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개혁교회의 정통주의

작성자
쥬니어칼빈
작성일
2013-05-17 18:33
조회
3599

1. 네덜란드의 칼빈주의 5대 강령

일반적으로 칼빈주의의 5대 강령은 영어로 'TULIP'이라 한다. 이것은 전적 타락(Total depravity), 무조건적 예정(Unconditional predestination), 제한적 속죄(Limited atonement), 불가항력적 은총(Irresistable grace), 성도의 견인(Persevearance of saints)의 머리글자를 모은 것이다. 이것은 극단적인 칼빈주의에 대한 반작용이었던 아르미니안주의에 대항하여 다시 칼빈주의를 재천명한 1619년의 도르트(Dort)회의의 산물이었다. 그러므로 칼빈주의의 5대 강령을 이해하려면 아르미니안주의를 살펴보아야 한다. 아르미니안주의는 칼빈주의의 절대 예정론에 반대하여 은총의 수단을 자발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허용하고, 또 이에 대한 하나님의 예지(divine foreknowledge)를 주장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이 피택된 사람만을 위한 것이라고 하는 제한적 속죄론에 대항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만민을 위한 것이므로 누구나 자발적으로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고 하였다(그러나 원죄를 부정하고 자력 구원의 가능성을 인정하는 펠라기우스주의보다는 그 정도가 약하다). 또한 불가항력적 은총에 대하여 인간의 자유의지가 은총을 수용할 수도 있고 거부할 수도 있다고 하였고, 한 번 받은 은총은 상실할 수 없다는 견인의 이론에 반대하여 자유의지에 따라 은총을 상실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하였다.


엄격한 칼빈주의적 개혁신학이 뿌리내렸던 네덜란드에서 아르미니안주의가 일어난 이유는 네덜란드에 아직도 르네상스 인문주의와 재세례파 전통이 살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같이 인간의 이성과 자유의지를 강조하는 학자로서 쿠른헤르트(Dirck Coornhert:1522-1590년)와 특히 아르미니우스와 그의 제자들이 있었다. 아르미니우스(Jacob Arminius)는 네덜란드의 라이든(Leyden)대학에서 교육을 받았고, 제네바의 베자(Beza) 밑에서 칼빈신학을 수학하였고, 1588년 암스텔담에서 목회를 시작했다. 그는 훌륭한 설교가였고 화해를 힘쓰는 개혁교회의 목사였다. 그리고 1603년에 라이든대학의 신학교수가 되어 은퇴할 때까지 이 곳에서 가르쳤다. 아르미니우스는 이성과 자유의지를 강조하는 쿠른헤르트의 신학사상을 반론하라는 요청을 받았으나 깊이 연구하는 가운데 아이러니컬하게도 그의 사상에 동조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은혜는 만민을 위해서 제공되었고, 인간은 누구나 이성과 자유의지를 사용하여 이를 받아들이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고 설교하였다.

이러한 주장이 있고 나서 이제 아르미니우스와 고마르(Gormar:1563-1641년) 사이에 신학 논쟁이 불붙어 올랐다. 논쟁의 내용은 주로 '타락 전 예정론'(supralapsarianism)과 '타락 후 예정론'(infralapsarianism)의 대립이었다. 즉, 하나님은 선택과 유기를 영원 전에(타락 전에) 작정하시고 타락을 이 작정이 수행될 수 있는 수단으로 허락하셨는가, 아니면 하나님은 인간이 타락할 것을 미리 아시고(예지)타락을 허락하신 다음 선택을 타락 후의 인류의 한 부분을 구원하는 방도로서 작정하셨는가 하는 문제였다. 물론 아르미니우스는 '타락 후 예정론'을 주장함으로써 인간 타락의 원인인 자유의지(하나님은 인간이 자유의지를 어떻게 사용할지를 미리 아신다)를 강조하였고, 고마르는 '타락 전 예정론'을 옹호함으로써 인류의 한 부분이 선택되었다고 하는 하나님의 무조건적 선택에 역점을 두었다. 이로 인하여 네덜란드 전역에 신학 논쟁이 확산되었고 네덜란드 교회는 시민전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양분되었다. 그래서 아르미니우스는 1608년에 국가 차원의 공의회의 소집을 네덜란드 당국과 서부 프리스랜드(West Friesland)에 요청하였는데 그는 회의가 끝나기 전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아르미니우스가 세상을 떠난 후(1609년) 그의 추종자들은 그의 신학사상을 체계화하여 발전시켰고, 기독교를 더욱 도덕적 성화의 종교로 보았다. 마침내 40여 명의 아르미니안주의자들은 종교적 관용을 강조하는 네덜란드의 정치인 올덴바르네벨트(Johan van Oldenbarnevelt)의 요구에 따라 "Remonstrance"(항의서, 1610년)라 불리는 신앙성명을 작성하였다. 이 "Remonstrance"에 대한 도르트회의(1619년)의 신학적 응답이 바로 칼빈주의의 5대 강령인 것이다.

이제 개혁교회의 나라 네덜란드는 교리문제로 온 나라가 위기에 봉착했다. 다수파인 칼빈주의는 총독인 모리스(Maurice)의 지지를 받았고, 소수파인 아르미니안주의는 올덴바르네벨트와 국제법학자요 사학자인 그로티우스(Hugo Grotius:1583-1645년)의 지지를 받더니 급기야 이 문제는 정치적으로 비화되었다. 모리스는 국민당으로서 국가 차원의 공의회소집을 요청했으나, 부유한 중산층을 대표하는 올덴바르네벨트와 그로티우스는 각 주의 권리를 옹호하는 연방파로서 종교적 문제도 각 지역에 맡기고자 한 것이다. 결국 모리스는 쿠데타(1618.7.)로 반대파를 제압하고 1619년 올덴바르네벨트는 목베고 그로티우스를 투옥시켰다.

결국 1618년 11월 13일~1619년 5월 9일 사이에 도르트에서 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에는 네덜란드, 영국, 독일의 팔레티네이트 출신의 대표들 이외에 헷세, 브레멘, 스위스로부터도 많은 대표들이 참석했다. 마침내 이 대회에서 칼빈주의가 승리를 거두었고, 여기서 나온 칼빈주의 5대 강령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Heidelberg Catechism)과 '벨기에 신앙고백서'(Belgic Confession)와 더불어 네덜란드 개혁교회의 전통적인 신앙고백서로서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이 대회는 고마르의 '타락 전 예정론'을 채택하지 않았다. Remonstrants들은 추방당하여 10년 동안 억압 속에서 살다가 1626년 네덜란드의 자유교회로 등장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또한 아르미니안주의는 네덜란드를 벗어나 영국에 깊숙이 뿌리를 내려 영국 교회에 영향을 주었다. 로드(William Laud:1573-1645년, 1633년에 캔터베리 대주교)를 따르는 고교회(high-church) 사람들은 아르미니안주의의 자유주의를 받아들여서 이 사상을 광교회주의자(Latitudinarians)들에게 넘겨 주었다. 영국에서 이 아르미니안주의의 한 흐름은 유니테리언주의와 합류했고, 다른 흐름은 침례교와 웨슬리의 감리교운동에 영향을 끼쳤다. 웨슬리(John Wesley)는 아르미니안주의적 분위기에서 양육되었고 그의 양친은 칼빈주의의 예정론에 대하여 유난히 거부반응을 보였다 한다. 뉴잉글랜드의 처음 기독교는 칼빈주의적 특징을 강하게 가졌던 것이 사실이나, 이들의 개인주의적 성향은 감리교와 침례교의 아르미니안주의의 침투를 환영했고 이것이 미국의 개신교를 급속히 확장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이 아르미니안 논쟁은 5세기경 펠라기우스를 연상시키는바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에 관한 문제로서 후기 중세기의 스콜라주의 신학과 루터의 대결의 연속이기도 하다. 이 같은 자연과 은총(natur und gnade)의 문제는 어거스틴, 아퀴나스, 루터, 칼빈, 카이퍼, 바빙크, 브룬너, 바르트 등에 의하여 계속 논의되는 신학적 주제인 것이다. 또한 위와 같이 종교개혁이 외쳤던 복음과 성령의 역동성은 식어지고 신학적 주장과 논쟁으로 한 나라가 내분에 휩싸이는 것을 우리는 네덜란드에서도 보게 된다. 이것은 30년 전쟁과 같은 맥락의 것으로 17세기 초는 이렇게 신학적 주장과 교파를 절대화한 나머지 기독교계는 물론 국가 차원에서도 분열을 경험하는 정통주의시대였음을 확인케 하는 것이다.

 

2. 개혁주의적 정통주의(Reformed Orthodoxy) 신학

영국 기독교의 개신교화는 역사적으로 영국 성공회(Anglican Church)에 의하여 시작되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영국 기독교를 개신교화한 것은 1560년 이후의 청교도의 역사였다. 이 청교도운동은 영국의 민주화와 인권 차원에서도 크게 기여하였다. 이 같은 퓨리탄의 투쟁사에서 만들어진 1647년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17세기 대륙의 개신교 정통주의와 맥락을 같이하면서 특히 네덜란드의 칼빈주의에 비견되는 영국의 칼빈주의를 대변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이미 논한 도르트회의 (1619년)의 칼빈주의 5대 강령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잠시 비교하기로 하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제 1장에서 성경을 모든 신학 논쟁의 '최고 심판자'(the supreme judge)로 여긴다. 또한 "성경해석의 무오류한 규범은 성경 그 자체이다."(1,9). 이것은 분명치 않은 성경본문을 해석할 경우에 보다 분명한 성경본문에 기초한다는 원리로서 종교개혁의 sola Scriptura의 원리이고, 가톨릭의 '전통'개념을 비판하는 말이다. 이에 반하여 가톨릭은 그들의 전통과 구전의 가르침과 교황의 권위를 보다 용이하게 확립하기 위하여 성경의 권위를 떨어뜨리려 애썼다. 벨라민(Bellarmine)은 성경이 교회에 유익한 것이기는 하지만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De Verbo Dei, 4권 4장). 추기경 호시우스(Hosius)는 성경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으면 교회는 더 유익한 상황이었을 것이라고 하였고, 발렌티아(Valentia)는 성경이 쓰여지지 않았으면 더 편리했을 것이라고 할 정도였다.

대체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이 같은 성경관은 대륙의 성경영감론과 통하는 것이다. 하지만 맥킴(Mckim)의 연구에 의하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성경 이해는 성경의 진리들을 문자적 명제에 묶어 두지 않고,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시려는 메시지를 어떻게 인간의 말로 전달하셨는가를 중요시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사고계열이라기보다는 플라톤적 사교계열이라 한다. 이 같은 사실은 성경이 '신앙과 행위의 무오한 규범'이라고 하는 본 신앙고백의 내용에도 잘 나타나 있다. 이것은 성경의 축자영감설이 아니라 성경의 중심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알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인간은 교회의 은총의 수단을 통한 성령의 역사에 의해 복음을 신앙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고 나서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명령)을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성경관은 분명 네덜란드를 포함한 대륙의 다른 개신교 정통주의의 명제적 진리에 집착하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축자 영감설과 입장을 달리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원하신 작정'(God's eternal Decree)(3,1)에서 취급되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예정론은 도르트회의의 '무조건적 선택'과 일치하면서 "하나님께서 장차 일어날 모든 일을 자유롭고 불변하게 미리 정하셨다."고 함으로써 아퀴나스적인 철학적 섭리를 암시하고 있다. '전적 타락' 역시 일치하는데 "우리는 이 근원적인 부패로 말미암아 모든 선에 대하여 전혀 마음에 끌리지 않고 무능하게 되었고 반대쪽에 있다."(6,4)고 고백하고 있다. '제한적 속죄'에 대하여는 두 가지 신앙항목이 일치한다. 즉, "범죄 후 인간은 구원 획득의 모든 자유를 상실하였다."고 하며, 또 이 구원은 하나님께서 피택자들의 의지에 역사하시는 '효과적 부르심'으로부터 오고 이로써 구원얻은 사람은 선을 향하게 되는 것이다(10,1)라고 선언하였다. 부연하면, 성령께서 교회의 은총의 수단(말씀, 세례, 성만찬 등)을 통하여 적절한 때에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피택자에게 적용하실 때 이 피택자들이 칭의를 얻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칭의는 성화로 이어지고 이같이 칭의와 성화의 과정 속에 있는 피택자들은 "은혜의 상태에서 전적으로 떨어지지도 않고 종국적으로 떨어질 수도 없다. 이들은 끝까지 이 은혜 안에서 견인되어질 것이요 영원히 구원받을 것이다." 그러나 도르트회의의 칼빈주의 5대 강령과 일치하는 것 이외의 나머지 부분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당시 퓨리탄혁명 시대에 논의되어진 영국의 특수상황이 반영되어 있다.

한편, 루터교 정통주의를 대변하는 대륙의 신학자들에 맞먹는 대륙의 개혁주의적 정통주의의 신학자들을 소개하면 볼렙(Johannes Wolleb:1586-1629년), 알슈테트(Johann Heinrich Alstedt:1588-1638년), 보에티우스(Gisbert Voetius:1588-1673년) 및 투레티니(Francis Turrettini:1623-1687년)등이 있다. 이들의 17세기 개혁주의적 정통주의 신학을 총정리한 이는 헤페(Heppe)로서 '개혁주의 교의학'을 저술하였다.
볼렙은 바젤에서 태어나 목사와 구약교수가 되었다. 그의 많은 작품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Compendium Theologiae Christiane였다. 이것은 조직신학 책으로서 수많은 개혁주의 신학교에서 교본으로 채택되기도 하였다.

알슈테트는 독일 출신으로 헤르보른에서 교육받았고 모교에서 교수가 되어 많은 저술을 함으로써 개혁신앙에 뿌리를 내린 유럽의 모든 곳에서 유명하게 되었다. 그는 네덜란드의 도르트회의에 참석하여 아르미니안주의를 정죄하는 일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30년 전쟁 때 트란실바니아(Transylvania)로 이사하여 이곳에 칼빈주의 영주가 새로 세운 학교에서 평생 교수로 봉직했다. 알슈테트는 그의 Theologia Scholastica Didactica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를 신학에 적용하였고, Encyclopedia Scientiarum Omnium에서 모든 지식을 통합하려 하였다. 여기서 그는 형이상학, 논리학, 지질학, 및 다른 과학들을 신학과 연결하려 하였다. 이것은 이성과 계시, 자연과 초자연의 종합을 이룩하려는 17세기 개신교 정통주의의 공통적 특징인 것이다. 특히 그는 라무스(Peter Ramus)가 발전시킨 스콜라주의를 사용하여 Encyclopedia Septem Tomis Distincta라는 작품을 써서 17세기의 신학계에 널리 사용되게 했다.

보에티우스는 네덜란드 칼빈주의자로서 라이든에서 교육받고 목사가 되었다. 1611년에 그가 목회를 시작한 곳은 로마 가톨릭주의와 아르미니안주의가 팽배하던 곳이었고 여기서 그는 논쟁적 신학사고를 키웠다. 그는 아랍어, 시리아어, 논리학, 물리학, 형이상학 및 신학을 가르쳤고 1주일에 8회나 설교하는 부지런한 사람이었다. 1634년 그는 유트레히트(Utrecht)대학에서 셈족 언어와 신학을 가르치면서 그의 주저를 완성하였다. 그는 여기서 봉직하면서 데카르트, 코케이우스(Cocceius), 아르미니안주의자들 및 자기와 의견이 다른 사럼들을 공격하였다. 그를 그렇게 논쟁적으로 만든 것은 그의 경건생활과 엄격한 도덕주의였다. 그의 모습은 경건주의자들과 비슷했고 그의 엄격한 도덕성은 영국의 퓨리탄과 비슷하였다. 그의 주저는 Disputationes selectae theologicae, Desperata causa papatus, Exercita et bibliotheca studiosi theologiae였다. 한편, 이방인의 개종, 교회설립, 하나님의 은혜를 선포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는 보에티우스의 Politica Ecclesiastica, 1663-76는 18세기와 19세기의 선교운동에 하나의 지침을 제공하여 주었다.

투레티니는 제네바, 라이든, 유트레히트, 사우무르 등에서 교육받았다. 그는 1648년에 제네바에서 목사가 되었고1653년에 교수가 되었다. 그는 칼빈의 작품들과 도르트회의의 교리에 근거하여 '신학 논쟁 강요'(Institutio theologiae elenticae)라는 작품을 내놓았다. 이것은 미국 장로교에 크게 영향을 주어서 프린스턴의 조직신학 교본으로 사용하였다. 특히 비어즈리 3세(John W. Beardslee III)가 Locus 2 of Institutio theologiae elenticae를 번역한 The Doctrine of Scripture는 17세기 개혁주의적 정통주의의 성경관을 대변하는 것으로 우리가 이미 언급한 대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성경관과 달리 아리스토텔레스 사고계열의 축자영감설을 지향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을 신앙과 행위의 정확무오한 규범이라고 할 때, 그것은 축자영감설이다. "......성경 안에서 믿어지도록 언급된 저 항목들은 완전히 믿을 만하고, 또한 행해질 것과 행해지지 않을 것으로 언급된 저 항목들은 순종을 요구한다. 그 기초는 하나님을 저자로 하는 책들의 신적이고 무오한 진리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류를 신앙과 순종에로 잡아매는 최고의 특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개혁주의적 정통주의의 육중한 영감론은 구약의 히브리어 모음의 영감까지 주장하게 되었다. "Helvetic Consensus Formula(1675년)는 중세기 때 첨가된 구약의 히브리어 모음까지 포함하여 성경의 영감을 이렇게 주장한다. "......그러나 특별히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이 위탁되었던 유대교로부터 전수받은 대로 오늘날까지 간직하고 있는 히브리어 원문은 그 자음에서 뿐만 아니라 모음에서도-즉, 모음의 점들 자체나 혹은 적어도 점들의 힘에 있어서-하나님에 의하여 영감받았고, 그 내용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그 단어들에 있어서도 영감받았다. 이 히브리어 원문은 신약의 원문과 함께 우리의 신앙과 삶의 유일하고 완전한 규칙을 형성하고 있다......."
 
3. 프랑스의 위그노파

30년 전쟁은 독일 교회뿐만 아니라 이 전쟁에 개입한 다른 나라 교회들에도 치명타였다. 17세기의 대륙의 비참한 상황은 프랑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프랑스 역시 개신교와 가톨릭 사이에 피흘리는 충돌이 거듭되었다. 프랑스의 칼빈 계통의 개신교에게 처음으로 위그노(Huguenots:중세의 소설에 나오는 Hugo라는 왕의 이름에서 유래함)라는 명칭이 주어진 것은 1560년경이었다. 프랑스의 개신교들은 박해를 피하여 독일의 영주국들로 피난하였다. 특히 슈트라스부르크의 위그노교회는 여기서 체류하고 있던 칼빈의 도움을 입었고 이로 인하여 칼빈은 훗날 프랑스 개신교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프랑스의 최초의 위그노공동체는 칼빈의 슈트라스부르크교회의 모형을 따라 1546년 Meaux지역에 세워졌다. 그리고 파리의 최초의 위그노교회는 칼빈의 제네바교회의 모형을 본떠서 1555년에 조직되었다. 그리고 1559년 15개의 위그노교회를 대표하는 노회(synod)가 생겼다. 이것은 프랑스에서 최초의 국립분립의 실현이었다. 이러한 프랑스 개신교의 성장은 1561에는 2,150개의 교회에 이르렀다.

위그노들은 가톨릭에 의해서 간헐적으로 박해를 받아 오다가 1562년 바씨(Vassey)의 대학살과 1572년 8월 23-24일의 성바돌로매 축제일의 대학살이라는 비극을 당했다. 6주 동안 계속된 이 박해의 기간에 정부의 제어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3만 명의 위그노들이 학살을 당했다. 이로부터 교파로 인한 시민전쟁이 계속되다가 집권을 위해 가톨릭으로 개종한 헨리 4세가 "낭트칙령"(Edict of Nantes, 1598년)을 발표함으로써 내분이 종식되었다. 이로써 위그노들이 시민으로서의 권한과 종교적 자유를 확보했다. 그러나 이러한 평화는 오래 가지 못하고 부르봉 왕조의 등장과 더불어 새로운 종교전쟁이 재개되었다. 이 전쟁은 리쉘리위(Richelieu)가 라로셜(La Rochelle)을 점령(1628년)함으로써 끝을 맺었다. 이후에도 위그노들은 계속 박해를 받아 오다가 17세기 말엽에는 대대적이고 조직적인 박해를 받게 되었다. 이때에 수천의 개신교도들이 강제로 개종당했고, 재개종으로 인하여 루이 14세는 낭트칙령이 이제는 더 이상 필요없다고 판단하고 이것을 취소하였다. 그러나 이때 4만 명이 넘는 개신교도들이 영국, 독일, 미국, 남미 등으로 이민하였다. 이들 위그노들은 프랑스혁명 기간 동안 어느 정도 종교적, 정치적 관용을 누리다가 혁명 후 보수파의 가톨릭세력에 의해 다시 박해를 받아 이민하였다 헨리 4세가 죽은 후로는 사실상 이들의 역사는 프랑스의 절대 왕권에 항거하여 투쟁한 역사였다. 따라서 위그노의 투쟁은 프랑스혁명에로 이어진 것이다.

이상 위그노의 박해상황을 염두에 두면서 이것을 좀더 상론해 보자. 헨리 4세는 1610년에 암살되었다. 비록 그가 정략적으로 가톨릭에 개종하였으나 개신교도들은 그가 공표한 낭트칙령을 생각해서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 다음 왕은 8살의 나이로 즉위한 루이 13세였다. 그의 어머니 마리 드 메디치(Marie de Medici)의 섭정하에서 낭트칙령을 무시하지 않았다. 그래서 위그노들은 위그노총회에서 이 새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였다. 그러나 마리는 점점 이태리의 정치고문을 사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합스부르크 왕가의 스페인계열과 손을 잡았다. 이러한 일련의 정책을 따라 그녀는 이제 가톨릭을 옹호하는 정책을 펼쳤다. 어린 왕 루이 13세는 스페인 공주(Anne of Austria)와 결혼했고 왕의 누이(Isabella)는 스페인의 필립 4세가 될 왕자와 결혼했다. 이러한 정책은 곳곳에서 위그노의 봉기를 야기시켰고, 이런 와중에서 여러 위그노 지도자들이 잡혀 죽었으며 여러 개신교 요새지가 점령되었다.

1622년, 마리의 세력이 약화되자 가톨릭의 대주교인 리쉘리위가 왕의 후견인으로 등장하면서 실권을 장악하였다. 그는 종교적 동기보다는 정치적 동기에 움직인 전형적인 인물이었다. 그가 30년 전쟁 동안 가톨릭 황제에 맞서서 개신교 진영을 도왔던 것도 합스부르크가를 약화시키고 부르봉 왕가의 세력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그가 국내적으로 위그노를 박해한 것도 그들이 개신교라는 사실보다는 헨리 4세가 위그노에게 허락했던 요새화된 여러 도시가 언제든지 왕권에 불복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중앙집권화 정책은 독립적인 위그노의 세력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마침내 리쉘리위는 군대를 동원하여 위그노의 주요 요새인 라로셸(La Rochelle)을 점령하였다. 이 싸움은 2만 5천명이나 되던 요새의 사람들이 1천 5백명으로 감소할 정도로 비참한 것이었다. 이에 자극받아 봉기하였던 여러 위그노 도시들도 왕의 군대에 의해 분쇄되고 말았다. 한편, 리쉘리위가 문제삼은 것은 위그노들의 정치적 세력이었으므로 위그노의 여러 도시를 점령한 1629년에 그는 다시 개신교도들에게도 종교적, 시민적 자유를 주는 관용의 칙령을 내렸다.

1642년 리쉘리위가 죽고, 1643년 루이 14세가 왕위에 오를 때 왕의 나이는 5살이었다. 당연히 어머니(Anne)가 섭정을 하였으나 국사는 리쉘리위와 친분이 있었던 추기경 마자렝(Cardinal Jules Mazarin)이 맡았다. 이러한 루이 14세 초기시대에 위그노들은 평화를 누리며 도시와 농촌으로 널리 퍼졌고 지성인계층도 포섭하였다. 그러나 마자렝이 죽고 23세의 루이 14세가 본격적으로 정치에 뛰어들자 사정이 바뀌었다. 그는 아무도 자기의 햇빛을 가리지 못하게 하는 '태양왕'의 위세를 떨쳤다. 그는 프랑스 내정에 간섭하려는 교황과도 충돌하여 갈리칸교회의 자유를 천명했다 또한 같은 이유로 프랑스내에 이교도나 비국교도를 전혀 허용치 않았다. 그는 '재결합'(reunion)이라는 명목으로 가톨릭으로 개종시키는 정책을 썼다. 그는 권고, 압력, 금력 등의 수단이 통하지 않은 경우 강제적 개종도 불사했다. 1684년의 경우 군대를 동원한 개신교 억압정책은 수만명의 가톨릭 개종자를 낳았다.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그는 1685년 낭트칙령을 취소하고 "퐁텐느블로칙령"(Edict of Fontainebleau)을 내렸다. 이것으로 프랑스에서 개신교가 되는 것은 비합법적인 것이 되었고, 이것은 프랑스 위그노들로 하여금 스위스, 독일, 영국, 네덜란드, 북미 등으로 이주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게다가 이러한 대출애굽의 물결에는 상인과 장인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어서 프랑스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이것은 훗날 프랑스혁명의 원인 가운데 하나가 된다.

이렇게 법적으로 제약을 받게 되자 프랑스의 개신교도들은 지하에 숨어서 신앙을 지켰다. 이들은 교회건물이 없었기 때문에 들이나 숲에서 예배를 드렸다. 프랑스 도처에서 들이나 숲으로 모여들어 말씀을 청종하고 죄를 고백하고 떡을 나누었다. 프랑스 왕정 당국은 비밀경찰을 동원하여 이러한 비밀스러운 예배를 추적하여 박해를 서슴지 않았다. 당국은 이 위그노들을 '사막의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다. 이 같은 박해상황에서 예언적 환상과 신비적 경험, 종말적이고 묵시적인 비전에 의존하는 개신교운동이 태동하였다. 로트르담에 유배되어 있던 쥬리위(Pierre Jurieu) 목사는 1689년에 개신교의 확실한 승리가 온다고 믿었다. 이것은 개신교도들에게 용기를 주어 더욱 심한 박해와 고문을 이기게 했다. 또한 이 같은 영성은 농부들의 무장봉기로도 나타났다. 이들은 씨를 뿌리고 가꾸고 거두면서 시간이 나면 봉기하여 왕의 군대를 공격하였다. 이들은 몇백 명 정도의 규모로 2만 5천의 정부군을 이기기도 하였다. 이들은 전쟁전에 성경을 읽었고 전쟁터에서 찬송가도 불렀다. 이러한 봉기는 1709년까지 계속되었으나 정작 영국이 도움을 주려 한 1710년에는 이미 봉기의 불길이 꺼져 있었다.

한편, 이와 전혀 다른 유형의 움직임이 있었다. 이 무리의 지도자들은 묵시적인 환상을 신뢰하지 않고 개혁교회의 전통에로 돌아가려고 하였다. 그래서 분명하고 조심스러운 성경해석에 근거하여 예배를 드렸다. 이들의 탁월한 지도자는 꾸르(Antonie Court)였다. 그는 1715년에 최초의 프랑스 개혁교회의 노회를 조직하였다. 이들은 모든 일에 있어서 국가에 순종하되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경우에만 순종하지 않는다는 정책을 표방했다. 1715년 최초의 노회가 있은 지 10일도 안 되어 루이 14세는 죽고 다시 5살 난 그의 증손자가 왕위에 올랐다. 루이 15세 역시 개신교를 박해하였으나 꾸르는 이에 대해 폭력으로 항거하는 것을 금하였다. 1726년 스위스의 로잔에 신학교가 세워졌다. 프랑스의 목회지망생들은 여기서 교육을 받고 본고장으로 돌아갔다. 여기서 말씀에 조예가 깊은 많은 프랑스 개혁교회의 설교가들이 양성되었다. 꾸르는 추방된 삶을 살면서도 조국을 방문하여 항상 프랑스 개혁교회의 일을 지도하며 감독하였고 마침내 1767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개혁교회적 개신교가 프랑스에 깊이 뿌리를 내린 상태였다. 하지만 개혁교회에 대한 당국의 박해는 루이 16세가 종교의 관용을 선포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바로 이같은  프랑스 개혁교회에 대한 박해와 개혁교회의 이에 대한 항거의 역사는 프랑스의 앙시앙 레짐(옛 왕정)을 무너뜨리고 프랑스혁명에로 이어진다.

 

4. 영국의 퓨리탄이즘과 청교도혁명

17세기는 개신교 정통주의시대요, 배타적이고 논쟁적인 교파주의시대였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침체적인 시대였다. 이렇게 대륙에서 종교개혁의 역동성과 생동성이 끊긴 것과 달리 영국에서는 청교도의 항거의 역사가 종교개혁의 정신을 이어나갔다. 영국의 개신교파의 입장에서는 17세기야말로 가장 많은 열매를 거둔 시대였다. 다양한 비국교도들의 교파가 일어났고 새 교파들이 신대륙으로 이주하여 북미 개신교의 기초가 되었다.

퓨리탄(puritans)이란 말은 '순수하게 하다'(purify)라는 말에서 유래하였다. 퓨리탄운동은 엘리자베드 1세(1558-1603년) 때 시작되어 17세기 말까지 지속된 것으로 로마 가톨릭주의의 잔재와 영국 성공회의 가톨릭적 잔재와 성공회의 국가와의 야합에 항거하여 성경과 영감에 찬 설교를 강조하며, 대륙의 16세기의 종교개혁에로 돌아가려는 영국 개신교의 개혁 운동이었다. 영국의 성공회가 상당한 정도로 가톨릭주의의 개신교화를 시도해 왔으나 아직도 크게 미흡하였기 때문에 퓨리탄들이 이 영국의 개신교화를 위해서 투쟁한 것이다. 이들은 에드워드 6세(1537-1553년) 때 대륙(제네바 등)에서 들어온 개혁교회의 신학전통과 교직체계를 이어받은 사람들(Hooper, Latimer,Ridley, Cranmer)과 피의 여왕인 메리(1516-1558년) 치하에서 제네바, 취리히, 프랑크푸르트 등 대륙으로 피난갔다가 1558년 엘리자베드 1세 때에 귀국한 이들이었다.
엘리자베드 1세는 옛 중세적 신앙과 종교관습을 따르는 가톨릭세력과 삶 전체와 교회의 구조까지 성경에 순응하기를 원하는 칼빈 계통의 개신교 사이에 화해의 균형을 어느 정도 유지했다. 보통 교회사가들은 이것을 '엘리자베드의 조정'(Elizabethan Settliment)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결국 그녀는 개혁교회로 하여금 중세의 예배의식, 교회정치 및 기타 중세적 잔재와 야합하도록 강요하였다. 전투적 자세로 개혁전통을 지향하던 퓨리탄들은 엘리자베드 1세가 의도하는 국가교회의 체제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녀의 치하에서 퓨리탄들과 왕의 종교정책에 찬동하는 성공회 사람들 사이에 싸움이 일어난 것이다. 이때에 퓨리탄들은 예복문제에 있어서 성직자의 백의를 거부했고, 국회를 개혁할 것과 무지하고 추문 많은 성직자의 숙정을 부르짖었으며, 여왕은 퓨리탄들의 교회구조를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이와 같이 엘리자베드 1세 때 터진 퓨리탄과 성공회의 싸움은 제임스 6세에서 찰스 1세로 이어지고 급기야 시민전쟁인 퓨리탄혁명으로 발전한 것이다.

엘리자베드 1세 때 퓨리탄이즘을 발전시킨 사람들 가운데 캠브리지대학의 교수 카드라이트(Thomas Cartwight:?-1603년)는 대주교와 대부제들(archbishop and archdeacons)제도를 반대하고 각 교구에 치리를 위한 평신도 장로제도를 두어야 할 것과 교역자의 상하질서를 철폐할 것을 주장하다가, 감독주의자 휘트기프트(John Whitgift:?-1604년)에 의하여 박해받았다. 비록 기성 감독제도를 완전히 버리지는 않으면서 장로들은 각 교구에 두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1570년에는 장로주의가 감독주의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카드라이트와 그의 동료들은 가능한 한 많은 퓨리탄적 요소를 도입할 것을 강조하면서도 실제의 개혁은 정부에 기대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국가로부터 분리하자는 입장은 아니었다. 사실상 한 세대 안에 국가 차원에서 교회의 헌법과 예배형식이 4차례나 수정되어 작성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퓨리탄을 만족케 하는 교회헌법과 예배의식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데 영국 교회측의 이 같은 지연에 대해서 보다 더 강력하게 불만을 가졌던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자연법이나 실정법보다 성경을 강조하며 회중교회 정치체제를 선포하였다. 이 분리주의자들의 지도자는 브라운(Robert Browne:?-1633년)이었다. 그는 처음에 장로교적 퓨리탄이었으나 1580년부터 분리주의 원칙을 지향하였다. 그는 1581년에 노르위치에 교회를 세웠으나 그의 설교내용으로 인해 여러 번 투옥되었다. 그리하여 브라운과 그의 교회는 네덜란드의 미둘부르크로 피난가야 했다. 브라운이 의도한 교회체제도 회중교회였다. 그에 의하면 오직 그리스도를 경험적으로 믿는 개교회만이 교회이다. 이들은 자의적 계약에 의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다른 교인들과 연합한 것이다. 이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임명한 교역자들과 법에 의하여 처리된다. 이 교회의 회원 한사람 한사람이 교회 전체의 삶에 대하여 책임을 진다. 상부기관이 개교회 위에 있을 수 없고 각 개교회는 자율(self-government)을 원칙으로 하여 신약성경이 제시하는 목사, 장로, 집사, 과부의 제도를 따른다.

그리달이 주교로 있을 때 기성 국가교회에 남아 있던 많은 퓨리탄 계통의 목사들이 성공회의 예배모임인 '예배모범'(The Book of Common Prayer)대신 트레버스(Walter Travers)의 '거룩한 훈련'(Holy Discipline)을 사용하였다. 이 퓨리탄들은 그린달을 승계한 휘트기프트와 크게 충돌하였다. 특히 후커(Richard Hooker:?-1600년)는 그의 '교회정치법'(Law of Ecclesiastical Polity)에서 경직화된 성경주의에 근거한 퓨리탄의 교직론보다 이성과 자연법사상을 사용하여 성경적 근거를 부여한 감독주의 체제를 주장함으로써 영국 고교회파(high-church)의 기초를 놓았다.

분리주의 교회에 대한 박해가 진행되는 상황에서 1592년 런던에 분리주의파의 교회가 생겼다. 이 교회의 목사는 존 스톤이고 교하는 그린우드였다. 바로 이 해 4월 바로우(Barrow)와 그린우드가 엘리자베드의 수위권(Supremacy in ecclesiastical matters)을 거부하다가 처형되었다. 바로 이 해에 국회에서 여왕의 수위권을 거부하는 사람과 교회 출석을 거부하는 사람과 합법적 예배를 드리지 않는 장소에서 예배하는 사람을 추방한다는 법안이 통과되었다. 이 때문에 런던 교회의 많은 사람들은 암스텔담으로 피난가야 했다.

 

1)제임스 1세
왕권을 물려줄 후계자가 없던 엘리자베드 1세는 1603년에 메리 스튜어트(피의 여왕 메리가 아니라 스코츠의 메리)의 아들이고 당시 스코틀랜드의 왕이었던 제임스를 승계자로 선포하고 죽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 출신의 제임스 1세는 영국에서 그렇게 환영받지 못했다. 영국과 스코틀랜드를 통일하려는 제임스 1세의 의도는 양국가로부터 모두 거부반응을 일으켰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제임스 1세와 개신교도 사이의 문제였다. 이들 개신교도들은 영국의 종교개혁이 대륙의 개혁 수준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특히 이들은 주로 왕권으로 말미암아 영국이 스코틀랜드보다 종교개혁으로 전진할 수 없었다고 생각하였다. 이들 퓨리탄들은 성경과 종교개혁의 전통을 따라 영국 교회가 답습하고 있는 가톨릭적 예배의 잔재들(십자가 긋기, 성직자의 예복, 제단의 성체 등)을 거부하였고, 성경의 명령에 따라 엄격한 도덕적 삶을 살아야 할 것을 강조하였다. 이들은 교역자에 대하여 엄격하였고 성수주일과 성도의 훈련과 선행을 강조하였으며 술, 극장, 도박을 멀리하였다. 특히 신앙을 물론 교회의 조직과 행정에 이르기까지 성경을 표준으로 하여야 한다고 하며 감독(bishop)제도를 완강히 거부하였다. 신약성경에 다양한 교직의 가능성이 있다고 하면서 주교제도가 신적인 법에 의한 것만은 아니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었다. 보통 장로교제도를 고수하는 장로파와 더 나아가 회중 중심의 개교회주의를 표방하는 독립교파(Independents)가 있었다. 이중 후자 가운데는 성인세례를 강조하는 침례교파도 있었다. 곤잘레스는 이렇게 말했다. "이들 여러 공동체들은 여러 문제에 있어서 의견이 일치하지는 않았지만 주로 칼빈, 쯔빙글리 및 기타 스위스의 개혁자들로부터 영감을 받았고, 어떤 이들은 재세례파에게서 영향받기도 하였다.

이제 엘리자베드 1세가 시도했던 화해의 균형은 깨어지고 예배에 있어서 가톨릭주의로 돌아가려는 영국 성공회와 이를 개혁하려는 퓨리탄 사이의 싸움이 다시 재개되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제임스 1세는 프랑스처럼 절대 왕정체제를 이룩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에서 영국 교회의 감독체제를 강화시키려 하였다. 이른바 "주교들이 없이는 왕도 없다."는 정책을 펴나갔던 것이다. 그는 장로교적 개혁이 성공한 스코틀랜드에서 지지를 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이처럼 영국에 집중한 것 같다. 그가 펼친 종교정책은 엘리자베드 1세와 비슷한 것이었다. 그가 재세례파에 대해서 조직적인 박해를 가한 것은 그들이 왕권을 위협하는 평등사상을 지녔기 때문이었다. 가톨릭에 대해서는 왕권에 협조하는 한 거세하지 않았으나 이들이 교황에 충성을 다하는 한 잠정적인 반역자로 볼 수밖에 없었다. 한편, 제임스 1세는 스코틀랜드의 장로교를 증오했지만 영국의 장로교에는 어느 정도 관용을 베풀었다. 그러나 그가 무엇보다도 영국 교회의 감독제도를 고수한 것은 이들 주교들이 왕권을 가장 잘 옹호해 주었기 때문이다.

제임스 1세의 치하에서 영국 국가교회와 퓨리탄 사이의 갈등이 점증되었다. 1603년, 제임스 1세는 런던으로 가는 도중에 온건한 청교도들의 요구가 들어 있는 "1천 명의 청원서"를 받았다. 그 결과 헴톤 코트에서 어전회의가 열렸는데 여기서 런던 주교 뱅크로프트(Richard Bancroft)가 왕을 지지하며 성공회의 대표로 활약하였다. 이 때 퓨리탄의 요구는 거의 무시되었고 성경번역만 받아들여졌다. 1604년 뱅크로프트는 감독 계층질서야말로 신적 기원을 갖는 제도이며 이것이 없이는 참교회가 없다는 내용의 법을 통과시켰다. 이에 대해 퓨리탄들은 다시 감독제도를 거부하고 대륙의 종교개혁 전통에 호소하였다. 또한 하원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퓨리탄들은 제임스 1세가 새로운 세금부과를 위해 소집한 국회에서 뱅크로프트 법안의 철회를 왕에게 요구하였다. 그러나 장로교체제를 사단적인 것으로까지 보는 철저한 감독주의자 제임스 1세는 이를 무시했고, 1611년 영어번역 성경인 "킹 제임스 버전"(King James Version)을 출판했을 뿐이었다. 이같이 국회의 하원과 보수적인 주교들의 갈등이 지속되는 가운데 주교들은 완전히 왕권에 야합하였고, 1606년에는 보다 강한 반퓨리탄적 법률안이 통과되었다. 이것은 바로 시민전쟁의 전주곡이었다. 이렇게 제임스 1세는 장로교제도를 배격하는 한편 주교제도를 조종하고 강화시켰다. 그는 장로교총회까지 소집하여 이에 반대하는 장로교인들을 추방시켰다. 1610년경에는 그의 세력이 크게 득세하였다. 그는 2명의 대주교를 머리고 하는 어용기구를 만들었고 1612년에는 국회를 통하여 자신의 감독체제를 재인가하도록 하였다. 더욱이 1618년에는 '스포츠론'(The Book of Sports)을 펼침으로써 성수주일 대신 스포츠와 댄스를 장려하였다. 이러한 제임스 1세의 처사가 퓨리탄들의 분노를 일으켰다. 그가 국회를 자의적으로 다룬 것, 30전 전쟁의 초기에 독일의 개신교를 성공적으로 지원하지 못한 것, 국민의 여론에 상관없이 스페인 공주와 무리하게 결혼시키려다 실패한 것 등 이러한 일련의 실정은 하원을 완전히 퓨리탄 편에 서게 하였던 것이다.

훗날 크게 영향력을 갖게 된 분리주의운동도 이 제임스 1세 때에 시작되었다. 스미스(John Smyth :?-1612년), 브루스터(William Brewster :?-1644년), 브래드포드(W. Bradford :?-1657년), 로빈슨(John Robinson :?-1625년) 등이 세운 공동체들이 분리주의를 지향했는데, 이들은 큰 억압과 박해 속에 네덜란드로 이주하였다. 이들 중 암스텔담으로 이주한 스미스는 재세례를 주장하여 최초의 침례교회를 이룩하였고 네덜란드의 재세례파인 메노나이트와 합류하였다. 같은 시기에 라이든에 있던 로빈슨교회 출신의 야곱(Henry Jacob :?-1624년)과 네덜란드로 추방당한 유명한 신학자 에임즈(W. Ames :?-1633년)와 퓨리탄 작가인 브래드쇼(W. Bradshaw :?-1618년)등은 새로운 퓨리탄적 입장을 내세웠다. 이들은 독립교파 혹은 비분리주의적 회중교회의 입장을 택했는데 이것이 현대 회중교회(Congregationalism)의 모태가 되었다. 이들은 영국 국교인 성공회로부터 분리하지 않은 채 영국 전역에 퍼진 각각의 회중교회를 한데 묶으려 하였다. 그리고 1630년에는 야곱의 교회에서 떨어져 나온 적은 무리가 신자의 재세례를 주장하며 제한 속죄와 예정을 긴밀히 연결시켰다. 이들은 1641년 침례를 주장하여 이 침례를 영국의 모든 침례교파에 파급시켰다. 바로 이들이 제 2침례교, 곧 칼빈적 침례교파이다. 비분리주의자의 교회인 라이든교회 역사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사건은 그들 중 적극적이고 활동적인 소수를 미국으로 보낸 사건이었다. 1620년, "Pilgrim Fathers"들은 브루스터의 지도하에 메이 플라워호를 타고 대서양을 건넜다. 1620년 12월 21일에 이들은 플리마우스에 도착하였다. 이리하여 회중교회는 뉴잉글랜드에 정착하게 되었다.

 

2)찰스 1세
제임스 1세를 승계한 그의 아들 찰스 1세(1625-1645년)는 영국과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를 함께 다스렸다. 찰스 1세 역시 강력한 중앙집권적 왕정체제를 원했기 때문에 곧 퓨리탄들이 다수인 국회와 충돌하였다. 먼저 찰스 1세는 가톨릭계인 프랑스 왕의 누이와 결혼하기 위해 국내의 가톨릭세력과 야합하였다. 또한 하원이 투옥시키기로 결의한 왕권신수설자 몬텍(Richard Montague)을 자신의 궁정 채플린으로 삼았다. 그리고 버킹햄의 공작을 왕의 직속상관으로 삼아 국회와 상의없이 국정을 처리하였고, 국회가 버킹햄 공작을 국가반역죄로 고발하자 오히려 국회를 해산하였다. 교회와 국가의 요직은 고교회(high-church) 사람들에게 돌아갔다. 또한 국회와의 화해를 시도한 캔터베리 대주교에게서 모든 권한을 박탈하여 퓨리탄을 증오하는 로드(William Laud)에게 모든 권세를 부여하였다. 로드는 제임스 1세 치하의 성공회 소장파 지도자로서 일찍이 1604년에 "감독없이 참교회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한 철저한 반칿ㄴ주의자였다. 그는 영국 성공회가 로마 가톨릭교회의 가장 순수한 가지라고 주장하였다. 찰스 1세는 이런 로드를 1628년에 런던의 퓨리탄 교구의 감독자리에 앉혔고 이어 1633년에 캔터베리의 대주교에 임명하였다. 로드는 버킹햄 공작이 암살된 이후에 찰스 1세의 정치고문의 역할까지 하였다. 그리하여 찰스 1세는 늘 하원과 충돌하였다. 이 하원의 중심세력은 지방의 상류사회 인사들인 강력한 칼빈주의자로서 국회의 동의가 없는 세금부화를 절대 허용하지 않았다. 이렇게 모든 정책에서 국회롸 충돌한 찰스 1세는 1629년에 그의 치하에서 세 번째로 국회를 해산하였고 이후 11년 동안 독재 정치를 했다.  기간에 귀족과 부유층은 그래도 괜찮았으나 노동자, 농민, 상인들은 도저히 살 수가 없었다.

1633년 캔터베리의 대주교가 된 로드는 영국 성공회의 대변인으로서 국가와 야합하여 퓨리탄들을 고문하고 처형하였다. 그는 퓨리탄의 설교를 금하고, 제임스 1세의 '스포츠론'을 재발간하였다. 이 같은 억압 때문에 퓨리탄들은 미국 이민을 계획하였다. 이들은 설교의 자유와 교회조직의 자유를 갈망하였다. 1628년에 매사추세츠로의 이민이 시작되었다. 찰스 1세는 매사추세츠를 식민지화하는 칙허장을 1629년에 만들어 주었고 이로 인해 살렘에 교회가 설립되었다. 1630년에 윈트롭(John Wintrop :?-1649년) 지도하에 많은 사람이 이주해 왔다. 이후 매사추세츠에 강한 교회들이 세워졌다. 보스톤의 커튼(John Cotton :?-1652년)과 도르체스터의 마터(Richard Mather :?-1669년)는 이 지역의 유능한 목사들이었다. 이어서 커넥티컷주는 1636년에 뉴헤이븐은 1638년에 식민지가 되었다. 여기서 커넥티컷의 하트포드의 목사였던 후커(Thomas Hooker :?-1647년)와 뉴헤이븐의 영적 지도자 대븐포트(John Davenport :?-1670년)가 유명했다. 이들은 성경을 삶과 교회정치의 규범으로 여긴 엄격한 퓨리탄이었지만 분리주의를 싫어한 영국 국교회의 목사였다. 이들은 그의 동료인 비분리적 회중교회주의자들이 잉글랜드에서 할 수 없었던 것을 뉴잉글랜드에서 해낼 수 있었다. 이들은 국법하에서 회중교회를 건설하였던 것이다. 1640년까지 미국으로 건너간 퓨리탄의 수는 적어도 2만명 이상이었다.

찰스 1세가 로드에게 스코틀랜드에서도 주교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하자 로드는 스코틀랜드에 성공회의 예배의식을 강요하였다. 이 일로 인해 스코틀랜드에서 폭동이 있어났다. 1637년 7년 23일, 에딘버러가 봉기하였고 전스코틀랜드가 로드를 반대하는 불길로 뒤덮였다. 1638년 참된 종교를 변호하는 국가 차원의 계약(national covenant)이 서명되었고, 12월의 장로교총회에서는 감독들을 몰아내고 제임스와 찰스가 수립한 교회구조를 전적으로 배격하였다. 그리고 이것을 무산시키려는 왕의 신하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총회는 왕의 명령을 거부하고 감독체제를 없애고 장로교체제를 확립해 버렸다. 이로써 전쟁이 불가피해졌다. 이때 재정난에 허덕이던 찰스 1세는 아일랜드계 신하들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기대하였으나 그 결과 스코틀랜드의 칼빈주의자와 영국의 퓨리탄을 더욱 가깝게 했을 뿐이다. 왕은 국회의 하원이 전쟁수행에 필요한 세금부과를 거부하자 국회를 해산시켰다. 이것을 '단기국회'(Short Parliament)라고 한다. 이러한 와중에서 스코틀랜드는 영국 영토를 침략해 들어왔고 왕의 군대는 무질서하게 도망하였다. 할 수 없이 찰스 1세는 다시 국회를 소집하였는데 이것이 영국역사상 유명한 '장기국회'(Long Parliament)이다

 

3) 장기국회
왕은 영국 영토에서 스코틀랜드 반란자들을 몰아내기 위한 예산을 얻기 위해 국회를 소집한 것이다. 그러나 국회는 스코틀랜드 장로교를 지지했기 때문에 안건처리에 늑장을 부렸다. 이 국회는 최초로 최근 퓨리탄이즘을 박멸하려는 사람들에 대한 조치를 취했다. 예컨대 왕의 충성스러운 신하 스트레포트를 재판을 거쳐 사형시켰는데 왕이 속수무책이었다. 1641년 국회는 국회의 동의없이 왕이 국회를 해산하지 못한다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그런데 막상 국회가 스코틀랜드 반란자들의 축출을 위한 예산문제를 심의하게 되자 왕은 국회의 힘을 거세하기 위해 스코틀랜드와 협상하였다. 아일랜드에서도 가톨릭의 반란이 일어났다. 이것은 국회를 당황시키고 왕에게 군비를 조달해 주기 위해서 황후에 의하여 종용되어 일어난 것이었다.

한편, 상원의원 가운데 찰스를 지지하는 감독들이 많았다. 이제 이들에 대립하고 있던 하원이 이들 감독들을 고발하였고 런던 시민들은 국회에 등원하려는 감독들을 쫓아냈다. 하원은 더 나아가 아일랜드에서 가톨릭의 반란을 종용한 왕후를 재판하려는 계획을 발표하였다. 이 같은 극단적 조처에 대해 왕은 하원의원들을 상원 앞에서 조급히 고발하였다. 왕은 이들을 체포하라고 명령하였으나 국회는 이 명령을 거부하였다. 다음날 국회의 하원은 런던으로 피해 가서 시민들의 지지 속에 상원으로부터 감독들을 추방시키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점차 국회는 반퓨리탄적 인사들을 국회로부터 몰아냈다. 이리하여 왕의 군대와 국회군이 대결하는 시민 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4) 시민전쟁
찰스 1세와 국회는 각각 군대를 모았다. 찰스는 귀족과 기사계급으로부터 지지를 받았고 국회는 최근 고통을 당하고 있던 하층계급의 지지를 받았다. 이에 대해 가톨릭인 아일랜드는 찰스를 지원했고, 장로교의 스코틀랜드는 국회를 지원했다. 국회는 스코틀랜드로부터 지지를 얻기 위해서 장로교를 더욱 지지하는 정책을 폈다. 퓨리탄이라고 해서 모드 장로교체제를 따른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감독체제를 폐지하는 데에는 일치하였다. 그것은 감독들이 왕을 지지했기 때문이고 또 신학적인 이유도 있었지만 이 감독들의 재산을 몰수함으로써 새로운 세금부과없이 전쟁비용을 충당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회는 1643년이 다 가기 전에 감독제도를 철폐하고 장로교적 신조와 교회정치의 수립을 위한 법안을 통과시켜야 했기 때문에 이를 위해 신학자들의 회의를 소집하였다. 이것이 그 유명한 '웨스트민스터총회'이다. 이 회의에는 121명의 목사, 국회를 대표하는 평신도 30명, 스코틀랜드 대표 8명이 참석하였다. 이중 군대의 힘이 가장 컸던 스코틀랜드 대표가 이 회의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들 중에는 독립파로서 회중교회를 선호하는 이들도 있었고 감독체제를 옹호하는 이들도 있었으나 총회는 영국 교회를 위해 장로교적 정치형태를 확정하였다. 장로교체제를 받아들이지 않던 국회 안의 독립파들도 전쟁의 상황이었기 때문에 장로교를 표방하는 스코틀랜드측의 Solemn League and Covenant를 지지할 수밖에 없었다. 웨스트민스터총회는 1644년에 '예배지침'(Directory of Worship)을 국회에 제출했고 철두철미한 장로교주의로 관철시켰다. 다음해에 국회는 성공회의 '예배모범'(Book of Common Prayer)을 철폐하고 위의 '예배지침'으로 대치시켰다. 또한 국회는 어느 정도 머뭇거리다가 1646년과 1647년에 장로교적 교회정치를 전국에 선포하였다. 그러나 이 일은 완전히 실행되지 못했다. 그리고 로드 감독은 1645년에 국회의 탄핵에 따라 처형되었다.

웨스트민스터총회는 그 유명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작성하여 1646년에 국회에 상정하였다. 1647년 8월 27일 스코틀랜드의 총회가 그것을 채택한 이래 그것은 스코틀랜드와 미국의 표준적 신앙고백으로 남아 있다. 반면 영국 국회는 1648년에 그것을 수정하여 채택하였다. 그리고 웨스트민스터총회는 1647년에 설교자의 성경해석을 위한 '대요리문답'과 주로 교육용인 '소요리문답'을 작성하였다. 1648년에 영국 국회와 스코틀랜드총회는 이 둘을 인정하고 받아들였다.
시민전쟁은 이 같은 신학적 토론이 진행되는 상황에서 시작되었다. 1644년 7월 3일 왕의 군대는 욕(York)지방 근처에서 전쟁의 경험도 크게 없던 크롬웰(Oliver Cromwell)의 '신앙인' 군대에 의해 참패당했다. 크롬웰은 헨리 8세의 고문의 후손으로 부유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몇 년 전에 퓨리탄이 되어 성경을 열심히 읽는 사람이었다. 그는 신의 뜻에 따라 내린 결정을 끝까지 밀고나가는 사람이어서 동료 퓨리탄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시민전쟁이 발발하기 전에는 하원의 한 국회의원일 뿐이었다. 이제 사태의 진전을 관망하던 크롬웰은 전쟁준비의 필요성을 예감하고 고향에 돌아가 강한 기병대를 조직하여 왕의 기병대에 대처하였다. 드디어 전국회군이 그의 열심에 영향받아 막강한 군대가 구성되었고, 마침내 네이즈비(Naseby)전투(1645년)에서 왕의 군대를 완전히 무찔렀던 것이다. 이 전쟁은 왕의 운명을 결정짓게 했다. 크롬웰이 이끄는 혁명군은 왕의 군영을 점령했을 때 왕이 외국의 가톨릭군대를 끌어들였다는 증거를 확보할 수 있었다. 이때 왕은 스코틀랜드 사람들과 협상하려 하였지만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도리어 왕을 국회군에게 넘겼다. 이제 전쟁에 승리한 국회는 성수주일에 관한 항목을 포함한 일련의 퓨리탄적 지침을 채택하였다.

그러나 퓨리탄들은 곧 내부 분열의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이제 국회의 다수파였던 장로파와 군대의 다수파였던 독립파 사이에 갈등이 시작된 것이다. 독립파의 입장에서 볼 때 장로교체제의 국가교회는 성경에 대한 순종의 자유를 빼앗는 것이었다. 1646년, 국회는 군대를 해산하려 하였으나 성공할 수 없었다. 이제 '제 5왕국'(Fifth Monarchy)과 '평준화의 역군들'(Levellers)이라고 불리는 보다 과격한 그룹이 군대에서 세력을 얻었다. 이들 가운데는 주님의 임박한 재림에 근거하여 과격한 사회개혁을 요구하는 이들도 있었다. 상인들이 다수였던 국회가 군대에 강력히 반발하자 군대는 자신들이 국민 대다수를 대표한다는 이유로 자신들의 우위를 주장했다.

이렇게 군대와 국회가 싸우고 있을 때 찰스 1세가 도망쳤다. 그후 왕은 스코틀랜드, 군대, 국회와 각각 서로 모순되는 약속을 하면서 협상을 벌였다. 그는 스코틀랜드와 영국에 장로교를 확립하겠다고 약속함으로써 스코틀랜드의 지지를 얻어내는 한편 국회와도 비밀리에 접촉을 계속했다. 그러나 퓨리탄군대는 왕과 동맹을 맺은 스코틀랜드군대를 격파하고 왕의 소유를 몰수하였다. 이어서 군대는 국회의 숙정을 단행하였다. 국회의 55지도자들이 체포되었고 더 많은 의원들이 자격정지를 당했다. 회의 참가를 거부하는 이들도 많게 되자 국회는 남아 있는 사람들에 의해 진행되었다. 이것을 '잔여국회'(Rump Parliament)라 부르는데 바로 이 잔여국회가 찰스 1세를 시민전쟁의 주범으로 고소하였다. 이에 대해 14명의 상원의원이 반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하원은 계속 이 재판을 진행시켜 결국 왕의 목을 베었다.(1649년)

 

5) 크롬웰의 호민관정치
이후 영국은 심각한 무정부적 상태에 빠졌다. 스코틀랜드는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기 위하여 오히려 목베임을 당한 찰스 1세의 아들 찰스 2세를 급히 왕으로 추대하였다. 아일랜드도 반란의 기회를 잡았다. 한편, 영국의 퓨리탄들도 분열되고 있었다. 보다 과격한 그룹인 '땅파는 사람들'(Diggers:1649년에 등장하여 사유재산제도를 거부하고 토지의 공유를 주장함)이 강세를 보이면서 일찍이 왕에게 항거하여 국회를 지지해 온 상인계층이 위협을 느끼기 시작했다. 다른 한편, 장로교인들은 독립파가 싫어하는 국가교회를 기획하였다.

크롬웰이 정권을 잡게 된 것은 이러한 상황에서였다. 크롬웰은 국회의 숙정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으나 그 결과를 인정하였고 잔여국회의 이름으로 아일랜드의 반란을 진압하고 스코틀랜드의 소요를 진정시켰다. 그래서 찰스 2세는 대륙으로 피난가야 했다. 그런데 크롬웰은 왕이 하지 못한 것을 하기로 결심하였다. 즉, 그는 몇 명 안 남은 잔여국회가 자신들의 정권을 영속화하려는 법률을 통과시키려하자 이 국회의원들을 축출해 버리고 의회건물을 폐쇄하였다. 이것은 본래 크롬웰의 본래의 의도와는 모순되는 것이었다. 그는 얼마 동안 의회정치로 복귀하려고 하다가 결국 '호민관'(Laud Protector) 정치를 택했다. 명목상으로는 영국,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의 대표로 구성된 국회의 도움을 받아 통치하는 것이었으나 결국 새로운 국회는 영국계로 구성되었고 크롬웰이 실권자로 등장하였다.

크롬웰은 교회와 국가를 개혁하려는 계획을 실천하기 시작했다. 그의 종교정책은 당시의 분위기에 걸맞게 상당히 관용적이었다. 비록 그가 '독립파'에 속하였고 전쟁발발 이후 2천 명의 감독주의 교역자들이 퇴위했지만 그는 장로교, 침례교, 심지어 온전한 감독주의자까지 포용했다. 그는 진정한 퓨리탄으로서 주일, 경마, 닭싸움, 극장 등에 대한 관습을 개혁하려고 시도하였다. 그가 특별히 신경을 쓴 경제정책은 중류계층과 어느 정도 가난한 자들의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귀족계층은 이에 반대하였다. 호민관통치가 계속되면서 이에 반대하는 세력이 귀족과 극빈자 사이에 점증하였다. 크롬웰은 남은 생애 동안 나라를 그의 의도대로 통치할 수 있었지만 안정된 공화국을 창조하려는 그의 꿈은 실현할 수는 없었다. 그도 역시 국회와 사이좋게 지낼 수 없었다. 그가 공화국건설에 노력했다는 것은 왕관을 거부한 것에서 잘 나타난다. 그는 죽기(1658년) 직전 그의 아들 리차드 크롬웰을 후계자로 세웠지만 그는 무능력하여 그의 자리를 내놓아야 했다.

 

6) 왕정복고
호민관 정치(공화국)의 실패는 왕정의 복귀를 가져왔다. 국회는 다시 찰스 2세를 아버지의 자리에 올려놓았고 퓨리탄들은 이에 항거하였다. 처음에 찰스 2세는 국교 안에서 장로교의 자리를 확보해주려 노력하여 퓨리탄 출신의 레이놀즈(Edward Raynolds:?-1676년)를 노르위치의 감독으로 삼았고, 비록 거절당했지만 장로교파인 박스터(Richard Baxter:?-1691년)에게 감독자리를 주려 했다. 그러나 왕정복고 후 등장한 새 국회는 그와 같은 계획을 반대하고 전통적 감독제도를 선호하였다. 그리하여 1622년에 감독제도와 국교회(성공회)의 '예배모범'이 부활하였고, 비국교도를 탄압하는 법(Act of Uniformity)이 통과되었다. 이 법에 대하여 1만 8천 명의 목사가 반대하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이와 같은 법률안은 청교도의 여러 분파운동을 제압할 수 없었다. 이 운동들은 법률의 테두리 밖에서 계속 진행되었고 17세기 말에 가서 마침내 관용이 선포되게 된다.

왕정복고의 결과가 심각했던 나라는 이전부터 장로교가 막강했던 스코틀랜드였다. 감독체제가 복귀되자 장로교 목사들은 자리에서 쫓겨났고 이로 인해 폭동과 반란이 일어났다. 스코틀랜드 수장(prelate) 샤프(James sharp)가 암살당했고, 영국의 개입으로 장로교인들은 많은 피를 흘려야 했다.
찰스 2세는 그의 임종시에 자신을 가톨릭신자로 선언하였다. 이것은 당시 박해를 받고 있었던 퓨리탄들과 스코틀랜드의 장로교인들의 의심을 강화시켰다. 찰스 2세를 승계한 그의 형 제임스 2세는 공공연한 가톨릭 신자였다. 그는 영국에서 종교적 관용을 선포하여 비국교도의 지지를 얻으려 하였다. 그러나 비국교도의 반가톨릭적 감정은 너무 거세어서 가톨릭의 부활을 허용하기 위한 종교적 관용이라면 차라리 관용의 혜택을 포기할 정도였다. 스코틀랜드에서는 마침내 제임스 2세(스코틀랜드의 제임스 7세)가 승인되지 아니한 예배에 참석하는 자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법률을 공포하였고 가톨릭 사람들에게 권력의 자리를 주었다. 제임스 2세 치하에서 3년을 보낸 후 드디어 영국 국회는 반란을 일으키고 오렌지공 윌리엄과 그의 부인 메리(제임스 2세의 딸)에게 왕위를 넘겨 주었다. 윌리엄은 1688년 그의 군대를 이끌고 영국에 상륙하였고, 제임스 2세는 프랑스로 도피하였다. 스코틀랜드에서는 제임스 2세의 지지자들이 몇 달 동안 저항하다가 다음해에 굴복하여 윌리엄(III)과 메리(II)가 스코틀랜드의 왕관을 차지했다. 이로써 1689년 5월 11일에 혁명이 완전히 성공한 것이다.
이 명예혁명으로 비국교도인 개신교도에게 관용이 주어졌다. 이제 "관용법"(Toleration Act, 1689.5.24)에 의하여 윌리엄과 메리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모든 사람들은 교황의 법적 통치를 거부하고 화체설, 미사, 마리아숭배와 성자숭배를 배격하고 39개 조항(1562년)의 교리에 서명하였다. 이 서약을 거부하는 사람들(nonjurors)도 왕권에 대항하여 모반을 꾀하지 않는 한 관용을 얻을 수 있었다. 1690년에 국회는 1661년 이래로 추방되었던 모든 장로교 목사들을 복직시키고 장로교주의를 공식 교회형태로 선포하였다. 1707년 영국과 스코틀랜드는 하나의 대영제국으로 통합되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 교회의 독립적 권리는 보장되었다. 그러나 1712년에 앤(Anne)여왕은 두 개의 법률안을 통과시켰다. 하나는 감독주의를 널리 관용한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왕이나 영주들이 장로교 목사들을 낯선 교구에도 강제로 임명할 수 있다는 것으로서 이는 계속해서 큰 분쟁의 불씨를 안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코틀랜드에서는 장로교가 국가의 공식 종교로 되었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교리적 규범으로 확정되었다.

이상의 영국 교회의 역사에서 우리는 국가의 비호 아래 있는 영국의 국교(성공회)와 비국교도 사이의 업치락 뒷치락하는 투쟁의 역사를 본다. 정말 많은 사람이 피를 흘려야 했던 역사였다. 적어도 이 같은 종교로 말미암은 싸움은 30년 전쟁과 더불어 17세기 유럽의 교파적 배타주의와 교리적 절대주의의 맥락 속에 있는 것이 확실하다. 하지만 왕정복고 이후에도 퓨리탄의 이상은 계속 유지되었고 영국 국민의 정서에 큰 영향을 주었다. 번연의 '순례자의 길'(Pilgrim's Progress)은 널리 알려진 경건문학이 되었고, 밀턴의 '실락원'(Paradise Lost)은 영어권 세계의 성경해석에도 크게 영향을 끼쳤다.

 

출처: http://cafe.daum.net/jkrubber/SkMd/2?docid=4046516116&q=%C1%A4%C5%EB%C1%D6%C0%C7&r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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