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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신학

논쟁

작성자
쥬니어칼빈
작성일
2012-11-08 02:59
조회
5507

요즘 개혁 신학계에는 이상한 바람이 불고 있다.  언제나 성경을 가장 신실하게 믿고 가르치는 교단은 흔들리지 말아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요즘은 이상한 신학기류가 흘러 개혁주의도 <NEO-REFORMED THEOLOGY. 신 개혁신학> 이 등장할 정도이다. 마치 그 옛 날 프린스톤 신학교에 자유주의가 들어 올 당시 자유주의와 근본주의가 싸운 것과 같은 양상이다.


 


교리의 논쟁은 항상 자유주의 교단 안에서만 심심치 않게 일어나는 것으로 알고 있던 개혁주의를 신봉하는 교단의 성도들은 매우 충격을 받았다.  근자에는 새로운 신앙운동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서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이다. 한때는 John Wimber 라는 사람이 만든 Vineyard 운동이라는 것이 등장하여 카나다 Toronto Airport Church 는 그야 말로 연일 인산인해를 이룰 만큼 전 세계에서 비싼 항공료를 지불하면서 Vineyard 운동을 배우려고 목사들로 붐비더니 John Wimber 가 죽은 다음 요즘은 잠잠해 졌지만 그 영향은 결코 없어 진 것이 아니다.


 


그 뒤를 이어서  얼마 전에는 <Emergent Church Movement> 라는 운동이 일어나서 Christianity Today 라는 잡지에 대서특필하여 소개되었는데 그 운동은 지금도 한창 번져 나가고 있고 젊은 목사가 목회하는 교회에서는 이 운둥에 가담한 교회들이 많다.  이 운동의 특징은 교리를 등한히 하는 것이다.  Postmodernism 의 영향을 받아서 모든 것이 상대적이고 모든 것이 주관적이니 기독교의 교리도 주관적이고 상대적이므로 어느 교리이든 일정하게 모든 사람이 받아 드릴 절대적이며 객관적인 교리는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운동은 교리를 중요시 하지 않고 사람들이 모여서 사교하는데 중점을 둔다.  교리는 각자가 해석이 다르기 때문에 일정한 한 가지 해석만을 진리라고 고집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들에 의하면 예수님의의 동정녀 탄생도 우리 성도 모두가 반드시 믿어야 할 절대적인 교리가 아니고 각자가 편한대로 해석해서 믿는다는 것이다.  비단 동정녀 탄생 교리만이 아니라 성경의 모든 교리를 이렇게 믿는다  이런 운동이 놀랍게도 미국의 많은 교회에 파급되어 가는 것을 참다운 성도의 입장에서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신학자들은 모두가 한 목소리로 반대하는 것이 아니고 찬반이 엇갈린다. 찬성하는 사람도 있고 반대하는 사람도 있다. 목회 현장에서도 목사나 당회의 신학에 따라서 이 운동을 보는 관점이 다르다. 그러나 성경적인 입장, 개혁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이는 분명 잘 못 되어가는 신앙풍조로서 시정되어야 할 운동이다.


 


사람들은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려 한다. 마치 컴퓨터 계에서 새로운 software 를앞을 다투어 만들어 내려 하는 것과 같이 기독교의 교리를 가지고 그것이 신론이건, 인간론이건 기독론이건 구원론이건 교회론이건 심지어 종말론까지도 무엇인가 새로운 교리를 만들어 내어 사람들이 주목을 받으려 하고 자신이 “유명?” 해 지기를 원한다.  그러나 분명히 알 것은 기독교의 교리는 새로 나올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초대교회에서 교부들은 잘 못된 교리를 가르치다가 진리에 도달한 일들이 많이 있다. 우리가 잘 아는 Augustine 도 처음에는 구원론에 있어서 천주교처럼 협력구원설 (synergism) 을 가르쳤다.  내가 믿으면 하나님이 도와주셔서 구원이 완성된다고 믿었다. 종교개혁가들이 주장하던 독력구원설 (Moergism) 의 진리를 발견하고 바른 신학자가 된 것은 훨씬 후의 일이다.  Origen 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신약을 공부하거나 교리 사를 공부하거나 교회사를 공부할 때 Origen 을 자주 인용한다. 그러나 그가 처음서부터 정통신학자가 아니었다.


 


오리겐이 사역하던 아프리카의 Alexandria 는 당시 헬라의 영지주의 철학이 만연된 곳이었다. 그곳에서 활동하던 Origen 의 스승 Clement of Alexandria 도 Philo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Philo 는 헬라의 영지주의에 심취해 있었다.  Origen 은 말하기를 사람은 사람으로 태어나기 전에 하늘에서 신의 존재로 있다가 인간 세상에 오면서 물질인 육신을 입고 사람으로 태어났다고 가르쳤으니 오늘의 모르몬교의 가르침과 같은 주장을 했다. 또한 사람이 죽으면 교육받는 곳이 있다고 가르쳤으니 오늘이 천주교의 가르침과 같은 주장을 했다. 물론 그는 나중에 이런 잘못된 교리를 고쳐 바로 잡았으나 초기에는 그의 교리에 상당한 오류가 있었음을 부인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런 분들의 특징은 자신의 가르침에 잘못이 있다고 깨달으면 즉시 시정하여 바른 신학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에 비해 오늘의 신학은 모두 자신의 신학은 완벽하다고 말하고 오류를 결코 인정하려 들지 않는 점이다  그리고 교회의 숫자적 성장을 위해서는 교리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믿는다. 이런 지도자의 타락한 사고방식이 오늘의 기독교를 병들게 한다.   또 한 가지 오늘의 기독교를 설명하자면 새로운 바람, 새로운 운동이 꼬리를 물고 새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그 중의 하나가 오늘 강의하는 주제인  이른바 <바을의 칭의 개념> 에 대한 새로운 관점이다.  영어로는  <New Perspective on Paul> 이라고 한다.  이제 그들이 주장하는 핵심이 무엇인지 알아보자.


 


영국 회중교회 목사인 Nicholas Thomas Wright 와 E.P.Sanders, 같은 사람이 중심이 되어 근자에 시작된 소위 <바울의 칭의 개념에 대한 새로운 관점> 은 요원의 불길처럼 기독교 교계에  번져가고 있으며 많은 이른바 “개혁교회” 목사들도 이에 호응하고 있는 추세이고 보면 정통적인 교리를 지켜 나가려는 성도들에게는 큰 장애물로 닥아 온 것이 사실이다.  마치 옛날 John Wimber 가 Vineyard 운동을 시작할 때 많은 개혁파 목사라고 자칭하는 분들이 대거 Canada 의 Toronto Airport Church 로 모여 들어 성령 받는 법을 배우던 것과 흡사하며 이 여파로 미국 남부 Florida 주 Pensacola의 Brownsville에서 있었던 이상한 성령집회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미국의 유명한 기독교 시사 잡지인 Christianity Today 지의 표지를 장식하는 가운데 많은 자칭 개혁파 목사들이 모여들었던 것과 흡사 하다.


 


자신을 개혁파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왜 분별없이 이런 집회에 출입하는지 알 수 없다.  사람들은 개혁주의 신앙이 무엇인지 모르면서도 개혁주의 신앙은 성경적인 교리를 가르친다는 말을 듣고 너도 나도 모두 교회를 시작하는 분들은 개혁주의를 신봉한다고 신문에 광고를 낸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들의 인기를 끌기 위한 그들의 인본주의적 위장술에 불과한 것이고 실제로 그들의 예배에 참석해 보면 개혁주의 의 초보도 모르는 분들임을 알고 실망한 적이 여러 번 있다.


 


그러면 요즘 떠드는 <바울의 칭의의 개념에 대한 새로운 관점> 이란 무엇인가?  무슨 “새로운 관점”을 발견했다는 말인가?  기독교 역사 2000년이 지나는 동안 수많은 공회가 있었고, 이를테면 니케아 공회 (325), 콘스탄티노풀 공회 (381), 에베소 공회 (431) 갈게돈공회 (451) 등의 공회와 1561년의 Belgic Confession, 1563년의 Heidelberg Catechism, 1556년의 제2 스위스 신앙고백서, 1559년의 프랑스 신앙고백서, 1619년의 Dordt 신경, 1647년의 WCF. 1996년의 Cambridge Declaration  등 실로 수많은 정통신학자들의 공회에서 우리가 믿는 도리를  확정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러므로 <이 전 사람들은 실수를 했고, 내가 새로운 교리를 발견했으니 이것을 믿어라> 라고 주장하는 것은 기독교를 파괴하는 행위임에도 그런 일이 종종 있어 왔던 것이 사실이다.


 


아마도 그 대표적인 사람이 Arminian 주의의 시조인 화란 Lyden 대학의 조직 신학 교수 였던 James Arminius 교수와 1880년대 영국에서 Plymouth Brethren 이라는 조직을 만들어서 기성교회를 부정하고 새로운 세대주의 교리를 정립한 John Nelson Darby 가 그런 사람이다.  우리들 주위에서 무엇인가 새로운 교리를 발견했다고 떠드는 사람들은 모두 이단 교리를 가만히 교회에 들여오는 사람들이므로 특히 눈여겨 주의해야 한다.


 


이번에 새로 등장한 <바울의 칭의에 대한 새로운 관점>이란 운동은 Nicholas Thomas Wright 라는 회중교회 목사가 New Perspective on Paul 이라는 책을 새로 발간하면서 불붙기 시작했다.  이 책은 Philadelphia 에 있는 Fortress Press에서 2006년에 나왔다. 우리가 알고 있는 칭의의 개념, 다시 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을 얻는 방법 (means of instruments) 은 이러하다. 하나님은 영영 형벌 받을 모든 인류 중에서 얼마를 택해 주시고 하나님이 택해 주신 자들을 위해서 하나님이 그의 아들 예수를 인간의 형상을 입고 인간 세상에 오시어 우리가 받을 지옥의 고통을 대신 십자가에서 받게 해 주시고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 즉 우리가 지키지 못할 율법을 모두 대신 지켜주신 것과 그의 수동적 순종, 즉 우리가 받아야 할 우리의 죄에 대한 형벌을 대신 받으시어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켜 드림을 우리가 믿을 때 하나님은 일방적으로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셔서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는 것이다.   이것이 정통적 교리이다.


 


롬 8:1에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 라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종교 개혁가들은 “오직 그리스도 (Solus Christus)” 라고 외치며 그리스도기 평생 우리가 지키지 못할 율법을 완전히 지켜주셨으며 십자가에서의 수동적 순종으로 이룩한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어 구원을 얻는다는 점을 강조하여 “Solus Christus” 라고 했다. “오직 믿음 Sola Fide” 라고 하여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이룩한 의를 믿음으로 받아 드릴 때 의로 여김을 받아 구원을 얻는 것이니 믿음은 곧 구원의 <수단, means> 이 되는 것이고 <오직 은혜 (Sola Gratia)> 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공로나 행위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을 얻는다고 하여 종교 개혁가들은 <Sola Gratia> 라고 했다 (롬 8:33-34; 롬 5:12-19; 롬 3:21-26; 롬 4;25 등 참고). 


 


이 구원 즉 하나님 앞에 죄가 없다고 인정받는 칭의 (justification)는 하나님의 법정에서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내리는 <선언>이다.  미국에서 보면, 대법원은 최고의 사법기관이다. 대법원에서 내린 결정은 어디에서도 번복할 수 없다. 하물며 하나님의 법정에서 하나님이 내린 판결을 누가 번복할 수 있는가? 그러므로 로마인서  8장에서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우리를 송사하리오?” 라고 바울이 말하는 것이다. 우리의 칭의의 근거는 주님의 십자가의 공로이고 칭의의 수단은 우리의 믿음이다. 그런데 성경은 그 믿음자체도 하나님의 선물이지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고 엡 2:8에 말한다. 그러므로 칭의, 즉 구원은 처음에서부터 끝까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그는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자” 이다 (히 12:2).  이것을 신학적으로 <독력구원설> 이라고 한다. 영어로는 <monergism> 이라고 한다.  <독력구원설>의 반대는  <협력구원설 (synergism)> 인데 이것은 우리가 믿고 싶으면 하나님이 도와 주셔서 믿게 된다는 교리이다. 성경은 우리는 모두 죄로 인하여 죽었으니 아무도 스스로 혼자서 주님을 찾아 갈 수 없다고 엡 2:1-7에 가르쳐 준다.


 


이것은 예수를 바로 믿는 사람, 즉 <개혁주의 신앙>을 가진 성도는 지금까지 믿어오던 <정통신앙, orthodox faith> 이다. 그러므로 개혁주의에서 말하는 칭의란 내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가 이룩한 것이 내게 전가되어(imputed) 되어지는 것이다. 이것을 신학적 용어로는 “justitia aliena et imputata, 외부에 의해 의로워졌고 전가 되었다) 라고 나타내는데 가장 정확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Francis Turretin 은 조직신학의 아버지 이다. 우리는 조직신학을 논할 때 한국에서는 박형룡교수를 거론하고 영문을 보는 신학도는 Princeton 신학의 거장이던 Charles Hodge 나 아니면 Calvin 신학의 거장이던 Louis Berkhof 교수를 논하지만 조직신학의 아버지는 프랑스 출신으로 일생을 종교개혁 사상을 널리 전파하는데 바친 Francis Turretin 이다. 한국 분들 가운데는 Turretin 을 아는 분이 별로 많지 않겠지만 그는 저 유명한 세 권짜리  Institutes of Elenctic Theology 변증신학강요 라는 불휴의 명작을 쓴 분이다. 그의 부친인 Benedict Turretin 은 1618년11월 부터 1619년 5월 까지 Dordt 공회가 소집될 때 아르미니우스 교수의 제자들의 주장에 반대하여 도르트 신경, Canons of Dordt 를 만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분이지만 아버지보다 오히려 그의 아들인 Francis Turretin 이 신학계에 더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번에 갑자기 신학게에 나타난 영국의  Nicholas Thomas Wright 목사는 엉뚱한 말을 한다. 그럼 그가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그의 주장은 과연 무엇인가? 


 


이제 그의 주장을 살펴보면서 그것이 성경에 맞는 말인가를 검토해 보자.


첫째 그의 주장에 따르면, 바울의 칭의 개념은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런 것이 아니었는데 종교 개혁가들이 바울의 칭의 교리를 오해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가 말하는 바울의 바른 칭의의 교리는 무엇이란 말인가?  Nicholas Thomas Wright 나 E. P. Sanders 같은 사람은 주장하기를 유대나라의 제2성전시대에는 유대인들 사이에 사람이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의로워 진다는 사상은 없었고 따라서 바울도 그런 교리를 가르칠 리가 없었다고  주장한다.


 


“그럼 바울은 무엇을 가르쳤다는 말인가?” 라고 물으면 이들의 대답은 이러하다.  바울의 관심사는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되는 것이 었다. 어떻게 하면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언약백성 즉 유대 민족 속으로 들어올  수 있는가 에 관심을 쏟았다> 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제2성전> 이란 첫째번 성전이 바벨론 군사들에게 파괴되고, 유대백성이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돌아와서 수축한 성전을 말하는데 예수님 과 바울 사역 당시에 서 있던 성전을 말한다. 이 성전조차도 AD 70년 유월절날 아침에 기습해 들어온 로마군사에게 아주 무너진 것은 우리가 모두 잘 아는 사실이다. 지금은 그 성전의 벽만 남아 있다.


 


이들 새로운 학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말을 들으면, 바울 당시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언약백성 즉 유대백성이 되는 일은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이지만 언약백성의 특권을 누리는 것은 율법을 지키므로 되는 것이었다고 가르친다. 그러므로 이들 바울의 <칭의 교리>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가르치는 <바울의 칭의의 개념> 은  종교 개혁가들이나 우리들의 생각과 아주 다르다 이들은 유대인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이들이야 말로 바울의 신학을 아주 오해한 사람들이다. 바울이 유대교에만 관심이 있어서  그가 로마서 와 갈라디아에서 말하는 칭의가 고작 이방인들이 유대교에 들어가는데 필요한 교리를 말한 것인가?  아니면 죄에 빠진 인간이 하나님 앞에 어떻게 의롭다고 인정받는가 하는 문제를 말했는가?  이 두 갈래 길에서 정통적 신앙과 이들 새로 나온 자유주의 학자들 사이의 의견이 갈린다.


 


둘째로, 이들은 바울이 말하는 “율법의 행위” 란 말은 유대인들이 말하는 의식법을 말한다고 주장하며 종교 개혁가들이 가르쳤던 도덕법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가령 롬 3:28절이나 갈라디아 2:16에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자 가 없나니” 라고 말할 때, 바울은 자기 행위로 구원을 얻으려는 사람을 탓한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이 모세의 율법에 명시한 의식법 즉 할례나, 월삭을 지키는 일이나 음식을 가려서 먹는 일등 의식법을  지키지 않으면 언약의 백성으로 받아 드리지 않으려는 유대교 주의자들을 향하여 책망하는 말이라고 가르친다.  이것은 종교 개혁가들의 해석과는 아주 다른 가르침이다.  그러므로 바울의 칭의의 가르침은 죄인이 어떻게 절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죄를 용서 받고 구원을 얻는가 하는 그런 종말론적인 해석이 아니고 이방인들이 어떻게 유대교에 들어가는 가 하는 교회론을 다루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이들 중에서도 특히 James D. G. Dunn 교수의 주장이다.


 


셋째로, 이들 새로운 학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말을 들으면 바울의 가르침을 종교개혁가들과 판이하게 해석한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들은 바울이 바울 서신들에서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칭의의 개념을 전혀 다르게 해석했다.  칭의 교리에 대한 정통신학의 개념은 전에도 언급했지만 죄인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죄를 용서함 받고 의롭다고 인정받는가 하는 것인데 이들 새로운 학설의 주창자들의 칭의의 개념은 <현세에서 이방인들이 어떻게 유대교에 들어가 하나님의 언약백성이 되는가?> 에 중점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의 칭의의 교리를 해석하는 방법은 죄인이 어떻게 죄를 용서함 받는가를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이방인이 하나님의 백성들 틈에 들어갈 수 있는가를 가르쳐 준다고 믿는다.


이 두 가지 개념은 아주 다르다.  정통신학의 해석은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함을 입을 육체가 없나니” 란 말은 유대교에 입교할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은 그 누구도 하나님의 완전한 율법을 다 완전하게 지킬 수 없으니 하나님의 은혜로만 의로워지며 즉 칭의를 받으며 구원을 얻어 <아브라함의 영적 자손>이 된다는 말이다.


 


넷째, Nicholas Thomas Wright 교수는 바울의 <칭의의 교리>를 설명하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룩하신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어 우리가 그 의를 근거로 믿음을 통해서 의로워 졌다는 성경적 교리를 정면으로 부인한다.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를 인정치 않으니 아담의 죄가 그의 후손들에게 전가된 사실도 인정치 않으며 바울이 말하는 칭의를 단지 좀은 의미에서 유대민족과 이방인과의 문제로만 국한하여 해석하려 한다. 그러나 분명 성경은 우리가 우리의 공로로는 하나님 앞에 의로워질 수 없다고 가르친다.  우리가 의로워 진 것은 그리스도께서 능동적 및 수동적 순종으로 이룩한 의가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백성에게 전가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고 보아 주시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에게 의롭다함을 얻었다는 말은 우리가 아주 의로워져서 죄를 도모지 짓지 않을 정도로 변했다는 말이 아니다.  아직 죄가 남아 있고 죄인인고로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는 우리를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의롭다고 간주해 주시는 것이다.  이것이 칭의의 셩경적 개념이며 바울의 가르침이다.  헬라어에서 <의로워진다> 는 단어는 <dikaiow, 디카이오오> 이다. 헬라어에서 o w 로 끝나는 동사가 도덕이나 윤리를 나타낼 때는 반드시 “...으로 여김을 받는다” “으로 간주된다” 란 의미를 가진다.  그러므로 “dikaiow” 는 “의롭다고 여김을 받는다” 란 의미이고, 같은 이유로 “homoiow, 호모이오오” 는 “같다고 여김을 받는다” 란 말이고, “axiow” 는 “합당하다고 여김을 받는다” 란 의미이다.


 


아상 네 가지 각도에서 새로운 학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의 학설을 들어보았는데 이를 어떻게 평가할까?


예나 지금이나 같은 성경을 놓고 <새로운 성경의 진리>를 발견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항상 있어왔다.  전에도 언급한대로 성경의 진리는 다시 발견될 수 없다, 왜냐 하면 이미 성경의 진리. 즉 우리가 <믿는 도리> 는 모두 그 많은 신앙고백들을 통해서 정립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모든 신앙고백서 중에서 단연 우뜸이라고 일컫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우리의 믿는 도리가 모두 자세히, 그리고 성경대로 정확히 정립되어 있다.  그러나 성경의 권위를 존중하지 않는 자들은 성경을 곡해하여 (distortion) 다른 사람들을 오도한다. 


 


지금으로부터 상당히 오래된 1970년대에 보도된 이야기 이지만 마가복음 16장 9절 이하의 말씀을 근거로 하여 뱀을 목에 감고 예배하는 교파가 있어서 당시 Christianity Today 잡지에 기사화한 적이 있었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새로운 <성경적 진리> 를 발견했는데 <믿음이 있는가 여부를 알려면 뱀을 목에 감고 예배를 드려야 한다> 고 주장했다.  성경해석방법을 모르거나 아니면 기독교의 진리를 왜곡하여 사람들을 성경의 진리에서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려는 소치라고 밖에 볼 수 없다.


 


이번에 새로 발견했다는 <바울의 칭의에 대한 새로운 관점, New Perspective on Paul> 이라고 하는 것도 바울의 경우 바울 당시 존재했던 성전이 칭의 교리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바울은 오히려 우리 몸이 주님의 성전이라고 고린도전서 3장과 6장에서 가르쳐준다.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몸이 주님이 계시는 성전이라고 가르쳐 준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의 성전을 중심으로 바울의 신학을 수정하겠다는 것은 첫째 접근 방법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바울은 그 옛날 회심하기 전에는 사람이 율법을 지켜 구원을 얻는 줄 생각하고 <율법에는 흠이 없이 지켰다> 고 본인이 고린도 후서 11장에서 자부한다. 이방인이 유대교를 믿는 방법을 논 한 것이 아니라 바울 자신은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회복 즉 구원을 얻는가 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바울 자신이 스스로 율법을 열심히 지켰다.  그러나 회심한 다음에는 사람이 구원을 얻으려면 죄 문제를 해결해야 하고 절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죄 문제는 반드시 해결되어야 하는 문제임을 알고 죄문제를 해결하는 법은 하나님이 보내신 그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이룩한 의를 믿음으로 되어 짐을  로마 1:17에 자세히, 그리고 1-5장에서 분명히 가르쳐 주고 있지 않은가?  로마서 3:11이나 3:23에서 우리 모두가 죄인이며 모두가 하나님에게 범죄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는 말은 무엇을 증명하는가?  이방사람들이 유대교에 들어가는 일을 말함이 아니다. 인간의 죄 문제를 논하는 것이다.


 


중세의 로마천주교의 많은 그릇된 가르침 가운데는 <칭의의 개념>이 크게 잘 못되어 있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이룩한 의가 우리에게 전가된 것이 아니고 우리는 구원을 위해서 우리의 노력과 공로가 필요하다고 가르쳤다. 그것은 여러 가지로 나타나는데 미사가 그 한 가지이다  그들은 성찬에 참여하면 그것이 죄를 없이 하는 줄 알았다. 그래서 죄인이 죄를 지으면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하고 신부는 그의 죄를 용서하는 조건으로 성찬식에 참여하기를 권장한다. 흠이 없는 신부가 집례 하는 미사에 참여하면 그 죄인은 죄를 용서 받게 되고 다시 죄를 지으면 또 다시 신부에게 가서 고해성사로부터 시작하여 같은 내용을 되풀이했다. 이것은 지금도 행하는 그릇된 천주교의 교리이다. 즉 그리스도가 십자가상에서 이룩한 의가 우리를 구원하는데 충족하지 못하므로 인간의 공로가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바울의 칭의 교리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주장하는 E .P .Sanders, 나 James Dunn 이나 회중교회 목사인 Nicholas Thomas Wright 등은 천주교에서 주장하는 것과 비슷한 인간의 공로를 포함하는 구원관을 말하고 있다.  무엇을 해야 구원을 얻는다는 교리는 모두 인위적이며 비성경적인 교리들이다. 우리는 무엇을 해서 믿는 것이 아니다  믿게 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되어 지고 회심한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선행을 하게 된다. 반대일수는 없다. 그러나 새로운 학설을 주장하는 이들은 이방인이 유대교에  입교하는 일도 모세의 육법에 명시된 의식법인 식이법이나 안식일, 할례 등을 행해야 이루어진다고 가르치는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경고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잘 못된 교리이다.


 


이는 갈라디아 2:16이나 로마서 2:20의 말씀을 오해한 것이며 바울의 의도와는 관계없는 일이다. 바울의 마음은 오직 죄에 빠진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에게 가까이 나아가며 바른 관계를 회복하여 구원을 얻는가 하는 일에만  관심이 있었다. 


그러기에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로원 질 육체가 없나니”에서 의로워진다는 것은 단지 이들 새로운 학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주장 처첨 이방인이 유대교에 입교하는 조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근본적인 문제로서 인간의 죄 문제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율법”을 말할 때 그는 모든 율법이 요구하는 의무를 말했다 가령 갈 3:10-14; 갈 5:2-4; 갈 6:13; 롬 2:6; 롬 3:20; 4:2-8;9:32 등을 보면 바울이 무엇을 말했는지 알 수 있다. 죄에 빠진 인생은 하나님의 온전하신 율법을 아무리 애써도 완전하게 지킬 수 없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이 땅에 오셔서 능동적 순종으로 우리가 지키지 못하는 그 모든 율법을 완전히 지켜 주시여 율법의 마침이 되었고 죄의 값은 죽음인데 죄인인 우리가 죽을 대신 그가 친히 십자가에서 수동적인 순종으로  자신의 몸을 버려 주셨다.  즉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으로 이룩한 그 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고 우리의 죄는 그에게 전가되어 하나님 앞에 우리는 아무 공로 없이 의롭다함을 얻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다.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된 것이 아니라> 고 믿는 새로운 학설을 주장하는 이들의 교리는 분명히 비성경적이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따르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이방인이건 유대인이건 하나님 앞에서 그의 율법을 온전하게 지킬 사람은 세상에 아주 없다 (갈 3:10; 갈 5:3; 롬 3:19-20; 롬 5;20; 7:5-12).


 


바울이 말하는 칭의는 이방인들이 유대교에 들어와서 하나님의 언약백성이 되는 것을 말함이 아니고 이방인이건 유대인이건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온전하신 도덕법을 지켜서 되어 지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만 되어 짐을 알게 하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것은 성경전체의 흐름이고 바울 신학의 골자이지만 특히 롬 7장에서 바울이 고민하는 모습을 보고 알 수 있다. 바울은 하나님의 법을 온전히 지키지 못하는 것이 그의 지체 속에 있는 육신의 생각 때문이라고 말하는데 바울의 생각이 무엇인가? 그가 유대교에 들어가는데   율법을 모두 지키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언약백성이 되기가 어렵다고 실망한다는 말인가?  아니다. 바울은 구원론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에게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율법을 다 지킬 수 없는 육신의 생각을 탓하는 것인데 바울의 논리의 극치는 8장 1절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라는 결론에서 볼 수 있다.  즉 바울은 교회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론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관건이다. 새로운 학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여기서 정통적 개혁주의 신학과 충돌한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참으로 어지러운 시대에 살고 있다.  온갖 이상한 교리가 난무하는 이상한 시대에 살고 있어서 참 성도는 신앙을 지키기 어렵다.  <빈야드 운동> 이 교회를 휩쓸고 갔고 하나님은 미래를 모른다는 소위 <Open Theim  열린 신론> 이 지나갔고,< Jesus Seminar 운동>이 생겨나서 “성경이 사실인가 아닌가 따지고 믿자“ 고하면서 공관복음의 내용을 검토하면서 이적 기사의 신빙성을 투표하는 목사들과 신부들이 있는가 하면 <Alpha Course> 라고 해서 처음으로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 잡기위해서 <그들이 편할 대로 예배를 드리자> 고 주장하는 소위 <열린예배 운동>, <Emergent Church 운동> 의 바람이 불어와서 <교리를 무시하고 편할 대로 믿자> 고 하는 사람들이 나타나더니 이제는 기독교의 가장 핵심 교리인 <칭의의 교리 즉 구원의 교리> 를 송두리째 말살 하려는 움직임이 서서히 영국과 미국의 교계에서 고개를 들고 있다.  우리는 경계해야 한다.  이를 용납해서는 안 된다.  성경은 <성경대로 믿지 아니하면 구원이 없고 저주를 받는다>라고 하나님은 바울을 통해서 갈라디아 1:8절과 9절에 두 번 씩 경고한다. 아무렇게나  내게 편한대로 믿으면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다. 이는 잘 못된 가르침이다. 기독교의 교리를 바로 알자, 성경을 바로 알자. 이단에 빠지지 말자.


 


이번에 E. P. Sanders, James Dunn, Nicholas Wright 등이 주장하는 <바울의 칭의 교리에 대한 새로운 관점> 은 종교 개혁가들의 신학과 반대가 되며 기독교 2000년 역사에서 수  많은 정통적 신앙고백서와 신조들에도 위배 되는 그릇된 인본주의 신학 풍조이다. “우리의 원수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삼킬 자를 찾는”  이때에 우리 개혁주의 성도들은 Sola Gratia, Sola Fide, Solus Christus 의 깃발을 높이 들고 아름다운 신앙을 지켜 나가야 할 것이다.
                                                                            


필자: 김명도 교수
튤립 교육 선교회 회장
튤립 신학 연구원 원장
칼빈 신학 대학 대학원 변증학 교수 
rvkim@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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