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고백서
신조학/허순길 교수
1. 신조학의 의미
신조학은 원래 라전어로 "심볼룸"(Symbilum)이라 불려졌다. 이 말은 희랍어의 "숨볼론"(Sumbolon)에서 온 것으로 원래 기장, 표어, 상징 등을 의미한 것이었다. 키프리안(Cyprianus)이 일찍부터 이 말을 신앙고백이란 뜻으로 사용했었다. 이 말을 처음 교회적으로 사용하게 된 것이 나타난 것은 알즈 총회(Synod of Arles,314)의 문서부터 나타난다. 어떤 이단 종파에 속해 있던 사람이 교회로 돌아 오게 되었을 때에 그가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는지를 알기 위해 그의 신앙고백(eum symbilum)을 요구해야 한다는 주장에서부터 사용되었다.
일찍부터 교회에서는 세례 예식을 집행하기 전 세례를 받을 사람에게 특별한 신앙고백문에 따른 신앙고백을 요구했었다. 이 신앙고백은 다른 사람들과 구별을 짓는 하나의 표였다. 그래서 터툴리안(Tertullianus)은 이 신앙고백을 심볼룸(표)이라고 말한 것이다. 이 외에 여러 교부들(Cyrillus of Jerusalem, Rufinus, Augustius)의 저서 속에도 심볼롬은 세례시에 받게되는 신앙고백을 가리켰고, 마침내 이 심볼룸이란 말은 한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진리로 믿는 바를 선언하는 교리의 항목인 신조를 가리키게 되었다. 그래서 신조는 언제나 교회적인 성격을 가지게 되었고, 신조라는 것은 그 교회가 성경을 따라 진리로 믿고 있는 것을 선언하는 것이다. 교리문답서(Catechism)도 신조의 성격을 가진다. 이는 교회가 자라나는 세대의 교리교육을 위해 성경의 진리를 따라 작성된 교리표준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2. 신조의 기원
신자는 자기가 믿는 진리를 공적으로 고백하고, 이를 증거함으로 다른 사람들을 그 진리로 이끌기를 원한다. 여호와 하나님만이 참된 신이심을 알게 된 자는 일찍부터 그의 신앙을 감사한 마음으로 고백하고 증거 했었다.
이 신앙고백과 증거는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교회로부터 무수히 발견된다. 출애굽을 통해 여호와의 권능을 보고 겪은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리로다"라고 여호와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고 노래했다(출15:1-18). 특별히 시편 전체는 신앙고백의 노래라고 부를 수 있다.
신약시대의 신앙고백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 내용을 더욱 구체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특별히 언약 백성인 유대인들은 나사렛 예수를 성경에 약속된 그리스도(메시야)로 믿고 고백하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이 신앙고백의 첫 번째 예는 베드로에게서 발견된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으셨을 때에,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했다(마16:16).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자리에서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고백했다. 예수의 복음을 받아드리고 믿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요20:28)로, 주(고전12:3, 빌2:11)로, 혹은 하나님의 아들(히4:14, 요일4:14, 5:5)로 고백했었다.
신자들의 신앙고백은 차츰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의 내용으로부터 성령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포괄하는 삼위 하나님에 대한 신앙내용으로 확대되어 구체적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이는 예수님이 그의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주신 명령인 "너희는 가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하신 말씀을 생각나게 한다(마28:19). 주께서는 이미 이 말씀 속에서 그의 교회로 부름을 받은 자들은 삼위 하나님을 믿고 고백하여야 할 것임을 함축적으로 가르쳐 주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는 자는 신자라는 표(symbilum)로 삼위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먼저 고백해야만 하게 되었다. 이 신앙고백은 일찍부터 개인적인 차원에 머물지 않고 교회적인 것으로 보편화되었다.
특별히 서신들 속에는 사도시대에 이미 교회안에 보편화되어 있었던 신앙고백문의 흔적이 여러 곳 있다. 딤전 3:16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셨음이니라"고 한 말씀은 신앙고백 내용의 일부를 찬송으로 고백한 것으로 보인다. 더욱 빌2-11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는 말씀은 분명히 사도 시대의 신앙고백문으로부터 온 것으로 여겨진다. 당시 디모데도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게 되었을 때에 교회에서 이에 따른 신앙고백을 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바울이 디모데에게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하였도다"고 함으로 지난날에 행한 교회에서의 공적인 증거를 기억나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딤전 6:12). 이 공적인 증거는 그가 교회에서 행한 신앙고백을 가리키고 있음이 틀림없다.
특별히 요한 서신 속에는 사도들이 가르친 삼위 하나님에 관한 신앙내용이 완전하게 나타나 있음을 보게 된다. 사도 요한은 "거짓말 하는 자가 누구뇨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뇨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고 했고(요일 2:22-23), 또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라고 하였다(요일5:6-7).
이 삼위 하나님에 관한 교리적인 내용의 신앙고백은 곧 교회의 공식적인 고백문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나는 성부 성자 성령을 믿습니다"라는 고백문으로 나타나게 되고, 차츰 이 신앙고백문에 다른 중요한 교리 항목들이 첨가되어 서방교회에서는 사도신경으로 발전되어 나타나게 되었고, 동방에서는 니케아 신경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오늘날 교회가 가지고 있는 신조들의 기원은 다양하다. 어떤 것은 교회 생활의 발전 과정에서 작성되어 하나님의 섭리적인 인도로 자연스럽게 교회의 신조로서 받아드려지게 되었다(사도신경). 또 어떤 것들은 교회의 공회에서 작성되어 받아드려지기도 했다(니케아 신경, 도르트 신경, 웨스트민스더 신앙고백 등). 이 밖에 어떤 신조들은 한 신학자가 작성한 것이나 혹은 수명의 신학자들이 작성한 것을 어떤 교회가 그 교회의 신앙고백으로 받아들였다(벨직 신앙고백서,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서 등).
3. 신조의 필요성
교회 안에는 신조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신조의 무용론을 펴는 분들도 있다. 그런데 교회는 일찍부터 신조의 필요성을 느끼고 신조를 작성하여 이를 교회 공동체 생활의 교리 표준으로 삼고 살아왔다.
신조는 교회생활에 필요하다. 이는 신조가 작성된 역사적 배경들이 잘 설명해 주고 있다. 먼저, 교회는 이방인들과 이단자들의 비방을 물리치고, 기독교 진리의 탁월성을 증거하기 위해 신앙내용을 선명하게 밝힌 신조를 가져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교회는 처음부터 신앙의 내용 때문에 이방인들과 이단자들로부터 비방을 받았다. 이때 교회는 이들의 비방을 배격할 뿐 아니라, 교회가 믿고 있는 탁월한 진리를 공적으로 널리 증거하기 위하여 성경에 계시된 진리의 핵심적인 내용을 간명하게 밝힐 필요를 느꼈다. 이 결과로 작성된 것이 신조였다.
종교개혁시대에도 거의 같은 이유로 다수의 신조들이 작성되었다. 로마교회는 개혁교회 신자들을 이단으로 단정하고 박해를 가해 왔다. 이 때에 개혁주의자들은 개혁교회 신자들의 신앙이 성경의 진리에 입각해 있다는 사실을 신앙고백서를 통해 증거함으로 로마교회의 잘못을 지적하고, 그 비방을 물리쳤다. 벨직신앙고백(Belgic Confession, 1561)이 그 가운데 한 예가 된다.
다음으로, 교회가 이단자들의 침투로 혼란과 어려움을 겪게 되었을 때에, 성경의 말씀을 따라 이들의 오류를 드러내고, 진리를 밝혀야 할 필요성을 느껴 신조를 작성하게 되었다. 이런 결과로 고대 교회에서 작성된 신조가 니케아 신경(The Nicene Creed)이고, 종교개혁시대에 작성된 것이 돌트신경(The Caonons of Dordt)이다. 이단은 언제나 같은 본질적 속성을 가지면서, 그 때의 환경을 따라 새로운 의장을 하고 나타날 뿐이다. 그런고로 교회는 변함이 없는 성경 진리를 정리한 신앙고백 내용을 파수하고 후대에 전해 줄 사명을 가지고 있다.
나아가 교회는 교회의 일치성을 지켜가기 위해 신조를 필요로 했다. 교회는 이단자들의 책동과 거짓 교사들의 그릇된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끊임없이 분열의 위험을 받아 왔다. 교회의 일치는 같은 신앙내용을 고백하고 파수함으로 가능하다. 예를 들면 4세기에 아리우스 이단으로 말미암아 교회가 분열의 위기를 맞았을 때에, 니케아에서 모인 공의회가 니케아 신경을 작성하여 함께 받고, 고백함으로 이단을 물리치고 교회의 일치를 보존할 수 있었다. 공적인 신앙고백은 교회의 일치성을 보존하기 위해 필요하다.
그러나 신조(신앙고백서)에 대한 무용론을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특별히 20세기의 교회의 일치론자들(Ecumenists)은 신조문제에 있서서 매우 부정적이다.
먼저 이들은 신조란 성경의 충족성에 배치된다는 것이다. 이는 신조를 오해하는 데서 나오고 있다. 개혁주의 교회는 로마교회가 전통과 교황의 교서에 절대무오의 권위를 돌려 성경의 진리에 이를 첨가하는 것처럼, 신조(신앙고백서)에 성경과 같은 권위를 결코 돌리지 않는다. 신앙고백서의 내용은 성경에 계시된 진리의 내용을 조직화하여 밝힌 것이다. 성경이 진리를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지만은, 이를 해석하고 조직적으로 제시할 필요성이 있다. 신앙고백서는 성경에 없는 것을 결코 포함하지 않는다.
다음으로 이들은 신조를 갖는다는 것은 신앙 양심을 속박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 온다고 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도 신앙고백서의 내용에 양심의 강요를 당하지 않는다. 신앙고백서를 따라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 고백서 속에 담긴 성경의 교훈을 확신하고 기쁨으로 고백하게 되는 것이다. 혹 어떤 부분이 성경과 모순되는 것으로 확신이 가게 되어 양심에 거리낌을 받게 될 때에, 그는 언제든지 거기에 대한 이유를 밝히고 공회에 수정을 요구할 수 있다.
나아가 신조를 갖는다는 것은 신학연구의 길을 막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앙고백서는 모든 교리를 세부적인 부분에 이르기까지 밝힌 완성된 신학 체계가 아니다. 신앙고백서는 성경연구를 통한 새로운 발견을 따라 수정과 증보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31장에는 원래 위정자들이 교회의 총회를 소집할 수 있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후일 이것이 성경적이 아님을 발견하고 삭제하게 되었다(벨직 신앙고백서 36장도 참고하라).
끝으로 신조를 갖는다는 것은 교회 분열을 조장하는 결과를 가져 온다고도 한다. 근래에 교리를 초월한 교회일치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교리는 분열을 일으키고, 신앙은 연합하게 한다(Doctrine divides and faith unites)"는 말을 하고 있다. 이들은 각 교회가 가진 신조들이 교회의 장벽을 두텁게 하고 교회의 분열을 조장한다고 한다. 그러나 오히려 신앙고백서를 통한 교리표준이 없을 때에 교회에 큰 혼란이 야기되고 분열이 가속화되기 마련이다. 이는 지난날의 역사가 잘 말해 주며 그 결과 신조는 참 교회의 보존과 파수를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증명할 뿐이다.
4. 신조의 권위
성경의 권위는 절대적이다. 그러나 신조의 권위는 상대적이다. 성경은 절대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래서 성경은 신앙과 생활에 있어서 절대 무오한 척도가 된다. 그러나 신조는 언제나 그 권위를 성경에 의존하고 있다. 신조의 권위와 가치는 성경에서 나온다는데 있다. 성경에 근거하지 않는 어떤 교리도 신조에 포함될 수 없다. "신조는 언제나 성경에 호소하고, 성경을 모든 교리의 원천과 표준으로 삼는다." 그러니 신조는 교회의 성경 지식의 계발을 따라 수정될 수도 있고, 보완될 수도 있다. 그러나 성경은 완전하고 오류가 없음으로 수정이나 보완을 할 수 없다(계22:18-19).
성경은 하나님에게로부터 직접 온 계시이다. 그러나 신조는 이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에 대한 인간편의 응답이다. 그래서 성경은 신앙의 법칙이요, 신조는 교리의 법칙이라 할 수 있다. 성경은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절대 권위를 가지나, 신앙고백은 교회에 속한 것으로 상대적인 권위를 가진다. 그런고로 신조와 성경의 권위를 동일시할 수 없다. 그렇지만 이런 이유로 신조의 권위를 경시해서는 안된다.
신조는 교회적인 신앙고백이다. 그러므로 그 교회에 속한 신자는 누구나 이 신조에 배치되는 내용을 따르거나 가르쳐서는 안된다. 혹 어떤 신조의 내용이 자신이 이해하고 있는 성경의 내용과 다르다고 확신하게 될 때에는 이 문제를 먼저 교회의 치리회에 제기하여야 한다. 그 신조가 교회로 말미암아 공식적으로 잘못된 것이 밝혀지고 수정되기 전에는 이를 누구에게도 유포하거나 가르쳐서는 안된다. 그 이유는 신조가 교회의 공적인 고백서이기 때문이다
5. 신조의 권위가 미치는 범위
누가 이 신조를 신앙고백으로 하며 그 권위아래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가? 신조는 한 교파 교회의 공적인 신앙고백이다. 장로교회는 장로교회 고유의 신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장로교회"라 불려진다. 그러니 교회의 신조는 그 교회 공동체 전체의 신앙고백의 내용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 신조의 내용을 다 자기 신앙고백으로 받고 그대로 살아야 할 자들의 범위에 있어서 차츰 교회들 간에 입장의 차이가 나타나게 되었다. 개혁주의 신앙노선을 견지하는 개혁교회나 장로교회가 모두 원래에는 교회가 가진 신조를 전 교회의 신조로 받아 모든 신자들이 자기 신앙고백으로 고백하고 받아 들였다.
세례를 받기 전의 신앙고백이나 입교를 위한 신앙고백은 교회가 공동체로 고백하는 교회의 신앙고백의 내용이었다. 대륙의 개혁교회가 이 전통을 그대로 지켜오고 있다. 스코틀랜드 장로교회(The Free Church of Scotland)도 이 개혁주의 교회의 전통을 오늘날까지 그대로 지켜오고 있다. 그러나 미주의 장로교회들과 한국장로교회에서는 교회를 지도하는 직분자들만이 교회의 신조를 공적으로 받아 드리는 서약하고 있다. 일반 신자들은 세례를 받기 위한 신앙고백을 할 때나 입교를 위해 신앙고백을 할 때에 기독교의 기본 진리만을 고백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다. 이 사실은 예배모범에 잘 나타나 있다. 이는 개혁주의 교회관이 흐려진 한 단면이라 볼 수 있겠다.
교회의 신조를 직분자만이 받느냐, 혹은 교회에 속한 직분자와 일반 신자 모두가 다 받느냐 하는 문제가 교회 존재의 본질적인 문제는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한 교회에 속하여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왜 내가 이 교회에 속하여 신앙생활을 하는가?" 이유를 밝힐 수 있어야 한다. 신자는 언제나 가장 참되고 완전한 교회에 속할 의무를 하나님 앞에 지고 있기 때문이다. 장로교회의 신자가 된 사람은 왜 내가 장로교회의 교인이 되었는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교회는 직분자들 뿐 아니라 그 교회에 속한 모든 신자들이 같은 신조를 중심으로 한 몸이 되어야 한다. 이럴 때 교회의 교리적인 순정성과 생활의 일치성도 지켜갈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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