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고백서
개혁주의 신조학 (Reformed Creeds) / 튤립 신학 연구원 원장 김명도
신조란 우리가 믿는 도리를 요령 있게 정리한 것을 말하는데 대체로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을 믿고,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을 믿으며, 예수님 당시의 이적과 기적을 믿으며 예수님의 부활과 재림을 믿는다면 기독교의 진수를 모두 믿는 정통신앙인에 이런 것을 명백하게 고백한 신앙고백서들의 바로 개혁주의 신조들이다. 미국에 자유주의가 상륙하여 프린스톤 신학교를 어렵게 만든 것은 1920년의 일이고 그로부터 약 10년동안 장로교의 어머니 라고 불리던 프린스톤 신학교가 위기를 맞던 때 였습니다. 1924년 1월에는 New York 주 Auburn 신학교에서 장로교 목사들이 150 목사들이 모여서 이른바 오번 선언 Auburn Affirmation 이라는 문서에 서명했는데 이 문서는 그후 1924년 5월에는 1,274명이 서명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이 당시 자유주의가 처음으로 머리를 들게 된 시초이다. 그러면 이들이 서명한 그 문서는 대체 어떤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이며 내용이 무엇인가? 여기에 우리의 관심이 쏠리지 않을 수 없다.
이른바 오번 선언 (Auburn Affirmation) 이라고 불리우는 이 문서는 원래가 당시 미국 북 장로교 UPCUSA 의 1910년 총회에서 결의한 다섯 가지 항목에 대하여 목사들이 반항한 사건인데 그러면 그 다섯 가지란 무엇인가?
그 다섯 가지란, 1. 성경의 무오설, 2. 동정녀 탄생, 3 예수님의 이적 기적 인정, 4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 그리고 5. 예수님의 육적인 부활 등 다섯 가지 중요한 기독교의 핵심 교리이다.
앞으로 목사가 되는 사람은 반드시 이런 다섯 가지 항목을 의무적으로 믿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결정을 내린 동기는 당시 영국이나 독일에서 자연신교나 독일에서 비평신학 등의 자유주의가 북 장로교에 감염되어 당시 총회에서는 이를 막기 위해서 이런 다섯 가지 사항을 결정한 것이었는데 이미 자유주의가 발을 붙인 그 당시 이런 다섯 가지 기본 교리를 지키는 것은 어려웠다. 이런 다섯 가지 항목에 반기를 들고 나선 사람들은 처음에서 자유주의 목사들 150명에 불과하던 것이 불과 4개월 후에는 1,274명으로 늘어 난 것을 보면 쉽사리 알 수 있다.
목사가 되려는 사람이 이 다섯 가지 성경의 핵심 교리를 믿지 못한다면 교인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겠는가? 당시 이런 자유주의 와의 싸움에 휘말렸던 프린스톤 신학교의 교수였던
J. Gresham Machen 박사는 이 무렵 발간된 그의 명저, “기독교와 자유주의, Christianity and Liberalism" (Erdmans, 1923) 이라는 책에서 ”자유주의를 믿는 사람은 기독교 신자가 아니다‘ 라고 엄히 경계하고 있음을 본다 (p.160). Auburn Affirmation 이 결의한 것은 목사가 될 사람은 그런 다섯가지를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법을 폐지하자 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목사가 될 사람이 반드시 이런 다섯 가지를 믿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은 이런 종류의 목사가 점점 늘어나고 북 장로교는 점점 자유주의자들이 장악했고, 프린스톤 신학교에도 이런 자유주의자들이 들어와서 지금까지는 들어보지 못한 이상한 교리를 전파했다. 이를 묵과할 수 없었던 교수들은 대거 프린스톤 신학교 교수직을 탈퇴하고 프린스톤에서 약 40 마일 서편에 있는 Philadelphia 에 Westminster 신학교를 세우게 되었으니 그때가 1929년 9월의 일이고 그때 프린스톤 신학교에서 나와서 Westminster 신학교를 만든 학자들 중에는 구약의 O.T. Allis, E.J.Young, 신약분야에 Ned B. Stonehouse, J. Gresham Machen, 교회사에 Paul Wooley, 변증학에 Cornelius Van Til 박사, 조직신학 분야에 John Murray, 실천신학에 Edmund Clowney 등이 있었다. 어쨋던 자유주의는 점점 미국을 침식하게 되었고, 그 후 뉴욕의 유니온 신학교는 그 선두를 달리면서 자유주의를 전파했다. 유니온 신학교도 독일에서 공부하고 돌아와서 교수직을 맡고 있던 Charles Briggs 목사로 인하여 그 신학교가 좌경화 된 것이니 그 후에 Paul Tillich 에 와서는 극도로 기독교의 진리에서 이탈하여 자유주의 신학 교육을 했다. 참으로 암담한 시기였다.
개혁주의 신조는 초대 교회 때부터 시작하여 교회가 계속 진리로 사수해 오던 역사적인 문헌들인데 이런 문헌들이 필요한 이유는 앞서 본 바와 같이 자유주의자들이 이상한 비 성경걱인 교리를 전파하므로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비 진리인지 구별하기 위함에서 였다. 이것은 프린스톤의 경우도 그러하고 또한 초대교회에서 사도들이 영지주의와 싸울 때도 그러했다. 사실 영지주의의 공격이 없었다면 기독교의 신앙고백은 그렇게 빨리 정립되지 못했을 것이다. 영지주의가 유대교의 교리를 아전인수 격으로 이용하여 복음의 내용을 왜곡하면서 자신들의 잘못된 교리를 펴 나갔던 것이다.
개혁주의 신조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물론 초대 교회 때부터 진리라고 믿어온 모든 신조는 모두 포함된다. 따라서 325년의 니케아 신경, 380년대의 아다나시우스 신경, 기원 5세기의 사도신경, 451년의 갈게돈 신경, 등이 포함되고 그후 종교개혁을 통해서 생겨난 신조들. 이를테면, 1561년의 베르기 신앙고백서, 그를 중심으로 만들어낸 요리문답서인 1563년의 하이텔베르크 요리문답서, 1566년의 제2스위스 신앙고백서, 1619년의 도르트 신경, 1647년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및 그 대 소 요리 문답서, 1996년 4월에 만들어진 케임브릿지 선언 등은 모두 대표적인 개혁주의 신조들인바 이제 이들을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자.
첫째로, 가장 먼저 출현한 니케아 신경을 보도록 하자.
아리우스라는 사람이 “예수는 인간에 불과하고 피조물에 불과하며 하나님이 아니다“ 라는 주장하는데서 당시 정통 신학자였던 Athanasius 가 Arius를 소송하여 Constantine 황제의 주제로 Nicae에서 종교회의를 열어 Arius 의 가르침의 정통성 여부를 집중 조사했는데 결국 아리우스의 패소, 아다나시우스의 승소로 끝났지만 그것으로 소송이 일단락된 것이 아니고 다시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교리를 정립했는데 이것이 니케아 신경이다. 니케아 신경은 사도신경과 비슷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신격을 강조하다. 그리고 하나님을 “참 하나님의 참 하나님” 이니. 주님을 “주님 중 참 주님”이라고 한 점, 빛을 “빛 중에 참 빛”이라고 한 것 등, 모두 참 진리를 수호하기 위해서 최고의 수사학을 쓰면서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옹호한다.
두 번째로, 380년대의 아다나시우스 신경을 보자.
아다나시우스라는 분은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으로 정통적인 신학자였다. 그러나 그가 신경을 쓴 것은 아니고 그가 죽은 후 얼마 있다가 그의 가르침을 중심하여 후세 사람들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다나시우스 신경 인데 이는 마치 사도신경이 사도들이 쓴 것이 아니고 사도들의 가르침을 따라 후세 사람들이 기록한 것과 같다. 아다나시우스 신경의 특징은 길다는 것이다. 모두 44개 조목으로 되어 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믿음을 진리로 고백한다.” 라는 말로 시작해서 “이런 교리를 믿지 아니하면 멸망한다.” 라는 말로 끝을 맺는다. 상당히 철저한 정통적 개혁주의적 신앙고백서이며 동방교회에서는 오늘까지도 아다나시우스 신경 을 사용하고 있다.
세 번째로, 기원 5 세기경에 나온 사도신경은 우리가 가장 잘 알고 있다.
주일마다 예배시 사도신경을 외우기 때문이다.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지만 사도신경은 사도들이 쓴 것이 아니라 사도가 가신 멋 훗날 누군가가 사도들의 가르침을 따라서 믿는 도리를 기록해 둔 신앙고백이다. 처음에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로시작해서 “죄를 사해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니다.” 로 끝나는 이 사도신경은 보통 기원 5세기경에 만들어 졌다고 생각된다. 사도신경 속에는 성부에 관한 교리, 성자에 관한교리, 성령, 교회. 주 재림의 교리, 영생의 교리 등 기독교의 핵심 교리가 모두 총망라되어 있다. 가장 간결하면서도 기독교의 기본교리를 모두 수록하고 있어서 가장 널리 사용되는 교리이다. 자세히 알기 연구할 분은 별도로 10개 테입을 본 선교회에서 구입할 수 있다.
네 번째로, 451년에 나온 칼케돈 신경을 보자.
칼케돈 신경에서는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을 분명히 가르쳐 줌은 물론이고 성삼위일체의 교리도 분명하게 가르쳐 준다. 초대교회에서는 기독론 논쟁에서 성부는 성자보다 우월하고, 성자는 성령보다 우월하다는 사상을 가진 당대의 신학자들이 많았다. 교리사를 공부하신 분은 알겠지만 Origen 같은 학자는 전형적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었는데 그는 심지어 “성령은 피조물” 이라고 까지 생각했다. 얼마나 초대교회에서 교리가 약했는가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사건이다. Clement of Alexandria 같은 어른은 “예수님은 인간이 아니고 하나님이신데 그가 식사를 하신 것은 그가 시장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함으로 그가 인간인 것을 사람들에게 일부러 보이기 위해서였다” 고 가르쳤다. 극히 가소로운 일이다. 성부와 성자, 성령의 관계를 바로 정립한 것이 바로 칼케돈 신경 이다. 성부가 성자보다 높은가? 성자가 성령보다 높은가? 아니다. 본질에 있어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모두 동등하다. 권세와 영광이 동등하다. 당시 사람들은 성부와 성자, 성령은 본질은 비슷하지만 결코 같을 수 없다고 주장했었는데 이런 잘못된 생각을 바로 잡아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본질이 비슷한 것이 아니고 동질이다라고 결정한 것이다. 칼케돈 공회는 교회사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그 당시 가장 어려운 교리문제를 정립한 공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즘은 “칼케돈” 이라는 이름을 가진 기독교 잡지조차 나오고 있다.
다섯 번째로, 1561 년에 나온 벨직 신앙고백서를 보자.
벨직 신앙고백서는 Belgic Confession 이라고 하는 것으로 1561년 Guido de Bres 라는 분이 만들었다. 그는 화란 개혁 교회의 목사 였다. 종교개혁 때 화란나라는 종교개혁이 잘 되었지만 남부 화란에는 개혁이 이뤄지지 못하여 결국은 나라가 둘로 갈라져서 북의 개신교와 남부의 구교로 갈라졌는데 남부를 벨직이라고 불리우게 되었고 천주교가 지배했다. 이 신앙고백서는 천주교의 핍박이 심한 남부의 벨직에서 시작되었다고 해서 벨직 신앙고백서라고 하며 이 신앙고백서를 제정한 귀도 드브레 는 그의 개혁주의 신앙 때문에 결국은 순교 당했다. 이 신앙고백서가 만들어 질 당시 천주교의 핍박은 대단했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 때문에 죽어 갔다. Guido de Bres 는 종교개혁이 결코 국가에 불이익이 되는 것이 아니라 유익이 된다고 하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이 신앙고백서를 제정했다고 서문에 썼다. 1562년에 이 신앙고백서는 당시의 왕이던 Philip II 에게 한통의 편지와 함께 보내졌는데 그 편지의 내용은 이러하다. “모든 합법적인 일에 있어서 정부에 순복 한다” 는 것과 “이 신앙고백서에 나타난 진리를 거부당하느니보다는 차라리 등에 채찍을 맞고 혀를 짤리며 입에 재갈이 물리며 온 몸이 불구덩이 속에 던져 지는 편이 낫다“ 라는 내용이었다. 이 신앙고백서는 화란에서 받아 드려졌고, 뿐만 아니라 1618-9의 도르트 공회에서도 받아 드려지게 되었는데 모든 개신교 목사는 반드시 이 신앙고백서에 서명하도록 하였고 오늘에도 전 세계적으로 개혁교단의 3대 교리라고 하는 이른바 The Three Forms of Unity 의 하나가 되었다. 그 3대 교리라고 함은 첫째 벨직 신앙고백서, 둘째 벨직 신앙고백을 근거로 만든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그리고 셋째가 도르트 신경 인데 도르트 신경 이란 바로 튤립 (TULIP), 즉 흔히 말하는 "칼빈의 5개 강요 (Five Points of Calvinism) 라고 불리우는 것이다. 그러므로 개혁교회 목사가 되려는 사람은 반드시 이 세 가지 신앙고백서에 서명해야 하는 것이다. 서명할 뿐만 아니라 가르치는 것과 생활하는 것이 부합되어야 하다.
그러면 벨직 신앙고백서는 내용이 어떠한가?
제1장 유일하신 하나님, 2. 인간이 하나님을 깨달아 알 수 있는 방법, 3.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4.정경인 하나님의 말씀, 5.하나님의 말씀의 신성과 권위의 근거 6.정경과 외경의 차이점, 7. 유일한 신앙의 규범으로서의 성경의 충족성, 8. 하나님은 그 본질에 있어서는 하나이나 세 인격에 있어서는 구분되심, 9. 한분 하나님에 3위가 계심에 대한 전장의 증거 10. 예수 그리스도는 참되시며 영원하신 하나님이심, 11, 성령은 참되시며 영원하신 하나님이 심 12, 만물의 창조, 특히 천사들의 창조에 관하여 13. 하나님의 섭리와 만물을 주관하심, 14, 인간의 창조와 타락 그리고 참된 선을 행함에 있어서의 인간의 무능력, 15 원죄 16. 영원한 선택, 17. 타락한 인간의 회복, 18.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19.그리스도의 인격속에 있는 두 성품의 연합과 구별, 20.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안에서 그의 공의와 자비를 나타내심, 21, 우리를 위한 대 제사장인 그리스도의 속죄, 22.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한 칭의, 23.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얻는 조건, 24, 인간의 성화와 선행, 25. 의식법의 폐기, 26. 그리스도의 중보자 되심, 27. 보편적인 기독교회, 28 모든 그리스도인은 참 교회와 연결됨, 29. 참 교회의 특징 및 거짓 교회와의 차이점, 30 교회 행정과 그 직무, 31 목사, 장로 그리고 집사, 32 교회의 질서와 가르침, 33. 성례, 34 세례, 35 우리 주 그리스도의 성만찬, 36, 국가 행정, 37. 마지막 심판, 등 모두 37 장으로 되어 있다. 매우 교리가 상세하다.
여섯 번째로, 1563년에 나온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서를 보자
하이델벨르크 요리문답은 벨직 신앙고백서를 근거로 작성했다. 작성자는 하이델베르그 대학의 교수 였던 Zacharius Ursinu 와 궁중 설교자인 Olevianus 인데 왕은 개혁주의를 전파하기 위해서 이 두 사람에게 간단한 요리 문답을 만들도록 지시하였다. 이 문답서의 특징은 매 주일마다 몇 문제씩 가르치도록 구성되어 교회마다 매주일 정해진 대로 공부하면 일년 52주에 모두 한 번 마치도록 되어있다는 점이다. 이 문답서가 나오자 화란교회는 즉시 이를 수용하고 화란어로 번역하여 교회마다 도입하여 가르쳤다. 1600년에는 화란 교회의 통일된 요리문답으로 채택했다. 모든 목사는 교회에서 이 요리문답의 내용을 가르치도록 의무화했다. 후에 1619년의 도르트 공회에서도 정식으로 인정을 받게 되었고 오늘에 와서는 모든 개혁교단의 3대 기본 교리중의 하나로 자리 잡고 있다. 이 요리문답은 매 주일마다 두개, 혹은 세 개씩 공부하도록 되어 있다. 첫 째번 질문은 “살거나 죽거나 당신의 단 하나의 위로는 무엇인가?” 라고 묻고 있는데 대답은 “몸과 영이 살거나 죽거나 내 자신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나의 미쁜 구주 예수 그리스도에 속한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피로서 나의 모든 죄를 값을 다 갚아 주셨고, 악마의 지배에서 나를 완전히 해방시켜 주셨다. 그는 나를 잘 지켜 주시기 때문에 하늘이 계시는 하나님의 뜻이 없이는 머리털 하나라도 나의 머리에서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정말 모든 것이 나의 구원을 위한 그의 목적에 부합됨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므로 그의 성령에 의해서 그는 영생을 나에게 보장해 주시고 나로 하여금 이제부터는 뜻을 다하여 그를 위해 살도록 준비해 주신다“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요리문답의 내용을 보면, 1부 죄와 그 비참함, 2부 구원, 3부 감사 등 크게 3부로 되어 있다. 오늘의 교회에서도 주일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을 가르치면 좋을 것이다.
일곱 번째로, 1566년의 제2스위스 신앙고백서 이다.
스위스 Zurich의 Bullinger가 1566년에 만들었다. 처음에 1536년에 나온 제1스위스 신앙고백서는 루터파와 쯔빙글리파 간의 교리상의 화목을 위해 만들어졌지만 너무 스위스 편 즉 쯔빙글리편에 치우처 화목에 실패하였고, 1562년에 구라라에 흑사병이 돌자 Bullinger 는 그의 아내와 세 딸을 잃고, 자신도 흑사병에 결렸으나 천만다행으로 치유되어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이 신앙고백서를 만들었고, 오늘까지도 개혁교회에서는 이 신앙고백서를 칼빈주의에 입각한 중요한 교리로 수용하고 있다. 모두 30장으로 되어 있다. 1장과 2장은 천주교의 교리의 부당성을 말하고 3-5장은 신론, 6-7장은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 8-11 장은 타락, 자유의지, 예정.12장은 율법, 13장은 그리스도의 복음, 14장은 회개와 회심, 15장은 칭의, 16장은 믿음과 선행, 17-21장은 교회와 성례론, 22장은 공희, 23장은 예배, 24장은 금식, 25장은 학습 그리고 문병, 26장은 장례식 27장은 예배 의식, 28장은 교회의 재산, 29장은 결혼과 독신, 30장은 소송사건, 이렇게 전문 30장으로 되어 있는 것이 제2스위스 신앙고백서 (The Second Helvetic Confession) 이다.
어덟째, 도르트 신경 을 보자
화란에서 종교개혁의 불길로 생겨난 대학이 바로 Leyden 대학이다. 원래는 모든 구라파나 북미의 대학이 그러했듯, 목사들을 양성하는 신학기관으로 출발한 것이 화란의 라이든 대학이다. 여기에서 조직신학을 강의하던 James Arminius 라는 분이 있었다. 그는 칼빈 선생의 오른 팔 격이던 Theodor (영어 철자는 Theodore) Beza 에 사사하면서 직접 배운 분이라서 처음에는 철저한 개혁주의 신학자 이었지만 화란에 돌아와서 화란개혁교단 산하에서 몇 년간 목회하면서 그의 신학에 변화가 생겼다. 그의 가르침은 이러하다.
1. 사람은 전적으로 타락한 것이 아니고 스스로 하나님을 찾아 갈수 있다.
2. 하나님은 조건부로 구원할 자를 택해 주셨다.
3.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세상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다.
4. 사람은 하나님이 구원의 은혜로 불러 주신다고해도 본인이 이 은혜를 거절할수 있다.
5. 사람은 한번 구원을 받았다가 후에 구원을 잃을 수 있다.
이런 신학을 갖고 학생들을 가르치던 아르미니우스 교수는 1609년에 세상을 떠나고 그가 세상을 떠난 이듬해인 1610년에 그의 제자들이 화란정부에 항의문을 제출하였는데 그 내용은 화란정부가 당시 국민들에게 가르치던 교리가 그릇되었으므로 아르미니우스 교수의 가르침대로 고쳐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화란은 철저한 칼빈주의 적 개혁주의를 따르는 나라였다. 사실, 오늘의 화란은 개혁주의가 퇴색해 가지만 17세기만 해도 화란은 유럽에서 가장 개혁주의적인 나라였다. 화란 정부는 아르미니우스의 제자들의 항의서를 접수하고 심사숙고한 끝에 1618년 11월 드디어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토론하려고 공회를 소집했다. 모두 84명의 종교계 지도자들이 여러 나라에서 모였다. 그중 48명만 화란 사람들 이었고 나머지는 유럽의 다른 지방에서 온 성직자 들이었다. 장장 153차 회의를 거쳐 1619년 5월에 회의가 끝났는데 결과는 아르미니우스의 제자들의 완전한 패소였다. 거기에 모인 사람들은 아르미니우스의 제자들이 제기했던 신학적 문제 5개 항목을 항목별로 성경적으로 바로 잡아 주었는데 결과는:
1. 사람은 전적으로 타락하여 스스로 하나님을 찾아 갈수 없다
2. 하나님은 무조건 구원할 자를 택해 주셨다.
3.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의 택한 자들만을 위한 것이다.
4. 사람은 하나님이 구원의 은혜로 불러 주시면 은혜를 거절할 수 없다.
5. 사람은 한번 구원을 받으면 구원을 잃을 수 없다.
이상과 같은 내용이다. 이것을 도르트신경 (Canons of Dordt ) 라고 한다. 이 도르트 신경은 오늘 미국에 산재하고 있는 개혁교단이 믿는 3대 기본신조 (The Three Forms of Unity) 의 하나이다. 다른 두 가지는 1561년의 벨직 신앙고백 과 1563년의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이라고 앞서 언급한바 있다. 이런 도르트신경 이 채택되고 난 후, 프랑스의 소물 학파 (Saumur School) 가 거세게 반발하여 이의 무효를 주장했는데 이에 Saumur 학파에 반박하여 개혁주의자들은 Forma Helvetica Concensus 라는 신조를 만들었는데 지도급 인사는 프랑스의 유명한 정통 신학자인 Francis Turretin 이다. 그의 아버지 되는 사람은 프랑스 대표로 1618-1619년의 도르트 대회에 참석하여 정통 신학을 고수한 사람이다.
아홉번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을 보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아마도 사도신경 다음으로 장로교인들 간에는 제일 많이 알려진 신앙고백서 일 것이다. 목사, 장로, 집사 안수 때는 장로교단에서는 반드시 “웨스트민스터 신조는 성경을 가장 잘 총괄한 신앙고백서로 믿으며 따릅니까?” 라는 질문부터 시작한다. 이 신앙고백서가 그렇게 유명한 이유는 모든 다른 개혁주의 신조보다 월등하게 세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전문 33장으로 되어 있는 이 신앙고백서는 다른 신조와는 특이하게 처음에 시작할 때
“Of the Holy Scripture, 성경에 관하여” 로 시작하여 마지막 33장은 “Of the Last Thing, 종말에 관하여” 로 끝난다. 그리고 제1장인 “성경에 관하여” 에서는 전문 10절에 이르기까지 아주 상세하게 “오직 성경” 이라고 외친 종교개혁가들의 사상을 잘 나타내 주듯 성경이 우리 신앙과 생활의 유일한 법칙이라는 것고, 지금은 계시가 종결되었다는 것, 성경은 성경으로 비교하여 해석한다는 것, 그리고 교회에서 문제가 생기면 반드시 성경을 통해서 해결한다 는 등 상당히 자세하게 성경의 필요성, 성경의 권위 그리고 성경의 충족성을 가르쳐주고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자체는 33장이지만 대요리문답이 196문, 소요리문답이 107문으로 되어 있다. 소요리문답은 길이가 짧다고해서 소요리문답 (Shorter Catechism) 이라고 하고 대요리문답 (Larger Catechism) 은 길이가 길어서 그렇게 불리우는데 소요리문답서에는 없는 교회론이 대요리문답서 에 들어 있기 때문에 더 길다.
1600년도 중엽에 영국에는 Charles I (찰스 1세) 가 왕위에 있었는데 예배가 천주교식이 었다. 이에 영국 의회에서는 예배 의식을 신약의 예배 형태로 바꾸려는 의도에서 모임을 갖고 예배를 개선할 예배모범을 만들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여기에 모인 120명 대표중 6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명문 Oxford, 혹은 Cambridge 의 현직에 있는 학자들이 었다. 이들의 생각은 이번 기회에 믿는 도리를 새로 만들어 보자는 생각이 지배적이어서 결국은 예배모범만이 아니라 기독교 교리 전체를 다시 정립하는 기회로 삼고 새로운 신앙고백서를 쓰게 되었다. 여기에는 멀리 Scotland에서 온 George Gillspie 같은 위대한 학자들 6명이 있었다. 이들은 투표권은 없었지만 진지하게 회의를 도왔다. 의장이던 William Twisse 목사는 장장 4년이나 걸린 이 모임을 주관하면서 회의가 시작할 때 마다 모든 회원들이 일어서 서서 “나는 나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서 내 양심대로 발언하고, 토의와 결정에 참가할 것을 엄숙히 서약한다” 는 서약을 받았다고 한다. (! David Hall, Windows of Westminster Abbey.) 오늘날의 교단 총회와는 달리 그들은 정말 조금도 사심이 없이 하나님의 영광만 위해서 성경이 교훈하는 바를 그대로 신앙고백서에 반영했다. 그 만큼 그들은 학식과 신학과 인격이 훌륭한 분들이 었다. 오늘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청념한 분들이었다.
회의는 주로 Westminster Abbey 옆에 있는 St. Margaret Chapel에서 열렸으나 회원 120명이 모두 참가하는 일은 거의 없었고 대개 평균 70명정도 참석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들은 1643년 9월 23일부터 모이기 시작하여 1647년 11월 목사고시 문제까지 만들어 목사 고시가 끝날 때 까지 무려 4년 반이라는 오랜 세월동안 이 신앙고백서 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 결과 얻은 것은 1647년의 Westminster Confessio of Faith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라는 멋진 개혁주의 신앙고백서이다. 1993년은 120명의 대의원들이 처음으로 모여서 새로운 신앙고백서 제정을 논의한지 정확히 350주년 되는 해 였다. 때를 맞추어 9월 23일 다섯 개의 미국 보수 장로교단 과 개혁교단 그리고 한 개의 외국교단으로 구성되어 있는 북미주 보수 장로교 및 개혁교단 협회 (NAPARC, North American Presbyterian and Reformed Council) 에서는 여러 번의 임원회를 거쳐 본회의에서 정식으로 이 날을 기념하여 대대적인 국제 학술대회를 갖기로 하여 세계 도처에서 개혁주의를 믿는 학자, 목사, 신학교 교수 학생등 모두 250명이 참석하여 9월 23일부터 9월 30일까지 열린 “웨스트민스터 신조 제정 350주년 기념 국제 학술대회”는 대 성황을 이루었고 mass media 의 각광을 받았다.
1993년 9월 23일 오후 1시에 the late Rev. Dr. James Montgomery Boice의 "Preexistence of Christ" 라는 설교를 필두로 시작된 행사는 그 다음날 St. Margeret Chapel에서 350년전 회의 실황 실연, 그리고 그 다음날부터 Westminster Abbey로부터 몇마일 떨어진 Westminster Chapel에서 본격적으로 학술대회가 열렸는데 주제 발표자는 주로
Westminster 신학교 (Philadelphia, PA), Reformed Presbyterian Theological Seminary (Pittsburgh, PA), Erskine Theological Seminary (Greenville, SC), Sterling College (Sterling, Scotland), University of Aberdeen (Aberdeen, Scotland) 등 여러 학교의 교수 및 교장들이 었다. 필자는 그 학술대회에서 사회를 맡았던 감격을 잊지 못한다. 학술대회가 있었던 장소인 Westminster Chapel 은 유명한 D. Martyn Lloyd-Jones 목사가 목회하던 교회였다. 지금은 하바드 출신 모 목사가 그곳에서 와서 목회한다고 들었다. 그 교회는 겉으로 볼 때는 평범한 붉은 벽돌 건물이었으나 안에 들어가 보면 약 200명이 앉을 수 있는 의자에 강대상은 사람의 키보다 더 높아서 맨 앞줄에 앉은 성도는 얼굴을 아주 높이 들어야 목사의 얼굴을 볼 수 있다. 평소에 서책을 통해서 존경하던 Lloyd-Jones 목사님이 설교하시던 그 단상에 부족한 제가 올라서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를 만들었던 당시를 역사물을 통해서 고증하는 학자들의 학술대회 사회를 맡았던 일은 내 평생에 잊을 수 없는 기쁨과 감격이었다고 기억된다. 우리 일행은 학술대회를 마치고 Buckingham 궁과 Windsor 궁을 견학하고 이튼 날 10 여일 간의 Scotland 여행길에 떠났다. 장로교의 뿌리를 찾아서 우리 일행은 영국의 명문 Oxford, Churchill 경의 무덤, Shakespeare 의 고향 Stratford-on-Avon 에 있는 Shakespearean Theater에서 Tempest 란 연극을 관람하고, Scotland 에 기독교가 처음으로 들어온 Iona 섬의 수도원들을 둘러보고, Sterling을 거처 동부의 Edinburgh 와 St. Andrews, 詩人 William Wordsworth의 생가, Walter Scott 의 생가, 또 John Knox의 목회지였던 St.Giles Church (Edinburgh 소재) 와 Cambridge 대학, York에 있는 Yorkminster Abbey, Greenwich 천문대, 대영박물관(여기에 Rosetta Stone, 신약 시내사본, 알렉산드리아 사본 등이 소장되어 있음), Spurgeon 목사의 Metropolitan Tabernacle 등을 둘러 볼 기회가 있었는데 이에 대해서는 별도로 책자로 기행문을 발행할 계획이다.
끝으로, 열 번째, 캠브리지 선언 이다.
캠브리지 선언 Cambridge Declaration) 은 1996년 4월 19-21일 미국 New England의 Massachusetts 주 Cambridge에서 개혁주의를 신봉하는 학자들 20여명이 모여서 만든 가장 최근에 나온 기독교 신앙고백서이다. 이 신앙고백서가 하바드 대학교 가 있는 Cambridge에서 만들어진 이유는 오늘의 지성인들의 상아탑이라고 할 수 있는 동부 명문대들이 밀집한 New England에서 지성인들로 하여금 역사적인 개혁주의 신앙으로 돌아오도록 촉구함이 그 의도였다. 이 신조의 내용은 바로 16세기 종교개혁의 못토 그것의 재현이었다. 즉 다음의 다섯 가지 이다.
Sola Scriptura (오직 성경), Solus Christus (오직 그리스도), Sola fide (오직 믿음)
Sola Gratia (오직 은혜), Soli Deo Gloria (오직 하나님에게만 영광)
성경만이 우리의 생활과 신앙의 유일한 법칙이며 다른 계시나 환상이 아니라는 성경의 충족성을 강조한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구세주이며 마리아가 공동구세주가 될 수 없다.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는 다원주의 (pluralism)을 배격하고 있다.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으며 공로가 구원에 가미되지 않는다. 구원이란 협력적 중생 (Synergism) 으로 되어지지 않고 어디까지나 독력적중생 (Monergism) 이다 우리 인생은 완전 타락한 까닭에 스스로 하나님을 찾아 갈 능력이 없고 구원에 무엇인가 공을 세울 수도 없다.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은 순전히 처음에서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에 기인한다.
이상 열 가지 신앙고백서는 개혁주의 신앙을 정립한 역사적 문헌들이다.
이 신앙고백서들의 내용을 잘 익혀 두어 바른 신앙생활을 하며 자손들에게 바른 신앙을 전수하고 이웃에게도 바른 신앙을 전하자. 신조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인식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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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과 교리개혁: 사도신경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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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 신조학 (Reformed Creeds) / 튤립 신학 연구원 원장 김명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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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903년 수정판의 신학적 문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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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신앙고백/김현수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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