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신학

신구약 성경의 관계/이신열 교수

작성자
쥬니어칼빈
작성일
2013-10-05 19:34
조회
5915

신구약 성경의 관계라는 주제는 사실상 교의학적인 주제이다. 흔히 교의학은 성경의 주해에 기초한 것이라고만 생각하기 쉽다. 교의학자의 사고가 종교철학과 구별되는 중요한 요소는 그 사고가 성경에 근거를 두고 성경의 주해에서 비롯되었는가 하는 것에 관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정반대의 경우를 살펴본다면 성경의 주해(exegesis) 또한 주해자(exegete)의 빈 서판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니다. 주해자가 지닌 신학적 사고가 그의 주해를 사실상 이끌어 가기 때문이다. 교의학이 스스로를 성경의 주해와 관계없다고 판단하거나 또는 스스로를 주해보다 더 우위에 둔다면 이는 교의학이 아니라 종교철학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성경의 주해가 신학적 사고 없이 진행된다면 이는 단순한 어원론 (philology)에 그치게 될 것이며 이 또한 종교철학 (philosophy of religion)에 그치게 되고 말 것이다. 교의학이 신구약 성경의 관계에 대하여 관심을 가져야 되는 이유는 교의학의 주된 과업이 성경에 근거한 신학 작업이기 때문이다.


 


신약과 구약의 위치에 관하여


신구약 성경의 관계라는 주제는 성경신학과 교의학의 공통된 관심사이며 이는 또한 아주 복잡한 주제이기도 하다. 루터, 칼빈, 그리고 멜랑히톤과 같은 종교개혁자들은 이 주제를 중요하게 다루었다. 중세의 교회는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 율법주의적 요소를 강화시키기 위하여 사실상 구약성경을 신약 성경과는 완전히 분리되고 구별된 것으로 취급하였다. 그 결과 구약 성경의 가르침은 아주 다양한 해석을 양산하게 되었으며 교회는 자신에게 주어진 권위를 사용하여 이러한 다양한 해석에서 비롯되는 긴장과 모순을 해결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이를 통하여 자신의 권위를 더욱 확고하게 다질 수 있었다. 즉, 신구약 성경의 완전한 분리는 결국 교회만이 성경의 참된 해석자라는 인식을 확증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종교개혁은 중세교회의 이러한 태도를 탈피하기 위하여 신구약 성경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고자 노력하였다. 종교개혁이 우리에게 남겨준 훌륭한 유산은 신구약 성경의 관계를 해석함에 있어서 사실상 신약에 우선적 위치를 부여한 점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구약에 근거하여 신약의 스스로의 메시지를 이해하고 이를 선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신약에 증거된 메시지가 이해되는 방식이 구약의 위치를 결정하게 됨을 가리킨다. 이를 달리 표현하자면 우리가 오늘날 구약 성경을 지니게 된 것은 신약 성경을 통해서 임을 뜻한다. 신약에 증거되고 알려진 바를 통하여 구약을 이해할 수 있으므로 구약 성경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신약 성경의 선포라는 길을 통과할 때 올바르게 주어지게 됨을 뜻한다.


 


그러나 계몽주의가 등장한 후에 본질적으로 신약 성경이 기독교의 제정에 필수적인 문서로 이해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사고는 기독교가 다른 모든 종교들 가운데 가장 고상하고 가장 고도로 발전된 종교라는 비교종교학적 차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기독교의 절대적 위치에 대한 확신은 기독교를 가장 탁월한 종교로 스스로 인정하도록 유도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확신에 근거하여 신약 성경은 기독교의 문서이며 구약성경은 유대교의 문서라는 이분법적 사고가 지배적인 사고로 자리잡기에 이르렀다. 유대교도 아주 고상하고 굉장히 발달된 형태의 종교이지만 어디까지나 기독교 이전 단계의 종교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초기 기독교가 구약 성경을 정경으로 인정하였었다는 사실과 초기 기독교의 대부분의 시기가 신약성경을 정경으로 지니지 않았으며 신약 성경이 구약 성경을 수없이 많이 인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계몽주의자들은 신약은 기독교의 문서이며 구약은 유대교의 문서라는 사고패턴을 지니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구약 성경은 많은 기독교 신학자들에 의하여 무시당하거나 거부되어지기도 하였다. 이는 초대 교회의 마르시온 (Marcion)이 지녔던 태도와 유사한 것이었다. 비록 19세기 말의 교리사가인 아돌프 하르낙 (Adolf von Harnack)은 자신의 신학적 활동 초기에 이러한 경향에 대하여 다음의 이유를 들어 이 사고의 위험성에 대하여 경종을 울리기도 하였다. 즉, 그는 기독교의 본질은 구약성경에 놓여 있지만 이제 그 본질은 헬라화에 의하여 둘러싸이게 되었으며 이는 곧 헬라화를 통하여 이 본질의 퇴색을 의미했다. 그러나 나중에 그는 자신의 견해를 변경하여 기독교의 실제적 임무는 구약을 벗어나서 이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대부분의 성경학자들이 구약이라는 전제조건 없이 신약을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보았지만 이는 구약성경이 지니고 있는 내용적 차원에 관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형식적 차원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구약성경의 권위를 평가절하하게 된 것은 사실상 18세기 말과 19세기 전반에 걸쳐 일어났던 신학적 자유주의와 깊게 관련된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신학적 자유주의는 기독교를 다른 종교와 같은 차원에서의 종교로 간주하기 시작했으며 그 결과 학문적 차원에 있어서 신학 또한 종교학의 영역에 속한 것으로 간주되기 시작했다. 따라서 신약성경도 여타의 종교적 문서라는 차원에서 이해되기 시작했으며 이는 곧 신약에 대한 평가절하 (deval‍uation)로 이어지게 되었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한 가지 사실은 계몽주의 이후에 등장한 구약성경을 평가절하하고 신약에 더 높은 가치를 부여하려는 균형을 잃어버린 태도는 결국 신약 자체를 평가절하하려는 태도를 부추기고 말았다는 점이다.


이러한 경향 - 구약을 평가절하하려는 경향 - 은 소위 구속사적 (salvation-historical) 성경 해석을 통해서도 확인되었다. 19세기 독일의 신약학자 요한 호프만 (Johann C. Hofmann)이 내세운 신구약 성경의 구속사적 해석은 이러한 경향을 잘 드러내고 있다 (J. C. Hofmann, Weissagung und Erfuellung im Alten und Neuen Testament, 1841). 호프만의 구속사적 해석은 성경 신학에 있어서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한 것인데 그 주된 내용은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그는 구약과 신약의 관계를 ‘예언’과 ‘성취’라는 널리 알려진 주제로 파악하고자 하였다. 구약 성경의 특정한 책이 예언서로서 예언을 많이 포함하고 있다는 사고를 벗어나서 구약 성경 전체를 예언으로 간주하였던 것이 그의 사고의 특징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사고는 계시의 단계 (stage) 또는 구속의 역사 (salvation-history)라는 개념으로 발전하기에 이르렀다. 성경신학을 전반적인 관점에서 이해함에 있어서 구속사라는 개념이 지닌 여러 가지 장점에도 불구하고 이는 구약 성경 전체를 ‘예언’ 또는 ‘약속’이라는 개념으로 통일함으로서 결국 구약성경 전체가 ‘성취’라는 개념으로 대표되는 신약성경으로 흡수되는 결과를 초래하는 단점을 지니고 있다. 구약 성경 전체를 조망함에 있어서 ‘약속’이라는 개념이 그 전체적 의미를 잘 드러내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구약 성경이 ‘약속’이라는 그물에 다 포함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호프만이 이런 개념을 사용하였던 이유는 오히려 이를 통하여 구약 성경이 신약성경에 의하여 잠식된다는 계몽주의적 사고와 더 깊이 연관된 것으로 보인다. 즉 ‘약속’이란 구약 이후에 신약에 이르러 약속에 대한 성취로서 무엇인가가 주어질 것이며 이로 인해 그 약속과 약속을 포함한 구약성경이 사라지게 됨을 뜻한다. 그렇다면 구약이란 신약에 나타난 믿음의 전형성 (pre-formation) 단계에 불과함을 가리키는 것이 되고 만다. 이는 결국 구약 성경은 그 자체로서 아무런 의미를 지니고 있지 않으며 성도의 신앙 형성에 있어서 그 역할은 신약 성경에 의한 것이라는 인식이 자리잡게 되었다. 그 결과 대부분의 사람들이 신약 성경을 직접 대하고 신약 성경에 전적으로 의존함으로서 신앙의 본질에 근접할 것이라는 잘못된 생각에 사로잡히게 되고 만 것이다.


 


구약의 해석에 있어서 신약에 드러난 직선적 차원


이런 지배적 경향은 결국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왜 구약성경이 기독교에 반드시 필요한 것인가라는 의문을 제기하도록 만들었다. 구약이 신약을 예측하고 기대함에 필요한 예비단계에 불과한 것이 사실이라면, 구약의 메시지는 교회에 해악을 끼치지 않는 한도 내에서 무시될 수 있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신약이 과연 구약을 이런 정도로 까지 무시하고 있는가를 살펴 볼 필요성이 대도된다. 신약은 많은 곳에서 구약을 지속적으로 언급하고 인용하고 있다. 신약학자 루돌프 불트만 (Rudolph Bultmann)은 신약이 제시하는 예언의 성취에 관한 구절들 가운데 일부는 구약의 유대적 전통을 따라, 그리고 나머지 부분들은 헬라적 논증의 전통을 따라 형성되었다고 주장했다 (“Prophecy and Fulfilment" in Essays Philosophical and Theological, 182ff.). 즉 구약은 새롭고 현실적인 진리들을 감추어진 형태로 표현하고 있지만 신약에 의하여 이제 이러한 현실이 완연히 드러나게 된다고 보았다.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 5:39)라는 예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얼마든지 예가 되나니... ” (고전 1:20)라는 사도바울의 주장이 이러한 경우에 해당된다. 또한 사도바울은 자신의 이신칭의 교리에 대한 주장을 구약 성경에 근거하여 펼치고 있다는 점이 이에 해당되는 것이다 (롬 3:21). 히브리서는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히 12:1)이라는 표현을 통하여, 그리고 더 나아가서 서신 전체가 이러한 경우를 입증하고 있다.        


 


신약에 드러난 구약에 대한 반립(antithesis)


신약은 구약에 드러난 현실을 이렇게 직선적 차원에서 이어 받아서 감추어졌던 것을 더욱 명확하게 드러내는 차원만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신약은 구약에 드러난 현실들과 관계를 맺음에 있어서 특정한 종류의 자유를 지니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마 5:22, 28, 32, 34, 39)라고 말씀하시면서 구약의 율법에 드러난 규칙들에 대하여 즉각적으로, 그리고 직접적으로 반대의사를 표명하셨는데 이는 바로 앞에 기록된 이 율법을 폐할 수 없다는 자신의 주장 (마 5:17)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안식일과 제사 음식에 관한 법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는 비록 그것이 유태인들의 회당에서 행해지는 의식에 한정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율법 자체에 대한 반대를 드러내고 있다. 정결케 하는 법에 관해서 사도 바울은 서슴없이 베드로와 다른 의견을 취하였다 (갈 2:11ff). 사도 바울이 할례에 대하여 취한 태도는 더욱 강한 것으로서 누구든지 스스로 할례를 받는 자에게 그리스도가 아무런 유익이 없다고 선언하였으며 (갈 5:2) 할례를 전하는 것이 십자가의 거치는 것을 그치게 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갈 5:11). 바울이 주장하는 율법으로부터의 자유함은 종교적으로 다른 견해에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이 율법의 목적이며 완성이라는 확신 (롬 10:4)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는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율법이 구원에 이르는 길로부터 제외시키기로 결정하셨음을 뜻하는 것이다. 따라서 신약은 이와 같이 구약을 대함에 있어서 놀라울 정도로 반립의 태도를 취하고 있다.


앞서 언급된 신약이 구약을 해석함에 있어서 취하는 긍정적인 태도와는 대조적으로 여기에서 신약은 특히 구약의 율법에 대하여 자유롭고 부정적으로 보이는 태도를 취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은 이러한 긍정과 부정이 모두 한 근원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이러한 긍정과 부정의 현실은 그 자체로서 성경이 하나의 책으로서 가지는 고유하고 독특한 특징으로 인정되어야 할 것이다.


 


구약의 특징


 


1)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증언


구약이 지니는 특징으로서 신학적으로 유효한 첫 번째 가르침은 천지 만물의 창조주로서의 야훼 하나님에 대한 증거에 관한 것이다. 신약은 창조주에 대한 설명에 있어서 구약과 상관없이 독자적인 주장을 펼치지 않으며 구약으로부터 전해 받은 핵심적인 내용에서 이탈하지 않고 이를 수용하여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이 이의 중요성을 더욱 증대시킨다. 물론 신약이 구약만큼 상세하게 하나님의 창조사역을 가르치지 않지만, 그 어떤 부분에서도 창조주에 관한 구약의 가르침을 부정하거나 왜곡하지 않으며 그 기본 사상에 있어서 구약의 가르침을 충실하게 따른다.


초대교회에서 구약을 무시하거나 그 가치를 평가절하 하여 이를 정경에서 제외시키려는 경향이 발생했을 때 기독교는 영지주의 (Gnosticism)를 위시한 비교(秘敎, esoteric)의 일종으로 전락할 위험에 직면하기도 했다. 이의 대표적인 경우로서 마르시온(Marcion)을 들 수 있다. 현대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하나님과 이 세상과의 관계를 탈세속화(desecularization)라는 차원에서 신약성경을 파악하려고 함으로서 창조주를 일종의 의도적 기원 (intentional origin)으로 꾸미려고 애쓴다. 구약은 그 자체로서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메시지를 지니고 있으므로 이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결국 신약의 창조주 하나님 이해에 있어서도 왜곡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2) 창조와 언약


구약에 증거된 창조주 하나님에 관한 증거는 이 세상의 현실이 하나님으로부터 유출되었다거나 그가 이 현실을 의미 있도록 만든다는 주장을 내세우지 않는다. 구약은 창조주 하나님을 주님으로 묘사하고 있으므로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어떠한 존재론적 상호교환도 허용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는 인간 속에서 하나님의 찾을 수 있다는 어떠한 종류의 신비주의를 수용하지 않는다. 인간은 그 자체로서 피조물에 불과하며 이는 인간이 그의 창조자이신 하나님 앞에서 존재하는 인간임을 뜻한다. 이는 구약성경이 헬라인들이 인간을 이해하였던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관점에서 이해하고 있음을 뜻한다. 하나님과 인간은 기본적으로 서로 완전히 다른 위치에 놓여 있음을 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인간을 대화의 파트너로 삼으시고 이를 통하여 하나님에게 접근할 수 있도록 만드셨다는 진리를 구약성경이 가르치고 있다. 즉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이 인격적인 존재로 인간에게 다가오심에 대하여 구약성경은 이를 ‘언약(covenant)’이라는 개념을 통하여 설명하고 있다. 이는 철저히 계시에 근거한 개념으로서 이스라엘이라는 집단에게 주어지는 약속임과 동시에 또한 이스라엘의 개개인에게 주어지는 약속이었다. 언약이 지니는 집단적 차원을 무시할 수 없음이 분명하지만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모세가 맺은 언약 (e. g. 십계명)은 우선적으로 철저하게 개인적이며 특수한 관계 설정이 그 목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창조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모든 만물들과 보편적인 관계를 맺으시는 사건이었다면 언약은 이 창조에 근거하여 이스라엘의 개개인들과 맺는 특수한 관계를 상징하는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이런 언약적 관계 형성의 궁극적 의도는 언약의 당사자인 한 개인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들에게까지 확장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창조의 보편성(universality)과 언약의 특수성(particularity)을 생각할 수 있다. 이는 구약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주제로서 구약 성경을 해석하는 중요한 열쇠임이 분명하다.


 


3)언약과 율법


루터에게 구약은 율법의 책이었으며 신약은 복음 또는 은혜의 책이었다. 이런 표현을 통해서 그가 의도한 바는 구약이 하나님의 약속으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무시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그가 구약을 무엇보다도 율법을 다루는 책으로 이해하려고 했다는 점이다. 즉 율법이 복음보다 시간적으로, 그리고 인간의 경험에 있어서 먼저 주어졌으며 이 사실에 근거하여 복음이 주어짐으로 인해 율법이 이제 폐기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전개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루터의 견해는 사실상 신약의 가르침에 위배된다는 점이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롬 5:20; 갈 3:19ff). 바르트는 이에 대하여 율법이 복음의 한 형태에 해당된다고 지적하기도 하였다 (Church Dogmatics, II/2, 492ff).


로마서 4장을 통해 살펴 볼 때 구약에 있어서 명령, 율법, 정의는 모두 언약과 관련된 것이며 이들은 모두 축복을 향한 기본적이며 위대한 행위로 이해되었다. 율법은 진노를 이루는 것이며 (4:15) 결코 언약이 율법에 근거한 것은 아니라고 바울은 밝힌다 (4:13). 언약은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그의 은혜에서 출발하여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맺어진 약속이므로 율법의 근본 목적은 언약 아래에서의 삶을 순종의 삶, 역사적인 삶으로 이해하도록 이끈다. 십계명의 “나는 .... 이라 (I am )”는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 ‘선언’ (declaration)과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주어진 “너는 ... 할찌니라 (Thou shalt).”라는 명령 (commandment)은 불가분의 관계 속에 놓여 있다. 만약 'I am' 이라는 선언이 ‘Thou shalt'라는 명령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된다면 야훼 하나님은 더 이상 은혜와 더불어 명령하시는 하나님으로 인정되지 못할 것이다. 또한 ’Thou shalt'이 'I am'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된다면 여기에 주어진 명령은 신적 기원과 권위를 상실한 채 이스라엘 사회에 필요한 규범으로만 인식되어서 은혜와 상관없는 삶의 윤리적 기준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다. 역사적으로 살펴볼 때 이스라엘이 야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상실하고 그를 일종의 우상으로 인식하기 시작하였을 때, 사회적 그리고 법적 질서가 무너지기 시작하였음을 발견하게 된다. 따라서 율법은 약속에 근거하고 있으며 궁극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약속으로 인도한다. 율법의 테두리 안에 머무르는 것은 약속의 은혜, 즉 구원의 범주에 머무르는 것을 뜻하였다 (레 18:5).


그러나 이러한 개념은 이스라엘을 일종의 폐쇄된 사회, 자기들만의 사회로 만들었다고 볼 수 있으며 여기에서 부정적인 의미에서 이스라엘의 선민의식이 싹트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율법이라는 외형적 측면에 거하는 것이 곧 언약에 거하는 것인가? 언약에 거하는 것이 전적으로 율법에 거하는 것인가? 라는 질문이 제기된다. 로마서 4장은 이 문제에 대해서 언약은 전적으로 믿음의 의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선언하면서 만약 율법에 속한 자들이 후사라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이 폐하여졌을 것이라고 밝힌다 (14절).


그러나 이 문제는 1970년대에 샌더스 (E. P. Sanders)를 위시한 신약학계에서 ‘언약적 신율주의 (covenantal nomism)’라는 문제로 제기되기 시작했으며 이로 인해 신학계 전반에 중요한 화두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는 그 이후에 ‘바울에 대한 새 관점’ (New Perspectives on Paul)으로 더욱 활기차게 논의의 대상으로 자리잡기에 이르렀다 (E. P. Sanders, Paul and Palestinian Judaism).


 


4) 미완성된 율법 - 미완성된 언약 - 미래를 향한 개방성


언약에 관한 구약 성경의 또 다른 특징이 있다면 이는 언약이 결코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항상 순종이라는 수단을 통해서 이에 대한 인간의 응답과 결정을 요구해왔다는 사실일 것이다. 언약은 단순히 이스라엘의 과거나 현재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미래를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언약은 그 자체로서 종말론적 개념이었다. 율법의 여러 명령 또한 이렇게 미래 지향적이며 종말론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이런 측면에서 살펴 볼 때 구약은 이스라엘로 스스로를 내향적으로 성찰하거나 또는 스스로를 넘어서서 성찰하도록 지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미래를 향한 방향을 제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구체적 사건에 대한 해석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그 사건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지도 않는다. 단지 이러한 구체적 사건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개인들이 역사에 있어서 신적 언약의 파트너로서 미래를 향해서 스스로를 열어나가도록 이끌고 있을 따름이다.  이는 구약성경에 주어진 언약이 그 자체로서 여전히 미완성인채로 남아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여기에 구약 성경의 묘미가 발견된다. 이를 달리 표현한다면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진 것은 언약의 미완성이라는 현실이었는데 이러한 미완성된 현실은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 앞에 주어진 것을 잡도록 유도하였다고 볼 수 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약 아래 살도록 허락 받았으나 그들의 삶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완성에 근거한 삶이어야 했다. 따라서 구약은 스스로를 항상 미완성된 언약아래 놓여 있는 미완성된 율법의 책으로 제시한다. 이 언약은 인간을 언약의 합당하고 완전한 파트너로 간주하지 않지만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불완전한 인간을 자신의 언약의 파트너로 삼으셨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파트너가 이렇게 언약의 파트너로서 지니게 되는 권한을 누리고 이를 완성하기를 원하신다. 이사야와 남은 자들을 제외한 전체로서의 이스라엘은 이러한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된 권한을 거부하였다. 즉 이스라엘은 언약을 거부하고 이에 반항함으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선민의 특권에 저항하였으므로 언약을 파기하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 창조주 하나님과의 언약적 관계에 파기되기 시작했으며 이로 인해 바벨로니아에 포로로 붙잡혀 가는 하나님의 엄청난 저주를 경험하게 되었던 것이다.  


 


5) 구약의 한계


구약에 나타난 율법의 미완성은 신약의 빛에 비추어볼 때 그 실상이 잘 드러나게 된다. 신약은 언약에 대한 이스라엘의 실패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언약에 드러난 특수성이 이스라엘의 선민의식과 결합되었을 때 이는 그들만의 특수주의 (particularism) 또는 배타주의(exclusivism)로 나타나게 되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특수주의와 배타주의의 결점이 하나님의 언약과 율법을 육체적인 방법으로 잘못 사용한데 그 본질적 문제가 놓여 있었음을 간파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누구보다도 언약에 드러난 특수성을 강력하게 변호하였다 (로마서 9-11장). 따라서 구약의 한계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언약의 특징으로서의 특수성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한계는 이러한 한계를 잘못 인식하여 이를 자신의 육적인 자랑으로 삼으려 하였던 이스라엘의 한계에 관한 것이었다. 앞서 언급된 구약에 나타난 미래를 향해 열려진 개방성이 이스라엘의 육체적 욕심에 의해 닫히게 되었음이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구약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에 관한 증거일 뿐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잘못과 교만으로 인한 언약의 파기에 관한 증거이기도 하다. 따라서 신약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러한 행위를 단지 실수로 묘사하지 않으며 이를 ‘죄악’이라고 지적한다. 이스라엘은 언약을 파기함에 있어서 언약의 제공자이신 하나님과의 약속을 저버린 것이며 이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무시하고 곧 그 분을 무시하는 불경함의 극치를 이룬 죄악 중의 죄악을 범한 것이었다. 그러나 구약성경은 이러한 이스라엘의 범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언약의 파기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한번 맺으신  자신의 언약을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이를 끝까지 붙드시고 실행에 옮기신다는 언약적 신실하심(covenantal faithfulness)에 그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는 언약의 갱신을 통해 이스라엘의 역사적 현실로 드러났으며 이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은혜와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증대시킬 수 있었다 (J. R. Vannoy, Covnenant Renewal in Gilgal). 이를 달리 표현한다면 언약의 현실, 즉 약속의 효력이 그 언약의 파트너보다 훨씬 더 강력하다는 것이다 (Walter Zimmerli, "Verheissung und Erfuellung" in Evangelische Theologie (1952/53), 34ff).  언약의 힘이 이렇게 강력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파기하였던 이스라엘의 죄악이 이런 측면에서 더욱 무겁고 무서운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구약에 드러난 언약과 율법의 한계는 사실상 언약과 율법 그 자체의 한계가 아니라 이를 받아들이고 실천에 옮겨서 미래로 향하려는 이스라엘의 교만에서 비롯되는 한계, 즉 죄인인 인간이 지닌 한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구약에 언약과 율법이 미완성인 채로 주어졌다는 사실이 그 자체로서 구약성경의 한계가 무엇인가를 결정짓지는 못한다. 이런 측면에서 신약 성경은 언약과 율법에 대하여 새로운 차원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구약 성경에 분명하게 부각되지 않은 채 감취어져 있던 현실들을 밝히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이 반드시 언급되어야 할 것이다.


 http://cafe.daum.net/sygratia


출처: http://cafe.daum.net/reformedvill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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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 언약교리에 나타난 조직(신학)과 경건의 조화
쥬니어칼빈 | 2014.10.04 | 추천 0 | 조회 58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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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경신학개관
쥬니어칼빈 | 2013.11.11 | 추천 0 | 조회 45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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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구약 성경의 관계/이신열 교수
쥬니어칼빈 | 2013.10.05 | 추천 0 | 조회 5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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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 ‘회개’의 개념
쥬니어칼빈 | 2012.12.04 | 추천 0 | 조회 5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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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신학과 조직신학 - 이승구 교수(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쥬니어칼빈 | 2012.11.13 | 추천 0 | 조회 9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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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 세례와 성령충만
쥬니어칼빈 | 2012.11.08 | 추천 0 | 조회 5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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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번역에 문제 있다
쥬니어칼빈 | 2012.11.08 | 추천 0 | 조회 5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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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해석의 기본 원칙
쥬니어칼빈 | 2012.11.08 | 추천 0 | 조회 54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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