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강해

예배의 바른 개념

작성자
쥬니어칼빈
작성일
2012-11-08 04:14
조회
4267

오늘 예배를 논할 때 사람들은 예배의 신학보다도 예배의 형태에 관심을 둔다. 다시 말하면 전통식인가 아니며 현대식인가? 하는 것이 논난의 쟁점이 된다.  대개 오늘의 교회는 예배에 대해서 지금 드리고 있는 예배가 성경적인가 하는 문제를 연구하지도 않은 채 다른 교회들이 모두 그렇게 하니까 우리도 그를 따른다고 하는데 이는 매우  무책임한 생각이다. 만일 다른 교회들이 성경과 다른 예배를 드리는데도 그것을 그냥 모방한다면 성직자가 성도들을 속이는 결과가 되고 그보다도 하나님이 비성경적인 예배는 받지 아니하므로 이는 성도들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는 결과가 된다.


 


그런가하면, 어떤 교회는 예배의 양식에 대해 논의를 많이 하고 있지만 참으로 예배에 대하여 바로 아는 사람은 드믄 것 같다. 이웃 교회들이 하는 형태로 따라가는 것이 고작이다.  이제 예배 신학은 현대교회에서 아주 자취를 감추어 버린 지 오래되고 교회는 마치 옛날 사사시대 모양으로 각자 소견에 옳은 대로 예배드리는 경향으로 흘러간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에게 예배하는 사람들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라고 가르치고 하나님이 받으시기에 합당한 예배를 드리라고 말씀 하시고 예배하는 법을 성경에 분명히 가르쳐 주셨다.  성경에 충실한 교회 일수록 예배에 각별한 신경을 쓴다.  성경에 충실하지 못할수록 예배에 관한 감각이 둔하다. 오늘 교계가 혼탁하고 성도가 말씀대로 살지 않는 것은 모두 예배를
바로 드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러 기회에 여기 저기 교회를 방문해 보면 예배 형태가 신앙고백에서 가르쳐주는 정통적 예배는 거의 없고 대개 성경의 가르침은 무시한 채 오로지 사람들의 기분에 맞게 예배를 드리기를 좋아하는 경향이 오늘의 예배풍토이다. 간혹 목사가 성경적인 예배를 드리려고 해도 그 교회에서 힘 있는(?) 제직들이 반기를 들고 이웃 교회처럼 예배하자고 하면 목사가 양보하여 성경에 어긋나는 줄 알면서도 사람들의 의견을 따라가는 교회도 많다. 


 


바울은 갈라디아 1:10에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에게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 었더면 그리스도의 일꾼이 아니 니라” 라고  참다운 목회자로서의 목회 철학을 가르쳐 준다.  개인의 신앙생활도 그러하거늘 하물며 그리스도의 양무리를 주님으로부터 위임받아 책임지고 이끌어가는 목회자가 사람들의 인기에 연연하여 목회 한다면 그는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 사람의 종으로 전락한 사람이다. 따라서 하나님과 맺은 계약을 파기한 사람이다. 목사가 안수 선서할 때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대로 목양할 것을 서약했는데 이를 스스로 파기했으니 하나님에게 책입질 문제이다.  바울의 목회 철학을 우리가 진지하게 배워야 한다.


 


<예배신학> 을 논하기 위하여 우선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이 예배를 어떻게 드렸는지 보도록 하자.  옛날 에덴동산으로부터 성경의 마지막 부분인 계시록의 새 예루살렘에서 예배드리는 모습을 살펴보면 자연히 성경적인 예배의 윤곽이 들어난다.  오늘의 예배와 비교해 보면서 오늘이 예배가 얼마나 타락했는지 깨닫자.  옛날부터 개혁주의 신앙가들은 예배를 매우 소중하게 생각했다. 우리가 생각하기로는 “지금은 은혜시대이니 구약처럼 철저하게 예배하지 않아도 적당히 하나님에게 경배하면 될 것이라” 는 잘못된 인식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 너무 많은데 이는 마땅히 시정되어야 할 태도이다.


 


우선 구약에서의 예배를 보자. 구약에서는 예배를 어떻게 드렸는가?
에덴동산에서의 예배는 간단했다. 타락전의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고 신앙과 순종으로 화답했다. 그러나 타락한 후에는  그렇게 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 순종하지 않고 뱀의 말을 들어 선악을 알게 하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었다. 전 인류의 대표자인 아담은 이렇듯 자기에게 편리하도록 제멋대로 하나님을 떠나 살았다. 그 결과는 아담이 가지고 있던 지. 정. 의가 모두 타락했다.  지 (intellect) 란 진리를 바로 알고 바로 전하는 선지자의 직분을 말함이고, 정 (emotion) 이란 본인과 백성을 위해서 기도하는 제사장의 직분이고, 의(volition) 란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고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며 하나님의 피조물을 다스리는 왕의 직분을 말한다.  이 모든 것이 하루 아침에 타락해 버려서 가치관의 기준이 아주 무너지게 되어 일대 혼란이 야기되었다.  그래도 아벨은 하나님에게 바른 예배를 드렸는데 이는 매우 다행한 일이다.


 


구약성경을 읽으면  처음으로 이스라엘백성이 모여서 집회를 가지면서 예배를 드린 것은  시내 산에서였다. 출애급기 19-23장에는 하나님이 그의 백성과 언약을 맺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데 출애급기 24장에는 이스라엘백성이 하나님에게 어떻게 예배를 드려야 하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예배 형식은 매우 간단했다.


 


1. 이스라엘백성은 번제와 소로 화목제를 드린다. (출 24: 4-6, 특히 5절)
2. 모세가 언약서 즉,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백성에게 읽는다 (출 24:7상)
3. 백성은 믿음과 순종으로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라고 화답한다.   (24:7하-8)
4. 모세와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 장로 70인이 올라가서 이스라엘 하나님을 보니 ...“ 라고 했으니, 이스라엘백성은 그의 대표자를 통해서 하나님에게 화목제를 드린다    (출 24:9-11)


성경에 나오는 예배는 모두 이런 형식에 맞추어져 있다. 예배를 가장 상세하게 기록한 부분은 아마도 역대하 5-7장에 나오는 솔로몬의 성전 봉헌 예배일 것이다  이 기록을 보면 그때의 예배는 방금 위에서 말씀드린 출애급기 24장의 예배의 형태를 그대로 적용시킨 것을 알 수 있다. 구약 역대하 5-7장을 보자:
   1. 솔로몬이 예배 드리기 위해서 이스라엘의 장로들과 각 지파의 두령들 즉 백성들을 회집했다 (대하 5:2-5)
   2. 제사장이 양과 소로 번제를 드려 죄 문제를 해결했다 (대하 5:6)
   3. 이스라엘 백성은 제사장들을 통해서 하나님 존전에 나아갔다. (대하 5:7-10)
   4. 찬양의 시편을 노래했다 (대하 5:11-14)
   5. 솔로몬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다 (대하 6:1-11)
   6. 솔로몬이 중보기도를 했다 (대하 6:12-42)
   7.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 그 번제물과 제물을 불사르고 영광이 성전을 가득히 채웠다  제사장이 그 전에 가득하여 제사장이 그 전에 못 들어갈 정도였다 (대하 7:1-2)
   8. 백성이 감사하여 시편을 노래하였다 (대하 7:3)
   9.  이스라엘백성이 화목제를 드리다 (대하 7:4-9)
  10. 이스라엘 백성이 기쁨으로 은혜 받고  돌아가다 (대하 7:10)


구약성경에 나타난 예배신학을 보면 그 신학이 아주 분명하다
   1.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는 반드시 죄 문제를 먼저 해결한 후였다.
   2.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여 하나님이 그의 백성의 죄를 사하기 위하여 하신 일을 백성들로 하여금 기억 하도록 하며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도록 촉구했다
   3. 하나님의 백성은 그 설교말씀에 믿음과 순종으로 화답하면서 하나님께서 그의 약속하신 대로 백성들을 축복해 주시기를 기도했다.


  이런 구약의 예배 형식은 진정한 예배의 개념을 잊은지 오랜 오늘의 성도들에게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모세는 시내 산에서 하나님이 보여준 양식대로 성막을 지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히 8:5; 출 25:40).  이 성막의 모양은 그리스도에게서 완성되었다. (히 7-10장). 그러므로 오늘 성도들의 예배는 모세가 보고 따른 영광스럽고 거룩한 예배 형식에 참여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거룩한 예배를 어디서 찾아 볼 수 있는가?



이제 신약성경에 나타난 예배를 보도록 하자
일반적으로 목사들이 알고 있는 것은 신약의 예배 양식은 유대인들의 회당의 예배를 모방했다고 생각하는데 이는 유대인들의 회당의 목적을 오해한 사람들이다.  주후 70년 예루살렘의 성전이 파괴되기 전에는 아무도 회당이 예배하는 곳이라고 생각지 않았다. 이유는 예배란 반드시 희생의 제물을 드리는 것이 필수였기 때문이다. 구약에서는 번제물이 항상 따라다녔다. 죄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예배할 때 죄 문제를 심각하게 다루는 일이 중요한데도 어느 널리 알여진 대형교회 목사는 교회에서는 죄 문제를 다루지 말라고 강조한다. 그 목사는 지난 2007년 부활절날 예배도중 세례 받을 사람들은 강대상 앞으로 나오라고 하여 예배에 참석한 사람들 중 세례받기를 자원하는 200명에게 세례를 배풀었다고 근착 Christianity Today 잡지가 알려준다. 속사람이 중생하지 않고 받는 세례는 아무 의미가 없다. 주님이 세우신 성례식 두 가지 중의 하나가 세례이다.  이는 마땅히 교회 당회에서 문답을 거치면서 본인의 신앙을 점검하고 베풀어야 할 일이다.


 


유대인의 <회당, synagogue> 이라고 하는 곳은 교회학교였는데 그 목적은 유대인들로 하여금 성전에서 예배하는 법을 가르치며 준비시키며 훈련시키는 곳이었다. 성경은 예수님과 사도들이 성전과 회당에 자주 드나들었다고  기록하지만 그곳에서 예배들 드렸다고는 말하지는 않는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지방 수가성을 지나가실 때, 우물가에 물을 길러 나온 여인을 만났는데 여인이 예수님에게 “예배는 그리심 산 이나 예루살렘 중 어디서 예배를 드려야 합니까?” 라고 물으실 때, 예수님께서는 <아무 회당이나 편한대로 가서 예배하라> 하시지 않고 메시야가 오시기 전에는 오직 한 군데 즉 예루살렘이었으나 그가 오신 다음에는 예배하는 장소가 변했다고 말씀 하신다 (요 4:21-23). 그 예배는 성삼위 하나님에게 드리는 경배이므로 신령과 진정으로 드릴 것을 강조하여 말씀하셨다.


 


사도들은 교회가 <새로운 성전> 이라고 가르쳐 준다 (고전 3:16-17; 벧전 2:5) 그리고 구약의 화목제의 의미를 성찬식에서 찾는다 (고전 10:18). 회당에서의 설교와 기도는  사도들의 예배 의식에 어느 정도 영향을 준 것 같다.  그러나 예배에 대해서 가장 많이 언급하는  요한 계시록에 보면 예배의 형식이 성전에서의 예배 형태를 그대로 따르고 있음을 본다.


 


사도요한이 계시록에서 말하는 환상을 보면 모세와 솔로몬이 예배드리던 모습 그대로 이다.
 1. 예배 드리려고 회집한다 (계 4:1-11)
 거룩한 백성들이 모여서 하나님을 창송하며 예배드린다. 역대하 5:2-5 에 적힌 말씀과 같은 형태이다. 보좌에 앉으신 이가 있고 보좌에 둘려 24장로가 앉아 있다. 이들은 하나님에게 경배 드리기 위함이다.


 2. 죄 문제를 거론하고 해결한다 (계 5:1-7)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책이 있는데 아무도 그 책을 펼 수 없으므로 사도 요한은 운다. 그 책에 무엇이 기록되어 있길래 요한이 우는가? 그 책에는 역사에 관한 하나님의 목적이 적혀 있다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 즉 구속사 Redemptive History 는 희생을 통해서만 계속할 수 있다.  오직 죽임당한 하나님의 어린양만이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행한 목적을 선포하기에 합당하신 분이다.


  3. 하나님 전에 나아가며 기도 한다 (계 5:8)
     하나님의 백성은 이제 그의 대표자인 24장로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


  4. 찬송시를 노래한다 (계 5:9-14)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룩한 구속을 찬송하는 찬송시를 노래한다.
그리고 다음에 열거하는 네 가지는 계시록에서 5번이나 반복한다.  계시록에 보면 <일곱>이라는 숫자를 이용하여 일곱 나팔, 진노의 일곱 대접 등을 말하는데 다음과 같은 사건의 순서대로 매번 반복됨을 본다. 그 공통으로 반복되는 네 가지란 무엇인가?


  5.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설교하는 일
  6. 기도하는 일
  7. 하늘이 제단을 태우고 영광이 성전을 채우는 일
  8. 찬송시를 노래하는 일


이런 여러 가지가 요한계시록에서 어떻게 반복되어 기록되었는지 보면 조금 전에도 언급했지만 계시록의 <일곱> 이라는 숫자가 들어가는 재앙에 모두 들어있다는 것이다. 가령:


    1. 계시록 6:1- 8:5 에 나타난 구절에서 일곱 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데  성도의 찬송과 기도로 이어지고 끝에는 하늘에서 천사가 단위의 불을 담아다가 땅위에 쏟으니 뇌성과 지진이 난다는 말로 끝난다. 즉 제단으로부터 불이 내려오는 것으로 끝난다.
    2. 계시록 8:6- 11:19에 나타나는 일곱 나팔은 하나님의 말씀 여기서는 심판의 말씀을 선포하고 성도의 기도와 하늘의 성전으로부터 오는 빛과 우레 소리로 끝난다.


    3. 계 12:1-15:8에 기록된 일곱 이적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모세의 노래와 어린양의 노래, 그리고 주의 영광이 성전을 채우는 것으로 끝난다 (15:8).


    4. 계 16:1-21에 기록된 일곱 대접을 보라,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불이 하늘에서 내려오고 사람들은 아무도 거룩한 성전에 들어갈 수 없으니 잠잠한 것으로 끝난다.


    5. 계 17:1-19:5 에 나타난  바벨론의 멸망을 그리는 장면도 처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성도들의 찬송으로 끝난다.


    6. 화목제가 계시록 19:6-10, 17-21절에 기록되었는데 두 잔치에 초대함을 본다, 첫 잔치는 성도들만을 위한 어린양의 혼인잔치 이고 둘째 초대는 하나님의 큰 잔치인데 이는 공중의 새들을 위한 (19:17)  것이다. 어린양의 혼인 잔치는 축복의 잔치이고  하나님의 큰 잔치는 저주와 심판의 잔치이다 ,끝으로


    7. 계시록 20장, 21장 22장에 나타난 축도를 보라. 마귀와 마귀를 따르던 자들은
모두 저주를 받는데 반하여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축복을 받는다.


한마디로 말하면 계시록은 우리가 거룩한 예배를 드리면서 살아가는 사람들로 나타내 주고 있다.  거룩한 예배가 언제 시작되었는가 하면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가 지성소에
들어간 때부터 시작되었고, 그의 마지막 심판이 올 때 끝이 난다. 그 때는 믿는 성도가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의 축복에 들어가게 된다.  다른 말로 말하면,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는 설교를 들으면서 살아가는데 하나님은 그의 설교를 통해서 역사를 향한 그의 목적을 지금도 주의 종들을 통해서 선포하고 계시다. 이런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선포되어지는 것이 예배이어야 함은 말할 것도 없다.



오늘의 예배 형태는 어떤가?
우리는 지금까지 구약의 예배와 사도들의 예배의 개념, 그리고 계시록에 기록된 예배가 어떠한가를 보았다. 오늘 우리가 드리는 예배를 성경에 조명해 보자,  오늘 우리가 주일마다 드리는 예배는 이런 거룩한 예배에 참여하는 것인데 예배를 드릴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공로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  그러므로 예수 없는 예배는 있을 수 없으며 하나님에게 나아갈 길이 없는 것이다. 주님말씀하시기를 요한복음 14:6에서 “나로 맒지 아니하고는 아버지께 나갈 자가 없다” 그 하셨다. 딤전 2:5에는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중보자는 인간 예수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봉독하고 설교하는 말씀을 들을 때 우리는 언약의 하나님이 그의 약속을 지키심을 알아야 하며 우리는 끝까지 인내하며 믿음을 지켜야 할 것을 깨달아야한다.  우리가 충성하면서 하나님에게 자비와 사랑을 베풀며 그의 언약으로 우리를 감싸달라고 기도할때 그 기도는 마치 아름다운 향기처럼 하늘의 보좌에 상달된다.  구약에서 번제를 드릴 때 불이 내려와서 제단을 태웠던 일을 본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할 때 불을 내려 보내어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는데 이는 문자 그대로의 불이 아니라 성령을 말하는데 성령은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축복을 주시고 하나님의 원수에게는 심판을 내리신다.


 


우리는 성찬식에 참여할 때,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참여하게 되는데 물론 성찬식은 우리의 죄를 없이해주는 의식이 아니지만  그 예식에 참여함으로 주님의 십자가와 함께 나도 죽어 죄를 멀리하게 된다.  성찬식은 구약의 유월절의 상징이지만 구약의 모든 화목제를 완성하는 잔치이기도하다.  예배는 하나님의 축복으로 끝나며  우리로 하여금 위로부터 내리는 주님의 은혜와 성부의 사랑하심과 성령의 감동을 받아 세상에 나가서 하나님의 예배하는 언약의 백성으로 힘 있게 살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다시 한 주간을 세상에서 지내고 다시 교회에 나와서 예배들 드린다.   비록 잘못되어가고 퇴폐적인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지만 우리의 정체는 거룩한 예루살렘에 살고 있다는 진리를 다시금 새삼스레 상기하면서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야 한다.  우리의 삶 전부가 예배이다. 인류의 모든 역사가 거룩한 예배에 참여하기 때문이다.


 


결론
기원 2세기부터 17세기에 이르는 기간 동안 모든 정통적인 교회들은 이런 형태로 이런 의미로 예배를 드렸고 그들의 예배에 관한 인식도 이와 같았다..  종교개혁기에 들어와서는 예배에 대해서 특별한 경외감을 가지고 위에서 설명한 것과 같은 인식으로 예배를 존중하며엄숙한 예배를 드렸다. 하나님에게 나아가 하나님과 교통하는 시간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성경에서 명령하신대로 예배를 드렸다. 악기도 사용하지 않았다. 원래 예배 시에 악기를 사용하지 않았다.  칼빈도 악기를 사용하지 않았고 성경의 시편만 노래했다. 


 


우리가 신봉하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도 제21장 <예배와 안식일에 관하여>에서 예배의 내용을 설명하면서 시편만 노래하도록 지시 한다 a capella로 불렀다..  RTS 의 Orlando 분교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치는  John Frame 교수는 그의 책 Music in Worship 이라는 책에서  장로교가 원래의 예배는 악기를 쓰지 않고 시편 을 반주 없이 a capella로 불렀던 일을 인정하고 있다.  더 분명한 자료는 서부 Westminster 신학교 교회사 교수인 Scott Clark 가 쓴 Recovering Reformed Confession (P&R, 2008) 이라는 명저 일 것이다. 이 책에는 <예배와 음악>에 대해 어느 신학자보다 연구를 많이 한 흔적이 보인다.


 


그럼 언제부터 교회에서 시편만 노래하기를 중단하고 하나님 찬양에 반주를 도입하여  찬송가를 부르기 시작했는가 하는 질문이 나온다. 미국의 청교도가 1620년에 미국에 건너온 것은 우리가 잘 아는 사실이다. 이들은 찬송가를 부르지 않았고 장로교 전통대로 시펀만 노래했다.  그러나 18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미국의 기독교 교계에는 새로운 바람이 불어닥쳣고 상당히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그 이유는 18세기 중엽부터 일어난 미국의 제1차 대각성 운동 때문이다.


 


미국의 <제1차 대각성운동>은 1730년대부터 시작되어 그로 인하여 프린스톤대학을 세우는  좋은 면도 있지만 한편 교회 예배 면에서 보면 상당히 변질된 방향으로 흘러갔다. 대각성 운동이 일어나게 된 동기는 청교도들의 후예들 이민 2세 3세들이 신앙을 버리고 타락하여 돈벌이에만 급급하여 교회생활을 등한히 하다 보니 교회가 영적으로 침체되어 New Jersey 주 Raritan에서 목회하던 화란계 목사 Jacob Frelinghuysen 과 William Tennent 그리고 그의 아들 Gibert Tennent 등이 회개를 외쳤고, 특히 Frelinghuysen 목사는 Danger of Unconverted Ministry 라는 설교로 노방전도를 하며 목사들을 일깨웠다. 회개하지 않은 목사들의 사역의 위험성 이라는 이 설교는 도처에 퍼져 나갔고 Massachusetts  주 Northampton에서 목회하던 Jonathan Edwards 의 호응을 얻게 되었다. 


 


뒤를 이은 Charles Finney 목사는 부흥이 아니라 부흥주의를 도입하여 처음으로 <찬송시는 너무 단조롭다> 는 이유로 흥을 부추기는 Issac Watts 의 찬송가를 많이 도입했다. 뒤를 이어 Chicago 의 Billy Sunday D.L.Moody 등도 호응하여 부흥주의를 꾀하는 목사들은 너도 나도 앞을 다투어 시편만 노래하던 옛 예배로부터 새로운  양상 즉 찬송가 가사를 별도로 쓰고 누군가가 곡을 붙인 찬송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찬송가의 제왕이라고 불리는 Isaac  Watts 는 말할 것도 없고, 미국의 Fanny Crosby 와 영국의 Charles Wesley 등이 앞을 다투어 찬송시와 찬송가를 만들어 교회에 보급했다.


 


물론 시편을 노래할 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든 것은 사실이고 그 후에 이런 추세는 크게 유행하게 되어 교회 음악은 이로부터 찬송가 일변도로 흘러가서 오늘에는 Christian Rock and Roll 이란 이름으로 모든 요란한 악기를 동원하는 형태로 이른바 CCM 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Christian Rock 'n' Roll 이라는 말 자체가  oxymoron (모순 어법) 이다.
그런 것은 존재할 수 없다. “거룩한 쓰레기” 란 말이 존재할 수 없듯이 말이다.


 


몇 년 전 미국 서부 Los Angeles Civic Center에서 일어난 일이지만 한국 선교 100주년을 기념하는 집회에서 너무도 음악이 요란스러워서 많은 참석자들이 예배의 타락에 분개하면 퇴장한 적이 있었다.  오늘 예배를 바로 아는 사람이 과연 목사들 중에 과연 얼마나 될까?  몰라서 이행 못하는 것인가? 아니면 알고도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는 것인가?  어느 편이든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가증한 것이다.


 


오늘의 예배는 모두 사람들의 기분을 내는 것으로 만족한다. 이것은 소위 <열린 예배>라는 극히 비성경적인 예배 형태에서 절정에 이른다.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신학생들의 말을 들으면 어떤 열린 예배에서는 복음성가를 얼마동안 노래하고 설교는 생략한다고 하니 이것은 성경에 나오는 예배와는 아주 다른 예배형태이다. 예배에 말씀이 없으면 사람만 모여서 기분을 내다가 가는 것이요 하나님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모임으로 전락한다. 교회는 하나의 사교장으로 변해 가는 것이 오늘의 예배이다.


 


교회에 출석하다가 어느 날 교회를 나오지 않는 사람들을 상대로 설문조자를 했더니 이유는 “너무 지루해서” 라고 응답했다고 한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지루한가?  하박국을 원망하는 하박국선지가 하나님을 만나니 두려워서 입술이 떨렸다고 했고, 욥이 하나님을 만나매 입숙을 가리웠다고 했고,  이사야가 하나님을 만나니 자기를 저주하면서 하나님 앞에 부복했다.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날 때 “지루했다” 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가? 


 


교회에서  성경대로 예배드리는 것을 “지루하게 생각하는 사람” 은 아직 거듭나지 못한 사람이요 이런 사람들은 아무리 <크리스챤> 이라고 자처하고 직분을 자랑해도, 결코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예배를 통해서,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면 기쁘고, 떨리고, 감격해 한다. 성경의 인물들이 모두 그러하다. 절대로 “지루한 감“을 느끼지 않는다. 예배를 지루하게 여기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싫어하는 사람들이다. 예배는 어디까지나 <시은자 중심> 이지 절대로 <수은자 중심> 이 아니라는 점을 확실히 알아 두자,


 


초기의 청교도들은 어린이와 같이 주일 예배를 드리면서 목사가 2 시간 설교해도 절대로 “지루한 감‘을 갖지 않았다. 눈물을 흘렸다. 그 눈물은 “지루한” 눈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게 대한 감사의 눈물이었다.  예를 들러 요나단 에드워즈가 1771년 7월 8일 Connecticut 주 Enfield 라는 마을에 있는 회중교회에서 신명기 32:35 한 절을 가지고 “진노하신 하나님의 손안에 들어있는 죄인들“ 이라는 설교를 할때 모습을 보십시오. 모두 통곡하며 죄 때문에 울었습니다. 너무 울기 때문에 설교자는 “Silence, please" 라는 말을 연발하며 진정해 지기를 기다려 설교를 계속하는 바람에 40분 설교가 1시간 반이 되어서야 끝났는데 오늘 이런 성도들이 어디에 있는가?  없다.


 


18세기 미국의 각성운동이 일어나고 Charles Finney 의 부흥운동이 일어날 때부터  악기를 도입하여 감정주의 일변도로 변해 버렸고 당시 성직자들은 그런 변화에 죄의식을 느끼면서도 원래의 시편을 노래하는 a capela 형태로 돌아가기를 거부했다. 이유는 “하나님”이 지으신 시편의 찬송시를 반주 없이 노래하는 것보다 새로 “사람이” 작사하고 작곡한 찬송가를 부르니 “기분이 좋아서“ 사람들이 그 편을 더 선호하기 때문이므로 사람들의 기분을 맞추기 위함이었다.


 


이것은 쉽게 증명할 수 있는데 오늘 전통적인 찬송가보다 복음성가를 더 선호하는 성도들이 절대 다수를 점하고 있는 것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보다 자기 자신의 즐거움을 더 사랑한다. 그것이 점점 악화되어 오늘에는 교회가 시끄러운 극장처럼 되어 버렸고 사람들은 예배를 드리기보다는 다분히 기분을 풀기위해서 교회에 출석하는 경향으로 변해 버렸다.


 


<사탄>의 무서운 속임수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경배를 받아야 할 의무가 없으신 분이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그런 예배를 거절한다. 예배를 거절당하면 하나님의 저주만 있을 뿐이다. 예배의 중요성을 알라, 예배의 중요성을 알려면 하나님의 속성을 알라, 하나님의 속성을 알려면 무엇보다 하나님은 “절대 거룩하신 분” 임을 제일 먼저 알라.


 


<거룩하다> 는 말의 의미부터 먼저 알자. “성별” “구별” 이란 말이 일반 성도를 지칭하는 “성도, hagios" 의 의미이지만 하나님에 관하여 <하나님의 거룩함> 을 말할 때는 ”피조물과는 전혀 다른“ 의 의미를 갖는다.  <절대> 라는 말은 <비교할 대상이 없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독특하여 (unique Being) 스스로 계신분이다.  하나님의 속성 중 제일 먼저 손곱히는 것이 그의 ”거룩성 Holiness of Sovereign God"‘ 이다.


그에게 나아가는 자는 그가 거룩한 하나님임을 제일 먼저 인정해야 한다. <거룩한 하나님>은 <거룩한 백성>을 요구하며 백성들이 거룩해 지기를 요구하신다 (벧전 1:13-16).


 


예배에 대한 바르지 못한 개념은 음악이나 설교만이 아니다. 집회도 마찬가지 이다.
지금으로부터 20년 전만 해도 일부 예배, 2부 예배, 3부 예배는 없었다. 간혹 2부 예배가 있다면 장소가 협소하여 동시에 많은 교인들을 모두 수용할 수 없어서 부득이 두 번 예배를 드린 적은 간혹 있었다. 그러나 요즘은 그런 이유가 아니고 본인의 편리를 위해서 예배 시간을 정하여 예배한다. 일부 예배나 2부 예배에 참석하여 예배드리고 나서는 주일의 나머지 시간을 세상일에 바친다. 이것은 비성경적이다. 


 


사도신경에는 “성도들이 서로 교통하는 것과” 라고 고백한다.  성경에 성도는 항상 <복수. hagioi> 로만 쓰인다. “시도산경” 을 원문인 Latin 어로 보라. “Communicatio sanctorum" 이다. 즉, 복수라는 말이다.  이유는 성도들은 그리스도와 신비적으로 연합되어 하난의 유기적 공동체로서 서로 함께 모여서 서로의 짐을 나누어지며 같이 덕을 세워나가야 한다.  또 한 가지 분할하여 예배를 드리는 일이 그릇된 이유는 아침 일찍 예배를 드리고 주일의 남는 시간을 내게 유익한 세상일을 하는데 보내겠다는 태도이다.  미국의 정통장로교인 OPC 교단에서는 성일을 범하면 목사에게 중징계 즉 divest 한다. 방언을 해도 divest 한다. 해임한다는 말이다.  오늘 주일 성수 개념은 모두 사라지고 모두 제멋대로 하나님의 이름만 부르고 나서는 모두 내 멋대로 자기 기분 좋은 대로 살아간다. OPC 교단은 금년 (2009) 년 총회에서 찬송가를 시편 중심으로 개편했다. 퍽 잘 한 일이다.


 


세속주의 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John .Robinson 은 그의 책 Honest to God 이라는 책에서 Love God and do whatever you want to do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고 난 다음에는 무엇이든 하고 싶은 일을 마음대로 하라“ 라고 말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다고 말하고는 마음대로 살아가라 고 가르친다. 독일의 Dietrich Bonhoeffer 는 “예수를 교회에 가두지 말고 세상에 보내라” 고 한다. Harvey Cox 라는 Harvard 신학교수도 그의 Secular City 라는 책에서 같은 말을 한다. 이런 무서운 세속신앙이 오늘 기독교 교계를 타락시키는데 이는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일이다.


 


이상에서 우리가 본  성경적인 예배 형태를 오늘의 모든 교회가 따른다면 요즘에 한창 시끄러운 예배 형태에 대한 논쟁은 필요 없게 될 것이다.  우리 예배가 거룩해 지면 우리의 일상생활에서의 삶도 따라서 거룩해 진다. 오늘 사회에 부조리가 심하고 죄가 더해가는 이유는 모두 예배에 대한 바른 이해가 없고, 바로 예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두려워 할 자로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이다.


 


최근에 들어온 소식은 한국 서울의 모 대형교회 원로목사는 교인들이 하나님의 나라 확장을 위해서 하나님에게 정성스려 바친 그  많은 액수의 헌금을 가지고 평양에 가서 <평양 과학기술대학> 을 세우고 그 교정에 <김일성 영생탑> 을 세웠다고 한다. 이는 하나님에에 용서 받지 못할 죄악이다.  그 “유명한” 목사는 제2계명도 모르는 것 같다.


 


중세에는 로마 천주교 신부들이 너무 무식해서 상부에서 가끔 신부들을 대상으로 “십계명” “주기도문” “사도신경” 등의 시험을 치루었는데 낙제하는 신부가 수두룩했다고 William Stevenson 이 쓴 Story of Reformation (종교개혁 일화) 란 책에서 말하고 있다. 오늘 기독교 교계에는 이보다 더 한 “무식한” 목사들 이 수두룩하다.  구약 사람들은 칼로 나무를 깎아 우상을 만들고 복을 달라고 그 우상에게 절했지만 요즘 목사들은 칼과 가위를 들고 성경을 난도질 한다.  무서운 “배교, apostasy" 가 판을쳐도 노회나 총회는 물론이고 일반 성도들은 “아멘” 만 연발한다. 악하고 폐역한 세대이다.  렘 5:30-31을 읽어보라, 모두 하나님의 거룩한 속성을 몰라서 혹은 정면으로 무시해서 일어나는 죄악상들이다.


 


예배에 대한 바른 개념을 가지고 살아계신 하나님에게 바로 예배드리자. 하나님은 예배드릴 규칙을 성경에 기록하셨다. 성경대로 예배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그 예배를 받지 않으신다.  신령과 진리로 예배해야 한다.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 순종하며 언약의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살아가는 예배가 아니라면 예배는 시간 낭비가 될 수 밖에 없다.  이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유대인의 회당에 가면 실내 정면 “토라, 모세오경” 을 간직해 두는 벽에 이런 글귀가 써 있다. “너희가 뉘앞에 섰는가를 알라”   유대인들은 회당에 갈때마다 이 말씀 앞에 떨며 예배를 드린다.  우리 하나님은 절대 거룩하시고 “소멸하시는 불” 이시다. 그러므로 <절대 거룩>을 요구하신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라고 명령하신다.


 


오늘과 같은 배교 (apostasy)가 득세하는 이 패역한 시대에 우리들 개혁성도는 예배에 관한 바른 개념을 갖고 바로 예배드리는 성도가 되자.


 


글: 김명도 교수
    튤립 교육 선교회
    튤립 신학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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