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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신학

성경의 무오성

작성자
쥬니어칼빈
작성일
2012-11-08 02:55
조회
5275

성경은 조금도 잘못이 없는가?  물론 성경에는 잘못이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고 하나님의 영의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기록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정통신앙을 가진 사람이면 누구나 쉽게 대답할 수 있는 정확한 대답이다. 그러나 그런 대답에 만족하지 않고 성경에 정말 잘못이 없는지 입증하자는 사람들이 18세기 독일의 합리주의자를 비롯해서 오늘에 이르기 까지 여기저기에서 많이 생겨나고 있고, 심지어 <정통 신앙가> 라고 스스로 자부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성경은 완전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상상외로 많다. 성경은 우리 생할과 신앙의 유일한 법칙인데 성경에 잘 못이 있다면 그것은 큰 문제가 아닐수 없다. 그래서 오늘은 <성경의 무오성> 이라는 주제로 강의하고저 한다.


    


미국에서는 1910년경부터 독일과 영국에서 자유주의 신학이 상륙해서 프린스톤 신학교를 중심으로하여 한편에서는 자유주의자들과 다른 한편에서는 성경의 권위를 지키고 역사적 신앙고백서를 지키려는 근본주의 보수 신학자들 간에 싸움이 치열했다. 놀랍게도 이때 가장 앞장서서 싸운 사람들은 장로교 사람들보다 침례교 사람들이 더 많았다. 물론 우리가 잘 아는대로 프린스튼 신학교에 보수주의 학자들이 있었고 그중에 John Gresham Machen 박사 같은 분이 장로교 진영에서는 앞장서서 열심히 책들을 펴내면서 새로 등장하여 이상한 교리를 퍼트리는 자유주의 목사들과 싸운 것이 사실이다.


 


이 무렵에 나온 유명한 책들이 가령 <Virgin Birth of Christ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What Is Faith? 신앙이란 무엇인가?>, <Christianity and Liberalism (기독교와 자유주의>. <Origin of Paul's Religion (바울 종교의 기원)> 등인데  모두 Princeton에서 신약을 가르치던 Machen 박사가 쓴 책들이고 하나같이 그 당시 성경의 무오성도 믿지 않을뿐더러 성경의 권위를 무시하며 신론에서 종말론에 이르기까지 잘못된 교리들을 전파하여 성도들을 오도하던 자유주의 자들에 대항하여 바른 신앙을 전하는 서적들이었다. 이런 서적들은 지금도 개혁주의 서적을 판매하는 책방에 가면 구입할 수 있다.  물론 Scotland에서 건너온 James Orr 라는 분이 편집하고 여러 보수주의 목사들이 기고한 <The Fundamentals 근본주의 교리들> 이란 10권짜리 책도 발간했지만 이 책은 개혁주의 신학자들만 아니라, 세대주의를 비롯하여 아르미니안 주의 신학자들도 기고하여 교리의 혼란을 가져왔으며 오히려 사람들은 Machen 박사의 글에 더많이 의존했다.



요즘에 와서는 성경의 무오성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고 요즘 가장 인기있는 가르침은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이므로 서로 사랑하고 남이 아무리 잘못하여도 책망하지 말고 서로 관용하며 사이좋게 지나며 비단 기독교 신자들끼리만 아니라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과도 서로 같은 인간이므로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고 서로 화해하면서 이 세상에서 지금 행복을 추구하며 살자> 는 신학이 팽배하고 있다. 이것을 요즘 새로 신학에 등장한 용어로는 <라프로쉬망, Rapprochement> 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프랑스 소르본느 대학을 중심한 Postmodernism 의 창시자인 Michel Foucault 라는 사람이 만든 말이지만 영어로는 <Political correctness> 라고 한다.  어떤 형편에 있던 어떤 경우이건 남에게 기분을 상하게 하면 예의에 어긋난다는 말이다.


그 이유는 이 세상엔 절대적인 가치관이나 객관적인 가치관은 존재하지 않고 모든 것이 상대적이고 주관적이므로 내 의견만 옳다고 고집 할 수 없고 다른 사람들의 의견도 그 사람들 나름대로는 진리이고 그 사람들이 가지는 주관적 상대적 진리이므로 내 의견이 중요하다면 같은 이유로 그들의 의견도 존중해야 한다는 이론이다.  물론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과 얼마나 거리가 먼 주장인지는 여기서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지만 그런 신앙풍토에서 성경의 무오성 (Inerrancy of the Bible) 을 그렇게 고집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신학자나 목사나 지도자들이 늘어만 가고 있다는 사실은 심히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문제는 이런 사실을 도모지 알지 못한 채 그런 목사나 부흥사나 신학교 교수의 가르침을 그대로 믿고 따라가는 사람들이 늘어가기 때문에 성경을 신실히 전하는 목자가 진리를 외쳐도 듣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경의 무오성은 가장 중요하다.  기독교의 생명, 성도의 전 생애가 성경을 보는 관점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의 무오성은 이해할 만큼 설명이 되어야 하고 일반 성도는 말 할 것도 없고 남을 지도하는 위치에 있는 분들도 분명히 알아 두어야 한다.  남을 지도하는 사람들을 하나님은 더 엄중하게 문책한다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이다.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하시는 우리 주님이시다. 그리고 마태복음 7:20-22절 말씀에서 주님으로부터 외면당하는 사람들은 오늘도 얼마든지 있어서 지금도 그런 분들은 잘못된 교리를 서슴없이, 일말의 양심의 가책도 없이, 앞으로 주님 앞에 설 때를 생각하지 않고, 성경의 가르침과는 무관하게 자기의 생각대로 많은 사람을 속이고 있다는 사실에 아연실색할 수 밖에 없다.  성경은 우리 신앙과 생활의 유일한 법칙이다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는 일인데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린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순종하며 사는 생활을 말한다. 성경의 내용을 보라. 성경을 읽으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향하신 뜻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형식적으로 믿는 성도는 구원이 없다.  우리는 구원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성경을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으로 믿지 않고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의 증거> 라고 하며 <성경은 사람이 기록했으니 성경에서 인간적 요소를 제거해야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 라고 믿는 Karl Barth의 신학도 옳다고 신학교 강의실에서 서슴없이 가르치는 목사들도 있다.


   


모세오경 즉 창세기, 출애급,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는 복음의 씨앗으로서 그리스도를 여러 가지 모형과 그림자로 나타내준다.  첫 아담의 타락으로 인한 인류의 타락과 그에 대한 대책으로 구속자이신 둘째 아담 그리스도가 어떻게 임할 것이며 어떻게 구속을 이룰 것인지를 예표를 통해서 알려 준다.  죄에 빠져 죽을 인생이 마지막에 구원을 얻을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을 구속의 그림자로 우리에게  보여준다. 모세 오경에 나오는 모든 창조, 구원, 영광 등이 모두 앞으로 오실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말한다.


 


역사서 즉 여호수아, 사사기. 룻기. 사무엘 상하, 열왕기 상하, 역대상하,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 등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계속 어기면서 죄를 상습적으로 짓는 모습을 실제로 사건들을 들어 자세히  보여 주면서 앞으로 죄짓는 백성들의 죄상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말하며, 또한  앞으로 메시야가 와서 백성의 죄를 대신하여 형벌을 받으실 것을 가르쳐준다.


 


지혜문서는 욥기. 시편. 잠언, 전도서, 및 아가서 인데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 테두리 안에서 지식과 지혜를 추구하는 인간의 몸 부림 치는 욕구를 말한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온전히 알 수 없는 인생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살아가야 한다는 결론이다. 지혜문서는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로 구속받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하나님과 어떻게 교제할 것인가를 논한다.   하나님에게 의지하는 것이 인생의 지혜의 근본임을 알게 하려는 것이다.  지혜문서는 극히 개인적이다. 개인의 희노애락의 감정을 나타낸다. 타락한 세상에 살면서 고통 받는 모양 그러나 불변하는 언약의 하나님 안에서 소망을 가지고  즐거워하는 인간의 모습은 오늘 우리의 생활과 같다. 그들이 삶의 현장에서 외치는 고통과 신음의 목소리가 하나님 안에서 해결을 보았듯.  인생의 괴로움과 줄거움이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참다운  해답을 얻는다는 심오한 교훈을 가르쳐 준다.


 


선지서는 이사야, 예레미야, 예레미야 애가, 에스겔, 다니엘, 호세아, 요엘, 아모스, 오바댜, 요나, 미가, 나훔, 하박국, 스바냐, 학개, 스가랴, 말라기 등 17권이다.  선지서를 기록한 선지자들은 패역한 백성에게 외치기를 “죄를 상습적으로 지으며 형식적인 신앙으로 하나님의 언약을 계속 파기하면 하나님의 복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해서 교훈한다.  선지자들은 이스라엘백성이 어떻게 하나님의 언약을 파기하고 죄에 빠지며 그들에게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이 온다는 것을 예언하는 동시에 또한 하나님에게 신실한 백성들에게는 위로하는 말을 전한다. 선지서를 통해서 선지자들은 앞으로 영원한 선지자 마지막 선지자가 오실 것인데 이는 하나님이 신명기 4:25-31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약속을 이루기 위함이며  모든 선자 자들이 모두 마지막 선지자인 그리스도를 가르키고 있다는 교훈을 준다.


   


성경이 무오하다는 진리를 어떻게 입증하는가?
가장 기본적인 접근 방법은 성경 자체가 성경의 권위에 대해서 무어라고 입증하고 있는가하는 것이다.  성경의 권위는 성경자체가 웅변으로 입증한다. 물론 성경의 무오성을 말할 때 우리는 성경의 원본의 무오성을 말한다. 그렇다면 비평하는 분들은 <오늘날에 성경에 원본이 없으니 오늘 우리가 사용하는 성경은 믿을 수 없는 고로 잘못이 있지 않은가?> 하고 반박하는 분들이 있다.  물론 성경은 1500년간에 걸쳐서 적어도 45명이 넘는 사람들, 서로가 성격이 다르고, 학식이 다르고, 직업이 다르고, 문화가 다른 사람들이 기록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꼭 알아야 할 것은 성경을 기록하는 사람들이 모두 제 나름대로의 생각대로 기록한 것이 아니고 베드로후서 1:21에 보면, 이분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서 하나님의 뜻대로 기록했다고 증언하고 있고, 바울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디모데후서 3:16에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 즉 하나님이 입김을 불어넣어 기록했다고 증언한다.  디모데후서 3:16을 ”하나님의 입김을 불어넣어서 기록했다“ 라고 읽은 것은 헬라어 원문이 그런 뜻이기 때문이다.


 


우리말 성경에는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한 것으로“ 라고 번역 되었으나 원문에서 ”theopneustos" 라는 헬라말은 “하나님이 입김을 불어넣어서” 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모든 성경은 하나님이 입김을 불어넣어서 기록했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두 가지 계시를 주셨는데 자연계시를 주셔서 조물주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을 알게 하였고, 그 하나님은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하였다. 그러나 그런 “자연계시, Natural Revelation) 만 가지고는 하나님의 성품이나 하나님의 속성이나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은 알 수 없다. 뒤뜰에 아름답게 피어나는 꽃은 조물주가 계심과 그 창조주의 아름다운 솜씨만 말해 줄뿐, 그 창조주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말해 주지 못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특별 계시, Special Revelation>를 주셨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나타내 주신 것인데 이것이 성경이다. 


 


하나님은 무려 1500년 에 걸쳐서 그의 말씀을 기록할 사람들을 선택하시고 그들의 죄 성을 없이 하시고 그들의 학식, 취미, 문화, 성격 등을 살리시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게 하셨다. 이것을 <유기적 영감설 (organic inspiration)> 이라고 한다.  성경이 <기계적 영감, Mechanic Inspiration> 으로 기록되지 않았다는 증거는 그의 문체를 보아서 쉽게 알 수있다.  구약의 에스더서는 비교적 문체가 단순하다. 그러나 선지서 이사야는 문제가 어렵다. 신약에서도 요한복음은 비교적 단문이나 중문이 많고 복문은 있기는 있어도 수가 적다.  반면에 누가복음은 복문 투성이며 단어 자체가 어려운 단어들이다. 왜 서로 문체가 다른가?  성경 기록자들이 서로 자기의 학식을 살리면서 서로 다른 문화 배경 속에서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성경 기록자들이 자기들의 문화를 간직하고 기록했다는 증거는 가령 로마인서 12장 20절에서 좋은 예를 볼 수 있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게 하라  그리하므로 그 이마에 산 숯불을 쌓아 놓으리라“ 라고 한 말씀이다.  이 말이 무슨 의미인가?  문자 그대로 사람의 머리위에 산 숯불을 쌓아 올리라는 말인가?  그렇게도 할 수 없지만 그런 의미가 아니다.


 


유대인들의 속담에 그런 말이 있다. 사람이 미우면 “그 사람에게 선심을 써라” 란 말을 그들은 “머리에 산 숯불을 얹어주어라” 라고 한다. 만일 성경이 한국에서 기록되었다면 아마도 <미운 사람에게 떡 한 개 더 주어라> 라고 기록했을 것이다. 이 말을 구약에서 잠언 25:22 과 비교해 보라.  거기에도 이런 유대인들의 어법이 나온다. 또 한 가지 예를 들면, 유대인들은 남을 욕할 때 곧잘 ” 먹기를 탐하고 술에 잠긴자“ 라는 말을 한다. 이런 문화가 신약성경 기록자들에게 그대로 들어왔는데 가령 예를 들면 예수님을 비방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빗대어 하는 말이 ”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라고 주님을 매도했다 이 말은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다는 말이 아니라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매도하여 그렇게 욕하는 유대인들의 언어습관이다.  이에 대해서는 구약 신명기 21:20 을 읽어 보기 바란다. 어떤 사람이 아들이 부모에게 불순종하면 그 자녀에게 대한 욕이 “술에 잠긴 자” 라고 한다. 술을 마셔서가 아니라 그 사람을 욕하는 그 나라의 언어 풍습이다.  여기서 이야기 하고 저 하는 것은 성경은 구약은 모두 유대인들이 기록했고 신약도 <누가> 를 빼고는 모두 유대인들이 기록했는데 유기적 영감으로 그들이 문화를 간직한 채로 하나님의 뜻대로 성경을 기록했다는 것이다. 


 


이렇듯 성경은 유기적 영감을 하나님이 성경 기록자들에게 역사하여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기록하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성경을 비판하는 사람들에게서 흔히 듣는 질문은 “성경은 원본에 있어서 조금도 틀림이 없다고 하더라도 복사하는 과정에서 또 번역하는 과정에서 잘못이 있을 수  있으니 오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은 믿을 수 없다”  라는 것이다.. 물론 복사 하는 과정에서 오류가 생긴다 그래서 오늘 구약과 신약에는 많은 사본이 있고 신약 사본먄도 5,000개가 넘는다. 그래서 성경학자들이 사본들을 비교 연구하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막중한 일을 담당하고 있는 연구 센터 중 하나가 영국 Manchester 에 있는 University of Manchester 의 John Rylands 도서관이다. 여기서는 아프리카 나일강 연안 이를테면, Therbe, Elephantine, Oxyrhynchus 같은 곳에서 발굴된 사본들과 mummy (미라)에서 발견된 사본들, 그리고 전 세계 여기저기에서 새로 발굴된 사본들을 수집하여 비교 연구하여 어느 것이 가장 원본에 가까운가를 연구한다. 이런 작업을 하등비평이라고 한다. 고등비평은 성경의 저자와 성경 기록 연대를 조정하는 작업이고 하등 비평은 사본들을 수집 비교 연구하여 어느 사본이 가장 원본에 가까운가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우리가 아는 것은 사본에 가끔 한 글자 혹은 한 줄이 누락하거나 혹은 반대로 한자 또는 한 줄이 중복되는 수가 있다. 그리고 중간에 서기관이 글자를 첨가한 곳도 있다. 가령 성경을 읽을 때 의미를 명확히 하기 위해서 글자를 첨가하는 일이 있는데 예를 들면 엡 1:2에 “있을 지어다 ” 란 말은 작은 글씨로 되어 있는데 이는 원문에는 그런 말이 없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서 서기관들이 마음대로 넣은 말이다.  우리말 성경에서는 이렇게 작은 글씨로 써서 원본에 없는 것을 서기관이 삽입한 것을 나타내지만 영문 성경에서는 사자체로 표기한다. 가령 고린도전서 14:2을 보면 “For he that speaks in an unknown tongue" 라고 되어 있는데 ”unknown“ 이라는 말은 원본에 없는 말로 서기관이 나름대로 이해를 돕기 위해서 집어넣은 말이다. 그래서 원본에 없는 말을 서기관이 삽입했다는 표시로 사자체 즉 italic 으로 기록한 것이다. 


 


방언은 <알지 못하는 말이 아니라 아는 말> 이며 지구 상 어디선가 어느 종족이 사용하고 있는 말이지 도모지 인간 세상에 어디에서도 모르고 하나님만 아는 그런 말이 아니라는 뜻인데 성경을 번역하는 사람이 원문에 없는 말을 삽입하여 우리들에게 혼동을 초래했다. 사도행전 2:4의 방언은 lalei heterais glossais 이다.   glossa 는 언어 이다.  즉 다른 언어들이란 말이다. 다른 나라말을 의미한다. 전혀 아무도 모르는 말이 아니다. 이 점에 있어서는 John Calvin 만 아니라 모든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공통되는 의견을 가지고 있다.


    


원본에서 복사하거나 다른 나라말로 번역하는 가운데 정확하지 못한 단어로 번역할 수도 있고 번역하는 사람들의 신학에 따라서 의미를 모호하게 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좋은 번역판을 사용해야 한다. 영문판에서는 KJV, NIV, ASV, NASV, ESV 등이 좋다. 우리말 성경으로는 관주성경이나 톰슨 성경, 오픈 성경 등이 있다.  이렇게 원본에는 잘못이 없어도 번역하거나 복사하는 과정에 잘못이 있다고 하지만 우리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장에서 가르치듯, 한 군데 의미가 모호하면 성경에 의미가 더 분명한 다르 부분에 비추어서 해석한다  즉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한다.  성경에 같은 대목이 많은 것은 서로 비교 연구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역대상에 나오는 말이 열왕기 상에도 나오고 시편말씀이나 호세아 말씀이 신약성경에 허다하다.  모두 비교 연구하게 하기 위함이다. 궁극적으로 우리를 구원에 이르는 지식을 얻게  하는 데는 조금도 지장이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성경은 정확무오하다고 하는 것이다. 성경의 내용이 조금도 틀림없이 정확하고 우리를 교리적으로 오도할 수 없이 정확하다는 말이다.


    


사람들은 말하기를 <성경의 무오성을 믿지 않아도 구원을 얻을 수 있고, 교회에서 지도자로 일할 수 있다> 라고 한다 그러나 이는 착각한다.  입으로는 보수정통 신앙가 라고 하면서도 돌아서서는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되었지만 내용은 틀림이 많다고 서슴없이 말한다. 사람들은 말하기를  <성경을 기록한 것을 본 사람이 지금  우리 곁에 있어서 증언해 주지 않는 한  이 성경이 무오하다고 보장할 수 없다>  라고 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사람들의 생각이고 성경 자체가 무어라고 하는가가 중요한다. 성경자체가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웅변으로 입증하고 있지 않은가?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가?  하나님이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입증하는 것을 믿지 않으면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하는가? 타락한 인간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비중 있게 믿어야하는가?  성경에서 하나님이 무엇이라고 가르치는가에 우리의 초점이 맞추어져야 한다. 이것이 성경의 무오성을 믿는 사람의 자세이다.


 


예수님이 성경에서 성경을 무어라고 가르치는가?
물론 주님 당시에는 구약뿐이었지만  구약과 또 조금 후에 기록될 신약에 대해서 우리 주님은 어떻게 생각했는가?   주님은 항상 구약을 인용하면서 구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가르쳤다. 마태복음 15:6 이나 마가복음 7:13; 요한복음 10:35을 보라. 이런 구약 성경 말씀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며 성경은 폐하지 못한다고 요한복음 10:35에 말씀하신다.  성경말씀은 진리라고 예수님이 힘주어 요한복음 17:17에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 이니이다” 라고 말씀하신다. 뿐만 아니라 마태복음 22:29에 보면, 예수님은 스스로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성경에는 잘못이 없다고 선언하셨다. 예수님이 잘 못이 없다고 입증한 것을 인간의 제한된 머리오 부인할 것인가?  인간의 지헤가 하나님의 지혜를 능가하는가?


 


예수님은 또한 구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셨다. 마태복음 4장을 보라, 시험받을 때 주님은 구약에서 많이 인용하셨다. 구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입증하시지 않는가?  신약성경 마태복음 7:26-29에 보면, 예수님은 자신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과 대등 시 한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았으니 지금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은 천지는 없어질지라도 절대로 없어지지 않는 그런 절대적인 말씀인 것이다 (마태복음 24:35). 예수님에게 있어서는 구약의 말씀과 그가 지금 하시는 말씀이 모두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다. 그는 로고스 바로 그 분이시다.  예수님이 이렇게 하신 말씀을 정면으로 도전하면서 부인할 것인가? 예수님은 분명히 성경의 무오성을 입증해 주고  계시다. 주님은 하나님 바로 그분임을 잊지 말자. 그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2위이시다. 이는 그가 성부 하나님보다 못하다는 말이 아니다. 성부 성자 성령은 한분 하나님의 삼위이며 모두 영광과 권세와 존귀가 동등하다.



하나님 바로 그분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 자신의 의견을 고집한다면 이는 예수를 믿는 사람이 아니다. 참다운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는다. 예수님의 말씀을 청종치 않으면 예수의 영 즉 성령이 없는 사람이고 예수의 영 즉 성령이 없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며구원이 없는 사람임이 분명하다 (롬 8:9).      예수님은 또한 말씀하시기를 성경은 변개할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마태 5:18, 눅 16:17; 눅 24:44 등을 읽어 보라, 성경은 교리 면에 있어서 마지막으로 호소할 권위이다.  마태 4:4,7.10; 마태 21:42;  막 11:17 등을 보라, 성경말고 어디에서 교리를 바로 알겠는가?  바른 교리는 성경에서만 나온다. 신앙고백서가 있다고하지만 신앙고백서는 사람이 만든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만큼 완전하지 못하다.  신약 성경을 읽어보면, 예수님이 하신 말씀 중에 “기록된바..” 란 말이 얼마나 많은가?  마태 11:10; 마태 21:13; 마태 26:24; 마가 9:12;  막 11:17; 막 14:21; 눅 7:27; 눅 19:46 등을 읽어 보라  <기록된바> 라는 말은 비단 예수님이 마귀에게 광야에서 시험을 당할 때만 쓰신 말이 아니다.  이런 말씀은 구약 율법서, 예언서, 성문서, 역사서 등에 모두 적용된다.  구약 전체와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성경의 무오성을 논할 때 놀라운 사실은 예수님이 구약의 모든 역사적 사건들이 실제로 일어났던 역사적 사건임을 입증한다는 것이다. 요나의 기적을 예수님은 마태복음 12:40에서 인정하시고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던 역사적 사건임을 입증했다. 창세기를 논하며 아담의 사적을 주님은 인정하고 역사적 사건임을 입증했다 (마태 19:4) 노아의 사적을 주님이 인정하시고 이 일이 실제로 일어났던 역사적 사건임을 입증했다 (마태 24:37 이하). 예수님은 모세의 글이 자기를 나타냄을 분명히 요한복음 5장42절 이하에서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 이라고 예수님이 입증하신 것을 우리가 부인할 수 있는가? 그런 가르침을 부인하면서도 우리가 그리스도를 생명의 구주로 믿는 분들인가?  우리의 지혜가 하나님의 지혜를 능가하는가?  우리는 피조물이다. 피조물은 지혜가 제한되어 있다. 온전하신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다.  예수님이 스스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성경은 폐할 수 없다> 라고 증명했다면 성경은 무오한 것이다. 


    


사람들은 고고학적으로 혹은 과학적으로 성경의 진위 여부를 입증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증언 이상 정확한 것이 성경 말고 또 어디 있는가?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 바로 그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 분은 인간의 형상을 입고 오시어 구약 말씀이 자기를 가르켜서 하신 권위 있는 말씀이라고 가르쳐 주셨다.  주의 말씀은 진리이다 그리스도는 진리 바로 그 분이시다.


    


성경의 무오성은 항상 성경 자체에서 그 진리를 입증해야 한다.  사람이 자기의 두뇌로 성경을 판단하면 오류가 생긴다. 이유는 인간은 타락하여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인간의 그 불완전한 생각과 식견이 완전하시고 절대 진리이신 하나님의 생각을 능가할 수 없다는 것은  어느 피조물이라도 부인할 수 없는 객관적인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성경의 무오성을 믿지 못하는 것은 타락한 인간의 본성을 그대로 들어내는 소치이며 아무리 유명한 신학자라도, 아무리 큰 교회를 목회하는 유명목사라 하더라도 아직 기독교의 교리를 모르는 사람이며 심한 경우 아직도 거듭나지 못했으며 아직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마태복음 7장20절 이하가 분명히 우리들에게 가르쳐 준다. 성경은 원본에 있어서 정확하고 무오하며 우리 생활과 신앙의 유일한 법칙이다.  성경을 바로 알자.


 


튤립 신학 연구원
김명도 교수
www.tulipministries.comrvkim@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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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크교수와 대담/교회의 정체성
쥬니어칼빈 | 2017.06.21 | 추천 0 | 조회 2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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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정체성과 사명
쥬니어칼빈 | 2017.06.21 | 추천 0 | 조회 3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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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 언약교리에 나타난 조직(신학)과 경건의 조화
쥬니어칼빈 | 2014.10.04 | 추천 0 | 조회 6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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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경신학개관
쥬니어칼빈 | 2013.11.11 | 추천 0 | 조회 5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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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구약 성경의 관계/이신열 교수
쥬니어칼빈 | 2013.10.05 | 추천 0 | 조회 6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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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 ‘회개’의 개념
쥬니어칼빈 | 2012.12.04 | 추천 0 | 조회 6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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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신학과 조직신학 - 이승구 교수(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쥬니어칼빈 | 2012.11.13 | 추천 0 | 조회 10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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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 세례와 성령충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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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번역에 문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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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해석의 기본 원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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