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신학
구원에 이르는 믿음
오늘 강의의 제목은 구원에 <이르는 믿음 Saving Faith> 이다.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떤 형태이든 간에 종교생활을 한다. 그리고 세상에는 종교라는 것이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종교 생활하는 사람들은 나름대로 모두 자기들이 믿는 신앙이 참 신앙이라고 굳게 믿는다. 이단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자기들이 믿는 교리에 충실하며 전도에 열을 올린다.
불교신자에게 물으면 부처만이 고해를 걸어가는 인생을 건져낼 수 있다고 한다. 힌두교를 믿는 사람에게 물으면 지금 고생은 과거에 내가 얻은 업보 때문이므로 현재의 어려운 사정을 개선하려고 할 필요도 없고 이 세상에서 현세를 착하게 잘 살면 다음 세상에는 보다 좋은 상태의 사람으로 태어난다고 믿는다. 유교를 믿는 사람에게 물어보면 사람이 살아가는 도리는 <3강 5륜> 인데, 신하는 군주에게 충성하고, 자식은 부모에게 충성하며 부부간에 유별해야 하며 웃사람 에게는 예의가 있어야 하고 친구지간에는 신의가 있어야 하는 것이 인간의 기본 본분이라고 하는데 이를 크게 나누어서 군이신강(君而信綱,) 부이부강(夫而婦綱) 부이자강(父而子綱) 이라고 하여 삼강 (三綱) 이라고 하고, 이를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군신유의(君臣有義). 부부유별(夫婦有別), 부자유친(父子有親), 장유유서(長幼有序), 붕우유신(朋友有信) 이하고 하여 오륜 (五倫) 이라고 한다. 유교에서는 이를 위해서 일생을 살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뉴에이지를 믿는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 하면 인간은 신접하면서 초월명상과 요가를 통해서 계속 노력하면 스스로 신의 경지에 이르고 급기야는 신이 되는 것이니 그 목적을 위해서 산다고 한다. 이슬람교를 믿는 사람들은 알라신에게 충성하다가 가면 하늘에서 축복을 누린다고 가르치면서 이슬람을 반대하는 사람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죽이라고 가르친다. 십대의 나이 어린 애들이 폭탄을 몸에 감고 적진에 뛰어 들어가는 것은 그렇게 죽으면 그것이 그들이 믿는 알라신을 기쁘게 해주는 것이라 믿고 하늘나라에서 상이 크다고 믿지만 이슬람교의 가르침은 남자는 천당에 올라가면 여자를 얼마든지 거느리고 살 수 있고 여자는 남자의 시중을 드는 것으로 즐거워한다고 가르친다.
그래서 모두 각자 자기가 원하는 종교 형태를 만들어 거기에 심취한다. 그러면서 자기들이 믿는 종교가 참 종교이며 자기 종교를 따르지 않는 사람들을 전도하여 같은 종교를 믿게 하려고 열심히 포교한다. 이슬람교도는 포교하여 말을 듣지 아니하면 무자비하게 죽인다. 참으로 무서운 종교이다. 세상에는 참으로 이렇게 무서운 종교들이 많이 성행한다.
왜 이렇게 여러 형태의 종교가 발생할까?
우리가 분명히 아는 것은 짐승의 세계에는 종교란 존재하지 않는다. 짐승은 태어나서 어느 정도 살다가 죽으면 그것으로 끝난다. 소멸된다. 영어로는 extinction 이라고 한다. 동물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적이 없고 따라서 하나님에게 책임질 일도 없다. 동물은 인간을 위해서 지음을 받았다.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동물의 이름을 지어 주어주었다.
그러나 사람은 다르다. 사람은 짐슴이 아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은 하나님에게 자기 삶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사람은 아무렇게나 짐승처럼 사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은 하나님에게 책임을 져야하는 만물의 영장이다. 하나님은 만물을 지으시고 마지막 날에 인간을 마드시고 만물을 주장하도록 하셨다. 이것을 문화명령 즉 cultural mandate 라고 한다. 인간은 만물을 주장하되 그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은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와 거룩함> 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이다. 진리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은 선지자의 직분을 행하도록 지음을 받았다는 말이고 의로 지음을 받았다는 말은 왕의 직분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말이며 거룩함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말은 제사장의 직분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말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인간은 처음에 죄를 짓기 전에는 아담이 모든 일에 하나님에게 순종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며 만물을 하나님이 해석하는 대로 해석했다.
그러나 사정은 달라졌다. 그가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치 않고 범죄한 후에 그런 속성은 남아 있지만 그의 속성은 더 이상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마비되었다. 성경은 우리 모두가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거리가 멀어졌다고 했고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다고 가르친다
<하나님을 알만한 것> 은 분명히 우리 안에 있다.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이다. 짐승들이 하나님이 계시는 것을 알 리가 없다. 짐승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지 아니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짐승에게는 어떠한 종교심도 없다. 이 세상에 서 자연의 법칙에 따라서 태어나서 얼마동안 살다가 죽으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
그런데 요즘 재미있는 일은 미국의 굴지의 유명한 신학자 한 사람이 성경에 관한 질의 문답 책을 썼는데 그 책의 290면에서 <짐승도 천당에 가는가?> 라는 질문을 다루면서 대답하기를 <우리 집에 애완동물이 있는데 이사야서 11:6절 이하를 읽어보니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니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땐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라는 말이 있으니 우리 애완동물도 천당에 가면 볼 수 있을것으로 안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 유명한 신학자는 사람은 R.C. Sproul 이고 그 책의 이름은 Now, That's a Good Question 이라는 책이고 이 글이 실린 곳은 290면이다.
이사야가 이런 말을 한 것은 실제로 그렇게 어린애들이 독사의 굴속에 손을 넣고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눕는 일이 천당에서 일어난다는 말이 아니라 이사야는 나중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에 그렇게 서로 조화된 상태가 도래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말하고 있을 뿐, 천당에서 그런 일이 실제로 있을 것을 예언함이 아니다. 마찬 가지 이유로 계시록에도 <머리가 일곱이고 뿌리가 아홉인 괴물이 올라온다> 는 말이 있는데 이는 정말 실제로 그런 기물이 올라온다는 말이 아니라 사탄의 흉악함을 상징적으로 가시적 효과를 위해서 그렇게 표현한 것 뿐이다. 이런 것을 수사학에서 <Imagery> 라고 한다. 이사야도 요한도 모두 유대인이다. 유대인들은 유대인의 묵시 문학 (Apocalyptic Literature) 이 이다.
성경기록자들은 아무도 모르는 독특한 말 (jargon) 을 도입한 것이 아니고 그들이 평시에 알고 있는 인간의 말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계시를 기록했다는 것을 잊지 말자. 가령 로마서 12장20절의 말씀도 문자 그래도 <원수의 머리 위에 “산 숯불을 얹으라” 는 말이 결코 아니다. 유대나라의 풍속과 속담에 그런 말이 있다. 누가 해를 끼치고 원수처럼 대하면 “그 사람 머리에 산 숯불을 얹어 주어라” 라고 말하는데 문자적으로 해석해서는 안 되고 그 나라의 속담으로 생각해야 한다. 만일 성경이 한국어로 기록되었다면 “미운 사람 떡 한 개 더 주어라” 라고 기록되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또 다른 속담은 누가복음 7:34절에 나오는 말인데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을 즐기는 자” 라는 말이 나온다. 같은 말이 구약 신명기 21:20에 나온다. 자식이 “먹기를 탐하고 술에 잠긴자라 하면 동리 장로들이 그를 돌로 처 죽일 것이요” 라고 말한다. 누구든지 “몹쓸 사람” 을 매도하는 유대인의 속담이다. 가령 누가복음 13:32에 나오는 “여우” 가 누구인가? 정말 짐승인 여우를 말하는가? 아니다. 헤롯을 말한다. 이렇듯 성경은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안 되는 부분들이 있다. 성경은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로 수사학을 동원해서 기록되었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이사야서 11장에 나오는 말씀을 근거로 천당에서 표범과 이리가 같이 노는 일이 있다고 생각 하거나 우리 집의 고양이나 강아지가 천당에 가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비성경적이다. 그들에게는 천당이 없다. 죽으면 그뿐이다. 하나님이 짐승에게 그런 특권을 주신 일이 없다.
그렇다면 이제 죄에 빠진 인생이 어떻게 구원을 얻게 되는가? 를 보자.
흔히 듣는 대답은 “믿음으로” 되어 진다고 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 대답은 정답의 일부분일 뿐 완전한 정답은 못된다. 물론 구원을 신학적으로 설명하자면 이야기가 길어진다.
구원의 서정은 대략 다음과 같다.
하나님이 효과적인 부름으로 죄인을 불러주시고 믿음을 선물로 주셔서 회개하고 중생하게 되며 중생하면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의롭다고 인정해 주셔서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의 죄를 기억도 하지 않으며 하나님은 그를 하나님의 아들 딸로 하나님의 가족으로 입양해 주시고 매일 신앙생활이 향상되도록 성화의 과정을 걷도록 하신다. 죽으면 성화가 완성되며 몸은 잠시 땅속에 들어가 잠을 자다가 주님 다시 오실 때 부활하며 (요 5:28-28), 죽는 사람의 영혼은 죽는 즉시 몸을 떠나 하나님에게 올라간다 (고후 5:8, 빌 1:23).
그런데 우리가 믿게 되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만 되어지는 것이다. 인간의 노력은 조금도 가미되지 않는다. 우리의 공로나 노력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옛날 어거스틴 이라는 사람은 생각하기를 우리가 믿고 싶으면 하나님이 도와주시는 것으로 생각했다. 이런 신학 사상을 <synergism 즉 협력구원> 이라고 말한다. 물론 그는 나중에 그것이 잘 못된 것을 알고 신학을 수정해서 독력설 (monergism)을 주장한 것은 퍽 다행 스런 일이다. 독력구원설은 구원은 오로지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이며 인간의 노력이 조금도 가산되지 않는다는 교리다. 영어로는 Monergism 이라고 한다.
그렇다, 구원은 처음서부터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그가 구원하고 싶은 사람들을 택해 주시고 그에게 믿음을 주어서 영적으로 죽었던 사람을 깨워준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상을 가장 잘 나타내 주는 곳이 엡1:4 와 엡2:8이다. 엡 1:4에는 <창세전에 하나님은 그가 구원할 자를 그의 기쁘신 뜻대로 택해 주었다> 고 했고 엡 2:8에는 <우리는 모두 영적으로 죽었던 사람인데 하나님이 긍휼을 베풀어 은혜로 우리를 살리셨다> 고 가르쳐 준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되어지는 것이며 오직 믿음으로만 되어지는 것이며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되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개혁가들은 이렇게 외쳤다: <Sola Gratia 오직 은혜: Sola Fide 오직 믿음: Solus Christus 오직 그리스도> 라고 외쳤다. 물론 이들이 이렇게 외친 것은 당시 교회가 잘 못 가르치는 것을 바로 잡기 위해서였다. 당시 로마교회 (오늘의 천주교)는 칭의 즉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죄 없다고 인정받는 것은 나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지 외부에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그릇된 가르침을 주고 있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이 의롭다고 하나님이 우리를 인정해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되어지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노력이 많이 포함되는데 가령 “미사에 많이 참석해야 하고 또 영세 즉 세례를 받아야한다“ 라고 가르쳤고, 그리스도가 이룩한 대속을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으로 순수하게 받아 드리지 않고 믿음에다 별도로 선행으로 공로를 세워야 구원을 얻는다고 그릇된 교리를 가르쳤다.
그러므로 로마교회는 선행에 힘을 썼고, 교리를 몰라도 교회에 출석하고 교회에 순종하고 일정한 공로를 세우면 구원을 얻는데 이는 로마교회를 떠나서는 구원이 없다고 가르쳤다. 이들은 교회론을 논할 때 무형교회보다 유형교회를 더 중요시했다. 그리고 성도들은 성경에는 무식한 채로 교회에서 시키는 대로 따라가기만 했고 교회는 교인들에게 위협하기를 교회에 불순종하면 장례식도 결혼식도 모두 거부한다고 엄포를 놓았다. 따라서 교인들은 공로를 세우는 선한 일에 신경을 써야 했다 (William Stevenson. The Story of Reformation 참고)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엡 2:8에서 우리의 믿음은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가르쳐 준다. 우리의 공로로는 하나님 앞에 의롭다고 여김을 받을 육체가 없다. 로마서 5:8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 하였나니라” 라고 하신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시편 14:1에 보면 하늘에서 하나님이 인생을 굽어 살피니 의로운 자가 없고 하나도 없다고 말하고 시편 58:3-4에는 악인은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간다고 말하고 있고 롬 3:11에는 의인은 없나니 한 사람도 없다 고 말하고 있다. 다윗은 시편 51:5에서 “어머니가 죄악 중에 나를 잉태하였음이여” 라고 말하면서 우리는 어머니의 모태로부터 죄인으로 태어남을 말하고 있다.
그 어느 누가 자기의 공로를 세워서 우리의 주홍 같은 죄를 씻음 받겠는가? 그럼에도 로마교회에서는 지상에서 유일한 그리스도의 대표자 라고 자초하는 교황이 연옥을 관장하며 교인들에게 공로를 많이 세워 여공까지도 세우기를 명령한다. <여공> 이란 supererogation 이라고 하여 자기가 구원 받을 이상의 분량의 공을 말한다. 로마교회에는 사람이 여공을 세우면 본인의 구원에 필요한 공 이외에 남는 공은 교회에 예치해 두었다가 믿음이 약한 다른 성도에게 나누어 준다고 한다. 마치 사람이 쓸 만큼의 돈을 제외하고 나머지 돈을 은행에 예치해 뒀다가 다른 가난한 사람에게 준다는 이치와 비슷하다. 이것이 어찌 성경적인가? 그럼에도 로마교회의 새로운 Benedict XVI 라는 교황은 천주교만 참교회이며 개신교는 거짓교회이며 거짓 교회는 구원이 없으니 결국 개신교는 구원이 없다는 주장이다 적반하장 (賊反荷杖) 격이라고 하는 것이 맞는 말일 것이다.
오늘 강의의 주제는 “구원에 이르는 믿음“ 이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은 맹목걱으로 믿으라고 하지 않는다. 무엇을 믿을까 하는 믿음이 대상과 함께 믿음의 내용도 말씀해주셨다. 한 가지 분명히 알고 넘어가야 할 것은 누구든지 성경대로 믿지 아니하면 구원이 없다는 엄연한 성경적 사실이다.
가령 농구 시합을 보자. 농구 코트에는 여러 개의 줄이 그어져 있고, 높이 basket 이 매달려 있다. 경기 하는 사람은 경기의 룰을 지켜야 하다. 선밖에 나가면 안 되고 정정당당한 방법으로 공을 상대방 basket 에 넣어야한다. 그런데 가상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농구경기를 하면서 줄에 얽매이고 basket 이 너무 높으니 기분이 상해서 Basket을 나지막하게 내리우고 줄은 모두 지워버리든지 무시하던지 하고 공도 한 손에 들고 뛰어 가서 상대방의 basket 에 shoot 한다면 이것을 농구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고 장난으로 생각할 것이며 심판의 꾸중을 들을 뿐 만 아니라 선수권을 박탈 당할 것이 자명하다.
신앙도 마찬가지이다. 신앙생활에는 <믿는 도리>가 있다. 혹자는 말하기를 <동정녀 탄생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으니 믿을 수 없으니 접어 두자.> <예수님은 죽은 자를 살리셨는데 나도 죽은 자를 살려보자 아무리해도 죽은 사람이 살아나지 않으니 기독교는 헛 종교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신 예수를 믿는다면 나도 그런 기적을 해야 마땅하지 않은가? 성경은 내게 능력주시는 자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빌립보 4장에 말하지 않는가? 왜 나는 안되는가?> <오늘은 몸이 피곤하니 교회 나가는 일을 쉬고 집에서 밀린 일을 처리하고 다음 주일에 교회에 나가도록 하자> <나는 성경보다는 비디오를 보는 것이 더 재미있고, 신문 잡지 보는 것이 더 유익한 생활정보를 얻을 수 있다고> 만일 이렇게 생각하는 삼람이 교회에 출석하고 있다면 그는 아직도 구원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그 이유는 믿는 도리를 모른다는데 있다. 믿는다는 것, 구원을 받는다는 것, 구원을 얻은 사람에게 나타나는 특징 등을 도모지 모르는 사람이다. 무엇보다도 진실로 거듭나서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면 이런 생각이 애당초 들지도 않고 따라서 이렇게 생각하지도 행동하지도 않는다. 사람이 이런 생각에 잠기며 이런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그것 차제가 아직 구원을 얻지 못한 사이비 신자라는 증거이다. 성경은 이런 사람이 구원을 얻는다고 말하지 않는다
갈라디아 1:8-9에는 바울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바로 믿지 않는 갈라디아 지방에 있는 여러 교회의 성도들에게 엄격하게 경고하는 내용이 적혀 있다. “우리나 혹 하늘로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하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으리라” 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아주 무서운 말이다. 아무리 열심히 복음을 전해도, 아무리 성실해 보여도, 아무리 잘 믿는 것 같아도 “우리가 전한 복음 말고 다른 복음” 즉 <성경적인 복음> 말고 <다른 복음, another gospel> 을 전하면 멸망 받는다는 말이다.
갈라디아 사람들은 바울에게 바로 가르침을 받았지만 바울이 떠나온 후 이상한 사이비 지도자들인 유대교주의자들이 들어가서 바울이 전한 복음과는 아주 다른 복음, 즉 <은혜로 구원을 얻지만 유대교의 의식법도 지켜야 한다> 는 교리를 가르쳤다. 열심히 복음을 전한다고 했지만 그런 복음은 <참 복음>이 아니기 때문에 구원으로 인도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갈라디아 1:8과 9절에 나오는 저주란 말은 원문에서는 <anathema> 이다. <anathema> 란 말은 두 단어가 합친 헬라어 합성명사 이다. “ana” 는 “위(上) 란 말이고 ”thema“ 란 ”tithemi“ 에서 파생한 말로 <놓였다> 라는 말이니 <위에 놓였다> 란 말이고 이 말을 분석하면 <하나님 앞에 놓였으니 만일 교리가 그릇된 것이 사실로 판명되면 다시 도리킬 수 없이 멸망을 받고야만다> 란 의미이니 무서운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옛날이나 오늘이나 되는대로 제멋대로 믿는 분들이 얼마나 많은가? 바로 잡아 주려면 바른 믿음이 도리를 가르치면 모두 반항한다. <진리를 믿기 싫어하고 거짓을 믿기를 좋아 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유혹을 그 마음에 역사하여 거짓을 믿다가 멸망하게 한다> 는 데살로니가후서 2:11-12에 말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하나님은 전제주권을 갖고 계시다. 구원할 자를 구원하시고 멸망할 자를 지나치신다. 문제는 하나님이 택해 주셔서 참 믿음을 가지고 회심한 성도는 성경대로 믿고 성경대로 산다는 것이다.
성경대로 믿지 않고 고의적으로 성경대로 살지 않는 사람은 아무리 예수를 믿는다고 떠들어도, 교회에서 중한 직분을 가지고 있어도 그런 것들이 구원해 주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보실 때 <사이비 신자> 에 불과할 뿐이다. 요즘은 기독교를 믿는 <성도들> 중에 이런 <사이비 신자들, bogus Christians> 이 상당한 비율을 차지하고 있고 교회에 문제가 생기고 교리가 오염되는 가장 큰 원인이 이런 사이비 신자 때문에 야기되는 것이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이런 일들은 우리의 원수인 사탄을 도와 줄 뿐이다. 사탄을 도와주는 일이 어찌 하나님에게 영광이 되겠는가?
신앙의 유형을 자세히 보도록 하자. 신앙에는 네 가지 종류가 있다.
<역사적 신앙>, <임시신앙>, <기적적 신앙>, 그리고 <구원에 이르는 신앙> 등이다. 사람들이 믿는 신앙은 각기 이 네 가지 종류중 하나에 속한다. 이제 이 네 가지 신앙형태를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자.
우선 첫째, <역사적 신앙> 을 보도록 하자.
이것은 기독교 교리를 머리로만 즉 지식으로만 알고 있는 사람으로 본인은 그렇게 믿지도 않고 그렇게 살지도 않는 그런 사람들의 신앙이다. 이런 신앙이 구원이 없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이것은 어떤 기준으로도 <신앙> 이라고 할 수 없다. <역사적 신앙> 을 가진 사람들은 대개 자유주의 신학을 따르는 사람들이다. 남에게 예수님의 십자가를 가르치지만 자신은 그것을 믿지 않고 자신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단지 하나의 학문으로서의 가치만 인정할 뿐이다. <Jesus Seminar> 같은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두 번째 생각할 것은 <임시 신앙> 이다.
<임시 신앙>은 문자 그대로 임시로 믿는 신앙이다. 모든 여건이 좋고 내게 유리하면 믿지만 조금 불리하거나 외부로부터 핍박이 오면 곧 신앙을 버리는 그런 신앙을 말한다. 마치 <가시덤불 속에 떨어진 씨> 같아서 지속성이 없다. <참 신앙 Genuine Faith> 을 시험할 가장 좋은 계기는 핍박을 당하거나 어려움을 당할 때 그의 신앙생활을 엿보면 알 수 있다. 과거 우리나라 성도들이 일본 사람들에게 압제를 받아 신앙 생할이 자유롭지 못할 때 많은 사람들이 신앙을 버렸다. 그러나 참 알맹이 신자들은 순교하면서도 신앙을 지켰다. 한 사람은 임시 신앙을 가진 쭉정이 사이비 신자이고 한 사람은 알맹이 신자로 <구원에 이르는 믿음> 을 가진 사람이다. <임시 신앙> 은 엄밀한 의미에서 아직 중생하지 못한 사람이다.
세 번째로 <기적적 신앙> 의 형태를 보자,
이것은 오늘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신앙형태이다. 어떤 기적을 보고서야 믿는 신앙이고 늘 기적을 따라 다니는 신앙이다. 우리들 주위에서 이런 신자들이 얼마나 많은가를 보면 아마 실감이 날 것이다. 새벽 기도회에 나갔더니 강단 벽에서 예수님의 피가 흘러 내려 왔다고 하면 사람들이 그 교회에 많이 모여든다. 목사가 설교하면서 천당에 가서 바울과 엘리야 를 만나고 왔다고 하면 사람들이 신기하게 생각하고 그 목사는 <가장 신령한 목사> 로 생각하고 많은 무리가 그를 따른다. 그래서 한국에 있는 <현대종교> 사에서 조사한 한국에 있는 100 여개의 이단 잡단 가운데 이런 류가 대부분을 이룬다. 이런 교인들의 심리를 너무 잘 아는 사이비 목사들은 특히 부흥사들은 조금도 주저 없이 천당에 가서 하나님을 만나고 온 이야기를 그럴듯하게 교인들에게 말하면서 인기를 얻으려고 하는 풍조들이 기독교를 좀먹고 있다.
과연 살아 있는 사람이 천당을 내 집 드나들 듯 자유자재로 드나들 수 있다는 말인가?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살아 있는 사람은 초자연계와 자연계를 내왕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마귀만 할 수 있다. 요즘 성행하는 뉴에이지 사상은 모두 이런 심령과학 (parapsychology) 에 속한 철학이다. 이런 심령과학이 기독교의 복음을 잠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가?
몇 년전 Columbia 대학의 Helen Schucman 이 A Course in Maracle 이라는 영서(靈書)를 기록한 것은 바로 이런 사탄의 작간이고 사탄에게 놀아난 것이 Schucman 이다. 본인이 살아 있다면 극구 부인 할테지만 분명 그 책은 Schucman 이 주장하는 대로 예수가 불러주어서 기록된 책이 아니다. 만일 예수님이 불러 준대로 기록한 것이 사실이라고 고집한다면,그 예수는 성경의 그리스도 가 아니고 “거짓예수” 임이 분명하다. 고린도후서 11장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 중 <다른 예수 즉 거짓 예수> 를 전하는 사람이 있다고 힐책하는 것을 보면 예나 지금이나 <다른 예수 another Jesus> 를 전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다. 오늘에는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그런 예수를 전한다.
이런 류의 책은 요즘 출판계에서 단연 bestseller 로 꼽히는 책들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Harry Porter 라든지 Da Vinci Code 라든지. 막달라 마리아 복음 이라든지 하는 것들이 이에 속한다. 따라서 기독교 목사들 중에는 대중의 인기 영합을 목적으로 예수를 믿으면 기분이 좋고, 돈 많이 벌고, 적극적으로 살 수 있고, 교리보다 더 실제 생활에서 만족을 느끼며 사는 것이 인생의 목적인양 오도하는 책들을 홍수처럼 쏟아 낸다.
Bruce Wilkinson 이 쓴 Prayer of Jabez 라는 책을 보라 Rick Warren의 목적이 이끄는 삶 이란 책을 보라 모두 이런 부류에 속하는 신앙을 전파한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길, 십자가를 지는 길, 고난을 참으로 남을 봉사하는 길 등은 안중에도 없다. 모두가 흥미 본위이다. 그래서 미국의 정통장로교단에서는 이런 책들에 조금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 가령 Rick Warren 목사가 쓴 <목적이 이끄는 교회> 라는 책에도 미국의 많은 신학교 교장이나 교수가 <추천서명>을 했지만 바른 신학을 가르치는 개혁주의의 마지막 보루인 동부 필라델피아의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교수나 미국 정통장로교단에 속한 목사들 중 단 한 사람도 그런 책에 추천 서명을 한 분이 없다.
이런 신앙풍토에서 기독교의 참 교리는 사라지고 거짓 교리가 난무하여 성도는 무엇이 진리인지 무엇인 비진리인지 구별할 능력을 상실한 채 각자 자기 편 할대로 신앙생활을 한다. 교회는 극장으로 변한다. Os Guinness 가 1988년에 Baker 출판사를 통해서 펴낸 Dining with Devil: Megachurches Flirting with Modernity (마귀와 겸상하다: 대형교회가 현대문화와 놀아나다 라는 책을 보면 오늘 교회들이 얼마나 참 신앙이 아닌 <거짓 신앙>으로 성도들을 속이고 있는지 여실히 알 수 있다.
기적적 신앙은 또 다른 양상으로 나타나는데 <번영신학, prosperity theology) 이다. 근착 Christianity Today 라는 미국의 기독교 잡지는 아주 놀라운 사실을 보도하면서 참 복음의 중요성을 성도들에게 일깨워 주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지금 아프리카에는 이전 그 어느 때 보다도 또 어느 교파보다도 <번영신학> 이 성행하고 있는데 걷잡을 수 없을 지경이라고 한다. 잡지는 그런 사례를 여기저기에서 취재하면서 목사들이 <병을 고쳐 준다> 는 명목으로 신도들로부터 많은 금전을 갈취하여 호화스런 사생활을 즐긴다는 것이다.
과거 미국에서도 Robert Tilton 같은 사람이 그런 일을 하다가 결국 목덜미가 잡혀서 철창 신세를 지고 지금은 아무런 전도활동도 못하고 있는 실정이고, <PTL, Praise the Lord> 이라는 선교단체를 만들어 전도하던 Jim Bakker 의 말로가 어떠했는지 우리 모두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이런 일들이 지금 미개한 아프리카에서 일어나고 있고 이것을 <교회 부흥>이라고 <전도> 라고 대서특필하는 신문도 있지만 이것은 기독교의 복음을 왜곡한 것이며 <참 신앙> 이 아니고 <기적신앙> 이다. 이런 <기적 신앙> 은 아프리카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 특히 미국에서 가장 많이 본다.
영국에서 나온 책 중에 Peter Glover 가 쓴 Signs and Wonders Movement Exposed 라는 Day One Publishers 에서 발행한 122p 짜리 paperback 이 있다. 거기에 보면 이런 기적신앙을 좋아하여 늘 그런 목사들만 따라다니던 이 책의 저자 Glover 가 이런 이적 기사 운동이 허구임을 알고 회심하여 구원에 이르는 믿음으로 돌아왔다는 내용인데 이런 <거짓 목사 부흥사> 들이 얼마나 사람들을 속이는지 잘 보여준다. 이런 운동은 영국만 아니라 미국 한국 등에도 얼마든지 성행하고 있으나 구원과는 관계 없는 사역이다. 오늘 가장 기독교 교계를 좀먹는 것은 이런 <기적적 신앙> 때문이다. 사람들은 <무엇을 보고 믿기> 를 좋아 하지만 고린도후서 5:7에는 <우리는 보는 것으로 행치 아니하고 믿음을 행한다> 라고 분명히 믿음의 성격을 가르쳐 준다. 아브라함이 좋은 본보기이다 그는 무엇을 보고 믿은 것이 아니다. 약속하신 하나님의 언약이 언젠가는 이뤄질 것을 믿고 이 세상을 떠났다. 히브리11장에 기록된 그의 신앙을 읽어보라.
끝으로 <구원에 이르는 믿음> 에 관해서는 앞서 자세히 설명했다.
<보는 것으로 행치 않고 믿음으로 행하며> <하나님의 주권을 높이고, 성경의 절대적 권위를 높이고 성경대로 생활하는 신앙> 이다. 성경의 가르침은 역사적 신앙고백서인 Nicean Creed(325), Athanasian Creed(381), Belgic Confession(1561), Heidelberg Catechism (1563), French Confession(1559), 2nd Helvetic Confession(1566) Canons of Dordt (1619), WCF(1647) , Cambridge Declaration(1996) 등을 받아 드리는 신앙이다.
우리는 아무런 소망이 없는 죄인이라는 것과, 그리스도가 나를 대신하여 능동적인 순종으로 모든 율법을 지켜주시고 수동적 순종으로 내가 죄 값으로 받을 죽음의 형벌을 대신 받아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켜 이룩한 그리스도의 의가 내게 전가되고 나의 죄를 그리스도에게 전가되는 이중전가 double imputation 된 것이 근거가 되어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에게 공로 없이 의롭다함을 얻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죽을 때까지 성화되어 가고 우리가 죽으면 우리 영혼이 즉시 하나님에게 올라가고 육신은 땅에 묻히지만 주님의 재림 때 육신이 부활하여 앞서 하늘에 갔다가 주님과 함께 내려오는 영과 합하여 영화로운 몸을 이루어 영원히 신천지에 살게 된다는 것이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 은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다. 우리 모두 세상을 본받지 말고, <구원에 이르는 믿음> 으로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남은여생을 살아 가야 할 것이다.
필자: 김명도 교수
튤립 교육 선교회 회장
튤립 신학 연구원 원장
칼빈 신학 대학 대학원 변증학 교수
rvkim@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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