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로 건너뛰기

조직신학

재림 신앙과 교회의 시대적 사명

작성자
쥬니어칼빈
작성일
2013-08-01 01:58
조회
5437

재림 신앙과 교회의 시대적 사명

송영찬 목사, 기독교개혁신보 편집국장

 

 

첨부파일 1thesch5.hwp

 


데살로니가전후서는 바울의 다른 서신서들에 비해 미래, 즉 종말이라는 주제들로 지배된다는 점에서 현저하게 구별된다. 이것은 자신들의 믿음을 포기하라는 압력을 받고 있는 신자들을 격려하기 위해 기록된 이 서신의 특성과도 연결된다.
때문에 바울은 데살로니가 신자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회심하였다는 의미에 대해 보다 상세하게 논증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회심 경험은 성령에 감동된 복음 전파와 성령에 감동된 청중들의 반응에서 나타나는 결과임을 강조해야 했다(I. Howard Marshall).

이에 본문에서는 재림 신앙을 가진 교회와 성도들이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함께 점검하고자 한다.

 

1. 그리스도의 강림과 그에 대한 소망

 

1) 회심을 통해 가지는 재림에 대한 소망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은 너희 아는 바와 같으니라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다"(살전 1:5-6)는 사실은 데살로니가 신자들이 우상을 버리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 돌아온 회심의 성격을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 회심의 내용에는 신자들이 되어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뿐 아니라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올 것을 기다리는 소망도 내포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데살로니가전후서가 재림 소망에 집중하고 있다는 사실은 처음부터 부각된다(James D. G. Dunn).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린다"(살전 1:9-10)는 바울의 말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회심'과 재림에 대한 '소망'이 서로 다르지 않고 하나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회심과 소망은 이 땅에서 고난 받으며 살고 있는 데살로니가 성도들로 하여금 "이는 너희를 부르사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살전 2:12)는 삶의 척도로 작용하게 만들었다.
사실 사도들의 주된 사역은 신자들을 믿음으로 인도하는 것으로 사도들이 얼마나 이 사역에 충성했는가 하는 결과에 대해서는 주께서 오시는 날 판단 받게 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바울의 '소망이요 기쁨이며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서 자랑의 면류관'(살전 2:19-20)이었다.
그러므로 사도들에게 있어서 간절한 소망은 자신들을 통해 회심한 신자들이 그 날에 흠이 없고 거룩해지는 것에 있었다. 바울은 '너희 마음을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기'를 위해 기도한다(살전 3:13). 이때 사도들에 의해 회심한 흠 없고 거룩한 신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승리하신 전리품으로 사도들에 의해 주님께 드려진다.
특별히 데살로니가는 디오니소스 숭배(Dionysus cult)와 카비루스 숭배(Cabirus cult)라는 토착 종교 영향이 강력하게 작용하는 곳이었다. 디오니소스 숭배는 자유로운 성생활과 연결되어 있으며 카비루스 숭배는 일종의 신비적 부활 신앙과 연결되어 있었다(김세윤). 이와 같은 토착 종교의 영향력이 강하게 지배하는 상황에서 데살로니가 신자들이 흠 없고 거룩한 성도들로 마지막 날에 주님께 바쳐지기 위해서는 보다 상세한 설명과 이해가 전제되어야 했다.
이런 점에서 데살로니가전서는 다른 서신들에 비해 흠 없고 거룩한 삶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주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행하는 일에 더욱 많이 힘쓰라'(살전 4:1)는 바울의 권면은 성적 순결에 대한 권면(살전 4:3-8)과 형제 사랑에 대한 권면(살전 4:9-12)에 이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관련된 주제로 연결된다.
바울은 이미 죽은 성도들이 주의 재림 때 누리게 될 영광을 밝힌 후(살전 4:13-18) 주의 재림의 때와 시기에 대한 오해들을 풀어주고(살전 5:1-11) 이어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성도들이 추구해야 할 삶의 모습들을 제시한다(살전 5:12-22).
이처럼 장황한 설명들은 주께서 재림할 때 성도들로 하여금 그 앞에서 흠 없고 거룩한 모습을 보이기 위함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재림은 흠 없고 거룩한 모습으로 재림을 소망하는 성도들에 대한 보상과 기쁨의 대상이 된다. 상대적으로 이 사실은 주님 앞에서 그렇지 않은 불경건한 자들에게 주어지는 파멸과 심판이라는 측면에서도 기독교적인 삶을 격려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기도 한다(I. Howard Marshall).  

 

2) 그리스도의 강림과 관련된 두 가지 교훈
주 앞에서 흠 없고 거룩한 신자들의 모습과 관련해 바울은 두 가지 면에서 논리를 전개시키고 있다. 하나는 이미 죽었거나 그리스도의 재림 이전에 죽을 신자들이 재림과 관련된 일들에서 어떤 불이익을 당하여 거기에 참여하지 못하리라는 두려움에 대한 가르침이다. 이에 대해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신자들이 먼저 부활하여 하직 살아있는 신자들이 휴거, 즉 들림을 받아서 주님을 만나기 전에 주님을 만날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살전 4:15).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 4:16-17)는 바울의 가르침은 충분히 묵시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서는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는 그리스도, 죽은 자들의 부활, 살아 있는 신자들의 휴거 등이 묵시적으로 묘사되어 있다(I. Howard Marshall). 이때 나팔소리는 천사가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에게 소집 명령을 명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이 나팔소리는 살아 있는 성도들뿐 아니라 죽은 성도들에게도 들리는 것으로 묘사함으로써 극적인 효과를 높이고 있다.
이와 관련해 바울은 서신의 초두에서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가리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살전 1:4)고 호칭하고 있다는 점은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강림에 대한 소망을 확신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때문에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에 그리스도 안에서 잠든 성도들을 깨워서 살아 있는 성도들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밝힘으로써 부활에 대한 데살로니가 신자들의 확신을 굳게 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재림과 관련된 바울의 두 번째 가르침은 그 사건의 시기 및 재림을 위한 준비에 대한 것이다. 재림은 그리스도의 강림을 소망하는 성도들에게는 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그렇지 않은 불경건한 자들에게는 심판의 의미를 동시에 가지기 때문이다.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28-29)고 하신 주님의 말씀처럼 신자들의 부활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지만 그렇지 않은 자들의 부활은 영원한 형벌을 받기 위함이다.

 

2. 그리스도의 강림과 '구원의 소망'

 

그리스도의 강림이 자신들이 살아 있는 시기에 구현될 것으로 믿고 있던 일부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이미 죽은 성도들에 대한 염려를 하는 것에 대해 답변(살전 4:13-18)을 한 바울은 일부 극단적인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강림을 대망하면서 생업을 전폐하고 그날이 도래하기만을 기다리는 잘못된 견해로 말미암아 발생한 문제들에 대해서 답변을 하고 있다.
죽기 전에 주님이 오실 것이라는 소망이 현실적으로 무산된 상황에서 그들은 주님이 언제 오시는가에 대한 의문과 자신들이 하나님의 심판날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는가 하는 문제가 증폭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바울은 때와 기한은 알 수 없지만 늦어지고 있는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확신과 성도들이 신앙하는 부활하신 그분이 곧 심판주로 오신다는 소망을 고취시기며 깨어 근신해야 할 것을 제시하고 있다(살전 5:1-11). 여기에서 바울은 ① 주의 날이 가지고 있는 성격(살전 5:1-3), ② 주의 날에 대한 경계(살전 5:4-8), ③ 주의 날을 앞둔 성도들의 자세(살전 5:9-11)에 대해 가르치고 있다.

 

1) 주께서 강림하시는 날의 성격
바울에게 부활의 소망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토대를 둔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강림이 언제 실현될 것인가는 이차적인 문제였다. 바울은 어디에서도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시는 시기를 알아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재림이 지연된다고 해서 그것이 종말론적인 신앙까지 변질시키는 것이 아니며 소망이 약해지는 이유도 될 수 없었다(F. F. Bruce). 오히려 그리스도의 강림을 소망하는 성도들은 종말론적 소망을 가지고 그날을 기다리며 준비해야 한다. 데살로니가 성도들 역시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때문에 바울은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주의 날이 밤에 도적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살전 5:1-2)고 말한다. 이 문단에서도 4장 9절과 마찬가지로 '-에 대하여'(       )로 시작되며 '주의 날'이 언제인지 그 '때와 시기'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가 없다고 함으로써 오히려 이 주제에 대한 관심을 갖도록 유도하는 역언법(paraleipsis, 逆言法)이 사용되었다.
본문에서 '때'(      )는 일반적으로 달력에서 말하는 시간을 가리키는 반면에서 '시기'(      )는 하나님의 구원사에서 특별히 의미 있고 중요한 결정적인 기회를 말하는 것이라고 일반적으로 이해되어 왔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이 두 단어의 용법을 구별하지 않고 일종의 관용적이 표현으로 이해한다. 이것은 동의어를 거듭 사용함으로써 그 의미를 강조하는 수사법의 하나로 용어법(pleonasm, 冗語法)이라고 한다(김세윤).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이미 '주의 날'에 일어날 사건들을 대략적으로 가르쳤기 때문에(살후 2:5 참고) 그들에게 '때와 시기'에 대해 다시 언급할 이유가 없다고 말하면서 오히려 여기에서 '때와 시기'에 대해 새롭게 가르칠 내용이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 내용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주의 날이 밤에 도적같이 임한다'는 주제어로 제시되고 있다.
'주의 날'(        )은 구약에서 예언된 '심판의 날'이었다(사 2:12-22; 렘 46:10; 겔 30:2; 암 5:18-20; 습 1:14-18). 이날은 여호와께서 자신의 의로운 뜻을 나타내시고 공정한 심판을 행하시는 날이다(암 5:18; 욜 2:31; 말 4:5). 따라서 '주의 날'이 임한다는 것은 두려움 그 자체였다.
특별히 '주의 날'은 갑작스럽게 임한다는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두려움은 증폭된다. 이러한 내용들은 이미 주님께서 언급하신 내용들에 근거하고 있다(마 24:43; 눅 12:39; 21:34). 여기에 바울은 주의 날이 '밤에' 임한다고 비유함으로써 두려움을 가중시킬 뿐만 아니라 아무도 주의 날에 있을 심판에서 피할 수 없음을 강조하고 있다(김홍전).
무엇보다도 주의 날을 피할 수 없는 이유는 사람들이 '평안과 안전'을 이루었다고 믿는 바로 그 때에 임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잉태한 여자에게 닥쳐올 해산의 고통처럼 결코 피할 수 없다(사 13:8). 일정한 기간이 되면 해산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듯이 어느 누구도 주님의 날을 피해갈 수 없다. 이에 바울은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살전 5:3)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경고는 주께서 경계하신 노아의 때를 연상시키며 소돔과 고모라에 갑작스럽게 재앙이 덮쳤을 때 누구도 그 위험을 눈치채지 못하고 사람들이 일상적인 평안을 추구하던 상황들을 연상시킨다. "번개가 하늘 아래 이편에서 번뜻하여 하늘 아래 저편까지 비췸같이 인자도 자기 날에 그러하리라 ...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니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였으며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서 불과 유황이 비오듯하여 저희를 멸하였느니라"(눅 17:24-30).
이처럼 주님께서 홀연히 등장하게 될 멸망을 경고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그 말을 비웃기라도 하는 것처럼 '평안하다, 안전하다'고 스스로 약속하고 있다. 사람들이 이처럼 치명적인 무감각에 빠지게 되는 것은 주께서 경고하신 말씀이 당장 성취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기들 눈에 드러나 보이지 않는 것은 모두 신화로 돌려버리고 만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주님께서는 오만으로 가득한 이 경솔을 처벌하시는 수단으로 그들에게 갑작스럽게 오시며 모든 사람들의 예상을 뒤엎고 불경건한 자들이 젖어있는 행복의 절정으로부터 그들을 내던지시는 것이다(J. Calvin).

 

2) 신자들에게 있어서 '주의 날'에 대한 이해
초대 교회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      )로 인식하고 고백했다는 것은 '주의 날'이 곧 '그리스도의 날'(빌 1:10; 2:16)이며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날'(고전 1:8)로 인식되었음을 의미한다. 신약 성경의 문맥에서 그 의미가 충분히 나타나 있는 경우에는 '그날'(살전 4:4; 롬 13:12; 고전 3:13; 히 10:25)로 불리거나 '그날에'(살후 1:10)라고 불렸다. 이 날은 그리스도께서 영광스럽게 나타나셔서 자기 백성을 회복하시고 공의로 세상을 심판하시는 날로 인식되었다(행 17:31).
그러므로 신자들에게 있어 '주의 날'은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든 세력들을 다 멸망시키기 위해 오시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날에 그리스도는 모든 사탄의 세력을 전부 멸망시키고 마지막 원수인 죽음까지 멸망시키고는 하나님 아버지께 그의 주권과 왕권을 돌려드리게 된다. 그 결과 아버지 하나님이 온 피조물을 평정하시고 온 피조물이 창조주 하나님의 의와 생명의 통치 아래 있게 된다. 이것을 가리켜 구원의 완성이라고 한다(김세윤).
따라서 주께서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눅 21:36)고 경계하신 것처럼 경성하는 신자들은 구원의 확신을 갖고 기도함으로써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설 수 있게 된다. 이것이 주의 날에 대한 세상 사람들과 다른 신자들의 위상이다. 이에 대해 바울은 "형제들아 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적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살전 5:4)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바울은 재림의 때와 시기가 비록 감추어져 있다 할지라도 성도들에게는 아주 닫혀있는 것이 아님을 암시하고 있다. 그것은 마치 잉태한 여자가 만삭이 되어 어느 날짜에 분만할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분만이 가까웠다는 사실조차 모르지 않는다는 것과 같다. 이런 점에서 성도들에게는 그날이 도적같이 임할 수 없다고 바울은 밝히 말하고 있다.
따라서 '그 날이 도적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라는 말은 예수님이 오시는 때와 시기에 대해 성도들이 전혀 모르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임하다'는 말은 '기습하다'(surprise)는 말로 사도 바울은 주께서 오시리라는 것 때문에 신자들이 놀라는 일이 없을 것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왜냐하면 주의 강림이 성도들을 불시에 습격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Jhon Stott).
본문에서 바울은 어두움(      )과 그날(       ), 즉 밝은 날을 극적으로 대조시키고 있다. 이때 '어두움'은 밤(night)을 '날'은 낮(day)을 각각 상징한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롬 13:12)는 말과 같이 밤과 낮은 서로 극적인 대조를 이룬다.
여기에서 바울은 신자들을 가리켜 어두움의 속성인 '밤'에 속하지 않고 밝음, 즉 빛의 속성인 '낮'에 속한다는 사실을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때 '어두움'과 '빛'은 상대적 속성이 아닌 절대적 속성을 지시한다. 절대적인 어두움과 절대적인 빛에는 그 어느 것도 용납되지 않는다. 따라서 낮과 밤, 어두움과 빛의 대조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극적이다(Beverly R. Gaventa).
밝은 낮에는 도적이 활동하지 않는 것처럼 낮에 속한 성도들에게 있어서 도적같이 임하는 '주의 날'은 해당되지 않는다. 주의 날이 도적 같이 온다는 것은 '밤'에 속한 세상 사람들에게 해당될 뿐이다. 밤은 도적을 위한 시간이며 낮은 진리를 위한 시간이기 때문이다(F. F. Bruce). 따라서 낮에 속한 성도들은 잠을 자서는 안 된다. 잠자는 행위는 밤에 속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성도들로 하여금 항상 경성하여 그날이 언제 오든지 그날을 준비하라는 권면을 하기 위함이다.

 

3) 새 시대에 속한 빛의 자녀들
바울은 성도들을 향해 "너희는 다 빛의 아들(          )이요 낮의 아들(           )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근신할지라"(살전 5:5-6)고 권면하고 있다.
성도들은 한때 어둠이었으나 지금은 주 안에서 빛의 자녀들이 되었다(엡 5:8). 이 말은 주께서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눅 16:8)고 말씀하시면서 이 세대의 아들들과 빛의 아들들을 구분하신 것을 상기시킨다.
성경은 역사를 두 시대로 나눈다. 구약에서는 이것을 악한 시대인 '현세'(또는 이 세대)와 메시아의 시대인 '내세'(또는 오는 세대)로 불렀다. 그리고 두 시대는 밤과 낮으로 비유되었다. 형세는 길고 어두운 밤과 같지만 메시아께서 오실 때면 해가 떠오르고 날이 밝아 오며 세상에는 빛이 넘치게 된다(눅 1:78-79).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랫동안 기다리던 메시아이시며 그 분이 오심으로써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고 가르친다. 예수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새 시대가 시작되었고 날이 밝았음을 알리셨다. 곧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었음을 선포하셨다(막 1:14-15).
그 결과 옛 시대는 끝나고 새 시대가 열렸다. 그러나 '이는 어두움이 지나가고 참 빛이 벌써 비췸이니라'(요일 2:8)고 요한이 말한 것처럼 당분간 이 두 시대는 중복된다. 이때 불신자들은 옛 시대, 즉 어두움에 속하고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신자들은 새 시대, 즉 빛에 속한다. 따라서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내세의 능력을 맛보게 된다(히 6:5).
이미(already) 하나님은 신자들을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셨다(벧전 2:9).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영광 중에 오실 때 이 중복의 기간이 끝나게 된다(not yet). 그때에 옛 시대는 마침내 끝나게 되고 그 시대에 속한 자들은 멸망을 받게 된다. 그리고 새 시대는 완성되고 빛에 속한 신자들은 완전히 최종적인 구원에 이르게 된다(Jhon Stott).
어두움의 아들들(       )은 선택되지 않은 자들과 불경건한 자들을 가리킨다. 반면에 빛의 아들들(       )은 선택된 공동체와 그 지지자들을 의미한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가리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살전 1:4)라고 이미 정의한 바 있다. 따라서 빛의 자녀들은 빛이신 하나님의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결코 어두운 가운데서 행하지 않는다(요일 1:5-6).
오히려 빛의 자녀들은 불가시적이고 영원한 일들, 특히 그리스도의 재림과 그 결과들에 대한 신적 계시의 혜택을 받고 있기 때문에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게 된다(엡 5:8). 그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엡 5:9)으로 압축된다.
성도들은 더 이상 이방인의 어둠이나 율법의 그림자 속에 있지 않고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밝히 드러내는 복음 아래 있다(딤후 1:10). 그러므로 성도들은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근신해야' 한다. 이것은 성도들이 새 시대에 속해 있는지 아니면 잠자는 어두움에 속한 것인지를 판단하는 근거가 된다.
밤에 속한 것과 낮에 속한 것의 차이는 극단적이다. 이에 대해 바울은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되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근신하여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살전 5:7-8)라고 권면하고 있다.
여기에서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앞절의 '자지 말고 오직 깨어 근신할지라'와 극적인 반전을 보임으로써 신자들은 낮에 속한 이상 밤에 속한 것처럼 하지 않고 근신하여 취하지 않으며 깨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로 무장한 그리스도의 군사 이미지로 극대화된다.
'믿음과 사랑'은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갈 5:6)을 의미하며 '흉배'는 하나님의 전신갑주(엡 6:11-18)를 대표한다. '구워의 소망'은 구원이 완성될 미래의 날에 대한 소망을 가리킨다. 이 구원은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에게 약속하신 구원이다(갈 5:5). 여기에서 신자들은 믿음과 사랑과 소망이라는 상중적인 은혜를 가지며 주의 날에 임할 심판에 대비해서 필요한 모든 준비를 갖춘 것으로 묘사된다(F. F. Bruce).
승리를 일구어내는 전사로서 메시아에 대한 이미지는 "의로 호심경(護心鏡)을 삼으시며 구원을 그 머리에 써서 투구를 삼으시고 보수로 속옷을 삼으시며 열심을 입어 겉옷을 삼으시고 그들의 행위대로 갚으시되 그 대적에게 분노하시며 그 원수에게 보응하시며 섬들에게 보복하실 것이라"(사 59:17-18)는 이사야의 예언을 상기시킨다. 이 모습은 그리스도의 재림이라는 승리의 이미지(살전 4:13-18)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신자들은 예수께서 최후에 승리와 함께 재림하심을 아는 '빛의 자녀들'이다(Beverly R. Gaventa).

 

4) 성도들에게 약속된 '구원의 소망'
주의 강림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은 예언서의 고전적인 이미지들과 묵시론적 대비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발전이 주목된다. 빛의 아들들/어둠의 아들들, 자고/깨고, 낮/밤, 정신을 차리고/취하고와 같은 극단적인 대립은 마침내 '구원의 소망'을 기점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신 것이라"(살전 5:9)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James D. G. Dunn). 이 구절은 '이는 장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살전 1:10)는 의미를 재확인하고 있다.
성도들이 구원의 소망을 가지게 되는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이기 때문이다. '노하심'(    )은 마지막 때의 심판이며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노하심'으로부터 구원하신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도록 정하셨다. 이런 점에서 구원(       )은 종말론적인 노하심으로부터 구원(롬 5:9)과 동시에 그리스도와 함께 생명으로 부활할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운 최종적이고 완성된 구원이다(살후 2;13, 14; 히 10:39).
이 완성된 구원은 복음의 모든 복을 내포하는 것으로 ①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현재의 삶과 그리스도와 함께 할 미래의 삶, ② 현재의 삶을 유지해 주시고 미래의 삶을 보증해 주시는 내주하시는 성령, ③ 죄의 지배로부터 구속받음, ④ 하나님의 가족으로 입양됨, ⑤ 점진적으로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감, ⑥ 마지막 때의 노하심으로부터 보호받는 것과 ⑦ 영광된 소망을 포함한다. 이처럼 바울에게 있어서 구원의 개념은 기독교 내에서 실제로 중요한 종교적이고도 윤리적인 모든 개념에 대한 핵심과 기틀을 마련해 준다(F. F. Bruce).
이상의 논제에 대한 최종 결론으로 바울은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살전 5:10)고 선언하고 있다. 앞절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는 여기에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로 그 의미가 확장된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갈 1:4)에서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 아버지의 뜻, 즉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 결과 성도들은 구원의 소망을 이루게 된다.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그리스도의 죽으심 또는 자기 희생에 대한 선언은 항상 그 목적을 표현하는 구절을 동반한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①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심(롬 14:8-9)과 ②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함(고후 5:15)과, ③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함(고후 5:21)에 있다. 여기에 대속의 의미가 담겨 있다. 이때 '우리를 위하여'는 인간을 대신하는 십자가를 지시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을 위해 죽으신 구원의 효능을 표현하고 있는 전치사 '위하여'(    )는 구원론적 의미를 담고 있다(갈 1:4; 고전 15:3; 고후 5:15; 롬 5:6, 8; 8:32; 14:15). 따라서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는 선언은 데살로니가서에서 그리스도의 죽으신 목적, 즉 구원하시려는 목적을 가장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다. 이 선언은 독자들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으며 의심할 바 없이 복음이 처음 그들에게 전파되었을 때 강조되었음이 확실하다.
이런 이유에서 바울은 성도들이 '깨든지 자든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구원하심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음을 강조한다. 이때 '자다'(         )는 말은 죽은 성도들을 지시하고 있다. 조금 전만 하더라도 바울은 '깨어 있는 자', 즉 종말을 대비해 깨어 있는 성도들과 '자고 있는 자', 즉 종말의 때에 대한 관심이 없는 불신자들 사이에 칼 같은 경계를 두었다. 하지만 이미 빛 가운데 있는 성도들에게 있어서 '깨든지 자든지'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구원은 하나님께 있으며 사람의 행위에 있지 않지 않기 때문이다(Beverly R. Gaventa).

 

5) 구원의 소망을 성취하시는 성령

구원은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공로와 은혜에 근거해 있다. 구원은 성도들을 위해 죽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진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약속과 더불어 그리스도의 속죄에 기인하고 구원에 대한 우리의 소망 역시 그 위에 기초되어 있어야 한다. 성도들이 살아 있든지 죽어 있든지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하려고, 즉 영원히 그분과 연합하고 더불어 영광 속에서 살게 하려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로 하여금 깨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는 말씀은 언약의 성격을 가진다. 이것은 어떤 환경에서도 자신의 양떼를 버려 주지 않으며 보호하기 위한 방법을 찾아내는 목자를 비유하고 있는 시편 23편의 위로와 언약을 보여주고 있다. 심지어 죽음조차도 하나님의 손길에서 성도들을 떼어놓지 못한다.
이러한 확신은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롬 14:8)는 말씀에서도 확인된다. 이처럼 어느 누구도, 즉 아니면 이미 죽은 자이든 살아있는 자이든 하나님의 보살핌이 없이는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강림하시는 때와 시간을 몰라 초조해 하는 것은 시간 낭비일 뿐이다(Beverly R. Gaventa). 이러한 위로는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있다는 신학적 사상에 근거할 때에만 비로소 언약으로서 의미를 가지게 된다.
옛 언약은 동물 희생 제사를 통한 죄의 용서를 포함하고 있었다(출 24:6-8). 그러나 이제 제단 위에 받쳐진 흠 없는 양 대신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흠 없는 양'인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쳐 한번에 모든 사람의 죄를 용서하셨다. 예수님은 죄를 위한 마지막 희생 제물이시다. 그의 피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새로운 합의를 인치는 데 사용되었다. 그리고 이 계획은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가운데 성취되었다(벧전 1:18-21).
하나님은 우리가 구원을 얻도록 하기 위해 우리를 세우셨다(9절).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살도록 하기 위해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10절). 그러므로 장차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목적에 의지하고 있으며 우리의 미래에 받을 생명은 그리스도의 죽음에 의지하고 있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뜻과 그리스도의 죽으심이라는 굳건한 반석 위에 서 있으며 우리 자신의 업적이나 감정 위에 서 있지 않다. 따라서 '구원의 소망'은 우리가 누구인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나타나신 하나님이 누구인가에 달려 있다. 하나님은 구원과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다(Jhon Stott).
이제 바울은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피차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같이 하라"(살전 5:11)는 권면으로 종말에 대한 가르침에 결론을 내리고 있다. '피차 권면하라'는 말은 여기에서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하나는 박해 가운데 있으며 사랑하는 신자들을 먼저 보낸 깊은 슬픔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은 이미 죽은 모든 신자들과 미래에 분명히 재회할 것(살전 4:13-18)과 또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영생의 약속(살전 5:9-8)을 상기함으로써 서로 권면해야 한다(Grant Osborne).
이렇게 함으로써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 중에서 극단적 종말론에 빠져 있는 오해를 수정시키고 있다. 진정한 종말론적 소망은 결코 게으름에 대한 변명일 수 없다. 오히려 태만해지고 싶은 유혹에 빠진 사람들을 서로 도움으로써 함께 영적 성숙에 도달해야 한다. 왜냐하면 진정한 재림에 대한 소망은 성도들의 삶과 행위에 있어서 그들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유발하시는 능력(살전 4:8)을 공급받는 사실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때 내주하시는 성령은 재림에 대한 소망을 통해 현재의 생활 가운데서 윤리적인 결실을 맺게 하시는 분이시다.
따라서 성도들은 어려운 문제들을 다룰 때 믿음으로 피차 덕을 세워주고 그리스도의 재림을 준비하기 위해 서로 힘을 써야 한다(살전 5:1-18). 이런 점에서 바울은 '피차 덕을 세우라'고 말한다. 즉 성도들은 영적으로 서로 도움으로써 교회 전체의 덕이 사랑으로 세워지는 것처럼(고전 8:1) 종말론적 소망을 가지고 상호간의 도움을 통해 데살로니가 공동체가 영적으로 성숙에 이르도록 해야 할 의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F. F. Bruce).

 

3. 재림 신앙을 가진 교회 공동체의 삶

 

성도들의 도덕적 순결과 형제에 대한 사랑과 근면한 삶에 대한 권면(살전 4:1-12)에 이은 종말에 대한 가르침과 권면(살전 4:13-5:11)을 마친 바울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성도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권면으로 주제를 바꾸고 있다. 이 주제의 핵심은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 5:22)에 집중되어 있다. 이 핵심 내용은 권면을 시작할 때 바울이 제시한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께 기쁘시게 할 것'(살전 4:1)에 속한 내용이다.
먼저 바울은 '너희끼리 화목하라'는 권고를 통해 공동체 안의 사역자들이 가져야 할 태도를 제시한다(살전 5:12-13). 이어 바울은 공동체 안에서 마음이 약한 자들과 힘이 없는 신자들을 포용할 것을 권고하고(살전 5:14-15) 교회 공동체의 행실, 특히 예배와 관련된 성도들의 삶에 대해 간결한 명령 형태로 제시한다(살전 5:16-22). 이 권면들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기원하고 데살로니가 교회에게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약속하는 소망의 기도에서 절정을 이루고 있다(살전 5:23-24).

 

1) 교회가 추구해야 할 화목의 정신
바울은 교회 공동체가 가장 먼저 추구할 것으로 화목을 제시한다.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너희가 알고 저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살전 5:12-13).
바울은 교회를 세우고 다른 곳으로 이동할 때 조직화된 신자 그룹을 형성한 후 떠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교회 안에는 일찍부터 지도자들에 세워져 있었다(행 11:30; 14:23; 딤전 4;14; 딛 1:5; 약 5:14; 벧전 5:1).
바울은 각 교회에 머물 수 없었지만 새로운 교회들에게는 영적 지도력을 갖춘 지도자의 필요성을 일찍부터 실감하고 있었다. 이들 지도자들은 건전한 교리들을 가르치고 신자들이 영적으로 성숙하도록 도우며 박해와 고난 속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도록 준비시키는 일을 하라고 선택되었다. 이들 지도자들은 '수고하고, 다스리며, 권하는' 직무를 사도들로부터 위임받았다.
이들 지도자들은 열심히 수고함으로써 교회를 다스린다. 지도자들이 다스리는 형태는 동료 성도들을 권하는 일이다. 이들의 수고는 자신의 이익이나 권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랑의 봉사'(살전 1:3)에 속했다.
사도들은 이러한 욕심없는 수고로 친히 모범을 보였다(살전 2:9; 3:5). 지도자들은 수고하되 부지런히 그리고 그 힘이 모두 소진될 때까지 수고해야 한다. 그들은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이기 때문이다(딤전 5:17). 지도자들은 일하는 자로 부르심을 받았으며 노는 자로 부름받지 않았다. 따라서 지도자들은 성도들을 가르치고, 위로하고 덕을 세워주기 위해 모든 수고를 아끼지 않아야 한다(Matthew Henry).
지도자들이 성도들을 다스릴 때에는 엄격함이 아니라 사랑으로 해야 한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세상 군주들과 같지 않기 때문에 군림해서는 안 된다. 교회 지도자들은 영적 지도자로서 공동체 회원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어야 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에 의해 임명받았으며 그리스도 아래에 있는 지도자이기 때문에 자기의 법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법에 의해 성도들을 다스려야 한다. 그러므로 지도자들은 주님을 섬기는 자세로 그분의 영예를 위해 일하는 자들이어야 한다.
지도자들의 권고에는 갖가지 교훈을 의미하거나 혹은 잘못된 경향을 바로 잡아야 하는 경고 등이 포함된다(살후 3:15). 다라서 지도자들은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성도들이 행실을 잘 하도록 가르치고 때로는 책망을 해야 한다. 좋은 충고나 권면을 통해 성도들이 빠지기 쉬운 위험들을 경고해 주고 과실이나 다른 잘못들에 대해서 책망하는 것이 그들에게 주어진 임무이다.
반면에 성도들은 지도자들의 인격을 알고 그들을 인정하며 그들의 가르침과 다스림과 권면에 합당한 관심을 표해야 한다. 성도들은 지도자들을 사랑 안에서 존경하고 그들의 직분을 높이 평가하고 그들의 인격을 존중하며 적절한 방법으로 존경과 사랑을 보여주어야 한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지도자들의 직무 때문이다. 그들의 직무는 그리스도의 영광과 사람들의 영혼의 행복을 높이기 위함이다.
따라서 교회의 지도자들은 '가장 귀히' 여김을 받아야 한다. 교회를 섬기는 지도자들이 다양한 칭호를 받는 것은 결코 중요한 일이 아니다. 그들이 '감독'들(빌 1:1)이나 '집사'들로 호칭되며 서로 다른 역할과 지위를 갖는다 할지라도 중요한 것은 가장 낮은 봉사자가 가장 높은 영광을 우린다는 주님의 가르침(막 10:42-45; 눅 22:24-27)을 따라 성도들을 섬기고 또 그렇게 섬기는 지도자들을 사랑으로 가장 존귀하게 여겨야 한다(F. F. Bruce).
무엇보다도 데살로니가에서 지도자들은 교회를 박해하는 세력들에게 가장 먼저 공격의 대상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성도들은 그들의 지도자들과 화목을 유지해야 한다.
'너희끼리 화목하라'는 이 말은 '그들과 평화를 유지하라'는 말로 번역될 수 있다. 이 말은 성도들과 지도자들 사이에서 쉴새 없이 분쟁과 불화를 일삼는 사탄의 간계를 저지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된다(J. Calvin). 이것이 교회 안에서 화평을 유지해야 할 첫 번째 이유이다.

 

2) 교회의 특성을 나타내는 삶의 자태들
교회 지도자들의 위치와 성도들 사이의 화목을 강조한 바울은 교회 공동체 회원들이 추구해야 할 일반적인 삶의 원칙들을 제시하고 있다. 특별히 이러한 권면들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품성을 나타낸다는 점에서 개개인의 문제이기 이전에 교회 공동체 의식과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규모 없는 자들을 권계(勸戒)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안위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으라"(살전 5:14)는 권면은 성도의 교제에 대한 기독교 윤리를 담고 있다. 공동체에 속한 형제들이 돌보아야 할 세 부류의 특정 집단은 앞선 지도자들에 대한 관심에서 소외 계층으로 시각을 전환시키고 있다.
'규모 없는 자들'(       )은 훈련받지 않고 합당한 질서를 지키지 않고 게으름만 부리는 자들을 말한다. 이 단어는 자기 부대를 벗어난 군인을 지칭할 때 사용되었다. 바울은 스스로 일한 사도들의 모범(살전 2:9)과 자기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는 권면(살전 4:11)을 따르지 않고 자신의 일상적인 의무를 소홀히 하거나 게으르게 살아가며 다른 사람들에게 짐이 되는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F. F. Bruce).
그들에게 '권계하라'는 말은 그들이 자신들의 행위를 여전히 인정하지 않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교회 지도자들은 그들의 게으름에 대하여 권고를 했을 것이지만 개선되지 않음으로서 교회 공동체의 명예가 위협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이런 점에서 성도들은 지도자와 협력하여 불규칙한 그들의 삶에 대해 끊임없이 개선이 될 수 있도록 관심과 함께 수치스런 행위들로부터 돌아설 수 있도록 권면을 계속해야 한다.
'마음이 약한 자들'(          )은 고상한 영혼을 소유자와 반대되는 사람으로 무력하고 자신이 없는 사람을 가리킨다. 이것은 심리적인 박탈감에서 나온 것으로 동료 신자들이 재림 이전에 죽음으로써 상대적인 박탈감을 가진 무리들(살전 4:13-18)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이 사람들은 격려를 받음으로써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어서 교회 공동체의 유익에 스스로 참여할 수 있도록 격려할 필요가 있다(Beverly R. Gaventa).
'힘이 없는 자들'(       )은 육체적 쇠약이나 도덕적 영적 질병과 관련하여 사용되는 단어로 데살로니가 지방에 범람하고 있는 음란의 영향(살전 1-8절)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을 지시하는 것으로 보인다(William Handriksen).  바울은 이들을 가리켜서 단단히 붙들어 주라(          )고 권한다. 이 말은 그들을 '두 팔로 감싸 안으라'는 의미이다.
바울은 형제들에게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으라'고 권면한다. 오래 참음(          )은 성령의 열매에 속한다(갈 5:22). '오래 참음과 인자함'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속성이다(출 34:6; 시 103:8). 바울은 오래 참음이 사랑의 열매라고 말한다(고전 13:4).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규모 없는 자들과 마음이 약한 자들과 힘이 없는 자들을 상대로 오래 참음을 보이라는 바울의 권면은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구현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절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딤전 1:16)는 바울의 말처럼 성도들이 오래 참음을 보이는 것은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르는 길이기도 하다.
'오래 참음'에는 '오랫동안 고통을 당한다'는 의미도 포함된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오래 참으시기 때문에 성도들 역시 오래 참아야 할 이유가 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이 서로 인내하도록 도우시기 위해 성령을 주신 이유도 여기에 있다(Grant Osborne).
오래 참음은 성도들을 대상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오직 피차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좇으라"(살전 5:15)는 권면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적극적으로 선을 좇는 것으로 나타나야 한다. 이때 성도들은 악으로 악을 갚는 오류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당시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심한 박해 아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는 권면은 결코 피상적으로 넘길 수 없는 권면이었다.
이러한 가르침은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39, 44)고 하신 주님의 모범과 연결된다. 주님은 불의에 대해 선으로 악을 이기는 모범(롬 12:21)을 친히 보이셨다.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심지어 원수까지라도 선으로 악을 이기는 길을 가야 한다.
이것이 새로운 시대에 교회가 나타내어야 할 속성이다.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 거하기 때문에 모든 슬픔과 고통과 잘못된 대우를 주님께 맡길 수 있다. 이것은 '권능의 왕국' 안에 사는 성도들이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독특한 새로운 삶의 방식이다.

 

3) 하나님의 거룩을 구현하는 성도들의 삶
핍박을 받고 있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그들이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다는 사실에서 가장 큰 위로를 받는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삶의 자태를 구체적으로 제시함으로써 그들이 이 땅에서 구현해야 할 거룩한 삶을 보여주고 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6-18). '기뻐하라, 기도하라, 감사하라' 이 세 가지는 신자들이 곤궁한 세상에서 구현하는 역동적인 삶의 증인들이 될 것을 요구하고 있다.
'항상 기뻐하라'에서 지시하고 있는 기쁨은 '주 안에서' 누리는 기쁨이다(빌 4:4). 바울 자신은 엄청난 시련과 환난의 한 가운데서도 기뻐하는 비결을 배웠다고 고백한다(고전 6:4-10). 주 안에서 누리는 기쁨은 하나님의 나라를 내 속에 보유하고 있다는 외형적 고백이기도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 14:17)는 말씀처럼 성도들이 누리는 기쁨은 성령께서 주시는 능력이며 하나님의 나라를 구현하고 있다는 실제적인 증거가 된다(김홍전). 이런 점에서 기쁨은 성령의 열매에 속한다(갈 5:22).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구절은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엡 6:18)에서 완전한 구절로 표현된다. 항상 기도에 힘쓰라는 권면은 모든 시간을 기도하는데 할애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이 말은 신자들이 하나님께 대한 의존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임재를 깨달으며 하나님께 대한 순종을 표현하기 위함이다.
이런 점에서 기도는 신자들이 살아가는 일상적인 삶의 일부여야 한다. 신자가 하나님과 누리는 교통은 결코 중단되지 않아야 하기 때문에 항상 기도해야 한다고 바울은 지적하고 있다. 주님은 기도에 대해 가르치실 때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로 고백하게 하셨다. 이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낙심치 않고, 언제나 평안을 깨뜨리고 기쁨을 빼앗기는 경우에서도 하나님과의 교통을 통해 다시 일으킴을 받는 유일한 길이다(J. Calvin).
'범사에 감사하라'는 권면은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6)에서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쉬지 말고 기도하라'와 긴밀한 관련이 있다. 감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세사을 구속하신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에 대한 표형이다.
특별히 감사는 성례전과 연결된다. 은혜의 방도로 주어진 성찬식(the Eucharist)은 성도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의 극치이다(Jhon Stott). 반면에 감사하지 않는 것은 이교도들의 타락한 전형적인 모습 중 하나이다(롬 1:21). 이런 점에서 성도들의 감사는 그들이 하나님께 속해 있는 백성임을 나타내는 중요한 증거중 하나이다(골 2:7; 엡 5:4, 20).
특히 데살로니가 성도들과 같이 고통스런 상황에 있다는 것은 감사의 조건을 무력하게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는 말씀처럼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 때문에 감사할 이유를 찾게 된다. 이런 이유에서 바울은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말한다.
때로 하나님은 신자들의 성품을 형성하고 믿음을 강하게 하기 위해 곤경의 시기를 사용하신다. 따라서 범사에 감사하는 법을 배운다는 것은 하나님을 완벽하게 신뢰하는 것을 배운다는 의미를 가진다.
이것은 하나님께 모든 책임이 있음을 알고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때로는 보이지 않는 커다란 그림의 일부임을 이해할 때 가능하다. 신자들이 기꺼이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상황을 완벽하게 주장하고 계시면 자신의 뜻을 성취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신뢰하게 한다(Grant Osborne).
여기에서 '하나님의 뜻'(           )은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와 연결된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살전 4:3)에서 이미 제시된 것처럼 '하나님의 뜻'은 모든 덕을 포함하는 자기 백성들의 거룩함을 실천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살전 5:23)에서 구체적으로 제시된다.
이때 성령의 거룩케 하시는 내적인 사역이 성도들을 통해 '기쁨과 기도와 감사'로 표현된다. 따라서 '기쁨과 기도와 감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뜻'이며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을 효과적으로 이행하고 있다는 외형적 증표들이 된다(F. F. Bruce). 이것은 성령의 일반적인 역사에서 나오는 성령의 일반 은혜(common grace)에 속한다.

 

4) 성령의 인도를 받는 교회
"종말로 형제들아 우리가 주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구하고 권면하노니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께 기쁘시게 할 것을 우리에게 받았으니 곧 너희 행하는 바라 더욱 많이 힘쓰라"(살전 4:1)는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한 바울의 권면은 궁극적으로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살전 5:23)에 귀착된다.
바울은 이 주제를 전개시키면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케 하심이 아니요 거룩케 하심이니"(살전 4:7)라고 이정표를 세워두고 있으며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신 것이라"(살전 5:9)고 목표점을 제시하고 있다.
이 모든 권면을 마치면서 '성령을 소멸치 말라'(살전 5:19)고 단속하는 이유는 바울이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바라고 있는 바 "너희 마음을 굳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살전 3:13)고 하는 그 목적이 전적으로 성령의 은혜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성령을 소멸치 말며"(살전 5:19)에서 '소멸하다'(        )는 단어는 공교롭게도 성령의 사역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된 불의 비유와 관련된다(마 3:11; 눅 3:16; 12:39; 행 2:2; 롬 12:11).
이때 성령의 불은 성도들의 거룩함을 위해 부정한 것들을 태우는 것으로 비유된다. 이런 점에서 성령의 역사는 성도들로 하여금 감화와 가르침을 통해 깨닫고 행하고 나아가는 것과 관련된다(김홍전).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요 16:13)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말씀과 더불어 바울은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 8:14)라고 말한다. 이때 성령의 역사는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롬 8:13)라고 한 말씀과 같이 성도들로 하여금 육신의 소욕을 거스르게 하신다.
따라서 '성령을 소멸한다'는 말은 데살로니가 교회가 지금까지 표명하고 있는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살전 1:3)을 거스리는 모든 내용들을 포함하고 있다. 성령께서는 친히 자신의 불길을 끄실 수 없다. 때문에 성도들이 성령께 속한 사랑, 기쁨, 평안 등의 은혜와 자비하심(갈 5:22-23) 등을 거부할 때 성령을 근심케 한다.
바울은 성령을 소멸하는 일 가운데 특별히 '예언을 멸시치 말라'고 권면하고 있다(살전 5:21). '예언'(          )은 성령께서 자신의 역사를 나타내는 현저한 증거 중 하나이다(F. F. Bruce). 예언은 성령의 선물이며 다양한 은사 중 하나이다(고전 12:10).
특히 아직 성경 계시가 완성되지 않은 사도교회 시대에 있어서 예언은 초대교회 이후에 주어진 성경 계시를 대신하고 있다는 점에서 예언은 말씀의 거룩한 도리와 연결되어 있었다(김홍전). 이런 이유에서 바울은 "사랑을 따라 구하라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전 14:1)고 말한다. 이것은 당시에 있어서 예언이 교회를 세우는 데 있어서 유익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여기에서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예언'은 장래 일을 점치는 은사가 아니라 성경 해석과 관련되며 예언자들은 성경 계시를 근거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고 성도들을 격려하며 위로하는 가르침을 통하여 교회를 가르쳐야 한다(J. Calvin).
이 예언과 관련해 바울은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 5:21-22)라고 권면하고 있다. 이 권면은 교회가 예언에 대해 취해야 할 적합한 방도를 제시하고 있다. 예언은 교회에서 행하여져야 하고 교회에 의해서 판단되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예언은 이미 받은 계시와 일치하는지 언제나 교회에 의해 확증되어야 한다. 따라서 교회는 예언을 받을 때 진리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때문에 바울은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변할 것이요 만일 곁에 앉은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거든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지니라 너희는 다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 모든 사람으로 권면을 받게 하기 위하여 하나씩 하나씩 예언할 수 있느니라 예언하는 자들의 영이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고전 14:29-33)라고 밝혀 말하고 있다.
특별히 교회의 지도자들은 예언의 질서에 대한 가르침을 바르게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예언은 전적으로 교회를 세우기 위함이며 교회의 유익을 위함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성령의 은사 중에서 '영들 분별하는 능력'(고전 12:10)의 은사는 참되지 않은 예언을 저지하는 것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반면에 거룩하게 영감받은 것으로 인식된 예언에 대해서 교회는 주목해서 받아들이고 그에 어울리는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F. F. Bruce).
그러므로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는 말씀은 상호보완적인 의미를 가진다. 좋을 것을 취하면 악은 자연히 버려지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는 말은 '모든 악한 종류의 말을 버리라'는 의미이다. 악한 말은 복음적 신앙이나 실천과는 반대로 나아가는 것을 가리킨다.
여기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이름이라는 미명 아래 예언을 무작정 받아들이는 맹신이나 오히려 정당한 예언을 통한 성령의 가르침을 멸시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 데살로니가 교회로 하여금 취할 것과 버릴 것에 대해 항상 판단해야 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

 

4. 거룩하고 흠 없는 교회

 

데살로니가 교회의 정상적이고 자랑스런 성장을 위해 중보의 기도(살전 3:11-13)를 했던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위한 권면을 마친 후 역시 중보의 기로로 마무리하고 있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살전 5:23-24).
이 소망의 기도는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로 압축된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가리켜 하나님께서 부르셨다는 사실을 거듭 밝힌 바 있다(살전 1:4; 2:12; 4:17).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거룩함으로 부르시고 그의 부르심을 이룰 수 있도록 성령을 통해 은혜를 주신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부르신 목적은 성도들이 거룩함에 있어 하나님의 형상과 일치하는 데까지 이르게 하기 위함이다. 이때 성령은 신자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같이 온전하고 거룩하게 되는 원인자가 되신다(Grant Osborne).
이 부르심은 바울에 의해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30)는 신학적인 체계를 갖추게 하였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부르심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의해 강화된다.
결국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자기 백성들의 생활 속에서 거룩함의 사역을 시작하신 그 사역을 완성하시기 때문이다. 이 사상은 후에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 1:6)는 고백을 낳게 하였다.
교회를 위한 연속적인 권면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온전하고도 최종적인 거룩함과 보존을 위한 기도로 마무리된다. 스스로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은 그가 내주하시는 성도들의 생명 안에서 그들을 거룩하게 하시는 분이시다(살전 4:8).
성령의 거룩하게 하시는 사역은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여 온전히 영광을 받을 때까지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게 함으로써 점진적으로 성도들의 존재가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변화를 가져오게 한다. 따라서 성도들로 하여금 거룩함의 완성에 이르도록 하기 위한 바울의 기도는 자기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목적이 절정에 이르렀음을 나타내는 것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는 것으로 나타난다(F. F. Bruce).
특별히 바울은 '영과 혼과 몸'을 언급함으로써 성도들의 영혼뿐만 아니라 '몸'까지도 하나님의 구원하시고 거룩하게 하시는 목적 가운데 포함되어 있음을 밝히고 있다. 이것은 당시 헬라 철학에서 '몸'을 천하게 여긴 것과는 전적으로 대조를 이루고 있다. 때문에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신들의 몸을 다스릴 것을 강조한 바 있다(살전 4:4). 몸은 주를 위한 것이며 주님의 능력으로 새로운 질서의 존재로 부활하게 되는 '성령의 전'이기 때문이다(고전 6:13-20).
 
마치는 말

 

"형제들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모든 형제에게 문안하라 내가 주를 힘입어 너희를 명하노니 모든 형제에게 이 편지를 읽어 들리라"(살전 5:25-27)는 바울의 마지막 인사말은 하나의 거룩한 보편 교회(살전 1:7-9; 2:14, 19; 4:10)로서 데살로니가 교회의 위치를 재확인하고 있다.
이 사상은 데살로니가 교회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신자들의 모범이 되었으며 유대에 있는 교회와 공통적인 신앙고백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확인된다. 무엇보다도 데살로니가 교회는 다른 교회들과 마찬가지로 바울에게 있어 영광의 면류관이었다.
특히 면류관은 전투적 교회(the church militant)의 특성을 밝혀주고 있다. 이 전투하는 교회는 곧 바로 승리하는 교회(the church triumphant)로 연결된다(William Handriksen).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 이 승리하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게 되며 전투에서 승리한 성도들은 영광의 주님과 더불어 영원히 함께 있게 된다.
바울이 이 서신에서 그리스도의 강림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 역시 성도들로 하여금 빛의 세력과 어두움의 세력 사이에서 빚어지는 갈등 속에서도 그들이 그리스께서 통치하시는 '권능의 왕국'에 속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확신시켜 주기 위함이다.
바울은 '주의 날'에 성도들이 참여하게 될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살전 5:28)는 축도로 이 서신을 마감하고 있다.
우리 시대의 교회는 승리하는 교회를 바라보며 모든 고난을 극복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복음을 대적하는 어두움의 세력들에 대해 교회는 기꺼이 복음을 사수하는 일에 모든 힘을 다해야 한다. 그럴 때 교회는 부활 신앙을 바탕으로 이 시대에 주어진 시대적 사명을 충실히 수행해 나갈 수 있다. 이러한 자세를 견지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교회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참고문헌

 

김세윤, 데살로니가전서 강해, 서울, 두란노, 2002.
김홍전, 데살로니가전서 강해, 서울, 성약출판사, 1989.
박윤선, 바울서신, 서울, 영음사, 1985.
Alan Richardson, 신약신학개론, 이한수 역, 고양,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4.
Beverly R. Gaventa, 데살로니가전후서, 김기영 역, 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2003.
Chester K. Lehman, 성경신학 II, 김인환 역, 고양,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4.
D. A. Caeson, 신약개론, 엄성옥 역, 서울, 은성출판사, 2006.
David Prior, 고린도전서 강해, 정옥배 역, 서울, IVP, 1985. .
Donald Guthrie, 신약 서론, 김병국, 정광욱 공역, 고양,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6.
F. F. Bruce, 데살로니가전후서, 김철 역, 서울, 솔로몬, 1999.
F. F. Bruce, 바울, 박문제 역, 고양,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2.
Fred B. Craddock, 빌립보서, 김도일 역, 서울, 장로교출판사, 2001.
James D. G. Dunn, 바울신학, 박문제 역, 고양,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3.
J. Calvin, 데살로니가전후서, 존 칼빈성경주석출판위원회 역, 서울, 성서교재간행사, 1990.
J. Christian Beker, 사도 바울, 장상 역,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98.
Jhon Stott, 데살로니가전후서 강해, 정옥배 역, 서울, IVP, 1993.
Grant Osborne, 데살로니가전후서, 박대영 역, 서울, 한국성서유니온, 2002.
I. Howard Marshall, 신약성서신학, 박문재, 정용신 역, 고양,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6.
Matthew Henry, 데살로니가전서, 메튜헨리주석전집 vpl 20, 김귀탁 역, 고양,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7.
Max Ansers,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서울, 디모데, 2003.
Ralph P. Martin, 신약의 초석 II, 원광연 역, 고양,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3.
Robert H. Gundry, 신약개관, 이홍성 역, 서울, 크리스챤서적, 1994.
Robert L. Reymond, 바울의 생애와 신학, 원광연 역, 고양, 그리스챤다이제스트, 2003.
William Handriksen, 데살로니가전후서, 김용섭 역, 서울, 아가페출판사, 1983.

 

 
전체 17
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 추천 조회
17
삼위일체적 관점에서 바라본 "휠리오크베"(Filioque) 논쟁
쥬니어칼빈 | 2017.06.21 | 추천 0 | 조회 3545
쥬니어칼빈 2017.06.21 0 3545
16
기 독 론/ 최더함 목사
쥬니어칼빈 | 2013.11.11 | 추천 0 | 조회 7468
쥬니어칼빈 2013.11.11 0 7468
15
조직신학 - 서론(Introduction, Prologue)|
쥬니어칼빈 | 2013.10.05 | 추천 0 | 조회 4824
쥬니어칼빈 2013.10.05 0 4824
14
재림 신앙과 교회의 시대적 사명
쥬니어칼빈 | 2013.08.01 | 추천 0 | 조회 5437
쥬니어칼빈 2013.08.01 0 5437
13
성령은 '성자에게서도' 나온다는 교리의 중요성
쥬니어칼빈 | 2013.01.19 | 추천 0 | 조회 9218
쥬니어칼빈 2013.01.19 0 9218
12
삼위일체론
쥬니어칼빈 | 2012.12.04 | 추천 0 | 조회 14514
쥬니어칼빈 2012.12.04 0 14514
11
제21주년 정암신학강좌 피터 릴백 교수 강의안(목회의 관점에서 본 칼빈의 언약신학)
쥬니어칼빈 | 2012.11.13 | 추천 0 | 조회 6234
쥬니어칼빈 2012.11.13 0 6234
10
성도가 구원 얻은 일자를 알아야 하는가?
쥬니어칼빈 | 2012.11.08 | 추천 0 | 조회 4966
쥬니어칼빈 2012.11.08 0 4966
9
“단일론 (Monism)” 이란 무엇인가?
쥬니어칼빈 | 2012.11.08 | 추천 0 | 조회 5915
쥬니어칼빈 2012.11.08 0 5915
8
구원에 이르는 믿음
쥬니어칼빈 | 2012.11.08 | 추천 0 | 조회 6295
쥬니어칼빈 2012.11.08 0 62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