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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칼럼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1563) 제29주일

작성자
쥬니어칼빈
작성일
2017-06-12 02:53
조회
2558

78: 떡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실제 몸과 피로 변화됩니까?

: 아닙니다. 세례의 물이 그리스도의 피로 변화되지 않고 그 자체가 죄를 씻지 못하며 단순히 하나님께서 주신 상징이요 확신이듯이 성만찬의 떡이 비록 성례의 본질과 용어상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불릴지라도 그리스도의 실제 몸으로 변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만일 떡과 포도주가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된다고 한다면 성찬을 할 때마다 우리는 실제로 주님의 몸을 찢는 행위를 하게 되며 단번에 주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사건은 헛된 것이 되고 맙니다. 여기서 우리는 떡과 포도주에 대한 바른 이해를 칼빈의 글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떡과 포도주는 표징입니다. 이 표징들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서 받는 보이지 않는 양식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우리 영혼의 유일한 양식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늘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초대하셔서, 우리가 그에게 참여함으로써 힘을 회복하며 하늘 영생에 도달할 때까지 몇 번이고 기운을 얻도록 하십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신자가 은밀하게 연합된다는 이 신비는 본래 이해할 수 없는 것이므로 우리의 적은 능력에 가장 적당한 보이는 표징으로 그 신비의 형상을 보여 주십니다.

 

떡과 포도주가 육신의 생명을 유지하는 것과 같이 영혼은 그리스도에게서 양식을 받습니다. 우리는 이 신비스러운 복의 목적을 알 수 있습니다. 곧 주의 몸이 이미 우리를 위한 희생 제물이 되면서, 우리는 지금 먹을 수 있으며 먹음으로써 우리는 그 독특한 희생의 역사를 우리 속에서 느끼고 또 우리의 영구적인 음료가 되기 위해서 주의 피가 이미 우리를 위해서 흘려졌다는 이 사실을 우리에게 확인시키시려는 것입니다.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고전 11:24, 26:26, 14:22, 22:19).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이미 희생된 그 몸을 받아먹으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명령의 의도는, 우리 자신이 그 몸을 먹는 것을 인해 생명을 주는 그리스도의 죽음의 힘이 우리 안에 효력을 나타내리란 것을 확실하게 판단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잔을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라고 부르셨습니다(22:20, 고전 11:25). 이것은 우리가 맛보도록 그 거룩한 피를 우리에게 제공하실 때마다, 그 피가 우리의 믿음을 강화하는 한 그가 이미 자신의 피를 흘려 확인하신 그 언약을 얼마간 새롭게 하시고 또 존속시키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과오를 경계해야 합니다. 첫째는, 표징을 경시함으로써 신비와 거기에 붙어 있다고 할 수 있는 표징을 서로 분리해서는 안 됩니다. 둘째는, 표징을 지나치게 찬양함으로써 신비 자체를 애매모호하게 만드는 듯한 인상을 주어서도 안 됩니다.

 

지난주 글에 올렸던 성찬에 대한 4가지 설을 다시 한 번 보자면 로만 카톨릭에서는 성찬에서 떡과 포도주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화한다는 화체설(化體設)을 주장하며, 루터의 성찬은 성찬에서 떡과 포도주 속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실제적으로 임재하신다는 공재설(共在設), 쯔빙글리의 성찬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임재하시는 것은 아니고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기념이며 상징이라는 상징설(象徵設),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영적으로 임재하신다는 칼빈의 영적 임재설(靈的臨在設)로 나눕니다.

 

이 가운데서 화체설에 대해 좀 더 살펴보자면 화체설에서는 성찬을 행하기 전에 그 떡을 축성을 하게 되면 그 떡의 본질이 예수님의 살의 본질로 변화되어집니다. 물론 떡의 질료는 떡의 질료 그대로 있기 때문에 모양이나, 촉감이나, 맛은 일반 다른 떡과 다를바 없습니다. 축성했다고 해서 떡이 살맛이 나는 게 아닙니다. 포도주가 피 맛이 나는 게 아닙니다. 일반적인 떡과 포도주와 동일합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그것을 그것 되게 하는 본질이 예수님의 살과 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의 본체가 바뀌었다고 해서 화체설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축성한 빵은 더 이상 일발적인 빵이 아니라 예수님의 몸이 됩니다. 축성한 포도주도 일반적인 포도주가 아니라 예수님의 피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몇가지 문제가 발생하는데 첫째는, 만일 성찬을 행하기 위해서 떡을 떼다가 부스러기가 떨어지면, 그리고 그것을 쥐가 와서 먹게 되면, 쥐가 예수님의 몸을 먹게 되는 것입니다. 부스러기가 절대로 떨어지면 안 되는 것이죠. 그래서 로마 가톨릭은 부스러기가 없게 하기 위해서 웨이퍼(wafer, 웨하스)라는 밀떡 조각을 만들어서 성찬식을 행합니다. 둘째는, 똑같은 일은 포도주에서도 발생합니다. 예를 들어서 포도주를 따르다가 그것을 땅에다가 흘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니면 그것을 엎지르거나 쏟아버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큰일 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가 손상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포도주는 아예 일반신도한테는 안주고, 신부가 대표로 혼자서 다 마십니다. 일반신도는 오직 성찬식때 떡만 먹습니다. 그 떡을 성체라고 말하고, 먹는 것을 영성체(성체를 영접한다는 의미)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성찬식은 영성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은 떡이 예수님의 실제 몸이기 때문에 그 몸 안에는 예수님의 피가 포함되어 있다는 논리를 펼칩니다. 떡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만의 논리일 뿐 전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떡의 본질이 예수님의 몸이니깐, 그 떡을 받는데, 그냥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무릎을 꿇고 받고, 씹어서는 안 되며 녹여 먹어야 합니다. 성찬하고 남은 것은 주님의 몸이니깐 잘 보관해야 합니다. 성체 보관함에 넣어서 썩지 않도록 잘 보관합니다. 미사 때 사람들이 성당에 들어가기 전에 예수님 십자가 상 앞에서 절하는 것을 볼 수가 있는데, 그것은 그 동상에다 절하는 것이 아니라, 그 동상 뒤에 있는 성체 보관함에다가 절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성체 보관함에는 예수님의 몸이 들어있기 때문이죠. 그리고 부활절이 되면, 성체 보관함을 열고 그것을 들고 동네 한 바퀴를 돕니다. 종교적인 동네는 그 행사를 성대하게 치룹니다. 그것이 지나갈 때 모든 동네 사람들이 무릎을 꿇고 그 앞에 절합니다. 이것은 성찬의 요소 자체를 숭배하는 우상숭배가 됩니다.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종교개혁자들이 우상숭배라고 문제를 제기했던 것입니다. 화체설은 분명 잘못된 가르침입니다. 윗글을 잘 읽어보시면 로마 카톨릭에서 말하는 화체설이 얼마나 비성경적인 가르침인지 어린 아이라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례에 대한 다른 설에 대해서도 알 것은 공재설이나 기념설도 다소 문제가 있기에 우리는 영적 임재설을 따릅니다. 성찬은 단순히 그리스도의 과거의 사역 곧, 죽으신 그리스도와 관련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현재의 영적 사역 곧 영광 중에 살아계신 그리스도와도 관계가 있습니다. 칼빈은 그리스도께서 육체적으로 그리고 장소적으로 성찬시에 임재 하시지는 않지만, 몸과 피를 포함하는 전인으로서 임재하시며 또한 향유(누리어 가짐)된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성찬에 임재하지 않고 오직 하늘에만 장소적으로 임재할지라도, 신자가 성찬에서 빵과 포도주를 받을 때 생명을 주는 감화를 그에게 전달한다는 것입니다. 이 감화는 실재적인 것이면서도, 육체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이며 신비적이요, 성령을 매개로 하여 전달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상징적으로 받는 믿음의 행위를 조건으로 하여 전달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영적 임재설이라 말합니다.

 

79: 그러면 왜 그리스도께서는 떡을 자기 몸이요, 잔을 자기 피, 혹은 피로 맺은 새 언약이라고 부르셨습니까? 그리고 사도 바울이 만찬을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실제적으로 동참하는 것(직접 먹고 마심)’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 거기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떡과 포도주가 우리 육신의 생명을 살지게 하듯이 십자가에 달리신 자신의 몸과 흘리신 피가 진실로 우리 영혼을 영생에 이르도록 살지게 한다는 것을 가르치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를 기념하면서 이 거룩한 상징물들을 실제로 받아먹듯이 우리도 성령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눈에 보이는 상징과 보증에 의하여 주님의 실제 몸과 피에 참여한다는 것을 확신시켜 주시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치 우리가 몸소 고난을 겪어 죄 값을 지불한 것처럼 주님의 고난과 순종을 우리의 공로로 간주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떡과 포도주를 신성시하여 섬기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렇다고해서 무시하는 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벨직신앙고백서는 우리가 성례식을 성도가 모인 곳에서 행하되 겸손과 경외심을 가지고 하는 것은, 우리 구세주인신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엄숙히 기념하고 감사하면서 동시에 기독교의 신앙을 고백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먼저 자기를 잘 살피지 않고 이 예식에 참여하는 자들은 이 떡과 잔을 마심으로 스스로 심판에 이르게 될 뿐이다. 요컨대 우리가 이 거룩한 예식을 행할 때는 하나님과 이웃을 뜨겁게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성례식에 있어 인간이 조작하여 덧붙인 모든 조잡하고 그릇된 생각들을 불경건한 것으로 배격하는 바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그 예식의 규정에 만족하며, 그들이 말한 바로 즉 그 방식대로 행해야만 한다는 것을 확증하는 바이다.”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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