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프로그램

한국의 무교회주의

작성자
쥬니어칼빈
작성일
2013-06-21 20:51
조회
6409

한국의 무교회주의자

1.김교신

2.함석헌

3.김정환

4.장도원

5.송두용

6.류석동

7.김성실

 

*** 무교회주의자 김 교 신 ***

 

" 통해 말하면 오늘날 교회의 신앙은 죽었다. 그 정통이라는 것은 생명없는 형식의 껍질이요, 그 진보적이라는 것은 세속주의이다. 이제 교회는 결코 그리스도의 지체도 아니요, 세상의 소금도 아니요, 외로운 영혼의 피난처조차도 되지 못한다. 한수양소요, 한 문화기관이다.

기독교는 그런 것이어서는 안된다! 다른 종교는 몰라도 적어도 기독교만은 형식에 떨어지고 세속주의에 빠져서는 안된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바로 그 형식의 종교와 세속주의를 박멸하기 위하여서가 아니었던가?"

- " 하나님의 중심으로 돌아오라" 성서조선 1935,12-

 

"그러나 저를 향하여 세례와 성찬예식이 어떻다느니, 교회 안에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다느니, 교회 밖에 구원이 없다느니, 일요일 보다 토요일을 지켜야 되느니 운은의 모든 거짓말과 허튼 수작으로써 승인을 강요할 때는 무교회인은 온

순한 대로 수수발관하지 못한다. 비상한 폭격력으로써 주위를 진동시킬 것이다."

- "건드리지 말라" [성서조선] 1940.5 -

 

I. 인간 김교신

우리는 앞의 몇장에서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여러 기독교 지도자들이 한국교회의 갱신을 역설했던 것을 찾아보았다. 이를 한 마디로 유교회주의적 교회갱신을 역설한 교회지도자들이라고 하겠다. 교회가 교회다워야 한다는 입장에서

기존 교회의 혁신과 새로운 교회운동을 전개했던 것이다. 이들은 교회의 존재성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교직제도를 비롯한 세례와 성찬예식 등도 고수하면서 하나님의 몸된 교회의 실체를 올바로 이해하려는 것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이들

의 교회갱신 운동을 유교회주의라고 이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그 반면에 거의 같은 시기에 교회 갱신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일군의 평신도 가운데 한국 교회 갱신을 제도적인 교회 밖에서 성서 연구를 통해서 시도했던 이들도 있었다. 이들은 무교회의 근거에서 교회 갱신을 역설하였다. 조선에서 이러한 무교회 신앙운동은 김교신을 비롯한 함석헌, 송두용, 정상훈, 양인성, 유석동 등이 추진하엿단. 조선에서의 무교회운동은 이들이 동인지 형식으로 [성서조선]을 창간한 1927년 7월부터 출발한 것이라는게 일반적인 이해이다.

이 새로운 신앙 형태는 "무교회의"좀더 정확히 표현한다면 "무교회주의 기독교"로 부를 수 있을 것인데, 그 이유는 기독교의 존재 가능성은 교회 없이도 가능하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 당시 김교신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무교회주의는 일명 '전적기독교'이다.. 그 증거로는 내촌 선생과 기타의 무교회인의 저서가 순진한 평신도와 조선 기독교회 교역자들에게 까지 좋은 영량이되는 일로써 알 수 있고, 순조선산 예수쟁이의 선배가 동시에 순조선산 무교회주의자인 것으로써 증명된다.

 

김교신은 1901년 4월 18일 함경남도 함흥 사포리에서 부친 김염희와 모친 양신사이에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소년시절을 거의 그곳에서 보냈으며, 1912년네살 위인 한매양과 결혼했으며, 슬하에 2남 6녀를 두었다. 1918년에 함흥농업 학교를 졸업하고 1919년 3월 기미독립만세운동이 한창이던 바로 그 달에 일본에 건너가 동경 정칙영어학교에 입학하였다. 이 무렵 그는 인생의 문제나 사회의 문제에 관한 유교적 해석에 깊은 회의와 번민을 했다.

그러던 가운데 1920년 4월 16일 저년 동경우시고매구에서 성결교회의 노방전도 설교에 깊이 감명받고 예수를 믿기로 결심하고 동경 시래정 성결교회에 출석교인으로 등록하고, 그 교회에서 같은해 6월 27일 세례를 받아 세례교인이 되었다. 그러나 교회에 출석하면서 성도들 사이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가 넘쳐 야 할 교회가 성도의 공동체로 이루어질 수 있는 체질을 상실하고 세속적이고 인본적인 기구로 운영되는 것과 청빈한 목사를 내쫓는 교회 내분을 지켜본 초신

자 김교신은 교회에 대하여 크게 실망했다. 교회에 대한 실망 가운데 그는 교회의 제도화 및 성직제도에 문제가 있다고 하는 것을 발견했다. 그때 김교신은 자신의 심경을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그해 년말은 당하여 나의 교회에는 일대 내분이 발생하여 온공한 학자인 청수목사는 사임하고 권무술책에 능한 파가 그 지위를 빼앗은 사건이 있었다. 온갖 불의와 권모가 횡행하는 조선 사회에서 생장한 내가 유일의 이상적 생활과 이상사회를 동경하여 기독교회에 입참하였던 신앙의 초기에 이러한 불의의 음모의 비열한 술책이 교회 내에서 행해짐을 보고는 단지 교회 탈퇴뿐 아니라, 과연 기독교 신앙의 근저까지 동요치 않을 수 없었다. 한동안은 교회에 참석치 않고 하숙방에서 홀로 예배하였다고 일지에 기록되어 있으니 말하자면 나의 신앙 생활의 일대 위기이었던 것이다.

 

그는 이런 내분을 목격하면서 심한 신앙의 갈등과 번민을 하며교회 출석을 단념하고 반년 동안 신앙적으로 방황하다가 그해 말에 일본의 무교회주의 창도자내촌감삼의 문하에 들어가 1927년 3월 귀국한 때까지 그의 성서 강의를 청강하

게 되었다. 한편 그는 1922년 4월에 일본 명문교인 동경 고등사범학교 영문과에 입학하여 공부하다 이듬해 지리.박물과로 전과과하여 학업을 계속했으며, 1927년 3월에 이 학교를 졸업했다. 그에게 있어서 이 기간은 한편으로는 내촌의 성서강의를 통한 기독교 신앙형성의 시기였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박식한 학문의 섭취와 교양을 통한 인격형성의 시기였다. 그 동기를 그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때는 마침 1921년 1월 16일부터 동경 대수정 위생회관에서 내촌 선생의 일생의

대사업인 로마서 강의가 시작되어 초회부터 나중까지 비상한 열심으로써 이에 참석하였다.

 

또한 대수정 위생회 강당에서 로마서 강의를 들을 때의 나의 열성을 말하면 현하 교회에 출석함으로써 목사의 환사를 받는 것이 의례인 줄로 습관된 교회 신자들은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으려니와 오히려 가소롭게 생각될 것이다. 내촌감삼 선생의 신앙과 교리 혹은 사상의 심원한데 이르러서는 내가 과연 그 몇 부분을 학습하였는지 지금 이것을 단언할 수가 없다. 감히 말하노니 내촌감삼 선생은 나에게 '유일의 선생'이다. 다시 말하노니 나는 선생을 가진 사람이다.

 

김교신은 내촌 문하에서 7년동안 영향을 받았으며, 또한 그것을 일생동안 실천하려고 노력했다. 내촌의 로마서 강의를 열성으로 경청하면서 기독교의 속죄신앙에 대한 깊은 체험을 하게 되었다. 1925년부텨는 내촌 문하 한국인 유학생 6명이 '조선성서연구회'를 만들어 신약성서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때의 신앙 동인들은 김교신을 비롯하여 앞에서 말한 함석헌,송두용,정상훈,유석동,양인성 등이었다. 이들은 귀국한 다음 성서를 통한 한국 민족의 영혼구원에 함께 일할 것을 굳게 다짐하였다. 1927년 7월 이들은 동인지 형식으로 월간 잡지 [성서조선]을 발간하기 시작했다. 이 [ 성서조선]은 "1927년 7월 1일에 본지의 창간호가 반도를 향하여 첫 소리를 외치기 시작하였을 때는 독자 이미 아는 바와 같이 6인이 동인지로 되였었다." [성서조선]의 발간 취지는 "조선에 기독교가 전래한지 약 반세기에 이르렀으나 아직까지는 선진 구미 선교사등의 유풍을 모방하는 지경을 벗어나지 못하였음을 유감으로 알아, 순수한 조선산기독교를 해설하고자 하여 [성서조선]을 발간한 것이다. 원컨대 조선에다 기독교의 능력적인 교훈을 전달하고 성서적인 진리의 기반 위에 영구불멸한 조선을 건립하고자 하는 소원이 [성서조선]이라 는 형태로써" 나타난 것이다.

[성서조선]은 30쪽 안팎의 '동인 6인의 합작'지였는데, 1930년 5월호인 제16호부터 김교신이 주필로서, 그리고 인쇄인으로서 책임 발행하는 개인잡지의 성격을 갖게 되었다. 김교신은 [성서조선]을 매월 발행하면서 12년간이나 호마다 총독부 검열을 받으며 이어왔다.그러다가 1942년 3월 30일 158호에 권두문 "조와(弔蛙,개구리의 죽음을 슬퍼함)

"가 발단이 되어 전국의 수백 독자들과 더불어 체포되었다. 그 가운데 함석헌,

송두용,유달영 등 13명은 함께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 동안 옥고를 치렀다.

이것이 소위 [성서조선] 사건이다.

"조와"의 내용은 아주 간단하야. 몹시 추웠던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와서 바위틈

의 얼음도 녹아내리고, 담의 얼음도 풀렸는데 여름부터 친구였던 개구리들이 지

난 겨울의 비상한 혹한에 얼어 죽어 개구리 시체를 모아 매장하며 몹시 가슴이

아팠으나, 물속을 자세히 들여다 보니 몇마리 개구리가 아직까지 살아남아 있었

다. 그것을 보는 순간 "아 전멸은 면했나보다!" 라고 기뻐 감탄하며 글을 맺었

다.

이글은 단순히 개구리의 죽음을 애도한 글이 아니라, 혹독한 일본의 온갖 식민

통치를 겪으면서 꺾이고 죽임을 당했으나 살아남은 몇명의 애국자들이 있음을

상징한다고 해석하는 이들도 있다. 이들은 살아남은 몇마리의 개구리들이 왕성

히 번식하여 머지않은 여름에는 개구리 천지를 이루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단 몇명의 애국자들만이라도 끝까지 견대어내면 민족정기와 혼백은 죽지 않고

머지않아 왕성케 되리라는 깊은 의미가 함축된 글이라고 해석한다.

조선총독부의 검열관은 이 글을 대수롭지 않은 내용으로 보아 검열을 통과시켰

고, 그래서 합법적으로 인쇄되어 전국 독자들에게 배포도 되었다.

그런데 한 일본 경찰이 이 글을 심상치 않게 여기며 [성서조선]을 조사해 본

결과 [성서조선]의 글 속에 민족 정신을 고취하는 내용이 들어있다고 판단하여

[성서조선]창간호부터 거슬러 올라가 전국 독자 명단을 압수하여 독자들을 검거

하였던 것이다. 이를 계기로 [성서조건] 폐간되었다. '조선어학회 사건'은 그

해 10월에 일어났다.

1943년 3월 29일 1년의 옥살이를 하고 불기소로 나온 다음 신앙동지를 격려하

러 전국을 순회하였다. 1944년 7월에는 함남 흥남 질소비료회사에 입사하여

3,000여 조선 노동자들의 복리를 위해 일하다가 장치프스에 감염되어 1945년

4월 25일 사망하였다. 그의 나이 45세였다.

 

II. 김교신과 내촌감삼

 

김교신은 "나는 선생을 가진 사람이다." 분명한 어조로 역설하였다. 그에게서

유일무이의 선생은 일본 무교회주의 창도자인 내촌감삼이었다. 그는 선생 내촌

에게서 "복음의 깊은 가르침을 받았다." "우리가 10년에 걸쳐 내촌 선생에게

배운 것은 무교회주의가 아니요, '성경'이었다. '복음'이었다. 설령 내촌 선생

의 마음속에는 무교회주의란 것을 건설하며 고취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할지라

도 내가 배운 것은 부교회주의가 아니요, 성서의 진리였다." 그는 또 한편으로

는 스승으로부터 나라사랑의 정신을 배웠다고 자랑스러워했다. 그래서 그는

"일본 애국자로서 일본을 열애케 하여 두라"고 말하기도 했다.

김교신은 "내가 본 내촌감삼 선생"이란 글에서 내촌 선생의 실체를 다음과 같

이 간추려 말하고 있다.

첫째, 김교신은 내촌에게 애국심을 배웠다고 한다.

우리는 본대로 내촌 선생의 전용을 말하라면 아무 것보다도 먼저 내촌 선생은

용감한 애국자이었다. 기독교적 성도라기 보다 첫째로 황실에 진심충성하고 국

민을 열애하는 표식적 무사, 대표적 일본제국 신민이었다. 그야말로 내촌 선생

에게서 애국자라는 요소를 뺀다면 '고자 내촌'이 될 것이다. 내촌 선생의 모발

부터 발톱가지가 전부 참애국자의 화신이었다고 우리는 본다.

 

위의 인용에서도 알 수 있듯이 김교신은 내촌의 애국심에 깊은 영향과 감화를

받았으며, 내촌을 "참애국자의 화신"으로 승화하여 그려내고 있다. 내촌은 자기

조국 일본을 열렬히 사랑하는 일본제국의 황국시민으로서, 일본 천황에 충성하

는 일본 무사의 후예로서, 전형적인 애국자였다.

그러나 일본이 김교신의 조국은 아니다. 일본은 유일한 내촌의 조국이었고, 그

를 그의 유일한 선생 내촌의 조국이었고, 그를 하늘 같이 떠받들고 있는 제자의

나라를 강탈하고, 짓밟고, 포악무도한 식민통치로 무참한 만행을 저질렀으며,

조선인을 야만인으로 취급하며 착취했다.

오늘날도 그렇지만 그때에도 일본의 교회들과 기독교 양심들은 그들이 무교회

주의자들이든지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에서의 만행을 눈감아두면서 천황에 죽

음으로써 맹세하였고, 천황의 전쟁광기를 박수와 만세로 열렬히 지원하는 것을

애국으로 생각했다. 내촌의 조선 침략국 일본에 대한 열렬한 애국은 일본에는

애국이 되겠지만, 일본 제국주의로 말미암아 나라가 강탈되었고, 민족과 문화가

말살되어가던, 일본에 종속된 조선의 입장에서는 김교신의 내촌 숭배론을 어떻

게 받아들여야 할지 매우 미묘한 민족감정이 생길 뿐이다. 조선 총독은 일본

천황의 충신이며, 일본의 열렬한 애국자이지만, 그의 천황에 대한 애국충정이

그가 통치하는 식민지 조선에서는 어떻게 평가될 것인가? 조선인들에게 조선 총

독은 식민지 내에서의 최고의 강폭한 표본이였으며, 조선인의 고통과 분노와 원

통함의 원흉이었다고 하는 사실이 총독을 일본 애국자로 만든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열렬한 황실 총정의 무사며, "대표적 일본제국식민"인 내촌의 조선과

조선인에 대한 본심은 무엇이었는지 분명하지 않은가. 아마도 김교신을 비롯한

소위 조선인 내촌 문화생들이 무교회주의자로서 비판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라든

가 김인서가 조선장로교회 평양신학교 기관지 [신학지남] 제 12권 제 4호,

1930년 7월호에서 내촌을 공격한 것은 당시의 조선 지성인들과 애국지사들의 내

촌의 무교회주의 표방과 그의 일본 황국신민으로서의 애국심을 한국인으로 못

마땅하게 보면서 공격하려는 공감대를 표출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마디로 반일의식과 민족주의의 사상에서 야기된 것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김교신이 의외로 강한 알레르기성 반응을 보이면서 흥분과 격앙적 논조

로 내촌미화와 내촌 숭배의 경지에 가깝도록 열을 내고 혈기를 부리며 반박하고

있으니 매우 야속하고, 김인서의 본의를 이해하지 못한 점이 매우 안타가울 뿐

이다. 김교신의 김인서의 글에 대한 반박은 필요이상으로 상세하게, 그리고 거

의 전체가 내촌미화의 논리로 되어있다. 그러나 안타까운 점은 지성인이며, 당

시로서는 민족의 실체와 민족정신의 고취를 위해 누구보다 앞장서야 했을 위인

이 민족주의와 반일, 독립사상이 왕성하게 일어나던 시대적 상황(식민지)을 이

해하지 못하고, 그리고 일본인들이라면 거의 누구나 갖고 있는 잠재적인 부정적

조선인관을 파악하지 못하고 철두철미 조선교회를 부정하고 내촌주의를 무조건

변호하려는 그의 태도이다. 그가 내촌의 대한 비판에 대해 싸움꾼으로나서서 정

도 이상의 내촌숭배론을 펴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것이다.

만일 그가 일본인이라 하다라도, 그 이상으로 더 위인모충하는 필의 혈전을 펴

지는 못했을 덧이다. 그를 민족의 애국자로 보는 사람들이 이 점을 어떻게 해

석할 것인가 궁금하다.

여기에서 그의 저의를 좀 더 정확히 알기 위하여 그의 글의 한 부분을 살펴보

자.

내촌감삼 선생의 신앙과 교리 혹은 사상의 심원한 데 이르러서는 내가 과연

그 몇 부분을 학습하였는지 지금 이것을 단언할 수가 없다. 다소간 안 것이 있

다 할지라고 그것은 비교적 후기에 속한 것이다. 그러나 내촌감삼이 아무것이

아닐지라도 일본의 진정한 애국자인 것은 초기부터 이것을 간취하였다....

일본 애국자에게 조선까지 걱정시키니까. 문제도 생긱는 것이다. 일본 애국자로

서 일본을 열애케 하여 두라. 증오도 생길 것이 없을 뿐더러 가장 아름다운 것

을 거기서 발견할 것이다.

일본의 애국자가 일본의 잃어버린 양을 찾기 위하여 심혈을 경주하는 자리에 외

방 사람이 일석을 점유하고 앉았음은 너무도 황송하고 너무도 엄숙한 사정이었

다. 애국자에 대한 도리를 다하기 위하여서는 차지하였던 의자를 일본 청년에게

사양하고 나는 의자 밑으로 들어가거나 천장에 구멍을 뚫고서라도 듣게만 되었

으면 만족하겠다는 것이 나의 실감이었다.

 

김교신 자신의 감회어린 글을 읽으며 우리는 무엇을 느낄수 있을까? 스승에 대

한 제자의 존경 이상의 모습, 아니 일본 청년에 대한 조선 청년의 자기비하가

겸손의 표현인지 열등의식의 단면을 드려낸 것인지, 실망과 함께 그의 충성되고

일편단심의 제자의 도에 한편 감탄과 보내는 바이다.

둘째, 김교신은 내촌 외에는 그 누구도 그의 선생이 아님을 스스로 고배하였다.

그는 그의 유일의 선생이 그에게 기독교 복음의 진수를 가르쳐 주었다고 확인

하는 아주 확실하고 훌륭한 제자이었다. 그의 글을 다시 인용해 보자.

 

내촌식 무교회주의란 무엇인가? 내가 배운 대로는 '교회 밖에 구원이 있다'

는 것이 내촌식 무교회주의의 전부이다. 이 이하의 것도 아니요, 이 이상의

것도 아니다.

 

여기에서 김교신은 내촌식의 무교회주의를 자신의 내촌식의 무교회주의를 자신

의 신앙형태로 만들기 위한 이론적 논증을 시작하였다. 그는 무교회주의적 구원

론이 성서의 진리요, 복음의 핵심이 오직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다."는 것으로

만 집약된 것으로 확신하면서 기독교의 여러 전승이란 교리들을 부정하고 있다

는 것을 놀랍게도 발견할 수 있다. 물론 기독교는 구원의 종교이므로 어떤 형태

로든지 종교적 형식과 내용, 그리고 전승된 신앙고백이나 교리들이 하나님의 구

원의 역사를 좌우할 수는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종교란 절대자에 대한 신

앙과 신앙의 표현이 필연적으로 요청되는 것이므로 종교에서 구원 자체만을 확

신하며 무교회적으로 나간다는 것은 문제가 많다. 더욱이 기독교는 세례와 성찬

을 중요시하는 종교이므로 이런 종교적 의례행위를 배척한 기독교는 사실상 기

독교는 사실상 기독교가 아니고, 도덕강론체일 뿐이다.

유교의 도덕륙에 의해 뼈가 자란 청년으로서, 그리고 기독교 신학에 관해서 아

무런 교육도 받은 바 없는 20대 평신도로서, 뿐만 아니라 노방전도를 통해서 기

독교 입문한지 6개월도 안되는 초신자로서 기독교의 핵심 교리들 가운데 하나인

구원의 문제를 왈가왈부했다는 것 자체는 너무도 놀라운 일이다. 그 스스로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신학교에 배운 일이 없고, 목회으 직분을 받은 일이 없으니 평신도요, 특수한

경험으로서 크게 성신의 역사를 받아 동포나 또는 이방 만민을 위하여 세움을

받었다는 확신이 없으니 평신도이다.

그러면서 그는 좀더 진지한 신학 문제에 관해서 언급했다.

다만 천당에 관하야, 사후 생명, 부활에 관하야 마치 금강산이나 팔레스틴을

구경하고 와서 이야기하듯이 골골이 사사치 넘어 자세히 이야기하는 교역자는

우리가 신용치 안하니 이도 평신도인 탓이다.... 저는 모든 일 까지도 소위 '

확신'이란 것은 없다. 저의 하는 일은 백퍼센티의 확신으로 하기 보다는 항상

50%의 의혹과 싸우는 것이 일의 대부분이다.

그렇다 바로 김교신의 기독교 이해란 평신도로서의 도덕적 삶에 충실한 생활로

서 만족하는 것이다. 김교신은 자기와 마찬가지로 내촌으로부터 무교회주의를

배운, 그가 표현하기를 "순수한 무교회주신자"인 일본 산본태차랑의 무교회주의

에 관한 글을 [성서강의]지 5월호에서 번역하여 [성서조선] 1937년 6월호에 게

재하며, 이것이 "우리의 무교회"라고 표명하였다. 산본의 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무교회주의란 것은 진정한 기독교를 의미하는 것이요, 무교회주의자란 것은 진

정한 크리스챤을 의미하는 것이다. 교회의 유무, 세례의 유무등은 하등 관계 없

다. 무교회주의 곧 복음, 무교회주의자 곧 신자이다. 나의 무교회주의란 이런

것이요, 이 무교회주의자야 말로 내가 내촌 선생께서 배운바 최선, 최미, 최고

의 것이오 이 의미에서 '무교회주의'곧 '감삼.내촌'이라고 확신한다. 아니, 이

것이야말로 그리스도 자신의 정신이라고 확신한다.

김교신은 산본의 무교회주의에 대한 명료한 표현을 자신의 무교회 신앙으로 받

아 들이면서 "이것이 본산지의무교회주의이요 또한 우리의 무교회주의이다."라

고 그의 입장을 표명했다.

결국 우리는 이러한 여러 진술들을 분석해 보면서 김교신은 그의 스승으로부터

기독교를 올바로 배운 것이라기 보다는 "복음"이라는 이름으로 표현된 내촌의

도덕주의를 받아들인 것이다. 내촌의 도덕주의란 일본 정신에 뿌리를 박고 있는

것임을 말할 것도 없다. 한국 보다 대략 3세기 정도 먼저 기독교가 일본에 전래

되었으나 일본의 무사정신, 신도, 선불교, 일본 재래 종교 등과 일본인 특유의

섬백성 근성의 배타주의, 황국신민정신의 혼합된 소위 일본 정신 때문에 오늘날

에 이르기까지 기독교가 일본 사회에 깊이 정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일본인들

이 기독교 보다도 일본 정신을 우선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은 기독교

를 윤리종교의 한 종류로 받아들였으며, 그렇기 때문에 사실상 기독교의 본질을

알고 있지 못했다. 신사참배냐 교회출석이냐의 선택에서 내촌 정도의 인물도 교

회 출석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운 것이었다. 천황이냐 예수냐의 선택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일본 무사도의 집안 후예로서 내촌의

기독교의 예배, 성례,공동체에 참여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일본 문

화를 부정하고 일본을 배반하는 역적 행위처럼 보여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

서 그는 기독교의 성례전과 교회성에 대한 신앙적 접근보다는 무교회적 접근을

시도했다. 내촌은 기독교를 하나님의 명령의 종교로서 받아들이지 않고, 인간의

양심의 종교로서, 아니 좀더 명료히 표현한다면, 히브리사상이 삭제된, 헬라화

된 인본주의적 도덕 종교로서 이해했던 것처럼 보인다. 김교신은 내촌으로부터

바로 이러한 사상을 받아들여 그가 죽을 때까지 철저하게 내촌주의자로 긍지를

갖고 한국교회와 기독교에 대항해서 싸워온 것이다. 당시 한국 교회의 골치거리

는 적극신앙단 (신흥우),원산파 신비주의(백남주,유명화), 황국주의 열광신비주

의, 무교회주의였다. 많은 교회들은 [성서조선]을 이단적 잡지로서 간주하였으

며 독서를 금지ᇹ는 교회도 있었다.

 

III. 김교신에 대한 역사적 평가

 

김교신에 관하여 논평한 글들의 공통점은 김교신을 조선의 민족주의자나 애국

자로 묘사하는 점이다. 그가 창씨개명을 끝가지 안했다는 점을 들어 그를 애국

자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김교신이 혈기왕성하고 의기충천하던 19세의

청년으로서 기미독립만세가 터져 조선 방방곡에서 만세의 함성이 울려 퍼지고,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는 사람들에게 무차별로 총을 쏘아대는 일본 순사들과 헌

변들의 총성이 조선 천지를 진동할 때, 그리고 총에 맞고 칼에 찔려 내장이 터

지고 골육이 찢겨지며 선혈을 흘리며 죽어가는 수많은 순국 열사들의 죽음을

바라보며, 더욱이 만세 사건으로 인해서 조선인들에 대한 조선총독부의 검거

선풍과 탄압이 더욱 심해졌던 바로 그 달에 민족의 비극을 묵묵히 바라보며 일

본으로 유학갔던 그를 어느 기준의 애국자요 민족의 지도자로 보아야 할지 애국

자의 기준을 이해하기 매우 어렵다. 우리는 종종 김교신이 그의 유일의 선생

내촌을 영웅화하고, 애국자화하고, 거의 신격화하는 위인모충의 글을 보았는데,

지금은 많은 김교신 연구가들이나 김교신주의자들이 바로 그러한 김교신투의 글

로 김교신을 영웅화하고, 애국자화하고, 신격화하는 것을 보면서 느낀 바를 무

어라고 표현하기 어려운 묘한 기분에 잠기게 된다. 어떤 이들은 그가 십여년간

교사였던 경력을 들추어 민족의 교사요, 민족의 선구자 운운하며 영웅화를 시도

하고 있다.

이런 미사여구의 수식어들과 정도 이상의 인물 서술은 오히려 그를 인물됨에서

신화됨으로 옳겨놓은 것에 불과하다. 일본 식민지 시대에 중학교나 고등보통학

교에 다니는 사람들에게 한 학교에 몇명 안되는 한국인 교사들의 인기와 감화력

은 어느 교사를 막론하고 지대했었다. 일본인 교장의 엄격한 규율주의와 일본

총독부의 조선인 교사들에 대한 성분검사와 일본 고등계 형사들이나 조선인 형

사 끄나풀들의 감시 속에서도 일본인 교장이나 일본인 동료교사들의 잊을 수 없

는 인상을 남길 정도라면 그는 친일분자이거나 적어도 반일분자는 아니었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김교신을 인물 그대로 분석해 보려는 필자로서는 이러한 걱정

이 다만 논리적인 가능성으로만 끝나기를 바랄 뿐이다. 그러나 김교신 추종자들

이 그에 붙여준 "민족의 스승" 혹은 "민족의 교육가"로서의 걸출한 민족주의

정신(?) 은 이런 가능성을 뒤엎기에 너무 부족함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우리는 우리 민족에 거족을 남긴 인물들,특히 한국 신학사상에 어떤 형태로든

지 영향을 끼쳤으며, 무엇인가 발자취를 남긴 인물들을 추적하여 한국 신학 사

상의 오늘의 현주소를 찾아 보려는데 궁극적 목적을 두고 있다. 그러는 과정에

서 종종 한국 신학사가들이나 한국 기독교 교회사가들의 냉철한 비판적 분석과

객관적 평가가 많은 길잡이가 되곤 했던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예외적이기는 하지만 몇몇 교회사가들은 냉철한 비판적 분석과 객관적

평가가 결여된 무조건 인물돋구식의 인물평전함을 종종 서글프게 보게 된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이런 학자들이 그들의 사가로서의 책임을 너무도 의식하지

못하고 통속적인 전기작가적 수법과 필치를 갖고 인물연구를 하려 하기 때문이

다. 처음부터 이들이 학술적 능력과 학문 방법론이 결여된 사람들이었다면 이

들에 대한 사적 평가를 기대하하지도 않았을 것이며, 처음부터 이런 기대감에

없었다면 실망도 크기 않았을 것이다.

김교신의 사랑하는 제자였던 농학자 유달영 교수는 "애국자로서의 김교신"이란

글에서 "[성서조선]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구검되어 서대문 형무소에 투옥되었었

다. 그당시 일인 경찰의 그 잔인성은 세계에서도 가장 잔혹한 것을 알려져 있었

다.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들의 고문으로 죽거나 또는 폐인이 되었었다.

그들 악독한 경찰 앞에서 떨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그때 일인 경찰이 김교신에

게 '황국신민서사'에 대하여 물었다.

경찰의 물음에 대하여 선생은 즉석에서 '황국신민서사는 반드시 망국신민서사가

될 것이다. 이것은 두고보면 알 것이다.'라고 대답하여 경찰들이 아연실색 하였

다. 그들은 또 일본의 만주에 대한 경륜에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그런

데 선생은 서슴지 않고 '솔직하게 말해서 일본은 만주 침략으로 인해서 망할 것

이 분명하다.'고 대답하여 심문하던 형사가 '김교신을 취조하노라면 취조 경관

인 내가 다 아찔해진다'라고 소감을 말했다는 등의의 기록을 보면 김교신을 영

웅화, 초인화하려고 하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 유교수의 개인적 목격담이므

로 진술의 사실 여부가 불확실하고 신뢰할 만한 기록된 논증 자료도 없는 형펀

이다. 그러나 대동아 전쟁을 일으켜 광기적인 공격성이 전반도에 넘쳐있던 전

시요, 더욱이 식민지 지배국 경찰로서 이 사건을 불기소처분할 정도로 다루었다

고 한다면 이런 정도의 일왕 모독적 언사와 일본패망 운운의 표현으로 무사했

을까 하는 의심이 아니날 수 없다. 만일 김교신이 사실 그런 정도의 대담한 말

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불기소처분을 받고 무사히 풀려날 수 있었다면 유달

영 교수의 진술은 자기모순에 바진 것이다. "그 당시 일본인 경찰의 그 잔인성

은 세계에서도 가장 잔혹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들의

고문으로 죽거나 폐인이 되었다" 고 했는데 김교신이 이런 진술로 무사했다면

그 당시 일인 경찰은 세계에서 가장 인자한 경찰이었거나 혹은 김교신의 제자인

유교수가 너무 과장되게 표현한 것일 것이다. "망국신민서사"니 "일본은 망한다

"느니 하는 말을 취조하는 경찰에게 하고 살아 남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

사실 그 당시는 일본에 의해서 신사참배가 강요되던 때이며, 만흔 교회들과 학

교에서 신사참배거부로 어려움을 당하던 때이다. 1934년에 신사참배 거부로 목

포 영흥중학교가 폐쇄된 것도 그 상황의 심각성을 설명해 주고도 남음이 있다.

뿐만 아니라 1935년 부텨는 신사 참배 문제로 한국 교회가 시련을 받기도 했다.

1937년 6월에는 서북계 기독교인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많은 사람들이 구금되었

으며, 1937년 10월 YMCA농촌사업도 일제의 탄압으로 중단되었다. 1938년 흥업

부락부 사건, 겅성계 Y 지도자들 구금, 그리고 같은 해 평양숭실전문학교가 신

사참배 반대로 폐쇄되었으며, 6월 에는 농촌연구회 사건으로 주기철 목사를 비

롯한 여러 목사들이 구속되었다. 드디어 총독부는 YMCA를 해산시켜버렸다.

평양장로회 신학교도 폐교되었다. 1940년에는 선교사들을 대거 축출하였고, 신

사참배를 거부하는 조선 기독교인들은 대량 검거하여 투옥시켰다.

일제는 조선 기독교에 대한 박해를 점점 더하여 갔다. 1941년 1월에는 평안북도

지방의 애국적 교회들에게 주일 예배 폐재를 강요하고, 그 교회당을 가마니 공

장으로 징용하여 교회를 없애 버렸으며, 심지어 3월에는 반전 기도일 사건으로

외국 여자선교사들까지 체포하였다. 마침내 군국주의 일본은 12월 이른바 대동

아 전쟁을 일으켰다. 1942년 황도 문화원을 설립하고 9월에는 외국 선교사 전원

을 출국조처했으며, 천주교 신부들도 35명이나 검거하였다. 1943년에는 안식교

, 성결교도 강제 해산시켰다. 그리고 "일본 기독교 조선 장로교로 조선 기독교

를 사실상 일본 교회의 지배아래 두었다. 1944년 감리교 신학교를 황도정신 교

사 연성소로 강제로 바꿔 사실상 한국에서의 기독교 말살과 일본 황국신민 충성

의 기독교로 한국의 기독교인을 사이비 기독교 신자로 만들려는 깊은 음모를 진

행하고 있었다. 이런 시대적 여건들과 일본의 계획적인 기독교 말살음모의 실

천의지가 무수한 박해와 순교자를 배출시킨 그 즈음에 사실 김교신의 [성서조선

]운 일본 총독부의 평가 수준에서는 일본 식민지 통치에 골칫거리가 되지 않는

매우 건전하고 별로 뚜렷하게 반일적이거나 철저히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기독교

적인 잡지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 말은 첫째, 그 잡지가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장애가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 잡지로서 당시의 전쟁, 평화, 인류,정의

,정치 등에 관한 날카롭고 비판적인 선구자적 목소리도 갖고 있지 않았으며, 오

려 일본인 무사요, 대표적 황국신민인 내촌을 숭배하고 떠받드는 한국 지성인들

이란 점, 둘째, 이들의 글은 신앙열기와 부흥회를 통한 성령강림의 뜨거운 불이

일어나고 있는 한국 기성 교회를 견제한 맞불작전과 같은 효과를 가질 수 있으

리라는 분석 판단, 셋째, 이들이 한국 기독교에의 서양적 영향을 배척하고 일본

적 영향력을 자신들의 돈을 들여가며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일

본 총독부 측에서 보면 어쩌면 내심으로 고마운 일이기도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인, 기성 교회에 대한 비판투쟁을 무교회주의자

들 [성서조선]이란 잡지를 통하여 맡아서 감당하기 때문이다. 1927년 7월부터

1942년 3월 폐간될 때까지 15년간을 민족의 고통하는 모습이나.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는 논문이나 일본 군국주의를 비판하는 논문 한편도 실음이 없이, 그리고

민족주의 정신고취 등의 문제로 일본인 경찰에 의해 혹독한 어려움을 당함이 없

이 평탄하게 이어온 것은 이 [성서조선]의 실체가 어떤 것인가를 한국기독교의

판단에 맡길 수 밖에 없다.

반일의식은 고사하고 오히려 김교신의 글 가운데 일부에는 한국 교회를 음해하

려는 저의도 깔려있는 듯 했다. 아마도 그의 신경질적인 반응들이나 과격하고

공격적인 표현들은 얼마나 그가 [성서조선]을 이끌어가며 기성 교회들로부터 어

려움을 당하고 있었는가 하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김교신으로서는 일

본의 경찰로부터는 고통을 받지 않았으나, 조선의 교회들로부터는 사방에서 공

격과 비난을 받으면서 매우 착잡한 심정에서 방어를 위한 공격을 시도했는지 모

른다. 그가 [성서조선]에 발표한 변론들의 제목으로도 그의 마음 움직임을 읽

을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성서조선]에 "내촌감삼론에 답하여"(1930,8-9), "교회에 대한 우리의 태

도"( 1935.4), "[성서조선'이 전하는 복음"(1935.5), "교회와 우리의 관계-

[성서조선]은 [성서조선]대로 (1935.7), "금후의 조선 기독교" (1936.2), "무교

회 문답"(1936.3) "가(假) 교회" (1936.5), "교회가 거룩하냐"(1936.6), "나의

무교회"(1936.9) "대립항쟁의 대상"(1936.11) "우리의 입장을 건드리지 말라"

(1936.11), "내가 본 내촌감삼 선생"(1936.11), "우리의 무교회"(1937.6)," 두

사람이 증언-무교회론의 방향"(1937.6), "건드리지 마라"(1940.5), "우리의 우

려"(1940.7), "비판 공격의 祖宗 "(1940.9),"낙담하지 않는다"(1940.12), 등외

에도 여러 편의 글들에서 무교회주의를 방어하였다. 그를 공격한 교회들은 장로

교, 감리교, 성결교, 안식교, 회중교회, 평양기도단과 기타 여러 기성교회 신

자들이 있음을 그의 [성서조선]에 실린 반박 논단들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은 그가 여러 교단의 공격에 대처해야 했던 어려움을 밝혀주는 것이다.

그는 드디어 1941년 8월 "나는 무교회주의자다" 고 선언했고, "무교회인의 진로

"(1941.10)를 제시해 주었다.

 

*** 무교회 주의 함석헌 ***

  장신대교수 : 한 숭 흥

 

"새종교, 하나의 종교, 참 종교가 필요하다. 있는 모든 것을 버리라는

말이 아니라, 살리라는 말이다. 그러나 살리려면 일단은 버리고 높은 자

리에 올라가야 한다. 이러한 기대를 가지고 오늘의 종교를 보면, 한편에

서는 벌써 동이 트는 것이 보이나 대부분은 멀었다. 아마 과거에 언제나

그랬던 것같이, 기성 종교는 그대로 화석이 되어, 역사의 지층 속에 남

고 말 것이다. 그들은 돌같이 굳어진 신조만을 주장하고 경전의 해석은

기계적으로 되어 생명을 자라나게 못하는 도리어 얽매이는 줄이된다."

- 인생과 역사 중에서-

 

I. 글머리

무교회주의자들 가운데는 그들의 무교회주의 운동의 활동 정도가 매

우 적극적이었던 사람들로부터 청년기에 잠시 이 운동에 가담했다가 거

의 발을 뺀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그들의 사상 밑바탕에는 항상 무교회

주의, 즉 교회무용론 및 지고의 선으로서 하나님의 본체에 대한, 엄격한

의미에서 보면 기독교의 신 개념과는 거리가 먼, 그러한 기독교 이해를

계속했던 흔적들이 있다.

이 장에서는 이런 무교회주의자들 가운데 특히 함석헌의 무교회주의 사

상을 중심으로 파헤쳐 해석해 보면서 무교회주의와 기독교 진리 본래의

신학적 문제를 살펴 볼 것이다. 그리고 함석헌의 종교이해 전반에 관해서

분석해 볼 것이다. 그의 신학사상은 (만일 어떤 특정 의미에서 붙일 수

있다면 )"씨알"-신학이라고 필자는 단정하며 이 들을 전개할 것이다.

 

II. 함석헌의 사상의 발전 과정

김교시느이 무교회주의 사상에 관한 이해에 이어 우리가 다루어야

할 또 한 사람의 무교회주의자는 함석헌이다. 그는 몇년 전까지만 해도

사회참여의 신념과 행동하는 지성의 한 표본으로서 한국 사회와 그 역사

안에서 많은 흔적을 남겼다. 또한 그는 몇번이나 사상적 변신을 거듭하면

서도 무교회주의적 기독교 신앙은 굳게 지켰기 때문에-물론 말년이나 무

교회주의 사상 자체가 거의 무종교주의 내지 유물론적으로 바뀌기는 했지

만 -그의 기독교 사상은 언급할 의미를 지닌다.

우리는 무교회주의 대표자의 한 사람인 함석헌의 사상을 논할 때, 무엇

보다도 그의 인물상을 살펴봄으로써, 사상의 핵심을 꿰뚫어 볼 수 있을

것이다.

함석헌은 1901년 3월 13일 평안북도 용천의 바닷가 마을 사점에서 한의

사 였던 함형택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 부터 민족주의 정신과

기독교 정신으로 충만되어 있던 집안 친척 어른들의 영향을 받았다.

특히 삼촌인 한학자 함일형을 통해 민족주의 정신과 기독교 신앙이 조화

된 원형의 이념으 체득했다. 함일형은 그의 이름을 지어 준 사람이기도

하다. 이러한 인연과 사상의 영향 때문에 함석헌은 함일형을 그의 생애

에서 "맨처음으로 정신적 스스이 된 이"라고 불렀다.

1916년에 평양고등보통학교 입학하여 장차 의학 공부를 하려는 포부를

갖고 공부하던 가운데 3.1운동이 일어났다. 그는 3.1운동이 없었다면

오늘의 함석헌이 아님을 고백하며 말하기를 "만일 3.1운동이 일어나지 않

았더라면 나는 입학 할 때의 생각 그대로 관립 평양고등보통학교를 졸업

했을 것이요, 그랬다면 의학을 했을 것이요"라고 했다. 그러나 3.1운동

대 평양고보에 연락하고 "독립선언서를 전날 밤중에 숭실학교 지하실에

가서 받아들던 때의 감각! 그날 평양경찰서 앞에 그것을 뿌리던 생각, 그

리고 돌아와서 시가행진에 참가했는데"바로 이 3.1운동이 그의 생의 지표

를 바꾸어 놓았다. 그는 그 당시를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만세를 부르고 난 후 한 반의 친국들은 거의 다 복교를 했다. 그리하여

그대로 보통학교가 훈도가 되고, 군 서기가 되고, 군수, 경부가 되고, 의

사, 변호사가 되었다. 그러나 나는 다시 학교엘 갈 수가 없었다...

머리를 들여 밀기가 우선 싫고,한번 박차고 나온 학교를 다시 갈 수가 없

고, 또 함께 운동했던 친구 중에는 아주 어디 간지 알 수 없어진 사람도

있는데, 의리상 배반이 되는 것 같아 다시 학교에 가서 자복하고 학교 다

니기는 싫었다... 그때부터 나의 일생은 딴길로 나가기 시작했다.

이렇게 하여 그는 3학년 때 평양고보를 중퇴하고, 21세 되던 해에 정주

에 있는 오산고등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하여 졸업을 하였다.

오산고보는 남강 이승훈 선생이 세우고, 고당 조만식 선생이 교장으로

있던 학교로서, 함석헌 스스로 고백하기를 오산고보에서 그의 사상 형성

에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이른바 오산의 3대 정신

을 의미하는 것인데, 그것은 오산학교를 이루는 3가지 요소였다.

그 첫째는 청산명호식의 민중 정신이요,

그 둘째는 자립 자존의 민족 정신이요,

그 셋째는 참과 사랑의 기독 정신이다.

오산학교에서 그의 사상은 남강 이승훈으로 부터 깊이 형성되어 갔다.

그가 받은 영향을 다음과 같이 말하곤 했다. "나는 거기서 처음으로<한글>

,<배달>,<한비>라는 말을 배웠다."

이 말은 그가 거기에서 민족사적, 민족정기적 차원에서 숭고한 의미를 깨

우쳤다는 의미이다.청년 함석헌에게 남강의 의미가 얼마나 컸던가 하는

것은 그의 독백이 증언하고 있다.

남강은 과연 조선에서 등촉이었다.

아마도 이런 솔직한 독백은 함석헌의 삶의 등불이 이미 오산학교에서 민

족주의적 교육을 통해서 불붙었던 것을 의미하는 표현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그 스스로 "조선에서 등촉"이 타며 밝힌 열과 빛을 더욱 불태워

밝히려 했던 것을 담은 의지의 표현이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남강의 죽음을 함석헌이 "외로운 촛불이 꺼져 버림"으로 표현한 것도 이

런 맥락에서 보면 그의 앞으로의 행위를 말해주는 시사적 의미가 있다.

그에 삶에서 세번째 영향을 준 사람을 그는 유영모라고 했다. 함석헌은

유영모로부터 그의 후기 사상인 "씨알"의 개념을 깨우쳤고, 그 씨알의

열매가 그후 반세기 후에 "씨알 농장"에서 자라 결실맺엇던 것이다. 이른

바 씨알의 소리를 통한 "씨알=민중"이라는 민중주의적 현실적 이념들이

었다.

네번째로 그의 삶을 변화시킨 정신적 스승은 일본의 무교회주의자 내촌

이었다. 함석헌은 오사고보 재학 때에 유영모를 통해 내촌에 관해서 약갈

알고는 있었으나, 내촌의 문하생으로 들어가게 된 것은 매우 우연한 일이

었다. "어느날 우연히 한 학교에 있는 김교신 형이 우찌무라 모임에 나가

는 줄을 알게됐다. 그래 곧 그의 소개로 선생의 문하에 가게 되었다." 고

그 동기를 분명히 밝히면서, 그러나 내촌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고 고백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영향은 [성서조선]을 통한 문서 활동에서 절절이

충성된 종으로서의 임우수행처엄 나타나곤 했다.

다섯번째로 그는 간디(Mohandas Karam-chand Gandhi,1869-1948)의 비폭력

, 무저항 해방운동, 곧 평화사상을 가장 위대한 정신으로 받아들였으며,

간디고 기독교인이 안된 것이 인도가 인도된 것으로 극찬할 정도로 간디를

숭배하엿다. 간디 숭배는 그의 1969년대 이후에 이른바 '실천하는 양심'으

로서 그의 사회참여에서 나타나곤 했다.

여섯번째로 그가 받은 영향은 퀘이커(Quaker)이다 .반전사상은 그에게 더

할 나위없는 고귀한 정신이었고, 그것을 그는 기독교의 다른 사상에서, 즉

장로교나 감리교나 기타 교파에서 발견하지 못하고 퀘이커에서 얻었다고

한다. 그가 무교회주의를 버리고 유교주의로 기울어지는 듯한 후기의 함석

헌주의는 바로 제도적 교파 교회인 퀘이커 교단에 참여하면서 였다.

무교회주의를 버리느냐 반전 평화주의 표방하는 퀘이커교회를 버리느냐, 가

함석헌에게 던져진 시험이었다.

일곱번쩨로 그는 장준하를 알게 되면서 한국적 사회상황과 [사상계]의 날

카로운 비판의 소리를 내면서 잘 우는 장준하만큼 소리치며 가슴의 눈물,

머리의 눈물을 쏟곤했다. 대충 이 런 사상들이 함석헌을 만든 것이다.

무교회주의자인 함석헌에 관한 신학적 분석을 그의 정치사회적 관심이나

활동과 직결시켜 연구하는 것은 자칫 잘못 이해하면 함석헌의 민중운동 자

체를 비판하는 것처럼 보여질 우려가 있으므로 여기에서 무교회주의 운동

가로서의 함석헌 만을 논할 것이다.

청년기의 함석헌과 1960년대 이후 사회참여에 뛰어든 함석헌은 별도로 연

구할 수 있을 만큼 인간 함석헌 자신은 여러번 변신했고 그때마다 새롭게

탈바꿈을 한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우리는 그에 관한 전기적 연구를

또 다른 연구의 과제로 남겨 놓을 수 밖에 없다.

 

III. 함석헌의 무교회주의 사상

함석헌의 무교회주의 사상은 내촌감삼의 영향을 깊이 받은 내촌 문

하의 조선 유학생 6명이 1927년 7월 1일 부터 창간한 [성서조선]에 단편

적 글들을 발표하면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대체로 아주 짧으

나 당시로서는 아주 어려운 함축적 언어를 사용하면서, 때로는 은유적 화

법으로 글을 이어가는 작가적 면모를 보여주었다. 그의 필치는 조선 기

독교의 부정적 측면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것으로 특징지어진다.

1930년12월 [성서조선](제23호)에 발표한 "참구세주"란 그의 글을 2면에

불과한 짧은 논단이지만 여기에는 아주 명백한 무교회주의 사상이 직설적

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 글에서 함석헌이 말하려는 저의는 예수 그리스도

의 구주성이 현실적, 일시적 구주됨이 아니요, 영원적, 영적 구주됨임을

강조하려는 것이었다.

그에 따르면 진정한 예수, 참된 구세주에 대한 신앙이나 헌신은 어떤 형

태의 형식주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결국 오늘날의 제도적 교회는 무

용함을 역설하려는 것이었다. 더욱이 1930년대라면 이용도를 비롯하여

여러 부흥사사들이 조선 방방곡곡을 누비며 열과 성을 다해 집회를 인

도하며 문자 그대로 신앙부흥의 열기가 드높았던 때요, 많은 조선 기

독교 신자들이 뜨거운 성경 강림을 체험했든 조선 신앙 부흥의 절정기였

다고 할 수 있을 때인데, 이 때 그는 과감히 이렇게 외쳤다.

기독교의 기를 세워 만인 을 모으려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본의에 합한

것일까. 그리스도는 교회다으이 문을 넓이는 것을 보고 칭찬할까. 음악

연주를 하여서 전도를 하는 것을 과연 영리한 일아라고 할까.

재단법인을 조직하여 기초를 든든케하려 노력함을 상줄가. 연합회를 조직

하고 영육병진하는 교화운동을 니르키려함을 아름답게 볼까. 도대체, 우

리가 손목을 잇끌어 교회당에 자리를 채우려함을 허락할가.

교회의 본래 기능에 대한 이러한 강한 회의 속에는 만인구원을 외치며,

"어느 누구나 주께 나오라 어서와서 주의 말씀 들으라 하늘 아버지가 오

라하시니 어느 누구나 오라"고 외치며 만인을 모으려는 기성 교회의 전

도와 선교를 부정하느 교회무용 사상을 깊숙이 깔려 있다.

교회무용론을 이토록 강하게 주장하면서 함석헌은 교회주의에 대한 비판

을 여러 측면에서 시도하였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1) 무교회주의는 이론적 주장이 아니라 역사적 주장이다.

2) 교회라는 일 단체의 도덕적 세럭에 의하여 사회구제를 하자는 피상적

인 생각이 대부분이다. 그러면서도 이름은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에 빈다.

여기 현대교회의 바리새적 위선이 들어있다. 교회주의는 바리새주의다.

3) 사회적 필연성의 소이로 조직적 교회를 시인하려 함은 분명히 비그리

스도적이다.

4) 교회의 중심으로 하면 신앙이란 복종이다. 교회의 명령에 복종치 않

고 성경을 정해할 수도 없고 합당한 생활을 할 수 도 없다. 교회의 의견

으로 하면 신앙은 공포에의하여 성립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이

다.

5) 영적인 진리에 직접 접하는 사도시대에 있어서 의식이라 말할만 한

것은 별로 없었다. 세례와 주의 만찬이 있었으나 보다 상징적 의미로 할

뿐이오 의식 그 자체안에 무슨 효과가 있다는 사상은 없었다. 그런 것이

조직이 점점 복잡하여감을 따라 단순했던 의식에 종종 마법적 의미가 붙

게되었다. 세례의 물 그것 안에 영생을 주는 능력이 있고 축복 후의 떡

은 실질적으로 그리스도의 살이 된다고 하는 등이다. 지금 보면 분명히

미신이지만.

6) 무교회주의자로 하여금 개성의 존엄을 새로히 부르짖게 하는 것은 개

인주의가 아니오 교회라는 물질적 권위 하에 인간을 굴복시키라는 교회주

의다...교권에 반대하는 이유로 무교회주의를 개인주의라 하는 것은 교회

를 가지고 생명인 사랑에 의한 단체로 알지 않고 권력에 의한 지배관계

의 단체인 것처럼 오해하는 인간주의에서 나온 말이다.

이상의 무교회주의 사상에 대한 체계적 본질규정은 교회주의 대한 비판과

부정을 통해서 더욱 부각되었으며, 함석헌 자신의 무교회주의에 대한 강

한 입장이 반영되어 있다.

여기에서 독특한 것은 교회주의에 대한 강한 비판과 동시에 무교회주의에

대한 강한 비판과 동시에 무교회주의에 대한 명료한 입장 표명이다. 함석

헌은 교회한 마치 악마적 권위로서 신앙인을 위협하고, 협박하고 금전적인

것을 수탈하기 위해 인위저인 미신적 의례를 신성한 효험과 신의 본체로서

믿도록 강요하고 계속 복종을 강요하는 집단으로 분석하면서, 이런 이유로

"교회주의는 바리새주의"라고 비판하였다.

어떤 면에서 보면 함석헌의 무교회주의 사상은 그의 동료였던 김교신의

무교회주의 사상보다 더 강도 높은 것이며, 더 철저한 교회증오적 경향

을 띠고 있다. 그는 교회가 영혼구원을 위해서 전도를 하고, 신앙향상의

한 방도로서 부흥집회를 갖는 것 자체도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고 있으며,

더욱 위험스러운 사상은 삼위일체론이나 세례, 성찬까지도 미신으로 보는

매우 과격한 주장을 하고 있다.

무교회신앙이란 하나님만을 알자는 신앙이라고 즉 바울이 가르치고 루터

가 주장한 그대로,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신앙 그대로를 가지

자는 것입니다. 신앙에는 본래 형용사가 붙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

앙은 오직 하나뿐입니다...하여감 무교회 신자라는 명칭을 듣는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십자가를 믿습니다. 그러나 삼윌일

체른이 어찌되었던지 그리스도론이 어찌되었던지 거기 대하여 별로 깊은

흥미를 느끼지 않습니다. 세례의 필요를 느끼지 않고 축도에 의하여 성찬

떡이 변하여 그리스도의 살이 되며 그것을 먹어서야만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는다는 말은 분명한 미신으로 생각합니다.

위 주장들은 대체로 그의 무교회주의론의 요지들이며, 그의 주장의 핵심

들이다. 간추려 보면,

1) 만인을 교회당에 모으는것, 즉 교회주의가 그리스도의 본의는 아니다.

2) 무교회주의는 역사적이다.

3) 무교회주의는 교권에 반대한다.

4) 교회주의는 바리새주의다.

5) 조직적 교회는 미그리스도적이다.

6) 누구나 성경강해를 할 수 있다.

7) 삼위일체론, 세례,성찬 등을 비롯한 교회의 모든 의식은 미신이다.

8) 신앙은 오직 하나뿐이다.

IV. 함석헌의 무교회주의에 대한 비판

위에서 간추려 본 함석헌의 이러한 30대 청정년기의 패기 넘친

교회 비판은 어떻게 보면 별론 반론할 가치가 없는 공허한 주장에 불과

할뿐이다. 왜냐하면 사범학교를 나온 그는 김교신과 마찬가지로 신학을

공부하지는 않았고, 신학에 대한 전문 지식도 갖고 있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내촌을 통해서 비뚤어진 기독교 이해를 수용하는 잘못

에 빠졌기 때문이다.

아주 예리한 신학자들 마저도 신학논쟁에 쉽게 빠져들기를 꺼릴 정도로

해석의 다양성과 이해 측면의 차이로 오는 수용의 가능성에 큰 쟁점이

되곤하는 문제들에 관해서 그가 감히 필을 휘둘렀던 용기(?), 즉 그가

교회론과 심지어 기독교의 핵심 교리에 속하는 삼위일체론이나, 세례 및

성찬의 본질과 의미, 그리고 신앙론에 관해서 왈가왈부 했던 것 그 자체

가 매우 용기있는 만용이 아니었는가 생각된다.

우리는 여기에서 그의 신학지식의 깊이나 넓이, 혹은 그의 기독교의 본

질에 대한 전문적 이해지평에 관하여 계속 논증하는 것 자체가 별로 의

미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더 이상 그의 기독교 이해가 옳으냐 그릇된

것이냐에 관하여 논할 필요는 없다. 다만 그가 기독교의 본질에 대하여

이해하고 있는 것은 매우 위험스러운 것일 뿐만 아니라, 이단적인 것이

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교회는 물질적 권위 집단이 아닐 뿐만 아니라,"선남선녀의 주머니를 엿

보는" 인간주의도 아니다. 함석헌의 교회 이해는 너무 부정적이며, 마치

유물론자 루드비히 포이 에리바하(Ludwig Feuerbach)보다도 더욱 맹렬

하게 기독교를 비판하고 있으며, 마르크스(Karl Marx)와 엥겔스(Friedr

ich Engels)의 종교 발생론과 유사한 설명을 하고 있음에 경악을 금할

수 없다. 함석헌 자신은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벗은 몸으로 십자가에 달렸다. 승려들은 그 위에 현란한

법의를 덮으며, 그 앞에 향을 피워 그리스도에 대한 존경을 하는 줄로

아나 그는 인간주의밖에 안된다. 거기 의하야 그는 일개 예술적 도취욕

의 만족을 얻던지, 그렇지 않으면 관료적 자만감을 느끼던지, 또 그렇

지 않으면 황홀하는 선난선녀의 주머니를 엿보는 것밖에 없다.

그런데 그의 주장대로라면 기독 교회의 성직자들은 예술적 도취욕에

젖은 미학적 신비주의자들이거나, 지배충동에 젖은 권력주의자들이거나

지배충동에 젖은 권력주의자들이거나 교회를 찾는 성도들에게 하나님께

헌금해야한다는 구실로 기만적으로 재물을 빼앗는 고등수법의 약탈자일

뿐이다.

어쨌든 지금까지 그의 기독교 이해를 통해서 볼 때 그는 기독교 개혁주

의자도 아니고, 혁신적인 교회주의자도 아니며, 철저히 교회무용론자요,

성직혐오자였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는 교회가 제도적이라고 하면

서 부정하였고, 기독교의 교리와 의식이 미신적이라고 역설하면서 부정

하였다. 또한 성직은 심미적 황홀결, 관료적 자만감 혹은 경제적 수탈

등의 목적 때문에 생겨난 인간주의라고 하면서 부정하였고, 전도는 그

리스도의 본의가 아니라고 하면서 부정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유일하게

역사적이라고 주장하며 역설하였다. 과연 기독교 없는 무교회주의란

가능할까? 그러한 무교회주의가 과연 기독교적일까?

 

V.함석헌의 "교회론"에 대한 분석적 비판

여기에서 우리는 그가 [성서조선](제86호,제87호)에 발표한 그의 논단

"무교회"를 8가지로 분석하면서 비판을 시도해 보도록 하자.

1) "교회절대필요론자와 교회무용론자는 다같이 한 성경과 한 역사에 자

기네의 논리를 발견할 수 있다" 고 역설함으로써 교회무용론이 마치 성

서적으로 증명될 수있는 것으로 - 성서적 근거를 증명될 수 있을 것으로-

성서적 그거를 제시함이 없이 -주장했다.

2) "무교회주의는 이론적 주장이 아니라 역사적 주장이다"라고 역설하면

서 무교회주의의 역사적 근거,뿌리,근원을 강조하엿으나, "무교회신앙과

조선"이란 글에서는 "무교회신자는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이 황야에 떨어

진 마적의 아들같은 것입니다"라고 하는 혈통으로 상징된 기독교의 역

사와 전통을 부정하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무교회주의는 이론적 주장이

아닐 뿐만 아니라 역사적 주장도 아니고, 오직 뿌리없는 주장임을 암시

하는 자기 모순을 갖고 있다.

3) 교회 안에 있는 인간주의, 이것을 교회주의라고 한다. 무교회주의는

바로 이러한 교회주의를 비판한다고 하면서 교회 자체를 전적으로 부정

하고 있으며, 나아가 교회성을 부정하고 있다. 이 점 때문에 무교회주의

자들을 이단으로 정죄한 것이다.

4) "그리스도만으로 서는 것이 참 교회다. 복잡한 조직이 필요치 않다.

조직은 인간주의의 표현이다"라고 갈파하고 있는 함석헌은 사회적 존재

로서의 인간은 항상 2명 이상이 모여 사회를 이루고 상부상조하며 공존

한다는 사회학의 기초적 이론이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

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18:

19-20)고 하는 그리스도의 교회조직 권면을 알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모이는 교회, 즉 "조직적 교회를 시인하려 함은 분명히 비그리스

도적 생각이라하지 않을 수 없다"는 과감한 교회부정론을 주장하고 있

으나 사도행전1:12-26까지의 내용 가운데 모이는 교회와 직제의 선출

방식(예수를 배반한 가롯 유다 대신 바사바의 요셉과 맛디아 두명을 놓

고 제비뽑아 맛디아를 열한 사도에 가입함)을 분명히 알지 못했던 오류

에서 온 주장이다.

5)" 천국에는 계단을 집고 올라가는 것도 아니오 단체로 할인하야 들어

가는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라는 유일한 안내자의 말을 듣고 단거름에

도약하여 들어가는 것이다. 쉬운 계단이 있는 것 같이 단체로 가면 값

싼 것 같이 말하는 것은 성전을 변하여 상점을 만드는 교권자의 일이다.

라고 교회의 존재성을 부정하고 있는 함석헌은 여기에서 이미 그 스스

로도 모르게 가톨릭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옳겨가고 있는 좌충우돌의 오

직 도전만을 내세우고 있다. 면죄부 판매에 대한 마틴 루터(Martin

Luther) 의 비판과 95개조의 논박을 연상시키는 함석헌의 소리를 과연

무엇을 주장하기 위한 소리며, 무엇을 하자는 주장인가? 무교회주의자

들이 모여서 성서 연구를 하는 것 자체가 두세 명이 그리스도의 이름으

로 모이면 교회가 되고 거기에 그리스도가 임하는 것이라는 예수의 말

씀에 비추어 볼 때 무교회주의자들은 논리상의 모순에 빠져 있다. 교회

가 천국행의 단체 할인을 주장했다는 그의 비판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실제로 교회주의자들이 천국행의 단체할인자들, 즉 기성교회들에서는

이단으로 정리되 뿐이다. 요즈음은 사이비 기독교 이단종파들(사실 이

들은 기독교로 보기 어렵다)이 이 루터를 격분시킨 면죄부 신앙식으로

구원받는 단체할인 혜택과 유사한, 어이없는 주장을 하며 순진하고 소

박한 신자들을 우롱하는 예를 종종 볼 수 잇다. 하지만 이런 현상들은

정통 기독교의 본래 교리도 아니요, 교회들이 모두 이런 것도 아니다.

6) 함석헌의 무교회주의는 교회성을 부정하는 점에서 오히려 그가 "교

회주의는 개인주의다"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던 바로 그런 개인주의가

아니겠는가. 그는 분명히 논리상 혹은 이론상으로는 신비주의적 요소를

그의 글에서 나타내고 있다. 그가 그렇게 이지적이며, 스스로 기독교

,유교, 도교, 불교, 힌두교 등을 비롯하여, 톨스토이, 트루게니에프,

이브센,괴에테,실러,로망 롤랑, 윌리엄 블리이크, 니이체. 베르그송,

그리고 H.G. 웰즈, 타고오르, 카알라일, 라스키, 슈바이쩌, 그뿐만 아

니라 동경사범에서 역사, 도덕, 교육을 전공하엿던 그는 "역사에서는

그때 한창 성한 공산주의의 유물사관을 전혀 눈감고 아니라 할 수 없

어 알대로 알아보려 애썼다."(그러나 그가 역사학을 전공했고. 특수

사상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점이나, 그의 사상에서 민중사상, 평민주의

등등을 연관시켜 모든 사상의 맥을 찾아 보면 그는 공산주의을 비교적

많이 공부한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그가 60년대에 글을 쓰면서 공산주

의 사상을 학습했다고 할 수 없던 한국의 사상적 분위기는 그가 단 몇

줄의, 그것도 매우 용기있는 솔직한 표현으로 나타낸 것은 그 표현 이

상의 마르크스 레닌사상 학습을 추론케하고도 남는다). 그리고 간디.

셀리, 크롬웰.밀턴. 오코넬, 위어즈워어드, 브라우닝,버나드 쇼오,

부커,워싱톤, 그 외에도 루터나, 룻도, 페스탈로찌를 비롯하여 수많은

인류의 지성인들의 사상을 넘겨 받은 이성적, 이지적, 사상적 함석헌

이 신비주의가 무엇인지 몰랐을 리 없으나, 그는 신학을 공부한 적이

없는고로 신비주의의 기초적 증상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가운데 신비주

의적 사상을 갖게 된 것이다. 그의 글에서 직접 그 사실을 인용해 보

도록 하자.

그는 "예수의 종교는 원격의 종교가 아니요 면접의 종교이며, 신비의

종교가 아니요 평이의 종교다. 사람을 하나님에 접근시키는 것일수록

진리를 수식없이 간명하게 들여내는 것일부혹 진리"라고 분명히 언급

했다. 신비주의란 신인합일의 감정이며, 특히 기독교 신비주의자들 가

VI. 무교회주의에서 종교대상주의로

만일 그의 명제에 대한 우리의 해석과 이해를 거부한다고 하면, 그

의 자기자신 부정론은 문자 그대로 "언제든지 부정적이자는 주의"에 빠져

고차원에서 표출된 이지적 허무주의(intelledtueller Nigilismus)이거나

현실주의적 염세주의(realistischer Pessimismus) 여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언제나 부정하기 위한 부정주의로서의 무교회주의는 종국엔 기

독교 자체 마저도 부정하게 되며, 결국 모든 종교는 동일한 도덕륙이나

세계관에 불과할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 유일주의까지 부정하고 종교상대주의 및 종교다원주의로

발전되어 모든 종교는 동일하다는 주장으로 귀결된다.

여기에서 함석헌의 무교회주의에 대한 객관적 이해를 위하여 그의 글을

직접 인용한다.

나는 학교(1924년,동경고등사범학교)에서 전공하는 것이 역사, 윤리,

교육이었으므로 그 방면의 책을 읽어감에 따라 종교를 차차 과학적인

자리에서 보게 되엇다. 그럼에 따라 기독교는 결코 유일의 종교가 아니

요 종교 중에 하나라는 것을 부인하지 못하게 되었다.

[성서조선] 사건(1942)으로 서울 감옥에 있는 동안 불교경전을 조금 읽

읽었다..그러는 동안에 불교와 기독교는 근본에서 다른 것이 없다는 생각

이 들었다.

피란 중 (1950년 6.25전쟁때)에...인도교에 대해 처음으로 알게됐고 읽

을수록 종교는 하나라는 생각이 분명해 졌다.

나는 지금 (1964년) 종교는 하나다 하는 생각이다.

1936년 4월 [성서조선]에서 무교회주의는 부정주의라고 선언한 다음,

"기독교는 결코 유일의 종교가 아니요 종교 중에 하나"라고 진술한 것

은 그의 종교관을 솔직히 수면 위에 또 올려 보여준 솔직힌 신앙고백이요,

믿음 자체였다.

여기에서 우리가 발견한 것은 함석헌의 무교회주의는 김교신이 철저히

기독교 울타리 안에서 , 즉 "성서와 조선" "성서를 조선에", 그리고 "조

선을 성서 우에" 설립하려던 철저히 기독교 중심주의인데 반하여 (함석헌)

은 종교상대주의적으로 기울어진 것이다.

종교상대주의 이론에서 볼 때 그의 무교회주의는 실상인즉 "무종교주의"

로 명칭이 바뀌어져야 할 것이다. 그것은 무교회주의가 교회의 의식, 제

도를 부정하면서 무교회주의를 표방했던 논리로 볼 때, 모든 종교는 전통,

성직,의식, 제도 등을 갖고 있다는 점에소 그것을 벗어난 무종교주의가 되

어야 할 것이 아닌가. 그의 사상의 진행과정은 교회주의(6,7세때)-무교회

주의(24,5세때)-기독교 유일종교성 부정(24,5세때, 고백은 1964년)-종교

상대주의(1964년 이후)-무종교주의(1964년 이후)- 탈종교주의 (1964년

이후)- 도덕종교주의 (1964년 이후) 로 진행해 가는 과정을 갖고 있었다.

물론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각 주의로의 이전과정의 연대가 그의 새로운

종교사상의 출현시기와 동일하지 않다고 하는 것은 사실이다. 다만 여기

에서 우리는 그의 전기에 표현된 것을 기초로 하여 산출한 것이므로 그가

각 종교주의를 갖게 된 식를 그의 전기에 발표되기 훨씬 이전일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의 종합적 사상을 통해서 추리해 볼 때, 이런 진

행과정의 궤도로 갈 경우 틀립없이 탈종교주의 선언이나 무신론선언으로

최종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는 소지가 없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

는 것이다.

우리가 여기에서 그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던진다면, "왜 당신은 무교회

주의자로나마 기독교인으로서 일생을 살아왔는가? 모든 종교가 하나라면

특정 종교에 머물러 있다는 것 자체가 교조주의적 신앙에 빠진 특정 종교

절대주의자일진대 그것은 모순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을 그는 그의 삶으로 표현했다. " 이단은 없다. 누구를 이단이라는

말만이 유일의 이단일 것이다"

모든 종교가 하나라면 모든 종교의 교리상이나 제도상의 종파들은 하나

같이 같을 수밖에 없고, 그렇다면 어느 종교의 어느 종파든지 이단일 수

없고, 모두 정통이요, 법통이요, 전통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그는 왜

교회주의는 배척하는가? "이단은 없다"고 한다면 모든 종교는 정통이요,

기독교의 모든 종파도 모든 정통인한, 기독교의 이단은 없다고 해야할 것

이다. 그는 바로 이점을 강조하여 인정했다. 그것이 그의 이 "하나의 세계"

(그의 자서전 가운데 소제목)선언은 결국 그가 어떻게 이해했더지간에 그

를 이단으로 비판했으며, 그가 기독교를 멀리하게 만들었다. 그는 거의

울분에 치를 떨며 욕설에 가까운 강한 어조로 교회의 비판에 비판을 거듭

하고 있다.

교사, 목사, 신부치고 고린내 아니 나는 것 있던가? 사범엘 들어가고 나

서야 그것을 느껴서 이런 데를 왜 왔나 후회했다. 대학에 가서 자루없는

칼을 받아 가지고 잘못해 몸에 상처를 내고 사람을 잡는 한이 있더라도

차라리 한번 자유로운 연구를 해보았으면 하는 맘이 간절했다. 대학에서

잘못된 지식을 가지고 사람을 해하는 것이 칼로 죽이는 거라면 교사,목사,

신부가 죽이는 것은 목아지를 비틀음이요, 입을 막고 코를 막아 숨이 차

서 죽게 함이요. 가스로 독살하는 셈이다. 그 노릇을 하다니! 내가 죽을

때 후손을 위해 유언하는 일이 있다면, 백대 천대에 경찰관 노릇을 애여

해먹지 말라 하겠다고 말한 일이 있었지만, 거기 한마디를 덧붙일 여유

가 있다면, 신부, 목사,교사를 거기 넣을 것이다.

 

VII. 함석헌과 칼 마르크스

[성서조선]의 공헌을 말한다면, 일제치하의 어려운 정치,경제,사회

문화 여건 속에서도 조선인의 손으로 15년동안 지속해왔다는 것이다. 그

러나 성서연구를 위한 순수 신학전문지로서의 [성서조선]은 한국 기독교

의 신학발전에는 거의 공헌한 바 없기 때문에 한국기독교사에 어떤 강한

영향을 주지 못하였단. 성직제도 반대, 성찬예식 반대. 성서의 정경성 반

대, 일본직으로 토착화하려는 내촌적 무교회주의 주장, 무교회 신앙형태

고수와 기성교회에 대한 부정, 극단적 부정주의, 성서해석자유권 주장,

개성주의 반대 종교동일동질론 등을 내새웠을 때 무교회주의가 정상적인

기독교신학의 한 신학이론이나 주의로 수용되기 어려웠던 것이다.

기성 교회들은 교파를 초월해서 무교회주의를 이단으로 정죄하였으며,

심지어 그들과의 접촉도 원치 않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무교회주의자들의

이론은 [성서조선]의 호수가 거듭할 수록 극단화, 과격화해가면서 초창기

에는 가톨릭주의적 교회 이해를 비판하던 상황에서(마치 루터의 "교회

안에서만의 구원론"에 대한 비판정신처럼),교회 자체를 부정하는데까지

발전해 가다가 심지어 함석헌에 이르러서는 기독교 자체에 대한 부정,

즉 무기독교주의로 발전해 나갔던 것이다. 그는 한걸음 더 나아가가

기독교와 불교의 동일시(1942년), 그리고 모든 종교는 동일함(1950년)을

선언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곧 무종교주의로 옳겨갔으며, 말기에 이

르서는 무신론적 유물론으로 발전에 발전(?) 을 거듭하였다. 그는 말하

기를 ,

맨 처음의 교회의 힘은 어디서 나왔을까?

하나는 예수의 인격적인 생명의 힘에서요,

또하나는 밖에 대해서 자기네가 절대로 힘

없음을 스스로 느낀데서 일 것이다.

위의 진술은 인간이 자연에 대한 두려움과 힘없음(약함)때문에 인간이

초자연적 위력,즉 종교를 창출했다는 주장이다.

소년기에 (이미6.7세 때 부터 기독교 접함) 유신론자였던 함석헌이 말

년에 철저한 무신론으로 변신한 것은 이른바 "무신론 선언"이라고 할 수

있는 "빵이냐? 말씀이나?"란 글에서 분명히 선언되었다. 그의 무신론

선언서 같은 이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핵심을 이루고 있다.

기독교 신자라는 사람들은 툭하면 사람이 빵으로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 하는 말을 한다.

이 말 때문에 허다한 사람이 육신으로 굶어죽고 정신으로도 굶어죽는다.

그 말씀은 성경책도 신부,목사의 설교도 아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

이라면 종교의 경전, 종교가의 설교로 안다. 그렇게 가르친 것은 신부

들이요, 목사들이다. 그들은 이것이 참 사는 하나님의 말씀이지 빵으로

는 못산다고 입에 침을 말려가면서 책과 말을 순진한 농사군에게 주고는

그 손에서 빵을 빼앗아, 돌아서서는 제가 먹는다...빵이 정말 먹고 사는

것이 못된다면 저는 왜 먹었나? 밥 아니 먹고 산 종교가가 이날껏 한

사람도 있었나? 성경만 보고 산 신자가 이날껏 하나이나 있었나?

그의 선언의 첫째 명제는 결국 성직계급이 인민 대중을 종교의 이름을

팔아 착취한다는 것이다. 함석헌은 마르크스-엥겔스의 종교 생성과 소멸

의 5단계설과 거의 유사한 주장을 하고 있다. 변증법적 유물론에서의 종

교생성 제2단계에서 종교는 "자연을 정복하려는 인간의 의지에서 생성된

것이 아니고, 오히려 지배자의 권력을 보강하기 위한 수단이었으며, 따

라서 종교는 인민 대중에 대한 사회적 억압과 착취의 수단이 되었다고

한다. 이 때에 이미 지옥과 천당이라는 내세의 두 세계 개념이 생겨났다

고 한다... 종교라는 미신적-망상적 도구를 내세워 억압, 착취, 지배를

했다고 한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셋째 단계에서 종교는 "성직자들의 기

만의 결과"(Folge priesterlichen Betrugs)로 보기도 한다.

무교회주의에서 무종교주의로, 그리고 종국에는 무신론으로 변신한 함

석헌의 철저한 무신론적 웅변은 거의 흥분된 감정이 섞여있다. 그는 계

속하여,

예수는 말을 입으로 한 것이 아니요, 몸으로 했다. 그래서 자기 말이란

말을 '내살을 먹고 내피를 마셔라'했다. 그가 피땀흘려 한 말씀을 몇주

일 교회에 가고, 몇해 신학교에 건들건들 다니고는 제 거나 되는 듯 팔아

먹으련는 놈들, 그리고 다른 사람이 제 딴으로 조금 얻은 것 있어 그것을

증거하고 그 때문에 참이 뭔지 아는 민중이 조금 거기 귀기울이는 것 보

면 제 편에서 저건 가짜라고 큰소리치는 놈들...천당이 있는지 없는지 내

모르지만, 설혹 밑에 들어가는 날까지, 언제 한번 그 흙을 만져 본 일도

없고, 일생 70년 하루도 빠짐없이 또박또박 먹는 밥을, 그 벼를 언제 어

떻게 심으며 그 쌀에 물을 얼마나 두는지 한번 알아도 보지 않는 놈은, 그

천당에 절대 가지 못할 것이다. 기적기적, 권능 권능 하지만 흙에서 밥을

만들어내는 이거야 말로 권능있는 기적 아닌가?

이러한 기적, 즉 그가 주장하는 실천적 생활 상태에서 성취되는 삶의 정

황이 이루어지면 종교도 없어질 것이다. 아니 그의 주장에 따르면 결국 종

교는 사라질 수밖에 없다.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내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것을 말하면 그것이 사랑의 원리인 줄 믿

듯이 나는 내 믿는 바를 말하면 그것이 보편적. 종교적인 것인 줄 믿는다.

이 말은 유물론자가 물질만이 절대적이라고 믿는 바를 말하면 그것이 유

물론자의 보편적. 종교적인 것이라는 뜻도 된다. 그래서 함석헌은 좀더 명

료하게 "같은 진리가 기독교에서는 기독교식으로 나타났을 뿐이다"라고

강조하여 단정하였다. "흙에서 밥을 만들어내는 것"을 전능잇는 기적으로

믿는 자는 과학적 유물론을 종교로 신봉하는 신자가 아닐까?

위의 문맥에서 우리는 함석헌의 종교 이해,즉 성직계급에 대한 이해는1)

성직자들은 민중을 착취하는 불로계급이며 2) 성자들의 이름을 팔아먹으

면서 민중을 기만하고 속이면서 철저히 배타적인 계급이며 3)그 스스로는

내세가 진정 있는가 의심을 하는 회의주의에 빠져있으나 민중착취의 수단

으로 천국과 지옥이 있다고 강조하며 4) 종교에서의 권능이나 기적이란 없

고 오직 있다면 물질적 형성, 식물의 배아와 결실현상이 기적일 뿐이라는

내용으로 약술됨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마르크스-엥겔수의 유물론적 종교

비판과 동일하다.

함석헌은 위에서 개관해 보았듯이, 공산주의의 종교생성과 소멸의 5단계

설과 거의 동일한 주장을 하고 있다. 공산주의의 종교생성과 소멸의 5단계

설에 의하면,

1) 인간은 그들이 필요에 의하여 그리고 환상 (Phantasie)에 따라 초자연

적 위력을 창출해냈다.

2) 종교는 지배자의 권력을 보강하기 위한 수단이었으며, 인민대중에 대

한 사회적 억압과 착취의 수단이 되었다. 즉, 종교라는 미신적-망신적 도

구를 내세워 억압, 착취,지배를 했다.

3) 종교는 성직자들의 기만의 결과(Folge priesterliche Betrugs)이다.

4) 종교의 도움으로 착취계급은 노동자들의 현세적 고통은 천국에서 보

상받으며,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하나님의 시험이라고 기만하며 지

배와 착취의 정당화를 시도했다.

5) 인간의 실천적인 생활상태가 자연과의 이성적인 관계들을 늘 철저하

게 제시하는 한 이 세상에 종교는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

마르크스는 그의 신앙 변천과정을 다음과 같이 고백한 바 있다.

하나님이나의 첫 신앙이었고, 이성이 나의 두번째 신앙이었으며, 인간이

나의 세번째요 마지막 신앙이다.(Gott war mein erster Glarbe, die

Vernunft nein zweiter, der Mensch mein dretter und letzter).

마르크스의 무신론적 종교비판의 주형(Matrix)을 함석헌의 무교회주의적

종교비판에 적용시켜보면 똑같음을 쉽게 알 수 있다. 함석헌의 고백형식

을 빌어 표현해 보자.

'하나님이 나의 첫 신앙이었고, 세계종교, 문학, 철학, 사상 등의 지성

이 나의 두번째 신앙이었으며, 씨알이 나의 세번째요 마지막 신앙이다'

그가 자서전[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에서 분명히 밝혔듯이 첫 신앙은

그가 "여섯이나 일곱됐을 때," 그리고 남강, 도산, 조만식의 기독교 신

앙을 그대로 그의 신앙으로 숭요한 때의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었다.

두번째 신앙은 지성주의였는데, 종종 그는 지성주의를 강조하다가 때로

는 지성비판을 냉철히 하곤한다. 그러나 지성이 그의 두번째 신앙이었음

은 그의 전생애가 입증한다.

세번째 신앙은 씨알 사상에 대한 그의 사회 사상적, 솔직히 표현하면

민중주의적 신념, 혹은 이념에 대한 신념 (= 신앙)이다. 마르크스가 그

의 세번째 신앙이라고 표현한 "인간" (=민중) 함석헌에게서는 씨알(=

민중)인 것이다. 함석헌은 씨알을 민중, 평민,천민, 머슴,종, 억눌린 자,

"스스로가 역사의 주체인 것을 믿고, 그 자람과 활동을 방해하는 모든 악

과 싸우는 것을 제 사명으로 아는 자"라고 정의한다. 이런 분명한 개념정

의적 맥략에서 이해할 때 씨알은 프롤레타리아(proletariat)와 본질적으로

구별할 수 없다. 그의 정의를 좀더 진지하게 경청해보면 이러한 이해가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더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그의 말을 인용해 보도

록하자.

이 나라의 민중아, 너는 씨알이지.

여물어 떨어져 땅에 들어가 썩는 씨알이지.

모든 뿌리, 모든 줄기, 모든 가지, 모든 잎,

모든 꽃이 네게서 나갔건만 하나도 너를 받드는 놈은 없지

모든 꽃, 모든 잎,모든 가지, 모든 줄기, 모든 뿌리가 너 하나를 위해

있건만, 너 될대로 되는 날 곧 떨어져 땅속으로 들어가 숨지,

너느 참 섦구나.

하지만 너는 씨알이다.

너는 앞선 영원한 총계산이요,

뒤에 올 영원한 맨 꼭지다.

설음은 네 허리를 묶는 띠요,

네 머리에 쓰이는 관이다.

너는 작지만 씨알이다.

그리고 1970년 4월 함석헌은 비장한 마음으로 선언하기를 "나는 민족주의

는 아닙니다. 세계주의입니다"라는 신념을 밝혔다.

필지는 여기에서 함석헌이 마르크스주의자나 공산주의자라고 주장하는 것

은 아니다. 그의 사상의 틀과 구조가 마르크스 레닌사상과 우연의 일치인

지는 알 수 없으나 동일하다는 것을 증명한 것 뿐이다. 그러나 그가 직접

진술했듯이 동경고등사범학교에서 그는 변증법적 유물론을 배웠던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가 어느 정도 깊이 변증법적 유물론을 연구했는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이미 앞에서도 말했듯이 그는 공산주의의 유물사관

을 "알대로 알아보려 애썼다."

우리의 주장 요지는 1) 함석헌의 교회주의적 기독교 신자에서 2) 무교회

주의로 전향하고 3) 그후 몇차례의 변신을 거쳐 종교상대주의에 빠졌으며

4) 그의 종교관은 말년에 가면서 종교다원주의와 종교동일주의의 색채

(=종교세계주의?)를 가미한 다음 5) 결국 탈종교주의적으로 발전했으며

6) 그의 종교이해가 마르크스 레닌의 종교 생성-소멸이론과 우연히도 (우

연인지 의도적인지 확실한 것은 알 수 없음) 일치한다는 사실을 제시하려

는데 있다. 우리의 관심은 그의 무교회주의 사상을 분석-비판-평가하려는

데 있으며, 그의 씨알주의로 볼 수 있는 사회사상,즉 민중론은 여기에서

배제하였다. 그것 자체가 또 하나의 방대한 연구가 될 수 있는 것이며,

그것은 우리의 주제와는 직접 깊은 관계가 없다.

 

VII. 글 맺 음

지금까지 우리는 한국 무교회주의의 원조격인 인물들, 김교신과

함석헌을 중심으로 심층 분석해 보았다. 그러면서 가장 핵심적인 무교회

주의의 이론과 사상이 여러 차례의 상황 조건과 사상의 변천을 거쳐 탈

종교주의적으로 발전되어 갔으며, 변증법적 유물론의 종교사상 비판과

거의 동일함을 발견하였다. 특히 우리는 함석헌의 무교회주의 사상은 신

자들이 그들의 착취계급인 성직자들로부터 벗어나야 하는 그리고 그들의

본질이 그래서 주체로서의 인격체인 "씨알"로서만 존재해야 하는 무종

교적 -비종교적 사상임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틸리히의 표현대로 모든 문

화의 본질이 종교라는 사상에서 볼 때 종교없는 씨알은 존재가치를 物,

빵,밥에서만 찾자는 유물론이 아닌가?

기독교가 말씀의 공동체인가 밥의 공동체인가? 이 문제도 한국신학사상

의 한 흐름에서 분석 - 평가되어야 한다. 무교회주의는 한국 민중신학

물, 신학, 저항신학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것은 '씨알신학'이기 때문

이다.

 

 

*** 김정환 무교회주의 ***

 

 김정환 교수가 [김교신] (한국신학연구소 발행) 전기는 비교적

훌륭한 평전에 속하는 바 그 내용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점을

발견하면서 무교회주의의 참된 본질을 더윽 이해할 수 없는 혼

돈에 빠지게 된다. 김정환은 무교회주의의 예배와 교회관을 다음

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무교회 모임' 은 성경공부를 하기 위한 것이며, 예배, 찬송은

그 절차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기에 예배, 찬송이 주가 되며, 그

과정에서 목사의 설교가 짜여져 있는 '교회 모임'과는 근본적으로

성격을 달리하고 있다... 무교회 모임의 사람들은 모든 신이 위탁

하신 각자의 가업을 충실하게 수행하는 일이 신에 대한 가장 귀중

한 예배라고 여기고 있으며, 또 그러기에 하루 24시간 전부가 예

배의 연속이라고 보는 것이다. 안식일에 예배당에 가는 것을 기독

교 신자의 도리로 여기는 관념으로 본다면 이런 생각은 통속적인

교회관과 크게 어긋난 것이다. 이들에 있어 교회당은 바로 생활의

장이자 또 둘이 모여 기도를 올리는 장소인 것이다. 안식일에 가족

들이 모여 성경을 읽으면서 기도를 하고, 그 중의 한 사람이 성경

을 해석하는 모임이 있다면 이것이 바로 이들에게는 가장 모범적인

주일예배인 것이다. 그러나 성경공부를 남과 더불어 좀 더 철저히

하고자 할 때에는 가족 아닌 신앙동지들이 모두 같은 입장에서 모여

공동연구를 하기도 하고, 또한 한 지도자 밑에 정기적으로 모여 성

경 강의를 듣기도 한다.

김정환의 무교회주의에 대한 진술은 매우 핵심적인 분석을 한 것이

다. 그는 '무교회 모임'을 비형식적인 예배 모임으로 서술하였고,그

반면에 '교회모임'을 형식적인 예배 모임, 즉 그의 표현에 따르면 "

절차에 지나지 않는"예배 모임으로 구분하였다.

그렇다면 성경 공부를 하기 위하여 모이는 무교회 모임의 신앙 형태

는 어떤 종류로 나뉠 수 있는가? 즉, 무교회주의의 신앙 형태를 7가지

로 분류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선 7가지 무교회주의 신앙형태를 그의

진술에 따라 개관해 보자.

1) 정통파:무교회주의에 찬동하고, 그 성서연구회에 매주일 참석하는

사람들.

2) 진보파:주일 예배를 각 가정에서 가족과 함께 성서연구로 지내는

사람들로서, 가정예배의 형식을 띠고 있는 점에서 사실상

가정교회의 모습을 가진 사람들.

3) 전원파:농사를 지으며 소를 몰며 풀을 베다가 우편 배달부로부터

[성서연구]를 받아 그 자리에서 거의 다 읽고난 다음 무릎

을 굻고 기도를 올리는, 그러기에 가족과의 성서연구는 별

로 하지 못하는 밀레와 같은 사람들.

4) 동조파:교회의 장로 또는 집사로서의 직분을 오전 중에 성실히 한

다음, 오후에는 무교회 모임의 성서연구회에 또 참석해서

우의를 다지는 사람들.

5) 교단파:맡은 바 일과 직장을 통해서 믿음을 무의도적으로 학생들에

게 전하는 사람들. 한 예를 들면 물리시간에 만유인력을 다

룰 때 우주의 아름다운 법칙의 근원인 그 무엇을 강조한다든

가, 또는 생물 시간에 세포를 현미경으로 보면서 생명의 신

비로움을 강조하든가하는 사람들.

6) 단독파:무교회 모임에는 거의 안 나가고 모임도 거의 안가지며, 전혀

신자인 체 하지 않으면서도 김교신과 그의 신앙 후계자들의

글은 정성으로 읽으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외톨이 신자.

7) 비판파:이러한 백가쟁명식의 신앙양식에 회의를 품고 점검하려드는

사람들.

김정환 자신은 "무교회 코이노니아의 아름다운 전통"에 관하여 언급하

면서 이 각 파가 "서로 존중하고 일체 서로 간섭 비평하지 않고 이해 수

용하는 것"임을 결론적으로 역설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이상 7가지 유형의 신앙형태 가운데 단독파를 "가장 귀한

것"으로 평가하면서, 자신의 무교회주의 입장을 시사하고 있다.

김정환이 단독파를 "가장 귀한 것"으로 평가하는 이유는 단독파는 철저

히 김교신주의자들이기 때문이다. 단독파의 경우 이들이 기독교인이냐

단순히 김교신교도들이냐의 평가가 먼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김정환의 표현에는 이들을 기독교인으로 보기는 매우 어려운 점이 많다.

김정환은 신념과 신앙을 혼돈하고 있으며, 어떤 사상을 선호하거나 추

종하는 것이 곧 종교인 것처럼 이해하고 있다. 이것은 전형적인 무교회

주의의 잘못된 종교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김교신 및 그 후계자들의 글을 정성으로 읽으면서" 무교회주의로 신

앙생활을 한다고 할 때, 이런 행위를 참된 기독교 신앙생활이라고 볼 수

있을까? 이런 생활을 통해 기독교적인 의미의 구원이 가능하다고 믿어

야 할 것인가?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음으로써 구원을 얻는

이신득구의 신앙을 부정하면서 김교신을 구주로 믿음으로써 구원을 얻

느다고 확신하는 김교신교도들일 뿐이다.

그리고 "신자인 체는 일체 하지 않으면서" 신자로 생각하는 것 역시

올바른 신앙태도라고 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도이기를 꺼리는

잠재의식이 단독파들에게는 강하게 들어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렇다

면 그 스스로도 무교회주의에는 많은 문제가 있음을 인정한 것이다.

신자가 자신의 종교적 태도를 숨기려 하는 것은, 자신이 믿는 종교

에는 정직하게 신앙을 표출할 수 없는 어떤 교리적 모순이 있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며, 종교적 사회적으로 떳떳하지 못한 것을 내포

하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다.

   

 

 *** 장도원 무교회사상 ***

 

무교회주의운동 초창기에 열심히 활동했던 사람들 가운데 비록 김교신

만큼 강력한 영향력이나 지지를 받지는 못했지만, 무교회주의 신앙을

신학적으로 비교적 잘 제시해준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 장도원목사이다.

장도원은 기독교 교회에 대한 접근에 있어서 김교신의 사상을 폭넓게

도용하면서, "교회는 조직만 힘써 잇고 신앙은 교리로만 되어 있으며

교역자는 교단에서 문화의 혜택을 설명하며 사회개량사업을 고취하면서

잇는 까닭이다. 그런고로 심령의 궁핍을 가지고 온 영들에게는 하등의

만족을 주지못하는 것이다"라고 피력했다.

그의 조선 교회 비판에 김교신의 기성 교회 배척론이 사용된 것이다.

장도원은 지금의 조선교회를 "성신이 떠난 교회가 되며 하나님께 버리

움을 받은 교회로서 악마의 소굴이 되고 만 것이다"고 단정하면서, 다

음과 같이 당시의 조선교회 현상을 그 나름대로 분석하였다.

현금 조선기독교회는 쇠약하여 간다. 양으로든지 질로든지 다 쇠약하

여 간다. 이 사실은 교회마다 다 실감하고 있는 사실이다.

교역자나 평신도의 별이 업이시다. 실감하는 사실이다. 지금 교회의 형

편으니 똑똑하고 유위유망한 청년들은 다 교회에서 멀리 물러가고 보잘

것 없고 변변치 못한 반불량자의 쯔스레기 청년만 나머있어서 제 뜻대

로 제 생각대로 제가 된대로 날뛰면서 썩은 내암새를 피우는 현상이다.

장도원의 조선 기독교의 현상과 실체에 대한 비판을 날카롭고, 직설

적인 표현을 통해서 강도 높게 던져졌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과격한

비판과 조선 교회의 현상분석은 매우 미흡하며, 시대상황적인 이해가

빠져있다. 교회비판의 내용을 담은 그의 글"현금교회"가 [성서조선]

(1931.9)에 발표될 당시의 조선 기독교와 사회상황은 일제치하에서 수탈

과 탄압과 극도로 심화되어가던 시점이었다. 뿐만 아니라, 일본 제국주

의가 조선문화 말살과 일본문화 이식에 혈안이 되어 날뛰던 시기였다.

조선 교회의 양적 성장은 3.1운동이 별로 현실적 효과를 얻지 못하고

사실상 실패로 돌아가자 민족 운동의 총본산으로서 기독교를 생각하며,

교회 배후에는 미국이 버티고 있어 교회가 조선 독립의 원동력이 될 것

이라고 확신하며, 신앙적 동기보다는 민족 해방의 수단으로서 기독교를

이용하려던, 그래서 교회에 찾아들던 많은 지성인들이 차츰 교회의 사

회변혁의힘이 약함을 깨달으면서 교회로부터 그들의 눈길을 다른 곳을

로 돌린 것은 사실이다.

교회를 떠나는 청년들은 조선 독립의 실현을 위한 힘이오직 사회주의적

공상주의뿐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장도원이 현재의 조선 기

독교교회가 쇠약해 간다고 지적한 것은 일면 타당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장도원은 " 지금 교회의 형편은 똑똑하고 유위유망한 청년들은

다 교회에서 물러가고"라고 말하고 있으나, 사실 이들은 대체로 신실한

기독청년들이었다기보다는 강한 민족주의 정신을 갖고 있던 민족주의

자들이거나 공산주의 운동가들이었다. 그러므로 장도원의 지적은 공산

주의자들이 교회를 떠나는 모습을 마치"똑똑하고 유위유망한 청년"이

교회가 제도적 교회이기 때문에 떠나는 것처럼 오도하고 있는데 문제도

있다. 그렇다면 "똑똑하고 유위유망한 청년들"이 무교회주의로 전향하

기라도 했는가?

장도원의 비판의 비현실적, 비과학적 논증이 여기에서 드러난다. 그는

예수를 믿고, 신실하게 신앙생활하는 기독청년들을 사회주의 이론으로

사상적 무장을 하고, 실천을 내세우며, 활동하는 청년들(즉 사회주의들,

공산주의자들)과 비교하면서 "보잘것 없고 변변치 못한 반불량자의 쯔

스레기 청년"으로 규명하고 있다. 즉 예수를 믿는 기독청년은 보잘것

없고, 변변치 못하고, 반불량자들이고,쯔스레기같은 사람으로 평한 것

은 그 스스로도 이런 부류의 기독교인임을 자인하는 것이다. 공산주의

청년은 똑똑하고, 기독청년은 변변치 못하다는 매우 모순적인 주장이

그로 하여금 당시의 시대상황과 시대정신을 전혀 알지 못한 기성교회에

대한 맹목적이고, 이론이 결여된, 감정적 투사로 활동하게 했던 것이다.

한국의 교회사가 이영헌 교수는 그의 명저[한국기독교회사]에서 1930

년대 당시 조선 교회는 한편으로는 사회주의 공산주의 운동이 "민족의

독립을 그 목표로 내건데서 당시 사회 각층에 공명자들을 다수 불러 일

으킨것은 자연스런 일이었다. 교회도 그 여파를 입지 않을 수 없었다.

차라리 교회는 심대한 타격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라고

보았다.

그리고 "한편 19세기에 위대한 발전을 한 과학문명의 물결이 20세기

에 들어서면서 한국을 휩쓸었다. 교회는 이 거센 과학 물결 앞에 마치

파도에 부딪힌 조그마한 배와도 같았다.. 교회느니 이 위기에 무척 당황

했다. 특히 청소년들의 마음 속을 파고 들어가는 반기독교적 사상과 문

명에서 헤어나갈 길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엇다. 1929년부터 시작한 제

2차 진흥운동, 제3차 진흥운동을 장로교회에서는 기독교 문화운동의 해

로 정하고 교회마다 교인을 위한 문고 설치,교역자를 위한 이동도서관

설치, 현대사상과 기독교의 관계를 해명한 저서를 내어 문고판으로 보급

할 것, 현대사상 및 기독교사상연구회를 조직하여 연구 발표할 것 등을

정했다. 이렇게 해서 출판된 팜플렛 중에 김인영 저 [하나님의 존재]

(1933), 채필근 저 [과학과 종교](1933), 이상문 저 [종교와 사회문제]

(1933), 김춘배 역 [마르크스와 예수] (1929), 도인명 저 [인류학]

(1933) 등이 있다"고 했다.

재일본 목사 장도원의 바로 당시 조선 교회의 이러한 문화운동의 동기

와 목적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무조건 "현금 일반 대중에게는 기독교

란 것은 문화운동이나 사회개량을 위하여 있는 종교와 같이 이해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기성 교회에서는 공산주의 사상의 침투와 과학적

세계관으로부터 오는 충격을 막기위하여 계몽적인 차원에서 문화운동을

펼쳤던 것이며, 그 결과는 오히려 건전한 기독교 사상과 이해를 증진시

켰을 뿐이다. [성서조건]이 펼치는 문서사업도 문화운동의 일환인 점을

장도원이 이해하지 못하고 비파늘 하기 위한 비판을 강력하게 추진한 것

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종교가 문화의 실체며 뿌리인 한, 우리도 왜곡된 문화를 개선한다거나

문화의 방향을 올바르게 정립하려고 노력하는 종교를 비종교적이라고

비판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종교의 본래성이 인간의 개인적 삶과 사회

적 삶의 공동 광정인 문화에서 그 진실성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은 인정

하여야 할 것이다. 장도원은 이런 폭넓은 시야를 갖고있지 않았다. 그

가 기성교회를 향해 던진 충고는 또 다른 여운을 남기고 있다. "현금

조선 교회들아 모든 조직을 버리고 복음으로 돌아오라".

장도원의 무교회주의적 주장은 기독교가 모든 조직을 버리고, 모든 문

화운동과 사회개량 운동을 버리고 오직 복음으로만 돌아오기를 충고하

고 있으나, 조직에 속하지 않고 복음에 돌아올 수 있을까? 즉, 어느 개

인이 기독교에 입교하지 않고, 기독교 조직에 들어서지 않고 이미 복음

을 듣고, 구원의 체험을 가질 수 있단 말인가?

무교회주의자 김정환이 말했던 "무교회 코이노니아의 아름다움 전통"역

시 조직으로부터 표출되는 것이 아닐까? 몸의 각 지체가 조직을 이루지

않고 몸에 조직을 버리고도 몸이 존재할 수 있을까? 몸의 조직을 버리

고도 몸이 존재할 수 있을까? 교회가 조직을 버리고 복음만 받는다는

것은 신체의 조직으니 버리고 오직 영혼으로만 살려고 하는 것과 같은

상식적 모순을 범하는 것이다. 그도 목사라는 점에서 조직을 필요로

할텐데. 그의 주장은 전혀 설득력없는 글의 연결일 뿐이다.

장도원은 조선 교회에 대하여 "조직을 버리라"고 충고조의 강변을 피력

하면서 "신앙창조설"을 말하고 있다. 기독교의 진리는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의 완전성에 있다. 그러므로 재창조설은 어떤 경우에도 이단설일 수

밖에 없다. 절대자와 전저전능한 하나님의 창조가 완벽하지 않다면, 이

미 하나님은 절대자일 수 없을 것이며, 그렇다면 기독교는 참된 종교일

수 없을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기독교의 신앙이란 것은 기독교의 교리를 이해 납득하거나 신조를 승인

하는 일은 아니다. 기독교의 신앙이란 것을 그리스도 자신을 수납하여

들이는 일이다. 즉, 하나님이 그리스도로써 인간의 안에 새로 창조한 새

생명이다. 고로 신앙은 하나님의 일이요 하나님의 것이다. 신앙은 사람에

게서 생기는 종교심으로의 운동이 아니요 우리로부터 새로 지으심을 받

은 새 생명이다.

사람의 종교심에서 起하는 절대자에게 대한 신뢰가 아니요 인간의에게서

는 절대로 생길 수 없는 재 창조의 새로운 인간사실이다. 신앙은 하나님

과 사람과의 공동작업의 결합이 아니요 전연 하나님편에서만 행하여 사

람에게 있게되는 새 창조의 새 사실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의 신앙론이 매우 위험스럽다는 것과, 그의 신앙창조

설에 따르면 인간에게 자유의지도 필요없게 된다는 사실, 그리고 구원은

하나님의 신앙 창조행위에 따른 새로운 창조 사역이라는 점 등으로 이해

할 수 있다. 이 점은 신학적으로 이단적일 수밖에 없다.

장도원의 신학이 이처럼 기성 조선 교회를 비판, 부정하기 위하여 논술

해 가는 동안 그의 신학노선이 기독교의 모든 것을 부정하고 오직 "그리

스도를 믿고 마시는 것"을 강조하는 점에서 그리스도 신비주의의 변질적

형태로 주형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분명히 제도적 교회를 부정한다.

그가 조직을 버리라고 하는 말도 이런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다. 즉

그는 철저히 개인주의적 신앙을 강조했으며, 그가 말하는 복음이란 곧

그리스도를 먹고 마시는 인간 삶의 현실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는 다음

과 같은 그의 기독관을 분명히 피력하였다. 기독교는 그리스도 자신이

다. 그리스도 자신이 곧 그리스도교다.. 기독교는 그리스도의 교훈을

일일히 실행하는 일에 중요점을 두지 아니하고 그리스도 자신을 먹고

마시는 일에 주안점을 두었다. 그리하여 크리스챤이란 것은 그리스도

교훈을 역행하여 그리스도와 윤리적 관계를 가지는 자가 아니요 그리

스도 자신을 가지는 자며 그리스도 자신을 소유하는 자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양식으로 하여 먹고 마시면서 날마다 날마다 당면하는 인생

사변에서 부절히 생장발육의 생활을 하는 자다.

우리가 그를 그리스도 신비주의의 돌연변이로 해석하는 이유는 그의 종

교경험에 대한 진술에서 찾을 수 있다. 그의 글 가운데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있다.

그리스도 자신을 경험하는 데에는 성신으로써만 된 것이다. 성경을 연구

함으로써 되는 것도 아니요 선배의 신앙경험의 서적을 읽음으로써 되는

것도 아니요 교회에 열심으로 출석하여 교회의 의식과 예문을 경건한

마음으로 지키며 은혜있는 선생의 설교를 들음으로써 되는 것도 아니요

다만 성신의 역사로서 개인의 심령 안에 그리스도를 나타냄으로써 그리

스도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그는 결론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고로 신앙은 각가 개인이 그리스도와의 직접 경험에 있는

것이오 사람의 전통에 있는 것이 안이며 제도에 있는 것

이 아니다.

그가 조직을 버리라고 했던 것과 문화운동, 개량사업, 교회부흥운동

등 일체의 교회적 실천을 부정한 것도 오직 개인적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하려는 의도에서 였다.

   

 

 *** 송두용의 제2창조설 ***

 

  무교회주의 신앙형태에 관한 또 하나의 유사한 관점은 송두용에 의해

서 표명되었다. 장도원의 "신앙창조설"과 같은 사상적 맥락에서 주창된

신학을 우리는 송두용의 "제2창조설"과"영적 창조설"에서 발견할 수 있

다. 송두용에 따르면 "하나님은 창조자이시며 또 창조를 깁버하신다는

뜻이다" 그는 하나님의 실체를 "스스로 존재하는 자"(I AM) 란 존재양

태 (Seinsmode)로 부터 "깁버하신다"란 유락양태(Stimmungsmode)로 과

감한 해석을 했다.

제 1 창조를 맛치신 하나님은 제 2창조를 시작하섯다. 하나님의 제2

창조는 그리스도 수육으로 비롯하섯다. 제 1 창조는 육의 창조요

제2창조는 영의 창조이다. 그래서 제 2 창조는 제 1 창조의 완성인

것이다. 따라서 제1 창조를 깁버하신 하나님은 제 1 창조의 완성인 제

2 창조를 더욱 깁버하심은 물론이다.

송두용의 사상은 하나님의 성육신을 부정하고, 성육신 자체를 제2창

조로 해석한 점이다. 하나님의 제1 창조며, 이것은 육의 창조라는 것이

며, 하나님의 제2창조는 그리스도 수육, 즉 성육신으로서, 영의 창조

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면서 제1창조의 미완성 때문에 제2창조가 있

었다고 하여 하나님의 천지창조를 전적으로 부정하고 있다.

그의 사상은 이단성은 아래와 같이 요약할 수 있다.

1) 제2창조설을 주장한 점이다.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창조를 절대적

이며 완전한 것이라고 믿고 있다. 제2의 창조란 하나님의 창조가 완전

하지 못하다는 것이므로 기독교의 신성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

다. 송두용의 무교회주의에는 영지주의(Gnostizismus)의 이원론사상

(Dualismus)같은 요소가 들어있다. 즉, 제1창조의 신은 낮은 신이거나

악의 신과 같은 것이고, 제2창조의 신은 그리스도 수육을 가능케한 신

으로 높은신, 즉 선신으로 이해하고 있는 듯한 내용으로 되어 있다.

2) 하나님의 실체를 "기뻐하신다"란 유락양태를 해석함으로써 하나님

"스스로 존재하는 자"란 존재양태를 부정라는 오류는 이단의 극치라고

볼 수 있다.

3) 참신이며 참 인간이신 신인동형설을 부정하면서, 그리스도는 하나

님이 인간이 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된 것, 즉 제2 창조

라는 사상은 많은 문제가 있다. 그리스도가 창조되어졌다고 하는 설은

이미 AD 318년 알렉산드리아의 아리우스(Arius,280-336)가 주장했고,

아리우스주의(Arianismus)는 이단으로 정죄된바 있다.

4) 하나님의 제1창조를 육의 창조로, 제2창조를 영의 창조로 주장함으

써 송두용은 하나님의 창조 자체가 부분적인 것이었다는 점과, 제2창조

가 제1창조를 완성한 것이란 주장은 창조주 하나님을 단지 조물주(Demi

urge)로 보면서, 구약의 하나님을 낮은 단계의 신으로 보고, 그리스도

수육으로 제2창조를 시작한 하나님을 지고의 신으로 나누는 영지주의의

신관과 매우 유사하며, 동시에 이단적이다.

송두용의 무교회주의는 이런 의미에서 교회의 필요성을 전혀 느낄 수

없다. 그의 관심은 오직 제2창조에 힘쓰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것은

한마디로 개인적 신비주의의 극치에서 나타나는 일종의 쾌락주의, 그의

표헌에 따르면 "유락"인 것이다. 그래서 그는 아래와 같이 말한다.

하나님은 창조하신다.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도 창조하신다. 하나님의

유락은 조화이다. 주 예수의 유락도 또한 창조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자녀인 예수 신자 엇지 창조하지 안을 수 있으냐? 그럿타 우리는 창조

하여야 하며 또 우리의 유락도 또한 창조이지안이치 못한다. 그러면 우

리는 창조함에 노력하라! 우리는 하나님과 갓치 또 예수와 갓치 창조하

자! 우리의 유락이 창조에 잇서 우리는 진리에 거한 자인 것이다.

지금은 제2창조기니 우리는 맛당히 영적창조에 힘써야할 것이다. 형제여

힘쓰라 영적창조에 힘써야 할 것이다. 형제여 힘쓰라 영적창조에!아!

영적창조다!영적창조다! 여기에서 송두용은 하나님,그리스도,인간을 모

두 창조의 주체로 인정하면서 그 능력의 동일시를 표명하였다. 기독교

신학은 창조주 하나님과 그의 독생자인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죄인인 인간의 본질을 근본적으로 구분하면서 교리의 중심 주제로 다루

고 있다.

그러나 송두용은 "예수도 창조하신다"는 주장을 함으로써"스스로 있는

자"인 하나님만이 無에서 有의 창조(creatio ex ex nibilo)기 아니고,

예수가 창조자가 되는 이단설을 주장한 것이다. 그의 주장의 모순은 다

음과 같다.

1) "하나님의 제1창조는 아담의 창조로 시작하섯고 제2창조는 그리스도

수육으로 비롯하섯다"고 주장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수육이 하나님의 창

조로 되어진 현상이라고 역설했으나,

2) 곧이어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도 창조하신다"고 주장함으로써, 여기

에서 "피조된"그리스도가 아니고 "창조하는"그리스도로 또 다른 묘사를

하고 있다.

3) 한마디로 그의 기독론은 "피조된 그리스도"와 "창조자 그리스도"를

수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첫째, "피조된 그리스도론"은 그리스도의 신성

을 부정하는 주장이며, 동시에 아리안주의와 매우 유사한 이론을 내포하

고 있다. 둘째, "창조자 그리스도론"은 기독교의 유일신관을 부정하는

사상으로 사물현상의 역동성을 창조적 현상으로 인식하려는 일종의 역동

설(Dymanismus)과 같은 비기독교적 사상이다.

4) 송두용은 인간도 창조능력을 가진 존재이다. "그러면 하나의 자녀인

예수 신지 엇지 창조하지 않을 수 잇느냐?" 로 강하게 인간의 창조적 행

이를 강조하고 있다. 여기세어 그는 그리스도 예수도 하나님의 독생자요,

인간도 하나님의 자녀라는 점에서 이 셋을 동격화하려 한다. 적어도 "창

조한다"는 능력에 있어서 그는 이 셋의 실체를 동일시하고 있다. 그의 주

장을 공식화해보면 "하나님=예수 그리스도= 인간(G=JX=M)"이라는 등식적

구조로 나타난다. 이 등식에 "하나님은 창조자"라는 명제를 대입하면,

곧, " 창조자 하나님"= "창조자 예수 그리스도"= "창조자 인간"이라는

이론이 성립된다. 이런 단순 논리적 삼단논법식 신학 이해는 철저한 이단

설이며, 무교회주의자들의 사이비 신학에서 유래된 것이다.

5) 송두용의 이단설 가운데 "영적 창조설"도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그

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제1창조는 육의 창조요 제2창조는 영적 창조이

다.""지금은 제2창조기니 우리는 맛땅히 영적 창조에 힘써야 할 것이다."

"제2창조는 제1창조의 완성인 것이다." " 형제여 힘쓰라 영적창조!"

여기에서 그는 하나님을 "육의 창조자"로 본질규정함으로써, 하나님을

그리스 고대철학에서 조물주로 인식되던 데미우룩(Demiurge)과 같은 존재

로 보았다. 또한 인간을 불완전한 창조를 완성시킬 수 있는 존재로 서술

함으로써 인간의 능력을 영적창조라로 평가한 것이다.

인간의 영적창조를 통해서 창조의 완성을 이루어야 한다고 역설함으로써

인간을 하나님의 능력처럼 높은 본질로 서술하였다. 인간이 곧 영적창조

자요, 모든 창조의 완성자라는 사상이다.

이 점은 아마도 그들의 기독교 신앙이 진정 기독교적인가 혹은 인간숭배

주의인가를 의심케하는 것이다. 송두용을 비롯한 무교회주의자들이 교회

부정, 교리 및 전승된 신앙고백 보벙, 그리스도창조설, 신앙창조설, 영

적 창조설, 인간창조주설, 하나님의 불완전한 창조설, 제2창조설, 인간의

창조완성설 등과 만인성서해석권의 오용 및 남용, 공산주의적 종교발생

론의 도식으로 기독교를 해석하려는 유물론적 종교론등은 이들을 기독교

도라고 볼 수 없도록 한다.

"송두용을 김정환의 무교회주의 신앙형태중 어디에속하는 것으로 보아야

하는가?" 라고 질무늘 던져본다면, 아마도 그는 분명히 정통파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이유는 그가 조선 무교회주의 설립

6인동의 한 사람이었으며 [성서조선]의 창간 동지였다는 점에서 그를 정

통파로 보는 것이 올바른 판단일 것이다.

그러나 그가 성서연구에 매주일 참석했는가 하는 점은 거의 규명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그가 [성서조선]과 관계를 끊었던 시기도

있는 점으로 보면 그는 정통파의 골수라고 보기 어렵다.

오히려 그의 무교회주의 사상을 분석하면서 우리는 그가 정통파

(orthodox) 무교회주의자라기 보다는 급진적 무교회주의자라고 볼 수

있으므로 그를 급진파(radical)라부를 수 있을 것이다. 김정환의 일곱

가지 신앙형태 이외의 분파이므로 "제8의 무교회주의의 신앙형태"로

범주화 할수 있을 것이다.

   

 

*** 류석동과 "그리스도의 옷" 신비주의 ***

 

 송두용과 마찬가지로 류석동은 조선 무교회주의의 운동을 적극저으로

보급하던 무교회주의자이다. [성서주선]에 발표된 20편 가까운 그의 글

들은 조선 무교회주의에 대한 일반인들의 이해에 매우 우호적인 영향을

끼쳤단. 그리고 그 자신은 김교신, 함석헌, 송두용을 비록한 기타 여러

무교회주의 동지들과 같이 무교회주의에 충성스럽게 남아 있었다.

그러나 송두용식의 급진적인 무교회주의를 지양하고, 매우 온건한 신앙

주의를 표방하였으며, 몇군데의 무교회주의적 표현을 제외하면 그를 교

회주의자라고 불러도 별로 거부반응이 일어나지 않을 정도로 신앙적이었

고, 성서적이었다. 그것은 그만이 무교회주의자들 가운데 유일하게 영

생의 체험을 한 것이다. 그는 확실히 종교적 체험을 한 사람이며, 하나님

을 체험한 신앙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이나, 교회나, 성서나, 성례 등을

함부로 도마 위에 올려놓고 난도질할 수 없는, 두려움과 경외적인 떨림

(nouminose)을 늘 갖고 있었다. 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직접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이러한 신앙체험을 다음과 같이 간증하였다.

5월20일은 나에게 특별한 생각과 느낌을 준다. 이 날은 내가 육에서 죽고

영에 들어온 날이다. 과거 몇십년 동안의 자아의 생활에서 버서나 하나님

의 생활로 들어오게 된 날이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알뿐만 아니라

그에게 나의 존재를 알리게 된 날이다. 물론 나는 이 날에 세례를 받은

것이 안이고 또 벗들 앞에서 이상한 힘을 나타낸 것이 아니다. 홀로 방에

앉아 자기의 죄악에 이때까지 없는 고민을 깨달아 어찔할 줄을 몰라 보통

때와 같이 기도를 하다가 성서를 읽고 성서를 읽다가는 기도를 하고 있을

때 과연 꿈에도 생각지 아니한 일이 눈앞에 전개되었다. 고린도전서 제

1장 30절 후반의 한말 '예수는 하나님께서 세우사 우리에게 지혜와 의와

거룩함과 속죄함이 되셨으니...'가 번개같이 마음 속에 지내가며 눈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뚜렷이 뵈였다....나의 가슴은 터지는듯하고

눈에서는 눈물이 쏘다지며 말할 수없는 깃븜이 한없이 생기었다. 이 깃븜

이 생긴 다음 순간에는 이몸, 이 마음을 에수 그리스도에게 받히자는 각

오가 무럭무럭 일어나며 나를 당신 마음대로 써줍소서 하는 기도가 솟아나

왔다. 이때 나의 분열된 의지, 이지,감정은 통일되어 다른 것을 생각할 수

없이 한 뭉치가 되여 하나님을 생각하게 되였다.

류석동은 전투적 언어로 교회주의를 공격하는 김교신, 함석헌,송두용 등

과 너무 대조적인 무교회주의자이다. 그는 김교신처럼 유일의 선생을 가진

자가 아니므로 선생으로부터 배움을 받은 자가 아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

도의 십자가를 본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십자가로 말미암아 나는 살았고

지금 또한 살고있다." "나는 십자가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비로소 자유

스럽게 되고 충족함을 얻었다."고 고백한다. 그는 기도하는 사람이었고 성

서를 읽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과감히 외쳤다. "성서만이 생명의 양

식이다." "우리는 성서를 읽지 아니하면 살 수가 없다." "성서를 경건한

마음으로 읽어라. 천상천하에 이 책 밖에 생명을 전하여 주는 것이 없느니

라."고.

그의 중심 개념은 "무교회"가 아니고 "신앙"이다. 따라서 그의 사상을

편리하게 신앙주의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신앙주

의의 출발점은 신앙의 유형이나 현상에 대한 분석이 아니고, 삶에서 역동

하는 신앙 자체라고 하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그는 철저히 하나님의 품

안에 안기를 원했다. 이러한 소원이 그를 더욱 신앙주의로 이끌어 갔으

며, 그가 신앙주의에 더욱 깊이 몰입하면 할수록 그는 공리주의에 빠져든

신앙 절대주의를 부정하면서 그리스도 신비주의에 접근해가고 있었다.

하나님이 주신 옷 예수 그리스도의 옷, 그의 의와 성의 옷을 입고 하나

님 아버지 앞으로 나가겠나이다. 이제 우리의 소원은 달하였나이다.

그의 "예수 그리스도의 옷" 사상은 신앙의 극치의 한 표현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의 옷을 입은 자만이 하나님 앞으로 나갈 수 있다.

천상천하에 이 옷밖에 우리가 입고서 하나님 앞으로 나갈 옷이 없나니라.

"그리스도의 옷을 입었다"고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그리스도와 하나

됨의 표현으로서 그리스도 신비주의의 대표적인 표현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분명히 본 류석동의 "그리스도의 옷"

이란 곧 그리스도와 합일의 경지에서 가지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의

미한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 없이는 구원이 없다고 하는 이신

득구의 신앙사상이 그 이면에 깊이 깔려 있다. 그것은 신앙이며, 영생에

의 길이었다. 그는 다음의 말을 통해서 신앙을 규정하고 있다.

신앙이란 비애의 골짝에서 모순의 그물 속에서 일어나는

조화의 음악이다. 투쟁 속에서 나오는 평화의 노래이다.

불완전한 우주에서 들여오는 해조의 음률이고 불비한 인

간의 말 속에서 삼겨나는 성서의 통일이고 약산 인간의

肉 속에서 일어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류석동의 신앙은 무엇에 대한 신앙인가를 그의 진술을

통해서 직접 찾아 보자, 그는 "십자가는 나의 신앙의 처음이고 끝이다"고

분명히 진술했다. 그의 신앙의 알파와 오메가인 십자가는 자기 실존의

전부였다. 그의 십자가 신앙은 "그리스도의 옷"사상이나 성서주의와 더

불어 그의 신앙주의를 새롭게 표현한 것일 뿐이다.

그는 인간의 실존이 십자가의 2중성, 즉 알파포인트(alpha-piont)와

오메가 포인트(omega-point) 사이에서 존재하는 양태임을 보여주고 있

다. 십자가의 알파점은 인간의 실존의 원초성이며, 십자가의 오메가점은

인간의 실존의 초극성을 의미한다. 다시말해서,류석동에게서 신앙의 처

음과 끝인 십자가는 신앙하는 인간 실조의 전체성이며, 통일, 실존 자

체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류석동은 교회무용론은 역설하는 무교회주의자는 아니었다. 그의 무교회

주의는 신앙의 형식화나 공리주의적 신앙절대주의를 부정하고, 철저히

성서주의적이며, 그리스도와 합일의 체험에서 표출된 그리스도 신비주의

의 한 양태를 띠고 있다.

그래서 그에게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그의 신앙의 전체였으며, 그리

스도와의 접합, 즉 "그리스도의 옷"을 입는 경지를 항상 최상의 희열로

흠모했다. 그는 기성 교회나 제도를 적대하며 비판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의 교리나 신조의 예민한 문제들을 일정한 표준없이 난

도질하거나 비판하는 만용을 가진 사람도 아니었다는 점에서 무교회주의

라기 보다는 십자가 신앙주의자라고 부르는 것이 오히려 더 마땅할 것

같다.

그가 조선 무교회주의 동지들과의 사상교류나 [성서조선]지에 논단 발표

를 1934년 3월 이후로 거의 단절해 버렸던 점은 그의 기독교 이해와 신

앙이 이들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었던 것이었음을 시사하고 있지 않을까?

그는 한 때 단테에 심취했었고, "한 때는 밀턴에 마음을 빼앗긴 때가

있었고 또 한 때는 사옹(세익스피어를 한자음 표기로 줄여서 일컫는 말

)에 몰두할 때가 있었고 또 한 때는 희랍철학에도 경도한 때가 있었다.

그러나 그의 신앙의 오메가 포인트는 성서였다. 그는 성서를 "생명의 양

식"이며, "영원한 생명을 길러주는 살과 피"라고 확신했다. 그래서 그는

문학과 철학에서 성서로 전향한 것이다. 이 점에서 그의 신앙은 성서주

의라고도 부를 수 있다. 그러나 그에게 붙여질 성서주의란 미국의 보수

주의적 근본주의의 성서주의와는 크게다른 것이다.

   

 

  *** 김성실의 기도생활중심사상 ***

 

우리가 또 한 사람의 무교회주의자로서 사상을 검토해 보아야 할 사람

은 "화육론"과 "조선교회와 교권자제위께"의 필자 김성실이다. 김성실

은 자기 사상의 핵심을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종교는 신앙경험을 근본으로 삼는다. 결코 의식이나 교리나 조직이나

제도나 사업이나 무슨 당파적 단결로써 중심을 삼는 것은 안이다.

그는 또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예수 믿는 유일의 길은 기도이다. 원래 종교 생활의 근본은 기도생활

인 것이다... 기도가 없이는 기독을 알 수 없고 믿을 수 없고 생명을

얻을 수 없다. 기도는 우리 영의 호흡이다. 양식이다.

기도생활을 강조하는 그는 조선기독교의 실체를 "기도하는 모양은 있

으나 실은 없는 "교회라고 비판하면서, 기도에 힘쓸 것을 당부하였다.

그러나 그는 철저히 교회개량주의적 태도를 견지하면서 기성교회의 비

교회성을 비판하였다. 이 점에서 그를 무교회주의자로 낙인찍기 보다

는 "교회개량주의자", 혹은 "교회갱신주의자"로 평가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의 분명한 문자적 표명은 이를 뒷받침하기에 충분하다. 그

의 글을 인용해 보자.

나의 신앙적의 목표는 교회내 조직이나 제도나 혹은 교리나 신조에 있

지 않다. 다만 形을 버리고 實에서 살게하고 저 하는데 있다... 그런 고

로 현대교회나 교역자들을 파고히라고 하지 않는다."

김성실은 교회의 현대주의에 대한 비파늘 시도했다 그러나 조선 무교회

주의의 효시인 김교신이나 종교파괴론자인 함석헌과 같이 철저한 무교회

주의자는 아니다. 그는 교회파괴론자가 아니다. 또한 김교신주의자도

아니며, 함석헌과도 별로 동질성을 가진 사람이 아니다. 더욱이 그의 입

장은 논문 두 편 말로는 밝혀진 것이 없으므로 이를 기초로 해서 평가할

때 그는 이용도가 부흥집회 때마다 조선의 기독교는 죽었다고 비판하면

서 신아에 불을 붙이고, 폭포같이 쏟아지는 눈물과 기도를 보여 주었던

것과 거의 유사한 점이있다. 그는 조선 기독교가 實을 얻어 생명종교가

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목회의 표준을 교회주의나 집합중심주의에 두지 말고 각 교인의 심령

안에 있을 영의 생명 유무에 둘 것이다."라는 충정어린 호소는 영성을

강조하는 일면을 갖고 있기도 하다.

오늘날 과학과 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인간의 삶의 내면 세계가

문명변화의 속도에 인간의 삶의 내면 세계가 문명변화의 속도에 적응

하여 변화하지 못하는데서 오는 문화적 괴리현상과 가치 혼란의 상황

은 인간에게 더욱 진지하게 자신의 영적 삶을 직시하고 성찰하도록 하

고 있다. 영성개발이라든가 영성훈련, 그리고 명상훈련 등을 통한 자

아발견과 개발은 이런 점에서 현실에 대한내적 삶의 표출에서 비롯되었

다고 하겠다.

김성실은 바로 "영의 생명"을 발견하여 살리는 일에 힘써야 한다고 말

0 고 있다. 그러나 그는 교회를 부정하지는 않았던 점에서 아마도 우리

는 그를 교회주의자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 무교회주의 요약 및 평가 ***

 

지금까지 우리는 조선 무교회주의를 인물중심으로 서술해 보았다.

이 사상은 한국신학사상의 흐름을 개관함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을 만큼

비중이 큰 사상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의 작품들을 직접 분석-해석

평가하면서 탐구해 보았다. 그러나 우리의 연구를 단순히 작품상의 문제

점을 나열한 것만은 아니었고, 매우 과학적으로 작업했다고 자부한다.

여기에서 결론은 무교회주의에 대하여 한국의 몇몇 교회사가들이 긍극

적 평가를 내리고 있음에도 솔직히, 더욱 정직하게 말해서 무교회주의

는 많은 문제들을대체로 기성 교회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한 마디로 우리가 추적해 본 무교회주의자들 가운데 몇명은

이단적인 발상도 갖고 있었다.

8 특히 김교신이나 함석헌 같은 이들은 기성 교회에 대하여 가히'전투적'

이라고 할 정도로 도전적이었으며, 증오심이 넘치는 과격한 표현을 통해

서 공격일변도의 주장만을 내세웠다.

그런가 하면 송두용은 너무도 황당무계한 신학이론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당혹하게 하기도 했다. 장도원, 류석동, 김성실과 같은 이들은 대체적으

로 "성서", "십자가","그리스도","기도", "신앙" 등과 같은 용어를 동원

하여 그들의 주장을 정립해 나갔다. 그래서 장도원이 약간 과격하게 나가

기는 했으나 이 세사람은 온건한 무교회주의자들이라고 불려질 수 있는

사람들이 되었다.

" 김정환 교수도 무교회주의자라고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문젯거리

가 될 수 있으나, 그 스스로 단독파로 암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도

무교회주의자의 범위에 넣을 수 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무교회주

의자라기 보다는 오히려 김교신을 흠모하고 있는 김교신주의자라고 불

러야 할 인물인 듯하다.

무교회주의 사상이 "조선을 성서화"하려는 선교적 사명과 의욕에서 헌

신적 노력을 계속했던 것음 매 높이 평가할 만하다. "성서와 조선", "

성서를 조선에", 그리고 "조선을 성서 위에" 세우고자 했던 조선 무교회

주의의 정열은 조선의 복음화를 최대의 목표로 전지해 갔던 것이다.

그렇게 때문에 그들의 [성서조선]지를 통한 문서활동은 당시의 정치.

경제적,사회 문화적 여건에 비추어 볼 때 매우 높이 평가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의 물리적 노력에 비하여 그들의 정신적 주장에 기

독교적이라고 보기 어려운 요소들을 담고 있는 점이다. 그 문제점들이

란 데체로 세 가지로 분류될 수 있는 것들이다.

1) 이들은 신학교육을 체계적으로 받은 사람들이 아니므로 기독교 이해

에 많은 오류를 갖고 있다. 신학서적이나 주석서 및 기독교 백과사전을

대충 간추려 가면서 독학으로 신학을 접한 사람들이므로 기독교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전혀 되어 있지 않다. 주로 교회론과 성례론을 부정하고,

그들의 신앙태도를 비판하는 교역자들을 증오하여 매도하거나 공격하는

열혈당적 분파주의 색채를 갖고 있다. 그리고 이들이 신학이나 기독교의

본질에 관해서 지식과 정보를 흡수할 수 있었던 시한자료들이 문제 있는

것들이 아니었는가 하는 의심이 들기도 한다. 왜냐하면 이들은 당시로서

는 최고의 지식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무교회주의

운동에 쏟는 열정으로라면 신학의 대하를 탐구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

들은 그들이 활동하던 시대의 기독교 신학의 세계적 추세와 당대의 신학

자들의 이름이나 저서, 논문 한편도 158호를 종간호로 [성서조선]이 폐간

될 때까지 비판적으로든지 수용적으로든지 한번도 거명하거나 논의하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은 이들이 사용하는 신학 및 기독교에 관한 자료는 매

우 제한적이었으며 고정관념에 편향된 문제있는 것들이었음을 입증한다.

그들이 사용 도서의 출처를 고의적으로 은폐하는 것은 왜 그럴까?

2) 기독교는 그리스도이 몸된 교회로부터 형성된 종교이다. 그런데 교회

성을 부정한다는 것은 여러가지 문제가 있다. 교회는 단순히 오합지졸로

모여든 군중의 모임이 아닐 뿐만 아니라 장소적 의미만을 갖고 있는 공간

이나 아니다. 교회는 그리스도가 세운 것이다. 마태복음에는 교회의 설립

기사가 분명히 명시되어 있따.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

를 세우리니"(마16:18) 라고 예수는 그 교회설립의지를 말씀하면서, 그가

교회의 정초자임을 확실히 가르쳐 주고 있다. 그리고 에베소서에는 교회

조직을 유지하기 위하여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전

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

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교회)를 세우려 하심이라"(엡4:11-12)

고 기록되어 있다. 이 내용 가운데는 이미 교회조직, 목적, 기능 등이 명

시되어 있다.

계속하여 성경에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

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저희와 우리

의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를 모든 자들"(고전1:2) 이 모인 곳

을 교회라고 지칭하고 있다. 성경에 따르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

(엡5:22-23), "살아있는 하나님의 교회"(딤전3:15), "하나님의 도성"(히

12:22), "하나님의 거하시는 처소"(엡2:22),"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

(엡2:22), "하나님의 집"(고전3:9),"하나님의 나라"(히12:28),"신령한 집

"(벧전2:5), "하나님의 전"(고전 3:16)이다. 이렇듯 성경은 교회의 유래,

본질, 조직, 기능 등에 관해서 언급하고 있다.

무교회주의자들이 성경의 이러한 부분을 의도적으로 은폐하면서 교회부

정만을 강조한 것은 "조선을 성서 위에 세우겠다"는 그들의 의도와 모순

적이다. 무교회주의가 성서를 연구하는데 중심을 둔다고 하면서 서의 교

회관에 관해서는 왜 언급을 회피하고 있는가? 교회를 부정하고 구원을

언급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도 구원이 가능하다는 종교신학적

발상과 동일한 것이다.

3) 무교회주의 존재 목적은 분명하지 않다. 그들은 교회주의와 전투하기

위하여 뭉쳐진 결사단체인지, 그들의 표현대로 "조선을 성서화"하려고 하

는 것인지 그들의 행적과 실천을 통해서는 분명하게 이해할 수 없다. 조선

을 성서화허려고 한다면 무엇보다 성서를 올바로 가르쳐 주어야 할 뿐만

아니라, 성서의 핵심인 복음의 메시지를 정확히 이해하고 제시해 주어야

했었다. 그러나 [성서조선]은 종간호(158호)에 이르기 까지 왜곡된 성서

해석으로 일관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교회부정,성직부정,제도부정,성례

부정,신조부정,교리부정,전통부정 등 철저한 부정주의에 빠져있다. 그들

스스로도 "무교회주의는 부정주의"라고 분명하게 표명하였다.

기독교 세계관은 염세주의나 비관주의가 아닐 뿐만 아니라 부정주의도

아니다. 율법을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고 율법을 완성하려고 오신 예수의

오심은 기독교가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비롯한 범사에 감사와 긍정을 드

러내는 것임을 보여준 것이다. 부정주의는 일종의 염세주의다. 무교회주

의자들의 부정주의는 일차적 증상으로 교회파괴증으로 나타났으며, 그리

고 개인적 신비주의로의 지향으로 발전되어 나갔다. [성서조선]의 페간

(1942년 3월,제158호를 끝으로) 으로 이론 무장이 중단되고, 김교신의

죽음(1945년 4월 25일)으로 지도자를 잃은 조선 무교회주의는 그 자리

에서 그 현상 그대로를 유지하며 더 이상의 변신을 멈추었다. 하지만

만일 김교신의 활동이 오늘날까지 왕성히 생동해 왔다면, 조선 무교회

주의는 분명히 개인주의적 신비주의 혹은 염세주의적 분파주의(sect)

로 그 양상을 가구어 나갔을 것이다. 지금까지 조명해 본 조선 무교회

주의자들이 사상을 다음과 같이 도식화 해보면서 무교회주의의 연구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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