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칼럼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1563) 제27주일
거룩한 세례에 관하여
제72문: 물에 의한 외부적 씻음 자체가 죄를 씻어 줍니까?
답: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성령만이 우리의 모든 죄를 씻어 줍니다.
물에 어떤 효험이 있는 것이 아니라 물은 단지 죄 씻음에 대한 표에 불과한 것이며 우리의 죄를 씻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 밖에는 없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가 빛 가운데 계신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요한일서 1:7) 이 세례에 사용되어야 하는 외형적인 요소는 물로서, 이 물을 가지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되, 합법적으로 부르심을 입은 복음의 사역자인 목사에 의해서 집례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또한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 볼 문제는 꼭 세례를 받아야만 구원을 받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결론부터 말씀을 드리자면 아닙니다. 세례를 꼭 받아야만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세례를 받지 못했다하더라도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례를 받아야 구원을 얻는 다는 것은 거짓임을 알아야 합니다. 세례를 받아야만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는 자들은 성경의 진리에서 벗어나 말하기를 죽은 자를 위해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도 말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이런 가르침은 성경에 없는 것이며 정통 기독교에서는 받아들이지 않는 가르침임을 아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져야 할 신앙의 자세는 세례를 경시하거나 소홀히 하는 것은 올바른 신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의식을 모독하거나 무시하는 것은 커다란 죄가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세례의 효력은 그것이 집행되는 그 순간에 꼭 발생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의식을 옳게 집행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때에, 하나님 자신의 뜻하신 바 계획을 따라서 약속된 은혜를 받도록 되어 있는 사람(어른이든 유아이든)에게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 은혜가 제공될 뿐만 아닐, 또한 실제로 나타나고 부여됩니다. 세례 의식은 어떠한 사람에게든지 오직 한 번만 베풀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73문: 그러면 왜 성령께서는 세례를 중생의 씻음과 죄의 씻음이라고 부르십니까?
답: 거기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물이 우리의 더러움을 씻어주듯이 그리스도의 피와 영이 우리의 죄를 씻어준다는 점을 가르치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러한 신적 보증과 표지를 통하여 우리의 죄에 대한 영적인 씻음이 물에 의한 몸의 씻음처럼 실제적이라는 점을 확신시켜 주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례가 ‘상징’이 아니라 매우 ‘실제적’이라는 것입니다. 세례가 상징이기는 하지만 단순히 상징으로 생각하지 않도록 세례를 중생의 씻음과 죄의 씻음이라고 말함으로써 실제적인 효력을 나타낸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 (고린도전서 6:11)
제74문: 유아들도 세례를 받아야 합니까?
답: 그렇습니다. 어른들뿐만 아니라 유아들도 하나님의 언약 속에 있는 하나님의백성입니다. 유아들도 어른들 못지않게 그리스도의 피를 통한 죄의 용서와 믿음을 주시는 성령을 약속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유아들은 언약의 증표인 세례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교회에 속하게 되고 불신자들의 자녀들과 구별되는 것입니다. 구약에는 이것이 할례로 말미암아 이루어졌으며 신약에 와서 세례로 대치된 것입니다.
유아들도 언약에 참가한다는 사실은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칼빈은 말하기를 “유아들에게 세례를 주는 것이 옳으냐 하는 문제를 검토하기로 한다면, 물이라는 요소와 외형적인 관례에 그치고 그 영적인 신비에 마음을 돌리지 못하는 사람은 무의미한 말을 하며 심지어 정신이 나간 말을 한다고 할 것이 아닌가? 이 영적 신비를 설명한다면, 세례를 유아들에게 주는 것은 옳은 일이며 그들에 대한 하나의 의무라는 것이 분명하게 될 것이다. 처음에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할례를 베풀게 하셨을 때에는 반드시 할례가 의미하는 모든 것에 그들도 참여하게 하셨다. 그렇지 않고 그들에게 무의미한 상징을 베푸셨다면 그것은 자기 백성에 대한 우롱이었을 것이며 이것은 듣기만 해도 무서운 일이다. 여호와께서는 조그마한 유아들에게 행하는 할례가 언약의 약속을 확인하는 인을 대신한다고 분명히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만일 이 언약이 지금도 확고부동하게 유효하다면 구약 시대 유대인의 유아들과 똑같이 현대 그리스도인의 자녀들에게도 적용될 것이다. 표징이 의미하는 일에 그들이 참가한다면 표징을 그들에게 거부할 이유는 무엇인가? 그들이 진상을 안다면 왜 그들을 외형에서 쫓아 보낼 것인가? 외형적인 표징은 성례의 말씀과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서로 분리시킬 수 없다. 다만 표징을 말씀과 따로 고려한다면 어느 편을 더 중요시해야 할까? 우리는 표징이 말씀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표징은 말씀 아래 있으며 말씀보다 낮다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으로서의 "세례"가 유아들에게 해당되는데 말씀의 부속물인 표징을 거부할 까닭이 무엇인가? 다른 이유가 없다고 하더라도 이 한 가지 이유만으로도 모든 반대론자들을 충분하게 반박할 수 있을 것이다. 할례에는 일정한 날이 있었다고 하는 반대론은 도피 수단에 불과하다. 우리는 지금 유대인들같이 날짜에 매이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한다. 주께서 날짜를 정하시지 않으면서 엄숙한 의식으로 유아들을 자신과의 언약에 받아들이는 것을 기뻐하신다고 선언하시니 우리는 이 이상 무엇을 더 요구할 것인가?” 라고 말하였습니다.
정통 기독교는 유아세례를 인정하여 베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어른들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어린아이들의 죄 씻음을 위해서도 그의 보혈을 흘려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린아이들도 그들이 태어나자마자 주께서 명하신 대로, 마치 희생 제물이 되는 어린양과 같이,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에 참여해야 마땅하기에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해 표적과 성례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할례가 유대인들에게 행해졌듯이 세례는 우리 자손들에게 행해져야 마땅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린 아이들에게 신앙의 교리를 잘 가르쳐 언약의 후손으로 잘 자라날 수 있도록 부모들이 힘써야 합니다.
그런데 유아세례를 인정하지 않는 ‘재세례파’라는 이단이 있습니다. 이들은 유아들이 아직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들을 수 없고 신앙고백도 할 수 없으므로 유아세례를 베풀 수 없다고 말합니다. 구약의 할례와 신약의 세례는 다르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은 틀립니다. 세례의 근거는 하나님의 언약이기 때문입니다.
유아세례를 무가치하며 무익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어야 합니다. 칼빈은 유아세례의 유익을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만일 무익하다는 구실로 유아세례를 우습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주께서 명령하신 할례를 조롱하는 것이 되는데, 그들이 유아세례에 반대하기 위해 제시하는 증거 중 할례에 해당되지 않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의 육적인 생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을 곧 정죄하는 사람들의 교만을 주께서는 벌하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미련한 생각을 압도하는 다른 무기를 우리에게 주신다. 그의 이 거룩한 제도는 우리의 믿음에 특별한 위로를 주며 무익하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날인과 같이 어린이에게 전달된 하나님의 표징은 경건한 부모에게 주신 약속을 확인하며, 주께서는 부모들뿐만 아니라 그의 후손들에게도 하나님이 되실 것이고 그의 인애와 은총을 부모들뿐만 아니라 그의 후손에게도 천 대에 이르기까지 주고자 하신다는 것이 확인되었다고 선언한다. 경건한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자기들 때문에 자기들의 후손까지 생각해 주시는 것을 볼 때에, 여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무한한 인자하심에 깊이 감동되어, 먼저는 주의 영광을 찬양하며 다음에는 비상한 행복감이 마음에 넘쳐 인애하신 아버지를 더욱 깊이 사랑하겠다는 충만함을 품는다. 주의 약속만으로도 우리의 자녀들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것을 충분히 확신할 수 있다는 이 점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 이의를 무시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다르게 보시기 때문이다. 우리의 연약함을 보시고 이 문제에서 우리를 부드럽게 다루려고 하셨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비가 자녀들에게 미치리라는 약속을 믿는 사람들은 자녀를 교회에 바쳐 자비의 상징으로 인침을 받게 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더욱 확신을 얻도록 분발하는 것을 자기의 의무로 생각해야 한다. 주의 언약이 자녀들의 몸에 새겨지는 것을 자기 눈으로 보기 때문에 더욱 확신이 생긴다. 동시에 어린이들도 세례에서 유익을 얻는다. 교회에 접붙임을 받았으므로 교회의 다른 지체들에게 얼마만큼은 더 인정을 받게 된다. 그리고 장성해서는 하나님을 경배하겠다는 열의가 더욱 고무된다. 이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깨달을 나이가 되기 전에 엄숙한 상징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되어 영접을 받았기 때문이다. 끝으로, 자기 자식에게 언약의 상징으로 표를 하는 것을 멸시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벌을 주시겠다고 한 그 위협을 우리는 깊이 두려워해야 한다. 이렇게 멸시하는 자에게는 주시겠다고 한 은혜를 거부하시며 취소하시기 때문이다.”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창세기 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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