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인물
존 스토트 신학에 대한 문제 제기
존 스토트는 영혼 멸절설을 주장한다.
존 스토트는 종교 다원론을 주장한다.
존 스토트는 윤리신학을 주장한다.
존 스토트는 신 복음주의자이다.
스토드의 주장을 요약하자면, 예수님과 그의 사도들이 사용한 심상(불못과 바깥 어두운 데와 두 번째 죽음)이 문자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경우에는 그것은 문자적으로 해석되는 것이 불가능한데 불과 어둠은 서로 모순되기 때문이다.(132쪽) 회개하지 않는 자의 종말은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의 영원한 고통이라는 견해가 견딜 수 없게 느껴진다.(133쪽) 성경이 가리키는 방향(134쪽)은 회개하지 않는 자의 종말은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의 영원한 고통이 아니라 그들의 존재가 완전히 소멸되는 것이다(자유주의자와의 대화, 황영철, 여수룬)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비 성경적이며 성경에 나오는 지옥의 개념을 거부하기 위한 것으로서 이미 “여호와의 증인”들도 이러한 영원 멸절설을 주장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다.
다음은 한종희 목사님의 “김세윤의 신학”에 나오는 김교수의 신학 비판과 더불어 복음주의의 탈을 쓰고 있는 신복음주의에 대한 비판이다. 여기에는 존 스토트 신부나, 우리가 보수주의 복음주의 거장으로 알고 있는 제임스 패커 등도 전통신학의 용어로 자신들의 신복음 주의 신학을 교묘히 포장하고 윤리신학을 그 속에 깔고 있다는 것이다.
“김(세윤) 교수는, 율법을 하나님의 율법 개념으로 지킬 것이 아니라, 제자의 개념으로 지키자고 하였다. 그러나 율법 개념과, 제자 개념은 그 뜻이 전혀 다르다. 율법 개념은 이 율법이 하나님의 율법임을 말하지만, 제자 개념은 그 교훈이 스승의 교훈임을 말한다. 그러므로 김 교수가 율법을 제자의 개념으로 지키자고 한 것은, 율법을 하나님의 율법으로 지킬 것이 아니라, 스승의 교훈으로 지키자고 한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사랑과 이웃 사랑”도 하나님의 율법으로 지킬 것이 아니라, 제자의 개념 즉 스승의 교훈으로 지키자고 하였으니, 김 교수의 신학에서는 교훈을 주는 자가 하나님이 아니고, 스승이므로, 김 교수의 신학에는 스승만 있고, 하나님이 없다. 그러므로 김 교수는 율법을 스승의 교훈으로 받기 때문에, 하나님의 율법으로는 받아들이지 아니한다. 물론 김 교수가 신학해설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말한 것이 있지만, 은유비유로서 말한 것이다. 은유비유에서 말한 하나님은 허구개념의 하나님이고, 관념의 하나님일 뿐이다.
그러나 보수신학(정통신학)은, 인간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면, 하나님이 복을 주시고, 거역하면 하나님이 형벌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율법을 두려움으로 순종한다. 다시 말해서, 정통신학에서는 하나님 때문에 율법을 지킨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준비한 대속(atonement)과 칭의(justification)로, 값없이 구원받은 자는, 지옥형벌을 벗어난 구원에 감격하여, 자신을 부인하고, 하나님만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되, 순교하면서까지 지키기 때문에(창4:3-8; 계1:9; 6:9,11; 12:17; 14:12), 참 하나님의 사람은 죄를 벗어나며, 성화를 입으며, 이웃을 사랑하여 화목한 삶을 산다. 기독교의 윤리는, 값없이 구원받은 자가 감격하여, 능히 맺히는 열매이다.
그러나 현대신학(진보신학)은 홍해를 가르신 하나님을 불신하고, 그리스도도 보통 인간으로 보기 때문에, 율법도 스승이 제자에게 주는 교훈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도 스승이 주는 교훈으로 받기 때문에, 김 교수가 하나님의 율법으로 지키는 것을 꾸짖었고, 제자의 개념으로 지키자고 주장하였다. 현대신학은 지옥과 천국을 불신하고, 대속과 칭의를 불신하기 때문에, 구원의 감격이 없으므로, 율법도 제자의 개념으로 지키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다. 바로 이것이 현대신학이자, 신복음주의 신학이다.
김 교수는 현대신학을 따르기 때문에, 성서의 교훈을 하나님의 율법과 계명으로 지키는 것은 잘못이라고 꾸짖었다. 반대로 성서의 교훈을 제자도의 개념으로 지키자고 주장하였다. 김 교수는 예수의 신인양성(神人兩性)을 믿지 않고,9 예수를 보통 인간으로 보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스승의 행적과 됨됨이에 동참하여 예수님의 형상을 되찾는 것을 구원으로 보았으니, 이것은 자유주의 신학자 Albrecht Ritschle이 부르짖은 윤리신학이고, Kierkegaard를 따라 인간의 윤리회복(실존회복)을 부르짖은 Barth의 윤리신학이고, Bultmann, Brunner, Tillich, Niebuhr 형제 등이 외친 윤리신학이고, 미국의 Harold J Ockenga, Edward J. Carnell, Carl F H Henry 등이 외친 윤리신학이고, 영국의 John R. W. Stott와 James I. Packer가 외친 윤리신학이다. 필자가 신복음주의 신학의 정체를 밝히는 이 책을 저술한 목적이 이러한 내막을 밝히는데 있었다.
그러므로 보통 인간 예수로 구성되는 복음과 구원과 신학을 다음과 같이 풀어낼 수박에 없다. 즉 보통 인간 예수가, 가진 박해에도 불구하고, 정의와 공의를 부르짖고, 끝내는 십자가에 못 박히기까지 하여, 정의와 공의를 세우고, 인권을 신장하였으니, 사람들이 이러한 예수를 스승으로 영접하고, 제자가 되어져, 예수님의 행적과 됨됨(품성)이에 동참하고, 예수님의 형상을 되찾으면, 인류사회는 지상천국을 이룰 것이라는 것이, 김 교수와 신복음주의 신학자들(B. Graham, Ockenga, Henry, Carnell, Stott, Packer)이 주장하는 제자도의 윤리복음과 윤리구원과, 윤리신학이다. 이 제자도의 신학은 모든 20세기 현대신학이 주장해왔고, WCC와 NCC와 NAE가 지지해왔다.
20세기의 윤리신학의 대 전제가 그리스도 예수를 보통 인간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1950년대의 예수를 보통 인간으로 보는 WCC, NCC, NAE가 대화 프로그램을 통하여, 종교통합을 시도해보았으나, 종교통합은 고사하고, 도리어 논쟁과 분쟁만을 조장함으로, 1990년대부터는 종교 다원주의를 지향하고 있다. 종교 다원주의는 “모든 종교가 동등하고, 그 구원이 동등하다”는 것이다. 로마 법황이 제2 바티칸 공의회를 마치면서 1965년에 종교 다원주의를 주장하였고, John Stott 목사가 1992년에 책 “The Contemporary Christian”에서 종교 다원주의를 주장하였고, Billy Graham 목사가 1997년에 종교 다원주의를 주장하였다.(신정통주의 신학의 정체, 한종희)
신정통주의 신학(1920-1950)은 상당히 알려져 있지만, 신복음주의 신학(1950-2000)의 정체(正體)는 거의 100% 은폐되어 있어, 제대로 알아보는 사람이 거의 없다. 신복음주의 신학의 正體가 왜 가려지고 은폐되어져 왔는가? 여기에는 상당한 이유가 있다. 독자들이 그 이유를 알아야, 비로소 신복음주의 신학의 정체(正體)를 조금씩이나마 감지할 수가 있다. 다음은 그 이유들이다.
ⓐ 신복음주의 신학을 자타가 복음주의 신학, 개혁주의 신학, 보수주의 신학으로 호칭해왔다.
ⓑ 신복음주의 신학이, 신학해설의 기법이나, 문장의 형식이 완전히 정통신학을 따랐다.
ⓒ 신복음주의 신학이, 신학해설에서 용어들을 100%, 정통신학의 용어들만을 사용하였다.
ⓓ 신복음주의 신학이, 정통신학을 절대로 정면에서 부정하거나 공격하지 않는다.
ⓔ 신복음주의 신학이, 자신의 신학적인 정체를 절대로 노골적으로 들어 내지 않는다.
이러한 이유로, 신복음주의 신학이 완벽하게 가려지고 은폐되어져, 그 신학의 정체성이 보이지 아니하였으며, 다음과 같은 신학자들은, 그들의 기적불신이 의심받지 않았다. Billy Graham, John R. W. Stott, J. I. Packer, E. Carnell, Carl F. H. Henry, H. J. Ockenga, 김세윤 등. “
출처 : http://blog.daum.net/trance/12928285
->근거 자료 :
1) 영혼멸절설->
자유주의자와의 대화/황영철 역, 여수룬 간/ 제 3권 132-141쪽/(1) '지옥이란 무엇인가?
2) 종교다원주의자 -> The Contemporary Christian/John Stott /1992,
3) 신복음주의자 ->
김세윤의 신학 <그리스도가 없는 신성과 내세가 없는 기독교> /한종희 목사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enercon2&logNo=120167384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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