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교도

청교도 신학

작성자
쥬니어칼빈
작성일
2012-11-02 22:25
조회
4782

오늘 우리는 참 신앙을 찾아보기 어려운 때에 살고 있습니다. 교회 수는 많고 믿는다고 하는 성도의 수는 날마다 늘어가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상한 일은 그들 대부분이 믿는 신앙이 성경적인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의 가르침은 사람이 입으로 믿는다고 시인만하면 그것으로 구원이 저절로 이뤄지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선물이고 하나님이 택하신 자에게만 거저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그 사람은 과거의 생활로부터 돌아서서 새 사람이 되어 어떻게 하면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릴까 하고 그것만 생각합니다. 그래서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도록 심령이 변합니다. 이런 마음의 변화가 없는 사람은 예수를 믿는 사람도 아니고 아직도 성경이 말하는 참 구원과는 거리가 아주 먼 사람입니다. 믿는다고 하는 사람은 많지만 마지막 날 참으로 구원의 반열에 들어갈 사람은 적습니다. 구원 받은 <참 성도> 와 구원을 얻지 못한 <사이비 성도>의 차이를 식별하는 법은 아주 간단합니다.


 


사람이 구원을 얻었는가 하는 문제는  다른 사람은 아무도 알 수 없고 하나님과 본인만 알 수 있습니다.  물론 교회에서 세례를 베푼다거나 직분을 위임할 때 목사님이 그분의 신앙을 인정한다고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목사도 가족도 누구도 그의 중생 여부를 알 수 없고 하나님만 아시고 또 본인만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이 죄인인 것을 깨닫고, 그리스도에게만 소망이 있는 것을 알아 예수님을 생명의 구주로 알고 그가 십자가위에서 내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죽으셨고,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나의 평생을 하나님이 인도해 주실 것을 확실히 믿고 주님을 왕으로 모시고 순종하면서 살아가면 그 사람은 누가 뭐라고 해도 구원을 얻은 사람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이런 마음은 본인과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모릅니다.  마태복음 7장 21절 이하를 읽으면 목사들 중에서 구원을 얻지 못한 사람들이 많은 것을 주님이 분명히 가르쳐 주십니다.  그러므로 <믿는다, credo> 라는 말의 뜻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신앙은 내가 영원히 지옥에서 고통을 받느냐 영원히 하나님앞에서 기쁨으로 사느냐 하는 가장 심각한 문제이건만 많은 <신자> 들이 이를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그들이 진정 신앙이 무엇인지 안다면, 영벌의 죄에서 구원 얻은 사람이라면 지금처럼 살지는 않을 것입니다. 구원의 감격 속에 살 것은 분명합니다.


       


오늘은 <청교도의 신학> 이라는 주제로 앞으로 한 시간 동안 강의하겠습니다.
<청교도, Puritans> 라고 하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상식으로는 17세기에 영국에서 종교적인 박해를 피하여 신앙의 자유를 찾아 Mayflower 라는 배를 타고 미국에 건너온 성실한 기독교인들로 알고 있습니다. 그 이상은 알려고 하지도 않고, 그 정도 아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이 기회를 통해서 청교도들의 신앙이 어떠했는가를 바로 알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사를 공부하는 목적이 단지 사건이나 인물들의 행적을 아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 역사를 해석하는 법을 배워서 오늘 내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주님을 섬기는데 응용해야하는 것이 그 주되는 목적입니다. 어떤 학문이건 간에 단지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는 무의미합니다. 지식을 얻었으면 그것을 우리의 신앙생활에 응용해서 활용해야 합니다.  성경도 배웠으면 생활에 응용해서 우리 발의 등이 되고 우리가 홀로 걸어가는 이 인생길의 빛이 되어 그 빛을 따라 생활해야 합니다.


       


청교도를 공부하자니 그들의 배경을 알아야 합니다. 청교도는 어떤 사람들이고 누구에게 어떻게 박해를 받았는지도 알아야 합니다. 영국의 교회는 Henry VII 때부터 전환기에 들어섭니다. Henry VIII 왕은  딸 하나 밖에 출산하지 못한 본부인 Catherine of Aragon 을 버리고 1526년에 새로 알게 된 정부 Ann Boleyn 과 결혼하기 위하여 절차에 따라서 로마 교황에게 이혼과 재혼 허락을 요청했으나 교황이 이혼을 금하자 천주교와 단절하고 왕은 자기 나름대로의 종교 즉 <영국 국교, Anglican Church> 를 만들었습니다. 당시 풍속으로는 주교나 성직자나 수도원 원장이 되는 사람은 자기 연봉 일년분을  의례히 교황에게 바쳐야 하는 상납금 납부법이 있었는데 왕은 그 상납제를 폐지해 버렸고, 또한 왕은 교황청에서 반대하는 Thomas Cranmer 라는 훌륭한 학자를  <Canterbury 주교> 로 임명하고  그 주교의 주관으로 정부인 Ann Boleyn 과 결혼도 했습니다.   Catherine 은 Henry VIII의 형 Arthur 의 부인이니 형수와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Henry VIII 는  천주교와 단절하면서도 천주교의 예배형식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이 <교회의 머리> 라고 하는 법령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수장령 (首長令Supremacy Act) 라는 것입니다.  사실 Henry VIII 는 천주교를 떠났다고 해도 로마교회의 모습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었습니다. 로마교황이 교회의 머리라고 하던 것을 영국의 왕이 교황이 머리라고 바꾼 것뿐입니다.  그 나름대로 천주교의 화체설을 부인하고 사제나 수녀가 결혼하면 화형에 처했습니다. 1547년 그가 죽을 때 까지 Henry VIII 는 잔인하여 천주교 신자이건  개신교 신자이건 가리지 않고 그에게 반대하는 사람은 모두 불태워 죽였습니다. 영국에서 사람을 처형하는 법은 화형입니다. 


       


Henry VIII 의 뒤를  이은 왕은 10살의 어린 나이에 등극한  Edward VI (1547-1553) 인데 그는 개신교에 대해 상당히 관대했습니다. 우선 석학인 Thomas Cranmer의 가르침에 영향을 많이 받아. 성만찬을 개신교대로 집례하도록 하였고, 성직자들의 결혼을 허락했습니다. Henry VIII 세의 핍박으로 대륙으로 피신했던 많은 개신교 학자들이 영국으로 돌아왔는데 그간 대륙에 가있으면서 유명한 Zwingli 나 Bullinger 같은 종교개혁 가들에게  배운 분들이었습니다. 이들 중에는 Ridley, Hooper, Coverdale, Ponet 등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Calvin이 스위스로 가는 길에 프랑스 Straussburg 에서 서로 만났던 Martin Bucer 같은 훌륭한 인물이 영국으로 건너와서 나중에 Cambridge 대학의 신학교수가 되었습니다. 이들은 대륙의 개혁주의를 본받아 영국의 성공회를 개혁하려고 했는데 이런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나중에는 <청교도, Puritans> 로 불리어 지게 됩니다. 이렇게 불리어 지는  이유는 교회의 예배의식을 신약의 가르침에 따라서 바르게 정화 (purify) 하자는 것입니다.  사실을 말하면 17세기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도 영국의 James I 의  아들인 Charles I 가 등극하면서 천주교적 예배를 고집하므로 이를 바로 잡기 위해서 영국 의회가 Oxford 나 Cambridge 의 학자들을 초치하여 논의한 결과 예배 모범을 고치는 것 보다 차라리 새로운 신앙고백서를 만들자고 하여 결국 새로운 장로교적인 신앙고백서를 1643년 9월 23일에 처음으로 모여서 1648년 해산할 때까지 120명이 기도하면서 만들어 낸 신조가 바로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입니다.


       


영국에서 Edward VI 의 뒤를 이은 사람은 Henry VIII 의 본처였던 Catherine 왕비가 출산한  무남독녀인 <Bloody Queen Mary, 피로 얼룩진 메리 여왕> 라는 이름으로 역사에 남겨진  <Mary of Tudor> 라는 사악한 여왕입니다.  그가 집권했던  1553-1558 년 즉 5년간 재위기간 동안에  영국에 천주교 예배의식을  도입하여 Edward VI 의 모든 공적을 수포로 만들었고, 천주교를 믿지 않으면 모두 죽였습니다. 우리는 역사를 공부하면서 천주교의 지도자들이 얼마나 하나님을 바로 믿는 성도들을 박해하고 살해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Edward VI 가 개신교편을 들어 핍박을 멈추자, 그이 치세동안 대륙에서 영국으로 건너왔던 Ridley 나 Latimore, Hooper 등 쟁쟁한 개혁주의 목사들은 모두 Oxford 대학의 교정에서 1555년 10월 16일  화형당하여 순교하였습니다. Thomas Cranmer 대주교도 1556년 3월 21일 Oxford에서 화형으로 순교했습니다. 영국 Mary 여왕이 사람들을 이렇게 대학 캠퍼스 안에서 화형을 행한 이유는 당시의 지성인들인 대학생들로 하여금 천주교에 반항할 의지를 꺾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악독한 메리 여왕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역사가 깊은 Oxford 대학을 택해서 그 곳에서 학생들과 교직원들이 보는 가운데 유명한 종교개혁 가들을 불에 태워 죽였습니다. 여왕은 자기 개인이 사생활도 결코 행복하지 못하여 남편에게도 배쳑을 당한 여자이지만 개신교 성도들에게 그가 입힌 피해는 가히 기록적입니다.


       


그 다음 Mary 여왕을 이어 1558년에 등극한 Elizabeth 여왕은 박해를 풀었다.  그는 <39개조 신조, The Thirty-Nine Articles>를 만들어서 칼빈주의를 따라  1559년 교식령 (Act of Uniformity) 을 만들어 모든 사람은 어느 종파이든 한 가지 예배에만 참석하도록 하는 법을 만들어서 천주교를 믿던 개신교를 믿던 묵인했다. Elizabeth 여왕은 성직자의 독신주의를 폐지하고, 일반 성도에게 미신을 가르치고 성직자들의ㅣ 부정 수입을 돕는 비성경적인 연옥설을 타파하고, 성모에게 경배함을 금하고 그리스도에게 나가도록 했는데 이것은 상당한 진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역사를 공부하면서 악의 세력과 하나님의 능력이 교차하면서 싸우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 후에 등장하는 James I 는 1611년 성경을 번역하여 KJV를 만든 사람으로 유명하지만 천주교의 가르침에 치우쳐서 많은 원성을 샀습니다. 그의 아들  Charles I 가 그를 계승하게 되는데 그는 철저하게 영국의 성공회를 천주교식 예배 형식으로 바꾸어 놓았고 모두 천주교식으로 예배를 드리도록 강요했습니다. 이때  예배 문제를 놓고 신약의 가르침대로 꾸밈이 없이 검소하게 영적인 예배를 드리자는 사람들은 앞서 대륙에서 건너왔던 Ridley, Hooper, Ponet 등의 사상의 영향을 받아서 영국성공회의 예배 의식을 개혁하자고 목소리를 높였으며 영국 의회와 손을 잡았습니다.  Oliver Cromwell 은 그 때 의회편에서 왕당파와 맞서 싸운 유명한 인사 입니다. 지금도 영국 London 에 가면 국회 의사당 건물 앞에 말을 타고 있는 Cromwell 의 늠늠한 동상을 볼 수 있습니다.


       


영국 의회는 예배 의식을 바로 잡으려고  상하 의원들을 소집했고 이들은 Oxford 와 Cambridge 에 있는 당대의 석학들을 대거 초치했고 또한  멀리 Scotland 에서도 8명 참석하도록 권하여 1643년에 예배 문제를 진지하게 논의하게 되었지만  이미 청교도들은 Mary 여왕과 James I, 그리고 Charles I의 핍박을 견디다 못해서 1620년에 영국 서남부 Wales 에 있는 Plymouth 항구를 떠나서 신 대륙으로 향했습니다.. 처음에는 <Speedwell> 이라는 배를 타고 떠났지만 도중에 고장이 나서 화란에 잠시 기항했다가 Mayflower를 타고 미국의 동부 Massachusetts 주 Cape Cod 라는 곳의 최북단 항구 도시인 Provincetown 에 도착하였으나 곧 바다를 건너 미 본토 Boston 근교에 정박하고 그곳의 바위에 <1620> 이라는 숫자를  새겨놓고 그 곳 이름을 그들이 출발했던 영국의 항구의 이름을  따서 <Plymouth> 라고 명명했고, 그 때 그들이 타고 온 배는 나중에 새로운 모조품으로 대치되었는데 오늘에는 그 모조품 (replica) 인 Mayflower 호가 Plymouth 항구에 정박하여 매일같이 밀려오는 관광객을 맞아 줍니다. 안내원들은 청교도가 건너 올 그 당시의 복장을 입고 그 당시의 언어를 사용하면서 관광객이 무엇을 물어보면 알아 듣기 어려운 17세기 영어로 대답합니다


       


청교도들은 Charles I 세의 박해때문에 신앙의 자유를 찾아 이 땅에 들어왔는데 이민 1세는 하나 같이 모든 생활이 <성경중심>이고 <교회생활 중심> 이었습니다.  이들이 1648년에  만든 이른바 Cambridge Platform 이라는  서약서는 모든 거민들이 매사에 하나님 중심으로 생활하기로 서약한다는 내용입니다. 이들은 마을이나 도시 한 가운데 큰 광장을 만들어 놓고 교회는 반드시 그 광장의 중심에 세웠습니다. 이들이 얼마나 경건했는가는 여러 서적에서 읽어 보지만 특히 Mark A. Noll 이 쓴 A History of Christianity in the United States and Canada 라는 권위있는 책에서 잘 읽어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매일 매일  문자 그대로 꾸밈이 없이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았습니다. 월요일에서부터 토요일 까지는 직업을 가지고 각자 직업에 충실했습니다. 이들의 생각은 직업은 하나님ㅇ니 주신 것이며 직업은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수단으로 생각하고 열심히 그리고 정직하게 일했습니다. 


       


모든 일은 하나님의 앞에서, <하나님에게 검사를 받는> 정신으로 일을 했습니다. 예를 들면, Boston 근처의 건물들은 지은지 300년이 훨씬 넘었지만 지금까지도 금이 가거나 훼파되는 건물이 없이 완벽 합니다. 그들은 집을 지을 때 벽돌 한 개를 놓아도 하나님에게 바치는 심정으로 일을 정직하게 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들 주변에서 교회의 직분을 맡고 있는 분들이 건축업을 맡아 일을 하다가 그 공사가 날림 공사가 되어 낭패를 보며 인명의 손실을 보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는 이들 17세기의 청교도들의 직업 철학과는 너무 처이가 나는 비양심적이고 비도덕적인 직업의식입니다.  우리는 역사를 공부하면서 많은 것을 배우고 우리의 실제의 생활에 적용해야 합니다. 그릇된 전철은 밟아서 안되겠고 바른 일은 본 받아야 합니다. 이것이 역사 학도의 철학이어야 합니다.  역사는 구경꺼리가 아닙니다.


       


청교도들은 일주일을 매일 같이 가정예배 (family devotion) 를 드리며 다음 주일에 목사님으로부터 은혜를 받게 해달라고 기도하면서 주일의 예배를 위해서 살았습니다.  토요일에는 가족이 이웃 불신자들을 불러 저녁도 같이 먹고, 같이 예배드리며 성경공부를 하고 그 다음 날 주일 예배 때 은혜를 받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주일이 되면 온 식구가 나이 어린 자녀와 같이 교회에 예배 시간 전에 출석하여 기도하며 예배 시간이 되면 부모가 어린이들과 같이 앉아서 같이 예배를 드려도 어린이들이 불평함이 없었고 어른들도 2시간 동안이나 이어지는 목사님의 성경적인 설교가 지루하지 않았고 오히려 감격에 울었습니다. 집에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는 부모가 어린이들과 같이 그날 설교 들은 내용을 성경을 펴서 복습하고 다음 일주간 내내 그 말씀을 묵상하면서 생활했습니다. 이렇게 경건한 삶은 이웃에게 감명을 주어 사람들은 누가 청교도와 가까이 사귄다하면 그 사람을 선망의 대상으로 여겼습니다. 오늘처럼 성도들의 생활이 성경에 미흡하여 남에게 비난 받는 그런 풍토와는 아주 다른 분위기 였습니다.


       


또한 초대 Massachusetts 주 지사 (知事) 였던 John Winthrop 은 경건한 분이었는데 그가 지사로 있을 때 Cotton Mather 의 조상인  John Mather 는  Shorter Catechism for Children (어린이를 위한 소요리문답) 을 만들어 어린이들을 어려서부터 성경으로 가르쳤습니다. 결과적으로  가령 Jonathan Edwards 의 가문의 예를 들자면, 목사들이 30여명 교수20여명. 그리고 많은 의사들이 배출되었고, 특히 우리가 잘 아는 찬송가 <내 주의 나라와, 찬송가 246장) 는 그의 외손자인 Timothy Dwight 목사가 작사했습니다. Dwight 목사는 나중에 Yale 대학의 교장을 지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Jonathan Edwards 의 사위인 David Brainerd 는 선교사로 Carolina에서 New York 까지 말을 타고 다니면서 인디안들에게 복음을 전하다가 지쳐서 목숨을 다한 훙륭한 분이었습니다. 오늘의 교계에는 이런 분을 찾아 보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 이유는 오늘의 크리스챤들은 영적 생활이 변하여 위선적인데 기인한다고 봅니만 당시에는 청교도들이 그처럼 경건했다는 말입니다. 이 또한 우리가 본받아야 할 신앙입니다.


       


그런데 청교도들이 미국에 건너와서 일세가 지나고 2세 시대에 와서 문제들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신앙이 해이하여 교회에 등록하기를 거부하고 재물을 축척하는데 더 관심을 가져서 부모들과 목사들이 관심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어린애 때 유아세례를 받았으면 커서 회중 앞에서 입교 예식을 해야 하는데 입교를 원치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성장하여  결혼도 그들의 마음대로 목사를 거치지 않고 해버렸습니다. 그 후 어린애가 생기면 목사에게 찾아와서 자기들의 어린이들에게 유아세례를 베풀어주시기를 원했습니다.. 이것은 문제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입교하지 않은 사람이 애를 낳아서 그 애를 유아세례 해 달라고 하니, 불법이고 그렇다고 거부하자니 교회에서 그들이 교회를 떠날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나온 절충안이 소위 “HALFWAY COVENANT 불완전 언약" 라는 것으로 그들의 자녀를 유아세례하고 교적에는 올리되 따로 구별하여 불완전 언약의 자녀로 올린다는 것입니다.


        


이후 1692에는 참으로 희안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물론 어떻게 보면 신앙을 지키기 위한 성직자들의 과잉단속이라고도 볼 수 있는 사건이지만 이른바 <witch trial, 마녀 재판>이라는 것이 Boston 북방에 있는 Salem 이란 마을의 교회에서 일어났습니다. 교인들이 마귀들렸다는 죄목으로 성도를 잡아다 재판하고 lynch 하고 죽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은 Increase Mather (Cotton Mather 의 부친)  라는 유명한 Boston의 목사가 항의하여 금지되었고 그 재판을 담당했던 Samuel Sewall 이라는 목사가 교회에 공식적으로 1697년에 사과했지만 영영 씻을 수 없는 상처와 치욕을 청교도들에게 남기게 되었습니다.  오늘도 Salem 에는 전세계에서 모여드는 “무당” “신접한 사람들,” “뉴에이지 영매들” 이 매년 이곳에 모여서 축제를 벌립니다. 마치 영국 Scotland 의 Edinburgh 성 바로 앞에 있는 Coven에서 벌어지는 마녀들의 축제와 흡사 합니다.


       


이 일로 인하여  청교도들은 이전에 겪은 그 어떤 일보다도 상처를 입게 되었습니다. 1692년 5월 13일에 있었던 <마녀 재판> 에서는 20명이 죽임을 당했는데 19명은 교수형, 한명은 목을 압살 (壓殺)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Noll, A History, etc, p.33). 이 불행한 일은 그 후 Cotton Mather 의 아버지인 Increase Mather 라는 경건한 목사의 진정으로 중지되었다고 말씀 드린바 있지만 당시 청교도들은 죄명으로 죽은 동료 성도들을 원망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 사람들을 죽도록 밀고한 사람들과  또 그들을 재판한 목사들을 원망하여 상당한 기간동안 후유증이 가시지 않았습니다. 아름답기만  했던 청교도들의 생활에 찍힌 옷점입니다.


       


오늘의 기독교에서도 <Salem 의 마녀재판>의 축소판들을 자주 봅니다. 흔히 사이비 부흥사들이 사용하는 극히 비성경적인 수법인데 교인들을 <마귀 들렸다> 고 마구 육신적으로 구타하는  버릇이다  소위 <축귀술 exorcism) 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과정에서 사람을 실제로 사고로 죽이기도 하는 예가 있습니다. 옛날 모 신학교의 학생 하나가 이런 일을 하다가 어느 여성도의 죽음을 이끈 사고가 있었음을 기억합니다.  축귀는 기도로 가능합니다.   안찰한다는 명목으로 사람을 구타하는 것은 극히 비성경적인 일로 삼가야 합니다.  사탄은 영적으로 축귀할 수 있으며 육적으로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말씀으로 승리합니다. Salem 의 교훈을 기억합시다.


       


지금까지 청교도들의 생활을 보았지만 그들의 신학은 어떠했습니까?
청교도들의 의도는 영국에서 James I Charles I 등의 천주교적 색체를 뿌리채 뽑고 영국 국교에 대한 <종교개혁을 지금 당장 끝을 보자> 는 것이었는데. 그 대표자는  Robert Browne 라는 목사로서 그는 1582년에 책을 냈는데 제목이 “Reformation without Tarrying for Any 였습니다. 청교도들은 Browne 목사의 이 책을 따라 종교개혁을 외쳤고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해서 신대륙으로 건너 왔는데 극히 소수를 제외하고는 모두 회중교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신학은 구원관에서, 어거스틴 (Augustine of Hippo) 의 신학을 도입했습니다. 인류는 완전타락해서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성경관 에서는, 성경의 절대적 영감설을 믿으며 따라서 성경의 절대적 권위를 믿으며, 영국과는 달리 성경에서 하라고 명령한 것만 행했습니다. 영국에서는 금한 것만 하지 않고 금하지 않은 것은 해도 된다는 생각이었으나 이들 청교도는 그들보다 훨씬 철저하여 성경에서 명백히 지시한 것만 한다는 것이며 따라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도 그렇게 가르칩니다. 신대륙에서 새로운 신앙고백서인 웨스트민스터 신조를 접한 청교도들은 이 신앙고백서를 지극히 성경적인 것으로 호응하여 정치제도를 제외하고 모두 받아 드렸습니다.. 이들은 성경은 그들이 믿을 신앙과 살아갈 생활의 유일한 법칙으로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천지를 지으시고 인간을 만드시고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은 3위로 계시며 인간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것이며 하나님은 거듭난 하나님의 백성이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받으시기를 기뻐하신다는 내용인데 청교도들의 신론의 특징은 그들이야 말로 누구보다도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정확히 알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자신 만만하게 자기들의 교리를 강요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어 속담에 "He is puritanic, 너무 독선적“ 이라는 말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청교도들의 교회관은 <참교회란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로 이 지상에 여기 저기 분산된 사람들> 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건물이 교회가 아니고 성도가 교회란 것입니다. 성도들은 서로 서로 유기적인 관계이고 마치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영적으로 유기체를 이루고 있는 것과 같아서 성도는 서로 서로 모이기에 힘을 쓰며 교회 생활에 전력을 다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많은 서적을 출판하여 그들의 신앙을 불신자에게 전파했습니다. 성도들 간에는 책보다도 설교를 통해서 세계관과 인생관, 직업관 등을 가르쳤습니다.  청교도들은 하나님의 언약을 믿었습니다.  그 언약은 성경에 나타나 있으니 설교를 중심으로 언약의 하나님에게 순종하므로 감사의 생활을 했습니다. 청교도들은 단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충만한 사람들이 었습니다.


       


사회문제에 대한 청교도들의 관심은 교육이었습니다. 그래서 1636년 Massachusetts 주 의회는 John Harvard 로 하여금 Harvard College를 세우도록 허락했고 2년 후 학교가 설립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목사들을 양성할 목적이었지만 차차 일반 과학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하바드 대학은 영국의 Cambridge 대학  출신인 젊은 John Harvard  가 그의 도서 400 권을 기증하여 Harvard College 를 1636년에 인가를 얻어 1638년에 설립했습니다. 이것은 남부 Virginia 영국의 식민지의  William and Mary College 가 1693년에 세워진 것을 보면 그 보다 훨씬 청교도들이 앞선 것을 볼수 있습니다. 양편 모두가 영국에서 건너 온 무리들이지만 Virginia 의 Williamsburg 에 건너온 영국 사람들은 신앙보다도 자신들의 자유를 위해서 였고, 사업을 위함이 였는가 하면 북의 청교도들은 철두철미하게 신앙의 자유를 위해서 가족 단위로 건너온 사람들이라서 신 대륙에서의 그들의 생활 철학이 달랐습니다. 지금도 Virginia 의 Willimaburg 에 가서 보면 그들이 와서 담배 농사를 짓던 농장들이 있음을 볼수있고, 그들의 새로운 식민지에서의 생활상을 볼수 있습니다.


       


1642년에 MASS 주 의회는 법을 한 가지 제정했는데 “도시 지도자들이 그 도시 주민들에게 글을 가르치지 않거나 성경을 모르면 벌금에 처한다” 는 법을 통과했고 인구 50 가구 이상 모여 사는 마을에는 반드시 교사 한명을 채용하여 그 마을 주민들이 글을 깨우치고 성경을 알도록 하였던 일은 청교도들이 얼마나 교육에 관심이 있었는가를 말해 줍니다.  그래서 17세기말에와서는 세계 어느 곳보다 미국의 청교도들이 가장 문맹이 적었다고 합니다.이런 교육에 대한 청교도의 전통은 후에 미국의 <제1차 대각성 운동, The First Great Awakening>이 있고나서 William Tennant 와 그의 아들 Gilbert Tennant 및 Samuel Davies 등을  통한  College of New Jersery를  1746년에 뉴저지주 Elizabethtowndp 설립하게 되었고 (이 학교는 나중에 Princeton University 가 됨),  얼마후 미국의 <제2차 각성운동> 때는 미국 PCUSA 의 총회 결의로  1812년에 프린스톤 신학교를 설립한 일로 이어집니다.


       


끝으로 청교도들의 예배를 논한다면, 철두철미하게 하나님 중심이었는데.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기 때문에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렸으며 예배 의식은 간소화했습니다.  설교는 M정례적 설교> 와 <간혈적> 설교로 나누어 정례적 설교는 주로 은혜 계약에 관한 설교를 한 시간 내지 두 시간 전했는데, <은혜 계약> 이란 죄인은 하나님의 자비를 구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 회개가 필요하니 회개하라“ 는 내용이 었습니다.


      


그리고 예배 때 말고 다른 기회가 있어 설교할 때는  주로 민족의 언약을 설교했는데 <하나님이 우리를 이 땅에 보내셨으니 우리의 사명 즉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자> 는 내용의 설교였습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끝가지 성경말씀에 근거를 두어 성경으로 성경을 해석했으며  예화는 없었습니다. Mark 교수의 말에 의하면 “당시 뉴잉글란드에 살다가 늙어 죽는 보통 사람은 평생에 설교를 7,000 번 들었으며 한 설교는 평균 2 시간이었다“.라고 말합니다 (Noll, ibid. 44-47).


      


청교도들은 서로 설교로 정보를 교환했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청교도들의 설교를 들으면 당시 청교도들의 신학, 그리고 관심사, 사회생활 신앙생활 등을 모두 알수 있다는 말입니다. National Covenant  분야의 설교는 나라와 민족을 위한 하나님의 명령을 전하는 청교도들의 신학사상과 신앙생활을 배울 수 있습니다. 이들은 세상의 책은 적게 읽고 주로 설 교 중심으로 살았으니. 존경하고 믿을만 한 주의 종으로부터 자주 듣는 설교는 곧 바로 그들의 신앙과 생활의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청교도들의 신앙이 1700년에 들어서면서 점점 변하기 시작하여 1724년부터 미국에서 <제1 차 각성운동> 이 일어나게 되는데 New Jersey의 Raritan에서 목회하던 호란 개혁교단 소속  acob Frelinghuysen 목사가 “A Danger of an Unconverted Ministry" 라는 설교를 하니,  모두 울고 통회하며 하나님에게 돌아오는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 다시 New Haven 의 Yale 대학 총장 Timothy Dwight 및 특히 그의 비서 (amanuensis) 인 Nathaniel William Taylor 등이 중심이 되어 칼빈주의를 버리고 아르미니안 주의, <감정위주의 부흥주의 신앙, experience-oriented revivalism) 으로 변하다가 나중에는 unitarianism 의 세상으로 변한 것은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후에 <뉴잉글랜드 신학, New England Theology> 라는 주제로 별도로 한 시간 동안 강의할 기회가 있을 것이므로 여기서는 깊은 이야기를 후일로 미룹니다.


       


우리는 청교도들의 신학을 통해서 초기의 청교도들이 얼마나 하나님 중심, 성경중심이었고, 말씀을 듣는 설교의 능력으로 매일을 살아갔고 설교자들은 그들의 설교는 철두철미하게 인간이 죄인이므로 죄를 회개하기를 촉구하는 은혜 계약의 설교를 두 시간씩 원고를 외워서 설교 했다는 것을 공부하면서 오늘 우리 시대의 성도들의 신앙생활과 비교해 보면 우리가 얼마나 그들의 신앙과 거리가 먼가를 다시 한번 반성하게 되며, 따라서, 우리들의 생기 없는 신앙을 청교도처럼 성경중심과 하나님의 영광 중심의 신앙으로 되돌려 놓을 각오와 결심이 불일 듯 일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청교도 신학을 보면서 그 옛날 모국을 버리고 신앙의 자유를 위하여 신대륙에 건너와서 온갖 역경과 싸우면서 믿음으로 살아갔던 청교도들의 사적을 거울삼아 우리도 그들을 본받아 그렇게 살도록 해야 하는 것이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의 자세입니다.  그로부터 385년이 흘러간 오늘,  생명력을 잃어가며  형식주의 사이비 신앙, 영지주의적 신비주의에 시달리는 오늘의 기독교 산앙 좌표에 서서 뒤를 돌아보면, 그 옛날 청교도들의 순수하고 성경적인 신앙이 무척 그리워집니다.  하나님이여, 이 땅에 청교도들의 순수했던 그 아름다운 믿음을 주시옵소서. 아멘.   오늘 강의를 여기서 마칩니다. 감사 합니다.
                                                                                                           


튤립 신학 연구원
원장 김명도
rvkim@yahoo.com
www.tulipministri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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