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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4복음서- 예수님과의 대화

작성자
쥬니어칼빈
작성일
2013-11-11 20:23
조회
6286

1강.
역사이야기

 

A.
프롤로그

 

1.
예수님은 성육신 이전에 어디에 계셨는가?

1)
예수께서는 모든 시대에 다양한 형상으로 나타나셨지만 성육신하여 세상에 오시기 전에는 통상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함께 계셨다.

2)
예수님은 영원 전부터 언제나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2.
가장 놀라운 이적

1)
가장 놀라운 이적이 신약에서 일어났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 성육신이 되어 사람들 가운데 거하신 것이다.

2)
구약이 성부 하나님의 성품과 사역을 강조하는 반면에 신약은 성자 하나님의 성품과 사역을 강조한다.

3)
하나님은 구약에서 보세와 천사들을 통해 전달된(갈3:19) 율법을 강조하였지만, 신약에서는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하고 온전한
은혜와 진리를 강조하셨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요1:16-17)

4)
그렇다고 율법시대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업고, 신약시대에는 율법적 명령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율법을 범한 자에게 항상 회개를
위한 경고를 미리 주었으며 그 경고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에게 심판을 행하셨고, 신약에서도 무려 1,051개의 명령이
존재한다.

 

3.
구약의 예표와 신약의 성취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심 - 말씀이 육신이 됨(요1:1, 14)


모세에 의한 율법 - 그리스도에 의한 은혜와 진리(요1:16)


만나와 죽음 - 생명의 떡(요6:49-51)


돌판 위에 새겨진 하나님의 말씀 - 마음 판에 새겨진 하나님의 말씀(고후3:1-3)


일시적이며 사라질 영광 - 더욱 커지는 영원한 영광(고후3:7-8, 18)


하나님의 종 - 하나님의 자녀(갈4:4-6)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심 - 아들을 통해 말씀하심(히1:1-4)


수많은 일시적 대제사장들 - 한 분 뿐인 영원하신 대제사장(히7:23-28)


수없이 반복된 희생제사 - 단 한 번의 영원한 희생제사(히9:25-28)


홍수로 멸망함 - 불로 멸망함(벧후3:5-13)

 

  

B.
침묵 : 신, 구약 중간기

 

1.
앗수르제국

1)
주전 900년경 고대 근동지역의 패권은 앗수르가 장악했다.

2)
주전 722년에 앗수르는 북 이스라엘을 점령했다. 왕족 및 귀족, 상류층들은 곳곳에 흩어버렸고, 인종혼합정책을 사용하여 남아있던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통혼시켜 혼혈족인 '사마리아인'을 낳았다.

3)
주전 612년에 신흥 제국 바벨론에게 패하고 흡수되었다.

 

2.
바벨론

1)
구약의 니느웨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세운 나라를 구 바벨론, 앗수르를 멸망시킨 나라를 신바벨론으로 부른다.

2)
주전 606년에 느부갓네살 왕이 남 유다를 정복했고, 이듬해엔 많은 사람들을 포로로 글어갔고(다니엘 등), 주전 586년에는 예루살렘 성전과
성벽을 완저히 파괴했다.

3)
다니엘이 에언한대로 바벨론은 주전 536년에 페르시아제국(바사)에 멸망한다.

 

3.
페르시아

1)
초대 왕 고레스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던 유대인들을 해방시키고 고향으로 돌려보낸다.

2)
고국으로 귀환한 유대인들은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 스룹바벨 등 지도자들과 함께 성전을 재건한다.(규모는 솔로몬성전에 비해
작았다)

3)
성전에서 다시 서기관들이 율법을 가르치고 해석하는 등 공식적인 직무를 수행했다.

4)
페르시아는 유럽의 작은 나라, 마게도냐에서 시작한 헬라제국에 의해 멸망한다.

 

4.
헬라제국

1)
주전 332년 마게도냐의 알렉산더(주전334-323)가 정북전쟁을 하면서 거대한 제국으로 발전한다.

2)
알렉산더 대왕은 피정복 국가들에 그리스(헬라)문명을 전파하여 모든 지역에서 헬라언어를 공용하게 되었다.

3)
알렉산더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헬라제국은 다시 마게도냐, 시리아, 이집트 왕국으로 삼분되었다.

 

5.
마카비 왕국

1)
주전 176년, 레위 지파의 마카비 일가가 시리아의 지배에 대항하여 봉기를 하고 약 80년 동안 독립왕조를 유지했는데 이를 '하스모니안
왕조'라고 부른다.

2)
주전 63년 세력을 확장 중이던 로마의 폼페이 장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독립왕조를 종식시키고

 

6.
로마제국

1)
주전 27년 옥타비아누스가 로마제국을 하나로 통일하고 자신을 '아우구스투스'라 칭하고 황제 직에 올라 주후 14년까지 로마를 통치했다. 그는
유대 땅을 헤롯왕에게 통치토록 했다.

2)
주전 5년경,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시었다. 헤롯대왕은 메시아를 죽이기 위해 남아들을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로 인해 민심이 흉흉해 지자 그는
환심을 사기 위해 성전을 확장 재건축하고 지역마다 도시를 건설하여 유대의 헬라화를 시도했다.

3)
로마제국은 자신들을 중심으로 한 하나의 세계를 건설하는 것이 꿈이었다. 그래서 'Pax Romana'(로마의 평화)를 기치로 모든 속국들을
하나로 묶는 정책을 시도했다. 먼저 언어를 헬라어와 라틴어로 통일했고, 모든 지역에 이르는 도로를 건설하였다. 1일 평균 80km가지 걸을 수
있는 도로환경이 조성되었다. 이러한 요소들은 여러 가지 면에서 기독교의 확장에 도움을 주었다.

4)
그러나 로마는 극심한 경제불황에 시달렸다. 전쟁으로 인해 발생한 6천만 명에 달하는 노예들로 인해 사회불안과 빈곤의 문제가 야기되었으며,
귀족들의 삶을 보장하기 위해 가혹한 세금을 부과하여 백성들을 도탄에 바지게 했다. 바울 사도의 지적대로 도덕적으로도 로마사회는 타락의 극치를
보였고, 영적으로는 온갖 우상숭배로 완전히 침몰해 있었다.

5)
그러나 유대 당은 주후 475년까지 로마에 지배당했다.

 

7.
유대의 사분오열

1)
주전 400년 경, 구약의 말라기 선지자 이후 유대인들에게서 하나님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유대는 이방족에 의해 계속 짓밟히고 있었다. 잠시
독립왕국을 건설하고 회복하는듯 했지만 강대국들이 끊임없이 유대를 지배했다.

2)
로마의 종교관용정책에 따라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종교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들은 대제사장을 수뇌로 하는 산헤드린 공회를 최고의결기관을 가지고
있었으며, 공식적으로 예루살렘성전에서 제사를 드렸으며, 각 회당에서 교육과 자체 회합을 가질 수 있었다.

3)
그러나 아론 때부터 계보를 이어오던 제사장 직분은 권력자에 의해 발탁되거나 매매되기도 했고 여러 분파로 나뉘어져 서로 갈등과 반목을 거듭하고
있었다.

4)
예수님 당시에는 6개의 주요 유대분파가 활약했다.


가장 큰 세력은 바리새인이었다. 그들은 구약과 유대인들의 구전 전승을 고수하는 완고한 율법주의자들이었으며 정교분리를 주장했다.


사두개인은 상류층의 종교적, 정치적 자유주의자들이었다. 부활과 영혼불멸을 믿지 않았고 전통에 반대하고 바리새인과 극단적으로 대립한 부자들이었지만
정치와 사회에 관심이 많아 로마권력에 아부하는 자들이 많았다.


에세네파는 세속을 멀리하는 고립된 극단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쿰란지역의 동굴에 은거하면서 거룩한 삶을 살고자 수도생활에 전념했다. 그들이
보존해온 성경의 사본들이 1947년에 발견된 '사해사본'이다.


서기관들은 율법을 가르치고 해석하는 일을 하는 전문가 집단들로 성경과 전통을 연구하여 백성들로부터 높은 신망과 존경을 받았다. 하지만 지나치게
시시콜콜한 문제까지 토론의 대상으로 삼는 등 논쟁을 야기시켰으며,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불신하고 배척하는데 앞장섰다.


열심당(제로테당)은 독립을 염원하는 유대인들의 비밀조직이었으며 헤롯당의 정적으로 로마에 항거하기 위해 폭력을 불사하는 등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투쟁하는 과격행동세력이었다. 그들은 모세시대처럼 유대가 다시 신본정치를 하는 나라가 되기를 염원했다. 그래서 시몬 등 열심당원들은 예수가
왕으로 통치하는 새로운 나라를 소망하며 제자가 되기도 했다.


헤롯당은 헤롯 가문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전념하던 현상유지를 바라던 현세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로마제국의 통치가 영원할 것이라 믿었으며
헤롯가문을 도와 유대를 재건하는 것이 지혜롭다고 믿었다. 그들은 예수를 정치적 반동세력의 우두머리라고 여겼다.

 

8.
문헌들

1)
사해사본 - 에세네파

2)
70인역 성경(LXX, Septuaginta) - 주전 250년경,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유대인 학자 70명(12지파에서 6명씩 선발,
2명이 중도에 탈락함)이 모여 히브리어 성경(구약)을 헬라어로 번역한 것. 이미 히브리어가 사어가 되어 속히 당시 세계어인 헬라어로 번역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3)
외경들 - 15개의 종교적 문서들이 구약의 외경으로 있었는데, 1546년 로마카톨릭은 트렌트종교회의를 열고 이 가운데 12개의 문서를 정경으로
인정했다. 외경들은 신구약 중간기에 대한 역사적 정보들을 제공하고 있다. 그러나 개신교에서는 외경의 기록 및 내용상의 불일치성과 비계시성을 들어
정경에서 제외했다.


솔로몬의 지혜(주전 30년)


전도서(시락. 주전 132년)


토비트(주전 200년)


유딧(주전 150년)


에스드라
1서
(주전
150-100년)


에스드라
2서
(주후
100년)


므낫세의
기도
(주전
2세기경)


마카비 1서(주전 110년)


마카비 2서(주전 110-70년)


바룩서(주전 150-50년)


예레미야의 편지(주전 300-100년)


에스더스 부록(주전 140년)


아사랴의 기도(세 청년의 노래, 주전 2세기 경, 다니엘서 3:24-90)


수산나 이야기(주전 2세기 경, 다니엘서 13장)


벨과 용(주전 100년경, 다니엘서 14장)

(줄친
부분의 책은 카톨릭에서도 정경으로 불인정함)

 

9.
주요 지역과 중심지

 

1)
이두래 - 가이사랴 빌립보, 벳세다. 거라사(가다라)

2)
갈릴리 - 갈릴리 바다(긴네렛 호수), 고라신, 가버나움, 막달라(달마누다), 가나, 나사렛

3)
사마리아 - 나인, 수가, 야곱의 우물

4)
베레아 - 벧아바라.

5)
유대 - 에브라임, 엠마오, 예루살렘, 베들레헴, 여리고, 베다니, 사해

6)
데가볼리 - 이두래와 베레아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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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도의 지상사역에는 20개의 도시가 언급된다.

-
가로 시작되는 도시는 3개

-
가나~나사렛은 약 10km , 예루살렘~베들레헴도 약 10km.

-
사마리아 한 가운데에 수가성이 있고 그 옆에 야곱의 우물이 있다면 유대 한 가운데는 예루살렘이 있고 그 옆에 베들레헴이 있다.

-
사마리아, 수가는 ㅅ으로 시작되고 유대, 예루살렘은 ㅇ으로 시작한다.

 

10.
알파벳으로 보는 예수님의 삶
(by
테리 홀)

 

angle
천사(마1장, 눅1장)

birth
탄생(마2장, 눅2장)

carpenter
목수(마2장, 눅2장)

dove
비둘기(마3장, 눅3장)

enemy
적(마4장, 눅4장)

follows
제자들(요1장)

guest
손님(가나기적, 요2장)

house
cleaning 성전청소(요2장)

interview
면담(요3장)

jacob's
well 야곱의 우물(요4장)

kin
친척(눅4장)

location
사역 장소(나사렛->가버나움, 마4장)

message
메시지(산상수훈, 마5-7장)

nature
miracle 자연이적(눅7장)

opposition
반대(마12장)

parables
비유(마13장, 막4장)

question
질문(마16장, 눅9장)

revelation
계시(변화산, 마17장)

stoning
돌로 침(요10장)

tomb
무덤(요11장)

upset
뒤엎음(승리의 입성, 마21-23장)

vision
소망(미래의 일, 마24-25장)

washing
씻음(요13장)

x-ecution
십자가 처형(마26-27장)

yes
예(신앙, 마28장, 눅24장)

zion
시온(예루살렘의 또 다른 이름/아리엘, 눅24장, 행1장)

 

   

 

2강.
대화하시는 예수님

 

1.
예수님의 말씀사역

1)
설교

가.
선포식 설교

-
마가에 의하면 예수님이 하신 처음으로 하신 말씀이 바로 선포식 설교였다.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며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1:14-15) 이런 예수님의 설교는 선포이다.

-
모든 복음서의 저자들이 예수님의 설교를 잘 기록하고 있다. 그중에서 마가는 매우 두드러진다. 그의 언어는 생생하며 강렬하고도 긴박한 언어로 아주
능숙하게 복음의 현장성을 잘 나타낸다. 그런 점에서 마가의 설교는 하나님이 하고 계시는 일에 우리를 개인적으로 참여시키는 언어다. 설교는
인격성과 현재성을 잘 전달해 준다.

-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설교를 하심으로서 자신의 공적 사역을 시작하시었다. 이러한 설교의 사역은 예수님 이전에 이미 시작되었고 오랜 전통으로
흘러내려온 것이었다. 예수님 직전에는 세례 요한이 이 설교의 전통을 이었고, 예수님 이후에는 베드로와 바울이, 크리소스톰과 키프리아누스,
암브로시우스,, 어거스틴, 프란체스코와 도미니쿠스, 루터와 칼뱅, 휫필드, 조나단 에드워즈, 뉴먼과 스펄전으로 이어졌다.

나.
가르치기 위한 설교

-
예수님의 가르침은 지금까지 유대인들이 들어온 것들의 차원이 아니었다. 번뜩이는 금언들로 가득 찬 것이었다. 예수님은 정보를 나누어주기보다 비유를
사용하시어 우리의 상상력을 재구성하고 진리를 받아들이도록 하시었다. 예수님의 가르침의 거의 모든 주제는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것이었다.

-
마태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다섯 개의 담론으로 모아 놓았다. (1) 산상수훈(마5-7장), (2) 12제자에게 주는 가르침(10장), (3)
공동체에 대한 가르침(18장), (4) 위선에 대한 경고(23장), (5) 마지막 때의 일들에 대한 가르침(24-25장)

-
요한은 예수님의 마지막 6개월 동안의 예루살렘에서의 사역을 집중적으로 부각시키면서 여러 가르침과 설교들을 기록하고 있다. 특히 솔로몬
성전설교와, 마지막 만찬설교는 요한만이 관찰하고 경험한 것들이다.

-
예수님은 우리를 가르치시고 우리가 대면하고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 자세히 짚으시고 우리가 결정하고 분별해야 할 것들, 예수님이 왕으로 계신 이
왕국의 삶을 사는 데 적합한 수단과 방법들을 자세히 가르치신다.

-
예수님의 가르침 또한 오랜 전통 위에 서 있다. 신명기의 모세의 가르침, 잠언과 전도서,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의 권고와 지혜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의
가르침은 전통을 회피하지 않으신다. 나아가 예수님은 구약에서 죽었던 말을 다시 살리시었다.

 

2)
일상의 대화

-
예수님은 설교나 가르침 이외에도 여러 가지 방식으로 이야기를 하시었다. 누군가의 집에서 혹은 친구들과 함께 식사를 하시면서, 들판이나 호숫가를
거닐면서, 혹은 어딘가로 가는 길에 만나게 되는 이런저런 일들과 질문들에 답을 하시면서 격의 없이 대화를 주고받으시는 예수님을 바라보게 된다.

-
설교는 하나님에게서 시작한다. 하나님의 말씀, 행동, 현존을 나타낸다. 가르침은 선포된 것을 확장시키고 적용시킨다. 그러나 구조화되지 않은
가벼운 대화들은 가정과 일터에서, 놀이터나 동네 슈퍼에서, 거리에서 우연히 친한 사람을 만났을 때, 공식적 장소가 아닌 개별적으로 어떤 질문을
받았을 때, 소소한 사건들과 우연한 만남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것은 소위 잡담이랄 수 있다. 서로 웃는 낯으로 서로를 알아가며 친밀감을 느끼도록
이끄는 격의 없는 소박한 대화이다.

-
마가가
설교에 집중하고, 마태가 가르침에 집중했다면 누가는 일상대화에 주목한다,

물론 누가도 첫 아홉 장에서 마가와 마태의 방식대로 예수님의 갈릴리사역을 기록하고 마지막 다섯 장(20-24장)은 예루살렘 사역을 기록하고
있지만, 특별히 누가는 갈릴리를 떠나 사마리아를 거쳐 예루살렘에 오기까지 사람들과의 만남과 질문들, 그리고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들 속에서 격의
없이 주고받은 예수님과 사람들의 언어에 주목한다. 특히 누가복음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9:51-19:44에서 누가는 예수님과 사람들이 나눈
비공식적인 대화를 10장에 걸쳐 기록하고 있다. 그것은 갈릴리를 떠나는 장면에서 시작하여 예루살렘에 도착하는 장면에서 멈춘다. 이것을 '누가의
여행 내러티브'라고 한다.

 

2.
제자들을 위한 사역

 

1)
하나님나라의 준비

-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사마리아를 통과하는 바로 그 여정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십자가에 달려 죽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간다고
예언하시고, 그들에게 같이 가자고 하시었다. 그 며칠을 같이 걸으면서 예수님은 십자가와 부활 사건 이후에 살아갈 그들의 삶을 대비한 훈련을 시킬
작정이었다.

-
예수님은 가까운 시기에 아주 극적인 사건들이 일어날 것을 아시었다. 이 사건과 함께 제자들의 삶도 완전히 뒤바뀔 것도 아시었다. 그들이 살아가야
할 세상은 고난과 핍박의 길이 될 것을 알고 계셨다. 때로는 끝도 없이 기다려야 하고, 참으로 많은 이들의 무관심에 직면해야 하고, 교만한
지배자들의 거짓말과 맞서야 하고, 스스로를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미칠 것 가은 위선과 싸워야 하고, 가족들의 냉대와 아는 사람들로부터
바보 취급, 알아주지도 않고 성과도 나타나지 않는 허망한 일에 매달려 사는 것이 얼마나 맥 빠지는 일인지를 실감해야 하는 그런 일들이 기다리고
있음을 예수님은 알고 있었다.

 

2)
눈치 채지 못하는 훈련

-
예수님은 깊은 호흡과 함께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꾸준히 제자들을 훈련시키고자 준비하시었다. 그것은 제자들과 함께 사마리아를 천천히 통과하면서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여정이었다. 이러한 훈련을 통해 제자들이 조용히 끈기 있게, 그리고 부드러움으로 불신자들을 다루는 기법을 익힐 것을
원하시었다. 자신들이 원하는 바대로 복음을 전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도록 훈련하는 것이었다.

-
예수님은 지금까지 설교나 가르침 위주의 대화 방식을 잠깐 접어두시고 새롭고 흥미로운 대화의 방식을 택하시었다. 예수님은 여유 있게 걸으며 제자들
앞에서 사마리아인들과 대화하기 시작했다. 목청을 높이지도 않았고, 긴박한 언어를 사용하지도 않았으며, 대화조로 말을 섞어갔다. 그리고 다정한
목소리로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시었다. 사람들은 지도자들의 경건하고 무거우며 딱딱한 주입식 설교가 아닌 새로운 방식의 대화에 매우 높은
관심을 보이며 귀를 기울였다. 예수님과 사람들 사이엔 어느새 자연스러운 친밀감이 형성되었다.

-
마태와 마가는 갈릴리에서 예루살렘까지 가는 길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으려는 듯, 단 두 장에 걸쳐 매우 빠른 속도로 진행하지만 누가는 짐짓 속도를
늦추고 여유를 부리며 무려 10장에 걸쳐 이야기를 전개시킨다. 마태와 마가가 놓치고 있는 많은 사건과 이야기들을 우리에게 소개한다.

-
누가가 소개하는 예수님의 모습은 친구 같은, 이웃집 아저씨 같은 이미지들이다. 질문에 대답하시고, 저녁 식탁에 둘러앉아 이야기를 즐겨 하시고,
친구들과 의논을 하신다. 대화중에 누구든지 끼어들 수 있도록 서두르지 않으시고, 무거운 종교적인 주제를 벗어나 일상의 관심꺼리들을 식탁 위에
올려놓으신다. 확실히 이 여행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새로운 언어를 만날 수 있다.

-
갈릴리와 예루살렘 사이에서 예수님이 이렇게 하신 모든 목적은 오직 제자들에게 집중된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자신과 함께 있을 때처럼 무슨 큰
능력을 발휘하며 표적과 기사를 행사하며 '내가 예수님의 제자'라고 떠들며 거들먹거릴까봐 경계심을 늦추지 않으시었다. 능력은 사역 중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지만 그것에만 제자들이 의지할까 염려되신 주님은 제자들을 온유함과 친절함과 따뜻함과 여유로움과 성실함 등으로 무장시키어 길고 험한
싸움을 치루어 나갈 수 있도록 준비시킨 것이다.

 

3)
일요일과 일요일 사이

-
갈리리와 예루살렘 사이는 오늘날의 일요일과 일요일 사이를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그대로 적용된다. 예수님을 따르는 삶은 일요일 예배에서 보통
설교를 통해 전달되고 가르쳐진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그 가르침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유익한 것이며 그러므로 일요일만은 하나님의
성소에서 거룩해진다.

-
그러나 일요일과 일요일 사이에의 시간은 세상의 지배 속으로 들어간다. 주일날 설교의 교훈은 성소를 나서는 순간 희미해지고 대단히 익숙한 대화에
다시 빨려 들어간다. 모든 언행심사가 철저히 세속적이다. 설교의 내용과 실제 삶은 상관관계에 있지 않고 늘 따로 논다. 오늘의 현대인들은
일요일과 일요일 사이에 놓인 사마리아에서 여전히 살고 있다. 그들은 자신의 정체성,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일요일 한 날에만 국한시킨다.
그것으로 하나님에게 미안한 마음을 풀었다는 위안감을 얻었으면 충분하다고 여긴다. 혹은 또 하나의 무리는 이 기간에 만나는 사마리아인들을 거룩하지
못한 존재로 단정 짓고 말 조차 섞지 않으려고 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예배 때 들은 성구나 필요한 말씀들을 적고 외워서 이 기간 중에 한 번
이상 써먹으려고 시도한다. 사마리아인들의 대화의 틈새에 성경구절을 끼워 넣어 보려 하지만 여의치 않음을 느끼고 실망에 빠진다. 아,
사마리아!

 

<참고
: 사마리아>

 

-
사마리아는 원래 한 나라의 이름도 아니며 한 민족의 공식적인 명칭은 더더욱 아닙니다. 사마리아는 북이스라엘의 수도였습니다. 주전 930년경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이 왕위에 오르자 그동안 애굽으로 정치적 망명길에 올랐던 여로보암이 다시 귀국해 유다와 베냐민 지파를 제외한 열 지파를
규합해 나라를 따로 세웁니다. 물론 그 나라는 하나님의 뜻을 정면으로 거스리는 것이었습니다. 여로보암은 자신의 백성들이 더 이상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금했습니다. 왕의 명령으로 북 이스라엘의 백성들은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 형상을 만들어 섬기게 되었습니다(왕상 12:28-30). 여로보암
왕이 그렇게 한 것은 백성들이 예루살렘을 찾으면 다시 다윗왕의 집안을 섬길까 두려웠기 때문입니다.(왕상 12:26). 그리하여 북쪽은 점점 남
유다와 소원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같은 민족끼리 선을 긋고 울타리를 치고 왕래를 금하며 등을 지고 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대적한 나라가 어떻게 멸망해 가는 지를 성경은 분명히 기록하여 우리에게 경종을 던지고 있습니다. 역사서인 열왕기에는 약 200년 동안
지속된 북 이스라엘의 멸망사가 나타나 있습니다. 모두 19명의 왕이 등장하지만 왕조는 무려 아홉 번이나 바뀝니다. 그만큼 반역과 반역으로 점철된
역사라는 것입니다. 먼저 여로보암은 온갖 악한 방법으로 나라를 22년간 다스립니다.(왕상 14:20). 그를 이어 아들 나답이 왕위에 올라
2년간 다스릴 때에 잇사갈 족속의 바하사가 모반을 하여 깁브돗에서 나답을 죽이고 자기가 왕이 되어 22년을 다스립니다(왕상 15:33). 그러나
바하사는 선지자 예후의 예언대로 들판에서 처참하게 죽고 왕위는 아들 엘라에게 2년 동안 주어집니다(왕상 16:8). 엘라는 군대 지휘관인
시므리에 의해 만취상태에서 살해되고 시므리가 왕이 됩니다(왕상 16:10). 그의 재위 기간은 가장 짧은 7일뿐이었습니다. 시므리의 모반을
전해들은 백성들이 오므리를 추대하고 그를 잡으러 오자 시므리는 왕궁에 불을 지르고 자살을 합니다(왕상 16:16-18). 그렇다고 오므리가
왕위에 쉽게 오른 것이 아닙니다. 오므리는 다른 백성들의 지지를 업고 왕으로 추대된 디브니와 한 판의 결투를 벌여야 했습니다. 이 정쟁에서
승리한 오므리는 이후 12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는데(왕상 16:23) 이 때 그는 은 두 달란트의 값으로 세멜(Shemer)에게서 사마리아 산을
매입하고 그 산 위에 성읍

건축하게 되는데(왕상 16:24), 이것이 사마리아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이후 사마리아는 후임 왕들에 의해 점점
확대됩니다. 오므리의 아들인 아합은 사마리아를 수도로 삼고 시돈왕의 딸인 이세벨을 아내로 맞습니다. 바알신을 섬기던 그녀는 남편에게 신전을
건축해 달라고 청원합니다. 왕은 아내의 청원을 수용하여 그곳에 바알(Baal)의 신전을 건축하고 바알의 제단과 아세라(Asherah)상을 만들고
모든 백성들을 우상숭배로 이끌어 명실공이 사마리아는 정치적 종교적 중심지로 각광을 받게 됩니다.(왕상 16:29-33).

이후
사마리아는 주전 722년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멸망(왕하 17:6)당할 때까지 수도로서 기능을 합니다. 앗수르는 북 이스라엘과 사마리아의
사람들을 모두 자신의 제국으로 끌고 가 노예를 삼고 모든 여인들을 타민족에게 보내어 혼혈의 자손을 생산케 합니다. 그리하여 이후부터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동족으로 여기지 않고 이방인 취급을 하게 됩니다. 그 후 앗수르가 잠시 약해질 동안 남 유다의 요시야 왕이 세력을
확장하여 사마리아와 그 주변의 지역을 장악하고 모든 우상숭배 행위를 금합니다.(왕하 23:19-20).

사마리아의
불행은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성읍은 고대 근동 지방을 점령하였던 모든 왕국들의 다스림을 받았습니다. 앗수르로부터 바벨론, 페르시아에
이어 알렉산더의 헬라제국에 의해 통치되었습니다. 이 때 외부에서 이주해 온 헬라인들이 비 헬라인들 모두를 일컬어 사마리아인이라고 부르게 됩니다.
그 후 사마리아는 주전 57년경에 로마의 통치하에 들어갔으며 주전 30년에는 헤롯 왕국의 일부로 편입되어 헬라의 모습을 한 새로운 도시로
건설되었습니다. 헤롯은 이 성읍을 '세바스테(Sebaste)'라고 명명했는데 이는 라틴어로 황제를 뜻하는 '아우구스투스(Augustus)'의
헬라적 표현입니다. 헤롯이 세운 사마리아는 거의 1백년의 세월을 건재하다가 주후 66년부터 70년까지의 로마군과의 전쟁 때 도시가 거의
파괴됩니다. 알다시피 주후 70년에는 예수님의 예고대로 예루살렘은 티투스 장군이 이끄는 로마군에게 철저히 파괴당합니다. 이후 사마리아는 주후
200년경에 다시 로마의 식민지로 재건되었지만 5세기경부터 사람들이 떠남으로 다시 폐허가 되고 말았습니다.

역사적으로
'사마리아'는 북 이스라엘의 멸망 전에 관할지역 전체를 아우르는 명칭인데, 지역적으로는 동쪽으로 요단강, 남쪽으로 아얄론 골짜기와 욥바,
서쪽으로 지중해, 북쪽으로는 이스르엘 골짜기와 가이사랴 마티마를 경계로 합니다. 다만, 신약에서는 중앙산지를 가리키는 말로 축소되고
있습니다.(요 4:4, 행 1:8)

일반적으로
사마리아인은 사마리아 지방의 거주민과 사마리아의 종교적 전통을 신봉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의 기원과 본질에 대한
유대인의 견해는 이미 구약에 나타나 있습니다. 북 이스라엘의 우상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내용이 왕하 17:7-23에 잘 나타나 있고,
앗수르에 멸망당한 후부터 타민족과 섞이고 다신숭배문화에 물들은 그들을 유대인들은 비 이스라엘인으로 부르게 됩니다.(왕하 17:24-41).
한편, 신약에서는 사마리아인을 경멸의 대상으로 여기고 있고(요 8:48), 유대인의 경전인 미슈나에서는 사마리아인을 '구다인'으로 지칭함으로서
같은 동족으로 생각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더 사마리아를 들여다보면 유대인들이 경멸하는 이유를 이해하게 됩니다. 사마리아인의 경전은 오직 <모세 5경>뿐입니다. 그들은 모세를
마치 하나님의 마지막 선지자로, 초인적인 존재로 추앙합니다. 그들은 또 그리심 산을 아브라함이 이삭을 희생 제물로 드리려고 했던 장소로, 나아가
이스라엘의 새로운 예배의 장소로 하나님이 정하신 곳으로 믿었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유대인들이 먼저 하나님의 진리에서 떠나갔다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엘리 제사장이 그리심 산이 아닌 실로에다 하나님의 제단을 세운 것이 잘못된 일이라는 것입니다(참조. 삼상 1-3장). 또 에스라도 오경을
거역하여 예루살렘에 성전을 재건함으로써 죄악을 범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의 분열이 가시화된 것은 유다의 요시야 왕(주전 640-609년)이 세력을 확장하고 종교개혁을 단행하면서 사마리아에 있는 모든
신전과 산당을 훼파했기 때문입니다(왕하 23:19-20). 사실 그 전만 해도 사마리아인들 중 일부는 정기적으로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하는 등(렘
41:5) 상호 유대관계가 지속되었지만 이후 둘 사이는 냉랭해지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포로기 이후인 주전 450년경엔 에스라와 느헤미야 등의
주도로 예루살렘의 성전과 성벽이 재건 될 때에 사마리아인들은 철저히 이 공사에서 배제되었습니다(스 4:2-3, 느 2:20). 유대인들이 재건
작업에 사마리아인들이 참여하는 것을 거절하자 사마리아인들은 예루살렘의 재건을 방해하여 얼마간 실효를 거둡니다(스 4:9-24). 그 뒤의 기록은
유대인 출신의 역사가인 요세푸스(Josephus)가 남긴 <유대사>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에 의하면, 주전 324년경 헬라제국의
알렉산더는 그리심 산에 사마리아인들을 위한 성전을 재건해 줍니다. 그러나 이 성전은 주전 129-128년경, 유다 독립왕국의 통치자인 요한
힐카누스(John Hyrcanus)에 의해 다시 파괴되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여 사마리아인들은 성전을 잃어버렸습니다. 타의에 의해 성전을
잃어버린 사마리아 사람들은 오경의 절기에 따라 계속해서 그리심 산을 찾아 예배드리는 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이 예배행위는 예수님이
방문하실 때에도 계속되었고, 안타깝지만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3강.
열개의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본문:
눅 9:51-56

 

1.
배경설명

-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은 가르침 이외에 초자연적인 일들이 많았다. 치유와 축귀와 자연이적과 기사들로 예수님은 갈릴리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권능을
증거했고, 나아가 하나님나라의 도래를 선포했다.

-
하나님나라의 선포와 함께 이제 예수님은 이것의 전파를 담당할 주체를 세워야 했다. 과연 누가 하나님나라의 전파를 책임지고 임무를 수행할 것인가?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도록 유도했으며, 이에 베드로가 예수님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고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라는
고백을 했다. 얼마나 기다리고 기다리던 제자의 대답이었는가? 예수님은 비로소 교회의 탄생을 선포하신다.(마16:18). 교회가 곧 하나님나라의
시작이요 이 영역에는 음부의 권세가 미치지 못한다고 선포하시었다.

-
그런데 예수님은 이 교회설립을 제자들에게 더욱 강화하기 위해 한 가지 사건을 더 보이시는데 그것이 바로 변화산 사건이다.. 제자들은 너무 놀라
입을 다물고 말았다(눅9:36)그러나 그것은 이제 육적인 차원에서의 사역이 아니라 영적인 차원에서의 사역을 해야 한다는 간접적인 가르침을
제자들에게 주신 것이기도 하다.

-
예수님은 이제 하나님나라를 제자들에게 맡길 때가 되었으며 자신의 마지막 때가 이른 것을 직감했다. 이미 자신이 십자가의 죽음을 맞이할 것이며
3일 만에 부활할 것이라고 제자들에게 예고했지만 제자들은 아직도 그 의미를 모르고 있었다. 아무튼 예수님은 하나님의 때에 맞추어 갈릴리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2.
해결과제

-
그런데 한 가지 해결과제가 남아 있었다. 그것은 자신이 떠난 뒤, 제자들이 감당해야할 몫이었지만 예수님은 그런 제자들을 위해 몇 가지 교육과
훈련을 통해 가르침을 주고 싶었다. 그 해결과제는 교회가 세워지면 제자들은 어떻게, 누구에게 하나님나라를 전파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이
문제는 아직 제자들의 입장에서는 머릿속으로 정리되지 않은 미래의 일이었다. 눅 9:10-11에서 예수님은 마침내 제자들을 사도라 부르고
하나님나라의 일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고 기록한다. 그것은 이제 제자들의 임무가 하나님나라의 건설이라는 것이며 그런 점에서 사도적 미션의 의미가
담겨 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
그런데 제자들은 여전히 눈앞의 문제도 감당치 못해 쩔쩔 매는 수준이었다. 변화산의 기이한 일을 직접 눈으로 확인한 제자들이었지만 여전히 육적인
수준에 머물고 있음을 누가는 놓치지 않고 변화산 사건과 예루살렘으로의 출발 사이, 즉 9장 37절부터 50절까지에 두 가지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하나는 귀신들린 아이의 부모가 제자들에게 찾아와서 귀신을 쫓아줄 것을 요청하지만 제자들이 쩔쩔매는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그 와중에서도
서로 누가 크냐고 쟁론을 벌이는 한심한 모습이다. 참으로 한심한 노릇이다. 이미 그들은 전도여행을 경험했고, 권능을 행사한 바 있다(마10장,
눅9:1-9). 그럼에도 믿음을 갖지 못하고 그들 스스로는 아무 것도 행하지 못하는 것이다. 주님 없는 제자들은 빈 껍데기일
뿐이었다.

 

3.
출발, 예루살렘으로!

-
자, 이제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출발하신다. 여전히 제자들은 알지 못하지만 그들이 알건 말건 자신이 이미 예고하신대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마지막 여행을 떠나시는 것이다. 제자들도 흥분해 있었다. 그들은 다시 한 번 전도여행 때 경험했던 신비한 능력을 행사하고 싶었다. 마치 그것이
자신의 실력이라도 되는 것인 것처럼 으쓱대고 싶은 것이었을 까?

-
그러나 제자들의 기대는 다시 빗나가기 시작했다. 예수님의 발걸음은 웬일인지 바쁘지 않았다. 천천히 그리고 너무나 평화스럽게 걸으며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한 사람도 놓치지 않고, 마치 오랜만에 여행을 하며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성미가 급한 세베대의 두 아들과 베드로가 가장 속이 많이
타지 않았을까? 어서 예루살렘에 도착해서 새로운 왕국이 도래했다고 선포해야 할 텐데 예수님의 발걸음은 다시 사마리아로 향하는
것이었다

 

4.
아, 사마리아

-
드디어 예수님은 사마리아의 사역을 시작하신다. 이번이 두 번째 방문이거나 그 이상일 수도 있다. 첫 번째는 처음 예루살렘을 공식적으로 방문하시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야곱의 우물가에서 물을 깃던 여인에게 생수를 먹이시고 마을 사람들의 요청으로 2-3일 동네에 머물며 복음을 전한 바
있다(요4장).

-
예수님은 사마리아에 들어가시기 전에 먼저 사자들을 앞서 보내신다. 이것은 매우 전략적인 선택으로 보인다. 혹시 예수님은 제자들이
사마리아인들로부터 냉대 받으실 것을 아신 것일까? 그 냉대를 제자들로 하여금 직접 겪게 하신 것에 어떤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나
다를까, 제자들은 사마리아인들의 싸늘한 반응을 목격해야만 했다. 약 3년 전에 사마리아인들이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야곱의 우물 동네에 들러
복음을 전파했건만 그들은 조금도 변하지 않고 제자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
사실 그렇다. 우리는 전도라는 것을 매개로 복음을 이웃에게 전한다. 개별적으로 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 교회의 가족들과 작을 이루거나 소그룹을
형성하여 전도를 한다. 그것은 교회의 행사 중 하나이며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행하는 하나의 증거적 행위이다. 우리는 자부심을 가지고 불신자에게
접근한다. 그러나 십중팔구 돌아오는 것은 싸늘함이거나 건성적인 표정, 무덤덤함, 약간의 비웃음, 심한 경우엔 욕지거리와 거창한 훈계까지 듣는다.
이럴 경우, 하나님은 우리들의 심중을 들여다 보신다. 전도에는 필수적으로 낙심이라는 고약한 친구가 동행한다. 이 친구는 계속해서 나의 발걸음을
무겁게 한다. 계속해서 내 귀에 속삭인다. "그것 봐,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라구". 약간의 믿음에 있어서 자존심으로 차음엔 이런 말을
무시하고 거부하지만 점점 낙심은 커지고 내면의 포기의 유혹도 커진다. 그래도 참고 참다가 드디어 폭발하고 만다. 그것이 우리의 신앙이요,
인내이다.

 

5.
세베대의 형제들

-
제자들은 사마리아인들로부터 거절을 당했고, 돌아와서 잠자리와 식사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고 예수님께 보고한다. 이 때 세베대의 두 아들인
야고보와 요한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우레의 아들들'(Boanerges)이라는 별명을 가진 이들은 그냥 앉아서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 그들은
성질이 급한 다혈질이었다. 그들은 사마리아인들의 냉대에 화가 나서 하늘로부터 불을 불러내어 이 무례한 사마리아인들을 불태우고 싶었다.

-
그러한 폭력적인 성급한 행동은 전례가 있는 일이었다. 디셉사람 엘리야가 바로 그런 일을 한 장본인이었다. 그는 8백 년 전에 하늘에서 불을
불러내어 바로 이 사마리아 지역 위에 떨어지게 했다.(왕하 1:10-12). 많은 그리스도인들은(심지어 신학자들까지도) 엘리야의 이 무시무시한
권능에 입을 벌리며 마음속으로 존경을 보낸다. 엘리야는 성경의 역사에서 늘 우리의 수준을 뛰어 넘은 다른 차원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런 위대한
인물이 이세벨의 체포가 겁이 나 산 속으로 피신한 모습에 이르면 초라하기 짝이 없게 된다. 무엇 때문인가? 왜 그는 까마귀가 날라주는 일용할
양식을 먹으며 목숨을 연명하는 처지로 급전직하했는가? 이 의문이야 말로 우리의 신학적 깊이와 신앙의 눈을 새롭게 해 주는 출발이 될 것이다.

-
불과 며칠 전 변화산(다볼산)사건에서 이 우레의 형제들은 예수님이 엘리야와 대화하시는 것을 보았다. 이제 그들은 엘리야로부터 인정받은 사명을
가지고 사마리아에 있는 것이니 이 오랜 사마리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엘리야의 방식을 사용하지 말란 법이 없다고 스스로 확신했다. 두 사람은
엘리야가 되고 싶었다. 오직 엘리야가 행한 표적과 기사를 자신의 손으로 행하고 싶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엘리야의 놀라운 권능의 행사로
사마리아가 본질적으로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
예수님은 즉시 이 두 사람을 단호하게 꾸짖었다. 이미 그들은 제자들 중에서 자기가 제일 큰 자라고 자랑하다가 예수님으로부터 망신을 당한 바
있다.(9:46-48). 매우 잘못된 생각과 행동을 수정하기 위해선 보통의 언어로 되지 않고 이렇게 꾸지람의 방식을 사용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런 방식은 다른 사람의 감정을 완전히 상하게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꾸지람은 완전히 굴복시키기 위함이다. 잠언 3장 11-12절의 말씀이다.

"내
아들아 여호와의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라 그 꾸지람을 싫어하지 말라.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 같이 하시느니라"

즉, 여호와의 꾸지람은 훈계이다. 스승의 꾸지람은 제자의 아둔함을 깨우치는 명약이다.

-
개역성경에는 55절의 말씀으로 끝나지만 어떤 사본에는 이렇게 추가된 내용이 있다. "
이르시되
너희는 무슨 정신으로 말하는지는 모르는구나 인자는 사람의 생명을 멸망시키러 온 것이 아니요 구원하러 왔노라 하시고"

-
그렇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반대파를 없애는 것이 임무가 아님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는 자들이 우리 편이 아니라고 해서
물리적 폭력으로든 언어적 폭력으로든 그들을 때려눕히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을 교훈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따르며 열정에 가득 찬 그들은 방해하는
세력을 참지 못한다. 그래서 폭력이 따른다. 그들은 가족에게, 교회 안에서, 친구들에게 그렇게 한다. 수백 년의 역사 동안 그러한 사람들이
유대인과 무슬림들을 죽였고, 공산주의자, 마녀와 이교도들과 미국의 원주민을 죽였다.

6.
작은 결론

-
대부분의 폭력은(모든 폭력이기도 하다) 언어에서 시작한다. 예수님은 그렇게 될 수 있다고 경고하신다. 마 5:21-22의 말씀을 들어보라.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 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
따라서 예외 없이 우리 모두는 예수님의 언어교육을 철저히 받아야 한다. 예수님이 자신을 따르던 사람들과 나누었던 대화의 방식을 그대로 모방할 뿐
아니라, 자신을 반대하던 사마리아인들과 나누었던 대화의 기술도 우리는 습득해야만 한다.

-
철저히 몸에 익히지 못하면 우리의 폭력은 언제나 드러나고 만다. 그 산 증인이 베드로이다. 요한복음 18장 10-11절의 기록이다.

"이에
베드로가 칼을 가졌는데 그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 버리니 그 종의 이름은 말고라. 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칼을
칼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
이 부분에서 마태는

"칼을 가진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마26:52)고
했고, 누가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예수께서
일러 가라사대 이것까지 참으라 하시고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
(눅22:51)

-
예수님은 지금 사마리아인들의 냉대 앞에서 앞으로 교회가 불신자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 가를 교훈적으로 가르치고 계신다. 심판은 하나님의 몫이다.
오직 우리의 할 일은 사랑하는 일이다. 원수마저도 사랑하라는 주님의 그 깊은 의미를 파악할 때 교회의 온전한 사명 감당이 이루어지는 줄 믿는다.
하나님 나라는 핍박의 피가 뿌려진 땅에서 사랑의 거름을 먹고 자라는 것임을 한 시도 잊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아멘.

 

  

4강:
1st 이야기- 추종자와의 대화

 

본문:
눅 9:57-10:20

 

1.
길에서 만난 세 사람

-
사마리아의 한 마을에서 냉대를 당한 예수일행이 다른 마을로 가는 도중이었다. 세 사람이 차례로 길 가던 예수를 붙잡고 다음과 같이 말을 건네고
있다.

-
첫째
남자

"어디로 가시든지 내가 따르리이다"(57절)고 하자 이에 예수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말씀했다. 즉, 예수님은 이 남자에게 우리는 최고급호텔에서 묵으며 다니지는 않는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것으로 이 남자와의 대화는 끝났다. 그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예수님을 분명히 따르지는 않은 것이 확실하다. 그는 자신이 기대했던 화려한 여행이 아님을 직감하고 조용히 물러난
것이다.

-
둘째
남자

아마 그 옆에 서 있었던 모양이다. 이번엔 예수님이 먼저 말을 걸었다. "나를 따르라"(59절)는 이 강압적 언사는 무엇인가? 밑도 끝도 없이
예수님이 다짜고짜 명령했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행할 언어치고는 상식을 벗어난 것이다. 그럼에도 대항하지 못하고 핑계를 대며 그 순간을
모면하려고 한 것은 예수님의 권위가 남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순간 당황하며 그는 "먼저 아버지 장례식을 치룬 다음에..."라고
얼버무린다(59절). 이에 기다렸다는 듯이, 이미 그가 핑계를 댈 것을 아시고, 예수님은 "죽은 자의 장례보다 살아있는 자들을 위한 일이 더
중요하다"는 취지의 말씀으로 이 사람의 현실주의적 안주와 게으름을 끄집어내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일은 우리가 먼저 하고 싶은 일을
먼저 하고 난 후로 미룰 수 있는 일이 아니다.

-
셋째
남자

등장한다. 이 남자는 자신은 예수님을 따를 준비가 되어 있는데 아직은 그 때가 아니라고 말한다.(61절). 이에 예수님은 뒤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않다며 그를 보낸다(62절). 다시 말해 "할 수 없지 지금이 유일한 기회인데"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지금 그에게 나타나 같이 갈 것을 말하고 있음에도 그는 자신이 아직 움직일 때가 아니라고 하다니 좀 놀랍지 않은가?

-
예수님은 사마리아를 지나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이 채 시작되기 전에 벌써 세 명의 추종자들을 만나신다. 그러나 그들은 채 열 발자국도 가기 전에
스스로 떨어져 나가고 만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를 따르는 일은 우리가 제시하는 조건대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라 우리가 그분을 따르는 일임을
깨닫게 된다.

 

2.
70인 전도단

-
곧이어 우리는 앞의 세 남자와는 전혀 성격이 다른 그룹의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그들은 12사도들은 아니었지만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
제자들이었다. 그들은 항상 예수님께 즉각적인 순종을 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었다.

-
그렇다면 예수님은 70인 전도단을 파송하기 전에 왜 3명의 추종자들의 사례를 보게 하신 것일까? 그것은 바로 복음전도에 대한 잘못된 세 가지
태도를 가르치려 하심이다. 간혹 우리 가운데엔 전도하는 것을
마치
여행가는 것쯤으로 생각하는 사람들

있다. 그들의 입에는 항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맴돈다. 그러면서 그들은 대도시나 시설이 좋은 장소를 선택한다. 고급의 숙박지가 아니면 그들은
불평한다. 물이 잘 나오지 않는 여관이거나 잘 씻지 못하는 숙박시설이거나 음식이 입에 잘 맞지 않거나 하면 금세 열정은 식어버리고 전도대열을
이탈한다. 그리고 항상 이렇게 말한다. "이 일은 내게 잘 어울리지 않아" 다음으로는
영적으로
죽은 사람이 전도를 하겠다고 나서는 경우
이다.
아무런 영적인 체험이나 지식, 준비도 없이 남이 하니까, 그것이 멋져 보이니까 따라 나서겠다는 부류가 이에 속한다. 예수님의 말씀 중 앞의 죽은
자는 영적으로 죽은 자를 가리키고, 뒤의 죽은 자는 육적인 죽음을 가리킨다. 마지막 남자의 경우는 전도의

때를 자기가 결정하는 사람

예표한다. 이런 사람들은 대부분 지금 당장 전도의 대열에 동참하지 않는다. 늘 다른 이들의 행동을 멀리서 또는 곁눈질로 지켜본다. 여기서 가족은
자신이 지금 합류하지 못하는 변명의 도구로 사용된다. 부모님이 반대하므로 잘 설득하는 것이 효도라고 생각한다며 일단 유보하고,, 혹은 아내가
아파서 병간호가 절실하다는 핑계로 슬쩍 비켜 선다. 그리고 남이 다 기초를 닦아두면 그때서야 비로소 열심히 일을 하는 척 한다. 누군가 그 일을
바라보는 사람은 그가 이 일을 처음으로 시작하고 가장 중심된 인물인 것처럼 볼 수 있다. 마치 자기가 모든 일을 다 한 것처럼 떠벌리고
자랑한다.

-
자, 이제 예수님은 70인을 불러놓고 앞의 세 부류의 전도자들처럼 너희도 그렇게 할 것이냐고 물어보신다. 70이라는 숫자는 물론 세계 열국을
상징하는 숫자이다. 모든 복음이 땅 끝까지 미쳐야 하며, 예수님도 땅 끝까지 직접 발걸음을 하겠다고 말씀하신 것이다(10:1). 한 마디로
너희가 지금 내 말에 순종하여 전 세계를 향하여 즉시로 떠날 수 있느냐 하고 물으신 것이다. 기록은 없지만 제자들 중 그 누구도 '노'라고 말한
사람은 없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앞의 12사도를 보내신 것과 마찬가지로 둘씩 짝을 지어 앞으로 친히 가시려는 각 동네와 각 지역으로 파송을
결행하시는 것이다.

-
그런데 12사도를 파송할 때(마 10장, 눅 9:1-6)와 70인을 파송할 때에는 차이가 있다. 나머지는 똑 같은데 12사도들에게는 귀신을
제어하는 권세와 병을 고치는 능력을 주었지만 70인에게는 그런 것들을 주시지 않은 것이다. 그저 70인 전도단은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다"(10:9)고 전파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무엇 때문일까?

-
우리는 바로 뒤에 나오는 이야기에 눈을 돌려야 한다. 갈릴리 지역의 복음의 3각 지대라고 불리우는 고라신, 벳세다, 가버나움이 복음을 전해 듣고
기적을 체험하고 병 고침을 받고 수많은 은혜를 입었음에도 그들이 회개치 않음에 대한 예수님의 절망적 심판의 예고를 듣게 되는데, 다시 말해
기적을 체험한다고 해서 귀신이 쫓겨 나간다고 해서, 병 고침의 특혜를 누린다고 해서 모두 회개하고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70인 전도단에게 예수님이 바라는 것은 전도는 무슨 희한한 능력이나 귀신 잡는 비법을 행하는 일이 아니라 단지 예수님의
이름만으로도 가능하다는 것을 가르쳐 주신 것이다. 이것은 70인 전도단이 귀환보고를 할 때 분명히 밝힌다. "70인이 기뻐하며 돌아와 이르되,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17절)

-
그렇다. 전도에 필요한 것은 물질도, 특출한 능력도 아니다. 오직 예수님의 이름의 권세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주님은 죽으시기 전에 이 전도의
비법을 가르치고 계신 것이다.

 

5강:
2nd. 행함이 없는 자와의 대화

 

본문:
눅 10:25-37

 

1.
배경설명

-
70인의 전도단은 사마리아 지대에서 성공적인 임무를 수행하고 돌아왔다. 많은 이들이 그들의 성공담을 듣기 위해 주위를 에워쌌다. 그런데 그중에
그것들이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하고 싶은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율법사였다. 헬라어 '노미코스'는 법률학자라는 뜻인데 그가 전문적으로 다루는
법률은 세속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 모세의 법, 즉 토라였다. 하나님의 율법을 해석하고 변호하는 무거운 책임을 지닌 인물이었다.

-
그는 누구보다 성경지식에 밝은 사람이었으므로 지금 자기 앞에 서 있는 메시아를 테스트해야 했다. 왜냐면 종교적인 속임수로 사람들을 미혹하는
미치광이들이 너무 많이 활보하고 있기 때문이었으며, 한편으로 자신이 받은 훈련과 습관 때문에 그는 질문을 하지 않으면 좀이 쑤실 지경이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는 질문을 통해 메시야로 추대 받는 나사렛 출신의 이 사람을 시험해 보아야 했다.

-
예수님이 시험을 받은 것이 이번이 처음도 마지막도 아니었다. 공적 사역을 하시기 전에 이미 예수님은 광야에서 마귀의 혹독한 시험을 받으시었다.
이 시험은 매우 적대적이었고, 포괄적이었고 매우 매혹적인 시험이었다. 유명인사가 되는 것, 능력을 행사하는 것, 권세를 누리는 것은 인간이
거절하기 힘든 가장 치명적인 유혹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생애 말기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또 시험을 받으셨다. 이 시험은 처음 시험보다 더
포괄적이고 엄격한 것이었으며 궁극적인 시험이었다. 과연 예수님은 십자가로 가서 이 세상의 구원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희생할 것인가? 피할 길은
없는 것인가? 피하면 어떻게 될 것인가? 매우 고통스러운 시험이었지만 예수님은 깊은 고뇌 끝에 이 시험을 받아들이신 것이다.

-
그런데 또 하나의 시험, 오직 누가만이 기록하고 있는 사마리아에서의 이 시험은 바로 가장 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는 성경학자가 던지는 시험이었다.
웬만한 성경지식 가지고는 이 사람이 쳐놓은 그물을 빠져 나갈 수 없다. 실력이 없다면 이 자리에서 들통이 날 것이다. 거짓은 언젠가는 드러나게
되어 있다.

-
과연 예수라는 이 청년은 이 위기를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이제 이 율법사와 예수님의 대화를 상고해 보자. 이 대화를 네 개의 장면으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2.
네 개의 장면

장면
1(기)

-
성경학자가 질문을 던진다.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내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
아마도 이것은 매우 기초적이고 핵심적인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이 학자는 분명히 성경에 기록된 영생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들을 꿰차고 있다. 물론
나쁜 질문도 아니다. 그렇다고 쉽게 대답할 질문도 아니다. 묘한 뉘앙스를 가진 간단하면서도 수준을 요하는 이상야릇한 질문이 던져진 것이다.
사람들은 쥐 죽은 듯 조용해지기 시작했다. 왜냐면 자신들의 지식으로는 이 학자가 무엇을 의도하고 던진 질문인지를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
더욱이 이 학자의 질문은 일인칭으로 시작한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느냐?"라는 말은 마치 조언을 구하는 것처럼 위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식의 질문은 지식인들 사이에 유행하는 것들이다. 마치 충고를 구하는 것처럼 가장하면 자신이 조사하고 있는 상대방이 경계를 풀고 불안해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몰아붙이듯 질문을 하면 답변을 듣지 못할 소지가 있다는 것을 미리 계산하고 행하는 고도의 세련된 질문이다.
심리적으로도 우리는 조언을 구하는 요청을 거절하지 못한다. 이런 질문에는 존경심이 담겨 있기에 질문 받는 사람을 일단 기분 좋게 만든다.

-
하지만 그는 예수님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예수님은 그의 이런 질문에 꼭 같은 방법으로 다시 질문을 한다. "하나님의 율법에는 무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까?" 그러자 율법사는 일순 당황하고 말았다. 갑자기 판이 바뀐 것이다. 자신이 먼저 성경에 대한 지식 여부를 점검당해야만 했다. 그리고
일방적인 질문과 답변, 그리고 미리 구상한 예수님의 허점을 공격하면 되는 사전 시나리오가 흐트러진 것이다. 더 이상 우월한 질문과 그에 대한
열등한 답변이 오가는 관계가 아니라 대등한 대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예수님은 단 한마디의 질문으로 율법사의 의도를 봉쇄하고 그의 답변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장면
2(승)

-
그러나 학자 또한 만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성경의 구절을 기억하고 예수님께 대답한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사랑하라".

신명기와 레위기를 섞어 놓은 말이다. 정확한 그의 답변에 대해 예수님은 후한 점수를 준다.
"좋은
대답이다. 네가 그렇게 하면 영생을 얻을 것이다"

라고 평해 주신다.

-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이 장면에서 중요한 것은 학자와 예수님의 위치가 바뀌어졌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했던 이 학자는 어느새 자기가
예수님에 의해 시험 당하고 있는 것임을 알게 된다. 조사자가 피조사자가 된 것이다.

-
또 하나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이 시험은 많은 군중이 쳐다보는 가운데 열린 공개시험장이었다는 것이다. 시험결과는 모두를 흡족케 하는 것이었다.
예수님과 학자 모두 시험을 잘 통과했다. 이제 다시 대등한 입장이 되었다. 두 사람 모두 정통성을 인정받았고 하나님의 길을 가르칠 자격을
검증받았다.

 

장면
3(전)

-
그런데 학자의 입장은 달랐다. 자기가 얻고자 한 것을 예수님으로부터 아직 얻지 못했다. 그래서 두 번째의 질문을 던진다.

"그렇다면 선생님은 이웃을 어떻게 정의하십니까?"

좋은 질문이다. 이 정도의 날카로움이 있어야 학자다운 것이다. 예리한 통찰력, 분석력, 그리고 반론에 대한 변증과 재반론의 독창성, 논리의
승화와 결합 등 이런 것들이야말로 지식인들의 전매특허이다.

-
하지만 누가는 이 점에 있어서 학자의 질문에는 이런 동기가 있다고 고발한다.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
무슨 말인가? 학자는 1라운드에서 예수님과 대등한 질의응답을 주고받았지만 사실 시골 촌뜨기와 무승부를 겨루었다는 것에 마음이 편치 않은
것이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빠져나갈 구멍'을 찾고 있었다. 자칫하다간 본전도 건지지 못할 것이라는 음울한 예감이 전신을
감쌌다.
(어쩌면
인생은 정통성만으로는 다 해결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비판받는다는 생각이 들면 우리는 얼른 일어나서 방어하거나 변명하기
일쑤다. 자기합리화, 자기정당화는 심리적 방어기제에 해당한다. 이 방어기제가 가장 잘 쓰여지는 경우는 상대방을 오히려 공격해서 그 사람을 방어적
위치로 갖다놓으면 되는 것이다.)

-
이 학자는 지금까지 자신의 지식이나 사고의 과정에서 아무런 문제가 없이 살아왔다. 그는 토라를 속속들이 잘 알았고 정확하게 인용할 줄 알았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불리하게 작용되는 상황에 처했을 때 자신을 정당화하기에 급급한 인물에 불과했다. 그것은 슬쩍 자신을 낮추며 총고나 조언을
구하는 저자세를 취하는 것이다. 실제로는 예수님 위에 서서 그를 지배하며 자신의 의도대로 이 상황을 끌고 가고 싶었지만 현실은 그가 의도한대로
굴러가지 않은 것이다.

-
그는 속으로 깜짝 놀랐거나 일순 당황하여 다른 질문을 불쑥 던지고 말았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그는 속으로 참 좋은 질문이라고
생각하며 이 정도면 앞의 것을 만회할 수 있을 것이라 여기며 스스로를 칭찬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가 만약에 "하나님이 누구입니까?"라고 물었다면
예수님과 그는 성경구절을 서로 인용하며 용호상박으로 겨루었을 것이다. 그것은 학자가 바라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렇게 되면 평생을 성경연구에
몰두한 그의 우월성이 입증되지 않으므로 답변하기 매우 기본적이면서 답변하기 곤란한 질문을 던져야 했던 것이다. 사실 이웃이라는 개념만큼
답변하기가 모호한 것도 없다. 이런 추상적인 것은 학자의 입장에서 토론하기가 매우 적절한 대상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예수님에게로 걸려드는 질문이
될 줄을 그는 모르고 있었다.

-
예수님은 그를 간파하고 있었다. 예수님은 만면에 웃음을 머금고 그를 향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심으로 그에게 이웃이 누구인지를 가르친
것이다. 예수님은 이 이야기를 사마리아의 어는 길가에서 들려주시었지만 이는 유대인 종교 전문학자에게 들려주신 이야기이다. 물론 주위를 둘러싼
많은 유대인들도 들었을 것이다. 하나님 말씀은 한 사람이든 여러 사람이든 동일하게 적용된다. 중요한 것은 이 이야기는 학자 뿐 아니라 심지어
70인의 전도단과 주위를 에워싼 무리들 모두에게 그들이 가지고 있는 기존의 고정관념이나 편견, 즉 이웃은 내편 또는 내 민족, 같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 정도로 알고 있던 이 사람들에게 진정한 이웃은 선을 행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각인시키고 있는 것이다.

-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고 있었다. 예루살렘(해발 760m)은 여리고(해발 -250m)보다 약 1km 높은 지대에 위치해 있고
거리상으로는 약 36km이다. 중간에 광야 황무지가 가로놓여 있고, 군데군데 동굴이 있는 가느다란 협곡을 지나야 한다. 이 길은 구불구불하여
산적들의 은신처로 적합하고 강도와 살인이 빈번히 행해진 길이었다. 이 길을 한 유대인이 걸어가다가 강도의 습격을 받아 죽도록 두들겨
맞고
(아마
이 사람이 사마리아인이었으면 살해당했을 것이다)

모든 것을 다 빼앗긴 채 길가에 버려졌다. 마침 그 옆을 제사장이 지나갔다. 그리고 레위인이 지나갔다. 그러나 그들은 이 사람을 돌보아줄 여유가
없었다. 그들은 너무 바빴으며 율법 상 시체를 만지면 아니 되었다.(레21:1-3). 그들은 율법의 형식은 가지고 있었으나 율법의 핵심인 사랑을
빠트린 사람들이다. 그런데 사마리아인이 나타나서 그의 상처를 씻어주고 소독하고 약을 발라주고 자기 당나귀에 태워서 여관으로 데려가서 숙박비를
지불하고 그를 맡긴다. 그리고 여관주인에게 치료비가 부족하면 돌아오는 길에 들러서 지불하겠다는 약속까지 했다. 유대인도 아닌 사마리아인이 쓰러진
유대인을 구하기 위해 선을 행한 것이다.

 

장면
4(결)

-
이 이야기를 들려주면서(아마 예수님이 만들어낸 이야기일 것이다) 예수님은 이웃이 무엇이라고 정의하지 않았다. 그냥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들려주시었다. 그리고 그 학자의 질문을 거꾸로 뒤집어 놓으신 것이다 "누가 나의 이웃인가?"라는 학자와 우리 모두의 질문을 예수님은 "나는
이웃이 될 수 있는가?" 또는 "나는 누구의 이웃인가?"라는 질문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
예수님은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나서 조용히 낮은 음성으로 따뜻한 목소리로 그에게 이렇게 묻는다.
"누가
버려진 사람의 이웃인가?
"
이에 학자는 다 포기한 듯한 음성으로 "
선을
행한 자입니다"
라고
고백한다. 그 말은 학자의 회심의 토로이고 신앙의 고백이었다. 드디어 예수님은 이거대한 질문에 대한 결론을 내린다. 예수님은 그를 향해 짧게
명하신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37절)

-
명사로서의 사랑이라는 단어는 매우 복잡한 개념이고, 다양한 토론의 대상이다. 그러나 사랑이 동사가 되면 더 이상 이 단어는 이해하거나 탐구하거나
토론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동사는 실천하는 것이며 행동으로 옮겨져 삶으로 살아내어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 이야기의 최종 단계에서 두 가지
동사, 즉
가라(πορευου),
하라(ποιει)

사용하신다. 이 단어는 더 이상 종교적인 단어가 아니다. 더 이상 그 자리에 머물러 있어야 할 단어가 아니다. 오직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이룰 수
있는 실천적 동사인 것이다. 당신에게 사랑이 있는 가? 그렇다면 지금 즉시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라. 그것이 앉아서 뜻을 다지고 있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이 단순한 가르침이 모든 토론을 종식시키고 있는 것이다.

-
과연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가서 행하였을까?

 

3.
결론

-
전도의 과정에서 우리는 이와 같이 학식있는 사람들과도 만난다. 그들은 지식과 노력, 성실함, 그리고 도덕적이고 윤리적이며 스스로 의롭다고
여긴다. 그들은 스스로 이해하지 못하거나 자신의 생각과 다른 주장에 대해 토론하고 논박하여 자신이 내세우는 주장이 옳고 우월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 한다. 우리를 화나게 하고 짜증나게 하는 부류들이다.

-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와 달랐다.

첫째,
여유롭고 부드럽게 그를 대하시었다. 둘째, 그가 질문하는 것을 막지 않았으며 경청했다. 셋째,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의도를 간파하고 있었다.
넷째, 그렇다고 예수님은 논리를 들어 반박하지 않았다. 하나의 예화를 들어 비유적으로 말씀하시었다. 마지막으로 상대가 수긍하자 즉시로 행동하도록
명하시었다. 그것은 정확하고 명쾌한 결론에 대한 해답이었다. 사람들은 어쩡정하거나 불투명한 것을 반기지 않는다. 명쾌하고 시원한 결론을 원한다.

-
불신자들에게 논리로 다가서지 말라. 일단 그들의 의견을 경청하고 조용히 예를 들어 이야기를 들려주고 스스로 생각하여 옳고 그름을 판단하도록
유도하라. 스스로 인정하는 것만큼 효과적인 굴복은 없다. 아멘.

 

 

6강:
3rd. 분주한 사람과의 대화


10:38-42

 

1.
낙인찍기에서의 해방

-
선한 사라미아인의 비유를 듣기 전까지는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사마리아인은 그들의 이웃이 아니었다. 사마리아인은 더러운 잡족이며 상종하지 말아야
대상이며, 만나면 눈인사도 주고받지 말아야 할 기피의 대상으로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었다. 이러한 낙인찌기는 사단의 교묘한 술책중의 하나이다. 이
술책에 미혹된 세상 사람들은 너무나 간단한 용어로 다른 존재들을 매도하기 일쑤다. 요즘 들어 우리 사회에도 이런 낙인찍기가 좌파들에 의해
횡행하고 있다. 좌파들에 의해 조합된 용어들에 의해 한 번 낙인이 찍히면 수많은 피해가 발생한다. 가장 대표적인 것들을 사례로 들어보자. 우선
좌파들의 주공격대상은 미국이다. 좌파들은 반미를 애국적인 것으로 치부한다. 노무현의 그 유명한 말,
'반미면
어때?
"
이 한 마디로 대부분의 청소년들이 미국은 나쁜 나라라는 선입견을 가지게 되었다. 광우병 파동은 그런 배경에서 터진 사건이다. 미국산 쇠고기라는
것을 매개로 그들은 열심히 미국을 낙인찍는다. 다음으로 그들은
안티기독교라는
용어를 만들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에 앞장선다. 안티운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목회자와 교회 내부의 비리들을 까발리고 은근히 기독교가 사회발전의
장애물인 것처럼 선전한다. 이외에 보수언론을 공격하기 위해
조중동으로
묶어내고 이명박 대통령을 음해하기 위해
쥐박이,
천재
등으로
매도한다. 교육현장에서는 전교조 교사들이
참교육이라는
용어를 조합해 학부모들을 현혹시키고 학생들에게 이념교육을 시킨다. 그들은 한국의 역사를
친일파
득세하고 애국자가 몰락하는 부끄러운 역사라고 매도한다. 나아가 한나라당을
딴나라당으로,
보수세력을
수구꼴통으로,
그리고 없어져야 할 세력으로 치부한다. 그들은 항상 사회를 가진 자와 못가진자의 대결로 보고, 자신들의 이상적인 나라를 만들기 위해 총궐기하여
갈아엎어야 하며, 이를 위해 노동자, 서민, 사회적 약자들이 똘똘 뭉쳐 혁명을 일으켜야 한다고 공공연히 활개를 치고 있는 것이다.

 

-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저주의 굿판을 슬쩍 비켜나서 '누가 우리의 이웃이냐?'라는 논쟁만이 들끓고 있던 유대사회와 그 지도자들에게 '당신은 누구의
이웃이 될 자격이 있습니까?' 하고 질문을 던짐으로서 우리가 가지고 있던 기존의 이웃의 개념을 완전히 개혁시키고 있다. 사마리아라는 낙인을
유대인들 머리에서 지워버리신 것이다. 그럼으로 예수님은 이제 우리가 가지고 있던 편견이나 왜곡된 정보들을 수정하고 우리 자신이 만나는 모든
사람을 낙인에서 해방시키고 정상화시키기를 원하신다. 그것은 나의 이웃을 이상한 존재 또는 대상이 아니라 인격화시키어 나와 같은 존재로 바꾸는
일이다. 멀리만 느껴지던 이웃을 나와 삶을 함께 나누어야 할 진정한 이웃으로 다시 만드는 일이다. 나와 마주치는 사람들이 모두 진정한 인격으로
다시 새롭게 되어질 때 드디어 나는 그들을 다시 바라보는 것이다. 드디어 내 눈과 마음이 수정된 것이다. 내가 먼저 저들의 이웃이 되어야 한다는
깨달음으로 우리는 진정한 이웃과 더불어 사는 참된 사회를 건설하는 첫 삽을 떠는 것이다.

2.
마르다의 집과 나사로의 집(?)

-
예수님은 율법사와의 이웃에 관한 대화를 끝내시고 다시 여행길에 오르신다. 그리고 어느 마을에 도착한다. 대부분 그렇듯이 예루살렘이나 주요
도시들을 제하고선 그냥 평범한 시골마을들이다. 대부분의 성경해석은 지금 예수님이 도착한 곳은 친구 나사로의 집이 있는 베다니로 추정한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약 3km 떨어진 감람산 동편 기슭에 자리잡은 작은 마을이다. 이곳에 나사로의 집이 있고, 동생 마르다와 마리아가 같이
살고 있다. 유월절 기간에 예수님이 이곳에 머무셨고(마21;17, 26:6), 죽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났으며(요11장), 마리아가 향유를
부었고(요12:3, 마26:6, 막14:3), 예수께서 승천하신 곳도 베다니 앞이었다(눅24:50)

 

-
그런데 지금 누가복음 상에 있는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야기는 시간적으로 다른 복음서의 기록보다 앞서는 것이다. 지금 예수님은 유월절이 시작되기
전인 기간에 좀 여유를 가지고 사마리아와 그 인근의 지역들을 둘러보고 있다. 아직 예루살렘 근처에 당도치 못하였다. 그래서 이곳에 등장하는
마르다와 마리아는 다른 인물일 가능성이 높다는 견해도 만만치 않다.

 

-
물론 요한복음에 의하면 예수님이 갈릴리를 출발한 것은 초막절 때(유월절 6개월 전)이다(요7:10). 누가는 단지 승천할 기약이 차가는 때(눅
9:51)라고 했으며 출발하자마자 사마리아의 한 촌에 들어갔다고 기록했다. 아무튼 초막절은 유대력으로 일곱째 달(9-10월)로 장막절, 수장절로
불리며 광야생활을 기념하기 위해 7일간 초막에서 생활하는 명절이다. 그리고 아홉 번째 달(11-12월)의 수전절을 맞아 솔로몬 행각에서 예수님은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요10:30)라는 놀라운 설교를 함으로서 유대인들이 돌을 들어 예수님을 칠만큼 분노를 촉발시킨다. 그러자 급히 요단강
저편 세례 요한이 세례 주던 곳(오리겐은 이곳을 베다바라로 보고 있다)으로 피신한다. 그 다음 사건이 바로 나사로의 죽음 사건(요 11장)이고
이로 인해 예루살렘공회가 열리며, 요 12장으로 가면 바로 유월절 6일 전의 시간이 되고 이 때 다시 베다니에 이르시고, 마리아의 향유사건이
이어지는 것이다.

 

-
그러므로 누가복음 10장의 마르다와 마리아가 요한복음 11-12장에 등장하는 동일인물인지 분명치 않아 보인다. 특히 누가복음에는 나사로의
집이라고 하지 않고 마르다의 집이라 한 것은 다른 인물일 가능성을 높여 준다. 알다시피 나사로는 예수님의 사랑을 받는 친구였다. 그런데 역사가인
누가가 굳이 나사로의 집이라 하지 않고 마르다의 집이라 한 점은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다른 복음서에는 예수님이 직접 나사로의 집을
찾아갔고 이 소식을 듣고 마르다가 먼저 나와 예수님을 영접했다. 즉, 예수님은 이미 나사로의 집을 알고 있었다는 뜻이 되지만, 누가복음에는
마르다라는 여인이 예수님에게 와서 자기 집으로 영접했다고 했으므로 예수님은 이 집을 처음 방문한 것이 된다.

 

-
그리고 요한복음12장 1-7절에 나오는 잔치는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있는 일인데, 이를 미루어 보면 마르다는 시몬의 자녀일 가능성이
높다(마26:6-13, 막14:3-9)

 

3.
분주한 사람과의 대화

-
가장 경계해야할 것은 내적 결핍의 상태에서 열정만을 가지고 주의 일을 한다고 분주한 사람의 신앙이다. 이것은 잘못된 결과를 초래하기 일쑤다.
왜냐면 신앙은 먼저 믿음에 의해 터가 굳어지고 행위에 의해 입증되는 순서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둘은 둘이 아니라 하나이고, 어느 것이 덜
중요한 것이 아니지만 그러나 내적인 중생함이 먼저이고 다음이 신앙행위로 이어지는 것이 순리이다. 개혁주의는 신자들의 바른 신앙을 위해 균형과
조화를 기반으로 늘 자신을 개혁하는 입장을 취한다. 원칙을 고수하되 시대적 변화에 개방적이며 융통성 있게 적응하면서 발전해 가는 신학행위로
무장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행위 이전에 믿음을 더 강조한다. 모든 가짜신앙은 행위구원을 강조한다. 이 땅에서 자신의 공로를 바탕으로 업적을
쌓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 지은 죄를 상쇄하고자 하는 보상주의를 취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공로에 의해 믿음과 구원을 선물로 주시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우리에 의해 좌지우지 되시는 분이 아니시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긍휼하심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자신의 공로나 선행들, 수도적 삶과 행위적 신앙으로 구원을 외치며 지금도 부지런히 땀을 흘리는
신앙인들이 있다. 그들은 지금도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정신없이 일하고 있다. 잘못된 열심을 가지고 오히려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것이
아닐까 하여 두렵다.

 

-
마르다는 바로 이런 사람을 대표한다. 마르다는 아람어 마르(주인)의 여성형 명사인 마르타, 즉 '여주인'을 뜻한다. 원래 주인은 남자의 몫이다.
유산의 상속은 장자에게 주어지므로 집안의 주인은 남자가 대부분이다. 히브리어 '아도나이'는 흔히 상급자들에게 말을 할 때와 가리킬 때
사용되었다(창23:6, 24:9). 대신 히브리어 '바알'은 소유자, 주인, 남편, 주의 의미를 포괄하는 단어이다.(에1:17, 전5:11).
구약의 율법은 종과 주인의 관계를 명확히 하고 있다.(레25:44-46). 따라서 존경받는 주인계급은 특권을 누렸다. 그러나 성경은 모든 사람의
평등성에 근거해 주인이라 할지라도 종들에게 자비롭게 대해주도록 지침을 내렸다(신5:14-15, 욥31:13-15)

 

-
간혹 남편이 죽거나 궝석인 경우 여자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 그런데 여자 주인은 남자만큼 대접을 받지 못한다. 부계중심의 사회적 전통에서 여성의
권리는 남성에 비해 우월한 지위를 가지지 못한다. 이름만 주인이지 여전히 종과 같이 일을 열심히 해야 한다. 마르다는 지금 그런 입장이다.
예수님을 초청해 놓고 대접하기 위해 정신없이 일하고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마르다가 이렇게 일을 준비하고 있을 때, 이미 예수님은 마루에
걸터앉아 사람들을 향해 말씀을 나누고 있었던 것이다. 이 때 얄밉게도 동생인 마리아는 예수님 발밑에 앉아 예수님의 말씀을 한 자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온 정신을 몰두하고 있었다. 마르다는 지나치며 마리아를 향해 눈치를 주며 와서 일을 좀 도우라고 계속 사인을 모내지만 마리아는
본척만척한다. 마르다는 이런 마리아에게 은근히 부화가 났다. 나는 땀을 흘리며 일하는데 저것은 일도 하지 않고 예수님 옆에 탈싹 붙어 앉아
있으니 배알이 꼬이기 시작한 것이다.

 

-
그만 마르다의 분기가 터져버렸다. 마르다는 하던 일을 멈추고 예수님께 이렇게 부탁하며 마리아의 잘못을 고자질했다.

"주님,
내 동생을 좀 보세요. 나는 지금 열심히 일하는데 동생은 나를 도와주지 않습니다. 그러니 동생에게 언니를 도와주라고 말씀해
주세요".


부탁은 은근히 남의 잘못을 빗대어 이야기할 때 쓰는 전형적인 수법이다. 만약 마르다의 심기가 비틀리지 않았다면 그냥 "마리아, 미안한데 언니 좀
도와줄래?"하면 될 것이었다. 그런데 마르다는 마리아의 행위가 못마땅하여 시기심과 질투심이 생긴 것이다. 그래서 마르다는 동생에 대한 질투심을
풀기 위해 지금 예수님을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마르다에 의해 예수님과 사람들과의 대화가 중단된 것이라는 점이다. 어떤 목사님이 설교 도중에 자꾸 울음을 터트리는 아기
때문에 신경이 거슬려 하다가 끝내 아기가 울음을 멈추지 않자 그만 소리를 버럭 지르고 말았는데 이로 인해 그날 설교는 엉망이 되고 그 일로
말미암아 교인들의 불만이 쌓여가고 결국 사임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물론 설교 도중에 화를 낸 목사님도 잘못이지만 우는 아기를 데리고 설교를
방해한 엄마도 잘못이다. 설교 도중이나 대화중에 자꾸 끼어들고 남의 이야기를 자르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특히 여성들의 대화법은 경청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이야기를 잔뜩 늘어놓기 일쑤인데 듣는 사람이 여간 피곤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의 예수님이 누구이신가? 마르다의 갑작스러운
등장에도 예수님은 조금도 영향을 받지 않으시고 조용히 마르다를 이렇게 타이르고 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나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4.
교훈

첫째,
예수님은 마르다의 이름을 두 번 불렀다. 그것은 마리아의 삐뚤어진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함이다. 흥분해 있는 사람은 일단 마음을 진정시키는 일이
최우선이다. 그래야 대화가 되기 때문이다.

둘째,
많은 일로 인해 근심하며 바쁜 것은 좋지 않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일이 많으면 마음도 바쁘고 마음이 바쁘면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기 쉽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놓치거나 마치지 못하면 늘 머릿속에 그 일이 남아 마음을 근심시킨다. 바쁜 목사가 나쁜 목사라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셋째,
네가 좋아하는 일을 하라고 충고하시는 것이다. 지금 마리아는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일을 선택한 것이라고 부연 설명까지 하신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영접해 놓고 무엇을 대접할 까 분주하지만 정작 말씀 듣는 일을 소홀히 하고 있다. 가장 중요한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이다. 이 일은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마르다는 말씀보다 일하는 것을 택하였다. 이유는 그녀가 바로 여주인이기 때문일 것이다. 주인이라는 자리는
늘 시키는 일에 익숙하다. 그리고 지나친 책임의식으로 자기가 아니고는 다른 사람의 일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마리아는 그런 언니의 기질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언니하고 일하면서 티격태격하느니 일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하는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을 선택한 것이다. 천국은 가장
좋은 선택을 한 사람의 것이다. 아멘.

7강:
4th. 표적을 구하는 자와의 대화


11:14-32
,(마
12;22-32, 막3:22-30)

 

1.
초점

-
마태는 유대인들과 예수 간의 충돌이 거듭되고 있는 상황 가운데 이를 포함시키고 있으나, 누가는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외식에 대한 예수의 책망
기사(37-54절) 앞에 이를 수록함으로서 유대인들이 왜 예수를 대적하는 지를 밝히고 있다. 그러나 마가는 이 둘과 달리 본 기사를 예수의
천국복음사역 및 하나님 나라에 관한 여러 비유(막4:1-34) 사이에 수록하고 있다. 이는 예수의 가르침에 대한 유대인들의 반응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기 위함이다.

-
하지만 이 같은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의 초점은 예수의 권위와 권능의 근원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특히 누가에 있어서 이 초점은 더욱
강조되어지는데, 누가는 예수의 초자연적 능력을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를 입증하는 요소로 부각시키고 있다.

-
한편 마태와 마가는 성령 훼방죄 문제를 바알세불 논쟁과 연결시켜 언급하고 있는데 반해 누가는 성령 훼방죄의 문제를 12:10에서 달리 다루고
있다. 결국 같은 예수님의 사역에 대해 서로 강조하는 바가 무엇이냐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참고>
바알세불(Beelzebub)

-
고대 수리아 인이 숭배하던 신으로 구약명칭은 바알세붑이다.
주인,
두목, 남편

뜻을 가진 바알과
파리라는
뜻의 세붑의 합성어로 희생제물 주변에 달라붙는 파리를 좇아내는 신이라는 뜻이다. 신약시대에 세붑과 비슷한 발음이지만
이라는
뜻을 가진 세불로 바뀌어 졌는데 이는 이방신이나 사단에 대해 유대인들이 똥의 신, 혹은 불결한 신이라고 조소하고 경멸했기
때문이다.

 

2.
본문해설

 

1)
벙어리귀신(14)

-
인간의 교만을 심판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인간의 언어를 혼잡케 하셨다.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창11:4)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7)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9)

-
오순절 날 성령의 강림으로 다시 언어가 회복되었다. 이것은 인간의 언어가 회복된 것이 아니라 창세기에서 묶였던 영적 언어가 성령에 의해 다시
풀렸다는 의미이다.

-
벙어리는 유전적인 요인이 대부분이지만 여기선 귀신의 역사임을 말해준다. 이것은 영적인 측면에서 살펴볼 때 묶여진 죄인들의 영적 언어를 상징한다
할 수 있다. 우리 모두 성령세례를 받기 전에는 영적인 벙어리였다는 것이다. 본시 하늘의 언어가 있었다면 인간은 범죄와 타락과 하나님의 심판으로
그 언어를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성령강림은 새로운 언어가 주어진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영적 언어의 회복을 예표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성령강림과 함께 방언으로 나타난 이 언어에 대해 웨스트민스터의 리차드 개핀 박사는 일회성 사건으로 방언은 이후로 사라졌다고 선언하고 있다.
이때의 방언은 각자의 지방언어로 말하는 것이었는데 언젠가는 모두가 말하고 알아들을 수 있는 하나의 언어로 통일된다는 것을 미리 보여준 것으로 볼
수 있다.

 

2)
세 부류의 사람들(15-16)

-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자 벙어리가 말을 하게 되었는데, 여기서 세 가지 다른 반응이 나타난다. 첫 번째는 기이히 여긴 사람들이고, 두 번째는
전혀 다르게 해석하는 사람들이고, 세 번째 그룹은 믿지 못하여 한 번 더 표적을 보여 줄 것을 요청하는 즉, 예수의 능력을 시험하고자 하는
세력들이다.

-
첫째
기이히 여긴 사람들은 있는 그대로 보는 사람들이다.
눈에
보이는 대로 믿는 사람들이라 속에 담긴 의미나 상징성에 무지하다. 그래서 약간의 해석을 붙여주고 그럴듯하게 포장하면 영향을 받아 속아 넘어가고
부화뇌동하기 쉽다. 반면에 한편으로는 순진하고 소박한 일반 사람들의 특성을 나타내 보인다.

둘째,
귀신의 왕인 바알세붑과 비교하며 예수님의 권위와 권능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해석하는 부류이다.

이들은 이미 그들 마음에 예수님이 귀신에 속한 사람이라는 편견이 자리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확인하거나 검증하지 않고 자기가 믿는 바대로
말하고 까부는 자들이다.

다음으로
여전히 의심을 가지고 예수를 시험하여 더 큰 표적을 구하는 부류이다
.
감히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하는 무모한 자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어떤 표적을 보여 주어도 믿지 않을 자들이다. 이들의 욕구를 채울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들은 언제나 욕구불만족이다. 언제나 더 크고 많고 좋은 것을 요구한다. 예수님은 이런 표적을 구하는 자들을 매우 경계하시고
싫어하시었다.

-
세 부류의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이 구약에서 예언된 바로 그 메시야라고 믿는 사람이 없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권위와 권능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있음을
눈치 채는 사람이 없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믿음이 있는 자가 하나도 없기에 예수님은 여기서 축귀의 사역을 행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3)
저희의 생각을 아시다(17)

-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시기에 모든 것을 아신다.(계2;23) 말씀이 성육신하신 예수님은 자신이 직접 인성을 취하심으로 누구보다 인간의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시고 알고 계신다. 예수님은 유다가 자신을 팔 것을 이미 알고 계셨다. 베드로가 새벽닭이 울기 전에 자신을 세 번 부인할 것을
아셨다. 바리새인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질문하는지를 아시고 그들을 꾸짖거나 교훈하시었다.

-
히 4:12에는 말씀이신 예수님은 우리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신다고 했다. 감찰하다는 히) 라아이고, 헬) κριτικος 인데 이는 영어로는
be able to judge 로 번역된다. 이는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더러는 판단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그것은
판단하는 권한은 오직 주님의 것이라는 점이다. 섣부른 판단으로 잘못된 결과를 낳는다면 돌이킬 수 없기 때문이다.

4)
예수님의 변증(17-26절)

-
예수님은 가장 완벽한 변증가이시다. 변증은 비 진리의 공격에 대한 진리의 설명이자 방어이다. 그러므로 진리의 변증은 완벽하고 온전하며 모순이
없다. 비 진리의 공격과 대적은 논리적이지 못해 자체적으로 모순을 가지고 있으며, 진리에 대하여 불순한 동기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비 진리의
사람들은 공격적이고 파괴적이고 비난과 저주, 왜곡과 변명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좀처럼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의
귀는 막아 놓고 진리의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다며 늘 불평한다.

-
첫째, 예수님은 그들의 언행은 평화를 위함이 아니라 분쟁을 위함이라고 지적한다. 그리고 분쟁의 결과는 멸망이라고 말씀하신다(17절)

둘째,
예수님이 귀신의 왕 바알세불의 힘을 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는 주장에 대해 이렇게 변증하신다. "만일 사단이 스스로 분쟁하면 저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18절) 이 말씀은 다시 말해 어떻게 같은 편끼리 싸울 수 있느냐며 자신은 사단의 편이 아니라는 것을 비유적으로 말씀하시는 것이다.

셋째,
예수님은 자신은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가 임한 것이라고 선포하신다.(20절) 그것은
지금까지 너희는 사단의 나라에서 살았다는 것이 되고, 사단이 너희의 재판관이 되어 모든 것을 행사했다는 것을 분명히 지적하신
것이다.

넷째,
예수님은 자신이 사단보다 더 강한 자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하나의 비유를 든다. 비록 지금까지 사단이 집을 지키고 있었지만 더 강한 주님이
오시어 이들을 무장 해제시키고 사단의 소유된 것을 다 나누어 준다는 이야기이다.(21-22절). 그러므로 지금 주님과 함께 할 것을 요구하신다.
함께 할 때 주님이 사단으로부터 탈취한 것을 분배받을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그렇지 않은 자는 주님을 반대하는 자로 간주된다고
경고하신다(23절). 너무나 분명하고 명쾌한 논리가 아닐 수 없다.

끝으로,
예수님은 사단에 속하였던 나라를 해방시키고 사단의 권세를 추방시켰지만 그들은 언제든지 다시 재무장하여 공격해 온다는 것을 알려주심으로 늘
경각심을 가지고 근신하고 깨어 있어야 함을 주지시키고 있다. (24-26절)

 

5)
한 여인의 엉뚱한 믿음

-
이 때 갑자기 한 여인이 등장한다. 목소리가 어찌나 큰지 주위 사람이 다 들을 수 있도록 이렇게 외친다. "당신을 먹인 젖이 복
되도다"(27절). 참 엉뚱한 여자다. 복의 근원이 예수님 자체가 아니라 예수님을 키운 어미라고 해석하는 것이다. 진리에 대한 바른 해석도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지혜로 행하지 않으면 다른 해석을 낳고 다른 교리를 만들어 전혀 다른 목표를 향해 열심히 달려가는 꼴이 되고 만다.

-
이에 예수님은 간단히 대답한다. 결코 무시하고 지나치는 것이 아니라 친절히 답한다. 이것이 우리와 다른 점이다. 잘못된 생각을 가진 사람의
생각을 고쳐주시고 계신 것이다. 진정 복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라고 가르쳐 주신 것이다.

-
그런데 그 여자가 말귀를 알아들었는지 그렇지 못했는지는 알 수 가 없다. 누가는 그 부분은 기록하지 않았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을 들은 그
여인은 반드시 깨달았을 것이다.

 

3.
<결론> 표적을 구하는 이들에 대해

-
이제 예수님은 이 사건에 대해 결론을 내리신다. 벙어리 귀신을 좇아내어 다시 말문을 열어주신 예수님은 그것이 하나님의 권능에 의한 것임을
밝히지만 사람들은 하나님을 생각하기보다 우선 눈에 보이는 표적을 더 우선시하는 어리석음을 보인다.

-
이에 예수님은 분개하신 모양이다. 갑자기 언성이 높아지신다. 대성일갈하신다.

'하나님께서
너희를 불쌍히 여기시어 벙어리도 다시 말하게 하시는 은혜를 베푸심에도 단 한 사람도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감사하거나 경배하지 않으니 너희는
정말로 악한 세대요, 구제 불능이구나'

-
그리고 단호히 그들의 요구를 거절하신다.

"너희에게 보여줄 표적은 요나의 표적 밖에 없다."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인가? 너희도 요나처럼 고래 배 속에 들어가 보아야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아는 자들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
끝으로 예수님은 이렇게 악한 세대가 반드시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선포하신다. 참으로 무서운 경고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의 반응은 여전히
묵묵부답이다. 차라리 니느웨 사람들은 요나의 복음을 듣고 회개하여 화를 면하였지만 지금 예수님 앞에 있는 사람들은 요나보다 더 큰 이의 권능을
목격하고도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회개하지도 않고 있다. 오직 그들이 받을 것은 심판 때에 정죄뿐이다.

 

-
오늘날 많은 이단들이 표적을 행사하며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유혹하고 미혹시키고 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이단교회들이 행사하는 거짓 이적과 표적들,
치유와 방언들, 능력 행함 등에 속아 왜 이단이냐고 항변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사단에 속한 능력이 대부분이다. 항상 사단은 자신의 능력에 대해
대가를 요구한다. 그 대가는 물질이거나 몸이거나 전적인 희생이거나 광적인 추종자가 되는 것과 종이 되는 것들로 나타난다. 심한 경우 직장도 그만
두 고 집 팔고 이혼하고 이단의 괴수를 교주처럼 떠받들고 미친 삶을 살아가게 된다.

-
그러나 성경은 표적이 반드시 믿음으로 연결이 된다고 말하지 않는다. 홍해 기적을 체험하고도 배신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부지기수다. 예수님의
오병이어 기적을 체험하고 배 타고 가버나움까지 쫓아 왔지만 더 이상 육의 양식은 주어지지 않고 이제부터 영의 양식을 먹으라고 하시자 언제
그랬냐며 모두 돌아가고 말았다. 그래서 예수님은 표적만을 보고 좇는 무리들을 몹시도 싫어하시었다. 그들은 믿음을 구하고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축복만을 구하는 이기적인 자들이기 때문이다. 아멘.

 

   

8강:
5th. 의도를 숨긴 자와의 대화


12:13-34

 

1.
배경

-
누가복음 11장에 들어서자 예루살렘을 향한 예수님의 발걸음이 점점 빨라진다. 먼저 예수님은 한 제자의 요청을 받고 주기도문을 가르친
다음(1-13), 바알세불논쟁을 겪으시고(14-36), 한 바리새인의 집에서 함께 점심을 먹다가 그들의 외식과 겉치레에 대해 따끔한 질책을
내린다(37-44). 이에 한 율법교사가 왜 자기들을 모욕하느냐고 문제를 제기하자 너희는 어려운 짐은 남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수고하지
않는다고 경고하신다(45-54).

-
그런데 여기서 주의할 것은 예수님은 어떤 사건 뒤에 필요한 경우에 제자들에게 그 사건에 대한 해석과 교훈을 주고 있다는 점이다. 이 교훈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를 심하게 질책하고 나자 사람들은 예수님의 권세에 놀라워하며 주위로 몰려들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와중에서도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주신다.(12:1-12) 그 교훈을 간단히 요약하면 첫째, 외식하는 모든 것은 드러나게 되어 있으며, 둘째, 몸을
죽이는 자를 두려워 말고 지옥심판의 권세를 가진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하며, 셋째 사람 앞에서 인자를 시인하면 하나님께 시인 받고 부인하면 그도
부인을 당하며, 넷째 어떤 위협적인 상황에 처할 때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가르쳐 주실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
그런데 무리 중에 이 광경을 유심히 지켜보던 한 사람의 평범한 청년이 있었다. 그는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자상한 가르침에 대해 몹시 부러웠던
모양이다. 묻고 답하며 진리에 대한 대화의 매력에 흠뻑 취했다. 그는 드디어 용기를 내어 예수님께 질문을 던졌다. 예수님이라면 자신의 질문에
대해 명쾌한 답변을 내려 주실 것 같았다.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12:13)

이것이
오늘 본문이 전하는 이야기의 시작이다.

 

2.
상속권의 문제

-
보아하니 이 사람은 형에게 속아 자신의 상속권을 빼앗긴 것 같았고 예수님께 그 잘못을 바로잡도록 도와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이런 요청은 예수님에게 할 것이 아니라 산헤드린공회에 정식으로 재판을 요청해야 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러한 일을 할 권의가 자신에게
없다고 하시면서 그를 도와주기를 거절하신다.

"친구여,
누가 나를 당신의 재판장으로 세웠습니까?"

-
그렇다고 이 사람의 요구가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다. 유대인사회에서 랍비는 재판관의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예수를 랍비의 한 사람으로 알고
있었던 이 청년의 입장에서 이러한 요구는 당연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거절이었다. 순간 청년은 당황했을 것이다. 지금까지 계속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던 그의 입장에서는 다소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이 사람은 예수님이 하라는 그대로 지금 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앞에서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는 기도의 표본을 가르쳐 주시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이 가르친 그대로 기도한 것이다. 차음 보는 사람에게
인격적 호칭(선생님)을 하고, 명령형의 동사를 사용하여 개인적인 요청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기도의 결과는 퉁명스런 거절이었다.
공식대로 기도해도 먹히질 않은 것이었다.

 

3.
무엇이 문제인가?

-
예수님은 기초적인 영적 분별을 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이 사람의 공식적인 청원 이면에 탐심이라는 죄가 깔려 있음을 보신 것이다.(아마 이러한
공개적인 장소에서 자신에게 유리한 판결을 이끌어 낸다면 더 많은 재산을 소유할 것이 아닌가!). 이 사람이 청원한 내용에는 그가 어떤 부분에서
형에게 속은 것인지에 대한 거론이 없다. 이 사람이 실제로 형에게 사기를 당한 것인지에 대한 근거가 될 만한 부분이 보이질 않는다. 물론 그가
정말로 권리를 침해당했다면 당연히 보상받아야 한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정의가 본질적이며 모든 예언자들이 그것을 열렬히 주장했다. 세례 요한도
그랬고 예수님도 그랬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요청에서 정의의 부분보다 먼저 욕심의 죄를 알아보신 것이다.

-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에서 쉽게 발견되지 않는 숨겨진 것들에 대한 논의를 해야만 한다. 이 숨겨진, 위장된 것들은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예수를 따르는 우리들 자신에게도 내재하고 있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간혹 예수를 따르는 우리가 자신의
죄를 위장하기 위해서 하나님 나라의 법칙을 더욱 준수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일에 더욱 헌신하고 공공연한 죄를 짓지 않기 위해 매우 노력한다.
우리는 의도적으로 악의 길에 들어서지는 않는다. 공공연하게 죄를 짓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의도가 좋다고 하여 마귀의 간계, 유혹자의
유혹으로부터 확실하게 보호받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거의 모든 죄가 미덕으로 포장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이 사람의 경우를
보면 더욱 그렇다. 이 사람은 불과 이틀 전에 예수님으로부터 기도하는 법을 배우고 이제 나에게 정의를 달라며 자신이 배운 대로 실천하고 있다.
자신의 욕심을 바탕에 깔아둔 채, 나는 당신이 가르친 대로 행할 뿐이라는 가식적인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이다.

-
참으로
무서운 점은 예수님께 헌신한 사람들과 따르는 사람들에게 찾아오는 가장 큰 유혹은 명백하게 선의 형태로 다가온다는 것이다. 마귀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스스로 악하다고 알고 있는 일을 하게 만들려고 유혹하는데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다.

마귀는 선한 일에 악을 숨긴 채 우리를 그 일을 하도록 유혹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마귀가 광명의 천사의 모습으로 가장한다는 경고를 이미 받았다.
그럼에도 우리는 너무도 순진하게 계속해서 마귀의 술수에 걸려 넘어진다. "이것은 선하고 좋은 일이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실꺼야' 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마귀의 유혹에 걸려들 수 있다. 예수님도 명백한 악의 유혹이 아닌 외양은 선한 것으로 유혹받으셨다. 사막에서 사십일을 금식하시는 중에
마귀는 성경말씀을 포장하여 선의 모습으로 예수님께 다가왔다. 예수님은 그것을 간파하시고 흔들리지 않으셨다.

-
지금 예수님은 겉으로 보기에는 참으로 올바른 이 사람의 요청을 간파하시고 흔들리지 않으며 이 사람의 질문에 부정적인 수사학을 동원하여
되물으신다.

"누가
나를 당신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습니까?"

그리고
무리를 향해 공식적으로 탐심의 문제를 거론하신다. 인생의 참다운 가치는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고 영생을 얻는 것에 있음을 가르치고 있다.

4.
결론

-
예수님은 하나의 비유를 든다. 한 부자의 어리석음에 대한 교훈적인 비유이시다.(16-21) 물론 곳간 짓는 일은 농부에게 당연한 일이다. 소출이
늘어났으므로 어떻게 그 소출을 저장할 것인지를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 누구도 농부가 곳간을 늘리는 일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
창조주 하나님은 매우 너그러우신 분이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 외에 그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주시었다. 누르고 흔들어 넘칠 정도로 풍성하게
주시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매우 부요하다. 우리는 필요하다면 우리의 노력으로 이 농부처럼 소출을 늘리어 곳간을 짓고 또 지을 수 있다.
실제로 부자들은 대부분 그렇다. 자신의 소유를 늘리기 위한 삶을 사느라 그들은 정신을 팔고 있다.

-
이와 같은 부요함은 우리의 내면에도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간신히 천국의 문턱을 겨우 넘을 수 있을 정도의 구원을 베푸시는 것이 아니라 아낌없이
구원하신다. 간신히 목마름을 해소하는 정도가 아니라 "내 잔이 넘치나이다"의 고백만큼 풍성하게 누리도록 하신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것을
누려야 한다.

-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각자에게 주어진 분깃이라는 것이 있다. 분깃을 넘어서는 것이 욕심이다. 그런데 나의 분깃이 무엇인지 모를 때 욕심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욕심과 함께 살고 있는 것이다. 욕심은 우리 속에 감추어져 있다.

-
분깃은 무엇인가? 그것은 생명이다. 예수님은 생명의 구원을 받은 자는 모든 분깃을 다 받은 자임을 가르치고 계신 것이다. 나머지 누리는 것은
보너스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부요함에 동참하는 것이다 그 부요함이 어느 날 사라진다 해도 내가 받은 분깃을 뺏긴 것이 아니다. 덤으로 받은 것을
어느 누구에게 나누어준 것이다, 자발적으로 나누지 않으니까 하나님이 강제로 빼앗아 나누어주는 것이다.

-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받은 부요함을 나누어야 할 사랑으로 여기지 않고 사용해야 할 권력으로 계산하기 일쑤다. 늘어난 소출을 곳간에 저장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에게 나누어야 하는 것임을 잊고 사는 것이다. 그 자체가 욕심이라는 말씀이다. 이미 내 분깃은 내가 살아가기에 충분하다. 나머지
소득은 이웃을 위한 것이다. 그 이야기를 하시고 싶어 예수님은 또 하나의 비유를 드신다(22-34)

-
우리는 염려할 필요가 없다. 이미 받은 자는 더 가지려고 할 필요가 없다. 무엇을 염려하거나 근심할 필요도 없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29)

-
우리는 이제 하나님 나라를 구해야 한다. 그 나라는 나의 소유를 팔아 구제하는 선행으로 세워진다. 하나님나라는 욕심을 먹고 자라지 않는다.
하나님나라는 나눔과 사랑을 먹고 자란다.

아멘.

 

   

9강:
복습

 

1.
5개의 이야기

-
우리는 지금 사마리아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는 예수님과 함께 동행하고 있다. 이 여행에는 총 10개의 이야기가 준비되어 있고, 그중 우리는
5개의 이야기를 들었다. 이 이야기를 통해 예수님이 각계각층의 사람들을 만나시고, 각 상황에서 돌발적이거나 의도를 가졌거나 어떤 질문과 요청에
대해 어떻게 대화를 하고 계신 지를 우리는 배우고 있다.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지금까지 이어진 이야기를 정리해 본다.

 

1)
1st 대화는 3인의 추종자와 나누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사마리아를 지나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이 채 시작되기 전에 벌써 세 명의 추종자들을
만나신다. 그러나 그들은 채 열 발자국도 가기 전에 스스로 떨어져 나가고 만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를 따르는 일은 우리가 제시하는 조건대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라 우리가 그분을 무조건적으로 따르는 일임을 깨닫게 된다.

 

2)
2nd 대화는 학식은 있는데 행함이 없는 자와 나눈 것이다. 전도의 과정에서 우리는 이와 같이 학식 있는 사람들과도 만난다. 그들은 지식과
노력, 성실함, 그리고 도덕적이고 윤리적이며 스스로 의롭다고 여긴다. 그들은 스스로 이해하지 못하거나 자신의 생각과 다른 주장에 대해 토론하고
논박하여 자신이 내세우는 주장이 옳고 우월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 한다. 우리를 화나게 하고 짜증나게 하는 부류들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와
달랐다. 첫째, 여유롭고 부드럽게 그를 대하시었다. 둘째, 그가 질문하는 것을 막지 않았으며 경청했다. 셋째,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의도를
간파하고 있었다. 넷째, 그렇다고 예수님은 논리를 들어 반박하지 않았다. 하나의 예화를 들어 비유적으로 말씀하시었다. 마지막으로 상대가 수긍하자
즉시로 행동하도록 명하시었다. 그것은 정확하고 명쾌한 결론에 대한 해답이었다. 사람들은 어정쩡하거나 불투명한 것을 반기지 않는다. 명쾌하고
시원한 결론을 원한다. 불신자들에게 논리로 다가서지 말라. 일단 그들의 의견을 경청하고 조용히 예를 들어 이야기를 들려주고 스스로 생각하여 옳고
그름을 스스로 판단하도록 유도하라. 스스로 인정하는 것만큼 효과적인 굴복은 없다.

 

3)
3rd 대화는 분주한 마르다와 나눈 것이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영접하느라 정신없이 바쁘게 일하는데 동생 마리아는 그 시간에 얄밉게도 예수님 발
앞에 앉아 말씀 듣는데 온 정신을 팔고 있었다. 가장 경계해야할 것은 내적 결핍의 상태에서 열정만을 가지고 주의 일을 한다고 분주한 사람의
신앙이다. 이것은 잘못된 결과를 초래하기 일쑤다. 바쁜 마리드라르 향해 예수님은 많은 일로 인해 근심하며 바쁜 것은 좋지 않다고 말씀하신다.
일이 많으면 마음도 바쁘고 마음이 바쁘면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기 쉽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놓치거나 마치지 못하면 늘 머릿속에 그 일이 남아
마음을 근심시킨다. 바쁜 목사가 나쁜 목사라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네가 좋아하는 일을 하라고 충고하신다. 지금 마리아는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일을 선택한 것이라고 부연 설명까지 하신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영접해 놓고 무엇을 대접할 까 분주하지만 정작 말씀 듣는
일을 소홀히 하고 있다. 가장 중요한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이다. 이 일은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마르다는 말씀보다
일하는 것을 더 중요시했다는 것을 깨우치고 있는 것이다.

 

4)
4th 대화는 표적을 구하는 자들과 나눈 것이다. 벙어리 귀신을 좇아내어 다시 말문을 열어주신 예수님은 그것이 하나님의 권능에 의한 것임을
밝히지만 사람들은 하나님을 생각하기보다 우선 눈에 보이는 표적을 더 우선시하는 어리석음을 보이자 이에 예수님은 분개하신 모양이다. 갑자기 언성이
높아지신다. 대성일갈하신다. 예수님은 믿음보다 눈에 보이는 것을 쫓는 자들을 늘 경계하시었다.

'하나님께서
너희를 불쌍히 여기시어 벙어리도 다시 말하게 하시는 은혜를 베푸심에도 단 한 사람도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감사하거나 경배하지 않으니 너희는
정말로 악한 세대요, 구제 불능이구나'

 

5)
5th 대화는 의도를 숨긴 자와 나누신 것이다. 한 청년이 갑자기 예수님께 재산상속의 문제를 가지고 청원을 했다. 듣기로는 형이 자신의 재산을
가로챈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속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기초적인 영적 분별을 하셨다. 이 사람의 공식적인 청원 이면에 탐심이라는 죄가 깔려
있음을 보신 것이다. 이 사람이 청원한 내용에는 그가 어떤 부분에서 형에게 속은 것인지에 대한 거론이 없다. 이 사람이 실제로 형에게 사기를
당한 것인지에 대한 근거가 될 만한 부분이 보이질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에서 쉽게 발견되지 않는 숨겨진 것들에 대한 논의를
해야만 한다. 이 숨겨진, 위장된 것들은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예수를 따르는 우리들 자신에게도 내재하고 있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지금 예수님은 겉으로 보기에는 참으로 올바른 것 같은 이 사람의 숨겨진 의도를 간파하시고 흔들리지 않으며 이 사람의 질문에
부정적인 수사학을 동원하여 되물으신다.
"누가
나를 당신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습니까?"
그리고
무리를 향해 공식적으로 탐심의 문제를 거론하신다. 인생의 참다운 가치는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고 영생을 얻는 것에 있음을 가르치고 있다.

 

-
이제 다시 5개의 이야기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폭력성을 가진 사람을 만나며(13:1-9), 율법주의에 빠진 사람(13:10-17,
14:1-14), 죄인들과의 대화(15:1-32, 18:1-14), 돈을 좋아하는 자들과의 만남(16:14-31, 18:18-30,
19:1-10), 10명의 나병환자와의 만남(17:11-19)이 준비되어 있다.

 

2.

-
갈릴리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여행길에서 예수님은 남들이 기피하여 가기 싫어하는 사마리아지역을 당당히 지나가신다. 그리고 수많은 종류의
사람들을 만나시고 대화를 나누신다. 이것은 당시의 관행을 완전히 무시하는 일이었다. 예수님의 이런 파격은 오직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함이다.
예수님은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시었다. 그런데 그 구원의 은혜를 베푸는 방식과 사람마다 나눈 대화법이 다르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10강.
6th. 폭력성과의 대화


13:1-9

 

1.
예수님과의 여행길

-
예수님을 따르는 일은 순탄한 항해가 아니다. 여행길 내내 의혹과 적대감이 곳곳에 있다. 처음으로 한 경험은 사마리아인들의 적나라한 적대감을 맛본
것이다. 하룻밤 머물 장소를 찾을 때 사마리아인들은 분명하게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그들이 이곳에서 환영받지 못할 것을 보여 주었다. 심지어
예수님은 여행 초기에 마귀와 결탁하고 있다는 비난까지 받으셨다.(11:15).

-
그로부터 이삼일 후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자신들이나 예수님을 두 팔을 벌려 환영해 줄 것이라는 착각에 빠지지 말 것을 말씀하신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라"(12:51)

-
사실 예수님은 이 여행을 시작하기 전에 이미 두 번씩이나 제자들에게 자신을 따르는 일이 결코 평탄한 길이 아님을 예고하시었다. 자신은 버림받고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말했었다.(9:22, 44). 예루살렘 입성 직전에도 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이 말을 들었다.(18:31-33). 그들은
충분한 경고를 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깨닫지 못했다. 여전히 제자들은 분노를 안고 대적자들에 대해 가슴속의 칼을 갈고 있었다. 우레의
형제들은 화가 머리 끝가지 나서 초자연적인 불을 불러 그 자리에서 그들을 죽여 버리고 싶어했다.

-
사마리아지역은 우호적인 지역이 아니다. 그들의 속에는 언제나 예수님과 제자들의 일행을 공격할 수 있는 폭력성이 내재해 있었다. 그런 폭력성은
빌라도에 대한 저항운동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그들의 그런 시도는 번번이 실패했다. 그 결과는 13:1-5에도 기록되었듯이 처참한 처형으로 끝나는
것이었다. 로마는 그런 방식으로 무너질 만큼 허약한 상대가 아니었음에도 그들은 계속 폭력에는 폭력으로 맞서자는 상대주의에 빠져 있었다. 그것이
사마리아사람들의 속성이고, 세상의 본질이다. 여기서 잠깐 인간의 공격성에 대한 심리학적인 연구결과를 알아보자.

 

2.
인간의 공격성

-
모든 유기체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공격성을 가지고 있다. 공격의 목적은 상대를 제압하여 복종시키려는데 있다. 이것을 위계설정이라
한다.

-
그러나 인간의 공격행위는 동물들과는 다른 사회적 행위의 특성이 있다. 동물세계에서의 위계설정은 주로 힘, 덩치, 속도 등의 신체적 특성에 의해
이루어지지만 인간의 경우는 지능, 사교성, 지도성, 성격, 동기 등의 심리적 사회적 특성에 의해 이루어진다. 다시 말해 인간의 공격성은 본능적인
동물들과는 달리 여러 심리적 요인에 의해 발생한다는 것이다.

 

Q.
주로 어떤 사람이 폭력성을 잘 나타내는가?

1)
자기애 성향

-
자존심이 높은 사람이며 자기애적인 경우, 남보다 우월하며 자신이 남보다 특권을 누릴 자격이 있다고 여기는데 이런 생각을 위협하는 사람에게 즉시
적개심을 가진다. 특히 자신에 대해 나쁜 평을 하거나 무시하면 높은 공격성을 보인다. 잘못된 일에 대해 남 탓을 하고, 자존심은 높지만 매우
내면적으로 취약하다.

2)
적개적 귀인

-
폭력성이 강한 사람은 상대방의 애매한 행동을 악의나 적개심을 지니고 행동했다고 귀인한다. 상황을 합리적으로 분석하고 대처하기보다 선입견과 도식을
적용하여 자기 식으로 판단하고 상대를 공격한다. 매사에 오해를 잘 한다.

3)
좌절경험

-
인간을 가장 화나게 하는 요인이 바로 좌절이다. 예를 들어 자판기에 동전을 넣었을 때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십중팔구는 발로 찬다거나 손으로
자판기를 두드린다. 멋진 여성에게 접근했지만 퇴짜를 맞았을 때, 열심히 뛰었는데 버스를 놓쳤을 때, 선의를 보였는데 냉담한 반응을 보였을 때,
기대하던 승진이 실패했을 때, 시험에 낙방했을 때, 인간은 모두 좌절을 경험하고 공격성향을 보인다는 것이다.

4)
상대의 도발

-
상대가 나를 해치려고 도발하거나, 자신을 부당하게 몰아세우거나, 손해를 끼치려고 하는 경우, 분노를 느끼고 공격심리를 가진다는 것이다.
160명을 대상으로 분노를 느끼는 경우를 연구한 결과, 59%가 상대의 행위가 고의적이고 부당하다고 여겨졌을 때이고 28%는 모면할 수 있었던
사건을 당했을 때 분노를 느끼고, 불가항력적인 사건에 대해 분노를 느낀 경우는 불과 2%에 불과했다. 그런데 이런 분노를 가진 사람 중 실제로
신체적으로 폭력을 행사한 경우는 10%에 달했다.

5)
흥분경험

-
좌절, 도발, 갈등은 인간을 흥분하게 만든다. 또 약물복용, 운동 후, 무더운 날씨, 듣기 싫은 소음, 아주 강한 성적 자극(포르노물 등)
이후에 인간은 폭력을 행사하기 쉽다는 것이다.

 

3.
우리의 반응

-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적대감 앞에서 나타나는 제자들 혹은 오늘날 우리가 저지르기 쉬운 폭력적 반응, 즉 복수심이다. 이 복수심은 일련의
생각들을 이어지게 하는 특징을 가진다.

"하나님의
적은 나의 적이다. 나는 하나님 편에 서 있다. 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하나님의 대의와 명예를 지킬 것이다.... 당한만큼 돌려주어야
한다...."

-
이런 복수심이 들면 이를 표현하는 가장 손쉬운 수단은 당연히 언어다. 적대감을 가진 자와 맞서 같은 류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다.

-
그러나 예수님은 이때에 즉시로 개입하신다. 그리고 단호히 '안 된다'고 말씀하신다. 그것은 강한 명령형이다. 칼을 빼든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을
보라. "검을 집에 꽂으라. 아버지게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요18:11). 예수님은 가끔 긴급한 표현을 마다하지 않으신다.
"검을 집에 꽂으라, 회개하라, 나를 믿으라, 나를 따르라,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말하라, 아이야 일어나라,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라, 내 뒤로 물러가라..."

-
폭력은 폭력을 부를 뿐이다. 마하트마 간디의 비폭력운동이 인도인의 적개심과 분노, 복수극을 멈추게 했다. 만약 사마리아인의 적대에 대해 정말로
우레의 형제들처럼 그들에게 불을 내려 복수를 했다면 영원히 우리는 사마리아를 잃었을 것이며, 아마 기독교라는 존재가 탄생하지 않았을 지도 모를
일이다.

 

Q.
잠깐, 여기서 누가의 의도는 무엇인가?

-
오늘의 사건, 즉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저희의 재물에 섞은 일에 대한 누가의 기사는 앞뒤 문맥상 이질적인 내용이다. 누가는 자신의
의도를 예수님의 사역과 연결시키려고 한다. 이런 분위기를 그의 복음서 안에 담구고 있다. 어느 부분에 담그느냐 하는 것은 누가 자신의 판단에
따른다. 우리가 보기에는 어떤 내용은 다소 생소하고 앞뒤가 연결되지 않는 곳에 위치한 것처럼 여겨지지만 오히려 그것은 우리가 누가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결과일 것이다.

-
예를 들어,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이야기(12:13-34)에 이어 누가는 갑자기 혼인집 비유(12:35-40)를 들며 깨어 있으라는 주님의 말씀을
삽입한다. 그리고 누가는 베드로의 반응에 주목한다. 주님은 의아스러워 하는 베드로에게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의 이야기를
들려주시고(12:41-48), 뒤이어 또 갑자기 분쟁이야기와 시대를 분별하라는 종말론적인 말씀을 전개하신다. 재물에 대한 경고와 예수님의
종말론을 이렇게 연결시킨 누가의 의도는 아마 말세의 가장 대표적인 현상 중의 하나가 재물에 대한 인간의 탐욕의 끝을 상징화시키려고 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
누가의 이런 시도는 여기서도 계속된다. 누가는 13장에 이르러서 사람들의 폭력성에 대한 예수님은 생각을 알고 싶었던 모양이다. 이런 사건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과 숨겨진 복수심을 지적하고자 하는 예수님의 진정한 의도를 파악하고자 한 것이다. 갈릴리 사람들이 빌라도에 의해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그런데 지금 유대인 두어 사람이 예수님께 찾아와 이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것이 오늘 들려주는 이야기의 키
포인트이다.

 

4.
결- 예수님의 비유와 교훈

-
사람들은 흔히 어떤 사람이 불행을 겪게 되는 것을 보면 그것이 죄의 결과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지만 무조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세워놓으신 자연 질서는 일반인에게든 성도들에게든 동일하게 적용되어지므로 성도들도 뜻하지 않은 불행을 당할 수
있다.

-
그러므로 예수께서 오늘 이 곳에서 바로 이 점을 지적하시고 있다. 본문 2-3절 말씀이다.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음으로써
모든 갈릴리 사람들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
중요한 것은 나와 이웃이 그런 불행을 당할 때, 비록 그들이 폭력을 행사하며 죄를 지어 심판을 당한다고 해도 우리는 그들이 저들의 죄로 인해
심판을 받았다며 좋아하고 그들을 정죄할 것이 아니라 그러한 사건을 통해 우리들이 취해야 할 올바른 자세는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
이 교훈을 가르치기 위해 예수님이 들려주신 하나의 비유가 바로 6-9절에 등장하는 짧은 거름이야기이다. 요약하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었는데
3년이나 거름을 주었음에도 열매를 맺지 못하자 주인이 포도원지기에게 땅을 버리므로
찍어버리라
말하자 포도원지기가 1년만 더 기회를 달라고 요청하고 있는 이야기이다.

-
이것을 다시 풀이하면 이렇다.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포도원지기는 예수님이시다. 무화과나무는 하나님의 자녀들이며, 열매는 구원을 상징한다. 그리고
땅은 하나님나라, 즉 교회를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세 번씩이나 기회를 주었음에도 회개하지 않자 이제 심판을 단행하시고자 하시는데 이때 예수님께서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고 요청하시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
다시 말해 오늘의 이 세상이 아직 심판대에 오르지 않은 것은 예수님의 마지막 요청에 의해 하나님께서 진노의 오른 팔을 들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회개를 기다리고 계신 것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서로 폭력을 행사하고 서로 정죄하는 일에 앞장설 것이 아니라 각자 회개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거름을 받아 아름다운 열매를 맺어야 버림을 받지 아니한다는 것이다.

-
결론적으로 예수님의 교훈은 이렇다.

첫째,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모두가 꼭 같은 죄인이라는 점이다.(롬3:10-12)

둘째,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형제를 향한 정죄가 아니라, 형제의 모습을 통하여 도리어 자신의 죄를 깨달으며, 그 죄를 회개하려는 겸허한
자세를 가지라는 것이다(마7:1-5). 즉 회개(히- 나함, 헬-메타노에오)치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아멘.

 

   

11강.
7th. 율법주의자들과의 대화


13:10-17, 14:1-14

 

1.
냉대와 환대 사이

-
냉대와 환대는 금방 눈치 챈다. 냉대는 적개심의 표현이고, 환대는 호의와 친절, 그리고 반가움의 표현이다. 그러나 위장된 환대가 있다. 오늘 두
개의 본문에서 우리는 두 개의 위장된 환대의 이야기를 통해 예수님의 언어와 교훈을 받아보자.

 

-
첫 번째 이야기는 13:10-17의 초청특강이다. 사마리아인의 냉대를 받으며 마지막 예루살렘 행 여행길에 오른 예수님은 어느 지역에서 안식일
맞아 회당에서 가르칠 수 있게 된다(13:1). 환대의 형식을 빌은 이 초청 특강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다. 아마 회당장은
사람들의 최근의 관심사항과 주요 이슈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구름 같은 군중을 몰고 다니며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전파하며 온갖
이적과 표적, 그리고 치유의 역사를 일으키며 돌풍을 몰고 다니는 나사렛에서 자라난 예수라는 한 청년에 관한 것이었다. 회당장은 이러한 때 마침
자기 동네로 지나가는 예수를 안식일을 맞아 초청하고 그가 대체 무슨 헛소리를 하는 지, 무슨 엉뚱한 행동을 하는지를 듣고 보고자 했다. 그러한
초청은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유명 인사를 통해 은근히 자신이 시대정신에 밝으며 대중들에게 어필하고 있음을 과시하고픈 욕구가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 소인배들의 주특기가 아닌가!

아무튼
예수님의 설교가 이어지고 그 때에(아마 설교 중에) 18년 동안 귀신에 들린 한 여인이 눈에 띠었다. 예수님은 즉시로 안수하여 여인의 병을 고쳐
주시었다. 이 때 회당장은 아마 깜작 놀란 모양이었다. 상상으로는 얼굴이 벌개졌을 것이며, 자신의 권위가 도전받음을 느꼈을 것이다. 소인배들은
늘 자신의 위치와 권역을 지키기 위해 즉시로 공격한다. 그는 즉시로 예수님의 설교를 가로막고 나서며 안식일에 병 고쳐 주는 것이 율법에 어긋나는
일임을 주지시키며 그런 일을 하지 말라고 엄히 꾸짖는다. 여기엔 내가 당신에게 호의를 베풀어 회당에서 설교를 하도록 환대를 했는데, 어찌 율법을
어기느냐는 호통이 포함된다.

그러나
예수님의 반응은 의외로 강하다. 예수님은 회당장을 향해 무시무시한 선포를 내리신다. "외식하는 자들아!!!~" 이 한 마디에 위장된 환대의
분위기는 깨어지고 온 무리는 속이 다 시원하다는 듯, 율법주의자의 몰락을 즐겼다.

 

-
두 번째 이야기는 예수님의 식탁대화 중의 하나이다. 모든 복음서 기자들이 예수님의 식탁대화를 기록하고 있지만 식사 시간에 대화하시는 예수님의
이야기는 누가복음에 가장 많이 나타나 있다. 레위집에서의 만찬(눅5:27-32), 바리새인과 함께 한 두 번의 식사(7:36-50,
14:1-14), 오천 명을 먹이신 일(눅 9:10-17), 마리아와 마르다의 집에서 하신 식사(10:38-41), 삭개오의 집에서 하신
식사(19:1-10), 부활 후 세 번째로 나타나셨을 때 하신 식사(24:36-43)가 그 예다.

식탁은
모든 문화권에서 환대의 중심이 되는 장소이다. 그러나 식탁에서 가지는 규범들은 모두 다르다. 한국에서는 식탁 위에서의 대화는 금물이다.(유불선의
추종자들이 예수님이 식탁에서의 대화를 즐겨 하신다는 사실을 알았을까?) 예수님이 사셨던 세게에서도 거역할 수 없는 엄격한 식탁규칙이 존재했다.
우선 경건한 사람들은 불쾌한 사람들 즉, 세리, 창녀와 같은 비주류 계층과 종교적으로 타당한 외양을 갖추지 않은 죄인들과 밥을 먹는 일은
엄격하게 금지되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미 그들과 식사를 같이 한 적이 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식탁규범을 거절했다. 바리새인들은 이에 대해
예수님을 격렬히 비난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바리새인의 최고 지도자가 안식일에 예수님을 식사 자리에 초대했다. 그런데 이 초청의 시점이 요상하다. 그 최고지도자는 아마
회당장으로부터 예수가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어 율법을 어긴 자임을 보고했을 지도 모른다.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주목하며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았다. 그 때 또 한 사람의 병자가 등장한다.(혹시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죄목을 확인하고 현장에서 체포하기 위해 미리 준비한 병자는
아닐까?) 그는 관절부위가 심하게 부어 있었다. 수종병이라고 성경은 말하는데 요즘에는 부종이라는 병으로서 관절 부위에 물이 차서 움직이기가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병이다.

예수님은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미 그들의 의도를 간파하고 섣불리 지난 번처럼 바로 고치질 않고 그들에게 그를 고쳐 주어도 되겠는지 물어보셨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미끼를 던지고 있음을 직감했다. 소인배들이 얼마나 눈치가 빠른지 알아야 한다. 그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예수님은 그들의 이
침묵을 허락의 분위기로 바꾸어 그 사람을 고쳐 주신다. 바리새인들은 움찔했다. 적극적으로 그들이 이 치유행위를 금하지 않았기에 예수님의 이 일에
대해 딴지를 걸 수가 없다. 바리새인들이 순식간에 한 방 먹은 것이다.

예수님은
틈을 주지 않으시고 바리새인들에게 이제는 상식의 세계로 그들을 끌어들인다. 아이가 우물에 바져 죽고 있는데 안식일이라는 이유로 구하지 않겠는가,
심지어 소가 빠져 죽어가도 구해야 되지 않겠는가? 그들은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했다.

-
예수님은 여기서 그들의 위선에 대한 지적을 멈추지 않고 하나의 충고를 더 보탠다. 그것이 14:7-14의 이야기이다. 손님들은 식탁의 명예의
자리에 서로 먼저 앉으려고 자리다툼을 하고 있었다. 식사를 초청한 최고지도자에게 가까이 가기 위한 몸부림이다. 주이누 가까이 앉을수록 더 중요한
사람이다. 옆 자리 하나를 꿰찰 수 있다면 그는 평생동안 그 사실 하나를 우려먹으며 자신을 뽐낼 것이다. 요즘말로 하면 청와대사진을 벽에
걸어놓고 은근히 자신의 위세를 즐기는 자들의 모습일 것이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말석에 앉을 것을 주문한다. 정말로 중요한 사람이 찾아오면
그 자리를 당신이 차지하고 있으면 주인이 당신을 내쫓지 않겠느냐는 말로 그들의 자리다툼에 일침을 가한다. 예수님의 이 지적은 겸손에 대한
가르침이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14:11)

그리고
잔치의 주인에게도 충고 하나를 더한다. 앞으로는 뽐내는 사람들만 잔치에 초청하지 말고 가난하고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도 청하라고
말씀하신다. 지도자는 군림하라고 세운 것이 아니라 섬김의 직분이다. 예수님은 그 교훈을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이었다.

 

2.
누가 율법주의자들인가?

첫째,
엄격한 규율과 형식논리에 빠진 자들이다
.

-
3:14에서 회당장은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범법행위라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밝히고 있다. 그는 이 규정에 묶여 진짜 하나님이 안식일에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놓치고 있다. 하나님의 뜻은 생명을 살리는 일이다. 생명을 살리기 위해 포로된 자를 풀어주고 억눌린 자에게 해방을 주고, 병든
자에게 치유의 은혜를 베푸시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여 위로케 하시는 것이다.

둘째,
콧대만 높은 자들이다.

-
자존심이 강해 옳은 일을 옳다고 하지 못하고, 맞는 일을 맞다고 인정하지 못한다.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을 고치고 심지어 물에 빠진 소를 건져내는
것이 합당하냐고 물었을 때 사실 그들은 속으론 옳은 줄 알면서도 대답하지 않을만큼 콧대만 높은 사람들이다.

셋째,
적대감으로 똘똘 뭉친 소인배들이다.

-
그리하여 호시탐탐 공격의 틈을 엿보고 노리는 자들이다. 14장 1절에서 예수님이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 떡 먹으러 들어가시자 그들은 예수님이
어떻게 하나 하고 엿보고 있었다. 한 개라도 잘못을 범하면 닥달같이 달려들어 예수님을 옥에 넘겨줄 참이었다. 가장 치사한 무리들이며, 가장
비겁한 기회주의자들이다. 이들을 공자는 전형적인 소인배라 했다.

넷째,
끼리끼리 어울리는 패거리들이다
.

-
그들은 우르르 몰려다니며 남의 잘못을 끄집어내고 그들을 재판하고 정죄하고 자신들의 세계를 구축한다. 자신들의 입맛에 맞지 않은 사람을 철저히
소외시킨다. 왕따의 선구자들이다. 이들이 붕당주의자들이고, 당파의 시조이다.

다섯째,
항상 잘난 체 하는 자들이다. 성로 상석에 앉아 거들먹거리고 싶어하는 자들이다. 섬기기보다 대접받기를 즐겨한다. 높은 자리에 앉아 군림하기를
즐겨한다.

 

3.
결론

첫째,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고 성령의 법을 선사하셨다. 주님은 율법을 십자가 사건으로 완성시키고 새로운 시대를 여시었다. 율법주의자들을 폐하시고 성령의
사람들을 부르신다. 하나님의 일꾼은 율법으로 충만한 사람이 아니라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이다.

둘째,
예수님은 율법주의자들을 매우 질책하셨다. 그들이야말로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엄히 꾸중했다. 오늘도 자시만의 논리에 빠져 자신도 모르게 율법주의자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성령의 법에 의해 먼저 내 안의 율법주의가 뿌리채 뽑혀야 한다.

셋째,
율법주의자들은 끝내 부끄러움을 당한다. 높은 만큼 낮아질 것이며, 잘난 채 한만큼 못나질 것이며, 근거도 없이 비난한 만큼 비난받을 것이며,
실력 있는 자를 폄하한 만큼 폄하 받을 것이며, 약한 자를 능멸하고 업신여긴 만큼 주님으로부터 창피를 당할 것이다.

 

12강.
8th. 투덜거리는 사람들과의 대화


15:1-32

 

1.
의원병

-
의원병이란 의사로부터 치료를 받는 과정에서 걸리는 질병이나 질환을 말한다. 즉, 의사가 어떤 병을 치료하는데, 그 질병은 치료하지만 자기도
모르게 또 다른 질병에 걸리게 하는 것이다. 의원병을 나타내는 단어 introgenic은 헬라어로 의사라는 뜻의 iatros와 원인이라는 뜻의
genic이라는 말이 합성된 것이다. (유진의 경우, 무릎수술을 받기 위해 한 달간 병원신세를 졌는데 그보다 치료 과정에서 포도상구균에 걸려
18개월 동안 조그만 종기 하나 때문에 고생을 했다고 한다.)

 

2.
자기 의라는 병

-
교회는 구원이 선포되고 죄를 용서받는 성령에 의해 형성된 공동체이다. 교회 안에서 사람들은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받는 세례로 다시
정의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생명이 형성되며 성찬의 의미를 지키는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고, 고난과 불의, 전쟁, 절망, 중독 그리고 은밀하게
행해지는 죄로 물든 세상에서 거룩한 삶을 실천한다. 이것은 참으로 대단한 일이다.

-
하지만 이러한 일에 참여한 사람들은 머지않아 이 새로운 삶이 완성된 삶이 아니라 진행 중인 삶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은
느리게 배우는 사람들이다. 많은 사람들은 성장하기를 꺼린다. 가능한 한 오래 이기적인 미성숙을 붙잡고 늘어진다. 죽음 직전 까지 성숙을 미루려고
한다. '조금 있다가, 이다음에', '이번 한 번만 미루고 다음에는 꼭' 하고 앞으로 나아가기를 머뭇거리고 지금 즉시 변화하기를 주저한다. 어떤
이들은 거룩함에 이르는 지름길이 없는지 호시탐탐 기회를 노린다. 또 어떤 이들은 인생을 계속해서 스스로 통제하고 스스로 할 수 없는 일들을
하나님이 해 주시도록 하나님을 조작해 볼 방법들을 이리저리 실험해 본다.

-
한편으로 우리는 죄에 대해 민감하게 생각하여 예배 때마다 죄를 고백한다. 공동의 고백 외에 개인의 고백을 드린다. 대부분 단도직입적으로 죄를
고백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의 비참한 심경을 위로해 줄 것을 요청한다. 자신이 비참한 범죄인이라는 사실을 주님께 고백하는 것은
상당히 창의적이고 고상한 표현이 된다.

-
그러나 불행히도 공동체 안에서 번창하는 죄의 형태가 있다. 그 죄는 바로 예배가 드려지는 그 자리에서 시작된다. 종교 공동체가 바로 이 죄를
생산하거나 방조한다. 이 죄의 이름은 바로 <자기 의>이다. 기독교인들이 자신의 구원을 대단한 자부심으로 여기는 대신에 자신의 중요한
죄를 치유 받은 대신에 그 치유의 과정에서 자신도 모르게 얻은 질병이 바로 의원병 같은 자기 의라는 질병인 것이다.

-
이 죄는 간혹 다른 사람에게서는 눈에 띄는데 정작 나에게서는 결코 발견되지 않는 죄이다. 이 현상은 너무나도 흔하고, 해롭고, 대개의 경우 눈에
띠지 않는다. 왜 눈에 쉽게 띠지 않느냐 하면, 바로 경건이라는 수건에 덮여 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병을 다른 말로
'경건병'이라고 한다. 헬라어 유세비아(eusebeia)는 '거룩한, 경건한, 독실한'이라는 끗인데 여기에 원인이라는 genic을 합성해
eusebeigenic이라고 부른다.

-
유세비아의 특징을 가진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일반적인 범죄함 즉, 의에 대해서는 상관하지도 않고 당연하다는 듯이 더 많은 돈, 더 많은
쾌락, 더 즐거운 섹스, 안정된 노후를 위한 모든 준비, 자식들을 삶을 위한 안전보장책의 마련 등의 행위들과는 전혀 다른 방식의 범죄를 짓는다.
나아가 유세비아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까지 죄를 짓도록 부추기는 데 선수들이다.

-
자기 의라는 이 질병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가장 무서운 죄이다. 이 죄는 그리스도인만 짓는 죄이다. 그리스도인이 되면 자기 의의 죄를 지을 수
있는 기회는 기하급수적으로 커진다. 그러나 자기 의라는 것이 얼마나 무감각한 죄인지 이 죄가 내안에서 어떻게 작동하고 우리가 얼마나 무심결에
감염되어 있는 지를 보려면 이런저런 방법을 다 동원해 점검해 보아야 한다.

-
그래서 유진은 이 병을 일단 <경건병>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진단을 시작하자고 권하고 있다. ('비유로 말하라' 155쪽).
경건병(유세비아병)이라는 죄는 온갖 의로운 외양을 다 갖춘 말과 행동 속에 묻혀 있기 때문에 간파하기 어렵다. 의원병이 치료가 일어나는 장소인
병원에서 가장 흔하게 걸리는 질병이듯 경건병은 이와 연관된 장소 즉, 교회나 성경공부나 기도 모임에서 가장 자주 짓는 죄이다.

-
그런데 이 병은 전형적으로 풍자의 형식으로만 밝혀지는 병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지금 자기 의를 앞세운 채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시는
예수님의 행동을 벌레 씹은 얼굴을 하며 쳐다보는 바리새인들에게 풍자적인 이야기를 셋이나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3.
이야기 셋.

-
여기 세 가지 이야기가 예수님에 의해 들려지고 있다. 세 이야기의 공통점은 잃은 것에 대한 것이다. 첫째 이야기에서는 양 100마리 중 한
마리를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에 대한 것이고(4-7절), 둘째 이야기는 10 드라크마 중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에 관한 이야기이고(8-10절),
세 번째 이야기는 두 아들 중 잃어버린 한 아들에 관한 이야기이다(11-32절).

-
이 이야기에서 먼저 우리는 양과 드라크마와 아들의 중요도를 계산해 보아야 한다. 알다시피 양(프로바톤)은 성경에서 500회 이상 사용된 만큼
흔한 동물이다. 구약시대에는 번제물로 가장 인기가 있는 동물이었다. 그러므로 희소가치적인 면에서 비중이 약하다. 그런데 예수님은 가장 흔한
양이라 할지라도 한 마리를 잃어버리면 주인이 찾으러 다닌다는 비유를 하신다. 다음으로 드라크마는 헬라의 은전으로 1 데나리온과 같은 값으로
친다. 신약에서 1데나리온은 일꾼의 하루 품삯이었다(마20::2,9,13). 에베소에서 불태워진 마술책의 값은 '은 오만'이었는데 이는 오만
드라크마에 해당하는 엄청난 액수였다(행19:19). 드라크마의 비유는 양의 비유보다 더 무게가 있다. 그러므로 잃어버리면 대개 찾기 위해 온
집안을 뒤적인다.

 

4.
비유를 통해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
예수님의 의도는 세 번째 비유에 담겨 있다. 다시 말해 두 아들의 경우, 한 아들이 집을 나가버렸는데 큰 아들은 아버지의 마음과는 달리 동생을
찾으러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양과 돈을 잃어버리면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큰 아들은 정작 양과 돈으로 값을 환산할 수 없을 만큼 가치 있고
귀중한 동생에 대해선 무심하고 냉담하다는 것이다.

-
예수님은 지금 큰 아들이 걸린 경건병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계시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우리 모두가 자신도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
감염되어 있는 이 큰 아들 의식, 이 무서운 유세비아의 질병에 대해 경고하고 계시는 것이다.

-
더 놀라운 것은 이 병에 걸린 큰 아들은 돌아온 작은 아들을 위해 잔치를 베푸시는 아버지까지 원망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부루퉁하게 화가 나서
휙 가 버리고는 잔치에 참여하기를 거부한다. 아버지가 그에게 다가와서 이야기를 하려고 하지만 그는 들으려하지 않는다. 그는 이렇게 투덜댄다.
"내가 얼마나 오랜 세월을 고생하며 아버지를 섬겨왔는지를 보십시오. 아버지께 조금의 근심도 끼치지 않고 열심히(뼈빠지게) 일했지만 아버지는 나와
내 친구들을 위해 한 번도 잔치를 열어 주시지 않았지요. 그런데 창녀들에게 아버지의 돈을 다 탕진해 버린 동생을 위해 잔치를 베풀다니요,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
이 이야기는 예수님에게 비판적으로 투덜대는 바리새인과 성경학자들에 의해 탄생한 것이다. 사마리아를 여행하면서 예수님이 이야기하셨던 대상은
신앙세계의 이방인들이었다. 세리와 죄인들, 불쾌한 사람들, 평판이 나쁜 사람들이었다. 종교적 주류들, 올바르고 책임있게 사는 바리새인들과
성경학자들은 이런 예수님의 행동에 기분이 나빴다. 왜 저런 죄인들과 우리를 같이 대하는지 불평했다. 그들은 예수님이 누구에게 더 관심이 있는지를
몰랐다. 모르면 툴툴댄다.(투덜댄다 grumble, mutter, 출 15:24, 16:2- 원망하다,
diegongudzen)

-
예수님의 가장 유명한 비유라고 할 수 있는 이 이야기는 거기에서 비롯되었다. 바리새인과 성경학자들이 투덜대고 있었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의
투덜거림이 거기에 함께 섞여 들려오는 것 같다. 이러한 투덜거림과 불평, 원망 가운데로 예수님이 이 세 가지 비유를 던지셨다.

-
과연 우리의 반응은 무엇인가? 우리는 어떤 경건병에 걸렸는가? 우리는 지금 이웃에 대해 같은 성도 혹은 교회에 대해 목회자에 대해 어떤 불평을
늘어놓는가? 만약 지금 원망이 있고 감사가 없다면, 자신의 공로에 대해 적절한 보상이 없다면서 잔치에 참여하기를 껄려 한다면 우리 또한 큰
아들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아멘.

 

   

13강.
9th. 생존에 지혜로운 자와의 대화


16:1-9

 

1.
가장 이해할 수 없는 비유

-
바로 앞부분에 위치한 '잃어버린 형제', 혹은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는 식을 줄 모르는 인기를 누리고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본문에 등장하는
부정직한 관리인의 이야기는 우리를 충분히 헷갈리게 하는 비유로서 많은 논란을 제공해 왔다. 어떻게 부정직한 사람을 칭찬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목적달성을 위해서라면 과정은 불법적이도 된다는 말인가? 대체적으로 학자들에게도 이 비유는 골칫거리였다. 20세기 자유주의 신학자의 한
사람이었던 불트만은 이 비유를 이해할 수 없는 비유라고 선언할 정도였다.

 

2.
탕자의 이야기와의 비교

-
앞의 15장의 이야기와 본문의 두 이야기에는 놀랍도록 비슷한 점이 있다.

첫째,
15장의 아들과 16장의 관리인은 모두 자신들이 받았던 신뢰를 저버린 사람이다. 둘 다 허랑방탕한 사람들이다(15:13, 16:1 /
디아스코르피드조).

둘째,
참으로 가엽게도 둘 다 위기에 처하자 변명하지 않고 아버지 또는 주인의 처분에 자신을 맡기고 있다. 오직 아버지의 자비에 기대고 있다. 마치
죄인이 판결을 기다리는 것처럼 완전히 코너에 몰린 형국이다. 한 사람은 아들 노릇을 망쳤고, 한 사람은 관리인 노릇을 망친 사람이다. 낭비하고
탕진한 삶 밖에는 보여줄게 없는 사람들이다.

셋째,
그럼에도 이 둘은 꼭 같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이다. 아들은 가족으로부터 추방당하지 않는다. 관리인은 자신이 저지른 부정직한 지출에 대해
책임추궁을 당하고 감옥에 가지 않는다. 반드시 죄 값을 치루어야 함에도 자신들이 심은 대로 거두지 않는 특별조치를 받은 자들이다. 어떤 도덕적
업적도 없는 사람들이 평생 잘못 살다가 한 방에 인생을 고침 받고 후한 대접을 받는다. 관리인은 심지어 주인으로부터 칭찬까지 듣는다. 하나님의
공의가 문제 제기를 받아야할 만큼 불공평한 처사로 여겨질 정도이다.

넷째,
두 이야기 모두에는 제대로 된 결말이 없다. 우리는 큰 아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모른다. 화를 풀고 아버지의 잔치에 참여했는지 알 수 없다.
관리인은 다시 복직을 했는지 알 수 없다. 그런데 결말이 없는 이야기는 강력한 호기심을 자극한다. 궁금증은 인간이 피할 수없는 유혹이다.
이것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이 이야기 속으로 확 끌어들게 한다. 그리고 모든 결말은 우리가 내리기를 유도한다. 여운을 남기는 이 비유를 통해
하나님은 과연 무엇을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일까?

 

3.
케네스 베일리(Kenneth Bailey)의 탁월한 주석

-
그는 이 비유를 해석할 당시 베이루트의 근동신학교의 교수였다. 그는 오랜 기간 동안 중동지역에 살면서 1세기 신약성경에 있는 당시 세계의
생활방식을 그대로 간직하고 잇던 농부들을 찾아가 그들의 언어와 관습을 연구했다. 그리하여 그러한 농부들의 문화에 익숙했던 그는 예수님의 비유를
이해하는 데 신선하고 독창적인 돌파구를 우리에게 열어주었고, 특히 이 본문을 이해하는데 밑바탕이 되는 정확한 문화적 이해를 우리에게 제공하고
있다. 당시의 전통과 사회적 관습에 따르면 주인은 토지의 주인이고, 관리인은 토지임대관리인이며, 채무자들은 자신들의 임대료를 현물(기름, 밀
등)로 지급하는 소작농이다.

-
사건의 발단은 이렇다. 어느 날 관리인이 자신이 책임지고 있는 자금 일부를 횡령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그는 그 자리에서 해고된다. 관리인은
자신이 무죄라고 항변하지 않는다. 그는 변명하지 않고 침묵으로 자신의 죄를 인정한다. 주인에게 한 번만 봐 달라고 애걸하지 않는다. 다만
관리인은 다음에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 지를 고민한다. 그에게는 일자리가 필요했다. 먹고 살 길을 찾아야 가족들의 생계를 꾸릴 수 있었다.
막노동도 생각해 보았지만 체력이 약한 그에게는 무리였고 구걸도 용기가 나지 않았다.

-
그 때 불현듯 그에게 계획 하나가 떠올랐다. 실직자가 된 이 관리인이 고심 끝에 드디어 생각해 낸 것이 무엇인가? 그는 자기 주인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었다. 주인은 보기보다 매우 자비로운 사람이었다. 또 당시에 귀족들의 관대함은 하나의 미덕이었다. 관리인은 이 미덕을 이용하기로
했다. 그는 주인의 자비에 모험을 걸기로 했다. 만약 실패하면 그는 감옥에 갈 것이다.

-
다행히 채무자들 중에 자신이 해고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즉시로 채무자들을 한 사람씩 불렀다. 채무자들인 소작농들은 오랜 기간
동안 주인과 신뢰의 관계를 맺어온 사람들이었다. 또 관리인이 주인으로부터 매우 신뢰를 받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채무자들은
관리인이 주인의 명령을 받고 자신들을 부르는 것으로 알고 그를 만나러 왔다. 그리고 매우 파격적인 조치에 감동하여 관리인이 시키는 대로 다시
계약서를 고쳐 쓴다. 만약에 관리인의 이 행위가 속임수라고 알았다면 이 이상한 계약은 성사되지 못했을 것이지만 아무도 그런 의심을 하지 않았다.
채무자들은 계산서를 고쳐 쓰는 일이 주인의 너그러운 자비심에 의해서 시행되는 합법적인 일임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어떤 이는 이 착한
관리인이 주인을 설득해서 오랜 기간 동안 주인에게 충성해 온 자신들을 위해 부채를 탕감하는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을 탄원한 결과 이런 일이 생긴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했다.

-
주인이 마침내 이 일의 전말이 어떻게 된 것인 줄 알았을 때는 이미 모든 계약은 갱신된 뒤였다. 주인은 매우 당황스럽고 화가 났다. 그러나 이내
주인은 평정심을 찾고서 이 일의 처리를 심사숙고하게 되었다. 주인에게는 두 가지의 선택권이 있었다. 하나는 채무자들을 불러놓고 이 계약은
관리인의 임의대로 행한 것이기 때문에 무효라고 선언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될 것인가? 아마. 채무자들은 화를 낼 것이고, 그 주인의
자비에 열광했던 자신들의 기쁨이 분노로 바뀌어지는 것을 결코 막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주인의 인색함에 돌을 던질 것이고, 주인을 저주할
것이다. 주인은 고개를 흔들었다. 이 선택의 결과를 주인은 상상하기 싫었다. 그렇다면 다른 선택은 무엇인가? 어쨌거나 주인은 지금 모든
채무자들로부터 관대하고 자비가 많은 매우 좋은 평판을 받고 있었다. 비록 관리인의 방식이 나쁜 것이지만 그로 인해 주인의 인기가 하늘로
치솟았다. 물질적으로 손해를 보는 일이기는 하지만 인기를 그대로 두는 것이 그리 나쁘지는 않은 선택이었다.

-
주인은 그 계약을 무효화하지 않았다. 드디어 관리인의 책략은 성공을 거두었다. 관리인은 주인이 실제로 자비롭고 관대한 사람임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다. 주인은 그런 관리인의 기지를 칭찬할 수밖에 없었다.

 

4.
결국 무엇에 관한 이야기인가?

첫째,
이 이야기는 구원에 관한 것이다.

-
이야기의 결론은 관리인이 기지를 발휘하여 자신의 위기로부터 탈출했다는 것이다. 결국 주인의 자비함을 받아 죄인이 구원을 받았다는 이야기이다.
있을 법 하지 않은 이 놀라운 은유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의 구원을 위해 인간적인 지혜와 기술, 그리고 노력을 다 해야 하지만 구원의
실행은 결코 우리들에게 권한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주인에게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만약 부정직한 관리인이 주인의 자비를 의심하고 나쁜 속임수로
주인을 험담하고 주인의 자비를 포악한 것으로 매도하거나 비난하였다면 그는 구원을 받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관리인은 방법상 다른 길을
택하기는 했어도 모든 이에게 주인의 자비하심을 실행했다. 그리고 사람들로부터 주인을 칭송하도록 만들었다. 과정이 비합법적인데도 주인은 관리인의
기지에 매료되어 관리인을 용서하고 구제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주인은 그런 기발한 관리인의 재치에 탄복했다. 자신이 단 하나의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들어버린 그 지혜로움에 탄복한 것이다. 그래서 호탕하게 웃었다.

(예화)
주차장에 세워둔 차에 키를 꽂아 놓고 내린 운전자가 어절 줄 몰라 하는데 꼬마 하나가 다가오더니 자신이 차문을 열 수 있다는 것이었다. 꼬마는
몇 분도 채 되지 않아 차 문을 열었다. 너무 놀라 입을 벌리고 있었는데, 고마가 "저의 도움이 1달러의 비용에 해당하지 않을까요?"하며
수고비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차 주인은 너무 기뻐 그 꼬마가 그런 기술을 언제 어디서 무엇 때문에 배웠는지를 묻지도 않고 "1달러뿐이냐.
2달러도 아깝지 않단다" 하고 오히려 꼬마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기꺼이 2달러를 주었다는 것이다. 꼬마는 불법 기술을 다른 사람을 돕는데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칭찬을 들은 것이다. 악한 것도 선한 일에 쓰면 오히려 축복을 받는 다는 교훈을 주는 것이다.

둘째,
이 이야기에서 유의해야 할 단어는 '분별있게'라는 단어이다
.

-
여기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프로모니스'이고 헤브리어는 '초크마'인데 개역개정에는 이를 '지혜롭게'로 번역하였고, 다른 번역본에는 '약삭빠르게
일했다'(NIV), '주인이 그를 분별있게 일했다고 칭찬했다'(RSV), '자신을 돌볼 줄 알았다'(메시지) 등으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지혜롭게'로 그 의미가 통일된다. 그런데 이 단어는 때때로 착한, 예의 바른, 반듯한 등과 같은 의미로 쓰여 지는데 이런 단어들에는
왠지 활력이 느껴지지 않는다. 착한 이미지에는 활력이 없고, 예의바른 사람에게 열정을 떠올리기는 어렵다. 분별이라는 영어 단어 prudence는
주로 여자 이름에 쓰인다. 내숭 떠는 여자라는 이미지를 갖는다. 소설가들이나 드라마 작가들은 악당이나 불량배보다 착한 사람을 매력적이고 흥미로운
주인공으로 각색하는 일이 가장 힘들다고 한다. '나쁜 남자'의 이미지가 가장 강력하고 짜릿한 흥분을 준다고 한다. 예수님은 이 부정직한 관리인의
비유를 통해 착하기만 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지도 못하고, 어떤 기지도 발휘하지도 못하는 예의 바른 마마보이,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홀로
서지도 못하는 그런 나약한 인간에 대한 하나의 대립개념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계신다. 매사에 분별을 강조하고 예의를 차리려는 사람들의 지나친
조심성, 신중함보다 위험을 무릅쓰고 위기를 탈출하기 위해 모험을 감행하는 진정한 지혜, 삶을 치열하게 살아가겠다는 열정적인 사람의 사례를
우리에게 들려주신 것이다. 그래서 전도여행을 떠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뱀처럼 지혜롭게, 양처럼 순하게' 행동할 것을 주문한 것이다. 아멘.

 

14강.
10th. 부자들과의 대화


16:14-31, 18:18-30, 19:1-10

 

1.
네 개의 이야기

 

1)
돈을 좋아하는 바리새인들(16:14-18)

-
앞의 이야기에서 예수님은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를 들려주시면서 구원을 위한 지혜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가르치시었다. 그러나 이를 들은
바리새인들은 비웃었다(14절).

-
왜일까? 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므로 돈을 손해 본 주인이 관리인을 용서해 준다는 것이 도무지 가당치도 않은 것으로 들렸을 것이다. 돈에
미혹된 자는 돈이 쌓여야 기쁨이 되는 특징이 있다. 그러나 돈에 있어서 거듭난 사람은 돈을 잘 쓸 때 큰 보람과 기쁨을 가진다. 전자의 사람은
돈이 자기를 위한 도구이지만 후자의 살메에게 있어서 돈은 하나님의 필요를 채우는 도구일 뿐이다.

-
돈의 문제에 대해 조롱하던 바리새인들을 향해 예수님은 스스로 자긍하며 교만한 바리새인들을 향해 하나님의 미움을 받을 것이라고 질타하며,
지금까지는 율법과 선지자시대 즉, 구약시대였지만 그것은 세례 요한까지이며, 이후부턴 복음의 시대가 도래한다고 선포하셨다. 이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므로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처럼 말씀을 사유화하거나 자기들만 즐기는 계층이 없어진다는 의미이다. 그렇다고 율법의 정신이 한
점도 훼손되지도 않을 것이라고 설파하셨다.

 

2)
부자와 거지 나사로(19-31)

-
부자는 세속적인 관점에서건 영적인 관심에서건 사회적 개혁과 경제적 정의의 문제에서 언제나 손쉬운 표적이 된다. 예나 저나 부자들은 냉소적이고
우스꽝스러운 풍자의 모델이 된다.

-
그런데 이 비유에서 주인공은 부자인 것 같지만 실상은 거지 나사로가 주인공이다. 예수님은 부자이야기로 시작하면서 어느새 나사로의 구원이라는
주제로 결말을 짓는다. 탕자의 비유와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처럼 이 이야기에도 극적인 반전이 이루어진다. 그 반전의 근원은 모두 자비와 긍휼을
바탕으로 한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은혜이다.

-
이야기의 초점은 다음의 두 가지로 압축된다.

첫째,
나사로는 거의 눈에 띄지 않는 사람이었다. 반면에 부자는 눈에 띄고 목소리도 잘 들린다. 유행하는 옷을 화려하게 입고 집에서는 날마다 잔치를
벌이며 호화롭게 살았다. 늘 그의 주변에는 사람들이 몰렸고,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그런데 나사로는 그들의 잔치에 한 번도 참여하지 못했다.
왁자지껄한 그들의 웃음판에 끼어들지 못한 채 부자집 대문 앞에 쭈그리고 앉아 먹을 것이 그에게 주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존재했으나 거의 눈에 보이지 않은 사람이었다. 사회마다 이러한 사람들에 대해 눈을 감고 귀를 막을 방법들을 찾아낸다. 그들은 부자들이 노는
세상에서 모습을 지워야만 하는 존재들이다. 부자들은 힘을 합해 그들을 외딴곳으로 밀쳐버린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곳으로 몰아넣고선 자물쇠를 채운다.
부자들은 쓰레기는 쓰레기 매립장에 가야 한다는 논리를 들어 가난한 사람은 빈민가로, 병들고 심신이 허약한 이상한 자들은 정신병원이나 수용시설에
가두고, 노인들은 요양원에, 고아들은 고아원으로 집어넣는다. 명절이나 국경일 등에 가끔 찾아보면 되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도 이런 차별이 있다.
단 한 번도 예배를 빠트린 적이 없는 휠체어 탄 병든 교인이 있으나 그는 관심을 받지 못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사로를 가장 먼저 찾아내었다.
돌무화과나무 위에 올라가 있던 삭개오를 찾아낸 것처럼...

둘째,
현실세계에서나 사후세계에서나 둘 사이에는 확실한 경계선(큰 구렁텅이, 26절)이 있다는 것이다. 둘은 완전히 다른 세계이다. 부자의 세계는
풍족한 육체의 향연이 있다. 그러나 나사로의 세계는 궁핍과 고독함이 있을 뿐이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두 세계는 서로 교류하지 못한다. 그것은
죽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천국과 지옥은 왕래하는 곳이 아님을 가르치고 있다.

 

3)
영생을 얻는 방법(18:18-30)

-
어떤 부자인 관리가 영생을 얻는 법에 대해 예수님께 질문한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율법이 가르친대로 모든 계명을 잘 지키며 열심 있는 신앙생활을
한 사람이다. 그는 자기쯤이면 분명히 영생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하고 예수님으로부터 그것을 공인받고 싶어 공개석상에서 이 질문을 던졌을
것이다.

-
그런 부자 관리인의 기대대로 예수님이 답변을 했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것이지만 예수님은 이미 그 속을 간파하시고 "소유를 다 팔아 가나나한
자에게 나눠주고 그리고 나서 나를 따르라"(22)고 말씀하셨다. 이에 부자관리는 심히 근심하자 예수님은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매우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덧붙이고 있다.

 

4)
삭개오(19:1--10)

-
부자이자 세리장인 삭개오가 예수가 어떤 사람인가 하고 알아보려고 몰래 무화과나무 위에 올라가서 예수님의 일거수 일투족을 지켜보고 있었다.
세리중의 대장인 삭개오는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의 무리에 기여 들지 못하고 홀로 나무 위에서 놀라운 예수님의 가르침을
훔쳐 듣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사실 삭개오는 양심이 있는 사람이었다. 에수님이 그런 삭개오의 중심을 간파하시고 그의 집에 신세를 좀 지겠다고
하자 삭개오는 매우 기뻐하며 예수님을 기꺼이 영접하며, 요청하지도 않았음에도 자발적으로 자신의 소유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겠다고
다짐을 했다. 앞의 부자에게 영생을 얻기 위해 소유를 다 팔아야 한다고 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삭개오는 기다렸다는 듯이 예수님의 요청에 순종한
것이다. 그러자 예수님은 삭개오에게 구원을 선포하신 것이다.

 

2.
교훈들

 

1)
네 개의 부자 이야기는 회개에 관한 것이다.

-
즉 회개에 있어서 가장 큰 걸림돌은 돈이라는 것이다. 사실,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회개는 그리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회개라는 말이 이해하기 어려운 말도 아니고, 회개하기 위해 무엇을 버려야 한다면 주머니 속의 먼지만 털어내면 되는 사람들이다. 말 그대로
돌아서면 되는 일이다. 그러나 부자들의 회개는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자신이 지고 있는 책임과 소유하고 있는 물질들, 해결해야 할 여러
어려운 문제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지금 당장 모든 것을 버리고 영생을 얻어야 할 시점이지만 부자는 지금 당장 모든 것을 포기하지 못한다.
지금은 때가 아니라고 자신을 합리화한다. 회개하기 위해선 너무나 많은 것들을 대가로 치루어야 한다. 릴케는 부자들이 회개하기 위해선 자신의 삶을
완전히 개정해야만 한다고 역설했다.

-
그러나 같은 부자이면서 삭개오의 경우엔 자신의 소유 중 절반 이상을 포기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는 사회적 냉대를 만회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언제든지 자신의 재산을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사람이었다. 부자들도 질이 다르고 종류가 다르고, 차원이 다른 부자가 있다는 것이다. 빌
게이츠는 현대판 삭개오일 것이다. 삭개오와 빌 게이츠는 구원의 선물을 받은 사람들이다.

 

2)
서로 다른 두 나라의 이야기이다.

-
하나님 나라는 세상나라와 대비된다. 공통점도 많지만 거의 대부분 다른 방싱으로 운영되고 통치된다.

먼저
소속원이 다르다. 하나님나라는 회개하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영생을 선물받고 거하는 곳이다. 그러나 세상나라의 사름들은 타락한 백성들이다.
그들의 귀에는 하나님의 소리가 들리지 않고 눈에는 하나님나라가 보이지 않는다.

둘째,
통치방식이 다르다. 하나님나라는 사랑으로 통치하지만 세상나라는 정죄하는 것이 특징이다.

셋째,
관계의 목적이 다르다. 하나님 나라는 사랑과 헌신, 자발성으로 관계를 맺지만 세상나라는 돈으로 지배하고 돈으로 관계를 맺고,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서로 교제한다. 이익이 없는 곳엔 발을 들여놓지 않는다. 하나님나라의 백성들은 서로 헌신하며 남을 높여주지만 세상나라의 사람들은
자신의 성공을 위해 일하고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기 위해 돈을 쌓아야 한다.

 

3)
부자들은 자신의 입맛에 맞지 않는 이야기는 철저히 파괴한다는 것이다.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 이후 실제로 그와 비슷한 나사로가
죽었다가 살아나자 부자들은 이후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했다고 성경은 기록한다(요 11:53). 오늘 우리 사회에서도 세상사람들은 어떤 일에 있어서
예수 냄새가 나면 즉시 핍박한다. 그들의 머리속에는 회개라는 단어가 입력되어 있지 않다. 그들은 회개라는 지극히 단순한 단어 하나를 가장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런 자들 앞에서 예수님은 당당히 "회개하라"고 주문하고 있다. 과연 우리는 내 옆에 있는 세상 사람에게 다가가 회개하라고
권유할 수 있는가? 오늘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교훈일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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