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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프로그램

현대 방언은 성경적인가? (I)

작성자
쥬니어칼빈
작성일
2012-11-08 04:54
조회
5990

고린도전서 12장에 나오는 9가지 은사 중에서 고린도 교회 성도들 중 방언하는 은사를 받은 사람들은 이 은사로 인하여 교만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을 쓰다가 말고 13장에서 어떤 은사를 받건 그것으로 자만하거나 교만해서는 안 되며 사랑으로 교회 덕을 세우기 위해 그 은사를 사용해야 한다고 하면서 사랑에 대하여 교훈한 후에 다시 방언에 대하여  깊이 설명하는데,  고린도전서 14장이 바로 그 방언에 관하여 상세히 설명하는 내용이다.


  


요즘 방언 때문에 가정이 파괴되고 교회 성도 간에 불화가 생기는 것이 사실이고 보면 방언 문제는 우리가 다루어야 할 가장 심각한 문제 중 하나임에 틀림없다. 어떤 이들은 방언을 하지 못하면 구원을 얻지 못한 사람으로 취급하고 혹은 방언을 못하면 덜 신령한 사람으로 3등 크리스챤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적지 않아서, 사람들은 고린도교회에 주어졌던 방언을 인위적으로 배워서 교회 집회 때 방언함으로 말미암아 신령한 “일등 크리스챤” 층에 들려고 애쓰는 모습을 본다. 어디를 가나 사람들은 방언하는 것을 큰 자랑으로 알고 있고  방언을 못하는 사람은 주눅이 들어 방언하는 사람을 부러워하는 현상이 두드러진다.


 


과연 방언을 못하면 구원을 얻지 못한 사람인가? 방언은 배워서라도 곧 습득하여야 “일등 크리스챤”이 되는 것인가? 이것은 아주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런 현상이 진리라면 우리는 어떠한 방법으로라도 방언을 배워야 할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이런 현상이 진리가 아니라면 단연 이런 사이비 운동과 맞서 싸워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지 못하도록 막아야 할 것이다. 현대의 방언은 성경적인가? 아니면, 오늘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방언을 하는데 이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분명 오늘의 방언의 성격을 잘 살펴서 진리를 알 필요가 있다.


 


I. 방언의 의미 
방언은  헬라어 원어로 “glossolalia”인데 이는 두 단어가 합해서 구성된 복합명사 인데 “glossa”란 “혀, 언어” 등의 의미이고, “lalia”란 “말한다”이란 의미이다. 그러므로 “말, 즉 언어로 말한다”라는 의미이다. 언어학 (linguistics)에서 glossology라고 하면, 이는 인간이 사용하는 모든 언어의 분석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glossa”라는 말은 신약성경에 50번 이상 나온다. 야고보 3:5에서는 사람의 몸의 일부인 혀에 쓰이고, 사도행전 2:3 에서는 불의 혀에서 “혀”라는 말로 사용되고, 그 외에는 모두 “말” 이란 의미로 사용된다. 사도행전 2:4에서 “다른 방언으로 말했다”고 했는데, “다른 방언”이란 그들이 일상 사용하는 말이 아닌 다른 언어를 말한다(뜻을 모르는 말이 아니라, 뜻을 아는 말 즉  known language이다).


 


독일어가 존재하는 것을 누가 부인하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독일어를 일상생활에서 쓰지 않으며 또한 그 말에 익숙해 있지 않다. 우리가 어느 곳에 가서 갑자기 독일어로 말한다면, 이야말로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마가의 다락방에 모였던 사람들은 각자가 자기가 배우지 아니한 다른 나라말로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이해하고 들었다는 말이며, 전혀 아무도 모르는(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말을 들었다는 뜻이 아니다. 계시록에서 다음 성경구절을 보라 : 계5:9; 7:9; 10:11; 11:9; 13:7; 14:6; 17:15 등 구절을 보라. 이 모든 성경구절에는 “방언”이라는 말이 등장하는데, 여기에 나오는 방언은 아무도 모르는 오늘날의 방언이 아니고 세상 나라 사람이 지구상 어느 곳에서인가 사용하는 언어를 의미한다.


 


II. 방언의 현 좌표
오늘 교계에서는 방언은 어느 한 교단에서만 유행하는 현상이 아니고, 전 세계 어느 곳이나  교회가 있는 곳에는 이런 방언 바람이 불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옛날 고린도교회에서 방언 문제가 복잡해서 바울이 고린도전서 14장에서 전적으로 방언을 다루어야 할 만큼 심각한 문제가 되었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방언으로 인하여 성도간에 분열(分裂)이 생기고 교회 성도들 간에도 온갖 문제를 유발하는 현상이 눈앞에 벌어지고 있다. 1970년대만 해도 그런 일은 상상도 못했던 미국 정통장로교단(OPC)도 요즘에 와서는 방언하는 목사를 파면하는 등 수난기를 당하고 있고, 한국 교단은 예외 없이 어느 교단이고 대부분 좀 신앙이 좋다고 하는 사람이면 모두 방언을 말한다.


 


한국의 교인들은 크게 자유파와 보수파로 분류되는데, 자유파는 성경을 인간의 생각으로 판단하여 이성과 경험에 비추어서 믿을 것은 믿고 믿기 어려운 부분을 불신 하지만 문제는 소위 “보수파”라는 교회들에 있다. 한국 사람으로 “보수파”에 속하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신령한 체험을 하고, 병 고치는 은사를 받고, 방언을 하는 성도라야 보수파 신자”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모두 자유주의 신학을 따르는 자로 매도한다. 다시 말하면, 병을 고치지 못하고, 방언을 못하고, 환상이나 계시를 못 보면 그는 자유주의 신자라는 것이고 반면에 이런 일들을 하면 그는 보수파라는 잘못된 생각이다. 한국이나 미국이나 남미, 특히 미국 Arizona 주 Phoenix 근처에 있는 New Age본부가 있는 Sedona라는 곳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이른바 “영적 체험”을 하고 “방언”을 말하며, 심지어 “영겁전(永劫前)에 살다가 죽은 사람과 영적으로 교통한다”고 한다.(Edmond Gruss. Ouija Board: Doorway to Satan. (P&R) 참고).


 


방언 문제는 아주 심각하여 비단 교회만이 아니라, 신학생들에게도 상당히 파고 들어가게 되어 드디어 Westminster 신학교 교수 Richard Gaffin, Jr. 박사는 일 년간 특별 휴가를 받아서 방언을 연구하도록 학교 당국에서 배려했는데, 그 연구결과가 바로 그가 쓴 “The Perspectives on Pentecost”(은사론)이라는 책이다. 이 책은 O Palmer Robertson 교수의 The Final Word라는 책과 함께 쌍벽을 이루는데, 방언 연구에서 으뜸가는 성경적 평가서라고 인정받고 있다. 이 일은 미국 정통장로교단(OPC)에서 방언하는 목사를 목사직에서 파면한 직후에 이루어졌으며, 1974년도부터는 그 교단 헌법을 수정하여 “Any minister who speaks in tongues shall be divested”(방언하는 목사는 직위에서 해제한다)라고 못 박고 있는데, 지금은 그 교단 안에 방언 문제만 아니라 복음성가 문제, 아동 성찬식 참여 여부를 두고 고심하고 있다.


 


방언과 복음성가는 세계 모든 교단에 파급되어 있어서 이미 걷잡을 수 없게 사태가 악화되어 버렸다. 얼마 전 Scotland의 1636년 언약파(National Covenanters)들의 후손인 Associate Reformed Presbyterian Church(ARPC)는 복음성가 문제로 파가 갈라져서 NAPARC(North American Presbyterian and Reformed Council), 현재 미국에서 가장 보수적인 7개 교단이 가입되어 있다고는 하나, 1976년 당초의 설립 목적과는 달리 회원 교단 중 Reformed Church in the United States(RCUS)와 Reformed Presbyterian Church of  North America(RPCNA) 등 두 교단을 제외한 다른 교단들은 저마다 문제를 안고 있다.


  


한국인들이 모이는 교회에서는 방언을 못하면 자유주의자로 오인되고 방언을 하면 신령한 보수주의자로 환영을 받는 것이 불문율(不文律)처럼 되어 버렸다. 왜 이런 현상이 생기는가? 놀라운 것은 이런 현상은 날이 갈수록 더욱 심해진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앞서 언급한대로 혹자는 산에 있는 “신령한” 기도원에 가서 방언을 배우기도 한다. 성경 어디에 방언을 배워서 하라고 가르치는가? 미 육군 군목출신의 Martin R. Carothers라는 분이 쓴 Prison to Praise라는 책(pp.33-37)에서 그가 방언을 배우는 내용이 나온다. 이는 분명히 잘못되었다. 방언을 배워서 한다는 것은 비성경적이기 때문이다.


 


III. 방언의 성격
고린도교회에 방언이 있었던 것은 부인하지 못하다. 문제는 고린도에 있었던 방언이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 보는 방언 현상과 같은 성격인가 여부에 달려 있다. 고린도교회의 방언은 분명히 성서적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특별계시인 성경이 완성되기 전에는 여러 가지 환상, 계시, 방언, 꿈 등을 통해서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주셔서 그것들을 성경에 기록되도록 하셨고, 그런 방법으로 성경을 완성하도록 역사하셨다(히 1:1;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1-10 참고).  다시 말하면 방언은 성경이 아직 완성 되기 전에 하나님이 그의 계시를 주시는 방법중 한 가지였다.


   


옛날 장님 여섯 명이 코끼리를 설명하는 일을 맡았다. 코끼리가 어떻게 생겼는지 설명하라는 것이었다. 앞을 못 보는 장님들은 각자 나름대로 코끼리를 손으로 만져 보면서 설명할 수 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다. 첫 번째 장님은 코끼리는 벽처럼 편편하다고 말했다. 둘 째 장님은 창과 같다고 했고, 셋째 장님은 뱀과 같다고 했고, 넷째는 나무 같다고, 다섯째는 부채 같다고, 그리고 여섯째 장님은 밧줄 같다고 했다. 여섯 장님들은 촉각을 통해서 모두 자기 나름대로 깊이 연구한 끝에 각자가 연구한 결과를 발표하니 저마다 자기 의견이 옳다고 갑론을박하며 싸우는 것이었다. 종일 토론해도 어느 장님도 코끼리를 알지 못했으니  장님 여섯 명은 모두 맞고 동시에 모두 틀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오늘날 카리스마 운동에서 열심히 활동하는 분들은 예외 없이 자신의 체험에 그들의 의견의 근거를 둔다. 모두 “내가 경험했으니 이것은 진리이다”라는 논리이다. 체험을 통해서 무엇을 증명하려는 것은 위험천만이다. 사람의 체험은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A라는 사람이 체험한 것을 B라는 사람에 반드시 체험한다는 보장은 없다. 코끼리를 알려면 코끼리를 설명한 책을 보아야 한다. 손으로 만져서 어찌 코끼리를 알았다고 할 수 있는가? 직접 코끼리를 보는 것이 더욱 좋겠지만 오늘의 은사파의 생각이 마치 이런 코끼리와 장님과의 이야기와 같은 것이다. 방언하는 사람은 모두 체험을 내세우지만 체험은 위험하며 체험은 진리를 판가름 할 잣대가 되지 못한다. 신앙이란 체험으로 믿는 것이 아니고 성경 속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사람마다 체험을 내세우면 어느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분간할 방법이 없다. 사탄이 좋아하는 말씀의 혼란이 올 뿐이다. 사탄의 작전은 성도들에게서 성경을 빼앗아 가거나 아니면 성경말씀의 진리를 혼란하게 하여 어느 것이 진리인지 분간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IV. 성경에 나오는 방언의 성격
성경에 나오는 방언의 성격을 보자   
첫째,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방언을 보자.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몇 날이 안 되어 그의 성령을 보내시어 복음을 전하게 하실 때, 하나님은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게 하였고, 또 그 말씀을 전파할 때도 여러 가지 수단을 사용하셨는데, 주로 이적, 기사, 환상, 방언 등이었다. 사도행전 2장의 이야기는 당시 여기저기 16개 지방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였으나 모두 각각 자기 나라의 말로 들었다고 했다(행 2:8).  어떻게 그랬을까?
여기에 모인 사람들은 2:9 이하에 기록 된 대로 그야말로 전 유럽에서 모여들었는데, 이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어야 하겠기에 서로 각자의 방언,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이 세상의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말이 아니라 각자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알아듣게 역사 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가 목적이었다. 


   


또 한 가지 사도행전 2장의 방언의 의의는 이제는 모든 사람에게 성령을 부어주어서 전도하게 하신 것이다. 구약에서는 모세가 70인을 택해서 저들에게 하나님이 사역할 영을 부어주어 활동하게 하였지만(민 11:16-17), 이제 신약 교회가 시작되는 오순절에는 70인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성령을 부어서 전도하게 하신 의의가 있다. 전도는 목사만의 사역이 아니라 모든 성도의 사역이다. 분명히 알 것은 방언은 아무도 모르는 언어의 문법이 없는 이상한 소리가 아니라 세상에 존재하는 언어로 내가 아직 배우지 않고 사용하지 않은 언어라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의 교회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이상한 소리와는 아주 다른 성격이다. 방언의 성격을 바로 알자.


  


이제 고린도전서 12장과 14장에 나오는 방언을 보자. 
사도행전 2장에서 고린도전서 12장에 이르는 어간에 가끔 방언이라는 말이 나온다. 그러나 방언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고린도전서 12장과 14장이다. 특히 14장은 “방언장”이라고 할 만큼 방언을 자세히 다룬다. 우선 알아야 할 것은 사도행전 2장에서 보았듯이 신약성경에 나오는 모든 방언은 신약성경이 완성되기 전에 하나님이 그의 계시의 말씀을 나타내 주시기 위하여 쓰신 방편이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의 방언은 의미를 모르는 방언이 아니고 통역하는 사람이 있어서(항상 같은 한 사람) 그를 통해서 의미를 알 수 있는 방언이었으며 방언이라는 수단을 통해서 하나님은 말씀을 계속 주셨던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오늘날에는 그런 계시를 주시지 않으시는가? 실제로 계시를 보았다고 간증하는 사람들이 우리들 주변에 얼마든지 있지 않은가? 여기서 알 것은 고린도 교회의 방언은 성경이 아직 완성되기 전, 성경이 아직 계속해서 기록되어가는 과정에서 하나님이 특별 계시 전달의 수단으로 주신 것이며 오늘날의 방언은 하나님이 계시의 수단으로 주시지 않는데, 그 이유는 이미 하나님은 하실 말씀을 모두 하셨으므로 새로운 계시가 필요 없기 때문에 그런 옛날의 방언, 계시 환상, 꿈같은 방법이 필요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1:1에 말하기를 “옛날 옛적에 여러 가지 방법으로 계시하시던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완성되었다”고 못 박고 있는 것이다. 예수에게서 모든 하나님의 말씀이 완성되었다는 것이다. 신구약 성경 66권은 완성되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시는 모든 말씀이 이제 끝났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그런 하나님의 계시를 전하던 수단인 방언, 환상, 꿈 등이 이제는 필요 없으며 끝났다는 뜻이다. 


  


개혁주의자는 “계시의 종결”을 믿는다. “Canon is closed for good”(정경은 영원히 끝났다). 성경을 바로 믿는 사람, 바른 신앙을 가진 사람은 성경의 완성을 믿으며 따라서 필연적으로 “계시의 종결”(啓示의 終結)을 믿는다. 성경이 완성되었다는 말은 성경의 마지막 책인 계시록 마지막 22장 18-19절에 분명히 가르쳐 주는데, “이 예언의 말씀에 더 보태지도 말고 제하지도 말라”는 말씀과 함께 또한 히브리서 1:1-2에서 잘 나타난다. 성경에 더 보태면, 즉 성경 이외에 다른 계시를 더하면 성경에 기록된 모든 재앙을 더할 것이고, 만일 반대로 삭제하면 하늘나라에서 생명나무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성경은 끝났으니 가감할 수 없으며 이 66권만 성경이라는 것이다. 방언을 받으면 그것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 것이니(그럴 일은 없지만 만약 그런 계시가 하나님에게서 온다고 가정한다면) 이는 계시록 22:19의 위반이 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개인이 말하는 방언은 위험하다는 것이다. 방언은 개인용이 아니라 항상 교회의 덕을 세우는 일, 즉 교우들 모두를 신앙으로 인도 할 하나님의 목적이 있던 것이며 개인의 용도가 아니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개인 방언이 얼마나 성경에서 먼 방언인가를 알자. 성경이 완성되기 전에는 하나님이 자기 뜻을 전하기 위한 수단으로 방언, 꿈, 환상 등을 동원하여 사용했으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로고스>로 오신 다음엔 하나님의 말씀이 완성되었으니, 즉 성경이 완성되었며, 하나님은 그런 방법으로 더 이상 역사하지 않으시고 “기록된 말씀 Written Word"를 통해서만 역사하신다. 그래서 종교개혁가들은 <Sola Scriptura>라고 외쳤던 것이다.


  


하나님은 두 가지 계시를 주셨는데, 하나는 “일반계시” 혹은 “자연계시”이고, 다른 하나는 “특별계시”이다. 자연계시(Natural Revelation)를 통해서는 하나님이 계신 것은 알 수 있지만,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이고, 인간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인간의 적나라한 모습은 어떤지, 인간의 구원은 어떻게 얻는 것이지 등은 자연계시를 통해서 해답을 얻을 수 없고 오로지 특별계시인 성경말씀만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 즉 성경을 주신 것이다.


  


오늘날의 방언의 특징은 무엇인가?
저들의 말을 빌리면 방언을 통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계시를 받는 것이다. 하나님이 지금도 계속해서 계시를 주신다면,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일 터이니 그 계시의 말씀과 지금 받은 계시를 합하여 해석한다면, 사람마다 받는 계시가 다르니 어느 말을 따라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생긴다. 혼동이 온다는 말이다. 혹자는 묻기를, “방언하는 것이 어떻게 성경에 보태는 것이 되는가?”라고 항의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완성된 말씀(성경)만 인정하는데, 앞서 언급한대로 오늘날의 방언이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면 분명히 하나님의 뜻일 터이니 하나님이 자기의 성경 이외에 보여 준다는 것은 성경 자체의 증언에 어긋난다는 말이다. 성경자체가 성경은 완성되었다고 증거하지 않는가?(계 22:18-19)


  


신약의 방언은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라 구약만 가지고 있던 당시, 신약성경을 기록하기 위하여 주신 방편이 방언이라는 점을 다시 강조한다. 성경 어디에도 방언이 구원의 조건이란 말은 없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거짓 증거하는 사람들이므로 경계해야 한다. 방언하는 사람이 더 신령하다는 말도 성경에 없다. 고전 12장에 방언이 성령의 은사중 하나로 되어있으나 성령의 은사를 가르치는 롬 12:6-8이나 엡 4:11-12에는 방언의 은사가 없다. 만일 고전 12:28에 나오는 방언이 오늘도 존속한다면, 같은 구절에 기록된 “사도들”도 존속해야 한다. 그런데 오늘날 사도가 어디에 있는가? 사도들이 떠난 지 2000년이 다 되어 온다. 성경에서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을 “사도”라고 하지만 상징적인 말일 뿐, 성경을 기록한 사도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고전 12:28의 방언이 상징이 아니라면 같은 구절에 나오는 “사도”도 상징이 될 수 없고 문자 그대로 옛 사도라야 하는데, 초대교회의 사도들, 즉 성경을 기록한 사도들이 지금 어디 있는가?


  


고린도교회는 대부분 구약을 모르는 이방인들로 구성된 교회였다. 따라서 미숙한 교회로 바울이 심혈을 기울여 그들을 가르쳤다. 그 교회는 문제가 많았다.--분쟁, 윤리도덕, 우상의 제물, 혼인문제, 은사문제, 성찬문제, 부활문제, 여성의 교회에서의 위치 등 실로 복잡한 교회였다. 그 중 은사문제는 많은 문제 중 하나에 불과했다. 그 중에서도 방언에 대한 인식이 제대로 되어 있지 못하여 방언에 관한 하나님의 뜻을 사도 바울이 바로 전해 주었다. 성령의 은사 9가지 중에서도 방언은 맨 끝에 적혀 있다. 그 당시에도 방언의 은사가 그리 대단한 은사가 아니었다. 사도 바울은 오히려 “제일 좋은 은사를 보여 주겠다”라고 하면서(고전 12:31),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을 말한다.



V.  고린도전서 14장에 나타나는 방언의 6가지 원칙 
 고린도전서에서는 12장보다 14장에서 방언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다.
고전 14:1-25까지 일반적인 방언에 관한 이야기를 해 나가다가 26절부터는 교회가 따라야 할 원칙을 언급하고 있다.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다음과 같은 <6가지 원칙>을  찾아 볼 수 있다:
   
1. “덕을 세워야 한다”(edification)는 원칙이다.
고린도교회는 방언 문제로 시끄러워져 혼란을 빚었다. 예배 분위기가 크게 손상되었다. 마치 오늘날과 같은 상태였다. 오늘날 이른바 “은사집회”가 소란스러운 것은 그런 집회에 참석한 분은 알 것이다. 요한복음 4:24에 예배드릴 때는 “신령과 진정으로” 거룩하게 드리라고 했는데, 과연 이런 “은사 집회” 형의 예배가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인가?


옛날 John Wimber의 빈야드 운동의 예배 형태를 보라, 회중이 방바닥에 뒹굴면서 닭소리, 개소리, 말소리, 소소리, 돼지소리 등을 내면서 소동을 피우고 예배 도중에 웃음소리가 요란하다. 그들은 이 웃음을 “거룩한 웃음 holy laughter”라고 부른다. 고전 14:26에 보면, “덕을 세우기 위해서 하라”라고 말씀하신다.


   


고린도교회의 예배는 우리와 달랐다. 그들의 성경은 구약뿐이고 신약은 아직 기록 중이었다. 주께서 승천하신 후, 은사 받으신 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멧세지를 받아 서로 권면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 그들은 하나님이 계시를 주시기 위하여 택함을 받아 하나님의 은사를 받으신 분들이었다. 보통 사람들이 아니었다. 방언으로 계시를 받으면 통역을 통해서 그 말씀의 의미를 깨달았고(이 말은 모르는 말이 아니라 세상에 존재하는 아는 언어이다), 그 말씀은 곧 바로 성경에 기록되었다. 마치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기도한 기도내용이 성경으로 기록되어 남게 된 것과 같고, 다니엘이나 요셉의 꿈 해몽이 곧 바로 성경의 일부로 기록된 것과 같다.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방언을 통역하는 사람은 한 사람, 즉 같은 사람이 다른 여러 방언하는 사람의 멧세지를 통역했다는 점이다. 오늘날처럼 통역 없이 저마다 떠들어대는 그런 방언이 아니고 통역이 있다고 해도 저마다 통역한다고 여러 사람이 통역으로 나서서 이것저것 통역하는 그런 방언이 아니었다. 이런 면에서도 현대 방언은 비성경적이다. 오늘날은 저마다 통역을 두지 않고 스스로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위험하다. 모든 이단 집단은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며 저들의 이단 집단을 시작한다.


  


가령 <안식교>의 창시자인 Ellen Gould White라는 여자를 보라. 그는 평생 220회 이상의 환상을 통해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한다. <모르몬교>의 교주 Joseph Smith 를 보라. Joseph Smith는 33세에 성난 백성의 몽둥이에 죽임을 당했지만, 그가 모르몬교를 시작할 때 계시를 보았다고 한다. 밤마다 Moroni라는 천사가 Smith 교주의 침상에 찾아와서 “New York 주 Palmyra에 가면 애굽의 회형문자(繪形文字 hieroglyph)로 기록한 순금 동판이 있는데 이것이 진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니 이를 캐내어 사용하라”는 계시를 받아 모르몬교가 시작되었다. 뿐만 아니라, <Christian Science>라는 이단 교단을 만든 Mary Eddy Baker라는 여자를 보라. 그녀는 몸에 부상을 입고 고생하다가 환상을 보고 나서 엉뚱한 <Christian Science>라는 종파를 만들어 교주가 되었다. 이들에 의하면 “고통이나 죽음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인데 이런 것들이 존재한다고 믿는 것이 죄이라”라고 가르치고 그들의 구원이란 “이런 관념에서 해방되는 것이 바로 구원이라”라고 가르친다. 위에서 본 모든 교주들은 하나같이 환상을 통해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한다. 이들의 주장대로 정말 이런 교리들이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인가? 아니다.


  


본인도 믿지 못하는 방언을 하면서 통역도 없이(통역이 있을 리도 만무하지만) 방언을 말하는 사람들은 그 출처가 어디인가? 따져 보아야 한다. 정말 하나님에게서 오는가? 아니면 다른 곳에서 성경을 위장한 어떤 다른 세력의 침투인가?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분명 성경적이 아니니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하나님에게서 오지 않는 것을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이는 거짓 증인들이니 그런 사람들의 말을 들을 필요가 없으며 경계해야 한다. 고린도교회의 방언의 목적은 소란을 피우는 것이 아니라, 그 방언을 통해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으면 같은 회중에 있는 통역의 은사를 받은 사람의 통역을 통해서 모든 회중에게 덕을 끼치며(신앙이 성장하게 하며) 은혜를 나누는 것이었다. 오늘날처럼 여러 사람이 뒤범벅이 되어 통성으로 방언 기도를 하지 않았다. 반드시 차서(순서)를 따라서 차례대로 방언했다. 이것도 오늘의 방언과는 거리가 멀다. 오늘의 방언이 이 첫째 원칙에 부합되는가? 그 방언이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면 이 원칙에 어긋날 수는 없다. 오늘의 방언이 온 교우에게 덕을 끼치는가? 만일 끼친다면 어떻게 덕을 끼치는가? 그 방언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도 모르면서 방언 말함을 자랑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다.


   


2. “방언하는 사람은 차서 (次序) 가 있다”는 원칙이다.
 앞서도 언급한대로 방언은 여러 사람이 동시에 떠드는 것이 아니라 순서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고전 14:27-28에 보면,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다불과(多不過) 세 사람이 차서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만일 통역자가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하라”라고 명령한다. 그런데 오늘날의 방언을 보면 이 원칙을 지키는가? 아니다. 이런 원칙은 아주 무시한다. 바울은 14:40에서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라고 가르친다. 그런데 현대 교회에서 이런 성경적 질서를 지키는가?


   


3. “통역이 있어야 한다”는 원칙이다.
 고전 14:27에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라고 했고, 28절에는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하라”라고 가르친다. 중요한 것은 한 사람이 통역하는 것이다. “한 사람”이란,  “동일한 사람”이란 말이다. 헬라어에서는 “한 사람”을 강조하여 “heis”라 했다.


같은 한 사람이지 다른 두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한 사람이 방언하면 A라는 사람이 통역하고 또 다른 사람이 방언하면 이번에는 B라는 사람이 통역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언제나 같은 A라는 사람이 모든 방언하는 사람을 통역한다는 말이다. 즉 통역을 바꾸지 말라는 말이다. 이런 통역의 원칙이 지켜지지 않아서 고린도교회에서는 혼란이 생겼던 것이다. 통역이 있건 없건 떠들어대는 오늘날의 방언은 성경의 원칙에 어긋난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하고 행해지는 방언은 하나님에게서 오는 방언이 결코 아니다. 고전 14:28에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잠잠하라”고 했으니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방언하지 말라고 하지 않는가? 그런데 현대 방언하는 사람들이 이런 원칙을 지키는가?


   


4. “혼란이 없게 하는” 원칙이다.
고전 14:33에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오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라고 하였다. 혼란이 있는 곳은 마귀가 지배하는 곳이며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 이유는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고 질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질서와 화평을 원하신다. 모든 피조물의 질서를 유지하는 하나님이시다. 우주의 천체(天體)를 보라. 미생물을 현미경에 놓고 관찰하라.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의 소위 “은사 집회”에서 이런 질서가 지켜지고 있는가? 아니다. 현대의 떠들고 시끄러운 방언 현장에 질서의 하나님이 계시다고 생각하는가?


   


5. “잠잠히 순종하는” 원칙이다.
고전 14:35-36에 보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저희에게 말함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니라”라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여자는 창조의 질서와 타락의 순서에 따라서(딤전 2:12-13; 창 3:16) 교회에서 권위 있는 말을 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성인 남자를 주관하여 가르칠 수는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주일학교 학생이나 같은 여자들은 가르칠 수 있다. 물론 교회 밖에서 세상에서의 직업에는 하등 구애 받지 않는다. 교회에서는 남자가 지도하는 권위를 가진다는 의미이다. 이 원칙은 대부분의 교회에서 오늘 여지없이 무너지고 있다. 비단 방언이 아니라고 해도 여자들이 강단에서 주일 예배 설교를 하고 장년부 성경공부를 가르치는 교회가 얼마나 많은가? 정면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도전하는 행위인데, 하나님의 말씀에 도전하는 것은 그 말씀을 주신 하나님에 대한 도전이다. 여자는 잠잠하라고 가르치는데 오늘날의 교회에서 여자들이 방언을 삼가고 있는가? 오히려 더욱 요란하지 않은가? 하나님에 대한 도전이다.


  
6. 끝으로, “위엄, 威嚴)”의 원칙이다.
고전 14:36에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난 것이냐 또는 너희에게만 임한 것이냐?”라고 묻는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교만했다. 고린도교회에만 진리가 있는 줄로 착각 했다. 사도 바울은 저들을 책망하여 14:37-38에서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한 것 같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라고 꾸짖는다. 계속해서 38절에 보면, “누구든지 알지 못하면 그는 알지 못한 자라”라고 한다. 이는 고린도교회 교인들의 잘못된 생각을 시정해 주는 교훈이다. 고린도교회의 방언의 목적은 하나님의 계시를 주시기 위한 수단이었다. 14:39에 보면,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라고 한 말씀대로 계속해서 방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계시의 말씀을 주셨다. 그러나 질서가 문란했다. 방언은 개인의 자랑거리가 결코 아니었고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 도구였는데(계시가 아직도 완성되기 전이므로), 오늘날의 방언과는 거리가 멀다. 계시가 완성된 오늘날의 방언은 하나님이 이용하시는 계시의 수단이 아니다. 계시할 것이 없는데 무슨 이유로 방언을 수단으로 등장하여 사용하겠는가?  그러므로 방언이 하나님의 계시라고 말하는 것은 성경의 종결성을 믿지 않는 소치이다. 성경이 완성된 것을 믿지 않는 소치이다. 성경은 완성되었다. 더 이상 하나님은 계시하실 것이 없으시고 이미 계시하신 말씀, 즉 성경만 가지고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고린도전서 13:8에 보면, “방언도 그친다”란 말이 있다. 좀 더 정확히 인용하면,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라고 했는데, 원어인 헬라어 성경에서 보면 방언이 예언과 지식이 폐하기 전에 “스스로 없어질 것”이 명백하게 나타난다. “방언도 그치고” 의 “그친다”라는 말은 원어에서 “파운손타이”(pausontai)인데 이는 문법적으로 “pauw”의 중간태(middle voice)이므로 문법적으로 보면, “방언은 스스로 없어지게 될 것이다”란 의미가 분명하다. 그 문장의 ”pausontai”는 문법적으로 “indicative mood, middle voice, future tense, 3rd person plural”( 직설법 중간태 삼인칭 복수 미래)이니 방언이 저절로 없어진다는 말이다.


  


한편 “예언도 폐하고 지식도 폐하리라”라고 한 대목은 원어에서 “katargeitheisetai”인데 이는 “katargew” 동사의 직설법 삼인칭 단수 미래 수동태이므로 “예언과 지식이 하나님에 의하여 폐함을 당하여 더 이상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라는 의미인 것이 분명하다. 그러기에 그 다음 구절 고전 13:9에 보면, “지식과 예언”은 나오지만 “방언”은 언급이 없는 것을 보아서 방언은 예언과 지식이 폐하기 전에 “스스로 끝난, 즉 임시로 주었던 은사”이다. 이런 은사를 성경의 “계시은사”(revelatory gift)라고 하기도 하고 “임시은사”(extraordinary gift)라고 하기도 한다.


  


사도행전 10장에서 고넬료에게 베드로가 전도할 때 고넬료가 방언을 말한 것이나(행 10:46), 사도행전 19장에 나오는 에베소 사람 12명에게 바울이 전도할 때 그들이 방언한 것(행 19:7)들은 베드로나 바울이 전도한 말씀이 과연 하나님의 말씀으로 틀림이 없는 진리의 말씀임을 그들로 인쳐서 믿게 하려는 복음 전파 초창기의 하나님의 임시적인 특별사역으로 설명된다. 이상하게도 그 이후부터는 방언에 관한 언급이 없다. 바울의 다른 서신은 말할 것도 없고 일반 서신에도 방언 언급이 전혀 없다.


  


마가복음 16:17-18을 연구하면, “믿는 자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여 병든 자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이것이 무슨 의미인가? 오늘날 예수를 구주로 믿는 사람이 독을 마셔도 죽지 않는다는 말인가? 독을 마신 사람이 죽으면 그는 믿음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해야 하는가? 믿는 성도가 뱀에게 물리면 해를 받지 않으며 병든 사람에게 손만 얹으면 모두 병석에서 일어나는가? 그럴 수는 없다. 그렇다면, 이 말의 뜻이 무엇인가?  어떤 성경 사본에는 이 말씀이 누락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는 누락되었건 안 되었건 그것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이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탐구하려는 것이다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낸다”란 말은 곧 예수를 믿고 중생한 자는 마귀의 자녀로부터 하나님의 자녀로 옮겨진다는 말이니 예수 믿는 성도에게는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을 말하며, “새 방언을 말하며”란 말은 예수를 믿는 사람이 도무지 모를 이상한 소리를 내면서 다닌다는 말이 아니라, 주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으므로 말이 달라져서 항상 하나님을 찬송하며 남을 저주하던 언어 습관을 고친다는 말이고,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이 말씀은 뱀은 사단을 말함이니 믿는 성도는 사단의 유혹을 받아도 넘어지는 일이 없으며 어떤 이단 사설, 감언이설, 혹은 환난과 핍박을 당한다 해도 해를 받는 일이 없으며 영혼이 강건할 것을 말한다. “병든 자에게 손을 얹은 즉 나으리라”란 말은 우리의 “영혼의 병”이 낫는다는 말이다.


  


방언은 성경이 완성되기 전에 여러 가지 이적 기사처럼 하나님이 성경을 기록하게 하면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 수단과 또 하나님의 말씀임을 확증하는 수단으로 기독교 초기, 아직 성경이 완성되기 전, 교회도 자림하기 전에 임시로 주셨던 하나님의 “임시 은사”(臨時恩賜, extraordinary gift of God)로 다른 말로는 “revelatory gift”이며 영속성(永續性)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순절의 사건도 유일회(唯一回)적 사건이다. 반복되지 않는다. 사도행전 2장의 사건은 요엘 2:28의 성취이며 모세 시대에 모세가 택한 70인에게 하나님이 그의 신(神)을 부어 주어 사역하게 했던 것을, 이제 신약 교회가 출발하면서 모든 성도들에게 그런 사역을 감당하도록 성령으로 역사하신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요엘 선지의 예언을 언급한 것이다. 노아의 홍수가 반복 안 되듯, 십자가가 반복 안 되듯, 오순절은 단회적인 사건(單回的事件, once for all)이며 방언도 임시로 주셨던 은사이다. 이것이 개혁주의 신학의 입장이며, 칼빈의 입장이며, 한국의 박윤선 목사님과 많은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견해 이다. 


 


그 외에 이런 신학을 주장하는 신학자들은 다음과 같다:


William Hendriksen,  Robert L. Dabney,  Louis Berkof,  Charles Hodge,  Archibald
Alexander, Ned. B. Stonehouse, Geerhardus Vos, J. Gresham Machen,  Richard Gaffin, Jr., W.G.T. Shedd, Abraham Kuyper, R.B.Kuiper, Herman Bavinck, Herman Ridderbos, Charles Spurgeon,  D. Martyn Lloyd-Jones, George Whitefield, Jonathan Edwards, Mathew Henry, John Knox, John Owen, 그리고 교부에 올라가서는 Augustine, Crysostom,  Origen,  Cyril of Alexandria, Clement of Alexandria, Eusebius, Tertullian, Irenaeus 등 많은 쟁쟁한 학자들이 계시의 종결, 오순절의 단회성, 성령의 임시 은사들을 주장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완성된 지금은 그런 방법이 필요 없어서 하나님은 그렇게 역사하지 않는 것이며 하나님의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다. 흔히 히브리서 13:8에 “예수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다”란 말씀을 인용하여 임시은사의 영속성을 주장하지만 예수님의 인격은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이 없으시다. 그러나 그의 사역은 이전과 지금은 다르다. 이전에는 십자가 사건 전이며 제자들과 직접 이 땅에서 사역하셨다. 그러나 지금은 영광 중에 계시며, 그의 영과 말씀으로 역사하여 구원할 자를 구원하며, 동시에 역사를 주관하고 계시고, 만국을 철장으로 다스리고 계시는 만왕의 왕이며 만주의 주가 되신다. 그의 사역 방법 까지도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구속사역(救贖使役)을 제한할 수 없다. 그러므로 히 13:8 말씀은 방언 지속의 증거구절로 이용할 수 없다.


  


구약 말라기가 끝난 후 400년간 침묵을 지켰다. 선지자를 보낼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다.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구약에서 하나님이 하실 말씀을 모두 하셨기 때문에 선지자를 보낼 필요가 없어서 안 보내신 것이다. 이제 옛 선지자들을 통해서 약속하신 메시야를 세례요한을 통해서 기름 부어 세우게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 때문에 400여 년간 침묵이 흘렀던 것과 같이 하나님은 전제주권을 갖고 모든 것을 그의 뜻대로 그의 계획대로 그의 목적을 위하여 역사하신다.


  


방언은 성경이 완성될 때까지 존속하여 하나님의 계시를 받던 임시 은사였다. 고린도전서 13;8에 “방언은 스스로 사라진다”라는 말은 방언이 그 목적인 성경을 완성한 다음에는 그쳤다는 말이다. 지식과 예언이 끝난다는 말은 헬라어 원문에서 “katargew”(카타르게오) 라는 동사의 “직설법 수동태 미래형”을 쓰고, 방언이 그친다는 말은 이와 전혀 다른 동사인 “pauw”(파우오)란 동사의 “중간태 미래형”을 쓰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한다.  헬라어의 중간태(middle voice)는 “스스로 무엇 무엇이 어찌어찌 되다”의 의미를 갖는다. 그러므로 “방언이 스스로 그치게 될 것이라”라고 번역하면 정확한 번역이다. 


  


어떤 분들은 고린도전서 13:12을 들어서, 주님이 재림할 때까지 임시 은사가 계속한다고 주장하지만 이 주장이 잘못된 것은 만일 주님이 재림까지 지속한다고 하면 왜 “parousia”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을까? 바울은 주님의 재림을 말할 때는 반드시 그의 특유한 단어 “parousia”(파루시아)란 단어를 썼다. 가령 예를 들어 바울은 주의 재림을 말하는 대목에서 “parousia”를 쓴 증거를 고전 15장이나 살전 4장과 5장에서 보면 모두 한결같이 “parousia”란 단어를 쓰고 있다. 그러하다면 만일 바울이 고전 13장에서 이런 방언 같은 임시 은사가 주님 재림할 때까지 지속한다는 뜻을 나타내려 했다면, 왜 “parousia”란 단어를  여기에서만 피했겠는가? 라고 생각해 보아야 한다.


  


많은 사람들의 오해를 불러오는 고전 14장을 통해서 방언의 원칙 6가지를 살펴보았는데, 그  6가지 원칙 중에서 그 어느 하나도 현대 방언에서는 지켜지지 않고 있음이 입증되었다. 오늘날의 방언은 어디서 오는지 몰라도 성경의 원칙을 무시하고 있으니 분명 성경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성경적이 아니라면 성경은 하나님의 정확 무오한 말씀인고로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이 아님도 입증된다. 오늘날의 방언은 계시록 22장 18-19절의 위반이다. Lehman Strauss 박사는 그의 저서, “Speaking in Tongues”(방언 말하기, p.19)에서 현대방언의 출처에 관하여 3가지 가능성을 말한다. “첫째는 혼자서 중얼거리거나, 둘째, 군중심리로 남이 하니까 따라서 하는 하등의 의미 없는 소리이거나, 셋째, 사단에게서 오는 것이다”라고 Strauss 박사는 말한다. Chicago Moody Bible Institute 의 Merrill Unger 박사도 같은 생각이며(Merrill Unger. New Testament Teaching on Tongues, 방언에 관한 신약성경의 가르침, 참고), 또한 Master Theological Seminary 의 John MacArthur 박사도 그의 저서 “Charismatic Chaos”(혼란스런 은사주의 운동)에서 필자와 같은 생각을 말하고 있다.


  


방언을 말하는 사람은 100퍼센트 이적과 기적을 좋아하고 지금도 성경에서 읽어보는 그런 기적, 이적이 일어난다고 믿는다. 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나고, 사람이 물위를 걸어 다닐 수 있고, 집 쌀독에 쌀이 없을 때 목사에게 음식을 잘 대접하면 그 쌀독에 쌀이 가득 가득 채워지는 것으로 믿는다. 그래서 목사를 우상처럼 대한다. 잘못된 신앙이다. 이들은 또한 방언과 구원을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위에서 우리가 살펴 본 바와 같이 현대 방언은 성경에서 벗어난 행위이기 때문에 방언을 멀리하는 것이 개혁주의 성도의 신앙생활이 되어야 한다.


  


참으로 거듭난 성도는 “기록된 말씀”만 믿고 의지하고 순종하며 살아가야 한다(Sola Scriptura). 성경은  말하기를 "성경대로 믿지 아니하면 구원이 없다" 고 가르치며 “anathema”(저주)가 임한다고 갈라디아 1:8-9에 같은 말을 두 번씩 반복하면서  가르치다. 또한 마태복음 7:22 이하에는 잘 믿는다고 하면서 실제적으로는 비성경적인 사역으로 남을 속이며  악행을 행한 "자칭 주의 종" 들이 심판날에 주님으로부터 준엄한 책망을 받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다.


  


갈라디아 본문의 '저주"란 말은 원문인 헬라어에서 "아나세마" (anathema) 인데 이 말은 "위에 놓여졌다" 즉 "하나님 앞에 놓여져 있다" 라는 말이고  이 말을 설명하면, "이제는 하나님 앞에 놓여진바되었으니 만일 그가 잘못 사역한 것이 판명되면 그는 영락없이 저주를 받을수 밖에 다른 피할 길이 없다" 는 의미이고 "저주" 를 받는다는 말은 구원이 없다는 말이다. 


  


세상에서 아무리 요란하게 인기리에 사람의 각광을 받으며 대형교회를 목회하고 신학교에서 벼라별 신기한 학설을 주장하며 멋진 강의와 설교를 하면서 학생들에게 혹은 교인들에게 인기를 얻어도,  나중 대심판날 주님으로부터 "내가 너를 도모지 안 적이 없다. 택한 적도 없고, 안수한 적도 없고, 너에게 사역을 맡긴 적도 없는데 너는 너의  멋대로 남에게 인기를 독차지하기 위해서 참다운 주의 종을 능멸하면서 이단을 가르쳤으니 이 불법을 행한 자야, 내게서 영원히 떠나라" 라고 한다면, 그 모든 세상에서의 영화가 무슨 소용일까?


 


목회자들이여,  바로 사역하자,  성도들이여, 사이비 사역자에게 속지 말자.
바로 알고, 바로 믿고, 바로 신앙 생활해야 할 때이다.


 


참고서적:
   Calvin, John. Bible Commentary. Grand Rapids, Mich.: Baker
   Gromacki, Robert. Modern Tongues Movement. Phillipsburg, N.J. P&R.
   MacArthur, John. Charismatic Chaos. Grand Rapids, Mich.: Baker
   Strauss, Lehman. Speaking in Tongues. Phillipsburg, N.J. P&R.
   Robertson, O Palmer. The Final Word. Edinburg: Banner of Truth Trust.
   Unger, Merrill. New Testament Teaching on Tongues. Chicago: Moody Press


 


글: 김명도 교수
    튤립 교육 선교회
    튤립 신학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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