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신학

삼위일체론

작성자
쥬니어칼빈
작성일
2012-12-04 02:14
조회
13531

삼위일체론



삼위일체론의 형성과 의미
유해무(고려신학대학원 교의학교수)

삼위일체론은 신학 교과서에만 있는 지식인가? 비록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지만, 대부분의 신자들은 일상적인 삶에서 사실상 '단일신론'을 따르고 있다. 우리는 매주일마다 성부, 성자, 성령께 송영을 돌려드리며, 삼위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면서 예배를 마치지 않는가. 그렇지만 삼위일체론이 거짓으로 판명되어진다 하여도 기독교 경건 서적의 대부분 바뀌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이처럼 삼위일체론이 창조론, 기독론, 은혜론 뿐만 아니라, 성도들의 경건과는 거의 분리되어 있다. 성령 안에서 성자의 이름으로 성부께 기도를 하루에도 몇번씩이나 드리며,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사역을 차례로 고백하는 사도신경을 고백하면서도, 성도들의 머리에는 '단일신론'이 자리잡고 있다. 이런 안타까운 신앙 현실을 주목하면서 우리는 삼위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형성과 내용을 살피려고 한다.

1. 몇 가지 오해들

먼저, 삼위일체론은 인간이 고안한 사변이라는 오해이다. 주지하다시피 1차 니케아공의회(325)와 2차 콘스탄티노플공의회(381)가 삼위일체론을 확립하였다. 인간들이 주재하고 토론했던 회의가 성자와 성령님의 신성을 결정한 것은 신뢰할만한 권위가 없으며, 삼위일체론은 사변일 따름이라는 오해이다. 둘째로, 이단에 대한 논쟁의 결과로 발생했다는 오해이다. 아리우스와 같이 그 당시 헬라 교양에 익숙했던 자들이 성자와 성령님의 신성을 부인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이 오해는 이단의 도전이 없었다면, 삼위일체론도 등장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부정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다. 셋째로, 삼위일체론은 그 내용과 표현 용어에 있어서 복음의 헬라화라는 오해이다. 하르낙(1851-1930)은 삼위일체론으로 대표되는 교의는 헬라 정신이 복음의 토양에서 얻은 결실이라고 폄하한다. 즉 기독교가 지적이고 철학적인 욕구를 따라서 당대의 교양을 이용하여 복음의 내용조차 변질시켰다는 주장이다.

2. 올바른 출발점

삼위일체론의 형성에 있어서 이러한 오해들의 소지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것들은 오해일 따름이다. 교회는 애초부터 삼위 하나님을 믿었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성부의 사랑을 성령님의 교제 중에서 고백하였다. 교회는 삼위 하나님을 고안하지 않았고, 비로소 이단과의 투쟁을 통하여서 이 고백의 내용에 이른 것도 아니다. 사실 처음부터 교회는 부활하신 주님이 마태복음 28:19-20에서 부탁하신 일, 곧 부활의 주님을 전파하고 세례를 베풀고 가르치는 일을 잘 준행했다. 사도신경으로 대표되는 신앙고백은 바로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사역을 구원역사적으로 진술하고 있다. 지금 형태의 사도신경은 주후 5-6세기경에 완성되었지만, 삼위 하나님을 고백하는 기본 구조는 이미 150년경에 형성되었다. 신약 정경이 형성되어 가는 과정 가운데서 이 신경은 이미 성경의 삼위 하나님 가르침을 가장 잘 요약하였고, 세례를 통하여 교회를 설립하고 삼위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데에 지대한 기여를 하였다. 무엇보다도 예배와 기도에서 그리스도가 차지하는 위치가 삼위일체론 형성에 주요한 역할을 하였다. 삼위일체론은 삼위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사수하기 위한 울타리였다. 교회가 삼위일체론을 형성하게 된 것은 일차적으로 방어적이지 않고 맡겨진 사명을 잘 감당한 결과였다고 말해야 한다. 우리가 아래의 논의에서 개별 신학자들의 입장을 정리하겠지만, 이들은 교회의 경건을 정리했을 뿐이다.

3. 삼위일체론의 형성

구약에서는 특히 한 하나님이심이 계시되었다(신 6:4). 그런데 이것을 하나님의 고유한 본질로 볼 경우, 삼위되심은 본질과 무관한 부가적 현상으로 간주될 수 있다. 사실 성경은 이미 창세기 1:26,27, 3:22에서 하나님의 내적인 자기 협의를 보여준다. 하나님의 단일성과 동시에 삼위이심이 구약에서는 암시적으로 가르쳐졌으나, 신약에서는 명시적으로 계시되었다. 우리는 여기서 교의인 삼위일체론을 정리하고자 한다. 삼위일체론은 교의(dogma)이므로 성경에 그대로 나오지는 않으나, 성경은 이 교의의 기본이 되는 교리(doctrine)를 분명히 가르치고 있다(마 28:19; 고후 13:13; 갈 4:4-6; 엡 4:4-6 등). 그러므로 삼위일체론의 흔적을 힌두교나 플라톤, 또는 단군신화에서 볼 수 있다는 주장은 근거가 없다. 성경과 사도신경은 구원역사적 순서를 따라서 삼위 하나님을 잘 가르치고 있으나, 하나님을 삼위로 고백하고 이 고백을 고수하는 것은 투쟁을 거쳐서 정착되었다.


3-1. 니케아회의 이전

초대교회 교인들이 예수를 主로 고백할 때, 구약의 하나님의 단일성과 예수님과의 관계가 논의의 중심에 있었고, 이 단일성을 유지하려고 예수님을 성부에게 종속시키는 것이 일반적 경향이었다. 심지어 정통적인 교부라 할지라도 이런 종속설의 흔적을 다 떨쳐버리지 못했다. 다만 니케아회의 이전에 이 종속설이 문제가 된 적이 없었으며, 만약 문제로 지적되었다면, 그들은 겸허하게 올바른 입장을 수용하였을 것이다. 이것이 정통과 이단의 갈림길이라 할 수 있다.

유대인 개종자들 중에는 예수의 신성을 부인하고 자신들이 알고 지냈던 예수가 하나님의 양자로 입양되었다는 입장을 표방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와는 반대로 영지주의자들은 구약의 하나님은 열등한 하나님이요, 예수 안에서 자신을 계시했던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시요 善神이라는 주장을 펼쳤다(말시온). 초기 변증가들 중에는 역사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神聖한 영이요 선재하던 하나님의 아들이 직접 인성과 결합했다는 성령 기독론을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교회가 확장되어 헬라교회가 정착되자 헬라 철학이 교회의 언어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하면서, 특히 요한복음에 나오는 말씀(Logos)을 헬라사상의 로고스론으로 해석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이제는 단일한 하나님만이 아니라 로고스론을 이용하여서 하나님 안에 있는 다원성을 말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이런 식의 다원론은 다시 단일성을 강조하는 君主論의 반격을 촉발하였다. 군주론은 성부의 단일성을 고수하려고 성자의 신성을 파생적으로 보거나 아니면 성부의 外現 방식으로 보았다. 전자는 2세기에 강했는데, 인간 예수 안에 비위격적인 신적 능력이 역사하여 그를 세례나 부활 시에 성자로 입양시켰다는 입장인데 이는 예수를 '半神半人'으로 만들었다(동력적 군주론). 후자는 200년경 유행했는데, 성부만이 독자적인 위격이시고, 성자와 성령은 성부 하나님의 외현 방식으로 보면서, 성부와 성자를 구별하지 않았다. 이 주장의 대표자는 사벨리우스인데, 그는 '성자-성부'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양태론적 군주론). 군주론은 하나님의 단일성을 지키려는 좋은 동기에서 출발했지만, 이 단일성을 성경의 가르침과는 다르게 개진했다. 이레네우스(140-202)도 단일성을 고수하되 양태론적 경향을 지녔다. 영원 전에 성부는 말씀과 지혜를 가졌고, 그들은 동등한 위격이라는 것이다. 성부의 위격에서 출발하여 성부의 위격이 동시에 말씀과 지혜(곧 성자와 성령)를 가지고 있다는 식이다. 이는 1-2세기 삼위일체론의 특성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그는 구속사의 관점에서 삼위일체론을 전개하는 좋은 길을 열었다.

이런 상황에서 두 교부가 새로운 기여를 한다. 서방의 터툴리안(160-220년 경)도 역시 성부 하나님의 단일성에서 출발했다. 성부는 말씀과 성령을 가지고 계시다가 창조를 위하여 발출하셨다. 이처럼 그는 신성의 단일성과 동시에 세 위격(personae)에 대해서도 말하면서, 세 위격에 공유된 '본질'을 도입했다. 세 위격이 한 본질 안에 동거하니, 신성은 삼위(trinitas)이시다. 구속사를 위하여 단일성이 세 위격의 모습으로 전개되었다. 세 위격은 동질이나, 동일하지는 않다. 이렇게 하여 그는 군주론과 노스틱 이단들을 잘 대처했다. 그럼에도 성자와 성령을 성부에 종속시키는 흔적은 그에게도 남아 있다.

동방의 오리게네스(185-254)도 하나님의 단일성을 강조했지만, 이보다는 위격의 구별성을 더 강조했다. 엄격하게 말하자면 성부만이 하나님이다. 로고스와 성령의 신성은 파생적이다. 위격을 표현하기 위하여 그는 '휘포스타시스'(uJpovstasi')라는 말을 사용했다. 이로써 성부와 성자는 위격적으로는 성부와 다르다는 구별성이 확보되었다. 그리고 그는 단일성을 표현하려고 성자와 성령이 성부와 연합되어 있다는 '호모우시오스'(oJmoouvsio')라는 말을 썼다. 그는 삼위일체론의 정립을 위한 용어를 창제한 인물이지만, 그의 설명에는 결정적인 흠이 있다. 즉 그는 로고스를 성부의 피조물로 보았다. 그러므로 신약과는 달리 성자께 기도하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성자가 성부 밑에 있듯이, 성령도 성자 아래 있다는 위계적인 신론은 그가 신플라톤 사상을 원용하여 신론을 전개한 代價이다. 이 때문에 '호모우시오스'는 니케아회의 이전까지 사용이 금지당했었다. 그렇지만 오리게네스의 영향은 지대하다. 니케아 회의 전과 당시와 후에도 오리게네스의 삼위일체론의 해석이 논의를 지배하고 향방을 정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그에 의하여 로고스 기독론이 최종적으로 승리하게 되었다.

3-2. 니케아 회의

아리우스(256-336)와 그의 스승 루시안( -312)도 오리게네스의 영향을 받았으나, 잘못된 한 측면만 강조하는 우를 범했다. 아리우스의 관심은 하나님의 독특성과 초월이었다. 그는 한 하나님 곧 성부만을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신성의 단일성과 종속설을 철저하게 고수했다. 성부의 본질은 초월적이고 불변하므로, 타자에게 수여될 수가 없다. 성부 이외의 모든 타자들은 피조물이요, 無에서 피조되었다. 성자가 성부에게서 출생하였다는 것은 하나님에게 물리적 범주를 적용하는 것인데 이는 도무지 불가능하다. 아리우스에 의하면, 하나님은 영원부터 말씀과 지혜를 가지고 계셨다. 그러나 이들은 결코 독립적인 위격들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육신이 된 말씀은 하나님의 피조물, 다만 완전한 피조물이다. 그러므로 성부와 성자의 본질적 동등성이란 있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아주 간교한 이단일 뿐이다. 성자에게 신성이 이야기될 수 있다면 이는 비유적 의미이며, 본질적이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 전가되었을 뿐이다. 다른 편으로 아리우스도 위격이라는 말을 쓰고, 성자와 성령의 독특성도 가르쳤다. 그러나 그의 절대적인 군주론은 그리스도를 '半神'으로 만들었고, 성령도 참 하나님은 아니었다. 아리우스는 하나님이 아닌 그리스도는 결국 성부를 실제적으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성부를 완전하게 계시할 수 없다는 망언을 하였다. 만약 하나님을 알려면, 성부 하나님 외에 그를 아는 다른 신을 상정하는 다신론을 도입할 수밖에 없는 위기에 처한다. 이와 같이 그가 하나님의 단일성을 잘못 주장한 결과는 엄청나게 클 수 밖에 없었다. 교회는 이런 주장을 방관할 수 없었다.

콘스탄틴 황제는 아리우스 논쟁에는 필요 없는 사변이 지배한다고 판단하고 상호 사랑과 포용을 촉구했다. 여기에는 이런 논쟁으로 자신의 제국의 통일이 손상받지 않게 하려는 정치적 배려도 있었다. 그는 최초의 공의회를 자기의 궁정 니케아에 소집했다. 그리고 그는 고백의 본문에 '호모우시오스'를 삽입토록 했다. 이는 터툴리안이 쓴 성부와 성자는 한 본질이라는 라틴어의 헬라 역어이기도 하다. 니케아 고백은 시리아-팔레스틴 고백, 아마 예루살렘 고백을 기초로 삼았다. 아리우스와 두 친구만이 고백 서명을 거부했다. 이 고백은 논쟁의 핵심에 해당되는 기독론에서 예수는 피조되지 않았고, 출생되었고, 성부와 동등하다고 했다. 이로써 성부는 성부가 아닌 적이 있었다는 아리우스의 주장은 거부되었다.

니케아 신조는 철학적 신개념을 거부하는 공을 세웠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라는 신약의 교훈을 무시하고 종속설적으로 그를 半神半人으로 만든 아리우스의 이단을 막는데는 성공했다. 사실 아리우스의 체계는 신플라톤적으로 채색된 위계적인 철학적 신론이었다. 니케아는 이에 맞서는 철학적 신개념으로 하나님의 비밀을 풀려고 하지 않았다. 교회의 고백은 '위격'과 같은 용어로 신앙을 개념적으로 묘사하려는 시도를 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고백에는 필시 역리(逆理)가 있기 때문이다. 즉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역리 말이다.

그러면 니케아 신조의 '호모우시오스'의 뜻은 무엇인가? 이 용어는 군주론에 대항하여 성부/성자의 數的 '구별'을 전제한 '동등성'을 뜻한다. 작성 당시에는 성부와 성자가 동일한 신적 본성을 공유한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니케아회의 이전과 이후 상당 기간동안 성부와 성자의 구별을 고려하지 않은 채 본질의 (수적) 동일성으로 이해(오해)되었다. 나아가 본성의 단일성과 위격의 구별성의 관계 또한 고려되지 않았고, 양태론의 오해를 받았다.

니케아의 영웅 아타나시우스(295-373)는 '호모우시오스'가 성자의 완전한 신성뿐 아니라 동시에 신성의 단일성까지도 표현한다고 해석했다. 그러면서도 용어 사용에 대해서는 유연한 자세를 취했다. 초기에는 성부와 성자의 단일성은 고려하지 않고 로고스의 신성만 강조했지만, 후기에는 신성의 단일성을 강조하다 보니 위격들 간의 구별이 모호해지게 되었다. 급기야는 성부의 신성과 성자의 신성은 동일하다는 주장을 하게 되었다. 물론 그는 성부와 성자는 구별된다는 것을 분명히 말했다. 그러므로, 아리우스派가 비난하듯이 그가 양태론에 빠진 것은 아니지만, 양 위격 간의 구별을 분명하게 제시할 수 있는 '위격'이라는 용어가 그에게는 없었다. 그 이유는 그의 관심이 삼위일체론 자체가 아니라 구원론에 있었기 때문이다. 즉 예수 안에 피조된 半神半人적인 본질만 있다면, 그를 통한 구원은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아타나시우스는 성자께서 피조물이 아니라 하나님이셔야 우리를 '신품화'(divinisation)하실 수 있다고 확신했다.

3-3. 니케아회의 이후

아타나시우스가 남겨놓은 문제는 세명의 캅바도키아 신학자들에 의해 정리되었고, 이는 성령의 신성 문제 해명으로 연결되었다. 니케아 수용자들 중에도 성령의 신성에 대해서는 많은 이들이 불확실했고, 콘스탄티노플의 감독이었던 마케도니우스(342-360)와 같은 성령否認派들까지 있었다. 그들에게 성령은 하나님이 우리와 세상 가운데서 일하려고 창조한 도구요 능력일 뿐, 하나님은 아니었다.

아타나시우스는 성령도 하나님이심을 분명하게 말했다. 다만 위격이라는 표현은 사용하지 않았다. 세명의 캅바도키아 신학자들은 오리게네스 전통을 따라 신성의 단일성이 아니라 구별되는 세 위격들에서 출발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공통적인 본성과 상호 구별되는 위격들을 구분하기 위하여 '본질'과 '고유성'을 각각 사용하였다. 바실리우스(329-379)는 고유성으로서 성부의 父性, 성자의 子性, 성령의 聖力 또는 聖化를 말하였다. 나찌안주스의 그레고리(329-390)는 성부께는 태어나지 않음, 성자께는 태어남, 성령께는 발출이라는 고유성을 부여했다. 그는 삼위 안에서 일체가 경배를 받으며, 일체 안에서 삼위가 경배를 받는다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신성과 君主權을 성부에게만 국한시키는 것을 반대했는데, 이는 군주론이 지닌 최대 약점을 극복하는데 기여했다. 닛사의 그레고리(330-395)는 태어나지 않음, 독생하심, 성령의 발출은 '성자를 통하여'라고 제안했고, 성부는 성자나 성령과 무관하게 사역하시지 않기 때문에, 신성은 하나라고 했다. 이들은 계시에서 전개되는 행위의 단일성에서 본질의 단일성을 찾았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신성의 단일성과 위격의 구별성을 확보했다. 나아가 그들은 '호모우시오스'를 '호모이우시오스'로 해석하는 것을 정통적이라 선언했다. '호모우시오스'를 단일성으로만 이해하다 보니 사벨리우스派적(양태론적)인 오해의 소지가 많았는데, 이런 식의 선언으로 그런 오해도 제거될 수 있었다.

콘스탄티노플회의(381)는 성령의 '호모우시오스'를 문자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으나 성령께서는 성부로부터 나와서 성부, 성자와 함께 경배와 영광을 받으신다는 식으로 성령의 신성을 고백했다. 1년 뒤의 또 다른 회의는 '호모우시오스'를 성령께도 돌려드렸다.

'호모우시오스'라는 용어를 도입함으로 교회는 아리우스 이단을 대항하여 그리스도의 신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바실리우스는 아리우스가 성경의 모든 말들을 자기 식으로 변형했기 때문에 '호모우시오스'가 효과적으로 방어선(防禦線)을 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교회는 이런 고백으로 하나님의 비밀을 벗겨버리거나 본질을 정의한 것이 아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이 진짜로 오셨고 성령으로 하나님이 직접 교회에 임재하신다는 성경적 교훈을 고수하려고 했다.

어거스틴(354-430)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단일성을 증거했다. 그는 세명의 캅바도키아 신학자들이 제시한 하나님의 본질과 위격들의 구별 또한 오해의 소지가 있음을 알았다. 즉 그들은 본질을 인간이라는 種槪念으로 보고서 각 위격은 구체적 인간 곧 베드로, 요한과 야고보 등으로 비교했다. 이 비교는 단일성보다는 구별을 너무 부각시켰다. 이에 근거하여 아리안파들은 캅바도키아 신학자들의 삼위일체론이 다신론이라고 공격했다. 어거스틴은 삼위란 三神들이 아니라 한 하나님이시며, 그 하나님이 삼위로 계시지만 단일성은 해소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그러므로 속성들은 본질에 부가적이지 않고, 본질과 속성들 간에는 아무런 거리가 없이 본질은 곧 속성들이다. 그러므로 절대적 속성과 절대적 존재는 한 분에게만 해당된다. 세 위격들이 아니라 한 하나님께 한 본성, 한 신성과 영광이 돌려지며, 뜻과 사역도 마찬가지이다. 오직 성부께만, 또는 오직 성자나 오직 성령께만 돌려지는 사역이란 없다. 세상을 향하여 하나님과 삼위는 한 원리를 제시한다. 가령 성육신에도 성부 뿐 아니라 성자와 성령이 공히 능동적 기여를 하셨다고 설명한다. 삼위의 외적 사역들은 불가분리인고로 삼위는 항상 함께 사역하신다. 어거스틴은 '위격'도 새롭게 해석한다. 이 말은 라틴어로 번역할 때, '본질'로 번역되어야만 했다. 동방신학에서는 '가면'을 뜻하는 이 말을 'persona'로 번역하는 것도 만족스럽지 않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침묵을 지키지 않으려고 사용하지만, 의도하는 바를 바로 표현하지는 못한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는 이 용어를 관계(relatio)로 번역했다. 이 점에서 그는 아타나시우스와 나찌안주스의 그레고리의 입장을 따르며, 이는 서방 전통도 되었다. 삼'위'란 그 자체로는 무엇이 아니라 상호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분들이다. 모든 속성들은 '일체'에 귀속되지만, 관계로서의 위격은 하나님의 내적 생명이나 피조계와 연관되어 의미를 지닌다. 삼위는 거룩하다, 선하다, 영원하다고 할 수 있으나, 삼위는 성부이다라고 해서는 안된다. 또 삼위를 성자이라 할 수는 없는데, 子性을 다른 위격에다 적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성부,성자,성령 간에 본체론적이나 또는 질적, 양적인 여하한 구분을 적용하지 않았다. 도리어 영원한 관계성을 도입했다. 나아가 이 관계성은 본질에 부가적인 우연이 아니다. 부가적 우연은 신성의 가변성을 상정하기 때문이다. 한 하나님이 오직 성부이거나 오직 성자이거나 오직 성령이거나 한 것이 아니라, 영원토록 성부, 성자, 성령이셨고, 또 그러하실 것이다. 어거스틴은 이렇게 三神論의 위험을 극복했다. 용어의 제한성이 있으나 그는 삼위 고백에서 침묵만이 능사가 아님을 우리에게 잘 보여주었다.

아타나시우스 신조(Athanasium)는 삼위의 한 하나님과 단일성 가운데 삼위 하나님을 경배하며, 위격들을 혼돈하지 않고 본체를 분리하지 않는 고백을 언명한다. 성부의 위격과 성자의 위격 그리고 성령의 위격이 각각 다르나 성부,성자와 성령의 신성은 하나이다. 영광과 위엄도 동일하며, 영원하다. 삼위는 공히 피조되지 않았고, 공히 불가해하며, 공히 영원한데, 한 영원한 하나님이시다. 성부도 하나님이요, 성자도 하나님이시고, 성령도 하나님이시나, 삼신들이 아니고 한 하나님이시다. 각각 주님이시나, 세 주님들이 계신 것이 아니라 한 주님만이 계신다. 성부는 출생되지 않았고, 성자는 피조되지 않고 출생되었고, 성령은 피조되지도 출생되지도 않았으나 발출하신다. 세 성부들이 아니라 한 성부만 계시고, 세 성자들이 아니라 한 성자가 계시고, 세 성령이 아니라 한 성령만이 계신다. 삼위 간에는 전과 후가 없으며, 크고 작음도 없다. 함께 영원하시기 때문이다.

다메섹 요한(670-750)은 요한복음 10:38, 14:9,11, 17:21을 근거로 하여 삼위일체론에 共在(또는 共座) 개념을 도입했다. 이 말은 위격들의 대면적 공재와 상호 침투를 표현한다. '삼위 하나님은 상호 간에 서로 뒤섞이지 않는 침투를 공유한다. ... 성자는 성부와 성령 안에 계시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 안에 계시며, 성부는 성자와 성령 안에 계시나, 뒤섞임이나 용해나 혼합은 발생하지 않는다.' 이 공재는 본질의 단일성에 기초한다. 위격들은 동등한 본질이며, 상존하며, 상호 관계하며, 상호 개방적이고 상호 자기 수여적이다.

칼빈(1509-1564)은 먼저 삼위께서 참되신 한 하나님이시요, 이 삼위를 떠나서 하나님은 결코 알려질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그 분을 바로 삼위로 아는 것이다. 하나님이라는 이름은 성부,성자,성령께 공히 적용되며, 위격이란 비공유적 속성이며, 상호 연관 중에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구별을 말한다. 위격은 상관적인 이름이고, 본질은 절대적인 이름이다. 그리고 성부, 성자, 성자의 이름은 명목적인 이름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존재한다. 칼빈은 성자와 성령의 신성에서 시작하여 삼위일체론을 언급한다. 하나님 내에서의 위격 구분은 성자께서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계시됨으로 필요하게 되었다. 이런 식으로 그는 각 위격에서 全 신성을 이해한다. 그는 요한복음 14:10을 인용하면서 성부는 전적으로 성자 안에, 성자는 전적으로 성부 안에 계신다고 다메섹 요한式의 공재를 말한다. 각 위는 본질의 상이성으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비공유적 속성을 통한 상호 관계성으로 구별되며 동시에 그 관계성을 통하여 단일성을 이룬다. 그는 에베소서 4:5과 마태복음 28:19의 세례의 단일성을 근거로 하여, 삼위께서 함께 한 하나님이심을 증거한다. 그리스도는 스스로 하나님이시다. 이 측면에서는 자기 원인자이다. 그러나 성부와의 관계에서는 성자이다. 이 측면에서는 성부가 성자의 원인자이다. 성부가 '신성의 원천'이라는 것은 본질이 아니라 순서의 측면에서만 가능하다. 위격들 간에는 어떤 경륜적 질서가 있고, 성부는 시작이요 원인자이시니까,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특히 성부에게 해당될 경우가 많다. 칼빈은 고대교회의 전통을 따라서, 성부는 한 위격의 이름일 수도 있고, 동시에 全 신성을 대표하는 이름으로도 쓴다. 그러나 성부가 신성의 원인은 아니다. 이런 식으로 성자와 성령께 추호의 약탈도 없이 본질의 단일성이 보존된다. 성자와 성부의 신성은 공유적 신성에 참여를 통하여 이루어지며, 결코 성부의 위격은 (본체론적) 원인이 아니다. 성부만이 '절대적으로' 원인자라고 말하는 것은 아리우스가 주장한 이단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고백을 할 때, 하나님이라는 이름으로 삼위로 이해되는 단일하고 단순한 본질로 이해한다.' 이렇게 본질의 단일성에 도달하는 것은 항상 필수적이다. 그러므로 '주', 또는 '영'이란 성부께만 적용되는 이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삼위의 각 위격이 불려지며, 이로써 하나님의 단일성이 보장된다.



4. 삼위일체론의 의미

고대 교회에서 신학은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근대학문의 한 분과로서 신학과는 전혀 다른 독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신학은 그 어원에서 '神'과 '말'의 관계를 뜻한다. '..를 하나님이라 말함'이 신학함이었다. 이방적이고 적대적인 환경 가운데서 예수님을 하나님이라 부르고, 성령님을 하나님이라 선언하는 것이 신학'함'이었다. 고대 헬라교부들은 성경의 저자들, 특히 성자의 신성을 잘 가르친 사도요한을 신학자라 불렀다. 신학은 성자와 성령님을 하나님이라 선언함으로써 삼위 하나님을 한 하나님이라 부르고 삼위일체 하나님께 합당한 영광을 돌리는 송영이었다. 신학'함'은 교회의 삶 자체, 특히 설교와 세례와 예배에서 일상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성도의 삶도 이 삼위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하여 닮아가는 '신품화'였다. 그리고 부차적으로 이에 대한 이론적인 반성인 삼위일체론이 형성되었다. 즉, 하나님의 단일성 아래서 계시의 삼위 하나님은 진정으로 또 다시 한번 더 바로 그분 자신이라는 해석이다. 삼위일체'론'은 성경에 문자적으로 나오지는 않으나 하나님의 계시를 바르게 해석하는 교의의 전형이다. 침묵이 아니라 말함이며 말함이 아니라 방어막을 치는 것이 이 해석의 의도이었다. 계시의 하나님이 원래 삼위이기 때문에 우리의 인식에도 삼위 하나님으로 알려진다. 삼위 하나님은 비공유적 속성들을 통하여 완전한 방식으로 한 본질에 동등하게 참여하는 한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삼위 하나님 이외의 다른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 신학의 원래적 의미와 활동이 회복되어야 한다. 따라서 최근 신학의 삼위일체론 부흥과 고대 헬라신학에 대한 높은 관심이 시사하는 바는 크다. '기독교신앙은 삼위일체 신앙에 내포되어 있다'라는 유명한 말이 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을 믿는데, 그 하나님은 삼위로 계시는 분이시다. 구원역사에 삼위로 계시되셨기에 우리가 삼위로 고백하지만, 원래 하나님은 삼위로 계신다. 비록 삼위일체론이 바로 이 신앙의 핵심을 인간의 논리와 언어를 사용하여서 정리하였지만, 삼위일체론은 딱딱한 사변이 아니라, 송영이며 신앙의 본질이다.

우리가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며, 삼위 하나님을 사도신경으로 매주 고백하고, 삼위 하나님이 주인이신 설교를 들으며, 예배의 말미에 삼위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데도, 삼위일체론이 어렵다고 인식되며, 대부분의 신자들이 신앙생활에서 실천적인 단일신론을 따르고 있는 것은 심히 유감스러운 일이다. 이를 타개하기 위하여 삼위 하나님을 명시적으로 계시하는 신약의 본문 뿐만 아니라, 암시적으로 가르치고 있는 구약의 본문도 이제는 삼위론적으로 설교되어져야 할 것이다. 또 세례 교육을 삼위론적으로 시행하며, 사도신경의 삼위일체론적 구조와 의미를 다시 음미하며, 예배 말미의 축복 선언은 삼위 하나님의 동행 약속임을 매번 명심해야 할 것이다. 삼위를 향한 송영을 찬송가에 많이 싣는 것도 고려해볼 만하다. 신앙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삼위 하나님과 누리는 교제이며, 삼위 하나님의 사역에 우리의 역사가 포섭된다.

삼위일체론은 부정적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설교, 선교, 교육, 예배와 기도 등 교회의 본래적 사역에서 자연스럽게 확립되었다. 이것은 공교회적 유산이다. 성장하고 부흥한 한국교회는 삼위 하나님을 향한 신앙과 송영에서 공교회적인 유산을 잘 전수받아서, 삼위 하나님과 진정으로 교제하고 사귀는 성숙한 교회와 교인들이 되어서, 다음 세대에게도 이 신앙의 핵심을 잘 전수할 때, 공교회적인 사명을 완수하게 될 것이다.


(목회와 신학)




삼위일체(trinity)는 성경에 나오는 단어가 아닙니다. 더 나아가서 비록 이 삼위일체의 교
리가 구약성경에는 암시적으로 나타나 있고, 신약성경에는 명백히 나타나 있다고 얘기되기
도 하지만, 사실상 신약성경에도 명백하게 나타나 있는 교리는 아닙니다. '명백한(explicit)'
이라는 형용사가 '충분하고 뚜렷한 표현에 의해 특징 지워진(characterized by full, clear
_expression)'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면, 사실상 이 형용사는 이 삼위일체의 교리에는 적
용하기 힘든 형용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교리는 성경을 통해서 확립되어 나온
교리이기 때문에, 이 교리가 성경적 가르침에 근거한 교리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흔히 삼위일체 교리를 얘기할 때 세 분이 동등하게 같고, 동등하게 영원한 분임을 잘 표
현하기 위해 '인격(person, 위격)'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비록 그 단어가 가장 최선의
단어는 아닐지라도, 그 단어는 양태론(modalism)의 이단사상으로부터 삼위일체 교리를 보
호해주는 핵심적 단어입니다. 그리고 '본체상(혹은 본질상)으로는 같은(of the same
substance)'이라는 구절은 삼신론(tritheism)이라는 이단사상으로부터 삼위일체 교리를 보
호해 주는 핵심적인 구절입니다. '하나님의 나눌 수 없는 통전적 본질(the whole undivided
essence of God)'은 세분의 인격 각각에 동등하게 소유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10장 30절에 나오는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라는 구절은 '인격의 다양성
(the diversity of the Persons)'과 '본질의 단일성(the unity of the essence)' 사이에서의
균형을 적절하게 잘 표현한 구절입니다. '나와 아버지'라는 구절은 두 개의 인격을 분명히
구분 짓고 있습니다. 그래서 동사도 복수형 동사를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분
명히 "우리는 하나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라는 단어는 중성명사로서
자연상 혹은 본질상 하나라는 말이지, '하나의 인격(one Person)'이라는 말은 아닙니다(그
렇다면 남성명사를 사용했어야 합니다). 이처럼 주님은 그분 자신을 아버지와 구분 지었지
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버지와의 단일성과 동등성을 주장하셨습니다.
삼위일체와 관련하여 우리가 시도하는 모든 논의와 묘사에도 불구하고, 결국 삼위일체는
신비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라는 점을 우리는 인식해야 합니다. 그러나 삼위일체에 관한 자
료들이 우리들의 이해의 영역에 벗어난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그 자료들을 진리로 받아들
여야 할 것입니다.
삼위일체의 실례(ILLUSTRATION OF THE TRINITY)
어떤 실례로도 삼위일체에 대한 성경적 계시를 정확하게 다 묘사하는 것은 불가능합니
다. 대부분의 사례들이 기껏해야 '하나 안에 셋(three-in-one)'이라는 개념과 유사한 개념들
일 뿐입니다.
물은 '하나 안에 셋(three-in-one)'의 예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물은 화학적 활
동에 따라 고체, 액체, 기체의 상태가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얼음, 수증기, 물이 평형상태
로 공존할 수 있는 상태인 '물의 삼중점(a triple point for water)'도 있습니다. 모두 다 물
이지만, 각각의 상태는 뚜렷하게 구분됩니다.
태양, 태양의 빛, 태양의 힘도 삼위일체의 사례가 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도 성부를
보지 못한 것처럼 어떤 사람도 사실상 태양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태양의 빛
에 대해 공부함으로서 태양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우게 되는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
의 광채이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히 1:3)를 통해서 성부에 대해서 배우게 됩니다. 우리는
씨, 나무, 식물들이 자라는 것을 통해서 태양의 힘을 보게 됩니다. 무엇이 식물들을 자라게
하느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우리는 태양이 식물들을 자라게 한다고 대답합니다. 성령은 태
양의 힘과 같고 그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삼위일체에 관한 실례들이 어떤 유용성 혹은 한계성을 가지고 있든지 간에, 삼위
일체는 언제나 신비에 쌓인 것임을 우리는 인정해야 합니다.
삼위일체 교리사 고찰(A SURVEY OF THE HISTORY OF THE DOCTRINE)
A. 단일신론(Monarchianism, 단일체론)
초대 교부들은 삼위일체에 대해서 어떤 뚜렷한 진술을 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교부들은
말씀(the Logos)에 대해서 명확한 언급을 회피했고, 대부분의 교부들은 신자의 삶에 있어
서의 성령의 사역을 제외하고는 성령에 대해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프랙서스
(Praxeus)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하면서, 터툴리안(Tertullian, 주후 165-220)은 삼위일체라
는 단어를 처음 사용한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삼위성(threeness)에 대해서 언급했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견해는 종속설(subordinationism, 성자종속설)의 경향을 띄고 있어서, 삼위
일체에 대한 완전하고도 정확한 이해가 부족했습니다.
터툴리안은 당시 삼위성(trinitarianism)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단일성을 채택했던 단일신
론자들과 논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단일신론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형태로 존재했습니
다.
1. 역동적 단일신론(Dynamic Monarchianism, 역동적 단일체론) 혹은 채택설
(Adoptionism, 양자론). 이 이론은 주후 210년경 비잔티움의 떼오도투스(Theodotus of
Byzantium)에 의해 처음으로 설명된 이론으로서, 예수님을 그분의 세례 시에 성령의 특별
한 능력이 주어진 사람으로 보았습니다.
2. 양태론적 단일신론(Modalistic Monarchianism, 양태론적 단일체론). 이 이론은 보다
영향력이 있었던 이론으로서, 하나님의 단일성을 주장하려고 했을 뿐만 아니라 성부가 성
자 안에서 성육신했음을 주장함으로서 그리스도의 온전한 신성을 주장하려고 했습니다. 서
방교회에서는 이 이론이 성부수난설(Patripassianism)로 알려져 있는데, 그 이유는 성육신
한 성부도 또한 성자 안에서 함께 고난 당했다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동방교회에서는 이
이론이 사벨리안주의(Sabellianism)로 알려져 있는데, 이 명칭은 신격 안에 있는 각 인격들
(Persons)은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현시하신 양태들(modes)이라고 가르쳤던 당시의 가장
유명한 신학자 사벨리우스(Sabellius)의 이름을 딴 명칭입니다.
B. 아리안주의(Arianism)
알렉산드리아에서 반삼신론적 입장을 견지했던 장로인 아리우스(주후 250-336)는 한 분
의 영원한 하나님을 성자와 구분시켰는데, 그 이유로 성자는 성부에 의해 생성되어서 '시
작(a beginning)'이 있었던 분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아리우스는 모든 만물이
성자에 의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성령께서도 아들에 의해 창조된 첫 번째 대상이라고 가르
쳤습니다. 그는 성자를 성부보다 열등한 분으로 묘사하는 것처럼 보이는 성경 구절을 통해
서 그의 견해를 성경적으로 뒷받침하려고 했습니다(마 28:18; 막 13:32; 고전 15:28).
아리우스의 견해는 하나님의 단일성을 견지하면서 하나님 안에서 세분의 본질적인 특성
들을 구분 짓고 또한 성자는 성부와 동일한 본체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던 아다나시우스
(Athanasius, 주후 296-373)에 의해 반박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논쟁을 종식시키기 위해서 니케아 회의(the Council of Nicea)가 소집되었을
때, 아다나시우스와 그의 제자들은 성부와 성자가 동일 본체(omoousios)라고 선언되기를
원했지만, 대부분의 많은 온건론자들은 유사 본체(omoiousios)라는 단어로 대체하자고 제
의했습니다. 극단적인 아리우스주의자들(thorough-going Arians)은 성자는 다른 본체
(heteroousios)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마침내 콘스탄틴 황제는 아다나시우스와 그
의 제자들의 주장에 기울었고 결과적으로 그리스도는 아버지와 동일 본체(omoousios)를
가지고 있었다는 뚜렷한 선언문인 니케아 신조(the Nicene Creed)가 발표되기에 이르렀습
니다.
성령에 대해서 니케아 신조는 다음과 같이 간단하게 언급했습니다. "나는 성령을 믿는
다." 그렇지만 아다나시우스 자신은 그의 가르침에서 성자와 마찬가지로 성령도 성부와 동
일한 본질을 가지고 있다는 입장을 견지했습니다. 니케아 회의 이후로 4세기 경 많은 문서
들이 돌아다녔고, 아리우스파의 견해가 부분적으로 인기를 얻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콘스
탄틴 황제의 계승자로 영향력이 컸던 콘스탄티우스(Constantius)가 아리우스의 견해를 선
호했기 때문이었습니다.
4세기 후반에 들어와 소아시아 동쪽 갑바도기아 지역에서 온 세명의 신학자가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결정적인 밑그림을 제공하여 아리우스주의를 패배시켰습니다. 그 세 사람은
가이사랴의 바실(Basil of Caesarea), 그의 형제 닛사의 그레고리(Gregory of Nyssa), 그리
고 바실의 친한 친구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Gregory of Nazianzus)였습니다. 한 분 하나
님 안에 세 개의 본질적인 특성을 가졌다는 점에 대한 그들의 강조는 온건론자들의 눈에
니케아 신조를 사벨리우스주의로 보는 의심에서 벗어나게 만들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성령
도 마찬가지로 동일 본체(the omoousis)라고 강력히 주장했습니다.
C. 콘스탄티노플회의(The Council of Constantinople, 주후 381)
주후 373년, '반 성령파들(Pneumatomachians)'이라고 불리는 유스타쓰(Eustath)를 중심
으로 한 일단의 그룹들은 성자와 성령을 모두 성부와 동일 본체라고 여겼습니다(몇몇 온
건론자들은 성자의 동일본질설(consubstantiality)을 확고하게 뒷받침해 주었다). 이에 대한
논쟁이 가열되어 결국 데오도시우스 황제에 의해 동방교회를 대표한 150명의 정교회 주교
들로 구성된 콘스탄티노플 회의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Gregory of
Nazianzus)'의 인도 아래 그 회의에서는 성령에 대해 다음과 같은 선언문을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주님,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 성령을 믿는데, 성령은 성부로부터 발현해 나오시고,
성부 및 성자와 함께 영광 받으셔야 하고,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분이다." 비록 이
신조가 니케아 신조에서 그리스도에 대해 사용한 것과 같은 '동일 본체를 가진(of the
same substance)'이라는 용어는 사용하지 않았지만, 그 신조는 창조된 존재에 대해서는 쓰
여질 수 없는 용어로 성령의 사역을 묘사했습니다. 이처럼 콘스탄티노플 신조는 성령의 동
일 본체(omoousios)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다른 두 인격(성부 및 성자)과 성령의 관
계성을 정의하지 않았기 때문에 완전히 만족할만한 선언을 제시하지는 않았을지라도 성령
의 신성의 문제를 잠잠하게 만들었습니다.
D. 어거스틴(Augustine, 354-430)
1. 삼위일체론(De Trinitate). 서방 교회에서의 삼위일체에 관한 선언은 어거스틴에 의해
서 최종적인 정형이 확립되었습니다. 이 '삼위일체론'에 관한 논문에서 어거스틴은 "삼위일
체 안에 있는 세분의 인격들(Persons)은 각각 온전한 본질을 가지고 있으며, 세분의 인격
은 모두 다른 인격과 독립적인 상태로 존재한다"라고 선언했습니다. 비록 그는 세분의 본
질적인 성향을 나타내기 위해 '인격들(Persons)'이라는 단어를 사용해야 하는 점에 대해서
불만족스럽게 생각했지만, 그는 '침묵하지 않기 위해서(in order not to be silent)' 그 단어
를 사용했습니다.
그는 또한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함께 발현되어 나온다고 가르쳤습니다.
2. 펠라기안 논쟁(The Pelagian Controversy). 어거스틴은 또한 성령의 사역으로서 '은
혜의 지속성(efficacious grace)'에 대해 특별히 강조했습니다. 이 주장은 인간과 죄에 관한
그의 교리에서뿐만 아니라 성령에 관한 그의 교리에서도 심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E. 톨레도 공회(The Synod of Toledo)
서방교회 신학자들이 일반적으로 성부와 성자 모두로부터 성령이 발현되어 나온다는 주
장을 고수하고 있었지만, 이 주장은 톨레도 공회에서 '콘스탄티노플 신조(the
Constantinople Creed)'에 필리오케(filioque, 그리고 성자로부터)라는 구절이 첨가되기 전까
지는 공식화되지 못했습니다. 동방교회에서는 이단이라고 천명하면서 이 주장을 결코 받아
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 이유로 오늘날까지 서방교회와 동방교회는 갈라진 상태로 존재
하게 되었습니다.
콘스탄티노플의 교부이자 로마의 교황 니콜라스의 대적자인 포티우스(Photius)는 '통괄
적인 대주교(universal bishop)'라고 주장하는 니콜라스 교황의 주장을 배척하는 노력의 일
환으로 이 필리오케(filioque)라는 구절을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필리오케(filioque)가 거룩
한 콘스탄티노플 신조를 그릇되게 만들었다고 주장하며 교리적 갱신을 요구함으로서 서방
교회를 난처하게 만들었다.
F. 삼위일체에 대한 개혁신앙의 가르침(Reformation Teaching on the Trinity)
개혁주의자들과 모든 개혁주의 신앙고백은 초대교회에 공식화된 정통주의에 입각해서
삼위일체에 대한 교리를 펴고 있습니다. 루터는 믿음으로만 삼위일체를 이해할 수 있다고
느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서에서 삼위일체를 가르치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에 삼위일
체에 대한 정통 교리를 받아들였습니다. 옥스버그 신앙고백(The Augsburg Confession,
1530)은 다음과 같이 분명히 선언한다. "하나님이라 불려지고 존재하는 한분의 신적 본질
이 있고.... 그러나 같은 본질과 능력을 가지고 또한 동등하게 영원한 세분의 인격들, 즉 성
부와 성자와 성령이 있다."(III. 7). 마찬가지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the Westminster
Confession, 1647)도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신격의 단일성 안에 하나의 본질과 능력, 그
리고 영원성을 가진 세분의 인격들, 즉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 있다. 성
부는 어떤 분에도 속해있지 않고 생성되지도 않고 발현되지도 않으시며, 성자는 아버지로
부터 영원히 생성되셨으며,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영원히 발현되어 나오신다."(II. 3).
소시니안주의(Socinianism)는 16세기에 성자를 '오직 한 사람(only a man)'으로 취급함으
로 성자의 선재성(preexistence)을 부인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한 분의 인격(only one
Person)'을 가지고 있는 오직 하나의 신적 본질만이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이 견해는 영국
의 '일신론(Unitarianism)'과 영국의 '이신론(Deism, 자연신론)'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많은
일신론자들은 이신론자들이 아니었지만 모든 이신론자들은 하나님에 대한 일신론적 개념
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단적인 사상은 아리안주의(Arianism)에서 소시니안주의
(Socinianism)로, 소시니안주의(Socinianism)에서 일신론(Unitarianism)으로, 일신론
(Unitarianism)에서 이신론(Deism)으로 계보를 형성하며 내려왔습니다. '미국의 일신론
(American Unitarianism)'은 '영국의 일신론(English Unitarianism)'의 직접적인 산물이었습
니다.
G. 현대의 견해(Modern Wiews)
삼위일체에 대한 정통적인 견해는 현대의 많은 신학자들에 의해 수용되었고 지금도 수
용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삼위일체에 대해 비난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칸트
(Kant)와 헤겔(Hegel)은 삼위일체에 대한 정통 교리를 반대했고, 채택설(adoptionism, 양자
론) 혹은 비인격적인 범신론(impersonal pantheism)을 받아들였습니다. 스위든보그
(Swedenborg)와 슐라이에르마허(Schleiermacher)는 사벨리아니즘(Sabellianism)을 주장했
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발트(Barth)의 개념이 양태론적 개념이었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습니다
(Leonard Hudgson, The Doctrine of the Trinity [London: Nisbet, 1955], p. 229). 다른 많
은 사람들은 발트가 사벨리아니즘을 거절하고 각 인격들의 개념을 설명하면서 하나님 안
에 있는 '존재하심의 형태들(modes of being)'이라는 개념을 사용했기 때문에 정통주의자
라고 그를 옹호합니다.
폴 틸리히(Paul Tillich)는 삼위일체에 대한 교리가 인간 자신의 필요를 만족시키기 위해
서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느꼈습니다. 틸리히는 사실상 신격 안에 한 분의 인격
이 있다는 사실조차 믿지 않았고, 세분의 인격을 그냥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여호와의 증인(Jehovah's Witnesses)은 성자의 영원성과 삼위일체 교리를 부인함으로
'아리안주의자와 같은 기독론(Arian-like Christology)'을 받아들입니다. 아리우스처럼 그들
은 말씀(the Logos)을 창조자와 창조물 사이의 '중간적 존재(an intermediate being)'로 보
고 있습니다.
ⓒ 이한규목사 번역 발췌







존 오웬의 구속에 대한 삼위일체적 이해
(John Owen's Trinitarian Understanding on the Atonement)

존 오웬(John Owen)의 신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내용 중의 하나이면서도 가장 논쟁이 되는 내용은 구속에 대한 그의 이해이다. 특히 오웬의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 있는 죽음의 죽음(The Death of Death in the Death of Christ)”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특별성 곧 구속의 제한성을 주장하는 책 중 가장 탁월하면서도 논쟁적인 책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저변에 흐르고 있는 구속에 대한 삼위일체적 배경에 대해 명확히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그것은 이 책이 가지고 있는 내용의 어려움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지금까지 이 책에 대해 역사적이며 신학적인 정황에서 이해하려는 노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로 이 책에서 옹오하고 있는 구속의 특별성은 이를 반대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나, 스콜라주의 혹은 극단적인 예정론에 기초를 둔 것으로 비판을 받아왔다.

그러나 이는 이 책의 내용에 대한 찬성을 하든, 반대를 하든 관계없이 존 오웬이 이 책에서 방법론적으로 사용한 스콜라주의나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대한 잘못된 이해와, 오웬이 이 책에서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구속에 대한 삼위일체적 이해에 대한 몰이해에서부터 나온 것이다. 사실 스콜라주의는 신학을 체계화하기 위해 사용된 방법이었다고 한다면,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나 용어는 성경의 진리를 설명하기위해 방법론적으로 사용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은 오웬의 신학에 있어서 보편타당한 진리체계로 혹은 방법으로 성경의 진리를 설명하기 위해 일반계시의 차원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의 진리를 왜곡하기 위해 사용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경의 진리를 설명하고 방어하기 위해 사용되었으며, 성경의 진리에 위배될 경우 언제든지 포기되었다. 이는 계시로서의 성경이 자연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연을 계시의 한계 내에서 오히려 효과적으로 사용하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오웬이 스콜라주의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지나치게 사용해서 성경의 계시를 넘어섰다면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구속에 대한 그의 논의를 살펴보면, 이 글에서도 나타나겠지만, 그에게서 스콜라주의나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은 극히 제한적으로, 상식선에서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남아있는 것은 방법의 문제가 아니라 내용이다. 이런 측면에서 오웬의 책의 내용을 반대하기 위해서는 그의 구속에 대한 삼위일체적 이해 자체를 반대하거나, 혹은 그의 구속과 관련된 성서해석의 오류에 대해 반대해야지, 그가 자신의 논의를 전개하기 위해 사용하고 있는 학문적 방법론 자체에 대한 비판은 논지에서 벗어난 것이다.

예정에 대한 그의 이해 또한 구속에 대한 그의 삼위일체적 이해 속에서 자연스럽게 이해될 때만이 보다 그 위치가 보다 분명히 들어 날 수 있다. 그리고 또한 이러한 비판은 오웬이 일찍부터 백스테리안주의와 아르미니안주의, 그리고 소시니안주의와 싸우는 과정에서 구속을 포함하는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삼위일체적 이해를 정립하기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가에 대해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거나 평가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오웬은 일찍부터 구속에 대한 정통주의적 이해에 대해 확신했으며, 이를 방어하기 위해서 구속에 대해 삼위일체적 관점에서 이해하고, 이를 기초로 보편구속에 대해 비판했다. 그러므로 구속에 대한 그의 삼위일체에 대한 이해는 구속에 대한 그의 견해를 명확히 이해하는데 필수적일 뿐 아니라, 그의 견해에 대한 찬성과 비판은 이에 대한 그의 이해를 전제할 때만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이 논문에서 오웬의 구속에 대한 삼위일체적인 이해에 대해 보다 심층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이 과정에서 보편구속을 반대하고 특별구속을 주장하는 오웬의 논리를 보다 분명히 알게 될 것이다.

이를 살펴보는 위해 필자는 그의 구속에 대한 역작인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 있는 죽음의 죽음”의 내용에 대해서 분석할 것이다. 이 책은 중요성과, 이 책과 관련된 많은 논쟁에도 불구하고 그 책의 구조와 내용에 대해 아직 명확한 해석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 논문은 이 책의 구조와 내용을 분석하고, 그 과정에서 오웬의 구속에 대한 삼위일체적 견해를 드러내는데 기여하고자 한다. 또한 이를 위해 필요할 경우에 그의 다른 책들을 참고할 것이다.


구속에 대한 계획과 수단과 결과

오웬은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죽음의 죽음”의 1권 1장에서 자신의 논의를 구속의 목적과 결과라는 관점에서 시작한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과 그가 실질적으로 성취하신 결과는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이 관계에 대한 명확한 관찰이 없이는 그리스도의 구속의 의미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논의의 배경이다.

그는 성경을 기초로 그리스도의 죽음의 목적은 택한 백성의 구원을 위한 것이었으며, 그의 구속의 결과는 그들의 실질적인 구원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분명히 밝힌다. 그런 다음에 그는 만일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의 구속을 위해죽으셨다면, 문제는 왜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지 못하는가를 묻는다. 그것은 결국 그리스도의 구속에 대한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계획이 잘못되었든가, 그렇지 않다면 그 구속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신 그리스도의 사역이 문제가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전자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과 완전하심을 무시하는 것이고, 후자는 그리스도의 사역의 가치를 무시하는 것이라고 오웬은 주장한다. 그런 다음에 2장에서 그는 자신의 논의를 분명히 하기 위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기초해서 목적과 수단과 결과에 대한 일반적인 관찰을 제시하고 성경의 논의와 연결시킨다.

이러한 오웬의 논의의 전개에 대해 알란 클리포드(Alan Clifford)는 오웬의 특별구속에 대한 논의는 성경에 기초를 두기보다는 아리스토텔레스철학과 스콜라주의와 극단적인 예정론의 논리적 적용의 결과라고 반박한다. 그 구체적인 증거로 그는 오웬이 목적, 수단, 결과와 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표현을 사용해서 논의를 전개시킬 뿐 아니라, 구속에 대한 계획과 그 결과라는 측면에서 문제를 본다는 것 자체가 오웬이 예정론을 논리적으로 구속론에 적용시키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고 제시한다.

그러나 이런 그의 주장은 먼저 오웬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과율과 그와 관련된 용어를 사용한다고 해서 그가 곧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액면그대로 받아들였다고 주장하는 것은 논리의 비약이다. 오웬과 같은 개혁주의신학자들은 물론 보편타당한 진리로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성경과 위배되지 않는 한 일반계시라는 측면에서 보다 긍정적인 면에서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성경의 진리를 보다 분명히 설명하기 위해 사용되고 있는 것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더 나아가 목적, 수단, 결과라는 표현들을 통해서 그가 이해하고자 하는 것은 구속에 대한 정확한 의미이다.

이는 심지어는 보편구속을 주장하는 리처드 백스터(Richard Baxter)와 같은 사람들도 자연스럽게 사용했던 표현들이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요점은 성경의 진리를 보다 분명히 표현하기 위해서 사용된 용어나 논리가 아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구속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과 그것에 대한 결과이다.

그러므로 오웬이 지금 묻고 있는 것은 하나님은 과연 모든 사람의 구속하시겠다
는 계획을 세우셨는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만일 그런 계획을 세우셨다면 왜 그 계획이 실패했는가 하는 것이다. 그 계획이 인간이 회개하고 믿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은 아무리 계획을 세우셔도 인간의 반응이 없다면 결국 그 계획을 포기하실 수밖에 없다는 논리이다. 이는 결국 하나님 전지하시며 전능하시며 완전하신 분이라는 정통주의적 신관을 포기하고 피조물의 반응에 의해 자신을 제한하는 하나님으로서 이해할 수밖에 없다.

오웬은 여기에 대해 이는 신성에 대한 모독이라고 반응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는 보편구속을 주장하게 되면 그리스도의 구속의 가치를 평가절하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다면, 그 죽음이 진정으로 모든 사람의 죄를 다 감당한 것이었다면 왜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는가라고 그는 반문한다. 그것은 결국 피조물의 반응에 의해 그리스도의 구속의 가치마저 절하되는 것이 아닌가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이러한 논의를 보다 객관화시키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기초한 목적과 수단과 결과에 대한 일반적 관찰을 시도한다. 이에 대해 이것이 바로 오웬의 자신의 논리의 궁색함을 보강하기위해 철학적 지지에 호소하고 있다고 주장한다면 이는 그의 생각과는 아주 동떨어진 것이다. 오히려 그가 시도하는 것은 보편구속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과 그리스도의 구속의 가치에 위배될 뿐 아니라, 보편타당한 논리체계를 기초로 해서 볼 때도 이는 타당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다. 물론 이런 그의 논의는 하나님에 대한 정통주의적 이해와 구속의 가치에 대한 그의 신뢰가 전제되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일 때 가능한 것이라는 것을 지적해야 한다.


구속과 삼위일체의 관계

구속의 목적, 수단, 결과라는 관점에서 특별구속의 타당성과 보편구속의 문제점에 대해서 지적을 한 오웬은 이제 더 나아가서 3-5장에서 구속의 의미를 보다 분명히 하기 위해 삼위일체와 관련해서 구속에 대해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을 제시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오웬이 왜 먼저 삼위일체에 대해 설명을 하지 않고 구속의 목적과 결과에 대해 먼저 이야기 한 다음에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속에 대한 경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을까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여기에서 이것이 바로 오웬이 예정론의 극단적인 적용을 통해서 특별구속을 도출해냈다는 결정적인 증거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오웬의 의도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결과이다. 오웬이 구속에 대한 계획과 결과에 대해 먼저 이야기하고 나서 구속에 대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경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방법론적으로 볼 때 다소 변증적인 자세에서 나온 것이다.

오웬은 보편구속은 하나님의 구속에 대한 계획과 그리스도의 구속의 가치를 생각해 볼 때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이론이라는 것을 먼저 선언한다. 이는 자신이 이 책을 통해 다루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 특별구속의 정당성과 이것을 기초로 아르미안이나, 소시니안, 그리고 더 나아가서 백스테리안들이 주장하고 있는 보편구속에 대해 비판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그는 보편구속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취약점을 먼저 지적해서 그것의 한계와 특별구속의 정당성을 보다 분명히 하고자 했던 것이다. 마치 상대를 공격할 때 그 상대의 가장 큰 취약점을 지적하면서 자신의 견해를 먼저 선언하고, 그 다음에 보다 구체적으로 문제를 풀어가는 것과 같은 논리이다. 이런 방법은 사실 중세의 교육 방법이었으며 자신이 대학에서 교육을 받았던 disputatio를 연상하게 한다.


또한 오웬의 논의의 방법은 구속의 특별성에 대한 자신의 주장은 단순히 한 교리의 논리적인 도출이나 혹은 철학적 잔재주를 통해서 얻어낸 것이 아니라, 성서를 기초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에 대한 깊은 묵상에서 나온 것임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사실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 다루고 있는 그의 다른 작품 “삼위일체론에 대한 간략한 논의와 방어(A Brief eclaration and Vindication of the Doctrine of the Trinity)”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이 책에서 먼저 삼위일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살피고, 그 하나님의 사역으로서 구속의 문제를 다음에 다루고 있다. 이는 오웬이 구속에 대한 자신의 이해를 삼위일체 하나님에 본질과 사역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구속이 결국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이며, 그러기 때문에 구속에 대한 이해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그 분이 어떻게 일하시는 가에 대한 이해를 기초로 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웬은 이면에서 특별구속을 주장했던 다른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논의와 한 노선에 서 있다. 후기 종교개혁 개혁주의 노선에서 쓰인 조직신학 책들을 살펴보면 그들은 한결같이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 다루고 그 다음 하나님의 사역으로서 구원의 원인적 근거로서의 예정과 더 나아가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작정을 기초로 구속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그들의 구속에 대한 논의가 기본적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기초로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오웬은 바로 이면에서 정확하게 이전이나 혹은 동시대 신학자들과 견해를 같이한다. 단지 우리가 논의하고 있는 책에서 오웬이 구속에 대한 계획과 수단과 결과에 대해 미리 말하고 있는 것은 앞에서 지적했든지 다소 변증적인 차원에서 나온 것으로 해석된다.


삼위일체 하나님과 구속

오웬은 구속과 관련된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에 관해서 상세히 논하기 전에 왜 자신이 구속을 성부와 성자와 성자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는지를 간단히 밝힌다. 그에 따르면 구속의 저자는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모든 외적인 사역은 분리되지 않지만, 그 사역은 위격의 질서에 따라 구분이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오웬의 논의에서 우리는 그에게 있어서 구속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구속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이라는 것은 그의 사역으로서 구속은 반드시 그분이 어떤 분이지에 영향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삼위일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에 대한 명확한 이해 없이, 그분의 사역인 구속에 대해 정확히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특별구속과 보편구속에 대한 이해의 차이는 단순히 구속의 범위에 대한 문제를 넘어서서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의 문제라는 것이다.

구속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이라고 할 때 이는 보다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모든 사역이 그러하듯이 구속은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있는 존재론적 질서에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구속에 대한 오웬의 삼위일체적 논의는 이러한 전제에 대한 이해가 없는 제대로 해석될 수 없다. 오웬은 우리가 다루고 있는 책에서 이 문제에 대해 간단히 언급하고 넘어가지만, 우리는 그의 다른 여러 책에서 보다 자세히 이 사실을 확인 할 수 있다. 그는 삼위일체 하나님 사이에 존재하는 질서에 대한 서구 기독교적 이해를 수용하여 이를 구속에 대한 이해에 적용시킨다. 삼위일체에 대한 서구교회의 전통적인 이론에 따르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본질상 한 분이시지만, 위격상 삼위로 존재하신다.

그런데 삼위의 하나님 사이에는 존재론적 질서가 존재한다. 성부는 위격의 원천이시며, 성자는 성부로부터 나오시는 분이시고(begotten),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발출되신 분이시다(proceeded). 그리고 이러한 존재론적 질서는 그가 하시는 모든 외적인 일에 영향을 미친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다루고 있는 구속도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으로 당연히 예외가 될 수 없다. 그런데 이렇게 삼위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는 질서가 있지만, 그들의 모든 사역은 하나님의 사역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외적으로 하시는 모든 사역은, 본질상 하나님은 한 분이시기 때문에, 분리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서로 위격의 차이와 존재론적 질서로 인해 구분될 수 있다. 이러한 삼위 하나님의 존재론적 질서로 인해 구속의 사건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사역으로 구분이 된다.

더 나아가 이런 삼위 하나님의 존재론적 질서에 기초한 구속과 관련된 하나님의 사역은 오웬에게 있어서 언약의 관계로 이해된다. 계속해서 그가 우리가 논의하고 있는 책에서 다룰 구속과 관련된 삼위 하나님의 사역은 바로 이 언약에 대한 이해를 전제로 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또한 오웬의 특별구속이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나, 스콜라주의나, 예정론의 극단적 적용의 결과라는 주장과는 달리 구속과 관련된 삼위일체 하나님의 언약의 관계에 대한 연구에서 나온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 오웬은 언약신학의 영향을 받아 구속의 문제를 삼위일체와 관련해서 구속언약(the covenant of redemption)과 은혜은약(the ovenant of grace)로 구분한다. 구속언약은 영원 속에서 구속의 문제를 놓고 성부와 성자사이에 맺어진 언약이다.

은혜 언약은 시간 속에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맺어지는 언약인데, 이 때 주된 역할을 하시는 분은 바로 성령이시다. 은혜 언약은 바로 성령을 통해 구속 언약이 구체적으로 사람에게 적용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속에 대한 이해는 바로 이 언약의 내용이 무엇이었는가에 기초한다. 또한 구속의 목적과 수단과 결과는 바로 구속 언약이 시간 속에서 은혜 언약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데 앞에서 암시했듯이 이 언약은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론적 질서에 기초해서 세워진 것이다. 구속언약이 성부와 성자사이에 맺어 진 것은 성자가 성부로부터 나오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성령은 바로 성부와 성자 모두에게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을 위한 성자의 구속사역에 초점이 맞추어진 구속 언약은 성부와 성자사이에 맺어진 것이다.

여기에 대해 성령이 빠진 것은 바로 삼위일체를 무시한 양신론적 태도라는 비판은 삼위 하나님 사이의 존재론적 질서에 대한 오웬의 의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결과이다. 더 나아가서 오웬에게 있어서 주로 구속언약에 기초한 택자의 실질적인 구원과 관련된 은혜언약은 성령을 통해서 바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맺어진 언약이라는 것은 성령이 존재론적으로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왔을 뿐 아니라, 그의 사역 또한 그 존재론적 질서에 따라 성부와 성자 사이에 언약으로 맺어진 것을 실질적으로 적용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은혜언약 또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론적 질서에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을 사전에 전제하고 났을 때 우리는 오웬의 구속에 대한 이해가 아리스토텔레스철학 기초한 스콜라주의나 혹은 극단적인 예정론의 논리적인 결과가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론적인 질서와 그에 기초한 구속과 관련된 경륜적 질서에 대한 깊은 묵상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구속과 관련된 성부, 성자, 성령의 사역

오웬은 보다 구체적으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모두 구속의 저자(agent or chief author)임을 밝히고 각 위격의 하나님의 자신들의 존재론적인 질서에 기초해서 어떻게 구속과 관련된 사역을 하시는지를 제시한다.

성부는 세 위격의 존재의 원천으로서 구속에 대해 계획하시고 이를 실행하시는 분이시다. 성부는 특히 성자와 관련해서 두 가지 일을 행하신다. 먼저 성부는 성자를 구속을 위해 세상에 보내시고, 그 다음으로 그 아들에게 죄에 대한 형벌을 부여하신다. 성부께서 성자를 구속을 위해 세상에 보내실 때, 아들에게 성부로서 중보자의 사역을 권위를 가지고 부여 하시며, 성자는 비록 본질상 성부와 동일하시지만,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자기를 낮추셨다.

그리고 성부는 성자께서 실질적으로 이 일을 실행하실 때 이를 실질적으로 진수(inauguration)하신다. 이는 성자의 탄생과 침례와 부활과 승천과 하늘보좌 위에 앉으시는 과정에 모두 나타난다. 그런데 성부께서 성자를 구속을 위해 세상에 보내실 때 성부와 성자 사이에 두 가지 약속이 맺어졌다.

성부는 성자를 자기가 택한 백성의 중보자요 구속주로 주셨다는 것과, 성부는 성자가 값을 치루고 산 은덕을 그를 믿는 택한 백성에게 주시겠다는 약속이다. 더 나아가서 성부는 성자께서 중보자요 구속주의 사역을 감당하는데 필요한 모든 은혜와 은사를 본질로서가 아니라, 위격의 관계에 따라 주신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완벽히 성취되도록 보호하고 후원하시겠다는 것을 언약으로 맺으셨다.

이렇게 성자를 세상에 보내시면서 성부와 맺어진 언약의 내용을 살펴볼 때 우리는 오웬에게 있어서 구속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택한 백성을 위한 것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구속은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성부께서 택하신 백성들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오웬은 이에 대해 그의 책 2권, 1-3장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이와 관련된 다양한 성경의 본문에 대한 주석을 토대로 성자의 구속의 목적은 자신을 위한 것도, 성부를 위한 것도 아니라, 잃어 버린자, 자기백성, 죄인들, 자기자녀들, 교회, 성부께서 자기에게 주신 자들을 위한 것이었음을 분명히 천명한다.

이는 그리스도의 구속은 하나님과 맺은 구속언약에 따라 오직 택한 백성들을 위한 것이었음을 성경의 주석을 기초로 밝히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구속의 목적이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한 것이 아니라 택한 백성을 위한 것이었다고 할 때 이것 자체가 예정론을 극단적으로 적용한 결과가 아니냐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이런 질문에 대해 우리는 오웬에게 있어서 구원의 긍극적인 원인은 분명히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이지만, 이 선택은 성부와 성자와의 존재론적 질서를 기초로 맺어진 언약으로 표현이 되었으며, 그러기에 우리는 그의 구속의 대상에 대한 하나님의 작정 또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질서와 경륜을 따라 이루어진 것이라고 대답을 할 수 있다. 이는 곧 선택을 이야기하기 전에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고, 그 분은 어떤 관계 속에서 일하시는 가의 문제가 선행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두 번째로 오웬은 성부께서 성자에게 죄로 말미암는 형벌을 부여하셨을 때, 그 형벌은 성부께서 성자와 언약 안에서 주신 택한 백성을 위한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형벌이 실질적으로 죄에 대한 형벌이었다면, 그 형벌의 실재성과 가치를 생각할 때 당연히 그 대상은 구속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그 형벌이 모든 사람이 모든 죄(all the sins of all men)을 위한 것이었다면, 당연히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아야 한다.

왜냐하면 성자께서 모든 사람의 모든 죄를 다 처리하셨다면, 당연히 모든 사람이 구속을 받은 것이고, 결과적으로 그들 모두가 구원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또한 그 형벌이 모든 사람의 일부의 죄(some sins of all men)나, 혹은 일부 사람의 일부의 죄(some sins of some men)를 위한 것이었다면, 그 누구도 구원을 받을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대상이 누구이든지 간에 그가 지은 모든 죄에 대한 형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형벌을 일부사람의 모든 죄(all the sins of some men)를 위한 것일 수밖에 없다. 그럴 때만이 우리는 구속의 실재성과 가치 모두를 확보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오웬의 논의를 생각해 볼 때 오웬은 이미 성부의 구속에 대한 계획과 더불어 성자를 통한 구속의 실재성과 가치를 동시에 생각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오웬의 특별구속이 예정론의 극단적 적용의 결과라는 주장의 근거를 뿌리째 흔든다.

왜냐하면 오웬에게 있어서 구속의 특별성은 구속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에 기초하고 있을 뿐 아니라, 구속의 실재성과 가치에 그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만일 오웬이 주장하고 있는 특별구속에 대해 비판하려면, 그의 선택에 기초한 구속언약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구속의 실재성과 가치에 대한 그의 생각 또한 비판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그의 구속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성부의 구속에 대한 계획과 성자의 실질적인 구속은 비록 구분이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웬은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구속의 저자이면서, 다른 위격의 하나님보다 더 두드러진 구속의 사역을 감당하시는 성자의 사역에 대해 다룬다. 그에 따르면 구속은 본질상 한분이기 때문에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이지만, 이는 오직 그리스도의 사역이다. 이 사역은 성부의 사역이 될 수도 없고, 성령의 사역이 될 수도 없다. 이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사이에는 위격의 구분과 질서가 있을 뿐 아니라, 그 위격의 질서에 따라 성부께서 바로 성자에게 부여하신 사역이기 때문이다.

구속과 관련되어 오웬이 지적하는 성자의 사역은 성육신(incarnation)과 수난(oblation)과 중보(intercession)이다. 여기에서 성육신은 크게 수난에 포함시켜 생각할 수 있다. 수난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백성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서 겪으신 모든 것이고(humilation), 중보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하늘 보좌 우편에 앉으셔서(exaltation) 자신이 수난을 받은 백성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성부의 계획에 따라 기도하는 것이다.

오웬은 그리스도의 이런 수난과 중보와의 관계에 대해 1권 6, 7, 8장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다룬다. 그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수난과 중보는 구분될 수는 있지만 분리될 수는 없다. 그리스도의 수난과 중보는 구속이 수단으로써 구속과 관련된 목적을 성취한다. 만일 이들이 구속에 대한 목적을 성취할 수 없다면 그것은 앞에서 지적했듯이 구속에 대한 목표가 잘못되었든지, 구속의 수단이 잘못되었든 지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모두는 받아들일 수 없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정말 모든 사람을 위해 수난을 받으셨다면, 그것이 참된 수난이었다면 모든 사람은 당연히 구원을 받아야 한다. 바로 그럴 때 그 수난은 참된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편구속은 그리스도의 수난의 실재성과 가치를 무시한다.

특히 오웬은 수난과 중보의 범위를 다르게 설정하여 성부의 택자의 선택과 성자의 보편구속을 동시에 주장하려는 백스테리안들에 대해 반대하면서 수난과 중보는 범위가 동일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백스테리안들은 수난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지만. 중보는 택한 백성들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결국 구원은 모든 사람들이 받지 않고, 성부의 선택과 성자의 중보를 기초로 오직 택자만이 구원을 받는 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이 땅에 오실 때 성자의 구속 혹은 수난의 목적과 성부의 구속에 대한 목적이 다를 뿐 아니라, 성자의 수난의 실질적인 가치를 무시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성부와 성자 사이의 능력과 지혜와 선하심을 무시하는 것일 뿐 아니라, 구속언약의 내용을 변질시키게 된다. 이에 오웬은 백스테리안들의 이런 난점들에 대해 비판하면서, 구속에 대한 성부의 선택과, 성자의 수난과 중보의 범위는 모두 동일하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바로 이것을 인정할 때 성부와 성자사이에 본질과 성품의 하나 되심을 인정하게 되기 때문이다.

오웬은 마지막으로 구속이 가능하도록 하며, 그 구속을 실질적으로 적용해서 구원에 이르도록 하는 성령의 사역에 대해 다룬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와 본질상 한분이시기 때문에 그들과 동일하게 구속의 저자이지만, 그의 역할은 성부와 성자사이에 맺어진 구속언약이 실질적으로 시간 속에서 성취되도록 일하시며, 더 나아가 그 언약이 은혜로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에게 적용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구원과 관련해 주도적인 역할을 하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이는 바로 성령이 성부와 성자로부터 발출되셨기 때문이다. 특별히 구속과 관련해서 오웬은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수난과 부활을 도우셨다는 것을 지적한다. 이는 성령께서 은혜언약의 저자로서 구속언약이 시간 속에서 구체적으로 적용되도록 성부의 계획에 따라 성자의 구속이 가능하도록 실질적으로 도우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구속의 범위와 관련해서 당연히 성령은 성부와 성자 사이에 맺어진 구속언약에 따라 이를 가능하게 하고 적용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성자의 선택과, 성자의 구속과 그 범위가 다를 수 없다. 만약 그 범위가 다르다면 이는 성부와 성자 사이에 의견의 불일치로 나타난다. 이것은 오웬 신학에서 신성모독죄에 해당되며, 받아들일 수 없는 이론이다.

이렇게 구속의 저자들로서 삼위 하나님의 각자의 사역에 대해 살피는 과정에서 보편구속은 받아들일 수 없는 이론이라는 것을 분명히 천명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오웬이 이 책에서 의도하고 있는 것은 비록 변증적인 차원이 분명이 있기는 하지만, 그보다는 그리스도의 구속의 의미와 그 범위에 대해 삼위일체적 관점에서 보다 분명히 드러내고자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그는 보편구속을 주장하는 이론의 허구성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비판하고 있다. 그의 결론은 간단하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속에 대한 사역을 연구해 볼 때 보편구속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이론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주장이 단순히 성경적 근거가 없이 논리적인 사색만으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성급한 판단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이론을 증명하기 위해 계속해서 자신의 주장에 대한 성경적 기초를 제공하고 있을 뿐 아니라, 계속해서 이어지는 그의 책의 3권은 보편구속을 주장하는 이론에 대한 반박으로, 그리고 4권에서는 구속과 관련된 성경구절들에 대한 세밀한 주석을 통해 자신의 이론을 옹호하고 보편구속에 대해 주석적 근거가 없음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가는 말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오웬에게 있어서 구속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이다. 그는 구속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삼위일체 하나님의 본질과 성품, 그 안에 존재하는 질서와, 그 질서에 기초한 성부와 성자사이에 맺어진 구속과 관련된 언약과, 그것의 실질적인 성취로서의 그리스도의 구속과, 그리고 구속에 대한 성령의 도우심과 실질적인 적용에 대한 성서에 대한 깊은 묵상과 연구를 통해서 얻어낸다. 이는 그 당시 보편구속을 주장하고 있는 아르미니안들과 소시니안들, 그리고 백스테리안들에 대한 신학적이고, 주석학적인 비판이었다.

특별히 그들의 이론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오웬은 삼위일체 하나님 사이에 존재하는 질서에 대한 서구교회의 이론을 받아들여 이를 구속에 대한 자신의 이해를 전개하는데 자연스럽게 사용한다. 이는 보편구속에 대한 그의 반대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본질과 질서와 사역에 깊은 이해와 묵상과 이를 뒷밭침하는 성경에 대한 주석학적 연구를 통해서 나온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특별구속에 대한 주장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기초한 스콜라주의나 혹은 예정론의 극단적인 적용에서 나왔다고 주장하는 것은 이들 자체에 대한 잘못된 이해 뿐 아니라. 오웬의 신학이 가지고 있는 삼위일체적 체계에 대한 잘못된 관찰에 기인한다. 특히 그의 구속에 대한 대작 “그리스도의 죽음의 종식”이 취하고 있는 변증적인 체계에 대한 잘못된 이해는 우리로 그의 삼위일체적 관점에서 바라본 구속에 대한 체계적인 이해를 간과하도록 한다.

1) 존 오웬은 17세기 명실상고 영국 최고 신학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의 책은 John Owen, The Works of John Owen, 24 vols. (London: Johnston and Hunter, 1850-53), repr. Edinburgh: The Banner of Truth Trust:1967)으로 남아있다. 이 논문에서 주로 다루는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 있는 죽음의 죽음”은 10권에 나온다.

2) 오웬의 특별구속이 아리스토텔레스철학에 기초한 스콜라주의와 예정론의 극단적 적용의 결과라고 주장한 사레로 다음과 같은 글을 보라: McLeod Campbell, The Nature of the Atonement and Its Relation to Remissions of Sin and Eternal Life (London: Macmillan and Co., Limited, 1915), 50-75; Alan C. Clifford, Atonement and Justification: English Evangelical Theology 1640-1790, An Evaluation (Oxford: Clarendon Press, 1990); R. T. Kendall, Calvin and English Calvinism to 1649 (Calisle: Paternoster, 1997); H. Rolston III, John Calvin versus the Westminster Confession (Richmond: John Knox Press, 1972); James B. Torrance, "The Incarnation and 'limited Atonement'", Evangelical Quarterly 55 (1982), 83-94.

3) 후기 종교개혁 개혁주의신학에서 철학의 사용에 대해 우리는 Bartholomaeus Keckerman의 “참된 철학은 거룩한 신학과 싸우지 않는다(vera philosophia cum sacra. theologia nusquam pugnat)”는 말을 기억해야 한다. 이 말은 신학과 철학은 혼합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신학은 철학이 보편타당한 진리를 가지고 있는 한 일반계시로서 성경이 허용하는 범위에서 철학을 방법론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Opera Omnia quae extant, Coloniae Alloburgum, 1614, 68. 후기 종교개혁 개혁주의 신학에서 신학과 철학과의 관계에 대한 보다 상세한 논의를 위해서는 Richard A. Muller, Post-Reformation Reformed Dogmatics, Vol. 1 (Grand Rapids: Baker Book House, 1987), 231-50; idem, "Vera Philosophia cum sacra Theologia nusquam pugnat: Keckerman on Philosophy, Theology, and the Problem of Double Truth" in Sixteenth Century Journal, IV(3) (1984), 341-65.

4) 철학이 방법을 넘어서서 신학의 내용에 영향을 주면서, 성경의 계시를 왜곡시킨 대표적인 예에 대해 Martin I. Klauber and Glenn S. Sunshine, "Jean-Alphonse Turretini on Biblical Accomodation: Cavinist or Socinian?", Calvin Theological Journal 25 (1990), 7-27을 보라.

5) 오웬의 특별구속이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기초한 스콜라주의나 극단적 예정론의 결과가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속에 대한 경륜에 대한 관찰에 기초한 것이라고 주장한 대표적인 학자는 Carl R. Trueman이다. 그는 그의 책에서 오웬에게서 사용된 스콜라주의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역할을 방법론의 차원에서 설명한다. 또한 그는 오웬이 아르미니안주의, 소시니안주의, 백스테리안주의와의 관계 속에서 어떻게 자신의 신학을 정립하는지 지적이며, 역사적인 정황 속에서 잘 설명해주고 있다. 그의 책 The Claims of Truth: John Owen's Trinitarian Theology (Carlisle: Paternoster Press, 1998), 9-19를 보라.

6) Owen, The Death of Death in the Death of Christ in The Works of John Owen, Vol. 10, 157-60.

7) Ibid.,

8) Clifford, Atonement and Justification, 95-98, 129.

9) 이에 대한 추가적인 논의에 대해 Trueman, The Claims of Truth, 34-44를 참고하라.

10) 여기에서 오웬의 표현을 직접 살펴보는 것의 그의 논의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Now, the master of this opinion do see full well and easily, that if that be the end of the death of Christ which we have from the Scripture asserted, if those before recounted be the immediate fruits and products thereof, then one of these two things will necessarily follow:-that either, first, God and Christ failed of their end proposed, and did not accomplish that which they intended, the death of Christ being not a fitly-proportioned means for the attaining of that end (for any cause of failing cannot be assigned): which to assert seems to us blasphemously injurious to the wisdom, power, and perfections of God, as likewise derogatory to the worth and value of the death of Christ; -or else, that all men, all the posterity of Adam, must be saved, purged, sanctified, and glorified; surely which they will not maintained, at least the Scripture and the woful experience of millions will not allow.” Owen, The Death of Christ, 159.

11) Owen, The Death of Christ, 163-79.

12) Disputatio는 quaestio와 더불어 중세대학에서 교육을 위해 사용하던 방법이었다. 이 방법은 조직신학에서 전형적으로 사용되었으며, 이러한 대표적인 예를 우리는 Aquinas의 Summa Theologica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이런 방법들은 종교개혁시대를 걸쳐 17세기 후기 종교개혁시대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므로 이런 방법들은 17세기 중, 후반에 Oxford에서 강의를 했던 오웬이 학생을 가르칠 때 흔히 쓰던 방법이었을 것이다. 참고로 Per Erick Persson, Sacra Doctrina: Reason and Revelation in Aquinas, trans, Ross Mackenzie (Oxford: Basil Blackwell, 1970), 3-11; David C. Steinmezt, “The Scholastic Calvin". Protestant Scholasticism: Essays in Reassessment, Carl R. Trueman & R. S. Clark ed. (Carlisle: Paternoster, 1997) 16-30.

13) Owen, A Brief Declaration and Vindication of the Doctrine of the Trinity in The Works of John Owen, Vol. 2, 377-13, 419-39.

14) William Ames, The Marrow of Theology, trans. John Dykstra Eusden (Grand Rapids: Baker Book House), 83-100; William Perkins, A Golden Chaine: or, the Description of Theologie in The Works of William Perkins, Vol. 1, (Cambridge, 1629), 11-16; Johannes Polyanderus, Andrea Van Rivetus, Antonius Wallaeus, Antonius Thysius, Synopsis Purioris Theologiae, (Leiden, 1682), VI-IX, XXIV; Turretin, Francis. Institutes of Elenctic Theology, Vol 1. Trans, James T. Dennison, Jr. (Philipsburg: P & R Publishing, 1992), 169-430.

15) Owen, The Death of Christ, 163 "The agent in, and chief author of, this great work of our redemption is the whole blessed Trinity; for all the works which outwardly are of the Deity are undivided and belong equally to each person, their distinct manner of subsistence and order being observed." 이 문제와 관련해서 Alan Spence, "John Owen and Trinitarian Agency" in Scottish Journal of Theology, Vol. 43, 157-73를 참고하라.

16) Owen, A Discourse concerning the Holy Spirit : The Works of John Owen, Vol. 3, 66-67, 91-94, 107-8; idem. A Brief Declaration and Vindication of the Doctrine of the Holy Spirit, 403-9.

17) Ibid.

18) Owen, An Exposition of the Epistle to the Hebrews: The Works of John Owen, Vol. 18, 42-97; idem, A Discourse of the Doctrine of the Holy Spirit, 207-42; idem, The Death of Christ, 236-38.

19) 로버트 리탐(Robert Letham)은 구속언약은 성령을 배제시키고, 종속설적인 경향이 보이며, 삼신론적 특징을 보이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의 책 The Work of Christ (Downers Grove: InterVarsity Press, 1993), 53를 보라. 흥미로운 것은 18세기 John Gill은 구속언약에 대해 은혜언약이라는 용어로 대체하고 여기에 성령을 참가시켜 삼위일체적인 구원관을 제시하고자 노력한다. 이러한 길의 노력은 구속과 관련된 언약인 구속언약을 구원과 관련된 은혜언약으로 확대해서 언약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용을 비교해 보면 실질적으로 17세기 언약신학과 다르지 않다. 오히려 이는 용어의 문제이며, 언약이라는 문제를 구속을 넘어서서 구원이라는 보다 폭 넒은 개념으로 이해하려는 시도로 보인다. John Gill, A Complete Body of Doctrinal and Practical Divinity, A New Edition (London, 1839), 214-25.

20) Owen, The Death of Christ, 163-174.
21) Ibid., 200-21.
22) Ibid., 171-74.
23) Ibid., 174-77.
24) Ibid., 179-200. 구속의 범위와 성격의 문제와 관련해 오웬은 백스터와 논쟁을 하였다. 이에 대해 그의 “Of the Death of Christ" in The Works of John Owen, Vol. 10, 435-79를 보라.
25) Ibid., 178-79.
26) Ibid., 236-424.




내용출처 : [기타] 박홍규교수 (침례신학대학교)





니케아 - 콘스탄티노플 신조와 바른 삼위일체론






김 명룡(장신대 교수)




서 언




기독교 교리 가운데 삼위일체론은 일반적으로 이해가 거의 불가능한 극난한 교리로 알려져 있다. 한국교회의 성도들 가운데 삼위일체론을 바르게 아는 사람들은 매우 적고, 많은 이들은 삼위일체론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다가 도저히 이해되지 않아서 포기하기도 한다. 삼위일체론은 정말로 이해가 안되는 그런 극난한 교리일까? 삼위일체론이 이해가 안되기 때문에 한국교회 안에는 이단적으로 보이는 잘못된 삼위일체론이 활개를 치기도 한다.




어떤 이들은 삼위일체론은 성서에 근거가 없고, 교회가 발전시킨 사변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셋이 하나가 되고 하나가 셋이 되는 그런 신관이 성서 안에 어디 있느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먼저 밝혀야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시다"라고 고백하는 것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셨다"( 고후 5:19)라고 전한 바울의 메시지가 삼위일체론 이라는 점이다. 삼위일체론이 성서와 관계 없는 고대교회의 사변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무언가 삼위일체론을 잘못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삼위일체론이 이해가 안되는 극난한 교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삼위일체론을 무언가 잘못 알고 있다. 삼위일체론은 사변도 아니고 이해가 안되는 극난한 어떤 교리도 아니다. 단지 우리에게 삼위일체론이 무언가 잘못 왜곡되어 전달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삼위일체론이 무엇이었는가를 이해하기 위해 먼저 삼위일체의 정통신조인 니케아 - 콘스탄티노플 신조 (381년)를 설명하면서 시작하고자 한다.




Ⅰ. 니케아 - 콘스탄티노플 (381년) 신조와 정통 삼위일체론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는 사도신조를 능가하는 권위를 지닌, 2000년 기독교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신조로, 또한 가장 정통적인 신조로 꼽히는 신조이다. 이 신조가 사도신조를 능가하는 권위를 지니는 이유는 사도신조는 동방 정교회가 인정하지 않는 서방교회만의 신조인데 반해서,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는 동서교회가 공히 가장 귀중한 정통신조로 인정하는 에큐메니칼 신조이기 때문이다. 한국교회 안에는 사도신조만 널리 알려져 있을 뿐, 이 정통신조 가운데 정통신조인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가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은 상당한 비극이며 바른 신학적 판단에 어떤 결함을 야기 시킬 수 있는 가능성과 연계될 수 있다.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는 무엇이 정통인가 이단인가를 판별하는 결정적 표준이고, 어떤 교회가 바른 신앙 위에 서 있는지를 규정지을 수 있는 결정적 권위를 가진 신조이다. 한국 장로교회 안에 널리 알려져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일부 장로교회의 신조로서 전 세계 교회라는 큰 시각에서 볼 때는 이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와는 그 권위에 있어서 큰 차이가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특별히 이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는 일명 삼위일체 신조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삼위일체론 연구에 있어서 결정적 시금석을 제공하는 신조인데, 이 신조가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는 것은 바른 삼위일체론 이해에 있어서 결정적인 결함을 야기 시킬 수 있다.




그러면 바른 삼위일체론 이해에 결정적인 이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는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의 신조일까? 우리는 바른 삼위일체론 연구를 위해 먼저 삼위일체론의 정통신조인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우리는 한 분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분은 전능하사 천지를 창조하시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지으신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는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분은 영원한 아버지로부터 나신 독생자로서 빛으로 오신 빛이시요, 참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참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피조 된 것이 아니라 나셨기 때문에 아버지와 본질이 동일하십니다. 만물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습니다. 그분은 우리 인류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하늘로부터 내려오사, 성령과 동정녀 마리아를 통하여 성육신 하셔서 인간이 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하여 본디오 빌라도에 의하여 십자가에 못박히시사, 고난을 받으시며 장사지낸바 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성경대로 사흘만에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하사 하늘에 오르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그분은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 위하여 영광 가운데 재림하시고 그의 나라는 영원무궁 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시고, 생명의 부여자이신 성령님을 믿습니다. 그분은 아버지로부터 나오시고, 아버지와 아들로 더불어 동일한 영광을 받으십니다. 이 성령님은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또한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교회를 믿습니다. 우리는 죄 사함을 위한 하나의 세례만을 인정합니다. 우리는 죽은 자들의 부활과 장차 임할 세상에서의 영생을 바라봅니다.




위의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에서 우리가 유념해야 할 것은 "우리는 한 분 하나님을 믿습니다"와 "우리는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분은 … 참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참 하나님입니다" 와 "우리는 주님이시고 생명의 부여자이신 성령님을 믿습니다 그분은 … 아버지와 아들과 더불어 동일한 예배와 영광을 받으십니다"라는 중요한 세 하나님에 대한 고백이다. 즉 이 신조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믿고 있는 것 (우리는 하나님께서 한 분이라고 믿고 있다) 과는 너무나도 다르게 하나님께서 세 분이심을 고백하고 있다. 이 신조의 첫째 단락은 성부이신 하나님에 대한 고백이고, 둘째 단락은 성자이신 하나님에 대한 고백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참 하나님으로 고백하기까지는 무수한 신학적 논쟁과 이단과의 투쟁이 있었다. 325년의 니케아 공의회는 참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께만 적용시키고 예수 그리스도는 성부 하나님 보다 열등한 어떤 존재로 보려고 했던 아리우스(Arius)파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예수 그리스도는 성자이시며 참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참 하나님으로 선포했다. 즉 니케아 공의회는 성부 하나님만이 영원 전부터 존재했던 유일한 하나님이라는 아리우스파의 일신론을 부정하고 성부 하나님과 똑같은 신성을 지닌 또 한 분의 하나님이신 성자가 계시고 이 성자가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선포한 것이다. 381년의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는 325년의 니케아 신조의 성자에 대한 고백을 그대로 이어받았고 이를 선포하고 있다. 325년의 니케아 신조와 381년의 콘스탄티노플 신조 (니케아 신조와 콘스탄티노플 신조를 합해서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조라 칭한다) 사이의 중요한 차이는 성령에 대한 고백이다. 위의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를 보면 셋째 단락에서 성령에 대해 "아버지와 아들과 더불어 동일한 예배와 영광을 받으십니다"라고 고백하고 있다. 이 고백이 콘스탄티노플 신조의 독특한 고백이다. "아버지와 아들과 더불어 동일한 예배와 영광을 받는다"는 표현은 성령께서 성부와 성자와 똑 같은 권능과 위엄과 신성을 지닌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는 표현이다. 즉 콘스탄티노플 신조는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외에 성령이신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고백하면서 이 성령이신 하나님은 성부나 성자에 열등한 어떤 신이 아니고 신성에 있어서 똑같은 권능과 위엄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전 세계 교회에서 가장 권위 있는 정통신조인 니케아 - 콘스탄티노플 신조는 한국교회 성도들의 일반적인 믿음과 생각과는 달리, 하나님께서 세분이심을 선언하고 있다. 즉 성부이신 하나님이 계시고 즉 성자이신 하나님이 계시고 성령이신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선포하면서 이 세 분 하나님의 특성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이 신조는 이 세 분 하나님께서 한 분이라고 어느 곳에서도 서도 선포하고 있지 않다. 정통 삼위일체론의 결정적인 신조인 이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는 하나님께서 세 분이심을 강력하게 선포하고 있을 뿐 하나님께서 한 분이라고는 조그마한 암시도 주고 있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고대교회에서 일신론은 언제나 이단이었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그것이 역동적 일신론이든 양태론적 일신론이든 일신론은 언제나 이단이었고 기독교의 정통신앙을 위태롭게 하는 것이었다.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조는 끊임없이 도전해 오고 정통신앙을 위태롭게 했던 일신론 이단을 물리치고 하나님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계시는 세 분 하나님이심을 만천하에 공포한 신조였던 것이다.




Ⅱ. 하나의 본질(우시아)과 세 실체(휘포스타시스)로서의 삼위일체 하나님




325년의 니케아 신조와 381년의 콘스탄티노플 신조 사이에 362년의 알렉산드리아(Alexandria)회의에서 고대교회의 삼위일체론의 초석을 놓은 중요한 항목이 결정되는데 기본도식은 "하나의 본질(우시아)과 세 실체(휘포스타시스)"였다. 이 기본 도식에서 "휘포스타시스"라는 희랍어는 개체를 뜻하는 말인데 곧 하나님은 세 분이시라는 말이었다. 362년의 알렉산드리아 회의는 하나님께서 세 분이라는데 조금도 의심이 없었다. 그러면 "우시아"라는 말은 무엇일까? 이 "우시아"라는 말은 본질 (nature)을 뜻하는 말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본질이 같은, 즉 동일한 신성을 지닌 하나님이라는 말이었다. 362년의 알렉산드리아 회의는 325년의 니케아 회의에서 결정된 성부와 성자 사이의 "호모우시온"(동일본질) 사상을 이어받으면서 이"호모우시온"을 성령이신 하나님께도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




381년의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의 삼위일체론은 알렉산드리아 회의의 결정의 연장선상에 있는 삼위일체론이다. 즉, 하나님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계시는데(세 하나님), 이 세 하나님은 동일한 신성과 위엄과 권능을 지닌 하나님이라는 것이었다.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가 규정하는 정통 삼위일체론은 하나님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계시는데 이 세 하나님은 같은 하나의 본질(우시아)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 까닭에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와 본질이 동일하십니다"라고 선언하고 있고, 성령이신 하나님은 아버지와 아들과 신성과 위엄에 있어서 동일하시기 때문에 "아버지와 아들과 더불어 동일한 예배와 영광을 받으십니다"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를 만드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동방교회의 정통신학자들의 삼위일체론은 몰트만( J. Moltmann)에 의하면 사회적 삼위일체론이었다. 사회적 삼위일체론이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신 세 하나님께서 상호간의 사귐을 통해 하나됨을 유지하는 사귐의 삼위일체론을 뜻하는 말이다.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의 배후에는 바실( Basil), 니사의 그레고리 (Gregory of Nyssa)와 나치안즈의 그레고리 (Gregory of Natianz)와 같은 위대한 신학자들이 있었다. 우리는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가 있도록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의 배후에 있는 동방교회의 정통신학자들을 캅파도키아 교부들이라 부른다. 이 캅파도키아 교부들 가운데 맏형격인 바실은 세 분 하나님의 일체성을 세 하나님의 코이노니아 (koinonia) 개념으로 표현하려고 시도했다. 나치안즈의 그레고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가족형의 유비로 표현하려고 노력했는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사귐은 지상의 인간의 가족 사이의 사귐과는 물론 무한한 차이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위일체 하나님의 가장 가까운 지상적 유비는 아담-하와-셋이라는 가족이었다고 가르쳤다.




캅파도키아 교부들은 세 하나님의 일체성을 세 하나님이 괴상한 방식으로 한 분이 되신다는 식으로는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즉, 오늘의 한국교회 성도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3=1의 교리가 고대교회에서는 삼위일체론의 초석을 놓은 캅파도키아 교부들의 머리 속에는 존재하고 있지 않았다. 또한 이 3=1의 교리는 삼위일체론의 정통신조인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 속에도 존재하고 있지 않다.




Ⅲ. 페리코레시스(침투 혹은 순환)로서의 세 하나님의 하나되심




362년의 알렉산드리아 회의의 삼위일체론의 기본도식인 "하나의 본질(우시아)- 세 실체(휘포스타시스)"라는 표현은 성부, 성자, 성령으로 계신 세 하나님은 동일한 신성과 권능을 지닌 같은 하나님이심을 선포한 신조였다. 그러면 이 세 하나님의 하나되심은 어떻게 되는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하나되심에 대해 결정적인 표현을 한 고대교회의 삼위일체론의 교부는 다메섹의 요한이었다. 요한은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으로 계시고, 이 세 하나님은 본질이 같으신 하나님 이신데, 이 세하나님은 상호 침투(페리코레시스)와 함께 하심으로 하나됨을 유지하고 계신다고 가르쳤다. 이 상호 침투(페리코레시스)와 함께 하심의 의미는 예수께서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다"(요 14:7-11 참고)고 언급한 말씀에 기초하고 있는 것으로, 성부와 성자의 하나됨은 성부가 성자이시고 성자가 성부이시기 때문이 아니라, 성자는 성부 안에 계시고, 성부는 성자와 함께 계시고 성자 안에 계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요한에 의하면 성부는 성자와 함께 계시고 성자 안에 계신다. 이런 까닭에 아들을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고 아들이 행하시는 일은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일과 동일하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요 14:11). 즉 삼위일체 하나님의 일체성의 신비는 다메섹의 요한에 의하면 성부가 성자 안에 거하시고, 성자가 성부 안에 거하시고, 또한 함께 계시는 하나님의 존재의 페리코레시스적 양태를 의미하는 것이다. 성부가 성자 안에 거하시는 양태는 성자와 성부가 성령 안에 거하시는 양태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페리코레시스 (perichoresis)라는 말의 원래의 뜻은 "윤무"라는 말에서 유래 된 말이다. 그것은 무대에서 무희들이 손을 맞잡고 원형의 춤을 추는 것에서 기인된 말이다. 예컨데 남자 무용수와 여자 무용수가 손을 맞잡고 원형의 춤을 출 때 두 무용수는 사람은 분명 둘이지만 하나의 춤과 하나의 연기와 표상을 만드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부와 성자께서 만드시는 사역이 그러하다는 의미이다. 희랍의 신들은 페리코레시스적 존재가 아니었다. 희랍의 여러 신들은 상호 간의 갈등과 투쟁과 싸움으로 얼룩져 있다. 그러나 성서의 하나님은 세 하나님이시지만 그들은 사랑의 깊은 사귐으로 성부는 성자 안에 계시고, 성자는 성령 안에 계시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와 안에 계신다. 즉 성서의 하나님은 페리코레시스적 양태를 지닌 존재로, 독자의 길을 걷는 세 신들이 아니고 하나이신 하나님이다.




Ⅳ. 터툴리안(Tertullian)의 삼위일체 도식의 신학적 오류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를 중심으로 하고 있는 삼위일체의 정통적 신조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계시는 세 하나님의 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