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강해

“교회 예배 음악” 에 관하여

작성자
쥬니어칼빈
작성일
2012-11-08 04:37
조회
4765

근자에 교회 음악이 늘 화제에 오른다. 몇 년전 <한국 선교 100주년 기념 로스엔젤레스 집회> 가 시내 Civic Center 에서 초교파로 열렸는데 많은 사람이 예배 도중에 퇴장했다. 이유는 너무도 요란한 CCM 의 소음(騷音 noise) 때문이다. Philadelphia 의 Glenside 에 있는 New Life Presbyterian Church (OPC) 는 담임 목사가 CCM 을 도입하여 교인의 수가 3배로 증가했으나 교단으로부터 심한 징계를 받아 그 교회는 OPC 를 자진 탈퇴하여 PCA 로 전입한 사실이 얼마동안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NAPARC 의 정회원교단인 ARPC (Associate Reformed Presbyterian Church 미 합동 개혁 장로교단 (Due West, SC 에 본부를 둔 Scotland 의 언약파 후예들, Erskine Seminary 를 운영) 에서는  CCM 때문에 교단 내 각 지 교회에서 심하게 싸우는 바람에  <CCM 문제를 통제할 자문>을 NAPARC 에 구해 온 적이 있다. 1995년 필자가 NAPARC 의 회장직을 맡고 있을 때 일어난 일이라고 기억된다. Scotland 언약파 라면 개력주의 중에서도 개혁주의 를 믿는 분들인데 교단이 언제 이렇게 되어 버렸는가?


 


이 교단은 요즘 교리문제로 진통을 겪고 있다. 2010년 3월초에 교단 임시 총회에서는 이 교단에서 운영하는 유서 깊은 Erskine Collee/Seminary 의 행정부가 교단의 지시대로 학생들을 가르치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 신학교를 감독할 책임이 있는 이사회원 14명을 경질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 학교의 영어 교수는 “진화론을 믿지 않는 사람은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 이라고 노골적으로 교실에서 열을 올릴 정도라고 Christianity Today 라는 잡지가 근자에 보도하고 있다.


 


일반 성도는 찬송가 사용에 대하여 민감한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교회에서 사람이 작사하고 작곡한 찬송가가 예로부터 불려 왔으니 아무 문제가 없고 그것은 심히 당연한 일이므로 아무것도 이상할 것이 없고 이의를 제기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광복 목사 같은 분은 찬송가에 문제가 있는 것을 간파(看破)하고 “교회 음악의 타락” 이라는 주제로 여기저기에서 순회 세미냐를 인도 하고 있다(Vienna에서 발행되는 “복음신문” 사에서 테입들을 구입할 수 있다).


 


또 최근에는 시카고의 “명물” 이라고 불리는 시카고의 Willow Creek Church 에서 오랫동안 찬양대를 지휘하던 음악목사 Dan Lucarini 가 교회 음악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을 깨닫고 늦게나마 그 교회에서 나왔고, <찬양팀 인도> 를 중지하고 책을 썼는데 그 책 “Why I Left CCM" 은 우리말로  "내가 현대 교회음악 활동을 그만둔 이유” 라는 책이다.  벌써 개혁주의 신학 진영에서는 300만부가 팔렸다는 소식이다.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예배에 상당한 관심을 보이고 걱정하고 있다.


신학에 대해서 조금도 관심이 없거나 신학을 도모지 모르는 사람은 교회에 나가는 것이 마냥 즐겁기만 하다. 왜냐하면 교회에 나가면 beat 가 강한 음악에 여러 가지 “신나는” 악기를 동원하며 현대식 교회 음악으로 기분을 좋게 해 주기 때문에 마치 무슨 Rock'n'Roll concert 에 갔다 온 기분이다. 그래서 다음 주일에는 친구를 교회에 데리고 온다. 교회 목사는 “사람들이 내가 목회하는 교회에 많이 모이는 것이 가장 기쁜 일이고 목회하는 목적이 사람들을 교회에 많이 끌어오는 것이라” 고하면서 매우 반긴다.  이것이 바로 교회를 타락시키고 제3계명을 어기는 일이다.


 


이제 오늘의 교회 음악, 무엇이 잘 못되어가고 있는지 보도록 하자.  물론 개혁주의 적 입장에서 연구하는 것이고 개혁주의는 성경에 가장 가까운 신학 체계이므로 성경적인 해답이라고 할 수 있다. 개혁주의는 "Semper Reformanda" 즉 항상 [성경에 가깝게] 개혁해 나가자는 주장이다. "개혁한다"는 말은 악화시키는 길로 개혁한다는 말이 아니라 보다 성경적인 방향으로 개혁한다는 말이다.  옛날 어느 신학교의 사무직원은 "목사님, 개혁주의는 개혁하는 것이니 음악도 현대에 맞게 개혁해야 하지 않습니까?" 라고 하여 그 여직원에게 야단을 친 경험이 있다.  사람들은 "개혁주의"를 말하면 "세속적으로의 개혁"을 의미하는 것으로 착각한다.  개혁주의를 부르짓는 신학교를 종업했다는 이 여전도사의 "개혁주의 인식"
이 이 정도라면 평신도의 신앙태도는  짐작하고 남음이 있다.


 


물론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개혁주의의 선구자 요한 칼빈(John Calvin)도 악기 없이 시편만 노래했고 (exclusive psalmody) 종교 개혁가들이 모두 그랬다. 청교도들도 그랬다. 요즘 개혁주의 신학자 들 중에는 두 진영으로 갈라져 있다.  시편만 노래하는 예배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를 만든 사람들은 “Regulative Principle” (표준 예배 원칙) 이라고 했다. 이것은 성경에서 명령한대로만 예배드리고 성경에서 명령한대로만 신앙생활하자는 주장이다. 이의 반대는 Normative Principle  인데 이는 성경에서 "하라"는 말도 없고, "하지말라" 는 말도 없으면 해도 되는 된다고 가르친다.


 


그러므로 이 두 가르침은 서로 벙반대가 된다. 전자는 개혁주의적 신앙이고 후자는 자유주의 적 신앙이다.


Regulative Principle 에 따르면 예배 시간에  악기 없이 시편만 사용하며 크리스마스나 부활절을 지키지 않고 주일만 거룩하게 지키는 신앙형태를 따른다.  NAPARC 에 가입되어 있는 7개 교단 중에 RPCNA (Reformed Presbyterian Church of North America, 북미주 개혁 장로교단, Pittsburgh, PA 에 본부) 와 RCUS (미국 개혁교단 Reformed Church in the U.S.) 교단들이 이에 해당된다. 이들은 악기 없이 시편만 찬송한다.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서부) 교회사 교수 Scott Clark 교수에 의하면 CRCNA 가 생기게 된 이유는 화란개혁교단 (Gereformeerde Kerken in Nederland)에서 미국에 전도하고저 건너온 RCA, Reformed Church in America 가 Regulative Priinciple 을 지키지 않아서 이를 반대하여 RCA 를 탈퇴하여 CRCNA, Christian Reformed Church in North America 를 만들었다고 그 역사를 말하고 있다.


 


2002년에 CRCNA 는 여성안수 문제와 성령의 일반사역과 특수사역 문제로 인하여 오랜 싸움 끝에 NAPARC에서 정회원 자격을 박탈당한 형편이고 CRCNA에서 탈퇴한 사람들이 만든 교단이 Westminster 신학교 (Escondido 소재) 교장 Robert Godfrey 교수를 중심한 URC, United Reformed Church 교단이며 급히 성장하고 있다.


 


기독교는 초기부터 Regulative Principle (표준 예배 원칙)를 사용했다. 베드로와 바울이 그러했고, 모든 사도들이 그러했고, John Owen, Samuel Rutherford를 비롯한 청교도들, Scotland 의 언약파들 모두가 Regulative Principle 을 사용했다. 그 외에도 William Cunningham, George Smeaton, Hugh Martin, John Murray 같은 쟁쟁한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모두 시편 찬송을 사용했다.


 


이중에서 George Smeaton (죠지 스미튼) 장로는 그가 출석하던 Scotland 의 Grange Free Church 에 1884년 찬송가를 도입하는 것을 보고 이 문제로 인하여 장로 직을 사임한 분이다. John Murray (존 머레이) 교수는 동부 펜실바니아 주 필라델피아 에 있는 세계적 명문교인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조직 신학 교수로서 평생을 독신으로 후진들 양성에만 몰두한 청교도의 신앙을 가진 Scotland 출신 학자이다. 그는 60이 넘어 하교에서 은퇴하고 고향인 Scotland 로 돌아가 늦게 육순에 결혼했으나 신병으로 곧 소천했다.


 


사람들이 시편 찬송보다 찬송가를 선호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찬송가 사용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시편” 만 가지고는 부족하다고 불평이다. 마치 오늘 교회에서 음악목사가 “찬송가만 가지고는 부족하니 <북음성가> 나 Rap Music, Heavy Metal music 을 사용해야 한다” 하는 이론과 같은 말이다.  과연 이 말이 성경적인 근거가 있는지 살펴보자.  과연 시편만 찬송하면 부족한가?  그래서 하나님이 만든 것이 아닌 “사람이 제멋대도 작사하고 사람이 제멋대로 작곡한, 즉 사람의 작품인 찬송가를 예배에 도입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시편만 부르면 “재미” 가 없고, “잠이 오고” “신이 나지 않는다” 라는 이론은 요즘 젊은 세대가 거의 100 프로 그렇게 주장하는 것이 사실이고,  나이가 든 장년층에서도 그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예상외로 상당히 흔하다. 


 


그들이 주장하는  이론은 대개 다음 두 가지로 압축된다.


   1. 예배 시에 “인간이 만든” 찬송가를 사용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기도나 설교도 사람이 제멋대로 만들어 내지 않는가?  영국의 성공회와는 달리 우리는 기도도 개인의 마음대로 하도록 허용이 되고, 설교도 설교하는 목사가 자기 마음대로 말을 골라서 사용할 권한이 있다면  예배시 음악이라고 해서 사람이 작사하고 사람이 작곡한 찬송가를 사용하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이런 논리이다. 외견상 그럴 사 한 이론이다.


  


 2. “신약 성경의 가르침을 노래로 나타내어 주님을 찬양해야 하므로 사람이 그 은혜를 간증하는 형식으로 찬송가를 만들어 사용할 수 있지 않은가?  찬송가의 대부분은 신앙 간증이 아닌가? ”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할 것은 예배는 하나님이 제정하신 대로 드려야 하는데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제21장 3,4.5 절 참고)  하나님이 만든 것이 아닌 인간이 만든 찬송가 가사나 찬송가의 가락을 사용해도 좋다고 하나님이 허락한 적이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이다. 개혁주의 적 성경해석방법은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하는데 하나님이 명령하거나 금한 것 이외에 아무 말이 없는 것은 하지 않는 것이다. 반면, 앞서도 언급한대로, 자유주의 진영에서는 하라는 말도 없고 하지 말라는 말도 없으면 양심의 가책없이 행하는 것이다. 이것이 개혁주의 와 자유주의 신학의 근본적 차이중 하나이다. 가령 예를 들어 ‘촛불예배“ 에 대해서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하라는 말도, 하지 말라는 말도 없다. 그러므로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금하는 것이다. 한편 자유주의 진영에서는 ”성경이 금하지 않으니“ 자유로 행하는 것이다.


 


또 한 가지 알아둘 것은 만약 기도나 설교를 할 때 사람이 단어를 선택하여 할 수 있으므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음악도 인간의 마음대로 선택해도 된다고 생각하면 머지않아 다른 모든 분야에도 인간 중심으로 고쳐지게 될 것이 분명하다. 고쳐야할 점이 어찌 Regulative Principle에서 찬송가로 고치는 일 뿐이겠는가? 소위 “열린예배로 설교를 간단히 해 버리며,  주일 저녁 예배도 생략하고 가령 시내에 마라톤 같은  세속적 행사가 있으면 주일 예배도 생략하고 주일에 오락도 어느 정도 허용하고 주일에 세상일도 허용하고.... 세상에 타락한 인간이 못할 일이 어디 있겠는가?  사람이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모두 자기 멋대로 고치려는 것이 패역한 인간의 심성이다 (human autonomy).


 


이렇게 되면 결국은 하나님에게 정면으로 도전하는 결과가 되어 버린다.  레위기 10 장의 나답과 아비후라는 두 제사장은  “하나님이 명하지 않은 불을 드렸다고 해서 설마 하나님이 징벌하시겠는가? 대단한 죄도 아닌데... 결국 하나님의 방법대로 예배드린 것은 아니지만 내 나름대로 내 기분에 맞게 ”정성스럽게“ 예배를 드리지 않았는가?“ 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런 예배를 하나님이 받으실 리 만무하다.  성경은 고린도전서 10:11이나 로마서 15:4에 ”옛날에 있었던 일을 신악성경에 기록한 것은 말세를 만난 우리들에게 경고하기 위함이라‘ 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과거 구약에서 일어난 모든 일들을 거울삼아 하나님에게 범죄 하지 말라> 는 뜻이다.


 


찬송가를 뜯어 고치는 분은  다른 일도 행하기에 담대해 져서 하나님을 위한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노엽게 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쌓는 일을 계속하게 된다. 가령 복음전파가 교회의 사명이라고 생각하고 “복음 전파” 라는 큰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어떤 생각도 개의치 않고 도입하게 된다. Rick Warren 이 바로 그 대표적 인물이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 들면 “할렐루야”를 부르며 주님에게 영광을 돌린다고 한다. 이 얼마나 가증한가?  하나님이 받지도 않으실 영광을 어떻게 하나님에게 돌리는가 말이다. 성경적 사상은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 할 수 없다고 가르친다.  (The end does not justify the means). 이것은 언제든지 변개할 수 없는  성경의 절대적 철칙이다.


 


이런 사람들은 <복음전파> 라는 구실로 교회에서 춤도 추고, 연극도 하고 별 희안한 일을 서슴치 않는다. 이것은  우리들이 출석하는 교회에서 실제로 행해지고 있는 사실이 아닌가?  모두 처음서부터 잘 못 출발한데 기인한다.  한 번 담이 무너지면 그 담을 통해서 들어오는 물의 위력은 엄청나기 때문에 다시 그 담을 고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화란 나라는 지면이 수면보다 낮다 그래서 Netherlands (낮은 땅) 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바다의 물을 막는 담이 있다. 그 담에 작은 구멍이 생기면 경각간에 담이 모두 무너져 나라 전체가 물에 잠기게 된다. 이것이 오늘의 교회를 설명하는 가장 적합한 비유이다.  그래서 오늘의 교회가 이렇게 타락해도  아무도 손을 쓰지 못하고 있다..그것이 오늘의 기독교의 현주소이다. 그러는 가운데 교회는 계속 세속화되어 파괴되어 가고 있다.


 


기독교 자체는 예나 지금이나 불변이다. 교리가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신앙 생활하는 성도들이 문제이다. 그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치 않기 때문에 온갖 문제를 유발한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에게 범죄 하면 인간의 형벌은 피할 수 있어도 하나님의 형벌은 절대로 피할 수 없음을 알도록 하기위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제3계명을 지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컫지 말라“ 고 제3계명에 엄히 명령하시는 것이다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Shorter Catechism #56, 참고).


옛 이스라엘처럼, 오늘날 사람들이 악을 행하기에 담대해 졌다 (전도서 8:11). 그러나 죄의 값은 사망이다 (롬 6:23). 하나님에게 순종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멸망한다. 사랑의 하나님은 동시에 ‘공의의 하나님”  이시다. 하나님은 절대 거룩하신 분이심을 잊지 말자. 거룩하신 성삼위 하나님에게 예배하는 자의 태도는 절대 거룩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성경에서 지시한대로 예배해야 한다.  음악도 설교도 기도나 헌금도 성례식도 모두 마찬가지이다.  인위적인 것은 아무것도 용서되지 않는다. 용서받지 못하는 일은 하나님의 진노만 쌓을 뿐이다. 하나님은 절대 거룩하시고 소멸하시는 불이라는 사실 한 가지를 잊지 말자.


 


시편을 버리고 찬송가를 불러도 좋다는 성경적 근거가 있는가?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항상 “성경이 무엇이라고 가르치는가?”에 중점을 둔다. 이유는 성경만이 우리 신앙과 생활의 유일한 법칙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스위스 신학자 Karl Barth (칼 바르트)  가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증거” 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 라는 진리를 분명히 알아 두자.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피조물은 조물주 하나님 의 말씅에 순종할 뿐이며 다른 아무 자유도 허락 받은 일이 없다. 하물며 예배 형태를 사람이 마음대로 변개하는 자유를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적이 없다. 그래서 개혁주의 성도는 “하나님이 이것을 허락하셨는가?” 를 먼저 생각한다. CORAM DEO.


 


하나님은 그를 찬양하도록 시편을 주셨다. 시편은 사람의 말이 아니다.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직접 영감으로 주신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다. 시편은 예배 시에 “예배에의 부름” 때만 잠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야웨 하나님 (YHWH) 을 칭송하고  찬양하는데 사용하도록 주어졌다. 시편에 “여호와를 찬양하세” 라는 말이 얼마나 많은가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시편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다. 하나님에게 경배할 때도 시편을 사용하지 않고 사람이 만든 가사나 곡에 의존하며 가벼운 정서에 흥분하여 그런 것들을 더 좋아하고 더 사랑한다. Individualism, Emotionalism 등은 모두 Postmodernism (후기 근대주의) 의 산물들이다.


우리 주님께서도 최후의 만찬을 마친 후 감람산으로 나가기 전에 제자들과 함께 시편을 찬송했다 (마태복음 26:30). 예수님도 시편을 노래했다는 증거이다.  사람들은 반박하기를 “그때는 다른 찬송가 가사가 없었고 또한 악기도 없어서 악기 없이 시편만 노래했다“ 고 억지 해명을 하려드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다. 신학생이나 목사들 중에도 그런 사람들이 많은 것은 통탄할 일이다. 악기가 나온 것은 창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도 사람 (시인) 들이 지은 노래가 있었고 악기도 있었다. 악기의 등장은 구약 창세기부터이다. 창세기 4:21의 <유발> 을 보라. 그는 악기의 조상이다. 구약시대에 악기가 없었는가?  구약에 악기가 많이 등장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여기서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꼭 짚고 넘어가야 한다. 시편에 나오는 악기들은 제사법 (의식법) 때 사용되던 악기들이다.  칼빈이 이를 몰라서 악기를 쓰지 않았다고 생각하는가?  칼빈 당시 악기가 없어서 칼빈이 악기를 쓰지 않았다고 생각하는가?  칼빈으로부터 100년 뒤에 나온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제정한 목사와 장로 학자들은 악기를 몰라서 시편만 악기 없이 a cappela 로 노래 불렀다고 생각하는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정자들은 <예배모범>을 만들 때 회원중 한 사람이던 Mr. Rouse 가 제정한 것을 사용했다. 왜?  그 분이 내놓은 예배모법에는 찬송시 시편만 노래하도록 주장하면서 시편 중에서 회중이 예배 때 사용할 시편들을 정선하여 책으로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의 안은 그 어느 하나도 받아지지 않았다.


 


주님은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서 실망에 찬  제자들을 꾸짖는다.  성경 (구약) 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는데 왜 그것으로 인하여 슬퍼하는가? 라는 것이다. “성경에 그런 일이 되어 질것이라고 예언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왜 제자들이 슬퍼하는가?“ 하는 것이다. 누가복음 24:27-44에 기록된 것을 보면, 주님은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게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 44절에는 “모세와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르켜 기록된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이 대목을 눈여겨보라,  시편은 주님을 증거하신다.


 


이와 같이 예수님과 제자들은 철저하게 성경에서 떠나지 않았다.  궁극적 질문은 “인간이 만든 찬송을 사용해도 된다는 성경적 근거가 어디 있는가? ” 하는 것이다.  대답은 “그런 성경적 근거가 없다” 는 것이다. 현대 찬송가가 도입되던 1880년대 까지 오늘과 같이 인간이 만든 (인간이 작사하고 인간이 작곡한) 찬송가를 쓴 기록이 없다는 것이다. 청교도들도시편 찬송을 불렀고, 성탄절과 부활절을 별도로 지키지 아니했고 주님 부활의 날인 주일을 거룩하게 지켰다.


 


현대의 찬송가 가 교회에 등장한 것은 19세기 말엽인데 그 무렵 미국의 “제2차 각성운동” 으로 큰 부흥운동이 일어날 때 부흥사들이 “흥에 겨워” “청중들의 감정에 호소하기 위하여” 현대판 찬송가를 도입한데서 유래한다. 한번 “재미”를 본 패역한 인간은 이제 한 단계 올라서서 “복음성가”를 도입, 지금은 그 도를 넘어서 Christian rock'n'roll 까지 등장했다.  아무 곡이나 <Christian> 이라는 말을 붙일 수 있는 자유를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적이 없다.


 


하나님의 뜻에 맞는 것, 다시 말하면 성경적이어야 Christian 이라는 말을 붙일 수 있다. “Christian Robbery (기독교적 강도행각)” 이라는 말이 성립되는가? Christian Rock'n'Roll 이란 말이  성립되는가?  언어도단이다. 이런 것을 수사학에서는 "oxymoron' 이라고 한다. 돼지에게 비단 옷을 입히면 과연 그 돼지가 비단처럼 아름다워 지는가? 그러나 현대 성도는 그런 것쯤은 아랑곳 하지 않는다. 그만큼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났다는 증거이다.


 


시편 찬송(exclusive psalmody) 주장에 모순되는 성경구절이 있는가?
사람들은 엡 5:19 이나 골 3:16 의 “신령한 노래” 를 들어 <찬송가>나 <복음송> 이나  Christian rock'n'roll 를 정당화 하려고 한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화답하라" 고 했으니 “시”도 사용되고 “찬미”도 사용되고 “신령한 노래” 도 사용되는 것이 아닌가? 라고 반박한다. 즉 찬송가도 사용하고 시편도 사용하고 신령한 노래 (그들의 생각으로는 “복음성가“) 도 사용하라는 말이라고 오해하며 그렇게 회중에게 가르친다.


 


이에 대해서는 목사마다 여러 가지 다른 해석을 한다. 그러나 칼빈에 의하면 시편 중에 골라서 부르는 노래라고 하면서 어떤 특정한 때 시편 중에서 보통 때 부르지 않던 시편이라고 주석한다 (칼빈 주석 참고). 그러므로 이 구절을 아무렇게나 마음대로 해석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이 성경구절 하나만 가지고 시편만 노래하는 것 (exclusive psalmody) 은 비성경적이다 라고  말할 근거가 되지 못한다는 말이다.


 


문제는 히브리어로 된 시편을 헬라어로 번역한 LXX (칠십인역) 에 의하면 “시” “찬미” “신령한 노래” 가 각각 서로 상호 교환으로(interchangeably) 사용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어떤 시편은 “Psalmos," 어떤 시편은 ”humnos," 어떤 시편은 “ode psalmou, 신령한 노래” 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Bruce Metzger. The Septuagint and Apocrypha 참고). ummos-시 61; Psalmos-압도적 대다수;ode psalmou-시 66, 68, 83 등이 대표적인 "신령한 노래" 이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기도할 때 단어를 사람마음대로 선택하는 것과 또 설교할 때 목사가 단어를 자기 마음대로 선택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  이렇게 반박하는 분도 상당히 많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부류는 각각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자. 무엇이 다른가?


기도나 설교는 어떤 정해진 틀이나 책 형식이 아니다. 기도와 설교는 성경에서도 보장하는 것이 기도하는 사람이 주기도문을 모형으로 삼아서 자유로 기도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주기도문은 꼭 그대로 기도하라는 말이 아니라 그 pattern 으로 기도하라는 말이다.


 


반드시 ACTS (Adoration 경배, Cofession 죄의 교백, Thanksgiving 감사, 그리고 Supplication, 간구) 등 네 가지 요소를 넣어서 기도한다. 성공회처럼 기도서를 읽는 것이 아니다. 마음에서 울어 나오는 대로 기도한다. 설교도 마찬가지 이다. 설교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풀어 교인들에게 전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수사기법을 사용한다. 그것은 설교자에게 주어진 특권이다.  성경을 읽기만 하고 풀어주지 아니하면 회중이 어떻게 성경을 이해하며 또 설교를 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설교는 목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풀어서 성도들이 변화받으며, 하나님에게 순종해 살며, 생활에 적용하도록 도와주는 사역이다. 그리고 설교하는 사람이나 기도하는 사람은 혼자서 행한다. 그러나 예배 시에 사용하는 찬송은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라 온 회중이 같이 참예한다. 온 회중이 같이 찬송하려면 단어가 같아야 한다.


 


그러나 기도하는 사람이나 설교하는 사람은 한 사람이다  누구에게 단어를 맞출 필요가 없다. 그러나 예배시 찬송은 여러 사람이 다 같이 함께 불러야 한다. 단어가 틀리면 안 된다. 노래의 “노랫말 (가사) 가 같아야한다. 그리고 그 가사는 바로 시편에 하나님이 자기를 나타내 주신 말씀 바로 성경말씀을 사용하여 주님을 찬송하라는 것이다. 찬송은 기도나 설교보다는 오히려 성경봉독에 더 가깝다는 사실을 알아두자.  찬양은 내 기분을 좋게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행위라는 것도 알아두자.  예배는 매사가 하나님 중심이다 절대로 인간 중심이 아니라는 것을 잊지 말자.


 


예배가 무엇인가?
예배가 무엇인지 아는가?  예배를 어떻게 드리는가?  예배는 상삼위 하나님에게 신령과 진정으로 해야 한다 (요 4:24). ”신령으로 예배한다“ 는 말은 하나님 중심이라는 말이요 <진리로 예배한다> 는 말은 성경대로 예배하라는 말, 즉 하나님이 정해 준대로 예배하라는 말이다. 사람의 생각으로 고안한 다른 방법을 쓰지 말라는 말이다.



중동사람들은 인사하는 법이 여러 가지 이다. 서로 비슷한 연배와 인사할 때는 입술에 키스한다. 조금 신분의 차이가 있으면 볼에 키스한다. 그러나 아주 신분이 높은 사람을 대할 때는 땅에 엎드려 이마가 땅에 닿게 절한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예배하다” 라는 헬라어 단어인 “PROSKUNEO, 프로스쿠네오”  의 의미이다.


 


아랍사람들은 하루에 다섯 번씩 Saudi Arabia 의 Mecca에 있는 이슬람 성전을 향하여 부복하여 기도한다. 저들의 기도의 자세를 자세히 보라,  땅에 엎드려 이마가 땅에 닿는다.  이것이 “예배한다”는 동사인 PROSKUNEO (프로스쿠네오) 의 원래의 의미이다. 예배는 절대로 가법게 생각할 것도 아니요 절대로 되는대로 내 멋대로 드릴 수 없다는 것을 반드시 알아 두자. 예배를 잘못 드리면 하나님의 복은 고사하고 하나님의 진노를 받는다.


 


어떤 찬송을 수용할 수 있는가?
찬송가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말하기를 “시편 보다는 찬송가가 복음을 더 확실히 증거하기
때문에 시편만을 a cappela 로 노래하는 것 보다 찬송가가 훨씬 바람직하다“ 라고 말한다. 그러나 문제는 “무슨 권리로 죄악 된 인간이 만든 찬송,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닌 인간이 만든 찬송을 예배에 사용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성경을 제멋대로 풀어서 개편하는 사람들에게도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요즘 많이 쏟아져 나오는 그 많은 새로운 번역 성결들, 그중에서도 특히 Eugene Peterson 이 번역한 The Message 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것은 과연 하나님의 말씀을 순수하게 번역한 성경인가 아니면 자기 개인의 철학에 입각하여 자기 일신의 기호에 맞게 번역한 책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무슨 권리로 뜯어 고치는가? 하는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


 


찬송가의 경우는 죄인인 인간이 만든 찬송가가 하나님의 말씀과 부합된다고 어떻게 확증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대두된다.  사람이 만든 찬송가는 절대로 무오할 수 없다. 잘못이 있을 수 있다. 오류가 있는 인간이 작사하고 작곡했으니 실수가 필연적으로 있게 마련이다.  아무도 찬송가 나 복음성가가 무오하다고 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시편을 노래할 때 시편에 잘 못이 있다고 말할 사람은 없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말씀이기 때문이다. 찬송가나 복음성가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 사람이 신앙 간증으로 만든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내용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다. 여기에 문제가 있음을 인정해야한다.


 


가령 예를 들어서 <고통의 멍에 벗으려고> (330 장) 라는 찬송에서 “병든 몸이 튼튼하고 빈궁한 살림이 부해지며‘ 라는 가사가 성경적인가? 하는 문제에 봉착한다. 예수를 믿으면 반드시 몸이 튼튼해진다면 칼빈 같은 병자는 있을 수 없다는 말인가? 모두가 Howard Hughes나 Bill Gates 처럼 거부(巨富) 가 된다는 말인가?  하나님의 전제주권 사상은 어디로 갔는가?  개혁주의 신앙은 하나님의 주권을 높인다. He is sovereign Lord, and He is King of kings. 그는 전제주권을 가진 주님이시며 만왕의 왕이시다.


 


찬송가를 조사해 보면 이 처럼 비성경적인 가르침이 많이 있다.. 이런 것들을 두고 찬송가는 인간이 만든 것이기에 비성경적인 내용이 있을 수 있으며 그러므로 이런 비성경적인 찬송가를 하나님을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예배 시에 사용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초대교회서부터 19세기까지 시편만 사용했고 (exclusive psalmody) 지금도 일부 정통적인 개혁교단에서는 그렇게 시편만 사용한다.


 


분명 찬송가 가운데는 좋은 것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 그리고 다수의  개혁가들이 찬송가를 반대하고 exclusive psalmody 를 주장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찬송가는 하나님이 만든 것이 아니고 불완전하여 틀릴 수 있는 인간이 만들었다는데 문제가 있다. 이런 노래들이 분명 어떤 사람들에게는 은혜를 끼칠 수 있다. “인애하신 구세주여” 라는 찬송을 듣고 우는 성도도 많다. 어떤 성도는 새벽기도 할 때 이 찬송만 되풀이해서 부르며 눈물을 흘린다. 이것은 마치 Beecher Stowe 부인이 쓴 Uncle Tom's Cabin (톰 아저씨의 통나무집) 이라는 소설을 읽고 감동되어 눈물을 흘리는 것과 같다. 그렇다고해서 그 소설을 교회에서 예배 시간에 읽을 수는 없지 않은가? 상도들이 하나가 되려면 무엇이 가장 효과적인가?


어떤 분들은 말하기를 “시편만 노래하는 예배는 싫증이 나서 그런 교회는 나가기 싫다” 라고 한다. Saddleback 교회의 Rick Warren 목사는 그의 책 “목적이 이끄는 교회Purpose-Driven Church 의 영문판 (Zondervan, 1995) p.285에서 노골적으로 불평하기를 “찬송가만 부르면 잠이 오고 마치 장송곡 葬送曲 (Requiem) 을 듣는 것 같아서 “재미” 가 없으니 우리 교회에서는 “신나고 박자가 빠른 노래” 를 예배 때 도입하여 사용 한다“ 고 말한다.  하물며 exclusive psalmody 같은 예배 음악을 Warren 목사가 수용할리 만무하다.


 


그래서 Warren 목사는 ”세상 방송국에서 흘러나오는 박자가 빠르고 경쾌한 리듬(rhythm)의  Pop song 을 예배 때 찬송가 대신 사용하니 교회 교인의 숫자가 몇 천명 늘었고 이에 반대하여 교회를 떠난 사람은 몇 백명에 불과하니 결국 흑자이다“ 라는 주장이다.


 


교회에서 사용하는 음악에 사람이 만든 음악을 사용하면 마음에 상처를 받고 반발할 사람들이 분명히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시편만 사용하면 반대자가 있을 수가 없다. 이유는 시편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진정 중생한 교인들이라면 서로 교회가 하나가 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찬송가는 인간이 만들었으므로 첫째 가사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논쟁을 벌리는 사람이  있고  또 작사자 나 작곡자의 신앙문제로 인하여 논난을 펼 소지가 충분히 있다.  그래서 교회 성도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을 길이 없다. 그러나 시편만 사용한다면 어느 누구도 시편을 가지고 왈가왈부(曰可曰否, dispute) 할 사람은 없으며 적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사람이라면 반대할 이유가 없다.


 


시편으로 찬양하는 것은 마치 성경을 읽는 것과 같다. 인간의 요소가 조금도 들어있지 않은 순수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을 찬양하기 때문에 진정 말씀을 사모하는 중생한 성도라면 감사함으로 주를 찬송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가 만드는 찬송가도 성경을 근거로 만들어 졌으니 믿을만하다> 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시편은 하나님의 말씀 바로 그 자체이니 의심의 여지와 논난의 여지가 전혀 없다. 그러나 인간이 작사하고 인간이 작곡한 찬송가는 불완전하다는 말이다.



결론
시편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찬양할 도구로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다.
시편이 아닌 다른 찬송가는 여러 가지 문제를 안고 있다.


  1. 교회 예배 때 사람이 고안해서 만든 찬송가를 사용해도 된다는 하나님의 허락이 성경 어디에 있는가?


  2. 여러 찬송가 중에 어떤 것을 택해야 할지 모든 사람이 만족할 찬송가를 선택할  기준이 어디 있는가? 어떤 찬송가를 택해도 교인 모두가 좋아 하는 것이 아니고 반대자 가 있다. 그리고 그 반대를 막을 길이 없다.  성경을 버리는 자는 처벌해도 찬송가를 버리는 자는 처벌할 규정이 없다.


  3. 교인들이 모두 제각기 찬성 혹은 반대하는 찬송가라면 그런 찬송가로 어떻게 교회의 하나 됨을 이룩할 수 있는가? 더욱이 교회 음악이 타락할대로 타락한 오늘의 교회에서 복음성가 나 Christian rock'n'roll 은 더욱 그러하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음악에 염증을 느끼는가? 시편을 사용하면 이런 일이 절대로 일어날 수 없이 모두 하나가 되어 주를 찬양한다.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에 이의를 제기할 성도는 없겠기 때문이다.


다시 기억하자 찬송가는 내 기분을 내는 노래가 아니다.  세상 "노랫방“에서 울적한 기분을 푸는 그런 노래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알아두자.  거룩하시고 공의로운 하나님 앞에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한 순서 (an integral element) 임도 알아야 한다.


 


Regulative Principle (표준 예배 모범) 이 무너지면 나중에는 “성경도 다시 기록해야  한다“고 주장할 때가 올 것인데 아니 벌써 이미 우리 앞에 와 있다. 요즘은 Skipper's Bible 이나 Gender Neuter Bible 같은 것이 벌써 시장에 나와 호평을 받으며 팔리고 있다.  전자는 선원 성경 인데 시편 23편을 이렇게 시작한다: “The Lord is my skipper I shall not be lost (여호와는 나의 선장이시니 내가 뱃길을 잃지 아니하리로다." 후자의 경우는 요즘은 여권신장(Feminism) 시대이니 하나님을 남성으로 표시하면 공평하지 못하니  중성으로 표하여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It' 라는 것이다. 마치 여호와의 증인이 성령을 ”It" 로 표하는 것과 같다.


 


예배를 소홀히 하던 악한 세대는 이제 급기야 성경도 뜯어 고치려 한다. 뿐만 아니라 프린스톤 대학의 Pagels 교수는 공관복음도 도마복음과 비교하여 여성위주의 복음으로 변개해야 한다고 그의 저서 The Gnostic Gospels에서 주장한다.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가 기다리고 있다.  따지고 보면 요즘의 기독교의 타락은 예배의 타락에 기인한다. 예배를 바로 드리지 못하면 온갖 교리가 모두 타락하고 윤리도 도덕도 가정도, 국가도 교회도 모두 타락한다.  Edward Gibbon 의 “The Decline and Fall of the Roman Empire 로마 제국의 쇠퇴와 멸망“ 이란 책 (총 3권) 제 2권에서 로마제국의 교회의 타락상을 보라,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망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런 현상이다. 오늘도 하나님에게 대항하면 개인이건, 가정이건, 국가이건 교회이건 모두 파괴된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찬송가를 작사하거나 사용하면 지옥에 간다는 말이 절대로 아니다. 사람이 구원을 얻는 것이 찬송가 사용 여부에 있는 것은 아니다. 19세기의 배도자 Charles Finney 이후 exclusive psalmody 를 사용하던 옛 풍습은 사라지고 오늘 우리의 찬송가가 등장하여 오늘에는 오히려 찬송가를 쓰는 편이 정상이고 시편을 쓰는 사람은 “비정상” 처럼 되어 버렸다. 주객이 전도 (主客顚倒, putting the cart before the horse) 된 상태이다. 마치 쟈유주의와 신비주의가 판을 치는 요즘 개혁주의자는 “bigot (속이 비좁은 사람)” 처럼 되어 “무리 가운데 이상한 자” 가 되어 남에게 조소를 당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오늘 Regulative Principle 을 주장하자는 운동이 교계의 한 모퉁이에서 조금씩 늘어나고 있는 것은 천만 다행이다.  OPC 도 그들 나름대로 찬송가를 모두 개편했다. 주로 시편의 내용만 가사로 만든 찬송가를 쓰고 있는데 악기는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OPC 가 사용하는 찬송가는 우리와 같은 찬송가 (hymnal) 이 아니고 Trinity Hymnal 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2009년 총회에서 대폭 수정 취사선택해서 주로 시편을 부르고 있다. RPCNA (Scotland 의 언약파의 후예들, Pennsylvania 주 Pittsburgh 에 본부가 있음) 에서는 교세가 작지만 여전히 Regulative Principle 을 지키면서 예배하고 있다.


 


문제는 인간이 주제넘게 자기가 만든 작품을 하나님에게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거룩한 공예배에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유는 하나님이 그런 자유를 인간에게 주신 적이 없기 때문이며 그런 찬송들이 전에 언급한대로 비성경적인 요소를 내포할 가능성이 많고, 또 그런 찬송은 교인들 간에 찬반 양론으로 분파가 생겨 교회의 통일을 이루기 어렵다는 문제등이 있다.  어떤 분들은 어떤 특정한 찬송가를 싫어하는 분도 있는가 하면 어떤 분들은 복음성가는 무조건 좋고 또 어떤 성도는 복음성가나 요즘의 CCM 은 모조리 반대하는 사람도 있으니 어떻게 교회의 통일 (unity of the Church) 을 기할 수 있겠는가?  이런 분파를 통일하는 유일한 방법은 시편만 사용하면 (exclusive psalmody) 그런 폐단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교회들이 모두 그렇게 하는데 우리 교회라고 해서 못할 것이 무엇인가? 교인들의 마음을 즐겁게 해주어야 교회가 부흥 (숫자적 부흥) 될 것이 아닌가?  이것이 오늘날 대부분 세속화된 목회자들의 목회 철학이고 보면 앞으로 시정될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지금은 모두 악기를 쓰되 요란한, 그리고 텝포가 빠는 음악으로 기분을 달래는 관습이 오히려 정상처럼 되어 버렸으나 (심지어 템포가 없는 뉴에이지운동의 음악도 있고) 본래 하나님의 의도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충분히 설명했다. 지금 당장은 어렵겠지만 늦게라도 주님 오시기 전에 고칠 것은 고쳐야 할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시편만 노래하지 않는다고해서 지옥에 가는 것은 아니지만 성경적인 예배, 성경적인 찬양을 드리자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다.


 


교회 음악에 우리의 분별력이 필요하다.  초대교회 사도, 속사도, 교부들과 종교개혁기의 지도자들, 그리고 19 세기 말엽까지 교회는 <a capella> 형의 exclusive psalmody 로서 Regulative Principle 을 고수 해 왔으나 19세기 말 <대부흥의 물결> 이 일면서 Regulative Principle 은 무너졌고 오늘에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내 기분” 을 더 중요시 하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  영지주의 의 부활과  Postmodernism 때문이다. 이제 앞으로 고쳐질 가망은 거의 없고, 이대로 가다가 주님의 재림을 맞게 될지도 모른다. 모두 깨어서 우리의 믿는 도리를 굳게 하자 (히 4:14하)


 


시편만 노래하는 (exclusive psalmody) 분들은 정당한 명분을 내 세울 수 있으나 찬송가 만 고집하는 분들은 이렇다할 납득할 명분을 내세울 수 없다.  지금은 모두 찬송가를 사용하는 교회가 절대 다수 이고 시편만 사용하는 교회나 교단은 극히 적지만 본래는 반대 였다.   찬송가를 사용하면 지옥에 내려가는 것은 아니다. 단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가? 하는 것이 문제이다. 무엇이든 “내가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려고 이것을 합니다” 라고 말하고 나서 하나님에게 그 일을 행한다고 해서 그 일이 모두 반드시 하나님에게 영광이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또 내게 주신 탈랜트가 음악이니 이 탤랜트는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라고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은사이므로 이것을 가지고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겠다고 해도 그 일이 하나님의 말씀에 부합되지 않으면 그 탈란트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 그 탈란트를 가지고 하나님에게 예배할 때 사용할 찬송가를 자기 마음대로 만들라는 성경말씀이 어디에 있는가?  그러므로 탤란트를 받았다는 그 한 가지 이유만으로 무엇이나 제 멋대로 만들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무엇이든 하나님의 말씀에 부합해야 한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불완전한 사람이 만든 찬송이나 시끄러운 복음성가 나 Christian rock'n'roll 음악이 아니라 <모세의 노래> 와 <어린양의 노래> 만 부를 그날이 닥아 온다 (계 15:3). 그런 노래는 바로 시편에 기록된 노래, 즉 하나님의 말씀에 맞춘 노리이다. 그때는 교회 음악의 진리문제 때문에 얼굴을 붉히며 서로 다투는 일도 없을 것이며 서로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 영광의 날이 하루하루 우리 앞에 다가오고 있다. 우리 모두 그날에 소망을 두고 아름다운 개혁주의 신앙을 만방에 전하자.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를 정화할 때가 되었다. 


 


참고서:  Armstrong, John H. The Coming Evangelical Crisis. Moody, 1996. 198pp.
         Clark, R. Scott.   Recovering Reformed Confessions. P&R, 2008, 384pp.
         Lucarini, Dan.Why I Left CCM.  London: Evangelical Press, 2002, 140pp.


 


글: 김명도 교수
    튤립 교육 선교회
    튤립 신학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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