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제 22장) "성령의 법과 은혜의 왕노릇" / 로이드존스

작성자
쥬니어칼빈
작성일
2013-02-02 01:54
조회
4789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2).


 


사도 바울은 1절에서 8장 전체의 주제, 특히 처음 네 구절의 주제에 해당하는 진술을 전제하여 놓았습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1절의 말씀을 숙고하여 보았으나 이제 바울이 그 기본적인 주제를 어떻게 설명해 나가고 있는가를 숙고하게 되었습니다.


 


 주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이 어떤 국면에서든지 구원을 확실하게 받으며, 궁극적인 영화와 철저한 구원이 최종적으로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바울은 2, 3, 4절에서 그 주제를 강해해 나가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이 부분이 8장의 제일 항목으로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정죄함이 없다고 말하는데 대한 특별한 이유를 2, 3, 4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2절의 첫번째 말은 그 점을 명백히 합니다. 그 말은 '이는' (왜냐하면)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왜냐하면' (거듭 말하지만 우리 한글 개역에서는 '왜냐하면'이라고 번역하기보다 '이는' 이라고 번역하든지 아니면 아예 문맥의 흐름에 맡겨버림으로 그 이후 접속사를 생략해버린 경우가 많다-역자주)이라는 말에서 시선을 떼지 않는 것은 8장에서 특별히 중요합니다.


 


8장을 잘못되게 해석하는 거의 모든 해석들은 '왜냐하면'이라는 말을 모르는데서 기인합니다. 그들은 진술 자체에만 관심을 모으고 '왜냐하면' 이라는 말에는 전혀 주목을 하지 않습니다. 만일 그들이 그 진술이 '왜냐하면' 이라는 말로 도입이 된다는 사실을 주목하기만 했다면 우리가 시험해 보려고 하는 거짓된 해석을 내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울은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왜냐하면..." 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그 이유를 말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2절은 우리로 하여금 1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한 것입니다. 2절을 어떻게 말하든지 간에 2절 말씀은 1절의 강해와 설명의 차원에서 언제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라는 말은 우리로 하여금 1절이 외골로 떨어진 독단적인 진술이 아니라는 것을 깨우쳐 줍니다. 방금 말한 것에 대한 이유가 있고 설명도 있습니다.


 


 이 2절 말씀은 성화 문제에 관한 한 가장 중요한 구절입니다. 성화에 대한 논란에 있어서 이 로마서 8:2 보다 더 중요한 구절은 없습니다. 우리가 앞으로 살펴볼 것인데, 지금까지 널리 통용되어 온 성화에 관한 확실히 잘못된 가르침은 바로 이 구절의 문맥(context)과 배경을 통해 해석하는 것에 소홀히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우리가 첫 번째로 주목해야 하는 것은 바로 시제입니다. 흠정역의 '현재...되었다' (hath made-현재완료시제라는 표현은 불충분한 번역이다)는 번역은 좋지 않습니다. 바울이 기록한대로 하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나를 해방하였다"(made me free 또는 made free me-과거시제)입니다.


 


바울은 자주 그러듯이 다시 한 번 '단번에' 일어나 버리고 끝나버린 것을 의미하는 부정과거 시제를 사용합니다. 6장을 강해할 때 이 점은 끊임없이 강조해야만 했습니다. 예를 들어 6:2 을 흠정역은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we that are dead to sin)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죄에 대하여(영원히) 죽은 우리"(we that died to sin)로 해야 한다는 것을 밝히 보여 주는 데 많은 수고를 하였습니다. 부정과거 시제가 여기서도 사용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해방하였음이라" (made me free). 'hath made'가 아니고 단순히 'made' 입니다. 그것은 이미 일어나 영원히 끝난 것입니다. 그것은 성취되었고 또한 과거에 속합니다.


 


그러나 번역상에 또 다른 문제점이 있습니다. 흠정역은 "나를 해방하였다" 이지만 일반적으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has made me free) 라고 번역해야 한다는 데 의견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사용한 말은 '나를' 이 아니라 '당신을' (thee)이나 '너를' (you) 이라고 번역되어야 합니다. 그는 주로 그리스도인에 대해서 쓰고 있지, 자기 자신에 대하여 쓰고 있지 않습니다. 할데인(Haldane)은 로마서 주석에서 왜 바울이 '나를' 이란 말을 되불렀는지에 대해서 아주 강하게 역설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나를' 이라고 쓰지 않고 '당신을' 혹은 '너를'-그리스도인은 누구든지-라고 썼습니다.


 


우리는 이제 두번째 중요한 구절에 대해서 숙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즉 ''죄와 사망의 법' 이라는 말로 출발되는 구절입니다. 무엇인가가 그리스도인, 즉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죄와 사망의 법에서 자유케 하였습니다.' 성화의 문제가 그릇되게 야기되는 것은 바로 여기에서입니다. ''죄와 사망의 법' 이라는 구절이 7:23 에서 사용된 표현과 같은 의미를 전달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7:23 에서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주장하기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해방하였다' 라는 것에 관해서 말할 때 그는 자기 본성 속에 있는 이 악한 악의 원리를 거론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나면서부터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그러한 악의 원리, 즉 우리로 하여금 우리를 사로잡아서 끝내 죽음에 이르게 하는 그 원리를 언급하고 있다는 것이죠. 그 구절을 그렇게 해석하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 이라는 구절은 신자 속에 있는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를 의미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더 나아가서 우리 안에서 성령의 역사는 '우리 지체 속에 역사하고 있는' '죄와 사망의 법' 에서 우리를 구원한다고 역설합니다. 그래서 로마서 7장의 곤고한 사람은 로마서 8장의 단계로 나아간다는 것이죠. 성령이 이제 임하였고 그래서 그 사람은 '두번째 또는 제2의 축복', 즉 제 2의 체험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제 그는 전에 자기를 몹시 괴롭게 짓이김으로써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라고 울부짓게 했던 것으로부터 온전히 해방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런 식으로 이 구절이 성화만을 가르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 로마서 8:2 이야말로 성화에 관련된 문제에 있어서 하나의 열쇠와 같은 구절이라고 주장합니다. 물론 '죄와 사망의 법' 의 의미를 그런 식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면 그들이 그렇게 말하는 것은 아주 논리적입니다.


 


그처럼 일반화되고 대중적인 해석을 받아드리는 사람은 서슴치 않고, 「스코필드 성경」(Scofield Bible) 난외주가 말하듯이, 바울이 여기서 성령을 첫번째로 소개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로마서 7장에 있는 사람은 성령 밖에 있는 사람이었으나 이제 성령이 그 사람 안에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전에 그는 '칭의'를 받은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거룩하게 됨' (성화)을 체험한다는 것입니다. 즉 두번째 체험을 하게 된다는 것이죠. 그는 "자기 지체 속에 있어 자기 마음의 법과 싸워 그로 하여금 자기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사로잡아 가는" 이 법으로부터 구원받는다고 하는 식의 주장인 것입니다.


 


저는 힘을 다해서 그러한 해석이 완전히 잘못되었음을 밝혀내려 합니다. 저는 단순히 그런 목적을 위해서 진술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저는 그것을 논리적으로 파헤쳐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구절들을 하나하나 시험해 나가야 됩니다. 이런 해석을 고집하는 학파를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완전 성화'를 가르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그들의 위대한 증거로서 이 구절을 제시합니다. 또 한 부류는 '완전 성화'는 가르치지 않지만 '두번째 체험'이 자기 속에 있는 죄의 요소에 대하여 '대응의 원리'를 도입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겐 가능하다고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이 새로운 원리는 자기 안에 내재하면서 그로 하여금 죄에 대하여 승리할 수 있게 하시는 성령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한' 성령께서는 그에게 매 순간마다 승리를 줄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구절은 성화에 관한 그러한 두 종류의 가르침에 대하여 매우 중대한 구절입니다.


 


그럼 이제 이러한 가르침들을 시험해 봅시다. 제가 말씀해 드릴 첫번째 논평은 만일 그런 해석이 진실하다면 로마서 8:2 은 다음과 같은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줄 것입니다. 즉 우리가 "해방되는 것은 우리가 성화된 결과이며 사실상 정죄받지 않는 것은 우리의 거룩하게 됨에 달려 있다는 의미일 것" 입니다. 진술간에 접속사를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우리 안에 성령께서 역사하는 것이 우리로부터 우리 지체 속에서 우리를 꼼짝 못하게 하고 실패의 상태를 유지하지 못하게 하려고 '죄와 사망의 법' 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였기 때문에 우리에게 정죄함이 없다는 식의 논리가 됩니다. 다른 말로 해서 우리는 더 이상 정죄 상태에 있지 않는데, 그것은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분명히 그것 자체만으로도 그러한 해석의 거짓됨을 보여주는 데 아주 충분합니다.


 


우리는 로마서 초두에서부터 보아왔고 끊임없이 강조하였듯이 그리스도인이 정죄로부터 구원받은 것은 '거룩하게 됨'의 결과라고 말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정죄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언제나 그가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결과에 기인하는 것입니다. 정죄에 대한 반대는 결코 성화가 아닙니다. 오직 칭의일 따름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저는 다시 두 중요한 구절을 언급하려 합니다. 곧 6:16 과 18절의 말씀입니다. 정죄의 반대가 성화라고 가르치는 성경은 단 한 곳도 없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죄와 사망의 법'을 그런 식으로 해석한다면 여러분은 사실상 이렇게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 정죄함이 없는 것은 그들이 거룩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 해석을 받아들이지 않는 첫번째 이유는 바울이 여전히 여기서 '칭의'를 다루고 있으며 칭의가 수반하여 함축하는 모든 것을 다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두번째로 바울은 여기서 그리스도인에게 일어날 수도 있고 일어날지도 모르는 어떤 것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제2의 축복을 추구하며 받는 그리스도인에게만 일어날 수 있는 것을 묘사하고 있는 것은 더욱더 아닙니다. 그가 이것이 이미 여러분에게 일어났다고 말하는 것은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믿는다. 여러분은 의롭다함을 받았으며 용서함을 받았다. 그러나 여러분에게 가능한 또 다른 축복이 있다. 여러분은 투쟁을 하고 있으며 날마다 좌절당하고 실패하고 있다. 그러나 들어 보라.. 여러분을 도와 패배를 승리로 바꿀 더 큰 체험이 여러분에게 열려져 있다" 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제가 설명했던 바와 같이 여기에는 새로운 것이 없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말을 되풀이하고 있으며 이미 말한 것을 요약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다른 방식으로 놓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미 과거에 일어난 어떤 일이라고 말합니다. 다른 말로 해서 만일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 전적으로 있다면 또한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라면 이것은 여러분에게 일어난 일입니다. 여러분은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부과적인 체험으로 제공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그 일이 더 나은 축복을 가진 몇몇 그리스도인들에게만 해당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바울의 전체의 논리는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에게 해당되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세번째로 여기서 처음으로 성령이 소개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5:5 에서 성령이 소개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거기서 바울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받는 구원이 확실하다는 이 위대한 주제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그뿐이 아닙니다. 그는 7:6 에서 성령의 사역을 언급하였습니다. 또한 문맥과 진술이 매우 유사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찌니라." 우리가 로마서 7:6 을 연구할 때 저는 바울이 거기에서 8장 후반부에서 거론하며 서술하여 나갈 바를 미리 예고하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여기에서 처음으로 소개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올바르지 못합니다. 바울은 7장의 처음 6절과 6장 전체에서 그리스도인과 그의 지위를 묘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7:14~25 의 대목에서 그 문제로 돌아가고 있지 않습니다. 그 대목은 그 앞에서 묘사된 그리스도인에 관한 묘사와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네번째로 이 구절을 그릇되게 해석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우리로 하여금 '완전 성화' 의 교리를 믿게끔 합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죄와 사망의 법'이 그리스도인에게 남아 있는 죄나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가는 내 지체 속에 있는 그러한 법을 가르킨다면, 바울의 말은 내가 더 이상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사로잡히지 않는다는 의미가 될 것입니다. 내가 내 지체 속에 있는 법으로부터 완전히 구원받았다는 말이 된 것입니다.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났으며 그것은 점진적으로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미 끝나버린 사실입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바울은 여기서 부정과거 시제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일이 내게 이미 끝나버린 사실이라면, 죄가 나로부터 완전히 떨어져 나갔다면 나는 완전히 거룩함을 얻은 것입니다. 그런 해석은 우리로 하여금 필연적으로 이러한 결론에 다다르게 만듭니다. 그리스도인이 완전히 성화되는 것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미 완전히 성화되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부정과거 시제가 사용되고 있으며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된다는 사실은 그러한 해석을 불가피하게 만듭니다.


 


나는 나를 넘어뜨리는 모든 것, 내 지체 속에 있는 죄, 나를 사로잡는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나는 완전히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해석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바울은 8:12~13 에서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라고 말해 나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만일 완전 성화가 이미 이루어진 것이라면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바울은 결국 자기 모순을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해서 그런 해석은 궁극적으로 그 자체의 논리에 많은 모순을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나가지 않으면 이상의 네 가지 이유들을 볼 때 '죄와 사망의 법' 이라는 구절을 그런 식으로 해석해서는 안됩니다. 그 구절을 7:23 에서 말한 것과 동일한 것으로 여겨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 대목에 있는 다른 병행적인 진술로 생각해서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죄와 사망의 법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그 말은 하나님의 율법이나 하나님의 도덕법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특히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주신 십계명 가운데 있는 법입니다. 그것은 특히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주신 십계명 가운데 있는 법입니다. 바울이 로마서의 초두에서부터 말할 때 바로 그것을 의미하였던 것입니다. 왜 그러해야만 합니까? 왜 그것이 인간들에게 주어지고 모든 인간들의 마음에 쓰여지며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모세를 통해서 분명하게 주어진 하나님의 법이어야만 합니까?


 


 첫번째 대답은 바울이 여기서 정죄를 다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기본적인 진술은 "그러므로 이제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그 정죄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어떻게 해방되었습니까? 우리로 정죄를 당하게 하는 법으로부터 해방된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우리에게 정죄를 가져오고 우리의 정죄를 선언하는 것은 율법입니다. 정죄를 내리는 율법은'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입니다(3:31). 이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저는 바울이 이미 1:18 에서 진술한 말씀들을 인용해 보아야만 하겠습니다. 왜 그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높이고 자랑합니까? 왜 그는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까? 왜냐하면"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죄에 대한 진노가 어디에서 나타났습니까? 특별히 율법 가운데서입니다. 바울은 그 점을 1:18~3:20 까지에서 계속해서 밝혀 주고 있습니다. 3:20 에서 바울은 그 논증을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라고 말함으로써 요약하고 있습니다. 율법이 무엇을 합니까?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3:19). 그런 다음에 21절에서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한 이것이 무엇입니까?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입니다. 율법은 정죄합니다. 그것은 죄를 깨닫게 합니다. 그것은 정죄를 수반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거기에서만 머무는데 만족하지 않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여러 번 그것을 반복하여 나갑니다. 4:15 의 말씀을 보십시오. "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 그런 다음에 로마서 5:20~21 의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율법은 한 측면에서 '범죄를 더하기 위해서' 들어온 것입니다. 그것은 결코 구원을 목적으로 들어온 것이 아닙니다.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되게 하려함이니라"  바울은 율법을 가리키면서 그것이 행하는 바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가 죄로 심히 죄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다른 말로 해서 율법은 언제나 정죄의 큰 요인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우리가 더 이상 정죄 아래 있지 않다는 점을 상기시키고, 다시 그 점을 선포할 때 그는 분명히 그것을 이런 식으로 지적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사망의 선고를 내린 율법에서 해방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서신들 가운데 있는 다른 병행구들을 찾아 봅니다. 그는 고린도전서 15:56 에서 같은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궁극적으로 사망을 이루는 것은 율법이요, 죄는 부수적인 요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의 권능은 율법입니다.' 율법은 언제나 사망으로 인도합니다. 또한 고린도후서 3:7~9 의 말씀을 보시시오. 바울은 거기서 모세를 통해서 주신 율법을 말하고 있습니다.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의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을 인하여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영의 직분이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 그는 거기서 모세에게 주신 하나님의 율법을 말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산에서 모세에게 두 돌판에 기록하여 주신 율법입니다. 그는 그것을 '사망의 직분' 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망의 법' 입니다. 9절에서 그는 그의 진술을 거듭하기를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망의 법' 이요, '정죄의 율법' 이기도 합니다. 이 '죄와 사망의 법' 이 '하나님의 율법' 을 의미한다고 주장하는 첫번째 이유입니다.


 


그러나 저는 두번째 이유로 나아가려 합니다. 7:7 에서 마지막 절까지 바울은 사람의 타락된 상태 때문에 하나님의 율법이 필연적으로 언제나 두 가지 중요한 결과를 가져온다는 점을 증명하려고 합니다. 첫번째는 죄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죄로 인도합니다. 그것은 죄를 더 심화시키며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활동' 을 부채질합니다. 5절에서 말한 바와 같습니다. 또한 바울은 7:7~12 에서 그 점을 상세하게 논술하고 있습니다. 율법의 두번째 결과는 율법이 언제나 사망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그는 13절부터 마지막까지에서 그 점을 상술하고 있습니다. 그 두 대목들이 시작하는 방식을 관찰하시기 바랍니다. 7절,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런 다음에 13절,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뇨" 대답은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율법의 결점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결점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해서 7:7~25 사이의 그 두 항목에서 바울은 율법이 죄와 사망을 낳는다는 것을 증명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 8:2 에서 그 율법을 '죄와 사망의 법' 이라고 부르는 것은 하등 놀랄 일이 아닙니다. 그는 율법이 그러한 일을 행한다는 것을 증명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율법을 그렇게 부를 자격이 있게 된 것입니다. 이미 그는 5:20 에서 그 점을 약간 비추어 준 바 있습니다. 그는 7장에서 그 점을 길게 상술하여 나갔습니다. 이제 그는 그것을 다시 거론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논증을 계속해 나가기 위해서 요약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율법은 '죄와 사망의 법' 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것에서 구원받고 해방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우리를 정죄하고 우리로 죄짓게 하며 사망에 이르게 한 것은 하나님의 율법입니다.


 


그러나 세번째 이유를 숙고해 봅시다. 우리는 이미 로마서 8:2 에 대한 그릇된 해석은 8:1 로부터 논리적으로부터 나온 해석이 아니기 때문에 받아들여서는 안된다는 점을 알았습니다.그러나 우리의 해석은 자연적으로 1절로부터 나와야만 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왜? "이는(왜냐하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여기서 죄와 사망의 법은 나를 정죄한 하나님의 율법을 말합니다. 만일 내가 나를 정죄한 하나님의 율법에서 해방되었다면 이제 나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2절 말씀은 1절 말씀을 설명하고 나로 하여금 1절 말씀을 이해하도록 도와줍니다.


 


그러나 보다 더욱 결론적이고 결국 그 논증을 붙잡고 있는 것은 단지 이 해석만이 끊이지 아니하고 3절에 이르게 한다는 것입니다. 3절에서 우리는 또 다른 '이는'(왜냐하면) 이란 말을 대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바울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은 율법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모든 사람은 3절에 있는 '율법' 이 모세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율법임을 인정하고 또 인정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3절이 2절에서 자연스럽게 나온 말씀이라면 '왜냐하면' 이라는 말이 주장하듯이 율법이라는 말은 두 구절에서 동일한 율법을 말하고 있음이 틀림없습니다. 그는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으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었다" 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옛 율법은 7장에서 길게 진술하였던 이유들 때문에 이런 일을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처럼 다른 방법으로 구원하셨습니다. 바울은 내내 하나님의 율법을 거론하고 있으며 또한 그 율법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는 "내 치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는 또한 로마서 7장 에서 상세하게 말해왔던 것을 계속 말하지도 않고 거론하지도 않습니다. 로마서 7장의 그 부분은, 제가 거듭 말씀드려야 하겠지만, 일종의 삽입구적 진술에 불과하고, 복음의 주요한 진술의 일부로 여겨져서는 안됩니다.


 


여기서 바울은 우리를 대적했고, 우리를 정죄했으며, '죄의 권능' 이고, 언제나 '죄의 권능' 이고, 언제나 '죄와 사망' 으로 이끄는 하나님의 율법으로부터 우리가 해방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정죄 아래 있지 않다는 것을 다시 한번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여러분이 로마서 8:2 에 있는 이 '죄와 사망의 법' 을 이와 다른 방법으로 해석한다면, 그 방법이 어떤 방법이든지 간에, 1절과 3절과의 올바른 연관에서 해석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틀림없이 바울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하고 논증의 사활을 좌우하는 '왜냐하면' 이라는 말을 두 번 사용했다는 사실을 간과해야만 합니다. 그렇게 되면 전체 논증을 파괴하는 것이고, 결국 분명한 해석을 전혀 불가능하게 만들고야 맙니다. 어떤 경우에서든지 바울은 자기가 행하고 있는 바가 어떠한 것인지 암시하지 않고 2, 3절에서 '법' 이라는 말을 서로 다른 의미로 사용하지는 결코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진술은 하나님의 율법에 관한 우리의 옛 관계로부터 우리가 완전히 해방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이 어떤 새로운 것을 말하고 있습니까? 그는 6:14 에서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6:14 의 말씀은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입니다. 왜 그러합니까? "(왜냐하면)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다음 7:4 에서 "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라고 말합니다. 그는 다시 6절에서 되풀이해서 말합니다.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찌니라." 바울은 본 주제가 아닌 여담을 할 경우에 그의 관례대로 다시 한 번 그가 전에 말했던 바를 단순히 말하고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는 주요한 주제로 되돌아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그것을 거론하는 것은 그의 논증을 풀어나가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도 이 로마서 8:2 은 문맥에서 너무나 자주 벗어나기 때문에 제가 여러분에게 상기시켜 드린 바 있는 두 종류의 잘못된 성화 이론에 기초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하나의 문제를 남겨 두고 있습니다. 그러면 율법에서 나를 해방시킨 그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 입니다. 이 특이한 구절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즉각적으로 그것은 우리가 거론해 왔던 하나님의 율법의 반대임에 틀림이 없다고 말할 수 있고, 또 누구나 그 점에 의견을 같이 할 것입니다. 우리들은 그리스도인들로서 더 이상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의 전체적인 지위가 변화되었습니다. 그 전에 우리의 지위는 어떠하였습니까? 우리는 '율법 아래' 있었습니다. 우리는 율법의 통치와 왕노릇과 권능 아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완전히 다른 위치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 이 '율법 아래' 에 있는 것의 반대를 지시합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까? 그 구절이 신자에게 있어서 성화를 위한 성령의 역사를 가리키는 것일까요? 우리는 즉각적으로 "아니다" 라고 대답해야 합니다. 바울은 내 안에 있는 성령의 역사 때문에 하나님의 법으로부터 해방되었다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성경은 어느 곳에서도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성령의 역사가 우리를 의롭게 하며 또 하나님의 율법에서 구원한다고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가 거룩함을 입었기 때문에 정죄 아래 있지 않다는 그 잘못된 교훈으로 되돌아가는 격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아보았듯이 그러한 가르침은 성경에서 전혀 가르쳐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의롭다함을 받았기' 때문에 정죄 아래 더 이상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기 때문에 정죄를 받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은 로마 카톨릭의 교훈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로마 카톨릭의 교도들은 구원의 확신을 믿지도 않고 설교하지도 않습니다. 그들의 이론에 따르면 우리가 완전히 거룩하게 되기까지는 구원을 확신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카톨릭교의 오류입니다. 우리는 온 정성을 다해서 그 오류를 배척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 구절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이것은 복음, 구원의 복된 소식을 다르게 묘사한 데 불과합니다. 무엇이 나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하였습니까?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5:20~21 에서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율법의 반대는 은혜입니다.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 한 것 같이" (그렇게 된 것은 율법을 통해서 된 것입니다) "은혜도 또한  왕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바울이 다시 5장 끝에서 잠깐 쉬었던 논증을 다시 계속해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율법의' 반대는 은혜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란 은혜의 통치와 은혜의 왕노릇을 의미합니다. 그가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길입니다.


 


왜 '법', 즉 '생명의 성령의 법' 이라는 표현이어야 합니까? 법이라는 용어가 어떻게 해서 복음을 말하는 뜻으로 사용될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해서 그 법이라는 말이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말을 뜻할 수 있으며, 왜 그 말이 율법 아래서 행위로 자신을 의롭다 하려는 시도와 반대되는 말로 사용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아주 간단하게 대답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3:26~27 로 되돌아가보면 대답을 알 수 있습니다.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믿음의 법' 이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23절 이하에서 언급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구원방식입니다. 그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믿음의 법' 이라고 부르는 것에 주의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바로 이 '법' 이라는 말을 복음의 문맥에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것을 거기에서 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비슷한 용법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5:20~21 에는 사실상 같은 개념이 있습니다. '율법' 에 대한 반대는 '은혜' 이며, '은혜의 왕노릇' 은 '죄의 왕노릇'과 대조되어 있습니다. 그가 은혜의 '왕노릇'을 그렇게 부르고 있음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왕노릇' 과 '법' 이라는 말은 같은 말입니다. 6:14 에서 그는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다고 말함으로써 같은 사항을 표현합니다. 여러분을 통치하고 있는 것을 '법' 이라고 묘사할 수 있습니다. 원래는 같습니다.  7:4, 6 역시 동일합니다. 그 여자의 첫번째 남편이 살았을 때는 거기서 언급되는 여자는 그 남편 '아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남편이 죽을 때 그는 더 이상 그 아래 있지 않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과 결혼하여 그 다른 사람 아래 있을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3장 6, 8절에서도 그 개념을 매우 명확하고 노골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군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여기서 새 언약, 새 율법의 조약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행하는 바는 다 법률이요, 그것은 '하나의 법조문' 입니다.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 8절에서 '사망의 직분' 과의 대조를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하물며 영의 직분이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영의 직분'은 '성령의 법'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의문' 이라 불리우는 옛 율법 아래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제 성령의 법 아래 있는 것입니다. 한때 '정죄의 직분과 사망의 직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바울이 묘사하는 대로 '영의 직분' 입니다. 그래서 여기 로마서 8:2 에서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법" 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야고보서 1:25 에서도 같은 개념이 나타나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얼마나 역설입니까?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 그것은 '하나의 길', '하나의 왕노릇' 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은혜의 왕노릇이요, 자유케하는 왕노릇과 법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숙고하고 있는 그 구절을 다음과 같이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원리나 직분이나 언약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해방하였음이라." 다른 말로 해서 바울은 우리가 이제 새 언약, 새로운 약속 아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향해서 그리고 우리 안에서 왕노릇하는 하나의 새로운 원리와 세력이 있습니다. 복음은 우리를 해방시켰습니다. 우리는 '자유케 하는 법' 아래에 있습니다. 그것을, 3:27 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믿음의 법' 이라고 부르거나, 5:20~21 에서 부르는 것과 같이, '은혜의 왕노릇' 이라 부르는 대신 여기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 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이미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1절에서 상기시킨 바 있습니다. 그 결과 중 하나가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을 뜻하는 것입니다.


 


6장에서 논증한 바와 같이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며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었고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였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에베소서 2장에서 묘사하는 바와 같이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또한 '그와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습니다. 고린도전서 15:45 절에서와 같이,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생명을 주는 영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 안에는 새로운 생명이 있습니다. 그 생명은 그리스도의 생명입니다.


 


어떻게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속에 들어옵니까? 대답인즉, '성령으로 말미암아서' 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었던 성령이 우리 속에 있는 성령과 같은 분입니다. 고린도전서 12:13 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세례받게 하는 성령입니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연합된 것은 한 성령에 의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것을 설명하는 또 다른 방식은 그리스도의 생명이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부여되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3장에서 바울은 '성령'과 '그리스도'라는 용어를 상호 교환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는 심지어 "그리스도의 영이 너희 속에 거한다"라고 썼습니다. 그는 이 8:9 에서 그 표현을 사용할 것입니다. 이 문제를 명확히 구분지어 주장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 점을 가장 잘 살펴보는 방법은 그 방법입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옵니다. 또한 우리에게 힘을 주고 우리를 인도하여 나가는 분도 성령이십니다. 누가 우리를 율법의 정죄에서 벗어나게 했습니까? 우리가 3, 4절에서 명확하게 알아보겠지만,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나 간접적으로 성령께서 우리를 인도한 결과이기 때문에, 그분은 성령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고린도후서 3:17 에서 그렇게 말하였던 것입니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유대인들이 눈멀었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읽기는 했으나 진리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을 밝혀 줄 성령을 필요로 했습니다.


 


이러한 진리들은 중생치 못한 사람, 곧 자연인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 진리를 밝혀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울이 여기서 말하고 있는 점입니다. 복음은 우리를 구속하였으되 그것은 성령을 통해서 우리를 해방합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구원 역사는 성자 하나님에 의해서 우리에게 적용됩니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나 성령에 의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고 그로 인하여 의롭다함을 받습니다. 그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 이라고 말함으로써 그 점을 한 구절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전에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큰 세력은 율법의 권능이었습니다. 그것은 우리로 죄짓게 하며 포로잡히게 하여서 실패하고 사망에 이르게 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 모든 것에서부터 해방되었고 구원받았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체계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며 성령 안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 결코 정죄함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용서함을 받았을 뿐 아니라 새로운 체계로 옮겨졌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구원의 입장에서 율법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습니다. 우리는 율법과 관계를 끊었으며, 우리는 그것에 대해서 죽은 바 되었습니다. '우리가 매인 바 되었던' 것은 제거되었으며 죽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역과 왕노릇 안에 있습니다. 또한 성령의 왕노릇과 체계 안에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모든 영광스러운 용어들을 상호 교환적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저는 다시 바울이 어떤 부과적인 축복을 받았던 몇몇 그리스도인만을 묘사하고 있지 않음을 강조할 것입니다. 바울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해당되는 사실을 진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왜 그는 성령을 이런 식으로 언급하며 그것에 대해서 강조를 하고 있습니까? 저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는 이미 5장에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와 하나님의 차원에서 칭의의 결과들을 추론하였습니다. 그가 여기서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차원에서 같은 사실을 보여 주려는 것입니다. 또한 그것을 보다 상세하게 다루어 나가려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그는 필연적으로 성령의 역사를 말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우리들에게 성화에 있어서의 성령의 역사를 보여 줍니다. 또한 하나님의 양자로 받아들임과 우리의 기도생활에 있어서 성령이 어떻게 역사하는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됨으로써 초래되는 주요한 결과들 가운데 하나는 성령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 또는 우리에 대해서 어떤 일을 행하십니다. 그러나 바울은 4절 끝에 이르기까지 그 점을 거론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것은 십자가와 우리의 칭의를 거론하고 있는 것이지 성화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율법의 요구를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라고 하였습니다. 이제 그는 성화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그는 그 다음에 계속해서 나아갑니다. 이것이 그의 전형적인 방식입니다. 그는 먼저 하나의 개념을 소개합니다. 그런 다음에 그 개념의 초안에 해당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 다음에 두번째 부분은 그래서 그 모든 것을 풀어나가는 것입니다. 그는 속죄에 관한 첫번째 부분을 논술한 다음에 성령의 특별한 사역에 해당하는 두번째 부분을 거론합니다. 그는 4절 끝에서 이것을 언급한 다음 13절까지 성화의 차원에서 그 점을 다루어 나갑니다. 또한 17절에서는 양자의 차원에서 그리고 25, 26절에서는 기도라는 차원에서 다루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그는 그 모든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은 어떤 적은 부분에 있어서도 실패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2절은 중요한 구절입니다. 바울은 그의 메시지와 주요 논증을 되풀이하여 말하고 있으며 요약하고 있습니다. 그는 우리가 우리의 구원이 절대적으로 확실하다는 사실을 알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는 우리 모두가 더 이상 우리에게 '정죄함이 없다' 는 것을 알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영원토록 정죄함이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는 우리에게 우리가 우리를 정죄하였고 우리에게 대해서 '죄와 사망의 법' 이 되었던 율법으로부터 영원토록 해방되었음을 확신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새로운 직분, 곧 '은혜의 직분', '성령의 직분', '영광의 직분' 이라 불리우는 이 새로운 직분에 의해서 그것으로부터 해방된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
로마서강해 제3권 제1장 “서론적 분해”에서 일부 발췌 (15~20p)


 5장에서 사도바울이 말하는 주제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구원의 확신에 대한 주제였습니다. 우리의 논증인, 즉 처음 네 장에 걸쳐서는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사도 바울의 위대한 교리를 다루어 왔으며 거기에 대하여 반대를 제기하는 여러 주장을 다루었는데, 지난 6장에서 사도는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음으로 따라온 결과를 연역해내기 시작하였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 즉(이제 얻었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그것이 5장 전체의 주장이었습니다. 바울은 우리의 칭의가 아주 완전한 의미에서 우리의 최종적인 구속을 보장한다고 역설하고 있습니다. 또한 어떤 사람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또는 우리가 지적한 바와 같이 8:30 에서 보는 바 칭의에서 영화에로의 동일한 비약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가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이것이 5장에서 말하는 사도의 주제요 논지인 것입니다. 우리가 의롭다 함을 얻으면 구속전체가 우리의 것이 되어질 것을 아는 입장에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로마 그리스도인들이 그 점을 깨닫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것을 상세히 설명하여 낙며 어찌해서 어떤 것도 이 보장된 목적지를 가지 못하게 그들 앞에 막아 설 수 없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환란도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아무것도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사실 그런 환란들은 확신을 더 가중시킬 뿐입니다. 우리는 그에 대한 절대적인 증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바울은 5장에서 하나님께서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 우리를 위하여 자기 아들을 죽게 내주셨다면, “화목된 자로서의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라”(5:10)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 점은 우리를 돌려서 12절로 5장 마지막에 이르는 놀라운 대목으로 인도하여 줍니다. 거기에서 사도는 모든 주제 중에서 가장 놀라운 주제인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담과 연합되어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우리의 구원이 그처럼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모든 것은 우리 것이 됩니다.....


바울은 구원의 확신과 칭의의 종국에 대한 그의 장엄한 논증을 중단하고 이 두 가지(1. 이 가르침이 무율법주의로 인도하기 쉬운 교훈이 아닌가?, 2.사도가 율법에 대하여 이처럼 말한다면 율법은 이제 전혀 가치가 없고 쓸모없지 않은가?) 있을 법한 난제들을 다루기 시작한 것입니다.


 


바울이 6장과 7장에서 행한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두 장을 일종의 5장과 8장 사이의 삽입구적인 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5장과 8장의 주제는 동일한 것이요, 계속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기억하다시피, 8장은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로 시작합니다. 이 진술은 5장 마지막 절과 연결되는 것이지 7장과 연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8장은 5장이 끊긴 자리에서 시작합니다. 그리고 6장과 7장은 본 주제를 벗어난 탈선이 아니라 삽입대목입니다. 6장과 7장은 특별한 진술들과 관련하여 야기되는 부수적인 난제들을 해소하기 위하여 주요 논증 가운데 들어있는 대목입니다. 6장은 첫 번째 문제를 다룹니다. 즉 이 율법폐기론으로 흘러가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더욱 넘친다”는 이 은혜에 관한 엄청난 진술이 사람들을 부추겨 해이한 생활이나 죄를 짓게 충동질 하지 않을까하는 문제를 다루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6장의 임무는 그 난제를 다루는데 있습니다. 7장은 두 번째 난제를 다루고 있으며 하나님의 구속적 경륜에 있어서 율법의 위치와 기능과 목적을 강해하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에야 그는 칭의의 결국에 대한 위대한 주제로 다시 넘어가게 되어, 8장 초두에서 마지막까지 그 문제를 다루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이 6:1에서 새로운 주요 대목이 시작한다고 하는 생각이 전혀 잘못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전혀 새로운 주요 대목이 시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사실의 논증에 억지를 부리는 것입니다. 환언하며 나는 6, 7장에 나오는 말씀들이 성화의 방식에 관한 문제만을 다루고 있다는 견해를 철저히 배격합니다. 일반적이고 친숙한 가르침에 의하면, 바울이 6장에서 그 주제를 내놓기 시작하여 7장에서는 바울 자신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실패할 때에 당하던 경험을 피력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 다음에 어떻게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었는가 하는 것을 8장에서 말했다는 것이죠. 나는 그런 식의 구분에 어떠한 증거도 없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로마서강해 제3권 제1장 “서론적 분해”에서 일부 발췌: 15~20p)


 


출처: 생명나무 쉼터  http://blog.daum.net/7gnak/15715085

전체 16
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 추천 조회
6
에피쿠로스 학파와 스토아 학파
쥬니어칼빈 | 2013.02.11 | 추천 0 | 조회 9619
쥬니어칼빈 2013.02.11 0 9619
5
제 22장) "성령의 법과 은혜의 왕노릇" / 로이드존스
쥬니어칼빈 | 2013.02.02 | 추천 0 | 조회 4789
쥬니어칼빈 2013.02.02 0 4789
4
오순절 사건에 대한 구속사적 조명/송영찬 목사|신약신학
쥬니어칼빈 | 2013.01.22 | 추천 0 | 조회 5063
쥬니어칼빈 2013.01.22 0 5063
3
중생한 사람도 죄를 짓는가?
쥬니어칼빈 | 2012.11.08 | 추천 0 | 조회 5482
쥬니어칼빈 2012.11.08 0 5482
2
사탄의 결박: 계시록 20:1-7
쥬니어칼빈 | 2012.11.08 | 추천 0 | 조회 5924
쥬니어칼빈 2012.11.08 0 5924
1
복음서 상호간의 차이점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쥬니어칼빈 | 2012.11.01 | 추천 0 | 조회 5821
쥬니어칼빈 2012.11.01 0 58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