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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강해

사도신경 강해 - 아더 핑크(A. W. Pink)

작성자
쥬니어칼빈
작성일
2012-11-13 20:54
조회
9934

서 론 


 



 사도신경은 주기도문과 더불어 모든 교회에서 암송되어지고 있다. 그러나 주기도문은 성경에 명백히 기록되어 있는 반면 사도신경은 성경 가운데서 자구적으로 일치하는 기록을 찾을 수 없다. 그럼에도 사도 신경이 교회 역사 가운데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계속 암송되며 사랑받는 것은 구원에 대한 기독교의 진리가 함축적으로 잘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사도신경은 인간 구원과 관련된 성경의 진리를 요약하여 구원의 주체이신 삼위 하나님의 사역별로 정리한 것이다. 따라서 사도신경이 성경 자체와 동일한 권위를 갖는다고 말하기는 어려우나 성경에서 구원의 진리를 추출한 것이기 때문에 진리의 말씀인 성경과는 완전한 조화를 이루는 성경적인 것이다.


 



 한편 사도신경이 언제부터 고백되어 왔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들이 있다. 전설적인 이야기로는 예수께서 승천하신지 열흘이 되던 날 사도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앞으로 그들이 전파할 복음의 내용을 동일하게 하기 위해 요강을 만들었는데 이때 사도들이 돌아가면서 한마디씩 말한 내용을 엮은 것이 사도신경이란 것이다. 이는 사도신경에 12번의 '믿는다'는 말이 나오는 것과 조화를 이루며 사도신경의 기원을 사도에게 둠으로써 권위를 갖게 하려는 의도에서 널리 유포되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고백하는 것과 동일한 형태의 사도신경은 710-724년에 작성된 문서에서 비로소 나타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신경은 사도적 권위를 갖는 것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사도들이 활동하던 초대교회 당시부터 성도의 신앙 고백으로 사도신경이 사용되었으며 따라서 이는 사도들의 바른 신앙이 전승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초대 교회 때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의 계속 사도신경을 사용하고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첫째, 방대한 기독교의 구원 진리를 간결한 형태로 정리하여 일관성 있는 진리를 사람들에게 교육하기 위해서이다. 둘째, 기독교의 순수성을 해치는 이단의 그릇된 견해를 분별하는 기준을 마련하기 위해서이다. 셋째, 성도들로 하여금 항상 바른 신앙을 고백케함으로써 자신의 신앙을 되돌아보며 신앙을 향상시키기 위해서이다.


 



 이처럼 사도신경은 성경에 입각하여 기독교의 구원 진리를 일목요연하게 요약한 역사성을 지닌 신앙고백이다. 이러한 신앙 고백은 인간 구원을 이루시는 삼위 하나님의 역할이 성부.성자.성령의 사역별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본서에서도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여 성자 그리스도와 성령의 구원 사역을 구분하여 해설하고 있다.


 



 그러나 사도신경이 성자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에 대해 상대적으로 많은 내용을 담고 있는 바 이에 대하여는 성자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한 신앙 고백과 성자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대한 신앙 고백으로 나누어 해설하고자 한다. 실로 성경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는 사도신경을 깊이 음미한다면 큰 신앙의 성장을 이룩할 수 있을 것이다.


 


 


 


제1장 신앙고백의 주체선언-각개인


 



 "...내가 믿사오며..."


 


 


 


 



 사도신경은 단순하지만 심오한 문장으로 시작된다. 즉 "내가 믿습니다.(I believe in)"라는 구절로 시작된다. "내가 믿습니다"라고 시작되는 사도신경의 서두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개인적인 것이라는 성경의 진리를 잘 반영하고 있다. 그것은 사도신경 암송자가 자신이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실을 무엇보다도 먼저 고백하는 것이다.


 



 우리가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교회의 일원이기 때문에 그것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교회에 가입하기 전에 우리는 이미 사도신경에 진술된 진리를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자기 자신의 개인적 신앙의 토대 위에서 "내가 믿습니다"라고 고백하여 사보 신경을 받아들임으로써 그 교회의 교제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기독 교회는 신자들의 공동체이다. 그리고 모든 신자는 성경에 계시된 동일한 진리를 믿는다. 그렇지 않다면, 신자들은 교회에 나아가 다른 신자들과 함께 모이지 않을 것이다.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겠는가?"(고후 6:15). 그러므로 신자들이 고백하는 사도신경은 신자들의 공동체인 교회의 신앙에 대한 표현이다. 그러나 이미 말하였거니와 사도신경은 먼저, 교회 각 회원의 개인적 신앙의 표현이었기에 그들의 것이다.


 



 이 진리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께 대한 신앙은 분명히 개인적인 것이다. 우리가 이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한, 신앙 생활은 단지 종교적인 관습에 지나지 않게 되고 이러한 관습적 종교 행위는 조만간 따분한 일이 되고 말 것이다. 많은 사람들의 삶이 그러하다. 십대들은 주일 학교가 따분하기 때문에 거기서 떨어져 나간다. 성인들도 설교가 자기들의 분명한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한다는 핑계를 대면서 교회에서 멀어진 다.


 



 어떤 경우에는 설교 내용이 지적된다. 청중은 그 설교 내용을 이해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그것을 거부한다. 그들은 시편 10편에 나오는 악인과 흡사하다. 그는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치 아니하신다 하며, 그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시 10:4)고 한다. 분명히 계셔서 역사를 주관하시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사람에게는 소망이 없다.


 



 반대로 하나님이 계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소망이 있다. 그러나 많은 경우 그들도 개인적으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그들은 교회에서 자라왔기 때문에, 단순히 교회의 일원이 되었다는 사실만으로 그들의 미래가 보장받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상 개인적인 신앙 고백이 없는 자들은 형식상 교인일 뿐이며 실상은 교인 자격을 박탈당하고 교회에서 쫓겨난 자처럼 교회 안의 잃어버린 자이다.


 



 구원은 복음의 진리를 체득하고, 자기 죄에서 돌이켜 그리스도께서 그의 삶 속으로 들어오시기를 믿음으로 기도하는 사람의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응하는 자 한사람 한사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다. 그들은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롬 10:9)라고 한 사도 바울의 말씀에 귀를 기울인다.


 



 만약 여러분이 이 말씀에 깊이 주의한다면, 진실하게 사도신경을 고백할 수 있을 것이다.


 


 


 


제2장 성부 하나님에 대한 신앙 고백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우주의 시작이 하나님의 창조로 시작된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구원 역시 인간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하심에서부터 시작된다. 따라서 인간 구원에 대한 성경의 진리를 요약 기술하는 사도신경이 구속 사역의 주체이신 성부 하나님에 대한 신앙 고백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은 합리성을 지닌다. 여기서는 성부 하나님에 대한 신앙 고백을 하나님 존재에 대한 증명과 하나님의 아버지되심과 하나님께서 구원을 이루실 수 있는 근거로서 전능하신 분이심에 대해 각각 구분하여 다룬다.


 



하나님의 살아 계심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따라서 때때로 우리는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음을 도와주소서"(막 9:24)라고 외친 사람의 갈급한 심정을 잘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처럼 하나님을 깊이 필요로 하는 사람만이 진정 믿는 자이다. 그렇지 않는 사람은 실제로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지 않으면서, 또는 과학 시대에 더 이상 있을 수 없는 미신이 아닐까 의심하면서 하나님의 개념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참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바로 믿는다. 그리고 사도신경으로 이러한 바른 신앙을 표현한다.


 



 사람들 가운데 그 누구도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논리적으로 밝혀 내지 못했다. 하나님을 믿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향한 갈망만이 필요하다(시 42:2).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키 위해 어떤 노력도 하지 말라고 한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존재 가능성을 입증해 주는 증거는 분명히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실재를 확신한다. 하나님의 실재에 대한 증거를 무시하는 자들은 자기들이 하나님 믿기를 거부한데 대한 명확한 변명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 증거를 진지하게 검토하는 것을 매우 꺼린다.


 



 우주의 합리성을 생각해 보자. 거대한 우주가 질서있게 존재한다는 것은 사려깊고 합리적인 창조주가 계신다는 사실에 대한 증거를 보여 준다. 흔히 신학자들은 네 가지 표제로서 우주의 합리성을 논한다


 



 첫째는 우주론(Cosmology)이다. 우주론은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우주의 기원과 특성을 연구하는 형이상학의 한 분야"라고 사전은 정의한다. 이러한 우주론을 진지하게 연구한다면 전능하신 하나님만이 우리가 아는 것과 같은 우주를 만드실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둘째는 목적론(teleology)이다. 목적론이란 현존하는 "자연 속에는 목적이 분명히 나타나 있다고 하는 학설이나 신념"이다. 인간의 한계를 갖는 사고로는 자연의 목적은 너무 복잡해서 그 생성과 발전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자연 활동이 질서 있게 합목적적으로 유지되고 있는 바 그 배후에는 지혜로운 창조주가 계심을 알 수 있다.


 



 셋째는 인류학(anthropology)이다. 이것은 인간의 체질이나 문화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인간이란 우주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획을 가장 잘 보여주는 증거라고 그리스도인은 믿는다. 또한 모든 피조물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만이 그 계획을 이해할 수 있다. 창조주처럼 인간은 지적인 존재인 것이다. 인간은 또한 인격을 지니고 있다. 인간이 우발적으로나 우연의 일치로 생겨났다고 믿는 사람은 실로 어리석은 자이다. 우리가 무에서 유를 만들어낼 수 없는 것처럼 인간은 비인격적인 근원에서 진화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인격적이신 분임이 분명하다.


 



 넷째는 존재론(ontology)이다. 존재론이란 "존재와 실체에 대한 학문으로서, 존재의 본질이나 그 핵심적 특성 및 관계성을 탐구하는 지식의 한 분야"라고 사전은 정의한다. 존재론의 주장에 따르면, 완전해지려는 인간의 노력은 완전함의 근원, 즉 완전하신 하나님 자신에 대한 증거라고 한다. 우리는 불완전한 세상에 살고 있는 불완전한 피조물이다. 우리가 완전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있다고 할 때,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으로부터가 아니면 어디서 그 개념을 얻었겠는가?


 



 인간의 본질에 대한 유일한 설명은 완전한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피조물이라는 것이다. 다윗은 이렇게 말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주께서 내 장부를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조직하셨나이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하심이라"(시 139:1, 시 139:13).


 



 위에서 살펴본 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어떤 지적인 주장보다도 더 나은 것은 하나님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실존적 체험이다. 다윗은 그것을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내가 세려고 할찌라도 그 수가 모래보다 많도소이다 내아 깰 때에도 오히려 주와 함께 있나이다"(시 139:17, 18). 그러므로 우리는 개인적으로 또한 공동으로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라고 진심으로 고백할 수 있다.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


 



 사도신경은 하나님을 추상적인 영향력으로 믿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이에 대해 사도신경은 단순하지만 분명하게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습니다"라고 진술한다. 이 말은 무슨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가? 탕자의 이야기(눅 15:11-32)를 통해서 부분적으로 그 대답이 주어진다.


 



 탕자의 이야기는 성경에서 가장 잘 알려진 이야기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어느 집이라고 "탕자 같은 아들"이 없겠는가? 아마 탕자 같은 딸도 있을 것이다. 탕자 이야기에 나오는 작은 아들은 어떤 부랑자보다도 더 망나니였다. 그는 대단히 반항적이었으며 제멋대로 행동했다. 그가 자기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한 것은 영혼이 병든 징후이다. 그러나 결국 그는 뉘우리고 그렇게 매정하게 저버렸던 자기의 늙은 부친에게로 돌아왔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이야기는 한 젊은이의 영적 방황기 이상의 것이다. 이 이야기의 중심 사상은 오히려 부친의 성격과 관련되어 있다. 아버지가 아들 기다림을 멈추지 않았던 사실과 또한 그 아들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기꺼이 맞이했던 사실은 정말 놀라운 일이다. 어느 가정에나 방탕한 아들은 있지만, 이 이야기에 나오는 아버지처럼 사랑이 풍부하며 철저히 용서해 주시는 아버지는 흔치 않다. 이 아들은 문학 비평가들이 전형적인 인물(archetype, 즉 전기나 문학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로 일컬을 만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 아버지는 문학가들이 말하는 전형적인 인물이 아니다. 왜냐하면 문학 작품 가운데 이와 같은 인물은 찾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맞으러 달려가는 아버지와 흡사한 분이다. 오히려 그 이상이다. 그 이야기에 나오는 아버지가 하나님, 즉 자기 품으로 돌아오는 죄인들을 환영하시는 하나님을 닮은 것이다. 이것은 성경의 가장 귀한 진리 중의 하나임이 분명하다. 하나님이 바로 자비가 풍부하신 우리 아버지이시다.


 



 이처럼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가 되신다는 고백은 두 가지 의미에서 분명한 사실이다. 첫째 만물을 창조하심으로 모든 인류의 아버지가 되시며, 죄인을 구속하심으로 모든 그리스도인의 아버지가 되신다. 여기서 후자가 보다 중요한 구분이다. 따라서 구속함을 입지 못한 불신자는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를 자격이 없다.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모든 생명의 근원, 즉 그들의 창조주로서 만의 아버지이시다.


 



 둘째 구속적인 의미에서도 하나님은 아버지이시다. 성경은 이 진리를 하나님의 성품과 연관시켜서 말한다. 바울은 "우리는 그의 소생이라"(행 17:28)고 한 어느 시인의 말에 찬동하며, 그것을 인용한다. 에베소서에서도 바울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엡 3:14, 15) 무릎을 꿇었다고 했다.


 



 탕자 이야기는 하나님의 이런 성품을 극화시켜서 나타내 준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제 갈 길로 간 그의 자녀가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두팔 벌리고 기다리신다. 자기의 죄를 뉘우치고 믿음으로 하나님께 돌아오는 사람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따뜻한 품에 안기게 된다.


 



 이처럼 아버지로서의 하나님 개념은 신약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구약에서도 벌써 나타난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기도를 가르쳐 주실 때에, 그는 전혀 새로운 무엇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그들의 조상과 부자 관계 맺기를 기뻐하셨다는 내용이 구약 성경에 나타난다. 그 관계가 인간의 범죄함으로 인해 실제로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은 그 관계를 맺으려 하셨다.


 



 그것은 다윗과 그의 아들 솔로몬의 대화에서도 분명히 나타난다. 다윗은 솔로몬에게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성전 건축의 특권을 허락하시지 않았다고 하며 자기 대신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한 아들이 네게서 나리니, 저는 평강의 사람이라...저가 내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할찌라 저는 내 아들이 되고 나는 저의 아비가 되어..."(대상 22:9, 10).


 



 일찍이 하나님은 다윗에게 자기를 아버지라 부르라고 가르치셨다. 그래서 다윗이 메시야를 내다보며 쓴 시에서, "저가 내게 부르기를 주는 나의 아버지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구원의 바위시라 하리로다"(시 89:26)라고 노래했다. 그러나 다윗이나 다른 그 누구가 하나님의 아버지되심을 참으로 알고 있었다는 증거가 구약에는 많지 않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을 아도나이(Adonai)나 여호와(Jehovah)로 불렀고, 아버지라고 부른 적은 얼마 되지 않는다.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홀로 그러한 관계를 바라셨지만 패역한 이스라엘은 그것을 거절했다.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굳은 마음에 호소하였다.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사 1:2). 그 후에, 하나님은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홀히 여겨 멀리 하고 물러갔도다"(사 1:4)라고 슬퍼하셨다.


 



 또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라고 하셨다. 이 말이 주님의 탕자 비유의 근거일지도 모른다. 하나님께서 자식으로 삼아 사랑으로 양육한 옛 이스라엘 백성은 모두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기를 거절했다. 그러나 예외도 있었다. 예를 들자면, 이사야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다. "그는 우리 아버지시라...여호와여, 주는 우리 아버지시라"(사 63:16 참고, 사 64:8).


 



 예레미야는 광야에서 외치는 목소리와 같았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여기지 않았으며, 그를 대단히 슬프게 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으로 인하여 슬퍼하셨다. "내가 스스로 말하기를 '내가 어떻게 하든지 너를 자녀 중에 두며, 허다한 나라 중에 아름다운 산업인 이 낙토를 네게 주리라'하였고, 내가 다시 말하기를 '너희가 나를 나의 아버지라 하고 나를 떠나지 말 것이니라' 하였노라"(렘 3:19).


 



 그러나 그 백성은 이 말씀에 응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하나님의 독생자가 이 땅에 오실 때까지,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버지되심을 확실하게 알지 못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지금도 자기 백성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되기를 바라고 계신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갈 3:26)라고 그리스도인들에게 말한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됨에 응했는가? 응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은 여러분의 아버지되시기를 원하시지만,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에게 나아가기 전에는 그가 여러분의 아버지가 되실 수 없는 것이다. 그의 자녀가 된 후에야 여러분도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전능하심


 



 사도신경을 만든 사람들은 세상의 아버지와 하나님 아버지를 구별하기 위해서 성부 하나님에 대해 '전능자'(Almighty)라는 단어를 덧 붙여 놓았다. 전능자라는 말은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음"을 뜻한다. 실로 전능하신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다.


 



 신약 성경은 여러 가지 면에서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표현하고 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다(히 7:25), 하나님은 "능히 모든 은혜를 넘치게" 하신다(고후 9:8). 하나님은 "[우리를] 보호하사 거침없게" 하신다(유 1:24). 그는 "[우리를] 능히 든든히 세우시는" 분이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분이시다(엡 3:20).


 



 간략하지만, 이런 표현들은 모두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충분히 증거하고 있다. 진실로 하나님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시는"(히 7:25) 분, 또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넘치도록 능히 하시는"(엡 3:20) 분이시다. 따라서 하나님에게는 못하실 일이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는다는 일은 비길데 없이 논리적인 일이다. 무력한 하나님을 상상해 보라. 누가 그런 시시한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겠는가? 그러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자녀인 우리를 돌보고 계시는가? 물론이다. 그 사실은 '아버지'라는 이름에 암시되어 있다. 전능자라는 말은 무엇이든 하실 수 있는 분을 뜻하며, 아버지라는 말은 사랑하는 자기 백성의 유익을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지 하시려 하신다는 의미를 배포하고 있다.


 



 하나님은 진정 우리를 돌보시며 우리에게 유익한 일을 행하시는 분임을 우리가 확신할 수 있다. 왜냐하면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 뿐 아니라, 하나님은 자신이 약속하신 진리를 증명해 보이셨다. 바울은 그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 느니라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28-30).


 



 그리고나서 바울은 웅변적으로 질문한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31절). 정말 멋진 질문이 아닌가? 바울은 스스로 그 질문에 대답한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 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32절). 이처럼 하나님은 아버지가 자녀를 위함같이 우리를 위하시는 분이다.


 



 사도신경은 하나님의 아버지되심과 하나님의 전능하심의 사실을 분명하게 연관시키고 있다. 아버지의 마음이 전능자의 손을 움직인다. 전능자의 능력은 냉정하고 빈틈없지만, 따뜻하고 사랑이 넘치는 거룩하신 아버지, 즉 자상하신 창조주의 마음에 의해 이것이 조정된다. 예를 들면, 시편 기자는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 다"(시 121:2)라고 했다. 그리고나서 다시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의 이름에 있도다"(시 124:8)라고 했다. 또한 밤에 여호와의 전을 지키던 자들이 부른 놀랄 만한 노래 말들을 살펴보다.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찌어다"(시 134:3). 그러나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사랑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표현은 다음과 같은 이사야의 표현일 것이다.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끝까지 창조하신자는 피곤치 아니하시


며, 곤비치 아니하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이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 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사 40:28-31).


 



 땅끝까지 모든 것을 창조하신 이가 그의 백성을 자녀와 같이 대하시며 극진히 돌보고 계신다. 천지를 만드신 전능자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시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성경의 증거를 무시하고 세상이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는가를 묻고 대답하는 여러 사상들이 있다. 다신교(Polytheism)는 창조의 주체로서 여러 신들을 말하며, 유물론(Materialism)은 세상이 우연히 생기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자연신교(Deism)는 하나님께서 어느 순간에 창조활동을 하신 것은 인정하지만 곧 세상을 제멋대로 움직이도록 내버려두었다고 한다. 범신론(Pantheism)은 하나님을 그가 지으신 세상에 가두어 버리고, 그 세상과 하나님을 동일시한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지으셨다고 명백하게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은 내재적(세상 속에 계심)이시지만 또한 초월적인 분으로(세상을 떠나 계시며 그것을 다스리신다)계속 피조 세계와 관련을 맺고 계신다.


 



 세상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은 아버지의 마음을 가지고 계신다. 땅 위에서 가장 마음씨 좋은 아버지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희미한 그림자에 불과하다. 세상에 있는 가장 사랑 많은 아버지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비교하면 사랑이라 할 수 조차 없을 정도이다. 이러한 하나님에 대해서 요한은 간결하고도 아름답게 말하고 있다.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낸 것을 우리가 보았고..." (요일 4:14). 하나님께서는 사업 여행이나 휴가차 그의 아들을 보내시지 않으시고, 슬픔과 고통으로 가득찬 세상에 선교하러 보내셨다. 만약 그것이 사랑이 아니라면 이 세상 어디에 사랑이 있으랴. 그러나 그것은 사랑이었으며, 그 사랑을 나타내 보이신 아버지는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이시다.


 



제3장 성자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한 신앙 고백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구원 사역의 주체이신 성부 하나님이 계획하신 인간 구원은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으로 성취되었다. 따라서 성부 하나님에 대한 신앙 고백에 이어 구속 사역의 성취자이신 성자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고백이 뒤따르는 것은 합리적이다. 그리스도는 본래 하나님이셨으나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땅에 오셔서 우리와 같이 생활하시다가 인간을 죄로부터 해방하는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 인간의 대표로서 죽음을 당하셨다. 성경은 이와 같은 구속을 이루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기록 되었는 바 사도신경 역시 이를 반영하여 성자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고백이 상대적으로 길게 나와 있다. 여기서는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에 앞서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한 신앙 고백을 믿음의 대상이신 그리스도,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그리스도, 그리고 그리스도와 인간과의 관계에 있어서 주(Lord)되심에 대해 각각 구분하여 다룬다.


 



믿음의 대상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고백의 사도신경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 내용의 심오함에 비해 놀랄 만큼이나 간결한 사도신경은 삼위 하나님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신앙 내용을 80개의 단어로 요약하고 있다. 성부에 대해 9단어, 성령에 대하여 3단어, 성자에 대해서는 68단어이다. 어느 작가가 표현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구속 계시의 중심이며...기독교의 초점(Focus)과 충만(Fullness)이며...다른 모든 사실과 진리에 생명력을 부여해 주는 진정한 사실(Fact)이며 진리 (Truth)"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도신경은 그리스도에 대하여 7가지 중요한 진술을 하고 있다. 그것들은 각각 위대한 진리를 암시한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의 무죄성은 "성령으로 잉태하셨다"는 수태 사실에 의해 암시된다. 우리의 위대한 제사장으로서 그의 중보 사역은 승천 사실에 의해 암시된다. 사도신경은 이러한 내재된 의미를 해설하지 않고 그저 사실들만 기술할 뿐이다.


 



 사도신경의 사실 진술에 나타난 우리가 믿어야 할 진리를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그리스도의 인격과 또한 그리스도와 성부 및 성도와의 관계의 표현인 "그 외아들 우리 주..."에 대해 살펴보자. 둘째는 성육신, 즉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에 대해서, 셋째는 그의 고난과 죽음, 즉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에 대해서 살펴보자. 넷째는 그리스도의 영이 3일 동안 보내심을 받은 장소에 대해서, 다섯째는 부활에 대한 선포, 즉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나시며"에 대해서, 여섯째는 그리스도의 승천과 지위의 회복, 즉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에 대해서, 마지막으로 일곱번째는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심판하려고 다시 오심, 즉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에 대해서 기술하고 있다.


 



 한편 사도신경에 나타나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에는 적어도 두 가지 사실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첫째, 고난과 영광이 병렬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리스도는 당시 로마의 유대 총독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지내어지는 고난 가운데 처하셨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또한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셨고 하늘에 오르셨으며, 때가 되면 자기를 거부한 제상을 심판하러 다시 오시는 영광된 모습을 취하실 것이다.


 



 둘째, 사도신경은 그리스도의 지상의 삶에 대한 언급을 생략하고 있으나 성육신과 대속적 죽음은 부각시킨다는 사실이다. 성육신은 그리스도가 본래 누구인가를, 즉 하나님의 죄없으신 아들이심을 말해준다. 이 사실에는 그리스도가 이 땅에서 사신 삶의 성격과 죽음의 성격이 내포되어 있다. 거룩하신자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다른 인간과 같이 죄에 대한 필연적 결과가 아니라 대속(찬립)의 필요성, 즉 당신과 나를 위한 대속을 이루시기 위함이었다.


 



 만약 그런 필요성이 없었다면,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지 않았을 것이다. 바울이 말한 대로 그리스도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5).


 



 예수님에 대한 이러한 신앙이 기독교를 다른 모든 종교와 구분한다. 유대교와 이슬람교는 다같이 유일신교이며 예수님을 하나의 선지자로 알고 있지만 예수님의 신성과 구주되심을 부인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단순한 인간 이상이신 분이다. 그가 곧 하나님이시다. 즉 그리스도는 완전한 인간이시며 또한 완전한 하나님이시다. 그것을 증거하는 다음 구절을 살펴보자.


 



 첫째, 그리스도는 무죄하시다. 그리스도는 원수에게 자신의 죄를 찾아보라고 하셨다. "너희 중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요 8:46). 그의 제자들은 원수들이 그리스도의 이러한 질문에 대해 침묵했던 사실을 잊지 않았다. 후에 베드로는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벧전 2:22 참고, 사 53:9)라고 기록했다. 바울은 "죄를 알지도 못하신자"(고후 5:21)라고 했다. 예수님의 무죄성은 인간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만이 지닌 유일성을 입증하는 도덕적 기적(moral miracle)이다.


 



 둘째, 그리스도는 자신을 가리켜 하나님이라고 하셨다. 무죄성을 지닌 존재는 자신에 대하여 절대 거짓말을 할 수 없다. 따라서 하나님이라 주장한 그리스도는 바로 무죄한 하나님이셨거나 아니면 제자들이 완전한 사람이라고 믿어왔던 것보다 훨씬 못한 거짓말장이였거나 둘 중의 하나였다. 그리스도를 대적한 자들은 그리스도가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하다고 주장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 사실, 이 주장이 그리스도에게 사형을 선고할 법적 근거가 되었다. 그들이 사형을 요구 하면서, 예수님을 빌라도 앞에 데려가서 "우리에게 법이 있으니 그 법대로 하면 저가 당연히 죽을 것은 저가 자기를 하나님 아들이라 함이니이다"(요 19:7 참고;요 5:17,18; 요 10:30-33)라고 하였다. 그리스도는 결국 스스로를 하나님이라 주장하였기 때문에 죽었으나 죽음이 그리스도의 신성을 소멸치 못했음은 부활을 통해 증명되고 있다.


 



 셋째, 초인적인 능력이 그리스도에게 있었다. 그는 물 위를 걸을 수도, 바람을 다스릴 수도, 죽은 자를 살릴 수도 있었다. 그를 비판하던 어떤 자들은 나사로의 다시 살아남을 목격하고 나서 그리스도의 하나님 되심을 믿게 되었다(요 11:44).


 



 넷째, 그리스도는 제자들의 예배를 받아들이셨다. 만약 그가 단지 인간이었다면 그에게 예배한 자들에 대한 그의 승인은 죄악이었을 것이다(요 9:38).


 



 신약 성경은 그리스도를 인간인 동시에 초인간적인 분으로 묘사한다. 기독교는 예수라는 인간에 대한 인식과 더불어 하나님이란 인식에 기초하고 있다.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은 계속해서 그리스도를 "주"라고 말한다. 서신서에서는 인사와 축도시에 하나님과 함께 그리스도가 연관되어 있다. 예를 들면 에베소서에서 바울은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좇아"(엡 1:2) 은혜와 평강이 그의 독자들에게 있기를 기원했다. 그 다음 구절에서 그는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를 찬양했다.


 



 예수는 그리스도의 이름이며 그리스도는 예수의 직함이다. "구세주" (Savior)라는 뜻을 가진 "예수"란 이름은 그가 무엇을 하시는 분인가를 가르쳐 주며,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뜻을 지닌 "그리스도"란 직함은 그 일을 하실 수 있음을 말해준다. 즉 그리스도란 말에서 보여지듯이 그는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이시기 때문에 예수란 말에서 보여지듯이 구원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예수라는 이름은 당시 유대 사회에서는 흔히 있는 이름이었다. 그러나 마리아의 아들에게 있어서 그 이름은 새로운 의미를 지녔다. 천사가 예수를 잉태한 마리아에게 나타나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마 1:21)라고 하면서 그 이름을 예수로 지으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 이름은 사도신경에서 적어도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되었다. 첫째, 그 이름은 역사적 사건을 나타낸다. 예수 그리스도는 터무니 없는 가상의 인물이 아니라 실제로 이 땅에 살았던 분이심을 보여 준다. 둘째, 그 이름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시는" 그의 선교 사역을 분명히 나타내 준다. 예수라는 말은 "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라는 의미를 지닌 히브리어 '여호수아'란 이름에서 연유 하는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는 히브리어 메시야(Messiah)에 해당되는 헬라어이며 그 의미는 "기름부음 받은 자"이다.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선지자, 제사장, 왕이 예식상 기름부음을 받음으로 직임에 취임하였다. 그러한 가운데서 언젠가는 선지자, 제사장 및 왕의 직임을 겸할 어떤 이가 오리라는 소망이 싹텄다. 그것이 곧 메시야 대망 사상이라 불리워진다.


 



 예수께서 오심으로 그 소망이 실현되었다. 예수님에 대한 소식을 들은 후, 안드레는 그의 형제 베드로를 급히 찾아가서 "우리다 메시야를 만났다"(요 1:41)라고 말했다. 시간이 지난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자기를 누구라 생각하느냐고 물으셨다.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라고 대답했다. 이것은 실로 엄청난 고백이었다. 이제야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대해 바로 인식되어진 것이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날에 동의하시면서,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 16:17)고 했다.


 



 예수님의 이 대답이 절대 과장일 수 없다. 예수께서는 메시야가 오실 것이라고 한 옛 모든 예언의 완전한 성취이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 즉 모세가 예언한 그 선지자이시며(신 18:15;행 7:37), 아론보다 큰 제사장이시며, 영원한 보좌에 앉으신 왕이시다.


 



 이상이 바로 우리가 사도신경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라는 신앙 고백을 할 때에 내포되어 있는 주요 내용이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어느 바리새인과의 대화 중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뉘 자손이냐?"(마 22:42)라고 질문하셨다. 그러자 그들은 당황했다. 왜냐하면 그들이 답변해야 할 그 대답이 의미하는 바에 대해 저항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도신경에는 이 질문에 대한 완전한 대답으로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독생자라고 천명한다. 즉 예수의 질문은 그리스도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정의를 요구한 것이고 이에 대한 사도신경의 대답은 그가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다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도신경의 첫번째 조항은 이 부분에 나오는 성자에 대한 조항의 예비적인 성격을 띠는데, 그 까닭은 아버지와 아들과는 필연적 관계를 지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아버지시라면 그 아들이 있어야 함은 필연적인 사실이나 예수께서는 자주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를 아버지와 아들 관계로 말씀하셨다. 그는 이렇게도 말씀하셨다.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느니라"(요 5:23). 이 말을 생각하면서 사도 요한이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요일 2:23)고 했을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사도 요한은 어느 대적자가 하나님과 예수님이 부자관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자, 예수께서는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하고 내 아버지도 알지 못하는도다. 나를 알았다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요 8:19)고 대답하셨던 것을 기억했을 수도 있다.


 



 한편 하나님과 예수님의 부자관계에 대해서는 적어도 다음 두 가지 사실이 이야기되어야 한다. 첫째, 그 관계는 영원한 것이며, 둘째 유일한 관계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베들레헴에 태어남으로 그때부터 하나님의 아들이 되신 분이 아니다. 예수님의 하나님과의 부자관계는 영원한 것이다. 아버지는 아들을 보내셨고, 땅 위에 있는 아들은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요 8:58)고 말씀하셨다. 시 2:7에서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등의 구절은 그리스도의 탄생이 아니라 부활을 언급하고 있다(행 13:33 참조).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시다.


 



 그는 또한 하나님의 유일하신 아들이시다. 우리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마 6:9)라고 기도하기를 배웠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성도들도 하나님의 아들이기는 하나 하나님이 그리스도에게 아버지되심과 똑같은 방식으로 성도인 우리의 아버지되시는 것은 아니다. 성경이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심으로 그의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이다. 그래서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은 멸망치 아니하고 영생을 얻도록 하셨다. 그가 바로 "독생자" 하나님의 유일하신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요 3:16).


 



 부활하신 후에, 예수께서 마리아에게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요 20:17)고 하신 명령 속에서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의 유일한 독생자이시라는 사실을 지적하셨다.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가 아닌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시다. 예수께서는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함께 "우리" 아버지라 하지 않았다. 이처럼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유일하신 아들이시고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일 수 없는 측면에서 그의 아버지 이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의미에서 성도로 부름받은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그의 자녀가 되는 권리를 우리에게 주셨다. 그래서 이 특권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 부르며 예수님을 주로 알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


 



 완전한 하나님이시며 또한 완전한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참으로 독특한 분이시다. 이런 독특함은 하나님과 인간과 그리스도의 관계를 설명하는데서 잘 드러난다. 사도신경은 먼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관계를 "[하나님의] 외아들" 즉 독생자라고 정의한다. 그리고 이어 우리와 그의 관계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과 직함에 의해 나타난다. 예수님의 친구들이 그를 "주"자 불렀고, 그는 그 명칭을 받아들이셨다. 성만찬을 제정하신 그 방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선생과 주"라 했던 것을 상기시켰다. 그리고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요 13:13)라고 하셨다. 이처럼 사도신경도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주"으로 단언한다.


 



 그러면 이 칭호는 무엇을 뜻하는가? 적어도 두 가지 사상이 내포되어 있다. 첫째, 그는 하나님이시며, 둘째, 그는 주권자이시다. 불신자는 이 주장에 반대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분을 하나님으로 믿었다고 증거하고 있다. 예컨대, 바울은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롬 14:9)고 했다. 같은 문장에서 바울은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인용하여 그것을 그리스도에게 적용시켰다. "내게 모든 무릎이 꿇겠고 모든 혀가 맹약하리로다"(사 45:23). 또한 바울은 다른 편지에서 장엄한 문장으로 그리스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9-11).


 



 이처럼 신약 성경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를 분명히 하나님으로 믿었다고 주장한다. 그를 선한 사람으로 믿는 것으로는 족하지 않았다. 그는 주님이시거나 아니면 아무 젓도 아니다. 훌륭한 도덕 선생은 존경을 받을 만하기는 하지만 우리 영혼을 구원할 수는 없다. 오직 하나님만이 영혼을 구하실 수 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그리스도인이 믿는 바로 그 신앙의 내용이다. 예수님은 주님이시며 하나님이시다.


 



 성경이 그리스도의 주님되심에 대해서 말을 할 때, 주권(sovereign) 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는 않지만 그 개념은 포함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주권자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것 때문이다. 통치(reign)라는 단어는 "왕권(royal authority), 지배권(dominion), 세력(sway)"이라는 뜻이다. 이 단어의 동사형은 "왕이나 군주로서 통치한다"는 의미이다. 주권(sovereign)이라는 단어 의 접두어는 "위의"(above)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 super에서 파생되어 나왔다. 이 단어에서 supreme(최고)라는 단어가 나왔다. 그래서 supreme(최고)와 reign(통치)를 합치면 sovereign(주권)이 된다. 따라서 엄정한 의미에서 주권(sovereign)이라는 단어를 왕이나 군주에게 사용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어떤 통치자도 진정한 지도자(supreme)는 아니기 때문이다. 대영 제국이 주권을 지녔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전 세계를 지배하지는 못했다.


 



 유일하고 진정한 주권자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는 완전한 의미에 서 통치자요, 지도자이시다. 예수께서 승천하시면서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마 28:18)라고 하신 말씀 속에서 그는 자신의 절대적 주권을 선언하셨다. 그 위대한 주권의 선언을 근거로 하여 그는 제자들을 땅 끝까지 보내어 복음을 전파하게 하셨고, 또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는 일을 위임하셨다.


 



 예수께서 승천하시면서 자신의 우주적인 주권을 선언하셨을 때, 사도 바울은 그 자리에 없었지만 그도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최고의 주권자로 인식했었다. 바울은 그의 서신서에서 반복해서 이 진리를 강조했다. 바울이 말한 내용을 예를 들어보자. "저가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 둘 때까지 불가불 왕노릇 하시리니"(고전 15:25). 또 다른 곳에서는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빌 3:21) 라고 말했다.


 



 이러한 구절들은 또 하나의 분명한 사실, 즉 그리스도께서 현재 최고의 주권을 행사하고 있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시사해 주고 있다. 오히려 그리스도께서는 범죄하여 사망의 권세하에 있는 인간이 그 권위에 반항하는 것을 내버려 두신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최고의 권위를 가지고 계시고, 때가 차면 그 권위를 완전하게 행사하실 것이라고 성경은 가르쳐 주고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주(Lord)로서만 아니라 또한 사도 신경의 표현대로 "우리 주"(Our Lord)로 믿는다. 왜 우리(our)라는 소유격 대명사가 그렇게 중요한가? 그 이유는 이 단어가 예수님을 자신의 주로 믿는 사람과 그러기를 거절하는 사람을 명확히 구분해 주기 때문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우리를 그리스도인 되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이런 자세 때문이다.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는 그를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약 2:1)라고 부르는데 익숙해 있었다. 베드로는 그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벧전 1:3)라고 불렀으며, "권력이 세세무궁토록 그에게 있을지어다"(벧전 5:11)라고 했다. 요한은 의심 많은 도마가 부활하신 예수님의 얼굴을 보고서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 20:28)라고 한 놀라운 광경을 기록하였다.


 



 만약 도마가 이 고백을 하지 않았다면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바울은 두 구절에서 그리스도에 대해 그리스도인이 지녀야 할 태도를 분명하게 요약해서 말한다.


 첫째 그는 로마서 10장 9절에서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라고 했다. 따라서 우리는 입으로 신앙을 고백해야 하며, 도마가 믿었던 그 내용을 마음으로 믿어야 한다. 즉, 죽은 자 가운데서 하나님이 예수님을 살리신 것과 예수님의 주되심을 믿어야 한다.


 



 둘째,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이러한 구절들은 예수님을 주로 단언한다. 따라서 예수님의 주되심을 알지 못하는 신앙은 옳지 못한 것이다. 그것은 성경적이지도 않고 전통적인 기독교의 신앙과도 위배된다.


 



 "우리 주(Our Lord)"라는 말의 소유격 대명사가 복수임도 유의해 보자. 그것은 믿음으로 인한 성도의 교제를 나타내 보여 준다. 예수님의 주되심을 내가 믿고 또한 여러분이 믿는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의 주님이시다. 도마가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고백 함으로, 그는 사도 공동체의 친교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오늘날도 우리는 사도 신경으로 개인적인 신앙("예수 그리스도를 내가 믿사오니")을 고백하고, 또한 공동적 신앙("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도 고백한다.


 



 이보다 더 위대한 신앙 고백이 있을 수 있을까? 만약 여러분이 진실하게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내가 믿나이다"라고 고백할 수 있다면, 여러분은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참된 일원이 되는 것이다. 세계 도처에 있는 모든 신자와 더불어, 여러분도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내가 믿사오니"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이다.


 



제4장 성자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대한 신앙 고백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한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자와 죽는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사도신경은 구속 사역의 성취자이신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한 신앙 고백에 이어 본래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이땅에 오셔서 어떻게 구속 사역을 이루시고 완성하실지에 대한 신앙을 고백한다. 원래 하나님이셨던 그리스도께서는 동정녀 탄생을 통해 이땅에 오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구속 사역을 성취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장차 이땅에 다시 오셔서 죄인을 심판하시고 믿는 자를 구원하심으로 구원의 역사를 완성하실 것이다. 이러한 그리스도 의 구속 사역에 대한 진리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며 성경의 중심 내용인 바 사도신경은 비교적 깊고 자세하게 이를 다루고 있다.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사람들이 기독교 신앙 가운데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 중의 하나로 제기하는 것이 동정녀 탄생이다. 그러면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라는 기사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여기에 대해 어느 누구도 죤 피어슨(John Pearson) 주교가 <사도신경 강해> (Exposition of the Creed)라는 제목으로1867년에 출판한 책에서 설명한 것보다 더 잘 설명하지는 못했다. 그리스도의 잉태 사실에 대하여 그가 쓴 기사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가 있다.


 



 1. 그리스도는 성령의 역사로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 잉태되셨다.


 



 2. 그리스도에게는 육신의 아버지가 없으며, 단지 요셉의 아들이라 일컬어졌을 뿐이었다.


 



 3. 우리는 잉태의 과정, 즉 처녀가 성령에 의해 잉태하게 되는 과정을 설명할 수 없다.


 



 4.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른 누구가 아닌, 그의 어머니 마리아라는 실제적인 인물을 통하여 인간이 되심을 안다.


 



 5. 그 어머니를 통해서 예수님은 다윗과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셨다.


 



 6. "하나님의 어린 양"이며,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의 완전 무죄성을 믿기 위해 우리는 동정녀 탄생의 교리를 믿어야 한다. 피어슨 주교는 이렇게 결론을 맺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방법은 이렇다. 그리스도는 분명히


여자의 몸에 잉태되었지만, 인간의 방법으로나 육체적 결


합으로나 일반적인 인간의 수태 방법으로 잉태되지 않았으


며, 오히려 성령의 독자적이며 능력있고 불가시적이고 직


접적인 사역에 의해 잉태되었다. 이러한 성령의 역사로 인


하여 자연법칙을 초월하여 처녀가 잉태를 할 수 있었고,


그러므로 그에게서 잉태되신 분은 본래부터 거룩하신 분이


었다. 


 



 동정녀 탄생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특별한 목적을 지니시고 행하신 초자연적인 사건이었다. 그것은 반복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실험실에서 실험하는 것과 같이 과학적인 방법으로 취급될 수 없다. 그러므로 그것은 믿음으로 받아들여져야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 교리가 논리를 무시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런 방법으로 자기 아들을 세상에 보내실 수 있음을 왜 의심하는가? 하나님께서는 아기를 가질 수 없는 여인을 임신케 하시며, 남자의 도움 없이도 처녀를 잉태케 하실 수 있는 실로 전능 하신 분이시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을 믿는 데에는 두 가지 분명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첫째는 성경의 증거이며, 둘째로는 그의 무죄성이다. 원죄를 지닌 아담에게서 태어난 모든 사람은 죄악된 본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본성은 흠이 없다. 그리스도 자신이 그렇게 말씀하셨고 그의 생애가 그것을 입증했다. 이것은 혈통적으로 아담의 후예가 아니어야 한다는 전제가 있어야 하므로 그리스도의 기적적인 탄생 사실 이외의 어떤 다른 말로서도 설명할 수 없다. 우리와 같이 그리스도도 여자의 몸에서 태어나셨으나, 우리와는 달리 처녀에게서 나셨다.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라는 기사는 그리스도의 실제 탄생이 기적적이었음을 뜻하지도 않는다. 그가 어떤 특별한 방법으로 태어났다고 할 아무런 증거가 없다. 또한 그 기사는 단지 그리스도의 잉태만이 초자연적임을 뜻하지는 않는다. 적어도 다른 두 사람의 성경 인물도-이삭의 어머니와 세례 요한의 어머니-초자연적으로 잉태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탄생만이 갖는 고유한 의미로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라는 구절은 항상 "성령으로 잉태하사"라는 상대되는 구절과 결합해서 생각해야 한다.


 



 엄격히 말해서, 동정녀 탄생은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증거이다. 그러나 이 교리가 사도들의 가르침 중에는 기록되지 않았다. 왜 그럴까? 아마 그리스도의 신성이라는 위대한 진리를 부인하는 자들까지도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을 믿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미신적이거나 맹신적인 사람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되심을 알지 못하면서도 동정녀 탄생은 믿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되심은 탄생으로보다는 부활에 의해 입증된다. 그래서 여러 사도들은 부활 사실을 중점적으로 증거했던 것이다(롬 1:4 참조). 그리스도의 부활 사실을 믿는 사람들은 그의 동정녀 탄생을 믿는 데에는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으실 때에,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아기로 나시지 않고 성인으로 이 땅에 오셨다면, 그의 몸에는 두 가지의 인격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그리스도의 인격의 통일성을 강조한다. 그리스도는 두 인격을 지니신 것이 아니었다. 한 인격에 두 본성, 즉 인성과 신성을 지니고 계셨다. 신학자들은 한 인격 속에 두 본성의 연합을 "위격의 연합"(the hypostatic union)이라 부른다.


 



 이것이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우리 중에 오셨다는 것이다. 이상이 우리가 신앙 고백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을 고백할 때마다 인정하고 있는 내용인 것이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 받으신 그리스도


 



 사도신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생애에 대한 기록은 생략하고 그의 탄생에서 바로 고난으로 건너 뛴다. 그리스도의 생애는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택한 자를 구원하신다는 신앙의 주제가 부각되어 있다기 보다는 그리스도인이 본받아야 할 신앙의 귀감이며 사단의 세력과의 투쟁으로서 성격이 강하다.


 



 따라서 신약 성경은 그리스도의 생애를 강조하지 않고 그의 죽음을 강조한다. 주님께서도 자신이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죽기 위해 태어나셨다고 말씀하셨다. 부활하신 후에,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구원 사역의 핵심임을 알지 못하는 제자들을 주님께서는 꾸짖으셨다.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눅 24:25, 26).


 



 이처럼 그리스도의 죽음이 중요성을 지니기 때문에 공관복음서-마태, 마가, 누가복음서-는 그리스도의 죽음에 관한 기사에 삼분의 일을 할애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요한복음서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술하는데에 거의 반을 할애한다.


 



 그러나 사도신경은 그리스도의 정신적 고통이나 고난 주간 이전에 겪은 어떤 고통도 언급하지 않는다. 우리 주님은 생애 중에 여러 가지 고난을 겪으셨다. 그 중에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기를 버리실 것이라는 두려움도 포함되어 있다. 그는 사단에게 고난받았으며 그를 죽이려 하던 악한 자들에게서도 고난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신경은 이런 고난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이렇게도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고난, 그 자체에는 구원의 능력이 없었다. 그리스도가 당한 고난 중의 상당 부분은 단순한 인간의 경험일 것이며, 그런 것은 그리스도의 본래의 거룩하심을 더 강화시켰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음만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잃어버린 백성을 구원하시도록 했다. 그래서 사도신경은 그리스도의 죽음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고난당하고 박해 당하시던 당시에, 로마 총독이었던 본디오 빌라도에 관한 언급에 주목해 보자. 왜 빌라도라는 인물이 언급되는가? 피어슨 주교는 그 이유를 세 가지로 주장한다. 첫째,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의 시기를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둘째, 그리스도의 죽음의 성격과 확실한 사망의 외적 증거를 우리에게 제시해 주기 위해서이다. 빌라도는 그리스도의 무죄하심에 대한 한 사람의 증인이었으나 그는 그리스도를 핍박자들에게 넘겨주었고 죽음을 인정했다. 셋째, 예언을 입증하기 위해서이다.


 



 빌라도에 대해 간략하게 언급된 사도신경의 기사에 대한 피어슨 주교의 보충 설명을 살펴보자.


 



 때가 차매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보내사 사람들의 죄를


위해 고통을 받게 하시니, 이 때는 로마 황제 디베리우스가


즉위한지 15년이 지난 때요, 유대 총독 본디오 빌라도가


통치하던 때라, 빌라도는 유대 사람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


자신이 무죄하나고 선언한 자에게 사형 선고를 내리고 성


경의 예언에 따라 그를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운 십자가 형


벌에 내어 주었더라.


 



 피어슨은 이러한 해석은 빌라도에 대한 언급이 갖는 세 가지 요점을 잘 지적했다. 사도신경에서 빌라도를 언급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죽은 날짜를 말해 줄 뿐 아니라 그 사건의 역사성을 강조한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실제로 일어났었고, 또 세속 세계는 그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요세푸스(Josephus)나 타키투스(Tacitus)와 같은 역사가들은 빌라도가 실제로 있었던 사람이며, 예수님이 그에게 고난받았다는 복음서의 내용을 인정한다.


 



 빌라도에 대한 성경의 언급이 내포하고 있는 두 가지 사실이 간과 되어서는 안된다.


 



 첫째, 빌라도는 예수님의 무죄함을 증언했다. "나는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노라"고 빌라도는 거듭 말했다(요 19:4, 6). 예수님이 법률적으로 무죄하였다면 왜 사형을 선고 받았는가? 특히 죄인들을 위하여 메시야가 고난 받으리라는 구약의 예언들에 비추어서 그것을 생각해 보라.


 



 둘째, 빌라도는 그리스도를 고난당하게 한 장본인이다.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채찍질하도록 하였고(요 19:1-3), 그를 사형집행인에게 넘겨주었다(요 19:16). 그리하여 그 당시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세속적인 힘이었던 로마 정부의 대행자가 영광의 주를 박해했던 것이다.


 



 시편 2편을 포함한 성경의 여러 구절은 다음과 같이 예언했다.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받은 자를 대적하며"(시 2:2).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를 그렇게 쉽게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주장에 대해 하나님께서 웃으신다고 같은 시편이 말하고 있다(시 2:4). 이러한 표현은 하나님은 즐거워하시는 것이 아니라 격노하심을 나타내는 것이다. 하나님은 분노 속에서 빌라도[와 그를 비롯한 세상의 수 많은 통치자]가 저버린 메시야에 대한 그를 보내신 목적을 선언하신다고 시편은 말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범죄에 대해 경고하시는 것이다.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찌어다 그 아


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


에서 망하리니 그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다 복이 있도다(시 2:11,12).


 



 빌라도는 이 경고와 권유를 무시함으로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범했다. 과연 여러분은 어떤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십자가에 매다는 것은 노예나 흉악범을 죽이던 로마의 처형법이다. 그것이 너무 수치스런 형벌이기에 예수님을 일개 선지자로 간구하는 모슬렘 신자들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힌 사실을 믿기를 거절한다. 그 대신 단지 "예수는 그리스도와 흡사한 인물이다"라고 그들은 말한다. 유대인에게 있어서도 십자가는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는데 가장 큰 장애물이 된다. 그들은 십자가에 달린 메시야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탈무드는 그리스도인을 "나무에 달린 자를 예배하는 사람들"이라고 조롱한다. 로마인들은 십자가를 "가장 잔인한 것". "최후의 것". 또는 "가장 불명예스러운 것"으로 생각한다. 4세기에 콘스탄틴 대제는 이 제도가 너무나 잔인하며 비인도적이기 때문에 폐지했다.


 



 그러나 사도신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이러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고 선언가고 있다.


 



 실로 그리스도께서는 상상만하여도 전율을 일으키게 하는 십자가에 달리셨으며 "성경대로"(고전 15:3) 죽으셨다. 그리스도에게 있어서는 죽음 사실 뿐 아니라 그 죽음의 방식까지도 구약 성경에 의해서, 또 주님 자신에 의해서 예언되었다. 예를 들면,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시면서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자기를 정죄하고 이방인(로마인)들의 손에 넘겨주어 조롱당하게하고 채찍에 맞게하며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리라고 말했다. 그 전에, 그리스도는 자기를 따르려는 자는 반드시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했는데, 그 말 역시 자신이 어떻게 죽으실 것인가를 분명히 예언한 것이다(마 16:21, 24).


 



시 22:16도 이미 그의 손과 발이 못 박히실 것을 예언하고 있다. 18절에서 시편 기자는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뽑나이다" 라고 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시는 사건이 없었다면 이 구절들은 엉뚱하고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비추어 볼 때, 비로소 시편 기록의 의미가 분명해지고, 그 구절들은 바로 그리스도의 죽음의 방식을 예언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직접적인 기사 이외에도 구약은 여러 사건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예언하고 있는데, 이것은 주로 모형(type) 혹은 예표라고 불리운다. 모리아 산에서 자기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 했던 아브라함의 기사를 살펴보다. 그들이 제사 장소에 도달할 때까지 이삭은 자신이 죽는데 사용될 나뭇짐을 지고 갔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친히 못박히실 십자가를 지고 가심을 예시해 준다(창 22:6).


 



 그리스도의 죽음은 출애굽 기사에서도 암시되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기 전날 밤에 어린 양의 뼈를 꺾지 말고 제사드려야 한다는 명령이 주어졌라. 나중에 요한은 로마 군병이 예수님의 다리를 꺾지 않은 사실에서 그 예언이 이루어진 것을 발견했다(요 19:36).


 또 다른 모형은 놋뱀 사건에서도 보여진다. 불뱀이 나타나서 수 많은 이스라엘 백성을 물어 죽게 되자, 모세는 놋뱀을 만들어 장대에 달고 뱀에 물린 사람들에게 그것을 보도록 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그 놋뱀을 보고 낫게 되었다. 주님께서 자신의 죽음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이 사건을 이렇게 언급하셨다. "모세가 광야에서 놋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그리스도의 죽음의 방식에 대한 이 언급은 아주 분명한 것이다(요 3:14 참고, 민 21:49).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럽고 비굴한 사형 방법이었던 십자가의 형벌은 그 희생자들에 대한 로마인의 경멸감을 나타내려는 의도가 있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죽음에는 최고의 고통과 최대의 모욕이 결합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기꺼이 죽으시려 선택했던 죽음의 방법-십자가의 죽음-이었다(빌 2:8).


 



신 21:23은 나무에 달린 모든 사람은 저주받은 사람들이라고 선언하고 있는데, 이 때문에 유대인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메시야를 생각하기를 그토록 싫어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저주가 바로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핵심적인 이유이다. 그 저주야말로 그리스도의 죽음을 의미있게 하는 것이다.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셨음이라"(갈 3:13). 그러므로 십자가가 신학적으로 깊은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그 방식은 우리 모두에게 몇 가지 분명한 교훈을 주고 있다. 첫째,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그리스도는 율법의 저주를 받으셨다(신 27:26;갈 3:10, 13). 둘째, 그는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신 것"(골 2:14)이다. 셋째, 그는 죄에 대하여 승리하는 비결을 보여주셨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 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십자가에서 얻을 수 있는 이 세 가지의 핵심적인 신학적 교훈 외에도, 그리스도의 죽음은 최소한 다른 두 가지의 교훈을 가르쳐준다.


 첫째, 주님은 자신의 죽음을 통하여 하나의 모범을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즉 "내가 목마르다"하시면서도 하나님께서 부과하신 것은 무엇이든지 견뎌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다. 그리스도가 당한 것보다 더 혹독한 고통을 당하며 죽은 사람은 없었을 것이나 그리스도는 이를 하나의 부족함도 없이 잘 감당하셨던 것이다.


 



 둘째, 그리스도의 죽음은 그리스도 안의 형제 자매들에 대한 성도의 자세를 평가해 주는 영구불변의 표준을 우리에게 제시해 준다. 바울은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 라고 했다. 그리스도는 어떤 마음을 품었는가? 바울은 그것을 이렇게 설명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서 죽으심이라"(빌 2:8).


 



 그리스도의 죽음의 방식이 중요하다고 할지라도 가장 중요한 사실은 그가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 자체이다.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셨던 것처럼 인자는 높이 들리워야 했는데,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었다(요 3:15). 그 결과 우리 그리스도인 들이 사도신경을 암송할 때,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라는 단순한 말 속에 내포된 영생의 진리를 알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갈 6:14)라고 했다.


 



 그리스도 죽음의 영향력


 



 레온 모리스(Leon Morris)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 언어 생활에도 대단히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했다. 토론할 때에 우리는 결정적인(crucial) 문제라는 말을 자주 한다. 이 말은 라틴어 crux(십자가)라는 단어에서 유래한 것이다. 기독교에서 십자가가 중심이듯이, 토론의 중심되는 문제를 "결정적"(crucial)인 문제라고 일컫는 것이다.


 



 십자가의 그림자(The Shadow of the Cross)라는 똑같은 이름을 가진 두 개의 유명한 그림은 십자가의 중심점을 잘 설명해 준다. 하나는 팔을 벌리고 있는 어머니의 품으로 어린 예수가 달려가는 것을 그려 놓았다. 그 달려가는 모습에 의해서 십자가의 그림자가 생긴다. 흘만 헌트(Holman Hunt)가 그린 또 하나의 그림은 아버지의 목공소에서 일하는 소년 예수를 보여 준다. 그가 팔을 뻗을 때에 그 몸이 십자가의 그림자를 만들게 된다.


 



 십자가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나타낸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죽음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리스도는 앞으로 자기가 죽을 줄을 완전히 알고서 그 죽음을 어떻게 생각하셨는가?


 



 그리스도가 자신의 죽음에 대해 말씀하는 구절들을 연구해 보면, 적어도 두 가지 사실을 알게 된다.


 첫째, 그는 자신의 죽음을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 즉 온전한 순종의 생애에 있어서 절정의 행위로 간주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잡으러 온 병정들에게 검을 빼어들고 대항하자 예수님은 "검을 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않겠느냐?"라고 하셨다(요 18:11 참고;마 26:39;요 12:27, 28).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원하셨으므로 그것을 거절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둘째, 그리스도는 자진해서 죽으신 분이시다. 땅의 기초도 놓이기 전에 준비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이루기 위해 그는 꾸물거리지 않고 기꺼이 자신의 일을 수행했다. 바울은 장엄한 어조로 이렇게 썼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 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참고, 요 10:17,18; 요 17:1;요 19:30;눅 24:26).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죽음은 순종의 행위였지만 그것은 주인에 의해 강요된 것을 수행하는 것과 같은 노예의 순종은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님과 동등하지만 죽기 위하여 인간의 유한성을 스스로 받아들인 분의 자발적 순종이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죽음이 갖는 의미를 다각도로 살펴보자.


 



 먼저 그리스도의 죽음이 시간(time)과 관련해서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성경은 적어도 세 구절에서 그 대답을 하고 있다. 첫째, 죽음은 시간이 존재하기 전에 계획된 것이었다. 베드로는 "그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리신 바 된 자"(벧전 1:20)라고 했다. 둘째, 그리스도는 "자기를 단번에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히 9:26) 시간 속으로 나타나셨다. 그의 죽으심은 모든 시간 가운데 최고의 사건이었다. 끝으로 그의 죽음은 영원까지, 즉 시간이 더 이상 존재치 않을 때까지 기억될 것이다. 언젠가는 시간이 끝이 나고 밤과 낮도 없어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은 영원히 기억되며(계 22:3) 어린 양 그리스도는 영원히 경배받으실 것이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우주(universe)와 관련해서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그것은 광대한 우주에 비해서는 너무나 미미한 지구라는 조그마한 항성에서 일어난 보잘 것 없는 사건이었었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실로 우주적인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 이에 대해 바울은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 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 1:19, 20)고 했다. 또한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인하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10, 11)고 바울은 말하였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죽음은 단순히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우주는 그 죽음에 의해 영향을 받게 된다. 이 진리는 여러 서신에서와 요한계시록에 거듭 강조되어 있다.


 



 또한 그리스도의 죽음은 미래의 형태를 결정짓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알만한 때에 그를 믿기를 거부한 자들은 장차 불못에 던져질 것이다. 반면 어린 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도성이 준비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그 거룩한 하나님의 도성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 만약 그리스도가 죽으시지 않았다면, 인류에게 천국은 결코 주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 모두는 죽으시고 또 그 죽음으로 미래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찬양하자(계 20:11-15;계 21:1-8계 19:30;계 22:3).


 



그리스도의 죽음에 있어서 성부와 사단의 역할


 



 성부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의 죽음을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재판관의 오판이나 무고한 자에 대한 살인처럼 그것을 엄청난 실수로 여기시지 않으시는가?


 



 원칙적으로 이것은 대답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왜냐하면 지적 한계를 지닌 인간이 하나님의 생각을 전부 다 알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생각 중의 일부는 알 수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자기 생각을 우리에게 계시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대언자였던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참으로 엄청난 실수이며 재판관의 오판이었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면, 그리스도께서 부활, 승천하신 직후에 예루살렘에 모여든 무리들에게 베드로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리 하였으며 너희 관원들도 그리 한 줄 아노라"(행 3:17)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같은 설교 중에서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께서 일찍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알리셨던 계획의 성취였다고 했다. 더 나아가서, 베드로는 인간의 악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 모든 사건을 주관하시는 분이라고 했다.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사 자기의 그리스도의 해 받으실 일을 미리 알게 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느니라"(행 3:18). 이처럼 그리스도의 죽음에 있어서도 전지하신 하나님은 자신이 미래 예언하신 일들을 이루셨던 것이다. 사건들이 아무리 혼란해 보여도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주관하고 계셨다.


 



 이것은 하나님이 시나리오를 쓰시고, 그 후에 인간을 꼭두각시로 조종하신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약 1:13). 즉 하나님은 악한 목적으로 시험하시거나 못된 일을 하도록 강요함으로 자신의 계획을 성취시키시지는 않으신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어떤 일을 할 능력을 주시거나 그것을 하고 싶어하는 성향을 주셔서 자신의 계획을 성취시키신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이 본국으로 돌아가고자 했을 때 하나님은 애굽 왕 바로에게 선한 마음을 불어 넣으셨다(출 12:31-36).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본국을 향해 애굽을 떠나자, 하나님은 바로에게 왕권을 사용하고 싶어하는 잔인한 마음을 허락하셨다(출 14:1-9). 이처럼 각 사람이 개인적 성향에 따라 자유롭게 행동했지만 결과적으로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일했던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예수 당시 대제사장이었던 가야바나 그의 장인 안나스같은 사람들이 산헤드린 공회를 지배하는 것을 허용하셨다. 그들은 사악한 무리들이었으며 자기들의 정치적, 종교적 특권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예수님을 죽이려 하는 그들의 결정은 그들의 사각성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그들의 양 어깨에는 무거운 책임이 지워져 있었으나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바로 이행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가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해 언급할 때, 그 일이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일어난 일이라고 했다. 즉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준 바" 되었다(행 2:23).


 



 분명히 말해서,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의 실수나 오판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대단히 중요한 성취였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죽음의 공포를 의지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하나님은 지금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시다(히 7:25).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푸실 충분한 근거를 만들어 놓았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인하여 하나님은 죄와 타협하지 않고 그것을 용서하실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진리는 여러 구절에서 나타나지만 사도 바울의 주장보다 더 심오한 것은 없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배신하여 간구하노


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


신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5:


19-21). 


 



 이 위대한 말씀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무죄성 및 그의 대속적 죽음을 밝히 말해주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 "안에" 그가 계시다는 그런 의미에서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 계시지 않았다. 이는 그리스도-아버지와 동등하시나 그와 구분되신 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신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케 하셨던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죄를 알지도 못하는 분"이라고 했다. 그는 개인적으로 죄를 경험하지 못했다. 그의 마음에는 사악한 생각이 없었고, 그 입에는 거짓된 말이 없었으며, 언제 한번 그릇된 행동을 한 적도 없었다. 그는 우리처럼 자신의 죄로 인하여 죽게 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


 



 이와 완전히 다른 의미이기는 하지만 그는 또한 하나님을 위하여 죽으셨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께서 죄인으로 멸망받을 수밖에 없는 인간에게 자비를 베푸실 충만한 근거를 만들어 드렸다. 우리가 구원받을 만한 가치가 있거나 또는 우리 죄를 간과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하신 요구를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만족시켜 드렸기 때문에 우리를 구원하셨던 것이다. 입법자이신 하나님은 죄에 대한 형벌로서 죽음을 요구하시는데 그리스도는 그 형 벌을 완전히 치르셨다.


 



 우리가 "나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할 때 우리가 고백하는 내용 가운데는 위의 설명과 같은 사실이 내포되어 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공의의 시행자인 동시에 사랑의 실천자가 되셨던 것이다.


 



 또한 사도 요한은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보내셨다는 진리를 강조한다. 왜 아버지께서 자기 아들을 보내셨는가? 요한은 그것을 이렇게 설명한다. "저로 말미 암아 우리를 살피려 하심"(요일 4:9)과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가 되기 위함"(요일 4:10)과 또한 "세상의 구주가 되기 위해"(요일 4:14) 아버지께서 아들을 보내셨다고 했다. 요한이 말했던 것처럼, 그 아들이 죽지 않고는 화목이 이루어질 수 없었기 때문에 아버지는 아들을 죽게 하기 위해 보내셨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받아 죽으실 때, 하나님은 단순한 방관자가 아니셨다.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계획했으며, 그 계획의 목표는 우리의 구원이었다. 요한이 말한 대로 아버지는 세상의 구주가 되시도록 아들을 보내셨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이라는 드라마에서 사단은 어떤 역할을 수행했는가?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해 사단이 어떤 책임을 지니고 있는가? 그는 그 죽음을 기뻐했는가? 여러 성경 구절을 통하여 이 문제에 대한 대답이 주어실 것이다. 첫째,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요일 3:8).


 



 그리스도가 마귀의 일을 멸하는데 성공하셨는가? 성공하셨다면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마귀를 멸하셨는가? 바울은 이렇게 대답한다.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정사와 권 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골 2:14, 15).


 



 우리를 거스리는 권세는 사단과 그의 추종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능력은 십자가에서 파괴되었다. 히브리서 기자는 "사망으로 말미 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려고"(히 2:14)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이 되셨다고 분명하게 말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사단의 패배이다. 그러나 사단은 지금도 여전히 활동하고 있다. 패배당하였으며, 그의 능력은 파괴되고 있고,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그를 묶어 불못으로 던져 넣으실 것이다.


 



 우리 주님은 자신의 고난과 죽음이 사단의 패배를 분명하게 나타내 준다는 것을 아셨으며, 사단도 또한 그것을 알았을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그 사실은 사단이 예수님의 생애 중에 그에게 극심한 적대 행위를 한 것과 예수님의 죽으실 기간이 다가옴에 따라 증오로 광분 하는 모습이 더 분명해지는 사실을 잘 설명해준다. 사단은 십자가를 지러가는 예수님의 길을 바꿀 수 없게 됨을 알자, 그 길을 대단히 고통스럽게 하고, 죽음의 고난을 더욱 쓰라리게 하려 했다. 의심할 나위도 없이 사단이 배신자 가룟 유다를 충동질했으며 유대인과 이방인의 분노심을 선동했다.


 



 그러나 그것은 사단의 마지막 발악이었다. 그의 능력은 십자가에서 파괴되었다. 그래서 마틴 루터(Martin Luther)가 다음과 같이 사단과 죄에 대한 승리가를 쓸 수 있었던 것이다.


 


 


 


 



 잔인한 흑암의 왕자,


우린 그를 두려워 않네.


그의 진노도 능히 견디네.


자, 그에게는 진노만 있나니,


이 한 마디 그에게 있을 뿐이네.


"전능하신 방패는 우리 하나님"


 



그리스도 죽음의 의미


 



 그리스도의 죽음은 대단히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닌다. 그래서 성경은 그 의미를 설명하는데 적어도 여섯 개의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첫째는 화목(propitiation)이다. 요한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다"(요일 4:10;요일 2:2) 라고 했다. 조금 다른 형태이긴 하지만 바울도 그 단어를 사용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 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롬 3:23-25).


 



 이러한 화목이라는 단어는 화해(reconciliation), 속죄(expiation), 변상(satisfaction) 및 보상(atonement) 등과 같은 부류의 단어들 중의 하나이다. 이 단어는 "감정이 상한 사람에게 먼저 말을 거는 것"이라는 사전적인 뜻이 있다. 이것이 성경에서 사용된 바로 그 용법이다. 신학자들은 때때로 이 단어를 하나님 편에서 본 주님의 죽음의 양상이라 설명했다. 화목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의로우심 및 공의로우심의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한 그리스도의 사역인 것이다. 그 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위하여 아무런 장애 없이 일하시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근거로 하나님은 아무런 장애없이 그의 원하시는 바를-죄인을 구원 함-행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거룩하심을 조금도 타협치 않으신다. 화목을 이루기 위해 그리스도의 죽음은 거룩하신 하나님으로 하여금 죄인들을 구원하시도록 하는 의로운 기초를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의 성격을 설명하는 방법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나타낸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죄를 못본 척 하신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에 대한 충분한 형벌을 요구하셨고, 또 그것은 십자가에서 충분히 지불되었다. 화목을 이루어 오신 하나님은 지금 이시간에도 그리스도의 죽음을 근거로 죄인들을 용서 하신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죽음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많은 인간이 쉽게 만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 준다. 하나님은 독생자의 죽음이란 방법을 통해서 적극적으로 화목케 하시며 인간은 수동적으로 은혜를 받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설명하는 데에는 또 다른 다섯 개의 단어가 사용된다. 그것은 희생(sacrifice), 제물(offering). 대속물(ransom), 구속(redemption), 화해(reconciliation) 등이다. 마지막 단어 화해는 "관계의 변화", '서먹서먹함의 마무리" 및 "우정의 회복" 등의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동의어로는 "재연합"(reunion), 또는 "조화"(harmony) 등이 있다.


 



 이러한 그리스도 죽음과 관계된 설명들은 우리에게 일반적인 개념을 가져다 줄 뿐이지 거기에는 큰 문제가 남아 있다. 누가 누구에게 화해되는가? 화해(화목과 마찬가지로)는 "감정이 상한 사람에게 먼저 말을 거는 것"이라고 사전은 설명한다. 이러한 표현은 화목되어지는 대상이 하나님인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바울의 말에 귀를 기울여 보자.


 



 곧 우리가 원수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


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롬 5:10).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후 5:18. 19).


 



 그렇다면 사전적인 이해는 잘못된 것 같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화목되어지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화목되기 때문이다. 다음에 나올 성경 말씀이 이 사실을 설명해 준다.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 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라 너희를 거룩하고 흠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골 1:19-22).


 



 이 구절들을 살펴보면 몇 가지 사실이 명확히 밝혀진다. 첫째,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교제의 장애물을 제거하심으로 자신과 세상을 화목케 하셨으며, 이로 인하여 사람들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둘째, 하나님께서 그 화목을 받아들이시려고 우리에게 나타나신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나아갈 길을 막을 것은 아무 것도 없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받아들이실 계획을 세울 뿐 아니라 죄인을 받아들이시는 분이시다. 따라서 지금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는 것은 우리의 책임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과 화해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분명 역사상의 한 사건으로만 이해되어서는 안되는 그 이상의 영원한 것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죄에 대한 거룩하신 적대감을 타협하지 않고도 죄많은 백성의 구원을 가능하게 한 방법이었다. 따라서 만약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을 내어주지 않았다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의로우심을 타협치 않고서는 아무도 구원 하실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의 또 다른 하나의 의미는 의롭게 여기다(justify), 또는 칭의(justification)라는 단어로 나타난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우리 인간은 의롭지 못하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의롭지 못한 자를 의롭게 여기시도록 하는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죽음을 하나님의 의로우심에 대한 증거였다고 바울은 말한다.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심이니라"(롬 3:26).


 



 칭의란 무엇이며 또한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 사전적 설명에 의하면, 칭의 란 "구원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거나 의롭다고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거나 또는 인정되는 것"이라고 한다. "구원받을 만한 가치"라는 구절을 제외하고는 잘못된 설명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 스스로 구원받을 가치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여된 그리스도의 가치와 밀접히 연관시켜서 우리를 의롭다고 간주 하시지 않으신다면 어느 누구도 구원받을 만한 가치는 없기 때문이다. 오직 이런 의미에서만 칭의가 가치라는 말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이다.


 



 사전적 설명의 마지막 부분, 즉 "하나님께 인정되는 것"이란 말은 아주 훌륭한 표현이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는 것이 무엇인가를 말해준다. 여기에서는 "되어지는"(made)이라는 단어를 강조 하는데, 이 단어는 하나님의 행위를 강조하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게 만드시는 것이다(makes).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지은 일이 없었던 사람으로 간주하신다는 의미가 아니다. 의로와진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나로서(what I am) 아심을 뜻하며, 과거에 무엇을 했으며, 미래에 무엇을 할 것 인가를 아신다는 뜻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모양 그대로의 나를 받아주신다. 온 세상을 심판하시는 자의 공식적인 자격으로 하나님께서 나를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받은 자들이 그렇지 못한 자들보다 더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 바울의 말과 같이, 모든 사람들은 죄를 범했으며 다 함께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롬 3:23) 자들인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 믿는 자"(롬 3:26)를 의롭다고 선언하신다.


 



 하나님께서 불의한 자를 어떻게 의롭게 하시는가? 이 문제가 우리를 당황하게 한다 할지라도 우리만이 그런 것이 아니다. 옛날 욥의 한 친구도 이와 똑같은 의문을 품었었다. "그런즉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하며 부녀에게서 난 자가 어찌 깨끗하다 하랴"(욥 25:4). 욥의 친구는 절대 그럴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바울은 그것을 가능한 것이라고 했으며, 하나님께서 불의한 자를 의롭게 하신다고 말했다(롬 3:26). 첫째, 하나님은 자기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칭 의의 의로운 기초를 이루어 놓으셨다. 둘째, 하나님은 자신이 의롭게 하시는 모든 자들에게서 분명한 반응을 요구하신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그들을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시지 않으시고 오직 그리스도 예수를 믿기만 요구하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게는 많은 것을 요구하시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이다. 따라서 인간에게 있어서 구원은 선물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있어서 그것은 실로 값비싼 것이었다. 구원은 하나님의 성육신과 뒤 이은 그의 독생자의 죽음을 요하는 것이다.


 



 이제 그리스도의 죽음이 대단히 방대한 의미를 지닌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누구도 그 깊이를 측량치 못한다. 그러나 주의 깊게 살펴 보면 몇 가지 분명한 사상이 드러난다. 첫째, 그의 죽음은 하나님의 인격성을 증거해 준다. 둘째, 그의 죽음은 하나님의 율법의 엄정성을 입증해 준다. 개인적으로 무죄함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는 우리 죄에 대한 책임을 지시고 죽으셨던 것이다. 셋째, 그의 죽음은 하나님의 용서의 근거가 된다.


 



 이 마지막 대목의 의미는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다른 사람을 용서해 주는 사람은 그 사람에게 벌을 주지 않게 하기 위하여 그 사람의 잘못된 행위의 결과를 용납해 준다. 이와 같이 어떤 사람이 빛을 면제시켜 준다면 그는 그 빛의 액수도 저절로 잊어버리게 된다. 그리고 만약 어떤 때에 모욕이나 허풍 떠는 것을 용납한다면 다른 경우에도 그 무례함을 용납해주게 된다. 그래서 인간의 용서는 자신의 희생을 치르고 잘못된 행동을 없는 일처럼 여기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죄를 지은 사람 대신에 무죄한 사람이 고통당하는 이 원리가 구속의 기본적 진리이다. 그러므로 모든 용서의 행위는 진정 속죄의 행위임이 강하게 역설된다. 그리하여 인간의 용서는 하나님의 속죄의 필요성을 없이 하지 않고 도리어 하나님의 용서를 진정으로 밝혀주고 그것을 정당하게 해주며 그것을 꼭 필요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용서는 정의의 원리를 가장 먼저 충족시키는 자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원리에 기초하여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죄용서 하심을 가능케 했다.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은 그의 사랑을 얼마나 필요로 하는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용서의 근거가 된다는 이러한 주장은 신약 성경에서 이론의 여지가 없으리만큼 분명한 것 이다. 회개가 과거를 원상태로 회복시킬 수는 없으며 다만 미래에만 영향을 미칠 뿐이다. 또한 구원으로 시작되지 않는 종교는 교육으로서도 성공하지 못한다 그리스도는 인간의 성숙에 관해서 뿐 아니라 죄로 인한 부패성에 대해서도 말씀하셨고 또 그것을 취급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용서는 값싸게 주어진 것이 아니다. 거기엔 적어도 두 가지가 요구된다. 죄인은 심판대에 서야 하며, 그 죄인의 자리에 적합한 대리자를 세워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갈보리 산에서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십자가 지심이다. 그리스도는 죄인의 대리자로 자신을 내어주셨으며, 하나님의 진노가 바로 대리자이신 그리스도에게 쏟아 부어졌다. 그리스도는 지금까지 살았던 모든 사람과 앞으로 살게 될 모든 죄인의 죄에 대한 책임을 지셨기에 하나님의 치심을 받아야만 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납하시는 근거가 된다. 적어도 두 개의 성경 구절이 이 주제와 연관되어 진다.


 첫째, 에베소서 1장 6절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 거하도록 받아주셨다고 했다(KJV 참조), 필립(J.B.Phillips)은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에 대한 영원한 사랑으로 우리를 환대하셨다" 라고 번역했다. 받아들여진다는 것은 환대받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그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바울은 예수께서 세례 받으실 때 하늘에서 들려온 음성, "이는 내 사랑 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 3:17)는 말씀을 생각하고 이 서신을 썼음이 분명하다.


 



 또한 받아들이심은 관계를 기초로 한 말이다. 더 나아가 "사랑하는 자 안에"라는 말은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과의 연합적인 관계를 나타낸다. 그리스도와 연합된 우리가 비로소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이 관계를 떠나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없게 된다. 바울은 용서받지 못할 자의 상태를 표현하기 위해서 "멀리 떠나"-하나님께로부터-라는 단어를 사용했다(골 1:21). 이사야도 그의 백성들에게 그들의 죄가 그들과 하나님 사이를 떼어놓았다고 했다. 하나님은 그들의 말을 듣지 않으셨고 그들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반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뿐 아니라, 그것으로 인한 모든 특권도 얻게 된다. 에베소 교회에 보낸 바울의 편지를 "그리스도 안에"라는 말과 "그 안에"라는 말에 밑줄을 그으면서 읽어보라. 그리고 거기에 기록된 특전을 헤아려 보라.


 



 두번째 구절은 롬 8:33, 34이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자를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어떤 설명도 하나님의 받아들이심의 완전성을 이 구절보다 더 잘 설명하지는 못한다. 전능하신 하나님 자신이 우리 편이시다. 그런데 누가 감히 우리를 고소하겠는가? 하나님은 아니하신다. 오히려 하나님은 의롭다 하시는 분이시다. 이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 하신다면, 누가 우리를 정죄하겠는가? 어느 누가 하나님보다 더 큰 자인가? 이러한 까닭으로 우리는 지금 "사랑하시는 자" 안에 받아들여졌음을 확실하게 믿는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우리의 자세가 어떠하여야 하는가?


 첫째 자세는 믿음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는 사실 자체에 대한 믿음이 아니다. 심지어 그리스도를 박해했던 자들조차도 그의 죽음 사실을 믿었다. 그들이 이 사실을 믿지 않았다면 장사지내라는 명령을 내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의 죽음에 대간 믿음이란 그가 죽으신 목적에 대한 믿음을 의미한다. 바울이 말한 대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고전 15:3). 누구든지 "우리 죄를 위한" 그리스도의 죽음을 믿고 그것을 개인적으로 마음에 받아들인다면 그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다.


 



 두번째 자세는 확신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믿는다. 아무리 어두운 길이나, 아무리 고통스러운 경험, 아무리 깊은 고뇌, 혹은 아무리 강렬한 고통을 당할지라도 그것은 십자가의 고통과는 비교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의심하는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롬 8:32).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세번째 자세는 그에게 헌신하는 것이다. 바울의 말과 같이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고후 5:14). 바울은 우리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렇게 잘 표현하였다. 반면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보잘 것 없으며 믿을 만한 것이 못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많은 사람들은 그를 모르는 체하며 그를 섬기는 일에 무관심한 경우 많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또한 특권적인 것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대해서도 교훈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나 성육신하심으로 하나님으로서의 특권을 기꺼이 포기하셨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를 는 우리도 모든 특권을 필요하다면 희생시켜야 한다.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의 자진해서 인간되심과 십자가에서 죽으심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의 좋은 본보기가 된다. 우리는 순종하고 있는가? 필요하다면 죽기까지,


 



 주 안에 있는 형제 자매들을 위하여 다소의 손해를 보더라도 그들의 필요에 대해 충분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가? 이것이 그리스도의 죽음이 주는 교훈 중의 하나이다. 빌립보서 2장에 나오는 위대한 말씀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다른 사람의 관심사에 시선을 돌리도록 만든다. 그리스도는 기꺼이 남을 위해 죽으셨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를 따르는 성도인 우리는 기꺼이 무엇을 해야 하겠는가?(빌 2:3, 4)


 



장사되신 그리스도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장사되심을 믿습니다"라고 반드시 고백해야 할 필요가 있는가? 사도신경은 왜 그리스도의 죽음만을 기록하고 장사되었다는 사실을 생략한 채 바로 부활에 대한 논의로 넘어가지 않는가?


 



 그 이유는 성경 자체가 주님의 장사되심을 묘사하는데 상당한 노력을 기울인다는데서 찾을 수 있다. 각 복음서는 모두 이것을 언급하는데, 복음서 기자는 각기 다른 사람이 빠뜨린 사항을 추가하고 있다. 예를 들면, 마태만이 무덤을 제공한 요셉이 부자였다고 말한다. 또 마가 혼자만이 그가 존귀한 공회원 이었음을 말한다.


 



 그리스도의 장사되심에 대해서는 서신서들에도 언급되어 있다. 고린도전서 15장 3, 4절에서 바울은 복음의 핵심적인 항목에 그리스도의 장사되심을 포함시켰다. 바울은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다시 살아나사"라고 했다.


 



 왜 그리스도의 장사되심의 기사가 이처럼 중요한가? 두 가지 이유를 들 수 있다.


 첫째, 그리스도의 장사되심은 그리스도가 실제로 죽었음을 확증해 준다. 회의론자는 그리스도는 죽은 것이 아니라 현기증을 일으킨 것뿐이며, 그러므로 그가 죽음에서 부활한 것이 아니라 의식을 다시 회복한 것뿐이라고 말함으로 그리스도의 부활 신앙의 기원을 설명하려고 했다. 그러나 복음서는 그가 죽었으며 그를 박해한 자들이 그의 죽음을 확인했으며, 또한 로마 총독 빌라도는 시체를 장사 지내도록 허락했다고 분명하게 말한다.


 



 둘째, 그리스도의 장사되심은 죽은 몸을 잘 돌봐야 한다는 교훈을 줌으로 중요하다. 사람들은 가끔 자기들이 죽을 때, 자기 몸이 땅에 묻히든 쓰레기 더미에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지든 상관없다고 경솔히 말한다. 그러나 성경은 시체를 중시하고 있다. 스데반이 순교당했을 때, 경건한 사람들이 그의 몸을 장사지냈다. 도르가의 몸은 당시의 관습에 따라 씻어져 장사되기 위해 다락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의 죽은 몸보다 더 따뜻한 보살핌을 받은 시체는 없었을 것이다.


 



 로마 제국 내에 기독교의 영향력으로 인해 화장 제도가 없어지고 매장 제도가 행해졌음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이방 세계에 살았던 그리스도인은 주님이 장사되었던 방식대로 장사되기를 바랐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부활에 대한 소망을 표현하는 극적인 방법으로 믿었다.


 



 그러나 몸이 그대로 보존되어 장사되는 것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시간이 지나면 어떤 몸이든지 분해된다. 상어에게 잡아먹힌 사람도 납으로 만들어진 관 속에 넣어져 흙에 묻힌 사람과 똑같이 전능자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장차 부활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 일을 가능케 하는지 우린 알지 못한다. 단지 우리는 그것을 행하는 분이 누구인지 아는 것으로 족하다.


 



 그리스도의 장사되심은 몸소 죽으심으로 인류 구원을 위해 성취하신 구속 사역의 중요한 한 부분이었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성취하신 일이 무엇이었는가? 여러 가지 중에서도 그가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로운 진노를 자기 몸에 짊어진 일이다. 모든 죄는 그리스도에게 치워졌으며 그의 죽으심으로 죄는 심판받았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요 1:29) 이라고 했다. 여기서 죄를 "지고가는"이란 표현은 구약의 속죄 의식에서 예시되었다. 대제사장은 속죄 염소의 머리에 손을 얹고 자기와 백성의 죄를 자백하고 그 염소를 광야로 내보내었다. 레 16:22은 이것을 잘 설명해 준다. "염소가 그들의 모든 불의를 지고 무인 지경에 이르거든 그는 그 염소를 광야에 놓을지니라."


 



 분명히 그 염소가 실제로 인간의 죄에 대한 책임을 질 수는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극적인 형태로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표현하기 위해 이러한 제도를 만드셨다. 집으로 돌아가기엔 너무 먼 광야에 놓여진 속죄 염소는 묵묵히 죄를 "지고가는"그리스도의 사역을 묘사하며 그의 장사되심과 상통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죄에 대한 마지막 처분은 그의 장사되심에서 이루어졌다. 그는 죄의 결과로 주어진 죽음에 바쳐진 대속 제물로서 무덤에까지 들어가셨다. 그리고 죄의 짐과 전혀 상관없이 부활하여 무덤에서 나오셨다. 이것이 "장사한지 사흘만에..."라는 구절의 교리적 중요성이다. 광야에 놓여진 속죄 염소의 생명과 존재를 규명하지 않듯이 무덤에서 성취된 죄에 대한 처분도 규명할 수 없다. 믿는 자의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의 사역의 한 양상이었던 장사되심 속에는 자신에 게 주어진 죄의 심판에 대한 처분도 분명히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이 글이 좀 어렵게 느껴진다면, 죤 번연의 작품이 도움이 될 것이다. <천로역정>(The Pilgrim's Progress)에서 번연은 등에 짐을 지고 있는 어떤 사람이 결국 그것을 벗어버리게 되는 방법을 말해준다. 그 짐은 그의 죄와 죄의식을 상징한다. 그 사람이 갈보리라고 부르는 언덕에 올라가 십자가를 바라볼 때, 자기를 위해 거기 달리신 구세주에 대한 감사의 눈물이 눈에 고이게 된다. "복되도다, 십자가여"라고 그는 말을 시작한다. 그리고나서 그는 자신의 잘못을 고친다. "나를 위해 고난 당하신 이여 다 복되시도다"라고 소리친다. 그 후에 그는 자기 등에 있는 무거운 짐을 묶고 있던 밧줄이 끊어지는 것을 꿈에서 보았다. 그 짐은 언덕 아래로 굴러내려가 빈 무덤에 들어갔다. 그리고나서 다시는 그가 그 짐을 보지 못했다고 한다.


 우리는 때때로 이 진리를 나타내 주는 다음과 같은 합창을 하게 된다.


 



 살아계셔서 나를 사랑하신 주님,


죽으셔서 나를 구원하신 주님,


장사되셔서 내 죄를 씻으신 주님.


-월버 챔프맨의 "어느날"


 



그리스도는 지옥에 내려가셨을까?


 



 사도신경에 논쟁의 여지가 있는 구절이 나타나는데. 그것은 "지옥에 내려가셨다가"라는 표현이다. 그리스도의 영이 실제로 죽은 영들의 장소에 내려가셨다는 사실을 모든 그리스도인이다 믿는 것은 아니다. 더군다나 지옥(hell)이라는 말은 사도신경이 처음 영어로 번역될 때 의미했던 그 의미가 아니다.


 



 지옥(hell)이라는 영어 단어는 "보이지 않는", 또는 "덮여진" 장소 라는 뜻의 앵글펄 색슨어인 "Hellan"이라는 단어에서 나온 것이다. 수백년 전에는 이 단어가 히브리어 스올(Sheol)이나 헬라어 하데스(hades)와 똑같은 의미의 단어였다. 그래서 그것은 죽음 이후의 모든 영혼이 가는 장소를 의미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단어는 악인들이 형벌받는 곳을 의미하게 되었다. 즉 그 뜻이 죄인이 사후에 가서 영원히 거하는 비탄의 장소로 한정되었다. 그래서 현대 영어 지옥 (hell)은 성경의 단어 스올이나 하데스와는 다른 뜻이며, 또 사도신경에도 적당치 않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라면 그리스도께서 죽으실 때에 그는 분명히 지옥으로 가시지 않았다.


 



 그러면 그리스도가 어디로 가셨는가? 분명한 것은 명확한 사실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 사실을 기록한 구절을 잘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행 2:24-31절은 이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후에 베드로가 한 첫 설교이다.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다윗이 저를 가리켜 가로되...내 육체는 희망에 거하리니 이는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치 않게 하실것임이로다.


 



 여기서 베드로는 시편을 해석하고 있다. 그는 다윗을 선지자라고 하면서, 그가 "미리 보는고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말하되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리라"고 했다.


 



 시편에서 인용된 이 말씀의 의미는 시편 본문처럼 분명하지는 않다. 따라서 우리는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영이 음부에 내려가셨음을 뜻한다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 구절은 그리스도께서 지옥에 내려가셨다는 사도신경 기사의 근거가 되는 중요한 두 세 개의 구절 가운데 하나이다.


 



 다시 한번 의문을 제기해 보자. 그리스도의 영이 과연 음부에 내려 가셨는가?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 있었던 장소는 명확히 알고 있다. 그는 못 박히시던 근처에 있는 동산 안의 새로 만든 무덤 속에 계셨다. 그러면 그의 영은 어디로 가셨는가?


 



 주님께서는 친히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셨다. 주님 옆에서 십자가에 달린 강도가 주님께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자기를 기억해 달라고 하자, 예수께서는 그 때까지 기다리지 아니할 것이라고 말씀 하셨다. 그리고는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고 하셨다.


 



 그 낙원이란 어디인가? 어떤 학자는 그것을 하늘로 믿는다. 이 단어는 신약 성경에 다시 두번 사용되는데, 각기 경우에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 장소를 말하는 것 같다. 예를 들면 요한계시록은 생명나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다고 한다(계 2:7;계 22:2). 이 해석에 의할 것 같으면, 우리 주님은 죽으실 때 그 영혼이 하늘로 올라가셨으며 거기서 몸의 부활을 기다리셨다는 것이다. 이 견해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주님이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라고 하신 말씀이 그것을 가리킨다고 믿는다.


 



 이런 해석은 분명히 가능성이 있는 해석이다. 그러나 그것은 인용된 본문이 원래 뜻하는 바가 아니라는 문제가 제기된다. 예수께서 십자가상에서 자기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부탁했을 때, 그는 하나님의 뜻 대로 처분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한 것뿐이었을지도 모른다. 더구나 구약의 헬라어 번역에는 신약의 "낙원"(Paradise)에 해당하는 단어가 "동산"(garden)이나 "숲"(grove)으로 번역되었다. 예를 들면, 에덴 동산이 하나의 낙원이었다(창 2:8 참고;느 2:8:전 2:5;아 4:13). 따라서 이 말은 유대인에게 있어서 복되게 죽은 자들의 장소를 묘사하는 시적인 표현인 "아브라함의 품"과 동의어일지도 모른다.


 



 그리스도가 죽으시고 부활하시는 기간 동안 어디에 계셨는가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만약 문제가 된다면 성경은 그것을 보다 더 분명하게 기록했을 것이다. 성경이 강조하는 바는 그리스도가 3일 동안을 어디에서 보내셨는가 하는 장소가 아니다. 성경에서 강조되는 것은 그가 머문 장소가 아니라 제자들에게로 다시 돌아왔다는 사실이다. 그는 자기가 말했던 대로 죽음에서 부활하셨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혼이 음부에 갔었다고 믿어야 하는가 아닌가를 결정해야 할 필요가 없다. 정작 우리가 믿어야 할 것은 그의 영혼이 음부에 버려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육체적, 영적 모든 면에서 죽음은 일시적일 뿐이었다. 장사지낸지 사흘만에 그는 육체와 영혼을 그대로 지닌 채로 무덤에서 나오셨다. 이 위대한 진리에 대하여 성경은 매우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사도신경이 말하는 바와 같이, 만약 예수께서 음부에 내려가셨다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떤 사람들은 예수께서 음부에 내려가심으로 인성을 완성했다고 주장한다. 그는 우리 중의 하나와 같이 되셨다. 그는 태어나시고 자라나셨으며 또한 이 땅에서 사시다가 죽으셨으며 몸이 장사되어졌으며 그의 영혼은 부활을 기다리기 위해 보이지 않는 세계로 가셨다. 그리고 삼일 후에 다시 살아나셨고 하늘로 올라가셨다. 부활과 승천을 경험하신 사실만이 우리와 다를 뿐 다른 것은 다른 인간의 경험과 동일한 것이다.


 



 웨스트코트(B.F.Westcott)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해설했다.


 



 그 사실은(그리스도께서 음부에 내려가셨다는 교리는) 주님의 죽음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완전하게 해준다. 죽음이란 영과 육의 분리이다. 이런 개념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죽음으로서 우리와 같은 운명을 맞이하셨다. 그의 몸은 무덤에 놓였고 그의 영혼은 앞으로 우리들이 들어가리라 생각되는 그 나라로 들어가셨다. 그는 인간의 모든 상태를 다 겪으셨고 하나님을 위하여 승리하셨다. 우리가 있는 곳은 어디나 그가 계셨던 곳이다. 그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우리 의 상태에 참여하셨다.


 



 그리스도는 죽은 자의 거처에 계시게 되는 일을 포함하여 인간의 모든 경험을 다 맛보셨다. 그래서 그는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셨다"(히 2:17). 그러나 인격적으로나 경험하신 바에 있어서는 우리와는 달랐다. 왜냐하면 그는 단순히 인간이 아니었으며, 죽음이 그를 매어둘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무덤에서 승리를 거두고 부활, 승천하셨다.


 



 여러 구절들을 비교해 보면, 부활하신 구주께서 복되게 죽은 자를 음부에서 풀어주시고 그들을 영광으로 인도하셨다(엡 4:8;히 11:40;히 12:18, 23을 보라). 만약 그렇다면 음부는 복되게 죽은 자들의 거처는 아닌 것이다. 그곳은 영원한 형벌을 기다리는 악인만을 위하여 준비되어 있는 곳이다. 음부가 지옥이 되는 곳이다.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자들의 영혼은 그들이 죽을 때에 즉시 천국으로 올라간다. 그들은 결코 음부로 "내려가지" 않는다. 그들은 주님과 함께 "올라간다" 바울이 노년에 로마 감옥에서 그의 친구들에게 편지를 쓸 때에,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졌다고 했다. 그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천국에서의 재연합을 의미했다. 그래서 그것이 "더욱 좋은 것"이 되는 것이다(빌 1:23).


 



 따라서 우리가 사도신경을 고백할 때마다 이 사실들에 대해 생각하게 되면 의심스런 마음이 생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내용이 사도신경의 위대한 기사 속에 포함되어 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지옥에 내려가셨다가 장사한지 사흘만에..."라는 사도신경 기사는 구세주가 고난당하심으로 인하여 우리를 위하여 이루어 놓으신 구원 사역에 대한 신앙을 확인하는 것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라고 고백하는 것은 무슨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사도신경보다 훨씬 후에 생겨난 여러 신조들과 신앙 고백문들은 보다 정확을 기하기 위하여 이 구절을 더 길게 만들었다. 예를 들면, 성공회의 39개 조항의 신앙 고백 중 제2조는 이렇게 표현된다. "그리스도는 실제로 죽음에서 부활하시고 살과 뼈와 그리고 사람의 본성에 속하는 모든 것을 구비한 신체를 다시 취하셨다."


 



 이 조항은 세 가지 중요한 진리를 강조하고 있다. 첫째는 부활 사실이다("그리스도는 진정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둘째는 몸이 다시 부활했음을 확인한 것이다. 셋째는 부활한 몸의 변화이다.


 



 여기에 피가 빠져 있다는 점을 주목해 보자. 그리스도의 부활은 단순히 소생이 아니라 진짜 부활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나사로나 다른 어떤 사람이 생명을 다시 얻었던 것과는 다른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진리는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브룬너 (E.Brunner)의 견해에 의할 것 같으면 "모든 것은 부활 사건에 의존하고 있다. "또 프로이드 필슨(Floyd Filson)은 "신약 성경 전체가 부활 사건을 감안하여 기록되었다"고 했다. 이러한 말들은 매우 대담한 주장이지만 어떤 학자도 이것을 반박하지 못할 것이다.


 



 부활의 중요성에 대한 바울의 평가는 여러 성경 구절을 통하여 살펴볼 때 매우 정확하다. 고전 15:3, 4절고전 15:3에서 그는 복음을 이렇게 요약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 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이렇게 쓴 후에 이어서 바울은 주님께서 사도들과 자기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에게 나타나셨던 일을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내나 저희나 이같이 전파하매 너희도 이같이 믿었느니라"(고전 15:11)라고 했다.


 



 또 다른 성경에서 바울은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 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롬 10:9)라고 했다. 이 두 구절을 연관시켜 생각해 보면, 죽는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그 진리의 중요성을 알게 될 것이다. 모든 사도들은 그 일이 실제로 발생한 것으로 믿었다. 또한 그들은 부활에 대한 신앙이 구원에 필요 불가결한 것이라는 중요한 결론을 내렸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사도신경으로 재확인한다. 분명한 증거가 그리스도 부활 사실을 지지하고 있다. 지금까지 부활을 믿는 확실한 이유에 대해 들어보지 못했다면, 기독교 서적을 판매하는 서점에 가보라. 기독교 변증이나 기독교 신앙의 내용을 소개하는 책들을 꽃아 놓은 서가에서 부활 신앙에 대해 도움이 되는 책을 많이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부활 신앙을 지지하는 여러 증거들 중에 예수님의 생애와 인격이 그 중의 하나이다. 분명히 참 인간이셨던 예수께서 자신의 부활을 분명하게 예언하셨다. 만약 그가 부활하지 못하셨다면 그의 진실성은 무너질 수밖에 없다.


 



 또 다른 증거는 빈무덤과 시체가 사라진 사실이다. 그것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것이거나, 아니면 사람들의 손에 의해 시체를 도둑맞았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 만약 시체를 도둑맞았다면 누구의 짓인가? 그의 대적자들인가? 그들이 시체를 가져갔다면 사도들이 예수께서 살아나셨다고 모든 사람들에게 말했을 때 왜 그 시체를 내보이지 않았겠는가?


 



 그러면 제자들이 그것을 가져갔는가? 그럴 수 없다. 시체가 있던 무덤은 육중한 돌로 박혀 있었으며, 인봉되었고 군대가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제자들 중 누가 분명한 비진리의 메시지를 옹호하기 위해 자기 생명을 바치겠는가?


 



 그리스도께서 부활을 예언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제자들은 사실상 부활에 대해 전혀 준비하고 있지 않았다. 몇몇 여인들도 부활을 위해서가 아니라 시체가 썩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예수님의 몸에 향유를 바르려고 했을 뿐이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증거가 점차 많아짐에도 불구하고 믿기를 싫어한 제자들이 많았다. 그들의 마음이 부활을 확신하는 것으로 변화되었다는 것은 부활 사실을 강력히 지지해 준다. 제자들이 부활을 믿었음은 불신자들까지도 인정했다. 분명히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몸을 훔치지 않았다.


 



 부활에 대한 불신앙적인 비판자조차 빈무덤과 시체가 없어진 사실을 성공적으로 설명한 적이 없다. 그리스도의 대적자들의 이러한 침묵이 그리스도의 친구들의 부활 증거만큼이나 중요한 것이다.


 



 바울의 회개가 부활에 대한 또 하나의 강력한 증거이다. 초대 교회의 그 오만한 박해자가 예수님을 믿으리라고는 누구도 생각지 못했다. 학문과 재능을 겸비한 그는 예수님의 이름에 철저히 대적했었다. 그러나 그도 제자가 되었다. 그리고 자기를 의심하는 사람들의 의심을 풀기 위하여,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이 자기에게 나타나셨던 그 체험을 이야기했다. 다메섹 도상의 경험이 그의 생애를 바꾸어 놓았던 것이다. 아그립바왕 앞에서 그는 자기의 회심을 이야기했으며, 또한 부활 사건의 요점을 말하자 베스도는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행 26:24)고 하며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바울의 회심은 그리스도 부활을 증거하는 참으로 중요한 사실이다. 바울은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정신차린 말을 하나이다"라고 했다. 그리고나서 그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 들은 바를 아그립바 왕에게 증거하면서, "이 일은 한 편 구석에서 행한 것이 아니로소이다"라고 했다(행 26:25, 26).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일보다 우리에게 더 큰 부활의 확신을 주는 증거는 아마 없을 것이다. 복음서에는 이에 대한 기사가 많이 나온다. 그러나 단순히 복음서의 기사 때문이 아니라,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여러 차례의 나타나셨다는 사실 그 자체가 부활에 대한 초기교회의 신앙을 설명해 준다. 제임스 데니(Jamas Denny) 는 그것을 이렇게 말했다.


 



 복음서 기자가 쓴 부활 기사는 우리가 취급해야 할 많은 중요한 증거들 중에서 가장 작은 부분에 불과할 것이다. 만약 우리가 이 범위(복음서-역자주) 밖에 놓여 있는 사실을 토대로 하여 부활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복음서 자체에 나타난 사실을 근거하여서도 그리스도의 부활을 받아 들이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여도 과장은 아닐 것이다. 부활에 대한 보다 확고한 역사적 증거는 이렇다. 부활은 믿어졌고, 전파되었고, 퍼져나갔으며, 또한 그 열매를 맺어 복음이 기록되기 오래 전에 이미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기독 교회가 생겨났다는 것이다. 이 말은 복음서를 무시하려는 것이거나 복음서가 말하는 내용을 과소평가하려는 것이 아닐 뿐 아니라 복음서 내용의 진실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도 아니다. 부활에 대한 신앙은 신약의 어느 성경도 기록되기 전에 이미 널리 퍼져 있었으며 대단히 힘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스도는 두 장소를 배경으로 나타나셨는데, 하나는 예루살렘이며, 다른 하나는 갈릴리이다. 이것 또한 부활이 실제로 있었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그리피스 토마스(W.Griffth Thomas)는 <기독교와 그리스도>(Christianity is Christ)라는 작은 책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지지하는 여러 가지 증거를 제시한 후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다.


 



 [여러 가지 증거들은] 따로따로 살펴보면 확고한 내용이며, 함께 모아보면 그 주장은 중복적이고 충족한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부활은 모든 비판의 망치가 두들겨도 하나의 파편도 내지 못했던 반석인 것이다.


 



 역사상 그 어느 누구도 부활을 지지해 주는 이런 압도적인 증거를 논박하는 일에 성공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따라서 믿기를 거부하는 자들을 주로 기적이란 발생하지 않는 것이라고 주장함으로 자기의 불신앙을 변호한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을 믿는다. 우리가 사도신경을 같은 목소리로 고백한다 할지라도 우리 각 사람은 그리스도 부활에 대한 개인의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다.


 



승천하신 그리스도


 



 부활하신 후에 그리스도는 하늘로 올라가셨다. 사도신경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일을 언급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사실을 옹호하는 것이 사도신경의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도신경은 이를 생략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사실만을 간략하게 말하고 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던 때인 유월절(Passover)과 승천하신 때인 오순절(Pentecost) 사이에는 50일의 간격이 있다(현대 교회에서는 유월절과 오순절 대신에 부활절<Easter>과 성령 강림절<Whitsun. Whitsunday>이라고 부른다).


 



 누가는 "해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40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행 1:3행 1:3)라고 말했다. 그래서 성경학자들은 주님께서는 부활하신지 40일 후, 즉 오순절 며칠 전에 승천하셨다고 결론내린다.


 



 주님께서 왜 부활 후 40일간 이 땅에 머무셨는가? 적어도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40이라는 단어가 성경에서 자주 사용되는데 그것은 주로 "시련"이나 "시험"과 관련된 경우가 많다. 한 예로는 출 애굽한 이스라엘의 광야 유랑 생활 40년이다. 둘째, 그리스도께서 공 생애를 시작하실 때 사단에게 시험받으신 40일과 그 기간이 일치한다.


 



 그리스도께서 수 많은 사람 중 몇몇 사람에게 나타나셨다는 기록 외에는 그 40일간 무엇을 하셨는지 우리가 알지 못한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부활이 그의 존재 양식을 바꾸었다는 점이다.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주님은 십자가 지실 것을 예상하시면서 굶주림과 목마름과 피곤함, 그리고 슬픔 등과 같은 한계를 스스로에게 가하셨다. 그러나 부활 후에는 모든 상황이 변하였다. 하몬드(Canon T.C.Hammond)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우리 주님은 육체와 영으로 새로운 실존에 들어가셨다. 그러나 주님은 이전 비하의 상황하에 있었던 자신을 완전히 탈피하지 아니하시고, 오류없이 실재적인 부활을 증거하기 위하여 인간들에게 찾아오셔서 필연적 관계를 재개하셨다. 이와 같은 부활이후 그리스도의 "현현"하심은 "많은 증거"을 요구하는 우리의 요구를 응하시는 사락과 고귀한 겸손을 보여 주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제자들과 함께 땅 위에서의 마지막 날을 보내셨다. 그들은 함께 예루살렘을 떠나 기드론 시내를 건너 겟세마네 동산을 지나서 감람산이라는 산등성이에 올라가서 베다니 동쪽에 머물러 있었다. 잠시 담소하신 후에 주님은 손을 들어 그들을 축복하시고 하늘로 들리우셨다. 누가는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행 1:9)고 기록했다. 그들이 자세히 구름을 쳐다볼 때, 횐 옷을 입은 두 사람이 나타나서 하늘로 올리우심을 본 그대로 다시 오신다고 그들에게 약속했다(행 1:10, 11).


 



 이처럼 그리스도의 승천 기록은 놀랄만큼 단순한 것이다. 어떤 수식도 덧붙지 않았고, 의심하는 사람을 확신시키기 위한 어떤 시도도 없다. 제자들은 그들이 본 바만을 말하고 있다. 누구도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을 직접 보지 못했다. 제자들은 오직 부활의 결과, 즉 부활 하여 살아계신 주님만을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승천에 있어 서는 그 결과가 아니라 승천 그 자체를 보았다. 그들은 주님께서 승천하신 후 하늘에서 무엇을 하실 것인가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에 대해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셨고, 또한 성령을 통하여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기자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첫째, 그리스도는 "승천하셨다"(히 4:14). 둘째, 그는 "참 하늘로 들어가셨다" (히 9:24). 첫째 구절은 아마 그리스도께서 공간의 한계를 초월하여 영원한 실재 속으로 들어가신 것을 의미하는 것 같다. 그러므로 천국이 "저 밖에"나 "저 위에" 있을 수 없다고 궤변하는 자들의 반대는 헛된 것이다. 성경은 불가피하게 천국을 "위의 것"으로 말하고 있는데, 그 까닭은 다른 방도로는 땅에 매어있는 사람들에게 뜻이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 구절, 즉 그리스도께서 "참 하늘로 들어가셨다"는 구절은 하나님의 처소인 하늘이 존재함을 보증해 준다. 실로 성경은 하나님의 무소부재하심을 말씀하고 있다. 솔로몬은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늘"(왕상 8:27)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하나님이 "계신 곳"(왕상 8:43)으로서 하늘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하늘은 관념이나 꿈, 혹은 환상이 아니다. 그것은 장소이며, 지금도 예수께서 계시는 곳이다. 그는 승천하셨으며 하늘로 들어가셨다. 그는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의 면전에 들어가셨다(히 9:14). 바울이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예수 그리스도시니 그는 하나임 우편에 계신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 8:34)고 말한 것은 조금도 무리가 아니다.


 



 사도신경은 신앙의 다른 사실, 즉 주님의 죽음이나 부활에 대해서 처럼 승천에 대해서도 똑같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이로 보아 사도 신경을 만든 사람들은 승천의 중요성을 믿었음이 분명하다.


 



 성경 역시 그리스도 승천의 중요성을 명백히 말하고 있다. 사실 신약 성경의 중요한 한 부분인 히브리서는 승천하신 그리스도의 관점에서 기록되었다. 히브리서는 부활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그리피스 토마스(W.Griffith Thomas)는 그것을 이렇게 논평했다. "우리 주님께서 제사장과 왕으로서의 사역을 시작하신 것은 승천하심에서였다. 그리고 이 때문에 주님의 제사장 직임에 관하여 집중적으로 다루는 히브리서의 교리적 입장이 승천 사실에 중심을 두고 있는 것이다."


 



 요한복음서는 승천에 대하여 적어도 12번이나 언급하고 있다. 요한은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확실한 말씀을 기록했다.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요 16:7 참고 ; 요 1:51;요 3:13;요 13:3;요 17:11;요 20:17). 그러나 그 말씀을 들을 당시 제자들은 주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들은 나중에 그 말씀을 이해 했으며 그래서 승천이 진정 자기들의 유익을 위한 것이었다고 동의하며 글을 쓴 것이다.


 



 승천은 몇 가지의 뚜렷한 유익을 가져다 준다. 첫째, 그것은 믿는 자로 하여금 진정한 기쁨의 원인이 되었다. 주님께서는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나를 사랑하였더면 나의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요 14:28)고 하셨다. 그래서 그들은 기뻐하였다. 누가는 주님께서 그들을 떠나시던 때(승천시)에 "저희가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갔다"(눅 24:52)고 했다.


 



 승천은 또한 강한 신앙심을 고취시켜 제자들로 하여금 역경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하였다. 바울의 말에 의하면, 당시에 널리 부르던 찬송가는 아마도 "참으면 또한 함께 왕노릇할 것이요"(딤후 2:12) 등과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그리스도의 왕으로서의 통치와 하나님으로서의 신분의 회복인 승천과의 관계는 매우 분명한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독자들에게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기"를 촉구하는데, 그 까닭은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자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히 4:14) 때문이라고 했다.


 



 승천을 떼어놓고 그리스도의 부활 그 자체만으로는 별 의미가 없다. 베드로는 자신의 첫 설교를 부활로 시작하여 승천으로 마무리짓고 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하나님이 오른 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주셨느니라"(행 2:32, 33). 그는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고 하늘로 올리우셨다. 이 두 사건은 실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이다.


 



 주님께서 부활 승천하심으로 승천하지 않았을 경우보다 우리를 위해 훨씬 더 활발하게 일하신다. 이렇게 생각해 보자. 만약 주님께서 승천하지 않으셨다면 그는 어디에 계실 것인가? 또한 무엇을하고 계실 것인가?


 



 만약 하늘로 올라가지 않으셨다면 그의 처소는 어느 한 지방에 제한받게 되었을 것이다. 때로는 예루살렘, 때로는 다른 곳에 계시지만 동시에 모든 곳에 계시지는 못했을 것이다. 주님은 자신이 부활하셔서 하늘로 올라가심에 대하여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고 하셨다. 승천하신 그리스도는 두 세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셨다(마 18:20마 18:20).


 



 만일 승천하지 않았다면 성령과 성령의 은사를 교회에 주시지도 않았을 것이다. 성령과 성명의 은사를 사람들에게 주신 이는 승천하신 주님이셨다(행 2:32, 33;엡 4:5-12),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지 않았다고 가정해 보자. 그가 우리의 큰 대 제사장이 될 수 있었을까? 땅에서 그는 하나님의 대언자이기는 했지만 제사장은 아니었다. 히브리서는 그것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예수께서 만일 땅에 계셨더면 제사장이 되지 아니하였을 것이니"(히 8:4). 그가 참 하늘에 들어가심으로 비로소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제사장이 되셨던 것이다(히 9:24).


 



 우리는 제사장을 필요로 한다. 히브리서는 그것을 분명하게 말한다. 우리 모두를 불행하게 만드는 죄와 연약함을 지니고 있는 땅 위의 제사장이 아니라, 우리 죄를 위하여 자신을 제물로 바치신 하늘의 제사장이 우리를 위해 중보하고 계신다. 그가 하늘로 올라가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큰 대제사장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그리스도


 



 그리스도의 승천으로 시작되는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라는 구절은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심"이라는 말로 끝맺는다. 이 구절은 그리스도께서 지금 하늘에서 수행하고 계시는 역할에 대한 신앙을 표현하고 있다. 신학자들은 가끔 이 말을 그리스도의 "개정"(session)이라 일컫는다. 재판관이 재판관석에 앉으므로 재판이 진행됨을 뜻하는 개정이라는 단어를 우리는 세속적 용도와 밀접히 연관시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는 이를 영적 진리를 나타내는 표현으로 사용하였다. "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라. 그가 하늘에서 위엄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히 8:1). 이처럼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의 신분으로 앉아 있는 일이 바로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는 개정이다.


 



 흔히 우리는 하늘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는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해 말한다. 우리는 승천하신 주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하여 행하셨고, 또 지금도 여전히 하고 계시는 일들을 쉽게 헤아려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그리스도는 유월절에 성령을 보내셨고(행 2:4), 교회에 구원 받는 사람을 더하게 하셨으며(행 2:47), 앉은뱅이를 고치셨으며(행 3:16), 다소 사람 바울에게 나타나셨고(행 9:5), 시험받는 자들을 도우시며(히 2:18), 우리의 대제사장으로 일하시며,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며(히 7:26), 우리의 대언자(advocate)이시며 (요일 2:1), 자기 원수들로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고 계신다(히 10:13).


 



 이 기록들이 완전치는 못하나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일에 대해 상상해 볼 수 있게 해준다. 개정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은 이렇게 요약될 두 있을 것이다. 첫째, 그리스도께서 영광 중에 들어가심으로 주로 인정되셨다. 둘째, 사람들에게는 성령을, 교회에는 은사를 주셨고 또 주고 계신다. 마지막으로 그는 제사장의 기능을 수행하셨다.


 



 이러한 일들이 끊임없는 그의 사역으로서 지금 행하시며, 교회가 없어질 때까지도 계속하실 사역이다(엡 4:8; 살전 4:17; 히 2:9; 벧전 1:21;벧전 3:22).


 



 이상이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라는 구절이 암시하는 내용인가? 그렇다. 그러나 오히려 우리는 여기서 그 이상의 것을 생각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다는 온유적 표현은 우리에게 "위엣 것을 찾으라"(골 3:1)고 요구하는 근거가 된다. 하나님 우편에 앉으심은 죄씻음이 이루어졌음과 그 사역이 완성되었음(히 7:3;히 8:1)을 우리에게 보증해 준다. 그래서 거룩하게 된 믿는 자들이 하나님의 면전에 초대되는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히 10:22) 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그리스도의 중보로 인해 팔을 넓게 벌리고 우리를 기다리신다.


 



다시 오실 그리스도


 



 "다시 오시리라"라는 말은 중요한 성경 교리를 함축하고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재림 신앙을 나타내기에 부족한 신조는 불완전한 것이며 기독교적인 것이 아니다.


 



 신약 성경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하여 약 300번 가량 언급하고 있는데, 이것은 30절마다 한번씩 언급하는 비율이다. 성경 학자들은 다른 교리와 비교해서, 그리스도의 재림이라는 주제가 중요함을 설명하기 위하여, 여러 주제들에 대한 성경의 언급을 수치로 나타낸 바 있다.


 



 세례에 대해서는 7개 서신서에서 19회 언급되며, 14개 서신서에서는 언급되지 않는다. 성만찬은 3, 4회 정도만 분명하게 언급될 뿐이며, 20개의 서신서는 전혀 말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주의 재림은 신약의 거의 모든 책에서 발견되며 그 수효에 있어서도 300여회에 이르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을 통하여 우리가 그리스도 재림 진리의 중요성을 지나치게 과장해서는 안된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성경에 너무 분명하게 나타나기 때문에 그것은 성경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신자들에게는 신앙의 일개 조항일 뿐이다. 성경은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그리스도의 재림을 믿어야 한다고 단조롭게 말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매우 분명하게 말씀하신 하나의 사건을 믿지 않는 것은 그와 그의 말씀에 대한 참 신앙을-이것이 없이는 누구도 구원받을 수 없는-막는 일이다.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요 12:45).


 



 그리스도인은 우리 주님께서 자신의 재림에 대해 분명하게 예언하신 사실을 받아들인다. 이 때문에 이 복된 소망에 대한 신앙이 사도신경과 그 후의 여러 신조에 분명히 기록된 것이다.


 



 재림의 시기 등과 같이, 분명하게 언급되지 않은 재림에 관한 세부 사항에 관해서는 불일치한 견해들이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반드시 다시 오실 것이라는 재림 신앙에 관한 사도신경의 고백에는 논쟁의 여지가 없다. 사도신경은 세부 사항을 밝혀내려 하지 않고, 단순하게 "다시 오시리라"고 말할 뿐이다.


 



 우리 주님의 재림은 문자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며 그러므로 그것은 성령에서 그리스도인 속에 거하심과 같은 영적 "오심"과 혼동해서는 안된다. 예수님 자신이 "내가 다시 오리라"(요 14:3)고 하셨으며, 승천하실 때 두 천사가 나타나 제자들에게 떠나가심을 본 그대로 다시 오시리라고 했다(행 1:11). 1세기의 그리스도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 문자적 재림을 바라며 기다렸었다(살전 1:8-10을 보라).


 



 이것이 성도의 소망이다. 우리가 죽게 되지만 죽음을 기다리지 않으며, 영적 경험을 하게 되지만 그것을 기다리지는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하늘에서 하나님의 아들의 다시 오심을 기다린다. 바울의 설명대로,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 (딛 2:13)을 기다리고 있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재림 사실에 대해서는 매우 분명하게 말하나, 그 시기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말하지 않는다. 따라서 성경 학자들간의 해석은 일치하지 않는다. 어떤 학자는 자신의 협소한 체계에 흠뻑 빠져 있거나, 또는 다른 견해를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자기 입장을 너무 변호함으로 그리스도의 재림이 가져다주는 축복을 망각할 위험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진리는 그리스도인들을 격려하며 고양시키려는 것이다. 그런데 본질에서 벗어난 사소한 문제에 대해 논쟁에 빠져들어 진리의 본질이 주는 기쁨을 잃어버린다면 그 어찌 슬픈 일이 아닌가?


 



 그리스도의 재림은 적어도 두 가지의 축복을 의도하고 있다. 첫째, 복된 소망은 참된 위로를 가져다 준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1-3).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두번째 축복은 거룩한 삶이다. 그리스도 재림에 대한 희망은 성도로 하여금 거룩한 생활을 하도록 자극해 준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며, 또한 우리가 그를 보게 되고, 그와 같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하면서 요한은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 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 3:3)고 말한다. 그 의미는 분명하다. 예수께서 다시 오심을 진정으로 믿는다면 우리는 악한 일에 참여하기를 거부하는 그리스도를 닮아 거룩함을 지닌 남자와 여자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4세기에 그 기원을 두는 사도신경을 비롯하여 기독교 역사상 중요한 모든 신조들은 그리스도의 최후 재림에 대한 신앙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면 그리스도가 다시 오시면 무슨 일을 하실 것인가?


 



 사도신경은 그냥 단순하게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다시 오신다"라고만 고백하고 있다. 사도신경의 표현, 그 자체만 보면 심판이 그리스도 재림의 유일한 목적인 듯이 보여진다. 그러나 사도신경은 지극히 간결하면서도 표면에 나타난 것보다 훨씬 더 함축적인 내용을 지니고 있다. 심판이 그리스도 재림의 유일한 목적은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다른 목적들을 생각해 보자.


 첫째, 그는 자기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을 자기에게로 맞아들이시기 위해 재림하신다. 그러기 위해서 그는 영혼이 이미 천국에 있는 자들의 몸을 소생시키실 것이며, 살아있는 신자들의 몸은 변화시키실 것이다. 죄가 인간의 육체와 본성에 미치는 영향력을 그리스도께서 파괴시킨다는 의미에서 재림은 "심판"일 것이다(고전 15:51-58).


 



 둘째, 하나님께서 유대인과 맺으신 모든 약속을 그리스도께서는 성취하실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스라엘에 대한 약속은 그리스도인이 받은 은혜로 인하여 "영적으로" 성취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롬 11:1과 같은 중요한 성경 구절은 그 옛 약속들이 그리스도의 재림시에 문자적으로 성취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사 60:1 참조). 그 약속들은 심판의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메시야를 거절한 사실로 인하여 그들을 심판하실 것이다(마 19:28).


 



 재림의 세번째 목적은 세상 질서 그 자체를 종결짓기 위해서이다. 베드로는 그 때나 되면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고 했다. "의가 거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들기 위하여 세상은 파멸될 것이다(벧후 3:10-13 참고 ;히 1:10-12). 하나님은 만물을 다시 만드시지 않으시나 전혀 새로운 것으로 만드실 것이다. 새 창조의 분자구조는 지금의 일반적인 체계와는 분명히 다를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는 사단과 그의 통치권을 파괴하기 위하여 다시 오실 것이다. 죽은 영들에 대한 심판이 있기 전에 이미 사단은 불못에 던져져서 땅 위의 사람들을 다시 괴롭히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 원수인 죽음까지도 없어지게 될 것이다. 환상 중에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을 보았던 요한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는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다 지나갔음이러라"(계 21:4 참고 :고전 15:26,고전 15:51-57:계 20:10;계 21:3).


 



 그리스도께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려 다시 오신다는 사도신경의 표현은 심판에 대한 몇 가지 진리를 요약해 놓고 있다.


 첫째, 그리스도는 구주 이상의 어떤 분, 즉 심판자이시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기 때문이다(요 5:27). 후에 바울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 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신다"고 했다(롬 2:16 참고;행 17:31).


 



 그 심판에 대해 생각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만, 심판의 공정함에 대해서는 모든 사람이 다 알고 있다. 양심 그 자체가 심판을 요구한다. 바울은 십계명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조차도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롬 2:15)고 했다. 바울이 로마 관리(벨릭스)에게 장차 있을 심판에 대해서 말했을 때 그 사람은 심판을 두려워 했다. 그의 양심이 심판의 합당함을 증명했기 때문이다 (행 24:25).


 



 사도신경이 의미하는 심판의 두번째 진리는 성경이 심판의 등급을 나누고 있다는 사실이다. 성경은 모든 사람을 똑같이 취급하여 심판하지는 않음을 보여 준다. 심판의 대상과 관련하여 사용된 "산 자와 죽은 자"라는 구절은 성경적 가르침을 따라 두 가지 방법으로 해석될 수 있다. 하나의 견해는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시점을 기준으로 살아있는 자들과 죽은 자들이라는 해석이다. 그러나 같은 구절이 영적으로 산 자들과 또한 육적으로는 살았으나 영적으로 죽은 자들을 구분하는 말로 사용되기도 한다.


 



 두 가지 해석 모두가 옳은 것이며 성경적인 것이다. 전자의 견해는 살아있는 자와 죽어 어딘가에 묻혀 있는 자가 있음을 보아 분명한 것이다. 후자의 견해는 회개치 않은 자를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라고 묘사한 엡 2:1과 같은 구절에 의해 그 정당성이 인정된다. 회개할 때에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시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신자와 불신자를 모두 심판하실 것이다. 그는 신자의 삶을 평가하고 거기에 따라 상급을 주실 것이다. 신자에게 있어서는 영생이 문제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순간에 이미 획득하여 영원히 고정되는 것이다.


 



 그러나 불신자에 대한 심판은 실로 엄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을 심판하러 다시 오신다고 하였다. 바울은 그것을 믿었다. 바울은 아테네의 철학자들에게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고 말했다(행 17:31), 천하를 심판하실 이가 누구인가? 물론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리스도이시다.


 



 하나님께서 천하를 "공의로" 심판하신다고 바울이 말했을 때, 그는 하나님께서 심판을 주재하시는 원리(principles)가 하나님의 공의임을 강조한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에 대해 말하고 있으며. 그는 또한 하나님을 "공의로운" 재판관이라고 했다(살후 1:5, 6; 딤후 4:1; 계 16:5-7). 하나님의 심판이 의롭기 때문에 하늘에서는 천사들과 구원받은 백성들이 다 함께 하나님을 찬양한다(계 19:2).


 



 아브라함은 소돔성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정당한 것임을 알았다. 따라서 아브라함은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불가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균등히 하심도 불가하니이다"라고 했다. 그리고나서 그는 의심할여지 없는 진리라고 생각되는 바를 질문했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공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창 18:25).


 



 하나님은 심판을 행하심에 있어 심판받는 자가 지녔던 여러 가지 특권, 기회 및 책임의 정도를 참작하신다. 심판자 스스로가 말씀하시기를 심판날에 타락한 두로와 시온의 도성이 하나님의 수 많은 이적을 보았던 가버나움보다 견디기 쉬우리라고 하셨다(마 11:22, 23).


 



 바울은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형벌을 받으리로다"(살후 1:8, 9)라고 했다.


 



 이와 같은 성경 구절들은 가끔 복음을 듣지 못한 자들의 운명이 어떠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야기시킨다. 그런데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들은 주로 복음을 듣고도 신앙을 갖지 못하였으므로 자기 자신에 대해 염려해야 할 불신자들이다. 심판날이 될 때까지는 우리가 하나님께서 이교도들을 어떻게 다루실지 정확히 알지는 못한다. 그러나 복음을 전하고도 거기에 순종하기를 거절하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처리하시는가에 대해서는 우리가 명확히 알고 있다.


 



 복음을 듣지 못한 자들의 궁극적 운명에 대해서 우리가 알 필요가 있는 것은 그들의 운명이 그들을 지으신 창조주의 장중에 있다는 것이며, 그 분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으리만큼 무한히 공정하신 분이라는 사실이다. 그는 자기 아들을 보내셔서 그들 모두를 위해 죽게 하셨으니 이것은 누구에게나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하신다는 충분한 증거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공정하게 심판하실 것임을 믿을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거룩하시며 사랑이 많으신 분이기 때문이다.


 



 한편, 그리스도께서 행하실 심판의 광경은 엄숙하다. 바울은 자신의 마지막 편지인 디모데후서에서 심판의 무서움을 환기시켰다.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딤후 4:1).


 



 이 구절이 사도신경 기사의 근거가 된다. 우리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는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고 고백할 때 우리는 앞으로 직면하여 인간의 영원한 운명을 판가름하게 될 그리스도의 마지막 심판을 연상해 보게 된다.


 



제5장 


성령 및 성령이 교회와 개인에게 적용시킨 구원에 대한 신앙 고백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니다"


 



 인간 구원의 계획자이신 성부 하나님과 구원의 성취자이신 성자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고백에 이어 그리스도의 구속의 효과를 교회와 각 개인에게 적용시키는 성령과 성령의 사역으로 이루어지는 구원의 역사에 대한 신앙 고백이 이어진다. 이처럼 구원은 삼위 하나님의 공동 사역으로 이루어지되 마지막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 객관적이고 역사적인 구원의 사역이 비로소 각 개인에게 주관적이고 체험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여기서는 구원의 적용자이신 성령과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생겨난 구원받은 자의 모임인 거룩한 공회와 구성원으로서 성도의 상호 교통함과 성도의 자격으로서 죄용서함과 구원받은 자가 장차 경험하게 될 육체의 부활 및 영생에 대한 신앙 고백을 각각 다룬다.


 



구원의 적용자이신 성령


 



 사도신경의 세번째 부분은 삼위 하나님 중 제3위이신 성령에 대한 우리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표현하고 있다. 영어로 된 사도신경에는 "성령"이 "성신"(HoIy Ghost)이라는 말로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서 신(ghost)이라는 말은 앵글로 색슨어로서 지금은 고어로 취급되고 있다. 따라서 성령(Holy Spirit)이 보다 바른 말이다. 사도신경의 셋째 부분을 언듯 보면, 성령과 그 외의 5가지 교리에 대한 신앙을 포괄하여 표현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의 이면에는 심오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성령에 대한 신앙 고백 직후에 나타나는 다섯 가지 축복의 기사는 그 축복이 성령에 의하여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령에 대한 신앙을 고백함으로써, 우리는 사도신경을 통하여 삼위 하나님, 즉 전능하신 성부와 그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 및 성령에 대한 우리의 신앙을 분명하게 확인하게 된다. 우리는 사도신경이 전적으로 성경적인 것임을 안다. 실은 여러 성경 구절에서 삼위 하나님에 대한 표현이 나타나지만 고린도후서 13장 13절의 위대한 축도보다 더 분명하게 드러나는 곳은 없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찌어다".


 



 우리가 성령을 믿는다고 할 때,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성령이 하나님이시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믿음을 의미한다. 사도신경 만큼이나 오래된 니케아 신조(The Nicene Creed)는 성령에 대해서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성령은 주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며,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시고,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예배와 영광을 받으시며, 그에게 관하여는 이미 선지자들이 예언하였느니다."


 



 성령은 성경의 둘째 절에 나올만큼 일찍 언급되었다. 창조 당시에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셨다"(창 1:2).


 



 성령에 대한 신약 성경의 가르침은 천사가 마리아에게 예시함으로 시작되었다. 마리아가 자신의 잉태 사실에 대하여 의심을 품게 되자, 천사는 성령이 그에게 임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그를 덮으실 것이라고 말했다(눅 1:34, 35). 마리아의 임신은 성령의 사역이었던 것이다.


 



 그 때,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는 노인이 살고 있었다. 성경을 보면, 성령께서 그에게 메시야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신 후에 성령이 시므온을 감동시켜 성전에 들어가게 했으며, 그 때에 요셉과 마리아는 거룩한 아기를 데리고 성전에 들어오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만나게 되었고 시므온에 대한 성령의 약속은 이루어졌으며, 시므온은 죽기 전에 그리스도를 보게 되었다(눅 2:25-27).


 



 그리스도의 지상 생애 중에는 성령께서 이면(background)에 머물러 계셨다. 이시대는 삼위 하나님 중 제2위께서 돋보이셨다. 그러나 주님께서 제자들 곁을 떠날 때가 다가오자, 주님은 제자들에게 성령 하나님의 사역에 순응할 준비를 시키셨다. 다락방의 담화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께로서부터 성령이 오실 것과 그가 제자들에게 모든것을 가르치실 것과 죄에 대하여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요 16:7-15).


 



 주님께서 제자들 곁을 떠날 준비를 하시면서, 세례 의칙(baptismal formula)을 통하여 성령을 성부와 성자에게 연관시키셨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마 28:19).


 



 신약 성경에서 성령은 하나님과 주로 불리워지신다(고후 3:18).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성령이 하나님이심을 큰 실수와 엄청난 희생을 통하여 배웠다. 베드로는 소유를 산 돈 일부를 감추고서도 전부를 바쳤다고 주장하는 그들에게 성령과 하나님께 왜 거짓말을 하느냐고 꾸짖었다(행 5:3, 4).


 



 성령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알게 하신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실때 우리 중 누구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대로, 성령께서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알게 하심으로 우리는 그를 알게 되었다(요 16:14, 15). 그 뿐만 아니라 성령은 우리 심령에 구속의 모든 은혜를 적용해 주신다. 만약 이것이 성령의 사역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아무도 신자가 될 수 없었으며 중생도, 죄용서도, 교회의 설립도, 성도의 교제도 없었을 것이다(요 3:6-8:엡 2:10, 엡 2:22;엡 4:30).


 



 성령에 대한 신앙 고백 다음에 기록된 다섯 가지 축복들은 모두 성령에 의해 우리에게 수여되는 것이다. 먼저 "거룩한 공회"의 일원이 되는 것을 생각해 보자. 성령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시킴으로 우리를 그의 몸인 교회의 한 지체로 만드시는 것이다(고전 12:13, 엡 1:22, 23), 그리하여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어지는 축복은 "성령의 교통하심"이다(고후 13:13 ;빌 2:1). 사도 바울은 육체의 부활이 성령의 능력에 의해 이루어지게 된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 8:11).


 



 사도신경을 만든 사람들이 다섯 가지 중요한 축복에 앞서 성령에 대한 신앙 고백을 위치시킨 이유가 이러한 설명으로 분명해진다. 기독교 고유의 축복들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기 이전에 우리는 먼저 이러한 축복들을 현실화시키는 거룩하신 이에 대한 신앙을 고백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깨달아 알게 하시는 성령을 믿으면서, 사도신경의 유서 깊은 구절인 "성령을 믿사오며"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구원받은 자의 모임인 거룩한 공회


 



 개신교 신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거룩한 공회"라고 말하는 것을 언짢게 여기는데, 그것은 공회(catholic)라는 말이 로마 가톨릭(Roman Catholic)과 동의어로 해석되지 않는가 하는 우려에서이다.


 



 그러나 사도신경에 사용되어진 공회(catholic)라는 단어는 로마 가톨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 영어 단어는 "우주적"(universal)임을 뜻하는 헬라어 형용사와 거의 동의어이다. 이 단어는 본래 세계 도처에 널리 퍼진 기독교의 지리적 범위를 나타내는 말이었다. 언젠가 어떤 권위 있는 학자는 "문장 속에서 '우주적 신앙' (catholic faith)이라는 말이 나오면, 그것은 전세계 모든 그리스도인이 믿는 교리의 순수성과 완전성을 뜻하는 것"이라고 했다.


 



 교회는 모든 시대, 모든 장소에 있는 모든 진정한 그리스도인을 다 포함하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의 보편성(catholicity)과 우주성(universlity)은 지리적인 것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이후로 세워지게 된 교회는 그리스도께 연합된 모든 사람을 다 포함하고 있다. 어느 지교회나 특정 종파가 아무리 영향력이 있다 하더라도 교회가 그것만을 의미하지 않는 것은 분명하다. 기독교 내에 있는 어떤 종파도 그 시대의 지상에 있는 그리스도인을 다 포함하고 있지 못하다면, 하물며 모든 시대의 그리스도인이랴.


 



 교회의 우주적인 면은 에베소서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물론 우리 주님께서도 이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자신의 교회를 세우시리 라고 말씀하셨을 때였다(마 16:18). 바울은 교회의 정의를 내리고 이에 대해 묘사했다. 예를 들어 보면, "하나님께서 만물을 그(그리스도의)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중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이의 충만이니라"(엡 1:22, 23). 바울은 교회를 보통 건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거룩한 성전"(엡 2:21, 22)과 같다고 했다. 가끔 우리는 이렇게 노래한다.


 



만민 가운데서 선택받았으나


땅 위에 교회는 하나이며,


구원의 헌장도 하나이고,


주도 하나. 신앙도 하나, 출생도 하나이며,


교회를 축복하는 거룩한 이름도 하나이며,


하나의 성찬에 참여하며,


부여 받은 모든 은혜로 나아가는


소망도 하나이로다.


-사무엘 스톤(Samuel J.Stone)의 "교회의 한 기초"-


 



 교회는 완전한 것이 아니라 세워져 가고 있는 건물이다. 죄인 하나가 회개하고 돌아올 때마다 한 개의 산돌이 그 벽에 더 쌓이는 것이다. 언젠가 이 교회는 완전해지게 될 것이며, 그 때에는 "승리를 거둔 위대한 교회여, 영원토록 안식하리라"고 찬양하게 될 것이다.


 



 4세기에 만들어진 니케아 신조(The Nicene Creed)는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교회를 믿나이다"라고 진술하고 있다. 이와 같이 니케아 신조는 사도신경에 나오는 거룩한 공회(보편적인 교회) 라는 표현에 하나와 사도적이라는 단어를 덧붙임으로써, 모든 그리스도인이 속해 있는 하나의 교회를 확인해 주는 네 가지 수식어로서 참된 교회의 네 가지 표시를 제시하고 있다.


 



 하나라는 단어는 진정한 교회의 연합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러나 바울을 비롯한 여러 사도들이 살던 시대에는 조직적인 연합이 없었다. 신약 성경이 말하는 유일한 연합이란 영적 연합이다. 바울의 말과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된"(롬 12:5) 것이다. 따라서 어떤 교단에 속해 있든지간에 신자들은 한 교회인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어느 한 조직이나 한 공동체가 바로 그 교회라고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교회는 거룩한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거룩(holy)이라는 단어는 라틴어 신성한(sanctified)이라는 단어와 같은 의미의 앵글로 색슨어이다. 이 단어의 근본 개념은 "구별"(separation)이다. 성경에서는 산이나 기타 장소가 거룩한 곳으로 일컬어지기도 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구별된 것"을 의미한다. 주님께서도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라는 기도 가운데서 이 말을 사용 하셨다. 이것은 주님께서 앞으로 하시게 될 그 일을 통해 하나님께 자신을 바치고 있는 것을 뜻한다(요 17:19), 따라서 "거룩한 공회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께 속한 교회를 믿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또한 정결하게 된다는 의미에서의 거룩이다. 따라서 완전히 정결치 못한 이 지상의 조직 교회는 언제나-과거에도 지금도-"거룩" 이란 칭호를 얻지 못한다. 그러므로 거룩한 교회란 칭호는 이미 하늘에 있는 성도를 포함하는 전체로서의 교회에 해당되는 말이다. 하늘에 계신 신랑 그리스도는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엡 5:25 -27)고 하신다. 따라서 완전한 의미에서는 이 지상의 어떤 교단도 이 칭호에 적합하지는 못하다.


 



 마지막으로 참된 교회는 사도적이어야 한다. 만약 사도에까지 교회의 계보를 추적하는 일이 가능하다면, 그 교회는 사도성을 분명히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 일은 불가능하다. 가능하다고 할지라도 부차적인 시험(test)이 요구되는데, 가르침과의 일치 여부이다. 이러한 가르침의 일치 여부를 추적하는 것만이 사도적 교회인지의 여부를 가릴 수 있는 유일한 시험이다. "사도적"이라는 말은 분명히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엡 2:20) 교회라는 바울의 묘사와 관련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 유일한 사도적 교회는 한 곳에 함께 모일 수 없는 교회이다. 이 교회의 회원은 여러 나라에 살고 있으며, 또한 수 많은 사람들은 이미 본향인 천국으로 들어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교파들은 자기들이 신약 성경의 전통을 바르게 계승한 교회임을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교파의 회원들은 자기 들의 행동이 1세기의 사도적 교회의 신자들과 제일 비슷하다고 믿는다. 그러나 사실상, 어떤 단체이든지 자기 자신에 대해 올바로 주장할 수 있는 최대의 한계는 자기들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한 부분이라는 주장 정도일 뿐이다.


 



 그리하여 그리피스 토마스 박사(Dr. W. H. Griffith Thomas)는 이 점을 분명히 밝혔다. "만약 그리스도의 몸이 어느 것인가라는 질문이 주어 진다면 대답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몸이 어디 있는 가라는 질문이 주어진다면 그리스도와의 생명적 연합이 이루어진 모든 곳이라고 자신있게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


 



 어떤 하나의 가시적 교회나 교회의 단체만을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그릇된 생각이다. 사도신경에서는 부분적으로, 니케아 신조에서는 전체적으로 설명된 이 표현은 신약 성경에서는 참되고 유일한 교회로 나타난다.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서신에서 바울은 그 교회를 "한 몸"과 "온 몸"이라고 했다(엡 2:16엡 2:16;4:16엡 4:16). 그것은 하나님께서만 보실 수 있는 교회이다.


 



 그러나 부분은 전체의 어떤 특징을 드러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다. 모든 교회는 참된 거룩의 특성을 지녀야 하며 가능한 한 "사도적"인 교회가 되도록 성경을 알고 이해하기를 쉼없이 힘써야 한다. 어떤 모임이 사도성을 지녔는가 라는 궁극적인 시험은 성령의 열매를 맺는 여부에 달려 있다(갈 5:22, 23을 보라).


 교회는 하나이고 거룩하며 보편적이고 또한 사도적이다. 이 교회는 하나님께서 자기 독생자의 피로 사신 하나님의 교회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거룩한 공회를 믿사오며..."라고 암송할 때의 고백되어지는 바로 그 교회이다.


 



 그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교회"는 한 장소에 모여 질 수 없는 그리스도의 온 몸이다. 그 가운데 어떤 이들은 이미 하늘에 가 있고, 나머지 사람들은 세계에 흩어져 있다. 그러나 온 몸이신 그리스도의 지체인 그리스도인들을 알고 사랑하며 자기의 삶과 행위로 이것을 증거하는 사람들은 참 교회라고 불리워져도 무방할 것이다.


 



구원받은 성도의 교통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순서상 두 가지의 예비적 고찰을 해 볼 필요가 있다. 첫째 사도신경의 이 구절은 다른 구절보다 후 시대의 것이다. 둘째, 이 구절은 몇 가지로 상이하게 해석되어져 왔다. 예를 들면, 마틴 루터(Martin Luther)는 이것을 "거룩한 공교회"라고 정의했다. 그의 견해에 의하면 강조점은 "성도"라는 단어에 있으며 그러므로 "거룩한 공교회"는 성도의 회합으로 정의되었다. 여기서 성도란 하나님께 구원받을 것으로 택하심을 입어 그리스도 보혈로 구속함을 얻은 교회에 속한 사람을 가리킨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교통(communion)이라는 단어를 강조하게 되면, 루터의 해석은 흔들리게 된다. 교통에 해당하는 헬라어 코이노니아(koinonia)로 번역되는 라틴어 코뮤니오(communio)는 어떤 일반적인 은혜에 참여하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교회를 뜻하지 않고, 오히려 그 회원들이 누리는 것, 즉 축복에의 참여를 말하고 있다.


 



 본인의 판단에 의하면 이 구절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이 구절 바로 앞에 있는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교회를 믿나이다" 라는 구절은 모든 참 신자들 사이에 존재하는 연합을 묘사하고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다루고 있는 이 구절은 앞의 구절과 동일한 내용을 뜻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것은 성도의 연합에 대한 부가적 사상, 즉 연합된 성도는 서로 교통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아 아는 것을 뜻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하여 서로가 각기 연합되는 것을 알게 된다. 만약 내가 그리스도와 연합되고, 또 여러분이 그리스도와 연합된다면 결과적으로 우리는 서로에게 연합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된 우리가 하나이기 때문에 우리는 공동 관심사와 공동의 기쁨을 지니게 된다. 성도의 교통은 연합됨의 의미를 바로 인식하는 데서부터 발전한다.


 



 또한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더불어 서로간의 연합의 의미를 이해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교제를 누리게 된다. 그들의 공동의 기쁨과 공동적 관심과 서로에 대한 성숙한 의존심을 알게 된다. 성도들,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여러분과 나 및 모든 진실한 신자들은 타인에게서 분리된 개인으로 살지 않는다. 우리는 고독한 사람이 아니다. 우리는 "성도의 교통"을 믿고 또 그것을 누리고 있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 중에는 이 위대한 진리를 표현하는 것들이 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찬송가들이다.


 



일의 수고를 마친 모든 성도들,


세상에서 믿음으로 주를 고백한 그들을 보라.


오 예수여,


당신의 이름이 영원히 영광받으소서.


할렐루야. 


얼마나 복스러운 교제이며, 거룩한 사귐인가.


우리는 헛되이 싸우지만,


그들은 영광 중에 빛난다.


그러나 만물이 주 안에서 하나이니,


이는 만물이 주의 것임이로다.


할렐루야. 


-월리암 월샴 하우(William Walsham How)의 "모든 성도들"-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


그리고 그 분과 교제하며


그 분과 함께 걷는 성도,


또한 땅 위에 있거나


하늘에 있는 성도들과 교제하는 성도는


다른 친구가 필요없으리.


 


 


 


성도들의 연합은


지혜롭고 안전하며 기쁜 연합이며,


내 마음이 낙심되고 괴로울 때,


그 연합됨이 나를 따뜻하고


밝게 다시 일으키리.


-리차드 박스터 (Richard Baxter) -


 



이러한 찬송 속에 우리가 "성도의 교통하는 것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할 때 의미하는 내용이 부분적으로 나타난다. 어떤 신앙 고백문은 이 개념을 보다 정교하게 다듬었다. 예를 들면,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은 모든 성도들(즉, 진실한 모든 신자들)이란 "거룩한 교제와 연합을 유지할 의무가 있는" 사람들이라고 묘사한다. 즉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은 그리스도인이란 다른 사람의 영적, 육적 복리를 추구할 의무를 지니고 있는 사람이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성도의 교통은 자기가 속한 교단의 사람들과의 교제로만 제한되지는 않는다.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로 그 범위가 확장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만약 이런 원리가 실행되어진다면 잘못된 종파주의를 크게 줄일 수 있을 것이다. 현실적으로 어떤 교단에 가입하는 일을 피하기는 어려울 것이지만,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자기 교단에 속하지 아니한 그리스도인들을 배척하는 종파적인 생각을 일소해야 할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종파주의를 반대한자. 그러나 복잡한 교회 규칙이, 원리적으로는 그렇지 않을지라도 실제에 있어서는 우리를 종파주의자로 만들고 있다. 폐쇄적인 종파주의를 생각해 보자. 그것은 성만찬에 참여하는 범위를 자기 교단의 회원으로 제한하고 있다. 이론상으로 그것은 불순자가 거룩해야만 하는 성만찬에 참여하는 것을 막으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리스도인의 교통을 막는 결과가 된다.


 



 해리 아이론사이드(Harry Ironside) 박사는 종파심을 벗어나는 일을 해냈다. 그가 어떤 교단에 소속하라는 종용을 받았을 때에 그는 자신이 시편 기자의 교단에 속해 있다고 말했다. 이것은 무슨 의미인가? 아이론사이드 박사는 시편 119편 63절을 인용했다. "나는 주를 경외하는 모든 자와 주의 법도를 지키는 자의 동무라." 얼마나 멋있는 교단인가! 이 교단에 속한 사람들은 "나는 성도의 교통을 믿습니다"라고 진실하게 사도신경을 고백할 수 있을 것이다.


 



죄의 용서


 



 죄용서는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첫째 되는 축복들 중의 하나이다. 그래서 이것이 핵심적인 기독교 진리를 축약한 사도신경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사도신경을 고백함으로써 죄용서에 대한 신앙을 분명하게 표현한다. 용서란 "범죄자에게 벌내리기를 포기 하는 것, 또는 형벌을 면제하는 것"이다. 따라서 용서(forgiveness)와 사면(pardon)은 같은 말이다. 영어 단어 pardon은 "완전히 포기하다" (즉, 철저히)라는 뜻의 프랑스어 합성어에서 나온 말이다. 우리를 용서하심에 있어서 하나님은 범죄자인 우리에 대한 처벌을 포기하신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범죄자를 징계할 칼을 내려 놓으시는 것이다. 우리에게 벌을 부과시킬 자기의 권리를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완전히 포기하시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죄가 무엇인지 알고 있다. 죄에 대한 가장 간단하지만 원천적인 정의는 "하나님의 법을 위반하는 것"이다. 그리고 부차적인 의미에서 죄란 인간적인 법의 위배이다. 사도신경에 사용된 바와 같이 이 단어는 하나님의 법과 관계되는 것이나 또한 인간의 법을 거슬리는 모든 형태의 죄를 포함시켜 말하고 있다. 사도신경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대항하는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받는다는 신앙을 확인한다.


 



 이 사상은 성경에 분명하게 나타난 것이다. 주님께서 승천하신 후에, 사도들은 예수께서 이스라엘을 용서하시려 했다는 것을 큰 소리로 외쳤다. 예루살렘 공회에서 베드로는 "이스라엘로 회개케 하사 죄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그를(그리스도)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고 했다(행 5:31).


 



 기록상의 바울의 첫 설교는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행해졌다. 그러나 그것은 형식을 갖춘 설교가 아니었다. 그는 회당에서 자기 동포와 진지하게 말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 대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용서가 선언된다고 외쳤다(행 13:39). 또 다른 곳에서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으니"(엡 1:7)라고 했다. 그리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이루어지는 궁극적인 죄용서를 믿는다.


 



 만약 마틴 루터(Martin Luther)나 다른 개혁자들이 사도신경을 기록 했다면, "나는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을 믿습니다"라고 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대신 "나는 죄를 깨끗케 사시는 것을 믿습니다"라고 했을 것이다. 왜 그럴까? 루터나 다른 개혁자들은 죄용서를 믿지 않았다는 말인가?


 



 성경의 가르침을 아는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마찬가지로 개혁자들도 죄용서를 믿었다. 우리 마음은 용서를 바라고 있으며, 또한 성경은 용서를 말하고 있다. 성경 중 가장 귀한 구절 중의 하나는 미가서 7장 18절이다.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을 사유 하시며 그 기업의 남은 자의 허물을 넘기시며 인애를 기뻐하심으로 노를 항상 품지 아니하시나이다. "이처럼 우리 하나님은 죄악을 용서하시고 사면하신다.


 



 그러나 우리는 죄용서 이상의 것을 필요로 한다. 우리는 용납(acceptance)을 필요로 한다. 즉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도록 보증하는 것과 또한 장차 지을 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적하지 않으시겠다는 보증을 필요로 한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는 거룩케 한다는 칭의(Justification)라는 의미의 모든 것을 필요로 한다. 칭의는 우리가 하나님 면전에 서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 칭의란 죄의 결과를 바꾸어 놓으며, 에덴 동산에서 상실한 하나님과 인류와의 관계를 회복시켜 주는 선물이다.


 



 신학자들은 에덴 동산에서 인간의 대표 아담이 범한 죄의 세 가지 결과를 죄책, 정죄, 하나님과의 분리라고 말한다. 칭의란 이런 세 가지 사실을 처리하시는 하나님의 행위이다. 첫째, 그는 우리를 덮고 있는 정죄를 벗겨주심으로 우리를 용서하신다. 둘째, 그는 우리에게 의를 전가시킴으로 우리의 죄책을 없애주신다. 마지막으로 그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회복시킴으로 하나님과의 영적 분리를 종식시키신다.


 



 이러한 일들은 분명히 용서 이상의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 하실 뿐 아니라, 우리를 의인으로 취급하시며, 또한 그의 "가족"으로 이끌어 주신다. 이것이 바로 로마서 8장에 나오는 바울이 제기한 일련의 질문들에서 얻을 수 있는 칭의와 관련된 진리이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자를 송사하리요?"(롬 8:33). 그 대답은 아무도 송사할 수 없다. 죄책은 없어졌다. "누가 정죄하리요?"(롬 8:34). 그 대답은 정죄는 벗어졌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롬 8:35). 그 대답은 끊을 수 없다. 분리는 끝나고 회복이 이루어졌다.


 



 이 모든 일들은 칭의에 속하는 것이며, 그것은 용서보다 더 광범위한 것이다. 그리피스 토마스 박사(Dr. W.H. Griffith Thomas)는 칭의와 용서, 이 두 가지 은혜를 다음과 같이 비교했다.


 



그러므로 칭의는 용서 이상의 것이며, 이 둘은 바울에 의해 분명하게 구별되었다(행 13:38. 39). 죄인은 용서받는다. 그러나 그가 의롭다고 여겨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칭의는 우리의 불의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의롭게 여기시며 우리를 용납하시는 하나님의 행위이다. 그리스도인은 단순히 용서받은 죄인이 아니라 의인이다. 용서는 하나의 행위이며 행위의 연속이다. 그러나 칭의는 용서를 일으키는 행위이나. 용서는 삶 전반에서 반복되지만 칭의는 완료된 것이며, 반복되지 않는 것이다. 칭의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영적 자세와 관련되는 것이며, 우리의 삶 즉 과거, 현재, 미래 전반의 삶을 다루는 것이다. 용서는 소극적인 것이며 정죄를 없애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칭의는 적극적인 것이며 하나님 앞에 완전히 서게 되는 자격을 부여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칭의는 회복을 뜻한다.


 



 이러한 설명들로써 만약 종교 개혁자들이 사도신경을 변경시켰었다면 왜 그렇게 했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도신경을 그렇게 다시 쓸 필요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용서 이상의 것을 우리에게 주실 것이라는 것을 알고 "죄를 사하려 주시는 것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한다면 완전한 고백이 되기 때문이다.


 



육체의 부활


 



 사도신경을 암송할 때마다 우리는 육체 부활에 대한 신앙을 확고히 하게 된다. 인간이 죽게 될 때에 인간의 몸은 분해되기 시작하여 시간이 지나면 흙으로 변하며, 그리하여 매장된 몸의 성분과 흙은 사실상 구분할 수 없게 됨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신앙에 의하면 바로 죽어 흙으로 변하여 형체를 잃어버린 그 몸이 다시 부활할 것이다.


 



 바울은 우리 육체가 부활할 것이라고 명백히 가르친다.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바울은 먼저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하고 있다. 그 후에 그는 그리스도의 부활이 모든 믿는 자의 육체적 부활에 대한 보증이라고 한다. 바울의 사상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도의 부활은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으로 만약 어떤 사람이 우리 몸의 부활의 가능성을 부인한다면 그는 또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임에 틀림 없다(고전 15:13, 16).


 



 이러한 이유때문에 사도신경에 육체의 부활에 대한 기사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라는 표현으로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언급하면서 사도신경은 계속하여 우리의 부활에 대한 신앙도 확고히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 둘 중의 하나가 없이는 다른 하나의 진리도 무너지게 된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부활이 이루어질 사실에 대한 모형이다.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하나님)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 8:11)고 말했다. 다른 곳에서 바울은 부활한 우리 육체가 그리스도의 부활체와 같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낯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빌 3:21)고 말했다.


 



 우리는 인간의 육체가 중요하며 내세에도 육체가 있음을 믿는다. 이 두 가지 사상은 인간 육체에 대한 일반적인 견해와는 어긋난다. 그리스인들은 정신과 물질을 아주 날카롭게 구별했는데, 이것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큰 영향을 미치는 널리 받아들여지는 견해이다. 즉 그리스인들의 견해에 의하면, 간음이나 간통은 육체의 죄악이며 영혼은 그것에 의해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했다. 결국, 육체는 무덤에 들어가게 되며 다시는 무덤에서 나오지 못한다.


 



 성경도 정신과 물질을 구분했지만, 육체와 영혼의 관계는 긴밀하며 영구적인 것이다. 인간은 절대로 육체의 감옥에 갇힌 정신은 아니다. 육체를 벗게 되면 우리의 흠이 드러나게 된다. 말하자면,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부활할 때 그 흠을 가리워주시는 것이다(고후 5:1-4).


 



 또한 육체는 중요한 것이다. 육체는 인간의 몸의 한 부분일 뿐 아니라 그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도, 범죄할 수도 있는 수단이다. 악한 것들은 속에서 나온다는 것이 진리이며 이것들에 의해 육체가 더렵혀질 수 있다(막 7:14-23). 그럴 경우 영혼과 마찬가지로 육체도 심판시에는 지옥으로 던져지게 된다.


 



 바울은 육체가 인생의 성격을 결정짓는다는 사실을 매우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자기 몸을 "쳐서"그 몸이 자신을 파멸시키는 죄의 수단이 되는 것을 막았다. 아마 그것은 온유적인 표현일 것이다. 바울이 실제로 자기 몸을 채찍질하거나 누더기를 걸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육체적 욕망의 힘을 알았고 그래서 그 힘이 자기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했다(고전 9:24-27).


 



 즉 바울은 자기 육체가 죄로 더럽혀지는 것을 거부했다. 그는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그들의 육체가 "그리스도의 지체"임을 아느냐고 물었다. 같은 곳에서 드는 또 그들의 몸이 "성령의 전"임을 아느냐고 질문했다. 그리고나서 바울은 "너희는 너희 것이 아니라...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했다(고전 6:15-20).


 



 부활하신 후에 예수님은 일반적 인간이 갖는 육체적 한계를 초월하셨다. 육체를 지녔으나 그것은 다른 육체였다. 그는 벽을 뚫고 나오듯이 갑자기 "육체적으로 나타나실 수"있었다. 그는 또한 공기로 변하듯이 곧 사라질 수도 있었다. 실제적인 몸을 지니고 계셨지만 피곤 하시거나 졸립지 않았다.


 



 장차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부활을 경험한 후 그런 육체를 지니게 될 것이다. 바울은 육체의 부활에 대해 "무릇 흙에 속한 자는 저 흙에 속한 자들과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는 저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으니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고전 15:48, 49)고 했다. 우리 몸이 무덤에서 부활하게 될 때, 우리는 그리스도와 같게 될 것이다.


 



 부활이 성취될 때, 즉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에 요한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보기 때문이다"(요일 3:2). 죄와 죄의 영향력은 벗어져 없어져서 그것은 영원히 무덤에 남겨진다. 그리고 우리의 육체와 영혼은 모두가 그리스도처럼 될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사도신경을 통하여 "몸이 다시 사는 것을 믿는다"라고 고백할 때 이러한 복합적인 우리의 신앙을 천명하는 것이 된다.


 



영생 


 



 "육체의 부활"과 "영생"과는 매우 깊은 관계를 지닌다. 우리 몸이 부활하게 된다면 그것을 한마디로 말하면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 목적은 성경 여러 곳에서 설명되어 있는데, 그것은 육체와 영혼의 재결합을 위해서이다. 이렇게 하여 완전해진 우리는 영원히 살게 되는 것이다.


 



 죽음에 반대되는 개념은 생명이다. 죽음이란 분리이다. 따라서 영적 죽음은 하나님으로부터 영혼이 분리되는 것이다. 이사야는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다"(사 59:2)라고 말한다. 사도 바울은 중생하지 못한 사람을 "허물과 죄로 죽은"(엡 2:1)자로 묘사 하며,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죄로 인하여 인간은 그에게서 멀어지고 분리하게 된다고 말했다(엡 4:18;골 1:21).


 



 그리고 육체적 죽음은 몸에서 영혼을 분리시킨다. 사실 죽음과 관계된 모든 언어가 이러한 사상을 잘 나타내고 있다. 임종시에 친구들이 임종을 지켜보며 "그는 갔다"라고 말한다. 그 후에도 "가버렸다". "돌아갔다"라고 죽음을 묘사한다. 숨을 거둔 후에도 인간의 육체적인 부분은 남는다. 그러나 비록 육체가 남아있다 할지라도 영혼이 없는 육체는 죽은 것이다.


 



 한편 둘째 죽음은 영원한 죽음, 즉 하나님으로부터 영혼과 육체의 영원한 분리를 가리킨다. 이와 같이 영원한 죽음을 경험하는 자는 성경에 가장 무서운 말로 표현된 형벌을 당하게 된다. 성경은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자들은 불못에 던져질 것이라고 예언하는 것이다 (계 20:11-15).


 



 영생은 죽음에 반대되는 것이다. 따라서 영생의 근본 사상은 분리와 대조되는 연합이다. 하나님과 멀어지는 대신에,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며 그 결과로 영생하게 되는 것이다. 죽음 대신에 그리스도인은 "살게 된다" 바울의 말대로,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과 죄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다"(엡 2:4, 5).


 



 육체적 죽음은 피할 길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장차 그 육체를 다시 살리심으로 죽음의 영향력을 파기하실 것이다. 즉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다시 오실 때에, 육체와 영혼은 부활로 다시 연합할 것이다. 이 위대한 진리가 밝혀지는 곳에서 바울은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 4:17)고 설명한다. 그리하여 우리 영혼은 육체와 다시 연합하게 되며, 이전과는 전혀 달리 완전해진 우리는 주와 함께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영원히 사는 것"을 믿는다. 그 이유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구원을 위해 세우신 계획이기 때문이다. 시편 16편은 아름다운 신앙 고백을 기록하고 있다.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시 16:11). 다니엘은 그 날을 이렇게 예언했다. "땅이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단 12:2). 다니엘은 영생과 그것의 반대인 치욕과 무궁한 부끄러움을 함께 예언했던 것이다.


 



 사도신경은 불신자들이 당할 "치욕과 무궁한 부끄러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사도신경은 신자들이 소유하고 있는 진리에 대한 적극적 진술이며 신자들의 신앙에 대한 핵심적인 표현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원히 사는 것"에 대한 신앙은 내용적으로는 그 반대되는 멋을 배제하지 않는다. 성경을 액면 그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영원한 심판에 대해 성경이 말하는 바를 분명히 믿을 것이다.


 



 요한복음서 3장에 나오는 두 개의 성경 구절은 이 점을 분명히 나타내고 있다. 먼저 요 3:16을 보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다음에는 요 3:36을 보자.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이 두 구절은 영생과 영벌에 대한 선택이 우리에게 있다는 점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하나님은 생명을 제시하시며, 또한 생명을 택하도록 우리를 권유하신다.


 



 나는 여러 해 전에 생명을 선택했다. 만약 재삼, 재사 다시 선택해야 한다면 다시 생명을 택하겠다. 그러나 선택은 한번이므로 나는 영원토록 안전하다. 이제 내가 할 일은 이 선택하심에 대해 증거하는 일 뿐이다. 사도신경을 암송할 때마다 우리는 이것을 증거하는 것이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지 사홀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여기서 "아멘"이라는 마지막 단어는 "틀림없습니다", 혹은 "그렇습니다."라고 번역해야 하는 히브리어이다. 그래서 "아멘"은 사도신경 전반을 훓어 보고 나서 "옳습니다. 이것은 진리이며 내가 진정으로 믿는 내용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당신은 사도신경 전체 내용에 대해 진정으로 "아멘"할 수 있는가?
[출처] [본문스크랩] 아더 핑크(A.W. Pink)의 사도신경 강해 (성경과 외국어) |작성자 진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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