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교도

청교도 인물사 요약

작성자
쥬니어칼빈
작성일
2013-05-03 17:47
조회
7558

서론

 

청교도란 말은 1560년대 초에 사용되었다. 당시 이 말은 영국 국교회에 비타협적인 개신교도들을 내리깎는 다분히 조소 띤 것이었다. 국교도들이 경멸하는 의미에서 청교도들을 까탈스럽고 비판적인 고집 불통이라고 할 때 여기에는 상당한정직이 내포되어 있었다.

청교도란 말의 어원인 라틴어 푸리타니(Puritani)가 말하는 바와 같이 청교도들은 세속의 오염으로부터 격리된 거룩한 양심의 소유자들이었다. 이들은 초대교회로부터 물려받은 사도적 순결과 거룩한 양심을 지키기 위해 세속으로부터 격리되기를 염원하였다.

청교도들은 성경에 근거하지 않은 신앙 생활은 어떠한 것이라도 거부하였다. 이 거부 과정 속에서 때로는 청교도들이 까탈스럽고 고집 세며 꼼꼼한 자같이 보였을 것이다.
학계는 청교도 역사를 연구하는 데 대략 두 가지 해석틀을 사용한다. 첫번째는 청교도 운동을 보수적 칼빈주의자들의 몸부림으로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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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해석하는 학자들은 영국의 청교도 혁명과 청교도들의 미국 이민 그리고 이러한 이민자들의 후손인 조나단 에드워즈 시대까지를 칼빈주의의 전성 시대로 보고, 이 사실은 칼빈주의에 입각한신정 정치”(Theocracy), 개인의 숨통을 짓누르는 자유가 없는 속박된 사회라고 정의한다. 이러한 학설을 지지하고 있는 학자들은 칼빈주의의 도덕적 율법주의를 자세히 열거한다.
또한 무시무시한 두려움(haunting fear)에 떠는 영미 청교도의 모습을 연상시키면서 청교도 운동이 음울한 과거의 유산을 되찾으려 한다고 비난한다. 대표적인 학자는 애덤즈, 페링턴 그리고 멘켄(H. L. Mencken)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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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로 불릴 수 있는 일단의 학자들은 첫번째 형태의 해석을 정면으로 도전하여 영미 청교도 운동과 그 후에 이어지는 미국 제1차 대각성 운동이 부정적 의미로만 사용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렇게 주장하는 자의 대표로는 하버드 학파의 페리 밀러(Perry Miller, 190563)를 위시한 그의 후계자들이다.
이들은 청교도 운동이 칼빈주의에 입각한 운동임을 긍정한다. 그러나 이 칼빈주의가 인간성을 짓누르고 문화를 멸시하는 저속하고 편협한 운동이 아님을 역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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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러는 청교도의 종교심이 미국화되는 변용을 거치면서 미국식 민주주의를 창출한 점을 긍정적으로 높이 평가하고 있다. 밀러의 대표 저서인 조나단 에드워즈는 청교도이자 칼빈주의자인 에드워즈를 미국의 영웅으로 만들어 놓으면서 새로운 학문의 장을 열고 있을 정도이다.

필자는 위의 두 학설 모두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 학설은 역사적 사료를 충분히 검증하지 못한 채 결론을 내린 편견이고, 두번째 학설은 역사적 사건을 현재의 입장에서 억지로 짜맞추는 인상을 준다. 따라서 보다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입장이 필요하다.

다시 말하면 과거의 역사를 오늘날에 비추어 해석하는 것을 배제하고, 과거의 사건이나 인물들이 과거 문화의 틀 속에서 스스로 이야기하도록 함으로써 청교도 운동이 실제로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가를 판단해야 된다는 것이다.
이런 바탕 위에 청교도 운동은 종교 개혁자들의 신학 속에서 평가받아야 한다. 왜냐하면 종교 개혁은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고, 청교도 운동은 이 종교 개혁의 연속선상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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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낙스:청교도의 창시자

 

어느 교회사 책을 보건 존 낙스(John Knox, 1514?72)의 이름은 빠지지 않는다. 그는 비록 스코틀랜드 사람이었지만, 그의 영향력은 그의 조국과 영국, 미국 그리고 칼빈주의를 신봉하는 많은 사람과 국가에 미쳤다.
스코틀랜드 사람인 토머스 칼라일(Thomas Carlyle)은 낙스를 청교도의 창시자라 생각했고 마틴 로이드 존스도 같은 의견을 표했다. 한때 미치광이, 열광적이고 극단적인 개신교 일파로 알려졌던 청교도들이 지난 50년 동안의 학계의 노력으로, 요즈음은 로이드 존스와 같은 평가를 내려도 큰 거부 반응 없이 수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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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큰(Ryken)이 지적한 바와 같이 청교도는 이 세상의 성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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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교도들은 천진 난만한 것 같으나 탄력성과 창의성 있는 지혜를 가진 성숙한 자들이었으며, 오직 하나님만을 무서워한 위대한 영혼의 소유자들이었고, 따뜻한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열정으로 지칠 줄 모르고 기도했던 자들이었으며, 무엇보다 끊임없는 수난과 억압 속에서도 현실 개혁을 위해 투쟁했던 용사들이었다


존 낙스는 1514년경 하딩턴(Haddington), 아니면 그 인근 지역에서 태어나 세인트앤드루스 대학에서 존 메이저(John Major)의 영향을 받았다. 메이저는 스코틀랜드의 장래를 위해 프랑스와 가깝게 지내기보다는 영국과의 평화 관계 유지가 필요하며, 왕정의 독재자가 시민 위에 군림해서는 안 된다는 급진 사상을 가진 자였다.

낙스는 대학에서 이러한 급진 사상뿐 아니라 교회법도 공부하였다.그는 신부로 활동하다가, 때로는 공증인(apostolic notary)으로, 위샤트를 만나기 직전에는 귀족 자제들의 개인 교사로 활동하였다. 낙스는 1540년쯤 회심했으며, 위샤트를 만났을 때 그의 신앙은 틀림없이 개신교적이었으나 개혁주의자는 아니었다. 그는 다분히 루터적이고 반교황적인 신학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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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스가 위샤트 순교 후 세인트앤드루스의 수비대에서 설교할 때 그의 나이는 30세 정도였다(1548). 낙스는 당시 스코틀랜드의 최고 지식인들인 세인트앤드루스 대학의 교수들과 일반 대중 앞에서 최초의 설교를 하였다.  그의 스승 존 메이저도 이 청중들 속에 있었다. 낙스는 다니엘 7:24, 25을 본문으로 삼아 설교하였다. 그는 로마 교회를 적그리스도라 해석하였는데 그 이유는 교황청의 교리 이탈과 역대 교황들의 문란한 사생활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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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스는 노예 생활을 통해 인간의 가혹성과 잔인성을 보았다. 그가 치룬 노예 생활은 참담한 것이었다.
항해 중에 이들은, 밤에는 의자에 묶인 채 잠이 들었으며, 낮에는 뜨거운 태양, , 바람, 추위에 시달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배를 수선하거나, 청소할 때, 혹은 겨울에는 육지에 있는 오두막에서 잠을 잘 수 있었다······육체적으로뿐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갖가지 곤경을 당해야 했을 것이다······낙스와 그의 동료들은 프랑스에서 가장 악질적인 죄수들과 함께 섞여 살게 되었다
.]
그러나 낙스는 절망스런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잊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이름 없는 사람으로 갤리선에서 인생을 마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언젠가 자신을 쓰시기 위해 훈련시키신다고 믿었다. 아울러 이 고통의 시기에 그는 낭트 주위에 살고 있는 프랑스 개혁주의자들과 산발적으로 친교를 나눌 수 있었다. 1549년 영국 정부의 교섭으로 낙스는 극적으로 해방되었다.영국에서 낙스의 중요성을 깨닫고 포로 교환의 방법으로 그를 구해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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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왕실의 후원을 받은 낙스는 잠시 스코틀랜드의 귀환을 보류한 채 5년 동안(154954), 베릭(Berwick)과 뉴캐슬(New castle)에서 목회로, 런던에서는 설교로 그리고 대주교 크랜머와는 따뜻한 우정을 나눔으로 유익한 시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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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6세는 낙스의 탁월함을 인정하고 그를 여섯 명의 궁정 목사 중 한 사람으로 지명하여 설교를 시켰다. 영국 체류 기간에 낙스는 모든 삶의 원리와 신앙을 성경에서 찾으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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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외에 낙스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성경을 최고 권위의 주도 원리로 삼았기에 청교도의 창시자이고,그 주도 원리에 기초해서 철저한 개혁을 믿었기에 청교도의 창시자이다. 청교도로서 낙스에게는 개혁이 단순한 수정이 아니고 새로운 형성이었으며, 이 개혁은 성경이 가르치는 교회를 만드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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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낙스는 영국에서 목회하는 동안 1548년판 에드워드 6세의 공기도서(Order of Common Prayer) 1549년에 발행된 성공회 기도서(Book of Common Prayer)의 사용을 거부했다.
누가 뭐라 해도 성찬에 관해서는 낙스의 공로를 인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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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스는 출교 처분을 받았던 자들의 자녀들에게 세례 베풀기를 거부했다. 다른 국교회 사역자들은 그런 자들의 자녀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던 것이다. 낙스는 교회의 권징을 참으로 중요하게 생각했을 뿐 아니라 교황제의 잔재인 국교회의 감독직에 대해서도 찬성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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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스의 제네바 사역

영국 체류 때 낙스의 신앙은 상당 부분이 칼빈주의화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리처드 콕스와의 대결 양상도 낙스의 개혁주의 신앙과 콕스의 성공회 신학의 마찰이 적지 않게 작용했음을 직감할 수 있는 것이다.
콕스와 헤어진 낙스는 칼빈이 목회하는 제네바 교회 바로 옆 건물에서 약 200여 명의 영국 피난민들을 돌보게 되었다. 이때 낙스는 칼빈의 예배 모범서를 본따기도의 형식과 성례의 집행”(The Form of Prayer and Ministration of the Sacrament)을 작성하여 성도들에게 사용하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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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순서는죄 고백과 시편 낭송, 주의 강림을 간원하는 기도, 설교 및 그 후의 질의 응답, 목회자의 기도, 축도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성찬식은 한 달에 한 번 혹은 성도들이 원할 때 실시했고, 세례식은 순서 중에 기도와 설교가 포함되어 은혜롭게 행해졌다.

교회 행정은 목사, 장로, 집사의 세 직분에 의해 다스려졌다. 이 직분들은 매년 선거를 통해 주어졌다. 매주 목요일 세 직분자들은 함께 모여 교회 일을 의논하고 치리를 행했다. 치리는 개인적 권면, 공개석상의 꾸지람, 파문 등의 절차를 밟았다. 치리는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 부득이한 경우에만 실시했다.

낙스는 스코틀랜드의 개신교 상황을 돌아보기 위해 일 년 정도 그곳에 가 있다가 1556 9 13일 다시 제네바에 돌아왔다. 이번에는 영국에 있는 장모와 아내까지 데리고 왔다. 그는 가장으로서, 목회자로서 매우 바쁜 나날을 보냈다고 진술한다.
낙스는 4년 동안(155559) 이곳에서 영국인들을 돌보았다. 그런데 엘리자베스가 여왕으로 등극하면서 개신교에 대한 종교 탄압이 수그러져 제네바의 영국 피난민들이 속속 귀국하였기에 낙스도 새로운 일감을 찾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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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스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영국에 들아가 목회 사역과 궁중 목사직을 계속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미완성으로 남겨 둔 스코틀랜드 종교 개혁을 재추진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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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교롭게도 1558년은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가 즉위한 해였다. 여왕은 낙스로 인해 명예가 실추되었다. 칼빈도 낙스의 언어와 행동의 격렬함에 놀랐다. 낙스는나중에 엘리자베스를 여선지 드보라와 같다고 일컫고 그의 언어를 순화시켜 여왕의 분노를 누그러뜨렸다.

그러나 낙스가 영국에 오는 것을 반길 영향력 있는 왕실 인사는 없었다. 1559 5 2일 마침내 낙스는 하나님의 섭리가 스코틀랜드를 가리키고 있는 것을 확신하고! 하나님! 나에게 스코틀랜드를 주시든지 아니면 죽음을 주십시오라고 부르짖으면서 스코틀랜드로 돌아왔다. 이 길만이 그에게 주어진 것이다.

정리

낙스는 참으로 위대한 청교도였다. 1560년대 초에 청교도란 말은 성공회에 비타협적이란 뜻과 아울러까탈스럽고, 비판적이며, 기만적이고, 위선적인 작당이란 의미를 가진 부정적이고 냉소적인 것이었다. 아마 낙스의 삶과 사상은 이러한 개념 속에 들어갈 부분이 있을 것이다.

낙스는 스코틀랜드 섭정 여왕 기즈의 메리, 영국 여왕 메리 튜더와 엘리자베스 그리고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 스튜어트를 대할 때 잔혹하리만큼 냉정하고 까다롭게 굴었다. 연약한 여성들을 설득시키기보다는 그들의 약점을 드러내어 비판하고 정죄하였다.

어찌 보면 사내 대장부로서 옹졸하게 보여질 수도 있겠다. 낙스는 또한 많은 면에서 비타협적이었다. 그는 끝끝내 가톨릭과 성공회 제도를 따르지 않았다. 이 위에 낙스는 무엇을 해도 서둘러 했다. “스코틀랜드 신앙 고백서 4일 만에 완성하지 않았는가!

지금까지 분석한 낙스의 모습은 외형상으로 보면 모두 부정적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이것이 낙스의 진면목일까? 낙스가 수행한 모든 것들을 보다 심사 숙고해서 연구해 보면 낙스의 약점이 오히려 장점이 된다.
낙스는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민주주의 시대에 살았던 인물이 아니다. 그는 종교 전쟁으로 폭풍우 치는 긴박한 사태의 연속선 속에서 살았다. 그는 여성의 부드러운 목소리, 애교와 눈웃음을 즐길 수 없었다. 순간 순간이 그에게는 생사의 갈림길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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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스는 특별한 때에 특별히 쓰시는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일해야 했다. 16세기 스코틀랜드에는 유순하고 말이 없는 사람보다 낙스와 같이 강하고, 엄하고, 용기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영웅적이고 거센 사람, 그러면서도 하나님 한 분만 무서워하는 사람이 필요했다.

낙스는 하나님을 참으로 경외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진정으로 사랑했다. 이러한 사랑이 그의 심장에 있었기에 그는 지칠 줄 모르고 열정에 불타서 일했다. 낙스는 스코틀랜드 종교 개혁을 지하 운동으로부터 시작하였다. 만나는 사람마다 개혁을 설득시켜 자신의 동역자로 세워야 했다. 그는 차분히 합리적으로만 일할 수 없었다. 시민과 귀족들에게 헌신의 용기와 결단을 촉구할 때 그의 언어는 웅변적이 되었다. 지적이기보다 자주 감정적이 되었다는 말이다.
따라서 그의 행동 양식은 정적인 것보다 동적이었고, 또 이 동적인 행동 지침을 신약보다는 구약에서 많이 찾았다. 구약의 영웅들이 활동적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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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낙스를 평가할 때 그가 처했던 특수한 상황인 스코틀랜드 정치 및 종교 상황, 낙스의 신앙 및 교육 배경 그리고 그의 인간성을 주의 깊게 분석할 필요가 있겠다. 한마디로 낙스를 평하면, 그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모든 것을 드리고, 하나님 한 분만 두려워하며 살아간 위대한청교도의 창시자라 할 것이다.

 

존 밀턴:합리적 청교도

 

영국 청교도들은 대강 네 종류의 특징을 나타냈다.

첫째, 청교도이므로 모두 개신교도였다. 가톨릭이 아니라는 것이 이 말에 노골적으로 나타나 있다.

둘째, 청교도는 자신이 국교회에 속해 있건 아니건, 영국 국교회의 종교 개혁이 미흡하고 불완전하며 앞으로 계속 수정되어야 된다는 데 동일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셋째, 청교도는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고 평신도 지위 향상에 모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성경 해석과 성령 사역에 대해서는 다른 관점을 보였다.

넷째, 청교도는 훈련된 신앙 생활과 고도의 윤리 생활을 주장했다.

 

한편 청교도들의 신학과 삶을 분석해 보면 경건 양태에 따라 네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교리적 청교도들, 둘째는 복음적 청교도들, 셋째는 신비적 청교도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합리적 또는 인문주의적 청교도들이다.

 

생애-

 

밀턴은 1608 12 9일 런던에서 태어났다. 공증인과 사채업으로 상당한 재산을 가진 아버지와 자애로운 어머니 밑에서 밀턴은 유년기를 보냈다. 아버지는 국교도였고 상당한 수준의 작곡을 할 정도로 음악에 재질이 있었다. 성 바울 학교에서 밀턴은 라틴어, 히브리어, 헬라어를 공부했고, 근대어 같은 부분은 가정 교사로부터 보충 수업을 받았다.
그는 학문에 심취했고, 12세부터는 자정 전까지 책을 놓는 일이 없었다. 과도한 독서는 후일 실명의 원인이 되었다. 1626년 담임 교수와 충돌하여 1년 정학을 받은 일 외에는 큰 탈 없이 학문에 매진하여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크라이스 칼리지 문학사(1629), 문학 석사(1632) 학위를 취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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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턴은 학창 생활 7년 동안(162532) 라틴어로 운문을 쓰는 법과, 작품 속에서 자아를 표출하는 기술을 배웠다. 그의 첫 영시, “어떤 아기의 죽음에 대해”(On the Death of a fair Infant)는 엘리자베스 시대풍으로 1628년 쓰여졌다.
그가 21세의 생일 직후에 쓴그리스도 탄생의 아침에”(On the Morning of Christ’s Nativity)는 혈기 왕성한 젊은 밀턴을 가둬 두고 신앙적 시를 통해 영성의 승화를 시도한 것같이 보인다(1629). 이 작품과 1628년에 쓴방학에”(At a Vacation Exercise)에서 고전 문학과 르네상스 인문주의 그리고 기독교 사상에 두루 영향을 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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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밀턴은 부모의 권유에 따라 성직자의 길을 택할까 생각해 보았으나 1630년경 마음을 바꾸었다. 영국 국교회의 제도에 들어가는 것을 노예 생활로 생각했으며, 한편으로는 시에 대한 헌신 때문에 성직을 포기한 성 싶다.
6
(163238) 동안 밀턴은 호튼(Horton)에 머물렀다. 이 시기에 철학, 고전 문학, 역사, 수학 및 음악 등폭 넓은 교양 과목을 공부하였다. 자유 사상을 통해 점잖고 관대한 예술 세계를 접하려는 젊은 밀턴의 야심이 엿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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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2
년경 밀턴은 궁정 취향 가면극 아케이드(Arcades) 1634년 또 다른 가면극 코머스(Comus)를 썼다. 코머스는 밀턴의 선악 사상을 최초로 극화시킨 작품이다. 1637년 모친 사망 후 밀턴은 이탈리아를 방문하여 이탈리아 예술가들과 지식층 인사들로부터 정중한 환대를 받았다(1638
39).

나폴리에서 밀턴을 환영한 후작 만소(Giambattista Manso, Marquis of Villa)와 천문학자 갈릴레오와의 교분은 밀턴에게 자신감을 심어 주었다.
밀턴이 이탈리아 여행을 하고 있을 때 영국 정세는 불안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당시는 제임스 1세의 아들 찰스 1(재위 162549)가 국왕이었는데, 그는 왕권 신수설 이론으로 영국과 스코틀랜드를 통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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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1세는, 반칼빈주의자로 열열한 국교도인 윌리엄 로드(William Laud, 15731645)를 켄터베리 대감독으로 임명하여 비국교도들을 탄압하였다. 당시 의회는 비국교도인 청교도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왕과 의회는 자주 충돌했고, 왕은 청교도들의 간섭을 싫어하여 11년 동안(162940) 의회를 소집하지 않았다
.
찰스 1세는 스코틀랜드에도 국교회 의식을 사용하도록 명령하였다. 존 낙스 이래 장로교회 정치가 뿌리내려진 이곳 사람들은 찰스 1세의 강제 명령에 대항하여 영국을 공격하였다. 국왕은 군비 조달을 위해 할 수 없이 의회를 소집했고, 이 의회는 1640년에 시작하여 1660년에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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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질질 끈 영국 의회를 장기 의회라 부른다. 장기 의회 기간 중에 청교도들은 눈에 가시 같은 국교회 대감독 로드의 목을 요구했고(1645 1월 참수됨), 나중에는 왕정에 대항하여 청교도 혁명 전쟁으로 비화했으며(164249), 마지막으로는 올리버 크롬웰 장군에 의해 찰스 1세를 사형에 처하였다(1649 1).

밀턴은 국교회의 사치스러운 의식, 대감독 로드의 전횡 그리고 국교회와 영국 왕실과의 정치적 타협에 불만이었다. 그러나 이제 청교도 세력의 사회 참여로 그의 불만을 해소할 기회가 왔다. 이탈리아에서 돌아온(1639 7) 후 밀턴은 뜨거운 정열을 쏟으며 정치 세계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1641년에 쓴 소논문영국에 있어서의 개혁”(Of Reformation in England)에서 영국의 감독 제도와 주교들을 공격하였고, 1642년에 정리한감독제에 반대하는 이유”(The Reason of Church Government Urged against Prelaty)에서는 이상적 교회 정치는 감독제가 아니라 사도 시대같이 민주적 단순성과 순수성을 보유한 장로 제도라고 조리 있게 설명하였다.
1643
5월 밀턴은 연하인 메리 포웰(Mary Powell)과 결혼하였다. 그녀는 왕당파 지주의 딸이었으나 고등 교육을 받지 못한 무사 태평한 여자라고 밀턴은 후에 토로하였다. 33세의 대학자와 무학의 소녀와의 결혼이 평탄할 리 없었다. 결혼 직후 그녀는 친정으로 돌아가 3년 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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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턴은 3(164345)에 걸쳐 그의이혼론”(Doctrine and Discipline of Divorce)을 발표하였다. 부부간에 애정이 없는 경우에는 이혼이 필수불가결하다는 것이다. 결혼은 애정과 우정으로 맺어진 능동적 관계이기 때문에 당시 유일한 이혼 사유인 간통보다 애정 없는 것이 더 큰 이혼 사유라고 정의했다.

불행한 결혼은 1652년 포웰이 죽음으로 끝났다. 밀턴은 1656년에캐더린 우드코크와 두번째 결혼을 하였으나 그녀도 1658년에 출산 직후 사망하였다. 1663년 밀턴은 젊고 상냥한 민셜(Elizabeth Minshull)과 결혼하였다. 밀턴은 크롬웰의 공화정에 참여하여 정부 활동에 개입했으나 1660년 왕정이 복고되자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다. 그렇다고 그가 정치적 사상을 버린 것은 아니다. 앞으로 자세히 보겠지만 그의 대작품들인 실락원, 복락원, 투사 삼손은 모두 정치적 메시지로 가득찬 것임을 알아야 한다.
밀턴은 1652년 완전히 실명하여 육체적 고통을 받았고, 왕정 복고 후에는 정신적 고뇌의 시간을 보내기도 하였다. 이러한 환난과 역경은 그를 대서사시인으로 만들어 주었다
.

정리- 밀턴은, 인문주의적 틀 속에서 보면 지적, 종교적 자유를 주창한 뛰어난 사상가이다. 그는 인간의 덕, 이상, 자유 및 행복의 중요성을 웅장한 시로서 표현하였다. 그는 실락원, 복락원, 투사 삼손, 기독교 교리 그리고 여러 다른 글에서 인간의 고귀함을 증명하려 했다.

감정을 극복하는 인간 이성의 승리, 타락 이전으로 복귀한다는 굳건한 신앙 그리고 이것이 창조주의 뜻이라고 외치고 있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밀턴의 서사시들을 도덕적 행동 기반에 구축한 예술이라고 극찬한다. 그렇다. 밀턴의 사상은 한결같이 고결하고 장엄하다. 그의 글들은 시의 기교와 뛰어난 음악성으로 매력을 끈다. 영혼의 환희를 그의 글에서 맛볼 수 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밀턴의 사상은 성경을 떠나 너무나 합리적이라는 느낌을 떨칠 수 없다. 이성 우위의 신앙과 사조는 존 번연이나 토머스 아 켐피스, 더 올라가서는 사도 바울이나 예수님의 고동치는 사랑의 불길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

 

존 번연 : 청교도 순례자

 

성경 다음으로 가장 많이 읽혀지는 책 중의 하나가 존 번연(John Bunyan, 162888)의 천로 역정이다. 번연은 이 책에서 가장 평범하고 소박하면서도 적나라하게 우리 인간의 영성 체험을 제시한다.

그가 사용한 언어는 엄청난 사유를 요구하는 철학 용어나 과학 용어가 아니다. 번연은 주위에서 흔히 보고, 느낄 수 있는 일상 생활 언어를 꾸밈 없이 우리에게 제시한다.

그러나 이 언어 속에는 다이너마이트와 같은 역동적 힘이 있다. 참된 신자의 영혼 속에 부각되는 상승된 영적 희열이 있고, 왜곡된 믿음을 가진 위선자들에 대한 풍자적 책망이 있으며, 무엇보다도 진리를 위해 살아가려는 모든 이들에게 주는 위로와 격려가 있다.

번연을 연구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 그는 세계의 고전으로 널리 인정된 천로 역정의 저자이기 때문에 우리의 관심을 끈다. 또한 그의 작품이 주는 영향력을 바로 알기 위해 우리는 그를 연구해야 한다.

존 번연의 생애

존 번연은 1628 11월 영국의 농경 지대 베드퍼드(Bedford) 근교인 엘스토(Elstow)에서 태어났다. 성인이 되었을 때그는 외모상 키가 크고 뼈대가 튼튼한 사람이었지만 살은 찌지 않았고, 반짝거리는 눈에 비교적 좋은 혈색을 하고 있었다.
또한 고대 영국의 유행을 좇아 윗입술 부분까지 그의 머리를 늘어뜨렸다. 그의 머리는 불그스레한 갈색이었는데, 생애 후반기에는 나이가 들어 회색으로 변했다. 그의 코는 잘생겼으며 구부러지거나 비뚤어지지 않았고 입은 좀 컸으며 앞이마는 약간 넓었다
.”

번연의 아버지 토머스 번연은 떠돌이 땜장이여서 자녀들에게 충분한 교육을 시킬 능력이 없었다. 번연은 겨우 읽고 쓰는 것을 문법 학교에서 배운 후 일찍 아버지의 직업을 전수받았다.
번연은 소년 시절을 엘스토 농경지 소작농의 아이들과 어울리며 보냈다. 그는 감수성이 뛰어났으며 비록 정규 대학 공부를 하지는 못했지만 독서열이 대단하였다
.

번연은 케임브리지 근처 스타워브리지(Stourbridge) 시장에서 파는 싸구려 책들을 닥치는 대로 구해 읽었다. 햄프턴의 베비스(Bevis of Hampton)나 그리스도교의 7용사 같은 모험담이 주제가 된 책들을 통해 번연은 풍부한 상상력을 길렀다.
이 외에도 번연은 엘리자베스여왕 시대에 목판본으로 출판된 존 폭스의 순교자 열전(Book of Martyrs), 쉬운 말로 된 설교집, 일상의 도덕적인 대화록, 하나님께 나아가는감상적인 판단과 행위를 다루는 책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흠정역 성경을 탐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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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다양한 책들에서 번연은 영웅 심리, 인문주의적 로맨스 그리고 영국 민담과 전승이 주는 시민의 일상 생활을 접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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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4 11월 우리는 번연이 뉴포트 파그넬(Newport Pagnell) 의회군 수비대의 보충병으로 일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의회군은 청교도 지도자 크롬웰을 중심으로 영국 왕 찰스 1세에 대항하고 있었다. 쉽게 말하자면, 번연은 가정을 떠나 내란의 한 귀퉁이에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하위직 보충병의 지위에 있었던 번연에게 어떤 특별한임무가 부여된 것 같지는 않다. 번연은 1647 7월까지 의회군에 있었으나 오직 한번 레스터셔 포위 공격 중 옆에 있던 동료가 총에 맞는 사건을 제외하곤 위험한 일을 당하지 않았다.
3
년의 군복무 중에 번연은 다양한 분파의 청교도 교리를 접할 수 있었고, 크롬웰의 신형군(New Model Army)이 가진 경건한 신앙 생활에서 큰 감명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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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 후 번연은 마리아라고 하는 매우 경건한 여성과 결혼했다(1649). 그녀는 결혼 혼수감으로 접시나 숟가락 같은 가정 용품 대신 번연에게 큰 영향을 줄 두 권의 책을 가져왔다.
한 권은 아더 덴트(Arthur Dent)의 평범한 사람이 하늘에 이르는 좁은 길(The Plain Man’s Pathway to Heaven)이었고, 또 한 권은 루이스 베일리(Lewis Bayly)의 경건의 훈련(The Practice of Piety)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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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연은 덴트의 글에서 쉽고 친숙한 격언을 가지고도 통렬한 표현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또한 덴트와 베일리가 사용한 대화 형식의 글들이 아름다우나 예리하게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도 알게 되었다. 번연이 천로 역정이나 다른 글에서 왜 대화체를 애용하게 되었는가를 여기에서 짐작할 수 있겠다.

마리아와의 결혼은 번연에게 영적 성장을 가져왔다. 마리아는 거친 남성인 번연을 조용한 인내와 섬김으로 품었다. 번연에게 말싸움을 걸기보다는 우회적인 방법으로 약점을 스스로 깨닫게 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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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연의 신앙 성장은 결혼 후 약 5년 동안(165055) 점진적으로 이루어졌다. 즐기던 춤, 종치기, 운동 경기와 같은 오락들을 서서히 포기하였다. 루터의 갈라디아서 강해도 이 시기에 읽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이 죽고 사망 권세의 두려움에서 빠져 나오는 비밀도 깨닫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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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연의 일생에 금을 그을 중요한 영적 선생인 존 기퍼드(John Gifford) 목사도 이때 알게 되었다. 기퍼드는 의사였고, 한때 왕당파 군의 소령이었다가 1650년 개종하여 침례교 목사가 되었다.

기퍼드는 번연에게 성경 말씀에 기초하여 구원의 확신을 심어 주었다. 칭의는 그리스도를 단순히 믿음으로 얻어지는 것이며 그리스도 밖에서 어떤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기퍼드의 성경 강해로 인해 번연은 광명의 길로 들어섰다.
1653
년 번연은 기퍼드의 성 요한 교회에 정규 회원으로 가입했다. 1655년 번연은 엘스토에서 베드퍼드로 이주했고 평신도 설교자로 봉사했다. 이때 건강이 나빴던 마리아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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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퍼드가 죽은 후 번연은 더 한층 설교할 기회가 많아졌다. 그러나 1660년 찰스 2세의 왕정 복고로 청교도 전성 시대가 끝나 가고 있었다. 찰스는 성공회를 영국의 유일한 교회로 복귀시키고 비국교도 성직자들을 교회에서 축출하였다. 크롬웰 치세에 사용했던 베드퍼드 성 요한 침례 교회는 다시 성공회의 교회가 되었다.

번연같이 비국교도이고 아울러 성직을 받지 못한 자로서 설교한다는 것은 국법을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 되었다. 설교 금지령을 위반한 번연은 12년 동안(166072) 감옥에서 지내야 했다.

감옥에 들어가기 1년 전 번연은 엘리자베스를 새 아내로 맞이했다.엘리자베스는 총명하고 용기 있는여성이었으며 번연을 구하기 위해 수차례에 걸쳐 항소하였다. 그녀의 항소는 묵살되었다.

번연의 오랜 수감 생활은 상당히 자유스러운 것이었으며 때로는 밖으로 가족이나 친구를 만나러 나갈 수도 있었다. 1672 3월 찰스 2세는 비국교도들에 대한 종교 관용을 선포하였다. 동년 5월 번연은 석방되었다. 출감 즉시 번연은 베드퍼드의 비국교도 침례교회 목사로 임직되었다.

1676년 다시 비국교도 박해가 시작되어 번연은 6개월 간 짧은 투옥을 당하는데, 이때 천로 역정 전반부를 쓴 것으로 생각되고, 후반부는 1684년에 완성하였다. 천로 역정에버금가는 대작 거룩한 전쟁은 1682년에 썼다. 번연의 천로 역정은 베스트 셀러가 되었고, 이것 때문에 그의 유명세는 높아만 갔다. 영국 왕 제임스 2세는 번연을 비국교도 진영에서 빼내려고 관직을 제의하는 등 여러 모양의 회유를 시도했으나 번연의 지혜로운 저항으로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번연은 유명해졌지만 끝까지 신앙의 지조를 지켰다. 1688 8 31일 번연은 재산 상속 관계 때문에 생긴 어떤 부자간의 갈등을 화해시키러 런던에 갔다가 심한 비를 맞고 열병으로 사망하였다.

정리

존 번연은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매우 어려운 시기에 살았다. 크롬웰의 공화정은 그의 생전에 붕괴되었고, 한때 자유스럽게 예배드렸던 청교도 공동체는 1660년 이후 다시 탄압을 받았다. 청교도들은 크롬웰 치세 때에 부여된 종교의 자유를 지혜롭게 사용하지 못하고 분열과 싸움으로 스스로를 약화시켰다.
존 번연은 칼빈주의자들이 연합하지 못하고 서로 중상 모략, 탄핵하는 데 몹시 실망하였다. 그러나 그의 사회 교육 배경은 그로 하여금 청교도 전반에 걸친 문제들을 집중적으로 토론하고 개혁할 수 있는 입장으로 만들어 주지 못했다. 그는 심지어 동료인 침례교도들로부터도 질시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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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로 번연은 그 시대에 정치적으로 영향을 줄 수 있는 위치에 있지 못했다. 그렇다고 그가 연합이나 화합을 전혀 시도하지 않았다는 말은 아니다. 우리가 살펴본 대로 번연은 특별한 교리 문제(예를 들면 퀘이커파의 신비주의)를 제외하고는 항상 대화의 창을 열어 놓고 있었다. 다만 이러한 그의 신학 사상을 당시 종교계에서 충분히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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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시대적 한계 가운데 살았던 번연은 다른 의미에서 참으로 중요한 인물이다. 불후의 명작 천로 역정과 거룩한 전쟁 등을 통해 그는 기독교를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보편 종교로 만들었다.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히는 천로 역정을 통해 그는 영국과 전세계에 기독교 윤리관, 문화관, 특히 구원관을 천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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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바울, 어거스틴, 루터, 칼빈의 어려운 신학 사상을 그는 가장 평범하고 쉬운 일상 언어로 전세계인의 마음 가운데 심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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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연은 열병으로 죽어 런던의 비국교도의 묘소인 번힐 필즈(Bunhill Fields)에 묻혀 있지만, 지금도 책을 통해 우리에게 하늘 나라 가는 비밀을 말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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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휫필드: 복음주의적 연합운동

요한 웨슬리의 동생이며, 동역자인 나 찰스 웨슬리는 주 안에서 사랑하는 나의 귀한 친구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를 주님의 곁으로 보내면서, 그를 위해 537행의시로 내 마음을 달래면서도 이렇게 다시 그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옥스퍼드 대학에서 그를 처음 만났을 때, 진리를 찾아 학문의 숲에서 배회하던 휫필드는 생각에 잠긴 듯한 겸손한 청년이었고, 내 눈에는 가식도 슬책도 없는 이스라엘 사람이요, 천사와도 같이 비쳤다.

주님을 구주로 영접하기 전, 우리는 함께 열성을 다해 종교적인 선을 진지하게 추구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각기 우리의 열심으로 그분께 도달할 수 없음을 알게 되었고, 스무 살(1735) 때 그가 우리 형제보다 먼저 회심하여 구원받게 되었다.

잃어버린 양들을 찾아 길과 산기슭으로 가서 강권하여 설교를 한다는 것과 목회의 길에 들어선다는 것에 대해 그가 얼마나 깊이 염려했는지는 하나님만이 아실 것이다. 목회는 한 직업으로서의 일이 아니기에 하나님의 분명한 부르심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으로 하여금 그분의 교회를 이끌도록 하지 말아 주실 것을 수도 없이 기도했다.

"주님, 저는 갈 수 없습니다. 나는 교만에 들뜰 것이고, 마귀의 올무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옥스퍼드를 떠나 있던 그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은 너무나 분명했다. 그가 목자로서 글로스터에서 설교하기 시작한 후, 그에게는 설교해 달라는 초청이 여러 곳으로부터 쇄도했고, 초청받는 곳곳에서 그는 거듭남의 교리를 전파하기 시작했다.
교회에 모인 사람들의 수가 너무 많아 어떤 이들은 높은 오르간 난간에 매달려서, 교회의 함석 지붕으로 기어올라 가서까지 그의 설교를 듣고자 했다. 교회 전체가 사람들이 내뿜는 숨결로 후끈 달아 올라 기둥들에서 마치 빗방울이 떨어지듯 물방울이 맺혀서 떨어졌다.설교자가 설교단으로 걸어나가기 힘들 정도로 운집한 사람들 사이에서, 그는 하나님을 대신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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휫필드가 세례받은 신자들에게까지 거듭남이 필요하다고 설교했기 때문에, 다수의 교회들은 자존심이 상했으며 분개하기 시작했다. 결국 조지아에서 돌아온 휫필드는 교회들에서 거부당하고 밀려냄을 당했다.

현실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당시 교회 건물 안에서만 전해지던 하나님의 말씀을 접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들을 찾아나서지 않고 있었을 때, 그들을 위해 휫필드는 창조적인 방식, 배척과 비난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던 야외 설교의 방식을 택하게 되었다. 그는 먼저 일생에 한 번도 교회에 가본 적이 없는 광부들에게로 갔다. 브리스톨 부근의 킹스우드(Kingswood)의 한 얕은 언덕 위에 휫필드가 섰을 때, 그의 주위에는 새까만 얼굴의 광부들이 모여들었다.

"하나님의 아들이 죽었습니다. 바로 죄인들의 친구였으며, 나와 여러분 같은 죄인들을 회개시키려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와 여러분을 대신해 죽으셨습니다..."

그 언덕에 서서 목청이 터져라 외치는 그의 설교를 듣던 그들의 새까만 두 볼에는 어느 새 회개의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말씀을 전할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모였고, 밝게 빛나는 태양 아래 나무와 울타리에도 사람들이 가득 올라서서 뇌성과도 같이 또렷하고 분명하게 전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회심하고, 변화되기 시작했다. 그것을 시작으로 런던, 무어필드, 케닝톤 등 영국 각 지방과 새로운 개척지 미국의 구석구석에 이르기까지, 그는 그의 목자를 대신해서 잃어버린 양들을 찾아다녔다.그 길이 광야든, 험한 바다이든 가리지 않았으며, 그저 안락한 곳에 앉아서 태만하게 죄인들이 자신을 찾아오기를 기다리고만 있지 않았다. 그는 그렇게 34년 동안 18,000회의 공중집회를 이끌었다.

'이 세대의 자칭 의인들이 그들 자신을 무가치한 자로 간주하기에, 나는 길과 산기슭으로 나가 창녀와 세리와 죄인들을 강권하여 내 주님의 집이 채워지게 했다."

휫필드라는 이름은 사라지게 하고,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으시게 하라

설교자로서의 휫필드는 그가 원하기만 했다면 거의 무한정의 "인기"를 그대로 유지할 수도 있었다. 청중들의 환호와 호의와 박수갈채는 갈수록 커졌으며, 심지어 그를 천사로까지 불렀다. 그러나 그 가운데 있으면서 휫필드는 자신을 파멸시킬 용광로의 뜨거운 불 사이로 걷는 자처럼 두렵고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의 도우심을 간구했다. 그분의 칭찬 외에는 모든 천사가 헛된 것임을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우리 웨슬리 형제들도 설교자로서 동일한 유혹과 죄의 공격을 받아 왔기에, 설교자로서의 사역이 기쁨과 동시에 더욱 큰 영적 싸움임을 잘 알고 있다.

"나는 내 자리를 안다."고 말했던휫필드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소망을 전했다. "나는 내 명성을 깨끗하게 지워 버릴 심판날이 올 때까지 만족하며 기다린다. 그리고 내가 죽은 뒤 묘비에는 '여기 G.W. 눕다.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위대한 심판날이 밝혀 줄 것이다.'라는 말 외에는 쓰지 말라."

모든 사람의 종으로 있게 하라

휫필드는 복음으로 다양한 사람들을 섬겼다. 킹스우드의 광부들, 더머(Dummer)에서 만났던 가난하고 무지한 사람들, 미국의 흑인 노예들, 미국의 프랭클린이나 벨쳐, 영국의 볼링브로크나 체스터필드, 그리고 학식있고 위엄 있는 일단의 귀족들까지...
그 섬김은 사람들의 환호 속에서뿐만 아니라 폭도들의 생명의 위협과 폭력 속에서도 줄어들거나 위축되지 않았다. 사실 그러한 위협들은 신앙 부흥이 일어나고 있던 기간 내내 휫필드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우리(웨슬리)의 사람들, 해리스의 인도 아래 있던 사람들과 모라비안들도 감당해야 했던 수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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휫필드는 무엇보다 그리스도의 ""으로 남으려 했다. 누군가는 엄청난 액수의 생활비를 주겠다고도 제안했으나, 그는 영광 중에 안식하기까지는 안식할 생각이 없었다. "이생에서 나는 영원한 갈등과 고난을 찾을 뿐이며, 내가 영원 세상의 이편에 있는 동안 십자가 외의 다른 어떤 평화도 소망하지 않는다."

그는 아무도 속박하려 하지 않았으며, 교단을 결성하지도 않았다. 그의 추종자들은 끝까지 그를 그 단체의 우두머리가 되게 하려 했지만, 그는 자유롭게 복음을 전파하는 일꾼으로 남고자 했고, 그리스도로 인하여 "모든 사람의 종"이 되고자 했다.
주님의 일에 지쳐 있기는 하지만 싫증을 느끼지는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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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사랑하는 친구 휫필드는 1770 9 29일 주일, 북 아메리카 뉴베리 포트에서 55살의 아까운 나이에 갑자기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그는 여려 해를 계속해서 보통 40시간, 곧잘 한 주에 60시간 씩, 수천 명의 청중들에게 설교했다. 30여 년 동안 조금도 쉬지 않고 그토록 무거운 짐을 졌던 그였다.

무례하게 구는 사람들의 반대를 이겨내야 하고, 모든 청중들의 주의를 집중시키며, 바람불고 비오는 험악한 날씨에도 한두 시간씩 설교를 강행했던 그는 늘 피곤과 싸워 이겨야 했다. 미국 남부의 더운 날씨에서의 어려움은 말할 것도 없었다. 때때로 그는 더위와 피로로 거의 죽을 지경에까지 이르기도 했다. 그러나 복음을 선포할 책임에 직면해야 한다는 사실이 그를 소생시키곤 했다. 격심한 정신적, 육체적 활동의 시간이 되면, 그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건해지곤 했다. "나는 조금씩 자고 조금씩 먹었으며, 아침부터 한밤중까지 일했다."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니는 데 걸린 시간과 중간중간에 잠간씩 휴식을 취하거나 그 다음 일정을 준비하는 데 걸린 시간을 제한다면, 그의 전생애는 계속 이어지는, 거의 중단없이 설교로 소진된 삶이었다. 휫필드는 그의 생애 동안 미국을 일곱번 방문했고, 스코틀랜드에 열 다섯 번, 아일랜드에 두 번, 지브롤터와 버뮤다와 네덜란드에 각각 한 번씩 갔다. 더욱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캐나다와 서인도 제도에까지 가려고 시도하기도 했다.

교회들의 신앙은 퇴색해 가고, 교회 안에는 형식적인 신자들 투성이었다. 아무도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는 거의 관심조차 두지 않고 있었다. 그런 현실 속에서 우리들은 주님대신 잃어버린 자들을 찾아 들로 산으로 나선 것이었다.
잃어버린 바 된 많은 사람들을 염두에 두라. 그들의 눈이 감겨진 채로, 그들의 귀는 거짓말에 속은 채로, 그들의 양심은 부패하고 더러워져 모든 감각을 상실한 채로 하나님으로부터 멀리멀리 떠나 있다. 누군가가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고, 자신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조차 모르는 불쌍하고 가련한 그들의 양심에 하나님의 말씀이 울리도록 해야 하지 않겠는가
?
진리를 붙들지 못하고 영적으로 시들어 버린 차지도 덥지도 않은 교회들을 염두에 두라. 주님의 편에서는 그들의 영적인 잠을 깨워 진리에 바로 설 수 있도록 그들에게 도전을 줄 자들이 이 시대에도 지속적으로 절실히 필요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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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스펄젼: 마지막 청교도

 

1834 6 19, 사도 바울에 버금가는 위대한 설교자가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 제임스 스펄젼은 54년 간(1804-58) 영국 스탬본에서 목회를 했다. 스펄젼의부모님은 스펄젼의 할아버지가 일하셨던 콜체스터로 이사해 톨스버리에 위치한 독립 교회에서 사역했다. 스펄젼은 어린 시절(1835-41) 할아버지와 함께 살았다. 1849년 그는 뉴마켓에 있는 침례교 학교를 다녔다.
모든 기독교적인 배경에도 불구하고 어린 스펄젼은 복음의 진리를 깨닫지 못했다. 그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방법을 찾을 때까지 도시에 있는 모든 교회를 방문할 것을 다짐했다. 6개월 간 그가 할 수 있는 한 모든 교회를 방문하고 난 뒤 스펄젼은 거의 좌절하고 말았다. 설교자인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있었지만 그들은 복음을 전해주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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춥고 눈 오느 1850 1 6일 아침이었다. 스펄젼은 내리는 눈처럼 차갑게 얼어붙은 마음을 안고 터벅 터벅 걷고 있었다. 목적지까지 가려면 아직 더 가야하는데 갑작스레 눈보라가 쳐 피할 곳을 찾다가 전에 있었는지조차 몰랐던 한 교회를 만났다. 알티머리 스트릿 초대 감리교회였다. 스펄젼은 감리교도들은 머리가 아플 정도로 크게 찬송한다는 그들의 명성을 들었기에 약간 망설이면서 안으로 들어갔다.

키가 크고 마른 남자가 앞으로 나가서는 오늘 날씨 관계로 목사님께서 늦으시는 것같아 자신이 대신설교하겠다며 즉시 이사야 45:22을 본문으로 설교하기 시작했다. "땅 끝에 있는 모든 자들아, 나를 쳐다보고 구원을 받으라. 이는 내가 하나님이요, 다른 이가 없음이라." 어린 스펄젼에게 이 말씀은 너무도 놀랍게 다가왔다. 그 사람은 계속 말했다. "쳐다보라! 단지 쳐다보기만 하라!" 스펄젼은 왜 전에는 이런 사실을 알지 못했는지 놀랍기만 했다. "나를 쳐다보라. 나는 피를 흘렸고 나는 십자가에 매달렸느니라." 그는 스펄젼에게 이렇게 말했다. "젊은이! 자네는 지금 참 비참해 보이는군... 젊은이, 예수 그리스도를 쳐다보기만 하라구. 단지 쳐다보기만 하란 말일세."라고 말했다.

스펄젼은 그때 15살이었고 후에 이렇게 간증했다. "나는 구원받는 방법을 단번에 보았다. 어두움은 물러갔고 나는 태양을 본 것이다. 나는 앉은 자리에서 봄이 온 것처럼 포근함을 느꼈고, 이 감리교 형제들과 함께 흥분하여 소리치고 싶었다. "나는 용서 받았다." 그때 그 설교자가 누구였는지 지금까지 알려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최선을 다해 자신의 의무를 다한 그 사람은 분명 하늘나라 어딘가에서 밝게 빛나는 별처럼 반짝이고 있을 것이다. , 그리스도를 위해 어떤 일을 하고자 소망해야 하는가요?" 이렇게 스펄젼은 어머니께 편지를 썼다. 한 주도 안되어 그는 그리스도를 위한 '어떤 일'을 찾았다. 그는 사람들에게 전도지를 나누어 주었다.

그는 1851 5 3일 캔트로우 목사에게 침례받았다. 그는 캠브리지에 있는 침례교회에서 목회자가 아닌 성도들이 설교하는 모임에 참석했다. 그는 그 교회의 주일학교에서 가르치기 시작했고 작은 기도모임을 인도했다. 그는 첫 번째 설교를 캠브리지 근처 테버샴이라는 동네의 오두막에서 베드로전서 1:7 말씀을 본문으로 했다. 진지하고 실제적이며 정직한 설교였다. 스펄젼은 자신이 맡은 예배를 인도하기 위해서 종종 16km 이상을 걸어가야 했다.

하나님께서 스펄젼에게 주신 은사는 분명하게 드러났고 "소년 설교자"에 대한 명성은 빠르게 퍼져 나갔다. 방과 후 저녁 때마다 스펄젼은 캠브리지 근처의 교회와 오두막 그리고 야외까지 가능한 한 모든 곳에서 설교했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로 성도들을 말씀으로 양육했고 설교했다. 그의 설교는 너무 뛰어나서 누가 들어도 명백히 하늘로부터 온 것임을 알 수 있었다. 22살에 그는 당대의 가장 유명한 설교자가 되었다. 런던에 메트로폴리탄 예배당을 세웠다. 5,5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중앙 강당과 두 개의 갤러리가 있는 엄청나게 큰 건물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청중에 비하면 큰 것이 아니었다.
그가 여행할 때조차도 그의 설교를 들으려고 10,000명의 청중들이 모여들었다. 그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침례인 요한에게 모여들었던 것처럼 모여들었다. 선지자 엘리야에게 있었던 것처럼 그에게도 하나님의 불이 있었던 것이다. 그의 교회에서는 왕족도 종처럼 앉아서 설교를 들어야 했다. 택시 운전사들은 그에게 요금을 받지 않았다. "설교의 왕자"를 차에 태운 것만으로도 영광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빵을 만들고 있는 여인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생명의 빵을 만들려고 시도해 본 적은 없습니까?" 목수들에게는 "모래 위에 성을 쌓으려고 한 적은 없습니까?"라고 묻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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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펄젼은 메트로폴리탄 예배당에서 그가 죽을 때까지(1892) 주께서 주신 위대한 능력과 설교로 목회를 했다. 한 미국인 방문자에게 스펄젼의 설교를 듣고한 후 그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하게 되었느냐는 질문에 그는 "사실대로 말하자면, 그의 설교를 듣고나면 저는 스펄젼이 아닌 그리스도를 생각하게 됩니다."라고 대답했다. 스펄젼은 적합한 묘사와 시기 적절한 말을 도구로 설교할 때 마치 한 편의 그림을 그려서 주듯 듣는 자들에게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어린 양"을 그대로 제시했다.
1864
년 스펄젼은 그가 구원받았던 그 교회를 다시 방문해서 이사야 45:22을 본문으로 다시 설교했다. 자신이 앉았던 그 자리를 가리키며이렇게 말했다. "제가 바로 저 자리에 앉아있었습니다. 그 자리가 모든 것을 시작할 수 있게 했던 곳이었습니다." 그는 설교뿐만 아니라 기도에도 탁월한 은사가 있었다. 5,000명의 회원들의 이름을 다 알 만큼 스펄젼에게 있어 그들은 소중하고 의미있는 사람들이었다
.

목회뿐만 아니라 설교하는 일과 주간 설교지를 발행하는 일과 900명의 학생들이 있는 목회자 학교를운영하는 일 등 그는 주 안에서 이 모든 일들을 감당했다. 그는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인기를 얻기 위해서 설교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오직 마귀만을 탄핵해야 하며, 오직 그리스도만을 높여야 합니다." 스펄젼은 사람들에게 단지 인기있는 설교자로 남는 것을원치 않았다. 1867년에는 500명의 고아들을 수용할 수 있는 고아원을 세웠다.
스펄젼이 무디에게 메트로폴리탄에 와서 설교해 줄 것을 부탁했을 때 무디는 "저를 초대해 주셔서 영광입니다. 그러나 당신의 설교에도 하나님께로 돌이키지 않는다면 설령 죽은 자가 부활한다고 하여도 사람들은 하나님께로 돌이키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하며 초대를 거절했다
.

스펄젼은 1891 6 7일 메트로폴리탄 예배당에서 자신의 5,311명의 회원들과 친구들에게 마지막 설교를 했다. "당신이 만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었다면, 당신은 그분안에서 당신의 혼이 편히 쉴 만큼 그분은 온유하며 겸손하신 분임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분처럼 관대한 지도자는 없습니다. 그분과 같은 통치자를 저는 만나본 적이 없습니다. 그분은 영적 전쟁 중 가장 어려운 상황에 항상 함께 계십니다. 찬 바람이 불 때면 그분은 항상 언덕 위의 바람맞이로 서 계십니다. 십자가의 가장 무서운 부분은 항상 그분의 어깨 위에 놓여 있습니다. 그분이 만일 우리에게 짐을 지운다면 그분 역시 그 짐을 함께 지고 계십니다. 사랑 안에 품위 있고 관대하며 친절하고 부드럽고 풍부한 무엇을 보았다면 당신은 언제나 그것을 그분 안에서만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40년 이상 저는 그분을 섬겼습니다. 그분으로부터 온 사랑 이 외에는 전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분의 군대에는 생명과 평화와 기쁨이 있습니다. 지금 당장 당신이 입대하시길 바랍니다.하나님께서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로 입대하는 것을 도우시기 바랍니다!"

스펄젼은 1892 1 31, 주일 저녁 11 5분에 주님께로 갔다. 장례식은 2 7일부터 11일까지 대략 100,000명 이상의 사람들이 참석한 가운데 메트로폴리탄 예배당에서 치뤄졌다. 스펄젼이 설교할 때 쓰던 성경은 그의 관 위에 이사야 45:22 말씀이 펼쳐진 채 놓여 있었다. 스펄젼은 결코 사람에 의해서 부름받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그를 설교하도록 부르셨다. 그는 설교자들을 위하여 목회자 학교를 세웠고 고아들을 위하여 고아원을 세웠다. 그리고 온 세상의 수많은 죄인들을 위해서 많은 글을 썼다.
그는 당시 국가의 소리였다. 그래서 도덕, 종교, 혹은 가난한 자에게 영향을 미치는 모든 국가의 문제는 그의 판단과 조언을 받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도 영혼에 대한 그의 열정에 비길 수는 없었다. 그의 모든 설교에서 독자들은 그것을 느낄 수 있다. 스펄젼은 수천 편의 시, 소책자, 노래와 설교와 주석서를 발표했다. 복음이 전해지는 한, 죄인들에게 보내는 그의 메시지는 생생하게 살아 울려퍼질 것이다
.

 

결론

 

많은 인물들이 가졌던 사상과 인생의 경험은 지금 시대에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부끄럽게 할뿐만이 아니라 도전이 되게한다.
본인은 이책을 접하면서 인물들을 상상 하는것 만으로도 큰 은혜가 되었으며, 하나님과의 교재를 통해 확실한 사상과 목표를 발견 할수 있었다.

 

 

[출처] http://blog.naver.com/orangkr/70130057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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