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신학

구 원 론 (救援論)

작성자
쥬니어칼빈
작성일
2012-11-01 05:20
조회
4516

오늘 강의의 제목은 구원론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얻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선 알아야 할 것은 구원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무엇으로부터 구원을 얻었는가 하는 말입니다. 구원을 얻었다고 하면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이 물에서 전져냄을 받듯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 구출 받은 것을 말할텐데 무엇으로부터 구원을 받은 것입니까?  구원론을 논함에 있어서 이것을 확실히 아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물에 빠져 죽게 된 사람을 건저내면 그 분이 얼마나 고마워하겠습니까? 누군가가 건져내 주지 않으면 그는 죽을 수밖에 없겠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아담> 이라고 불리우는 인류 시조의 자손들이고 아담이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죄를 지은 탓에 그의 후손들인 우리는 모두가 죄인이 되었다고 로마서 5:12절 이하에 말하고 있습니다. 죄를 지으면 죄의 댓가는 죽음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를 지을 때 신부에게 가서 죄를 사죄 받는 것은 터무니없는 거짓입니다. 죄를 용서 받으려면 하나님에게 직접 나아가 회개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용서 받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1:10).죄의 값은 사망입니다(롬 6:23).


 


이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죄를 용서 받을 수 없습니다. 신부가 사람의 죄를 용서해 줄 권한이 없습니다. 모두가 같은 죄인이기에 죄인이 죄인의 죄를 용서해 줄 수 없다는 이치입니다.  천주교에서는 신부에게 가서 고해 성사 (告解聖事, Penance) 를 하여 자기의 죄를 고백하고 신부가 하라는 대로 벌을 받으면 그것으로 죄 사함을 받는다고 가르치지만 그렇게 해서 죄가 사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죄의 댓가는 죽음이기 때문에 죄지은 사람이 죽어야 하는데 내가 죽을 대신 죽어주신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죄를 용서할 수 있습니다. 그는 우리의 중보자가 되십니다. 딤 2:5이 그렇게 가르쳐 줍니다.


 


        사람은 누구나 죄인으로 태어납니다. 어린애도 죄를 타고 납니다. 시편 51편5절에 보면, 다윗은 모태에서 죄악 중에 잉태했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모두가 죄악 중에 태어납니다.  <사람은 날 때에 본래 선하게 태어나는데 환경 때문에 악해 진다> 라고 가르치는 공자의 성선설 (性善說) 은 거짓입니다. 성경 시편 51편 5절이나 시편 58편 3절 등이 사람은 나면서 죄악 중에 태어난다고 분명하게 가르쳐 줍니다. 그던데 죄의 댓가는 죽음이라고 또한 성경 로마서 6:23절에서 가르쳐 줍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죽게 되었고, 죽는다는 말은 육신의 죽음과 함께 영원히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것을 말합니다. 죽음이란 절대로 우리의 본체가 소멸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원래부터 영혼과 육신으로 되어 있는데 이 둘은 죽어서도 존재합니다. 인간의 영혼은 신자이건 불신자 이건 할 것 없이 모두 영원 불멸입니다. 영혼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단지 그 영혼이 어디서 어떻게 영원을 보내는가 하는 문제만 남아 있는 것입니다.  죽음이란 단지 일시적으로 몸에서 영혼이 분리되는 작용을 말할 뿐입니다.


 


주님이 재림하게 되면 다시 영혼과 육신이 연합하여 영원히 영과 육의 인간으로 영원히 삽니다. 영원히 사는 곳은 신자와 불신자가 다릅니다. 신자는 하니님과 같이 살게 되고 불신자는 지옥에서 의식상태에서 영원히 고통가운데 살게 됩니다. 신자는 천국에서 영원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그때의 인간의 육은 지금의 우리의 육신과 같은 썩을 육신이 아니고 시들지 않고, 썩지 않는 영화로운 몸입니다. 그래서 그 영화로운 몸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히 살게 됩니다. 베드로후서 3:9절이 그렇게 가르쳐 줍니다. 물론 이것은 구원 얻은 성도에 한합니다. 그리고 교회에 명목으로만 출입하는 <사이비신자>는 이에서 제외됩니다. 또 한편 아직도 죄악 중에 있어서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은 이와는 반대로 죽을 때 영혼이 몸을 떠나는 현상은 신자와 같지만 그 후에 몸과 영이 아울러 영원토록 지옥의 형벌을 받게 되는 엄연한 사실을 꼭 알아 둘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의 기독교계는 <사이비신자 (似而非信者, quasi-Christians) 들이 대다수 입니다.


 


그래서 눅 18:8에서 주님은 <인자가 다시 오는 날 이 세상에서 “성경적” 믿음을 보겠는가?> 하고 묻습니다.  사실 오늘 유럽은 말할 것도 없고 미국이나 한국에도 성경적인 믿음은 찾아 보기 어렵습니다.  대개가 형식주의 이며 믿는 도리를 모르면서 적당히 신앙생활하고 있음이 사실입니다.  사회 각계에서 일어나는 부정행위에 <신자> 들이 불신자 보다 더 많이 들어 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합니다.


 


        그러면, 이제 구원에 대해서 좀더 자세히 말해 보도록 합시다. 구원이 무엇입니까?
앞서 <물에 빠진 사람의 이야기> 를 비유로 들어 보았습니다만, 사람이 물에 빠져 있는데 여러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말하기를 “앞을 보고 다니지 왜 빠졌는가?” “물에 빠지면 짚 오라기를 잡고 나와야 한다,” “조심해서 나오라” 는 등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지만 물에 빠져 죽으을 앞둔  당사자에게는 그런 “강의” 가 필요한 것이 아니고 실제로 직접 뛰어들어 건져 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당사자는 자기 능력으로 물에서 나오려고 하지만 역부족입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빠져 나로려고 애쓰는 것이  타종교에서 말하는 구원관입니다. 다른 종교는 이른바 자율적인 종교 (自律的宗敎) 입니다. 즉, 스스로가 자기의 힘으로 인생에서 가장 큰 문제인 <죄문제>를 해결하려 듭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타율적인 종교 (他律的宗敎) 입니다.  하나님이 죄에 빠진 인생을 살리기 위해서 직접 인간 세상에 오셔서 친히 인간의 희노애락 (喜怒哀樂) 을 체험하시고 친히 나무 (십자가) 에 달려 우리가 받을 저주와 형벌을 대신 받아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인간이 어떻게 구원을 얻습니까?  한 가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사람은 스스로를 구원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사람은 타락하여 스스로의 힘으로는 하나님을 찾아갈  수 없다고 로마인서 3:11이나 3:23등에 말합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처음서부터 끝까지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히 12:2). 하나님이 하신다는 말은 성부, 성자 성령이 하신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란 말을 사용할 때 성부만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나님은 한 분인데 성부, 성자, 성령 등 삼위로 계신 분입니다. 영원 전부터 영원까지 하나님은 3위로 항상 계신 분입니다. 구약시대는 아직 성자 예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시지 않은 것뿐입니다.


 


구약에 나타나는 신인 현현 (anthropomorphiism) 은 모두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가령 이사야 6장 1절부터 보면 이사야가 선지자로 안수 받을 때에 문지방이 흔들리며, 연기가 성전에 가득 차며, 스랍들은 여섯 날개를 가졌는데 두 날개로는 얼굴을 가리우고, 두 날개로는 발을 가리우고 두 날개로 날면서  <거룩하다 거룩하다> 라고 창화했습니다. 그 때 이사야는 거룩한 여호와를 보았다고 했는데 요한복음 12장41절에 보면 그때 이사야가 본 것은 주님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구약 이사야 40장 10절에 나오는 여호와도 마찬가지로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럼, 이제 성삼위께서 어떻게 인간의 구원을 이룩하시는지 보도록 합시다.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는 과정을 흔히 신학적으로 구원의 서정 (救援의 序程) 이라고 하고 Latin 어로는 Ordo Salutis 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단계는 어느 정도 시간의 간격을 두고 일어나는 변화가 아니고 <성화>를 제외하고는 동시에 일어나는 변화입니다. 단지 성화만이 오랫동안 지속할 뿐입니다.


 


        하나님은 처음에 구원 얻을 자를 창세전에 택해 주십니다. 엡 1:4이나 로마서 8장29절 등에 보면, 하나님은 창세전에 그의 기쁘신 뜻대로 구원하시고저 하는 사람들을 예정하시고 우리를 택해 주셨다고 가르칩니다. 세상에 많은 사람이 오고 가지만 하나님의 택함을 받아 예수를 알고 구원을 얻고 간 사람의 수는 지극히 적습니다.  우리가 믿게 되는 것은 순전히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며 우리의 마음대로, 우리의 의지대로 되어 진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창세전에 택해 주신 그들이 어떻게 구원을 얻는지 자세히 보도록 합시다.


 


        구원의 서정의 첫 단계는 효과적 부르심 (Effectual Calling)입니다.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많지만 택함을 받은 사람은 적다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어쨋던 하나님이 그가 창세전에 기쁘신 뜻대로 택해 주신 분은 그가 죽기 전에 언젠가 하나님의 정한 때에 효과적인 부르심으로 불러 주십니다. 부르심이 첫 단계입니다. 부르심은 두가지가 있는데 일반적인 부르심 즉 Universal call 과 효과적인 부름 Effectual call 입니다. 복음은 누구에게나 전해 집니다. 특히 오늘같이 통신 수단이 발달 한 사회에서는 누구나 쉽게 복음을 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일반적인 부름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은 복음을 듣게 되는데 복음을 듣는 모든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가령 거리에 나가서 노방전도를 할 때 많은 사람이 모여서 같은 목사의 설교를 같은 장소에서 같은 시간에 듣지만 설교가 끝나고 나면 아무런 감정도 없이 모두 사라져 버리고 몇 명만 남습니다.  왜 이런 현상이 생깁니까? 


 


       어떤 분들에게는 복음이 특별히 사역하여 그 마음에 감동을 주고 어떤 분에게는 아무런 감동을 주지 않습니다. 왜요?  이유는 하나님이 그 사람을 효과있게 불러 주시면 그 마음에 죄에 대한 아픔이 생기고 영적인 문제에 흥미를 갖게 되지만 효과 있게 불러주시지 않는 사람들은 아무런 감각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처음에 예수를 믿을 때는 효과 있는 부르심으로 시작한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로마서 10:17에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난다” 고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들어서 믿음이 생기게 됩니다.  음악을 들어서는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오로지 사람이 믿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이뤄지는 것인데 말씀만이 아니고 말씀이 성령으로 그 사람의 마음속에 역사할 때 열매를 맺어 중생이 이루어 진다는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말하기를 하나님이 택해서 예수를 믿게 되는 것이라면 무엇 때문에 전도할 필요가 있는가? 하고 반박합니다. 그러나 말씀을 통해서 중생케 되므로 누군가가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고린도 전서 3:6 이하에 보면,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 뿐이시니라> 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도만 하면 그만이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분이라면 그분을 그의 뜻대로 구원해 주시는 것입니다.  야곱과 에서는 쌍둥이 입니다. 에서는 먼저 출생했으니 형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에서보다는 동생인 야곱을 택해 주었습니다. 왜요? 하나님의 주권에 속하는 일이므로 인간이 힐문(詰問) 할 수 없다고 로마서 9장에 가르쳐 줍니다.
       
        두 번째 단계는, 중생입니다.  하나님이 창세전에 택해 주신 자들을 하나님은 정한 때에 효과적으로 불러 주시면 그 사람은 중생하게 됩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하시는 일입니다.  중생이란 영어로는 “regeneration” 이니 “born again” 이라는 말을 사용하지만 원래의 의미는 “위로부터 출생했다 born from above" 라는 의미 입니다. 그것이 헬라어 원문성경에서 ”monogenao“ 의 의미 입니다. 위에서 낳았다는 말은 하나님 으로부터 낳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으로 낳다는 말은 고린도후서 5:17에서 말하는 것처럼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옛 것은 모두 지나가고 모든 것이 새로워졌다> 는 말입니다. 모든 것이 새로워 졌다는 말은 우리의 지(知., intellect) 정(情, emotion),의(意, volition) 가 변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 (Imago Dei) 으로 지으심을 받았기 때문에 짐승과는 달리 지.정.의 가 있습니다.  물론, 거듭나기 전의 인간은 지.정.의가 모두 타락하여 자기중심적이고 본질상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야 할 사람들이 었지만 (엡2:1) 하나님이 중생케 하므로 인하여 이제 그 지.정.의 가 모두 변한 것입니다.  자기중심의 생활에서 하나님의 중심 생활로 돌아 서게 된 것입니다.


 


        중생이란 어떻게 이뤄집니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에게 일어나는 특이한 현상인데, 중생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지만 하나님은 말씀과 성령으로 역사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디도서 3:5에 보면,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셧나니 성령을 우리 구주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 주사 우리로 저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5-7절) 라고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3:5에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고 들어갈 수도 없다” 고 했습니다. 여기서 “물”은 “말씀”을 말합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에스겔서 36장 24절 이하를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중생은 말씀과 성령을 통해서 이뤄진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교회에서 말씀을 등한히 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요즘의 이른바 <열린예배, Seekers' Service> 에서 설교가 희생되는 것은 극히 비성경적인 인본주의 사상입니다.  교회에서는 말씀이 진실하게 선포되어야 합니다. 참다운 교회의 세 가지 표지는 첫째, 말씀 선포, 성례식 거행, 그리고 세 번째, 권징입니다. 그러나 이 세 가지 특징은 오늘의  교회에서는 모두 포기한지 오래 됩니다. 권징이 있는 교회는 거의 없습니다.


 


오늘의 교회는 타락에 타락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깊은 배도 (背道, apostasy) 로 깊이 빠져 들고 있고 그리스도의 원수인
사단은 기뻐하고 있습니다.


 


        중생하면 중생과 함께  두 가지가 따라 오게 되는데 그것이 회개 (metanoia) 와 믿음 (pistis) 입니다.  회개와 믿음은  어느 것이 더 중요한 것도 아니며 또 어느 것이 앞서는 것도 아닙니다. 둘 다 동시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앞서 중생을 논하면서 중생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인데 말씀과 성령으로 되어 진다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중생이 이뤄지면 회개와 믿음이 자생적으로 울어 나오게 됩니다. 회개가 일어나니 죄를 미워하게 되고 죄를 안 지을 마음이 생기게 되고 죄인인 것을 알게 되고 그렇게 되면 이제는 그리스도에게 나아오게 되니 믿음을 갖게 되어 주를 왕으로 모시고 순종하며 살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나온 회개와 믿음은 우리를 변화시켜 주는데 이 말은 우리의 지. 정. 의를 변화 시킨다는 말입니다.


 


       그럼 여기서 우선 회개가 어떻게 우리의 지.정.의를 변화시키는지 봅시다.  회개한 사람은 지적인 면에서 변화가 생기는데 “나는 할 수 없는 죄인이므로 지옥에 들어 갈 수밖에 없다” 는 것을 지적으로 알게 됩니다. 이것이 회개가 우리의 지적인 면에 일으키는 변화입니다.  그 다음 회개가 정적인 면에 미치는 변화를 보면, “나는 죄인인 것을 비관하여 가슴을 치면 울고 웁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구나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구원하랴> 라고 한 로마서7장 끝절의 사도바울의 탄식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거듭난 사람은 죄 때문에 웁니다. 이것은 중생과 함께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회개가 정서적인 면에 일으키는 변화 때문입니다.  회개가 의지에 미치는 변화는 어떤 것입니까?
“이제는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으며 죄를 미워 하겠다” 는 결심이 서게 됩니다. 이것이 회개가 우리의 지.정.의에 변화를 가져오는 과정입니다.


 


       그러면, 믿음은 어떤 변화를 가져옵니까?  중생하면 중생과 함께 회개와 믿음이 자생하는데 하나님이 그런 마음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믿음은 지.정.의에 어떤 변화를 초래합니까?  지적인 면에서는 “나는 어쩔 수 없는 죄인이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구원하심을 안다.” 라는 지적인 변화가 생깁니다.  정서적인 면에서는 “이제는 구주 예수에게 감사 감격하고 그를 본받아 성경공부하고, 기도하고 봉사 하여야겠다” 는 마음이 듭니다. 그래서 그렇게 생활합니다. 그리고 믿음은 우리의 의지면에서 “이제 부터는 그리스도에게 순종하고 의지하며 전폭적으로 그에게 자신을 의탁하고 살겠다” 라는 결심이 섭니다. 이것이  중생한 사람의 믿음생활입니다. 


 


만일 이런 지. 정. 의의 변화가 생기지 않았으면 아직 회개가 없는 사람이며, 믿음이 없는 사람이고 따라서 중생하지 못한 사람이고 따라서 부르심을 받지 못한 사람이니 구원과는 관계가 없는 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회개는 구약에서 히브리어로 “shub” 라고 하는데 이는 <가던 길을 돌아온다> 는 말이니 영어로 <making a U turn> 을 말하는 말이며 신약성경에서 "anastrepho" 와 마찬가지 의미입니다. 또 한가지 희개의 의미는 “생각이 바뀐다” 의 의미를 갖습니다. 이것이 신약성경의 metanoew (명사는 metanoia) 란 말의 의미입니다


 


        믿음이란 “fiducia” 라는 말인데  이는 <trust and obey, 의지하고 순종하는 것> 을 말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부연할 것은 하나님이 중생 시키시고 믿음과 회개를 선물로 주었지만 일단 그런 선물을 받은 다음에는 책임이 성도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믿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자신을 회개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것이고 우리가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을 성장하게 할 책임은 성령의 도움으로 인하여 우리가 늘 힘을 써야한다는 말입니다 (성화, sanctification) 하나님에게 맡기고  태만한 생활을 하는 것은 비성경적 입니다..


 


        중생의 단계 다음은 회심 (Conversion) 의 단계입니다.  진실로 중생한 사람은 가치관이 달라집니다. 이전에 중요하던 것이 이제는 별로 가치가 없어집니다. 바울이 빌릴보서 3:8 이하에서  말씀하는 것처럼 <예수를 아는 가장 고상한 지식으로 인하여 세상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는 마음> 입니다. 이제는 그리스도를 알고 나서는 인생관 세계관이 모두 변해 버립니다. 새로운 인생을 찾아 나섭니다. 엡 5:10 말씀대로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그것만  생각합니다.  생각하는 것, 말하는 것, 행하는 것이 모두 하나님 중심으로 변합니다. 오늘의 빈번한 교회 문제는 교회의 직분 받은 분들 중 이런 회심한 분들이 적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부르심과, 중생, 회심의 단계를 거쳐 이제는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고 보아 주시는 단계인데 이것을 신학적으로 칭의(稱義, justification) 라고 합니다.  "칭의" 에 대해서는 참으로 오해가 많으므로 잘 공부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첬째, "칭의"라고 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일방적으로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는 것 뿐이며 우리가 실제로 흠도 없고 티도 없이 깨끗이 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런 칭의의 과정을 신학적으로는 법적인 선언 (forensic declaration) 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죄인이로되  죄인을 죄인으로 다루지 않고, 마치 죄가 없는 것처럼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죄없다” 고 인정해 주시며 따라서 “의롭다‘고 인정해 주신다는 놀라운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칭의를 받은 사람이 ”이제 나는 의로워 졌으니 기도할 필요도 없고, 회개할 필요도 없고, 봉사할 필요도 없고, 나가서 아무렇게나 죄를 마음대로 짓자“ 라는 생각은 크게 잘못된 것이니 이런 사람들은 아직 구원 얻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가르치는 사람을 ”Antinomian” 즉 <도덕 폐기론자, 道德廢棄論者) 라고 합니다.


 


       만일 구원을 얻은 사람이라면, 그런 생각이 들지 않고, 오히려 나 같은 죄인 살려 주신 하나님에게 감사 감격하여 더욱 겸손해 지고 더욱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살게 됩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3:9에는 ”하나님께서 난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 속에 있음이이요“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즉 거듭난 사람은 성령이 그 안에 계시기 때문에 상습적으로 죄를 지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문법적으로 알 것은 ”죄를 짖지 아니하나니“ 란 말은 현재 동사이므로 헬라어에서는 현재 동사를 쓰면 <상습적으로, 혹은 반복적으로 어떤 일을 계속하는 일>을 말하므로, 상습적으로 죄를 짓지 않는다, 반복적으로, 고의적으로 죄를 짓지 않는다 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상습적으로 습관적으로 죄를 짓는 사람은 아직 거듭나지 못한 사람입니다. 요한일서 2:19에 보면 거듭나지 못한 사람이 마치 거듭난 사람처럼 착각하여 교회에 출석하다가 결국은 교회에 출석치 않고 믿음을 저 버린 사람을 말하면서 ”원래부터 중생하지 못한 사람이었는데 마치 중생한 자 인듯 위장하고 있었다는 요지의 말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가롯 유다 처럼, 예나 지금이나 기독교의 교회에는  중생하지 못하고도 중생한 척하며 자기 자신을 속이며 하나님을 속이는 사이비 신자들로 인하여 온 교회가 고통을 당해 왔던 일을 교회사를 통해서 봅니다.  진정으로 중생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세칭 “구원파”에서 말하듯, 중새한 일자와 장소를 반드시 알아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 일자와 장소를 아는 것은 구원과 무관합니다.  중요한 것은 현재 중생하여 주님을 왕으로 모시고 순종하며 산다는 사실입니다.


 


        칭의의 근거는 무엇입니까?  예수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에서 우리는 이중 전가 (二重轉嫁 double imputations) 를 봅니다. 즉, 그가 그의 택한 백성의 죄를 대신해 죽으셔서 그 의를 우리에게 전가 시켜서 우리는 아무 공로 없이 의롭다함을 얻게 되었고, 또한 우리는 우리의 죄를 그리스도에게 전가 시켜 그는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유월절의 어린양으로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외롭다고 보아주시는 하나님의 칭의 의 사상은 십자가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상에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셨습니다.  자기 자신이 우리를 위한 화목제로 하나님에에 바친바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는 빌립보 2:6-9까지의 말씀대로, 하나님 바로 그 분이지만 인간의 형상을 입고 오셔서 죽기 까지 순종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순종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능동적인 순종 즉 Active Obedience와 수동적인 순종 즉 Passive Obedience 입니다. 능동적인 순종이란 그가 그의 백성이 지키지 못하는 율법을 모두 지키신 것이고, 수동적인 순종이란 인간의 형상을 입고 오셔서 모든 고난을 몸소 친히 자원하여 당하신 순종입니다. 


 


       이와 같은 순종이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는 칭의의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 중요한 것은 에수님을 본받아 우리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왕 (Lordship of Christ) 이십니다.  요즘은 교회에서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대신해 죽으셨다는  그리스도의 3중직 중 “제사장직분” 만 강조하지만 그에게는 세 가지 직분이 있는데 제사장 직분 말고도, 선지자의 직분과 왕의 직분이 있습니다. 이것 또한 지켜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선지자의 직분은 말씀과 성령을 통해서 죄인을 구원하심이며 우리의 선지자의 직분은 성경말씀을 사모하고 말씀을 전하고 말씀을 지키는 일이요  그리스도의 왕의 직분은 그가 우리를 다스리고 온 세상을 통치하는 것이며, 우리의 왕의 직분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피조물을 다스리며 주님의 뜻을 이땅에 이룩해 드리는 일이며, 예수님의 제사장의 직분은 그의 지상사역에서는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의 언덕에서 택한 자의 죄를 위해서 우리를 대속하고저 운명하시고 부활 승천했지만 지금은 승천하여 하늘에서 통치하시며 지금의 그의 제사장의 직분은 우리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하시는 일인데 우리들 성도의 제사장의 직분은 나의 죄를 인하여 하나님에게 회개의 기도하며 이웃을 위해서 하나님에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제자상이란 백성을 대표하고 선지자는 하나님을 대표합니다.  이와 같이 주님의 3가지 직분과 우리의 3가지 직분이 있습니다. 개혁교단에서는 주님의 왕권(Lordship of the Lord)를 가장 중요시 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왕 이십니다. 왕이라면 떨며 순종해야 합니다. 그래서 개력주의자들은 성경대로 믿고, 성경대로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면서 살아 갑니다. 생활에 성경을 적용하는 실신한 생활은 모든 개혁주의의 시금석 (試金石, testing stone) 이 됩니다. 그를 왕으로 모시고 절대 순종하는 일입니다.  놀랍게도 오늘은 예수님의 선지자 직분과 왕의 직분은 무시해 버립니다. 선지자 직분을 무시 한다는 말은 그의 말씀을 훼파한다는 말이고 왕의 직분을 무시한다는 말은 주님의 뜻대로 살기를 기피하고 자기의 편한대로 신앙생활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자면 말도 되지 않는 <율법주의자> 라고 매도하는 풍토로 변해 버렸습니다.   상당히 성경의 가르침에서 멀어져 가고 있습니다.


 


        아담 (첫째 아담) 은 모든 인류의 대표자입니다.  성령으로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를 제외하고 모든 인류는 아담 안에서 모두 예외 없이 타락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고 오직 하나님의 진노를 받기에 합당한 사람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중에서 몇 사람을 그의 기쁘신 뜻대로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여서 구원의 계획을 세우시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속을 완성하게 하시고 성령으로 하여금 그 구속의 효과를 적용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한편 그리스도 (마지막 아담, 혹은 둘째 아담) 는 모든 믿는 자의 대표자 입니다. 아담이 모든 인류의 대표자인 것과 좋은 대조를 보입니다.  로마인서 5장 12절 이하를 읽어 보면,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둘째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리라” 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모든 ” 이라는 말은 인류 전체를 말함이 아니고 어느 민족이나를 막론하고“ 의 의미로 해석됩니다. 마치 요한일서 2:2 과 같은 의미를 가집니다.


 


        칭의가 되면, 다음에는 양자의 단계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불러 주시고 중생시키고, 의롭다고 인정하신 다음에는 양자로 삼아 주십니다. 이제 우리는 마귀의 자녀로부터 하나님의 자녀로 신분이 변해 지는 것입니다. 골로새 1:14에 보면 이제 <우리는 어둠의 세상에서 빛의 나라로 옯겨 졌다> 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요한복음 1:12에 보면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었으니> 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이면 로마서 8:15-17 에보면,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된 것을 증거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라고 하고 있습니다.


 


        양자의 개념에서 오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성부를 “아버지“ 라고 부르는 것과 우리 서도가 하나님을 ”아버지“ 라고 부르는 차이가 있는가? 하는 문제인데. 물론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성부를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양자로서가 아닌 성 삼위일체의 제2위로서 부르시는 말이요,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죄인이며 하나님의 원수이던 우리가 하나님에게 입양되어 영의 아버지로 부르는 것 뿐입니다.  본문 로마서 8장에서 “아바” 란 말은 아람어 (Aramaic) 이지만 가장 친근감 있게 부르는 어법이다.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집에 입양되어 하나님의 아들과 함께 후사가 되는 특권을 누리고 있다.  하나님 아버지는 성령으로 인하여 우리를 눈동자처럼 사랑해 주시고 우리의 출입을 영원까지 지켜 주시는 분이시다 (시편 121편).


 


        양자에게는 사랑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에게는 가끔 징계가 있다. 그래서 히브리 12장 8절 이하에 <사랑의 징계> 이야기를 하고 있다. <징계가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라? 고 하였습니다.  <징계가 비록 그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아도 이로 인하여 연단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는다> 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된 사람은 가끔 하나님의 <사랑의 매> 를 맞게 되지만 그 모든 것은 우리의 유익을 위함입니다.  욥기 5:18에 보면,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도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도 그 손으로 고치시나니...” 라고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사랑의 징계를 하십니다  시편 119: 71에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라고 했고, 또한 시편 50:15에 보면,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 라고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의 사랑하는 자에게 가끔 어려움도 주시지만 감당하지 못할 정도의 시험은 주지 않는다고 고린도전서 10:13 절에 말씀하십니다.  야고보서 1:2-4에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의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라고 하고 있는데 이것은 모두 하나님이 그의 사랑하는 자에게 가끔 어려운 시련을 주신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는 말씀 들입니다.


 


        양자가 되면 하나님은 그 사람을 그냥 내어 버리지 않고, 눈동자처럼 사랑하여 길러 주십니다. 이것을 성화라고 합니다.  부르심에서 중생, 칭의, 양자 등은 모두 일시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지만 성화는 독특하게 오래 지속하는 하나님의 사역입니다.  어린애가 충생하면 자라듯, 믿는 성도도 처음 예수를 믿고 중생하여 회심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성장하여야 하는데 그 성장 과정을 성화라고 합니다.  어떤 분은 성장과정이 빨라서 믿은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벌써 신앙이 많이 성장한 것을 봅니다. 그런가하면 어떤 이들은 오래 믿었는데도 신앙이 별로 성장하지 못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모두 성장의 속도는 다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이 신앙이 성장하도록 원하십니다. 엡 4:13에 보면,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 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13-14) 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이 세상에서 우리의 성화가 끝난다고 가르치는 분들이 있습니다. 아르미니안 주의 사람들입니다. 이 들은 말하기를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느 시점에 다달으면 죄를 짓지 않게 되는 완전한 시점에 도달하게 된다고 가르칩니다. 이런 사람들을 완전주의자 (Perfectionists) 라고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이 세상에서 완전에 이를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우리의 성화가 극에 달한다고 해도 이 세상에서는 죄를 안 지을 만큼 거룩해 질수는 없다는 것이 성경적인 가르침입니다.  아브라함도, 모세도, 다윗도, 엘리야도 바울도 모두 죄를 지었습니다  <세상에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은 없다>고 전도서 7:20에 말하며, 요한일서 1:10에 보면,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하면,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이 세상에서는 죄를 짓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이유는 우리는 아직도 육신을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을 때, 중생할 때, 우리 영혼은 거듭 납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는 롬 8:5에서 영혼이  부활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 육신은 아직 부활하지 못했습니다. 우리 육신이 부활하는 것은 주님이 재림할 때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5;28 이 이를 말해 줍니다.  그러므로 이 땅의 성도는 부활한 영혼과 부활하지 못한 육신의 소욕과 늘 싸우는데 이런 싸움에서 날마다 승리하며 나아가는 과정이 바로 성화라는 과정입니다. 


 


       이 땅의 교회를 <전두적인 교회 Church Militant> 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마귀와도 싸우고 우리 자신과도 싸우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는 싸움이 늘 지속됩니다. 그래서 이 땅의 성도를 전투적인 교회라고 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하늘에 올라가면 그곳의 교회를 승리의 교회 (Church Triumphant)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곳에 올라가기 까지는 싸움은 계속됩니다. 그래서 <험하고 높은 이 길을 싸우면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싸움에서 승리하는 길은 오직 말씀의 능력에 의지하는 길 뿐입니다. 그러므로 성경공부가 필요하고 효과적인 성경공부를 위해서는 무어니 무어니 해도 요리문답서 (웨스트민스터 요리문답서, 혹은 하이델벨크 요리문답서)를 철저하게 공부하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그러나 그런 요리문답서를 신실히 가르치는 교회는 요즘 미국 정통장로교단 (OPC)를 비롯해서 NAPARC 산하 개혁 교단들 말고는 별로 없는 것은 심히 안타까운 일입니다.


 


구원의 서정의 마지막 단계는 영화로운 몸입니다.  이것은 종말을 말합니다. 성도가 이 세상에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때가 되면 하나님의 예정된 때에 부름을 받게 되고 하나님에게 가게 됩니다. 이것은 두 가지로 가능해 집니다. 하나는 주님이 재림하므로 그때가 올수 있고 다른 하나는 주님 재림 전에 내가 죽으면 가능해 집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재림에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그날을 주시합니다. 문제는 그런 재림의 날은 아무도 모른다고 성경이 마태복음 24:36에서 말합니다. 하나님이 모른다고 했으면 우리는 알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럼에도 과거에 주님의 재림문제로 소동을 빚은 일들이 자주 있었습니다. 가장 유명한 사건은 1844년에 있었던 침례교목사 William Miller 이야기 입니다. 그래서 그 사건이후 Ellen G While 라는 여자의 수많은 환상과 계시가  안식교 출범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전에 안식교 교인으로 있다가 개종한 Walter T. Rea 가 쓴 명저, The White Lie (Turlock, CA:M.&R Publications, 1982,409p)를 참고하시면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주님의 재림을 여러 번 예언했지만 모두 실패하여 거짓 선지가 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1914, 1917, 1918, 1974 모두 거짓 예언되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재림에만 관심을 갖지 말고 우리가 죽으면 죽는 그 사람은 언제 죽든지 죽는 그날이 그의 심판 날이라는 것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매일 매일을 오늘이 나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살아야 할 것입니다.


 


        종말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일반적인 종말론> 과 <개인종말론> 입니다. 일반적인 종말론은 세상이 어떻게 끝나며 세상의 끝에는 어떻게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즉 지구가 불에 타서 없어지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조성되어 영원히 살게 되는 날이 오고, 죽은 사람들이 모두 신자이건 불신자이건 동시에 부할(General Resurrection) 하여 앞서 갔던 영혼과 연합하게 되고 마지막 대 심판 (General Judgment) 이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개인종말론, Individual Eschatology) 은 사람이 죽은 다음에 어떻게 되는 가를 가르치는 분야 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어찌 되는 것입니까?  성경은 분명히 불신자는 영벌에 들어가고 신자는 영생에 들어간다고 요한복음 5:28이나 요한복음 3:17에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죽은 후에 영혼이 잠들거나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영혼은 불멸입니다.  신자의 영혼도 불신자의 영혼도 모두 살아 (conscious existence) 있습니다. 죽거나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교파에서는 <사람의 영혼이 잠잔다> 고 가르칩니다. 그 이유는 인간은 바로 영혼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영혼이 아니고 인간이 영혼과 육신으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It is not that man is soul, per se, but rather that man has soul and body). 성경에서 잠잔다는 말, 특히 사도행전 7장60절에서 <스데반 집사가 잔다>는 말은 육신의 죽음을 말합니다. <잔다> 는 말은 <깨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죽은 자에게 부활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하고 성경은 <육신의 죽음> 을 <잔다>는 말로 나타내 주는 것 뿐, 영혼이 잠잔다는 말이 아닙니다. 또한 <영혼이 없어진다, annihilation of soul essence) 는 가르침도 잘 못된 가르침입니다. 영혼은 소멸되지 않습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의 말을 빌리면 "하나님은 자비로우셔서 사람의 영혼을 지옥에 보내지 않으시고 차라리 없애 버린다" 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이는 사람이 성경을 제멋대로 해석하는 소치이며 성경은 여러 군데에서 분명히 불신자의 영혼이 지옥에 들어가 형벌 받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로 보건대, 오늘 교회에서 얼마나 많은 이단 가르침이 성행하고 있는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고대로부터 인간의 영혼의 불멸은 늘 주장해 왔습니다  고대 애급에서도 영혼불멸설을 믿어 왔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죽으면 피라밋 (pyramid) 안에 배를 만들어 넣어 주면 죽은 사람의 영혼이 그 배를 타고 태양으로 여행하여 영생을 산다는 것입니다.  애급의 기사 (Giza) 라는 곳에 가면 피라밋이 많이 있고 또 영국의 대영박물관 (British Museum) 이층에 가면 애급에서 영국 사람들이 가져온  미라 (mummy)가 많이 있는데 수의 (壽衣, shroud) 에 기록된 내용은 모두 영혼의 불멸을 믿는 사상입니다.


 


        구원을 얻은 신자가 죽으면 영혼은 하나님 앞에 곧 바로 올라갑니다. 고린도후서 5:8 이나 빌립보 1:23이 분명히 가르쳐 줍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밤낮의 구별이 없는 곳에서 영원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몸은 땅속에 들어가서 흙에서 났으므로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재림하는 그날 즉 대 심판의 날에는 앞서간 영혼이 주님과 같이 공중재림하게 되며 무덤속에 잠자던, 즉 죽었던 시신들이 일어나서 그 영혼들과 연합하여 <영화로운 몸, glorified body> 이 되어 영원을 살게 되는데 이들이 사는 곳은 베드로후서 3:8-10에 보면,  <새 하늘과 새 땅> 입니다.  여기서 성도는 영원토록 살게 됩니다.  그곳은 아픔이나 슬픔이나 눈물이나 한숨이나 고통이 없는 곳입니다. 그 날이 구원 받은 모든 성도들에게 시시각각 (時時刻刻) 으로 닥아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 재림의 날과 우리 순례자 (巡禮者) 인생여정 (人生旅程) 이 끝나는 그 날을 모른다 하여도 그 날은 분명히 우리 앞에 하루하루 닥아 오고 있습니다.     -구원론, 끝-



 참고 서적:
B .B .Warfield, Plan of Salvation (Grand Rapids, Mich.: Wm. B. Eerdmans 1947).
 


튤립 신학 연구원
김명도
www.tulipministri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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