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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인물

톰 라이트 - 이은선교수

작성자
쥬니어칼빈
작성일
2013-09-27 18:56
조회
12262
[바울의 새 관점(New Perspective on Paul)의 이신칭의에 대한 비판 - 톰 라이트(Tom Wright)와 존 칼빈(John Calvin)의 비교를 중심으로 이은선 교수(안양대학교 신학대학원 원장)

I. 들어가는 말 

바울의 새 관점은 1960년대 스텐달(Krister Stendahl)의 연구에 의해 시작되어 점차로 동조자들이 확대되어 왔다. 1970년대에 샌더스(E. P. Sanders)에 의해 언약적 율법주의가 주장되어 종교개혁자들의 바울 서신에 대한 이해가 잘못되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그 이후 제임스 던(James Dunn)과 헤이스(Richard B. Hays)를 비롯한 여러 신학자들에 의해 수용되었으며,1) 그와 함께 개혁주의자이며 복음주의자인 톰 라이트가 수용하...여 대중적인 전파자가 되었다. 

특히 영국 성공회에서 개혁주의자이며 복음주의자로 알려진 톰 라이트가 바울의 새 관점을 수용하여 다양한 저술들을 출판하면서 이 견해는 개신교회의 가장 핵심적인 교리인 이신칭의 교리를 위태롭게 만들어 왔다. 학문 활동에 그치고 있는 다른 학자들과 달리 톰 라이트는 목회자로서 자신의 견해에 대해 규범성을 주장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2) 미국의 개혁주의 교단들 안에서도 지지자들을 확보해 가고 있다.3) 그래서 미국에서는 존 파이퍼가 목회자의 입장에서 톰 라이트의 견해를 적극적으로 비판하였고,4) 미국의 정통장로교회5)와 미장로교회(PCA)6) 등에서 적극적으로 바울의 새관점을 비판하고 있다. 이러한 영향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새 관점이 개신교회에 미치는 영향력의 심각성을 자각한 한국교회도 2010년에 접어들어 톰 라이트의 견해를 중심으로 바울의 새 관점에 대한 다양한 학술대회가 개최되어 학문적인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7) 

지금까지의 바울의 새관점에 대한 논의는 신약학자들을 중심으로 주경학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런데 본인은 바울의 새관점을 주장하는 학자들이 종교개혁자들의 이신칭의에 대한 이해에 대해 제기하는 질문들을 역사적인 관점에서 검토해 보고자 한다. 물론 바울의 새관점에 대한 논의는 신약본문을 토대로 하는 주경적인 연구를 통해 전개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할 것이다. 그러한 주경작업을 통한 논의와 함께 바울의 새관점이 종교개혁자들의 이신칭의를 중심으로 한 논의들을 집중적으로 비판하고 있으므로, 그들의 종교개혁자들에 대한 비판이 정당한 것인지 검토하는 작업도 필요하다고 판단된다. 그래서 본고에서는 제일 먼저 바울의 새관점이 형성되는 과정을 살펴보고, 그러한 학자들이 종교개혁자들의 이신칭의에 대해 제기하는 문제들을 분석하고자 한다. 그 후에 그러한 문제 제기에 대한 종교개혁자들 특히 칼빈의 견해를 제시하면서 그러한 비판의 타당성을 검토하고자 한다. 

II. 바울에 대한 새 관점의 형성 과정 

스텐달은 1961년에 미국 심리학회(American Psychological Association)에서 강연을 했다. 그는 이 강연에서 처음으로 20세기에 이루어진 바울 해석이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의 해석학적 유산에 의해 부당하게 지배당하고 있다고 분명하게 지적하였다. 바울에 대한 “종교개혁자들”의 해석은 믿음과 행위, 율법과 복음, 유대인과 이방인들에 대한 바울의 서술들이 중세 후기 경건의 구조 속에서 읽혀지는 추론(analogism)에 의존하고 있다. 스텐달의 전체적인 비판은 신약학자들이 루터가 아마도 16세기에 그를 읽었던 바와 같이 개인의 죄와의 싸움의 관점에서 바울을 읽어 왔다는 것이었다.9) 스텐달에 따르면 루터는 1세기 맥락에서 바울을 읽기보다는 바울의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시대착오적으로 공로에 대한 중세의 질문의 관점으로 읽었다. 

샌더스는 바울 해석의 분수령을 이루는 작품인 『바울과 팔레스타인 유대인』(Paul and Palestinian Judaism)에서 주로 제2성전 시대 유대교 문헌들을 분석하여 유대교를 율법주의 혹은 행위 의의 종교라는 기독교의 일반적인 해석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샌더스는 유대인들이 율법에 대한 순종을 통해 구원을 받는데 관심이 있었다는 기독교의 통념을 반박하고자 하였다. 샌더스의 1세기 유대교에 대한 이해는 하나님의 은혜 혹은 선택을 통해 언약 안으로 들어가서, 순종으로 언약에서 자신의 위치를 유지하며, 속죄의 수단을 사용하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그래서 샌더스는 1세기 유대교를 “언약적 율법주의”라고 묘사했는데, 언약적 율법주의는 “하나님의 계획에서 한 사람의 위치는 언약의 토대에서 결정되고 언약은 범죄에 대한 속죄의 수단을 제공하는 동안에 사람들의 올바른 반응으로서 계명에 대한 순종을 요구”10)하는 것이다. 샌더스는 제2성전시대 유대교 문헌을 연구하여 유대교에서 율법의 기능이 언약으로 들어가는 수단이 아니라 언약 안에 머무는 역할을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언약 안에 들어가는 것은 율법에 대한 순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 혹은 은혜에 의한 것이다. 그러므로 유대교는 율법종교가 아니라 은혜의 종교라는 것이다. 

샌더스는 바울 시대의 유대교의 전반적인 특성을 여덟 가지로 확인한다. 1)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선택하셨다. 2) 그는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셨는데, 3) 이 율법은 선택을 유지하려는 하나님의 약속과 4) 순종하라는 요구를 함의하며 5) 하나님은 순종을 보상하고 위반을 처벌하며 6) 율법은 속죄의 수단을 제공하는데 7) 이 수단들은 언약 관계의 유지 혹은 재확립의 결과를 가져오며 순종, 속죄, 그리고 하나님의 자비에 의해 언약 안에 머무는 모든 사람들은 구원받은 집단에 속한다.11) 

많은 신약학자들에게 있어서, 샌더스의 1세기 유대교에 대한 이러한 재평가는 바울 서신들의 역사적이고 문맥적인 배경을 더 훌륭하게 이해할 수 있는 해석학적인 틀을 제공하는 조명으로 수용되었다. 

스텐달과 샌더스의 작품이 나온 직후에 톰 라이트는 루터의 시각으로 해석된 바울을 비판하는 진영에 합류하였다. 물론 톰 라이트 자신은 바울에 대한 자신의 독특한 관점이 이 문제에 대한 샌더스의 중요한 저서인 『바울과 팔레스타인 유대인』의 출판 이전에 자신의 옥스퍼드에서의 박사 학위 논문 탐구에서 비롯된 것임을 밝히고 있다.12) 톰 라이트가 개인적으로 이미 그러한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글을 통한 의견의 발표는 샌더스의 저술 직후인 1978년에 나온 논문을 통해 이루어졌다. 그는 이 논문에서 게르하르트 에벨링(Gerhard Ebeling)같은 루터파 해석자들은 이신칭의의 교리를 말씀의 신학과 십자가 신학(theologia crucis)으로서 루터파의 순수성 속에서 보존하기 위하여 신앙을 역사로부터 분리시켜야만 했다고 주장했다.13) 덧붙여서 라이트는 또한 “바울 해석의 전통은 그가 반대하는 거짓된 유대교를 만들어내서 거짓된 바울을 만들어냈다”고 주장하였다.14) 다시 스텐달과 같이 라이트는 유대인들이 율법주의적이라는 묘사는 로마가톨릭과의 전투 속에서 16세기에 루터가 처음으로 만들었다고 주장한다.15) 그러므로 라이트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우리는 간단히 말해, 바울의 세계 속으로 종교개혁과 현대의 이념들을 투사한 결과로 역사의 바울보다 그의 발명자들이 더 많은 것을 알려주는 신앙의 사도, 적어도 상상의 사도인 바울을 가지고 있다.”16) 라이트는 계속해서 주장한다. “우리가 바울을 이해하는 범주들, 그 문제에 대하여 신약 전체는 루터파 논쟁의 얇고, 피곤하며 시대착오적인 것들이 아니다. 그것들은 역사의 바울 자신이 우리에게 준 것들이다.”17) 

제임스 던은 스텐달의 토대를 구축하는 논문에 의존하면서 라이트와 같이, 바울은 루터의 로마가톨릭과의 전투의 관점에서 해석되었다고 믿는다. 샌더스의 연구, 특히 제2성전 시대 문헌 연구의 견지에서 해석자들은 마침내 “바울을 올바르게 그 자신의 맥락 안에서 볼 수 있고, 그 자신의 시대의 관점에서 바울을 들을 수 있으며, 바울이 자신이 되도록 만들어 줄 수 있었다.”18) 샌더스가 제2성전 시대의 유대교 문헌들을 집중적으로 연구했던 것과는 달리 이후에 라이트와 던은 바울 자신의 작품들, 특히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분석하면서 바울에 대한 새로운 관점들을 발표하였다. 물론 바울에 대해 새 관점을 가진 학자들이 동일한 견해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각자들마다 고유한 주장들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그들은 샌더스가 제기한 언약적 율법주의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의견을 같이 하고 있다. 

라이트도 샌더스의 언약적 율법주의에 대해 동조하여 다음과 같이 요약하여 소개하고 있다. 

바울 시대의 유대교는 일반적으로 주장되는 바와 같이, 율법주의적인 행위 의의 종교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우리가 유대교가 행위-의의 종교이고, 바울이 마치 유대교가 그런 것 같다고 공격하고 있다고 상상한다면, 우리는 유대교와 그에게 폭력을 가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개신교 주석가들은 바울과 유대교를 마치 유대교가 오래된 이단인 펠라기우스주의의 형태인 것같이 해석한다. 펠라기우스주의에 따르면 인간들은 그들의 도덕적 수준을 끌어올리고 그것을 통해 칭의, 의, 그리고 구원을 획득한다. 샌더스는 아니라고 말한다. 유대교 안에서 율법을 준수하는 것은 언제나 언약적인 구조 안에서 작용한다. 하나님께서 유대교와 언약을 맺으실 때 주도권을 잡으신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백성들 (특히) 유대인들이 반응하는 것보다 앞서 간다. 유대인들은 은혜에 대한 올바른 반응으로 감사로부터 율법을 지킨다. 다시 말해서 언약 백성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언약 안에 머무는 것이다. 첫째 자리에 자리잡는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다.19) 

톰 라이트는 개신교의 정통적인 바울 해석을 루터와 칼빈 등의 16세기 개혁자들의 해석에 토대를 두고 있다고 거부하면서, 오히려 그의 역사적 맥락, 즉 제2성전 시대 유대교의 관점에서 바울을 해석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러한 관점에서 해석할 때 바울 서신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안에 포함된 교리들, 특히 이신칭의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III. 톰 라이트가 종교개혁자들의 이신칭의를 비판하는 내용들 

바울의 새 관점을 주장하는 학자들마다 그 주장하는 내용에서 약간씩의 차이가 있으나 라이트가 종교개혁자들의 이신칭의에 대해 비판하는 중요한 내용들은 다음의 몇 가지로 분류될 수 있다. 톰 라이트가 이신칭의와 관련하여 집중적으로 제기하는 질문들은 위에서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바울 서신들을 해석하는 틀로서의 1세기 유대주의에 대한 이해, 그리고 거기서부터 출발하여 하나님의 의, 율법의 행위, 그리고 이신칭의의 새로운 이...해이다. 이러한 주제들에 대한 톰 라이트의 견해는 개혁파와 폭넓게 복음주의 공동체에 충격을 주었고 그러한 공동체 안에 있는 일부 학자들의 칭의 교리의 해석에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에 철저한 검토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판단된다. 

1. 하나님의 의 

톰 라이트는 종교개혁자들의 하나님의 의에 대한 이해가 잘못되었다고 비판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루터의 이신칭의 교리가 형성되는데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이 로마서 1장 17절에 있는 하나님의 의에 새로운 이해였다. 루터가 중세 말의 신학자들이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의로우신 속성이라고 이해했던 것을 비판하고 하나님께서 전가시키는 의라고 해석하면서 그의 종교개혁적인 이신칭의 사상이 탄생하였다.20) 이러한 전가된 의라는 하나님의 의에 대한 이해는 칼빈에게도 그대로 수용되었다. 

그런데 라이트는 이러한 종교개혁의 전통을 비판하면서 1세기 유대교 배경에서 하나님의 의를 이해할 것을 주장하고 그러한 1세기 유대교 배경에 근거하여 지금까지의 전통적인 해석의 오류들을 지적한 후에 자신의 견해를 제시한다. 그는 먼저 1세기 유대교 배경에서 하나님의 의를 올바르게 이해하는데 필요한 세 가지 배경이 있다고 주장한다. 첫째 70인 역의 독자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의’는 자신의 약속, 즉 언약에 대한 하나님 자신의 신실성이라는 하나의 분명한 의미를 가질 것이다.”21) 라이트는 이사야 40-55장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의’는 이스라엘의 사악함과 방황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을 구출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다니엘서 9장서 민족을 구원해 달라는 다니엘의 기도도 역시 하나님의 이러한 의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라이트는 두 번째 배경으로 유대 법정의 구조를 제시한다. 유대법정에는 검사는 없고 원고와 피고와 함께 그들을 판결하는 재판관만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재판관은 법에 따라 공정하게 판결할 때에 의롭게 된다.22) 원고와 피고는 법정의 결정의 결과로 의로운 신분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법정의 상황에서 의롭다는 것은 도덕적 자질이 아니라 법정 결정의 결과일 뿐이다. 라이트는 의롭다는 단어를 이렇게 이해하면 재판관이 자신의 의를 전가한다거나 나누어준다는 종교개혁시기의 개신교와 로마가톨릭의 논쟁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주장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악한 이방인들이 자신들을 억압할 때 재판관이신 언약의 하나님께 언약에 충실하셔서 자신들을 의로 변호해 달라고 호소하게 된다는 것이다. 

라이트는 이러한 두 가지 배경 하에서 하나님의 의를 이해할 때 세 번째 요소로서 미래의 심판이 요청되는데, 이것은 그들의 언약의 의무에 충실함을 반영하는 행위-의의 심판이 될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칭의 부분에서 좀 더 살펴보겠다.23) 

라이트는 이러한 유대교 배경을 검토한 후에 교회사적으로 등장했던 하나님의 의의 다층적인 의미의 가능성에 대하여 검토한다. 그는 하나님의 의를 하나님 자신의 의로 이해하는 가능성(A)과 인간에게 주어진 의로 이해하는 가능성(B)으로 나눈다. 그 후에 A를 도덕적 특성으로서의 의(소유격 속격으로서의 ‘하나님의’ 의, A1)와 구원을 이루시는 능력으로서의 의(주격 소유격으로서의 ‘하나님의 의’, A2)로 나눈다. A1을 다시 ‘분배적인 의’(A1a)와 ‘언약적 신실성(A1b)’으로, A2는 언약적 신실성의 행동들(A2a)과 비언약적 세계를 패배시키는 행동들(A2b)로 분류한다. B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의로운 신분으로서의 의(기원의 속격으로서의 하나님의 의, B1)와 ‘하나님 앞에서 간주되는’ 특성으로서의 의(목적격 속격으로서의 ‘하나님의 의,’ B2)로 분류한다. 그리고 B1은 전가된 의(B1a)와 분배된 의(B1b)로, B2는 하나님에 의해 인정된 자연적인 특성(B2a)과 하나님으로부터 오고, 그 후에 그 자체로 인정되는 특별한 은총(B2b)으로 나눈다.24) 루터 이후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의”라는 구절을 “신앙의 토대 위에서 복음의 결과로서 사람들이 가지는 신분을 표시하는 것”으로 해석하여, B1a와 B1b는 종교개혁 당시에 개혁자들과 로마가톨릭의 견해를 나타낸다. 그리고 A1a는 루터가 종교개혁 이전에 가졌던 견해이다. B2a와 B2b는 중세 말기의 유명론자들이 주장했던 견해인 것으로 보인다.25) 그는 A2b는 구원을 일으키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해석한 케제만의 견해인데,26) 언약을 배제하고 우주의 구원을 말하기 때문에 유대적인 배경과 맞지 않아 배제되어야 한다고 말한다.27) 이러한 여러 견해를 검토한 후에 라이트는 하나님의 의는 주격적 속격 혹은 소유의 속격으로 해석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 신자들에게 전가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하는 특성이다. 라이트는 로마서 1장 17절을 “바울은 복음이 하나님 자신의 의, 그의 언약적 신실함을 드러낸다 혹은 계시한다고 말한다. 이 신실함은 차례로 신실한 모든 사람들의 은총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함을 통하여 역사한다”고 설명한다.28) 그는 로마서 주석의 하나님의 의와 관련된 구절들을 주석한 후에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성이란 결론을 내린다. 

이러한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맺은 언약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물론 이 의는 공의의 한 형태이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언약에 속박되셔서 이 언약을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뿐만 아니라 우주를 갱신하시겠다고 약속하신다. 그러나 이 언약의 신실성, 이 언약의 공의는 구원 활동일 뿐만 아니라 다니엘 9장이 분명하게 증명하는 바와 같이 언약을 파기하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엄격한 심판의 문제이다. 그리고 그 후에 회개하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로운 구원의 활동이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주님이라는 복음이 그 자체 안에 바울이 로마서 2장 16절에서 강조하는 바와 같이 구원의 소식뿐만 아니라 미래 심판의 메시지를 포함하는 이유이다.29) 하나님의 의는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는 속성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언약을 지키시는 신실성이다. 그는 루터 종교개혁의 가장 비극적인 부분이 이러한 하나님의 의의 성격이 은폐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2. 율법과 율법의 행위 

톰 라이트가 종교개혁자들의 이신칭의에서 두 번째로 문제를 삼는 것은 율법과 율법의 행위가 어떤 의미를 가지느냐? 하는 것이다. 바울이 “아무도 율법의 행위로는 그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다”(롬3:20)고 쓸 때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 역사적으로 루터와 함께 칼빈을 비롯한 개혁파 학자들은 “율법의 행위들”을 의를 얻으려는 유대인들의 시도를 언급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다시 말해서 이것의 지시대상은 구원을 얻으려고 율법을 사용한다는 의미에서 율법주의적이다.30) 

톰 라이트는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이 율법의 행위를 하나님 앞에서 구원을 얻으려는 유대인들의 율법 준수 행위로 이해한 것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의 전체적인 맥락을 잘못 해석한 것으로 비판하고 있다. 라이트는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개인적인 죄와 구원의 문제를 다루는 편지가 아니라 민족적 집단으로서의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가장 큰 관심사는 누가 하나님의 백성에 속하는가?를 논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두 서신을 하나님의 백성의 성격에 대한 책이라기보다 개인적인 구원에 관한 책으로 읽어온 교회가 얼마나 바울의 생각으로부터 멀어졌는지를 판별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31) 그러므로 라이트는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1세기 유대주의의 배경에서 읽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32) 둘째로 이 두 서신은 율법주의를 반대하기 위해 쓰여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두 서신에서 “정말로 문제가 되는 것은 전통적 개신교 신학에서 일반적으로 생각해 온 같은 ‘형식주의’가 아니라 유대인이 되어야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느냐?”하는 것이었다.33) 갈라디아서에서 논의되는 핵심적인 문제는 이방인 기독교인이 할례를 받아서 유대 기독교인과 같이 되어야 하는 것인데, 참다운 유대인으로서 바울은 이러한 행위를 통해 아무런 유익을 얻을 수 없다고 강조하고 있다.34) 로마서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역사의 마지막에 이스라엘을 위해 무엇을 하실 것이며, 역사의 중간에 예수를 위하여 무엇을 하셨는가를 생각하면서 유대 민족과 이방인들 사이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35) 

그러므로 라이트는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말하는 율법을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법이 아니라, 유대민족에게 주어진 토라라고 지적한다. 두 서신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었던 언약의 배경 하에서 읽어야 하기 때문에 이 서신서들에게 사용되는 율법은 일반적인 법이 아니라 구약의 율법이라는 것이다. 그는 로마서 4장의 행위가 일반적인 행위가 토라의 행위라고 지적한다.36) 

그러므로 이러한 서신서들에서 언급되는 율법의 행위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었던 언약의 관점에서 해석할 때 구원을 얻기 위한 행위가 아니었다. 그는 “율법의 행위에 반대하는 바울의 논쟁은 유대인의 율법을 지킴으로 언약의 회원권을 획득하려 시도했던 사람들이 아니라(1세기에는 그런 사람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같다) 유대인들의 율법을 순종함으로 그들의 언약의 회원권을 입증하려는 사람들을 겨냥하였다”고 주장한다.37) 라이트는 이러한 입장에 따라 율법의 행위는 공로나 구원을 얻기 위한 율법주의적인 행위가 아니라 언약에 속한다는 회원권의 증거를 제시하려는 유대 민족의 뱃지, 그리고 ‘이방인들로부터 유대인들을 구별하려고’ 지키는 율법의 국면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런 율법의 행위들 혹은 뱃지에는 안식일, 음식법, 그리고 할례 등이 포함되어 있다.38) 

그는 갈라디아서 2장에 있는 율법의 행위를 당시 삶의 정황을 고려하여 유대 민족의 뱃지로 해석한다. 바울이 여기서 할례의 문제를 논하는 것은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 혹은 루터나 에라스무스가 직면했던 질문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고 1세기 맥락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정의하는 방식의 질문과 아주 분명하게 관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할례는 ‘도덕적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도덕적 노력이나 선행을 통해 구원을 얻는 것과 관련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39)

3. 칭의 

톰 라이트는 율법의 행위를 이와 같이 유대민족을 특징짓는 민족적인 뱃지로 해석하기 때문에, 칭의에 대해서도 전통적인 견해를 비판하고 새로운 해석을 제시한다. 그는 전통적인 칭의관이 5세기의 어거스틴-펠라기우스 논쟁과 16세기의 에라스무스-루터 논쟁을 배경으로 형성된 것으로 바울의 성경 본문이 말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고 지적한다. 그는 이신칭의가 “성경 본문과는 아주 독립적인 의미를 발견시켜 왔다”는 맥그래스의 지적40)을 인용하면서 전통적인 “이러한 방식으로 로마서를... 해석하는 것이 수백 년 동안 그 본문에 조직적으로 폭력을 행사하였다”고 평가한다.41) 

따라서 라이트는 칭의에 대해 전통적인 견해와 달리 다음의 세 가지 내용을 집중적으로 설명한다. 첫째로 칭의는 언약의 언어인데, 16-7세기의 언약신학의 관점이 아니라 1세기 유대교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었던 언약의 약속의 견지에서 해석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바울이 칭의를 말할 때, 그는 당시 로마 제국의 지배 하에서 직면했던 정치적인 곤경 속에서 하나님의 언약의 약속에 매달리던 1세기 유대교의 관점에서 사고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라이트는 종교개혁 이후의 칭의에 대한 정의는 1세기 팔레스타인에 있었던 역사적 배경 안에서 이해된 바울의 교훈과 관련되는 것이 아니라 16-7세기 교의학과 더 많은 공통성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바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맺었던 언약에서 약속했던 구원에 관심이 있었는데, 죽은 후의 영혼의 상태나 행위 의를 통한 무시간적 구원이 아니라 당시 민족적인 재난에서 이스라엘 민족의 변호를 통한 구원에 관심이 있었다. 그래서 라이트는 1세기의 칭의를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1세기의 칭의는 어떤 사람이 하나님과 관계를 수립하는 방식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현재와 미래의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정의, 즉 사실상 누가 그의 백성의 구성원이냐에 대한 것이었다. 샌더스의 용어로 표현하자면, 이것은 ‘들어가는 것’ 혹은 ‘머무는 것’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누가 그 안에 있는지를 말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것이었다. 표준적인 기독교 신학적인 용어로, 이것은 구원론에 대한 것이 아니라 교회론에 대한 것이었다. 구원에 대한 것이 아니라 교회에 대한 것이었다.42) 

둘째로 그는 이 칭의가 유대 법정을 배경으로 한 용어라는 것을 이해해야만 한다고 강조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실 때, 이것은 아담의 죄를 교정하시고 세상을 올바른 길로 돌이키는 하나님의 방식이었다. 하나님의 법정에서 그의 백성들은 세상 앞에서 변호 받고 올바른 길에 있다고 판결을 받을 것이다.43) 라이트는 칭의에서도 하나님의 의에서 설명했던 유대 법정의 비유를 통해 누군가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법정적 선언이라고 해석한다. 

셋째로 라이트는 바울이 종말론의 견지에서 칭의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칭의는 사람들이 구원받는 교리의 어떤 추상적인 체계의 일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만물을 그리스도의 권위 아래 굴복시키면서 성령을 통해 죄로부터 우주를 구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결정적인 행동에 뿌리를 박고 있다. 

라이트는 이러한 세 가지 특성을 가지고 있는 칭의를 이중적으로 구분한다. 첫째는 칭의의 현재적인 측면이다. 현재의 칭의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과거의 성취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미래의 변호를 기대한다.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날에 앞서 현재 예수를 메시아와 주로 믿는 모든 사람들을 변호하신다. 라이트는 말씀과 성령을 통한 소명을 사람의 심령이나 특성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행동이라고 부르고, 칭의는 그 사람이 지금 올바른 길에 있다는 하나님의 선언으로 그들에게 올바르다는 신분을 수여한다고 이해한다.44) 

둘째는 최종적인 혹은 미래의 칭의는 심판 날에 세상 앞에서 어떤 사람이 옳다는 사실에 대한 실질적인 선언이다.45) 그러나 라이트에게 있어서 칭의의 근거는 현재로부터 최종적인 칭의로 진행하는 과정에서 분명해질 것이라는 것이 주목되어야만 한다. 로마서 8장 3-4절을 주석하면서 라이트는 여기서 언급되는 것은 미래 변호, 마지막 날의 변호, 바울이 로마서 2:1-16절에 묘사하는 날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선언은 현재의 선언과 일치할 것이고, 바울이 지금 말하고 있는 성령에 의해 인도받는 생활로부터 따라올 것이다.46) 

바울은 제2성전 시대 주류 유대교와 공동으로 하나님의 최종적인 심판은 삶의 전체와 일치하여 이루어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행위와 일치하여 이루어질 것이다. 그는 로마서 14:10-2과 고후 5:10절에서 아주 분명하게 이것을 말하고 있다. 그는 고린도 전서 3장에서 교회 건축자에 대해 말하는 그 두려운 문단에서 이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 사실을 가장 분명하게 설명하는 주요문단은 로마서 2장 16절이다. 

로마서에서 칭의에 대한 첫 번째 서술은 2장 13절에 있는 행위에 따른 심판인데, 로마서 8장과 10장에서 이것을 정의하고 있고, 빌립보서 1장 8절에서 가장 간결하게 지적하고 있다.47) 기독교인들이 마지막 날에 그것과 일치하여 변호 받을 행위는 성령의 내주와 역사의 결과로 한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들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로마서 8장 17절은 로마서 2장 16절에 대한 실질적인 답변이다. 지금 정죄함이 없는 이유는 한 편에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육체 안에서 죄를 정죄하시고, 다른 한 편에서 성령께서 신자 안에서 율법이 할 수 없는 일인 생명을 주는 일을 수행하려고 활동하시기 때문이다.48) 이러한 면에서 라이트는 성령의 역사에 의한 행위에 의한 최종적인 심판을 말하고 있다. 

데살로니가와 빌립보서에서 바울은 다가오는 심판 날을 미리 바라보는데 그리스도의 공적과 죽음의 토대 위에서가 아니라, 그의 사도의 사역의 토대 위에서 하나님의 호의적인 변호를 바라보고 있다.(살전3:19; 빌2:16) 그는 도덕적이고 물리적인 노력으로 자신이 현재 하고 있는 일들이 살아계신 그리스도의 성령이 그 안에 역사하고 계신다는 효과적인 표지이기 때문에 마지막 날에 그의 공적(credit)이 될 것이라는 것을 매우 분명하게 밝힌다.49) 올바른 행동을 한 사람은 마지막 날에 의롭다고 선언될 것이다. 

라이트가 제시하는 바울의 칭의교리는 교회론의 축 위에서 회전하고 있다. 칭의는 현재 하나님의 언약 백성에 속하는 사람들에 대한 선언이자 할례, 음식법, 그리고 안식일같은 율법의 행위들이 아니라 믿음으로 표출되는 언약의 의로운 구성원인 사람들에 대한 선언이다. 이것은 또한 마지막 날 미래에 일어날 것에 대한 현재의 예기이다. 현재의 칭의는 신자들의 성령에 의해 인도받는 행위들에 근거하여 미래 칭의를 기대하는 신실한 순종으로 이해되는 신앙에 근거한다. 

이러한 라이트의 칭의론에서 과연 믿음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인간의 죄를 위해 죽은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언약의 저주를 짊어지고 죽은 것으로 이해한다. 그는 갈라디아서 3장 13절의 의미는 그리스도가 율법을 어긴 민족적인 죄악의 결과로 저주의 추방의 저주를 당하고 있는 ‘우리’ 유대인들을 구속했다고 해석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유대인들의 추방이라는 저주가 끝나고 이제 그 축복이 이방인에게 흘러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부활은 이러한 그의 죽음을 하나님께서 올바르다고 인정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라이트는 전통적인 의미의 칭의를 거부하기 때문에 칭의의 수단이란 의미의 믿음도 반대한다. 그는 믿음을 칭의의 수단으로 이해하게 되면 칭의와 속죄를 통합하여 믿음을 사치품으로 만들기 때문이라고 한다.50) 그는 하나님께서 믿음을 이미 언약 구성원의 자격의 표시로 보며 이것으로 사람을 의롭다고 선언하신다는 것이다. 현재 칭의에서 믿음은 “언약 구성원의 뱃지”이며, 언약에 들어가려는 시험으로 수행하는 어떤 것이 아니다.51) 그는 믿음을 신실함으로 이해하며, 결국은 순종이라고 말한다. 그는 믿음은 (다른 주들을 부인하며)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하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신 것을 믿는 것이다. 이 신앙은 하나님의 신실함에 대한 인간의 신실함이다.52) 

이와 같이 라이트는 믿음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다는 내용을 말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주되심과 부활이란 자신의 복음에 대한 고백이라 정의한다. IV. 칼빈의 칭의교리 

라이트의 견해와 비교하기 위하여 먼저 칼빈이 하나님의 의, 율법의 행위, 그리고 칭의에 대하여 어떠한 견해를 제시했는지를 분석해보고자 한다. 

1. 하나님의 의 
...
칼빈은 루터의 하나님의 의의 전가 사상을 수용하여 로마서 1장 17절을 주석하면서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나는 하나님의 의란 하나님의 법정에서 인정받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이것은 사람들의 의견에 의로 평가받고 간주되는 것이, 그것이 비록 사소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일반적으로 사람의 의라고 언급되는 것과 같다. 그러나 바울은 분명하게 성령께서 미래 그리스도의 왕국에서도 있을 하나님의 의를 계속하여 제시하는 많은 예언들을 암시하고 있다. 일부 주석자들은 이것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라는 의미로 설명한다. 나는 틀림없이 이 단어들이 하나님께서 그의 복음으로 우리를 의롭게 하시고 그리하여 우리를 구원하시기 때문에 이러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내가 이 문제에 많은 시간을 소비할 수는 없지만, 그렇지만 전자의 의미가 나에게는 훨씬 더 적합한 것같다. 일부 학자들이 이 의가 값없이 주시는 죄의 용서뿐만 아니라 부분적으로 중생의 은혜에도 존재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께서 값없이 자신을 우리에게 화해시키시므로 생명으로 회복된다고 주장한다.53) 

칼빈은 여기서 하나님의 의를 하나님의 법정에서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으로 보는 견해와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으로 보는 견해를 구분하고 자신은 전자의 의미가 본 구절에 더 적합하다고 주장한다. 전자의 입장은 루터의 개혁활동을 통해 더욱 분명하게 밝혀진 것으로, 법정에서 선고를 통하여 의롭다고 간주되는 것으로 결국 하나님의 의가 전가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복음 외에 다른 곳에서는 하나님께서 그의 의를 우리에게 계시하지 않으셨으며,” “하나님께서 그의 복음 안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보화 즉 그의 의의 전달”을 통해 불의한 우리가 의롭게 되어 구원받는다고 서술한다.54) 그러므로 칼빈은 주격 속격 혹은 소유의 속격으로 해석하는 라이트와 달리 “하나님의 의”라는 구절의 속격을 기원의 목적격 혹은 속격으로 해석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으로부터 사람에게 전가되는 의라고 해석한다. 칼빈은 하나님의 의가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으로서 중생의 의미를 지닌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자신은 하나님의 법정에서 인정받는 것이라는 의미를 선호한다고 밝힌다. 칼빈은 여기서 중생이 칭의의 결과로 생겨나는 것으로 보고 칭의와는 구별하고 있다. 칼빈은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어 우리의 것으로 간주된다고 이해한다.55) 

칼빈은 하나님의 의를 “중생의 은혜요 아무 자격이 없는데도 하나님께서 그의 성령으로 우리를 새롭게 하신 까닭에 이 은혜는 값없는 것”이라고 말하는 어거스틴의 견해를 거부한다. 칼빈은 바울이 구원에서 인간의 행위를 완전히 배제하는데, 심지어는 “주님께서 그의 택하신 백성들에게 열매 맺힌 행위 일체”까지도 배제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바울은 인간의 칭의를 말할 때 “타고난 본능으로 행하는 도덕적 행위뿐만 아니라 신자들이 행할 수 있는 모든 선한 행위들까지도 일체 배제한다.” 그리고 “저희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않으셔서,” 즉 하나님의 의의 전가를 통해서만 의롭다고 하신다.56) 칼빈은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의는 인간의 모든 행위를 배제하고 철저하게 하나님의 의의 전가라는 것을 분명하게 밝혀주고 있다. 

그러면 칼빈은 “하나님의 의”를 하나님의 속성으로 이해하는 측면은 없는가? 칼빈은 로마서 3장 22절의 “하나님의 의”를 주석하면서 하나님의 속성으로의 의와 우리에게 주시는 의의 양면성을 설명하고 있다.57) 그는 “하나님의 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바울은 칭의가 무엇과 같은지를 간략하게 밝힌다. 이 칭의는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고 믿음으로 파악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의 이름을 다시 소개하여 하나님을 자신이 말하는 있는 의의 단순한 승인자일 뿐만 아니라 장본인으로 만드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마치 바울이 의가 하나님에게서만 흘러나오고, 혹은 그 기원이 하늘에 있는데, 그러나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드러나게 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58) 

칼빈은 여기서 하나님의 의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바울이 말하는 성도들에게 전가된 의를 단순하게 승인하시는 분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 의의 장본인이라고 말한다. 이 의는 하나님에게서 흘러나오며, 결국 그 기원이 하늘에 있다고 말한다. 결국 이 의는 하나님의 속성으로서 하나님께로부터 흘러나와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칼빈은 이 하나님의 의는 단순하게 전가되는 의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본래 가지고 계셔서 그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칼빈은 “하나님께서 모든 의의 근원”이라고 말한다.59) 

칼빈은 하나님의 의의 양면성을 로마서 3장 26절 주석에서 더욱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는 의가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첫째는 “자신 안에 홀로 의의 모든 충만함을 포함하고 계신 분으로서 의로우시다는 것이다.”60) 따라서 “전체 인류는 불의하다고 정죄받는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홀로 의롭다는 이름과 영광을 얻으시므로 그에 합당한 충만하고 완전한 찬양을 받아야 한다.” 둘째 부분은 “의의 전달”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 그의 의의 부요함을 자신 안에 가두어 두지 않으시고 인류 위에 쏟아 부으시므로,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믿음으로 의롭게 하시는 한에서 우리 안에서 빛나신다.”61) 

이와 함께 칼빈은 로마서 4장 11절에서 하나님의 언약의 신실성을 충분하게 설명하고 있다. 칼빈은 할례를 비롯한 “성례들이, 바울이 증거 하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약속들이 우리의 가슴에 새겨지고 은혜에 대한 확실성이 확증되는 표징들”이라고 한다. 그리고 “할례의 표에 의해 이중적인 은혜가 나타났다는 점이 특별히 기술되어야만 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축복의 씨를 약속해 주셨다. 이 씨에게서 온 세상을 위한 구원이 기대되도록 되어 있었다 --- 그리고 값없는 하나님과의 화목이 그 표에 내포되어 있었던 것이다.”62)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할례를 통해 자신의 언약의 약속이 성취된다는 것을 설명한다. 그러므로 칼빈은 하나님의 의가 하나님의 속성으로서 자신이 하신 약속을 할례를 통해 확실하다는 것을 나타내셨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칼빈은 하나님의 의가 자신의 속성으로 자신의 언약에 신실함과 동시에 타인에게 전가되는 의의 두 측면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로마서에서 인간이 의를 얻는 방법이 인간의 전적인 타락으로 하나님의 의의 전가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의의 전가를 강조하였다. 

2. 율법의 행위 

칼빈은 갈라디아서 주석을 쓰면서 이 교회의 문제가 “거짓 사도들이 의식의 준수가 필요하다고 가르쳐” 발생하였고, 바울이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갈라디아서를 쓴 것으로 이해하였다.63) 이들은 “예루살렘에서 지켜온 관습들을 가는 곳마다 어디서나 지키도록 의도했다면 이들은 상당한 잘못을 과오를 범하는 것”이었고, “관습적인 의식을 지키는데서 의를 얻는다고 생각하여” “사람의 양심을 종교의식에 얽어매어 놓으려고” 하였다. 그래서 칼빈은 “의식에는 사람을 의롭게 할 힘이 없다”는 것을 논증하면서 이신칭의를 주장하게 되었던 것이다.64) 그러므로 칼빈은 갈라디아 교회에서 문제가 된 율법의 행위는 바로 의식법의 준수 문제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 그러한 의식법 준수를 통한 율법의 행위로는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그는 갈라디아서 2장 11절을 주석하면서 베드로의 이러한 행위는 사도행전 15장 이전에 일어난 행위라고 해석한다. 그리고 베드로의 이 행위는 제롬이 공개적인 책망이 아니라고 해석한 바와 달리 “이방인들에게 굴종을 강요하는 것같이 유대화하고 있었다”고 해석하여 공개적으로 책망한 것으로 해석한다.65) 그래서 칼빈은 갈라디아서 2장 16절을 주석하면서 “거짓 사도들이 그리스도나 믿음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 다만 의식을 믿음과 결합하려고 했기 때문에” 바울은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믿음으로써만” 구원받는다는 배타적 명제를 제시하였다.66) 그는 갈라디아서 5장 3절의 할례는 거짓 사도들이 의식을 통해 구원얻기 위해 할례를 시행하도록 하는 것은 행위 의를 얻으려는 율법의 행위에 해당된다고 이해하면서 비판하고 있다. 이들은 “율법과 그리스도를 혼합하고자” 하였다.67) 칼빈은 갈라디아서에서 율법의 행위는 바로 할례와 같은 의식법을 준수하도록 요구하는 것은 행위-의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이해하여 철저하게 비판하였다. 

칼빈은 율법의 행위에 대하여 로마서 1-4장까지의 주석에서 여러 가지를 설명하고 있다. 먼저 칼빈은 로마서 3장 27절 주석에서 행위의 자랑의 무익함을 설명하면서 당시 스콜라주의자들의 논의를 먼저 반박하고 있다. 

그러나 공적이 자랑의 문제라면, 합당한 공로(meritum de congruo) 혹은 사람이 이러한 공로를 가지고 자신을 하나님과 화목케 할 수도 있다는 당연한 공로(meritum de condigno)라고 부르든지 간에, 우리는 이러한 양자가 여기서 파괴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68) 

라이트가 비판하는 바와 같이 칼빈은 행위의 공로를 다루면서 중세 후기 스콜라주의의 주장을 반박하고 있다. 이것은 칼빈이 시대의 아들인 이상 당연한 것이라고 여겨진다. 오히려 그 시대의 잘못된 문제들을 지적하면서 올바른 논의를 전개해야 하기 때문이다. 

칼빈은 율법의 행위에 대해 당시의 여러 가지 논의들을 충분하게 잘 숙지하면서 로마서가 제시하는 칭의와 가장 잘 어울리는 견해를 제시하고자 하였다. 칼빈은 율법의 행위가 라이트가 주장하는 바와 같이 할례를 중심으로 한 의식법을 가리킨다는 견해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로마서 3장 20절을 주석하면서 “율법의 행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박식한 학자들 가운데서도 율법의 행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약간의 의심이 있다. 일부 학자들은 이 말씀을 확대하여 전체 율법의 준수를 포함시키는 반면에, 다른 사람들은 의식법에만 국한시킨다. 크리스소돔, 오리겐, 그리고 제롬은 율법이란 단어의 첨가 때문에 후자의 의견을 수용하였다. 왜냐하면 이들은 율법이란 단어가 첨가된 것은 이 문단이 모든 행위들을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되는 것을 방지하려는 특별한 함축을 가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어려움을 쉽게 해결될 수 있다. 행위들은 우리가 그것들을 통해 하나님을 예배하고 순종하려고 노력하는 정도에 따라 하나님 앞에서 정당하다. 그러므로 바울은 모든 행위로부터 칭의의 능력을 분명하게 제거하려고, 의롭게 해주는 최고의 능력을 가진 그러한 행위들에 대하여 그 용어를 사용하였다.69) 

칼빈은 이미 크리소스돔, 오리겐, 그리고 제롬과 같은 초대 교부들이 이미 로마서 3장 20절의 율법의 행위를 의식법에만 국한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들 교부들은 행위가 아니라 율법의 행위이기 때문에 의식법을 통해 의롭게 되려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그러나 칼빈은 율법의 행위가 모든 행위라고 해석하고 있다. 칼빈은 “율법은 약속들을 가지고 있고 이 약속이 없으면 우리의 행위들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칼빈은 “바울은 단순한 행위가 아니라 그의 논의의 주제인 율법의 준수에 대한 분명하고 확실하게 언급하고 있다”고 결론을 내린다.70) 

칼빈은 이 율법의 행위를 의식법에 제한하면서 인용한 논증들은 의식법에 대한 한 가지 실례로 할례를 제시하여 생각보다 약하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칼빈은 당시에 율법의 행위에 대해 율법 전체를 포함한 행위를 말하는지 아니면 의식법만을 포함하는 행위를 말하는지에 대한 논의를 분명하게 알고 있으면서, 이 율법의 행위는 바로 율법의 전체 행위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그는 다시 로마서 3장 27절 “행위로냐”를 주석하면서 “여기서 의가 행위의 법에 존재한다면, 우리의 자랑은 배제되지 않을 것”이나 “의가 믿음 만에 의한 것이라면, 우리가 자신을 위해 주장할 수 있는 아무 것도 없을 것”이라고 하면서 “신앙과 행위 사이에 이러한 대조는 주의깊게 주목되어야만 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여기서 행위들은 아무런 첨가 없이 보편적으로 언급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의식의 준수, 구체적으로 외적인 행위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상상할 수 있는 행위의 모든 공적을 포함하고 있다”고 해석한다.71) 

그는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라는 4장 6절의 주석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율법의 행위를 의식에만 제한하는 사람들이 단지 트집을 잡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바울이 앞서 율법의 행위로 지칭하였던 것을 이제는 단순히 그리고 아무런 형식적인 단어를 첨가하지 않고 행위라고 칭하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본문에서 발견하는 이 간략하고 수식이 없는 행위가 모든 행위에 구별 없이 적용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면, 이것은 전체 논증에 일관해서 유효한 것임에 틀림없다. 바울이 구별없이 모든 행위를 배제하기 때문에 칭의의 능력을 단지 의식들에서만 배제하는 것만큼 모순되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72) 

칼빈은 로마서 주석에서 율법의 행위를 인간의 모든 행위들이라고 이해하는 반면에, 라이트는 율법의 행위를 안식일 준수와 할례와 같은 문화적인 경계표지들을 언급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3. 칼빈의 칭의 

칼빈은 율법의 행위를 인간이 구원받기 위하여 행하는 모든 행위들이라고 정의하고, 이러한 행위들의 구원론적인 가치를 박탈하므로 칭의는 오직 하나님의 의의 전가만을 통해서 가능하게 된다. 그러므로 칼빈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 주석들을 통해서 칭의는 오로지 의의 전가를 통해서만 일어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바울은 “율법 외에” 라는 로마서 3장 21절을 주석하며 이신칭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
바울이 우리가 믿음으로 얻는 의를 하나님의 의라고 부르는 이유가 우리가 그 의로서만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기 때문인지 아니면 주께서 긍휼로서 우리에게 그 의를 주시는 까닭인지 확실하지 않다. 우리는 두 가지 해석 모두 적합하므로 어느 한쪽을 주장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전달하시는 의와 하나님께서 의로 받아서 인정하는 바로 그 의가 율법 외에, 다시 말해 율법의 도움 없이 계시되었다고 바울은 말한다.73) 

칼빈은 율법 외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통한 칭의는 어거스틴이 말하는 중생의 행위로 인한 칭의도 배제한다고 설명한다. 칼빈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하여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것과 사람이 영적 중생으로부터 행위에 의해 의롭다함을 받는 두 명제가 충분히 일치된다”는 것을 인정한다. 칼빈은 “그러나 바울은 인간의 양심이 하나님의 자비에만 의존할 때까지 평화를 누리지 못할 것이라는 완전히 다른 원리를 제시한다”고 설명한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의롭다 칭하기 위하여 그리스도 안에 계셨다고 가르치는 다른 문단에서(고후5:16) 그는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않으시는” 그의 칭의의 방식을 설명한다. 동일한 방식으로 그는 갈라디아서에서 칭의의 효과와 관련하여 율법을 신앙과 대립시켜 놓고 있다. 율법은 명령한 것을 행하는 사람들에게 생명을 약속하고(갈2:16) 외적으로 나타나는 행위의 열매뿐만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사랑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행위의 공로가 믿음에서는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74)(71) 

그러므로 칼빈은 칭의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하여 자신의 의로운 사람으로 받아주시는 것인데, 그 방식은 자신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시키고 우리의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않고 용서해주시는 것이다. 

칼빈은 『기독교강요』에서 동일하게 칭의를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인으로 받아주시며 은혜 베풀어 주시는 것”이라 설명하고 “죄를 용서하는 것과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시키는 것”이라고 정의한다.75) 칼빈은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말이 법정적인 용어로서 행위와 관계없는 죄의 용서라는 것을 분명하게 설명한다. 

만일 하나님께서 무죄방면과 용서로 우리를 의롭다 하지 않으신다면, 바울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라고 말한 것은(고후5:19) 무슨 뜻인가? “하나님께서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21절) 맨 먼저 나는 하나님과 화목된 사람들이 의롭다고 인정된다고 결론을 내린다. 하나님께서 용서하심으로써 의롭게 하신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다른 문단에서 칭의가 고발과 대조되어 있는 것과 같다. 이러한 반제는 이 표현이 법률 용법으로부터 취해졌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히브리어에 어느 정도 익숙한 사람은, 그가 어느 정도 건전한 머리를 가지고 있다면, 이 어구가 이러한 근원에서부터 왔으며 여기서부터 경향과 암시를 끌어낸다는 것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거기서 바울은 행위없는 의가 다윗에 의해 다음과 같은 말들로 묘사된다고 말한다. “허물의 사함을 얻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32:1)76) 

칼빈은 칭의에서 율법의 행위를 통한 죄용서의 가능성이 없으므로, 하나님의 의의 전가와 죄의 용서라는 것을 분명하게 밝힌다. 그러므로 그의 칭의 개념에서는 하나님의 의의 전가와 율법의 행위와 칭의가 인간이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구원론을 중심을 밀접하게 연계되어 전개되고 있다. 

4. 칼빈은 1세기 유대주의 성격에 대해여 어떻게 이해하였는가? 

칼빈은 이러한 이신칭의를 주장할 때에 1세기 유대주의가 은혜의 종교라는 것은 전혀 모르고 오로지 행위로 종교로만 이해하였는가? 칼빈의 여러 가지 언급들을 살펴볼 때, 그는 이미 1세기 유대교 안에 은혜종교로서의 유대교와 행위종교로서의 유대교의 존재를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함께 라이트는 칼빈이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의 논쟁, 그리고 중세 말기의 공적 논쟁에 영향을 받아서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개인의 이신칭의의 구원의 서신으로 이해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 칼빈의 그 이전의 주석전통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었는가? 칼빈 자신이 로마서 주석에서 율법의 행위를 의식법으로 제한하는 사람들로 크리소스돔, 오리겐, 그리고 제롬을 인용하고 있다. 이러한 언급으로 볼 때 칼빈은 이미 어거스틴 이전의 교부들의 저술들을 충분히 숙지하고 있었고, 그들의 주석전통도 분명하게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스타인메츠도 칼빈이 로마서를 주석할 때 당시의 학자들의 주석들뿐만 아니라 초대교회의 주석전통에서도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을 잘 설명하고 있다.77) 

물론 칼빈을 포함한 개혁자들이 새관점의 학자들만큼 1세기 유대교 문헌에 대해 많이 알고 있지 못한 것은 너무나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들이 그러한 흐름을 전혀 몰랐던 것은 아니다. 칼빈은 로마가톨릭이 인정하여 사용하고 있던 외경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고, 외경에 기록된 어떤 행동들에 대해서는 미신적인 행위로 간주한 반면에 어떤 내용들에 대해서는 타당한 것으로 수용하여 받아들이고 있다. 그는 마카비서에 기록된 유다가 죽은 자들을 위해 예물을 드린 행동을 미신적인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유다의 경건은 죽은 자들을 위한 헌물을 예루살렘에 보냈을 때 최후 부활의 굳건한 소망을 가졌던 특성에 대하여 칭찬을 받았다. 그 역사의 기록자는 유다가 행한 것을 구속의 값을 지불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조국과 종교를 위해서 죽었던 다른 성도들과 함께 영생에 참여하도록 한 것으로 간주하였다. 이 행위는 참으로 미신과 오도된 열정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그 당시에 사용되었던 희생물들이 그리스도의 강림으로 중단되었다는 것을 확신하므로 율법의 희생을 우리에게조차 확대하는 것은 완전히 어리석은 것이다.78) 

칼빈은 제2성전 시대 유대교가 최소한 외경을 통해서 오는 한에서 미신적인 요소를 포함했다는 것을 인식했다. 그렇지만 주기도문을 해설하는 가운데 외경인 바룩서의 내용을 참된 것으로 인용하고 있다. 

예언자 바룩의 말이라고 하는 것은 저자가 누구였든지 간에, 그의 말은 참되고 거룩하다. “자기의 악이 큰 것을 슬퍼하여 고독하고 머리를 숙이고 기운이 없는 영혼 --- 굶주린 영혼, 그리고 힘이 없는 눈이 주여 당신에게 영광을 돌리나이다. 오 주 우리 하나님, 주님 앞에 우리 기도를 쏟아놓으며 주님 앞에서 자비를 비는 것은 우리 조상들이나 우리 왕들의 어떤 의로운 행위 때문이 아닙니다.”(바룩2:18-9) 그렇지 않고 당신께서 자비하시므로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우리는 당신 앞에 죄를 지었나이다.”(바룩3:22)79) 

그는 하나님의 자비에 호소하는 바룩서의 기도의 말을 참되다고 하여 인용하고 있다.80) 그러므로 칼빈은 최소한 암시적으로 자신의 의로운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를 의지하는 1세기 유대교에 정통적인 신학의 흐름들이 있었다는 것을 인식하였다. 

반면에 칼빈은 사람들이 펠라기안주의라고 불렀던 그러한 흐름들과 친숙했다. 칼빈은 집회서의 “만약에 당신이 선택한다면, 당신은 명령들을 지킬 수 있고 신실하게 행동하는 것은 당신의 선택의 문제이다. 그는 당신 앞에 불과 물을 놓을 수 있고, 당신이 선택하는 무엇을 향하여 당신을 손을 뻗칠 수 있다. 각자의 사람 앞에 생명과 사망이 있으며, 사람이 어느 것을 선택하든지 간에 제공될 것이다”라는 문단을 인용한 후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람이 창조시에 생명 혹은 사망을 취할 능력을 받았다고 인정하자. 우리가 다른 측면에서 사람이 이러한 능력을 상실했다고 대답한다면 어찌 될 것인가? “하나님께서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은 많은 꾀를 낸 것이라”고 선언하는 솔로몬을 반박하려는 것은 확실하게 나의 의도가 아니다. 그러나 사람이 타락해서 자신과 모든 소유물을 파산시켰기 때문에, 원래의 창조에 무엇을 귀속시킨다하더라도 필연적으로 그의 부패하고 타락한 본성에 직접적으로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나의 반대자들뿐만 아니라 그가 누구였든지간에 집회서 저자에게도 대답하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이 구원을 얻을 능력을 자신 안에서 찾으라고 사람에게 가르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여러분의 권위를 높이 평가해서 조금이라도 하나님의 확실한 말씀에 대항하여 어떤 편견을 일으키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81) 

칼빈은 집회서가 정경의 권위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그 내용이 로마서 3장과 같은 성경의 증언과 모순되기 때문에 외경으로부터의 이러한 문단을 거부한다. 펠라기우스나 에라스무스는 이미 당시 논쟁과정에서 이 문단에 관심을 기울였다. 칼빈 당시에 개혁자들은 로마가톨릭교회의 외경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적어도 16세기 신학토론은 1세기 유대교의 문헌인 외경과는 직접적인 관련을 가지고 있었다. 칼빈은 외경 가운데 행위 구원을 주장하는 문서들의 권위는 부인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인정하는 문서들은 인정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칼빈의 언급에서 드러나는 바와 같이 외경 가운데 인간의 자유의지를 주장하며 행위 구원을 주장하는 글이 이미 알려져 있었다.V. 칼빈과 라이트의 이신칭의 교리에 대한 비교 

1. 1세기 유대교 문헌에 대한 이해 

톰 라이트는 1세기 유대교 문헌들에 근거하여 언약적 율법주의를 만들어 냈던 샌더스의 견해에 동조하여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비롯한 바울 서신의 해석학적인 틀을 구성한다. 그리하여 1세기 유대교를 은혜의 종교라는 언약적 율법주의의 하나의 시각으로 모든 것을 해석한다. 그렇지만 오늘날 샌더스의 1세기 유대교에 대한 연구에 대해 많은 비판들이 제기되고 있다. 적어도 유대교 안에 은혜를 추구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톰 라이트 자신이 인정하는 바와 같이 1세기 유대교는 언약에 들어갈 때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은혜나 언약을 유지하는 데는 행위가 필요하였다. 또한 샌더스 자신도 의의 종교라고 인정한 에스라4서의 견해도 있다.82) 그러므로 1세기 유대교를 은혜의 종교라고만 규정하기에는 많은 무리가 따른다고 보여진다. 

칼빈은 당시 로마가톨릭과의 성경관의 차이로 외경의 내용에 대해 논쟁하면서 적어도 1세기 유대교 문헌 안에 바룩서와 같이 은혜에 의존하는 흐름과 함께 집회서와 같이 행위에 의존하는 흐름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칼빈은 이러한 흐름 가운데 행위에 의존하는 문서들을 거부하고 은혜에 의존하는 문서들은 인정하고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1세기 유대교에 대한 이해의 관점에서 톰 라이트보다는 칼빈의 관점이 그 다양성을 파악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새관점의 가장 중요한 기여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의 맥락으로 율법적 언약주의를 고려해야 한다는 이해의 폭의 확장인 반면에, 그들의 가장 큰 단점으로 지적되는 것은 하나의 관점으로만 모든 것을 다 해석하려 한다는 점이다.83) 새관점이 등장한 이후에 1세기 유대교에 대한 연구에서 밝혀지는 사실들이 1세기 유대주의에 다양한 흐름이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칼빈이 암시적으로나마 유대교의 은혜 중심의 흐름과 행위 중심의 흐름을 파악하면서, 은혜중심의 종교개혁의 이신칭의 교리를 수립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리고 로마가톨릭의 은혜와 함께 행위를 인정하는 교리가 그러한 외경의 흐름들과 관련되어 있다고 보아 외경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칼빈의 외경에 대한 거부의 입장이 행위-의의 내용과 관련되어 있는지의 여부가 좀 더 깊이 연구되어지면 칼빈의 1세기 유대주의의 관점에 대한 이해의 폭도 넓어질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2. 하나님의 의에 대한 이해 

하나님의 의에 대한 이해에서 톰 라이트는 하나님의 의를 하나님의 속성으로 이해하여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성으로 해석한다. 반면에 칼빈은 하나님의 의의 양면성을 함께 파악하고 있다.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 자신이 가지고 계신 속성으로서의 의와 하나님의 의의 전가로서의 은혜의 측면이 있다. 칼빈에게 있어서 속성으로서의 하나님의 의의 측면은 하나님의 전가되는 의가 그 자신의 의의 속성에서 유래한다는 언급에서 확인된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의는 아브라함과 맺었던 언약에 대한 신실성이 할례의 성례로 시행되는 측면을 설명한다. 그렇지만 인간의 모든 행위의 타락성 때문에 행위를 통한 구원의 가능성이 없으므로 하나님의 의의 전가를 통한 구원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칼빈은 하나님의 속성으로의 의와 전가되는 의의 통일성을 인식하고 있고, 오히려 인간의 죄에 대한 해결책은 오히려 의의 전가라고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의 속성인 의로서 언약의 신실성만 강조하는 라이트의 견해는 인간의 죄의 문제에 대한 분명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는 약점을 않고 있다. 라이트는 언약의 공동체성을 강조하면서 개인과 하나님의 의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별로 언급이 없다. 그는 아브라함의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성을 당시 유대 민족의 고통을 추방이란 측면에서 이해하고, 그 언약적 대표자로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설명하고 있다. 그렇지만 칼빈은 하나님의 의의 전가를 통한 인간 죄의 분명한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 바울이 하나님의 아브라함에 대한 언약을 유대교와의 연속성에서 이해하였는지 아니면 오히려 이방인들을 포함한 인류 전체의 구원자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새언약의 성취로서 이해했는지에 대한 관점의 차이가 중요하다고 보여진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을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을 포함하는 아브라함의 언약의 성취라는 구원론에서 언약의 신실성을 이해한다면, 교회론과 사회학적 관점에서 이해하는 라이트의 이해보다는 훨씬 더 타당성이 있다고 판단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의의 양면성을 파악하는 칼빈의 이해가 더 타당한 것을 보인다. 

3. 율법의 행위에 대한 이해 

라이트는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율법이 대부분 일반적인 법이 아니라 토라이며. 이러한 법은 분리될 수 없는 통일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잘 드러내고 있다.84) 그리고 이러한 그의 연구 성과들은 수용될 부분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라이트는 율법의 행위를 할례, 음식법, 그리고 안식일 준수 같은 유대인들의 민족적인 표지로 이해하는 반면에, 칼빈은 율법의 행위를 그러한 의식법에 제한하는 사람들의 견해를 알고 있었으나, 바울의 논의에 문맥에 적합하지 않다고 보아 거부하고 오히려 율법의 모든 행위라고 해석한다. 그러므로 칼빈은 율법의 모든 행위를 통해서는 정죄를 당하므로 행위를 통한 구원의 가능성은 완전히 배제된다고 말한다. 

오늘날의 학자들도 칼빈의 견해에 동조하여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율법의 행위, 특히 로마서 3장과 4장에서의 행위는 선한 행동을 의미하고 결국 바울은 그러한 선한 행위로 구원받을 수 없다는 지적한다고 해석하고 있다.85) 실바도 갈라디아서 3장 6-14절을 분석한 후에 루터의 믿음과 행위의 대조를 지지하는 것 같다고 결론을 내린다.86) 던의 제자인 개더콜(Simon Gathercole)도 로마서 3장 20절의 “율법의 행위”에 대해 라이트를 비롯한 새관점의 학자들이 할례와 음식법같은 민족적 표지로 해석하나 바울은 이 구절에서 토라에 순종하여 그것을 통해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의 무능력(cf. 롬8:3)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주장한다.87) 

4. 이신칭의에 대한 이해 

톰 라이트는 이신칭의에 대해 현재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선언이라고 말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행위에 따른 최종적인 심판에서의 하나님의 변호라는 이중적인 구조를 말한다.88) 톰 라이트의 이신칭의는 죄의 문제에 대한 해결이 없이 누가 교회에 속했느냐는 것을 결정하는 교회론의 차원과 동시에 당시에 유대인과 이방인들을 구별했다는 사회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고, 마지막의 하나님의 변호행위라는 종말론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 톰 라이트는 전통적인 이신칭의의 주장이 초대교회가 아니라 5세기 펠라기우스-어거스틴의 시기에 등장했다고 주장하나, 이미 2세기 속사도 교부들인 로마의 클레멘트와 터툴리안 등도 이미 그러한 견해를 가르쳤다는 주장도 있다.89) 

반면에 칼빈은 이신칭의는 우리가 믿음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받아 현재에 구원의 확신을 가지게 되며, 우리가 하나님의 자비에만 의존하므로 양심의 평안을 누리게 된다고 말한다. 칼빈의 이신칭의는 현재 우리가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받고 죄를 용서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구원론이다. 이렇게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된 사람은 죄를 전가받아 의롭다 칭함을 받으면서 성령의 역사를 통해 동시적으로 거룩하게 살아가는 성화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그러면서 이렇게 구원받은 성도들은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에 따른 구원에 대한 확신과 함께 자신들의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에 따른 상급을 기대하는 종말론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다. 물론 칼빈은 이신칭의에서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와 함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말하고 있는데, 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한 종말론적인 측면을 제시하고 있다.90) 칼빈은 이신칭의를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사람은 동시에 성령의 역사를 통해 그리스도와 함께 신비로운 연합을 이루게 되고, 이러한 신비로운 연합을 통해 성령의 역사와 함께 이신칭의와 함께 동시에 성화를 이루어 가게 된다. 이러한 그리스도와의 연합 속에는 종말론적인 구원의 확신과 상급을 받는 소망의 측면이 포함되어 있다. 

VI. 나가는 말 

톰 라이트는 샌더스 이후의 바울의 새 관점의 언약적 율법주의를 공유하면서 자신의 고유한 연구결과들을 통하여 새로운 이신칭의의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그는 이러한 새로운 이신칭의를 제공하는 배경인 1세기 유대교를 언약적 율법주의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있다. 그는 이러한 언약적 율법주의를 바울서신들, 특히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이해하는 배경으로 삼으면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이러한 언약적 율법주의의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신다는 하나님의 자신의 특성이다. 그리고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말하는 율법의 행위는 아브라함의 언약 안에서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을 분리시키는 민족적 경계표들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율법의 행위들은 안식일 준수, 할례, 음식법준수이다. 톰 라이트는 이러한 율법의 행위들이 구원에 이르게 한다는 유대인들의 민족적 우월감에 대항하여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주님이라는 것을 믿는 복음을 통해 구원받는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이러한 주님을 믿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선언하면서 그의 행위에 대한 종말론적인 변호를 기다리는 것을 칭의의 의미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라이트의 연구는 기여한 측면도 없지 않지만 가장 중요한 문제점은 죄의 심각성에 대한 분명한 언급이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의의 전가를 통해 죄를 용서받아 구원받는다는 이신칭의 구원론이 약화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행위에 기초한 최종적인 심판은 인간이 구원을 확신을 누리지 못하게 만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이신칭의를 통한 구원의 확신과 함께 평화를 누리면서 동시에 성화의 길을 걸어가고, 그러한 가운데서 하나님의 종말론적 구원의 확신을 누리는 건전한 칼빈의 구원론을 더욱 확고하게 정립시켜 나가야 하겠다. 칼빈을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의 관점들 가운데 새로운 연구 성과들을 통하여 새로운 이해가 필요한 부분들을 잘 정립시켜 나가면서 동시에 보존해야할 전통적인 이신칭의의 교리를 확고하게 파수해 나가야할 것이다.

 

출처 http://cafe.daum.net/reformedvill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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