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에피쿠로스 학파와 스토아 학파

작성자
쥬니어칼빈
작성일
2013-02-11 22:08
조회
9620

"바울이 아덴에서 그들을 기다리다가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여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장터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 어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냐 하고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부활을 전하기 때문이러라"(행 17:16-18)


 


1. 에피쿠로스 학파
사모스의 에피쿠로스(BC 341-270)는 철저히 영혼의 평온함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헬레니즘 철학자였다. 그는 알렉산드로스가 죽은 BC 323년에 아테네로 왔으며,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랬듯이) 그 후 아테네를 떠나 여러 곳에서 활동하다가 34세 때인 BC 306년에 돌아왔다. 이때 그의 유명한 '케포스'(정원)을 세워 뤼케이온, 아카데메이아, 스토아와 더불어 '아테네의 네 학당'을 이루었다. 그의 철학은 기본적으로 은둔과 도피의 사상이었지만, 그는 자신의 정원에 여성과 노예 나아가 창녀까지 받아들였고 이는 또 다른 의미에서의 윤리적 실천을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에피쿠로스는 데모크리토스를 따라 인식의 규준을 감각에 두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규준이 지각의 결과들, 나아가 판단의 결과들에 대한 정교한 논리학적 분석이었던 데 반해, 에피쿠로스는 그런 논리학을 거부하고 지각 자체만을 인식의 규준으로 삼았다. "당신이 모든 감각에 대항해서 싸운다면, 당신은 감각이 틀렸다고 말할 기준도 가지지 못할 것이다" 예컨대 멀리에서 둥근 탑으로 보였던 것이 가까이 가서 보니 네모난 탑임이 밝혀졌을 때, 감각을 교정해준 것은 바로 감각이다. 진리를 찾기 위해서 감각 바깥으로 나갈 필요는 없으며, 감각들의 차원 자체 내에서 진과 위가 밝혀질 수 있는 것이다.(에피쿠로스는 감각적인 것과 이성적인 것을 구분하지 않았다.)


 


  에피쿠로스는 어떤 것도 무로부터 나오지 않으며 또 무로 돌아가지 않는다고 보았다. 모든 것은 원자들로부터 나오며 또 원자들로 돌아갈 뿐이다.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부터는 어떤 것도 만들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만약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부터 어떤 것이 생겨난다면, 모든 것이 씨앗도 없이 모든 것으로부터 생겼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만약 없어지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소멸한다면, 구성 요소마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분해되어 모든 것이 사라지게 될 것이다. 한편 우주는 항상 현재의 모습과 같으며 앞으로도 같을 것이다."([헤로도토스에게의 서한]).


 


  에피쿠로스는 데모트리토스의 사유에 따라 '일자'를 원자들과 허공들로 분할하고 또 원자들의 운동을 사유코자 함으로써, 비존재/무(원자들이 '존재'라면 허공은 '무'이다)를 긍정하고, 또 운동을 긍정하는 후기 자연철학의 구도를 이어받고 있다. 에피쿠로스에게 우주는 원자들의 수에 있어서나 허공의 크기에 있어서나 무한정하다. 원자들은 영원히 운동한다. 그래서 다른 원자들과 항시 충돌한다. 그 결과 원자들은 물체들을 형성하게 된다. 그러나 물체들 속에는 여전히 허공이 존재하며, 때문에 그 안에서도 원자들은 진동한다. "원자들은 무게, 크기, 형태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속성들을 제외한다면, 감각 대상에 속하는 어떤 속성도 가지지 않는다고 생각해야 한다."([헤로도토스에게의 서한]). 우리의 감각과 상관적으로만 존재하는 것들은 원자들이 갖는 성질들이 상호 작용해 만들어내는 '효과들'이며 가현적 존재다.


 


  에피쿠로스에게는 영혼도 원자들일 뿐 다른 어떤 것이 아니다. 영혼이란 원자들 중 특히 '영묘한' 원자들로 되어 있다. 영혼이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서처럼, 비물질적인 것이 아니다. 영혼-원자들은 신체-원자들/복합체 전체에 골고루 퍼져 있으며, 때문에 신체를 떠나서는 영혼의 활동이 성립할 수 없다. 신체는 감각에 있어 부(副)의 역할을 하며 그로써 'symtoma'(신체로 느끼는 감각-현상들)을 얻는다. 에피쿠로스에게는 신들조차도 원자들의 일종이다. 에피쿠로스는 신들의 존재 자체는 부정하지 않았다. 신들은 가장 영묘한 원자들이다. 신들인 원자들은 우리의 감각기관들로 들어오지 않고 우리의 영혼으로 곧장 들어온다. 그가 비판하고자 한 것은 신들이 인간들의 삶에 일일이 간섭한다는 대중의 믿음이었다."축복받았으며 불멸하는 본성(신의 본성)은 그 스스로 어떤 고통도 모르며, 다른 것들에 고통을 주지도 않는다. 그래서 그런 본성은 분노나 호의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왜냐하면 분노나 호의는 단지 약한 것들에게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에피쿠로스는 "우선 우리는 천체현상에 대한 앎의 목적이 마음의 평온함('아타락시아')과 확고한 믿음 이외에 다른 어떤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퓌토클레스에게의 서한]). 에피쿠로스는 '현자'는 "삶에서 도피하려고 하지도 않으며 단지 가장 즐거운 삶을 원할 뿐이기 때문이다. 현자에게 중요한 것은 죽음에의 두려움이 아니라 기쁜 삶에의 향유일 뿐이다. 스피노자가 말했듯이 자유인은 죽음이 아니라 오로지 삶만을 사유한다. 에피쿠로스학파에게는 스토아학파에서 그리고 특히 기독교에서 발견되는 어떤 강박증 같은 것이 없었다. 그들은 우정, 즐거움/기쁨, 강요-없음, 개인에서 개인으로의 전달, 잔잔한 평온함의 철학을 지향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사상은 시대와 정면으로 대결하는 적극성은 띠지 못했다. 이들에게는 단지 "우리"와 "그들"이 있을 뿐이었다. 이들은 '자족성'과 '현자'의 이상을 추구했지만, 이 이상은 결국 개인 또는 소집단 차원에 머무는 것이었다.(이정우. [세계철학사1]. 도서출판 길. 2011.,pp.490-508 참고)


 


2. 스토아 학파
스토아 학파를 세운 제논(BC 333-262년)은 알렉산드로스, 아리스토텔레스, 시노페의 디오게네스가 이미 세상을 떠난 후에 아테네에서 활동했으며, 에피쿠로스와 동시대를 호흡했다. 에피쿠로스가 자신의 '정원' 안에서 친구들과 철학했다면, 제논은 길게 늘어선 '주랑(stoa)'을 거닐면서 아테네 시민들과 철학했다. 제논은 철학을 '논리학'(logica), '자연철학'(physica), '윤리학'(ethica)로 삼분했으며, 논리학을 달걀 껍질로, 윤리학을 흰자위로, 자연철학을 노른자위로 비유했다고 한다. 또, 논리학을 울타리로, 윤리학을 과일로, 자연철학을 흙과 나무로 비유하기도 했다.


 


  스토아 학파를 두드러지게 만드는 한 요인은 논리학(인식론, 언어철학 등을 포함)의 존재이다. '윤리'의 문제에만 천착했던 당대의 다른 학파들과 달리 스토아 학파는 정교한 논리학을 발전시킴으로써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버금가는 수준의 사유에 도달할 수 있었다. 아울러 "자연에 따라 살라"는 것을 지상 명제로 삼음으로써, 당대 철학 학파들이 지향한 '개인적 자족성'과는 방향을 달리하는 사유를 펼쳤다. 마지막으로 스토아 학파는 정치적이고 현실 참여적이었다. 스토아 윤리학은 '의무'의 윤리학이었으며, 이 의무에는 의당 현실 참여가 포함되었다.


 


  스토아 존재론에서 가장 흥미로운 점은 이들이 '존재'보다도 더 상위의 범주를 상정한 점이다. 이들은 '존재'를 'existence'로 보았으며, 이 실존 외에도 'subsistence'라는 것을 설정했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세계글 이해하기 위해 '실존'만이 아니라 '존속'도 고려돼야 한다. 이들은 이 둘을 포괄하는 말로서 '무엇(ti)'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스토아 철학에서는 성질들 역시 일종의 물체들이고(영혼의 속성들 역시 물체들이다), 그래서 실체가 성질을 '띠고 있다'는 것은 한 물체와 다른 물체들이 '결합해 있다'는 뉘앙스를 가진다. (에피쿠로스학파처럼) 우발성이 지배하는 원자론적 세계와는 달리 스토아적 세계는 모든 것이 일정한 근거를 가지고서 의미심장하게 관련 맺는 세계이다.


 


  스토아 논리학은 오늘날로 말하면 논리학, 인식론, 언어철학, 기호학/기호론, 수사학 등등 매우 많은 분야들을 포괄하는 분야이다. 인식의 근거로 감각-인상을 들었고 이 감각-인상의 반복, 승인/동의, 언표화, 추론 등에 의해 지식이 성립한다고 보았다. 합리적 인상은 'lekton'으로 화할 수 있는 인상 즉 지식의 근거가 될 수 있는 인상을 뜻한다. 스토아 학파는 학문적 인식('에피스테메')과 억견('독사')과 파악('카탈렙시스')을 구분했다. 파악은 정상적 상황에서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지각이며, 학문적 인식은 지각이 과학의 수준으로 상승되었을 때 성립하며, 억견은 지각이 불확실해서 쉽게 동의를 얻지 못할 때 성립한다.


 


  감각-인상이 지식으로 화하기 위해 꼭 거쳐야 할 것은 'lekton'이다. 'lekton'의 개념은 스토아 언어철학의 핵심이다. "소리(phone)와 말(lexis)은 다르다. 단순한 물리적인 소리도 소리라 할 수 있지만, 오로지 분절된 소리만이 말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말과 언어(logos)는 다르다. 말은 의미를 결할 수도 있지만('blituri'같은 말에서처럼), 언어는 반드시 무언가 의미하기(semantikos) 때문이다. 나아가 그냥 소리를 내는 것과 말하는 것은 다르다. 소리를 내는 것은 단순한 물리적 과정이지만, 말하는 것은 무언가를/에 대해(pragmata)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말로 표현되는 것들(lekta)'이 지시하는 것이 바로 이 무엇이다." (스토아 학파의 논리학에는 개념론, 명제논리학, 양상논리학의 시초가 들어있다.)


 


  자연철학은 스토아주의의 핵심을 차지한다. 스토아 철학자들에게는 논리학과 자연철학이 별개의 것이 아니었다. 이들에게 자연이란 엄밀한 섭리에 의해 지배되는 것이었고, 논리나 언어란 결국 이 섭리가 인간존재의 생각과 말을 통해서 표현되는 것에 다름 아니었기 때문이다. 에피쿠로스 학파의 우주가 우발성에 의해 지배되는 완벽하게 탈신화화된 우주라면, 스토아학파의 우주는 로고스/이법에 의해 지배되는, 신성이 깃든 곳이라는 점이다. 세계는 'logoi spermatikoi' 즉 종자-로고스들에서 탄생했다. 세계는 물질에 신성이 깃듦으로써 성립한 것이다.(이른바 범신론). 따라서 생명, 정신, 문화 등의 차원은 물질적 운동의 가상적 효과들이 아니라 물체 자체에 처음부터 깃들어 있는 것들이다. 흔히 운명이라고 번역되는 'fatum'은 그러나 문학적인 뉘앙스에서의 '운명'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우주의 냉정하고 객관적인 합법칙성일 뿐이다. 그것은 "원인들의 질서와 계열", 원인들의 연쇄 이외의 것이 아니다.


 


  세계의 궁극 원리는 이렇게 물질과 그 안에 스며들어 있는 신성, 타올랐다가 잦아들면서 만물을 낳는 '조형하는 불'이지만, 스토아 자연철학의 실제 주인공은 (이 원리들로부터 생성된 결과인) 물체들 그리고 특별한 범주들인 '비물체적인 것들'이다. 스토아 학파에게는 '비물체적인 것들'을 제외한 모든 것들이 물체들이다. 신조차도 그것이 물질에 작용하는 이상 어떤 형태로든 물체적인 존재이다. 스토아 학파는 물체론에 있어서 특히 혼합(물)의 개념에 많은 관심을 경주했다. 혼합은 플라톤 철학에서 관여('메텍시스'), 임재('파루시아'), 결합('코이노니아')이 행하는 역할을 수행했다고 할 수 있다.


 


  스토아 철학에서 인간과 자연의 관계는 오늘날의 관계와는 달리 타자들 사이의 관계가 아니다. 그것은 전체와 부분의 관계이다. 스토아 철학자들에게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이 관계들-'외재적 배치'을 잘 가져가는 것이다. 그런데 우주의 모든 것들은 필연적인 연쇄 고리로 묶여 있다. 이렇게 우주가 '파툼'에 의해 지배된다면, 이 '파툼'은 가치론적으로 어떤 의미를 담지하고 있는가, 그 안에서 인간은 어떤 존재이고, 어떤 자유/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며, 어떻게 행위해야 하는가? 이것이 스토아 윤리학의 출발점이다. 스토아 철학자들의 범신론적, 낙천주의적 사상은 이들로 하여금 윤리를 직접 자연에 연결시키도록 만들었다. "자연에 따라 살아라". 그렇다면 이들에게 인간의 자유는 어떤 것일까? 이들에게 자유는 결정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내 삶이 혼미한 것은 내가 결정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나 자신이 어떻게 결정되어 있는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훗날 스피노자가 정식화했듯이 "자유는 필연의 인식이다." 인간은 이성을 통해서 그 필연성을 터득해나가고 그 깨달음을 통해 초연하게 살아갈 수 있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이런 경지에 도달한 인물을 '현자'라고 불렀고, '스토아적 현자(stoic sage)'라는 이 개념은 서구 문명에 오래도록 영향을 끼치게 된다.


 


  스토아 윤리학의 토대는 자연을 파악하는 것이었고, 특히 인간의 자연=본성을 파악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런 작업은 동물계 전체에 대한 이해와 그 안에서 인간이 차지하는 특별한 위상에 대한 이해를 핵심으로 했다. 자연적 성향이란 자연이 각 동물들에게 준 것으로서, 스토아 철학자들이 즐겨 사용하는 비유로 말해 우주라는 연극 무대에서 각 존재들이 부여받은 '역할'이라고 할 수 있다. 스토아 철학자들에게 핵심적인 것은 바로 이 세계에서 인간의 역할이 무엇인지, 또 인간 각각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것이다. 이성적 능력을 최대한 발휘해서 우주에서의 자신의 역할을 다하는 것, 여기에 '스토아적인 것'이 있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덕의 교육 가능성과 통일성을 강조한 면에서 소크라테스를 잇고 있다. 이들은 덕이 교육가능하다고 보았다. 이들에게 덕과 악덕 사이에는 정도가 허락되지 않는다. 여기에 스토아적인 엄격함이 있는데, "fiat justitia, ruat coelum"(하늘이 무너지더라도 정의는 행해져야 한다)고 하곤 했다.


 


  로마 공화정 시대에 키케로(BC 106-43년)가 활동하였다. 그는 [법률론]에서 "법률이란 인간의 재능으로 생각해 낸 것이 아니며 시민의 어떤 의결도 아니다. 명하고 금하는 예지를 갖고 전 세계를 통치하는 영원한 무엇이다." "법학은 그 바탕이 되는 철학에서 이끌어내야 한다.""나는 법의 원천을 자연본성에서부터 모색해 나갈 작정이며, 우리는 자연본성을 길잡이로 해서 모든 논의를 설파해나가야 마땅하리라 본다."라고 말함으로써 '자연과 일치하며 모든 인간에 적용되고 불변적이고 영원한 법'과 같은 신념을 보인다. 이 외에도 인간 이성의 강조, 만인의 평등, 성선설, 법의 근원으로서의 정의 등이 자연법론의 근간을 형성하고 있다. 키케로 자신의 생각과 태도가 훨씬 명료하게 나타나는 저작은 [의무론]이다. "생활의 어떤 부분도 의무에서 벗어날 수가 없으니, 생에 있어서 도덕적으로 옳고 선하고 명예로운 모든 것('호네스툼')은 의무를 이행하는 데 달려 있고, 도덕적으로 옳지 않고 나쁘며 불명예스러우며 추한 것('turpitudo')은 의무를 이행치 않는 데 있기 때문"임을 설파했다.


 


  제정 로마 초기에 세네카(BC 4-AD 65년)가 활동하였다. 시대적으로 황제이든 구세주이든 사유가 아니라 믿음을 원했고, 철학이 아니라 종교를 원했다. 폭력과 광기의 시대를 살았던 세네카는 인간의 사악함을 누구보다도 가까이에서 경험했던 사람이었고, 고통, 고독, 죽음과 항상 투쟁하면서 구원을 갈구했던 사람이었기에 위로의 철학을 탄생시켰다. 이제 스토아철학은 이론적 치열함과 체계성, 견고한 초연함과 극도의 엄격함을 일정 정도 포기하는 대신, 인간적 따사로움과 자애, 타인에 대한 극히 세심한 배려와 연민, 속삭이듯이 오가는 대화, 상냥함과 온후, 삶에 대한 비애와 관용, 체념이 가미된 새로운 뉘앙스의 철학으로 화한다. 키케로적인 '의무'가 세네카적인 '명상'(meditatio)으로 바뀐 것이다.(이정우. [세계철학사 1], 도서출판 길. 2011. pp.509-574 참조)


 


출처: http://cafe.daum.net/reformedvillage?t__nil_cafemy=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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