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중생한 사람도 죄를 짓는가?

작성자
쥬니어칼빈
작성일
2012-11-08 05:12
조회
5483

중생한 사람은 도무지 죄를 짓지 않는다고 가르치는 분들이 있다(완전주의). 정말 그러한가? 아담 안에서 범죄 하여 완전히 타락한 인간이 하나님의 택정함을 받아 예수를 믿어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고, 복스러운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고 일컬어 주시어, 하나님의 아들, 딸로 삼으시면 그때부터 성도는 죄에 대하여 죽으며 의에 대하여 살려고 몸부림치며 그 마음속에 그리스도의 형상(Imago Christi)이 이루어지기 위하여 성령님께 매달려서 기도하며 성경 연구하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서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려는 마음이 스스로 우러나오게 된다(spontaneous inclination to magnify His name).  세상의 옛 풍속을 사랑하며 썩어질 육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영생을 얻을 성령을 위하여 심고, 부르심에 합당한 생활을 하려고 애쓴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순종과 전도에 힘쓰게 된다. 초대 교회 성도는 성령을 받고 나가서 전도하여 교회가 튼튼히 서 갔다.


       


그러면, 거듭한 성도(the regenerated)는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죄를 도무지 짓지 않고 완전한 성화(perfect sanctification)에 도달할 수 있는가? 이것이 문제가 된다.  주님의 영이 내 마음속에 들어온 때부터 점점 죄를 멀리하고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을 입고 살아가려는 성화의 과정이 시작되는데 이 성화가 일생을 통하여 어느 정도까지 미치는가 하는 것이다. 거듭난 성도는 성화가 극에 달해서 죄를 전혀 지을 수 없는 경지(境地)까지 도달한다고 주장하는 학설을 신학적으로 “완전주의(Perfectionism)"이라고 한다. 


       


오늘 전도자들 가운데는 완전주의를 주장하는 분들이 많다. 그렇다면, 이 완전주의자들의 가르침이 과연 올바른가? 성경을 통해서 알아보아서 만일 그릇된 교리라면 당연히 버려야 한다. 웨스트민스터 신조에서 가르쳐 주는 것처럼, 모든 교리상의 문제는 궁극적으로 성경에서 찾아야 한다. 성경만이 우리 신앙과 생활의 유일한 법칙(sole guide to our faith and practice)이다.


       


우선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성도가 성화 된다고 하는 것은, 우리 몸의 일부만을 말함이 아니라 전 인간(全 人間)을 말한다. 비유하자면, 한 어린애가 신체의 어느 한 부분은 완전하다고 생각될지 몰라도 그 어린 아기의 전신(全身)으로 보아서는 아직 미숙한 상태에 있는 것처럼, 성도는 이 땅에서 살고 있는 동안 죄와 더불어 싸우며 살아가게 마련이다.  가장 좋은 예는 로마서 7장에 기록된 바울의 내적인 싸움이다(internal conflict). 


       


왕상 8:46에 보면, “범죄 치 않는 사람이 없사오니 저희가 주께 범죄 하므로 주께서 진노(震怒)하신다”라고 말씀했고, 잠언 20:9에는 “내가 내 마음을 정하게 하였다 내 죄를 깨끗하게 하였다 할 자가 누구뇨?”라고 했고, 전도서 7:20에는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아주 없느니라.” 하고 했으며, 또한 신약 약 3:2에는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이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라고 했으며, 사도 요한은 요일 1:8에서 “만일 우리가 죄 없다고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라고 했다.


       


바울은 롬 7:22 이하에서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네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 잡아 오는 것을 보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라고 탄식했다. 같은 로마서 8:10에서 바울은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라”라고도 말씀하였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 말씀은 바울이 회심한 후, 중생하고 난 후 사도로 부르심을 받고 성경을 기록하면서 하신 말씀이라는 점이다. 예수 믿는 즉시 우리의 영은 부활한다 (resurrected in our soul essence). 부활한 영혼과 아직도 부활하지 못한 채로 죽어 땅속에 장사 되었다가 주님의 재림의 날(Parousia)에 비로소 부활할 (아니면, 내 생전에 주님 재림하신다면, 죽음을 맛보지 않고 우리가 홀연히 변하여 공중에서 주를 맞을 고전 15:51), 육신과의 싸움에서 부단히 싸우는 바울의 참모습을 여기서 엿 볼 수 있다. 육신의 법과 싸우는 바울은 고전 15:31에서 “나는 날마다 죽노라”라고 했다. “죽노라”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일까? 우리의 육신의 법을 죽인다는 말이다. 육신의 법은 성령의 법을 거슬리기 때문이다. 바울이 이처럼 죄의 법과 싸우는 성화의 과정을 걷는 것이 성경을 통해서 사실이라면, 하물며 우리랴.


       


완전주의는 기원 4세기에 있었던 펠라가우스(Pelagius, AD 360-422, 영국 사람으로 로마에 이주하여 살던 이단), 천주교(Roman Catholicism), 아르미니안주의자 (Arminians), 또한 Ohio 주 Oberlin 대학을 중심으로 한 오벌린 학파(Oberlinian School), 사회 복음주의의 씨를 뿌린 릿출(Albrecht Ritschl, 1822-1889) 학파 등이 주장하는 것으로 중생한 사람은 현세의 율법, 즉, 현세 성도들의 능력과 필요에 알맞게 조절된 그 율법을 완벽히 지켜서 완전한 성화의 극치를 달성할 수 있다고 믿는 데서 비롯된다. 중생한 사람은 죄를 도무지 짓지 않을 만큼 거룩해진다고 그들은 가르친다. 이들 중에서 Pelagius 학파를 제외한 여타 완전주의자들은 원래 하나님이 주신 도덕률(道德律, Moral Law)의 표준을 사람이 지킬 수 있는 정도까지 낮추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율법은 절대적이 아니라 현세에 맞게(現世, in the temporal context), 해석해서 우리가 능히 지킬 수 있는 자리까지 끌고 내려와야 한다고 하는 주장하는 것이니 말씀의 상대성(relativity)을 믿는 셈이다. 이것은 말씀의 절대권위(Absolute authority of the Word of God)을 액면 그대로 믿는 개혁주의 신앙과는 아주 다르다.


       


완전주의(Perfectionism)의 근거는 베드로전서 1:16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 지어다” 또, 마태복음 5:48에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함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또한 야고보서 1:4의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를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베드로전서 2:21의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이상 여러 가지 성경 구절들을 증거 구절로 들고 있다. 그들은 말하기를 이런 성경구절들이 사람이 이행할 수 없는 것이라면, 성경으로서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닌가 하고 그들은 따진다. 신앙생활에 성화의 과정이 엄연하다는 사실을 외면하려 한다.


       


하나님은 능치 못함이 없으시다. 원하시면 하나님은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에 완전히 성화(聖化. sanctification)할 수 있게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사람이 죽기 전에 이 세상에서 전 인간이 완전히 성화 되리라는 약속을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적이 있는 가하는 문제이다. 만일 하나님이 그런 약속을 하셨다면, 그런 약속을 완전히 성취한 역사적인 인물을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성경에는 그런 사람이 없다.  성경은 우리에게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라고 가르친다(마태 26:41). 본문에서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서 기도하라”는 말은 원문에서 “adialeiptws proseuxesthe 아디알레입토스”로서 기도하라는 말이 현재 명령이다(proseuxesthe, 프로스유케스테). 헬라어(Koine Greek)의 문법은 그 뜻(shade of meaning)이 다른 어느 나라의 말보다 정확하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필이면 오랜 세월에 걸쳐서 Alexander the Great(알렉산더 대왕, 323 BC에 33세로 사망함)을 통해서 전 세계를 정복, 헬라어로 언어를 통일하여 헬라어가 보편화된 후에 신약 성경을 Koine Greek(기원 1세기 신약 성경 기록 당시 세계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던 평민의 헬라어)로 신약 성경을 기록하여 하나님의 특별계시 완성인 신약 성경을 기록하게 하신 것이다. 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만일 하나님의 특별계시 말씀이 한국말처럼 모호한 말로 기록되었다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까? 그래서 하나님은 가장 의미 전달이 잘되는 헬라어로 신약이 기록되도록 하신 것이다. 


     


헬라어에서는(Classic Greek이나 Koine Greek이나 간에) 현재 시제(present tense)를 사용하면 항상, 예외 없이, 어떤 동작의 “계속적, 상습적” 동작만을 나타낸다. 반면에 정과거형(定過去形, aorist tense)을 사용하면, 어떤 동작이 과거에 한번 있었고, 반복되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반과거(半 過去, imperfect tense)는 과거에 있어서 어떤 동작의 습관적, 계속적, 반복적(customary, continuous, repetitive, habitual) 동작을 말한다(이것은 프랑스어에서의 passe imparfait과 같다).  


     


그렇다면, 다시 본론에 돌아가서 본문의 의미는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깨어 있어야 하고,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기도해야한다”는 뜻이 분명하지 않은가? 재론의 여지없이 뜻이 명확하다(unequivocal meaning). 성도의 성화는 죽을 때까지 계속된다. “거룩하라”라는 말, “온전하라”는 말은 우리가 그렇게 되려고 늘 성화의 과정(sanctification process)이 계속되는 것뿐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내가 지킬 수 있는 정도로 낮추어서 다 지켰다고 자랑하라는 말이 결코 아니다.


       


 “죄”란 무엇인가? 요일 3:4에는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 (anomos)이라고 했다. 여기서 “불법”이란 단어는 “하나님의 법이 아닌 것”을 말한다. 그것이 anomos이다.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Shorter Catechism(소 요리문답서) 제14문에 보면, “죄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있는데 대답은 “죄는 하나님의 법을 순종함에 부족한 것이나 혹 어기는 것이니라”라고 답하고 있다. “죄”의 정의(定義)는 하나님의 법으로 결정되는 것이지 사람이 결정짓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법을 사람이 제멋대로 낮추어서 그것을 지키므로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것이라고 주장할 수 없다는 말이다. 요일 1:8에는 앞서 언급했듯, “죄 없다하면 스스로 속이는 자요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않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라는 말씀대로 온전히 이 땅에서 성화가 완성되어 완전히 거룩해질 수는 없는 일이다. 성도를 “거룩한 백성”이라고 하는데 정말 흠과 티가 없어서 그렇게 불리는 것인가?  아니다. 거룩해서 거룩하다고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그의 독생자 그리스도 예수가 십자가에서 이룩한 의(義, dikaiosune, 디카이오수네)를 우리에게 전가(impute, 轉嫁)하여 “의롭다고 보아 주셔서” 성도라고 불리어 지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것을 imputation of Christ's righteousness(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라고 한다. 십자가 보혈의 공로 때문에 우리 성도들을 “거룩하다”라고 일컬어 주시는 것뿐이다(We are counted as righteous owing to His death on the Cross).


       


전에도 언급했듯, 성경 어디에 보아도 사람이 죽기 전에 완전해진다는 약속이나 완전해진 인물이 없다. 성령의 도움으로 완전해지려고 애쓸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완전해져서 죄를 지을 수 없는 단계에까지 이르게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기준을 인간들이 지킬 수 있는 수준까지 낮추어서 그 낮추어진 수준의 말씀을 지킬 수 있다고 하는데 이는 일점일획(一點一劃)도 가감할 수 없고 변경시킬 수 없는 절대적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훼방이다. 육신을 가진 인간은 세상에 살 동안 완전에 이르지 못하는 죄인들이며 육신을 갖고 있는 한(限) 죄를 짓지 않고 못 사는 인간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죄가 없는 상태에는 아무도 이르지 못한다. 성도가 완전해 지는 것은 성도가 죽는 날, 아니면, 주의 재림 때 이루어진다. 그때까지 성도는 성경 읽고 기도하며 성령의 도움으로 옛사람을 죽이기 위한 싸움을 지속할 뿐이다.


       


완전주의자들이 말하는바 성경에서 완전한 생활을 했다고 생각하는 인물들, 즉, 노아(창 6:9), 욥(욥 1:1), 아사(왕상 15:14)들도 그들의 평생에 죄를 도무지 짓지 않은 것이 아니라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이 죄 없다고 보아 주셔서 죄가 없는 것이다. 성도 누구에게나 모두 아담에게서 물려받은 죄가 있지만, 예수의 보혈로 씻음을 받아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죄가 없다고 인정해 주시기 때문에 우리가 의인(義人)이요 또한, 성도인 것이지, 우리의 옛사람이 즉 우리의 죄가 하루아침에 아주 없어진 것이 결코 아니다.


       


세상에 죄가 없는 사람이 있는가? 하나님 앞에서 말이다. 요한복음 8장에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불륜의 여인을 붙들고 주님에게 끌고 와서 모세의 율법에 따라서 돌로 여인을 칠 것을 종용한 일이 기록되어 있는데, 누구보다 모세의 율법을 잘 알고 경건한 바리새인들 중에서 누가 돌을 던졌는가? 아무도 없었다. 왜? 모두가 죄인이기 때문이므로. 죄란 외형적인 것만을 말함보다도 마음으로 짓는 내면적인 죄를 말한다. 직접 형제를 살인한 적이 없어도 마음으로 그를 미워하면 이미 살인했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요일 3:15). 성경에 나오는 가장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도 죄를 지었고, 때에 따라서는 무서운 죄를 짓기도 했다. 마음으로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한 것이 인간이다. 노아도, 아브라함도, 모세도, 욥도, 다윗도, 엘리야도 모두 그러했다. 그렇다고 그들이 죄를 상습적으로 범한 것은 결코 아니다. 죄를 미워하며, 죄를 범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지만, 아주 죄를 짓지 않는 경지에까지는 이르지 못한 채로 세상을 떠난 사람들이다.


       


사도 요한은 요일 3:6,8-9 및 5:18에서 하나님께로서 난자마다 죄를 짓지 않는다고 했는데 6절에서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 하지 아니하노니”라는 원문에서 보면, “hamartian ou poiei, 하마르티안 우 포이에이”이므로 poiew 동사의 현재형 동사 직설법  삼인칭 단수를 사용했으므로 “죄를 상습적으로, 고의적으로 짓지 않는다”라는 의미임이 아주 분명하다. 또한, 요일 3:8에서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 함이라”란 말씀도 원어에서 “ho diabolos hamartanei, (호 디아볼로스 하마르타네이)”로서 역시 같은 문법적 사상이며, 3:9에서 “하나님께로 난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라는 말도 역시 똑같은 직설법 능동태 현재(indicative mood, active voice, present tense, 3rd person singular)를 사용하고 있다. 


        


이 성경구절들이 무엇을 입증하는가? 헬라어에서 부정 부사(negative adverb, 否定副詞) ou를 사용하고 직설법 현재 동사를 사용하면 “계속해서 상습적으로 반복해서 어떤 동작을 하지 않는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본문에서 볼 때, 세 구절이 모두 이에 해당한다.  6절과 9절에는 “하나님께로 난자마다 상습적으로 습관적으로 반복해서 죄를 짓지 않는다” 라고 해석해야 한다. 우리 말 성경에는 명확치 않아도 원문에서는 아주 분명하다. 반면에 3:8에서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 함이라”라는 말씀도 직설법 능동태이니, “마귀는 계속해서 상습적으로,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죄를 짓는다”는 말이 분명해진다.


       


신약성경이 의미가 명확한 헬라어로 기록된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은혜인가?  그러므로 “하나님께로 난자” 즉, 중생한자(중생 한다는 말은 “위로부터 난자, born from above”의 의미)는 결코 상습적으로 죄를 짓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전혀 죄를 짓지 않는다는 말과 다르다. 요일 1:8-10에 비추어 보면 죄 없다고 말할 사람이 아주 없다. 거듭난 사람이 죄를 마귀처럼 상습적으로(고의적으로) 지을 수 없다는 말이다. 물론 거듭난 사람도 아직 완성되지 못한 까닭에 (성화가 완성되지 못한) 아직도 죄를 짓게 마련이지만 거듭나면 죄에 대해 민감해지고 죄를 안 지으려고 애를 쓴다. 그러나 육신을 갖고 사는 한 죄에서 왼전히 해방될 수는 없는데 이유는 믿는 즉시 우리 영혼은 부활했지만 우리 육신은 아직 부활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우리 육신은 주님 재림시에 부활한다.  주재림때에 우리가 죽지 않고 주님을 만나면 죽음을 맛보지 않고 홀연히 순식간에 변하여 영화로운 몸이 된다 (고후 15장 참조).


       


그뿐만 아니라, 완전주의자들이 요한 일서의 말씀을 해석하면서 거듭난 성도가 죄를 지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 잘못이라고 하는 점은 그들 자신이 이 성경구절을 해석함에 있어서 자가당착(自家撞着)에 빠지는 것이니, 그들은 말하기를, 믿는 성도 모두가 죄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고 죄 없는 상태까지 이 세상에서 도달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데, 만일 그들의 주장대로 한다면, 요한일서에 나오는 3:6, 8, 9 및 5:18 등은 모든 믿는 자들이 죄를 짓지 않으니 죄가 없다는 것을 입증하는 결과가 될 것이다. 은혜에서 떨어지는 것은 죄를 짓는 것이니 죄를 짓지 않는다고 한다면, 은혜에서 떨어질 수 없지 않은가? 죄를 짓지 않는 상태로 어떻게 은혜에서 떨어져 나가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생 자라 할지라도 구원을 잃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바로 완전주의자들이니 그들의 말이 모순되어 자승자박(自繩自縛)하는 결과가 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요한일서의 여러 가지 성경구절들은 완전주의자들의 주장인 “중생 자는 죄를 짓지 않는다”는 교리를 뒷받침하지 못함을 알 수 있다. 요한일서 3:9를 자주 인용해서 완전주의를 부르짖어도 그들의 주장은 스스로 모순될 뿐만 아니라 요한일서에서 그들의 교리의 정당성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결론에 필연적으로 도달하게 된다.


       


이와 같은 완전주의자들의 교리에 대하여 몇 가지로 반박하여 바른 성경적 성화 (聖經的聖化, biblical sanctification) 교리를 찾아보려고 한다.


 


1. 성경 전체에 흐르는 사상을 참고하는 것은 성경 해석가들의 필수적 접근방법(必須的接近方法, indispensable method of approach)이다. 성경 전체에 흐르는 사상은 중생한 사람이 죄를 도무지 짓지 않는다는 교리를 가르치지 않는다. 앞서 언급했듯, 예를 들어, 왕상 8:46 에 보면, “범죄치 아니하는 사람이 없사오니 저희가 주께 죄를 범하므로 주께서 저희에게 진노하사.....”라고 했고, 잠언 20:9에는 “내가 내 마음을 정하게 하였다 내 죄를 깨끗하게 하였다 할 자가 누구뇨?”라고 했으며, 전도서 7:20에는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아주 없느니라”라고 했고, 롬 3:10-11에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다”라고 했다. 성경의 무오설을 믿는다면, 이런 성경구절들을 무시하면서 죄인이 완전한 성화의 단계까지 도달할 수 있다고 가르칠 수 없다.


       


2.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자녀는 가장 거룩한 자녀라 해도, 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 한 영과 육의 싸움(conflict between soul and body)이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이런 싸움은 죽을 때까지 계속된다. 이 싸움의 가장 전형적인 예는 로마서 7:25ff. 에서 찾아본다. 바울은 부활하신 주님을 보고 회심하여 주의 사도가 되어 성경을 기록하는 과정에서 7:22ff. 에서 “내 속 사람으로는 [즉 부활한 영혼]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 [부활하지 못한 육신]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도다”라고 했고, 25절 하반 절에서는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라고 그의 싸움을 기록하고 있다.  비단 바울만이 아니다. 성도들 모두에게 있는 공통되는 싸움이다. 바울은 갈라디아 5:16-24에서 영과 육의 싸움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갈라디아 5:19 이하에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라고 하면서 여러 가지 자연인의 모습을 열거한다. 5:22 이하에서 성령의 열매란, “사랑과...........”라고 하면서 거듭난 사람의 생활 태도를 말한다. 옛사람과 새사람의 이 같은 대결은 죽을 때까지 지속한다. 빌립보 3:10-14에 보면, 바울은 노년기에 기록한 말씀 중 “아직까지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않노라”라고 하면서 아직도 완전해지지 못하고 지금도 싸우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가?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를 줄 아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위에서  부르심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라고 했다. 이 세상을 떠날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원숙기인 이 시점에서도 자신은 아직도 완성되지 못하고 있다고 고백함을 알 수 있다. 오늘의 완전주의자들은 사도 바울보다 더욱 신앙이 돈독한가? 아니, 아무리 돈독해도 육신을 쓰고 있는 한 이 세상에서 살아갈 동안의 인간의 완전 성화는 불가능하다.



3. 성경에는 죄를 고백하고 죄 사함을 빌라고 하나님이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말씀이 많이 있다. 마 6:12-13에 기록된 주기도문을 보면,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치면서 예외 없이 모든 제자에게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 하옵소서”라고 기도하도록 가르쳤다. 요일 1:9에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고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의 죄를 용서하실 것이요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터이요”라고 했다. 성도의 생활은 누구나 항시 회개의 생활과 죄 용서함을 비는 생활이 계속되어야 하는데 이것은 죽을 때까지 지속되는 것이다. “죄 없다고 하면, 이는 스스로 속이는 자이며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라고 요일 1:8에 말씀한다.


       


4.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은 늘 죄를 고백한 사실을 찾아볼 수 있다. 어느 한 분도 자신이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죄 없다고 한 사람이 없다. 욥은 욥기 9:2에서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서 의로우랴?”라고 했고, 욥 9:20에서는 “가령 내가 의로울지라도 내 입이 나를 정죄하리니 가령 내가 순전할지라도 나의 패괴함을 증거 하리라”라고 했다. 다윗은 시편 32:5에서 “내 허물을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라고 하였고, 또 시편 143:2에서는 “주의 종에게 심판을 행치 마소서 주의 목전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라고 했다. 솔로몬도 시편 130:3-4에서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감찰하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케 하심이니 이다”라고 했고, 또 잠언 20:9에는 “내가 내 마음을 정하게 하였다 내 죄를 깨끗하게 하였다 할 이가 누구이리오!”라고 했고, 전도서 7:20에는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않는 의인은 세상에 아주 없느니라”라고 하였으며 왕상 8:46에는 “죄를 범치 아니하는 사람이 없나니 저희가 주께 범죄하므로 주께서 저희에게 진노하사 저희를 적국에 붙이시매......”라고 말했다. 


         


이사야선지는 이사야 64:6에서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같이 우리를 몰아 가나이다”라고 탄식했다. 다니엘은 어떤가? 다니엘 9:15에 보면, “우리가 범죄 하였고, 악을 행하였나이다…….”라고 하지 않았는가? 바울도 로마서 7:14에서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라고 말하였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람들은 모두 하나같이 자신이 부족하여 죄를 고백하는 일과 죄 용서함을 하나님에게 기도한 것을 본다. 완전주의자는 죄를 도무지 짓지 않을 만큼 성화 되었다고 하니 죄가 없을 것인데 과연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죄가 없다고 할 수 있는가? 우리의 죄를 도말해 주신 것은 주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이지 내 자신이 성화 되어 죄를 지을 수 없으리만큼 성화 되어 지는 것이 결코 아니다.


       


5. 완전주의자들은 그들의 완전주의 교리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절대 거룩하시고 완전하신 하나님의 법의 수준을 소위 오늘날 신약시대의 복음의 수준으로 낮추어서 죄를 외면적으로만 생각하고 마음으로 짓는 죄는 생각하지 않는데 그들의 맹점이 있으니 죄가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는 사람들이다. 신약시대에는 하나님의 법이 완화된 것이 아니라  더욱 온전해 진 것이다. 하나님의 법은 만고에 불변하다. 하나님의 법을 자기가 지킬 수 있을 정도로 낮추어 바리세인들처럼 외적으로 그 낮추어진 하나님의 법을 지키므로 죄를 안 짓는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훼방임이 틀림없다. 그들은 하나님말씀의 정도를 낮추는 단계로 처음에는 “거듭한 사람은 죄를 안 짓는다”라고 하였다가 그 교리가 불합리해지자 수정하여 “거듭한 사람은 의식적으로 죄를 짓지 않는다”라고 했다가 다음엔 “거듭난 사람은 하나님 앞에 몸과 마음을 다 바친다”란 말로 고치고 나서 다시, “거듭한 사람은 믿음의 확신에 이른다”라고 가르친다. 믿음의 확신을 부인하는 성도가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그들은 자신들도 교리의 정함이 없이 유동하고 있음을 본다.


       


6. 역사적으로 기독교의 모든 신앙고백과 신조치고 죄 용서를 포함하지 않는 것이 없다. 어떤 형태의 예배이든 가령 개인의 경건 예배이건, 교회의 주일 예배이건, 또한 어느 시대이건 죄를 자복하고 죄 사유함을 기도하지 않는 예배 의식은 없다. 교회는 절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한다. 이런 사실은 Westminster 신앙고백서, Belgic 신앙고백서, Heidelberg 요리문답, Dortd 신조 등에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아르미니안주의자들의 신앙고백서인 소위 “항의자의 고백서 (The Protest of the Remonstrants, 1619)에서도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7. 성도는 양심을 통하여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 됨을 안다. 죄로 인하여 저주받은 이 땅, 공중에 권세 잡은 자들이 횡횡하는 세상에 살고 있는,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온전한 법을 완전하게 지킬 수 없음은 신앙 양심이 웅변으로 증거 한다. 사람들의 마음이 교만하여 자신의 실수(blunders)나 부족한 점을 죄라고 부르지 않는다고 해도 죄를 인정하든 말든 간에 죄는 죄인 것이다.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필요할 뿐이다. 어떤 죄를 사람이 죄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 죄가, 죄가 아닌 것이 아니다. John Wesley는 그의 Plain Account(明白한 事理) 라는 책 p. 67 에서 말하기를:  “죄란 첫째 하나님의 법이라고 분명히 알고 있는 법을 자원해서 범하는 것을 말하며 하나님께로서 난자는 아무도 죄를 짓지 않는다. 둘째, 죄란 모든 경건치 못한 개인의 성품 자기중심의 생각 교만, 분노, 죄악 된 생각을 말하는데 이런 죄에서 완전주의자는 탈피한다. 셋째, 그러나 인간의 실수나 연약한 것은 죄가 아니다. 이런 것들은 온전하신 하나님의 법에서 잘 못 나간 것이므로 용서를 받아야 되긴 하지만 죄 자체는 아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충만한 사람일지라도 이런 무의식적 죄(unintentional sin)는 지을 수 있는데 이런 것들을 죄라고 단정 짓고 싶으면 죄라고 단정하라. 나는 이것들을 죄라고 단정하지 않는다.”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신학자 Wesley가 죄로 인정하느냐 여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이 이를 죄로 단정 하는가 단정하지 않는가 하는 것이다. 용서받을 것이 없으면 그것은 죄가 아니로되 무슨 일이든 용서받아야 할 일이라면 그것은 분명히 죄인 것이다. 죄를 죄로 여기지 않는다고 해서 그 죄가 안 되는 것이 아니니,  하나님의 말씀이 <죄>라고 단정하는 것을 사람이 제 나름대로 신학적 이론으로 죄가 아니라고 주장할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치 않고 자신의 노력으로 공을 세워 인간의 공명심(功名心)을 얻으려는 행위를 종교 개혁가 Martin Luther는 “Theology of Glory”라고 했다. 반면에, 전폭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순종하며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행위를 Luther는 "Theology of Cross"라고 했다. 분명히 Wesley는 전자에 속한다.


      


진실로 중생한 자는 하나님의 온전하신 법을 자신에게 맞게 뜯어고쳐 그 기준을 낮추지 않는 한 자신을 완전하다고 생각할 사람이 없는데 중생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순종할 뿐이다. 위험은 여기에 있으니 하나님의 불변의(immutable) 진리의 말씀을 사람의 비위에 맞게 필요에 따라서 낮추어 생각할 수 있다면 절대적인 하나님의 말씀은 끝없이 격하(格下, degradation) 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렇게 훼방을 받고 있다.


       


이상 위에서 살펴본 일곱 가지 이유로 완전주의자들의 주장의 헛점들을 알 수 있다. 우리 성도의 생활은 절대 거룩하시고 온전하신 하나님 앞에서 늘 자신의 부족을 느끼며 회개의 눈물을 흘리고 자비하신 하나님에게 죄 용서함을 빌며 부단히 성화 해가는 과정에서 죄와 싸우는 생활의 연속이다. 죄에 대하여 죽고 의(義, justice, dikaiosune)에 대하여 살려는 신앙생활이 이 세상을 떠나는 그날까지, 다시 말하면, 우리의 죄의 몸이 무덤 속에 들어가고 영혼이 육신을 떠나 하나님에게로 가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 계속 된다. 부활하지 못한 육신을 입고 살고 있는 한,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William Shakespeare의 말대로 “To err is human, to forgive is divine." 그 말은 옳은 말이다. 우리는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며 달려갈 길을 달려가는 것뿐이다. 족장들이 그러했고, 선지자들이 그러했고, 사도들이 그러했고, 앞서간 우리의 신앙의 선조들이 모두 이런 싸움을 싸우며 살아갔다. 우리의 실수나 연약함이 하나님의 완전하신 법으로 따지면 죄가 되지만 현실에 맞게 격하시켜놓은 말씀의 기준에서 본다면, 죄가 아니라고 하는 완전주의자들의 가르침은 과연 옳은가?


       


어느 법을 따라야 할까?  하나님의 온전하신 법을 따라야 할까? 아니면 사람의 비위에 맞게 격하시켜 놓은 것을 따라야 할까? 물론 하나님의 온전하신 법을 따라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비추어보면, 우리가 모두 죄인이다. 우리의 영과 육의 싸움은 죽을 때까지 계속하는데 이 싸움에서 매일매일 시간마다 승리하도록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이름다운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바로 알고, 바로 믿고, 바로 전하자.  
                                                 
요일 3:9 말씀에 대한 바른 이해를 해야 한다. 중생한 자가 도무지 죄를 짓지 아니하는가? 요일 본문에서 말하듯, 중생한 자는 상습적으로 반복적으로 고의적으로 죄를 짓지 않는 것뿐이고 아직 부활하지 못한 육신을 가지고 이 세상에 사는 성도는 늘 죄와 싸우면서 살아간다. 그래서 가끔 실수한다. 예: 아브라함, 모세, 다윗 등도 모두 죄를 지었다. 요일 1:10을 분명히 읽어 익힐 것. 바로 알고 바로 믿자, 또 중생자는 구원의 확신을 가질 필요가 있다.   


     


중생한 사람도 죄를 짓는가?  대답은 중생한 사람도 죄를 짓는다. 그러나 죄의 종이 되어 감각 없이 마음대로 고의로 상습적으로 짓지 않는다. 죄를 안 지으려고 피나는 노력을 한다.  성도는 이 세상에서 성화가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성화는 일생을 두고 죽을때까지 계속한다. 우리의 신앙은 점점 성화되어 갈뿐, 아무도 이 세상에서 죄를 안 지을만큼 성화가 완성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글: 김명도 교수
    튤립 교육 선교회
    튤립 신학 연구원

전체 16
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 추천 조회
6
에피쿠로스 학파와 스토아 학파
쥬니어칼빈 | 2013.02.11 | 추천 0 | 조회 9620
쥬니어칼빈 2013.02.11 0 9620
5
제 22장) "성령의 법과 은혜의 왕노릇" / 로이드존스
쥬니어칼빈 | 2013.02.02 | 추천 0 | 조회 4789
쥬니어칼빈 2013.02.02 0 4789
4
오순절 사건에 대한 구속사적 조명/송영찬 목사|신약신학
쥬니어칼빈 | 2013.01.22 | 추천 0 | 조회 5063
쥬니어칼빈 2013.01.22 0 5063
3
중생한 사람도 죄를 짓는가?
쥬니어칼빈 | 2012.11.08 | 추천 0 | 조회 5483
쥬니어칼빈 2012.11.08 0 5483
2
사탄의 결박: 계시록 20:1-7
쥬니어칼빈 | 2012.11.08 | 추천 0 | 조회 5925
쥬니어칼빈 2012.11.08 0 5925
1
복음서 상호간의 차이점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쥬니어칼빈 | 2012.11.01 | 추천 0 | 조회 5822
쥬니어칼빈 2012.11.01 0 58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