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신학
교회의 정체성과 사명
교회의 정체성과 사명(The Identity and Mission of the Church)
Dr. Abraham van de Beek / 번역: 안명준박사(평택대)
1. 정체성의 우위
주제에 있는 단어들의 순서는 처음에 정체성이고 그 다음에 사명인데 내가 회원으로 있는 화란 개혁 교회 신학의 특징을 뒤집은 것입니다. 그 총회는 새로운 교회 규정을(Church Order) 준비하는 동안에 20 세기 중반에 광범위한 논의를 걸친 후에 교회는 세상의 봉사를 위하여 부름을 받았기 때문에 교회의 사명은 교회의 고백을 앞서야만 한다고 결정을 내렸습니다. 하나님의 최종 목적은 교회를 조직화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그의 왕국을 실현시키는 것입니다. 교회란 단순하게 이 목적을 위한 하나의 도구입니다. 그래서 먼저 우리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게 되면, 그때 교회가 어떻게 이것을 위한 하나의 도구가 될 수 있는지를 알 수가 있으며, 우리는 어떻게 교회의 정체성이 교회의 고백에서 표현한 대로 정의되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화란 개혁 교회처럼 세계 교회 협의회(WCC) 또한 하나님의 나라를 그것의 활동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그 협의회는 정치적이며 사회적 주제들에 매우 많이 연루되었으며, 평화, 정의 그리고 창조의 보전을- 실제로 더 나은 주제로서 땅의 생태적 균형의 보전을- 목표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뒤돌아보면 이런 방식은 많은 열매를 맺지 못하였습니다. 세상으로 향한 이 전환은 기독교인의 삶과 영성에 대한 고전적 주제들을 희생시켰습니다. 그것은 기독교인들에게서 인내력을 박탈하였고, 그 목표들이 성취되지 않았을 때, 또 그 목표에 반대적으로 일이 일어났을 때 기독교인들을 실망 시켰으며, 형식적 목표가 달성되었을 때, 그것은 기독교인들을 어리둥절케 하였습니다. 더욱이 많은 논쟁이 있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교회 지도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선택에 대하여 걱정을 하였으며, 특별히 동 유럽에 있는 공산주의 정권들에 관련하여 내린 결정들에 대하여서 걱정을 하였습니다. 서 유럽에서는 교회들이 세속 사회에 연루된 것이 교회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리도록 큰 영향을 주었으며, 세속화의 과정을 자극시켰습니다. 그래서 반 세기 후에 교회는 질과 양에서 점점 강하지 못하였고, 점점 약해 졌으며, 엄밀하게 말하면 그 이유 때문에 교회는 교회가 50년 전에 목표로 삼았던 과업을 완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한국에 있는 숫자나 영향력이 거대한 교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믿음의 기초와 중심 그리고 그의 사역의 선포, 그의 십자가와 부활을 느슨하게 하지 않도록 하는 하나의 경고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명과 정체성의 순서를 바꾸어야만 하는 것은 단지 그 이유 때문도 아니며 더욱이 그것이 첫 번째라서 그런 것도 아닙니다. 기독교의 참된 뿌리가 이것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신약성경과 초대 교회에서 이것과 반대되는 순서를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이 기간에 교회의 우위는 분명히 교회의 정체성에 있었습니다. 우리는 기독교 사상의 초기 방법을 따라야만 합니다. 교회의 정체성은 그리스도에 의하여 주어집니다. 그리스도안에 있는 것 바로 이것이 기독교인들의 정체성입니다. 이 정체성은 교회의 첫 번째 특징입니다. 그리스도안에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정체성과 관련이 있지, 사명과 관련이 없다는 사실은 신약 성경의 서신들 안에 있는 말들의 사용으로부터 분명해 집니다. 사명은 즉 보내는 것은 특별한 임무를 위해서만 사용되었지, 전반적으로는 교회를 위해서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사도들은 복음을 전파하도록 보내어 졌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믿게되고 그리스도의 몸에 연합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사명은 교회를 세우는 결과를 만들었습니다.
더 많은 예화가 부른다는 라는 단어족에(the word family) 있습니다. 교회의 사명과 부르심은 현대 사상에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현대사상의 맥락에서는) 교회는 세상을 위한 봉사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또 이 부르심은 정확하게 교회의 사명이며, 이 사명에서 교회의 정체성이 나오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신약 성경에 있는 '부른다' 그리고 '부르심'이라는 말들을 분석해 본다면, 그것들은 이런 의미로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세상에서 부름을 받아 그리스도의 공동체로 들어옵니다. 사도는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고전 1:9) 하신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하여 우리 복음으로 너희를 부르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살전 2:14).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딤전6:12).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놀라운 빛으로 오는 방법을 가르키기 위하여 그 말은 주로 절대형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당신은 부르심을 받았으며, 그러므로 당신은 기독교인입니다. 당신은 뭔가를 하기 위하여 크리스천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당신의 부르심은 기독교인이 되는(be) 것입니다. 당신이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 즉 당신의 정체성은 당신의 부르심입니다. 그래서 정체성이 우리의 첫 번째 관심입니다.
2.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 안에서
신약 성경에 따르면, 우리의 정체성은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과 교제입니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우리의 정체성은 그의 정체성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론은 기독론 없이 발전될 수 없습니다. 교회의 참된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알아야 한다. 물론 이 강의에서 기독론의 전체적 윤곽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공통된 신조인 니케아 신조를 보면 충분합니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신 하나님입니다. 빛으로 나오신 빛입니다. 참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신 참 하나님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그리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인간이 되셨으며, 그리고 그는 성육신으로부터 승귀에 이르는 길을 따랐습니다. 그가 세상에 오신 핵심은 그의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바울은 하나의 메시지로 복음의 모든 선포를 요약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그가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라는 것입니다. 정통 교회 교부들은 전능자 하나님이며, 빛으로 나오신 빛이며, 우리의 인간 존재로 태어나시고, 죽기까지 하신 그 분을 증거하는데 있어서 결코 지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을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죽음을 경험 하셨습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말하기를 십자가가 아닌 부활이 사도적 복음 선포의 핵심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맞습니다. 부활이나 혹은 다른 방법을 반대하여 십자가를 업신여기는 것은 잘못된 모순이기 때문에 물론 맞습니다. 그러나 오직 그것은 우리가 십자가는 생명 그 자체이신 거룩한 주님의 십자가인 것을 망각할 때나 가능합니다. 부활하신 분은 십자가에 못박히신 분과 동일하며 지금은 하늘에 계신다는 것을 망각할 때나 가능합니다. 만일 우리가 생각하기를 부활이 땅에 있는 십자가를 취소한다면, 우리는 십자가의 영향과 실재성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세상에 대한 죽음과 정죄로서 십자가 그 안에서 인류가 세상에서 당하는 운명과 죄를 하나님 자신이 담당하십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백성을 위하여 처소를 준비하기 위하여 하늘에서 영생으로 높임을 받으셨다. 그들은 그가 있는 곳에 있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영광을 함께 나눌 것이다. 그는 세상의 기초가 세워지기 전부터 계속해서 계셨습니다. 이것은 하늘에 있는 하나의 존재입니다. 거기에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그의 부활은 다시 한번 땅으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로 가는 것이다. "너희는 더 이상 나를 보지 못하리라"고 그가 말씀하신 바와 같다. 그리스도의 나타난 영광은 하늘에서 보여집니다. 땅위에서 그의 영광은 항상 인간 육신에 가려져 있었습니다. 빌립보서 2장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인간의 육신의 형상에서 보여 집니다. 고대 그리스 사상에 따르면, 그 형상은 존재의 본체를 정의합니다. 하나님의 형상, 즉 하나님의 참된 본체시나 종의 형상으로 나타나사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래서 땅위에서 빌라도가 "이 사람을 보라" 라고 말했을 때 그가 지적한 이분 안에서 우리는 참된 하나님를 만납니다.
기독교 공동체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나눕니다. 그 정체성은 그리스도에 의하여 정의됩니다. 그 의미란 교회의 가견성이 땅위에서 그리스도의 인간적 모습의 특징을 가지는데 그의 고통을 나누는 것입니다. 기독교 예배의 핵심적 의식은 주의 성찬입니다. 이 의식은 주님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최후의 만찬에 모이게 됩니다. 바로 이 최후의 만찬은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옛 사람이 죽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의 삶은 세상에 대하여 죽어가는 것입니다. 날마다 여러분의 생명을 잃는 것입니다. 복음은 말합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16:24, 25).
이것은 세례에 의해서도 표현되어 있습니다. 세례란 사회의 좋은 시민이 되는 의식도 아니며, 세상을 안전하게 통과하기 위한 보험 정책도 아닙니다. 오히려 세례란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주의 성찬이 그의 죽음을 기념하는 것처럼, 세례란 이 공동체 즉 그의 죽음의 공동체 안으로 들어가기 위한 첫 번째 의식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그와 함께 죽음으로 장사되었다고 말합니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그의 죽음을 나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세상 출생에서 하늘 나라까지 하나의 직선을 그리는 것이 불가능하다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례의 문맥에서는 다른 단어들이 나타납니다. 회심, 중생, 새 생명, 육 대신 영입니다. 교회의 공동체를 나눈다는 것은 자연 인간의 생명에 있는 당신의 기초를 잃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지 않은 것에 주목하기를 바랍니다.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목숨)을 얻으리(save)"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목숨)을 찾으리라(find)"고 하셨습니다. 당신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나눔으로써 당신이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의 삶은 계속적으로 죽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부 이레니우스가 말한 것처럼 기독교인이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은 영원히 그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나눈다는 것은 또한 그의 생명을 나누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 분 자신을 나누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의 몸입니다. 우리는 그 안에 있습니다. 그의 존재는 우리의 존재입니다. 우리의 존재는 그 분에 의하여 정의됩니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교회의 정체성은 교회의 주님에 의하여 완전하게 정의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은 그 안에 있습니다. 우리의 본질은 그의 생명인데, 우리의 자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의 금욕은 부활에 반대되지 않습니다. 이 둘은 하나이며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옛 생명에 죽고 그리스도의 영생을 얻게 됩니다.
그리스도가 하늘에서 높임을 받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의 궁극적인 존재는 하늘에 있지 땅에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는 우리가 땅의 것을 생각치 말고 그리스도가 계신 하늘에 있는 것들을 생각하도록 말합니다. 우리의 본향은 하늘에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땅위에 있다라는 것은 외국 땅에 거주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세상에 속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땅위에 살고 있지만,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하늘에 있습니다. 바로 그곳에 우리 주님이 계십니다. 기독교인들은 나그네들입니다. 땅위에서 그들은 자신들이 외국인들로 생각할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과 자신들의 부모들이 추방된 고향 땅에 대하여 아는 사람들과 같을 것입니다. 그것은 망명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곳은 당신이 좋아하는 장소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곳은 몇 가지 이유 때문에 당신이 있어야만 하는 곳입니다. 당신은 집으로 돌아가기를 항상 고대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으로서 이것은 천국이 우리를 위한 우리의 목표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천국은 그리스도가 그곳에 계시기 때문에 우리의 유일한 집입니다. 그와 함께 연합하는 것은 우리의 궁극적 희망입니다. 왜냐하면 그 분이 우리의 궁극적인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만일 이 땅위에 있는 장막이 무너지면, 그가 하늘에 거처를 가지고 있는데, 비록 그가 세상에서 교회가 싸우는 것을 돕기 위하여 땅에 있어야 할 이유가 있음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를 갈망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만일 우리가 기독교인의 마지막 목적지가 천국이라는 것을 (비록 우리가 그것에 대하여 아주 다른 상상을 가지고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으며, 우리가 천국을 갈망하는 것은 그리스도 때문이지, 천국 그 자체에 대한 어떤 것 때문이 아닙니다), 믿지 않는다면 그때 우리는 기독교 믿음의 핵심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전체 기독교 진리는 죽은 자가 부활한 것을 믿는 것에 관한 것이다. 부활은 1세기 문화에서 나온 개념도 아니며, 유대 묵시문학에서 나온 개념도 아니며, 우리가 현대시대에서 믿을 수 없는 것도 아닙니다. 1세기 역시 죽은자의 부활은 아테네 철학자들이 알았던 것처럼 터무니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고린도 교인들 이 장애물 없는 종류의 기독교를 선호하였다. 그러나 모든 반대를 아주 잘았었던 바울은 우리가 부활에 확신할 것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 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전15:19), 왜 우리는 힘과 영광이 아닌 십자가를 짊으로써 구원을 얻는 기독교 공동체의 위험한 삶을 위하여 우리가 세상적 안전을 모두 포기해야만 하는가? 라고 말합니다.
교회의 정체성은 그리스도가 계신 천국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서 나그네들입니다. 더 심하게 말하면 외국 거주민들입니다. 나그네들은 그들이 돌아갈 수 있는 고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외국 거주민들은 단지 자신들의 참된 고향으로 땅위 어떤 곳도 없이, 자신의 고향이 아닌 한 국가 안에서 하나의 장소만을 가지고 있습니다. 외국 거주민들은 집시들과 같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도시들 어느 곳에서도 살지 않습니다. 음식과 옷, 그리고 매일 삶을 위한 다른 모든 것들 위하여 그들은 나라의 관습들에 따라서 살아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놀라우며 그리고 상식적인 의견에 따른 삶의 나그네 방식을 보여 줍니다." 디오그네투스에게 보내는 편지는 그것이 기독교인들의 상태(situation)라고 말합니다. 이런 입장은 고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특별히 기독교인들이 주님을 따르고 이세상의 신들에게 숭배하기를 거절하기 때문에 고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권세와 부에 관심을 갖는 세상에 조화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세상에서 얻으려고 애쓰는 목표들을 정죄합니다. 기독교인들은 하나의 목표를 가지지 않습니다. 그들은 사랑에 푹 빠진 자들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끝까지 사랑하는 단 한 분만 열망합니다. 그들은 세상 사람들이 행동하는 것처럼 행동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완전히 다릅니다. 그들은 교부들이 말한 것처럼 유대인과 이방인과 다른 사람들로서 다른 종류의 사람인 일종의 제 3의 인간입니다. 세상에서 이런 특이한 입장들 때문에 그들은 핍박을 받습니다.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않다"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그들이 나를 핍박한다면, 그들이 너희 또한 핍박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자신들이 겪고 있는 폭력에 어떻게 반응하는지는 중요합니다. 그들의 삶이 그리스도 안에 숨겨져 있기 때문에 어떻게 그들이 반응하는지는 분명합니다. 그들은 그 분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것이 의미하는 것이 그 분이 하신 대로 우리가 행동해야만 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벧전2:21-23). 이런 방법으로 그리스도는 죄를 범죄 않으셨습니다. 기독교인으로 부르심은 정치적으로 연루가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고난을 견디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주님을 따르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주님이 행동하는 방법으로 행동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 안에는 폭력이 없다고 2 세기의 교부들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자신들의 신의 영광을 위하여 희생을 요구하는 로마 황제에게 복종하듯이 우리 자신들도 그에게 복종할 것을 요구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이런 방법으로 행동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발적인 사랑으로써 사람들을 초청하시고 그리고 이끄십니다. 그리고 그의 교회를 그렇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어떻습니까?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를 구하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란 어떤 것입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에- 십자가 위에서 써졌던 "이 사람은 유대인의 왕"이라고 기록된 그곳에- 공개적으로 전파되어지는 곳에서 우리는 그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무엇이 교회의 사명입니까? 그것은 교회의 정체성에서 나옵니다. 폭력 없는 교회의 삶이 바로 이것이 교회가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교회는 스스로가 대항적 폭력(counter-violence)을 사용하기를 허락해서는 안됩니다. 이것이 교회의 메시지이며, 이것이 하나님과 세상과 공개적 관계입니다. 물론 이것이 원수들의 폭력을 멈출 수는 없을 것입니다. 피흘림은 계속될 것입니다. 그러나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사명입니다. 즉 천국에 숨겨진 그 생명을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것을 행동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이런 교회를 어디서 발견합니까? 우리의 교회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진정한 기독교인입니까? 우리는 어디에서 올바르게 주님의 이름을 가진 기독교인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우리가 사도들의 특별한 사명을 즉 그리스도에 대하여 이야기를 말하는 것,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신 것을 말하는 것을 무시하는 사실에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참으로 영생을 믿습니까? 혹은 우리는 우리가 모든 것을 받았다고 믿는 것 대신에 목적들을 이루기 위하여 설정해 놓으셨습니까? 지난 세기의 기독교는 목적론적인 기독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초대 교회는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 있는 영생 때문에 성만찬에서 감사하는 기독교였습니다. 사도들이 오직 추구했던 것은 바로 이것을 성취하기 위한 열망이었습니다.
3. 사회 속에서 기독교인들
기독교인으로서 우리의 정체성은 우리가 가진 다른 정체성과 어떻게 관련이 됩니까? 나는 기독교인일 뿐만 아니라, 화란사람이며, 남편이며, 아버지이며, 대학의 교수 멤버이며, 그리고 기타 등등입니다. 이 모든 다른 정체성을 거부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것들은 나를 한 인간의 나로 만듭니다. 인간으로서 나는 기독교인으로 불리워 집니다. 이런 정체성들을 거부한다는 것은 기독교 믿음의 본질을 거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의 현실의 삶을 담당하셨다 라는 것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당신의 사회적 신분을 변화시키지 말라고 바울은 고린교 교인들에게 말합니다. 각 사람은 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그 위치에 머물러야 합니다. "각 사람이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고전7:20). 우리는 우리의 국적을 바꾸지 말고, 우리의 가족을 떠나지 말고, 그리고 우리의 직업을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이란 이것이냐 저것이냐가 아니라, 즉 하나의 정체성이냐 아니면 다른 정체성이 아니라, 우리의 정체성과 관련된 방법에 관한 것이다. 첫 번째, 우리의 믿음은 다른 정체성들을 파괴하지 않고 그것들을 증진시킴으로서 우리의 다른 정체성에 영향을 줍니다. 나는 더 좋은 아버지가 될 수 있고, 더 좋은 남편이 될 수 있으며, 더 좋은 네덜란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기독교인이기 때문이며, 적어도 그렇게 되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다른 정체성은 우리가 기독교인 이라는 사실을 구체화합니다. 서구 기독교인으로서 나는 한국의 기독교인들과 다른 방법으로 나의 믿음을 표현합니다. 우리는 인도네시아에 있는 기독교인들과 다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구속되었다고 표현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어떤 문제도 없습니다.
더 보겠습니다. 우리의 사회적, 문화적, 국가적 정체성들이 우리의 기독교의 특성을 나타낸다고 하면 그것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이런 일이 일어날 때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사는 것을 표현하는 것에 대한 것입니까? 혹은 기독교인이 되는 본질이 다양성 있게 되는 것입니까? 다른 정체성은 마치 믿음처럼 자신의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요구들은 믿음에 종속합니까? 아니면 믿음이 둘레에 있는 다른 방법에 종속합니까? 후자가 일어나는 순간 우리는 기독교인으로서 우리의 통일성을 잃어버립니다. 그래서 우리의 정체성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이 아니라, 우리의 다른 정체성이 우리의 삶의 핵심과 기초가 되며, 그것들이 우리가 사는 기본적인 공동체를 특징 있게 합니다.
우리는 믿음과 다른 정체성들과의 상관성에 대하여 3 가지를 가질 수 있습니다.
a. 첫 번째 견해는 믿음이 우선적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종적 정체성은 단지 믿음을 표현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라는 것입다. 그것은 마치 바울처럼 노예들은 자신의 노예적 생활에서 기독교 삶을 표현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b. 두 번째 견해는 두 개(믿음과 다른 정체성들)는 같은 수준에 있다라는 것입니다. 즉 화란사람이 되는 것은 기독교인이 되는 것과 동일하다고 합니다. 노예에 대한 예로 다시 돌아가면, 노예제도는 당신이 참된 기독교를 볼 수 있는 사회적 신분이라고 말할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이 유형은 자유주의 신학에서 자주 사용됩니다. 즉 가난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물론 번영과 관련하여 그것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번영은 참된 제자훈련에 대한 보상으로서 보여집니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관련성은 배타적으로 교만하게 인도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오직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을 설명하지 못하며, 우리가 세상에서 외국 거주민들인 것을 설명하지 못합니다.
c. 두 번째 견해는 쉽게 세 번째 견해로 쉽게 이동시킵니다. 그것은 기독교인의 정체성이 다른 정체성들에게 종속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첫 번째 관심은 우리의 번영에 있으며, 우리는 그것을 강화하기 위하여 믿음을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이 경우에 있어서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남용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그는 처음이며 마지막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그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그는 교만과 경제적 힘의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자기의 원수들을 위하여 죽으셨고, 그의 머리 둘 곳도 없으셨습니다.
만일 다른 정체성들이 믿음을 지배한다거나 혹은 동일한 수준에 있다면, 우리는 실제로 하나님에게 불경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경우에 있어서 하나님은 다른 목표를 달성하는데 사용되기 때문에 가장 높으신 분이 되지 못하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번영을 위하여 그의 이름을 남용합니다. 사회 구룹을 위하여 그를 남용합니다. 우리의 문화를 위하여 그를 남용합니다. 특별히 유대인 작가들은 이점에 있어서 매우 민감합니다. 19 세기 어떤 사람들은 진보를 위한 통합 종교를(Religion Allied to Progress) 제청했습니다. 그때 유대인 작가 사무엘 히르쉬는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종교가 다른 요소에 종속되는 것은 종교를 거부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토라(성경)는 당신에게 하나님의 율법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감히 당신이 다른 관점에서 진보가 있다고 하여 당신이 그것 위에 다른 법을 두며, 하나님과 그의 율법을 함께 두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진보를 위한 통합종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감각적 즐거움을 위한 통합된 선이며, 발전을 위한 통합된 정직이며, 성공을 위한 통합된 올바름입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순간적으로 변덕스런 마음을 갖게하는 종교이며 도덕입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자신의 목표와 발전에 고착시키며, 자기의 발전을 방해하지 않고 도울 수 있는 부분만을 종교로부터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과 봉사는 다른 목표들을 섬기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바로 주님의 말씀과 봉사이기 때문에 그것들이 정당하게 시행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세상과, 사회와 사람들에게 관련시키려는 모든 외침은- 우리가 자주 듣는 것처럼- 이미 하나님의 말씀의 참된 특성을 거부한 것이다. 그것은 말씀을 어떤 사물이나 어떤 사람에게 의존시키게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세상과 사회와 사람들에게 의존하게 합니다. 그러나 말씀은 주님의 예배를 위하여 올바른 관계를 갖습니다. 교회의 사명이란 교회에 부여된 이 깊은 정체성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목표들과 독립하여 그리고 우리의 환경에서 독립하여 주님을 예배해야 합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대학살에 대한 유대인 박물관(Yad Vasjem, 야드 바스젬)에, 한 수용소에 있는 한 유대인 가족에 대한 사진이 있습니다. 그들은 한 운하를 걷고 있었습니다. 운하의 다른 편에서 한 독일 병사가 자동권총을 가지고 앉아 있었습니다. 몇 초 동안 그는 유대인 가족을 발사하였고 그들은 운하 안에 이미 산더미처럼 쌓여 죽은 시체의 운명이 되었습니다. 그 유대인 가족의 첫 번째 사람들은 할아버지와 그의 손자였습니다. 그들의 얼굴에는 어떤 불안이나 화가 없었습니다. 늙은 사람이 그들 위에 날고 있는 한 마리 새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심지어 이런 무서운 순간에서도 당신은 주님의 창조물을 바라보아야 하며, 그의 이름을 찬양해야 합니다. 그의 손자는 인간들이 했던 근심 속에서 죽지 않고, 주님을 찬양하면서 죽었습니다. 주님을 찬양하는 것은 인간의 행동이나 혹은 인간 고통에 의지하지 않습니다. 신실한 유대인들은 수용소에서 매일 찬양과 함께 시작했으며, 심지어 독가스 방으로 가던 날에도 찬양을 했습니다. 주님을 찬양합시다. 주님을 예배하는 것은 우리의 환경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다른 정체성들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종교가 진보에 달려있고, 인간 자유에 달려있고, 서구문명에 달려있게 하는 것은 수치스러운 것입니다. 화란사람이나 한국사람이 되는 것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남한에 살든 혹은 북한에 사는 것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만일 주님을 예배하는 것이 그것에 달려있다면, 그때는 그리스도의 이름은 인간 정치권력에 의존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국가적 이익을 위하여 믿음을 연합하려는 경향이 있음을 주목한다. 만일 우리가 그렇게 한다면 대문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폭력을 위하여 열어진 것입니다. 사실상 지난 수년동안 기독교인은 정부에 영향력을 행사해 왔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하여 정부를 이용했던 (그리고 이용도 당했으며) 시대 동안에 수많은 실례가 있었습니다. 물론 정부들은 자신들의 국가적 이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의 이름과 함께 그런 것들을 연결시킬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아는 참된 하나님의 이름과 함께 연결시킬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라는 말을 듣습니다. 또 하나님은 지난해 동안 미국을 축복해 주셨습니다 라는 말을 듣습니다. 이런 말들이 폭력의 상황 속에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교회가 고백하는 하나님은 이런 하나님이 아닙니다. 로마 사람들이나 그리스 사람들이 자기들의 국가 신들을 가졌던 것처럼 그런 신은 미국의 국가적 신입니다. 미국의 행동은 기독교의 이름으로 된 것도 아니며, 문명의 이름으로 된 것도 아니며, 자기들의 이름으로 된 것입니다. 이런 신이 그리스도의 하나님으로 인상이 주어질 때, 모든 것이 혼동됩니다. 오사마 빈 라덴이 무슬림 가치의 정체성의 상실에 대항하여 폭력으로 대응한 것처럼 똑 같이 미국도 폭력으로 대응했다고 나는 생각해 봅니다. 그러나 이런 폭력을 정당화시키기 위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지 맙시다. 국가들은 그런 것을 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이런 혼동을 폭로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으며, 우리로 세상에서 죽게 하시고, 우리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일하도록 부르시지 않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전파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만일 교회가 이런 혼동을 제공하고, 그리고 교회가 국가적, 경제적 혹은 사회적 신들로부터 멀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가증스러운 일입니다.
결론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언어와 상황 속에서 자신들의 믿음을 표현할 수 밖에 없지만, 그러나 그들이 가지고 있는 어떤 다른 정체성도 그리스도에게 복종되어야 합니다. 만일 그 분이 더 이상 우리의 삶의 중심이 되지 못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세례를- 우리가 그 안에서 죽고 다시 살아남- 부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있는 신들- 국가 신들, 돈, 집단 이익 혹은 가정과 집의 개인 신들- 가운데 하나를 우리 주님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교회 안팎에 있는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행동하는 곳에서, 당신은 기독교인은 나그네이며, 가장 좋은 것을 분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 당신의 교회로부터 심지어 때때로 소외 될 수 있음을 더욱더 알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기독교인들이 사회로부터 초연해 있으며, 국가의 복지에 관심을 갖지 말아야 할 것을 의미합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세상과, 자신의 나라와, 자신의 고향과, 심지어 자신의 삶에서 외국 거주민입니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면 그들은 여기서 거주하기 때문에 그들은 그들이 사는 공동체의 복지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것은 선지자 예레미아가 포로로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 말했던 것과 같습니다.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하기를 힘쓰고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니라" (렘29:7).
비록 세계가 당신의 참된 고향이 아닐 지라도 당신이 세계에서 평화롭게 살수 있다면 주님께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자신의 평화에만 관심을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은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사랑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모든 인류의 평화를 지원합니다. 그들은 주님과 함께하는 삶이 그들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위하여 받아들여지게 합니다. 그들은 사회적 돌봄으로 봉사하려고 애쓰며, 살기에 좋은 환경을 추구하는데 애씁니다. 그들은 심지어 원수까지 사랑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폭력과 전쟁에 관계되는 것을 막으려고 노력합니다. 그들은 모든 세상이, 그리고 그들이 살고 있는 나라와 가정까지도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된 것을 알고 있습니다. 땅위에 거하는 모든 사람들은 그의 백성입니다. 국경을 넘는 사람들을 위하여 우리는 그들이 공격받지 않도록 주장해야 합니다. 기독교인들은 주님으로부터 배웠기 때문에, 자신의 마을과 국가 그리고 우리가 사는 지구촌을 위하여 지혜로워야 합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가르쳐야 합니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의 계명일 뿐만 아니라, 그 규례들이 인간을 위하여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지혜로운 사람들은 자기들이 누구인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전혀 지혜롭지 못합니다. 그 사람들은 세계의 많은 고통을 일으킵니다. 지혜롭지 못한 사람보다 더 나쁜 사람들 모두가 죄를 짓고 있습니다. 우리는 정부, 경찰, 그리고 강제적 수단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는 영광이 충만한 하나님의 나라에 아직은 살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현실을 극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회적 정치적 질서를 만들어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 있어서 기독교인들은 정부에서 책임을 맡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어떻게 그들이 이것을 다룰 수 있겠습니까?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관계된 절대적 정체성과 땅위 정부들의 상대적 목표들 사이에 아주 분명하게 구별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을 완전하게 만들려고 노력해서는 안됩니다. 이레니우스도 심지어 사람들이 완전하게 되려는 이 개념은- 하나님처럼 되려는 것은- 원시적 죄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일이 상대적인 것으로 명심해야 합니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또한 우리의 지위, 우리의 마을, 우리의 국가 그리고 주님 이외에 모든 것들이 상대적인 것을 의미합니다.
완전이란 종말론적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에서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켜 주신 완전한 겸손을 실현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인으로 우리는 스스로 죽기를 배워야 합니다. 사회를 위한 책임을 가질 때 우리는 상대적 본성을 고려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존 칼빈은 겸손과 공평을 (아마도 균형이 더 좋을 듯 하지만) 구별시켰습니다. 겸손은 기독교인들의 깊은 윤리적 태도입니다. 그러나 사회에서 우리는 공평을 사용합니다. 아무것도 절대적이지 않으며,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한 사람의 우위를 피하기 위하여 공평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정부들이 공평을 증진시키기 위하여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실제로 이것이 정부들이 약한 자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강한 사람들은 스스로 도울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약한 사람들과 약한 단체들은 정부의 특별 보조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기독교인의 계명일 뿐만 아니라, 인간 지혜입니다. 가장 적절한 것들의 생존은 반대적으로 강한 것들의 생존이 반드시 아닙니다. 오랜 기간 속에서 동물 세계와 인간의 세계와는 다르지 않습니다. 가장 큰 동물들은 첫 번째로 멸종하게 되었습니다. 딱정벌레는 지금까지 생존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어떤 지구촌 정부도 (공평을 위한 임무의 부르심이) 없었기 때문에 (상대적이란 것이 그 지도자들에 의하여 곧 망각되기 때문에 나는 한 사람 당 하나 씩 갖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국가들은 마치 그들이 이 임무를 위하여 부름을 받은 것처럼 행동해서는 안됩니다. 만일 무슨 이유이던지 그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한다면, 그들은 균형이 여기서 역시 규칙인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지구촌의 책임을 지도록 부름을 느끼는 사람들은 먼저 가난한 사람들에게와 약한 사람들의 이익에 스스로 향하도록 해야 한다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행동은 결코 우리 자신의 부와 권력을 보장하는 것으로 향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항상 약한 자들을 도우려는 것으로 향해야 합니다. 만일 지구촌 사건에 개입하고 있는 모든 민족들은 이것을 명심한다면, 그것은 세계 질서에서 많은 것들을 변화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세상 사람들이 이 규칙을 지키려는 경향이 있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어떤 수준에서도 - 국제 무대부터 시골 마을까지-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로서 우리는 공평의 이 법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멀리해서는 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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