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신학
성도가 구원 얻은 일자를 알아야 하는가?
사람들은 곧잘 “당신은 언제 구원을 얻었습니까? ” 라고 묻는다. 구원을 얻은 성도는 언제 어디서 구원을 얻었는지 기억하고 있어야 하는가? 어떤 교파에서는 언제 어디서 구원을 얻었는지 모르면 구원이 없다고 억지를 부리는 교파도 있다. 과연 성도는 구원 얻은 날과 장소를 알아야 하는가? 이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언제 구원을 얻었는가? 라고 물으면 대개 기억을 더듬으며 자기가 구원 얻은 것이 거짓이 아니고 사실임을 입증하기 위해서 어느 부흥회 나 어느 사경회, 어느 전도 집회에서, 혹은 가정예배를 통해서 구원을 얻었다고 말한다.
“구원” 이란 말은 흔히 중생과 칭의를 말한다. 성경에서 “구원”이라고 말할 때는 폭넓은 의미를 지니는데 죄에서 구원받아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구원은 항상 과거, 현재 미래의 국면을 갖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에베소서 2:8에 보면 성도는 죄의 죄책으로부터 이미 과거에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 문장에 나오는 동사 "SESOSMENOI" 라는 동사가 완료형 분사이다. 그러므로 “과거에 일어난 동작의 결과가 지금 남아 있다” 는 것이다. 동시에 고전 1:18 말씀을 보면 아직도 죄와 싸우면서도 성화가 계속되고 있으므로 현재면에서 구원은 현재 “이루어져 가고 있는 것” 이 분명하다. 또한 구원은 미래의 국면을 가지고 있는데 장차 그리스도의 대 심판으로부터 구원을 받아 영원한 영화로운 상태에 들어가게된다 (행 15:11). 그러므로 구원은 과거면에서는 이미 구원을 얻었으므로 누구나 진정으로 거듭난 성도라면 오늘 이 시간에 죽어도 천국에 들어간다.
그러나 구원은 빌 2:12 절 말씀대로 현재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룩하라” 고 하신 말씀대로 지금 죄와 싸우면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도록 성화되어 가고 있고 동시에 미래에 주님 다시 오시는 날 영화로운 몸을 입고 죄와 싸울 필요가 없이 영원한 신천지에 살게 된다는 것을 알아 두자. 이 따에서의 교회를 “전투적 교회 (church militant)” 라고 하고
하늘 나라 에서의 교회를 “승리의 교회 (church triumphant)” 라는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땅에서는 자신의 좌와 싸우며 사탄의 유혹과 싸우며 성화의 과정이 죽을때까지 계속 된다 (sanctification process). 성화는 늘 지속되는 “과정” 이다. 그로므로 이 세상에서 죄을 짓지 않을 정도로 성도가 완전해 진다는 가르침은 비성경적이다.
사람이 구원을 얻은 체험들은 서로 다를지라도 구원을 얻었다고 하는 객관적인 그 한 가지 사실은 변함이 없고 절대적이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실 때는 요한일서 3:14절의 말씀대로 구원받은 사람마다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분명한 때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 때를 본인은 몰라도 하나님은 알고 계시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하나님이 모를 리가 없다.
“영적으로 거듭난 때” 가 정확히 언제인지 본인은 모른다고해도 거듭나면 생애에 몇 가지 기적적인 사건들이 발생한다. 성령으로 중생하게 될 때 영적으로 죽은 사람이 디도서 3:5 말씀대로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난다. 성도들이 스스로 의로운 체 하는 더러운 옷은 벗어 던지고 빌립보서 3:8-9 말씀대로 그리스도가 십자가 상에서 이룩한 “의의 옷”을 덧입게 된다. 성도는 스스로 혼자서 하나님 앞에 의로워지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빌립보 2:8-9 말씀대로 그리스도가 이룩한 사역에 전적으로 의지하여 그분의 공로로 우리가 의롭다고 여김을 받는다. 즉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었다고 믿는다 (imputation of Christ's righteousness into us). 바울이 롬 8:1에서 말하듯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게” 된다. 성도는 이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고 요한복음 5:24에 말하는데 이는 요일 4:17말씀대로 심판 날에 자신감을 갖고 주님 앞에 서게 되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선다 (고후 5:10). 성도가 받는 t심판은 구원여부의 심판이 아니라 상급의 심판이다.
미국의 교회들은 부흥운동에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이 사실이다. 부흥회의 특징은 “빌리 그래함 전도 집회” 처럼,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예수를 믿기로 작정하는 결심” 을 하는 것이다. 보통 이런 결단의 시간은 그 사람에게 있어서 평생 잊을 수 없는 구원의 증거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누가 물으면, “나는 지금부터 몇 년전 x년 x월 x일 x 지방에서 있었던 빌리 그래함 목사 전도 집회에서 회심했다.” 라고 의기양양하게 대답한다.
부흥운동에 그리 많이 영향은 받지 않은 다른 교단들, 이를테면, 개혁교단이나 루터교 등 일반 여타 개신교의 경우를 보면 구원 받은 날자와 시간을 중요시 하지 않는다. 이런 두 가지는 각각 문제를 안고 있다.
결단을 촉구하는 부흥회식 방법은 그리스도에게 자신을 헌신하는 일에 중점을 두고 또한 중생이란 어떤 특정한 시간에 일어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러나 결점은 이런 생각은 구원이 인간의 노력으로 되어지는 듯한 그릇된 인상을 준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다고 입술로 고백하면 구원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착각하게 만든다. 결과적으로 보면, 그런 결심이 과연 사실인가 하고 자신의 신앙에 대해 의심하게 되어 방황한다. 신앙의 열매 없이 입으로만 주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위험한 사상이다. 그래서 입으로 신앙고백하면 모두가 구원 얻은 성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롬 10장에 보면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입으로 주를 시인하여 의에 이른다“ 라고 했다. 마음으로 믿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마음으로 믿는 것이 없는데 입으로만 주를 고백한다고 해서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한편, 개혁주의는 구원을 이룩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주권과 교회의 역할을 중요시한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에 의거한다. 사람의 노력은 조금도 가미되지 않는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자” 라고 히브리서 기자는 말한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문제이다. 교회는 세상에서 불러냄을 받은 무리의 집합체이며, 그리스도의 몸이다. 주께서 피로 값 주시고 사신 교회에서는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가르쳐 준다. 성도는 말씀으로 인하여 믿음이 돈독해 지고 주님의 형상을 닮아가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사람들을 하나님에게도 돌아오게 하신다. 이것을 인정해 야한다. 일률적으로 한 가지 방법으로만 회심시키는 것이 아니다. 이런 저런 여러 가지 방편으로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하신다. 어떤 분들은 질병을 통해서, 어떤 분들에게는 가정우환을 통해서, 어떤 분들은 사업의 실패를 통해서 하나님에게 돌아오도록 하신다. 이 처럼 다양한 하나님의 방법들을 모두 인정해야 한다. 부흥회에서만 회심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부흥회에서의 “일시적 감정” 이 거짓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자.
영국의 스퍼젼 목사가 말 한대로, “성령님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사람들을 예수님에게 인도하신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너무 조용하게 부르시기 때문에 언제 하나님이 자기를 부르셨는지 모를 지경이다. 그런가 하면 어떤 이들은 너무도 갑자기 되어 진 일이라서 그들의 회심의 경험은 마치 대낮에 일어난 사건처럼 아주 선명하게 기억에 들어나게 된다.
구원을 묻는 사람들에게 대답할 가장 적절한 대답은 이러하다. 구원 받은 여부를 아는 가장 좋은 증거는 구원을 얻었노라 고 어떤 집회에서 손을 드는 경험도 아니고 구원받았다고 기도한 일도 그 증거가 될 수 없다. 또 세례 받았다고 해서 중생한 증거가 되는 것도 아니다. 사람이 구원을 받았는지 여부를 진실로 입증할 수 있는 유일한 시금석은 그리스도를 닮은 인격으로 성장해 가는 것이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며 성령의 열매를 맺는 일이다 (갈 5:22-25: 야고보 2:18). 사람이 회심한 일자를 기억하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현재 내 신앙생활이 어떠한가? 이것이 중요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일생을 두고 사람이 예수를 닮아가도록 하는 성령의 지속된 사역이 있을 때, 그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고후 5:17) 가장 확실한 증거가 되는 것이다.
글: 김명도 교수
튤립 교육 선교회
튤립 신학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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