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교도

참된 거룩은 능동적 행함과 수동적 은혜가 성품과 삶에 나타나는 것

작성자
쥬니어칼빈
작성일
2018-06-30 18:11
조회
616

참된 거룩은 능동적 행함과 수동적 은혜가 성품과 삶에 나타나는 것

거룩한 삶을 살고 하나님께 전적으로 성별된 삶을 살아야 하는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세속성에 마음을 빼앗겨 경건한 마음이 무디어졌다. 개인적 경건이라는 주제는 뒷전으로 물러나게 되었고, 사람의 수준은 많은 부분에서 처참하리만큼 곤두박질쳤다. “우리 구주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 하고(딛2:10), 우리의 일상 습관과 성품으로 이 교훈을 더욱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하는 일이 너무나 중요한데도 쉽게 간과되고 있다. 신앙이 있다고 하는 사람들이 세상에 호감을 주지도 못하고, 오히려 더 이기적이고 착하지도 않다는 평을 듣는다.


성화는 칭의만큼이나 중요하다. 개신교가 아무리 바르게 가르치고 있다 해도 삶이 따르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다. 오히려 더 해롭다. 예리하고 날카로운 세상 사람들은 그런 가르침을 거짓되고 공허하다고 멸시하고, 급기야 기독교 신앙 자체를 싫어한다. 우리 모두가 성경이 말하는 거룩이 온전히 회복되기를 바란다.


하지만 거룩이라는 주제는 바른 기초 위에서 다루어져야 한다. 미숙하고 부당하고 편향된 주장으로 손상되어서는 안 된다. 지난 날 칭의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을 혼란스럽게 하고 신비적으로 만드는 데 사탄이 성공했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성화에 대한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려고 애쓰고 있다(욥38:2). 저는 물음의 형태로 몇 가지 지침을 제시하겠다.


이 지침을 “이 시대를 향해 던지는 거룩에 관한 경고”라고 생각하시기 바란다.

1. 성화 교리를 다루는 많은 사람들이 회심한 사람의 거룩은 개인적인 노력과 전혀 상관 없이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고 대담하게 주장하는 사람이 많은데, 과연 이런 주장이 지혜로운 것인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모든 거룩의 뿌리이다. 거룩한 삶의 첫걸음은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믿음을 갖기 까지는 한 톨의 거룩도 거둘 수 없다. 믿음을 통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거룩한 삶의 시작일 뿐 아니라 거룩한 삶을 이어가는 비밀이다. 하지만 성경은 참된 그리스도인의 거룩을 위해서는 믿음뿐 아니라 개인적인 노력도 필요하다고 가르친다.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고 말했던 사도가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자신이 “싸운다”, “달음박질한다”, “몸을 쳐서 복종하게 한다”고 말한다(고전9:26,27) 그것만이 아니다.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고도 하고(고후7:1), “힘쓸지니”라고도 하고(히4:11), “모든 무거운 것을 벗어 버리자”고도 한다(히12:1). 더구나 믿음이 우리를 의롭게 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우리를 거룩하게도 할 것이라는 가르침은 성경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의롭다 함을 얻는 믿음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신뢰하는 은혜이다(롬4:5). 하지만 성결하게 하는 믿음은 삶으로 역사하는 은혜이다. 이 믿음은 “사랑으로 역사하고”(갈5:6), 시계태엽과 같이 속사람 전체를 움직인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거룩”이라는 표현은 신약성경 어디에도 없다. “믿음만이 의롭게 한다”는 말은 지극히 바르고 성경적이지만, “믿음만이 거룩하게 한다”는 말은 그렇게 바르지도 성경적이지도 않다. 야고보 사도는 우리가 의롭게 되었음을 사람 앞에 가시적이고 분명하게 의롭게 되었다고 드러낼 수 있는 믿음은 “행함이 없으면 그 자체가 죽은” 믿음이라고 분명하게 말한다(약2:17).


2. 산상수훈이나 사도 바울이 쓴 대부분의 서신들 후반부에서 볼 수 있듯이, 일상에서의 거룩함에 대한 많은 실천적인 권고를 약화시키는 것이 과연 지혜로운가?


스스로 신자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날마다 자기를 구별하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에 힘써야 한다. 신약성경은, 양심을 아프게 하지도 않고, 감정을 상하게 하지도 못하는, 거룩한 삶에 대한 일반적인 권고 이상의 것이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가르친다. 일상에서 거룩함을 빚어내는 특정한 요소와 세부적인 권고를 신자에게 분명하고 온전하게 제시하고 강조해야 한다. 참된 거룩은 단지 믿음과 느낌의 문제가 아니라, 능동적인 행함과 수동적인 은혜가 우리의 행함과 태도를 통해 나타나는 것이다. 참된 거룩은 우리의 말과 성품, 본성적 필요와 성향을 통해 그리고 부모와 자녀, 주인과 종, 남편과 아내, 통치자와 백성으로서의 우리의 행위를 통해 나타난다. 우리의 몸가짐, 시간 사용, 일터에서의 행동, 아플 때나 건강할 때의 행동을 통해, 부요할 때와 가난할 때 우리의 처신 등을 통해 나타난다. 오래전 경건한 저자들은 이 모든 문제를 속속들이 다루었다. 원론적인 언급 정도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들은 더 깊이 파고들어 갔고, 더 세부적으로 나아갔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거룩한 사람이 가정이나 직장에서 무엇을 하고 어떻게 지내야 하는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했다.


참된 거룩은 단지 내적인 감흥이나 감동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눈물이 흐르고 탄식하고 흥분하고 맥박이 빨라진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설교자와 교파에 대해 강한 애착을 느끼고, 우리와 의견이 맞서는 모든 사람과 기꺼이 싸우려는 분명한 태도가 있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거룩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덧입는 것으로, 자신의 개인적인 삶과 습관과 성품과 행실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롬8:29). 그들의 가족과 친구들이 볼 때 일상의 행실과 성품에서 진보와 변화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자기를 내려놓는 헌신과 믿음으로 거룩하게 된다”는 운동의 가르침을 듣고 “더 높은 수준의 삶”을 찾았다고 하는 사람들은 막대한 해를 끼칠 뿐이다.


3. 모호하고 막연한 말로 완전을 이야기하고, 성경적으로나 사람의 경험으로나 전혀 근거 없는 거룩의 표준을 이 땅에서 얻을 수 있는 양 그리스도인을 다그치는 것이 지혜로운가?


성경을 주의 깊게 읽는 사람이라면, 신자에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가고(고후7:1), “완전한 데로 나아가고”(히6:2), “온전하게 되라”(고후13:11)고 권면하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생각이나 말, 행실, 태도로 짓는 죄로부터 완전하고 흠없는 자유를 얻을 수 있다고 하는 문자적인 완전을 가르치는 구절은 하나도 보지 못했다. 그뿐 아니라, 아담의 후손 가운데 이 세상에서 그것을 얻은 사람이 있다는 소리를 전혀 들어보지 못했다. 모든 세대를 통틀어 가장 탁월한 하나님의 성도라 할지라도 스스로 절대적이고 문자적인 완전에 이르렀다고 할 수 없었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의 전적인 무가치와 불완전을 항상 절감했다. 신령한 빛을 더 누리는 사람일수록, 무수하게 많은 흠과 부족함을 자신에게서 보았다. 더 많은 은혜를 받은 사람일수록, 더 큰 “겸손으로 허리를 동였다”(벧전5:5).


이런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오늘날 많이 사용하고 있는 완전과 관계된 말에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다. 또한 이런 말을 사용하는 사람은 죄의 본질이나 하나님의 성품, 자신의 마음, 성경, 용어의 정의 등에 무지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처음 믿음을 갖게 되었을 때는 ‘큰 죄에 빠진 날 위해’와 같은 찬송이 맞았지만, 지금 자신은 그 찬송을 부를 단계는 지났고, 그 내용은 자기가 지금 경험하고 있는 수준과 맞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은 그 영혼이 아주 건강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육신을 입고 있는 동안에도 “죄를 짓지 않고 살 수 있다”고 하면서, 자신은 “지난 3개월 동안 죄악된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주 무지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이런 가르침은 유익하지 않을 뿐 아니라 아주 해롭다. 있지도 않은 “완전”에 이르지 못하는 것 때문에 선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침륜에 빠지기도 한다. 한 마디로 이런 가르침은 위험한 속임수에 불과하다.


4. 로마서 7장의 내용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경험을 묘사한 것이 아니고, 아직 회심하지 못한 사람이나 연약한 초신자의 경험이라고 억지 주장을 하는 것이 과연 지혜로운가?


이 문제는 사도 바울이 서신을 기록한 이래로 1,800(2,000)년 동안 논란거리였다. 존 웨슬리나 찰스 웨슬리, 존 플레처까지도 사도 바울 자신의 현재 경험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그런데 사도 바울의 로마서 7장 기록은, 모든 시대의 성숙한 성도들이 자기 경험을 기록해 놓은 것과 정확히 일치한다. 오히려 이 기록은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나 연약한 신자의 입에서는 결코 나올 수 없는 말이다.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교회사의 탁월한 주석가들 대부분이 한결같이 로마서 7장을 성숙한 신자의 고백으로 본다는 사실이다. 물론 예외가 있기는 한다. 여기에 반대하는 주석가들 대부분은 소키누스주의자, 아르미니우스주의자, 로마 가톨릭교도이다. 대부분의 종교개혁자들과 청교도들과 탁월한 현대의 복음주의 신학자들은 그렇지 않다.


5. 오늘날 “우리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 교리를 말하는 사람이 흔히 사용하는 말은 과연 지혜로운가? 이 교리가 성경에서 의도한 것 이상으로 높아져 있지는 않은가?


참된 신자는 그리스도와 하나요, 그리스도가 그 안에 거하신다. 이것은 그리스도와 신자의 신비로운 연합이다. 신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서, 그와 함께 장사되고, 그와 함께 다시 살고, 그와 함께 하늘에 앉혔다.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분명히 가르치는 성경 구절이 다섯 군데 있다(롬8:9-10,갈2:20,4:19,엡3:17,골3:11). 우리는 이 구절들이 의미하는 바를 잘 알아야 한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에 계시고”(엡3:17). 성령으로 우리 안에서 자신의 일을 해가신다는 사실은 누가 봐도 명확하고 분명하다. 하지만 이런 의미를 넘어서 신자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의 신비로운 내주하심을 말할 때는 그 의미를 더욱더 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칫 성령의 사역을 무시하게 된다(요즘 내재 신론이나 우주적 그리스도를 말하는 뉴에이지적 신비사상은 같은 류이다-요약자주).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는 우리 마음에도 계시고, 천국에도 계시고, 두세 사람이 그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도 계시고, 어디에나 계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의 머리와 대제사장 되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재림 때까지 하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고 계시고, 그분이 떠나시면서 보내겠다고 약속하신 성령을 통해 지금도 그분의 백성 마음에서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요15:2^). 로마서 8:9-10을 보면 확연하다. “우리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는 다름 아닌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이다. 사도 요한의 말은 이 사실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요일3:24).


새뮤얼 러더퍼드의 <영적인 적그리스도>를 보라. 신자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의 교리에 대한 잘못된 가르침으로 인해 두 세기 전에 극단적 이단이 일어났음을 알 수 있다. 반율법주의와 광신주의의 가장 악독한 형태로 변해갔다. 이 끔찍한 오류는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2:20) 같은 말씀을 무리하게 푸는 데서 비롯되었다. 그 결과, 이런 가르침을 따랐던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을 하든 그 일에 대한 책임이 자신에게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신자는 죽어서 이미 장사되었고 그리스도만이 그들 안에 살면서, 그들을 위해 모든 것을 한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아무런 가책도 없이 육신의 안락함만을 구가하고, 아무 거리낌 없이 죄를 짓기 시작했다! 왜곡되고 과장된 진리는 가장 위험한 이단들의 어미가 될 수도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6.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회심과 성별 또는 회심과 “더 높은 수준의 삶”을 서로 전혀 다른 것으로 생각하고 분명하게 선을 긋는 것을 본다. 이 둘을 완전히 구분하는 것이 과연 지혜로운가?


로마 카톨릭은 교회를 죄인, 회심자, 성도의 세 부류로 나눈다. 오늘날 현대 교사들도 신앙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을 회심하지 않은 자, 회심한 자, 완전한 성화의 삶을 살아가는 “더 높은 수준의 삶”에 도달한 자의 세 부류로 나눈다. 중요한 것은 성경에서 그 근거를 전혀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다. 성경은 항상 사람을 두 부류로 나눈다. 산 자와 죄 가운데 죽은 자, 신자와 불신자. 회심한 자와 회심하지 않은 자, 좁은 길로 가는 자와 넓은 길로 가는 자, 지혜로운 자와 미련한 자,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로만 나눈다. 그러나 각 범주 안에 있는 사람들의 죄와 은혜의 정도는 다르고 다양하다. 그러나 그 차이가 본질적인 것은 아니다. 한 승강기인데 서 있는 높이가 다른 것에 불과하다. 물론 이 두 범주 사이에는 무한한 간극이 있다. 생명과 사망, 빛과 어둠, 천국과 지옥의 차이만큼이나 멀다. 하지만 사람을 세 가지 범주로 나눈다는 말은 성경에서 전혀 들어 본 적이 없다. 저는 두 번째 회심(second conversion)이라는 개념을 몹시 싫어한다.


은혜는 정도마다 큰 차이가 있고 영적인 삶은 항상 성장하는 것이기 때문에, 신자는 은혜 안에서 자라기 위해 항상 힘써야 한다. 하지만 신자가 신비로운 변화를 통해 단번에 완전한 성별과 지복의 상태에 이르게 된다는 이론은 받아들일 수 없다. 은혜, 지식, 믿음, 사랑, 거룩, 겸손, 영적인 마음이 점진적으로 성장하는 것은 성경이 분명히 가르치고 있고, 많은 성도들의 삶이 잘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갑작스럽고도 즉각적인 변화를 통해 신자가 회심에서 성별로 급작스럽게 건너띈다는 말은 성경 어디에서도 보지 못했다. 성별이 없는 회심이 있는가! 두 번째 회심으로서의 “더 높은 수준의 삶”을 신자에게 촉구하는 사람은, 성경이 새 생명, 새 창조, 영적인 부활이라고 일컫는 위대한 처음 변화의 길이와 넓이와 깊이와 높이를 경시하는 것은 아닌가? 그런 주장을 듣다 보면, 이들이 말하는 성별되는 때가 바로 이들이 처음 실제로 회심하는 때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저는 “옛길”을 따르겠다(렘6:16). 몸과 마음과 영혼을 그리스도께 성별하고 더욱 헌신함으로 은혜 안에서 지속적으로 성장할 가능성과 앞으로 전진해야 할 절대적 필요를, 회심한 모든 사람에게 해마다 역설하는 편이 더 지혜롭고 안전하게 보인다. 대부분의 신자가 지금 누리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거룩과 하늘의 기쁨을 이 땅에서도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반드시 가르쳐야 한다. 두 번째 회심을 가르치는 것은 겸비한 마음을 가진 사람을 짓누를 뿐 아니라, 경박하고 무지하고 자기를 속이는 사람을 부추겨 아주 위험한 상태에 이르게 한다.


7. 신자에게 죄와 씨름하고 싸우기보다는 전적으로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고”, 그리스도의 손에 자신을 맡기기만 하라고 가르치는 것이 과연 지혜로운가?


신자의 의무로서 “너희 자신을 드리라”고 하는 표현은 신약성경 단 한 군데서 찾아볼 수 있다. 바로 롬 6:13-19이다. 총 다섯 번 등장한다. 하지만 여기서도 “우리 자신을 타자에게 수동적으로 맡기라”는 의미는 아니다. 적극적으로 우리 자신을 드려 섬김과 유익과 소용이 되게 하라는 것을 알 수 있다(롬12:1).


또한 신약성경의 서신서 전체를 통틀어 서른 군데 정도에서, 신자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일에 온 힘을 다 쏟아야 할 책임이 있고, 이 일을 위해 개인적인 모든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고 분명히 가르치고 있다. 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수동적인 주체로서 그저 자신을 드리기만 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일어나 일하라고 말씀한다. 거룩한 침노, 갈등, 전쟁, 싸움, 군사의 삶, 씨름 등을 참된 그리스도인의 표지로 언급한다. 에베소서 6장에 나오는 “그리스도인의 전신갑주”에 대한 이야기만으로도 이 문제에 대한 충분한 대답이 된다.


그 가르침은 본 번연의 <천로역정> 같은 고전을 불태워 버리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사람들은 전혀 다른 두 개의 사실인 칭의와 성화를 계속해서 혼동한다. 칭의를 통해 사람에게 요구할 말은 “믿으라, 그저 믿기만 하라”는 것이고, 성화를 통해 요구할 말은 “깨어 기도하고 싸우라”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놀라울 정도로 성경에 무지하고, 따라서 신앙도 견고하지 못하다. 이런 사람들은 어린아이와 같이 “온갖 교훈의 풍조에 흔들리거나 이리저리 밀려” 다닐 수밖에 없다(엡4:14). 아테네 사람들과 같이 무엇인가 새로운 것에만 관심이 있을 뿐, 우리 조상들을 통해 다져진 것에는 병적인 염증을 느낀다. 현대적인 가르침을 듣기 위해서는 구름처럼 몰려들지만, 자신이 듣는 것이 과연 진리인지에 대해서는 숙고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선정적이고, 선풍적인 인기를 끄는 가르침을 끊임없이 열망한다.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벧전3:4)과는 전혀 상관 없고 영적으로 술 취해 사는 것과 다르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과장된 찬양으로 쉴 새 없이 감정을 자극해 주고, 감정에 격해 큰소리로 울 수 있는 군중집회 같은 것에만 관심을 둔다. 교리의 차이를 전혀 분별할 수 없게 만드는 무지가 팽배해 있다. 설교자가 “똑똑하고” “열정적”이기만 하면 다른 것은 별로 문제될 것이 없다. 이런 것에 


문제라도 삼으면 이내 여러분은 “편협하고 관대하지 못한” 사람으로 여겨질 뿐이다!

슬픈 사실은, 진심으로 거룩을 증진하고자 했던 사람이 서로에 대한 오해와 반목으로 하나 둘씩 떨어져 나간다는 것이다. 우리는 정말 큰 곤경에 처해 있다.


생소하고 기괴한 용어와 어구로 성화를 가르치는 것을 반대한다. 거룩을 증진하려는 운동은 결코 새로 만들어 내는 표현이나 편향된 진술을 통해 되는 것이 아니다. 특정한 본문에 집착하거나 한 진리를 위해 다른 진리를 희생하고, 본문을 풍유적으로 해석하여 인위적으로 조화시킨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을 다투게 하고 이간시키는 거룩 운동은 일단 의심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위해, 진리와 사랑의 이름으로, 우리는 거룩뿐 아니라 평화도 추구해야 한다. “하나님이 짝지워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마19:6).


거룩에 자라기 위해 힘쓰는 모든 사람은 성경을 더욱 균형 있게 읽고, 교리를 신중하게 분별하고, “헛된 것을 버리고 귀한 것”을 분별하기 위해 더욱 힘쓰고 분발해야 할 것이다(렘16:19).


- 존 라일, 『거룩』, PP 13-40(서론)의 요약.

출처 : 청교도 아카데미 http://cafe.daum.net/psc-k/89vA/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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