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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신학

삼위일체론

작성자
쥬니어칼빈
작성일
2012-12-04 02:14
조회
14343

삼위일체론



삼위일체론의 형성과 의미
유해무(고려신학대학원 교의학교수)

삼위일체론은 신학 교과서에만 있는 지식인가? 비록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지만, 대부분의 신자들은 일상적인 삶에서 사실상 '단일신론'을 따르고 있다. 우리는 매주일마다 성부, 성자, 성령께 송영을 돌려드리며, 삼위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면서 예배를 마치지 않는가. 그렇지만 삼위일체론이 거짓으로 판명되어진다 하여도 기독교 경건 서적의 대부분 바뀌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이처럼 삼위일체론이 창조론, 기독론, 은혜론 뿐만 아니라, 성도들의 경건과는 거의 분리되어 있다. 성령 안에서 성자의 이름으로 성부께 기도를 하루에도 몇번씩이나 드리며,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사역을 차례로 고백하는 사도신경을 고백하면서도, 성도들의 머리에는 '단일신론'이 자리잡고 있다. 이런 안타까운 신앙 현실을 주목하면서 우리는 삼위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형성과 내용을 살피려고 한다.

1. 몇 가지 오해들

먼저, 삼위일체론은 인간이 고안한 사변이라는 오해이다. 주지하다시피 1차 니케아공의회(325)와 2차 콘스탄티노플공의회(381)가 삼위일체론을 확립하였다. 인간들이 주재하고 토론했던 회의가 성자와 성령님의 신성을 결정한 것은 신뢰할만한 권위가 없으며, 삼위일체론은 사변일 따름이라는 오해이다. 둘째로, 이단에 대한 논쟁의 결과로 발생했다는 오해이다. 아리우스와 같이 그 당시 헬라 교양에 익숙했던 자들이 성자와 성령님의 신성을 부인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이 오해는 이단의 도전이 없었다면, 삼위일체론도 등장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부정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다. 셋째로, 삼위일체론은 그 내용과 표현 용어에 있어서 복음의 헬라화라는 오해이다. 하르낙(1851-1930)은 삼위일체론으로 대표되는 교의는 헬라 정신이 복음의 토양에서 얻은 결실이라고 폄하한다. 즉 기독교가 지적이고 철학적인 욕구를 따라서 당대의 교양을 이용하여 복음의 내용조차 변질시켰다는 주장이다.

2. 올바른 출발점

삼위일체론의 형성에 있어서 이러한 오해들의 소지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것들은 오해일 따름이다. 교회는 애초부터 삼위 하나님을 믿었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성부의 사랑을 성령님의 교제 중에서 고백하였다. 교회는 삼위 하나님을 고안하지 않았고, 비로소 이단과의 투쟁을 통하여서 이 고백의 내용에 이른 것도 아니다. 사실 처음부터 교회는 부활하신 주님이 마태복음 28:19-20에서 부탁하신 일, 곧 부활의 주님을 전파하고 세례를 베풀고 가르치는 일을 잘 준행했다. 사도신경으로 대표되는 신앙고백은 바로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사역을 구원역사적으로 진술하고 있다. 지금 형태의 사도신경은 주후 5-6세기경에 완성되었지만, 삼위 하나님을 고백하는 기본 구조는 이미 150년경에 형성되었다. 신약 정경이 형성되어 가는 과정 가운데서 이 신경은 이미 성경의 삼위 하나님 가르침을 가장 잘 요약하였고, 세례를 통하여 교회를 설립하고 삼위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데에 지대한 기여를 하였다. 무엇보다도 예배와 기도에서 그리스도가 차지하는 위치가 삼위일체론 형성에 주요한 역할을 하였다. 삼위일체론은 삼위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사수하기 위한 울타리였다. 교회가 삼위일체론을 형성하게 된 것은 일차적으로 방어적이지 않고 맡겨진 사명을 잘 감당한 결과였다고 말해야 한다. 우리가 아래의 논의에서 개별 신학자들의 입장을 정리하겠지만, 이들은 교회의 경건을 정리했을 뿐이다.

3. 삼위일체론의 형성

구약에서는 특히 한 하나님이심이 계시되었다(신 6:4). 그런데 이것을 하나님의 고유한 본질로 볼 경우, 삼위되심은 본질과 무관한 부가적 현상으로 간주될 수 있다. 사실 성경은 이미 창세기 1:26,27, 3:22에서 하나님의 내적인 자기 협의를 보여준다. 하나님의 단일성과 동시에 삼위이심이 구약에서는 암시적으로 가르쳐졌으나, 신약에서는 명시적으로 계시되었다. 우리는 여기서 교의인 삼위일체론을 정리하고자 한다. 삼위일체론은 교의(dogma)이므로 성경에 그대로 나오지는 않으나, 성경은 이 교의의 기본이 되는 교리(doctrine)를 분명히 가르치고 있다(마 28:19; 고후 13:13; 갈 4:4-6; 엡 4:4-6 등). 그러므로 삼위일체론의 흔적을 힌두교나 플라톤, 또는 단군신화에서 볼 수 있다는 주장은 근거가 없다. 성경과 사도신경은 구원역사적 순서를 따라서 삼위 하나님을 잘 가르치고 있으나, 하나님을 삼위로 고백하고 이 고백을 고수하는 것은 투쟁을 거쳐서 정착되었다.


3-1. 니케아회의 이전

초대교회 교인들이 예수를 主로 고백할 때, 구약의 하나님의 단일성과 예수님과의 관계가 논의의 중심에 있었고, 이 단일성을 유지하려고 예수님을 성부에게 종속시키는 것이 일반적 경향이었다. 심지어 정통적인 교부라 할지라도 이런 종속설의 흔적을 다 떨쳐버리지 못했다. 다만 니케아회의 이전에 이 종속설이 문제가 된 적이 없었으며, 만약 문제로 지적되었다면, 그들은 겸허하게 올바른 입장을 수용하였을 것이다. 이것이 정통과 이단의 갈림길이라 할 수 있다.

유대인 개종자들 중에는 예수의 신성을 부인하고 자신들이 알고 지냈던 예수가 하나님의 양자로 입양되었다는 입장을 표방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와는 반대로 영지주의자들은 구약의 하나님은 열등한 하나님이요, 예수 안에서 자신을 계시했던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시요 善神이라는 주장을 펼쳤다(말시온). 초기 변증가들 중에는 역사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神聖한 영이요 선재하던 하나님의 아들이 직접 인성과 결합했다는 성령 기독론을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교회가 확장되어 헬라교회가 정착되자 헬라 철학이 교회의 언어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하면서, 특히 요한복음에 나오는 말씀(Logos)을 헬라사상의 로고스론으로 해석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이제는 단일한 하나님만이 아니라 로고스론을 이용하여서 하나님 안에 있는 다원성을 말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이런 식의 다원론은 다시 단일성을 강조하는 君主論의 반격을 촉발하였다. 군주론은 성부의 단일성을 고수하려고 성자의 신성을 파생적으로 보거나 아니면 성부의 外現 방식으로 보았다. 전자는 2세기에 강했는데, 인간 예수 안에 비위격적인 신적 능력이 역사하여 그를 세례나 부활 시에 성자로 입양시켰다는 입장인데 이는 예수를 '半神半人'으로 만들었다(동력적 군주론). 후자는 200년경 유행했는데, 성부만이 독자적인 위격이시고, 성자와 성령은 성부 하나님의 외현 방식으로 보면서, 성부와 성자를 구별하지 않았다. 이 주장의 대표자는 사벨리우스인데, 그는 '성자-성부'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양태론적 군주론). 군주론은 하나님의 단일성을 지키려는 좋은 동기에서 출발했지만, 이 단일성을 성경의 가르침과는 다르게 개진했다. 이레네우스(140-202)도 단일성을 고수하되 양태론적 경향을 지녔다. 영원 전에 성부는 말씀과 지혜를 가졌고, 그들은 동등한 위격이라는 것이다. 성부의 위격에서 출발하여 성부의 위격이 동시에 말씀과 지혜(곧 성자와 성령)를 가지고 있다는 식이다. 이는 1-2세기 삼위일체론의 특성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그는 구속사의 관점에서 삼위일체론을 전개하는 좋은 길을 열었다.

이런 상황에서 두 교부가 새로운 기여를 한다. 서방의 터툴리안(160-220년 경)도 역시 성부 하나님의 단일성에서 출발했다. 성부는 말씀과 성령을 가지고 계시다가 창조를 위하여 발출하셨다. 이처럼 그는 신성의 단일성과 동시에 세 위격(personae)에 대해서도 말하면서, 세 위격에 공유된 '본질'을 도입했다. 세 위격이 한 본질 안에 동거하니, 신성은 삼위(trinitas)이시다. 구속사를 위하여 단일성이 세 위격의 모습으로 전개되었다. 세 위격은 동질이나, 동일하지는 않다. 이렇게 하여 그는 군주론과 노스틱 이단들을 잘 대처했다. 그럼에도 성자와 성령을 성부에 종속시키는 흔적은 그에게도 남아 있다.

동방의 오리게네스(185-254)도 하나님의 단일성을 강조했지만, 이보다는 위격의 구별성을 더 강조했다. 엄격하게 말하자면 성부만이 하나님이다. 로고스와 성령의 신성은 파생적이다. 위격을 표현하기 위하여 그는 '휘포스타시스'(uJpovstasi')라는 말을 사용했다. 이로써 성부와 성자는 위격적으로는 성부와 다르다는 구별성이 확보되었다. 그리고 그는 단일성을 표현하려고 성자와 성령이 성부와 연합되어 있다는 '호모우시오스'(oJmoouvsio')라는 말을 썼다. 그는 삼위일체론의 정립을 위한 용어를 창제한 인물이지만, 그의 설명에는 결정적인 흠이 있다. 즉 그는 로고스를 성부의 피조물로 보았다. 그러므로 신약과는 달리 성자께 기도하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성자가 성부 밑에 있듯이, 성령도 성자 아래 있다는 위계적인 신론은 그가 신플라톤 사상을 원용하여 신론을 전개한 代價이다. 이 때문에 '호모우시오스'는 니케아회의 이전까지 사용이 금지당했었다. 그렇지만 오리게네스의 영향은 지대하다. 니케아 회의 전과 당시와 후에도 오리게네스의 삼위일체론의 해석이 논의를 지배하고 향방을 정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그에 의하여 로고스 기독론이 최종적으로 승리하게 되었다.

3-2. 니케아 회의

아리우스(256-336)와 그의 스승 루시안( -312)도 오리게네스의 영향을 받았으나, 잘못된 한 측면만 강조하는 우를 범했다. 아리우스의 관심은 하나님의 독특성과 초월이었다. 그는 한 하나님 곧 성부만을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신성의 단일성과 종속설을 철저하게 고수했다. 성부의 본질은 초월적이고 불변하므로, 타자에게 수여될 수가 없다. 성부 이외의 모든 타자들은 피조물이요, 無에서 피조되었다. 성자가 성부에게서 출생하였다는 것은 하나님에게 물리적 범주를 적용하는 것인데 이는 도무지 불가능하다. 아리우스에 의하면, 하나님은 영원부터 말씀과 지혜를 가지고 계셨다. 그러나 이들은 결코 독립적인 위격들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육신이 된 말씀은 하나님의 피조물, 다만 완전한 피조물이다. 그러므로 성부와 성자의 본질적 동등성이란 있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아주 간교한 이단일 뿐이다. 성자에게 신성이 이야기될 수 있다면 이는 비유적 의미이며, 본질적이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 전가되었을 뿐이다. 다른 편으로 아리우스도 위격이라는 말을 쓰고, 성자와 성령의 독특성도 가르쳤다. 그러나 그의 절대적인 군주론은 그리스도를 '半神'으로 만들었고, 성령도 참 하나님은 아니었다. 아리우스는 하나님이 아닌 그리스도는 결국 성부를 실제적으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성부를 완전하게 계시할 수 없다는 망언을 하였다. 만약 하나님을 알려면, 성부 하나님 외에 그를 아는 다른 신을 상정하는 다신론을 도입할 수밖에 없는 위기에 처한다. 이와 같이 그가 하나님의 단일성을 잘못 주장한 결과는 엄청나게 클 수 밖에 없었다. 교회는 이런 주장을 방관할 수 없었다.

콘스탄틴 황제는 아리우스 논쟁에는 필요 없는 사변이 지배한다고 판단하고 상호 사랑과 포용을 촉구했다. 여기에는 이런 논쟁으로 자신의 제국의 통일이 손상받지 않게 하려는 정치적 배려도 있었다. 그는 최초의 공의회를 자기의 궁정 니케아에 소집했다. 그리고 그는 고백의 본문에 '호모우시오스'를 삽입토록 했다. 이는 터툴리안이 쓴 성부와 성자는 한 본질이라는 라틴어의 헬라 역어이기도 하다. 니케아 고백은 시리아-팔레스틴 고백, 아마 예루살렘 고백을 기초로 삼았다. 아리우스와 두 친구만이 고백 서명을 거부했다. 이 고백은 논쟁의 핵심에 해당되는 기독론에서 예수는 피조되지 않았고, 출생되었고, 성부와 동등하다고 했다. 이로써 성부는 성부가 아닌 적이 있었다는 아리우스의 주장은 거부되었다.

니케아 신조는 철학적 신개념을 거부하는 공을 세웠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라는 신약의 교훈을 무시하고 종속설적으로 그를 半神半人으로 만든 아리우스의 이단을 막는데는 성공했다. 사실 아리우스의 체계는 신플라톤적으로 채색된 위계적인 철학적 신론이었다. 니케아는 이에 맞서는 철학적 신개념으로 하나님의 비밀을 풀려고 하지 않았다. 교회의 고백은 '위격'과 같은 용어로 신앙을 개념적으로 묘사하려는 시도를 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고백에는 필시 역리(逆理)가 있기 때문이다. 즉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역리 말이다.

그러면 니케아 신조의 '호모우시오스'의 뜻은 무엇인가? 이 용어는 군주론에 대항하여 성부/성자의 數的 '구별'을 전제한 '동등성'을 뜻한다. 작성 당시에는 성부와 성자가 동일한 신적 본성을 공유한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니케아회의 이전과 이후 상당 기간동안 성부와 성자의 구별을 고려하지 않은 채 본질의 (수적) 동일성으로 이해(오해)되었다. 나아가 본성의 단일성과 위격의 구별성의 관계 또한 고려되지 않았고, 양태론의 오해를 받았다.

니케아의 영웅 아타나시우스(295-373)는 '호모우시오스'가 성자의 완전한 신성뿐 아니라 동시에 신성의 단일성까지도 표현한다고 해석했다. 그러면서도 용어 사용에 대해서는 유연한 자세를 취했다. 초기에는 성부와 성자의 단일성은 고려하지 않고 로고스의 신성만 강조했지만, 후기에는 신성의 단일성을 강조하다 보니 위격들 간의 구별이 모호해지게 되었다. 급기야는 성부의 신성과 성자의 신성은 동일하다는 주장을 하게 되었다. 물론 그는 성부와 성자는 구별된다는 것을 분명히 말했다. 그러므로, 아리우스派가 비난하듯이 그가 양태론에 빠진 것은 아니지만, 양 위격 간의 구별을 분명하게 제시할 수 있는 '위격'이라는 용어가 그에게는 없었다. 그 이유는 그의 관심이 삼위일체론 자체가 아니라 구원론에 있었기 때문이다. 즉 예수 안에 피조된 半神半人적인 본질만 있다면, 그를 통한 구원은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아타나시우스는 성자께서 피조물이 아니라 하나님이셔야 우리를 '신품화'(divinisation)하실 수 있다고 확신했다.

3-3. 니케아회의 이후

아타나시우스가 남겨놓은 문제는 세명의 캅바도키아 신학자들에 의해 정리되었고, 이는 성령의 신성 문제 해명으로 연결되었다. 니케아 수용자들 중에도 성령의 신성에 대해서는 많은 이들이 불확실했고, 콘스탄티노플의 감독이었던 마케도니우스(342-360)와 같은 성령否認派들까지 있었다. 그들에게 성령은 하나님이 우리와 세상 가운데서 일하려고 창조한 도구요 능력일 뿐, 하나님은 아니었다.

아타나시우스는 성령도 하나님이심을 분명하게 말했다. 다만 위격이라는 표현은 사용하지 않았다. 세명의 캅바도키아 신학자들은 오리게네스 전통을 따라 신성의 단일성이 아니라 구별되는 세 위격들에서 출발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공통적인 본성과 상호 구별되는 위격들을 구분하기 위하여 '본질'과 '고유성'을 각각 사용하였다. 바실리우스(329-379)는 고유성으로서 성부의 父性, 성자의 子性, 성령의 聖力 또는 聖化를 말하였다. 나찌안주스의 그레고리(329-390)는 성부께는 태어나지 않음, 성자께는 태어남, 성령께는 발출이라는 고유성을 부여했다. 그는 삼위 안에서 일체가 경배를 받으며, 일체 안에서 삼위가 경배를 받는다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신성과 君主權을 성부에게만 국한시키는 것을 반대했는데, 이는 군주론이 지닌 최대 약점을 극복하는데 기여했다. 닛사의 그레고리(330-395)는 태어나지 않음, 독생하심, 성령의 발출은 '성자를 통하여'라고 제안했고, 성부는 성자나 성령과 무관하게 사역하시지 않기 때문에, 신성은 하나라고 했다. 이들은 계시에서 전개되는 행위의 단일성에서 본질의 단일성을 찾았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신성의 단일성과 위격의 구별성을 확보했다. 나아가 그들은 '호모우시오스'를 '호모이우시오스'로 해석하는 것을 정통적이라 선언했다. '호모우시오스'를 단일성으로만 이해하다 보니 사벨리우스派적(양태론적)인 오해의 소지가 많았는데, 이런 식의 선언으로 그런 오해도 제거될 수 있었다.

콘스탄티노플회의(381)는 성령의 '호모우시오스'를 문자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으나 성령께서는 성부로부터 나와서 성부, 성자와 함께 경배와 영광을 받으신다는 식으로 성령의 신성을 고백했다. 1년 뒤의 또 다른 회의는 '호모우시오스'를 성령께도 돌려드렸다.

'호모우시오스'라는 용어를 도입함으로 교회는 아리우스 이단을 대항하여 그리스도의 신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바실리우스는 아리우스가 성경의 모든 말들을 자기 식으로 변형했기 때문에 '호모우시오스'가 효과적으로 방어선(防禦線)을 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교회는 이런 고백으로 하나님의 비밀을 벗겨버리거나 본질을 정의한 것이 아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이 진짜로 오셨고 성령으로 하나님이 직접 교회에 임재하신다는 성경적 교훈을 고수하려고 했다.

어거스틴(354-430)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단일성을 증거했다. 그는 세명의 캅바도키아 신학자들이 제시한 하나님의 본질과 위격들의 구별 또한 오해의 소지가 있음을 알았다. 즉 그들은 본질을 인간이라는 種槪念으로 보고서 각 위격은 구체적 인간 곧 베드로, 요한과 야고보 등으로 비교했다. 이 비교는 단일성보다는 구별을 너무 부각시켰다. 이에 근거하여 아리안파들은 캅바도키아 신학자들의 삼위일체론이 다신론이라고 공격했다. 어거스틴은 삼위란 三神들이 아니라 한 하나님이시며, 그 하나님이 삼위로 계시지만 단일성은 해소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그러므로 속성들은 본질에 부가적이지 않고, 본질과 속성들 간에는 아무런 거리가 없이 본질은 곧 속성들이다. 그러므로 절대적 속성과 절대적 존재는 한 분에게만 해당된다. 세 위격들이 아니라 한 하나님께 한 본성, 한 신성과 영광이 돌려지며, 뜻과 사역도 마찬가지이다. 오직 성부께만, 또는 오직 성자나 오직 성령께만 돌려지는 사역이란 없다. 세상을 향하여 하나님과 삼위는 한 원리를 제시한다. 가령 성육신에도 성부 뿐 아니라 성자와 성령이 공히 능동적 기여를 하셨다고 설명한다. 삼위의 외적 사역들은 불가분리인고로 삼위는 항상 함께 사역하신다. 어거스틴은 '위격'도 새롭게 해석한다. 이 말은 라틴어로 번역할 때, '본질'로 번역되어야만 했다. 동방신학에서는 '가면'을 뜻하는 이 말을 'persona'로 번역하는 것도 만족스럽지 않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침묵을 지키지 않으려고 사용하지만, 의도하는 바를 바로 표현하지는 못한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는 이 용어를 관계(relatio)로 번역했다. 이 점에서 그는 아타나시우스와 나찌안주스의 그레고리의 입장을 따르며, 이는 서방 전통도 되었다. 삼'위'란 그 자체로는 무엇이 아니라 상호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분들이다. 모든 속성들은 '일체'에 귀속되지만, 관계로서의 위격은 하나님의 내적 생명이나 피조계와 연관되어 의미를 지닌다. 삼위는 거룩하다, 선하다, 영원하다고 할 수 있으나, 삼위는 성부이다라고 해서는 안된다. 또 삼위를 성자이라 할 수는 없는데, 子性을 다른 위격에다 적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성부,성자,성령 간에 본체론적이나 또는 질적, 양적인 여하한 구분을 적용하지 않았다. 도리어 영원한 관계성을 도입했다. 나아가 이 관계성은 본질에 부가적인 우연이 아니다. 부가적 우연은 신성의 가변성을 상정하기 때문이다. 한 하나님이 오직 성부이거나 오직 성자이거나 오직 성령이거나 한 것이 아니라, 영원토록 성부, 성자, 성령이셨고, 또 그러하실 것이다. 어거스틴은 이렇게 三神論의 위험을 극복했다. 용어의 제한성이 있으나 그는 삼위 고백에서 침묵만이 능사가 아님을 우리에게 잘 보여주었다.

아타나시우스 신조(Athanasium)는 삼위의 한 하나님과 단일성 가운데 삼위 하나님을 경배하며, 위격들을 혼돈하지 않고 본체를 분리하지 않는 고백을 언명한다. 성부의 위격과 성자의 위격 그리고 성령의 위격이 각각 다르나 성부,성자와 성령의 신성은 하나이다. 영광과 위엄도 동일하며, 영원하다. 삼위는 공히 피조되지 않았고, 공히 불가해하며, 공히 영원한데, 한 영원한 하나님이시다. 성부도 하나님이요, 성자도 하나님이시고, 성령도 하나님이시나, 삼신들이 아니고 한 하나님이시다. 각각 주님이시나, 세 주님들이 계신 것이 아니라 한 주님만이 계신다. 성부는 출생되지 않았고, 성자는 피조되지 않고 출생되었고, 성령은 피조되지도 출생되지도 않았으나 발출하신다. 세 성부들이 아니라 한 성부만 계시고, 세 성자들이 아니라 한 성자가 계시고, 세 성령이 아니라 한 성령만이 계신다. 삼위 간에는 전과 후가 없으며, 크고 작음도 없다. 함께 영원하시기 때문이다.

다메섹 요한(670-750)은 요한복음 10:38, 14:9,11, 17:21을 근거로 하여 삼위일체론에 共在(또는 共座) 개념을 도입했다. 이 말은 위격들의 대면적 공재와 상호 침투를 표현한다. '삼위 하나님은 상호 간에 서로 뒤섞이지 않는 침투를 공유한다. ... 성자는 성부와 성령 안에 계시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 안에 계시며, 성부는 성자와 성령 안에 계시나, 뒤섞임이나 용해나 혼합은 발생하지 않는다.' 이 공재는 본질의 단일성에 기초한다. 위격들은 동등한 본질이며, 상존하며, 상호 관계하며, 상호 개방적이고 상호 자기 수여적이다.

칼빈(1509-1564)은 먼저 삼위께서 참되신 한 하나님이시요, 이 삼위를 떠나서 하나님은 결코 알려질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그 분을 바로 삼위로 아는 것이다. 하나님이라는 이름은 성부,성자,성령께 공히 적용되며, 위격이란 비공유적 속성이며, 상호 연관 중에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구별을 말한다. 위격은 상관적인 이름이고, 본질은 절대적인 이름이다. 그리고 성부, 성자, 성자의 이름은 명목적인 이름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존재한다. 칼빈은 성자와 성령의 신성에서 시작하여 삼위일체론을 언급한다. 하나님 내에서의 위격 구분은 성자께서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계시됨으로 필요하게 되었다. 이런 식으로 그는 각 위격에서 全 신성을 이해한다. 그는 요한복음 14:10을 인용하면서 성부는 전적으로 성자 안에, 성자는 전적으로 성부 안에 계신다고 다메섹 요한式의 공재를 말한다. 각 위는 본질의 상이성으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비공유적 속성을 통한 상호 관계성으로 구별되며 동시에 그 관계성을 통하여 단일성을 이룬다. 그는 에베소서 4:5과 마태복음 28:19의 세례의 단일성을 근거로 하여, 삼위께서 함께 한 하나님이심을 증거한다. 그리스도는 스스로 하나님이시다. 이 측면에서는 자기 원인자이다. 그러나 성부와의 관계에서는 성자이다. 이 측면에서는 성부가 성자의 원인자이다. 성부가 '신성의 원천'이라는 것은 본질이 아니라 순서의 측면에서만 가능하다. 위격들 간에는 어떤 경륜적 질서가 있고, 성부는 시작이요 원인자이시니까,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특히 성부에게 해당될 경우가 많다. 칼빈은 고대교회의 전통을 따라서, 성부는 한 위격의 이름일 수도 있고, 동시에 全 신성을 대표하는 이름으로도 쓴다. 그러나 성부가 신성의 원인은 아니다. 이런 식으로 성자와 성령께 추호의 약탈도 없이 본질의 단일성이 보존된다. 성자와 성부의 신성은 공유적 신성에 참여를 통하여 이루어지며, 결코 성부의 위격은 (본체론적) 원인이 아니다. 성부만이 '절대적으로' 원인자라고 말하는 것은 아리우스가 주장한 이단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고백을 할 때, 하나님이라는 이름으로 삼위로 이해되는 단일하고 단순한 본질로 이해한다.' 이렇게 본질의 단일성에 도달하는 것은 항상 필수적이다. 그러므로 '주', 또는 '영'이란 성부께만 적용되는 이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삼위의 각 위격이 불려지며, 이로써 하나님의 단일성이 보장된다.



4. 삼위일체론의 의미

고대 교회에서 신학은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근대학문의 한 분과로서 신학과는 전혀 다른 독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신학은 그 어원에서 '神'과 '말'의 관계를 뜻한다. '..를 하나님이라 말함'이 신학함이었다. 이방적이고 적대적인 환경 가운데서 예수님을 하나님이라 부르고, 성령님을 하나님이라 선언하는 것이 신학'함'이었다. 고대 헬라교부들은 성경의 저자들, 특히 성자의 신성을 잘 가르친 사도요한을 신학자라 불렀다. 신학은 성자와 성령님을 하나님이라 선언함으로써 삼위 하나님을 한 하나님이라 부르고 삼위일체 하나님께 합당한 영광을 돌리는 송영이었다. 신학'함'은 교회의 삶 자체, 특히 설교와 세례와 예배에서 일상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성도의 삶도 이 삼위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하여 닮아가는 '신품화'였다. 그리고 부차적으로 이에 대한 이론적인 반성인 삼위일체론이 형성되었다. 즉, 하나님의 단일성 아래서 계시의 삼위 하나님은 진정으로 또 다시 한번 더 바로 그분 자신이라는 해석이다. 삼위일체'론'은 성경에 문자적으로 나오지는 않으나 하나님의 계시를 바르게 해석하는 교의의 전형이다. 침묵이 아니라 말함이며 말함이 아니라 방어막을 치는 것이 이 해석의 의도이었다. 계시의 하나님이 원래 삼위이기 때문에 우리의 인식에도 삼위 하나님으로 알려진다. 삼위 하나님은 비공유적 속성들을 통하여 완전한 방식으로 한 본질에 동등하게 참여하는 한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삼위 하나님 이외의 다른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 신학의 원래적 의미와 활동이 회복되어야 한다. 따라서 최근 신학의 삼위일체론 부흥과 고대 헬라신학에 대한 높은 관심이 시사하는 바는 크다. '기독교신앙은 삼위일체 신앙에 내포되어 있다'라는 유명한 말이 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을 믿는데, 그 하나님은 삼위로 계시는 분이시다. 구원역사에 삼위로 계시되셨기에 우리가 삼위로 고백하지만, 원래 하나님은 삼위로 계신다. 비록 삼위일체론이 바로 이 신앙의 핵심을 인간의 논리와 언어를 사용하여서 정리하였지만, 삼위일체론은 딱딱한 사변이 아니라, 송영이며 신앙의 본질이다.

우리가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며, 삼위 하나님을 사도신경으로 매주 고백하고, 삼위 하나님이 주인이신 설교를 들으며, 예배의 말미에 삼위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데도, 삼위일체론이 어렵다고 인식되며, 대부분의 신자들이 신앙생활에서 실천적인 단일신론을 따르고 있는 것은 심히 유감스러운 일이다. 이를 타개하기 위하여 삼위 하나님을 명시적으로 계시하는 신약의 본문 뿐만 아니라, 암시적으로 가르치고 있는 구약의 본문도 이제는 삼위론적으로 설교되어져야 할 것이다. 또 세례 교육을 삼위론적으로 시행하며, 사도신경의 삼위일체론적 구조와 의미를 다시 음미하며, 예배 말미의 축복 선언은 삼위 하나님의 동행 약속임을 매번 명심해야 할 것이다. 삼위를 향한 송영을 찬송가에 많이 싣는 것도 고려해볼 만하다. 신앙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삼위 하나님과 누리는 교제이며, 삼위 하나님의 사역에 우리의 역사가 포섭된다.

삼위일체론은 부정적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설교, 선교, 교육, 예배와 기도 등 교회의 본래적 사역에서 자연스럽게 확립되었다. 이것은 공교회적 유산이다. 성장하고 부흥한 한국교회는 삼위 하나님을 향한 신앙과 송영에서 공교회적인 유산을 잘 전수받아서, 삼위 하나님과 진정으로 교제하고 사귀는 성숙한 교회와 교인들이 되어서, 다음 세대에게도 이 신앙의 핵심을 잘 전수할 때, 공교회적인 사명을 완수하게 될 것이다.


(목회와 신학)




삼위일체(trinity)는 성경에 나오는 단어가 아닙니다. 더 나아가서 비록 이 삼위일체의 교
리가 구약성경에는 암시적으로 나타나 있고, 신약성경에는 명백히 나타나 있다고 얘기되기
도 하지만, 사실상 신약성경에도 명백하게 나타나 있는 교리는 아닙니다. '명백한(explicit)'
이라는 형용사가 '충분하고 뚜렷한 표현에 의해 특징 지워진(characterized by full, clear
_expression)'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면, 사실상 이 형용사는 이 삼위일체의 교리에는 적
용하기 힘든 형용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교리는 성경을 통해서 확립되어 나온
교리이기 때문에, 이 교리가 성경적 가르침에 근거한 교리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흔히 삼위일체 교리를 얘기할 때 세 분이 동등하게 같고, 동등하게 영원한 분임을 잘 표
현하기 위해 '인격(person, 위격)'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비록 그 단어가 가장 최선의
단어는 아닐지라도, 그 단어는 양태론(modalism)의 이단사상으로부터 삼위일체 교리를 보
호해주는 핵심적 단어입니다. 그리고 '본체상(혹은 본질상)으로는 같은(of the same
substance)'이라는 구절은 삼신론(tritheism)이라는 이단사상으로부터 삼위일체 교리를 보
호해 주는 핵심적인 구절입니다. '하나님의 나눌 수 없는 통전적 본질(the whole undivided
essence of God)'은 세분의 인격 각각에 동등하게 소유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10장 30절에 나오는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라는 구절은 '인격의 다양성
(the diversity of the Persons)'과 '본질의 단일성(the unity of the essence)' 사이에서의
균형을 적절하게 잘 표현한 구절입니다. '나와 아버지'라는 구절은 두 개의 인격을 분명히
구분 짓고 있습니다. 그래서 동사도 복수형 동사를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분
명히 "우리는 하나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라는 단어는 중성명사로서
자연상 혹은 본질상 하나라는 말이지, '하나의 인격(one Person)'이라는 말은 아닙니다(그
렇다면 남성명사를 사용했어야 합니다). 이처럼 주님은 그분 자신을 아버지와 구분 지었지
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버지와의 단일성과 동등성을 주장하셨습니다.
삼위일체와 관련하여 우리가 시도하는 모든 논의와 묘사에도 불구하고, 결국 삼위일체는
신비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라는 점을 우리는 인식해야 합니다. 그러나 삼위일체에 관한 자
료들이 우리들의 이해의 영역에 벗어난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그 자료들을 진리로 받아들
여야 할 것입니다.
삼위일체의 실례(ILLUSTRATION OF THE TRINITY)
어떤 실례로도 삼위일체에 대한 성경적 계시를 정확하게 다 묘사하는 것은 불가능합니
다. 대부분의 사례들이 기껏해야 '하나 안에 셋(three-in-one)'이라는 개념과 유사한 개념들
일 뿐입니다.
물은 '하나 안에 셋(three-in-one)'의 예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물은 화학적 활
동에 따라 고체, 액체, 기체의 상태가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얼음, 수증기, 물이 평형상태
로 공존할 수 있는 상태인 '물의 삼중점(a triple point for water)'도 있습니다. 모두 다 물
이지만, 각각의 상태는 뚜렷하게 구분됩니다.
태양, 태양의 빛, 태양의 힘도 삼위일체의 사례가 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도 성부를
보지 못한 것처럼 어떤 사람도 사실상 태양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태양의 빛
에 대해 공부함으로서 태양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우게 되는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
의 광채이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히 1:3)를 통해서 성부에 대해서 배우게 됩니다. 우리는
씨, 나무, 식물들이 자라는 것을 통해서 태양의 힘을 보게 됩니다. 무엇이 식물들을 자라게
하느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우리는 태양이 식물들을 자라게 한다고 대답합니다. 성령은 태
양의 힘과 같고 그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삼위일체에 관한 실례들이 어떤 유용성 혹은 한계성을 가지고 있든지 간에, 삼위
일체는 언제나 신비에 쌓인 것임을 우리는 인정해야 합니다.
삼위일체 교리사 고찰(A SURVEY OF THE HISTORY OF THE DOCTRINE)
A. 단일신론(Monarchianism, 단일체론)
초대 교부들은 삼위일체에 대해서 어떤 뚜렷한 진술을 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교부들은
말씀(the Logos)에 대해서 명확한 언급을 회피했고, 대부분의 교부들은 신자의 삶에 있어
서의 성령의 사역을 제외하고는 성령에 대해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프랙서스
(Praxeus)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하면서, 터툴리안(Tertullian, 주후 165-220)은 삼위일체라
는 단어를 처음 사용한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삼위성(threeness)에 대해서 언급했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견해는 종속설(subordinationism, 성자종속설)의 경향을 띄고 있어서, 삼위
일체에 대한 완전하고도 정확한 이해가 부족했습니다.
터툴리안은 당시 삼위성(trinitarianism)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단일성을 채택했던 단일신
론자들과 논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단일신론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형태로 존재했습니
다.
1. 역동적 단일신론(Dynamic Monarchianism, 역동적 단일체론) 혹은 채택설
(Adoptionism, 양자론). 이 이론은 주후 210년경 비잔티움의 떼오도투스(Theodotus of
Byzantium)에 의해 처음으로 설명된 이론으로서, 예수님을 그분의 세례 시에 성령의 특별
한 능력이 주어진 사람으로 보았습니다.
2. 양태론적 단일신론(Modalistic Monarchianism, 양태론적 단일체론). 이 이론은 보다
영향력이 있었던 이론으로서, 하나님의 단일성을 주장하려고 했을 뿐만 아니라 성부가 성
자 안에서 성육신했음을 주장함으로서 그리스도의 온전한 신성을 주장하려고 했습니다. 서
방교회에서는 이 이론이 성부수난설(Patripassianism)로 알려져 있는데, 그 이유는 성육신
한 성부도 또한 성자 안에서 함께 고난 당했다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동방교회에서는 이
이론이 사벨리안주의(Sabellianism)로 알려져 있는데, 이 명칭은 신격 안에 있는 각 인격들
(Persons)은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현시하신 양태들(modes)이라고 가르쳤던 당시의 가장
유명한 신학자 사벨리우스(Sabellius)의 이름을 딴 명칭입니다.
B. 아리안주의(Arianism)
알렉산드리아에서 반삼신론적 입장을 견지했던 장로인 아리우스(주후 250-336)는 한 분
의 영원한 하나님을 성자와 구분시켰는데, 그 이유로 성자는 성부에 의해 생성되어서 '시
작(a beginning)'이 있었던 분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아리우스는 모든 만물이
성자에 의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성령께서도 아들에 의해 창조된 첫 번째 대상이라고 가르
쳤습니다. 그는 성자를 성부보다 열등한 분으로 묘사하는 것처럼 보이는 성경 구절을 통해
서 그의 견해를 성경적으로 뒷받침하려고 했습니다(마 28:18; 막 13:32; 고전 15:28).
아리우스의 견해는 하나님의 단일성을 견지하면서 하나님 안에서 세분의 본질적인 특성
들을 구분 짓고 또한 성자는 성부와 동일한 본체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던 아다나시우스
(Athanasius, 주후 296-373)에 의해 반박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논쟁을 종식시키기 위해서 니케아 회의(the Council of Nicea)가 소집되었을
때, 아다나시우스와 그의 제자들은 성부와 성자가 동일 본체(omoousios)라고 선언되기를
원했지만, 대부분의 많은 온건론자들은 유사 본체(omoiousios)라는 단어로 대체하자고 제
의했습니다. 극단적인 아리우스주의자들(thorough-going Arians)은 성자는 다른 본체
(heteroousios)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마침내 콘스탄틴 황제는 아다나시우스와 그
의 제자들의 주장에 기울었고 결과적으로 그리스도는 아버지와 동일 본체(omoousios)를
가지고 있었다는 뚜렷한 선언문인 니케아 신조(the Nicene Creed)가 발표되기에 이르렀습
니다.
성령에 대해서 니케아 신조는 다음과 같이 간단하게 언급했습니다. "나는 성령을 믿는
다." 그렇지만 아다나시우스 자신은 그의 가르침에서 성자와 마찬가지로 성령도 성부와 동
일한 본질을 가지고 있다는 입장을 견지했습니다. 니케아 회의 이후로 4세기 경 많은 문서
들이 돌아다녔고, 아리우스파의 견해가 부분적으로 인기를 얻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콘스
탄틴 황제의 계승자로 영향력이 컸던 콘스탄티우스(Constantius)가 아리우스의 견해를 선
호했기 때문이었습니다.
4세기 후반에 들어와 소아시아 동쪽 갑바도기아 지역에서 온 세명의 신학자가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결정적인 밑그림을 제공하여 아리우스주의를 패배시켰습니다. 그 세 사람은
가이사랴의 바실(Basil of Caesarea), 그의 형제 닛사의 그레고리(Gregory of Nyssa), 그리
고 바실의 친한 친구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Gregory of Nazianzus)였습니다. 한 분 하나
님 안에 세 개의 본질적인 특성을 가졌다는 점에 대한 그들의 강조는 온건론자들의 눈에
니케아 신조를 사벨리우스주의로 보는 의심에서 벗어나게 만들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성령
도 마찬가지로 동일 본체(the omoousis)라고 강력히 주장했습니다.
C. 콘스탄티노플회의(The Council of Constantinople, 주후 381)
주후 373년, '반 성령파들(Pneumatomachians)'이라고 불리는 유스타쓰(Eustath)를 중심
으로 한 일단의 그룹들은 성자와 성령을 모두 성부와 동일 본체라고 여겼습니다(몇몇 온
건론자들은 성자의 동일본질설(consubstantiality)을 확고하게 뒷받침해 주었다). 이에 대한
논쟁이 가열되어 결국 데오도시우스 황제에 의해 동방교회를 대표한 150명의 정교회 주교
들로 구성된 콘스탄티노플 회의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Gregory of
Nazianzus)'의 인도 아래 그 회의에서는 성령에 대해 다음과 같은 선언문을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주님,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 성령을 믿는데, 성령은 성부로부터 발현해 나오시고,
성부 및 성자와 함께 영광 받으셔야 하고,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분이다." 비록 이
신조가 니케아 신조에서 그리스도에 대해 사용한 것과 같은 '동일 본체를 가진(of the
same substance)'이라는 용어는 사용하지 않았지만, 그 신조는 창조된 존재에 대해서는 쓰
여질 수 없는 용어로 성령의 사역을 묘사했습니다. 이처럼 콘스탄티노플 신조는 성령의 동
일 본체(omoousios)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다른 두 인격(성부 및 성자)과 성령의 관
계성을 정의하지 않았기 때문에 완전히 만족할만한 선언을 제시하지는 않았을지라도 성령
의 신성의 문제를 잠잠하게 만들었습니다.
D. 어거스틴(Augustine, 354-430)
1. 삼위일체론(De Trinitate). 서방 교회에서의 삼위일체에 관한 선언은 어거스틴에 의해
서 최종적인 정형이 확립되었습니다. 이 '삼위일체론'에 관한 논문에서 어거스틴은 "삼위일
체 안에 있는 세분의 인격들(Persons)은 각각 온전한 본질을 가지고 있으며, 세분의 인격
은 모두 다른 인격과 독립적인 상태로 존재한다"라고 선언했습니다. 비록 그는 세분의 본
질적인 성향을 나타내기 위해 '인격들(Persons)'이라는 단어를 사용해야 하는 점에 대해서
불만족스럽게 생각했지만, 그는 '침묵하지 않기 위해서(in order not to be silent)' 그 단어
를 사용했습니다.
그는 또한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함께 발현되어 나온다고 가르쳤습니다.
2. 펠라기안 논쟁(The Pelagian Controversy). 어거스틴은 또한 성령의 사역으로서 '은
혜의 지속성(efficacious grace)'에 대해 특별히 강조했습니다. 이 주장은 인간과 죄에 관한
그의 교리에서뿐만 아니라 성령에 관한 그의 교리에서도 심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E. 톨레도 공회(The Synod of Toledo)
서방교회 신학자들이 일반적으로 성부와 성자 모두로부터 성령이 발현되어 나온다는 주
장을 고수하고 있었지만, 이 주장은 톨레도 공회에서 '콘스탄티노플 신조(the
Constantinople Creed)'에 필리오케(filioque, 그리고 성자로부터)라는 구절이 첨가되기 전까
지는 공식화되지 못했습니다. 동방교회에서는 이단이라고 천명하면서 이 주장을 결코 받아
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 이유로 오늘날까지 서방교회와 동방교회는 갈라진 상태로 존재
하게 되었습니다.
콘스탄티노플의 교부이자 로마의 교황 니콜라스의 대적자인 포티우스(Photius)는 '통괄
적인 대주교(universal bishop)'라고 주장하는 니콜라스 교황의 주장을 배척하는 노력의 일
환으로 이 필리오케(filioque)라는 구절을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필리오케(filioque)가 거룩
한 콘스탄티노플 신조를 그릇되게 만들었다고 주장하며 교리적 갱신을 요구함으로서 서방
교회를 난처하게 만들었다.
F. 삼위일체에 대한 개혁신앙의 가르침(Reformation Teaching on the Trinity)
개혁주의자들과 모든 개혁주의 신앙고백은 초대교회에 공식화된 정통주의에 입각해서
삼위일체에 대한 교리를 펴고 있습니다. 루터는 믿음으로만 삼위일체를 이해할 수 있다고
느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서에서 삼위일체를 가르치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에 삼위일
체에 대한 정통 교리를 받아들였습니다. 옥스버그 신앙고백(The Augsburg Confession,
1530)은 다음과 같이 분명히 선언한다. "하나님이라 불려지고 존재하는 한분의 신적 본질
이 있고.... 그러나 같은 본질과 능력을 가지고 또한 동등하게 영원한 세분의 인격들, 즉 성
부와 성자와 성령이 있다."(III. 7). 마찬가지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the Westminster
Confession, 1647)도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신격의 단일성 안에 하나의 본질과 능력, 그
리고 영원성을 가진 세분의 인격들, 즉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 있다. 성
부는 어떤 분에도 속해있지 않고 생성되지도 않고 발현되지도 않으시며, 성자는 아버지로
부터 영원히 생성되셨으며,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영원히 발현되어 나오신다."(II. 3).
소시니안주의(Socinianism)는 16세기에 성자를 '오직 한 사람(only a man)'으로 취급함으
로 성자의 선재성(preexistence)을 부인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한 분의 인격(only one
Person)'을 가지고 있는 오직 하나의 신적 본질만이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이 견해는 영국
의 '일신론(Unitarianism)'과 영국의 '이신론(Deism, 자연신론)'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많은
일신론자들은 이신론자들이 아니었지만 모든 이신론자들은 하나님에 대한 일신론적 개념
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단적인 사상은 아리안주의(Arianism)에서 소시니안주의
(Socinianism)로, 소시니안주의(Socinianism)에서 일신론(Unitarianism)으로, 일신론
(Unitarianism)에서 이신론(Deism)으로 계보를 형성하며 내려왔습니다. '미국의 일신론
(American Unitarianism)'은 '영국의 일신론(English Unitarianism)'의 직접적인 산물이었습
니다.
G. 현대의 견해(Modern Wiews)
삼위일체에 대한 정통적인 견해는 현대의 많은 신학자들에 의해 수용되었고 지금도 수
용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삼위일체에 대해 비난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칸트
(Kant)와 헤겔(Hegel)은 삼위일체에 대한 정통 교리를 반대했고, 채택설(adoptionism, 양자
론) 혹은 비인격적인 범신론(impersonal pantheism)을 받아들였습니다. 스위든보그
(Swedenborg)와 슐라이에르마허(Schleiermacher)는 사벨리아니즘(Sabellianism)을 주장했
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발트(Barth)의 개념이 양태론적 개념이었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습니다
(Leonard Hudgson, The Doctrine of the Trinity [London: Nisbet, 1955], p. 229). 다른 많
은 사람들은 발트가 사벨리아니즘을 거절하고 각 인격들의 개념을 설명하면서 하나님 안
에 있는 '존재하심의 형태들(modes of being)'이라는 개념을 사용했기 때문에 정통주의자
라고 그를 옹호합니다.
폴 틸리히(Paul Tillich)는 삼위일체에 대한 교리가 인간 자신의 필요를 만족시키기 위해
서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느꼈습니다. 틸리히는 사실상 신격 안에 한 분의 인격
이 있다는 사실조차 믿지 않았고, 세분의 인격을 그냥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여호와의 증인(Jehovah's Witnesses)은 성자의 영원성과 삼위일체 교리를 부인함으로
'아리안주의자와 같은 기독론(Arian-like Christology)'을 받아들입니다. 아리우스처럼 그들
은 말씀(the Logos)을 창조자와 창조물 사이의 '중간적 존재(an intermediate being)'로 보
고 있습니다.
ⓒ 이한규목사 번역 발췌







존 오웬의 구속에 대한 삼위일체적 이해
(John Owen's Trinitarian Understanding on the Atonement)

존 오웬(John Owen)의 신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내용 중의 하나이면서도 가장 논쟁이 되는 내용은 구속에 대한 그의 이해이다. 특히 오웬의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 있는 죽음의 죽음(The Death of Death in the Death of Christ)”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특별성 곧 구속의 제한성을 주장하는 책 중 가장 탁월하면서도 논쟁적인 책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저변에 흐르고 있는 구속에 대한 삼위일체적 배경에 대해 명확히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그것은 이 책이 가지고 있는 내용의 어려움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지금까지 이 책에 대해 역사적이며 신학적인 정황에서 이해하려는 노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로 이 책에서 옹오하고 있는 구속의 특별성은 이를 반대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나, 스콜라주의 혹은 극단적인 예정론에 기초를 둔 것으로 비판을 받아왔다.

그러나 이는 이 책의 내용에 대한 찬성을 하든, 반대를 하든 관계없이 존 오웬이 이 책에서 방법론적으로 사용한 스콜라주의나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대한 잘못된 이해와, 오웬이 이 책에서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구속에 대한 삼위일체적 이해에 대한 몰이해에서부터 나온 것이다. 사실 스콜라주의는 신학을 체계화하기 위해 사용된 방법이었다고 한다면,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나 용어는 성경의 진리를 설명하기위해 방법론적으로 사용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은 오웬의 신학에 있어서 보편타당한 진리체계로 혹은 방법으로 성경의 진리를 설명하기 위해 일반계시의 차원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의 진리를 왜곡하기 위해 사용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경의 진리를 설명하고 방어하기 위해 사용되었으며, 성경의 진리에 위배될 경우 언제든지 포기되었다. 이는 계시로서의 성경이 자연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연을 계시의 한계 내에서 오히려 효과적으로 사용하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오웬이 스콜라주의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지나치게 사용해서 성경의 계시를 넘어섰다면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구속에 대한 그의 논의를 살펴보면, 이 글에서도 나타나겠지만, 그에게서 스콜라주의나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은 극히 제한적으로, 상식선에서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남아있는 것은 방법의 문제가 아니라 내용이다. 이런 측면에서 오웬의 책의 내용을 반대하기 위해서는 그의 구속에 대한 삼위일체적 이해 자체를 반대하거나, 혹은 그의 구속과 관련된 성서해석의 오류에 대해 반대해야지, 그가 자신의 논의를 전개하기 위해 사용하고 있는 학문적 방법론 자체에 대한 비판은 논지에서 벗어난 것이다.

예정에 대한 그의 이해 또한 구속에 대한 그의 삼위일체적 이해 속에서 자연스럽게 이해될 때만이 보다 그 위치가 보다 분명히 들어 날 수 있다. 그리고 또한 이러한 비판은 오웬이 일찍부터 백스테리안주의와 아르미니안주의, 그리고 소시니안주의와 싸우는 과정에서 구속을 포함하는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삼위일체적 이해를 정립하기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가에 대해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거나 평가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오웬은 일찍부터 구속에 대한 정통주의적 이해에 대해 확신했으며, 이를 방어하기 위해서 구속에 대해 삼위일체적 관점에서 이해하고, 이를 기초로 보편구속에 대해 비판했다. 그러므로 구속에 대한 그의 삼위일체에 대한 이해는 구속에 대한 그의 견해를 명확히 이해하는데 필수적일 뿐 아니라, 그의 견해에 대한 찬성과 비판은 이에 대한 그의 이해를 전제할 때만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이 논문에서 오웬의 구속에 대한 삼위일체적인 이해에 대해 보다 심층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이 과정에서 보편구속을 반대하고 특별구속을 주장하는 오웬의 논리를 보다 분명히 알게 될 것이다.

이를 살펴보는 위해 필자는 그의 구속에 대한 역작인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 있는 죽음의 죽음”의 내용에 대해서 분석할 것이다. 이 책은 중요성과, 이 책과 관련된 많은 논쟁에도 불구하고 그 책의 구조와 내용에 대해 아직 명확한 해석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 논문은 이 책의 구조와 내용을 분석하고, 그 과정에서 오웬의 구속에 대한 삼위일체적 견해를 드러내는데 기여하고자 한다. 또한 이를 위해 필요할 경우에 그의 다른 책들을 참고할 것이다.


구속에 대한 계획과 수단과 결과

오웬은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죽음의 죽음”의 1권 1장에서 자신의 논의를 구속의 목적과 결과라는 관점에서 시작한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과 그가 실질적으로 성취하신 결과는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이 관계에 대한 명확한 관찰이 없이는 그리스도의 구속의 의미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논의의 배경이다.

그는 성경을 기초로 그리스도의 죽음의 목적은 택한 백성의 구원을 위한 것이었으며, 그의 구속의 결과는 그들의 실질적인 구원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분명히 밝힌다. 그런 다음에 그는 만일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의 구속을 위해죽으셨다면, 문제는 왜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지 못하는가를 묻는다. 그것은 결국 그리스도의 구속에 대한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계획이 잘못되었든가, 그렇지 않다면 그 구속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신 그리스도의 사역이 문제가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전자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과 완전하심을 무시하는 것이고, 후자는 그리스도의 사역의 가치를 무시하는 것이라고 오웬은 주장한다. 그런 다음에 2장에서 그는 자신의 논의를 분명히 하기 위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기초해서 목적과 수단과 결과에 대한 일반적인 관찰을 제시하고 성경의 논의와 연결시킨다.

이러한 오웬의 논의의 전개에 대해 알란 클리포드(Alan Clifford)는 오웬의 특별구속에 대한 논의는 성경에 기초를 두기보다는 아리스토텔레스철학과 스콜라주의와 극단적인 예정론의 논리적 적용의 결과라고 반박한다. 그 구체적인 증거로 그는 오웬이 목적, 수단, 결과와 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표현을 사용해서 논의를 전개시킬 뿐 아니라, 구속에 대한 계획과 그 결과라는 측면에서 문제를 본다는 것 자체가 오웬이 예정론을 논리적으로 구속론에 적용시키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고 제시한다.

그러나 이런 그의 주장은 먼저 오웬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과율과 그와 관련된 용어를 사용한다고 해서 그가 곧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액면그대로 받아들였다고 주장하는 것은 논리의 비약이다. 오웬과 같은 개혁주의신학자들은 물론 보편타당한 진리로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성경과 위배되지 않는 한 일반계시라는 측면에서 보다 긍정적인 면에서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성경의 진리를 보다 분명히 설명하기 위해 사용되고 있는 것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더 나아가 목적, 수단, 결과라는 표현들을 통해서 그가 이해하고자 하는 것은 구속에 대한 정확한 의미이다.

이는 심지어는 보편구속을 주장하는 리처드 백스터(Richard Baxter)와 같은 사람들도 자연스럽게 사용했던 표현들이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요점은 성경의 진리를 보다 분명히 표현하기 위해서 사용된 용어나 논리가 아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구속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과 그것에 대한 결과이다.

그러므로 오웬이 지금 묻고 있는 것은 하나님은 과연 모든 사람의 구속하시겠다
는 계획을 세우셨는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만일 그런 계획을 세우셨다면 왜 그 계획이 실패했는가 하는 것이다. 그 계획이 인간이 회개하고 믿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은 아무리 계획을 세우셔도 인간의 반응이 없다면 결국 그 계획을 포기하실 수밖에 없다는 논리이다. 이는 결국 하나님 전지하시며 전능하시며 완전하신 분이라는 정통주의적 신관을 포기하고 피조물의 반응에 의해 자신을 제한하는 하나님으로서 이해할 수밖에 없다.

오웬은 여기에 대해 이는 신성에 대한 모독이라고 반응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는 보편구속을 주장하게 되면 그리스도의 구속의 가치를 평가절하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다면, 그 죽음이 진정으로 모든 사람의 죄를 다 감당한 것이었다면 왜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는가라고 그는 반문한다. 그것은 결국 피조물의 반응에 의해 그리스도의 구속의 가치마저 절하되는 것이 아닌가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이러한 논의를 보다 객관화시키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기초한 목적과 수단과 결과에 대한 일반적 관찰을 시도한다. 이에 대해 이것이 바로 오웬의 자신의 논리의 궁색함을 보강하기위해 철학적 지지에 호소하고 있다고 주장한다면 이는 그의 생각과는 아주 동떨어진 것이다. 오히려 그가 시도하는 것은 보편구속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과 그리스도의 구속의 가치에 위배될 뿐 아니라, 보편타당한 논리체계를 기초로 해서 볼 때도 이는 타당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다. 물론 이런 그의 논의는 하나님에 대한 정통주의적 이해와 구속의 가치에 대한 그의 신뢰가 전제되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일 때 가능한 것이라는 것을 지적해야 한다.


구속과 삼위일체의 관계

구속의 목적, 수단, 결과라는 관점에서 특별구속의 타당성과 보편구속의 문제점에 대해서 지적을 한 오웬은 이제 더 나아가서 3-5장에서 구속의 의미를 보다 분명히 하기 위해 삼위일체와 관련해서 구속에 대해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을 제시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오웬이 왜 먼저 삼위일체에 대해 설명을 하지 않고 구속의 목적과 결과에 대해 먼저 이야기 한 다음에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속에 대한 경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을까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여기에서 이것이 바로 오웬이 예정론의 극단적인 적용을 통해서 특별구속을 도출해냈다는 결정적인 증거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오웬의 의도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결과이다. 오웬이 구속에 대한 계획과 결과에 대해 먼저 이야기하고 나서 구속에 대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경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방법론적으로 볼 때 다소 변증적인 자세에서 나온 것이다.

오웬은 보편구속은 하나님의 구속에 대한 계획과 그리스도의 구속의 가치를 생각해 볼 때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이론이라는 것을 먼저 선언한다. 이는 자신이 이 책을 통해 다루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 특별구속의 정당성과 이것을 기초로 아르미안이나, 소시니안, 그리고 더 나아가서 백스테리안들이 주장하고 있는 보편구속에 대해 비판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그는 보편구속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취약점을 먼저 지적해서 그것의 한계와 특별구속의 정당성을 보다 분명히 하고자 했던 것이다. 마치 상대를 공격할 때 그 상대의 가장 큰 취약점을 지적하면서 자신의 견해를 먼저 선언하고, 그 다음에 보다 구체적으로 문제를 풀어가는 것과 같은 논리이다. 이런 방법은 사실 중세의 교육 방법이었으며 자신이 대학에서 교육을 받았던 disputatio를 연상하게 한다.


또한 오웬의 논의의 방법은 구속의 특별성에 대한 자신의 주장은 단순히 한 교리의 논리적인 도출이나 혹은 철학적 잔재주를 통해서 얻어낸 것이 아니라, 성서를 기초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에 대한 깊은 묵상에서 나온 것임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사실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 다루고 있는 그의 다른 작품 “삼위일체론에 대한 간략한 논의와 방어(A Brief eclaration and Vindication of the Doctrine of the Trinity)”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이 책에서 먼저 삼위일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살피고, 그 하나님의 사역으로서 구속의 문제를 다음에 다루고 있다. 이는 오웬이 구속에 대한 자신의 이해를 삼위일체 하나님에 본질과 사역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구속이 결국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이며, 그러기 때문에 구속에 대한 이해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그 분이 어떻게 일하시는 가에 대한 이해를 기초로 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웬은 이면에서 특별구속을 주장했던 다른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논의와 한 노선에 서 있다. 후기 종교개혁 개혁주의 노선에서 쓰인 조직신학 책들을 살펴보면 그들은 한결같이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 다루고 그 다음 하나님의 사역으로서 구원의 원인적 근거로서의 예정과 더 나아가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작정을 기초로 구속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그들의 구속에 대한 논의가 기본적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기초로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오웬은 바로 이면에서 정확하게 이전이나 혹은 동시대 신학자들과 견해를 같이한다. 단지 우리가 논의하고 있는 책에서 오웬이 구속에 대한 계획과 수단과 결과에 대해 미리 말하고 있는 것은 앞에서 지적했든지 다소 변증적인 차원에서 나온 것으로 해석된다.


삼위일체 하나님과 구속

오웬은 구속과 관련된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에 관해서 상세히 논하기 전에 왜 자신이 구속을 성부와 성자와 성자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는지를 간단히 밝힌다. 그에 따르면 구속의 저자는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모든 외적인 사역은 분리되지 않지만, 그 사역은 위격의 질서에 따라 구분이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오웬의 논의에서 우리는 그에게 있어서 구속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구속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이라는 것은 그의 사역으로서 구속은 반드시 그분이 어떤 분이지에 영향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삼위일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에 대한 명확한 이해 없이, 그분의 사역인 구속에 대해 정확히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특별구속과 보편구속에 대한 이해의 차이는 단순히 구속의 범위에 대한 문제를 넘어서서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의 문제라는 것이다.

구속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이라고 할 때 이는 보다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모든 사역이 그러하듯이 구속은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있는 존재론적 질서에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구속에 대한 오웬의 삼위일체적 논의는 이러한 전제에 대한 이해가 없는 제대로 해석될 수 없다. 오웬은 우리가 다루고 있는 책에서 이 문제에 대해 간단히 언급하고 넘어가지만, 우리는 그의 다른 여러 책에서 보다 자세히 이 사실을 확인 할 수 있다. 그는 삼위일체 하나님 사이에 존재하는 질서에 대한 서구 기독교적 이해를 수용하여 이를 구속에 대한 이해에 적용시킨다. 삼위일체에 대한 서구교회의 전통적인 이론에 따르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본질상 한 분이시지만, 위격상 삼위로 존재하신다.

그런데 삼위의 하나님 사이에는 존재론적 질서가 존재한다. 성부는 위격의 원천이시며, 성자는 성부로부터 나오시는 분이시고(begotten),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발출되신 분이시다(proceeded). 그리고 이러한 존재론적 질서는 그가 하시는 모든 외적인 일에 영향을 미친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다루고 있는 구속도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으로 당연히 예외가 될 수 없다. 그런데 이렇게 삼위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는 질서가 있지만, 그들의 모든 사역은 하나님의 사역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외적으로 하시는 모든 사역은, 본질상 하나님은 한 분이시기 때문에, 분리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서로 위격의 차이와 존재론적 질서로 인해 구분될 수 있다. 이러한 삼위 하나님의 존재론적 질서로 인해 구속의 사건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사역으로 구분이 된다.

더 나아가 이런 삼위 하나님의 존재론적 질서에 기초한 구속과 관련된 하나님의 사역은 오웬에게 있어서 언약의 관계로 이해된다. 계속해서 그가 우리가 논의하고 있는 책에서 다룰 구속과 관련된 삼위 하나님의 사역은 바로 이 언약에 대한 이해를 전제로 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또한 오웬의 특별구속이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나, 스콜라주의나, 예정론의 극단적 적용의 결과라는 주장과는 달리 구속과 관련된 삼위일체 하나님의 언약의 관계에 대한 연구에서 나온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 오웬은 언약신학의 영향을 받아 구속의 문제를 삼위일체와 관련해서 구속언약(the covenant of redemption)과 은혜은약(the ovenant of grace)로 구분한다. 구속언약은 영원 속에서 구속의 문제를 놓고 성부와 성자사이에 맺어진 언약이다.

은혜 언약은 시간 속에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맺어지는 언약인데, 이 때 주된 역할을 하시는 분은 바로 성령이시다. 은혜 언약은 바로 성령을 통해 구속 언약이 구체적으로 사람에게 적용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속에 대한 이해는 바로 이 언약의 내용이 무엇이었는가에 기초한다. 또한 구속의 목적과 수단과 결과는 바로 구속 언약이 시간 속에서 은혜 언약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데 앞에서 암시했듯이 이 언약은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론적 질서에 기초해서 세워진 것이다. 구속언약이 성부와 성자사이에 맺어 진 것은 성자가 성부로부터 나오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성령은 바로 성부와 성자 모두에게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을 위한 성자의 구속사역에 초점이 맞추어진 구속 언약은 성부와 성자사이에 맺어진 것이다.

여기에 대해 성령이 빠진 것은 바로 삼위일체를 무시한 양신론적 태도라는 비판은 삼위 하나님 사이의 존재론적 질서에 대한 오웬의 의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결과이다. 더 나아가서 오웬에게 있어서 주로 구속언약에 기초한 택자의 실질적인 구원과 관련된 은혜언약은 성령을 통해서 바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맺어진 언약이라는 것은 성령이 존재론적으로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왔을 뿐 아니라, 그의 사역 또한 그 존재론적 질서에 따라 성부와 성자 사이에 언약으로 맺어진 것을 실질적으로 적용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은혜언약 또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론적 질서에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을 사전에 전제하고 났을 때 우리는 오웬의 구속에 대한 이해가 아리스토텔레스철학 기초한 스콜라주의나 혹은 극단적인 예정론의 논리적인 결과가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론적인 질서와 그에 기초한 구속과 관련된 경륜적 질서에 대한 깊은 묵상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구속과 관련된 성부, 성자, 성령의 사역

오웬은 보다 구체적으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모두 구속의 저자(agent or chief author)임을 밝히고 각 위격의 하나님의 자신들의 존재론적인 질서에 기초해서 어떻게 구속과 관련된 사역을 하시는지를 제시한다.

성부는 세 위격의 존재의 원천으로서 구속에 대해 계획하시고 이를 실행하시는 분이시다. 성부는 특히 성자와 관련해서 두 가지 일을 행하신다. 먼저 성부는 성자를 구속을 위해 세상에 보내시고, 그 다음으로 그 아들에게 죄에 대한 형벌을 부여하신다. 성부께서 성자를 구속을 위해 세상에 보내실 때, 아들에게 성부로서 중보자의 사역을 권위를 가지고 부여 하시며, 성자는 비록 본질상 성부와 동일하시지만,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자기를 낮추셨다.

그리고 성부는 성자께서 실질적으로 이 일을 실행하실 때 이를 실질적으로 진수(inauguration)하신다. 이는 성자의 탄생과 침례와 부활과 승천과 하늘보좌 위에 앉으시는 과정에 모두 나타난다. 그런데 성부께서 성자를 구속을 위해 세상에 보내실 때 성부와 성자 사이에 두 가지 약속이 맺어졌다.

성부는 성자를 자기가 택한 백성의 중보자요 구속주로 주셨다는 것과, 성부는 성자가 값을 치루고 산 은덕을 그를 믿는 택한 백성에게 주시겠다는 약속이다. 더 나아가서 성부는 성자께서 중보자요 구속주의 사역을 감당하는데 필요한 모든 은혜와 은사를 본질로서가 아니라, 위격의 관계에 따라 주신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완벽히 성취되도록 보호하고 후원하시겠다는 것을 언약으로 맺으셨다.

이렇게 성자를 세상에 보내시면서 성부와 맺어진 언약의 내용을 살펴볼 때 우리는 오웬에게 있어서 구속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택한 백성을 위한 것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구속은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성부께서 택하신 백성들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오웬은 이에 대해 그의 책 2권, 1-3장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이와 관련된 다양한 성경의 본문에 대한 주석을 토대로 성자의 구속의 목적은 자신을 위한 것도, 성부를 위한 것도 아니라, 잃어 버린자, 자기백성, 죄인들, 자기자녀들, 교회, 성부께서 자기에게 주신 자들을 위한 것이었음을 분명히 천명한다.

이는 그리스도의 구속은 하나님과 맺은 구속언약에 따라 오직 택한 백성들을 위한 것이었음을 성경의 주석을 기초로 밝히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구속의 목적이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한 것이 아니라 택한 백성을 위한 것이었다고 할 때 이것 자체가 예정론을 극단적으로 적용한 결과가 아니냐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이런 질문에 대해 우리는 오웬에게 있어서 구원의 긍극적인 원인은 분명히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이지만, 이 선택은 성부와 성자와의 존재론적 질서를 기초로 맺어진 언약으로 표현이 되었으며, 그러기에 우리는 그의 구속의 대상에 대한 하나님의 작정 또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질서와 경륜을 따라 이루어진 것이라고 대답을 할 수 있다. 이는 곧 선택을 이야기하기 전에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고, 그 분은 어떤 관계 속에서 일하시는 가의 문제가 선행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두 번째로 오웬은 성부께서 성자에게 죄로 말미암는 형벌을 부여하셨을 때, 그 형벌은 성부께서 성자와 언약 안에서 주신 택한 백성을 위한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형벌이 실질적으로 죄에 대한 형벌이었다면, 그 형벌의 실재성과 가치를 생각할 때 당연히 그 대상은 구속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그 형벌이 모든 사람이 모든 죄(all the sins of all men)을 위한 것이었다면, 당연히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아야 한다.

왜냐하면 성자께서 모든 사람의 모든 죄를 다 처리하셨다면, 당연히 모든 사람이 구속을 받은 것이고, 결과적으로 그들 모두가 구원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또한 그 형벌이 모든 사람의 일부의 죄(some sins of all men)나, 혹은 일부 사람의 일부의 죄(some sins of some men)를 위한 것이었다면, 그 누구도 구원을 받을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대상이 누구이든지 간에 그가 지은 모든 죄에 대한 형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형벌을 일부사람의 모든 죄(all the sins of some men)를 위한 것일 수밖에 없다. 그럴 때만이 우리는 구속의 실재성과 가치 모두를 확보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오웬의 논의를 생각해 볼 때 오웬은 이미 성부의 구속에 대한 계획과 더불어 성자를 통한 구속의 실재성과 가치를 동시에 생각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오웬의 특별구속이 예정론의 극단적 적용의 결과라는 주장의 근거를 뿌리째 흔든다.

왜냐하면 오웬에게 있어서 구속의 특별성은 구속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에 기초하고 있을 뿐 아니라, 구속의 실재성과 가치에 그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만일 오웬이 주장하고 있는 특별구속에 대해 비판하려면, 그의 선택에 기초한 구속언약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구속의 실재성과 가치에 대한 그의 생각 또한 비판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그의 구속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성부의 구속에 대한 계획과 성자의 실질적인 구속은 비록 구분이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웬은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구속의 저자이면서, 다른 위격의 하나님보다 더 두드러진 구속의 사역을 감당하시는 성자의 사역에 대해 다룬다. 그에 따르면 구속은 본질상 한분이기 때문에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이지만, 이는 오직 그리스도의 사역이다. 이 사역은 성부의 사역이 될 수도 없고, 성령의 사역이 될 수도 없다. 이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사이에는 위격의 구분과 질서가 있을 뿐 아니라, 그 위격의 질서에 따라 성부께서 바로 성자에게 부여하신 사역이기 때문이다.

구속과 관련되어 오웬이 지적하는 성자의 사역은 성육신(incarnation)과 수난(oblation)과 중보(intercession)이다. 여기에서 성육신은 크게 수난에 포함시켜 생각할 수 있다. 수난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백성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서 겪으신 모든 것이고(humilation), 중보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하늘 보좌 우편에 앉으셔서(exaltation) 자신이 수난을 받은 백성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성부의 계획에 따라 기도하는 것이다.

오웬은 그리스도의 이런 수난과 중보와의 관계에 대해 1권 6, 7, 8장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다룬다. 그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수난과 중보는 구분될 수는 있지만 분리될 수는 없다. 그리스도의 수난과 중보는 구속이 수단으로써 구속과 관련된 목적을 성취한다. 만일 이들이 구속에 대한 목적을 성취할 수 없다면 그것은 앞에서 지적했듯이 구속에 대한 목표가 잘못되었든지, 구속의 수단이 잘못되었든 지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모두는 받아들일 수 없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정말 모든 사람을 위해 수난을 받으셨다면, 그것이 참된 수난이었다면 모든 사람은 당연히 구원을 받아야 한다. 바로 그럴 때 그 수난은 참된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편구속은 그리스도의 수난의 실재성과 가치를 무시한다.

특히 오웬은 수난과 중보의 범위를 다르게 설정하여 성부의 택자의 선택과 성자의 보편구속을 동시에 주장하려는 백스테리안들에 대해 반대하면서 수난과 중보는 범위가 동일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백스테리안들은 수난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지만. 중보는 택한 백성들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결국 구원은 모든 사람들이 받지 않고, 성부의 선택과 성자의 중보를 기초로 오직 택자만이 구원을 받는 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이 땅에 오실 때 성자의 구속 혹은 수난의 목적과 성부의 구속에 대한 목적이 다를 뿐 아니라, 성자의 수난의 실질적인 가치를 무시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성부와 성자 사이의 능력과 지혜와 선하심을 무시하는 것일 뿐 아니라, 구속언약의 내용을 변질시키게 된다. 이에 오웬은 백스테리안들의 이런 난점들에 대해 비판하면서, 구속에 대한 성부의 선택과, 성자의 수난과 중보의 범위는 모두 동일하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바로 이것을 인정할 때 성부와 성자사이에 본질과 성품의 하나 되심을 인정하게 되기 때문이다.

오웬은 마지막으로 구속이 가능하도록 하며, 그 구속을 실질적으로 적용해서 구원에 이르도록 하는 성령의 사역에 대해 다룬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와 본질상 한분이시기 때문에 그들과 동일하게 구속의 저자이지만, 그의 역할은 성부와 성자사이에 맺어진 구속언약이 실질적으로 시간 속에서 성취되도록 일하시며, 더 나아가 그 언약이 은혜로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에게 적용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구원과 관련해 주도적인 역할을 하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이는 바로 성령이 성부와 성자로부터 발출되셨기 때문이다. 특별히 구속과 관련해서 오웬은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수난과 부활을 도우셨다는 것을 지적한다. 이는 성령께서 은혜언약의 저자로서 구속언약이 시간 속에서 구체적으로 적용되도록 성부의 계획에 따라 성자의 구속이 가능하도록 실질적으로 도우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구속의 범위와 관련해서 당연히 성령은 성부와 성자 사이에 맺어진 구속언약에 따라 이를 가능하게 하고 적용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성자의 선택과, 성자의 구속과 그 범위가 다를 수 없다. 만약 그 범위가 다르다면 이는 성부와 성자 사이에 의견의 불일치로 나타난다. 이것은 오웬 신학에서 신성모독죄에 해당되며, 받아들일 수 없는 이론이다.

이렇게 구속의 저자들로서 삼위 하나님의 각자의 사역에 대해 살피는 과정에서 보편구속은 받아들일 수 없는 이론이라는 것을 분명히 천명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오웬이 이 책에서 의도하고 있는 것은 비록 변증적인 차원이 분명이 있기는 하지만, 그보다는 그리스도의 구속의 의미와 그 범위에 대해 삼위일체적 관점에서 보다 분명히 드러내고자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그는 보편구속을 주장하는 이론의 허구성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비판하고 있다. 그의 결론은 간단하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속에 대한 사역을 연구해 볼 때 보편구속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이론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주장이 단순히 성경적 근거가 없이 논리적인 사색만으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성급한 판단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이론을 증명하기 위해 계속해서 자신의 주장에 대한 성경적 기초를 제공하고 있을 뿐 아니라, 계속해서 이어지는 그의 책의 3권은 보편구속을 주장하는 이론에 대한 반박으로, 그리고 4권에서는 구속과 관련된 성경구절들에 대한 세밀한 주석을 통해 자신의 이론을 옹호하고 보편구속에 대해 주석적 근거가 없음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가는 말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오웬에게 있어서 구속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이다. 그는 구속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삼위일체 하나님의 본질과 성품, 그 안에 존재하는 질서와, 그 질서에 기초한 성부와 성자사이에 맺어진 구속과 관련된 언약과, 그것의 실질적인 성취로서의 그리스도의 구속과, 그리고 구속에 대한 성령의 도우심과 실질적인 적용에 대한 성서에 대한 깊은 묵상과 연구를 통해서 얻어낸다. 이는 그 당시 보편구속을 주장하고 있는 아르미니안들과 소시니안들, 그리고 백스테리안들에 대한 신학적이고, 주석학적인 비판이었다.

특별히 그들의 이론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오웬은 삼위일체 하나님 사이에 존재하는 질서에 대한 서구교회의 이론을 받아들여 이를 구속에 대한 자신의 이해를 전개하는데 자연스럽게 사용한다. 이는 보편구속에 대한 그의 반대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본질과 질서와 사역에 깊은 이해와 묵상과 이를 뒷밭침하는 성경에 대한 주석학적 연구를 통해서 나온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특별구속에 대한 주장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기초한 스콜라주의나 혹은 예정론의 극단적인 적용에서 나왔다고 주장하는 것은 이들 자체에 대한 잘못된 이해 뿐 아니라. 오웬의 신학이 가지고 있는 삼위일체적 체계에 대한 잘못된 관찰에 기인한다. 특히 그의 구속에 대한 대작 “그리스도의 죽음의 종식”이 취하고 있는 변증적인 체계에 대한 잘못된 이해는 우리로 그의 삼위일체적 관점에서 바라본 구속에 대한 체계적인 이해를 간과하도록 한다.

1) 존 오웬은 17세기 명실상고 영국 최고 신학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의 책은 John Owen, The Works of John Owen, 24 vols. (London: Johnston and Hunter, 1850-53), repr. Edinburgh: The Banner of Truth Trust:1967)으로 남아있다. 이 논문에서 주로 다루는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 있는 죽음의 죽음”은 10권에 나온다.

2) 오웬의 특별구속이 아리스토텔레스철학에 기초한 스콜라주의와 예정론의 극단적 적용의 결과라고 주장한 사레로 다음과 같은 글을 보라: McLeod Campbell, The Nature of the Atonement and Its Relation to Remissions of Sin and Eternal Life (London: Macmillan and Co., Limited, 1915), 50-75; Alan C. Clifford, Atonement and Justification: English Evangelical Theology 1640-1790, An Evaluation (Oxford: Clarendon Press, 1990); R. T. Kendall, Calvin and English Calvinism to 1649 (Calisle: Paternoster, 1997); H. Rolston III, John Calvin versus the Westminster Confession (Richmond: John Knox Press, 1972); James B. Torrance, "The Incarnation and 'limited Atonement'", Evangelical Quarterly 55 (1982), 83-94.

3) 후기 종교개혁 개혁주의신학에서 철학의 사용에 대해 우리는 Bartholomaeus Keckerman의 “참된 철학은 거룩한 신학과 싸우지 않는다(vera philosophia cum sacra. theologia nusquam pugnat)”는 말을 기억해야 한다. 이 말은 신학과 철학은 혼합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신학은 철학이 보편타당한 진리를 가지고 있는 한 일반계시로서 성경이 허용하는 범위에서 철학을 방법론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Opera Omnia quae extant, Coloniae Alloburgum, 1614, 68. 후기 종교개혁 개혁주의 신학에서 신학과 철학과의 관계에 대한 보다 상세한 논의를 위해서는 Richard A. Muller, Post-Reformation Reformed Dogmatics, Vol. 1 (Grand Rapids: Baker Book House, 1987), 231-50; idem, "Vera Philosophia cum sacra Theologia nusquam pugnat: Keckerman on Philosophy, Theology, and the Problem of Double Truth" in Sixteenth Century Journal, IV(3) (1984), 341-65.

4) 철학이 방법을 넘어서서 신학의 내용에 영향을 주면서, 성경의 계시를 왜곡시킨 대표적인 예에 대해 Martin I. Klauber and Glenn S. Sunshine, "Jean-Alphonse Turretini on Biblical Accomodation: Cavinist or Socinian?", Calvin Theological Journal 25 (1990), 7-27을 보라.

5) 오웬의 특별구속이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기초한 스콜라주의나 극단적 예정론의 결과가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속에 대한 경륜에 대한 관찰에 기초한 것이라고 주장한 대표적인 학자는 Carl R. Trueman이다. 그는 그의 책에서 오웬에게서 사용된 스콜라주의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역할을 방법론의 차원에서 설명한다. 또한 그는 오웬이 아르미니안주의, 소시니안주의, 백스테리안주의와의 관계 속에서 어떻게 자신의 신학을 정립하는지 지적이며, 역사적인 정황 속에서 잘 설명해주고 있다. 그의 책 The Claims of Truth: John Owen's Trinitarian Theology (Carlisle: Paternoster Press, 1998), 9-19를 보라.

6) Owen, The Death of Death in the Death of Christ in The Works of John Owen, Vol. 10, 157-60.

7) Ibid.,

8) Clifford, Atonement and Justification, 95-98, 129.

9) 이에 대한 추가적인 논의에 대해 Trueman, The Claims of Truth, 34-44를 참고하라.

10) 여기에서 오웬의 표현을 직접 살펴보는 것의 그의 논의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Now, the master of this opinion do see full well and easily, that if that be the end of the death of Christ which we have from the Scripture asserted, if those before recounted be the immediate fruits and products thereof, then one of these two things will necessarily follow:-that either, first, God and Christ failed of their end proposed, and did not accomplish that which they intended, the death of Christ being not a fitly-proportioned means for the attaining of that end (for any cause of failing cannot be assigned): which to assert seems to us blasphemously injurious to the wisdom, power, and perfections of God, as likewise derogatory to the worth and value of the death of Christ; -or else, that all men, all the posterity of Adam, must be saved, purged, sanctified, and glorified; surely which they will not maintained, at least the Scripture and the woful experience of millions will not allow.” Owen, The Death of Christ, 159.

11) Owen, The Death of Christ, 163-79.

12) Disputatio는 quaestio와 더불어 중세대학에서 교육을 위해 사용하던 방법이었다. 이 방법은 조직신학에서 전형적으로 사용되었으며, 이러한 대표적인 예를 우리는 Aquinas의 Summa Theologica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이런 방법들은 종교개혁시대를 걸쳐 17세기 후기 종교개혁시대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므로 이런 방법들은 17세기 중, 후반에 Oxford에서 강의를 했던 오웬이 학생을 가르칠 때 흔히 쓰던 방법이었을 것이다. 참고로 Per Erick Persson, Sacra Doctrina: Reason and Revelation in Aquinas, trans, Ross Mackenzie (Oxford: Basil Blackwell, 1970), 3-11; David C. Steinmezt, “The Scholastic Calvin". Protestant Scholasticism: Essays in Reassessment, Carl R. Trueman & R. S. Clark ed. (Carlisle: Paternoster, 1997) 16-30.

13) Owen, A Brief Declaration and Vindication of the Doctrine of the Trinity in The Works of John Owen, Vol. 2, 377-13, 419-39.

14) William Ames, The Marrow of Theology, trans. John Dykstra Eusden (Grand Rapids: Baker Book House), 83-100; William Perkins, A Golden Chaine: or, the Description of Theologie in The Works of William Perkins, Vol. 1, (Cambridge, 1629), 11-16; Johannes Polyanderus, Andrea Van Rivetus, Antonius Wallaeus, Antonius Thysius, Synopsis Purioris Theologiae, (Leiden, 1682), VI-IX, XXIV; Turretin, Francis. Institutes of Elenctic Theology, Vol 1. Trans, James T. Dennison, Jr. (Philipsburg: P & R Publishing, 1992), 169-430.

15) Owen, The Death of Christ, 163 "The agent in, and chief author of, this great work of our redemption is the whole blessed Trinity; for all the works which outwardly are of the Deity are undivided and belong equally to each person, their distinct manner of subsistence and order being observed." 이 문제와 관련해서 Alan Spence, "John Owen and Trinitarian Agency" in Scottish Journal of Theology, Vol. 43, 157-73를 참고하라.

16) Owen, A Discourse concerning the Holy Spirit : The Works of John Owen, Vol. 3, 66-67, 91-94, 107-8; idem. A Brief Declaration and Vindication of the Doctrine of the Holy Spirit, 403-9.

17) Ibid.

18) Owen, An Exposition of the Epistle to the Hebrews: The Works of John Owen, Vol. 18, 42-97; idem, A Discourse of the Doctrine of the Holy Spirit, 207-42; idem, The Death of Christ, 236-38.

19) 로버트 리탐(Robert Letham)은 구속언약은 성령을 배제시키고, 종속설적인 경향이 보이며, 삼신론적 특징을 보이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의 책 The Work of Christ (Downers Grove: InterVarsity Press, 1993), 53를 보라. 흥미로운 것은 18세기 John Gill은 구속언약에 대해 은혜언약이라는 용어로 대체하고 여기에 성령을 참가시켜 삼위일체적인 구원관을 제시하고자 노력한다. 이러한 길의 노력은 구속과 관련된 언약인 구속언약을 구원과 관련된 은혜언약으로 확대해서 언약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용을 비교해 보면 실질적으로 17세기 언약신학과 다르지 않다. 오히려 이는 용어의 문제이며, 언약이라는 문제를 구속을 넘어서서 구원이라는 보다 폭 넒은 개념으로 이해하려는 시도로 보인다. John Gill, A Complete Body of Doctrinal and Practical Divinity, A New Edition (London, 1839), 214-25.

20) Owen, The Death of Christ, 163-174.
21) Ibid., 200-21.
22) Ibid., 171-74.
23) Ibid., 174-77.
24) Ibid., 179-200. 구속의 범위와 성격의 문제와 관련해 오웬은 백스터와 논쟁을 하였다. 이에 대해 그의 “Of the Death of Christ" in The Works of John Owen, Vol. 10, 435-79를 보라.
25) Ibid., 178-79.
26) Ibid., 236-424.




내용출처 : [기타] 박홍규교수 (침례신학대학교)





니케아 - 콘스탄티노플 신조와 바른 삼위일체론






김 명룡(장신대 교수)




서 언




기독교 교리 가운데 삼위일체론은 일반적으로 이해가 거의 불가능한 극난한 교리로 알려져 있다. 한국교회의 성도들 가운데 삼위일체론을 바르게 아는 사람들은 매우 적고, 많은 이들은 삼위일체론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다가 도저히 이해되지 않아서 포기하기도 한다. 삼위일체론은 정말로 이해가 안되는 그런 극난한 교리일까? 삼위일체론이 이해가 안되기 때문에 한국교회 안에는 이단적으로 보이는 잘못된 삼위일체론이 활개를 치기도 한다.




어떤 이들은 삼위일체론은 성서에 근거가 없고, 교회가 발전시킨 사변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셋이 하나가 되고 하나가 셋이 되는 그런 신관이 성서 안에 어디 있느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먼저 밝혀야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시다"라고 고백하는 것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셨다"( 고후 5:19)라고 전한 바울의 메시지가 삼위일체론 이라는 점이다. 삼위일체론이 성서와 관계 없는 고대교회의 사변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무언가 삼위일체론을 잘못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삼위일체론이 이해가 안되는 극난한 교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삼위일체론을 무언가 잘못 알고 있다. 삼위일체론은 사변도 아니고 이해가 안되는 극난한 어떤 교리도 아니다. 단지 우리에게 삼위일체론이 무언가 잘못 왜곡되어 전달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삼위일체론이 무엇이었는가를 이해하기 위해 먼저 삼위일체의 정통신조인 니케아 - 콘스탄티노플 신조 (381년)를 설명하면서 시작하고자 한다.




Ⅰ. 니케아 - 콘스탄티노플 (381년) 신조와 정통 삼위일체론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는 사도신조를 능가하는 권위를 지닌, 2000년 기독교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신조로, 또한 가장 정통적인 신조로 꼽히는 신조이다. 이 신조가 사도신조를 능가하는 권위를 지니는 이유는 사도신조는 동방 정교회가 인정하지 않는 서방교회만의 신조인데 반해서,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는 동서교회가 공히 가장 귀중한 정통신조로 인정하는 에큐메니칼 신조이기 때문이다. 한국교회 안에는 사도신조만 널리 알려져 있을 뿐, 이 정통신조 가운데 정통신조인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가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은 상당한 비극이며 바른 신학적 판단에 어떤 결함을 야기 시킬 수 있는 가능성과 연계될 수 있다.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는 무엇이 정통인가 이단인가를 판별하는 결정적 표준이고, 어떤 교회가 바른 신앙 위에 서 있는지를 규정지을 수 있는 결정적 권위를 가진 신조이다. 한국 장로교회 안에 널리 알려져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일부 장로교회의 신조로서 전 세계 교회라는 큰 시각에서 볼 때는 이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와는 그 권위에 있어서 큰 차이가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특별히 이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는 일명 삼위일체 신조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삼위일체론 연구에 있어서 결정적 시금석을 제공하는 신조인데, 이 신조가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는 것은 바른 삼위일체론 이해에 있어서 결정적인 결함을 야기 시킬 수 있다.




그러면 바른 삼위일체론 이해에 결정적인 이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는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의 신조일까? 우리는 바른 삼위일체론 연구를 위해 먼저 삼위일체론의 정통신조인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우리는 한 분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분은 전능하사 천지를 창조하시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지으신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는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분은 영원한 아버지로부터 나신 독생자로서 빛으로 오신 빛이시요, 참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참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피조 된 것이 아니라 나셨기 때문에 아버지와 본질이 동일하십니다. 만물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습니다. 그분은 우리 인류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하늘로부터 내려오사, 성령과 동정녀 마리아를 통하여 성육신 하셔서 인간이 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하여 본디오 빌라도에 의하여 십자가에 못박히시사, 고난을 받으시며 장사지낸바 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성경대로 사흘만에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하사 하늘에 오르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그분은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 위하여 영광 가운데 재림하시고 그의 나라는 영원무궁 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시고, 생명의 부여자이신 성령님을 믿습니다. 그분은 아버지로부터 나오시고, 아버지와 아들로 더불어 동일한 영광을 받으십니다. 이 성령님은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또한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교회를 믿습니다. 우리는 죄 사함을 위한 하나의 세례만을 인정합니다. 우리는 죽은 자들의 부활과 장차 임할 세상에서의 영생을 바라봅니다.




위의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에서 우리가 유념해야 할 것은 "우리는 한 분 하나님을 믿습니다"와 "우리는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분은 … 참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참 하나님입니다" 와 "우리는 주님이시고 생명의 부여자이신 성령님을 믿습니다 그분은 … 아버지와 아들과 더불어 동일한 예배와 영광을 받으십니다"라는 중요한 세 하나님에 대한 고백이다. 즉 이 신조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믿고 있는 것 (우리는 하나님께서 한 분이라고 믿고 있다) 과는 너무나도 다르게 하나님께서 세 분이심을 고백하고 있다. 이 신조의 첫째 단락은 성부이신 하나님에 대한 고백이고, 둘째 단락은 성자이신 하나님에 대한 고백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참 하나님으로 고백하기까지는 무수한 신학적 논쟁과 이단과의 투쟁이 있었다. 325년의 니케아 공의회는 참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께만 적용시키고 예수 그리스도는 성부 하나님 보다 열등한 어떤 존재로 보려고 했던 아리우스(Arius)파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예수 그리스도는 성자이시며 참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참 하나님으로 선포했다. 즉 니케아 공의회는 성부 하나님만이 영원 전부터 존재했던 유일한 하나님이라는 아리우스파의 일신론을 부정하고 성부 하나님과 똑같은 신성을 지닌 또 한 분의 하나님이신 성자가 계시고 이 성자가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선포한 것이다. 381년의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는 325년의 니케아 신조의 성자에 대한 고백을 그대로 이어받았고 이를 선포하고 있다. 325년의 니케아 신조와 381년의 콘스탄티노플 신조 (니케아 신조와 콘스탄티노플 신조를 합해서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조라 칭한다) 사이의 중요한 차이는 성령에 대한 고백이다. 위의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를 보면 셋째 단락에서 성령에 대해 "아버지와 아들과 더불어 동일한 예배와 영광을 받으십니다"라고 고백하고 있다. 이 고백이 콘스탄티노플 신조의 독특한 고백이다. "아버지와 아들과 더불어 동일한 예배와 영광을 받는다"는 표현은 성령께서 성부와 성자와 똑 같은 권능과 위엄과 신성을 지닌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는 표현이다. 즉 콘스탄티노플 신조는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외에 성령이신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고백하면서 이 성령이신 하나님은 성부나 성자에 열등한 어떤 신이 아니고 신성에 있어서 똑같은 권능과 위엄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전 세계 교회에서 가장 권위 있는 정통신조인 니케아 - 콘스탄티노플 신조는 한국교회 성도들의 일반적인 믿음과 생각과는 달리, 하나님께서 세분이심을 선언하고 있다. 즉 성부이신 하나님이 계시고 즉 성자이신 하나님이 계시고 성령이신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선포하면서 이 세 분 하나님의 특성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이 신조는 이 세 분 하나님께서 한 분이라고 어느 곳에서도 서도 선포하고 있지 않다. 정통 삼위일체론의 결정적인 신조인 이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는 하나님께서 세 분이심을 강력하게 선포하고 있을 뿐 하나님께서 한 분이라고는 조그마한 암시도 주고 있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고대교회에서 일신론은 언제나 이단이었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그것이 역동적 일신론이든 양태론적 일신론이든 일신론은 언제나 이단이었고 기독교의 정통신앙을 위태롭게 하는 것이었다.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조는 끊임없이 도전해 오고 정통신앙을 위태롭게 했던 일신론 이단을 물리치고 하나님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계시는 세 분 하나님이심을 만천하에 공포한 신조였던 것이다.




Ⅱ. 하나의 본질(우시아)과 세 실체(휘포스타시스)로서의 삼위일체 하나님




325년의 니케아 신조와 381년의 콘스탄티노플 신조 사이에 362년의 알렉산드리아(Alexandria)회의에서 고대교회의 삼위일체론의 초석을 놓은 중요한 항목이 결정되는데 기본도식은 "하나의 본질(우시아)과 세 실체(휘포스타시스)"였다. 이 기본 도식에서 "휘포스타시스"라는 희랍어는 개체를 뜻하는 말인데 곧 하나님은 세 분이시라는 말이었다. 362년의 알렉산드리아 회의는 하나님께서 세 분이라는데 조금도 의심이 없었다. 그러면 "우시아"라는 말은 무엇일까? 이 "우시아"라는 말은 본질 (nature)을 뜻하는 말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본질이 같은, 즉 동일한 신성을 지닌 하나님이라는 말이었다. 362년의 알렉산드리아 회의는 325년의 니케아 회의에서 결정된 성부와 성자 사이의 "호모우시온"(동일본질) 사상을 이어받으면서 이"호모우시온"을 성령이신 하나님께도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




381년의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의 삼위일체론은 알렉산드리아 회의의 결정의 연장선상에 있는 삼위일체론이다. 즉, 하나님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계시는데(세 하나님), 이 세 하나님은 동일한 신성과 위엄과 권능을 지닌 하나님이라는 것이었다.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가 규정하는 정통 삼위일체론은 하나님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계시는데 이 세 하나님은 같은 하나의 본질(우시아)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 까닭에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와 본질이 동일하십니다"라고 선언하고 있고, 성령이신 하나님은 아버지와 아들과 신성과 위엄에 있어서 동일하시기 때문에 "아버지와 아들과 더불어 동일한 예배와 영광을 받으십니다"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를 만드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동방교회의 정통신학자들의 삼위일체론은 몰트만( J. Moltmann)에 의하면 사회적 삼위일체론이었다. 사회적 삼위일체론이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신 세 하나님께서 상호간의 사귐을 통해 하나됨을 유지하는 사귐의 삼위일체론을 뜻하는 말이다.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의 배후에는 바실( Basil), 니사의 그레고리 (Gregory of Nyssa)와 나치안즈의 그레고리 (Gregory of Natianz)와 같은 위대한 신학자들이 있었다. 우리는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가 있도록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의 배후에 있는 동방교회의 정통신학자들을 캅파도키아 교부들이라 부른다. 이 캅파도키아 교부들 가운데 맏형격인 바실은 세 분 하나님의 일체성을 세 하나님의 코이노니아 (koinonia) 개념으로 표현하려고 시도했다. 나치안즈의 그레고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가족형의 유비로 표현하려고 노력했는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사귐은 지상의 인간의 가족 사이의 사귐과는 물론 무한한 차이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위일체 하나님의 가장 가까운 지상적 유비는 아담-하와-셋이라는 가족이었다고 가르쳤다.




캅파도키아 교부들은 세 하나님의 일체성을 세 하나님이 괴상한 방식으로 한 분이 되신다는 식으로는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즉, 오늘의 한국교회 성도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3=1의 교리가 고대교회에서는 삼위일체론의 초석을 놓은 캅파도키아 교부들의 머리 속에는 존재하고 있지 않았다. 또한 이 3=1의 교리는 삼위일체론의 정통신조인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 속에도 존재하고 있지 않다.




Ⅲ. 페리코레시스(침투 혹은 순환)로서의 세 하나님의 하나되심




362년의 알렉산드리아 회의의 삼위일체론의 기본도식인 "하나의 본질(우시아)- 세 실체(휘포스타시스)"라는 표현은 성부, 성자, 성령으로 계신 세 하나님은 동일한 신성과 권능을 지닌 같은 하나님이심을 선포한 신조였다. 그러면 이 세 하나님의 하나되심은 어떻게 되는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하나되심에 대해 결정적인 표현을 한 고대교회의 삼위일체론의 교부는 다메섹의 요한이었다. 요한은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으로 계시고, 이 세 하나님은 본질이 같으신 하나님 이신데, 이 세하나님은 상호 침투(페리코레시스)와 함께 하심으로 하나됨을 유지하고 계신다고 가르쳤다. 이 상호 침투(페리코레시스)와 함께 하심의 의미는 예수께서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다"(요 14:7-11 참고)고 언급한 말씀에 기초하고 있는 것으로, 성부와 성자의 하나됨은 성부가 성자이시고 성자가 성부이시기 때문이 아니라, 성자는 성부 안에 계시고, 성부는 성자와 함께 계시고 성자 안에 계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요한에 의하면 성부는 성자와 함께 계시고 성자 안에 계신다. 이런 까닭에 아들을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고 아들이 행하시는 일은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일과 동일하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요 14:11). 즉 삼위일체 하나님의 일체성의 신비는 다메섹의 요한에 의하면 성부가 성자 안에 거하시고, 성자가 성부 안에 거하시고, 또한 함께 계시는 하나님의 존재의 페리코레시스적 양태를 의미하는 것이다. 성부가 성자 안에 거하시는 양태는 성자와 성부가 성령 안에 거하시는 양태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페리코레시스 (perichoresis)라는 말의 원래의 뜻은 "윤무"라는 말에서 유래 된 말이다. 그것은 무대에서 무희들이 손을 맞잡고 원형의 춤을 추는 것에서 기인된 말이다. 예컨데 남자 무용수와 여자 무용수가 손을 맞잡고 원형의 춤을 출 때 두 무용수는 사람은 분명 둘이지만 하나의 춤과 하나의 연기와 표상을 만드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부와 성자께서 만드시는 사역이 그러하다는 의미이다. 희랍의 신들은 페리코레시스적 존재가 아니었다. 희랍의 여러 신들은 상호 간의 갈등과 투쟁과 싸움으로 얼룩져 있다. 그러나 성서의 하나님은 세 하나님이시지만 그들은 사랑의 깊은 사귐으로 성부는 성자 안에 계시고, 성자는 성령 안에 계시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와 안에 계신다. 즉 성서의 하나님은 페리코레시스적 양태를 지닌 존재로, 독자의 길을 걷는 세 신들이 아니고 하나이신 하나님이다.




Ⅳ. 터툴리안(Tertullian)의 삼위일체 도식의 신학적 오류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를 중심으로 하고 있는 삼위일체의 정통적 신조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계시는 세 하나님의 모습을 분명히 하고 있는 반면, 하나님께서 한 분이라는 표현은 나타나고 있지 않다. 즉, 하나님은 세 분이신데 하나로 존재한다는 것이 원래의 정통적 삼위일체론의 도식이었다.




그런데 왜 오늘날 우리들은 삼위일체론을 생각 할 때 언제나 세 하나님께서 한 분이 되시는, 즉 3=1의 교리를 삼위일체론이라고 믿고 있을까? 이를 알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터툴리안의 삼위일체 도식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터툴리안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언급 할 때 "한 본체(숩스탄티아)와 세 인격(페르조나)"으로 표현했다. 이 표현에서 한 본체란 말은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는 말이다. 그리고 세 인격이라고 표현되고 있는 라틴어의 "페르조나(persona)"는 사실은 인격으로 번역하면 안되는 말인데, 왜냐하면 '페르조나'는 터툴리안이 살던 시대에는 개체성을 지닌 한 인격체를 의미하는 단어가 아니었고, 무대에서 배우가 어떤 역할을 할 때 그 역할을 지칭하는 표현이었다. 즉 어떤 배우가 왕으로 분장해서 왕의 역할을 할 때 그때 이 '페르조나'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그러므로 이 '페르조나'는 가면이라는 말로도 번역이 가능한 단어였다. 따라서 터툴리안의 삼위일체론의 도식을 다시 번역하면 "한 본체 (숩스탄티아)와 세 역할(페르조나)" 이 된다.




하나님께서는 한 분이신데 세가지 얼굴을 갖고 세가지 역할을 한다고 한다면 이는 이미 고대교회가 이단으로 규정한 양태론 이단에 매우 근접하고 있는 표현이다. 사실상 터툴리안의 삼위일체론은 양태론의 매우 어두운 그림자를 느낄 수 있는, 문제가 많은 삼위일체론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터툴리안의 삼위일체론은 유감스럽게도 서방교회의 삼위일체론의 초석이 되었는데, 이는 어거스틴(Augustinus)이 터툴리안의 삼위일체론을 이어받아 발전시키면서 서방교회의 삼위일체론의 기둥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어거스틴도 하나님은 한 분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고, 세 하나님께는 독자적인 개체성을 부여하기 보다는 한 분 하나님의 내적 분리를 통해 상호간의 관계에 있어서만 아버지이고 아들이고 성령이시다고 가르쳤다.




터툴리안의 삼위일체론은 20세기에 들어와서 칼 바르트(K.Barth)와 칼 라너(K. Rahner)라는 신구교의 신학의 대가들이 그대로 이어 받았다. 바르트는 터툴리안의 삼위일체 도식에서의 '페르조나'는 계몽시대 이후의 개체성이 들어 있는 의미의 인격이 아니었고, 단지 역할이라는 의미로 터툴리안 시대에 쓰이고 있었다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이런 까닭에 바르트는 삼위일체 도식을 "한 인격체(Person)와 세 존재양태(Seinsweise)”로 표현했다. 바르트가 표현한 세 존재양태는 터툴리안의 세 '페르조나'를 오늘의 독일어로 옮겨 놓은 것이었다. 바르트에 이어서 라너는 더욱 터툴리안의 표현에 가깝게 삼위일체 도식을 “한 인격체(Person)와 세 본체의 양태(Subsistenzweise)”로 표현했다. 이것은 터툴리안이 한 하나님을 하나의 본체로 표현한 것에 유래되고 있는데, 세 분 하나님을 한 하나님의 본체가 드러나는 세가지 양태로 표현한 것이다. 바르트와 라너의 삼위일체 도식은 터툴리안의 삼위일체 도식의 20세기적 발전인데, 모두 양태론의 그림자를 벗기 어려운, 문제가 많은 삼위일체론 이었다.




서방교회의 삼위일체론은 고대교회의 터툴리안에서 20세기의 칼 바르트와 칼 라너에 이르기까지 양태론적 성향의 삼위일체론의 하나의 흐름이 존재하는 반면 또 하나의 삼위일체론의 중요한 흐름이 있는데 그것은 3=1의 교리를 삼위일체론으로 보는 흐름이다. 이 흐름은 터툴리안에서 어거스틴으로 이어 내려오는 하나님은 한 분이라는 사고와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와 동방교회의 캅파도키아 교부들에 의해 주장된 하나님은 세 분 이시다는 사고를 종합한 것인데, 종교개혁자 칼빈(J. Calvin)에게서 뚜렷이 나타나고 오늘에 있어서는 스코틀랜드의 개혁파 신학자 토랜스(T. F. Torrans)와 독일 프라이브르그(Freiburg)의 카톨릭 신학자 그레스하케(G. Greshake)에게서 명백히 살펴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3=1의 교리는 언뜻 보기에는 동서교회의 삼위일체론을 종합한 가장 훌륭한 삼위일체론으로 보이지만, 내용상으로는 종합될 수 없는 두 개의 사고를 합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결국 삼위일체론을 이해 할 수 없는 교리로 만들어 버렸다. 하나가 셋이 되고 셋이 하나가 되는 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 할 뿐만 아니라 진리도 아니다.




서방교회의 삼위일체론의 근본적 문제는 그것이 양태론적 성향의 삼위일체론이든, 3=1의 교리를 주장하는 삼위일체론이든 동서교회가 공히 고백하는 가장 귀중한 정통신조인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에 위배된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니케아-콘스타티노플 신조는 모든 형태의 일신론과 대립되어 있는 삼위일체적 신조인데, 서방교회의 삼위일체론은 두 개의 흐름 모두 하나님은 한 분이라고 고백하는 일신론의 터전 위에 있기 때문이다.




Ⅴ. 삼신론에 대한 잘못된 이해




한국교회 내에서는 하나님은 한 분이라고 말하면 정통이고 하나님은 세 분이라고 말하면 이단이라고 보는 생각이 팽배해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고는 바른 사고도 아니고 정통신조에 입각한 사고도 아니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서방교회의 전통 안에는 하나님이 한 분이라고 말하는 것이 당연시 되고 바른 고백인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 서방교회 신학의 삼위일체론의 전제가 전 세계교회의 정통신조인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와 충돌되고 있다는 점을 깊이 유념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또 하나 유의해야 하는 것은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를 만들었던 캅파도키아의 교부들이 그들의 대적이었던 일신론자들에 의해 끊임없이 삼신론자라는 비판을 받았다는 점이다. 몰트만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삼위일체 신학의 토의들에서 삼신론의 비난은 사실적 근거를 갖고 있지 않다. '세신들'에 관한 이론을 대변한 기독교 신학자는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 비난은 먼저 고대의 아리우스파가 행했던 비난이었고, 그 다음에는 정통 기독교에 대한 이슬람의 비난이었다. 그 후에 이 비난은 동방교회 신학에 대한 서방교회의 비난이 되었고, 오늘날 그것은 자신의 현대적 양태론을 숨기는 데에 봉사하고 있다. 이슬람 유일신론의 전망에서 볼 때, 모든 기독교 신학자들은 - 어거스틴 혹은 토마스, 바르트 혹은 칼 라너, 판넨베르그 혹은 그레스하케 등 - '삼신론자' 들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하나님 되심을 고수하며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라 부르기 때문이다.




몰트만이 말한 것처럼 이슬람의 유일신관에서 보면 모든 기독교 신학자들과 기독교회들은 삼신론자들인 것이다. 왜냐하면 기독교 신학자들과 기독교회들은 성부 하나님 외에 성자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이신 하나님을 언급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양태론적 이단의 눈으로 볼 때는 정통 삼위일체론은 언제나 삼신론이다. 그리고 삼신론은 언제나 하나님이 한 분이라고 주장하는 아리우스파를 비롯한 일신론 이단들이나 양태론적 이단들이 삼위일체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공격하기 위해 사용했던 가공의 이론이었다는 몰트만의 주장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는 삼위일체론의 정통신조에서 이탈한 서방교회가 삼위일체론의 정통신조를 유지하고 있었던 동방교회를 비판한 이론이었다는 점도 유념해야 할 것이다. 바른 삼위일체론은 한 쪽에는 일신론과 다른 한 쪽에는 삼신론을 두고 그 가운데를 선택하는 3=1의 교리가 아니고, 성부, 성자, 성령이신 세 분 하나님께서 페리코레시스적 삶인 상호 내주와 함께 하심을 통해 하나됨을 유지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독특한 삶과 존재방식을 설명하는 교리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신 하나님은 상호내주와 함께 거하심으로 하나이시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께서는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 10:30)라고 말씀하셨다.




결 언




"성령이신 하나님은 다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와 같은 표현을 우리는 한국교회 내에서 자주 듣게 된다. 그런데 이 표현은 일신론 이단으로 흐르는 표현이고, 양태론의 검은 그림자를 느낄 수 있는 표현이다. 바른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령 안에 거하시고 성령 안에서 우리를 만나신다는 표현이다. 성령과 예수 그리스도는 다른 분이시다. 그러나 우리는 성령을 통해, 성령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령 안에 거하시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성령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를 만난다. 이런 의미에서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시고 "그리스도의 영"(롬 8:9) 이시다.




삼위일체론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혼동하기 위한 교리가 아니다. 성부가 성자가 되고 성령이 성부가 되는 괴상한 교리가 삼위일체론이 아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인격적 개체성을 위협하는 삼위일체론은 모두 잘못된 삼위일체론이고 이단적인 삼위일체론이다. 사과는 하나지만 껍질과 속과 씨가 있듯이 하나님은 한 분이시지만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계신다는 표현 역시 잘못된 삼위일체론의 비유이다. 위와 같은 비유는 일신론의 위장일 뿐이다. 위와 같은 비유가 삼위일체의 비유로 한국교회 안에서 자주 언급되는 것은 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철저한 일신론적 사고가 한국교회를 지배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성부 하나님을 믿고,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이신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은 이미 이슬람과 같은 일신론의 이교적 사상을 떠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역사적으로 볼 때 삼위일체론은 일신론과의 투쟁과 대립을 통해 형성된 교리였다. 그것은 일신론과 삼신론의 중간에 있는 교리가 아니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똑같은 하나님이심을 강조하려는 교리였다. 그것은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와 오순절 이후 성령의 경험을 통해 얻게 된 세 분 하나님에 대한 인식과 경험이 바탕이 된 교리였다. 그런 까닭에 삼위일체론은 성부 하나님의 경험밖에 없는 유대교의 일신론과 근본적으로 구별되는 기독교의 독특한 신관이었고, 이런 까닭에 초대교회는 성부와 성자가 성령의 이름으로 곧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었다.













칼빈의 하나님/인간의 관계이해: 변증법적인가 아니면 삼위일체론적인가 ?




칼빈의 관심은 신약성경의 본래적인 경륜적-삼위일체론적 관심과 니케아 신학자들의 동기를 재발견, 요약한 것이었다[1]. 스콜라신학은 삼위일체론을 먼저 주어진 성경적 진술, 교부들의 주장, 철학적 명제들을 기정 논리에 의거하여 공리적인 의미로 사용하는 연역적인 방식으로 전개하려는 경향을 드러낸다. 이와 대조적으로 칼빈은 귀납법적인 방식, 곧 신약성경 주석의 자료들과 거기에서 성부, 성자, 성령에 대해 계시된 사실로부터 출발하여 하나님의 세 위격들의 단일성에 대한 논의를 위해 필요한 성경적, 성경외적인 일반화로까지 나아갔다. 삼위일체론을 체계적으로 전개함에 있어서 칼빈은 단일한 신적 본질(ousia)과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위격(hypostaseis)의 관계에 대한 전통적인 교부들의 이해를 깊이 받아들였다. 그는 비록 삼위일체 안의 상대적인 `질서'를 인정하긴 했지만, 존재론적 종속설이나, 양태론에 대한 어떤 혐의도 주지 않으려고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2]



그는 삼위일체적 위격(hypostaseis)들에 대해 말하고 있는 신약성경의 경륜적 관점들에 대해 일차적으로 관심을 가짐으로 현대신학자들이 말하는 바 내재적 삼위일체에 관한 것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경륜적 사역에 대해 말하고 있는 성경본문에서 명확히 반영되어 있지 않는다면, 그것에 대해 분명하게 유보적 입장을 취했다. 또 다른 한편으로 칼빈은 opera Trinitatis ad extra communia(indivisa)라는 어거스틴의 언명이 경계하려고 했던 기능적 양태론으로 전락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경륜적 사역은 세 위격들 모두의 통일된 사역이라고 주장했다. 칼빈은 성경에 계시된 대로 하나님의 인간과의 경륜적-삼위일체론적 사역이라는 렌즈를 통해서만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인식론적인 접근이 가능하다고 이해했다.



구원에 대한 칼빈의 삼위일체론적 이해를 지배하고 있는 신약성경 주석적 관심은 삼위일체론을 교리적으로 최종적으로 공식화한 니케아 신학자들의 전례와 뚜렷한 연속선상에 있는 것이다. 니케아 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제네바의 지도자 칼빈에게 있어서 전체적인 기독교적 비젼을 위한 삼위일체론적 페러다임이 불가피하고 규범적이었던 이유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구원사적인 사역을 충실하게 말하기 위함이었다. 니케아 신학자들의 삼위일체론적 확신은 철저하게 경륜적인 것이었다. 곧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사적인 관계에 대한 관심이었다. 그러므로, 초대교회가 가진 핵심적인 삼위일체론적 관심들은 인간 구원이 삼위일체되신 하나님께 있으며, 또 삼위일체론이 기독교의 신앙, 예배, 삶에 대한 깊은 함의를 주제로 삼은 것이다. 칼빈에게 있어서 삼위일체론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구속사적인 관계 전체의 뿌리와 유형과 동력으로 이해되었다.



Philip Walker Butin에 의하면 칼빈은 니케아 신앙고백을 작성한 신학자들의 심원(深原)한 관심에 가장 철저하게 충실한 신학자였다.[3] Timothy George는 칼빈의 삼위일체론적인 관점 속에 담긴 성경주석적, 교부신학적, 구원론적 관심을 다음과 같이 간명하게 요약했다: " 칼빈에게 있어서 삼위일체론이 왜 그다지도 중요하게 다루어지는가 ? 그는 추상적 신학의 형이상학적 정밀함에 연연해하지 않았고, 전통적 표현들에 맹목적으로 매이지도 않았다. 칼빈에게 있어서 삼위일체론이 결정적으로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증거이고 또 그렇기에 그에 의해 획득된 구원의 확실성에 대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칼빈이 전개한 삼위일체론의 목적은 아타나시우스의 경우와 같이 구원론적인 것이었다. 칼빈은 성경의 메시지, 곧 "하나님께서 육체로 현현(顯現)하셨다는 메시지를 잘못된 해석들에 맞서서 변호하기를 원했던 것이다."[4] 1539년판과 이후의 기독교 강요 개정판에서 칼빈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상호내주(περιχορησις)에 대한 고전적 동방교회의 표현으로 간주되고 있는 Gregory Nazianzen의 유명한 다음 문장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분과 통일에 대한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나는 세 분의 광채(光彩)로 재빨리 에워싸이지 않고서는 한 분을 생각할 수 없다; 또한 한 분에게로 곧바로 다시 돌아가지 않고서는 세 분을 식별할 수 없다".[5] 비록 칼빈 자신은 περιχορησις란 단어를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이와 매우 유사한 개념들을 사용함으로 하나님의 통일성을 설명하려고 했다. 칼빈의 요한 복음 주석은 세 위격들의 통일성에 대한 상호내주적인 접근(perichoretic approach)을 보여주고 있다. 성령에 의하여 그리스도 안에 참여함으로 신자들은 하나님의 생명에 περιχορησις한다고 칼빈은 말한다.



이러한 칼빈의 철저한 삼위일체론적 관심, 그것도 성경적, 구원론적, 경륜적 삼위일체론적 관심에 대한 앞에서의 논의를 통해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인간에 대한 관계문제이다. 삼위일체론적 색채에 깊이 물든 칼빈신학과는 달리 후대의 칼빈주의에 와서는 이러한 원색적인 삼위일체론이 퇴색된 이유로, 삼위일체론적 관계성보다는 일반적, 철학적 신론에 근접한 변증법적 관계성이 두드러지게 되었다고 판단된다. 부틴에 의하면 칼빈연구가들은 칼빈신학의 전면에 두루 흐르고 있는 삼위일체론적 관심을 평가절하하는 경향이 있지만, 삼위일체론은 칼빈신학에 있어서 하나의 패러다임의 위치에 있다.[6] 일찍이 칼 바르트는 교회교의학 I.1에서 삼위일체론을 철저하게 삼위일체론적 표현으로 하나님의 자기계시로 전개한 다음 하나님/인간의 관계를 기독론으로부터뿐 아니라 보다 포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자기계시의 삼위일체론적 성격으로부터 해명하려고 했다.



부틴에 의하면 칼 바르트의 이런 삼위일체론적 하나님/인간의 관계성은 칼빈 이후의 개혁주의 전통에서 강조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삼위일체론적 이해가 19세기의 개혁주의 전통과 칼빈해석에서 상당 부분 무시되었기에 칼빈의 삼위일체론적 지평을 재평가해야 된다고 부틴은 바르게 주장한 바 있다.[7] 지난 200년 동안 칼빈해석가들은 하나님/인간의 관계성에 대한 칼빈의 입장을 과격하고 반립적, 양극적인 변증법적 관계로 해석해 왔다.[8]그러나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관계는 칼빈에 의하면 철저한 삼위일체론적 패러다임의 지평 위에 서 있는 것이었다[9] F. Wendel과 같은 가장 권위있는 칼빈연구가들조차도 칼빈의 변증법적 해석을 그의 신학의 본질로, 하나님의 절대적 초월과 인간에 대한 그의 "절대적인 타자성"을 본질적인 원리들로 생각했다.



그의 피조물로부터의 무한한 거리를 유지하시면서 어떠한 하나님/인간의 혼합도 허락지 않는 극단적인 구분의 관계로 하나님/인간의 관계는 종종 묘사되었다. 변증법적인 finitum non capax infiniti라는 명제가 경륜적-성경적 삼위일체론적 humanitas capax divinitatis per accommodationem보다는 종종 앞서서 강조되었다. 그러나 펠라기우스에 대항해 타락한 인간과 의로우신 하나님 사이의 무한한 질적인 차이를 강조한 어거스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칼빈은 의로우신 하나님과 죄악된 인간본성에 대한 이러한 변증법적, 반립적 관계는 하나님/인간에 대한 일시적인 묘사이지, 결정적인 것은 아니다.



칼빈이 사도신경의 삼위일체론적 구조를 따라서 자신의 기독교 강요를 저술했다는 구조적인 측면에서도 칼빈의 삼위일체론이 하나님/인간의 관계의 기초, 형태, 동력에 대한 전포괄적인 페러다임을 제공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10] 우리는 앞에서 논의한 바와 같이 원색적 삼위일체론적 지평이 점차적으로 퇴색되어감에 따라 하나님/인간(세계)의 관계도 점차적으로 변증법적 관계로 나아갔다고 본다. 이러한 변증법적 관계로 인해 개혁주의의 "인간의 전적부패교리는 인간은 가치가 없으며 어떠한 선도 행할 수 없다"는 오해와 "개혁주의 신앙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부정적, 율법주의적 접근을 조장한다"는 오해를 가져왔다.[11]



칼빈주의의 삼위일체론적 페러다임을 깊이 회복해야한다. 한국 칼빈주의 교회현실에서도 하나님/인간의 관계는 반립적, 변증법적으로 이해되고 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는 구호 아래서 참된 휴머니즘으로서의 복음이 간과되고 있는 교회현실은 비삼위일체론적, 일반적인 유신론적 하나님/인간의 관계규정에서 나온 것이다. 한국 칼빈주의 교회는 보다 삼위일체론적인 관계규정으로 이러한 현실을 교정해야 한다.



5) 현대신학의 삼위일체론의 재발견



초대교부들이 사용했던 테올로기아의 개념은 중세를 지나 근대에 접어들면서 그 의미가 달라지게 되었다. 근대의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의 영향으로 테올로기아는 더 이상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에 대한 존재론적인 질문을 소홀히 하게 되었고 슐라이허마허의 신앙론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인간 자신의 신앙에 관한 논의로 변했다. 서구철학이 존재론에서 후퇴해서 인식론과 언어철학으로 축소된 것처럼 신학도 시대철학의 영향을 극복하지 못했다. 신학은 그 고전적인 의미가 퇴색되어 종교학, 신앙론, 종교철학, 인간구원론, 정치사회적 이데올로기로 되어버렸다. 헬라철학적 존재론에 대한 혁신과 혁명으로 패러다임 전이와 같은 영향력을 행사했던 신학은 칸트 이후 근대신학에 접어들어서는 시대정신을 극복하지 못하고 칸트철학적인 불가지론이라는 먹구름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오면서 신학의 다시금 자기정체성을 회복하기 위한 노력을 시작한다.



거룩하신 삼위일체되신 주님에 대한 지식으로서의 테올로기아, 가장 거룩하고 경건한 하나님지식 속에 가장 진보적인 세계비판이 존재한다는 혁신된 사고가 회복된 것이다. 신학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송영을 그 본질로 삼는다. 신학은 그 본질에 있어서 삼위일체론적이다. 그러나 삼위일체론적 신학은 인간구원과 세계평화, 사회정의을 떠나서 영지주의적, 신비주의적인 신지식으로 도피하자는 것이 아니다. 성삼위일체 하나님의 삶 속에 세계문제에 대한 답변이 모두 존재한다. 해방신학자 보프에게서는 치열한 정치사회적 프락시스와 경건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송영은 공존한다. 발트 카스퍼에게는 고전적 삼위일체론이 현대 철학적 무신론에 대한 답변으로, 몰트만에게서는 생태학적 위기와 신정론의 답변으로서, 군톤에게는 서구 개인주의/집단주의의 딜레마에 대한 해결책으로 제시되고 있는 점은 삼위일체론적 신학은 가장 경건하면서도 가장 진보적인 세계비판이 된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우리가 삼위일체론적 신학으로 회귀하는 이유는 후기현대의 시대적 유행처럼 고대에 대한 낭만적인 향수 때문도 아니요, 역사비평적 성경연구법의 후기시대 속에서 교회의 자기비판으로서의 현대신학적 개념을 모두 버리고 교회성만을 찬양하는 자기안일로 도피하지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가장 비판적이기 위해 가장 겸손해지고 경건해져야 한다. 교회가 진실되게 교회다울 때 그것은 어떤 켐페인과 프로그램보다도 가장 강력한 사회비판이 될 수 있는 것처럼 신학이 가장 신학다울 때 그 어떤 복잡한 인간학적, 종교학적, 정치사회적 논의 보다도 더 진보적이게 된다. 현대의 다양한 주제신학, 상황신학들은 삼위일체론적 신학 속에서 해소되는 것이 아니라, 지양된다. 삼위일체론적 신학은 결코 또 하나의 현대신학적 유행이 아니다. 서구의 번역신학으로 머물고 있는 한국신학이 입수하게된 또 하나의 유행신학이 아니다. 모든 것을 토착화시켜야만 한국적이 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어슬펀 시도 보다 모든 민족들이 성령 안에서 가져야 할 참된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삼위일체론적 신학은 목표한다.



카스퍼의 평가에 의하면 서구 근대사상은 삼위일체론적 신앙고백의 파괴의 역사였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삼위일체론을 재구성하려는 시도의 역사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삼위일체론을 재구성하려는 시도는 신학에서보다는 근대 철학에서 발생했다. 그 대표적 인물은 헤겔이다. 그러나 헤겔의 철학적 삼위일체 이해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비와 은폐성을 삼켜버렸다. 헤겔은 신학전통에서 그 동안 오랫동안 잊혀졌던 삼위일체론의 종말론적 차원을 되살렸다. 즉 성자가 성부에게 그의 나라를 넘기실 때 하나님은 모든 것 안에 모든 것이 되실 것이다(고전 15:28). 그러나 삼위일체론은 헤겔의 절대정신이라는 추상적 개념이나 사랑이라는 필연적인 개념으로부터 추론, 증명할 수는 없다. 삼위일체론은 엄밀한 의미에서 신비(mysterium stricte dictum)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 삼위일체론적 지평의 재발견에 있어서 헤겔철학의 일종의 촉매역할을 했다고 본다. 무엇보다도 현대의 삼위일체론의 재발견의 개신교와 카톨릭의 칼 바르트와 칼 라너에게서 이루어졌다. 토마스 F. 토런스는 칼 바르트와 칼 라너가 이룩한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논의없이도 독립적으로 한 분이신 하나님을 말할 수있다는 중세 카톨릭적, 계몽주의적 이원론적으로 왜곡된 전통을 고전적인 동방교부들의 삼위일체 이해를 재발견, 재강화함으로서 결정적으로 교정했다는 점이다. 즉 고전적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앙고백의 원색적 삼위일체론을 회복함으로 다시금 기독교 신학의 모호한 주변으로 밀려난 삼위일체론을 기독교 신학의 근본적 문법이라는 중심적 위치를 회복시켰다는 것이다[12] 칼 바르트와 칼 라너는 una substantia-tres personae라는 전통적 공식으로부터 출발하지 않았다. 곧 그들은 하나님을 전통적인 방식처럼 본체로서가 아니라, 주체, 곧 자기계시의 주체(바르트)와 자기전달의 주체(라너)로 새롭게 이해했다.



그러나 우리는 바르트는 신적인 주체를 강조하는 관념주의적 사변적 삼위일체론을 수용함으로 결국 삼위일체성보다 하나님의 통치를 앞세우고 이 하나님의 통치에 있어서의 신적이 주체성에 대한 보장과 해석을 위해 삼위일체론을 사용함으로 일종의 기독교적 유일신론으로서 삼위일체론을 제시했고 삼신론에 대한 강한 경계의식으로 인해 양태론적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고 평가한 몰트만의 입장이 옳다고 본다.[13] 물론 군톤의 주장처럼 바르트가 비록 양태론적 경향을 지닌다는 혐의를 충분히 벗어나지는 못한다하더라도 그를 양태론자로 부를수는 없다. 우리가 그를 비판하는 것은 그가 양태론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현대 개인주의의 폐허로부터 인격에 대한 관계적 이해를 회복하는데 미흡했다는 사실에 있다.[14] 바르트의 철저한 삼위일체론적 이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남아있는 독일 관념주의적 잔재와 서방신학의 한 분 하나님에 대한 강조를 몰트만은 동방신학과의 대화로부터 비판했다.



그는 성경적 증거에 근거하면 세 위격으로부터 출발하게 되고, 절대적인 단일성이라는 철학적 요청과 철학적 논리에 근거한다면 한 분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하게 된다고 말함으로 다소 강한 어조로 자신의 서구전통을 비판했다[15]. 몰트만은 하나님의 한분되심은 절대적, 폐쇄적, 배타적 단자적 단일성이 아니라, 자신을 나누어줄 수 있는 하나됨, 열려있고, 초청하고, 통합할 수 있는 하나됨이라고 표현했다. 몰트만 신학의 방법론적 과격성에도[16] 불구하고 그의 바르트 비판과 삼위일체론적 역사이해는 신선하면서도 도전적인 통찰로 평가할 수 있다. 곧 삼위일체 하나님의 세 위격들의 한분되심은 단일한 본질로 전제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바르트의 주장처럼 하나님통치의 동일성 혹은 라너의 경우처럼 자기전달의 동일성에 의해서 추가적으로 비로소 확보되는 것도 아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통일성은 오직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교제를 통해서 이미 주어진 사실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본질의 동질성 혹은 절대적 주체의 동일성에서가 아니라, 삼위일체의 세 위격들 사이에 존재하는 상호내주적인 하나됨에서 발견해야 한다.



칼 라너에게 있어서 삼위일체론의 출발점은 바르트와는 달리 하나님의 주체성이 아니라, 인간의 주체성이라는 인간학적인 동기로 착상되어 있다. 이는 그가 삼위일체의 신비를 철저하게 구원의 신비로 이해하려고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에 의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자유롭고 절대적인 자기전달의 사건이다’”. 그러나 바르트가 삼위일체론으로 하나님을 절대적 주체로 주제화함으로 인간의 주체성이 위협을 받는 것과 같이, 칼 라너는 인간의 주체성을 주제화시킴으로 말미암아 삼위일체 하나님 당신이 위협을 받게 되었다. 카스퍼는 칼 라너의 경우 인간 구원을 강조된 나머지 삼위일체께 대한 송영이 약화되었다는 비판을 한다.[17] 하인리히 오토는 라너에게는 아직도 사변적 잔재가 남아있어서 삼위일체 하나님 앞에 서있는 `실제적'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전달의 `가능적' 수취인으로서의 인간에서 출발함으로 보다 철저하게 계시의 실제성에서 출발하지 못했다고 비판한다(S. 340).[18]



또한 칼 라너의 유명한 공리는 "경륜적 삼위일체는 내재적 삼위일체이며, 그 역으로도 해당한다"이다.[19] 칼 바르트도 이와 유사한 표현을 했다.[20] 카스퍼는 경륜적 삼위일체론은 곧 내재적 삼위일체론이라는 공리는 결국 인간의 구원이 하나님과는 구별되는 피조된 선물일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자신을 나누어 주신 하나님 자신이라는 사실을 의미한다고 풀이한다.[21]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행하신 우리를 위한(pro nobis) 하나님의 구원행동은 곧 하나님 자신의 행동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22]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자신을 주신 계시사건은 결코 배후에서 일어난 숨어계신 하나님(Deus absconditus)의 어떤 흐릿한 주변이나 나머지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계시된 하나님(Deus revelatus)은 곧 Deus absconditus라는 구원사적 진리를 말함이다. 또한 구원은 성자께서 이루신 것인데, 이는 성령 안에서 성부께서 자신을 우리에게 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과 딸들이 되는 것이다. 곧 은혜는 성령 안에서의 자유로운 하나님의 자기전달이라는 사실을 말함이다. 몰트만은 십자가신학을 삼위일체론적으로, 삼위일체론을 십자가신학적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그의 기본입장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구원경륜적 삼위일체론에만 국한시키고 내재적 삼위일체론과의 연관을 상실한 전통적인 경륜적/내재적 삼위일체론의 구분을 비판했다[23].



내재적 삼위일체론과 경륜적 삼위일체론을 동일시하는 것은 구원역사적 경륜적 삼위일체론의 독자성을 흐리게 한 나머지, 영원한 내재적 삼위일체론의 단순한 시간적 현현 정도로 이해할 수 있는 오해의 여지를 가지고 있다. 그럴 경우 성자의 성육신을 통해 구원역사적으로 이루어진 세상 속으로의 시간적 파송과 성부로부터의 영원한 출생은 거의 구별되지 않은 채, 성자께서는 성육신을 통해 역사 속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간과하게 된다. 또한 반대로 내재적 삼위일체론이 경륜적 삼위일체론에 흡수된 나머지, 마치 영원한 삼위일체께서 역사 가운데서 처음으로 또한 비로소 역사를 통하여서 규정된다는 식의 오해를 일으킬 수 있다.



그럴 경우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원으로부터의 세 위격들간의 구분은 기껏해야 양태적인 것이며, 역사 속에서 비로소 실제적으로 규정되었다는 오해가 나올 수 있다[24] 그러므로 내재적 삼위일체론과 경륜적 삼위일체론의 동일성은 A=A라는 동어반복적인 의미로 이해되어져서는 안된다. 경륜적 삼위일체론은 내재적 삼위일체론`이다'라는 공리에서 `이다'는 결코 동어반복적인 동일성이 아니라, 구원역사적(경륜적)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나타난 자유롭고 은혜롭고 역사적인 내재적 삼위일체 하나님의 현존이라는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카스퍼는 칼 라너의 그 테제를 다음과 같이 교정했다: "구원역사적인 자기수여 안에서 내재적 삼위일체 하나님의 자기수여는 새로운 방식으로 세계 안에서 현재한다"[25]. 카스퍼는 이 새로운 테제는 내재적 삼위일체론에 대하여 경륜적 삼위일체론의 은혜롭고 자유로우며 케노시스적인 성격을 보호하며, 삼위일체 하나님의 자신의 자기계시 안의(배후가 아니라 !) 내재적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비를 올바르게 이해한다고 말한다[26] Y. Congar도 칼 라너의 이 테제의 절대성을 강하게 제한한다. 특히 `umgekehrt'이하의 뒷 문장은 보다 정교한 주의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자기수여로 자신의 `모든' 신비를 관련시켜 계시했는가 ?"라고 그는 질문한다[27]



Congar는 라너의 테제를 충실히 발전시킨 Piet Schoonenberg을 비판하면서 인식(認識)의 영역에서 존재론의 영역으로 비약하는 한에 있어서 'umgekehrt'는 문제가 된다고 말한다.[28] 또한 경륜 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자기수여는 낮추심, 비하, 섬김 곧 Kenose의 상태로 일어났기에 경륜적으로 계시된 삼위일체론과 영원한 삼위일체론의 구분을 침해하지 않기 위해서는 둘 사이에는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카스퍼와 Congar의 지적대로 칼 라너의 이 테제를 불필요한 오해로 비판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뒷 문장에 대해서는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할 것이다.[29] 그러나 무엇보다도 칼 바르트와 칼 라너를 비롯한 현대 삼위일체론적 신학자들에게서 도전받아야 할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내면적 삶(내재적 삼위일체론)을 교회사의 낡은 기념물 정도로 방치하는 자세에 대한 비판적 자세다. 하나님 본질의 불가침성과 신비를 축소시키지 않는 범위 내에서 신학은 성삼위일체되신 하나님의 내면적 삶을 외면적 구원계시에 근거해 탐구해야 한다.[30] 신학이 경계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내면에 관한 칸트적인 불가지론과 함께 개인주의적 구원에 집착한 나머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대한 실용주의적인 무관심이다. 이런 의미에서 현대신학은 비록 지나치게 하나님의 내적인 삶에 대해 너무 쉽게 말하고 너무 많이 알고 있는것처럼 보이지만, 테올로기아의 고전적 사명을 재발견하여 발전시켰다고 본다.



6) 동방신학의 삼위일체론적 지평의 재발견



"오라, 민족들아 !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께 경배하자 !" 동방신학은 구원론적인 죄용서로부터가 아니라 삼위일체론과 그리스도의 신인되심으로부터 출발한다. 삼위일체 신비의 계시야말로 동방신학에서 신앙의 모든 신비 중에서 가장 근본적인 신비이다[31] 서방신학에서는 삼위일체론은 기독교 복음의 정수를 농축한 것으로가 아니라 논리적, 수학적 난제를 포함한 하나의 문제로 간주하는 경향으로 흘러 점차적으로 삼위일체론이 의문시된 데 반하여 동방신학과 예배는 줄곧 삼위일체론적 범주들로 채색되어 있다. 서구신학에서는 삼위일체론은 마치 정통신학을 인정하기 전에 힘겹게 넘어야만 하는 일종의 지적인 허들로 간주되었던 것이다[32] 삼위일체의 신비를 맛보는 것은 권위있는 삼위일체 성화에서 뿐 아니라, 기도와 예배를 통해 끊임없이 이루어진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체험은 무엇보다도 예배문서를 통해 이루어진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영광을 돌릴찌어다"라는 예배언어는 끊없이 반복된다. 예배의 시작에서부터 삼위일체 하나님께 대한 부름이 자리잡고 있다: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하나님,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우리를 정결케 하소서, 주(主)여, 우리의 죄악을 사하소서, 우리의 통치자여 우리의 범죄를 사하소서, 우리의 연약함을 돌아보소서, 거룩하신 주님,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를 고치소서". 이와 함께 아침예배문서에는 항상 "Triadikon", 곧 삼위일체론을 찬양으로 발전시킨 구절을 반복한다[33]. 동방교회에는 삼위일체론적 송영으로 시작되지 않고 끝나지 않는 기도가 없다. 동방교회의 기도는 또한 언제나 성령의 능력 가운데서 일어남을 강하게 부각시킨다[34]. 이런 기도와 송영과 예배에서의 성령의 사역을 강조함으로 동방교회는 서방신학의 그리스도일원론(Christomonismus)의 위험을 경계하고 있다[35].



서방신학에서처럼 동방신학에서는 성부의 진노와 성자의 사랑이 분열된 채 대립하지 않는다.[36] 삼위일체 하나님의 본질은 사랑이다. "성부의 사랑은 성자를 십자가에 못박는 사랑이며, 성자의 사랑은 십자가에 못박힌 사랑이며, 성령의 사랑은 십자가의 능력으로 승리하는 사랑이다. 그러므로 동방신학은 고난받을 수 없는 하나님의 고난이라는 서구신학의 자기모순을 반성할 수 있는 신학적 차원을 가지고 있다. 이는 서구신학에서처럼 철학적, 일반적 유신론 혹은 유일신론의 일반범주의 영향 아래 그리스도의 고난을 구원론적, 기독론중심주의적으로만 제한하여 보는 것이 아니라, 보다 폭넓고도 철저하게 성경계시의 경륜에 근거하여 성령론적 차원과 삼위일체론적 차원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자기사건으로 파악한 것이다. 동방신학과 같이 고난받지 않는 신의 공의로운 세계통치라는 아프리오리한 일반종교적 범주에서 자유로와지고 삼위일체론적으로 스스로 고난받으시는 성경계시의 경륜의 아포스테리오리에 충실해질때만이 세계고난의 의미에 대해서 하나님 자신의 답변을 듣게 된다.



동방신학은 세 위대한 갑바도기아 신학자들에 의지해서 삼위일체의 하나됨을 구체적, 체험적, 인격적으로 기초시킨다: Christos Yannaras에 의하면 동방교회는 존재에 대한 인격의 우위를 강조한다: " 하나님께 대해 말할 때 동방교회는 언제나 보다 구체적인 것, 곧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곧 인격적 관계의 하나님을 말한다"[37]. Christos Yannaras는 서구신학이 신앙과 삶을 단절시켜 하나님을 경험할 수 없는 오지로 추방했다고 비판한다.[38] 이에 반해 동방신학은 체험의 신학을 강조한다. Karl Chistian Felmy에 의하면 동방신학에서 이 체험은 경건주의에서처럼 회심이라는 개인적 신앙체험을 의미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교회, 예배, 세례와 성찬, 신비, 기도, 수도를 통한 체험, 곧 교회성이라 할 수 있다[39].



경건주의 신학과 경건이 개인적 구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개인적 관계로부터 시작되는데 반하여 동방신학의 체험은 철저하게 삼위일체론적 신학 아래서 구체적인 삼위일체 하나님의 세 위격으로부터 시작한다.[40] 동방신학은 끊임없이 삼위일체 하나님께 대한 송영과 예배, 기도와 찬양의 흐름 속에서 전개된다. Yannaras는 마틴 하이데거를 인용하면서 서방신학적인 사변적 신개념을 비판하고 있다: "자기 원인(causa sui)으로서의 신은 기도할 수도 예배드릴 수도 없는 신이다.



Causa sui라는 신앞에서는 우리는 경외함으로 무릎을 꿇을 수도 없고 음악으로 찬양할 수도 춤출 수도 없는 것이다"[41]. 이에 반해 동방교부들과 이를 계승하는 동방신학은 철저하게 인격적인 하나님인식을 가르쳐왔다.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관계는 주체와 객체의 관계가 아니라, 히브리어 와 같이 사랑의 관계이다. 세계와 하나님의 관계를 인격적인 사랑의 관계로 보지 않고 비인격적, 기계적으로 주체와 객체, 원인과 작용으로 본다면 하나님은 세계로부터 단절, 추방되어지고 세계는 독립하게 된다. 사실 서방신학은 동방신학만큼 성경적, 경륜적 삼위일체론적 신학전통에 충실하지 못하였고 자연신학적, 일반적 유신론, 유일신론적 범주와의 불운한 조우를 하게 되었다.[42] 동방신학에 있어서 성경계시에 드러난 세 위격은 케류그마의 대상으로서 신학적 사유와 도그마의 대상인 세 위격의 통일성(Monarchie)보다 선행한다.



서방신학은 비인격적, 사변적, 철학적, 일반적 하나님/세계의 관계를 낳게 되었다. 이런 점에서 서방신학은 동방신학의 삼위일체론적 세계관을 통해 도전을 받고 반성되어야 할 것이다.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의 관계로 정립되지 않은 지성주의적인 합리적 추론으로 도출된 하나님/세계의 관계는 주지주의적인 객관화와 효용성과 연루된 합목적성의 노예가 되고 만다. 서구신학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직접적인 인격적인 체험과 만남의 신앙을 삶으로부터 추방하게 되고 철학적 개념 혹은 상징적 표상으로 환원하게 됨으로 세속화를 가져오게 되었다는 동방신학의 비판은 정당한 것이다.[43] 러시아 종교철학의 세 가지 특징, 곧 기독교적 특징, 인격주의적 특징, 공동체적 특징은 분명 물질주의적, 개인주의적, 비기독교화되어 있는 서구정신과 철학에 큰 도전과 날카로운 비판이 되는 것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므로 러시아 종교철학은 서구 철학전체에 하나의 충분하가도 필수적인 대안이 되는 것이다.[44]우리는 서구의 탈기독교화, 세속화 과정은 원색적인 삼위일체론적 색채를 퇴색시킨 非삼위일체론화 과정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현대 서구신학의 당면한 반기독교적, 탈기독교적 세속화의 위기는 바로 원색적인 삼위일체론적 차원의 재발견을 통해서 해결되어야 하며 해결될 수 있다고 본다. 사실 현대신학이 전통적인 유일신론을 반성하고 새롭게 철저히 구원역사적, 구원경륜적인 관점에서의 삼위일체론을 재발견하게 된 것은 교회연합운동을 통해서 동방신학과 접촉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동방신학의 성령론적, 삼위일체론적, 예전적, 신비적, 송영적 색채에 서방신학은 깊이 도전을 받았다. 그러므로 이 생태학적 문제에 대해서도 동방신학의 성령론적 관점은 하나의 실마리를 충분히 제공할 수 있다고 본다. 몰트만의 경우 바로 동방신학적 전통에 대한 수용으로 사회적 삼위일체론을 통한 생태학적 답변을 시도했던 것이 그 예이다. 이미 칼빈도 동방신학에 대한 깊은 조예를 가지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 칼빈은 동방교회에 더 가깝다 할 수 있다. 부틴은 칼빈의 삼위일체론이 가지고 있는 동방교회와의 관련성을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통상 동방교회적인 삼위일체론적 사고방식으로 간주되는 내용들과의 칼빈의 이런 유사성이 있다고 해서 칼빈이 삼위일체론에 대한 동방교회적 혹은 헬라적 접근법을 의식적으로 수용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칼빈 자신의 역사적, 문화적 지평의 한계로 볼 때 특히 그러하다. Perichoresis(circumincessio)교리도 갑바도기아 신학자들의 다른 부분둘과 같이 칼빈 이전 시대에 이미 서방 전통의 삼위일체론의 다양한 형식 안으로 수용되었었다.



그러나 칼빈을 위시한 종교개혁자들은 새롭게 준비된 갑바도기아 신학자들과 다른 동방교회 신학자들의 본문들을 접근할 수 있었다. 16세기의 반니케아적 논쟁으로 인해 동방교회의 삼위일체론적 이해의 몇몇 부분들에 대한 새로운 논의가 일어났던 것이다. 그렇지만 칼빈에 대한 동방신학자들에 영향은 결코 적은 것이 아니었다. 핵심적인 부분에서 동방교회 전통과 평행된 강조를 칼빈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그의 삼위일체론의 형성을 지배했던 귀납법적인 성경주석법이었다. 물론 이런 유사성들이 지나치게 과장되어서도 안되겠지만 기존의 서방신학 전통에 대해 현격하게 독립되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은 확실하다"[45](Butin, p,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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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Philip Walker Butin, Revelation, Redemption, and Response-Calvin's Trinitarian Understanding of the Divine-Human Relationship, Oxford University Press, 1995. p. 49. 이런 점에서 칼빈은 동방교회에 더 가깝다 할 수 있다. 그러나 "관습적으로 "동방교회적"인 삼위일체론적 사고방식으로 간주되는 내용들과의 칼빈의 이런 유사성이 있다고 해서 칼빈이 삼위일체론에 대한 동방교회적 혹은 헬라적 접근법을 의식적으로 수용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칼빈 자신의 역사적, 문화적 지평의 한계로 볼 때 특히 그러하다. <Perichoresis, circumincessio>교리는 갑바도기아 신학자들의 다른 부분둘과 같이 칼빈 이전 시대에 이미 서방 전통의 삼위일체론의 다양한 형식 안으로 수용되었었다. 종교개혁자들은 새롭게 준비된 갑바도기아 신학자들과 다른 동방교회 신학자들의 본문들을 접근할 수 있었다. 16세기의 반니케아적 논쟁으로 인해 동방교회의 삼위일체론적 이해의 몇몇 부분들에 대한 새로운 논의가 일어났던 것이다. 그렇지만 칼빈에 대한 동방신학자들에 영향은 결코 적은 것이 아니었다. 핵심적인 부분에서 동방교회 전통과 평행된 강조를 칼빈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그의 삼위일체론의 형성을 지배했던 귀납법적인 성경주석법이었다. 물론 이런 유사성들이 지나치게 과장되어서도 안되겠지만 기존의 서방신학 전통에 대(對)해 현격하게 독립되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은 확실하다"(ibid., p, 45).


[2] Butin, ibid., p. 41


[3] Ibid., p. 48


[4] Ibid., p.48에서 간접인용


[5] Ibid., p. 42


[6] Ibid., p. 26


[7] Ibid., p. 6


[8]. Butin, 1. Reassessing Calvin's Understanding of the Divine-Human Relationship 중에서 Calvin's View: Dialectical or Trinitarian ?을 참고하라.


[9]. Ibid., p. 39. Butin은 상당히 자세하게 칼빈에 대한 새로운 교회사적 평가논의를 통해 이 명제를 논증하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Calvin's View : Dialectical or Trinitarian ? (pp. 15-25)를 참고하라. 물론 우리는 Moltmann의 입장을 따라서 하나님/인간의 관계 뿐 아니라 하나님/자연(창조)라는 보다 넓은 지평까지도 철저하게 삼위일체론적 관계성으로 볼 것을 요청한다.


[10]. Jan Koopmans(Das Altkirchliche Dogma in der Reformation), Werner Krusche(Das Wirken des Heiligen Geistes nach Calvin)은 이에 대한 고전적인 저술들이다(ibid., p. 19에서 간접인용).


[11]. 이 오해는 I. John Hesselink, On Being Reformed - Distinctive Characteristics and Common Misunderstandings, Servant Books, Ann Arbor, Michigan, 1983에 나오는 오해(7)과 오해(8)이다.


[12] Torrance, ibid., p. 4


[13] Moltmann, a.a.O., S. 159


[14] Gunton, ibid.,p.124


[15] Moltmann, a.a.O., S. 167


[16]. 방법론적 과격성이라 함은 몰트만의 신학적 관심에 원론적으로 동의하면서도, 다만 지나친 극단화를 염려하는 입장을 표현하기 위함이다. H. Berkhof, W. Pannenberg보다 더 나아가 몰트만은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하나님 자기 자신 안의 역사'로 주장한다. 그러므로 역사의 의미는 성부, 성자, 성령으로서의 하나님의 자기개현에 있고 하나님의 자기역사는 모든 세계역사의 핵이며 역사의 역사(Geschichte der Geschichte)이다. 죄와 죽음으로 물든 모든 인간의 역사는 이 `하나님의 역사' 곧 삼위일체 속에 `지양되며(aufgehoben)', 하나님의 역사의 미래 속에서 통합된다. 그러나, 세계로부터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세계를 이해하는 몰트만의 사고는 세계의 구체성을 손상시키며 역사를 하나님의 자기발전의 운동으로 협착화시키는 위험을 잠재적으로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J. T. Bakker, Een nieuwe theologia crucis, Tijdschrift voor theologie, 1988. 6.. pp.150-155). Kasper의 비판대로 Moltmann은 지나치게 헤겔철학적 방식으로 하나님을 인간죄악의 역사로 해소(解消)시켜 버린 나머지, 하나님의 즉자적, 대자적 존재(Gottes An-sich- und Für-sich-Sein), 곧 내재적 삼위일체와 세계고난사(苦難史)와의 구별을 사실상 흐리게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럴 경우 하나님은 결국 인간의 한 계기(Moment)로 흡수되고 말 것이다(Kasper, a.a.O., S. 86). 이러한 몰트만 신학에 대한 비판을 깊이 염두해 둔다하더라도 몰트만의 입장이 만유내재신론적이거나 헤겔철학적이라고는 보지 않는다.


[17] Kasper, a.a.O., S. 368


[18]하인리히 오토는 라너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실제로, 구속사적으로 발생한 계시에 근거해서 삼위일체론을 구성했다는 의미에서는 사변적이라 할 수는 없지만, 그가 이 계시의 실제성의 내적이고 초월적인 필연성을 주장함에는 충분히 사변적이라 할 수 있다고 한다고 말한다(Heinrich Otto. a.a.O., S. 344).


[19]. K. Rahner, Der dreifaltige Gott als transzendenter Urgrund der Heilsgeschichte, in: Mysterium Salutis II, S. 328.


[20]. " Die Wirklichkeit Gottes in seiner Offenbarung ist nicht einzuklammern mit einem nur, als ob irgendwo hinter seiner Offenbarung eine andere Wirklichkeit Gottes stünde, sondern eben die uns in der Offenbarung begegnende Wirklichkeit Gottes ist seine Wirklichkeit in allen Tiefen der Ewigkeit" (KD 1/1, S. 503)


[21] Kasper, ibid., p. 334.


[22]. "Gott hat gehandelt -und doch Gott im Gegenüber zu Gott ", Otto Weber, Grundlagen der Dogmatik I, Verlag der Buchhandlung des Erziehungsvereins, Neukirchen Kreis Moers, 1955, S. 424.


[23] Moltmann, a.a.O., S. 177


[24] Kasper, a.a.O., S. 335


[25] Ebd., S. 336


[26] Ebd., S. 336


[27] Yves Congar, Der Heilige Geist, Herder Freiburg, Basel, Wien, 1982. S. 334


[28]. "Das Problem liegt im 'umgekehrt', insofern man damit von der Erkenntnis zur Ontologie übergeht"(Ebd.,S. 335).


[29]. 같은 맥락에서 J. Moltmann은 다음의 테제를 제시했다: "Aussagen über die immanente Trinit t dürfen nicht im Widerspruch zu den Aussagen über die öknomische Trinität stehen. Aussagen über die ökonomische Trinität müssen den doxologischen Aussagen über die immanente Trinit ät entprechen"(S. 171).


[30]. 이 점에 대해서는 Werner Bründle이 잘 말해주고 있다. Werner Bründle, Immanent Trinität - ein 'Denkmal der Kirchengeschichte ? ', Kerygma und Dogma 38, Vandenhoeck & Ruprecht 1992.


[31] Karl Chistian Felmy, a.a.O., S. 40


[32] Gunton, ibid., p. 31


[33] Karl Chistian Felmy, a.a.O., S. 43f.


[34] Ebd., S. 106


[35] Ebd., S. 107


[36]서구신학 전통은 헬라철학적 영향아래 하나님의 고난불가능성공리를 고수한 채 성자의 고난의 구원론적 의미만을 말할 뿐 칼 라너가 주장한것처럼 삼위일체론적 의미, 곧 성부와의 관련성을 부인해 왔지만, 현대 많은 서구신학자들은 이를 반성했다. 이는 또한 동방신학의 고난의 삼위일체론적 차원과의 교회연합적 만남을 통해 자극을 받은 것이기도 하다. Moltmann이 러시아 신학자 N. Berdjajew의 사상을 수용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Trinität und Reich Gottes, 5 Die Tragödie in Gott). 또한 한스 큉, 위르겐 몰트만, 키타모리, 칼 라너 등이 성자의 고난과 성부와 삼위일체론적으로 깊게 연관시킨다고 해서 이를 성부수난설이라고 쉽게 비판할 수는 없다. 성부수난설은 성부 하나님 자신이 고난을 당했다는 그런 단순한 주장만은 아니다. 성부수난설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그리스도 사이의 일체의 구분을 인정하지 않는 양태론적 군주론에 기초하고 있기에 하나님의 고난과 성부수난설은 구분되어야 한다.


[37] Christos Yannaras, Person, S. 29(Ebd., S. 46에서 간접인용)


[38]. Ebd., S. 2.


[39] Ebd., S. 4


[40] Ebd., S. 5. 동방신학에 대한 재발견은 결코 하나의 새로운 유행이 아니라, 서방교회도 공유하고 있는 초기 교회전통에 대한 재발견이다. 또한 종교개혁정신의 재발견이기도 하다. 이를 우리는 칼빈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칼빈은 삼위일체론이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사적인 관계라는 기초, 유형, 동력인 성경본문으로부터 유리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스콜라주의의 논리에 의존하는 논증 스타일을 피했다. 대신 그는 성경주석과 교회의 예전적, 교리문답적 상황 안에서의 신앙의 체험에 호소했다. 삼위일체에 대한 그의 일차적인 논증은 세례와 신앙의 대상인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삼위일체론적 이해를 위한 인식론적인 길로서의 신앙이라는 하나님의 선물을 밀접히 상호연관시키는 예전적이며 체험적인 것이었다. 그의 논증의 유형은 세 위격들이라는 성경적 현상에서 출발하여 하나님의 통일성이라는 예전적이고 체험적인 필연성으로 나아가는 것이었다. 바로 이런 논증의 방향은 갑바도기아 교부들의 삼위일체론적 논증에 특징적인 방법들과 현격한 유사성을 드러내는 것이다...신학을 성경주석과 함께 전개시키고자 했던 칼빈의 관심은 전통적으로 삼위일체론에 대한 보다 "헬라적인" 혹은 "동방교회적인" 이해로 간주되어 온 관점들과 현격한 유사성을 낳게 했다."(Philip Walker Butin, ibd., p. 44).


[41] Ebd., S. 36에서 간접인용.


[42]. 이는 서구신학의 자기반성이다: " De Deo Uno und De Deo Trino, die schon seit langem durchgä ngig als selbstverständlich empfundene Scheidung und Reihung der Traktate De Deo Uno - De Deo trino. Sie ist erst allgemeinüblich seit der Verdrängung der Sentenzen des Lombarden durch die Summe des heiligen Thomas(Ebd., S. 323) 사실상 경륜적 De Deo Trino보다 De Deo Uno를 선행시키는 서방전통과는 달리 동방신학은 경륜적 세 위격을 선행시킨다: "Von Basilius d. Gr. läßt sich z. B. sagen: "was das trinitarische Geheimnis insgesamt anlangt, so galten ihm die drei Hypostasen als κηρυγμα, ihre Einheit dagegen, die 'Monarchie' als δογμα.. Damit war im Verstä ndnis des Großen Basilius die Dreiheit als Gegenstand der Verkündigung der Einheit als theologischer Spekulation vorgeordnet"(Ebd., S. 46)


[43]. Ebd., S. 36. "릴케가 "이 세상 어디에도 러시아만큼 하나님에게 가까운 나라는 없다"고 말할정도로 러시아 전통철학자들의 사상은 러시아 정교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그 전체적 성격은 기독교적이라 할 수 있다. 러시아 전통철학에는 인간의 인격에 대한 존숭사상이 깊게 각인되어있다. 곧 인간을 고등동물로서나 공신주의에서 보는 사회적, 경제적인, 즉 소유적 존재로 보지 않고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된 영적 존재로 보고 이런 영적 존재성에 인간의 본래적인 자유가 놓여 있다고 강조한다". 전광식, 마르크스 이후의 철학, 이문출판사, 1994, p. 213-214. 이러한 러시아의 전통철학의 특징은 바로 러시아 정교회의 삼위일체론적 차원의 강한 영향에서 비롯된 것으로 본다.


[44]. "서구철학은 영성의 철저한 결핍위에 수립되어 있는 반면에, 러시아 종교철학은 바로 영성을 기반으로 한 철학이다", 상게서, p. 215.


[45] Butin, ibid., p.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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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년 5월 13일 금요일




삼위일체론
























삼위일체론을 다루는 것은 유일하신 하나님의 존재성과 더불어서 그분의 단일한 신격 안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삼위 하나님의 인격성 - 격위(格位) - 의 관계 이해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신데 그 신격 안에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의 독립된 세 격위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신앙고백 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삼위일체론을 어떻게 이해하고서 신앙고백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니 삼위가 계시다!" 이것이 정통 기독교회의 입장입니다. 그것은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교육부에서 발간하고 있는 학습. 세례 문답서에서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제1편 학습문답 제2장 하나님은 누구십니까?에서 3항에 "하나님은 몇 분이십니까"라고 질문하고 있으며, 그 대답으로 "오직 한 분 뿐이시나 삼위가 계십니다" 라고 해 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질문과 답은 장로교회의 신앙 표준 문서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2장 3항에서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 있는 데 따른 것입니다.

"단일한 신격 안에 본체와 능력과 영원성이 하나인 세 격위가 있으니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이시다. 성부는 아무에게서도 나오지 않으시고, 출생하지도 않으시고 발출하지도 않으시니, 성자는 성부에게서 영원히 출생하시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영원히 발출하신다."

개혁교회가 교리 표준의 하나로 삼고 있는 벨직 신앙고백서는 제8장에서 '하나님은 본질에 있어서는 하나이시나 세 인격에 있어서는 구별되심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자세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진리되신 하나님 말씀에 따라서, 본질에 있어서는 단 한 분이신 하나님을 믿으며 또한 동시에 그분은 곧 공유할 수 없는 바 인격적이시며 참되시며 진리되신 그리고 영원히 구별되신 삼위(三位), 즉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심을 믿는다. 성부는 원인과 근원이 되시고 모든 가시적인 것뿐만 아니라 불가시적인 모든 것의 시작이 되시는 분이시며, 성자는 말씀과 지혜와 하나님의 형상이 되시는 분이시며, 성령은 영원한 능력과 힘이 되시며 성부와 성자로부터 기인하는 분이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 구분에 의하여 나뉘어지는 분이 아니신데, 그 이유는 성경의 말씀은 우리에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각기의 인격성을 가지시고 그 특성에 의하여 구별되기는 하나, 이 세 인격은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이라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부는 성자가 아니시며, 성자는 성부가 아니신데, 이와 마찬가지로 성령은 성부도 아니시며 성자도 아니심이 명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 구별된 인격은 나뉘어지거나 혼합되어 있는 것이 아닌데, 그 이유는 성부나 성령은 육체를 입지 않으셨고 다만 성자만이 육체 가운데 계셨기 때문이다. 성부는 성자 없이는 계시지 않았고 또한 성령 없이 존재하지도 않으셨다. 이 삼위(三位)는 영원하심과 그 본질에 있어서 공유하시는 분이시다. 어떤 분이 처음이고 어떤 분이 나중이 되시는 그러한 분들이 아니시다. 왜냐하면 삼위는 진리와 능력 그리고 선하심과 자비하심에 있어서 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이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교리는 성경에서 알게 해 주고 있으며, 또한 기독교회의 시작과 함께 신앙고백 하여 온 것입니다. 단지 그 신앙고백이 채택되고 문서화해야 할 필요성을 갖게 된 데에는 오랜 세월이 흐른 뒤입니다. 우리는 사도신조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을 가장 먼저 봅니다. 사실 이 사도신조는 가장 오랜 세월에도 불구하고 가장 보편적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가장 오래된 신앙고백서인 사도신조는 5세기에 작성된 것입니다만 실은 훨씬 그 이전부터 신앙고백 되어져 온 것입니다. 그리고 이후에도 여러 신조들이 작성되었습니다. 우리는 그 중에서 다음의 세 신조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교리를 보고자 합니다.


사도신조에서 본 삼위일체론

사도신조의 작성 연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교회에서 세례 받고자 하는 분들에게 그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을 확인하는 질문을 한 것이 후에 신조문으로 작성되어서 사용되었는데 로마신조가 그것입니다. 그리고 이 로마신조를 근거로 해서 5세기에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신조가 사도신조입니다.

"나는 전능하시고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믿는다. 나는 그분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그분은…오실 것이다. 나는 성령을 믿는다." 로, 하나님과 그분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언급하는 정도로 간단히 삼위일체론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니케아(니케아 콘스탄틴노플) 신조에서 본 삼위일체론

니케아 신조는 니케아 콘스탄틴노플 신조라고도 불립니다. 이 니케아 신조는 이단, 특별히 성자와 성령의 신성을 부인하면서 삼위일체 교리를 공격하는 아리우스주의를 반대하는 초대기독교회의 정통신앙에 대한 진술입니다. 이 이단은 삼위일체 교리와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해 정통교회와 달리 생각했고, 니케아 공의회에서 논박 당했습니다(325A.D.). 그러나 이 니케아 신조가 채택된 것은 니케아 공의회가 아니라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입니다(381A.D.) 이 공의회에서는 니케아 공의회의 여러 가지 결정들과 성령에 관한 폭넓은 고백을 넣어 니케아 신조를 작성하였습니다. 니케아 신조는 로마제국의 동부에서 사용되었던 전형적인 것입니다. 비록 중요한 차이점이 있었지만, 로마제국의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가 다 이 신경을 영예롭게 지지했습니다.
이 신조의 특징은 "하나님을 믿으며 또한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생명의 주이시며 수여자이신 성령을 믿는다"는 것을 고백한 후에 다시 한번 하나님과 그분의 아들에 관한 신앙고백을 포함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나시었고, 아버지와 아들과 더불어 예배와 영광을 받으시고,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다른 중요한 차이점이 됩니다. 그것은 그 시대에 동방교회에서 거부한 성령의 항목에 "그분은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나시었고"에서 "와 아들"(and the Son"=Filioque)이란 구절을 포함시켰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서 아리우스의 이단성을 논박하면서 삼위일체론을 더욱 두각시켰으며 이로 인해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는 삼위일체론에 대해 서로 다른 입장을 표명하게 되었습니다.


아타나시우스 신조에서 본 삼위일체론

니케아 신조가 채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논쟁은 계속됩니다. 이에 삼위일체 교리를 공격하는 아리우스의 주장에 정면으로 맞서 싸운 자가 있는데 아타나시우스입니다. 아타나시우스 신조는 425년에 작성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아타나시우스가 직접 만든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의 이름이 붙여져 불려졌을 뿐입니다. 이 신조의 특징은 보편적인 신앙을 강조하면서 크게 두 단락으로 되어 있는데 첫 번째 단락에서는 정통 삼위일체 교리를 진술하고, 두 번째 단락에서는 그리스도의 두 본성의 교리에 대해서 진술하고 있는 점입니다. 우리는 이 중에서 삼위일체 교리 부분만 살펴보겠습니다.

"구원을 받고자 하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먼저 보편적인 신앙을 확고히 가져야 합니다. 누구든지 이 신앙을 완전하고 손상됨 없이 지키지 않는 사람은 영원히 멸망 받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이 보편적인 신앙이란 이런 것입니다.

1. 우리는 삼위로 한 분 하나님이시고 일체로 삼위이신 하나님,
2. 삼위가 혼합되거나 본성이 분리됨이 없는 한 분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3. 왜냐하면 성부가 한 위로 계시고, 성자가 다른 위로 계시고, 성령이 또 다른 위로 계시기 때문입니다.
4. 그러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신성은 하나이시며, 영광도 동일하며, 그 위엄도 영원히 공존합니다.
5. 성부께서 계심같이, 성자께서도 그렇게 계시고, 성령께서도 그렇게 계십니다.
6. 성부께서도 창조함을 받지 않으셨고, 성자께서도 창조함을 받지 않으셨고, 성령께서도 창조함을 받지 않으셨습니다.
7. 성부께서도 측량할 수 없는 분이시고, 성자께서도 측량할 수 없는 분이시며, 성령께서도 측량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8. 성부께서도 영원하시고. 성자께서도 영원하시고, 성령께서도 영원하십니다.
9. 그러나 세 영원하신 분이 아니고 한 영원하신 분이십니다.
10. 또한 세 창조함을 받지 않으신 분이 아니시고 세 측량할 수 없는 분이 아니시고, 한 분 창조함을 받지 않으신 분이시고, 한 분 측량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11. 동일한 방식으로, 성부께서도 전능하시고, 성자께서도 전능하시고, 성령께서도 전능하십니다.
12. 그러나 세 전능하신 분이 아니시고 한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13. 이와 같이 성부께서도 하나님이시고, 성자께서도 하나님이시고, 성령께서도 하나님이십니다.
14. 그러나 세 하나님이 아니시고 한 하나님이십니다.
15. 이와 같이 또한 성부께서도 주님이시고, 성자께서도 주님이시며, 성령께서도 주님이십니다.
16. 그러나 세 분의 주님이 아니시고 한 주님이십니다.
17. 왜냐하면 기독교의 진리가 우리로 하여금 각 위가 각기 하나님이시요, 주님이심을 고백하도록 하는 것과 같이,
18. 보편적인 신앙은 우리가 세 하나님이나 세 주님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기 때문입니다.
19. 그래서 성부께서는 만들어지지도 않으셨고 창조되거나 누군가로부터 나시지도 않으셨습니다.
20. 성자께서는 오직 아버지에게서만 나시고, 만들어지지도 않으셨고, 창조되지도 않으셨고, 나시었습니다.
21. 성령께서는 만들어지지도 않으셨고, 창조되지도 않으셨고, 나시지도 않으셨고,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오셨습니다.
22. 그러므로 한 성부이시지 세 성부가 아니시고 한 성자이시지 세 성자가 아니시고 한 성령이시지 세 성령이 아니십니다.
23. 그리고 이 삼위 안에 먼저 되시거나 나중 되신 분이 없으시고, 더 큰 자나 더 작은 자도 없으십니다.
24. 그러나 삼위는 세 위가 영원히 서로 공존하시고, 동등하십니다.
25. 그래서 앞에서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우리는 모든 것 가운데서 일체 안에서 삼위이시고 삼위 안에서 일체이신 한 분 하나님께 예배해야만 합니다.
26. 따라서 구원을 받으려는 사람은 누구나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아타나시우스의 신조에서 삼위일체론의 기술은 이렇게 상당히 구체적입니다. 이것을 간략히 종합해 보면, 크게 두 단원으로 나누어서 1-8항에서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 기술하고 있고, 9-26항에서는 그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 방식에 대해서 기술하고 있습니다.


첫째, 삼위일체 하나님입니다.

삼위로 한 분 하나님이시고 일체로 삼위이신 하나님 한 분을 예배한다는 것인데, 삼위가 독립된 그래서 서로가 구분된다는 것이며, 그렇지만 혼합되거나 본성이 분리됨이 없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신성은 하나이시며, 영광도 동일하며, 그 위엄도 영원히 공존합니다.


둘째,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 방식입니다.

성부께서도 창조 받지 않으셨고 그렇듯이 성자와 성령께서도 동일하며, 또한 동일하게 측량하실 수 없는 분이시며 영원합니다. 그러나 세 하나님이 아니시고 한 하나님이십니다. 기독교의 진리는 각 위가 각기 하나님이시요, 주님이심을 고백하게 하는 것과 같이 보편적인 신앙은 우리가 세 하나님이나 세 주님으로 말하는 것을 금합니다. 그래서 성부께서는 만들어지지도 않으셨고 창조되거나 누군가로부터 나시지도 않으셨습니다. 성자께서는 오직 아버지에게서만 나시고, 만들어지지도 않으셨고, 창조되지도 않으셨고, 나시었습니다. 성령께서는 만들어지지도 않으셨고, 창조되지도 않으셨고, 나시지도 않으셨고,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오셨습니다.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 방식과 관련하여 생각해야 할 것이 "성자께서는 오직 아버지에게서만 나시고, 만들어지지도 않으셨고, 창조되지도 않으셨고, 나시었습니다. 성령께서는 만들어지지도 않으셨고, 창조되지도 않으셨고, 나시지도 않으셨고,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오셨습니다."라는 표현에 대한 이해입니다.

우리는 이에 이해를 갖기 위하여 먼저 유해무가 쓴 글인 '삼위일체론의 형성과 의미'에서 니케아 회의 전후에 있었던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견해와 함께 삼위일체의 의미를 말한 부분을 보고자 합니다.


『 …
니케아회의 이전

초대교회 교인들이 예수를 主로 고백할 때, 구약의 하나님의 단일성과 예수님과의 관계가 논의의 중심에 있었고, 이 단일성을 유지하려고 예수님을 성부에게 종속시키는 것이 일반적 경향이었다. 심지어 정통적인 교부라 할지라도 이런 종속설의 흔적을 다 떨쳐버리지 못했다. 다만 니케아회의 이전에 이 종속설이 문제가 된 적이 없었으며, 만약 문제로 지적되었다면, 그들은 겸허하게 올바른 입장을 수용하였을 것이다. 이것이 정통과 이단의 갈림길이라 할 수 있다.

유대인 개종자들 중에는 예수의 신성을 부인하고 자신들이 알고 지냈던 예수가 하나님의 양자로 입양되었다는 입장을 표방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와는 반대로 영지주의자들은 구약의 하나님은 열등한 하나님이요, 예수 안에서 자신을 계시했던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시요 선신(善神)이라는 주장을 펼쳤다(말시온). 초기 변증가들 중에는 역사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성(神聖)한 영이요 선재하던 하나님의 아들이 직접 인성과 결합했다는 성령 기독론을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교회가 확장되어 헬라교회가 정착되자 헬라 철학이 교회의 언어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하면서, 특히 요한복음에 나오는 말씀(Logos)을 헬라사상의 로고스론으로 해석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이제는 단일한 하나님만이 아니라 로고스론을 이용하여서 하나님 안에 있는 다원성을 말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이런 식의 다원론은 다시 단일성을 강조하는 君主論의 반격을 촉발하였다. 군주론은 성부의 단일성을 고수하려고 성자의 신성을 파생적으로 보거나 아니면 성부의 外現 방식으로 보았다. 전자는 2세기에 강했는데, 인간 예수 안에 비위격적인 신적 능력이 역사하여 그를 세례나 부활 시에 성자로 입양시켰다는 입장인데 이는 예수를 ‘半神半人’으로 만들었다(동력적 군주론). 후자는 200년경 유행했는데, 성부만이 독자적인 위격이시고, 성자와 성령은 성부 하나님의 외현 방식으로 보면서, 성부와 성자를 구별하지 않았다. 이 주장의 대표자는 사벨리우스인데, 그는 ‘성자-성부’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양태론적 군주론). 군주론은 하나님의 단일성을 지키려는 좋은 동기에서 출발했지만, 이 단일성을 성경의 가르침과는 다르게 개진했다. 이레네우스(140-202)도 단일성을 고수하되 양태론적 경향을 지녔다. 영원 전에 성부는 말씀과 지혜를 가졌고, 그들은 동등한 위격이라는 것이다. 성부의 위격에서 출발하여 성부의 위격이 동시에 말씀과 지혜(곧 성자와 성령)를 가지고 있다는 식이다. 이는 1-2세기 삼위일체론의 특성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그는 구속사의 관점에서 삼위일체론을 전개하는 좋은 길을 열었다.

이런 상황에서 두 교부가 새로운 기여를 한다. 서방의 터툴리안(160-220년 경)도 역시 성부 하나님의 단일성에서 출발했다. 성부는 말씀과 성령을 가지고 계시다가 창조를 위하여 발출하셨다. 이처럼 그는 신성의 단일성과 동시에 세 위격(personae)에 대해서도 말하면서, 세 위격에 공유된 ‘본질’을 도입했다. 세 위격이 한 본질 안에 동거하니, 신성은 삼위(trinitas)이시다. 구속사를 위하여 단일성이 세 위격의 모습으로 전개되었다. 세 위격은 동질이나, 동일하지는 않다. 이렇게 하여 그는 군주론과 노스틱 이단들을 잘 대처했다. 그럼에도 성자와 성령을 성부에 종속시키는 흔적은 그에게도 남아 있다.

동방의 오리게네스(185-254)도 하나님의 단일성을 강조했지만, 이보다는 위격의 구별성을 더 강조했다. 엄격하게 말하자면 성부만이 하나님이다. 로고스와 성령의 신성은 파생적이다. 위격을 표현하기 위하여 그는 ‘휘포스타시스’(uJpovstasi")라는 말을 사용했다. 이로써 성부와 성자는 위격적으로는 성부와 다르다는 구별성이 확보되었다. 그리고 그는 단일성을 표현하려고 성자와 성령이 성부와 연합되어 있다는 ‘호모우시오스’(oJmoouvsio")라는 말을 썼다. 그는 삼위일체론의 정립을 위한 용어를 창제한 인물이지만, 그의 설명에는 결정적인 흠이 있다. 즉 그는 로고스를 성부의 피조물로 보았다. 그러므로 신약과는 달리 성자께 기도하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성자가 성부 밑에 있듯이, 성령도 성자 아래 있다는 위계적인 신론은 그가 신플라톤 사상을 원용하여 신론을 전개한 代價이다. 이 때문에 ‘호모우시오스’는 니케아회의 이전까지 사용이 금지당했었다. 그렇지만 오리게네스의 영향은 지대하다. 니케아 회의 전과 당시와 후에도 오리게네스의 삼위일체론의 해석이 논의를 지배하고 향방을 정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그에 의하여 로고스 기독론이 최종적으로 승리하게 되었다.


니케아 회의

아리우스(256-336)와 그의 스승 루시안( -312)도 오리게네스의 영향을 받았으나, 잘못된 한 측면만 강조하는 우를 범했다. 아리우스의 관심은 하나님의 독특성과 초월이었다. 그는 한 하나님 곧 성부만을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신성의 단일성과 종속설을 철저하게 고수했다. 성부의 본질은 초월적이고 불변하므로, 타자에게 수여될 수가 없다. 성부 이외의 모든 타자들은 피조물이요, 무(無)에서 피조되었다. 성자가 성부에게서 출생하였다는 것은 하나님에게 물리적 범주를 적용하는 것인데 이는 도무지 불가능하다. 아리우스에 의하면, 하나님은 영원부터 말씀과 지혜를 가지고 계셨다. 그러나 이들은 결코 독립적인 위격들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육신이 된 말씀은 하나님의 피조물, 다만 완전한 피조물이다. 그러므로 성부와 성자의 본질적 동등성이란 있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아주 간교한 이단일 뿐이다. 성자에게 신성이 이야기될 수 있다면 이는 비유적 의미이며, 본질적이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 전가되었을 뿐이다. 다른 편으로 아리우스도 위격이라는 말을 쓰고, 성자와 성령의 독특성도 가르쳤다. 그러나 그의 절대적인 군주론은 그리스도를 ‘반신’(半神)으로 만들었고, 성령도 참 하나님은 아니었다. 아리우스는 하나님이 아닌 그리스도는 결국 성부를 실제적으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성부를 완전하게 계시할 수 없다는 망언을 하였다. 만약 하나님을 알려면, 성부 하나님 외에 그를 아는 다른 신을 상정하는 다신론을 도입할 수밖에 없는 위기에 처한다. 이와 같이 그가 하나님의 단일성을 잘못 주장한 결과는 엄청나게 클 수 밖에 없었다. 교회는 이런 주장을 방관할 수 없었다.

콘스탄틴 황제는 아리우스 논쟁에는 필요 없는 사변이 지배한다고 판단하고 상호 사랑과 포용을 촉구했다. 여기에는 이런 논쟁으로 자신의 제국의 통일이 손상받지 않게 하려는 정치적 배려도 있었다. 그는 최초의 공의회를 자기의 궁정 니케아에 소집했다. 그리고 그는 고백의 본문에 ‘호모우시오스’를 삽입토록 했다. 이는 터툴리안이 쓴 성부와 성자는 한 본질이라는 라틴어의 헬라 역어이기도 하다. 니케아 고백은 시리아-팔레스틴 고백, 아마 예루살렘 고백을 기초로 삼았다. 아리우스와 두 친구만이 고백 서명을 거부했다. 이 고백은 논쟁의 핵심에 해당되는 기독론에서 예수는 피조되지 않았고, 출생되었고, 성부와 동등하다고 했다. 이로써 성부는 성부가 아닌 적이 있었다는 아리우스의 주장은 거부되었다.

니케아 신조는 철학적 신개념을 거부하는 공을 세웠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라는 신약의 교훈을 무시하고 종속설적으로 그를 半神半人으로 만든 아리우스의 이단을 막는데는 성공했다. 사실 아리우스의 체계는 신플라톤적으로 채색된 위계적인 철학적 신론이었다. 니케아는 이에 맞서는 철학적 신개념으로 하나님의 비밀을 풀려고 하지 않았다. 교회의 고백은 ‘위격’과 같은 용어로 신앙을 개념적으로 묘사하려는 시도를 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고백에는 필시 역리(逆理)가 있기 때문이다. 즉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역리 말이다.

그러면 니케아 신조의 ‘호모우시오스’의 뜻은 무엇인가? 이 용어는 군주론에 대항하여 성부/성자의 數的 ‘구별’을 전제한 ‘동등성’을 뜻한다. 작성 당시에는 성부와 성자가 동일한 신적 본성을 공유한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니케아회의 이전과 이후 상당 기간동안 성부와 성자의 구별을 고려하지 않은 채 본질의 (수적) 동일성으로 이해(오해)되었다. 나아가 본성의 단일성과 위격의 구별성의 관계 또한 고려되지 않았고, 양태론의 오해를 받았다.
니케아의 영웅 아타나시우스(295-373)는 ‘호모우시오스’가 성자의 완전한 신성뿐 아니라 동시에 신성의 단일성까지도 표현한다고 해석했다.

그러면서도 용어 사용에 대해서는 유연한 자세를 취했다. 초기에는 성부와 성자의 단일성은 고려하지 않고 로고스의 신성만 강조했지만, 후기에는 신성의 단일성을 강조하다 보니 위격들 간의 구별이 모호해지게 되었다. 급기야는 성부의 신성과 성자의 신성은 동일하다는 주장을 하게 되었다. 물론 그는 성부와 성자는 구별된다는 것을 분명히 말했다. 그러므로, 아리우스派가 비난하듯이 그가 양태론에 빠진 것은 아니지만, 양 위격 간의 구별을 분명하게 제시할 수 있는 ‘위격’이라는 용어가 그에게는 없었다. 그 이유는 그의 관심이 삼위일체론 자체가 아니라 구원론에 있었기 때문이다. 즉 예수 안에 피조된 반신반인(半神半人)적인 본질만 있다면, 그를 통한 구원은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아타나시우스는 성자께서 피조물이 아니라 하나님이셔야 우리를 ‘신품화’(divinisation)하실 수 있다고 확신했다.


니케아회의 이후

아타나시우스가 남겨놓은 문제는 세명의 캅바도키아 신학자들에 의해 정리되었고, 이는 성령의 신성 문제 해명으로 연결되었다. 니케아 수용자들 중에도 성령의 신성에 대해서는 많은 이들이 불확실했고, 콘스탄티노플의 감독이었던 마케도니우스(342-360)와 같은 성령否認派들까지 있었다. 그들에게 성령은 하나님이 우리와 세상 가운데서 일하려고 창조한 도구요 능력일 뿐, 하나님은 아니었다.

아타나시우스는 성령도 하나님이심을 분명하게 말했다. 다만 위격이라는 표현은 사용하지 않았다. 세명의 캅바도키아 신학자들은 오리게네스 전통을 따라 신성의 단일성이 아니라 구별되는 세 위격들에서 출발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공통적인 본성과 상호 구별되는 위격들을 구분하기 위하여 ‘본질’과 ‘고유성’을 각각 사용하였다. 바실리우스(329-379)는 고유성으로서 성부의 부성(父性), 성자의 자성(子性), 성령의 성력(聖力) 또는 성화(聖化)를 말하였다. 나찌안주스의 그레고리(329-390)는 성부께는 태어나지 않음, 성자께는 태어남, 성령께는 발출이라는 고유성을 부여했다. 그는 삼위 안에서 일체가 경배를 받으며, 일체 안에서 삼위가 경배를 받는다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신성과 군주권(君主權)을 성부에게만 국한시키는 것을 반대했는데, 이는 군주론이 지닌 최대 약점을 극복하는데 기여했다. 닛사의 그레고리(330-395)는 태어나지 않음, 독생하심, 성령의 발출은 ‘성자를 통하여’라고 제안했고, 성부는 성자나 성령과 무관하게 사역하시지 않기 때문에, 신성은 하나라고 했다. 이들은 계시에서 전개되는 행위의 단일성에서 본질의 단일성을 찾았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신성의 단일성과 위격의 구별성을 확보했다. 나아가 그들은 ‘호모우시오스’를 ‘호모이우시오스’로 해석하는 것을 정통적이라 선언했다. ‘호모우시오스’를 단일성으로만 이해하다 보니 사벨리우스派적(양태론적)인 오해의 소지가 많았는데, 이런 식의 선언으로 그런 오해도 제거될 수 있었다.

콘스탄티노플회의(381)는 성령의 ‘호모우시오스’를 문자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으나 성령께서는 성부로부터 나와서 성부, 성자와 함께 경배와 영광을 받으신다는 식으로 성령의 신성을 고백했다. 1년 뒤의 또 다른 회의는 ‘호모우시오스’를 성령께도 돌려드렸다.

‘호모우시오스’라는 용어를 도입함으로 교회는 아리우스 이단을 대항하여 그리스도의 신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바실리우스는 아리우스가 성경의 모든 말들을 자기 식으로 변형했기 때문에 ‘호모우시오스’가 효과적으로 방어선(防禦線)을 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교회는 이런 고백으로 하나님의 비밀을 벗겨버리거나 본질을 정의한 것이 아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이 진짜로 오셨고 성령으로 하나님이 직접 교회에 임재하신다는 성경적 교훈을 고수하려고 했다.

어거스틴(354-430)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단일성을 증거했다. 그는 세명의 캅바도키아 신학자들이 제시한 하나님의 본질과 위격들의 구별 또한 오해의 소지가 있음을 알았다. 즉 그들은 본질을 인간이라는 종개념(種槪念)으로 보고서 각 위격은 구체적 인간 곧 베드로, 요한과 야고보 등으로 비교했다. 이 비교는 단일성보다는 구별을 너무 부각시켰다. 이에 근거하여 아리안파들은 캅바도키아 신학자들의 삼위일체론이 다신론이라고 공격했다. 어거스틴은 삼위란 삼신(三神)들이 아니라 한 하나님이시며, 그 하나님이 삼위로 계시지만 단일성은 해소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그러므로 속성들은 본질에 부가적이지 않고, 본질과 속성들 간에는 아무런 거리가 없이 본질은 곧 속성들이다. 그러므로 절대적 속성과 절대적 존재는 한 분에게만 해당된다. 세 위격들이 아니라 한 하나님께 한 본성, 한 신성과 영광이 돌려지며, 뜻과 사역도 마찬가지이다. 오직 성부께만, 또는 오직 성자나 오직 성령께만 돌려지는 사역이란 없다. 세상을 향하여 하나님과 삼위는 한 원리를 제시한다. 가령 성육신에도 성부 뿐 아니라 성자와 성령이 공히 능동적 기여를 하셨다고 설명한다. 삼위의 외적 사역들은 불가분리인고로 삼위는 항상 함께 사역하신다. 어거스틴은 ‘위격’도 새롭게 해석한다. 이 말은 라틴어로 번역할 때, ‘본질’로 번역되어야만 했다. 동방신학에서는 ‘가면’을 뜻하는 이 말을 ‘persona’로 번역하는 것도 만족스럽지 않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침묵을 지키지 않으려고 사용하지만, 의도하는 바를 바로 표현하지는 못한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는 이 용어를 관계(relatio)로 번역했다. 이 점에서 그는 아타나시우스와 나찌안주스의 그레고리의 입장을 따르며, 이는 서방 전통도 되었다. 삼‘위’란 그 자체로는 무엇이 아니라 상호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분들이다. 모든 속성들은 ‘일체’에 귀속되지만, 관계로서의 위격은 하나님의 내적 생명이나 피조계와 연관되어 의미를 지닌다. 삼위는 거룩하다, 선하다, 영원하다고 할 수 있으나, 삼위는 성부이다라고 해서는 안된다. 또 삼위를 성자이라 할 수는 없는데, 子性을 다른 위격에다 적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성부,성자,성령 간에 본체론적이나 또는 질적, 양적인 여하한 구분을 적용하지 않았다. 도리어 영원한 관계성을 도입했다. 나아가 이 관계성은 본질에 부가적인 우연이 아니다. 부가적 우연은 신성의 가변성을 상정하기 때문이다. 한 하나님이 오직 성부이거나 오직 성자이거나 오직 성령이거나 한 것이 아니라, 영원토록 성부, 성자, 성령이셨고, 또 그러하실 것이다. 어거스틴은 이렇게 삼신론(三神論)의 위험을 극복했다. 용어의 제한성이 있으나 그는 삼위 고백에서 침묵만이 능사가 아님을 우리에게 잘 보여주었다.
아타나시우스 신조(Athanasium)는 삼위의 한 하나님과 단일성 가운데 삼위 하나님을 경배하며, 위격들을 혼돈하지 않고 본체를 분리하지 않는 고백을 언명한다. 성부의 위격과 성자의 위격 그리고 성령의 위격이 각각 다르나 성부,성자와 성령의 신성은 하나이다. 영광과 위엄도 동일하며, 영원하다. 삼위는 공히 피조되지 않았고, 공히 불가해하며, 공히 영원한데, 한 영원한 하나님이시다. 성부도 하나님이요, 성자도 하나님이시고, 성령도 하나님이시나, 삼신들이 아니고 한 하나님이시다. 각각 주님이시나, 세 주님들이 계신 것이 아니라 한 주님만이 계신다. 성부는 출생되지 않았고, 성자는 피조되지 않고 출생되었고, 성령은 피조되지도 출생되지도 않았으나 발출하신다. 세 성부들이 아니라 한 성부만 계시고, 세 성자들이 아니라 한 성자가 계시고, 세 성령이 아니라 한 성령만이 계신다. 삼위 간에는 전과 후가 없으며, 크고 작음도 없다. 함께 영원하시기 때문이다.

다메섹 요한(670-750)은 요한복음 10:38, 14:9,11, 17:21을 근거로 하여 삼위일체론에 공재(共在;또는 共座) 개념을 도입했다. 이 말은 위격들의 대면적 공재와 상호 침투를 표현한다. “삼위 하나님은 상호 간에 서로 뒤섞이지 않는 침투를 공유한다. ... 성자는 성부와 성령 안에 계시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 안에 계시며, 성부는 성자와 성령 안에 계시나, 뒤섞임이나 용해나 혼합은 발생하지 않는다.” 이 공재는 본질의 단일성에 기초한다. 위격들은 동등한 본질이며, 상존하며, 상호 관계하며, 상호 개방적이고 상호 자기 수여적이다.

칼빈(1509-1564)은 먼저 삼위께서 참되신 한 하나님이시요, 이 삼위를 떠나서 하나님은 결코 알려질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그 분을 바로 삼위로 아는 것이다. 하나님이라는 이름은 성부,성자,성령께 공히 적용되며, 위격이란 비공유적 속성이며, 상호 연관 중에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구별을 말한다. 위격은 상관적인 이름이고, 본질은 절대적인 이름이다. 그리고 성부, 성자, 성자의 이름은 명목적인 이름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존재한다. 칼빈은 성자와 성령의 신성에서 시작하여 삼위일체론을 언급한다. 하나님 내에서의 위격 구분은 성자께서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계시됨으로 필요하게 되었다. 이런 식으로 그는 각 위격에서 全 신성을 이해한다. 그는 요한복음 14:10을 인용하면서 성부는 전적으로 성자 안에, 성자는 전적으로 성부 안에 계신다고 다메섹 요한式의 공재를 말한다. 각 위는 본질의 상이성으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비공유적 속성을 통한 상호 관계성으로 구별되며 동시에 그 관계성을 통하여 단일성을 이룬다. 그는 에베소서 4:5과 마태복음 28:19의 세례의 단일성을 근거로 하여, 삼위께서 함께 한 하나님이심을 증거한다. 그리스도는 스스로 하나님이시다. 이 측면에서는 자기 원인자이다. 그러나 성부와의 관계에서는 성자이다. 이 측면에서는 성부가 성자의 원인자이다. 성부가 ‘신성의 원천’이라는 것은 본질이 아니라 순서의 측면에서만 가능하다. 위격들 간에는 어떤 경륜적 질서가 있고, 성부는 시작이요 원인자이시니까,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특히 성부에게 해당될 경우가 많다. 칼빈은 고대교회의 전통을 따라서, 성부는 한 위격의 이름일 수도 있고, 동시에 全 신성을 대표하는 이름으로도 쓴다. 그러나 성부가 신성의 원인은 아니다. 이런 식으로 성자와 성령께 추호의 약탈도 없이 본질의 단일성이 보존된다. 성자와 성부의 신성은 공유적 신성에 참여를 통하여 이루어지며, 결코 성부의 위격은 (본체론적) 원인이 아니다. 성부만이 ‘절대적으로’ 원인자라고 말하는 것은 아리우스가 주장한 이단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고백을 할 때, 하나님이라는 이름으로 삼위로 이해되는 단일하고 단순한 본질로 이해한다.” 이렇게 본질의 단일성에 도달하는 것은 항상 필수적이다. 그러므로 ‘주’, 또는 ‘영’이란 성부께만 적용되는 이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삼위의 각 위격이 불려지며, 이로써 하나님의 단일성이 보장된다.


삼위일체론의 의미

고대 교회에서 신학은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근대학문의 한 분과로서 신학과는 전혀 다른 독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신학은 그 어원에서 ‘神’과 ‘말’의 관계를 뜻한다. ‘..를 하나님이라 말함’이 신학함이었다. 이방적이고 적대적인 환경 가운데서 예수님을 하나님이라 부르고, 성령님을 하나님이라 선언하는 것이 신학‘함’이었다. 고대 헬라교부들은 성경의 저자들, 특히 성자의 신성을 잘 가르친 사도요한을 신학자라 불렀다. 신학은 성자와 성령님을 하나님이라 선언함으로써 삼위 하나님을 한 하나님이라 부르고 삼위일체 하나님께 합당한 영광을 돌리는 송영이었다. 신학‘함’은 교회의 삶 자체, 특히 설교와 세례와 예배에서 일상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성도의 삶도 이 삼위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하여 닮아 가는 ‘신품화’였다. 그리고 부차적으로 이에 대한 이론적인 반성인 삼위일체론이 형성되었다. 즉, 하나님의 단일성 아래서 계시의 삼위 하나님은 진정으로 또 다시 한번 더 바로 그분 자신이라는 해석이다. 삼위일체‘론’은 성경에 문자적으로 나오지는 않으나 하나님의 계시를 바르게 해석하는 교의의 전형이다. 침묵이 아니라 말함이며 말함이 아니라 방어막을 치는 것이 이 해석의 의도이었다. 계시의 하나님이 원래 삼위이기 때문에 우리의 인식에도 삼위 하나님으로 알려진다. 삼위 하나님은 비공유적 속성들을 통하여 완전한 방식으로 한 본질에 동등하게 참여하는 한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삼위 하나님 이외의 다른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 신학의 원래적 의미와 활동이 회복되어야 한다. 따라서 최근 신학의 삼위일체론 부흥과 고대 헬라신학에 대한 높은 관심이 시사하는 바는 크다. “기독교신앙은 삼위일체 신앙에 내포되어 있다”라는 유명한 말이 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을 믿는데, 그 하나님은 삼위로 계시는 분이시다. 구원역사에 삼위로 계시되셨기에 우리가 삼위로 고백하지만, 원래 하나님은 삼위로 계신다. 비록 삼위일체론이 바로 이 신앙의 핵심을 인간의 논리와 언어를 사용하여서 정리하였지만, 삼위일체론은 딱딱한 사변이 아니라, 송영이며 신앙의 본질이다.

우리가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며, 삼위 하나님을 사도신경으로 매주 고백하고, 삼위 하나님이 주인이신 설교를 들으며, 예배의 말미에 삼위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데도, 삼위일체론이 어렵다고 인식되며, 대부분의 신자들이 신앙생활에서 실천적인 단일신론을 따르고 있는 것은 심히 유감스러운 일이다. 이를 타개하기 위하여 삼위 하나님을 명시적으로 계시하는 신약의 본문 뿐만 아니라, 암시적으로 가르치고 있는 구약의 본문도 이제는 삼위론적으로 설교되어져야 할 것이다. 또 세례 교육을 삼위론적으로 시행하며, 사도신경의 삼위일체론적 구조와 의미를 다시 음미하며, 예배 말미의 축복 선언은 삼위 하나님의 동행 약속임을 매번 명심해야 할 것이다. 삼위를 향한 송영을 찬송가에 많이 싣는 것도 고려해볼 만하다. 신앙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삼위 하나님과 누리는 교제이며, 삼위 하나님의 사역에 우리의 역사가 포섭된다.

삼위일체론은 부정적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설교, 선교, 교육, 예배와 기도 등 교회의 본래적 사역에서 자연스럽게 확립되었다. 이것은 공교회적 유산이다. 성장하고 부흥한 한국교회는 삼위 하나님을 향한 신앙과 송영에서 공교회적인 유산을 잘 전수받아서, 삼위 하나님과 진정으로 교제하고 사귀는 성숙한 교회와 교인들이 되어서, 다음 세대에게도 이 신앙의 핵심을 잘 전수할 때, 공교회적인 사명을 완수하게 될 것이다. 』



칼빈의 삼위일체론에서 좀 더 자세히 살펴봄

삼위일체론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기 위해서 유해무가 쓴 다른 글인 '칼빈의 삼위일체론'에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 삼위일체론은 신학 교과서에만 있는 지식인가? 비록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지만, 대부분의 신자들은 일상적인 삶에서 사실상 ‘단일신론’을 따르고 있다. 비록 매주일마다 성부, 성자, 성령께 송영을 돌려드리면서 예배를 마치지만, 설령 삼위일체론이 거짓으로 판명되어진다 하여도 기독교 경건 서적의 대부분 바뀌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이처럼 삼위일체론이 창조론, 기독론, 은혜론 교리 뿐만 아니라, 성도들의 경건과는 거의 분리되어 있다. 가령 삼위일체론이 없어도 기독론에 결정적인 변화를 끼치지도 않을 것이다. 실제로 현대 기독론 연구는 대부분 주석적이지만, 삼위일체론이나 성령론적으로 통합되어진 연구는 흔치 않다. 성령 안에서 성자의 이름으로 성부께 기도를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드리며, 사도신경을 암송하면서도, 성도들의 머리에는 ‘단일신론’이 자리잡고 있다.

이런 안타까운 신앙 현실을 주목하면서 우리는 신앙의 대선배인 칼빈의 교훈을 살피려고 한다. 칼빈(1509-1564) 신학의 구조는 한 마디로 삼위일체론적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의 신학의 주제는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사실은 그가 진정한 의미에서 ‘신학자’라 할 수 있다. 신학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며, 신학의 유일한 주제는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하나님은 유일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이 점에서 칼빈은 신학 정의에 충실하였다. 우리는 그의 신학을 공부함으로 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더욱 더 잘 알기를 원한다. 성경의 주인공도 삼위일체 하나님이시요, 설교의 주인공도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우리 한국교회의 모든 설교자들이 성경의 내용이 삼위 하나님이기 때문에 신학과 설교의 내용도 삼위 하나님으로 꽉 채우는 지혜를 얻기를 바라면서 본고를 시작한다.


신학: 삼위 하나님을 아는 지식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는 표현으로 칼빈은 신앙을 정의한다. 그에 의하면 신앙은 이곳 저곳이나 잡다한 것들에 관한 이야기를 따라 다닐 것이 아니라 한분 하나님을 주목해야 한다(I,xiii,16). 그는 신앙을 설명할 때는 종종 요한복음 17:3을 인용한다. 즉 한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이 보내신 자인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신앙은 이처럼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으로 이루어진다(III,ii,3). 그리스도의 광채가 우리 위에 비취지 않았다면 하나님은 완전히 은폐되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을 계시하시려고 독생자를 보내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광의 형상이다. 볼 수 없는 성부를 우리는 오직 보이는 성자의 형상에서 찾아야 한다. 타락 후 신지식(神智識)은 중보자를 떠나서는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우리는 성령의 이끌림을 받아서 그리스도를 찾게 된다(III,i,1). 칼빈은 이처럼 삼위 하나님의 사역을 통하여 신앙을 해명한다. 사실 신앙은 바로 이 삼위 하나님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칼빈이 신앙을 지식으로 정의한 것은 성경적인 탁견(卓見)이다: “믿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주어진 진리에 근거하여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베푸신 자비에 관한 확고하고 확실한 지식인데, 성부와 성자의 양 사역은 성령을 통하여 우리 생각에 계시되고 우리 마음에 인쳐졌다.”(III,ii,7; I,vii,5 참고) 그가 신앙을 성령의 사역으로도 계속 설명하는 것을 고려하면, 삼위 하나님에 관한 바른 지식 곧 신앙이 신학이다.

신앙은 삼위 하나님에 관한 올바른 지식이라는 칼빈의 입장에 서서, 그의 삼위일체론을 살펴보기로 하자.


우리의 하나님은 삼위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당신을 계시하시되, 당신이 삼위이심을 계시하셨다. 이 삼위 하나님을 붙잡지 않으면, 하나님이라는 공허한 이름만 뇌리에 번쩍이면서 참 하나님을 놓치고 말 것이다. 그러면서 칼빈은 계속 성자와 성령의 ‘위격’에 대하여 말한다. 그리고 나서 ‘일체’에 집중한다. 즉 우리 한글 표현대로, 그는 먼저 삼위에 대하여 말하고 그리고 일체를 다룬다. 이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 의미를 지닌다. 먼저 내용상 이것은 삼위일체론의 역사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흔히들 서방교회의 전통은 하나님의 본성(일체)에서 출발하고, 동방은 삼위에서 출발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칼빈은 동방의 전통에 서 있는 셈이다. 이 점은 아래에서 계속 논의될 것이다.

둘째로 용어 자체에 대한 칼빈의 유연한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이것은 신학 논쟁이나 교회 연합의 시도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이라 하겠다. 한편으로 칼빈은 ‘위’라는 말이 성경에 나온다는 점을 부각시킨다. 그러나 ‘일체’라는 말은 없다. 그는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한 하나님이요, 성자는 성부가 아니고 성령은 성자가 아니며 비공유적 속성으로 서로 구별된다는 신앙에 이견이 없다면, 위나 일체라는 말은 매장되어도 좋다는 포용적인 자세를 취한다. 물론 성경은 우리 사고와 용어 표현의 확실한 규범이다. 그러면 교회는 왜 성경에 나타나지 않는 용어를 도입하였는가? 아리우스(Arius, 280-336)를 대항하여 교회는 ‘동등’이라는 말을 도입하였다. 아리우스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라거나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에게 ‘(성부께) 동등’이라는 용어를 제시하니까, 그는 그리스도가 피조물이요 시작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즉 이 용어가 아니었다면 아리우스의 이단성은 폭로되지 않았을 것이다. 후에 사벨리우스(Sabellius, 215년경)가 성부, 성자, 성령이란 한 하나님의 속성에 불과하며, 삼위의 구별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때 선인들은 삼위는 한 하나님 안에서 분명하게 구별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면서 칼빈은 힐라리(Hilary, )를 옹호한다. 즉 제롬(Jerome, 340-420)은 하나님에게 3 본질들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신성모독죄라 하였다. 그런데 힐라리에게서는 이런 표현이 일백번 쯤은 나온다. 그러나 이것은 악의없는 평범한 표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칼빈은 위라는 말은 무엇인가를 표현하려기 보다는 다만 성부, 성자, 성령이 3분이라는 것에 대하여 침묵을 지키지 않으려고 불가피하게 사용하는 언어의 제한성에 기인한다는 어거스틴의 말을 인용한다.

용어에 대한 자유를 천명한 뒤에, 칼빈은 인격을 정의한다. “인격은 비공유적 속성(proprietas incommunicabilis)으로써 상호 관계 하에 구별되는 하나님의 본질 안에 있는 실재(subsistentia)이다.”‘위’를 대개 관계로 설명하지만, 칼빈은 아주 의도적으로 ‘실재’라는 말로 위를 정의한다. 물론 관계성에서 구별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성부, 성자, 성령은 구별되지만, 실재하는 구별이라는 뜻이다. 본질은 단일성을, 위는 단일성 안에 있는 구별을 말한다. 본질의 단일성을 깨뜨리지 않으면서 하나님 안에 있는 경륜이라는 터툴리안(Tertullian, 160-220년경)의 말에도 동의한다.


성자와 성령 하나님의 신성.

칼빈은 성경의 자료들을 증거하면서, 교회의 전통을 따라서 성부와 ‘동등’하다는 식으로 성자와 성령의 신성을 증거한다. 지금까지는 삼위일체론의 여러 용어들에 관한 도입이라 할 수 있고, 7절부터 비로소 칼빈은 삼위일체론 자체를 다룬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서 성육하신 말씀이 곧 하나님이다. 말씀은 성부와 함께 처음부터 계셨고, 만유의 창조주이시다. 하나님이 창조하시려고 입을 여실 때에, 말씀이 비로소 존재하기 시작했다는 주장은 하나님의 본질에 변화를 초래하는 모독이다. 성자가 말씀하신 ‘창세 전에 성부와 함께 가졌던 영광’(요 17:5)은 성자가 성부와 영원 전에 이미 함께 계셨다는 것을 증거한다.

또 구약에서 하나님의 본질을 표현하는 본질적인 이름인 야웨가 신약에서는 ‘주’로 번역되면서, 그리스도께 사용되었다는 점이 그리스도의 신성을 증거한다(9-11). 하나님은 육신으로 나타났고(딤전 3:16), 교회를 피로 사셨는데(행 20:28), 이것은 이등 신이 아니라, 바로 성자의 신성을 증거한다. 나아가 예수께서 죄를 용서하심에서 오직 창조주에게만 해당되는 권세가 있었다. 이 권세에서 신성을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성경은 예수를 믿고, 기도를 받으실 분으로 설명한다. 신앙과 기도를 통하여 우리는 성부와 성자에 공통적인 구원 능력을 경험한다. 천부께서 주시는 모든 은사들은 성자의 중보로 주어지지만, 이 권세에 대한 참여로 성자가 바로 이 은사들의 주인이시기도 하다.

성령님에 대해서도 유사한 증거를 전개한다. 성령께 돌려지는 것들은 피조물의 속성은 아니다. 성령은 만물을 유지하고 자라게 하며 생명을 준다. 성령은 중생과 불멸성의 주인이시다. 성령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과 교제한다. 그는 칭의, 성화와 능력과 모든 선한 것의 주인이시다. 그러므로 성령은 위격적으로 하나님 안에 실재한다(14-15).



하나님의 단일성과 삼위되심.

칼빈은 성자와 성령의 신성을 증거하고 난 뒤에, 하나님은 한분이심을 증거한다. 이를 위하여 특히 그는 에베소서 4:5과 마태복음 28:19의 세례명령을 주석한다.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하나님 신앙과 종교에 가입한다. 삼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것은 하나님의 본질 안에 삼위가 계시며, 삼위로 한 하나님이 알려진다는 것을 증거한다는 것이다. 삼위이면서 한 분이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없이는 세례 받을 수 없다.

성자와 성령의 신성이 증거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성자와 성령의 구별이 강조되어야 한다. 칼빈은 신학자 그레고리(Gregory the Theologian, 330-389년)의 말을 기꺼이 인용한다. “나는 한 분을, 삼위의 휘광으로 재빨리 휘감기지 않고는 생각할 수 없고, 삼위를 구별할 때는 즉시로 한 분에게로 옮겨진다.”그러면서 그는 삼위만을 혼란스럽게 생각하고 일체로 복귀하지 않는 잘못을 경고한다. 그는 성부, 성자, 성령은 공허한 칭호가 아닌 ‘실재적인 구별’(vera distinctio)이며, 구별은 결코 구분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이 구별은 성육신을 기점으로 삼지 않는다. 그리스도는 성령이 성부에게서 나온다고 하여 성부와 성령을 구별하였고, ‘다른’ 보혜사라 하여서 자신과 성령을 구별하셨다.

칼빈은 위격의 구별을 인간사(人間事)에서 빌려오는 신학 전통을 따르지 않고 성경에 표현된 대로 설명한다. 성부에게는 사역의 시작과 만유의 근원이심이, 성자에게는 지혜와 모사, 그리고 만유의 집행이, 성령께는 사역의 능력과 효과가 돌려진다. 하나님은 영원토록 지혜와 능력과 나누어질 수 없다. 물론 영원에 선후(先後)가 없지만, 성부가 먼저, 그리고 성자, 마지막으로 성부와 성자에게서 성령이라는 순서를 설정하는 것이 무의미하지는 않다.

그리고 나서 칼빈은 중요한 요소를 하나 지적한다. 성부, 성자, 성령의 위는 구별되지만, 각 위에서 각 위의 특징, 말하자면 불공유적 속성으로 신성의 전부가 이해되어진다는 것이다. 성부는 전적으로 성자 안에 계시고, 성자는 전적으로 성부 안에 계신다(요 14:10). 각 위는 본질의 구분이 원인이 되어 서로 분리될 수가 없다. 구별이란 상호 관계를 나타낼 뿐이지, 본질을 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는 발생 가능한 어떤 혼동을 시정하려고 한다. 성부와 관련되지 않고 성자를 부르면, 그는 스스로의 원인자이다. 그러나 성자가 성부와 가지는 관계에 치중하면, 성부는 성자의 원인자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자기와의 관계에서 성부와 성자는 동일한 하나님이다.

우리가 한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할 때, 이 하나님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는 한 본질을 이해하며, 동시에 그 본질 안에서 삼위를 파악한다. 그러므로 구체적인 언급 없이 하나님이 나오면, 성부 뿐 아니라 성자와 성령도 지칭된다. 그런데 각 위들의 특징들에는 어떤 질서가 수반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특히 성부에게 적용될 때도 있다. 이런 식으로 본질의 단일성이 유지되며, 성자와 성령의 신성에 아무 손상도 없이 정당한 순서도 유지된다. 각 위를 언급할 때마다 신성의 단일성에로 복귀하는 것은 항상 필연적이다. 하나님이라는 단순한 이름은 관계를 지칭하지 않으며, 하나님은 자기와의 관계에서 이러하고 저러하다고 말할 수 없다. 즉 관계성은 항상 본질이 아니라 위격의 문제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단일성과 위격들의 구별에 대한 오해 논박

칼빈은 신앙을 파괴하는 사탄의 책락을 두 가지로 요약한다. 이들은 성자와 성령의 신성을 훼손하거나 위격들의 구별을 무시한다. 그는 아리우스로 대표되는 본체론적인 종속설과 사벨리우스가 대변인인 양태론을 동시에 거부한다. 그러므로 칼빈은 호기심으로 미로에 빠지지 말고 하나님께 당신의 지식을 위임한다. 하나님의 본질은 단순하고 분리되지 않기 때문에, 성부, 성자, 성령께 공히 적용된다. 그러나 각 위격에만 고유한 특징으로 위격들 간에는 구별이 있다. 그러나 세르베투스는 하나님 안에는 3 구분이 있다 하여 단일성과 충돌되는 주장을 한다. 반면에 그는 위격이란 실질적인 실재가 아니라고 한다.

나아가 칼빈은 어떤 자들(Gentilis 등)이 성부는 신성의 원천(fons et principium deitatis)이며 성자와 성령의 신성 수여자(essentiator)로 보는 오류를 범한다고 논박한다. 칼빈은 다시 그리스도가 야웨임을 상기시키면서, 만약에 모든 신성이 오직 성부에게만 있다면, 신성은 분리 가능하거나 아니면 신성은 성자에게서 다시 탈취될 수 있다는 말이라면서, 이런 주장의 헛점을 논박한다. 즉 신성은 성부와 성자에게 공통적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육신으로 나타날 때부터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칭하여 졌다. 그는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었을 뿐 아니라, 중보자의 인격과 사역을 지고서 우리를 하나님과 연합시켜야 하셨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또 ‘영’이라는 이름은 성령 뿐 아니라 성부와 성자에게도 해당된다. 야웨와 마찬가지로 성령은 전체 신성에 해당되는 표현이다.

성부는 하나님이 아니라면 성부일 수가 없다. 성자도 하나님이 아니라면 성자일 수 없다. 그러므로 신성은 그 자체로서 존재한다. 성자가 하나님이기에 위격과는 관계 없이 그는 스스로 존재한다. 그러나 그가 성자이기에 그는 성부로부터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의 본질에는 시작(principium)이 없다. 이 경우 성부와 성자는 함께 원천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위격에는 원천이 있다. 성부와 하나님이 무조건 동의어라면, 성부는 신성 수여자(deificator)가 될 것이요, 성자는 그림자에 불과하고 말 것이다.

이와 같이 성부는 본질의 수여가 아니라 ‘질서상’(ratione ordinis) 신성의 신성의 원천(principium deitatis)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하신 말씀이나 그의 위상은 항상 그가 중보자로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사역하셨음을 고려해야 한다. ‘아버지는 나보다 크다’(요 16:7)는 말씀은 그리스도가 성부에 비하여 본질상 이등 신(二等 神)에 해당된다는 말씀이 아니라 하늘 영광을 입으시고 신자들을 성부와의 교제로 불러모으시는 사역을 지칭한다. 때로는 ‘성부’라는 이름 아래에 자신의 신성도 포함시켜 말씀하시기도 한다. 즉 이런 발언들은 모두 구원 역사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성경의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시다. 그러나 성경에서 절대적으로 하나님이라 불리는 분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시며, 그리스도도 이 절대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이시다. 또 터툴리안이 하나님의 말씀은 경륜적으로 존재한다는 발언을 하였으나, 이는 본질에 관한 언급이 아니라 위격에 관한 언급일 뿐이다. “하나님은 본질에서는 단일하시나 이 단일성은 경륜의 신비를 통하여 삼위로 나타나셨다. 세 분이 계시나 정도의 문제이지 위상이 아니며, 형식의 문제이지 본질의 문제가 아니며, 현현의 문제이지 능력의 문제는 아니다.”성부는 누구에게서도 기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를 신성의 원천이라 부른다. 원천이 성부에게서 오지 않으면 하나님의 단일성이 인식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특히 성부에게 돌린다. 성부의 원천이심은 어떠한 존재론적 우위와는 무관하다.

칼빈은 삼위일체론 전부를 신실하게 다 설명하고 난 뒤에, 호기심과 사변의 추구가 아니라 '교회 건덕'(建德, ecclesiae aedificatio)에 대한 열정을 언급하면서 마친다. 이런 실천적인 지식은 어떠한 허망한 사변보다도 더 확실하고 견고하다.


칼빈 신학의 삼위일체론적 구조

칼빈은 이렇게 잘 정리한 삼위일체론을 '기독교강요'의 뼈대로 삼았다. 물론 더 정확하고 바르게 표현하려면, 삼위일체 하나님과 그 분의 사역이 이 저작의 구조로 드러나게 하였다. 그는 세례 명령에 기초하여 형성된 사도신경을 그의 신학의 틀로 삼았다고 볼 수 있다. 기독교강요 최종판(1559)은 80장으로 구성되었고, 기본 뼈대는 4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물론 이는 3 구분의 형태를 취하지 않았으니, 사도신경에 근거한 엄격한 삼위일체론적 구분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칼빈은 초판(1536)에서부터 사도신경을 성부, 성자, 성령 그리고 교회로 4분하여 해설하였다. 이것이 3판(1543년)에서는 4장으로 확대되었지만, 여전히 고립된 사도신경의 해설에 불과했다. 1559년 판에 칼빈이 독자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언급한 구조 변경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나는 이전의 노고를 탓하지 않으나, 작품이 지금 제시된 순서대로 배열될 때까지 만족할 수 없었다.” 즉, 고대교회의 교의인 삼위일체론이 중세의 신학 전통과 마찬가지로 개혁교리 곁에 있는 또 다른 신앙 항목으로 고립되어 있는 한, 종교개혁은 완성될 수 없었다. 이 관계를 원만하게 해결하지 못하면, 개혁자들은 자기들의 주장이 ‘새로운 교리’의 고안일 따름이라는 로마교의 공박을 피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신론과 기독론이 객관적 교의가 되고, 이신칭의는 ‘주관적’ 구원론이 될 수 밖에 없는 위험이 있었다. 바로 이 문제를 칼빈은 이렇게 풀었다: 새로운 고백은 옛 신앙에서 나왔다.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요 신뢰인 이 믿음이 성령의 일차적인 사역이다. 성령은 성부의 말씀인 성자를 깨닫게 하신다. 그러므로 믿음이 생긴다. 이로써 삼위 교리가 설교에서 구체화된다. 만약 이런 성령론이 개신교회의 발견이라면, 개신교회의 믿음론(신앙론)에 고대 교회의 삼위론과 기독론 교의가 초석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 개신교회의 교의라는 이신칭의와 선택론 역시 고대 교회의 삼위론과 기독론 없이는 이해될 수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더 확인하게 된다. 이를 그는 기독교강요가 ‘사도신경 해설’(Expositio Symboli)의 형태를 취하게 함으로써 단번에 풀어버렸다. 외견상 이는 사도신경의 해설에 불과하나, 사도신경의 뼈대로 삼위 하나님을 그 사역에서 고백하는 형태를 취했고, 이신칭의의 교리는 새로운 교리가 아니라 옛 신앙의 새로운 이해에 해당될 뿐임을 밝히 보였다.

이처럼 기독교강요 전면에는 사도신경의 구조를 따른 삼위일체론이 깔려있다. 설교와 주석에 기초한 개혁파의 교회적 신학이 중세의 사변을 뛰어 넘고서 고대 교회의 교의와 악수를 한 셈이다. 그러므로 기독교강요가 사도신경의 구체적 항목들을 그대로 따르지 않고 있다는 것을 흠 잡을 필요는 없다. 이렇게 하여 칼빈은 신론을 삼위일체론으로 취급하였고(제1권), 그렇게 함으로 삼위일체론이 교의학 전체 구조에서 고립되는 구습을 극복하였다.


삼위일체론의 신학자 칼빈

칼빈은 서방의 일반적 전통, 즉 하나님의 본성이라는 ‘一’의 관점에서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三’의 문제로 나아가는 방식을 취하지 않는다. 그는 성자와 성령의 신성을 바로 성경의 증거를 따라서 먼저 정리한다. 그는 성경에 경륜적으로 나타난 삼위 하나님의 사역들을 살피면서, 삼위들의 단일성을 증거한다. 또 그는 삼위일체에 관하여 수많은 비성경적인 변증을 가하는 전통을 벗어났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삼위 하나님을 소개하면서 호기심이나 사변이 아니라 구원론적이고 실천적인 지식을 강조했다.

그렇지만 그는 성자와 성령의 신성을 ‘성부와 동등’이라는 관점에서 증거한다. 이것은 교회사적으로 볼 때 성자의 신성을 증거한 유일한 방식이었다. 이 점에서 종속설적인 흔적이 묻혀있을 수 있다. 그러면 ‘성부가 신성의 원천’이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렇지만 그는 젠틸(Gentile)식으로 성부를 ‘신성의 수여자’로 보는 입장을 단호히 거부한다. 성부가 ‘신성의 원천’이라는 것은 신성의 본질이 아니라 질서의 측면에서만 가능하다(I,xiii,26). 성경에 하나님이라는 이름은 성부와 동시에 성자와 성령도 지칭한다. 그렇지만 위격들 간에는 어떤 경륜적 질서가 있고, 성부는 원천이요 원인자이시니까,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특히 성부에게 해당될 경우가 많다. 칼빈은 고대교회의 전통을 따라서, 성부는 한 위격의 이름일 수도 있고, 동시에 전 신성을 대표하는 이름으로도 쓰임을 말한다. 그러나 성부가 신성의 원천은 아니다. 이런 식으로 성자와 성령께 추호의 약탈도 없이 본질의 단일성이 보존된다. 성자와 성부의 신성은 공유적 신성에 참여를 통하여 이루어지며, 결코 성부의 위격은 (본체론적) 원천은 아니다. 성부만이 ‘절대적으로’ 원천자라고 말하는 것은 아리우스가 주장한 이단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고백을 할 때, 하나님이라는 이름 하에 삼위로 이해되는 단일하고 단순한 본질을 말한다.”(I,xiii,20) 그러므로 본질의 단일성에 도달하는 것은 항상 필수적이다. 그러므로 ‘주’, 또는 ‘영’이란 성부께만 적용되는 이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삼위의 각 위격이 불려지며, 이로써 하나님의 단일성이 보장된다(I,xiii,19,20,24).

그러므로 칼빈은 실재(subsistentia)와 본질(essentia)을 구분한다. 실재는 관계성 속의 존재이고, 본질은 자체로서의 존재이다. 실재는 다른 위격들과의 관계 속에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단순한 구별적 관계일 수는 없고, ‘실재’로 존재한다. 즉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실재는 유명론적인 칭호이지 않고, 실재한다.

이점에서 칼빈이 동방의 전통 중에서 위를 ‘존재 방식’으로 보는 입장을 탈피한 것은 특기할 만하다. 즉 그는 성부를 신성의 촛점으로 보지만, 성부의 위격을 신성의 통일체로 보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신성의 충만은 성부에게만 집중되어 있지 않고, 성부, 성자, 성령께 공히 해당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공재 사상이다.

칼빈은 삼위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하여 도입되는 인간적인 유비들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는 키프리안(Cyprian)이 말한 감독제도의 동등성을 예로 든다. “감독 제도는 하나이며, 개개 감독에 의해 전체적으로 그 각 부분이 유지된다”는 말 중의 “전체적으로”에 근거하여 삼위일체를 설명한다. 즉 본질은 성부와 성자께 전적이고 ‘전체적으로’(in solidum) 공통적이다(I,xiii,23). 즉 삼위는 비공유적 속성에는 동참하지 않지만, 신성에는 동참한다. 그리고 비공유적인 속성들은 삼위를 서로 분리시키지 않고 실재하는 상호 관계로 서로 연합시킨다. 공재에 관한 이해가 위를 개별적인 단자로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오해를 불식시킨다.

이런 공재 이해에 근거하여서 성부의 주권(μοναρχια)를 말할 수 있다. 성부가 성부인 것은 성자와 성령과의 실재적인 관계 속에서 가능하다. 물론 성부가 하나님이기에 그는 성부일 수 있다. 성부를 ‘신성 수여자’로 오해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이 말은 삼위의 공재에 의한 협동 사역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주권을 말할 수 있다. 신성은 성부, 성자, 성령께 공통적이다. 그럼에도 성부의 신성을 말하는 것은 본질의 문제가 아니라, 질서의 문제일 뿐이다. 본질은 나눌 수 없다.

우리는 칼빈의 삼위일체론이 아주 성경적이며, 균형을 잃지 않으면서도 교회사에도 찾기 힘든 삼위일체론임을 밝혔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신앙이며 경건이며 이것이 또한 신학이기 때문에, 호기심이나 사변이 아니라 실천적인 지식을 그는 추구하였다. 성경과 설교의 주인은 삼위 하나님이시다. 신앙은 삼위 하나님을 향하고 있음을 밝히면서, 성경에서 당신을 삼위로 계시하신 하나님의 계시 의도를 잘 파악하고, 설교 또한 삼위 하나님을 잘 소개하는 설교가 정착되어야 되겠다.』


이상의 삼위일체 교리가 보다 교회사 속에서 구체적으로 용어로 사용되어지고 그 설명이 표현되어진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승구는 사도신경 강해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강론하면서 다음과 같이 그 이해를 설명하고자 하였습니다.

『 하나님이 한 분이심은 신약에서도 명백히 가르치는 중요한 교훈입니다. 예를 들어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선언합니다: "하나님은 복되시고 홀로 한 분이신 능하신 자시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요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도 없는 자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능력을 돌릴찌어다. 아멘"(딤후 6:15-16). 다른 모든 것보다도 이 선언 속에 하나님이 홀로 한 분이신 분으로 이 세상을 주관하시는 분이심이 잘 드러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신약에서 가장 현저하게 계시된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은 이 한 분이신 하나님은 아주 독특한 방식으로 존재하신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한 분이 있다고 하면 그에게 하나의 인격(person)이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은 한 인격이 한 사람, 즉 한 분을 구성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약의 계시의 빛에서 보면 하나님은 이와는 좀 다른 존재 방식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한 분이시지만 그 한 신성이 세 위격(three persons, three hypostasis)으로 존재하신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본질(ousia, essentia)은 하나이지만, 이 본질이 구현되어 있는 위격(person)은 셋이시라는 것입니다. 칼빈이 말하고 있듯이, "하나님의 한 본질 안에 위격들의 삼위일체가 있다"(in the one essence of God there is a trinity of persons)는 말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당신님의 독특한 존재를 계시하시자 사람들은 난제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이전부터 하나님으로 섬겨 왔고 예수께서 아버지라 부르신 그 분과 자신을 그의 독특하신 아들로 드러내신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아버지께서 이 아들의 이름으로 보내신 성령의 관계가 과연 무엇인가 하는 난제입니다. 아버지 하나님, 아들 하나님, 그리고 성령 하나님의 관계는 과연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일까요?

교회가 처음 이 난제 앞에 서게 되었을 때 교회 안에는 이에 대해서 두 가지 대립되는 잘못된 이해가 발생했습니다. 그 하나는 하나님을 이제 세 하나님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삼신론적 이단). 그러나 이는 앞서 살펴본 구약과 신약의 명확한 증거, 즉 하나님은 홀로 한 분이신 하나님이시라는 증거와 명백히 상반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있을 수 없는 견해이고 아주 명확한 형태의 삼신론을 교회 안에서 찾기는 좀 힘듭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이에 근접하는 오해로, 성부 하나님만을 온전하신 하나님으로 말하고, 성자와 성령은 좀 못한 하나님, 제 2의 하나님이나, 제 3의 하나님으로 말하는 이들은 많았습니다. 이런 이해도 성경의 진술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생각은 교회에서 이단적인 생각으로 정죄된 것입니다. 이런 오해의 가장 대표적인 경우를 들자면 그것은 아리우스(Arius)와 그를 추종하던 이들(Arians)의 생각입니다. 아리우스는 성자는 영원에서 창조된 최초의 피조물이라고 했습니다. 근 "하나님의 뜻과 경륜에 의해서" 존재하게 된 하나님의 온전한 피조물이요, 하나님의 사역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통해 세상이 창조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영원에서는 성자가 "있지 않던 때가 있었다"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자는 성부보다는 좀 못한 하나님, 선을 선택하여 불변성을 얻고 신성에 이른 존재이고, 하나님으로 받아들여진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의 영에를 받으시기에는 합당하나 우리의 경배의 대상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7 성령의 지위는 더 격하되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이런 생각에 의하면 성부, 성자, 성령이 따로 계시되, 성부만이 온전하신 하나님이시고, 성자와 성령은 부차적인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이와는 정반대로 성부, 성자, 성령의 동등하심과 심지어 하나이심을 강조하다가 잘못된 사상도 있습니다. 소위 역동적 군주론(dynamic monarchianism)은 예수님을 그저 사람으로 보고, 성령을 신적인 영향력으로만 보았고, 양태론(modalism)으로 알려진 이단은 성부, 성자, 성령이란 한 하나님께서 각기 다른 시기에 자신을 드러내신 세 가지 양태(three modes of manifestation)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부가 성자이고, 그가 성령인데, 그것은 각기 다른 시기에 다른 형태를 가지고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시고 계시하신 수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자의 수난이 곧 성부의 수난이 되고 (성부수난설, patripassianism), 결국 하나님은 한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이해는 성부와 성자, 그리고 성령이 뚜렷이 구별되어 계시되어 있다는 것과, 또 때로는 성부, 성자, 성령이 동시에 나타나신 사건들 (예수님의 수세, 변화산 사건 등)을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이해는 하나님을 오해하는 것이 됩니다.

이 두 가지 오해는 아주 명확한 형태로 나타난 것만이 문제가 아니라, 비록 정통적 삼위일체론을 지니더라도 그런 경향에로 나아가는 모든 것도 문제가 있을 수 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삼위일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터툴리안(Tertullian)도 성자를 성부에게 종속시키는 듯이 말을 한 일이 있고, 오리겐(Origen)은 성자는 성부에게 종속되어 있고, 성령은 성자에게 종속되어 있다고 표현하여 소위 종속론(subordinationism)의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점들은 과거의 교회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이와 비슷한 생각들이 우리 주변에 있을 수 있기에 우리는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들에게도 성부에 비해서 성자와 성령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을 수 있습니다. 성자의 인간되심에 충실한다고 하면서 그의 신성을 무시하거나 이를 완전히 감취어진 것으로 여기는 현대의 경향이나, 성령을 향해서 명령하듯이 말을 하는 풍조나 성령의 인격성을 잘 드러내지 못하는 언사와 행동이 위에서 말한 첫번째 오해와 연관될 수도 있음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주의해야 합니다. 또한 성부, 성자, 성령을 설명하면서 한 존재가 가질 수 있는 세 양태와 관련해서 설명하는 것(예를 들어서, 물질의 삼태(三態)에 따라서 물이 수증기, 물, 얼음으로 될 수 있으나 다 같은 것이라고 설명하든지, 한 존재가 가질 수 있는 다양한 지위와 관계로 [아버지, 남편, 교사 등] 설명하든지 하는 것)은 위에서 말한 두 번째 오해와 관련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삼위일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오직 한 하나님이 계신데, 그는 이 세상에 그 어떤 것과도 유비되지 않으시는 아주 독특한 존재 방식을 가지셔서 그 한 하나님이 성부, 성자, 성령 삼위(three persons)로 존재하신다고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부, 성자, 성령은 그 존재와 영광과 권세에 있어서 동등하시며, 동일 본질을 가지고 계시어서 한 하나님으로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질적 존재에 있어서는 각 위간에는 종속적인 면이 없고, 위격적 엄위에 차이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그 분들에 계시하실 때 아버지, 아들의 용어를 써서 계시하시므로 우리는 그 계시를 따라서 성부(아버지 하나님), 성자(아들 하나님), 그리고 성령 하나님이라는 용어를 쓰는 것이고, 또 이 용어들이 지시하는 관계성과 성경의 표현에 근거해서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하나님을 낳으시고(generate), 성자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에 의해서 낳아지시며(is generated), 성령 하나님은 성부와 성자로부터도(filioque) 나오신다(proceed, spiratio, 요 15: 26)는 표현을 써서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삼위일체의 관계를 우리가 인식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점진적으로 계시하신 것에 근거해서 신약에서야 비로소 온전히 인식할 수 있지만, 이 삼위의 관계는 구약에도 있던 것이고 때때로 비록 그림자적 형태이기는 하지만 그런 시사가 있는 계시도 있었다고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삼위일체의 관계는 사실상 하나님이 계시면서 계속해서 있어 온 관계입니다. 이렇게 영원 전부터 삼위일체로 존재하신 하나님을 우리는 때때로 본체론적 삼위일체, 존재론적 삼위일체라고 하며, 그 하나님이 자신을 역사적 경륜 가운데서 드러내신 것을 경륜적 삼위일체라고 불러 왔습니다. 그렇다면 본체론적 삼위일체는 경륜적 삼위일체의 존재 근거이고, 경륜적 삼위일체는 본체론적 삼위일체의 인식 근거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자신이 삼위일체적 존재이심을 경륜과 계시 가운데서 드러내어 주셨으므로, 우리는 그것에 근거해서 하나님을 삼위일체적 존재로 인정하고 그에 걸맞게 섬겨 나가야 할 것입니다. 』



기독교의 신관인 삼위일체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가진 신관은 '삼위일체 하나님'입니다. 이는 교회사 속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용어가 사용되고 정립되어 왔습니다. 그리고 오늘날에 이르면서 보다 자세한 가르침이 있어오면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의미가 보다 풍성히 알려졌습니다. 삼위일체란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 이 세 인격이 각기 독립적으로 존재하시면서 일체라고 하는 독특한 신관입니다. 하나님께서 삼위일체가 되신다는 신관은 구약과 신약 많은 곳에서 증거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구약 역사 때부터 삼위일체 하나님의 특성이 나타납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셨습니다. 성부 하나님과 더불어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은 세상 만물의 생명을 내시는 창조자이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타락 후 그들의 구속사와 관련하여서는 성부 하나님의 직접적인 사역이 두드러지는 것과 함께 성령 하나님의 사역도 나타났습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일을 위하여 선지자로 부름을 받는 자들에게 능력을 주시는 일을 하셨으며, 예언하게 하시고 또한 성경으로 기록하게 영감하셨습니다. 때로는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왕국으로 존재시키는 데 있어서 필요할 경우는 한 개인이나 국가를 움직이게도 하셨습니다. 또한 성자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세상에 들어오시는 일을 준비하셨습니다.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성부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 성령 하나님의 준비 속에서 그 모습을 세상에 나타내셨습니다. 성령 하나님의 존재성은 오순절의 강림하심으로 온 세상에 충만히 나타내셨습니다.



삼위일체 신관의 역사성과 관련하여 재차 확인하여 봄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가진 신관이 삼위일체 하나님이심이 비록 구약과 신약의 증거를 교리로 구체화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기독교의 역사에서 확증시키고 하나님에 대한 명확한 신앙으로 확립되기까지는 난관을 거치는 과정인 역사성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제자들, 그리고 초기 교회 시대가 가진 신관은 하나님의 유일성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보고, 성령님에게서 하나님의 거룩한 영을 보는 것에서 하나님만이 참 신이신 유일성을 보았지, 하나님을 삼위일체론적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터툴리안이 처음으로 '삼위일체'란 말을 사용하며 교리화 시켰습니다. 그러나 그 개념이 성자가 성부에게 부당하게 종속되어 있는 불충분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오리겐에 의해서는 성자는 성부에게 종속되며, 성령은 성자에게도 종속된다는 개념으로 가르쳐졌습니다. 교회가 삼위일체의 교리를 공식화하기 시작한 때는 제4세기에 이르러서입니다. 니케아 회의에서 성자를 성부와 일체되는 것으로 선언하였고(325.A.D), 콘스탄티노플 회의(381. A.D)에서 추가적으로 성령의 신성을 주장하며 삼위의 상관 관계를 공식적으로 언명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삼위일체 교리는 사람들에게 자칫 '종속론'의 의미로 받아들여지는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그것은 '성자는 성부에게서 출생하셨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오셨다"는 표현 때문입니다. 어거스틴은 그의 대작(大作)인 '삼위일체에 대하여'에서 이를 전적으로 배제하고 있습니다만, 표현 자체가 그런 뉘앙스를 띠고 있기 때문에 항상 오해를 가질 요인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표현되어지고 있는 '출생'(나셨다)이나 '발출'(나오셨다)은 우리 인간이 아버지가 자식을 낳고, 또 그 자식에게서 나온 자식은 그 조상인 할아버지와 아버지에게서 나온 것과 같은 이해로 받아들여져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에 있어서 상관 관계는 어느 분이 먼저 계시고 어느 분이 나중에 나셨고 또한 나오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표현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성을 설명한 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과 그 실천인 구속사의 질서를 결코 무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엡 1:3-14).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의 구원의 성업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을 통해서 이루시고자 하신 작정을 실천하시는 것으로 아들을 육신을 입게 하여 출생시키셨고, 아들이 이루신 구속을 각 사람에게 적용시키고 완성시켜 나가시기 위해서 그 아들과 함께 성령을 보내시는 일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 하나님은 그 신격이 하나이신 데서 나오신 표현을 갖는 것이기 때문에 성부 하나님과 동일 본체시오 동일 본성이시오 동일 능력이시오 동일 영원성이십니다.

종교 개혁이 있은 후인 개혁교회는 그동안 삼위일체 교리와 그리스도의 양성 교리에 대한 투쟁 속에서 정통 기독교회의 중요 교리로 채택한 신조와 함께 여러 신앙고백서와 교리문답에서, 예컨대 벨직 신앙고백서, 돌트 신앙고백서,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등에서 하나님에 대한 신관을 뚜렷하게 가져왔습니다. 또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도 다음과 같이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하여 설명합니다. "단일한 신격(신성) 안에 본체와 능력과 영원성이 동일하신 세 인격이 계시는데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시다. 성부는 아무에게서도 말미암지 않고 나시지도 않으셨고 나오시지도 않으신다. 성자는 영원히 성부에게서 나셨으며, 성령은 영원히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왼다"(제2장 하나님과 삼위일체 3항)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이해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교리는 종교개혁 이후 시대에 다양한 주장으로 표출되었습니다. 종속론을 비롯해서 영원한 신인이 성자 안에서 육신이 되셨고 성령을 통하여 역사하셨다는 형체론, 유일하신 하나님이 사역 시기에 따라서 구약 시대에서는 여호와로 신약 시대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로 교회 시대에서는 성령으로 나타난다고 하는 양태론,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 세 분이신데 그 신격의 본질이 같다고 하는 삼신론은 그 대표적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주장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불충분합니다. 이런 주장은 교회사에서 이단 시비를 불러 왔습니다. 그렇지만 개혁교회가 가지고 있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주장도 그 이해를 완전히 명확하게 가질 만큼 충분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기에 설명이 안 되는 부분도 있고, 이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신비로 돌려 우리의 주관적 판단으로 하나님의 존재성을 규명하는 것을 주의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앞을 못 보는 사람이 커다란 코끼리의 신체 일부를 손으로 만져보고 "코끼리는 이렇게 생겼다"고 극히 한 부분만 설명하는 것과 같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마도 오늘날에까지도 없어지지 않고 여전히 많은 신자들에게 많이 가르쳐지고 또한 가장 많이 확산되어 있는 삼위일체론은 양태론과 함께 삼신론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 이 삼신론이 적지 않은 지지를 얻고 있는 듯 합니다. 차영배는 그의 저서인 '개혁교의학'에서 지금까지의 한국 교회가 가졌던 삼위일체에 관한 견해를 다음과 같이 수정하여 표현하며 언급하고 있습니다. " '본체는 하나님이나 삼위로 계신다'는 말이 아니고 '삼위가 계시는데 그 본질이 하나이다' 본체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삼위가 영원히 실존하시니 곧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시다. 성부로서의 하나님, 혹은 성자로서의 하나님이 아니다. 마치 본체는 하나님인데 성부로서, 혹은 성자로서, 혹은 성령으로서 나타나는 하나님인 것처럼 생각하면 이것은 양태론의 이단에 가까운 생각이 되고 만다. 성부로서가 아니라 바로 성부 하나님이시다. 성자로서가 아니라 바로 성자 하나님이시다. 성령으로서가 아니라 바로 성령 하나님이시다." 이러한 언급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매우 잘 표현한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렇지만 말입니다. 그럴 경우 단일한 신격 안에 세 인격이 계시다고 하는 정통 기독교회의 삼위일체론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삼위의 구별된 본질에서 시작하여 그 본질이 서로 동일한 것으로서 하나라고 하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입니다. 각각 삼위의 독립된 개체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때 그 독립된 삼위의 개체의 본질이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곧 신격의 동일성을 말하는 것인데 이는 하나님의 인격성을 지닌 독립적인 개체는 그 신격성 또한 개체라고 하는 견해를 갖고서 삼위 하나님의 신격의 본질은 동일하다고 보는 것으로 여겨집니다(만일 이러한 의미에서 가진 견해가 아니라면 이는 전적으로 필자가 저자/차영배의 글의 의미를 잘못 이해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며, 이는 저자의 글을 의도적으로 훼손할 뜻이 아니었음을 밝힙니다). 그래서 후에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 앞에 설 때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 세 분을 뵙게 될 것이라고 하는 주장이 조심스럽게가 아니라 이제는 아주 설득력 있게 주장되어지고 있고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이 주장은 전통적으로 개혁교회가 가진 것과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삼위일체에서의 '삼위'를 하나님의 인격성을 지닌 구별되고 독립적인 개체(실존)의 구분으로 보고 '일체'를 단일한 신격으로 봄으로써 단일한 신격 안에서 세 분의 인격성이 구별되며 또한 독립성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말하는 것과는 다른 이해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분명한 삼신론입니다. 그것은 동일한 본질의 신격을 말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 신격은 인격과 마찬가지로 구별되고 독립적인 것으로서의 성질이기 때문에 단일한 신격에 의한 유일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유일한 신격을 세 분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의 삼위일체론에 의하면 성자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에게서 나셨으며, 성령 하나님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오셨습니다. 여기서 구분되어지는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의 '삼위'는 세 인격성의 구분을 뜻하고 있어서 삼위 하나님이 각기 독립적이고도 구별되는 독특한 특성인 인격성을 지닌 실존임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이 실존은 하나님의 신적 본질의 기원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즉 성자이신 하나님의 기원은 성부에게서, 성령이신 하나님의 기원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시작된 것을 뜻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루이스 벌콥은 말하기를, "신적 본질의 생성(발생)이라기 보다는 인격적(위적) 실체의 생성(발생)이라고 할 수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칼빈이 말한 주장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신성에 있어서 한 분이시고, 인격에 있어서 삼위이시고, 관계에 있어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시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것의 이해는 철저히 하나님 자신의 존재에 대한 계시와 구속 사역에 두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단지 삼위 하나님의 인격성이나 존재성만을 갖고 논한다고 하면, "단일한 신격 안에 본체와 능력과 영원성이 하나인 삼위가 계시니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이시다" 라는 것이나,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 계시는데, 그 하나님의 신격은 동일하다"는 논리로 끝없는 충돌을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그 하나님은 삼위 하나님으로 존재하시는데 당신의 영원한 작정의 실천으로 이 세상에 자신을 나타내어 보여주시고 설명하십니다. 그래서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의 구별된 독립적인 인격성으로 그 존재성을 나타내시고 일하시는데, 그 본질은 하나이니 단일한 신격입니다.

이러한 이해에 의해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교리는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진술됩니다.

첫째,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다."입니다. 성경은 이 사실을 분명히 가르칩니다. "여호와께서만 하나님이시고 그 외에는 없도다"(왕상 8:60).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사 44:6).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칭하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고전 8:5-6). 하나님은 오직 한 분 뿐이신 것은, 그분은 존재하심과 지혜와 권능과 거룩하심과 공의와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이 무한하시며 불변하신데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또한 자존자이시며 자신 안에서 스스로 모든 생명과 영광과 선하심과 축복 등을 가지시고 자신 안에서 그리고 자신에게 충족하게 행하시는 충족자이시며 모든 존재의 근원이시며 만물의 통치자이신 점에서 다른 신(우상)과 구별됩니다.

둘째, "하나님의 신격에 삼위(세 격위)가 계시는데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시다."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은 아버지뿐 아니라 아들과 성령도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가르칩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말하기를,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18)라고 말하여서 아버지의 아들의 관계로 오신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시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성령을 "하나님의 영"(롬 8:9)이라고 말하여 성령님께서 하나님이심을 나타냈습니다. 바울은 교회를 위해 기원할 때 삼위 하나님의 특성을 가지고 하였습니다(고후 13:13). 이는 교회를 위한 바울의 기도가 삼위 하나님께서 행하신 구원론적인 근거 속에서 행해지고 있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도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어 제자 삼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마 28:19).

하나님의 삼위는 하나님의 구속사에 따른 자기 계시에서 그 상관 관계가 잘 나타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일하신 구속사의 특징은 성부 하나님의 계획, 성자 하나님의 실행, 성령 하나님의 적용이라는 이 세 가지 사실로 설명됩니다. 성부 하나님은 창조와 섭리에서 부각되시며 구원을 작정하시고, 또한 그 구원의 실행을 위하여 성자 하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을 실행하기 위하여 육신을 입고 인간의 모습을 취하셔서 인간의 모든 죄를 대신 담당하는 대속주가 되게 하신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공로를 가지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찾아오셔서 그들에게 내주하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을 적용시키실 뿐만 아니라, 그것에 의하여 영단번으로 받은 구원을 인치시고 보증하시며 완성시켜 가십니다.

셋째, "삼위의 각 고유성은 구별되나 그 본질은 같으시고 권능과 영광은 동등하시다"입니다.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의 각 인격성은 고유한 것이며 독립적인 것입니다. 성부의 고유성은 성자를 낳으심이며, 성자의 고유성은 성자로부터 나심이며, 성령의 고유성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오심에 있으면서 그 각각의 고유성은 하나님 자신을 나타내시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삼위 하나님은 그 본질이 같으시고 권능과 영광이 동등하시기 때문입니다.



홀로 한 분이신 하나님의 삼위일체 계시

삼위일체 하나님이 함께 복수로 표현되어지거나 등장하는 곳이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무소부재하여 온 우주에 충만하신 분께서 그 자신의 존재성을 아들과 성령과 함께 그 모습을 나타내시어 일하시는 것에서 하나님과 그분의 인격과 생명과 능력과 영광을 보이셨음을 알 때 이해될 수 있는 문제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의 원리에서 볼 때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이루실 일을 작정하시고,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의 거룩한 일을 성령에 의하여 완성시켜 나가실 일도 작정하신 것의 실천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인격적 특성을 드러내셨으며, 때가 되시자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보냄을 받고,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에 의해서 보냄을 받은 것이기에 자신을 보내신 분의 거룩한 뜻에 순종으로 나가는 태도를 갖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보내신 자의 인격을 통해서 당신의 거룩한 뜻을 이루어 가시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가령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창 1:26)에서 하나님께서 복수로 등장하여 창조 사역에 참여하셨으며,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구속 사역을 앞두고 중보자의 기도를 하실 때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 17장)에서 알 수 있듯이 아들은 자신을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알고서 철저히 자신을 순종으로 드려 가는 모습을 취하셨습니다. 이분께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요 1:49) 라고 말씀하여서 예수님을 통해서 곧 그분을 보내신 하나님을 보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아들과 또한 성령님이 일하신 데서 보이신 인격은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시는 일이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본래적 상태를 말하기를,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다"(빌 2:6)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인간의 모습을 취하셨습니다. 그래서 자신 안에 있는 하나님의 거룩한 신성과 그 인격을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가르치시며, 이적을 행하시는 것에서 나타내어 주셨습니다(마 4:23).

하나님의 삼위일체성은 우리를 향한 거룩한 뜻을 온전히 이루어 나가 완성하시고 그래서 당신의 택하신 백성들에게서 영원히 찬양과 경배를 받으시는 것에서 계속될 것입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하나님의 삼위일체성이 당신의 본체론적(존재론적) 관계에서와 구속 사역과 관련된 것이라고 할 때, 구속 사역의 완성 이후의 하나님 나라의 모습은 당신의 나라의 주이신 하나님 한 분과 그의 백성이 함께 영생하는 신세계로 영원 무궁할 것이라는 생각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홀로 한 분이신 하나님을 뵙는다는 말입니다. 그런 면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이신 신의 특성은 유일성이요 그 존재성 또한 유일성입니다. 신세계로서의 하나님 나라에서의 하나님의 존재성을 계속해서 삼위일체 교리에 의한 단일한 신격 안에서 갖는 유일성으로 가져야 하는 것은 그래서입니다.

이상에서 살펴 본대로 하나님은 삼위일체 교리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하나님의 존재 방식에 대한 자기 계시의 용어로서 가장 최적의 것입니다. 그런데 삼위일체 하나님의 계시는 우리가 성경에서 보게 되는데 특별히 우리의 구원과 관련하여 있으며, 이는 창세 전에 가지신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신적작정)에서부터 시작이 됩니다. 하나님은 영원 전에 당신의 나라를 어떻게 건설해 가실 것인지를 작정하셨습니다. 모든 피조물의 창조와 그들에게 있었던 일, 곧 천사의 창조와 사단의 출현, 그리고 인간 세계의 창조와 타락은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의 실천으로 있는 일들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앞서 언급한 대로 인간의 창조에 있어서 하나님 자신의 존재에 대한 계시를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라고 하여서 복수를 쓰셨습니다. 그러면서 그 복수로 표현된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실 때는 '하나님'이란 단수를 쓰셨습니다.

에베소서 1장에서는 창세 전에 이미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룰 일을 작정하시고 우리를 그리스도의 것으로 택하신 진리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은 구속이란 방식을 동원해서 우리를 하늘에 있든지 땅에 있든지 사방에서 모아 영원히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가족으로 삼아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있게 하심으로써 실천하시고 성취하십니다. 이런 까닭에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께로부터 맡은 사명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기에 순종으로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나가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해 나간 구속의 완성을 이룰 사역을 위해 성령을 보내는 일을 아버지 안에서 또한 하셨습니다. 따라서 성령님의 오심도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과 함께 자신이 해 나가야 할 일에 대한 성격을 뚜렷이 인식한데서 되어진 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 가지신 영원한 작정을 통해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자기 계시가 있었습니다. 물론 이 계시는 단지 삼위일체로서 일하실 하나님에 대한 자신을 알리는 그런 차원이 아닌 분명하게 삼위일체로 존재하신 하나님께서 그 존재하신 대로 각각 맡은 사역을 수행하실 것이기에 그 구별된 삼위 하나님이, 곧 하나님의 구별된 인격이 뚜렷하게 그의 사역 속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삼위일체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가지신 영원한 작정의 실천으로 그 모습을 세상에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아는 대로 이 삼위일체 하나님 교리는 한 분 하나님이 존재하시는 독특한 방식이라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성부가 하나님이시고, 성자가 하나님이시고, 성령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이 세 분의 하나님이 아니고 한 분 하나님이십니다. 삼신론이 아니고 유일신론입니다. 그렇다고 단일신론도 아닌 유일신론입니다. 그 한 분 하나님께서 당신이 하고자 하시는 일에 대한 영원한 작정을 가지셨으며, 그 작정과 그것을 실천해 나가시는 데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분명히 보고 그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와 영광과 권세에 있어서 동등하시며, 동일 본질을 가지고 계시어서 한 하나님으로 계시는 것이라는 이해 속에서 그에 대한 신앙을 가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홀로 한 분이십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신 6:4), "하나님은 복되시고 홀로 한 분이신 능하신 자시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요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도 없는 자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능력을 돌릴찌어다. 아멘"(딤후 6:15-16)라고 해서 하나님께서 홀로 한 분이심을 강조하여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이 창조되기 이전의 영원 전에 하나님을 보는 모습이 그러며, 또한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을 보는 모습 또한 그럴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은 영이시다"(요 4:24)라고 말씀하여 '신'(神)이신 하나님 자신을 '영'(靈)으로써 말하고 있는 의미를 이해하고 있을 때, 그래서 하나님은 과연 분리되거나 나누일 수 없으며, 해서 또한 여럿 일 수 없는 분이심을 알 때 하나님을 수의 개념인 세 분으로 여기지는 않을 것입니다. (*)





칼 바르트의 삼위일체론

목 차

I. 서 론
1. 연구의 목적
2. 연구방법 및 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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