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칼럼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1563) 제24주일
제62문: 왜 선행을 통해서는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질 수 없으며, 왜 선행은 의로워지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까?
답: 하나님의 심판 앞에 설 수 있는 의는 절대적으로 완전해야 하며 모든 면에서 하나님의 율법에 어긋남이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무리 최선을 다한다고 해도 그것은 불완전하며 여전히 죄로 더럽혀져 있기 때문입니다.
선행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의롭다 칭함을 받을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선행의 공로로 공덕을 쌓아 의롭다 칭함으로 구원을 얻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을 모르는 무지의 행위입니다. 만일 선행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하면 그 기준은 무엇입니까? 얼마만큼 선행을 해야 하겠습니까? 그리고 가장 중요한 사실은 이런 선행을 통해서는 의롭다 칭함을 받을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하였기 때문에 인간의 선행을 통해서는 의를 얻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선행을 통해 그것으로 공덕을 쌓아 둘 수가 없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 (이사야64:6) 이사야의 말대로 인간의 모든 의, 설령 그 의가 인간의 눈에 선하게 보인다하더라도 그 의는 더러운 옷과 같습니다. 그러기에 자랑할 만한 것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 알량한 의를 자랑하거나 내세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진정 의에 대한 이해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칼빈은 행위에 대한 공로를 자랑하는 것은 의로움을 주신 하나님께 대한 찬양과 구원의 확신을 파기한다고 말합니다. 또한 의롭다함을 얻으려면 인간의 공로가 필요하다는 교리는 성경뿐만 아니라 어거스틴과 베르나르드도 반대한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잠시 의에 대한 칼빈의 설명을 들어보겠습니다. ‘의가 행위에 의해서 지탱된다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전적으로 무너지지 않을 수 없으며 의는 오로지 하나님의 자비에, 그리스도와의 교제에, 따라서 오직 믿음에 제한된다고 우리는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이 문제의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라는 것을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일반 사람들뿐 아니라 학자들까지도 망상에 빠져 끌려 들어가게 된다. 믿음의 칭의와 행위의 칭의가 문제가 되는 때에는, 그들은 곧 하나님 앞에서 행위에 약간의 공로가 있다고 하는 듯한 구절들을 인용한다. 하나님 앞에서 행위에 약간의 가치가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면, 행위에 의해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것도 완전히 증명된다는 듯이 그들은 생각한다. 그리고 "공로"란 말은 성경에 없으며, 위험한 말이다. 우선 이 "공로"란 말에 대해서 서론적인 말을 하겠다. 하나님의 심판에 반대되는 개념으로서 사람의 행위에 이 말을 처음으로 적용한 사람은 진실한 믿음에 나쁜 영향을 주었다. 물론 나는 말에 대한 논쟁은 피하고 싶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저술가들은 성경에 없는 말을 큰 해독을 끼치고 유익은 극히 적은 말을 사용하지 않도록 항상 주의하기 바란다. 선행의 가치는 다른 말을 사용해도 잘 설명될 수 있고 폐해도 남기지 않을 수 있는데 "공로"란 말을 쓸 필요는 무엇인가? 이 말에 얼마나 큰 잘못된 원인이 내포되어 있는가 하는 것은, 그것이 세상에 준 독을 보면 명백하게 알 수 있다. 참으로 그것은 심히 강한 자존심을 표시하는 말이므로 하나님의 은혜의 빛을 가리며, 사람들에게 패악한 자만심을 불어넣을 수밖에 없다.
고대 교회의 저술가들이 자주 이 말을 썼다는 것을 나는 인정하며, 그들이 이 작은 말 한마디를 잘못 써서 후세에 잘못의 원인을 남긴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그러나 어떤 구절에서 그들은 진리를 상하게 하려는 생각이 없다는 것을 증언한다.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한다. "아담으로 인해서 없어진 인간의 공로는 여기서 침묵하라.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지배하게 하라." "성도들은 자기의 공로에는 아무것도 돌리지 않고 모든 것을 하나님, 당신께만 돌리리이다." "사람이 자기에게 있는 선한 것은 모두 자기에게서 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에, 그는 자기에게 있는 칭찬할 만한 것도 모두 자기의 공로에서 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자비에서 왔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와 같이 어거스틴은 사람에게 선을 행할 능력이 없다고 함으로써 공로의 가치를 부정하였다. 그뿐 아니라, 크리소스톰도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께서 값없이 우리를 불러주신 후에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한다면 그것은 빚을 갚는데 불과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물들은 은혜와 인자하심과 위대한 관용이다." 그러나 우리는 말보다도 일 자체를 보아야 한다. "공로가 있는 체하지 않는 것이 공로이므로, 공로가 없음은 심판을 받기에 충분하다"고 한 베르나르드의 말을 나는 이미 인용했다. 그러나 그는 곧 이 말에 대한 해석을 첨부해서 그 거친 표현을 완화한다. "따라서 공로가 있도록 유의하라. 공로가 있을 때에는 그것을 받은 것인 줄 알라. 결실을, 즉, 하나님의 자비를 바라라. 그러면 빈곤과 감사할 줄 모르는 망은과 교만 등의 모든 위험을 피할 수 있다. 공로가 있어도 있는 체하지 않으며, 공로가 없어도 담대한 교회는 복되다." 이 말보다 조금 전에 그는 그가 사용한 공로란 말의 경건한 뜻을 충분히 설명했다. "무엇 때문에 교회는 공로에 관심을 두는가? 하나님의 목적이야말로 자랑할 더욱 견고하고 확실한 이유가 아닌가?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부인하실 수 없다. 약속하신 것을 실행하실 것이다(딤후 2:13 참조)." 그러므로 '무슨 공로로 우리는 은혜를 바랄 수 있느냐?'고 물을 필요가 없다. 특히 '너희를 위함이 아니요‥‥‥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함이라'는 말씀이(겔 36:22,32) 있기 때문이다. 공로로써는 불충분하다고 알기만 하면 그것 자체가 충분한 공로가 된다....사람은 아무리 완전할지라도 오점이 없는 행위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가장 선한 행위일지라도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면, 거기서 하나님 자신의 의를 보시는 동시에 사람의 불명예와 치욕을 발견하실 것이다. 따라서 선행은 하나님께 기쁨이 되며 행하는 사람에게 무익하지 않다. 그러나 사람이 일종의 보상으로서 하나님의 지극히 풍성한 은혜를 받는 것은, 당연히 받을 만하기 때문이 아니라 친절하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그런 가치를 붙여주셨기 때문이다. 사람은 상을 받을 가치가 없는 행위에 상을 주시는 하나님의 너그러우신 태도를 만족하게 여기지 않고, 순전히 아낌없이 주시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을 행위의 공로인 것같이 보이려고 애쓴다. 이 얼마나 모독적인 야심이며 사악한 생각인가!.‘라고 말하였습니다.
제63문: 하나님께서는 선행에 대하여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 보상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 왜 당신은 그토록 선행을 무시합니까?
답: 그 보상은 노력의 대가가 아니라 은혜로 주시는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오해 하지 말아야 할 것은 선행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선행을 무시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칭함을 받기 위한 선행은 있을 수 없다는 말이지 그것을 하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선행을 하는 이유는 하나님 앞에서 뭔가 내세우거나 자랑할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받은 그 은혜에 감사하여 기쁘고 자발적인 마음으로 선행을 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로 하여금 이렇게 선행을 하게끔 하시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이며 선물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사도 누가의 말을 잘 보시기 바랍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것 뿐이라 할찌니라” (누가복음 17:10) 사도 누가의 말대로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뿐입니다.
제64문: 그렇다면 사람들은 그러한 교훈으로 인해 선행에 관하여 무관심해지고 사악해지지 않겠습니까?
답: 아닙니다. 참된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은 감사의 열매를 맺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선행은 믿음의 결과로 오는 것입니다. 선행을 통하여 믿음이 오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통하여 선행이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있노라 하면서 선행이 없다면 그것은 거짓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매스컴을 통하여 불미스러운 사건들을 일으키는 자칭 기독교인들을 보면 그들이 가진 믿음은 죽은 믿음이요 거짓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주변에도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들을 저지르는 자칭 기독교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들은 유사 기독교인들인 것입니다. 우리는 야고보의 말슴을 잘 이해하여야 합니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야고보서 2:17,22,26)
믿음과 선행에 대한 바른 이해를 통하여 바른 신앙으로 나가야 합니다. 우리는 꼭 생각해야 합니다. 경건한 사람의 행위일지라도 하나님의 엄격한 판단에 따라 검토할 때는 그 행위도 별로 내세울만한 것이 못된다는 사실입니다. 설령 그런 행위가 있다고 가정할지라도 그것은 여전히 용납되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행위가 자신이 죄 짐을 지고 있어서 그 행위도 곧 약화되고 오염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의는 다 더러운 옷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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