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칼럼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1563) 제16주일
제40문: 왜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의 길로 가셔야만 했습니까?
답: 하나님의 공의와 진리가 그것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즉, 오직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을 통하는 방법 외에는 우리의 죄에 대한 값을 지불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로마서 8:3,4)
죄의 값은 사망입니다. 이 사망의 길에서 벗어날 능력을 가진 인간은 없습니다. 그리고 이 사망의 값을 온전히 치루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켜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의 공의를 완전히 만족시킬 만한 능력이 없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인간에게 있어서 아주 비참한 현실입니다. 그런데 무지한 인간은 이 비참함이 얼마나 큰 저주인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즉 인간에게는 소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택자들을 그냥 두시지 않으시고 한 줄기 빛인 길을 마련하셨습니다. 이 한줄기 빛의 길은 그리스도였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사랑하시는 자 독생자이신 아들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우리 인간의 죄의 값을 지불하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신 이유는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 시킬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즉 이 방법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말입니다. 만일 다른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거짓입니다. 오직 하나님은 그리스도만을 통한 인간의 죄값을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제41문: 왜 그리스도는 “장사지내”졌습니까?
답: 그의 장사는 그의 죽음이 실제적으로 사실이라는 것을 증거 해 줍니다. “그는 강포를 행치 아니하였고 그 입에 궤사가 없었으나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 (이사야 53:9)
그리스도께서 장사지내셨다는 말은 그의 죽으심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믿지 않고 장사됨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신화나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만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장사 지내셨다는 것은 분명히 그가 죽으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사도 마가는 “빌라도는 예수께서 벌써 죽었을까 하고 이상히 여겨 백부장을 불러 죽은지 오래냐 묻고 백부장에게 알아 본 후에 요셉에게 시체를 내어 주는지라” (마가복음 15:44,45) 그리스도께서는 분명히 죽으셨습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죽지 않으셨다면 택자들의 구속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구속의 계획은 이루어 질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구속의 계획속에는 그리스도의 죽음이 반드시 있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탄은 자신들의 수하(자유주의 신학자, 종교다원주의자...등등) 통하여 어떻게든 그리스도의 죽음을 거짓으로, 신화로, 소설로 만들어 버리기에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위에서 죽으셨습니다. 사복음서에는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 (마태복음 27:50),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지시니라” (마가복음 15:37),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 (누가복음 23:46),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군인들이 가서 예수와 함께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또 다른 사람의 다리를 꺾고 예수께 이르러는 이미 죽으신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요한복음 19:30,32,33)
아더 핑크는 ‘왜 그리스도의 장사되심의 기사가 이처럼 중요한가에 설명하기를 ..., 그리스도의 장사되심은 그리스도가 실제로 죽었음을 확증해 준다. 회의론자는 그리스도는 죽은 것이 아니라 현기증을 일으킨 것뿐이며, 그러므로 그가 죽음에서 부활한 것이 아니라 의식을 다시 회복한 것뿐이라고 말함으로 그리스도의 부활 신앙의 기원을 설명하려고 했다. 그러나 복음서는 그가 죽었으며 그를 박해한 자들이 그의 죽음을 확인했으며, 또한 로마 총독 빌라도는 시체를 장사 지내도록 허락했다고 분명하게 말한다.’
제42문: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대신해 죽으셨는데 왜 우리는 여전히 죽어야 합니까?
답: 우리의 죽음은 죄 값을 치루는 행위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로 더 이상 범죄 하지 않게 하여 영생으로 인도하는 관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데살로니전서 5:9,10)
제43문: 십자가를 통한 그리스도의 희생과 죽음으로부터 얻게 되는 또 다른 유익은 무엇입니까?
답: 우리의 옛 자아가 그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고 죽고 묻힘으로써 육신의 악한 욕망이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게 되고 그 대신 우리 자신을 감사의 제물로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라디아서 2:20)
십자가를 통하여 얻게 되는 또 다른 유익은 믿음으로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이전에는 내 마음대로, 내 정욕과 탐욕으로 살았지만 이제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감을 말합니다. 이전엔 나를 위해 살아왔지만 이제는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아가는 존재로 믿음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악인들의 형통이 부러워 하나님을 원망하였고, 이방인들처럼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를 간구하였고 땅에 것을 삶의 목적으로 두고 살아 온 모든 것을 십자가에 못박으므로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것을 사모하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찾으며, 모세처럼 하나님과 함께 고난 받는 것이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게 되는 유익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제44문: 왜 사도신경에는 “음부에 내려가셨다가”라는 구절이 덧붙여져 있습니까?
답: 내가 개인적인 유혹과 위기에 처해있을 때마다 주 그리스도께서 그 삶을 통하여 특히 십자가상에서 말로 다할 수 없는 영혼의 슬픔과 고통을 겪으심으로써 지옥의 고통과 슬픔으로부터 나를 구원하셨다는 것을 확신시켜 주기 위해서입니다. (즉 실제적으로 지옥에 내려가셨다는 의미가 아님을 주의해야 한다). “제 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마가복음 15:34)
한국 교회에서는 ‘음부에 내려가셨다가’라는 구절은 빠져 있습니다. 그러나 영어 사도신경을 보면 ‘He descended into Hell’ 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이델베르그요리문답에서는 “내가 개인적인 유혹과 위기에 처해있을 때마다 주 그리스도께서 그 삶을 통하여 특히 십자가상에서 말로 다할 수 없는 영혼의 슬픔과 고통을 겪으심으로써 지옥의 고통과 슬픔으로부터 나를 구원하셨다는 것을 확신시켜 주기 위해서입니다. (즉 실제적으로 지옥에 내려가셨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칼빈은 음부 강하를 단순한 사망상태의 서술로 보지 않고 음부적인 고통의 영적 체험으로 이해하였습니다. 그는 십자가를 육적 고통으로 음부강하의 체험을 영적 고통으로 이해하고, 이 둘이 합하여 그리스도의 우리를 위한 대속적 형벌의 완성으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한국의 어느 대형교회 목사가 그리스도의 지옥 강화 부분을 설명하면서 죽은 자의 영혼을 위해 기도해 줄 수 있다는 설명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는 비성경적 주장으로 상당히 위험한 사상입니다. 참 성도는 이런 가르침을 전하는 곳에서 떠나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의 가르침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장사지내심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왜 죽으셔야만 했으며 그의 장사지내심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 잘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의 성도들은 실상은 알고 싶지도 않으며 이것과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성도들은 그리스도를 믿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리스도에 관한 교리들을 듣고 싶지 않으며 알고 싶어 하지를 않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성도들이 이런 모습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딤후4:3) 성도들이 바른 교훈 즉 바른 교리들을 받기 싫어합니다. 바른 교리보다는 허탄한 이야기를 더 좋아합니다. 자기들이 원하고 듣고 싶어하는 허탄한 이야기를 설교하는...세상에서의 번영과 축복과 성공과 출세를 이야기하는 또는 인본주의적인 지적인 충족을 시켜주며 설교하는 곳으로 사람들이 모입니다.
성도들이여....진리의 길을 찾아 가십시오. 생명의 길은 좁고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습니다. 그러나 이 길이 진리의 길이며 생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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