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교도

청교도 운동

작성자
쥬니어칼빈
작성일
2013-11-11 20:24
조회
5272

청교도
운동
                                                                                                                                    
아리엘교회

 

1.
역사적 배경

 

1)
헨리 8세

-
잉글랜드의 국왕 헨리 8세는 교황으로부터 ‘로마교의 수호자’라는 칭호까지 받은 열렬한 카톨릭의 신자였습니다. 1509년, 친형인 아더가 죽자
형수인 캐더린과 결혼을 합니다. 그는 이후 다섯 명의 여인을 부인으로 둡니다. 그리고 캐더린 사이에 메리(훗날 피의 여왕으로 불리는 사람)를
낳고, 앤 공주(천일의 앤)와의 사이에 엘리자베스 여왕을 낳고, 제인 세이모어와의 사이에 유일한 아들 에드워드 6세를
낳습니다.

-
1529년, 헨리 8세는 아들을 낳지 못하는 캐더린과 이혼을 하였는데, 이를 로마 교황청이 허락하지 않자 카톨릭과 단절을 선포하고 영국에
독자적인 교회를 세우기 위해 의회를 압박합니다. 의회는 1532년부터 36년까지 이 문제를 다룬 끝에 헨리 8세를 영국교회의 최고 권위를 지닌
수장권(Headship of Church)을 인정하는 결의문을 반포합니다. 이후 헨리는 교회의 재정과 재판 및 행정을 독점하고, 모든 종교정책을
관리하는 영국의 교황이 되었습니다. 그는 신부들의 결혼을 금지하고 라틴어 예배만 허용하였으며 모든 종교적 형상들을 예배당에 설치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이런 행위에 대해 1517년 루터의 종교개혁운동의 영향을 받은 많은 개혁가들은 분노하고 저항하기 시작합니다. 이들은 영국의 위대한
종교개혁의 유산을 남긴 존 위클리프와 윌리암 틴테일의 개혁사상을 가르치며 영국 성공회를 개혁하고자 힘을 합치기 시작했습니다.

 

2)
에드워드 6세

-
1547년 헨리 8세가 죽자 그의 유일한 아들인 에드워드가 왕위에 오릅니다. 그는 아버지와는 달리 개혁사상에 호의적인 태도를 지녔습니다. 이때
스코틀랜드의 존 낙스가 고국에서 핍박을 피해 잠시 잉글랜드에 피신해 있었는데 국왕은 그를 왕실 목사로 임명하고 잉글랜드의 종교개혁에 힘을 실어
줍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에드워드는 16세의 어린 나이에 죽고 맙니다.

 

3)
메리 여왕

-
1553년 메리는 그녀의 이복동생인 에드워드가 죽자 왕위에 오릅니다. 동생과 달리 그녀는 철저한 카톨릭 신자였습니다. 그녀는 개혁가들을 핍박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대 300여 명의 개신교신자들이 목숨을 잃었고, 약 800여 명이 망명을 떠났습니다. 존 낙스는 스위스로 망명을 갔으며 그곳에서
칼빈을 만났습니다.

 

4)
엘리자베스 여왕

-
1558년, 피의 여왕으로 불리던 메리가 갑자기 즉사합니다. 사람들은 그녀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엘리자베스는 어릴
때부터 개신교 사상을 가진 스승으로부터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많은 개혁가들은 그녀의 등극을 반겼습니다. 많은 망명가들이 귀국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개혁가들의 기대와는 달리 아버지 헨리 8세의 수장령을 재반포하고 국가와 교회를 동시에 다스리기를 원했습니다. 이른바
황제교황주의(Caesaropapism)가 탄생한 것입니다.

-
개혁가들은 다시 저항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교회의 개혁을 부르짖는 이들을 가리켜 ‘청교도’(puritan)라 불렀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원래
‘precian'에서 유래한 것으로 ’매우 까다로운 사람‘ ’아주 꼼꼼한 형식주의자들‘이라는 의미이며 이들을 비아냥거리는 욕설이었습니다.
엘리자베스는 점점 개혁가들을 극단주의자로 몰아갔습니다.

-
1559년에 이르자 그녀는 공공기도서와 함께 종교통일령을 발표했습니다. 이어 그녀를 지지하는 자들을 주교로 임명하고 그들을 중심으로 신앙고백서를
작성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성공회의 신앙고백서인 39개 조항(Artical)입니다.

-
이에 반해 청교도들은 성공회가 준수하는 성직자의 성의 착용, 세례줄 때 성호를 긋는 것, 성찬을 받을 때 무릎을 꿇는 것, 성상이나 성물 숭배
등을 철저히 금지하는 ‘청교도 조항’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청교도들의 이런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이후 청교도들은 더 이상 정치적인
방법으로는 교회를 개혁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시민들 속으로 파고듭니다. 그들은 곳곳에서 열정적으로 설교를 했으며 문서를 풀판하고, 개인적인
영향력을 통해 개혁사상을 전도했습니다. 이를 두고 역사는 ‘아래로부터의 개혁운동’으로 평가합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청교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 갔습니다.

 

5)
제임스 6세

-
1603년, 엘리자베스 1세가 후사가 없이 죽자 그녀의 뒤를 이어 스코틀랜드(1560년에 이미 존 낙스 등에 의해 종교개혁이 완성되고 장로교를
채택함)의 왕인 제임스 6세가 왕권을 이어받습니다.(잉글랜드에서는 제임스 1세라고 함) 이에 다시 한 번 청교도들은 고무됩니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제임스는 정치적인 목적을 이유로 장로교 대신에 감독주의 제도를 택합니다. 그는 한 발 더 나아가 왕권신수설을 들고 나오 왕이 교회의
수장이라고 재천명했습니다. 그리고 왕의 명령에 복종하든지 아니면 나라를 떠나라고 명령했습니다.

-
1620년, 종교와 시민의 자유를 찾아 146명을 태운 메이플라워호가 신대륙으로 향하여 출발하였습니다. 드디어 117일 만에, 항해 도중
44명의 목숨을 바다에 던진 채 그들은 오늘날의 뉴욕항구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바로 배에서 내릴 수 없었습니다. 인디언들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 달을 바다에서 버티다가 결국 뱃머리를 돌려 북쪽의 메사추세츠라는 곳에 입항했습니다. 그곳은 현대판 가나안 땅이라
할 만큼 황량한 벌판이었습니다. 1년 뒤 이들은 원주민의 도움으로 옥수수, 감자, 호박, 그리고 칠면조 고기로 하나님께 감사제를 드렸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추수감사제의 전통으로 이어지고 있고 이들이 미국 땅에 청교도 신앙의 씨앗을 뿌린 것입니다.

-
청교도들을 몰아낸 제임스 국왕은 반면에 교회에 공로도 세웠습니다. 1611년에 들어 지금까지 영어권에서 가장 많이 읽히고 있는 킹 제임스 역
성경(KJV)을 편찬하는 업적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6)
찰스 1세

-
1625년 아버지 제임스에 이어 왕위에 오른 찰스는 더욱 강력한 종교정책을 펼치며 교회를 자기 손아귀에 쥐려 했습니다. 나아가 그는 고향
스코틀랜드의 장로교를 없애고 감독주의 교회를 세우기 위해 당시 캔터베리 주교였던 라우드로 하여금 공동기도서를 작성케 하고 스코틀랜드 수도
에딘버러의 성 자일레스 교회로 보내 감독식 예배를 강행했습니다. 이에 스코틀랜드인들이 폭동을 일으키며 완강히 저항했습니다.

-
1638년 2월 28일 찰스에 반기를 든 장로교도들이 자신들만의 언약서를 발표했습니다. 이로 인해 스코틀랜드의 개혁파들을 ‘언약도’ 혹은
‘계약파’로 부릅니다. 이 언약서엔 그리스도의 왕권과 수장권 및 성경의 절대 권위와 장로정치를 끝까지 수호하자는 다짐이 들어 있습니다. 이
언약서를 만들 때 참가자들은 혈서로 서명을 했습니다.

-
이 소식을 들은 찰스는 언약도들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합니다. 이때부터 국왕의 군대와 언약도들 간의 전쟁이 발발합니다. 찰스는 먼저 전쟁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의회의 협조를 구하지만 그러나 의회는 국왕의 요구를 반대합니다. 이로 인해 1642년 잉글랜드는 내전이 발발합니다. 역사는
이것을 ‘시민전쟁’이라 부릅니다. 처음에 의회군은 열세였지만 스코틀랜드 군대의 지원을 받아 국왕을 지지하는 왕당파를 제압합니다. 국왕과 왕당파는
할 수 없이 1643년 장로교를 국교로 한다는 비밀협약을 맺고 전쟁을 끝냅니다.

 

7)
올리버 크롬웰

-
찰스의 권력이 무너지자 이후 권력은 의회의 대표인 올리버 크롬웰에게 넘어갑니다. 전쟁이 종식되었지만 여전히 종교적인 갈등이 내재하였습니다. 이에
의회는 국가의 종교회의를 열 것을 결의했습니다.

-
드디어 1643년 6월 12일에 전국에서 교회의 대표자들이 웨스트민스터 교회로 모이게 됩니다. 이 종교회의는 이후 1649년까지 지속됩니다. 총
151명(목사 121명, 나머지는 평신도)이 참가한 이 회의는 모두 1,163회의 회의를 가졌고 역사상 가장 성경적이고 개혁신학적인 신앙고백서와
대 소요리문답, 그리고 예배모범과 권징 조례 등의 귀중한 문서를 만들었습니다. 이로 인해 이제 장로교회는 안정적인 교리 위에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회중교회는 1658년에, 침례교는 1677년에 이를 받아들였습니다.(침례교는 1689년에 독자적인 신앙고백서를 만들어 이탈합니다.
그러나 이들의 신앙고백서는 웨스트민스터의 것에서 약 10%정도만 수정한 것일 뿐입니다.)

-
1641년 라우드 주교는 의회군에 체포되어 런던타워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1645년 1월에 사형당합니다. 잉글랜드의 감독주의는 1646년에
폐지됩니다. 모든 권력은 올리버 크롬웰이 장악했습니다.

-
그러나 문제는 내부에서 다시 불거졌습니다. 의회 안의 장로교파와 독립교도들이 심각하게 대립했습니다. 의회의 다수를 점한 장로교도들은 독립교도들이
주를 이루고 있는 군인들의 정치를 매우 싫어했습니다. 여기에 의회가 군인들의 월급을 제때 지급하지 않자 군인들이 불만을 가졌습니다. 이런 기미를
눈치 챈 찰스 1세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먼저 언약도들에게 모종의 제안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 비밀협상이 크롬웰에게 누설되었고
찰스는 1649년 1월에 체포되어 반역자의 죄목으로 참수당합니다.

-
찰스 1세가 죽자 아들인 찰스 2세는 화란으로 피신을 갔다가 스코틀랜드의 국왕으로 추대됩니다. 그를 지지하는 군인들과 독립교도들이 크롬웰에게
마지막 도전을 감행하지만 1650년에 완전히 제압당하고 드디어 잉글랜드의 시민전쟁은 종지부를 찍게 됩니다. 찰스 2세는 이때 프랑스로
피신했습니다.

-
크롬웰은 초대 호민관(오늘날의 수상)이 됩니다. 크롬웰의 집권동안 청교도들은 만개합니다. 이때 유명한 목사들로는 로버트 불톤, 로버트 해리스,
제레미아 부로그, 윌리암 조지 등이 있었고, 신학적으로는 토마스 굿윈, 토마스 머튼, 존 오웬, 리차드 백스터, 존 번연, 존 프라벨 등이
있습니다. 이들의 작품은 지금까지도 독자들에게 인기가 높습니다. 

 

8)
찰스 2세

-
1658년 크롬웰이 사망하자 아들인 리차드 크롬웰이 2대 호민관이 되지만 나약한 지도력으로 다시 나라는 혼란에 빠집니다. 한편에서 왕정복구운동이
일어나자 프랑스로 피신해 있던 찰스 2세가 군인들과 합세하여 1661년에 드디어 권력을 쟁취합니다. 이것으로 잉글랜드의 청교도 운동은 막을
내립니다.

-
왕은 이전보다 훨씬 강력한 종교 통일정책을 펼칩니다. 그는 감독주의 교회를 선포했으며 모든 비국교도들의 집회를 금지했습니다. 이때 4,000여
명의 퀘이커 교도들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듬해엔 비국교도들의 추방령을 반포합니다. 왕은 성공회 예식에 따라 목사가 되지 않은 사람은 다시
안수를 받든지 그렇지 않으면 교회를 떠나라고 명령했습니다. 윌리엄 거널 목사는 이때의 가혹한 탄압을 <그리스도인의 전신갑주>라는 책에
기록했습니다. 

 

2.
결론

 

1)
1662년 이후로 청교도운동은 종식됩니다. 청교도운동이 이렇게 막을 내리게 된 것은 외부적으로는 혹독한 탄압 때문이지만 내부적으론 청교도들 간의
연합과 단결이 약하였기 때문입니다. 개혁방법에 대한 서로 다른 목소리들이 하나로 집약되지 못한 것으로 봅니다.

 

2)
그러나 약 1백년간 잉글랜드의 종교개혁을 위해 헌신하고 싸운 청교도들의 신앙은 지금까지도 살아 우리에게 전수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무엇보다
철저한 성경주의자들이었습니다. 교회의 모든 문제나 개인의 신학사상과 신앙은 철저히 성경에 근거한 것이라야만 했습니다. 그들의 이와 같은 사상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그대로 반영되어 제 1장에 성경을 제일 먼저 취급한 것입니다. 또 개인적으로 경건생활을 그들의 신앙생활 중 가장 위대한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경건의 힘이 바로 청교도의 힘이었습니다. 거룩한 삶을 통해 그리스도인의 아름다움을 몸소 증거한 그들이야말로 신앙인의
모범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그들은 디모데전서 4장 8절의 ‘범사에 유익한 경건의 연습’에 힘쓴 하나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3)
흔히 청교도들을 오해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낙을 모르는 고리탑탑한 자들이라 생각합니다. 청교도들을 폄하하는 자들은 청교도들을 ‘수척한 몸매에 검은
모자를 쓰고 머리는 길게 늘어뜨린 자’로 묘사합니다. 그러나 청교도들은 실제로 매우 유머스러웠으며 무둑뚝하고 불친절함을 물리칠 적으로 간주하고
언제나 다른 사람에게 친절하고 환환 웃음을 선사하며 일상생활에서 기쁨과 즐거움을 누린 자들이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 대한 영적 헌신의 깊은
지각을 소유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청교도들은 하나님을 닮아가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이던 진짜 살아있는 신앙인이었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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