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칼럼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1563) 제22주일
제57문: “몸이 다시 사는 것”은 당신에게 어떠한 위안을 줍니까?
답: 죽음 후 바로 내 영혼이 머리되신 그리스도께로 갈 뿐 아니라 내 몸도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일으킴을 받아서 영혼과 결합하여 그리스도의 영화스러운 몸과 같이 될 것입니다.
죽음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두려움과 공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음을 맞보지 않고 영원히 살고자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사람들은 자신은 죽지 않고 영원히 살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어떤 이들은 육신이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기에 사람들은 인생을 함부로 삽니다. 악을 저지르고 세상의 쾌락을 즐기며 살아갑니다. 왜냐하면 죽으면 끝이기에 죽음 이후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 것은 죽음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영혼은 죽는 것이 아니라 불멸입니다. 영혼은 죽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 좌우에 강도들이 함께 달렸습니다. 그 중에 한 강도는 마지막에 구원을 받게 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23:43)
어떤 사람은 영혼 수면설을 말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영혼이 육체의 죽음과 부활 기간에 잠을 잔다는 교리로서 정통 기독교에서는 받아들이지 않는 교리입니다. 그리고 또 어떤 사람들은 영혼 멸절설을 말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비성경적인 주장으로서 한국에도 잘 알려진 존스토트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 영혼 멸절설을 따르는 자들은 지옥에 관한 여러 가지 이미지 가운데, 성경에서 사용되고 있는 '지옥 불' (마태복음 5:22; 18:9), '영원한 불'(마태복음 18:8; 25:41), '불 못'(요한계시록 20:14-15) 등의 표현에서 불이라는 이미지는 영원한 고통을 준다는 의미라기보다는 다 태워서 소멸시킨다는 의미로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받지 않고 죽어서 지옥에 들어간 영혼의 운명은 지옥에서의 영원한 고통이 아니라 태워져 소멸되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이 주장은 한마디로 지옥을 부정하는 비성경적인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유명한 사람이 말했다고해서 그 말을 다 믿어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맹목적 믿음, 맹신을 말하는 것으로 아주 위험한 행위입니다. 그들이 말하고 가르치고 있는 내용이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은지 다른지를 분별해야 합니다. 사도 요한은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 (요한1서 4:1) 하신 말씀처럼 분별해야 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많은 슬픈 일들을 만납니다. 그 가운데서 가장 큰 슬픔은 죽음입니다. 특히 사랑하는 이를 죽음으로 떠나보내는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그런데 죽음이라고 다 같은 죽음이 아닙니다. 죽음에는 3가지의 죽음이 있습니다. 영적죽음, 육신의 죽음 그리고 영원한 죽음입니다. 영적 죽음이란 하나님과 단절된 관계를 말합니다. 육신의 죽음이란 육신의 호흡이 끊어져 영혼과 육신이 분리된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영원한 죽음이란 꺼지지 않는 불 못인 지옥으로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신자들에게는 죽음이 절망과 끝이 아니라 위안과 소망임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소망이 있는 것은 부활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고린도전서 15:17,18) 그런데 부활이라고 다같은 부활이 아니라 서로 다른 부활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한복음 5:28,29)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선한 일과 악한 일에 대한 이해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선한 일과 악한일이란 세상에서 말하는 도덕 윤리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믿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선한 일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이 악한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생명의 부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은 악한 부활로 나올 것입니다. 악한 부활로 나온 자들은 비참할 것입니다.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 (마가복음 9:48,49)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선한 부활로 나온 자들은 영혼이 머리되신 그리스도께로 갈 뿐 아니라 그 자신의 몸도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일으킴을 받아서 영혼과 결합하여 그리스도의 영화스러운 몸과 같이 되는 부활체가 될 것입니다. 이 얼마나 복되고 소망의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우리의 머리되신 그리스도께로 간다는 것은 그분을 우리가 직접 뵐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죗값을 지불하시고 구원하신 주님을 직접 볼 수 있는 이것이 은혜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
제58문: “영원히 사는 것”에 관한 구절은 당신을 어떻게 위로합니까?
답: 내가 이미 영원한 기쁨을 마음속으로 경험하고 있듯이 죽은 후에도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지 못하였던 완전한 행복 즉, 하나님을 영원히 찬양하는 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만일 내세가 없고 영혼이 불멸하지 않는다면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이 세상뿐만 아니라 내세가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영혼은 불멸의 존재로서 영원합니다. 내세에 영원히 사는 존재로 성도들의 영혼은 존재합니다. 그러나 두 가지의 영원한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영원히 하나님을 찬양하며 복된 영생을 누리며 사는 영혼이 있는가 하면 영원히 지옥불에서 고통과 괴로움 속에서 살아야 하는 영혼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참 영생이란 생명의 부활을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자들이 얻는 은혜입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요한복음 17:3) 하나님을 아는 것이 생명을 얻는 데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라는 개념은 히브리 사상에 있어서 일반적인 것입니다. '헤르메스 문서집'에 보면 '인간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유일한 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다'라고 했으며, 유태인 헬라 철학자 '필로'(Philo)의 글에 보면 '하나님을 알고 깨닫는 것이 지혜의 길이다'라고 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①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이 영생을 가져다준다는 것으로 영생을 얻는 것은 또한 믿음의 결과입니다. 따라서 믿음과 지식은 동시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② '유일한, 참'이라는 두 형용사가 사용된 것과 같이 구원 지식의 대상으로 하나님만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③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그의 성육하신 아들에 관한 지식과 결코 단절되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아는 길은 단 하나로서 계시를 통해서 뿐인데, 하나님에 대한 그 계시가 아들 예수 안에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에로 들어가는 문이며 시작입니다. 이 새로운 세계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 나라에 대해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요한계시록 21:4) 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세상에서의 행복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을 행할 때 누립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은 잠시일 뿐입니다. 솔로몬은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 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 할 수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하는도다” (전도서 1:7-8)
세상에서 가장 오래 산다는 10가지 물건을 가리켜 십장생이라 말합니다. 그것은 해, 달, 산, 돌, 물, 구름, 학, 사슴, 거북, 불로초(영지), 대나무, 소나무입니다. 사람들은 이들을 그림에 그리거나 이불에 수를 놓거나 장롱에 자개를 놓아 장수를 기원했습니다. 불로장수는 인간의 보편적인 욕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진시황제가 천하를 통일한 후 신선과 불로초를 찾아오도록 명했던 일이나, 동방삭이 한무제의 복숭아를 훔쳐 먹고 3천년을 살았다는 설화나, 집안 곳곳에 십장생을 그려두고 기원했던 것들이 모두 불로장수를 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상상이거나 설화에 불과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런 것에 마음을 두고 영원히 사는 것을 원하고 있습니다.
참 신자들은 세상 사람들이 상상하거나 설화를 믿는 것을 따라가지 말아야 합니다. 결코 이런 것들로는 영원히 사는 은혜를 가질 수가 없습니다. 영원히 사는 은혜를 받고자 한다면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나아오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영접하시며 지식을 소유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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