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교도
청교도사 / 김영익 교수
◈ 목 차 ◈
제1장 청교도 /4
1. 청교도란? /4
2. 청교도의 유래 /5
3. 청교 주의의 기원 /7
4. 청교도의 활동 /10
제2장 청교도 혁명 /14
1. 청교도혁명의 배경 /14
2. 청교도혁명의 시작 /16
3. 청교도혁명의 결과 /18
제3장 청교도운동의 전개 /19
1. 영국 청교도 운동의 전개 /19
2. 청교도주의의 문학 /22
3. 미국에 끼친 청교도주의의 영향 /23
제4장 청교도의 이주 /25
1. 청교도의 신대륙 이주 /25
2. 신대륙의 영국 식민지 /30
3. 분리주의자와 비분리주의자 /31
4. 뉴네델란드와 메릴랜드 /32
5. 청교도 정신과 프론티어 /34
제5장 청교도의 신앙과 사상과 삶 /36
1. 청교도들의 사상 /36
2. 청교도 운동의 7대 기준 /36
3. 청교도들의 삶 /37
4. 청교도들의 신학 /44
5. 미국 청교도주의의 성격 /55
6. 청교도들의 사회활동 /62
7. 청교도들의 가정과 교육 /68
제6장 청교도들의 설교 /77
1. 청교도의 목사 상 /77
2. 청교도의 유명 설교자들 /78
3. 청교도 설교자들의 설교 특징 /79
제7장 청교도 인물사 /90
A. 전기 퓨리탄 /93
1. 존 낙스 /93
B. 초기 퓨리탄 /109
2. 에드워드 데링 /109
3. 존 도트 /112
4. 위리엄 퍼킨스 /115
5. 존 로저스 /119
6. 리차드 십스 /120
C. 절정기 퓨리탄 /122
7. 존 밀턴 /122
8. 존 번연 /125
9. 존 오웬 /128
D. 후기 퓨리탄 /130
10. 요한 웨슬레 /130
11. 조지 휘트필드 /132
12. 챨스 스펄젼 /134
E. 미국의 퓨리탄 /137
13. 토마스 쉐퍼드 /137
14. 조나단 에드워드 /140
淸敎徒史
제1장 청교도(Puritans)
1. 청교도(Puritans)란?
청교도들(Puritans)은 누구인가? 한 작가는 그들을 이렇게 묘사했다: “영국교회와 영국사회에서 보다 경건하고 철저한 개혁을 위하여 일어난 한 운동으로, 이것은 기본적으로 1560년에 시작했으며, 짧은 시기 즉 1640년대와 1650년대에 성공적이었다.”
청교도란 16세기 후반, 영국에서 일어난 프로테스탄트의 한 부류이다. 이들은 가톨릭적인 영국 국교회 즉 성공회에 반항하여 칼빈이즘을 모범으로 하여 태동된 하나의 신앙운동의 부류이다.
이들은 모든 오락을 죄악시하였으며 화미(華美), 호사(豪奢)를 물리치고 성직자의 권위를 배격하며, 승속(僧俗)을 구별하지 않고 청정(淸淨)한 생활을 강령으로 하고 있다.
청교도(Puritan)라는 별명은 1564년경에 붙여진 명칭으로 '통일령'(the Act of Uniformity, 1559년)에 규정된 것보다 더욱 급진적으로 교회의 예배와 질서를 개혁하기를 원했던 영국 국교회(the Church of England)의 회원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청교도들은 전해진 바에 의하면 미신적인 의식들과 천주교의 관구 조직을 타파하고 성직자들의 동등성을 주장하고 편협적인 징계에 대항하며 보다 더 나은 설교와 목회를 위해 능력을 받는 것을 위해 진력했다.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의 청교도들은 분리주의자(分離主義者)가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의 분리주의자들은 청교도로 불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17세기에 청교도란 이름은 포괄적으로 확대되어 사용되었는데, 칼빈주의 신조를 고수하고 진지한 경건 생활을 실천하는 감독 교회 교인, 장로교회 교인, 독립 교회 교인들 모두에게 대해 사용되었다. 보다 더 넓은 의미에 있어서 청교도주의는 검소하면서도 부유한 문화와, 고상한 전통적 도덕과, 목회 신학으로 발전하였는데, 이것은 영국에서와 뉴잉글랜드에서 18세기의 복음주의를 고취시켰다.
청교도 신학은 개혁주의 신학을 특색으로 하고 있으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the Westminster Confession)을 증거하고 있다. 두 가지의 뚜렷한 특징은 성령의 사역을 세밀하게 취급하였다는 것과 일요일에 대한 개념을 그리스도의 안식일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2. 청교도의 유래
(1) 종교개혁
사실 청교도주의 실마리가 된 것은 종교개혁과 일련의 사건들로 시작된다. 종교개혁의 직접적인 배경이라 할 수 있는 여러 해 동안의 교회의 악습, 특히 날로 증대해 가는 세입을 위한 온갖 십일조, 요금, 벌금 등의 부과는 그것의 원인이 될 수 있었다. 한 편, 독일에서는 농노제도가 아직도 존재하였으며 완전하게 지방분권화 된 정부들은 널리 퍼진 농민의 고통을 완화하는데 거의 도움이 되지 못했다.
또한 르네상스 시대의 교황들은 예술의 아낌없는 후원자들로 후원금을 대기 위해 계속해서 추가 세입을 거둬들였고, 특히 교회 당국의 노골적인 면죄부 판매는 루터로 하여금 개혁의 의지를 일으키게 한 가장 큰 원인이었다. 그의 태도는 이러했다. 신과 올바른 인간적인 관계만이 구원을 가져온다고 확신하고 모든 선행 중에서 가장 숭고한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라고 정의하였으며, 더 나아가 일상생활의 평범한 직업과 본질적인 선함을 주장하였다. 게다가 선행을 자선금 기부나 단식, 기도 또는 부자연스러운 금욕생활을 통해 추구하려는 점을 거부한 것은 루터 사상의 대단함과 독창성을 더욱 입증해 주고 있다.
또한 스위스에서 활동한 쯔빙글리의 뒤를 이은 캘빈은 인도주의적 전통 속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그의 종교에 대한 접근 방법은 신비적이거나 경건하기보다는 지성적이었다는 점이 특징이었다. 그 때부터 이 두 사람의 강력한 추진력을 통해서 개신교는 캘빈이즘 그리고 후에는 청교 주의를 구분해 주는 표시가 된 신학과 내적 조직의 특색을 띄게 되었다.
(2) Calvinism
캘빈의 신학 체계는 신의 완벽한 통치와 신의 진정한 본질을 인간은 결국 이해할 수 없다는 점을 받아들이는 것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나 그에 의하면 인간은 자신과 신에 대한 지식이 인간의 가장 소중한 의무이기 때문에 인간은 성격에 담겨 있는 신의 말씀과 자연의 교훈을 통해 약간의 이해를 성취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루터와 마찬가지로 캘빈도 개인의 삶 속에 적용하는 신의 은총을 개별적으로 통찰할 것을 강조했다.
캘빈은 예정설의 피할 수 없는 사실을 주장하면서 예정설이란 "우리가 신의 영원한 뜻이라 부르는 것으로, 그것으로 신은 마음속에서 인류 개개인에게 일어날 일을 결정짓는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모두 유사한 운명을 가지고 창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생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미리 정해져 있으며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영원한 저주가 미리 정해져 있다."고 하였다.
캘빈주의는 개인의 정신적 생활에 카톨릭 교회가 중재하는 것을 거부하며 비교적 단순하고 비 의례적인 예배 의식으로 돌아가고 또 교회의 목사들, 집사들, 그리고 장로들의 지도에 교회 신도들의 동의를 요하는 원칙을 내세운 점에서, 캘빈주의는 결코 이교도에게 관대하거나 민주적이라고는 부를 수 없지만 철저하게 신교 적이었다. 비록 캘빈주의 최초의 교리들이 영국 해협을 건너가면서 상당한 변화를 겪고, 또 대서양을 건너 뉴잉글랜드로 가면서 더 많은 변화를 겪었지만 캘빈주의의 기원과 일반적 특성들은 청교 주의의 기초가 되었던 것이다.
3. 청교 주의의 기원
* 청교도 운동 기간의 영국 국왕 계보와 개요 *
핸리8세(HENRY VIII, 헨리7세의 차남, 1509-1547, 중도(middle way), 국교회(Anglican Church) 시작, 1534년에 의회에서 수장령통과, 1536년에 영국교회의 첫 번째 교리 Ten Articles 발표, 1539년에 Six Articles로 개정) →
에드워드6세( EDWARD VI, 헨리8세와 제인 시모어 사이에서 낳은 아들, 1547-1553, 개신교(prostantism), 1549년에 영국교회의 첫 번째 기도서 The First Prayer Book 발간, 1552년에 교리 42조문(Forty-Two Articles)을 포고,) →
매리(MARY, 1553-1558, 헨리8세와 케더린 사이에서 낳은 딸, 캐톨릭(romanism) 많은 개신교인들을 체포하고 죽임.) →
에리자베스(ELIZABETH, 헨리8세와 앤의 사이에서 낳은 딸, 1558-1603, 중도(middle way)영국의 중흥 기 이룸, 청교도 운동 일어남. 에리자베스가 죽음으로서 tudor왕조가 끝남.) →
제임스 1세(JAMES 1, 스코틀란드의 여왕 메리의 아들로서 스코트에서는 제임스VI세로 즉위했었음, 1603-1625, 국교회(Anglican Church) 확립, 왕권신수설(Divine right of kings)로 왕권을 강화함, Version of King James를 완역하여 출간, 영국과 화란의 100여명의 청교도들이 May Flower라는 배를 타고 Plymouth를 떠나 신대륙 동부에 도착.) →
챨스1세(CHARLES I, 제임스1세(6세)의 아들, 1625-1649, 국교회(Anglican Church) 강화 개신교 박해, 1629년 왕은 의회를 해산. 그러나 1640년, 의회는 단독으로 장기의회(Long Parliament)를 소집하여 왕에게 대항. 1642년에 시민전쟁이 일어남, 장기의회는 Westminster Assembly를 소집(1643.7). Westminster Assembly는 1643-1647에 걸쳐서 소집되었으며 120명의 정회원으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대 소 요리 문답, 예배모범을 만듬.)
일반적으로 영국의 종교개혁은 1534년 헨리 8세가 개인적이며 정치적인 이유에서 잉글랜드의 교회는 교황 교회로부터 결별한다고 선언함으로써 시작되었다. 1534년의 ‘수장령(首長令)’에 따라 영국은 국왕을 최고 관리자로 하는 독립된 교회가 되었는데, 이것이 영국 국교회(성공회)이다.
그 후 아들을 얻지 못하는 헨리 8세의 뒤를 이어 그의 장녀 메리가 직위 한 후 신교도들의 박해는 시작되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가 정권을 잡은 후 그녀는 정치적 입장에서 양파에 대해서 타협적 입장을 취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헨리 8세에 의해 생겨난 성공회의 최고 수장 직을 계속 이어가면서 구교와 신교사이의 공통분모를 찾으려하였다. 하지만 정통 로마 카톨릭 측과 정통 개혁파측은 여전히 그들만의 교리와 교회를 유지하려 하였다. 이 때 생겨난 것이 청교도 운동이었다. 프랑스의 개혁파를 위그노파라 불린 것과 같이 영국의 개혁파의 주류는 청교도들이었다. 청교도들은 더욱 급진적으로 교회를 개혁하길 바랬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그녀에게 반대하는 자들을 배격하는 정책으로 일관하였다. 청교도들은 엘리자베스 여왕의 신앙 노선을 불신하였고 로마 카톨릭 교황 Pius 5세도 여왕을 1570년 파문시켰다.
그러나 많은 순교자의 반 카톨릭 정신 즉, 대륙의 Protestantism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정신은 결코 멈추지 않았다. 그 개혁자들이 바로 Puritans였던 것이고 그 운동이 청교 주의 운동이었던 것이다.
즉, 영국 국교회에 있어서 로마 카톨릭의 냄새, 즉 성서에 없는 의례를 일소하자, 그렇게 하지 않으면 개신교의 진리는 발휘되지 않는다는 것이 그 주장이었다.
로이드존스(D. Martyn Lloyd-Jones)의 표현처럼 “먼저 의식들과 예복들에서 시작이 되어서 끝내는 영국 국교회의 전체 상태에 대한 의문으로 나아갔고, 철저하게 개혁하려는 열망으로 연결되었습니다. 청교도는 부분적으로 개혁된 교회에 만족하지 않고 완전하게 개혁된 교회를 원하였다.” 더욱 발전하여 엘리자베스 여왕이 다스리던 1560년대에는 청교도 운동이 하나의 조직된 운동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로마 카톨릭을 벗어났다고 하는 영국 국교회는 국왕이나 여왕을 교회의 수장(Super Head)으로 받들었으며, 일반회원으로서는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은 귀족과 그 가신들이 존경을 받았다. 그러한 까닭으로 국교회는 전제군주정치와 원칙이 동일했다. 거기에는 인간의 자유가 중시되어 있지 않았다. 게다가 Puritan들도 결국은 영국 교회 테두리 안에서 개혁을 주장하였고 그 후 그들도 세속에 찌들고 영국 교회와 잦은 교류를 하면서 타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따라서 국교회를 반대하는 단체가 생기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청교 주의에 기초를 둔 것으로 비국교도(Dissenters) 라고 불리는 것들이었다. 그중 제일 먼저 나타난 것이 장로교회이다. 하지만 장로에 의해 운영되는 장로교도 아직 일반 회원의 권리를 충분히 인정하지 못했다. 그래서 또 하나의 교회가 생기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빈곤하며 사회적 지위가 얕은 사람들의 평등의 권리를 인정하는 조합 교회였다. 이 파는 분리주의자(Separatist) 라고 불려지기도 했다.
영국 국교회 내에서의 청교도 운동은 1662년 대 추방령으로 종식되었다가 1688년 명예혁명이 일어남으로 청교도들에게 설교하고 독립교회를 세울 수 있는 권리가 다시 주어졌고 국교회 밖에서 계속되게 되었다.
이렇듯 청교도는 한 세기 반가량 영국에서 진행된 개신교 종교 개혁운동이다. 청교도 운동은 그들의 정신과 사상을 이어받은 그의 후예들에 의해서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청교도라는 말이 최초로 사용된 시기는 1564년으로 추정되는데, 이 이름은 처음에 영국 국교회에 비타협적인 개신교도들을 내리깎는 경멸조의 적개심이 가득한 호칭이었다. “까탈스럽운 사람들, 비판적이고 고집불통의 사람들”, “까탈스럽고 비판적이고, 기만적이고 위선적인 작당들”, “국교도에 반대하는 악명 높은 청교도들”이라는 호칭으로 사용되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표현이 처음에 사용되었을 때에 대적 자들에 의해서 붙여진 경멸조의 이름이었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 영광스러운 표현이 되었듯이 청교도들이라는 경멸의 표현도 얼마 후에 일반적인 용어로 사용되었고 그 이후의 세대에게 영광스러운 이름이 된 것이다.
4. 청교도 (Puritans)의 활동
청교도들은 스코틀랜드의 장로교회를 그들의 모범적 교회 관으로 삼았다. 청교도들은 성공회로부터 분리를 원했고 그래서 기성교회와 정부로부터 심한 박해를 받아야 했다. 1588년 스페인의 필립 2세가 이끄는 130척의 무적함대가 영국 해협으로 출현하였다. 필립 2세는 엘리자베스 여왕의 이복누이 Mary Tudor의 남편으로써 영국의 개혁주의 운동을 차단하기 위해 영국으로 해군을 보낸 것이다. 1588년 7월19일 스페인의 무적함대는 네델란드 해안을 경유해 영국으로 나아가려다 갑작스런 돌풍에 휘말려 대부분 바다에 침몰되었다. 필립 2세는 다시 2차 공격을 준비하다가 병들어 죽었다.
1603년 엘리자베스 여왕이 죽자 Darnley경에 의해 스코틀랜드 Mary여왕이 낳은 제임스 1세가 영국의 왕이 되었다. 제임스 1세는 어려서 장로에 의해 교육을 받았으나 왕이 되자 성공회를 선호하게 되었다. 왕위에 오르자 제임스 1세는 교회를 개혁하라는 시대적 요구에 따라 1604년 런던 Hampton 궁중에서 성공회교도와 청교도들이 함께 모이는 의회를 소집하였다. 의회 모임은 실패로 돌아갔으나 그 의회에서 영국 성경 번역이 제안되어 성경을 영어로 공식적으로 번역하게 되어 나온 것이 King James Version (Authorized Version)성경이다 (1611년). 그 전에는 Mary Tudor 여왕 시대에 Geneva Version이 있었으나 Geneva Version이 군주제를 반대한다는 이유로 KJV를 만든 것이다. Hampton 궁중 의회의 결과에 실망한 많은 청교도들은 그 후 네델란드와 나중에는 북미로 이민가게 되었고 이것이 미국의 청교도들이 발생한 원인이었다.
17세기 전반부에 영국의 청교도는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특히 캠브리지 대학 도시에서 청교도들이 많이 나왔는데, 그 중에는 캠브리지에 엠마누엘 대학을 세운 Walter Mildway도 있었다. 또한 캠브리지에서 영국의 캘빈이라 불린 William Perkins(1558-1602)는 많은 학자들에게 캘비니즘에 입각한 설교로 그들을 개혁시켰다.
그리고 Richard Sibbes(1577-1635)는 49세에 캠브리지 성 캐서린 홀의 주임이 되어 개혁주의 설교로 청중에게 깊은 감화를 주었다. Thomas Goodwin(1600-1679)은 옥스퍼드 Magdalen 대학의 학장이 되어 많은 저술활동으로 청교도 정신을 유럽에까지 알렸다.
제임스 1세에 이어 영국 왕이 된 찰스 1세는 로마 카톨릭 성도인 Henrietta Maria와 결혼하게 되자 청교도 주류의 의회와 마찰하게 되었다. 영국의 청교도 교회들을 박해하고 나아가 스코틀랜드 장로교회까지 구교를 강요하다가 2년 간(1639-1640) 전쟁을 치른 끝에 스코틀랜드를 복종시킬 수 없음을 깨달았다.
1642년부터 1648년까지 영국 내에서 구교를 지향하는 왕당파 군과 청교도를 대변하는 의회 군(New Model Army)간의 시민전쟁이 발발해 신교를 대표하는 의회 군이 이기자 찰스 1세는 1649년 처형당했다.
7년간의 시민전쟁에 스코틀랜드 군도 의회 군 편에 가담하게 되었는데 의회 측과 스코틀랜드 장로회 측은 개혁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하여 교리와 예배와 제자 훈련과 교회 감독에 관한 전반적인 계약서를 만들자고 결의하였다.
그림 1) 웨스트민스터사원
성공회와 같이 교회의 수장이 국왕이 되는 제도를 철폐시키고 개혁 교회들의 통일된 교리문답서를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사원(Abbey)에서 만들었는데 이 것이 웨스트민스터 대요리, 소요리 문답서인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교리문답서 작성에는 Thomas Goodwin, Samuel Rutherford, Richard Baxter 등 청교도와 장로교의 지도자들이 주도하였다. 웨스트민스터 교리문답은 장로교에만 국한되지 않고 1658년 회중교회(Congregationalists)와 독립교회(Independent), 1689년 침례교회에서 신앙고백서로 채택되었다. 후에 미국 교회들의 대부분의 보수주의 교단에서 웨스트민스터 교리 문답서를 인정하고 그들의 교리 문답서로 채택하였다.
그 후 의회와 의회군이 분열되고 스코틀랜드도 장로교 방식의 왕정 정치를 주창하다가 최종적으로 의회군에 의해 권력이 장악되어 영국 연방은 올리버 크롬웰 호민관(Lord Protector)이 이끄는 청도교파에 의해 올리버의 아들 리차드 크롬웰까지 군사독재로 통치되었다. 구교파의 입지가 약화되고 청교도를 비롯한 장로교, 침례교, 독립교회 지도자들이 재판관으로 올랐다. 올리버 크롬웰은 모든 종교를 공평하게 다루려 하였으며 그 일환으로 유대인들이 영국에 들어와 유대교를 세우는 것도 400년 만에 허용하였다. 올리버에 의해 청교도인 존 오웬이 옥스퍼드 대학의 부총장으로 발탁되었으며 존 오웬은 많은 저술 활동으로 청교도의 정신을 체계화시켰다.
올리버가 죽고 그의 아들 리차드가 새로운 호민관이 되었으나 얼마 못가 1660년 찰스 2세를 국왕으로 하는 군주제가 부활되자 청교도의 입지가 급속도로 약화되었다. 그 시기에 조지 폭스에 의해 퀘이커 교도들이 만들어졌다. 초기에 그들은 기독교 신앙으로부터 출발하였으나 신앙 교리를 가지려하지 않은 이유로 얼마 못 가 비기독교적 단체로 전락하게 되었다. 나중에 북미로 건너 간 퀘이커교도들은 1681년부터 펜실베니아를 중심으로 그들의 본거지를 구축하였다.
찰스 2세로 군주제가 세력을 회복하자 청교도들은 다시 핍박의 대상이 되었다. 구교 세력은 각종 종교적 제약으로 청교도의 입지를 줄여갔다. 찰스 2세 시대에 베드포드 지역에서 태어난 땜장이 존 번연은 갖은 투옥과 핍박 속에서도 수많은 저술 활동으로 청교도의 기본 정신을 알리려 하였다. 존 번연의 책으로 천로역정, 거룩한 전쟁, 죄인들의 괴수에게 넘치는 은혜 등이 있는 데 특히 천로역정은 성경 다음으로 전 세계에 가장 많이 팔린 베스트 셀러였다. 존 번연 외에도 17세기에는 청교도들에 의해 지어진 많은 책들이 알려졌다. 윌리암 거넬이 지은 '전신무장의 그리스도인', 리차드 백스터가 지은 '성도의 영원한 쉼', 요셉 캐럴이 지은 욥기 강해, 존 오웬의 히브리서 강해, 매튜 헨리가 저작한 전 성경 주석이 1687년~1712년 사이에 쓰여졌다.
1684년~1685년 사이에 영국과 스코틀랜드의 전 교회들을 Episcopal(주교주의) 제도화하려는 찰스 2세의 시도에 대항하는 스코틀랜드의 저항으로 스코틀랜드에서는 많은 핍박과 순교가 잇달았다. 1685년 찰스 2세에 이어 왕이 된 제임스 2세는 영국 연방을 모두 로마 카톨릭화 하려고 갖은 시도를 다하였다. 그는 프랑스에서 위그노파를 멸종시키려는 루이 14세와 같은 방식으로 청교도파와 성공회파를 모두 멸종시키려 하였으나 결국에 실패로 돌아갔다. 제임스 2세가 프랑스로 망명하고 난 후, 1689년부터 모든 종교의 자유가 허용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17세기 말부터 성공회는 세계 선교의 눈을 뜨고 북미 매리랜드에 성공회 교회를 세우는 등 전 세계에 성공회 선교사들을 파송하게 되었다.
▣ 과 제 ▣
1. 청교도란 누구인가 약술하라.
2. 청교도의 유래를 약술하라.
3. 청교 주의의 기원을 약술하라
4. 청교도들은 어떻게 활동 했는가 약술하라.
제2장 청교도 혁명
1. 청교도 혁명의 배경
(1) 영국 사회의 변화
영국에서는 인클로저(enclosure) 운동이 일어났는데, 이 운동으로 이득을 본 세력은 젠트리(gentry)로 불리는 지방 계층들이었다. 그들은 자영농과 귀족사이의 중간 계급으로서, 경제적 이익을 바탕으로 의회의 하원에서 다수 의석을 차지하였다. 한편, 도시에서는 상공업의 발달로 시민 계급이 성장하고 있었다. 경제적으로 발달한 두 세력 중에는 농촌의 자영농과 함께 칼뱅의 신앙을 가진 청교도가 많았다. 그들은 국왕의 전제 정치와 국교회 강요 정책에 대해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 보다 더 큰 문제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왕권신수설이었다.
(2) 왕권 신수설의 신봉
왕권 신수설에 대해 제임스 1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곤 하였다.
"신이 하는 일에 왈가왈부 하는 것은 무신론이자 신성모독인 것처럼, 왕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해 신하가 이러쿵저러쿵 하는 것 역시 주제 넘는 짓이자 엄청난 모독이다."
즉, 왕권신수설은 왕권의 절대성을 옹호한 것이다. 이에 따르면 국왕은 지상에서 신의 대리인이며, 왕권은 신으로부터 주어졌기 때문에 신성불가침이요, 절대적이다. 또한 국왕은 신에게만 책임을 지고 신하는 오직 복종의 의무만 있다. 그러나 왕권신수설은 한편으로는 신이 왕에게 굉장히 커다란 책임감을 준 것으로, 종종 왕이 그의 의무를 매우 신중하게 여기게 하도록 하였다.
문제는 새로운 왕이 의회 적 전통이 강한 영국에 왕권신수설을 강요한데서 출발한다. 엘리자베스 1세의 뒤를 이어 즉위한 제임스 1세는 이 왕권신수설을 강하게 믿었으며, 이를 신하들에게도 강요하였다. 이에 대해 의회는 반발하였다. 여기에 문제를 더욱 심각하게 하는 것이 하나가 더 있었다. 앞에서 보았듯이 왕과 의회는 종교적으로 다른 믿음을 지닌 것이었다. 즉 왕은 영국 국교회를, 의회는 청교도를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불구하고 제임스 1세와 그의 아들 찰스 1세는 현명한 정치를 하지 못하였다. 그들의 정치는 억압적인 전제정치였다. 이는 의회의 분노를 더욱 자극하였다.
(3) 전제정치의 강화
엘리자베스 1세가 죽음으로써 tudor왕조가 끝나고, 왕위는 스튜어트 가문의 제임스 1세가 이어받았다. 제임스 1세(1603-1625)는 당시 영국의 입헌정치의 전통을 무시하고, 왕권신수설을 신봉하면서 전제정치를 강화하고자 하였다. 이에 의회와 국왕의 관계가 악화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