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신학
신약성경신학개관
신약성경신학개관
이승미
(고려신학대학원
은퇴교수,
신약학)
신약
성경신학(Theology
of New Testament)이라는
용어를 사실 개혁주의 진영에서는 피하고 있다.
‘신약
성경신학’을
개혁주의 입장에서 표현 한다면,
‘신약
성경을 통한 하나님의 계시(Revelation)’
혹은
‘하나님의
말씀(Word)',
'선포’(Proclamation)의
의미로 이해하고 있다.
신약의
마태복음은,
마태의
신학이 아니라,
사도
마태를 통한 설교요,
선포
곧 하나님의 말씀임을 알고 믿고 있다.
본
연구에서 이 사실을 자연스럽게 알게 될 것이다
성경신학,
특별히
신약 성경신학의 역사
A.D.
6-15세기
어간을 중세 시대라고 한다.
이
시대에는 교회의 전통과 교의학적인 시녀로서 성경 연구가 일어났다.
성경
자체를 위한 독자적인 연구는 아주 빈약했다.
그럼
그 당시의 성경 연구는 무엇인가?
교회의
전통과,
로마
가톨릭이라고 하는 교리의 정당성을 확인하기 위해서 공부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성경 연구라는 것이 교회의 전통과 교리를 옹호하고 발전시키고 변호하기 위해서 학자들이 동원된 어두운 시기였다.
이와
같은 것이 오래 가지 못했다.
하나님께서
때가 될 때 뒤집는 일을 하셨다.
이것이
바로 15세기에서
16세기에,
종교
개혁자들의 등장이다.
역사의
역할도 중요하게 되었다.
종교
개혁자들의 주장 가운데는,
성경은
풍유적(allegorical)으로가
아니라 여자적(literal)으로,
특별히
문법적(grammatical)으로
해석이 되어야 된다고 강조했다.
이것은
참된 성경신학의 출발이 되었다.
성경연구의
독자적 출발이 되었다.
종교
개혁 이후의 시대에서는,
또
여기에 대한 반작용이 일어났다.
역작용이라는
것은,
종교
개혁 시대에 너무 강조하게 된 그것 때문이다.
그것은
정통 교리의 지나친 사수로 인한 성경의 무오성의 강조는,
성경을
무비판적으로 보게 되는 경향이 나타나게 되었다.
성경의
무오성을 강조하다 보니 성경 연구의 진전 발전이 소홀하게 되었다.
성경을
역사적 관점에서 연구하려는 노력이 종교 개혁 이후에 다소 게을러졌다.
그러나,
종교
개혁 이후에 무딘 부분이 있었지만,
18세기
계몽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게 된다.
계몽주의
사상은 성경을 문학적으로 다루는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
성경을
교회나 신학적 관습에서 떠나서 성경 자체를 객관적인 역사적 산물로 보려고 했다.
이것은
합리주의적인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초자연적인 요소들을 무시하고 성경을 단순히 당시의 고대의 다른 문학 작품의 차원에서 인간 역사의 기록물,
문학
작품으로 보게 된다.
이
성경을 단순히 인간 역사의 산물,
인간이
만든 문학 작품 정도로 보게 된 것이다.
단순한
이스라엘의 종교 역사 차원에서 이해하려고 했다.
그래서
계몽주의 사상 영향 하에서 성경에 관한 것을 요약한다면,
성경은
일종의 고대 종교적 기록물들의 편집이다.
즉
고대 셈족의 역사를 보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 연구는 당시 여러 종족 중 셈 족이 가졌던 종교를 다루듯이 해야 한다.
이로
인해,
성경의
영감을 무시하는 방향으로 나가게 되었다.
계몽주의
사상에 의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문학 작품으로 보면서,
성경을
보는 눈이 이성을 가지고 보는 합리주의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놀라운
것은 1603-1669년에
살았던 신학자 가운데 J.
Cocceius(Ulrum 개혁교회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 전체를 어떻게 보았느냐 하면,
계약(Covenant)으로
보았다.
행위
계약(Act-Covenant)과
은혜 계약(Grace-Covenant)으로
보았다.
행위
계약은 범죄 이전 하나님과 사람과의 언약,
예를
들면 모든 것을 다 먹어라 그러나 이것은 하지 말라는 행위적 성격이 들어 있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은혜 계약이라는 것은 행위 계약으로 인간이 범죄하고 실패해서 하나님께서 은혜의 성격의 계약을 맺었는데,
그것이
은혜 계약이다.
이것은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율법
이전의 시대,
율법
시대,
율법
이후의 복음시대로 나누고 있다.
이
사람 이후로 크게 진전이 없었다.
그리고
J.
A. Bengel은
성경 주해를 많이 한 사람이다.
이
사람은 주해 내용 가운데 알 수 있는 것은 계시에 대해서 강조를 했고,
계시의
진행성을 강조했다.
그리고
계몽주의 시대 이후에 특별히 교의학에 대한 과목은 상당히 체계화되어서 내려왔다.
그러나
엄격히 말해 역사적으로 성경신학의 중요한 요소들을 그 이전에 말하기는 했지만 학문적으로 체계화시키고 발전시키지는 못했다.
합리주의의
영향을 받은 J.
P. Gabler가
역사적 측면에서 살펴 볼 때,
성경신학을
학문화시킨 공로자라 할 수 있다.
이
사람은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성경신학의 개념을 가지지는 못했지만,
교의학과
구분된 성경신학이라는 과목을 이론적으로 주창한 첫 학자라고 볼 수 있다.
1787년
그의 저서 ‘성경신학과
교의 신학의 정확한 차이’에서
성경신학과 교의 신학의 구분을 분명히 밝혔다.
그의
이론은 성경신학은 엄격히 역사적이며 교의신학과 구분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에
의하면 ‘성경신학은
이스라엘의 종교 사상을 추적해서 성경 저자들이 종교적인 제 문제들에 대해서 품었던 사상을 역사적으로 밝히는 작업,
임무이다‘라고
정의를 내렸다.
이것은
역사적인 사건으로 구성된 이스라엘 민족의 종교적 개념,
사상을
취급하는 정도로 성경신학의 정의를 내렸다.
반면에
교의신학을 정의내리기를,
성경신학을
이용하여 철학적,
합리적으로
각 시대의 전망과 요구에 맞추어서 하나님의 일을 살펴보는 것이다.
성경신학과
완전히 결별된 것이 아니라 상호 보완적이다.
그의
성경신학의 정의를 살펴 볼 때 문제점을 볼 수 있다.
첫째,
그의
성경관의 전제가 우리와 다르다.
특별히
구약성경을 이스라엘의 종교 역사로 보고 있다.
단순히
인간 사상의 산물로 전제하고 있다.
이점에
있어서 우리와는 다르다.
그리고
역사성을 말하고 있지만,
그가
말하는 역사성은 순수한 인간 사상의 변천과정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시의 진정성,
점진성의
차원은 아닌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문적 기여는 있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정경론을
다루어 보면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사본학에
있어서도 자유주의 학자들의 수고와 노력의 결과를 개혁주의 진영에서 많이 혜택을 받고 있다.
그러나
내용적으로는 보다 정확한 것으로 바꾸어야 한다.
여기서도
마찬가지의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
이후에 성경신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게블러의 추종자들에게 많은 관심을 가진다.
주된
관심사는 성경 안에 있는 종교적 사상,
인간
이성의 법칙에 관련되어서 연구한다.
이것은
개혁 주의가 표방하는 것과는 아주 다른 차원에서 나아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후
종교 철학의 시대로 접어든다.
종교
철학은 합리주의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특별히
헤겔(Hegel)의
관념론적 철학 사상의 영향을 받게 된다.
신학계는
헤겔의 철학적 사상을 많이 받았고,
신학자들
가운데도 헤겔의 종교 철학의 영향으로 성경을 보고 해석을 하는 일들이 나타나게 된다.
특별히
헤겔의 사상 체계 가운데 변증법적 사상 체계가 있다.
이
사상 체계도 합리성을 추구하고 표방하는 자유주의 신학자들도 그대로 받아 들여서 성경을 보고 성경을 분류하고 이해하려고 했다.
예를
들면 신약 성경신학 분야에서 독일의 사상을 바로 중용한 사람으로 F.
C. Baur는
독일 튀빙겐 학파의 중심인물이다.
이
사람도 헤겔의 철학 사상을 직접 받아서 신약 성경을 마태복음에서 요한 계시록까지의 전체 내용을 역사의 흐름에 따라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분류하려고 했는데,
그의
사상 체계는 헤겔의 정->
반->
합에
의해 분류했다.
신약
성경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초대 교회가 아주 진리와 구원과 하나님의 말씀과 조화롭게 하나 된 듯하지만,
내면을
연구해보면 그것은 갈등이 내재하고 있다고 보았다.
이
사람의 갈등의 성경 근거는 고전1:11이다.
네
개의 파가 있다.
1. Petrine Christian Party(정),
2. Pauline Christian Party(반)
3. The Acts 15:1-21 (합)이다.
예루살렘
공회(행
15장)가
모였다.
그곳에는
베드로와 바울이 있었다.
거기서는
바울에 대해서 따지려고 모였다.
그런데
베드로가 바울을 공격하지 않았다.
바울의
편에 들어서 바울을 이해하는 발언을 했다.
이것을
합의 단계에서 이해하고 있다.
그는
바울과 베드로의 대결 구도를 갈라디아서 2장
11-14에서
보고 있다.
베드로와
바울이 만났을 때,
바울이
베드로에게 외식을 지적했다.
이런
것을 갈등 구조로 본다.
신약
성경 전체를 정,
반,
합의
구도에 맞추어 보고 있다.
따라서,
바우는
정 반 합의 논리에 맞추어,
신약
성경의 저작 연대를 1세기
후로 늦추고 말았다.
보스(Vos,G.)의
성경신학
역사적으로
대략 살펴볼 때 자유주의로 인해 성경신학이 개설되었다.
그러나
문제점이 있었다.
그들의
성경신학에 있어서 성경관에 문제가 있다.
우리와는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
이후에
성경신학이 진전되어 갔다.
종교
철학 체계에 의해 성경을 보게 되는 문제까지 발생하게 되었다.
특별히
독일 튀빙겐 학파,
즉
종교 철학 체계를 근간으로 성경을 들여다보는 그룹의 영향을 받았다.
그래서
여기에 대한 반작용이 즉시 나타났다.
1829-35년
어간에 헹스텐베르크(Hengstenberg)가
바우(Baur)를
위시한 성경신학에 일탈된 것에 대항했다.
헬버크(Helberg),
슐츠(Schultz),
데이비드슨(Davidson)이
구약 성경신학에 관한 책을 많이 썼다.
특별히
헹스텐베르크는 구약의 기독론,
구약에서의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썼다.
구약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를 다루어서 자유주의 학자들의 편향된,
인간
이성 중심의,
철학
체계 중심에 반기를 들게 되었다.
이렇게
진행되다가 1895년
5월8일
게하르스 보스가 프린스톤 신학교에서 자신이 성경신학 교수로 취임했을 때,
특강을
하게 되었다.
그
특강 주제가 성경신학에 대한 이론을 나타내었다.
이것이
개혁주의 진영에서 찬성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게블러가 교의 신학과 구분되는 것을 내세웠지만,
편향적이었다.
그러나
보스로 인해서 교의학과 구분되는 성경신학을 비로소 정착시켰다고 볼 수 있다.
이때
특강에서 신학이라는 용어를 썼지만,
신학의
개념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통상 여기서는 신학이라고 한다고 했다.
그래서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라는 이면에는 하나님의 계시가 아주 핵심부분인 것으로 말했다.
결국
보스가 밝힌 성경신학은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자아 계시(The
Self-Revelation of God)의
과정을 다루는 분야’로
정의했다.
성경
전체를 하나님의 계시라는 골격으로 제시했다.
보스는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까지를 하나님의 자아 계시라고 하면서 계시를 삼등분해서 설명을 했다.
첫째는
구약을 말씀 계시(Word-
Revelation)로,
둘째는
신약의 복음서를 행동계시(Act-Revelation)로,
셋째는
신약의 서신서를 설명 계시(Interpretative
Revelation)로
분류를 했다.
말씀
계시는 예언적이고 예비적인 것이다.
구약의
반복되는 예비적이고 예언적인 말씀 계시가 말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때가 되매 행동화되었다.
그
증거는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것이다.
행동으로,
생활로써
아들을 통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나타내주셨다.
이것이
행동 계시이다.
이
행동 계시의 핵심은 구속적인 계시를 핵심으로 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포인트는 아들을 중심한 것이었다.
그
아들이 현장에 오셔서 행동으로,
생활로써
보이신 것이 하나님의 계시의 fact를
보인 것이다.
그
핵심은 죽으시고 復活하신
구속 사역이 핵심이다.
행동
계시의 주요 예는 복음서이다.
복음서를
통해서 구속 사역을 땅에서 행하신 것을 보이신 것이다.
설명
계시는 사도들이 말로 전했고,
그것이
나중에 기록된 것이다.
주로
신약의 기록 형태로 남긴 계시는 설명적이다.
서신의
내용들이 사도들 개인의 사적인 사상의 내용이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자유주의 견해들과 비슷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특별한 시대에 특별한 인물,
계속
대를 이어 갈 수 없는 사도들을 통해서 그의 행동 계시에 대한 것을 설명적으로 풀어서 기록한 것이 서신서이다.
예를
들면,
예수님께서
실제적으로 행동 계시의 차원에서 기록된 십자가의 죽으심은,
어떤
측면에서 보면,
당시의
유대 지도자들,
제사장들과
서기관들,
바리새인들의
시기와 질투에 의해 죽으신 것으로,
혹은
가룟 유다의 배신에 의해 죽으신 것으로,
당시의
빌라도 총독의 정치적인 그릇된 선고에 의해서,
혹은
로마 군인의 잔인한 창에 찔려 죽으신 것으로 이해 할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행동 계시만으로는 우리의 연약성과 부족함 때문에 오해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통한 행동계시를 쉽게 풀어서 각 지역의 상황에 맞게 설명 형식으로 주신 계시가 바로 신약의 서신서들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에대한 설명은 고린도전서 15장
3절에
바로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보스 이후에 많은 신학자들에 의해 보완되었다.
보스는,
영어로
"Historic
progressiveness of the revelation-process"(‘계시
과정의 역사적 진전’)으로
표현했다.
하나님의
자아 계시가 한꺼번에 나타난 것이 아니라 긴 시간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아 계시가 점차적으로 밝아진 것으로,
그래서
오순절 이후의 이 시점은 하나님의 계시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완전히 계시가 펼쳐진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그러나
구약 시대는 하나님의 자아 계시는 아주 적다.
하나님의
자아 계시가 구약의 창세기부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적으로 계시가 밝아지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계시를 잘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에 의해 잘 알 수 있다.
천국은
마치 씨와 같다.
이
씨가 점점 자라서 큰 나무가 된다.
특별히
신약 성경신학에게 다루는 것도 하나님의 자아 계시의 차원에서 다루는 것으로 보면 될 것이다.
신약은
불과 100년
미만에 쓰였다.
지금까지,
성경신학에
관한 역사부분을 개요적으로 살펴보았다.
성경신학,
특별히
개혁주의 진영의 성경신학이라는 과목을 본격적으로 시행한 역사는 오랜 역사는 아니다.
그
과정을 보면 자유주의 신학자,
특별히
개블러라는 공헌이 컸다라고 할 수 있다.
그가
교의학과 성경신학을 구분했지만,
우리가
전적으로 받아들일 만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성경신학과 교의학의 구분,
학문의
한 구분을 확장한 공로는 크다.
이것을
근거로 해서 보스가 개혁주의 입장의 성경신학과 교의학의 구분을 했다.
그리고
성경신학이 구약과 신약을 관통하는 신학으로 정착을 시켰다.
그러나
그 동안 자유주의 학자가 성경신학에 대한 것을 교의학과 구분하기 이전에,
보스가
본격적으로 성경신학 과목을 개설하고 시작하기 이전에도 부분적으로 여러 학자들이 성경신학에 해당하는 아이디어는 부분적으로
말했다.
코케이쿠스(cocceius)는
신구약 전체를 계약이라는 주제에다가 신구약 성경을 꿰뚫어 보는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뱅겔도
계시의 움직임,
점진성,
진행성을
말했다.
결국은
이런 것이 다 참고가 되어서 게하르드 보스와 그 이후의 개혁주의 학자들의 부가적인 연구의 결과로 오늘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역사의 과정 가운데,
개블러
이후에 종교 철학적인 사상을 가지고 성경을 드려다 보는 시대도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에
대해 반기를 든 글들이 많이 있었다.
이런
것들이 바탕이 되어서 보스에 의해서 개혁주의 입장의 성경신학이 어느 정도 정착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성경신학과
교의학(Dogmatics)을
우리의 입장에서 구분
우리가
먼저 생각할 것은 공통점은 있다.
모두
동일한 하나님의 말씀을 자료로 해서 연구한다는 것은 같다.
교의학도
신구약 성경 전체를 자료로 연구하고 성경신학도 마찬가지다.
존
머레이((Murray)는
교의학은,
성경에
나타나 있는 진리의 다양한 사실들을 분류,
조직화,
체계화시켜서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성경신학은 ‘교의학에서
다양한 주제들을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포괄하고 있는 하나님의 계시를 역사의 흐름에 따라서 계시의 점진적인 과정들을 살펴보는 것
이다‘라고
구분했다.
교의학은
성경에 나타난 중요한 진리의 사실들을 각론적으로 살피는 것이라면,
성경신학은
각론의 내용들을 다 포괄하면서 역사성을 띠고 계시의 점진성을 취급하는 학문으로 볼 수 있다.
여기에
대해서 예리하게 구분하기 어렵다.
머레이도
교의학도 각론을 다룸에 있어서 성경신학의 도움을 받아야 된다고 해서 상호 보완적인 관계를 말했다.
현재
실재적으로 취급하고 있는 주제들을 살펴보자.
주로
영국 쪽의 신약 학자들의 타이틀에 있어서,
신약
성경신학이라고 하고 있지만,
실제로
다루고 있는 내용들은 교의학 차원인지,
성경신학적인
것인지 구분이 모호한 것이 있다.
영국
학자 중 거드리(Guthrie,D.)는
그의 책 이름을 신약 성경신학이라고 붙였지만,
목차를
볼 때,
10개를
다루고 있다.
예를
들면 하나님,
인간과
세계,
그리스도의
사역,
성경,
그리스도의
생활,
교회론,
미래,
신약의
윤리 등의 주제를 가지고 신약 성경신학에서 다루고 있다.
그리고
다른 신학자 A.
리차드슨(Richardson)은
분명히 신약 신학의 서론이라는 주제로 책을 썼는데 17개의
주제이다.
믿음과
들음,
지식과
계시,
하나님의
구원 능력,
하나님의
나라,
성경,
메시야
재해석,
사도
교회의 기독론,
그리스도의
생애,
그리스도의
승천,
승리,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
완전하신
그리스도,
교회의
직분,
신약의
성찬 신학 등이 있다.
그리고
G.E.
래드(Ladd)는
신약 성경신학이라는 타이틀로 여섯 개로 분류하고 있다.
신약
성경의 분류로 했는데 공관복음,
사복음,
초대교회,
바울,
일반
서신,
계시록으로
분류했다.
그리고
C.H.
라이리(Ryrie)는
6-7개로
나눈다.
공관신학,
사도행전의
신학,
야고보
신학,
바울
신학,
히브리
신학,
베드로와
유다 신학,
요한신학을
분류를 했다.
지금까지
신약 성경신학이라는 타이틀 속에 다루고 있는 주제들은 구약과 신약을 관통하는 하나의 큰 흐름을 다루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거기에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부분들이다.
성경신학에서
이 모든 것들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학자들의 성경신학이라는 이후에 개혁주의 입장에 있는 학자들 가운데,
로버트슨(Robertson,
O. P.), 보스와
같은 사람들의 책을 보면,
로버트슨은
‘계약’이라는
용어로써 신구약 성경 전체를 다루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로버트슨은
모두 3
Chapter를
하나님의 계약,
창조의
계약,
구속의
계약으로 나누었다.
첫째,
둘째는
구약 부분이다.
그리고
구속 계약은 신약 성경을 두고 하는 말이다.
상당히
큰 범위에서 한 주제로 다루고 있다.
그리고
보스는 구약 신학,
신약
신학으로 분류를 해서 하나님의 나라(The
Kingdom of God)라는
주제로 해서 다루고 있다.
그리고
래드의 신약 성경신학 주제 가운데서는 영국과 구분이 되는데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상당한 무게를 두고 저술을 한 것을 눈여겨 볼 수
있다.
신약
성경신학의 주제 :
하나님의
나라
이제
범위를 좁혀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신약 성경의 주제에 해당하는 것을 살펴보자.
신약
성경신학의 주제는 어떤 것이 되어야 하는가?
이미
성경신학이라는 것은 신구약을 관통하는 하나님의 계시에 해당하는 부분을 살펴보는 것이라고 했다.
또 그
계시가 역사를 통해서 점진성을 가지고 진전된 것을 말했는데,
이런
것이 과연 어떤 것이 있는가?
이것을
생각할 때,
우리가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땅위에 오셔서 구약과 관련해서 가장 강조한 부분이 있는가?
분명히
강조된 부분이 있다.
구약과
약간의 차별성이 있으면서 예수님을 통해서 강조된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Hei
Bsileia)’ 혹은
‘천국’이다.
예수님께서
공적 사역을 시작하실 때부터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강조를 했다.
예수님
자신이 이 땅위에 임하신 동시에 인격적 출현과 더불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것으로 말씀하시면서 공관복음에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것이 크게
강조된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또 한가지 특이한 것은 구약과 관련해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말하는 부분이 있다.
누가복음
4장
43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노라”
여기서
중요한 것을 찾아 볼 수 있는데,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복음은 예수님께서 땅에 오셔서 비로소 독자적으로 생긴 것이 아니라,
구약에서부터
아버지 하나님께서 여러 선지자들을 통해서 메시야가 오실 것을 말씀하셨는데,
하나님의
의도는 그의 아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복음을 전하도록 하기 위해서 그 사명을 위해서 보내셨는데,
주님은
그 말씀을 받아서 성취된 말씀으로 말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반복적으로 사역 초기에서부터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말씀하신 것은 구약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나타나는 중요한 주제이다.
우리가
Basileia
(나라)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통치(Reign),
다스림(Rule),
왕권(Kingship)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통치,
주권,
왕권에
대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나라는
중요한 세 요소 즉 1.통치자,
2. 백성.
3. 영역을
갖추어야 한다.
통치라고
하면 백성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나라라고
할 때는 위의 3가지가
있어야 한다.
그러면
신약 성경신학에서 다룰 수 있는 주제들도 결국은 나라라는 통치 개념 속에 다 포함 할 수 있다.
통치자와
백성 사이의 언약,
계약,
또
주님의 구속 사역도 통치자가 백성들을 깨끗하게 만들기 위한 관계성 속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리고
교회라고 할 때,
하나님의
통치권 내에 있는 그의 백성들의 모임이다.
세례,
성찬의
내용들도 통치자와 백성간의 관계성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신약 성경신학의 중요한 주제로써 이제 다룰 것은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통치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할 것이다.
신약
성경신학에서 다룰 것은 주로 점진성(progressiveness)을
가진 하나님의 계시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라는 주제로서 하나님께서 역사 가운데서 점진적으로 그의 계시를 밝혀 나가셨다.
그
계시의 점진성의 내용 가운데는 하나님 자신의 계시,
백성에
대한 계시,
영역에
대한 계시들을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님의
나라 :
구약과의
관계
특별히
하나님의 나라라는 주제가 신약 성경에서는 용어상으로 강조되어 있다.
그러나
구약과는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구약과 신약을 관통하는 주제가 어떻게 구약과 연결되어 있는지를 살펴보자.
마태복음
1:1에서
아브라함과 다윗이 나온다.
왜
하필 아브라함과 다윗이 나오게 되었는가?
모세와
다니엘과 같은 다른 사람과 차별되는 것이 있는가?
아브라함과
다윗이 나오는 성경 내용을 참조할 때,
하나님과의
계약,
언약,
그
당시로만 그치는 언약이 아닌 영원한 언약과 관련이 있다.
아브라함과
다윗도 모두 죽었다.
인간적
차원에서 아브라함과 다윗과 영원한 언약을 맺을 수 없다.
그의
자손 가운데 영원한 언약이 나오는데 그것은 메시야와 맺어지는 언약이다.
아브라함과
관련해서는 창12:2-4,
창
15:4-5,
17:3-7, 18:18-19, 26:3, 24, 28:15절은
아브라함과의 영원한 언약의 성격을 띤 내용을 담고 있다.
다윗과
관련된 성경 구절은 사무엘하 117:13-16,
23:5, 대상
17:14-15이다.
다윗과
아브라함의 언약을 살펴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영원한 언약을 맺었는데,
그것은
메시야를 통해서 나타난다.
다윗과도
영원한 언약을 맺었는데 ‘그
나라 위는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고
했다.
다윗과
관련된 신약 성경은 눅 1:32-33에
나타나 있다.
이것은
다윗과 맺은 영원한 언약의 내용을 누가복음 1장
초두에서 예수님께서 탄생하시기 전에 이미 다윗과의 영원한 언약을 상기시키면서 그 성취가 임박했음을 말하고 있다.
Basileia가
나오고 아버지 하나님께서 다윗의 위를 그 아들에게 주어서 그 나라를 영원하게 하리라고 했다.
하나님의
통치,
다스림,
경영하심,
그의
백성들을 중심으로 하는 통치,
주권
행사,
왕권
행사를 구약에서뿐 아니라 신약에서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의 나라에 대한 것이 역사의 흐름에 따라서 더 구체화되고 우리 연약한 사람들도 나라가 점점 진전되는구나라고 느낄 만큼 진전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구약에는
전체적으로 창세기에서부터 말라기까지 한 마디로 말한다면 하나님의 왕권에 대한 내용이다.
그
왕권에 대한 내용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구약
성경 전체를 보면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의 통치자,
그의
백성을 다스리시는 왕으로서 그와 백성과의 관계를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통치자로써
그 백성을 다스리고 꾸짖고 있다.
이스라엘의
왕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왕일 뿐 아니라 이스라엘 이웃의 이방까지도 친히 다스리고 주장하시는 왕권을 발휘하고 있는 분으로 생각할 수 있다.
두
내용을 전체적으로 말한다면 하나님은 만유의 주,
우주의
통치자로서 우리가 이야기할 수 있다.
창세기
1장에
나타나는 창조가 우주의 주인,
우주를
통치하는 분으로 나타나 있다.
구약
성경 전체를 보면 만물을 통치하시는 통치자로써 하나님이 나타나신다.
그분은
특별히 자기 백성을 중심으로 해서 모든 것을 운영하심을 볼 수 있다.
그의
백성을 길들이기 위해서 이방 나라들을 움직여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괴롭게 하신다.
이 뿐
아니라 구약 성경에서 그의 백성을 다스리는 것 가운데,
하나님의
백성들의 거주 영역과도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은 주로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거주한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거주 영역과 관련해서 한때는 애굽 땅에 430년
동안 살았다.
이방
나라에서 살았다고 할 때는 대단한 것이다.
때가
되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구출하기 위해서 바로의 마음을 부드럽게도 하고 강퍅케도 하셨다.
어떤
면에서 보면 하나님의 통치권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을 광야를 지나게 하신 후 약속의 땅을 바라보게 하셨고,
그
땅에 들어가게 하셨다.
가나안에
들어가면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완전한 나라를 형성하고 하나님의 통치권 속에서 보다 안정된 삶을 살 것을 기대했지만,
그렇지
못했다.
사사들을
통해서,
왕들을
통해서 여러 가지 제도들로 그의 백성을 다스렸지만,
문제는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들조차도 범죄하고 실수하고 넘어지는 일들이 있었다.
사사들도
강력한 통치권을 발휘했다.
그러나
그들이 범죄할 때 그 백성들은 비참했었다.
구약에
나타난 사사와 왕들로 다스려본들 죄로 인해 불행해졌다.
그래서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구약적 방법들을 시도했지만,
그것들은
일시적이었다.
하나님의
계획은 이제는 완전한 나라를 형성해야 하겠다,
통치자도
완전한 통치자로 삼고,
그의
백성도 죄의 문제에서 완전히 해결되는 방안을 모색했는데,
그의
아들을 통해서 구속 사역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
일들을 하기 위해서 구약에서 서론적으로 하나님의 왕권에 대한 훈련이라고 할 수 있다.
구약
성경 전체를 한 주제로 생각할 때,
하나님의
통치의 역사로 보면 될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역사이다.
그래서
구약의 역사라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집단적으로 또 당대 뿐 아니라 대대로 뼈저리게 느끼게 하는 것이다.
인간
통치자로는 안되겠다는 것이다.
인간
통치자는 불완전하다.
또
한가지는 죄의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어야 할 필요성도 절감했다.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왕정 시대가 있었다.
북이스라엘,
남
유다 나라가 있었다.
이 두
나라가 갈리게 된 것도 동족상잔의 불행이다.
북이스라엘은
19대
왕조였다.
평균
통치 기간이 11년이었다.
그
가운데 19대째
왕 가운데 8왕이
반역자에게 살해되는 비참한 역사를 가졌다.
여기에
비해서 남 유다는 평균 통치 기간은 16년
정도였다.
그러나
결국 B.C.586년에
바벨론에 의해서 망했다.
북이스라엘은
더 일찍 망했다.
(721년)
왕정
시대를 통해서 그의 백성들로 하여금 인격을 가지고 있으면서 사람이면서 죄가 없는 메시야의 통치를 기대하도록 약속하시고,
그
약속에 대한 것이 점차 밝아질 수 있도록 계시가 점진적으로 분명해지도록 진전시키셨다.
이것이
구약의 역사이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점진적으로 계시를 진행해 오시다가,
구약에서
말씀하신 내용대로 그 아들을 이 땅에 직접 보내셔서,
그의
사역을 끝낸 후에,
하나님의
경륜 가운데서 말씀하셨던 그대로 아들의 죽음과 復活을
통해서 인간의 죄를 근본적으로 믿음-십자가와
속죄 사역에 대해서 믿기만 하면 의인이 되어서 그의 친 백성이 되도록 길을 열어 주었다.
구약과
신약을 관통하는 하나님의 계시의 흐름 가운데 보다 구체적인,
사람들이
직접 이해하고 깨달을 수 있는 주제는 ‘하나님의
나라’이다.
하나님의
통치라는 주제이다.
그리고
이 내용을 간접적으로 말하는 내용을 살펴보자.
히
1:1-2절이다.
1절은
구약에 대한 글이고,
2절은
신약에 대한 글이다.
하나님의
계시가 하나님의 나라라는 우리가 쉽게 이해 할 수 있는 주제로 설명되고 있는데,
이것이
구약성경부터 지금 현재까지 어떻게 진전되어 왔는가를 이해하자.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예를 들어 보자.
하나님의
나라(Basileia)이다.
나라라는
개념 가운데는 통치자,
백성,
영역의
요소가 포함이 된다.
특별히
하나님의 백성들의 하나님에 대한 지식,
그의
아들에 대한 지식의 정도를 예를 들어 설명하자.
옛날
구약 시대 주전 8세기경에
이사야,
예레미야,
다니엘,
호세아가
있다.
이사야의
시대에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추앙을 받는 유명한 선지자였다.
그
당시에 유명한 선지자라고 하는 이사야가 메시야에 대한 지식 정도가 어느 정도냐면 사 7:14절에
보면 ‘메시야는
동정녀의 몸에서 태어날 것이다’
53장에
의하면 메시야의 고난에 대한 것이 구체적으로 나오고 있다.
그
정도의 고난의 지식도 대단한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2012년
4월의
시점에 있어서,
초등학교
3,
4, 5,학년들의
메시야에 대한 지식이 어느 정도인가?
메시야는
마리아와 요셉 사이에 어느 정도 관계가 있었고,
마리아는처녀로서
성령을 통해서 예수를 낳았다.
그리고
예수님이 탄생하시는 과정에서 동방 박사의 내용까지도 알고 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못 박히시는 과정까지 구체적으로 알고 있다.
예를
들어 대 제사장에게 시기 질투를 받아서 넘기어지고,
골고다
언덕에서,
겟세마네
언덕에서 기도하시는 모습,
십자가에
못 박혀서 운명하시기까지의 과정을 알고 있다.
지금
초등학생들의 지식은 이사야의 지식보다 월등하고 구체적이다.
시대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세례
요한도 대단한 사람이다.
구약의
최종적 선지자이다.
그러나
세례 요한보다도 오늘날 더 지식이 월등하다.
이런
시대와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계시의 밝아짐이 점차 밝아져서 오늘날 우리에게는 완전히 개방된 상태이다.
더군다나
지금은 계시록을 통해서 아는 것은 영원한 나라,
그리스도가
완전히 다스리시는 나라,
악의
세력이 없고 영원히 운영하실 나라까지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계시가 완전히 밝아진 상태인지 알 수 있다.
구약
시대의 계시의 흐름에 대한 진전 과정은 천년 가까운 간격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신약 성경신학에서 다룰 계시 역사 시대는 100년
어간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직접 현장에 오셔서 시간이 진행되면서 구약에서 계획하고 예언했던 내용을 하나하나 시간이 진행되면서 이룬 것이다.
그리고
계시록의 내용을 보면 영원한 나라의 도래까지도 계시록을 통해서 알 수 있다.
100년의
시간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신약
성경에서 다룰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초림,
그리고
초림 이후에 세례 요한,
그리고
예수님의 공적 사역 시작,
공적
사역을 마무리하면서 십자가에 죽으심,
復活,
승천,
승천
후의 오순절 성령 강림,
성령
강림 이후의 내용들,
계시록을
통한 영원한 나라에 대한 것을 다루게 된다.
이제,
이어서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의 강조점,
특별히
하나님의 나라,
통치에
관한 것을 살펴보고자 한다.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의 특이성 가운데 그 하나는 용어사용에 있어서,
공관복음에서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많이 나온다.
그러나
요한복음에서는 빈약하다.
왜
그런지,
그럼
그에 상응하는 특이한 강조점이 있는지도 살펴보자.
구약시대
하나님 나라와의 관련 내용을 다시 간략히 요약하면,
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통치의 역사라고 할 수 있는데,
시대별로
보면 점진적으로 진전이 되었다는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의
통치가 아브라함을 통해서,
모세를
통해서,
그리고
모세 후의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의 사사시대,
왕정시대를
거치면서 하나님의 통치가 구체화되고 체계화 된 것을 우리가 안다.
그런데
구약에서 문제가 된 것은 하나님께서는 땅위의 인간 통치자는 그 어느 누구도 완전한 통치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계속
강조했다.
아브라함,
모세,
사사들,
왕들을
보면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린 사람도 있지만,
죄로
인해 무너진 사람들도 많다.
왕은
바르게 통치를 하지만,
백성
가운데 우상을 섬기는 가운데 나라 전체가 무너진 경우도 있다.
한
왕이 처음에는 잘 출발했지만,
마지막에
무너진 경우도 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자자손손으로 인간 통치자는 불완전하다는 것을 심어주는 과정 가운데서,
완전한
사람이면서 죄의 문제를 능히 다스리고 초월하실 수 있는 통치자,
메시야에
대해서 늘 그의 자손들에게 예언하고 나타날 것을 선지자들을 통해 예언해서 대망케 했다.
인간의
다스림으로 인해 실망 가운데 있는 백성들에게 메시야의 완전한 통치를 제시해서 대망케 했다.
그리고
때가 되어서 그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나라,
통치를
실현시키고 세워나가는 일을 신약 시대에 시작하셨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것을 아무런 설명 없이 자연스럽게 백성들에게 이 용어를 사용하면서 가르치신 것은 이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통치를 이해하고 있는 입장이었다.
마태복음과
하나님의 나라
신약
학자들 중에는,
마태복음의
구조를 분석적으로 살펴보는 가운데,
마태복음은
구조적으로 13장,
즉
천국 비유,
천국에
대한 설교가 마태복음의 중심 혹은 초점으로 보고 있다.
예를
들어서,
꼼브렁크(Combrink,
H.J.B), 로오르(Lohr,C.H.),
엘리스(Allis,
O.T.),포스터(Vorster,W.S.)등의
학자들은 마태복음을 천국,
하나님의
나라를 중심으로 기록한 것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다.
특별히
마태복음은 수신자를 생각할 때,
이
수신자는 유대인들과 그 이외의 모든 이방인들에게도 대상이 되지만,
특별히
유대인을 다분히 의식해서 쓴 것임을 알 수 있다.
당시
유대인은 구약의 메시아를 통해서 완전한 나라,
역대
이스라엘의 여러 죄로 인해 무너지고 불완전한 통치자가 아닌,
메시야를
통한 통치,
이것을
늘 기대했던 사람들을 대상으로 마태복음이 기록되었다고 할 때,
용어상으로
마태복음에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용어보다도,
하늘나라라는
용어를 압도적으로 많이 사용하고 있는 점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이것은
유대인을 의식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직접 표현하기 보다는 하늘이라는 명칭으로 사용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천국과 하나님의 나라라는 같은 개념으로 생각할 수 있다.
54회
나라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왕이라는
용어는 22회,
하늘나라,
천국이라는
용어는 34회
정도 사용되고,
하나님의
나라라는 용어는 3회
나타난다.
그리고
마태복음에는 아버지의 나라라는 표현도 있다.
그리고
마태복음에는 천국 복음이라는 표현이 자주 나타나고 있다.
4:23, 24:14. 13:19절에는
천국 비유가 나오는 장이지만,
여기에는
나라의 말씀이라고도 했다.
나라의
복음과 서로 교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용어로 사용된다.
그리고
마태복음 첫 부분에서 특이한 것은 5장에서
9장까지에
의하면 1)5-7장
2)8-9장으로
나눌 수 있다.
5-7장은
산상보훈이다.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것이다.
천국
복음으로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 필요한 말씀을 하신 것이다.
그리고
산에서 내려오셔서 8-9장까지의
내용은 말씀하신 후에 초자연적인 행위를 직접 행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말씀만 던지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말씀한 내용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행동,
이적적인
행동으로 보여주셨다.
하나님의
말씀과 행동하심이 하나로 묶어서 9:35,
4:23의
문맥에 의하면 천국 복음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마태복음에는 하나님의 인격적인 우주적,
특히
주권에 대한 것을 아들을 통해서 강조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통치,
나라가
구약 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진전되고 구체화된 것으로 실현되었음을 마태복음에서는 보여주고 증거하고 있다.
그리고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에 의해서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위에 직접 실현된 것을 힘차게 보여주고 증거할 뿐
아니라,
동시에
그 내용 가운데는 아직도 사탄의 저항이 이 땅에 있음을 말하고 있다.
이
내용을 뒷받침하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에 대해서 여러 차례 말하면서 동시에 사탄의 나라까지도 말하고 있다.
12:26, 25:41등에
보면 사탄의 나라도 잔존하고 있음을 말한다.
그리고
특이한 것은 마태복음에는 아들을 통해서 아들이 인격적으로 이 땅위에 임한 것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실현되고,
그
현장에 현재적으로 임한 것,
실현된
것을 말함과 동시에 예수님께서는 그 나라는 미래에,
장차
완전한 나라로 실현될 것으로,
미래에
속한 것으로 동시에 말하고 있다.
마태복음
내에서 동시에 천국의 현재적 실현,
미래의
완성의 나라를 말하는데,
이것은
결코 두 관계가 부자연스럽게,
부조화의
마찰이나 충돌이나 모순이 아니라 아주 자연스럽게 말씀하고 계신다.
그리고
현재적 실현에 대한 것은 4:1-11이다.
그리고
미래의 완성은 7:21,
13:1-37, 16:18-19, 28, 24:1-51등이다.
마가복음과
하나님의 나라
마가복음은
양이 적음(16장)에
비해서 나라(Basileia)라는
용어는 모두 19번
사용되고 있다.
그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이 14번
나오고 있다.
그리고
왕이라는 용어는 12회
사용된다.
그
12회
가운데 예수님에게 적용된 것이 15:2,
9, 12, 등등으로
6번
나온다.
마태복음과
비교할 때,
마가복음에는
그 용어가 하나님의 나라로 되어 있다.
천국이라는
용어는 나타나지 않는다.
마태복음에는
천국이 압도적이고 하나님의 나라라는 용어가 나오는데,
마가복음에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라는 용어만 나온다.
이유는
마가복음은 주로 이방인을 상대로 했기 때문에,
하나님이라는
용어를 이방인에게 자연스럽게 사용할 수 있지 않았겠는가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마가복음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인자,
그리스도
예수’에게
속한 것으로 말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나라를 충성되게 소개하고 전파하고 있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
이유도 마가복음의 수신자로 인한 강조가 아니겠는가 볼 수 있다.
그리고
마태복음에 비해서 마가복음에 강조된 것은 예수님을 여호와의 종으로 표현하고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마가복음에는 이방인에게 여호와의 종이라고 할 때,
이방인에게는
가볍게 생각할 여지가 있지만,
마가복음
전체를 읽어 나갈 때,
이방인은
놀랄 것이다.
마가복음의
클라이맥스에 가면 보통 일반적인 종이 아니라 굉장한 종으로 나타난다.
예수님이
처음에는 종이었는데,
마지막에는
유대인의 왕으로 간주된다.
물론
죽음에서 復活하심으로
인해 이방인의 입을 통해서도,
이
분은 과연 왕이시다 라는 것이 강조된 것으로 나타난다.
마가복음
전체를 통해서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나라가 특이하게 강조되었고,
그
나라를 세우실 주된 통치자가 예수님께서 왕으로 간주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누가복음과
하나님의 나라
누가복음은
24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누가복음에는
다른 두 복음서보다도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표현이 아주 풍부하게 나타나 있다.
누가복음에서는
특이한 것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이 나라를 백성들에게 주시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것을
보면 말라기 이후 하나님의 완전한 통치를 줄 수 없을 어두운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선물로 주시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1:32, 11:20, 22:29-30, 12:32에
나타나고 있다.
12:32절에
보면 너희 아버지께서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신다고 했다.
그리고
누가복음에서는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나라이기도 한 것으로 말한다.
1:32-33, 22:29-30 등이다.
하나님의
통치는 동시에 예수님의 통치로 여기고 있다.
그리고
마태복음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 나라와는 차별성이 있는 것으로 강조하고 있다.
4:5-8, 22:24-27 등이다.
그래서
누가복음에는 하나님의 나라는 사탄의 것과는 결코 합류할 수 없는 구별된 차별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누가복음에는 마태복음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나라의 현재적 실제를 말하고 있다.
7:18-23, 11:20, 17:21-22 등이다.
또한
하나님의 나라의 미래성을 21:5-38에서
말하고 있다.
누가복음1-24장까지가
독립된 것으로 나타나 있지 않다.
완전히
종결 된 것은 아니다.
사도행전1-28장까지
연결된다고 볼 수 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One
Volume에
대한 것이다.
한
책의 제 1부,
제
2부로
볼 수 있다.
그래서
사도행전과 분리시킬 수 없다.
이런
차원에서 누가복음 1장에서
사도행전 끝장을 전체로 볼 때,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것이 2부에서는
다른 것으로 강조되고 있다.
공관복음을
통해서 본 것에 의하면 전체적으로 공통적으로 유대인을 의식해서 기록했든 이방인을 의식해서 기록했든,
공통으로
하나님의 나라,
통치,
다스리심,
하나님의
왕권에 대한 것이 예수님을 통해서 아주 강조되었다.
구조적으로
부분적으로 강조되었다는 사실이다.
주목할
사실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임재하신 인격적 임재로 하나님의 통치가 그 아들과 동시에 이 땅에 임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를 대망하도록 미래적인 것까지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통치의 현재적 측면과 미래적인 측면을 계시 하고 있다.
요한복음과
생명(영생)
공관복음에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것이 강조된 것을 살펴보았다.
그럼
요한복음이 공관복음과 같이 넣어서 공동으로 취급할 수 없을 만큼 요한복음의 고유한 특징을 갖고 있다고 했는데,
특징을
가지고 있는가?
있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것에 대해 특징을 가지고 나타난다.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의 강조점의 차이중의 하나는,
기록
목적에 대한 것이 요한복음에는 너무나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
마태,
마가,
누가
복음은 성경을 읽는 사람이 유의해서 꼼꼼히 읽어야 한다.
그럴
때 목적에 해당되는 것을 결정해야 한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그렇지 않다.
이
부분은 요한복음의 목적이 구나하는 것이 있다.
20:30-31절이다.
그
내용을 보면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이심을,
둘째는
믿도록 하여 ,
셋째는
그 믿는 자에게 생명(영생)을
얻게 하기 위한 목적이다.
요한복음의
기록 목적은 이 세 가지 내용을 강조하고,
지금
믿는 자에게는 영생을 얻게하기 위한 것이다.이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을 효과적으로 달성하기 위해서 사도 요한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땅위에서 행하신 하나님의 아들로서만이 할 수 있는 생생한 이적
-요한복음에서는
표적(signs)이라고
되어 있다.
표적은
공관복음에서의 이적과 예수님의 행하신 행동,
특별히
구속사역과 관련된 행동까지도 포함하고 있다 -
을
엄선해서 첫 번째 표적,
두
번째,
세
번째 표적으로 계획적으로 구성해 놓고 있는 것이 요한복음이다.
그리고
클라이맥스에 해당하는 것이 하나님의 아들이 죽으셨는데,
살아나셨다는
것이다.
요한복음
전체를 통해서 강조된 부분은 공관복음에서는 하나님의 나라의 측면이지만,
요한복음에서는
믿는 자에게는 영생(Eternal
Life:ζωη)이
있다는 것이 강조되어 있다.
영생과
하나님의 나라와의 관계는 어떤가?
하나님의
나라에는 백성,
주권,
통치를
생각할 수 있는데,
요한복음의
영생이라는 것은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본질적인 문제,
내용의
문제이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본질적인 면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요한복음의 영생이다.
공관복음에서
“하나님의
나라”
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요한복음에서는
”영생“에
대한 용어로 나타남을 알 수 있다.
요한복음
전체적으로 보면 하나님의 나라는 2회이다.
3:3,5절이다.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에서 나타난다.
그리고
18:36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가운데,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다고 말씀하시면서,
”내
나라“(My
Kingdom)라는
표현을 했다.
하나님의
나라 즉 예수님 자신의 나라,
예수님의
통치를 동일하게 생각하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라는 직접적인 용어 대신에 구성원의 본질적이고 내용적이고 자질적인 영생을 요한복음에서는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자세히 요한복음을 보면 영생,
생명이라는
것도 현재성과 미래성이 나타난다.
3:36, 5:24-25, 4:35에
보면 메시야를 믿는 자는 이미 영생이 현재적으로 소유상태에 있는 것으로 말한다.
또
다른 성경은 미래의 것을 말한다.
4:14, 7:37-39, 10:10, 20:22 등이다.
영생이
미래에 대망의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것도
공관복음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에 있는 현재성과 미래성과 밀접한 관계에서 볼 수 있다.
그리고
요한복음에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확실히 지적이 되었지만,
이
세상과의 어떤 적대 관계에 있음을 아주 강조하고 있다.
요한복음에
보면 ‘세상’이라는
용어가 많이 나오고 있다.
특별히
‘이
세상’이
많이 나온다.
이
세상이라고 할 때는 문맥에서 이해되어야 하지만,
이
세상이라는 내용 가운데는 하나님을 적대하는,
반대하는
어떤 그룹,
영역을
지칭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셨을 때,
이
세상이 영접하지 않고 적대하고 멀리하는 구조로 나타난다.
그러나
요한복음 전체의 구조를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고 復活하신
것을 통해서 이 세상의 임금이 이미 심판을 받은 것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승리하신 것으로 말하고 있다.
이것과
생각해서 영생과 관련해서 생각할 수 있다.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은 강조의 차이가 있다.
그러나
공관복음의 하나님의 나라는 외형적이고 가시적이라면,
요한복음에서
강조하는 영생이라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내적이고 본질적이고 내용적인 측면에서 강조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지금까지
하나님의 굵은 선에서의 계시에서 구약과 신약을 관통하는 내용이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임을 우리가 확인했다.
우리가
그동안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에서도 역시 예수님께서 땅에 오셔서 가르치신 중요한 주제임을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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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승미 교수 - 신약성경신학 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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