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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칼럼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1563) 제5주일

작성자
쥬니어칼빈
작성일
2015-10-03 08:18
조회
2644

12: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에 따라, 우리는 이 세상과 영원한 세상에서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이 형벌을 피하고 다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자신의 정의가 충족되기를 원하십니다. 따라서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이 그 죗값을 완전히 치러야 합니다. “가라사대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 (이사야 53:11)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기도 하시지만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공의의 하나님이시기에 불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람들이 범한 죄에 대하여 죗값을 찾으십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죗값을 치루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다시 입을 수 있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사람들의 죗값이 치러지기 전에는 결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죄인으로 서있는 인간에게는 아무 해결책이 없음을 보았습니다. 아담 이후 어느 누구도 해결책을 마련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사 모든 사람을 다 버리지 않으시고 그 가운데 택자들을 예정하사 구원을 주시기로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공의를 손상시키지 않으시고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설정하셨습니다. 죄인이 어떻게 하나님과 화해하는가 하는 것을 바로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은 오직 하나님이 말씀하신 방법 즉, 공의를 만족시킴으로 가능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현대 교회안에는 공의의 하나님은 없고 사랑의 하나님만 있습니다.

 

공의가 없는 사랑만 외치는 현대의 가르침은 온전하지가 않습니다. 불완전합니다. 그 결과 우리에게 주신 귀한 예수님의 은혜는 값싼 복음, 깂싼 은혜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죄를 지어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공의의 하나님은 감추어 버리고 사랑의 하나님만 찾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은 우리가 행한대로 갚으시는 공의의 하나님도 되신다는 것입니다.

 

13: 우리가 스스로 이 죗값을 치를 수 있습니까?

절대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날마다 죄를 더해 갈 뿐입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감찰하실찐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시편130:3) 이 땅위에서 사람들이 지은 죄의 값을 대신 지불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담의 범죄 이후로 사람들은 원죄를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에 죄인인 사람이 죄를 지은 사람들의 죗값을 절대로 지불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죄가 없는 의인이 죄를 지은 사람들의 죗값을 지불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처해 있는 사람들은 그 심각성에 무지하여 도리어 죄를 더해 갑니다.

 

착각에 빠진 인간은 자신의 죄값을 갚기 위해 스스로 그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것을 이루고자 행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실로 엄청난 어리석음을 나타내는 행동입니다. 인간은 자연인의 상태에서는 하나님의 공의를 절대적으로 만족시킬 만한 행동을 할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하였기 때문에 인간 안에는 선한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선한 것을 찾기보다는 더러운 것을 찾기가 쉽습니다.

 

14: 어떤 다른 피조물이 우리를 위해 죗값을 치를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죄 때문에 다른 피조물에게 벌을 내리시지 않습니다. 더구나, (단지 피조물로서는) 어떤 피조물도 죄에 대한 하나님의 영원한 진노의 짐을 감당할 수 없고, 다른 피조물을 그것에서 구원 할 수 없습니다.

 

피조물들 가운데 사람들의 죗값을 지불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피조물은 없습니다. 특히 피조물들 가운데 특별한 천사들이 있는데 이 천사들 중에서도 사람들의 죗값을 지불할 수 있는 천사는 없습니다. 범죄한 인간의 죄값을 값아 줄 피조물은 아무도 없습니다. 역사적으로 훌륭한 그 어떤 성자들이라도 인간의 죄값을 없이 할 수 없습니다. 에스겔은 모든 영혼이 다 내게 속한지라 아비의 영혼이 내게 속함 같이 아들의 영혼도 내게 속하였나니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찌라 아들은 아비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할 것이요 아비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하리니 의인의 의도 자기에게로 돌아 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에스겔18:4,20)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의 내용은 어떤 피조물이든 인간의 죄악을 담당 할수 없음을, 설령 부모라도 자식의 죄악을 담당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15: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중보자와 구원자를 찾아야 합니까?

그는 참 사람(true man)으로 의로우신 분이며, 동시에 참 하나님(true God)으로 모든 피조물보다 큰 능력을 가진 분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사야 7:14)

사람들이 지은 죄의 값을 지불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방법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요구에 충족성을 드릴 수 있는 중보자가 필합니다. 그런데 이 중보자는 하나님과 인간을 화해시켜줄 능력이 있는 구원자라야 합니다. 그 중보자와 구원자의 조건이 사람이면서 또한 하나님이셔야만 합니다. 반신반인이 아니라 완전한 사람이면서 완전한 하나님이시라는 말입니다. 이 중보자는 하나님이 보내주셔야만 합니다. 사람들 편에서 어느 누구 한사람을 지정하여 세울 수는 없습니다. 사실 세울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사람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하늘로부터 하나님께서 보내 주셔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중보자의 자격은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을 가져야 하고 죄가 없어야 합니다. 즉 참 하나님이셔야 하며 그리고 참 인간이셔야 하되 죄가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자격을 가진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신약에 있어서는, 하나님과 사람과의 사이의 중보자는 하나님에 의해 세워진 오직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시라는 신앙이 일관되어 있고, 다른 인간적인 중보는 인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중보자는 어느 한편에만 속한 자가 아니라는 말씀처럼,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성자, 하나님의 본체의 참 형상,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이 하나님을 대표할 수 있음과 함께 혈육을 갖추어 모든 점에 있어서 사람과 같이 되시고, 인간의 연약함을 체휼하신 분, 그 죄를 담당할 수 있는 분으로서, 중보자로서의 완전한 자격을 갖추신 분이십니다.

 

참고로 중보기도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요즘 주변에서 흔히 듣는 말 가운데 하나가 바로 중보기도입니다. 중보기도란 무엇인가? 간단히 말하자면 남을 위해 기도한다는 말입니다. 남을 위해서 기도한다는 것은 정말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중보기도에 대한 성경적 바른 이해를 해야 합니다. 중보기도라는 용어를 성도들이 사용 할 수 있는가? 중보라는 말을 예수님 외의 다른 사람들이 사용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중보란 단어의 원어는 메시테스입니다. 이 단어의 뜻은 1) 둘 사이에 평화와 우정을 회복시키거나 협약을 이루도록, 또는 언약을 승인하도록 중재하는 사람, 2) 전달의 수단, 중재자(mediator)라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곧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 중재자 되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가 되시어, 하나님께 나아가, 성도들을 위해 중보 해 주십니다. 또한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더 좋은 언약의 중보, 새 언약의 중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가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이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시라” (히브리서8:6), “이를 인하여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히브리서 9:15, 12:24)

 

중보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이기 때문에 중보기도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사용되어야 합니다. 성도들이 중보기도를 한다고 말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소위 기도한다는 자들(선교사,권사,집사)은 자기가 중보자의 자격을 가진 양 중보기도를 해 준다고 하면서 떠들어 댑니다. 이런 사람들은 무식이 용감하다고 자기가 메시아라는 소리를 떠벌리고 있으면 모르고 있습니다. 신성모독의 죄를 범하면서도 두려움 없이 이런 악을 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성도가 사용할 수 있는 용어는 무엇인가? 성도가 중보기도 한다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중보직과 예수님의 중보기도에 대한 의미를 손상시키는 것이기에 성도가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을 '도고(간구)기도 또는 합심기도'로 사용 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딤전 2:1)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도고'는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서 간구하는 '중보기도'를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남을 위해 기도한다고 할 때 중보기도의 의미인 도고를 성도들이 사용하여 도고기도를 드립시다라고 하는 것이 올바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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