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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신학의 역사 」-앨리스터 맥그래스 著 / 요약

작성자
쥬니어칼빈
작성일
2013-11-14 19:34
조회
11855

서 론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전파하기 위함이다. 이를 위해서 많은 교회는 불철주야 힘쓰며, 세계 각지로 많은 선교사들을 파송하고 있다.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다. 그러나 여기서 조심스럽게 정리해야 할 일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성경적인 바른 교리의 정립과 전파이다. 아무리 선교를 열심히 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바른 성경적 교리에 기초하지 않는 것이라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일이기에 그렇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교리의 발전사를 역사적으로 살펴보는 일이 중요할 것이다. 초대교회로부터 현대교회에 이르기까지 성경적 바른 교리를 정립하기 위한 각 시대의 노력들을 우리는 겸허한 자세로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가 이 지상에 있다면 분명히 거기엔 역사의 자취가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우리는 초대교회의 역사를 보고 그 시대에 속한 성도들의 신앙과 우리들의 신앙을 비교,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나아가 그들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각 시대의 성도들이 남겨 놓은 발자취가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서 우리들의 발걸음을 인도하는 이정표가 된다.

개혁교회는 자랑스런 전통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역사로서 항상 우리 앞에 남아 있다. 어느 한 시대의 교회가 그 전 시대의 교회와 단절되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면면히 흘러오는 역사적인 교회에 바탕을 두고 교회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개혁교회의 역사가 지금까지 흘러온 발자취를 지켜보면 내 신앙과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과 내가 신앙하는 하나님에 대한 사상이 서로 같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지금 우리가 가지는 신앙의 노선과 삶의 모습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 등이 역사적인 또는 전통적인 교회가 가지고 왔던 것과 비교해 볼 때 같아야 하며 그 안에서 객관성을 찾을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지금까지 무언가 추구해서 이만큼 이룬 것이 있다면 우리에게서만 아니라 적어도 역사 안에 있는 개혁교회의 발자취 안에서도 그 모습을 찾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번 학기의 수업을 통해서 바른 교리를 정립하고 이를 목회 속에서 실천적으로 적용하는 일의 계기가 되리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신학과 신앙은 역사 안에서 얼마든지 확인되고 증명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신학과 신앙은 뿌리 없는 이단이나 사이비일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앨리스터 맥그라스의 「신학의 역사」는 이런 목적을 충분히 달성하게 할 수 있는 자료라고 생각한다.

 

1. 신학이라는 개념 : 간략한 서론

신학은 “신에 관한 말”로서 초기 교부시대에 신앙의 특정 측면을 언급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신학은 하나님의 본성과 섭리의 사역을 조직적으로 분석한다.

 

2. 신학의 구성

1) 성경연구 - 기독교 신학의 궁극적 소재는 성경이며, 이는 그리스도의 생애와 부활 안에 있는 기독교의 역사적 토대를 증거한다. 그러므로 신학은 그에 관한 지식을 전수하는 경문과 씨름할 수밖에 없다.

2) 조직신학 - Systematic Theology는 신학의 체계적 조직화로 간주되어왔다.

3) 철학적 신학 - 철학적 신학의 관심은 기독교 신앙과 다른 영역의 지적 활동 간에 “공통적 토대를 모색함”이라 할 수 있다.

4) 목회신학 - 기독교에는 강력한 목회영역이 존재한다. 신학의 참된 관심은 목회에 있다는 확신은 목회신학에 대한 흥미를 새로이 촉발했다.

5) 교회사 - 기독교는 역사의 흐름 안에 있고, 교회사는 기독교의 사상, 개인, 제도의 고유한 위상을 역사의 흐름 속에서 탐구하려는 것이다.

 

3. 역사신학 : 목표와 위치

역사신학은 기독교 교리의 역사적 발전을 연구하고, 교리 형성에 영향을 끼쳤던 요인들을 확인하려는 신학적 탐구의 한 부분이다.

1) 역사신학의 발전- 16세기에 기원된 역사신학은 18세기에 Dogmengeschichte로 알려진 교리사 운동의 발흥과 더불어 더 큰 발전을 보게 되었다.

2) 교육학 도구로서의 역사신학 - 역사신학은 현대의 신학적 진술에 본질적인 교육적 자원이 된다.

3) 비판적 도구로서의 역사신학 - 신학적 발전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 아니며, 과거의 잘못은 교정될 수 있다. 역사신학은 기독교 신학의 대 주제에 대한 답변을 기록하며, 그 답변을 구성하는 데 중요했던 인자들을 설명하려는 시도들을 보도한다.

 

제 1 장 교부시대

 

1. 교부시대 개관

교부시대는 기독교 사상사 중 가장 자극적이고 창의적인 시대 중 하나였다. 기독교의 본류는 예외 없이 교부시대를 기독교 교리의 발전상 결정적 이정표로 삼는다. 311년 갈레리우스의 박해 금지령은 기독교를 합법적 종교로 만들었다. 특히 황제 콘스탄티누스의 개종은 로마를 기독교화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건설적 신학논쟁이 공적 업무가 되었다.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의 기독교 지도자간의 갈등이 고조되었고, 알렉산드리아, 갑바도기아, 안디옥, 카르타고 등이 신학사상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동방교회는 철학적 성향의 신학적 사변에 몰두한 반면, 서방교회는 철학을 도입하는 것에 적대적이었으며, 신학을 경전 안에 비치된 교리를 탐구하는 것으로 간주했다.

 

1) 주요 신학자

(1) 순교자 유스티노스(Justin Martyr, 약 100-165) - 최대의 변증가로서 복음을 헬라 철학이라는 외양에 연계하려는 신학자들(특히 동방교회)의 초기 모범을 보였다.(첫 변증)

(2) 리용의 이레내우스(Irenaeus of Lyons, 약 130-200) - 영지주의에 직면해서 기독교의 정통성을 옹호했다.(저서 - 모든 이단에 대항해서)

(3) 오리게네스(Origen, 약 185-254) - 동방교회 사상발전에 중요한 토대를 마련했으며, 보편구원사상을(인간, 사탄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의 구원) 채택했다.

(4)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 약 169-225) - 라틴신학의 아버지로서 구신약 성경의 통일성을 옹호했고, 삼위일체 교리의 초석을 놓았다. 외적 자료의 의존을 반대했다.

(5)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약 296-373) - 기독론에서 중요한,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위격에서 인간의 본성을 취했다는 사상으로 아리우스 주의를 배격했다.

(6) 힙포의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e, 354-430) - 기독교 신학의 삼대영역에 핵심적으로 기여했다. 이는 교회와 성례전의 교리, 은총교리, 삼위일체 교리 등이다.

 

2. 주요 신학적 발전

 

1) 신약정경의 범위 - 이레내우스 시대에 사복음서가 인정, 2세기 말엽에는 복음서, 사도행전, 서신들이 인정되었다. 367년 아타나시우스는 지금의 신약 27권을 정경으로 확정했다. 서방교회는 히브리서를, 동방교회는 계시록에 대해서 유보적 태도를 취했다.

2) 전통의 역할 - 전통은 “경전의 전통적 해석”, “기독교 신앙의 공통적 진술”을 의미하며, 교회의 공공연한 교리의 선언 안에 반영된 것이다. 또한 전통은 경전을 자기 식으로 해석하지 않고 교회가 사도들의 가르침에 충실하도록 보장하는 수단으로 간주되었다.

3) 범교회적 신경의 확립 - 신경이라는 말은 라틴어 “credo(나는 믿는다)”에서 유래한다. 신경의 발전은 초대교회 안에 일치된 교리를 향한 운동상 중요한 요소였다.

4) 예수 그리스도의 두 본성

(1) 학파 -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신성을, 안디옥 학파는 인성을 강조하였다.

(2) 논쟁 - 4세기의 아리우스 논쟁은, 아타나시우스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신성이 기독교의 구원 이해의 핵심적 요소임을 밝히게 되었다.

(3) 공의회 - 니케아 공의회(325년)는 예수는 아버지와 “동일본질(호모우시아)”임을 확증함으로 아리우스 논쟁을 마무리했다. 칼케돈 공의회(451년)는 니케아를 재확인했다.

5) 삼위일체 교리 - 한 분 하나님 안에 세 위격(아버지, 아들, 성령)은 똑같이 신성하며 지위 또한 같다는 것이다.

6) 교회에 관한 교리 - 교회의 거룩성에 관한 문제에서, 도나투스주의자들은 성자들의 모임인 교회에 죄인들은 설 자리가 없다고 주장했으며, 어거스틴은 교회는 사역자의 거룩성에 의거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의거한다고 주장했다,

7) 은총의 교리 - 펠라기우스와 어거스틴의 논쟁에서 카르타고 공의회(418년)는 어거스틴의 은총과 죄에 관한 견해에 찬성했고, 펠라기우스주의를 정죄했다.

 

3. 사례 연구

 

1) 성경과 전통 - 신학논쟁의 주요 현안은 성경해석 방법과 관계가 있다. 즉 성경을 정통적 방식으로 해석하는 것이 중요했다. 특히 구원은 비의로써 가능하다는 영지주의는 기독교회에 큰 위협으로 대두했는데, 이에 대해 교부시대는 중요한 답변을 제시했다.

(1) 리용의 이레내우스 - 오직 전통을 아는 자만이 성경을 올바로 해석할 수 있다. 영지주의는 피상적이고 표피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사도들의 교훈이 교회의 공적 가르침을 통해 알려졌으며, “온전히” 교회를 통해 “축적”된 것이다.

(2) 테르툴리아누스 - 정통성은 사도들과 역사적으로 연속된 상태로, 신학적으로 의존되고 있는 지에 좌우된다. 이단은 이런 연속성을 증명할 수 없다.

(3) 레랑의 빈켄티우스(Vincent of Lerins, 450년 이전 사망) - 경전이 사람들에 따라 달리 해석된다는 점을 지적한다. 단지 경전에 호소하는 것만은 부족하며, 무엇인가 추가해야 한다. 그러므로 “예언자와 사도들을 해석하는 척도”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즉 “언제, 어디서나, 만인에 의해”이다.

 

2) 아리우스 논쟁 : 그리스도의 신

(1) 순교자 유스티노스 - 기독교 신앙이 고전 그리스 철학과 유대주의의 통찰을 열매 맺게 했음을 증명하려고 애썼다. 기독교가 이방 철학을 통해 획득한 하나님의 계시의 암시와 예견 위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성취한다고 주장한다.

(2) 오리게네스 - 로고스 기독론을 만개시켰다. 로고스는 아버지에게 종속된 것이며, 로고스와 성부는 “모두 영원하지만” 로고스는 성부에게 종속된다는 것이다.

(3) 아리우스(Arius, 약 250-336) - 하나님의 자기본질을 강조했다. 성부는 성자에 앞서서 존재한다. 즉 성자는 피조물이다. “아들”이라는 용어는 은유적이며 서열을 강조하는 것이다. 성자의 지위는 본성의 결과가 아니라 성부의 의지의 결과이다.

(4) 아타나시우스 - 아리우스에 대한 해결책으로 예수가 성육신한 하나님이라는 것을 수용하는 것뿐이라고 주장했다. 어느 피조물도 다른 피조물을 구원할 수 없으며, 아리우스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을 구원할 수 없다.

 

3)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기독론 : 아폴리나리스 논쟁

아타나시우스가 대표인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구원을 신격화(deification)으로 표현한다. 그리스도은 인간 본성을 취했고, 그럼으로써 인간의 신격화를 확증했다는 것이다.

(1)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로스(Cyril of Alexandria, 444년 사망) - 로고스는 살아있는 영혼을 지닌 인간 본성에 자신을 인격적으로 일체화했고, 인간 존재가 되었고, 사람의 아들로 불리웠다. 즉 그리스도의 한 가지 본성을 강조한 것이다.

(2) 라오디게아의 아폴리나리스(Apollinaris of Laodicea, 약 310-399) - 그리스도 안에서 순수한 인간 성정과 영혼이 신적 정신과 영혼으로 대체되었다. 하나님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의 인간 성정의 역할을 완수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인간 본성은 불완전하다.

(3)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Gregory of Nazianzus, 329-389) - 아폴리나리스주의를 논박한다. 그리스도가 인간 성정을 취하지 않았다면 인간(성)은 구속되지 않는다.

 

4) 안디옥 학파의 기독론 : 네스토리우스 논쟁

안디옥 학파는 그리스도의 두 본성을 옹호했다. 그리스도는 동시에 하나님이며 인간이다. 그리스도 안에는 인성과 신성간의 “완전한 결합”이 존재한다.

(1) 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로스(Theodore of Mopsuestia, 약 350-428) - 로고스는 “인간 본성” 일반을 취하지 않았고 특수한 인간 존재를 취했다. 즉 추상적인 인간 본성을 취하는 대신 구체적 개별인간을 특별히 취했다고 암시한다.

(2) 네스토리우스(Nestorius, 약 451년 사망) - 네스토리우스 시대에 “테오토코스(하나님의 어머니)”라는 칭호는 폭넓게 자리잡았다. 그러나 네스토리우스는 “안트로포토코스(사람을 낳은 자)” 혹은 “크리스토토코스(그리스도를 낳은 자)”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가 제기한 방식은 큰 반발을 초래했다.

5) 삼위일체

삼위일체 교리의 발전은 기독론의 전개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예수는 하나님과 “유사한 본질(호모이우시오스)”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본질(호모우시오스)”에 속한다는데 점차로 동의가 이루어졌다.

(1) 경륜적 삼위일체(이레네우스) - 각 위격이 구원의 경륜의 한 측면을 관장한다는 하나님의 본성에 대한 이해를 뜻한다.

(2) 테르툴리아누스 - 삼위일체 신학에 특별한 용어를 부여했다. 즉 구원의 경륜의 세 측면을 통합하는 것이 “본질(substance)"이요, 세 측면을 구별하는 것이 ”위격(person)"이다. 세 위격은 구별되나, 나뉘지 않으며 다르나 상호간에 분리, 독립되지 않는다.

(3) 동방교회 - 세 위격 혹은 세 본질의 독특한 개성을 강조하며, 성자와 성령이 성부에게서 나온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그들의 일체성을 옹호하는 경향이 있다.

(4) 서방교회 - 하나님의 통일성에서 출발하는 경향이 있다.

(5) 양태론(modalism) - 삼위일체 교리가 삼신교리의 형태로 전락하는 것을 우려하면서 신의 통일성을 옹호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상이한 시대에 상이한 방식으로 오직 한 분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했다고 주장했다. 그리스도와 성령의 신성을 신적 계시의 세 가지 상이한 방식이나 양태로 설명한다.

(6) 삼위일체에 대한 갑바도기아식 접근 - “세 위격 속의 한 실체”로서, 불가분적 한 분 하나님이 삼위일체의 세 위격 모두에 공통적이다. 종속적이라는 주장을 용인하지 않았지만, 성부는 삼위일체의 근원으로 간주해야 한다고 명시적으로 진술했다.

(7) 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 모델 - 성자를 “지혜”로 성령을 “사랑”으로 말한다. 성령은 우리를 하나님과 묶는 하나님의 은사이다. 삼위일체 자체 내에 이와 상응하는 관계가 존재한다. 즉 성령은 삼위일체 안에서 위격들을 서로 묶어주는 사랑이신 하나님이다.

(8) 필리오케 논쟁(filioque-그리고 아들로부터) - 니케아 신경은 성령을 “성부에게서 나오는 존재”로 언급한다. 그러나 9세기까지 서방교회는 성령을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오는 존재”로 불렀다. 이 사상은 아우구스티누스의 고전적 진술로써 조심스럽게 제기 발전되었다. 그러나 이런 성령의 “이중 산출” 개념은 헬라 저술가들을 크게 자극했다. 다수의 학자들은 1054년에 발생한 동,서방 교회의 분열이 이 혐오감으로 촉발되었다고 본다.

 

5) 도나투스 논쟁

303년 2월 칙령으로 기독교 서적과 교회에 소각과 파괴명령이 떨어졌다. 이때 자기가 소유한 책들을 불태우도록 넘겨준 교회지도자들(traditores-넘겨준 자들)이 성직 수임을 허락받았다는 사실에 사람들은 분개했다. 즉 이런 사람들을 받아들여야 할 것인지의 문제가 대두된 것이다. 이때 도나투스주의자는 배교라는 측면을 강조했고, 가톨릭주의자(키프리아누스, 어거스틴)는 분파 불가성을 강조했다.

 

6) 펠라기우스 논쟁

(1) 의지의 자유 - 자유의지(liberum arbitrium)는 스토아 철학에서 유래했다. 어거스틴은 인간의 자유의지가 회복되고 치유되려면 신적 은총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에 펠라기우스는 인간은 의지상 전적 자유를 소유하며 죄악에 대해 전적으로 책임진다고 했다.

(2) 죄의 본성 -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인간성은 타락의 결과로 죄의 보편적인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펠라기우스는 인간은 무죄하게 태어났으며 오직 의도적 행위를 통해서만 죄를 범한다고 주장했다.

(3) 은총의 본질 - 어거스틴은 은총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관대하고 무조건적인 관심이요, 이것으로서 치유의 도정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나 펠라기우스에 따르면 은총은 인간의 자연적인 능력이다. 즉 하나님이 인간에게 하사한 것이고 사용하도록 되어 있다.

(4) 구원의 토대 - 어거스틴은 우리의 칭의가 하나님의 은총의 약속에 있다는 중요한 신학적 결론을 도출했다. 하나님은 그 약속에 충실했고, 죄인들을 의롭게 만든다. 그러나 펠라기우스는 인간의 선행은 전적으로 자율적인 인간 자유의지의 실행 결과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모방한 구원”이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7) 신앙과 철학

(1) 기독교가 확산됨으로써 기독교 사상가들에게 제기된 현안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기독교와 고전철학 간의 관계였다. 즉 복음은 이들과 전적으로 상충하는가? 이를 기독교 복음의 예비형태 중 하나로 간주해야 하는가? 이는 터툴리안이 훗날 제기한 “예루살렘이 아테네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의 문제였다.

(2) 져스틴 - 그리스도가 오기 전에 “로고스”에 따라 살려고 노력한 사람들은 기독교인이라 생각할 수 있다고 했다. 이는 후에 너무 진보적인 생각으로 배격당한다.

(3)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Clement of Alexandria, 약 150-215) - 고전 철학이 복음에 이르는 길을 예비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는 사고방식을 제기했다.

(4) 터툴리안 - 기독교 사상 내에 철학이 점하는 위치에 대해서 크게 불신했다. 철학은 외양상 이교적이며 그것을 신학에 도입하는 것은 교회 안에 이단을 키우는 것이다.

 

제 2 장 중세와 르네상스(약 500 - 1500)

 

1. 수도원 제도의 기원

초대 기독교 역사에서 발생한 가장 중요한 발전 중 하나는 수도원 제도의 발전이었다. 이 운동의 기원은 3세기 동안 이집트의 변방 구릉지역과 시리아 동쪽 지역에서 일어난 것으로 보고 있다. 수도원이 이상은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매력을 심어 주었다. 4세기에 이르기까지 동쪽 기독교 지역, 특히 시리아와 소아시아 지역의 많은 곳에 수도원들이 세워졌다. 5세기에 이르러서는 서방교회도 이 운동을 이어받게 된다.

수도원들의 등장은 기독교 신학의 역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수도원은 자주 신학과 영적 활동의 중심지였다. 교부 시대와 중세 시대 동안에, 대부분의 중요한 기독교 신학자들은 모두 수도원 공동체의 회원이거나 수도원 공동체와 밀접한 관계를 맺은 사람들이었다.

 

2. 켈트 기독교의 등장

켈트 기독교의 발상지가 웨일즈에 있는 것처럼 보임에도 불구하고, 5세기와 6세기에 특색있는 선교의 중심지로 드러난 곳은 바로 아일랜드이다. 전통적으로 아일랜드의 복음화를 책임진 것으로 간주된 사람은 패트릭(Patrick, 약 390-460)이다. 켈트 교회 지도자들은 세속적인 부와 지위에 대하여 공개적으로 비판했으며, 하나님을 아는 수단으로서 자연세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켈트 기독교는 위협적으로 감독 제도를 훼손시키며, 로마의 세력을 축소시키고, 기독교가 문화적으로 받아들여지기 더욱 어렵게 했다. 700년은 확실하게 켈트 기독교의 성장이 종지부를 찍게 된 해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중세”라고 알려진 새로운 시대의 여명을 알린 해로 널리 간주되었다.

 

3. 용어의 정의

 

1) 중세(The Middle Ages) - 중세라는 용어는 르네상스의 저술가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16세기 말이 되었을 때는 일반적으로 사용되기에 이른 것 같다. 중세 시대 초기는 프랑스에서의 발전에 의해 주도되었으며, 특출한 기독교 저술가들과 사상사들을 배출했다.(랑프랑, 안젤무스, 토마스 아퀴나스, 보나벤투라)

 

2) 르네상스(The Renaissance) - 프랑스 말인 르네상스는 이제 14세기와 15세기의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문화적이고 예술적인 부흥을 지칭하는 말로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세계관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요소가 고대의 문화적인 영광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며, 중세의 지성적인 성취를 주변적인 것으로 취급하는 것이다. 즉 부분적으로 북유럽 대학들의 교양학부 및 신학부와 연합의 강도를 더해간 접근 방식에 대한 반작용으로 이해할 수 있다.

 

3) 스콜라주의(Scholasticism) - 스콜라주의는 아마 인간의 역사 가운데서 가장 비하된 지성적 운동의 하나일 것이다. 이 용어는 그것이 대변하는 운동을 평가절하하려고 애썼던 인문주의 저술가들에 의해 창안되었다고 할 수 있다. 스콜라주의는 1200-1500년 사이에 풍미했던 중세의 운동으로, 종교적 신앙의 합리적 정당화를 강조하여 그 신앙을 체계적으로 제시했다. 즉 “신학을 조직화하는 특별한 방식”을 가리킨다.

(1) 실재론과 유명론(Realism and nominalism) - 실재론은 보편적인 개념을 주장하며, 유명론은 특수한 개념을 주장한다. 실재론에는 “토미즘”(토마스 아퀴나스)과 “스코티즘”(스코투스), 유명론에는 “근대적 방식”과 “근대 아우구스티누스학파”가 알려져 있다.

(2) 근대적 방식(The Modern way) - 근대적 방식이라는 용어는 “유명론”을 가리키는가장 좋은 방법으로 수용되고 있다. 14-15세기의 오캄의 윌리엄 등이 있으며, 펠라기우스주의 교리를 채택했다. 이는 루터신학이 형성된 배경이 되었다.

(2) 근대 아우구스티누스 학파 -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전적으로” 하나님의 역사로 이해된다. 죄를 그만두고 의로 돌아올 수 있는 능력은 하나님의 행동을 통해서 생겨난다.(리니미의 그레고리우스)

 

4) 인문주의(Humanism) - 인문주의라는 용어는 오늘날 하나님의 존재나 관련성을 부인하는 세계관을 의미하거나, 세속적인 세계관에 관심을 가진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당대의 대부분의 인문주의자들은 기독교를 정화하고 갱신하는 일에 관심을 가졌다.

(1) 북유럽의 인문주의 - 이는 고전시대의 방식을 따르며, 기독교회의 집단적 부흥을 목표로 행해진 종교적 프로그램이 발견된다. “다시 태어난 기독교(Christianismus renascens)”라는 라틴어 슬로건은 이 같은 프로그램의 목적을 요약하고 있으며, 르네상스와 연관된 문학의 “부활”과 관련되어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2) 스위스 인문주의 - 스위스 인문주의는 기풍은 강력한 도덕주의였는데, 이러한 기풍은 성경을 하나님의 약속을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독교인들의 바른 도덕적 행위를 규정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했다.

(3) 프랑스 인문주의 - 16세기 초 프랑스에서 법 연구는 급진적인 개혁과정에 있었다. 이런 법적인 인문주의가 전성기를 누리고 있던 때, 칼뱅이 등장했다. 프랑스 인문주의는 칼뱅에게 옛날의 문헌과 1550년대의 제네바 시의 상황이 상호작용할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하고 도구를 제공했다.

(4) 영국 인문주의 - 16세기 초 옥스퍼드와 런던, 로버트 반즈 등이 부각된다.

 

4) 주요 신학자들

(1) 캔터베리의 안젤무스(Anselm of Canterbury, 약 1033-1109) - 12세기의 신학적인 르네상스의 여명기를 이끄는 가운데, 안젤무스는 하나님의 존재증명,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에 대한 합리적인 해석을 했다. “왜 하나님은 인간이 되셨는가(Cur Deus homo)"에서 성육신과 하나님의 아들의 순종의 결과 인간에게 주어진 혜택을 분석하고 있다.

(2)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약 1225-74) - 1266년에 신학대전(Summa Theologiae)을 저술하기 시작했다. 이 책은 제1부 창조주 하나님, 제2부 인간의 하나님에게 회복, 제3부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이 인류에게 구원을 가져오는 방식에 관해 다루고 있다.

(3) 둔스 스코투스(Duns Scotus, 약 1265-1308) - 주의설(voluntarism)에서 신적 의지가 신적 지성보다 우선하는 것으로 간주했다. 또한 무죄수태설에서 그리스도가 그의 완전한 구속사역으로 마리아를 원죄로 물드는 것에서 보호할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4) 오캄의 윌리엄(William of Ockham, 약 1285-1347) - 오캄의 면도날은 “절약의 원리”로서 언급된다. 단순성이 신학적이고 동시에 철학적인 덕목이라고 주장했다.

(5) 로테르담의 에라스무스(Erasmus of Rotterdam, 약 1469-1536) - 르네상스의 가장 중요한 인문주의 저술가로 간주되며, 16세기 전반부 기독교 신학에서 심원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인정받는다. 최초로 헬라어 신약성경을 만들었으며,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시도했다.

 

4. 주요 신학적 발전들

 

1) 교부적 유산의 강화 - 서방교회가 라틴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신학자들은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의 문헌으로 돌아와야만 했고, 신학적 성찰의 출발점을 삼았다.

2) 신학에 있어서 이성의 역할적 탐구 - 11세기 저술가인 캔터베리의 안젤무스는 기독교 신학의 합리성에 대한 기본적인 믿음을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 “나는 이해하기 위하여 믿는다”(credo ut intellegam)로 표현했다.

3) 성례전 신학의 발전 - 교회는 공적 예배의 행위를 안전한 지적 기초에 두어야 할 압력을 받았고, 예배의 이론적 측면을 강화해야 했다. 성례전 신학은 그 시대에 크게 발전했으며 성례의 정의, 성례의 수, 본질적인 면모에 관해 의견의 일치를 보게 되었다.

4) 구원의 구도 안에서의 마리아의 역할 - 은총과 칭의에 관한 이러한 새로운 관심은 구원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인 마리아의 역할에 새롭게 주목하게 만들었다.

5) 기독교 신학의 자료로 직접 회귀하는 문제 - 성경에 대한 관심이 높아짐에 따라, 이 원천에 대한 라틴어 번역들은 점점 더 부적절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 중 가장 뛰어난 것은 중세에 광범한 영향력을 가졌던 성경에 대한 라틴어 번역 중의 하나인 “불가타(Vulgate)"였다.

6) 성경의 불가타 번역에 대한 비판 - 이탈리아 인문주의자 로렌조 발라에 의해 쓰여진 글을 인용하면서, 에라스무스는 몇 권의 주요한 신약성경 본문에 대한 불가타 번역이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7) 비잔틴 신학 - 비잔틴 신학은 비잔티움이라는 헬라 도시로부터 그 이름을 취하고 있는데, 콘스탄티누스가 330년에 새로운 수도로 정한 도시이다. 비잔틴 저술가들은 구원을 서방의 법적 혹은 합리적 범주보다는 오히려 “신성화(deification)"의 관점에서 이해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비잔틴 신학은 전통의 개념, 특별히 헬라 교부들의 문헌이란 개념에 강하게 경도되고 있다.

 

5. 사례 연구

 

1) 하나님의 존재 증명

(1) 안젤무스 - 존재론적 증명은 1079년에 출판된 안젤무스의 “프로슬로기온”에 처음으로 나온다. 안젤무스는 하나님에 대한 정의를 “더 이상 생각되어질 수 없는 가장 위대한 존재”로서 제시한다. 그런데 베네딕트 수도사 가우닐로에 의하면 안젤무스의 증명에는 분명한 논리적인 약점이 있다. 너무나 아름다워서 더 이상 완전한 섬은 생각할 수조차 없는 섬을 상상할 때, 그 섬의 실재는 단지 개념보다 필연적으로 더 완전하기 때문에, 그런 섬은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고 말한다.

(2) 아퀴나스 - 토마스 아퀴나스는 세계에 대한 인간의 보편적 경험으로부터 이끌어내어, 하나님의 존재를 지시해주는 것들을 식별하는 것이 전적으로 타당하다고 믿었다. 세계의 질서가 하나님의 존재와 지혜에 대한 가장 신빙성 있는 증거라는 것이다. 결국 아퀴나스의 증명은 오로지 세계의 창조자 혹은 세계 속의 결과들을 야기시킬 수 있는 지적 존재를 믿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방향으로 작용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의 비약은 여전히 요구되고 있다. 이 창조자 혹은 지적 존재가 기독교인들이 알고, 예배하고, 찬양하는 하나님“이다”라는 사실은 여전히 증명되어야 할 과제로 남는다.

 

2) 속죄에 대한 이해

(1) 교부들 - 중세시대에는 학문적인 신학과 대중적인 종교에서 모두 그리스도의 사역에 관한 교리에 상당한 관심을 보여주었다. 대속물로서의 그리스도의 죽음의 표상은 이레니우스와 같은 헬라 교부작가들에게 매우 중요한 주제가 되었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대속물이라면 그것은 누구에겐가 지불되었어야 했던 것이라고 오리게네스는 주장했다. 그레고리우스는 그리스도의 인간성은 미끼이고, 그의 신성은 낚시 바늘로서 마귀는 그 미끼를 물었다는 것이다. 또한 캔터베리의 안젤무스는 하나님의 의를 전적으로 강조한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의의 특성에 전적으로 일치되는 방식으로 인간을 구속하신다.

(2) 아퀴나스 - 아퀴나스는 무엇보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제공한 만족이 어떻게 인류가 저지른 범죄보다 크다고 간주될 수 있는지를 확실히 보여주었다. 아퀴나스의 분석은 속죄의 “만족” 모델에 대한 신학적 잠재력을 보여준다. 아벨라르두스는 인간의 죄를 위한 희생제물로서의 그리스도의 죽음에 관한 전통적 개념을 포함한다. 그리스도의 죽음의 의미를 찾는 그의 방법론은 그러한 죽음이 가지는 강력한 주관적 영향력을 바로 깨닫게 해주었다.

 

3) 성례에 대한 논의

(1) 아우구스티누스 - 기독교 전통의 처음 몇 세기에는 성례전 신학에 대한 관심이 비교적 적었던 것이 특징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성례를 표지로서, “표지가 신적인 것들에 적용될 때 성례라 부른다”고 했다. 성례전 신학이 크게 발전한 시기는 중세였다. 12세기 전반부에 쓰여진 성례전 신학에 대한 포괄적인 설명을 통해 휴(Hugh of Victor, 1142년 사망)는 물질적 요소에 대한 필요를 포함하는 것으로서, 물질적 요소가 지시한 은총을 어떻게든 닮고 있는 것이었다. 휴에 따르면 성육신, 교회, 그리고 죽음과 같은 것들은 “성례”였다.

(2) 롬바르두스 - 페트루스 롬바르두스는 일곱 성례의 목록을 확정하여 중세 가톨릭 신학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는 세례, 견진, 축복의 빵(성만찬), 고해, 종부성사, 임직, 결혼으로서 중세 기독교 신학과 실천에 있어서 규범이 되었다.

 

4) 성경의 해석

(1) 4중 의미 - 성경이 어떻게 해석되어야 하느냐의 문제는 항상 신학적으로 중요했으며, 중세시대에도 어느 정도 많이 논의되었다. 보통 “성경의 4중 의미”라고 알려진 해석의 체계가 완성된 것은 바로 기독교 사상사 중 이 시기였다.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성경의 피상적인 의미 아래 감추어진 “영적”의미를 강조했으며, 안디옥 학파는 성경의 문맥의 관점에서 성경을 해석하는 것을 강조했다.

(2) 중세교회 - 아우구스티누스는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통일성을 강조할 수 있었다. 비록 그 표현방식이 다르다고 하더라도, 구약과 신약은 동일한 신앙을 증거한다. 한편으로 성경에 대한 “문자적”, “역사적” 혹은 “영적”. “알레고리적‘ 의미 사이의 차이는 초기 중세 교회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이는 ”꽈드리가(Quadriga)" 로서 알려져 있다.

 

5) 르네상스 인문주의와 성경

(1) 불가타 - 중세 신학자가 “경전”을 언급할 때, 그는 거의 변함없이 성경에 대한 라틴어 번역을 의미한다. 라틴어 번역 성경은 “텍스투스 불가투스(textus vulgatus)"로서 널리 언급되던 것인데, 이는 위대한 교부 성서학자였던 히에로니무스(Jerome)가 4세기 후기와 5세기 초기에 번역한 것이다.

(2) Ad Fontes - 그렇다면 성경의 권위, 해석 그리고 적용에 관심을 기울이는 많은 신학적 질문들과 관련하여 인문주의의 중요성은 무엇이었는가? 이는 “원전으로 돌아가라”(ad fontes)였으며, 성경의 가장 훌륭한 본문을 정확하게 확정하는데 필요한 본문비평 방법을 발전시켰다. 에라스무스는 성서적 전문지식을 갖춘 평신도가 교회 갱신에 열쇠를 쥐고 있다고 주장했다. 성령에 대한 평신도 독자가 그래서 기독교 신앙과 특별히 실천의 본질을 더욱 적절하게 안내할 수 있었다.

 

6) 후기 중세 스콜라 신학의 몇 가지 주제들

(1) 유명론 - 초기 세대의 학자들은 “유명론”을 가리켜, 보다 후기의 중세에 속한 대부분의 북유럽 대학의 신학 교수진을 사로잡은 종교사상학파로 간주했다. 이는 “근대적 방식(via moderna)"이라는 용어로 알려졌는데, 구원의 교리에 있어서 핵심적인 특징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맺어진 언약이다. 왕과 그의 백성간의 정치적 언약이 왕이 그 백성에 대한 의무를 규정했듯이, 하나님과 그의 백성간의 종교적 언약도 그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의무와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의무를 규정했다.

(2) 근대 아우구스티누스 학파 - 그레고리우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영향력을 반영하는 구원론을 발전시켰다. 은총의 필요, 인간의 타락과 죄성, 칭의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도적 역할, 하나님의 예정에 관한 강조를 보게 된다.

 

제 3 장 종교개혁과 그 이후(1500 - 1750)

 

“종교개혁”이란 용어는 마르틴 루터, 홀드리히 츠빙글리와 장 칼뱅 같은 인물들을 중심으로 서구 지역에서 일어난 도덕적, 신학적 및 제도적 개혁에 관심을 두는 서구의 운동을 지칭하고자 역사가와 신학자가 사용한다. 종교개혁 운동은 복잡하고 각양각색이었으며, 그 명제는 교회 교리의 개혁을 훨씬 넘어섰다. 종교개혁 자체는, 비록 칼뱅주의가 헝가리까지 동쪽 깊숙이 침투하긴 했지만, 특히 유럽의 중부와 북부에 집중된 서구적 현상이었다.

 

1. 용어설명

1) 루터교 개혁(The Lutheran Reformation) - 루터의 개혁은 처음에는 뷔텐베르크 대학교에서 신학교육을 개혁하는데 주로 관심을 둔 학구적 운동이었다. 학구적 개혁안은 교회와 사회개혁안으로 변했다. 루터는 이제 종교적, 사회적 또는 정치적 개혁운동의 지도자로 간주되었다.

2) 칼뱅주의 개혁(The Calvinist Reformation) - 개혁교회(장로교)를 있게 한 칼뱅주의 개혁은 스위스 연방 내의 변화에 연유한다. “칼뱅주의”는 종종 개혁교회의 종교적 사상을 가리키는 데 쓰인다. 개신교 사상을 “칼뱅주의자”라고 부르는 것은, 그것이 본질적으로는 칼뱅의 사상이라는 것을 의미하며, 이제는 대개 칼뱅의 사상이 그의 후계자들에 의해 미묘하게 바뀌었다고들 본다.

3) 급진적 개혁(The Radical Reformation - Anabaptism) - 재침례주의는 1520년대 츠빙글리의 개혁이 있었던 취리히 근방에서 일어난 듯하다. 재침례교회 운동의 여러 분파들 내에서 공통요소를 식별할 수 있다. 즉 외부권위에 대한 일반적 불신, 성인신자 침례를 옹호하고 유아세례 배척, 재산 공동소유, 평화주의와 무저항의 강조 등이다.

4) 가톨릭 종교개혁(The Catholic Reformation) - 이 말은 종종 트렌트 종교회의 개최 이후 시기의 로마 가톨릭교 안에서의 갱신을 가리키는데 쓰인다.(반종교개혁)

 

2. 주요 신학자들

1)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 - 루터는 1517년 면죄에 관한 95개조를 공표하며 대중의 관심을 끌었다. 이후 1519년 6-7월 사이의 라이프치히 논쟁에서 그는 스콜라주의에 대한 급진적 비판자로 이름이 알려졌다. 그의 “십자가 신학”은 20세기 신학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2) 장 칼뱅(John Calvin, 1509-1564) - 제2기 개혁의 주요인물인 칼뱅은 복움주의 신학의 기본개념을 명시하고, 성경에 근거하여 그 개념의 근저를 밝히고 가톨릭의 비판에 대해 그것을 지켜낼 저술의 필요성을 느꼈다. 1536년 그는 「기독교 강요」를 출판했으며, 마지막 판이 나올 때까지(1559년) 장들을 추가하고 자료를 재배치했다. 그가 사망하는 1564년 무렵, 그는 제네바를 그의 이름을 가진 국제적 운동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3) 훌드리히 츠빙글리(Huldrych Zwingli, 1484-1531) - 그는 기독교 인문주의. 특히 에라스무스에 관심이 있어 교회개혁의 필요성을 확신했다. 츠빙글리는 초기 개혁전파에 있어서 특히 동부 스위스에서 주요한 존재였다.

 

3. 주요 신학적 변화

1) 신학의 근원 - 성경으로만(sola scriptura)

2) 은총교리 - 오직 믿음으로만(sola fide)

3) 성례교리 -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은총의 외적 표시

4) 교회교리 - 개혁 둘째 세대의 관심사 - 마르틴 부처와 칼뱅

5) 개혁이후의 운동 - 교리적 규준과 정의를 강조하는 특징

6) 정통 개신교/ 신교정통주의

(1) 방법에 대한 새로운 관심 - 자료의 논리적 배열과 제일원리에 기초한 배열

(2) 조직신학 작품의 발전 - 테오도레 베자, 요한 게르하르트

7) 로마 가톨릭교 - 트렌트 공의회는 종교개혁의 출현에 의한 문제들을 해결하고, 기독교 신앙의 핵심에 관한 가톨릭 교설의 골간을 정했다. “언제나 같다(sempre eadem)"라는 구호는 개신교에 대한 가톨릭 논쟁의 중요 요소가 되었다.

8) 청교도주의(Puritanism) - 청교도주의는 신앙의 경험적이고 목회적 측면에 특히 중점을 둔 개신교 정통의 한 형태이다. 청교도주의가 17세기 초 영국에서 주요 신학적 세력이기는 했지만, 가장 중요한 발전은 신세계에서 일어났다. 특히 18세기 조나단 에드워즈는 “대각성 시대”의 여파 속에서 신학의 실제를 나타냈다.

9) 경건주의(Pietism) _ 진젠도르프는 헤른후터(Herrnhuter)로 알려진 경건주의 공동체를 세웠다. “살아있는 신앙”이란 구호는 개신교 정통의 무기력한 신조에 대한 반발이다. 존 웨슬리는 영국 교회 내에서 감리교 운동을 시작하여, 기독교 신앙의 경험적 측면을 강조하며, 영국에서 중요한 종교적 부활이 있게 했다.

 

4. 사례 연구

 

1) 종교개혁에 있어 성경과 전통

(1) 정경인 성경 - “정경”은 교호가 본래적이라고 인정한 경전들을 가리키는데 사용되었다. 일부 개혁가들이 외경이 교훈적이라고 인정했으나 일반적으로 교회의 근거로는 사용할 수 없다는데 뜻을 같이 했다. 그러나 중세의 신학자들은 이 차이를 제거했다. 그러나 개신교은 외경들을 의도적으로 누락시킨 목록을 출판하거나, 이 작품들이 교리상 중요하지 않다고 천명했다.

(2) 성경의 권위 - 개혁가들은 하나님 말씀과 관련지어 성경 권위의 기초를 세웠다. 그러나 가톨릭측은 교회가 성경의 정경을 규정했고, 현 성경을 정경적 권위를 지닌 것으로 확정했다는 점에서 교회가 성경에 우선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주류 개혁가들은 그 권위가 성경에서 나왔으므로 성경 아래에 있다고 주장한다.

(3) 전통의 역할 - 개혁가들은 전통을 아주 긍정적으로 이해했다. 개혁가들은 교회 전통적 교리 대부분,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삼위일체 교리 등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4) 가톨릭의 입장 - 성경을 계시의 유일한 근원으로 여길 수 없다. 성경의 라틴어판(부가타)은 믿을만

한 권위가 있다. 교회는 성경을 해석할 권위가 있다.

 

2) 칭의 교리 : 마르틴 루터와 트렌트 공의회

(1) 마르틴 루터 - 믿음은 단순한 역사적 지식이 아니다. 믿음은 신뢰(fiducia)라고 이해해야 한다. 이 믿음은 신자를 그리스도와 결합시킨다. 즉 이신칭의(justification by faith) 교리는 죄인이 믿기 때문에 그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루터는 의롭게 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하나님이 제공하셔서 죄인이 할 일이라곤 그걸 받는 것뿐이라고 주장한다.

(2) 트렌트 공의회 - 트렌트가 루터의 의인 교리를 비판한 4가지 주요부분이다.

① 의인/칭의의 본질 - 의인은 인간성 안에서의 중생과 갱신의 과정이며 그 과정은 죄인의 외적 지위와 내적 성격 모두에 변화를 일으킨다. 트렌트가 채택한 용어 “의인”은 개신교도의 의인과 성화 모두를 의미한다.

② 의롭게 하는 의의 본질 - 하나님이 죄인들을 의롭게 만들 무엇이 개인 안에 있어야 한다. 즉 의인의 직접 원인은 의의 내적 은사이다.

③ 의롭게 하는 믿음의 본질 - “의인”이란 기독인의 삶의 시작과 지속 및 성장 모두를 의미한다. 이 부분에서 트렌트는 루터의 입장과 아주 가까워졌다.

④ 구원의 확신 - 그 누구도 오류에 빠지지 않는 확고한 믿음으로 자기가 하나님의 은총을 받았는지 여부를 알 수 없다.

 

3) 실재설의 본질 : 루터, 츠빙글리와 트렌트 공의회

(1) 화체설 : 트렌트 공의회 - 화체설은 봉헌 순간 빵과 포도주의 우유성은 바뀌지 않은 채 있지만 빵과 포도주의 실체에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실체로 바뀐다.

(2) 루터 : 공재설 - 빵과 그리스도의 몸이 한꺼번에 동시에 임재한다. 믿어야 할 것은 화체 교리가 아니라 성찬때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임재하신다는 것이다.

(3) 츠빙글리 : 기념설 - 그리스도의 고난을 기념하는 것이지 희생이 아니다.

(4) 장 칼뱅 - 표지가 가시적이고 물질적인 반면, 상징된 대상은 비가시적이고 영적이지만, 표지와 상징된 대상의 관계가 매우 친밀하여 이것을 저것에 적용할 수 있다.

 

4) 교회와 교리 : 개신교 안에서의 경향

(1) 마르틴 루터 - 말씀이 있는 곳에 믿음이 있고, 믿음이 있는 곳에 참교회가 있다. 가시적 교회는 하나님 말씀의 설교로 이루어지고, 어떤 인간의 모임도 이 복음에 근거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교회라고 주장할 수 없다.

(2) 급진적 종교개혁 - 사도교회가 콘스탄티누스 항제의 개종 이래 국가와 긴밀한 유대를 누림으로써 완전히 타협하고 말았다. 이제 참교회는 하늘에 있고 어설픈 제도적 모조품들이 땅에 있다.

(3) 장 칼뱅 - 교회는 기독교 신자의 공동체로서 가시적 집단이다. 또한 성도의 교제이며 선택받은 이들의 사귐으로서 비가시적 존재이기도 하다. 전자는 선택받은 이들로만 구성되고, 후자는 버림받은 자 모두까지를 포함한다.

5) 신학과 천문학 ;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이의 논쟁

갈릴레오를 중심으로 한 논쟁이 과학 대 종교의 논쟁으로, 또는 자유의지론자 대 권위주의자의 논쟁으로 자주 묘사되지만, 실제로 문제가 된 것은 성경의 정확한 해석이었다.

 

제 4 장 현대(1750 - 현재)

 

1. 유럽에서 발생한 종교적 무관성

종교전쟁이 끝나면서 유럽은 루터교회, 가톨릭교회, 정교회, 개신교회로 분할 되었다. 로크는 종교란 공적인 것과 무관한 사적 문제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런 접근방식은 동시에 종교적 관용을 천명했고, 그것은 종교가 순수하게 사적인 것임을 뜻하는 것이었다. 이는 계몽주의로 인해 고무되었는데, 계몽주의는 동일한 궁극적 실체를 상이한 방식으로 표현한 것으로 간주하면서 그것이 이성을 통해 알려질 수 있으리라고 보았다.

 

2. 북미의 기독교 : 대각성과 미국혁명

기독교 신앙에 대한 새로운 관심은 1730년대 메시추세츠 주 노샘프턴시에서 조나단 에드워즈를 중심으로 발흥한 “대부흥”운동에서 유래했다. 이 부흥은 미국 기독교에 항구적인 영향을 끼쳤다. 특정교회에 소속되지 않은 순회설교가들의 역할이 정립되었고, 기성교회의 성직자의 권위를 잠식하게 되었다. 특히 미국혁명의 뿌리가 미국의 새로운 민중적 종교화 영국의 기성종교간의 점증하는 종교적 소외현상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대각성의 세대 중에 식민지는 반란에 휩싸이게 된다.

 

3. 유럽의 분수령 : 프랑스 혁명

프랑스 혁명은 유럽의 종교적 반감의 정점으로 꼽히곤 한다. 프랑스 사회의 전통적 두 기둥(왕정과 교회)에 개혁이 필요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혁명의 종교정책은 이웃나라에도 확산되었다. 이로서 기독교 신앙과 제도는 돌이킬 수 없는 쇠락의 길로 접어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나폴레옹 치하에 교황과의 관계는 정립되었고, 비록 19세기 내내 교회와 국가간의 실제적 갈등은 경감되지 않았지만, 교회는 적어도 잃어버린 영향력과 명성과 성직권을 다시 얻을 수 있었다.

 

4. 계몽운동(Enlightenment)

계몽운동은 서유럽과 북미의 기독교에 심각한 불확실성의 시대를 초래했다. 계몽운동은 기독교의 지적 신빙성 그 자체가 여러 전선에서 큰 위험에 직면한 것으로 간주했다. 이런 계몽운동에서 개방적 입장을 취한 것은 로마 가톨릭이나 정교회가 아니라 신교신학이었다는 것이 유의할 점이다.

1) 기독교 신학에 대한 계몽주의의 비판 : 개관

전통적 기독교에 대한 계몽운동의 비판은 인간 이성 만능이라는 원리에 의지한다. 본래 계몽운동은 유럽과 미국의 현상이었고 숫자적으로 가장 중요한 형태의 종교인 기독교 문화 안에서 발생한 것이었다. 전례 없이 강한 비판적 검증에 시달렸던 것은 이슬람이나 힌두교 경전이 아니라 기독교 경전이었다.

2) 기독교 신학에 대한 계몽주의의 비판 : 개별 주제

(1) 기적의 가능성 - 우주의 기계적 규칙성과 질서가 새로이 강조됨으로써(뉴턴) 신약의 이적사건 보도의 신빙성에 의문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이적적 증거를 주장하는 다른 종교도 똑같이 회의적인 계몽주의적 비판의 대사이 되었다. 우연히 기독교는 계몽운동이 전개된 문화적 환경의 주도적 종교라는 이유로 각별히 주목을 받은 것뿐이었다.

(2) 계시개념 - 계몽주의는 초자연적 계시라는 개념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취했다.

(3) 원죄교리 - 볼테르나 루소는 원죄 교리를 인간의 사회적 점차적 발전을 저해하고 방임적 태도를 유발하는 것으로 비판했다.

(4) 악의 문제 - 악의 존재는 기독교 신앙 자체의 신빙성과 전일성에 도전하는 것으로 변모했다.

(5) 경전의 위상과 해석 - 이신론 안에서 경전의 비판은 시작되었고, 독일의 계몽주의 신학자들은 성경이 여타 문학작품과 같이 본문 분석과 본문 해석방식에서 개방되어야 한다는 명제를 전개했다.

(6)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과 의미 - 이신론이나 독일의 계몽주의는 모두 역사적 예수와 그에 대한 신약의 해석 사이에 심각한 편차가 있는 명제를 전개했다. 특히 “대속이론”은 점차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예수의 죽음을 제한했고, 부활을 부정했다.

 

5. 계몽주의 이후 서구의 신학운동

 

1) 낭만주의 - 낭만주의는 전통적 기독교 교리와 계몽주의의 진부한 합리적 도덕 모두를 혐오했다. 합리주의는 경험적으로나 정서적으로 결핍된 것으로 보았다. 슐라이어마허는 합리주의에 대한 환상이 점차 깨어지고 인간의 “느낌”을 새로 인식하기 시작한 상황에서 그는 이러한 느낌에 대한 관심을 고양했다. 그는 기독교는 느낌 혹은 “자의식”의 문제라고 주장했다.

2) 마르크스주의(Marxism) - 유물론 개념은 마르크스주의의 기본이다. 인간존재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물질생산과 더불어 시작해야 마땅하다는 주장이다. 마르크스는 종교 일반은 사회적, 경제적 조건에 대한 직접적 반응이라는 사상을 전개했다. 즉 경제적 소외가 제거된다면 종교는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마르크스는 종교가 소외된 인민들의 삶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한 존속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사상은 적당하게 수정된 상태로 현대 기독교 신학에 유입되었다. 남미 해방신학은 이를 적당하게 수용한다.

3) 프로테스탄트 자유주의(Liberal Protestantism) - 현대에 기독교가 지성적 선택권을 유지하려면 신앙의 재구성은 필연적이라고 주장한다. 신교 자유주의가 가장 진보적으로 영향력 있게 전개된 곳은 폴 틸리히의 저술이다. 그는 “상호연계”라는 용어로 현대신학의 과제를 인간문화와 기독교 신앙 간의 대화를 수립하는 것으로 보았다.

자유주의는 인간의 보편적인 종교경험이라는 개념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다. 또한 일시적인 문화적 발전을 과다하게 강조하는 면이 있으며, 당대의 문화에 수용적 자세를 취하려고 기독교 교리의 독특한 면모를 너무 쉽게 포기한다는 지적도 있다.

4) 모더니즘(Modernism) - 이는 전통적 기독교 교리, 기독론과 구속론에 관련된 교리에 대해 비판적이고 회의적인 태도를 취한다. 과격한 성서비평에 긍정적인 입장을 옹호하며 신앙의 신학적 측면보다는 윤리적 측면을 강조한다.

5) 신정통주의(Neo-Orthodoxy) - 일차대전은 슐라이어마허와 관련된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환멸을 경험했다. 이에 칼 바르트는 하나님의 “타자성”을 강조하면서 몰락한 인간 중심의 자유주의 신학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고 확신했다.(교회 교의학) 그의 가장 독특한 면모는 “하나님 말씀의 신학”인데, 신학이란 인간상황이나 인간의 질문에 대한 응답이 아니라 그 내적 본성상 대답을 요구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응답이다. 신정통주의는 1930년대 북미 신학계를 풍미했는데 특히 당대의 신교 자유주의의 낙관적 전제에 의거한 사회상을 비판하는 라이놀드 니버 등의 작품에서 잘 나타난다.

6) 로마 가톨릭주의 - 로마 가톨리의 주요한 갱신은 이차대전 이후에 그 징후를 보였다. 가장 중요한 주제는 교부와 중세의 가톨릭 유산을 되찾는 것이었다.

7) 동방 정교회주의(Eastern Orthodoxy) -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로 인해 러시아 정교회의 다양한 신학과 영성을 재구축하는 길이 본토에서 열리긴 했지만, 러시아 디아스포라는 이 분야에서 계속 중요한 역할을 감당할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 터키의 지배에서 벗어남으로 정교회 내의 신학적 전통을 갱신하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8) 페미니즘(여권신장주의 : Feminism) - 페미니즘은 여성해방을 위해 매진하는 범세계적 운동이다. 페미니즘은 기성종교가 여성을 2등급 인간으로 취급한다고 인식한다는 점 때문에 기독교와 마찰을 빚게 되었다. 페미니즘이 기독교 사상에 기여한 공로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전통적인 신학도식에 도전했다는 점일 것이다.

(1) 남성적 신개념(The maleness of God) - 기독교 전통에서 하나님을 가리킬 때 시종 남성형 인칭대명사를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은 수많은 페미니즘 작가들의 비판 표적이 되었다. 여성형 인칭대명사의 사용은 남성적 하나님 역할 상에 대한 지나친 강조를 얼마간 교정할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 되었다.

(2) 죄의 본성(The nature of sin) - 죄의 개념은 본질상 남성지향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개념은 죄를 긍지의 결핍, 야망의 결핍, 자기사랑의 결핍으로 체험하는 여성들의 경험과 일치하지 않는다.

(3) 그리스도의 위격(The persons of Christ) - 기독론은 기독교 안의 만연한 성차별의 최종근거라고 주장한다. 페미니즘 작가들은 그리스도가 남자였다는 사실은 그가 유대인이었다는 사실처럼 그의 본성상 부수적인 측면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9)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 - 포스트모더니즘은 확고한 토대없이 어떤 문화적 감각으로 간주되고 있는데, 다원성과 다양성을 선호하며 모든 인간적 사유의 근원적인 “상황성”을 통해 사고하려고 한다.

(1) 성경해석 - 1980년대에 해롤드 블룸이나 프랭크 커모드 같은 주도적 문학비평가들은 성경해석 영역에 돌입해 “제도적으로 합법화 되거나” “학적으로 존중된” 성경해석이라는 생각에 도전했다.

(2) 조직신학 - 포스트모더니즘은 태생적으로 “체계화”라는 개념에 적대적이며, “의미”를 파악했다는 주장에 반감을 보인다.

10) 흑인신학(Black Theology) - 흑인신학은 특히 1960,70년대 미국에서 맹위를 떨친 운동으로서 검은 경험의 실체가 신학적 레벨로 대변되었다는 것을 확증하려는 것이었다. 이 운동의 기원은 미국 역사 특유의 흑인의식의 고조에 소급된다. 제임스H.콘은 해방을 위한 흑인의 투쟁에 관여한 하나님이라는 핵심개념에 호소했다.

11) 후기자유주의(Postliberalism) - 이 운동의 토대는 한스 프라이어가 개발한 설화적 접근방식과 경험과 사유를 산출하고 해석함에 있어서 문화와 언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사회적 해석학파에 있다.

12) 복음주의(evangelicalism) - 복음주의는 성경의 권위와 자족성,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통한 구속의 유일성, 개별적 회심의 필요성, 복음주의의 필요성, 정당성, 긴박성 등으로 요약된다. 1970년대에 미국에서는 복음주의의 중요성이 대중에게 새로이 부각되었다. 1976년 미국은 복음주의 진영에서 조직적 정치활동에 점차 깊이 관여하는 양상을 띠었다.

13) 오순절 카리스마 운동(Pentecostal and Charismatic Movements) - 이들은 현대 기독교가 신약, 특히 사도행전에 기록된 성령의 능력을 재발견, 수용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현대에 영적은사를 재발견하는 일은 “오순절 운동”과 관련이 있는데, 이는 분명 카리스마적 성향을 보이는 첫 번째 현대적 운동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현대 교회에서 성령의 임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나 경험은 성령세례의 본질에 관한 일련의 논쟁을 야기시켰으며, 다양한 “영적은사” 중 어느 것이 개인적 신앙과 영성, 전체 교회의 건덕상 더 중요한가라는 문제를 제기했다.

 

6. 개발도상국의 기독교 성장

1) 라틴 아메리카 : 해방신학(liberation theology) - 이 용어는 압제적 상황과 관련된 신학이라면 어디에도 적용할 수 있는 말이다. 그러나 실상 이 용어는 1960, 70년대의 남미라는 토양에서 유래한 아주 독특한 형태의 신학을 지칭하는데 쓰인다. 페루의 신학자 구스타보 구티에레즈는 「해방신학」에서 이 운동을 이끌게 될 독특한 주제를 도입했다.

해방신학은 가난한 자와 피압박자를 지향한다. 또한 실천에 대해 비판적으로 반성한다. 이 점에서 해방신학이 마르크스 이론에 의지하고 있음이 분명해진다. 해방신학은 구원의 본질에도 깊이 관여한다. 해방신학은 종종 구원을 해방과 동일시하는 듯이 보이며 구원의 사회, 정치, 경제적 측면을 강조한다.

2) 동남아시아 - 동남아시아의 발전 중 가장 흥미 있는 것이 바로 중국과 한국의 경우일 것이다. 1865년 허드슨 테일러는 중국 내륙선교회를 설립했다. 1911년 중화민국의 건립은 기독교에 대한 관용을 주었지만, 1949년 인민공화국 이후 공산주의자들로 인해 선교사들은 이 땅을 떠나야 했다. 1979년 문화혁명이 종식되고 삼자애국운동의(자조, 자율, 자전) “공식”교회가 출현했다.

한국의 상황은 이 지역의 기독교 이래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 1883년 이전의 기독교 인구는 극소수였다. 이차대전 이후 해방과 더불어 기독교는 양적으로 큰 성장을 누리게 되었다. 현재 전 인구의 30퍼센트가 기독교도이며 장로교회가 쥬류를 이룬다.

3) 아프리카 - 기독교는 기원 첫 세기에 북아프리카에 정착했다. 알렉산드리아는 기독교의 생각과 삶의 중심지로 부상했다. 그러나 7세기 아랍의 침략으로 기독교는 대부분 소멸했다. 16세기 이후 아프리카는 유럽의 식민지로서 중요하게 되었다. 현재 아프리카 독립교회는 기독교 신앙의 배경 하에 전통적 유산을 간직하려는 입장의 교회를 폭넓게 규정한 것이다. 이들 교회는 때때로 카리스마적 취향을 보이는데, 영적치유, 축귀술, 꿈해석, 예언적 지도 등을 강조하는 특색이 있다.

4) 남태평양 - 이 지역의 지리적 특성은 복음화를 수행할 믿음직한 수단, 즉 선교기지 건립을 확보할 수 없게 만들었다. 이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기독교 선교단은 호주와 뉴질랜드에 있었는데, 결국 이 지역의 선교사역의 대부분을 책임진 선교기지가 되었다.

5) 인도 - 전통적으로 사도 도마가 첫 세기에 인도의 마르토마 교회를 창건했다고 믿는다. 18세기 영국의 선교회나 개인들은 저항없이 활동할 수 있었다. 초기단계에는 기독교를 자기 고유의 세계관에 동화시키는 힌두교도를 통한 신학도 등장했다.(라모훈 로이) 20세기 후반에 들어 점차 국가적 주체성을 강조하게 된다. 독립 후 기독교는 다른 이념들과 경쟁하게 되었다.(간디와 마르크스주의)

최근 인도에선 다른 현안이 부각되었는데, 그 중 특기할 것이 기독교 복음과 가난한 자들과의 관계였다. 1947년 10월 27일 독립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몇몇 기독교 대교파가 “남인도교회”로 알려진 한 단체를 구성하기로 결의했다.

 

7. 사례 연구

 

1) 역사적 예수 연구

(1) 역사적 예수에 대한 기원적 탐구 - 역사적 인물로서의 예수와 교회가 예수를 해석하고 있는 것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를 전제하는 것에서 출발하고 있다. “역사적 예수”는 단순히 종교적 교사이며, “신앙의 그리스도”는 이 단순한 인물에 대한 초대교회 저자들의 오해였다는 것이다.

(2) 1890 - 1910년에 제기되었던 탐구에 대한 비평

① 묵시문학적 비평(The apocalyptic critique) - 요한네스 바이스와 슈바이처가 주장한 이 비평은 종말론으로 크게 경도된 예수의 신국선포가 그 개념에 대한 칸트식 자유주의적 해석에 이의를 제기했다고 주장했다. 나사렛 예수의 인격과 메시지에 대한 이러한 철저 종말론적 해석은 예수상을 아주 낯설게 묵시문학적이며 비세계적인 인물로 묘사하며 그의 희망이나 기대가 궁극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낳았다.

② 회의주의적 비평(skeptical critique) - 브레데에 의하면 마가복음 기자는 역사적 목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아주 창조적으로 역사에 대한 신학적인 해석을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역사를 재구성하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③ 교리적 비평(dogmatic critique) - 마틴 켈러는 “역사적 예수”는 신앙과는 무관하고 “신앙의 그리스도”가 신앙의 근거가 된다는 것이다. 캘러에게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가 누구인가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신자들을 위해서 곧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진정한 그리스도는 설교된 그리스도”이다.

(3) 역사로부터의 후퇴 :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 1884-1976) - 불트만에게 있어서 십자가와 부활은 실제로 역사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신앙에 의해서 성스러운 사건들로 구별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 “케리그마”는 역사적인 사실의 문제들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그 청중들의 결단의 필요성을 전달하는 것과 관련된 것이다.

(4) 역사적 예수에 대한 새로운 탐구 - 에벨링은 불트만의 그리스도론이 지니고 있는 근본적인 결함을 지적한다. 그리고 이 문제는 1953년 10월에 케제만의 강연으로 시작된다. 이는 역사적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 사이의 연속성을 강조하는데 관심을 가지고 있다. “옛 탐구”가 신약성서에 표현된 그리스도상을 의심하는데 집중되어 있다면, 새로운 탐구는 예수 그 자신의 선포와 예수에 대한 교회의 선포 사이의 연속성을 강조함으서, 그것을 통합하여 정리하고 있다.

(5) 제 3의 탐구 - “제 3의 탐구”는 예수의 치유와 축귀에 초점을 두고서 예수의 선교가 지니고 있는 특징과 예수의 목표를 이해하는데 치중했다.

 

2) 구원의 근거와 성격

(1) 기독론과 속죄론의 관계 - 현대에 이르러 신학적 주제가 기독론과 구속론으로 첨예하게 나누어졌지만, 기독론과 구속론은 점차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2)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해석

① 희생(Sacrifice) - 희생의 이미지에 대한 사용은 1945년 이후로 눈에 띄게 약하게 퍼져나가게 되었는데, 특히 독일 신학에서 아주 미미했다. 아돌프 히틀러 이후로 희생이라는 용어는 부정적인 연상과 더불어서 사실상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의 가르침과 선포의 내용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게 했다.

② 승리하신 그리스도(Christus Victor) - 계몽주의의 도래와 더불어 승리의 주제는 신학적인 지지를 잃어버리기 시작했고, 점차적으로 구시대적이고 단순한 것으로 여겨졌다.

(3) 합법적 접근(legal approaches)

① 대표성(representation) - 십자가에 순종함으로써 그리스도는 그의 언약의 백성들을 대표했고, 그들에게서 대표성을 갖게 되었다.

② 참여(participation) - 신앙을 통해서 신자들은 부활한 그리스도에게 참여한다.

③ 대속(substitution) - 죄인들은 그들의 죄로 인해서 십자가에 못박혀야 마땅하다. 그리스도는 그들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박혔다.

(4) 모범적 접근들 - 십자가의 의미에 관한 신약성서적 이해의 중심에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남이 분명하게 서있다. 계몽주의적 세계관의 등장과 함께 점차 비평적 접근들이 초월적인 요소들을 통합한 속죄의 이론들에 합쳐지게 되었다.

(5) 십자가 : 본질적인가 예증적인가? -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의지를 보여주는가? 또한 십자가는 처음으로 구원을 가능하게 만드는가? 계몽주의는 십자가를 시간을 초월한 진리의 역사적 상징으로 취급했다.

(6) 구원의 특성

① 신성화(Deification) - 현대 동방정교회 신학에서 일부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② 하나님 앞에서 의(Rightousness before God) - 18세기 루터 정통주의

③ 그리스도와의 합일(Union with God) - 그리스도와의 합일은 개혁시기의 루터와 칼뱅에 의해 발전되었다.

④ 도덕적 완전(Moral perfection) - 칸트는 “도덕적 완전의 이상”과 관련하여 예수의 역할에 대해 토론했고, 이것을 윤리적 가치의 영역으로 이해된 “하나님 나라”에 관한 개념에 연결지었다.

⑤ 하나님에 대한 자각(Consciousness of God) - 슐라이어마허는 기독교의 순수한 이성적이거나 도덕적인 개념에 반대하면서, 인간 구원은 신 의식의 지배라는 관점에서 논의해야 한다는 생각을 발전시켰다.

⑥ 진정한 인간성(Genuine humanity) - 많은 학자들이 구원은 진정한 인간성의 재발견과 회복의 조건이라는 용어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⑦ 정치적 해방(Political liberation) -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신학은 구원개념의 정치적 관점을 강조했고, 그 주제에 대한 성서적(특히 구약) 접근방식의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관점을 재발견하는 것으로 간주했다.

 

3) 부활에 대한 논쟁

 

(1) 계몽주의 :

부활은 없었던 사건 - 계몽주의는 18세기의 부활에 대한 강한 회의적인 태도에 엄청난 발전을 주도했다. 레싱은 자신이 직접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경험해보지 못했음을 고백한다. 그래서 부활을 있지도 않았던 사건을 오해한 것으로, 예수의 도덕적 의미에 큰 가치가 없는 것으로 간주한다.

(2) 슈트라우스 : 부활은 신화이다 - 신화는 복음서 기자들의 사회적 상황과 문화적 전망을 반영하고 있다는 전제이다. 이는 그들의 신실성의 시비를 논하자는 것이 아니라, 단지 복음서 기록 당시의 전근대적 관점을 인지하려는 의도에서였다.

(3) 루돌프 불트만 :

부활은 제자들이 경험한 사건이다 - 불트만은 과학시대에 기적을 믿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슈트라우스의 기본적인 확신을 공감했다. 그는 부활을 “아주 순수하고 단순한 신화적 사건”으로 간주했다. 부활은 제자들의 주관적인 경험 속에서 일어났던 어떤 것이지, 역사의 공적 무대에서 일어나 어떤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부활절 신앙은 “케리그마” 속에 현존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4) 칼 바르트(Karl Bart, 1886-1968) :

부활은 비평적 접근을 넘어선 역사적 사건이다 바르트는 부활을 역사적 탐구에 문을 열어놓는 것으로 간주하여 처음 신자들의 사적인 내적 경험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세계 역사의 공적인 장소에서 일어났던 사건으로 이해할 것을 제안했다. 바르트는 바울과 다른 사도들이 “잘 보존된 역사적 보도를 전수”하기를 원하지 않았으며 “신앙에 대한 결단”에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5) 판넨베르크(Wolfhart Pannenberg, 1928년 출생) :

부활은 비평적 탐구에 개방된 역사적 사건이다 - 역사의 종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 속에서 선취적으로 나타나게 된다. 신약성서의 계시적 요소들을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해석할 해석학적 규준이나 그 틀로서 취급했다.

 

4) 20세기 사상에 나타나 있는 삼위일체론

(1) 칼 바르트 - 바르트는 삼위일체론을 계시의 “정합적 설명”이라고 표현했다. 그것은 계시 사건에 대한 해석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 자신을 계시한다. 하나님은 그 자신을 통해서 그 자신을 계시한다” 이러한 표현을 통해서 바르트는 삼위일체론의 형식을 이끌고 있는 계시적 틀을 세우고 있다.

(2) 칼 라너(Karl Rahner, 1904-1984) - "경륜적인“ 삼위일체론은 역사 안에서 하나님 자신이 자기를 계시하는 방식을 우리가 경험함으로서 알 수 있고, ”내재적인“ 삼위일체론은 신성 속에 있는 하나님의 다양성과 통일성을 우리가 경험함으로써 알 수 있다. 즉 삼위일체로 나타난 그 하나님은 삼위일체이다. 하나님이 자기계시 속에 알려진 방식은 하나님이 내적으로 존재하는 방식과 일치한다.

(3) 로버트 젠슨 -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신자들이 알 수 있는 하나님에 대한 적당한 이름이라고 주장했다. 젠슨은 형이상학적 사고에서 하나님의 인격적 개념을 회복했다.

 

5) 교회론에 대한 20세기 토론

 

(1) 주제에 대한 다양성 : 그리스도가 있는 곳에 또한 공교회가 있다.

① 그리스도는 성만찬 속에 현존한다 - 이 기억될 만한 경구는 기독교 역사 전체를 통해 교회론을 숙고하는데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드 뤼박은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는 예수그리스도를 세상에 나타내려는 데 있다는 것이다. 라너는 교회는 인간에게 대한 하나님의 구원의 구체적인 표현이라고 하며, 쉴레비크는 그리스도가 원시적 성체로서 간주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한다.

② 그리스도는 말씀을 통해서 현존한다 - 교회의 성향에 대한 개신교적 이해의 주된 주제는 말씀과 설교와 성만찬으로부터 초래되는 그리스도의 현현에 초점을 맞춘다. 칼뱅에게 있어서 말씀의 선포와 올바른 성만찬의 집행은 그리스도의 현존과 연결되어 있었으며, 그리스도가 계신 곳에는 교회 또한 존재하는 것이다.

③ 그리스도는 성령을 통해서 현존한다 - 보프는 교회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성령의 구조적인 역할을 예수 그리스도의 영의 실체에 의거하고 있다. 이러한 “교회의식”은 성령의 역사에 의한 결과인데, 이 점을 확증하면서 “아버지와 아들”로부터의 성령의 발현이라는 교리를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지지울라스의 경우에는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세워지지만 성령에 의해 구성된다”는 것이다.

 

(2) 교회에 대한 제2 바티칸 공의회의 견해

① 교제로서의 교회 - 교제의 규제적 강화는 이제 신자와 하나님간의 교제라는 더 근본적인 관념의 한 측면으로 간주되었고, 교회의 삶속에서 살아남았다.

②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교회 - 교회의 다양한 모습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교회의 모습이다. 이것은 구약과 신약에 깊은 뿌리를 두고 있는 강력한 성서적인 사고방식이다.

③ 카리스마적인 공동체로서의 교회 - Lumen Genyium(이방의 빛)이란 슬로건은 교회적 삶에서 카리스마적인 은사의 중요성을 명확하게 인식시켰다.

 

6) 과정신학에 있어서 하나님의 속성 - 과정신학의 사상은 세상의 모든 과정 안에서 설득이나 영향이라는 관점에서 신의 전능을 재정의 하고자 한다. 과정신학을 비평하는 학자들은, 신의 초월성에 대한 전통적인 견해를 포기한 것으로 보았고, 신의 초월성도 과정 속에 있는 존재로 간조하여 영속성의 관점에서 재해석한 것으로 이해했다.

주목할만한 내용은 신의 전능에 대한 고전적인 교리를 거부하고 있다는 것이다. 과정신학은 전통적인 신의 능력을 제한하고, 세상 속에서 고통과 악의 기원문제를 밝힌다. 신은 지배할 능력을 버리고 설득할 능력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신도 어떤 일이 일어나는 것을 막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하나님은 악에 대한 책임이 없다. 하나님에게 부여된 형이상학적 제약 때문에 하나님은 사물의 자연적 질서에 개입하지 못하게 되어 있다.

 

7) 전통적인 기독교 신학에 대한 페니니스트의 비평 -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은 고대 이스라엘에 있어서 아버지의 역할이 하나님의 본성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해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들은 하나님이 남성이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남성도 여성도 아닌 것이 하나님에 대한 이해이다. 왜냐하면 성이란 창조질서의 특징이기 때문이며, 창조질서는 창조자 되신 하나님 자신의 양극성과 직접적으로 동일하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남성이 아니다”라는 사실을 일깨우려고 노력하면서 학자들은, “어머니” 혹은 “친구”로서의 하나님 개념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페미니스트들의 비판은 하나님의 “남성성”에 대한 문제를 넘어섰다.

(1)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라는 용어는 성의 구별이 없는 “창조자, 구원자, 유지자”라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2) 나사렛 예수는 남성이다. 그러므로 그는 여성에 대한 경험이 부족했다고 생각되어, 여성에 대한 잠재적 성향에 대해 논쟁되고 있다.

(3) 죄에 대한 전통적인 개념은 특별히 남성들에 의해 지지를 받은 권력과 통치라는 범위 안에서 이해되고 있다는 것이다.

페미니스트의 견해는 최소한 서구의 전통적인 기독교 신학에 대해서 숙고할만한 중요한 사항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8) 다른 종교에 대한 기독교의 접근

(1) 배타주의적 접근

- 크래머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길과 진리와 생명을 계시하고 있으며, 또 이러한 계시를 전 세계가 알릴 것이다”라고 강조한다. 몇몇의 배타주의자들은(칼 바르트) 그리스도와 분리되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없다는 입장을 선택했다. 바르트는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를 통하여 가능하다고 천명했다.

(2) 포괄주의적 접근

- 예수회 소속 칼 라너는 개개의 비그리스도인들이 구원을 받는 문제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다른 종교전통들도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하는 은혜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나님의 보편적 구원의지를 포함한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 그는 “익명의 그리스도인들”이라는 용어를 소개했다.

(3) 다원주의적 접근

 - 존 힉은 “기독교가 중심이라는 교리에서 벗어나 하나님 중심이요, 우리 기독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가 그분 주위를 선회하며 섬긴다는 사실을 깨닫는데로 나아가야만 한다”고 했다. 힉은 모든 종교는 똑같이 하나님에게 인도하는 것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결론으로 이끌었다.

 

9) 현대에 나타난 신학방법

(1) 경험에 호소한 슐라이어마허와 틸리히

① 슐라이어마허(F.D.E.Schleiermacher, 1746-1834)

- 하나님에 대한 “절대 의존”의 감정 혹은 경험이라는 논리를 전개함으로서 기독교의 분명한 주체성을 추구했다. 개개인은 크신 분의 일부분이 아니라 전적으로 그분에게 의존해 있다는 논리를 전개한다. 그는 “기독교 신앙”에서 신앙이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교리는 구원의 경험을 설명하는데 이차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개개인의 경건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연합적 경건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기독교 교리는 이러한 경험을 합리화하는 수단을 제공한다.

② 폴 틸리히(Paul Tillich, 1886-1965)

- 경험에 대한 호소는 폴 틸리히에 의해서 더욱 발전되었다. “상관의 원리”에서 틸리히의 관심은 인간의 문화와 경험데 대한 연구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는 “기독교를 경멸하는 자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기독교를 소개하는데 관심이 있었다. 인간의 문화는 기독교 신학이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을 제기한다.

(2) 칼 라너 : 초월적 현상학

- 라너는 인간 본성의 한계를 초월하기 위하여 기본적인 인간의 강렬한 욕망에 대한 중요성을 주목한다. 라너의 관심은 우리가 비록 유한하고 제약이 있지만, 우리는 인격과 상황의 한계를 넘어서는 어떤 초월적인 것을 강하게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는데 있다.

(3) 칼 바르트 : 계시에 대해 응답하기 - “로마서 주석”은 하나님과 인간 존재 사이에 있는 “무한한 질적” 차이를 강조하고 있다. 즉 고정된 간격이 광대하므로, 이편에서 저편으로 건너가기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이러한 접근은 종종 하나님과 인간의 과격한 차이를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변증법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4) 후기 자유주의 : 공동체와 신학

- 1980년 이후 “예일 학파” 혹은 “후기 자유주의”는 특별한 공동체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조지 린드백고 하우워스는 신학적 숙고에 있어서 공동체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다. 문화적-언어적 형식은 모든 인간이 속해있는 공동체의 전통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기독교 신학은 기독교 전통 안에서 수행된다.

(5) 해방신학 : 실천으로서의 신학

-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신학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본래적 기독교 신학의 출발점은 구체적인 사회-정치적 상황의 분석에 있다고 주장한다는 점이다. 이들이 추구했던 특징은 가난한 자들에게 일차적으로 관심을 갖는 일이었다. 즉 해방신학은 실천개념을 강조하는데 그 특징이 있다. 기독교 신학은 단순히 사람들의 생각만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삶의 방식을 바꾸는 것을 의미한다. 신학은 이러한 신념에 철저히 봉사해야 하는데, 개인적 삶과 사회를 변형시킬 수 있어야 한다.

구티에레즈에 의하면, 신학은 교회로 하여금 비판적인 기능을 감당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한 기능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본성과 교회다운 행동은 비판적 신학 사고 위에 있을 때 참다운 것이다.

 

8. 다음은 무엇인가?

1) 독자는 그 저자에게서 발견하는 특별한 관심을 발전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2) 기독교 사상사에 나타난 몇몇 특별한 시기에 대해서도 연구해야 한다.

3) 기독교 사상에 있어서 특별한 영역에 관심을 가지고 상호작용에 대해서도 탐구해야 할 것이다.

4) 독자는 탐구할만한 신학적, 교회사적 전승에 관심을 기울이고, 계속적인 반성과 몰두로 이끌어 나가야 할 것이다.

 

<독서후기>

500여 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신학의 역사」를 요약하고 나니, 어느덧 한 학기가 지나갔다. 내용의 방대함으로 인하여 읽고 요약하는 깊이는 상대적으로 얕을 수밖에 없었다. 신학의 역사라는 방대한 분야를 한 권의 책으로 기록하기도 힘이 든 일인데, 이를 또 쪼개서 요약하려니 읽는 나도 잘 이해할 수가 없을 지경이다. 그러나 각 시대마다 인물마다의 관심사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놓은 본서는 참으로 훌륭한 “신학과 교리”의 교재라고 평가하고 싶다.

이 책을 읽으면서 자주 그리고 깊이 느꼈던 것은, 인간은 결국 객관성을 완전히 추구할 수 없는 주관적인 존재라는 사실이다. 우리 각자의 해석은 주관성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같은 내용에 대한 다른 신학적 해석에서, 이 사람의 해석만이 옳고 다른 사람의 해석은 틀리다는 판단은, 자신의 주장이 객관적이고, 성경적이라는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 누가 자신의 주장은 성경과 상관없는 자신의 임의적인 해석, 현대 문명이나 철학에서 빌려온 해석이라는데 동의할 사람이 있겠는가?

물론 이는 방법론에 대한 문제라고 볼 수도 있는데 방법론에 대한 문제는 당대의 유행하는 철학이나 세계관과도 무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저자는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의 의견을 별다른 평가 없이 학문적 입장에서 최소한의 지적으로만 시종일관하고 있다. 특히 현대신학에 대한 그의 평가는 오늘 폐쇄적인 교단신학에 얽매여 있는 한국교회가 생각해보아야 할 내용이다.

시대와 사상에 따라서 발견되어지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절대적으로 옳고, 절대적으로 틀릴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런 시비들은 때를 따라 당신의 작정과 예정을 이루어 나가시는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허용하시는 분량이 아닐까도 생각을 해본다. 신학이라는 학문의 영역이 실제의 삶으로 옮겨지면서 겪어야 했던 시행착오는, 오늘 우리의 삶에서도 동일하게 보여지기 때문이애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설교자의 입장에서 다시 생각을 하게 되었다. 즉 시행착오를 통하여 진리를 자신의 삶에 확정해 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나친 확신과 강조는 삼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진리라고 확신하며 경험했다고 믿어지는 어떤 것을 사람들에게 가르치려고 하는 순간, 그 진리라는 것이 자신의 경험에서 확인되었던 바로 그것이었다고 자신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신학적인 교리 그 자체가 하나님의 진리는 아니며, 그에 대한 구체적인 삶의 형태가 또한 신앙적인 삶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다양한 신학과 성경의 해석에 대한 일치하지 못하는 영역이 신학과 이성의 사이에 가로 놓여 있는데, 이를 자신의 학문적 경험과 교단적 규칙의 입장으로 해결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날마다 변질되어가는 세상의 문화 속에서 오직 변하지 않은 단 한 가지,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 말씀을 너무 사랑해서 밤새워 성경을 읽으며, 부지런히 연구하며 살피며, 변증하던, 초대교회로부터 현대교회에까지 이르는 많은 신앙의 선진들을 생각하며, 그들에게 감사함을 표하며, 이번 학기를 마감하고자 한다. - 이 상 -

한 학기 동안 열강해주신 김동춘 교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출처 : http://blog.yahoo.com/_55NOWFWXJDZV7BH6MJTXSQ5RQ4/articles/1374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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