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복음서 상호간의 차이점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작성자
쥬니어칼빈
작성일
2012-11-01 06:44
조회
5822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약 성경에는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 이렇게 네 권의 복음서가 들어 있다.


우리는 이것을 사복음서라 부르며 함께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복음서를 읽다 보면, 네 복음서 상호간에 유사성(similarities)과 차이점(differences)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서로 일치하는 것들은 별 문제가 되지 않지만 서로 상이한 것들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문을 가지게 된다.


 


만일 같은 사건을 기록한 것이라면 왜 조금씩 다르게 되어 있는 것일까? 단지 사소한 표현상의 차이라면 큰 문제가 아니겠지만, 상당한 실질적인 차이점을 제공해 주는 경우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런 문제들에 대해 평신도들은 가능한 한 신경 쓰지 않으려 한다. 그런 복잡한 문제는 목사나 신학자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그저 은혜만 받으면 되지 뭐, 성경 중에 모르는 게 어디 한 둘인가? 이렇게 생각한다. 이런 사람들은 매사에 편하게 생각하고 편하게 산다. 그러나 이런 어려운 문제들에 대해 속시원한 답을 찾지 못하면 참지 못하는 사람들도 간혹 있다. 이들은 어떤 문제에 대해 의문을 품으면 끈질기게 물고 늘어진다.


 


그래서 주위 사람들의 눈총을 받기도 하고 목사님께 야단을 맞기도 하지만, 궁금증은 계속 남아 있어서 그를 괴롭힌다. 이런 사람은 진리에 대한 열정이 있는 사람이며, 세상과 쉽사리 타협하지 않는 순수한 사람이다. 그렇지만 한 가지 안타까운 것은 이들 중에는 나름대로 이런 저런 책을 사서 읽다가 종종 이상한 결론에 빠지고 결국에는 신앙을 잃어버리는 사람들도 있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되는 주된 이유는 시중에 나와 있는 많은 신학 책들이 성경 말씀에 대해 잘못된 시각으로 접근하고 있으며, 그 해결책이 근본적으로 불신앙적인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한국 교회의 성도들에게 목회자들이 어떻게 설명하고 가르쳐야 할 것인가를 염두해 두고서 복음서 상호간의 차이점과 그 해결책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 I. 각 복음서의 기록 배경을 생각해야 한다 ]


먼저 우리는 각 복음서의 기록 배경을 생각해야 한다. 기록 배경이란 각 복음서의 저자와 수신자, 기록 시기와 장소, 기록 계기와 목적 등을 말한다. 물론 이런 것들을 집중적으로 살펴보는 것이 비평학의 출발점이긴 하지만, 그들은 복음서들을 단지 인간적인 책들로 보고서 ‘순수하게 역사적으로’ 살피는 데 그들의 잘못이 있다. 즉 그들은 사람들의 활동만 보고 하나님의 섭리와 성령의 역사를 보지 않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각 복음서가 성령의 감동과 섭리로 된 것임을 믿지만, 또한 우리는 그 복음서들이 그냥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인간 저자들을 사용하셔서 구체적인 상황과 배경 가운데서 기록하게 하셨음을 믿는다. 따라서 각 복음서가 각각 어떠한 상황에서 어떻게 기록되었는가를 이해하는 것은 각 복음서 사이에 존재하는 어떤 미묘한 차이점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예를 들면 우리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에 대해 잘 알고 있다. 그런데 마태복음 16장 16절에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되어 있는데, 마가복음 8장 29절에는 간단하게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누가복음 9장 20절에는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라고 되어 있다. 각각 다른 이 차이점들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비평학자들은 이런 것들은 각각 다른 전승(傳乘)이나 삶의 정황(Sitz im Leben)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쉽사리 결론을 내리지만 그러한 것은 성경의 통일성을 파괴하고 성경을 한낱 인간적인 문서로 보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런 설명에 만족할 수 없으며 다른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각 복음서가 어떠한 상황에서 기록되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마태복음은 마태가 팔레스틴 지역에서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다가 다른 지역으로 떠나게 되었을 때, 자기가 떠난 후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기록한 복음서이다(Eusebius, Hist. Eccl. III,24,6). 이에 비해 마가복음은 베드로가 로마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로마를 떠나게 되었을 때에, 베드로를 따라다니다가 로마에 남게 된 마가가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기억한 대로 기록한 복음서이다(Irenaeus, Adv. Haer. III,1,1). 마가는 예수님을 직접 따라다닌 제자가 아니라 베드로를 따라다닌 제자이기 때문에 사건의 순서대로 정확하게 기록하지는 않았으며, 베드로가 상황에 따라 이것저것을 설교한 것을 그 들은 대로 기록하였다(Hist. Eccl. III,39,15). 따라서 마가가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라고 짤막하게 기록한 것은 베드로가 로마에서 설교할 때 이렇게 간단하게 말했기 때문일 수 있다. 또는 베드로가 이 사건에 대해 여러 번 설교했는데 어떤 때는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라고 짤막하게 말하고 어떤 때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길게 말했는데(이런 것은 구체적인 설교에서 흔히 일어나는 현상이다), 마가는 이 중에서 베드로가 여러 번 설교한 것 중에서 짧은 고백이 더 많았다고 판단했거나 또는 짧은 고백을 주로 기억했거나 또는 짧은 고백을 기록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짧은 이것을 기록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누가복음의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라는 기록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이것은 어려운 문제이고 정확히 알기 어렵다. 그러나 누가가 그의 서문(1:1∼4)에서 밝힌 대로, 누가는 자기 앞에 여러 기록들 또는 이야기들이 있었음을 알고 있었으며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폈다고 한다. 따라서 누가는 ‘역사가’의 관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실을 ‘차례대로’ 서술해 나갔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누가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라는 마태의 기록을 “하나님의 그리스도(기름 부음 받은 자)시니이다”로 압축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것은 하나의 추측에 불과하며, 누가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다른 관점에서 그렇게 표현했을 수도 있다.


 


이처럼 각 복음서의 기록 배경을 고려하는 것은 바로 이어서 나오는 예수님의 칭찬에 대한 기록을 이해하는 데에도 빛을 던져 준다. 곧 마태는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는 예수님의 칭찬을 기록해 주고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는 이 부분이 생략되어 있다. 누가가 생략한 것에 대해서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역사가의 관점에서 압축했다고 볼 수 있지만, 마가가 생략한 것은 좀 특별하다고 생각된다. 이에 대한 하나의 가능한 설명은 자기를 내세우기 꺼려하는 베드로의 성격상, 그가 로마에서 설교할 때 자기 혼자서 칭찬받은 이 부분의 말씀은 말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마가는 예수님의 이 칭찬에 대해서는 듣지 못했을 것이고 그래서 자연히 기록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마태는 현장에 함께 있었으므로 당연히 이 부분을 기록했을 것이다.


 


[ II. 표현상의 차이를 고려해야 한다 ]


우리는 각 저자들 사이의 표현상의 차이를 고려해야 한다. 사실상 대부분의 차이들은 동일한 뜻을 가진 각각 다른 단어들의 선택이거나 순서상의 차이, 시상의 차이, 문장 구성의 차이 등에 해당한다. 이 외에도 우리의 주목을 끄는 의미 있는 차이들이 간혹 있다.


 


예를 들면 산상보훈의 말씀 중에서, 마태복음은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라”(5:40)고 한 데 비해, 누가복음은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금하지 말라”(6:29)고 하였다.


 


왜 이처럼 ‘속옷’과 ‘겉옷’의 순서가 서로 뒤바뀌어 있는 것일까? 그 이유에 대해서는 성경이 침묵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다음과 같이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다. 우선 마태는 옷의 값이 ‘싼 것’에서부터 ‘비싼 것’의 순서로 말하고 있다. ‘속옷’은 하찮은 것이고 값이 얼마 되지 않은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이처럼 하찮은 ‘속옷’을 교묘한 방법으로 빼앗아 가려고 하거든 그보다 훨씬 비싸고 좋은 ‘겉옷’(속옷 위에 걸치는 외투)까지도 아까워하지 말고 주라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외투’의 가치와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마태가 기록한 이 말씀의 의미를 충분히 파악했을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도 아마 이러한 순서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유대인으로서 유대 지역에서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가가 기록할 때에는 사정이 달랐다. 그는 ‘데오빌로 각하’에게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써서 바쳤는데, 데오빌로는 대개 유대 지역 바깥에 살았던 이방인 회심자로 생각되고 있다. 그래서 그런 이방인에게는 이러한 ‘겉옷’의 중요성과 가치가 빨리 이해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누가는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를 유지하면서 독자가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속옷과 겉옷의 ‘순서’를 바꾼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곧 ‘겉옷’을 달라고 하는 자에게는 네 몸에 밀착되어 있는 은밀한 ‘속옷’까지도 기꺼이 벗어 주라는 것이다. 곧 누가는 마태가 말하는 ‘가치상의 심화’를 ‘감정상의 심화’로 바꾸어서 말하고 있다. 이 둘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동일하나 단지 독자에 따라 그 표현하는 방식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서의 저자들에게 이 정도의 표현의 자유는 허락하셨으며, 이를 통해 복음의 내용이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에게 더 잘 전달되도록 하셨다고 생각된다.


 


그 외에도 단순한 표현상의 자유로 볼 수 있는 것들은 매우 많다. 예를 들어 씨 뿌리는 자의 비유 중 가시떨기에 뿌리운 경우를 설명할 때, 마태는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13:22)이라고 말하고, 마가는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과 기타 욕심’(4:19)이라고 말하며, 누가는 ‘이생의 염려와 재리와 일락’(8:14)이라고 말하고 있다. 원어로 살펴볼 때 마태와 마가의 기록은 마가가 ‘기타 욕심’을 더 가지고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거의 동일하나, 누가의 기록은 단어 선택과 문장 구성에 있어서 제법 차이가 난다. 그러나 전체적인 의미를 살펴볼 때 이 셋은 다 동일한 내용을 표현하고 있다. 즉 예수님이 전달하고자 하신 의도를 나타냄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이 세 저자들로 하여금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의 의도를 각각 조금씩 다르게 표현하도록 허락하셨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다양한 표현을 통해 예수님의 의도가 더욱 풍부하게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문제에 대해 우리가 다르게 접근할 수 있는 길도 있다. 그것은 곧 예수님께서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여러 번 말씀하셨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상황에 따라 예수님 자신이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 대해 조금씩 다르게 설명하셨다고 볼 수도 있다. 우리는 이 가능성을 충분히 인정하지만, 이 설명보다는 앞의 설명을 더 선호한다. 왜냐하면 복음서에는 단 한 번 있은 사건에 대해서도 각 복음서 사이에 조금씩 다르게 표현되어 있는 경우를 많이 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갈릴리 바다에서 큰 풍랑을 만났을 때 제자들이 예수님께 찾아가서 한 말을 기록함에 있어서, 마태는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8:25)라고 한 반면 마가는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4:38)라고 말하고 있다. 이런 경우에 우리는 제자들이 두 번 말했다고 볼 수는 없다.


 


따라서 우리는 성령 하나님께서 각 저자들에게 표현의 다양성을 허락하셨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제자들이 그 때 ‘정확하게’ 어떻게 말했는가 하는 것은 우리가 알 수 없지만, 그것을 ‘내용의 동일성’의 범위 내에서 ‘다양하게 표현’하는 것은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의 성격에 부합한다. 성경은 의미 없는 것들을 기계적으로 정확하게 수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내용을 다양하게 표현하게 하심으로 우리의 이해의 폭을 넓히며 생각을 풍부하게 한다고 볼 수 있다.


 


[ III. 생략과 자세한 설명의 차이를 고려해야 한다 ]


백부장의 믿음에 대해 말해 주고 있는 본문을 읽어보면, 마태의 기록과 누가의 기록 사이에 차이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단순한 어휘나 표현상의 차이가 아니라 예수님을 찾아간 사람이 누구냐에 있어서 실질적인 차이가 있다. 마태복음 8장에서는 ‘백부장’이 예수님께 나아와 간구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5,8절), 누가복음 7장에서는 백부장이 ‘유대의 장로’ 몇 명을 보내어 간구하게 하고(3절) 또 예수님께서 가까이 오셨을 때에는 백부장이 ‘그의 친구들’을 보내어 자기 집에 들어오지 말아 달라고 탄원한 것으로 되어 있다(6절). 그러면 이 두 상이한 기록 중에 어느 것이 옳은 것일까? 그러나 우리는 이 두 기록 중에서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이 그르다는 식의 양자택일을 하면 안 된다. 그렇게 하는 것은 결국 성경의 한 부분을 부정하는 결과가 되고 만다.


 


그러나 이 백부장 사건은 조금만 생각해 보면 그 해결이 어렵지 않다. 예수님께 직접 나아간 사람은 누가가 말해 주고 있는 대로 ‘유대의 장로들’과 ‘그의 친구들’이었다. 누가는 경우에 따라 사건의 경과를 ‘자세히’ 말해 주기도 한다. 그러나 마태는 여기서 누가 나아갔든지 간에 백부장이 보내어서 간 것이니 만큼 ‘백부장’이 나아갔다고 말한 것이다. 다른 사람을 시켜서 보내었을 때에는 자기 자신이 간 것과 동일하다는 것은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바이다. 이처럼 우리는 중간 과정을 생략하고 간단히 말하는 경우와 그 과정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 경우를 생각해야 한다.


 


다른 예를 하나 더 들어보자. 세례 요한이 무리들에게 한 설교를 기록함에 있어서도 사복음서는 각각 다르게 기록해 주고 있다. 우선 마가는 간단하게 요한의 중심 메시지만 기록하고 있다(1:7,8). 마태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것을 포함해서 좀 더 기록해 주고 있다(3:7∼12). 이에 비해 누가는 각각의 사람들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더욱 자세하게 기록해 주고 있다(3:7∼17). 한편 사도 요한은 공관복음에 기록되지 않은 것들에 대해 보충적으로 자세히 기록해 주고 있다(1:19∼34). 이처럼 각 복음서 저자는 그 기록 목적과 자신의 판단에 따라 어떤 부분은 과감하게 생략하고 어떤 부분은 자세하게 설명해 주고 있는데, 이에 따라 복음서들 상호간에 차이점이 발생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 IV. 강조점의 차이를 생각해야 한다 ]


그러나 우리는 좀더 어려운 경우에 직면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거라사(또는 가다라)의 군대 귀신 들린 자의 경우 마가복음(5:1∼20)에는 ‘한 사람’으로 되어 있고 마태복음(8:28∼34)에는 ‘두 사람’으로 되어 있다. 한 사람이냐 두 사람이냐 하는 것은 표면상 분명히 모순되는 것이며 상호배제하는 성격의 것이기 때문에 독자들로 하여금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이런 경우에 우리는 어떻게 설명하여야 할 것인가?


 


우선 우리는 거라사(가다라)의 군대 귀신 들린 사람의 숫자를 따진다면 마태가 기록한 대로 ‘두 사람’이 옳다고 봐야 한다. 왜냐하면 원래 ‘두 사람’이었는데 경우에 따라 ‘한 사람’인 것처럼 기록된 것은 설명 가능한 것이지만, 원래 ‘한 사람’뿐이었는데 ‘두 사람’으로 기록되었다는 것은 설명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마태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의 한 사람으로 그 사건 현장에 있었으며 그 모든 상황을 목격하였다. 따라서 그가 귀신 들린 자는 ‘두 사람’이었다고 말했을 때 그것은 정확한 것이며 조금의 오류도 없다. 그러나 마가복음의 경우는 다르다. 물론 기록의 진실성과 정확성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않지만, 그 기록 과정에 대해서는 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마가는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그 들은 대로 기록하였다. 그런데 베드로가 이 사건에 대해 설교할 때, 물론 베드로 자신은 그 귀신 들린 자가 ‘두 사람’이었다는 것은 분명히 알고 있었지만, 그 숫자가 한 사람이냐 두 사람이냐 하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또한 예수님과 주로 대화한 사람은 그 둘 중 ‘한 사람’이었을 것이기 때문에 그 한 사람에 초점을 두고 이야기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마가는 그 들은 대로 기록할 때에 거라사의 귀신 들린 자가 ‘한 사람’인 것처럼 기록했을 수 있다. 물론 우리는, 베드로는 분명히 ‘두 사람’이라고 설교했고 마가도 그렇게 들었지만, 마가가 이 사건을 기록할 때 그 숫자는 중요하지 않다고 보고 그 중에서 핵심 역할을 한 ‘한 사람’을 중심으로 기록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경우는 예수님의 무덤에 나타난 천사가 ‘한 명’인가 ‘두 명’인가 하는 문제에도 해당된다. 마태복음(28:2,5)은 ‘한 천사’가 나타나 무덤 앞의 돌을 굴렸다고 한다. 그리고 마가복음(16:5)도 여자들이 무덤 안에 들어갔을 때 “흰옷을 입은 한 청년이 우편에 앉은 것을 보았다”고 한다.


 


그러나 누가복음(24:4)과 요한복음(20:12)은 분명히 천사 ‘두 명’이 나타났다고 한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가? 이 두 기록 사이의 명백한 차이를 우리는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 얼핏 보기에 그것은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며,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여기에 명백한 불일치가 존재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성급한 판단을 내리기 전에 본문을 자세히 읽어볼 필요가 있다.


 


이 경우에도 예수님의 무덤에 나타난 천사의 숫자는 ‘두 명’이 맞다고 보아야 한다. 우선 요한은 무덤 안에 나타난 두 천사가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다고 말한다(20:12). 그러나 마태는 그 나타난 천사의 수가 한 명이냐 두 명이냐에 대해 초점을 맞추지 아니하고 무덤 입구의 돌을 굴려 낸 자가 ‘사람’이 아니라 ‘천사’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그냥 ‘주의 천사’가 돌을 굴려 내었다고 말한다(28:2). 그리고 여자들에게 말한 천사에 대해서도 몇 명이냐에 대해 초점을 두지 않고 ‘천사’라는 존재가 말했다는 사실에 초점을 두기 위해 그냥 ‘그 천사’가 말했다고 한다(28:5). 따라서 마태복음에서의 단수는 하나, 둘을 나타내는 ‘숫적(數的, numerical) 단수’가 아니라 천사라는 존재를 나타내는 ‘종적(種的, generic) 단수’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역사가의 입장에서 자기 앞의 여러 기록들(또는 이야기들)을 살핀 누가는 이에 대해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여자들) 곁에 섰다”고 기록해 준다(24:4). 그런데 마가는 여자들이 무덤에 들어가서 “흰옷을 입은 한 청년이 우편에 앉은 것을 보았다”고 한다(16:5). 이것은 누가나 요한의 기록과 또다시 충돌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마가는 여자들이 무덤에 들어가서 본 청년들(천사들)의 총 수가 한 명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편에’ 앉은 한 천사를 보았다고 말한다. 이것은 곧 다른 편에 또 한 천사가 앉아 있었는데, 여자들이 무덤에 들어가서 처음에 본 천사는 우편에 앉은 천사라는 의미이다. 베드로는 여자들의 말을 듣고 요한과 함께 달려가서 무덤에 들어가 보았기 때문에 (비록 그 때에는 천사들이 사라졌겠지만) 무덤 안의 상황을 생생하게 기억했을 것이며,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설교할 때에도 무덤 안의 상황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덧붙였을 것이다. 이 때문에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기록한 마가는 무덤 안의 상황에 대해 비교적 자세하게 묘사할 수 있었을 것이다.


 


[ V. 한 사건을 다른 관점에서 설명한 경우도 있다 ]


복음서들에 기록된 사건들 가운데에는 동일한 사건을 각각 다른 관점에서 기록한 것들도 있다. 그래서 얼핏 보면 각각 다른 사건들인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동일한 사건에 대한 서로 다른 기록들인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안드레,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신 사건은 마태복음 4장(18∼22절)과 마가복음 1장(16∼20절)과 누가복음 5장(1∼11절)에 각각 기록되어 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의 기록은 거의 같기 때문에 동일한 사건임을 금방 알 수 있다. 그러나 누가복음의 기록은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상당히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즉, 마태와 마가에는 나타나지 않는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는 예수님의 말씀과, 베드로가 주의 말씀에 의지하여 순종하였더니 심히 많은 고기를 잡게 되었다는 것과, 이에 베드로가 예수님 앞에 엎드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한 것 등이 누가복음에는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두 사건 다 갈릴리 바닷가에서 일어난 사건이며, 베드로와 안드레와 야고보와 요한을 제자로 부르신 사건이며(누가복음에는 안드레의 이름이 나타나 있지 않지만 베드로와 함께 고기를 잡고 있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9절 참조),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누가의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는 말씀은 동일한 말씀으로 생각된다)는 말씀 등에 비추어 볼 때 이 두 사건은 동일한 사건으로 생각된다. 물론 주석가들 중에는 이것을 각각 다른 사건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으며 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동일한 장소에서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는 예수님의 부르심이 두 번 있었다고 보는 것은 아무래도 부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래서 우리는 이 기록들을 동일한 사건에 대한 각각 다른 기록으로 보는 것이 더 옳다고 생각한다. 곧 마태와 마가는 네 제자들을 부르셨다는 ‘사실 자체’에 초점을 두고 간단히 기록한 반면, 누가는 그 부르심의 ‘과정’을 자세히 기록해 주고 있다. 이처럼 각 기록자의 ‘기록 관점’에 따라 동일한 사건에 대해서도 약간씩 다른 기록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많은 사람들은, 그러면 요한복음 1장 35∼42절의 기록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을 제기하곤 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 안드레와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난 사건은 그들이 예수님을 만난 ‘첫 만남’을 기록한 것이며 아직 ‘제자’로 부르신 것은 아니다. 곧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안드레를 제자로 부르시기 전에, 그들은 예수님을 만나서 함께 지내는 시간을 가졌던 것이다. 이처럼 사전 준비가 있은 후에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을 부르셨을 때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좇았던 것이다.


 


[ VI. 다른 관습이나 방식을 따른 경우도 있다 ]


또 우리가 많이 접하는 문제 중의 하나는 왜 마태복음의 족보(1:1∼17)와 누가복음의 족보(3:23∼38)가 서로 다른가 하는 것이다. 물론 마태복음은 아브라함에서부터 시작하여 예수님에게로 내려오는 방식을 취하고 있고, 누가복음은 이와 반대로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으로부터 시작하여 아담을 거쳐 하나님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방식을 취한다는 뚜렷한 차이가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분명한 방식의 차이 외에 그 족보의 이름들 중에 서로 다른 이름들이 상당히 많이 나오고 있다는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에서는 “다윗 -> 솔로몬 -> 르호보암” 등의 계보로 이어지지만, 누가복음에서는 “맛다다 -> 나단 -> 다윗”으로 이어진다. 내려오는 방식이냐 올라가는 방식이냐의 차이 외에도 “다윗 -> 솔로몬”이냐 “나단 -> 다윗(즉 다윗 -> 나단)”이냐의 뚜렷한 차이가 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바로 위 조상들 가운데에도 차이가 있다. 곧 마태복음에서는 “엘르아살 -> 맛단 -> 야곱 -> 요셉 -> 예수”로 이어지는 반면, 누가복음에서는 “예수 -> 요셉 -> 헬리 -> 맛닷 -> 레위”로 이어진다. 곧 마태복음에는 요셉의 아버지가 ‘야곱’으로 되어 있는 반면 누가복음에는 ‘헬리’로 되어 있다.


 


이러한 어려운 문제점에 대해서는 예로부터 여러 가지 해결책이 시도되어 왔다(예를 들면 Eusebius, Hist. Eccl. I,7에 기록되어 있는 Africanus의 설명). 이에 대해 우리가 지금 여기서 논할 여유가 없다. 일반적으로 교회 안에 많이 알려져 있는 해결책은 마태는 ‘요셉의 족보’를 기록하고 있고 누가는 ‘마리아의 족보’를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견해는 그 근거로 누가복음의 “사람들의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라는 표현을 든다. 곧 예수님은 ‘그 당시 사람들이 알고 있는 일반적인 견해로는’ 요셉의 아들이었지만 ‘사실은’ 성령으로 잉태하여 태어난 ‘마리아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요셉의 이상은 헬리요”에서 ‘헬리’는 마리아의 아버지라고 보는 것이다(cf. S. Greijdanus, Heilige geschiedenis volgens de vier evangelieverhalen, Goes, 1951, p.145f.). 이러한 견해는 물론 가능한 하나의 해결책이며 마태와 누가의 족보 사이의 차이점을 쉽게 설명해 준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의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이상은 헬리요…”라는 문장에서 “그[요셉의] 이상은 헬리요”라는 표현은 아무래도 요셉의 아버지를 가리킨다고 생각되며 마리아의 아버지를 가리킨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원어의 구성상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을 요셉 한 사람에게만 제한하는 것도 어렵고 “…사실은 누구의 아들이다”는 의미로 보는 것도 지나친 주입적 해석이라는 인상이 든다.


 


그래서 문제는 더욱 복잡하게 된다. 요아킴 예레미야스(Joachim Jeremias)와 같은 비평학자들이야 누가복음의 족보가 옳고 마태복음의 족보는 틀렸다는 식으로 쉽게 말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볼 수 없다. 우리는 두 족보가 다 옳다고 본다. 그러면 왜 이러한 차이점들이 생기게 되었는가? 여기에는 여러 가지 요인들이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된다. 그 중요한 한 예는 소위 ‘형사취수혼’(兄死娶嫂婚)의 경우이다. 이것은 구약 시대에 어떤 가정에 형(또는 동생)이 아내를 취하였으나 아들이 없이 죽었을 때에 그의 동생이 형수를 취하여 아들을 낳아 그 형의 가계를 잇도록 하는 제도를 말한다(신 25:5∼10). 따라서 이러한 경우가 발생하면 동생과 형수 사이에 태어나는 첫 아들은 ‘자연적으로는’ 동생의 아들이지만 ‘법적으로는’ 형의 아들이 된다. 이 경우에 족보 기록자가 어느 방식을 따르느냐에 따라 형의 아들로 기록할 수도 있고 동생의 아들로 기록할 수도 있다.


 


그 외에도 족보 기록에는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가 뒤따른다. 예를 들어 구약의 족장들 중에서 야곱의 열 두 아들 중 장자는 르우벤이었지만, 그는 장자의 자격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런 경우에 족보 기록에 어려운 문제가 있음을 역대기 저자도 인식하고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르우벤은 장자라도 그 아비의 침상을 더럽게 하였으므로 장자의 명분이 이스라엘의 아들 요셉에게로 돌아갔으나 족보에는 장자의 명분대로 기록할 것이 아니니라. 유다는 형제보다 뛰어나고 주권자가 유다로 말미암아 났을지라도 장자의 명분은 요셉에게 있느니라”(대상 5:1,2). 그러나 마태와 누가는 모두 ‘유다’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보아 그들은 역대기 기자처럼 ‘장자의 족보’를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메시야의 족보’를 기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외에도 족보 기록에는 여러 가지 복잡한 요인들이 영향을 미치는데, 너무 복잡하므로 여기서 중단해야만 하겠다. 단지 우리가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처럼 ‘기록 방식’ 또는 ‘기록 원리’의 차이에 따라 차이가 생길 수 있다는 점이다(마태와 누가의 족보 사이의 복잡한 관계에 대한 하나의 가능한 해결책으로는 J. van Bruggen 교수의 Christus op aarde, Kampen, 1987, p.103에 있는 도표를 참조).


 


[ VII. 서로 다른 사건인 경우도 있다 ]


복음서에는 동일한 사건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서로 다른 사건인 경우가 있다. 그 대표적인 예는 오병이어의 이적과 칠병이어의 이적이다. 오병이어의 이적은 사복음서 모두에 기록되어 있는데(마 14:13∼21, 막 6:30∼44, 눅 9:10∼17, 요 6:1∼15), 마태복음(15:32∼39)과 마가복음(8:1∼10)에는 떡 일곱 개와 작은 생선 두어 마리로 사천 명의 무리를 먹이신 사건이 또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왜 비슷한 사건이 두 번 기록되어 있을까? 혹시 와전된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을 가진다.


 


그러나 본문을 자세히 읽어보면 이 두 사건은 서로 다른 사건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먹은 사람의 숫자도 (성인 남자만 쳐서) 각각 ‘오천 명’과 ‘사천 명’으로 다르며, 배불리 남은 것을 거둔 양도 ‘열두 바구니’와 ‘일곱 광주리’로 서로 다르다. ‘광주리’(spuris)는 ‘바구니’(kophinos)보다 큰 것으로 아마도 일곱 광주리의 양이 열두 바구니의 양보다 더 많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적에 사용된 ‘떡’도 다섯 개와 일곱 개로 다르며, 또한 ‘물고기’(ichthus) 두 마리와 ‘작은 생선’(ichthudion) 두어 마리(원어: 몇 마리)도 서로 다르다. 뿐만 아니라 이적을 행하고 나서 떠나가신 장소도 다르다. 오병이어의 이적을 행하신 후에 예수님께서는 ‘게네사렛’ 땅으로 가셨으나(마 14:34), 칠병이어의 이적을 행하신 후에는 ‘마가단’ 지방(마 15:39)으로 가셨다. 마가복음(8:10)에는 ‘달마누다’ 지방으로 가셨다고 했는데, 이 두 지역은 같은 곳을 일컫는 것으로 생각된다(오병이어와 칠병이어의 차이점에 대해서는 「그말씀」 2001년 4월호를 참조).


 


이 두 사건이 서로 다른 사건이라는 것은 그 후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주고받은 다음 대화에 분명히 나타나 있다. “내가 떡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바구니를 거두었더냐? 가로되 열 둘이니이다. 또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광주리를 거두었더냐? 가로되 일곱이니이다.”(막 8:19,20)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비슷한 이적을 두 번 행하신 것이 분명하다. 이처럼 비슷한 이적을 반복하신 것은 예수님께서 물질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제자들은(우리도 마찬가지다) 믿음이 없어서 예수님의 이적을 보고도 잘 잊어버리기 때문에 반복적인 교육이 필요했다고 생각된다.


 


이와 비슷한 성격의 것으로 또한 ‘성전 청결 사건’을 들 수 있다. 공관복음에는 이 사건이 예수님의 공생애 말기에 위치하고 있는 데(마 21:12∼13, 막 11:15∼18, 눅 19:45∼46) 비해, 요한복음에는 공생애 초기에 나타난다(요 2:13∼22).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요한복음의 성전 청결 사건 기록은 제 자리를 찾지 못하고 너무 빨리 나온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본문을 자세히 읽어보면 이 두 사건은 서로 다른 사건임을 알 수 있다. 두 사건 모두 예수님께서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을 엎으신 행동에서는 일치하지만, 이 때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공관복음에서는 모두 다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라는 말씀을 중심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요한복음에는 그런 말씀이 없다.


 


요한복음에서는 단지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고 하셨다. 물론 이 말씀의 배후에는 성전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는 생각이 들어 있다고 할 수 있지만, 예수님의 이 말씀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은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였다”(요 2:17)는 것이었다. 그래서 공관복음에서는 이사야 56장 7절이 그 배후에 있지만, 요한복음에서는 시편 69편 9절이 그 배후에 있다. 즉, 공생애 초기에 행하신 성전 청결 사건에서는 ‘주의 전을 사모하는 예수님의 열심’이 중심 주제이지만, 공생애 마지막에 행하신 성전 청결 사건에서는 주의 전을 강도의 굴혈로 만든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 대한 격렬한 분노’가 나타나 있다. 그래서 이 사건은 곧 그들로 하여금 예수님 죽이기를 도모하는 것으로 이어지게 되었다(막 11:18).


 


그러나 공생애 초기에 행하신 성전 청결 사건에서는 아직 이러한 단계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그 때에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에게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고 묻는 정도였다(요 2:18). 이것은 요한복음의 이 사건이 아직 공생애 초기의 사건임을 말해 준다. 뿐만 아니라 요한복음 2장에 기록된 성전 청결 사건에서는 공관복음에는 나타나지 않는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더 큰 무게가 실려 있다. 곧 예수님은 돌로 지은 헤롯 성전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인데(21절), 이로써 예수님은 자기의 죽음과 부활을 예언하셨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을 기억하고 믿었다는 사실에 강조점이 있다(22절).


 


하나 더 지적하자면, 무리들이 예수님을 고소하여 증거할 때에 그가 이 성전을 헐고 사흘만에 다시 짓겠다고 하더라고 하였으나 이 증거도 서로 합하지 아니하였다고 한다(막 14:57∼59). 이 사실은 곧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지 제법 시간이 흘렀음을 시사한다. 만일 이 말씀이 공생애의 마지막 때에 하신 것이라면 그것을 분명히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상의 여러 사실들을 종합해 볼 때 공관복음의 성전 청결 사건과 요한복음의 성전 청결 사건은 서로 다른 사건임이 분명하며, 성전 청결은 적어도 두 번 이상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VIII. 각각 다르게 요약한 경우도 있다 ]


다음으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각 복음서 저자들이 어떤 사건이나 말씀을 각각 다르게 요약한 경우이다. 예를 들면 예수님이 전파한 메시지에 대해 마태와 마가는 조금씩 다르게 기록하고 있다. 곧 마태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 4:17)고 기록하고 있으나, 마가는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고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두 기록 사이에 차이가 나는 이유는 마태와 마가는 예수님의 메시지의 핵심을 각각 다르게 요약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비슷한 경우로 우리는 예수님의 ‘산상보훈’을 생각할 수 있다. 우리는 이에 대한 마태복음의 기록(마 5∼7장)과 누가복음의 기록(눅 6:20∼49) 사이에 제법 차이가 있음을 알고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쉽사리 ‘산상설교’와 ‘평지설교’로 나누어서 말한다. 그래서 ‘산상설교’에서는 이러하지만 ‘평지설교’에서는 저러하다는 식으로 이원화해서 설명한다. 예를 들면 산상설교에서는 ‘영적으로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지만, 평지설교에서는 ‘문자적으로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다는 식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성경의 통일성을 파괴하고 예수님께서 한 입으로 정반대 되는 두 말을 하셨다고 주장하는 것이 되고 만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해결을 반대하고 마태복음의 산상보훈과 누가복음의 산상보훈은 예수님께서 각각 다른 기회에 하신 다른 말씀이라고 보기도 한다. 즉 비슷한 내용의 말씀을 두 번 하셨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며 가능한 해결책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두 본문을 자세히 살펴볼 때 이것들은 각각 다른 기회에 하신 말씀이라고 보기에 주저되는 점들이 많이 있음을 느끼게 된다. 둘 다 “복이 있나니”로 시작하고 있으며, 받을 것을 생각하지 않고 주라는 절대적인 사랑의 강조와, 마지막으로 형식적인 믿음이 아니라 행하는 믿음에 대한 강조와 홍수 비유로 끝나는 점 등에서 상당한 일치점이 있다.


 


따라서 우리는 제 3의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곧 이 두 기록은 동일한 사건에 대한 각각 다른 기록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즉 마태와 누가는 예수님의 산상설교를 각각 나름대로 요약해 주고 있다는 것이다. 먼저 우리는 마태복음의 산상보훈 기록도 예수님이 하신 산상설교를 하나도 빠짐 없이 그대로 다 기록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만일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7장에 기록된 그대로, 토씨 하나도 다르지 않게 설교하셨다면 그 소요된 시간은 20분도 채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산상설교가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제법 긴 시간 동안 행해졌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마 두 시간 이상은 되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아무리 짧게 잡아도 한 시간은 더 걸리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그렇다면 마태복음에 기록된 것은 그 설교에 대한 요약이라고 볼 수 있다. 요약의 방법에는 생략과 압축, 유사한 것들의 병합, 재배치 등 여러 방법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누가는 그 자신이 서두에서 밝힌 것처럼 여러 기록 또는 이야기들을 자세히 살펴서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마태복음 5∼7장에 기록되지 아니한 내용들도 많이 알고 있었을 것이며, 그 모든 것들을 가지고 기록할 때 자기 나름대로 압축하고 요약하였을 것이다. 그 결과 우리는 동일한 산상설교에 대해 서로 다른 두 기록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두 기록은 동일한 예수님의 설교에 대한 요약들이기 때문에 그 내용에 있어서 완전한 일치성을 가지고 있다. 비록 표현과 배치와 강조점에 있어서 차이가 있을지라도 그 내용과 사상에 있어서는 동일성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그 둘은 다 한 예수님에게서 나온 진리의 말씀들이기 때문이다.


 


[ IX. 사본상의 차이인 경우도 있다 ]


여태까지 설명한 것들 외에 사본상의 차이로 인하여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도 있다. 그 대표적인 예로 우리는 ‘주기도문’을 들 수 있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마태복음의 주기도문(6:9∼13)에 비해 누가복음의 주기도문(11:2∼4)이 짧다는 것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이 사실에 대해 사람들은 대개 한편으로는 의아해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냥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이고 있다. 물론 누가가 꼭 마태복음의 주기도문과 똑같이 기록할 필요는 없으며 나름대로 요약할 수도 있고 다르게 표현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이 가능성을 충분히 인정한다. 그러나 주기도문은 제자들이 기도할 때 늘 사용하라고 주신 ‘의식문’(formula)인데, 이것마저 이렇게 상당한 차이가 나야 하는 것일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의외로 사본상의 문제에서 찾을 수 있다. 곧 누가도 사실은 마태의 주기도문과 거의 같은 주기도문을 가지고 있는데, 현재의 사본학자들이 성경(헬라어 신약)을 편집할 때 그런 본문을 가진 사본들의 증거를 채택하지 아니하고, 아주 간단한 본문을 가지고 있는 지극히 적은 숫자의 사본들의 증거를 채택했기 때문에 마태와 누가의 본문 사이에 차이가 발생하게 된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마태복음에서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시작하고 있다. 그런데 개역판 성경의 누가복음에는 그냥 “아버지여”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가 사본들을 잘 살펴볼 것 같으면 압도적인 대다수 사본들이 누가복음에서도 마태복음에서와 똑같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를 본문으로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총 5,400여 개의 헬라어 사본들 중에서 “아버지여”를 가지고 있는 것은 여섯 개밖에 없으며, “우리 아버지여”를 가지고 있는 것은 단 하나밖에 없다. 나머지들은 모두 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를 가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 마지막 본문은 대부분의 고대 역본들에 의해서도 광범위하게 지지받고 있다.


 


그러면 왜 현재의 사본학자들(네슬레-알란트 26/27판 편집자들과 UBS 3/4판 편집자들)이 대다수 사본들의 증거를 배척하고 그런 극소수 사본들의 증거를 본문으로 채택했을까? 시내산 사본과 바티칸 사본이 극히 우수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일까? 그러나 그러한 판단은 19세기말의 웨스트코트-홀트의 주관적인 편견에 불과하며 아무런 외적 증거도 없다. 이들 사본들에 대해서는 전부터 많은 의문과 문제점이 제기되어 왔다. 그러나 웨스트코트-홀트가 이들 사본들, 그 중에서도 특히 바티칸 사본을 편애하도록 만든 더 중요하고 핵심적인 이유는 소위 그들이 ‘내적 증거’(internal evidence)라고 부른 증명되지 않은 원리에 있다. 곧 어떤 구절에 서로 다른 사본상의 독법(reading)들이 발견될 때에, 다른 곳에서 발견되는 독법과 동일한 독법은 후대의 필사자들이 서로 조화시키기 위해 수정한 것(conflation 또는 assimilation이라고 부른다)이기 때문에 원본의 본문이 아니라고 배제하는 원리를 말한다.


 


이 원리에 따르면 누가복음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는 마태복음의 그것과 동일하게 만들기 위해 후대의 필사자들이 수정한 것이기 때문에 원본의 것으로 볼 수 없으며, 따라서 비록 극소수 사본들의 지지를 받고 있기는 하지만 마태복음의 그것과 다른 “아버지여”를 원본의 본문으로 보아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이러한 ‘어려운 독법’(lectio difficilior) 우선의 원칙은 현대 사본학계를 지배하는 원리로서 현재 널리 보급되고 있는 네슬레-알란트 판과 UBS 판의 주요 편집 원리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러한 원리에 의해 편집된 원어 성경은 어떠한 모습을 띠게 될까? 복음서 사이에 서로 조화되는 본문들은 후대의 수정으로 배제해 버리고, 가능하면 서로 다르고 충돌되는 본문들을 가진 것들만 원본의 것으로 인정받아 본문으로 채택되게 된다. 그 결과 우리는 가능한 한 서로 다르고 충돌되는 본문들을 가진 원어 성경을 가지게 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네슬레-알란트 판이다(UBS 판도 동일하다). 그 결과로 우리는 오늘날 서로 다른 주기도문을 가지게 된 것이다. 거의 모든 사본들은 (거의) 동일한 주기도문을 가지고 있는데도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현대 사본학의 원리는 원본은 가능한 한 서로 조화되지 않다고 보는 소위 ‘원본부조화가설’에 기인한다. 예를 들면 웨스트코트-홀트의 사본학 이론에 중요한 근거를 제공한 그리스바흐(J. J. Griesbach, 1745∼1812)는 어떤 독법이 “불확실하고 거칠고 부연설명하고 이상하고 역설적이고 불경건하게 들리고 오류적일 경우”에는 그 독법을 채택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결국 성경 원본에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것으로 성경 영감의 사실에 정면으로 배치된다. 이처럼 현대 사본학의 원리는 대개 성경 영감을 믿지 않는 비평학자들이 만든 것으로 가능한 한 본문들을 서로 충돌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고 만다.


 


물론 우리는 복음서들 사이에 무조건 문자적으로 일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앞에서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복음서 저자들은 각각 다르게 요약할 수도 있고 다르게 표현할 수도 있다. 그래서 다양성과 차이점이 발생할 수 있다. 우리는 이것을 충분히 인정한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현대 사본학자들의 비평적인 편집 원리에 의해 불필요하게 서로 다르거나 충돌되도록 편집된 본문들도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자 하는 것이다. 주기도문 외에도 마가복음 13장 33절에서 거의 모든 사본이 가지고 있는 “깨어 있어 기도하라” 대신에 불과 세 개의 헬라어 사본만 지지하는 “깨어 있으라”를 택한 것이라든지(cf. 눅 21:36), 마태복음 19장 29절에서 단 하나의 헬라어 사본(바티칸 사본)을 따라 ‘부모나’ 다음에 ‘아내나’를 빼버린 것 등 그러한 예는 매우 많다(현대 사본학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필자가 [개혁신학과 교회] 제 6호(1996년)와 제 4호(1994년)에 각각 기고한 글을 참조).


 


[ XI. 우리가 풀기 어려운 문제도 있다 ]


이상에서 우리는 몇 가지 경우들에 대한 해결책을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이 외에도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경우들은 많이 있으며, 그 중에는 우리가 풀기 어려운 문제들도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27장에는 스가랴서에서 취했다고 생각되는 인용이 나온다. “이에 예레미야로 하신 말씀이 이루었나니 일렀으되, 저희가 그 정가(定價)된 자 곧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정가한 자의 가격 곧 은 삼십을 가지고 토기장이의 밭 값으로 주었으니 이는 주께서 내게 명하신 바와 같으니라”(마 27:9,10). 이 인용 본문은 구약의 스가랴서(11:13)에 나온다고 생각되는데, 마태는 예레미야가 말했다고 한다. 어떻게 된 것일까? 이런 경우에 사람들은 ‘마태의 실수’라고 말하기 쉽다. 여기서 마태는 스가랴서에 나오는 본문을 예레미야의 것으로 착각했으며, 따라서 이것은 ‘명백한 실수’에 해당한다고 말하기 쉽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말하면 안 된다. 왜냐하면 그렇다면 이것은 단지 ‘마태의 실수’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오류’로 귀착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경은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기 때문에 그러한 견해를 받아들일 수 없다. 성령께서는 마태로 하여금 그러한 실수를 하도록 허락하시지 않았을 것이며, 그러한 것이 성경에 들어오도록 역사하셨다고 볼 수도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문제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몇 가지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다. 첫째로,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의 정경들 중에는 선지서들의 제일 앞에 예레미야서가 나오는 것이 있었으며, 그래서 그 선지서들은 ‘예레미야’로 불리웠다는 것이다. 마치 시편에는 여러 저자들의 시편이 들어 있지만 그 대표자인 ‘다윗’의 시편으로 불리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리고 구약 성경은 ‘율법’과 ‘선지자’와 ‘시편’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종종 ‘율법’으로써 전체를 지칭하는 경우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둘째로, 마태는 지금 여기서 정경이 아닌 외경 예레미야서를 인용하고 있다고 보는 견해이다. 외경 예레미야서에 이러한 구절이 나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마태가 정경을 두고서 외경을 인용했다는 것도 믿기 어렵거니와, 그 외경의 기록이 오히려 마태의 이 부분을 사용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볼 수도 있다. 셋째로, 마태는 머릿속에 예레미야서의 여러 구절들(18:2∼15, 19:1∼15, 32:6∼9)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 구절들에서 시작하여 실제로 쓸 때에는 스가랴의 말들을 가지고 적었다고 보는 견해이다.


 


흐로쉐이드는 이 마지막 견해가 제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F. W. Grosheide, Mattheus, Amsterdam, 1922, p.339f.). 왜냐하면 마태는 다른 곳에서도 여러 예언들을 종합하는 경우가 있을 뿐만 아니라(마 11:5), 마태복음 27장의 인용은 스가랴 11장의 말씀과 상당히 다르기 때문이다. 이것은 히브리어 본문과도 다르고 칠십인역과도 상당한 차이가 난다. 따라서 꼭 스가랴서에서 인용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마태는 다른 곳에서는 히브리어 본문과 칠십인역 본문을 잘 알고 있으며 매우 주의 깊게 구약을 인용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볼 때, 여기서 상당한 차이가 난다는 것은 아무래도 스가랴서의 본문을 인용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려운 것이다. 그렇다면 마태는 아마도 ‘토기장이’에 대해 많이 말하고 있는 예레미야서의 여러 본문들과 스가랴의 본문을 종합적으로 인용하고 있으며, 그래서 그 대표자의 이름인 예레미야를 언급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우리는 이 마지막 해결책이 가능성이 높다고 보지만 다른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다른 해결책이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단지 그것을 알지 못할 따름이다. 또는 그것을 알 수 있는 자료들을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지 않을 따름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며 조금의 오류와 실수도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고대 교회가 마태의 이 기록에 대해 아무런 이의도 제기하지 않고 그대로 다 받아들였다는 사실도 중요하다. 만일 문제가 있었다면 고대 교회가 이에 대해 분명히 이의를 제기하였을 것이다. 특히 고대의 필사자들이 이 부분의 말씀을 필사할 때에 뭔가 코멘트를 옆에 기록해 두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생각해 볼 때 고대 교회는 마태의 ‘예레미야’라는 말에 대해 전혀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 준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 비평적 사본학자들이 편집한 UBS 4판까지도 마태복음의 이 부분은 스가랴서와 예레미야서 두 곳의 인용이라고 표기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도 마태의 이 기록은 오류가 아님을 알 수 있다.


 


[ 맺는 말 ]


이상에서 우리는 복음서 상호간에 존재하는 차이점들에 대한 몇 가지 해결책들을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의 어려운 구절들에 대해 억지로 모든 문제를 다 풀려고 해서는 안 된다. 오래 전에 베드로가 경고한 것처럼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다”(벧후 3:16)고 고백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우리는 비평학자들처럼 억지로 성경을 풀려고 하다가 하나님의 말씀을 파괴하고 스스로 멸망에 이르는 어리석음에 빠져서는 안 될 것이다. 그들은 쉽사리 하나님의 말씀이 잘못되었다고 비판하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말씀을 판단하는 그들의 교만한 생각이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생각을 초월하여 높이 있으면서 과연 인간이 그 말씀 앞에 굴복하는가 굴복하지 않는가를 시험하고 계신다. 그래서 교만한 사람은 그 말씀에 걸려서 넘어지며 오직 겸손한 사람만이 그 ‘시험돌’을 통과하도록 역사하신다.


 


우리는 네 복음서에 기록된 것들이 다 옳은 것임을 믿는다. 한 ‘실체’에 대해 각각 다른 ‘기록들’이 있지만 각 기록은 나름대로 옳고 진리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왜 옳은지 다 이해하지 못할 때도 있다. 그것은 우리의 ‘이성’의 한계이지 ‘하나님의 말씀’의 한계는 아니다. 그 알 수 없는 것들 중에는 앞으로 이해 가능한 것도 있을 것이고, 영원히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있을 것이다. 이런 것들에 대해서는 우리의 무지를 고백하면서 남겨 두는 자세가 필요하다. 우리가 천국에 가면 그 모르는 것들을 다 알게 될 것이다. 어차피 지금은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며 거울을 보는 것처럼 희미하게 안다(고전 13:12). 그러나 우리가 확실히 아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과 신앙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충분하게, 분명하게 계시해 주셨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모든 사실에 대해 감사하며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나아가서 우리는 복음서들 상호간의 차이점에 대해 일일이 교인들에게 다 설명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성도들은 복음서 상호간의 차이점에 대한 해결을 들으러 교회에 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으러 교회에 온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복음서들에서 이 복음을 증거해야지 복음서들의 상호 차이점과 그 해결책을 설교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것들은 성경공부 시간이나 또는 개인적인 질문이 들어왔을 때에 잠깐 다룰 성질의 것이지, 설교자가 전파해야 할 복음의 주된 내용은 아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언제 어디서 정확하게 어떤 말씀들을 하셨는지 ‘실체 자체’를 다 알 수는 없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실체에 대한 ‘기록들’이며, 전체 실체에 대한 ‘부분들’이다. 그러나 그 부분은 또한 진리이다. 전체가 진리이듯이 부분도 또한 진리이다. 각 부분 사이의 관계를 아는 것은 차후의 문제이며, 또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것도 아니다. 물론 알 수 있으면 좋고 말씀 이해에 도움이 될 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다 알 수 없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기록들이 진리임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설교자는 이 진리를 전하고 설명해야 한다. 그 진리들 사이의 상호관계나 다른 복잡한 문제들에 대해서는 조용한 시간에 따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것을 다 알 수는 없다는 것을 늘 생각하여야 한다.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다”는 베드로의 고백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여전히 중요하다. 이 고백이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라는 고백과 함께 할 때 우리의 신앙은 반석 위에 지은 집과 같이 흔들리지 아니하고 영원히 굳게 설 것이다.


 


변종길 교수(고려신학대학원 신약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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