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신학
플라톤의 동굴 비유
21세기 문화와 개혁 신앙: 플라톤의 동굴 비유
이 경 직 (천안대, 기독교 철학)
I
기독교와 철학의 관계는 어떠해야 하는가? 테르툴리아누스(Tertulianus)처럼, 예루살렘과 아테네가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인가? 복음 외에 다른 것을 전하지 않기로 했노라는 말을 철학의 배제로 받아들여도 좋은 것인가? 철학적 논변이 복음을 믿게 하는 근거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말로 받아들여야지, 복음을 전하는데 철학적 언어가 전혀 무용하다는 말로 받아들여서는 안될 것이다. 대상의 본질 또는 정의(定義)를 묻는 철학은 복음의 내용을 보다 분명하게 하는데 (비록 완전하게는 아니지만) 크게 이바지할 수 있다. 또한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지음받은 사람에게는 (비록 죄로 인해 훼손되기는 했지만) 이성이 있으며, 따라서 진리에는 미치지 못하나 모상의 형태로 조금이나마 진리를 반영할 수도 있다. 일반 언어와 신학의 언어 사이를 이어주는 다리가 없다고 여기는 것은 기독교 진리의 초월성만을 강조하지, 그 진리의 내재성은 부정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그래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성육신 사건의 의미를 부정하는 결과가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언어 대신에 인간의 언어를 사용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헤드폰을 끼고 흥겨운 음악을 듣는 사람은 흥에 겨워 신나게 춤을 출 수 있다. 그러나 그 음악을 들을 수 없는 많은 사람은 헤드폰을 끼고 춤을 추고 있는 사람을 정신나간 사람 정도로 취급할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로마 시대의 기독교 박해의 원인 가운데 하나가 기독교에 대한 오해에 나왔음을 알 수 있다. 기독교인의 성만찬은 로마인이 보기에 식인 풍습이었다. 그런데 만일 헤드폰을 통해서만 음악을 들을 수 있으며, 그 음악을 확성기를 통해 전할 수 없다면, 아직까지도 기독교인의 성만찬은 식인 풍습으로 여겨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다.
이 글에서는 기독교 신학의 형성에 영향을 준 헬라 철학, 특히 헬라 철학의 학문관을 살펴보면서, 이와 관련하여 개혁 신앙이 21세기 문화 속에서 해야 하는 역할을 드러내고자 한다. 또한 미디어 문화 시대인 21세기 문화 속에서 신앙은 어떻게 전달되어야 하는지를 밝히고자 한다. 이를 위해 플라톤의 <국가>편 7권에 나오는 동굴의 비유를 중심으로 논의를 해나가고자 한다. 이를 통해, 이론학과 실천학을 구분하여 서로 다른 영역에 둔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관 대신 모든 지식의 근거를 좋음이라는 하나의 원리에 둔 플라톤의 학문관이 지식과 실천이 함께 가는, 진리가 자유를 주는 개혁 신앙의 본질을 더 잘 드러낼 수 있음을 보여주고자 한다. 또한 알면서도 죄를 짓는 사람이 있다는 점을 들어 플라톤의 학문관을 일종의 주지주의라고 비판하는 입장에게 있는 문제점도 지적하고자 한다.
II
이 글에서 기독교를 접하지 못했던 플라톤을 연구 주제로 삼는 목적은 기독교 선교에서 그의 생각을 어느 정도까지 활용할 수 있는지를 찾아보려는데 있다. 이는 플라톤의 동굴 비유에서 기독교 신앙의 구조를 찾아낼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기독교의 신앙 경험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 (완전하지는 않지만) 나름대로 전달할 수 있는 구조를 찾아보는 일은 선교적 차원에서 의미있는 작업일 것이다. 한편으로 기독교의 독특성을 어느 다른 구조로도 설명할 수 없다는 원칙에 동의하면서도, 일반 은총을 통하여 모든 사람이 (불완전하게나마)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입장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물론 일반 은총만으로는 그리스도의 구속을 믿기에는 충분치 못하다. 인간에게 종교성이 있는 이유도 일반 은총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다. 기독교 외의 종교를 믿는 사람은 (불완전하고 그래서 제대로 된 것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는 셈이다. 이 글에서 살펴 보고자 하는 플라톤의 동굴 비유에도 종교적 배경이 있다. 플라톤은 <파이돈>(Phaidon)편 62b에서 이 땅에서의 삶을 감옥으로 여기는 생각을 이 비유에서는 동굴과 연결시킨다. 이 땅에서의 삶을 감옥으로 여기는 생각은 오르페우스(Orpheus) 종교 전통에서 나타난다. <국가>(Politeia)편 533d에서 변증술을 통해 영혼에서 제거되어야 하는 무지를 진창에 비유하는데서도 이러한 전통이 잘 나타난다. <파이돈>편 69c에서 진창에 누워 있는 것은 오르페우스 종교에 입문하지 못한 자의 운명으로 표현된다. 이에 비추어 볼 때 동굴밖에 나와 좋음의 이데아를 파악하는 사람은 높은 단계에 이른 자(teletai)로 간주될 수 있다. <파이돈>편 69c-d에서 플라톤은 지혜(phronesis)를 katharmos, 즉 정화하는 의식이라고도 부르는데, 정화를 나타내는 표현이 그 대화편에서 계속해서 나온다. <국가>편에서도 동굴 안에서 동굴 밖으로 나가는 과정을 영혼이 정화(katharsis)되는 과정으로 묘사한다. 이러한 종교적 배경은 <향연>(Symposion)편에 나타난 인식의 상승 과정에서도 잘 나타난다.
또한 <국가>편 6-7권에서 플라톤이 좋음의 이데아를 묘사하면서, 그 이데아가 다른 모든 이데아보다 더 높은 것처럼 얘기한다. 좋음은 다른 모든 것에 가치가 있기 위해 필요한 조건이다. 또한 좋음은 인간 인식의 필요조건이다. 잠재적 색이 실제 색으로 되기 위해 빛이 필요하듯이, 형상을 알 수 있기 위해서는 좋음으로부터 빛이 나와야 한다. 또한 좋음은 지성을 통해 파악할 수 있는 세계, 즉 형상 세계를 만들고 유지해주는 원인이기도 하다. 물론 플라톤이 좋음의 이데아를 신으로 여겼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플라톤이 좋음의 이데아를 묘사하는 표현으로 인해 그의 제자 크세노크라테스(Xenokrates)와 같은 사람은 좋음의 이데아가 신이라고 해석하게 되었으며, 그래서 중기 플라톤주의에서 신을 좋음과 같게 여기게 되었다. 이러한 해석은 기독교 신학자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플라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지라도, 일부 신학자는 플라톤의 표현에 기독교의 진리와 양립할 수 있는 측면이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은 존재하는 모든 것을 만들고 유지해주는 원인이 하나님이라고 여기는데, 이는 좋음의 이데아에 관한 묘사와 일치하기 때문이다: 신이 없다면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또한 기독교인은 신을 인간 인식의 필요조건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인간이 신의 형상을 지니지 않았다면, 인간은 지식을 지닐 수 없는 야수에 불과할 것이다. 기독교인은 신을 인간 삶의 절대적이고 궁극적인 목적으로 여긴다.
또한 라틴 계열 중세 신학자들이 기독교 철학의 체계와 논리적으로 모순이 없는지에 따라 플라톤 철학 가운데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은 받아들이고 그렇지 못한 부분은 물리쳤던 역사도 있다. 또한 15세기 르네상스 시대에 나타난 기독교 플라톤주의는 기독교와 플라톤주의를 연결해보고자 시도했다. 그 가운데 대표적 인물이 플라톤의 모든 대화편을 라틴어로 번역하고 본문을 밝혀주는 긴 주석을 붙인 마르실리오 피치노(Marsilio Ficino)이다.
III
플라톤의 동굴은 플라톤이 사용한 비유 가운데 가장 유명한 비유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 비유를 진지하게 살펴봄으로써 플라톤의 생각을 해석했다. 하지만 이 비유를 어느 정도까지 철학적으로 해석해야 하는지에 대해 논란이 많다. 해석상 철학적으로 어려운 문제가 생겨나며, 비유가 도대체 무슨 뜻인지에 대해서도 서로 의견이 다르기 때문이다. 동굴의 비유는 인간에게 자유와 계몽을 줄 수 있는 능력이 철학에게 있다는 점을 가장 낙관적이고도 아름답게 그려낸 비유이다. 이와 더불어 철학의 계몽을 받지 못한 사람의 상태가 가장 어둡고도 비관적으로 그려진다. 또한 대부분의 사람이 계몽되지 않은 상태라는 점도 아울러 지적된다.
플라톤이 비교적 자세하게 제시하는 동굴의 비유(Pol. 514a-519b)는 다음과 같다. 입구가 보이지 않는 길고 경사진 동굴이 있다. 이러한 지하 동굴 속에 태어날 때부터 앉아 있는 사람들이 있다. 동굴은 나쁜 사회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조건을 나타낸다. 그들 뒤에는 불이 있다. 하지만 그들의 목과 발에는 족쇄가 채워져 있어서 그들은 그들 앞에 있는 벽에 비친 그림자만 볼 수밖에 없다. 이러한 그림자는 그들 뒤에 있는 담에서 어떤 사람이 인형극을 하듯이 온갖 종류의 인형을 움직일 때 불빛에 투사되어 생기는 그림자이다. 그들은 그림자가 진짜 사물이라고 여긴다. 동굴에 울리는 소리가 있는 경우, 그들은 그 소리가 그림자에서 나오는 소리라고 여긴다.
만일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의 족쇄가 풀려서, 그가 강제로 불을 향하게끔 되는 경우 그는 눈이 부신 까닭에 그림자의 원상(原象)을 볼 수 없다. 그래서 그는 당황하고 불평하면서, 원래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이 더 행복하다고 여긴다. 누군가 그의 이전 상태가 얼마나 비참한 것인지를 말해줄 때 그에게 화를 내기까지 한다. 족쇄가 풀린 사람 가운데 소수만이 힘든 상황을 참아내어 결국 그림자가 인형에 의해 생긴 그림자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눈이 회복되는 과정은 천천히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제 그들은 해방의 여행을 시작하여 불을 지나쳐서 동굴 밖으로 나와 실재 세계를 접하게 된다. 처음에 그들은 눈어지럼증을 느끼며, 물에 비친 그림자를 통해서만 실재 대상을 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햇빛 아래에서 실재하는 대상을 직접 보며 나중에는 태양까지도 볼 수 있게 된다.
이제 그는 그가 이전에 동굴에서 겪었던 상태를 기억해낸다. 그가 보기에 동굴 속에 있는 사람들의 상태는 비참한 상태이다. 그들은 스쳐가는 그림자를 분명하게 볼 수 있고 그림자가 나타난 순서를 잘 기억해서 다음에 나올 그림자를 정확하게 맞춘다는 이유로 상과 명예를 주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가 동굴 속으로 되돌아오는 경우, 그의 눈이 다시 어두움에 익숙해져야 하므로 그는 그림자 맞추기 놀이를 잘 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동굴 안에 있던 사람들은 그를 비웃으며 지상으로의 여행이 그의 눈을 망쳤다고 생각할 것이다. 누군가 그들을 자유롭게 해서 위로 가게 하고자 한다면, 그들은 도리어 그를 죽이고자 할 것이다.
IV
플라톤은 이 비유(eikon)를 이해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다(Pol. 517a-c). 지하 동굴은 눈에 보이는 세계와 일치하며 불은 태양과 일치한다. 동굴 밖의 세계로 올라가서 그곳의 사물을 보는 것은 영혼이 지성을 통해 파악될 수 있는 세계로 올라가는 것에 해당한다. 동굴 밖에서 마지막에 볼 수 있으며 가장 보기에 어려운 것은 좋음의 이데아이다. 좋음의 이데아를 파악하는 경우, 우리는 모든 옳고 좋은 것의 원인이 그것이며, 그것이 눈에 보이는 세계에 있는 태양을 낳으며 지성을 통해 파악될 수 있는 세계를 다스리며, 진리와 지성을 제공하며, 그러한 이데아를 보지 못하는 경우 개인적인 일이나 공적인 일에서 지혜롭게 행위할 수 없다고 추론해내어야(syllogistea) 한다. 플라톤의 비유에 따르면, 변증술은 동굴 안에 있는 사람이 동굴밖에 나와서 더 이상 연못에 비친 그림자를 보지 않고 자연물을 보며, 마지막으로 태양 자체를 보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동굴 안에서 족쇄를 차고 있는 사람은 교육받지 못한 보통 사람을 가리키며, 몸을 돌려 동굴 밖으로 나가는 모든 과정은 플라톤이 제시하는 개혁적 교육의 단계를 나타낸다.
1. 동굴 안의 사람
동굴의 비유는 인간에게 계몽이 있는 상태와 그렇지 않은 상태를 다루는 비유이다. <국가>편 515a에서 글라우콘(Glaukon)은 이는 낯선 그림이며 동굴 안의 사람들은 낯선, 즉 이 세상에는 없는 사람들(atopon eikona kai desm tas atopous)이라고 밝힌다. 플라톤은 글라우콘의 이러한 생각을 강하게 부정하면서, 동굴 안의 사람이 우리와 같은 사람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이는 동굴의 비유가 이론적 차원에 머물지 않고 당대 아테네를 겨냥한 비유이며, 더 나아가서 우리의 구체적인 현실을 나타내는 비유라는 점을 잘 드러내준다. 동굴의 비유가 동굴 안을 매우 비관적으로 그리고 있는 까닭은 당대 아테네의 상황이 매우 비관적이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플라톤에 따르면, 인간의 상황은 진공 상태에 있지 않고, 이미 어떤 정치 체제 속에 있다. 동굴 안에 있는 사람은 기존 정치 체제에 순응하는 자이다.
한 가지 유의해야 할 점은 동굴 안에 있는 사람을 속이는 자도 동굴 안에 있다는 점이다. 그러한 자가 다스리는 사회는 사회 구성원이 나름대로 가치관을 개발하도록 격려하지 않는다. 그러한 사회의 관심은 사람들의 생각을 지배하는 미디어를 통제함으로써 사회 구성원들이 기존의 견해에 순응하도록 하는데에만 있다. 사회 구성원이 주체적으로 윤리적 결단을 내리는 일은 이러한 사회에서 불가능하다. 이러한 사회는 사회 구성원에게 자발성을 요구하지 않는 사회이다. 플라톤은 동굴의 비유를 통해서 계몽되지 못한 사람의 상태뿐 아니라 계몽을 방해하는 사람 또는 체제에 대해서도 비판한다: 좋은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는 교육 방법 또는 교육 체제를 개혁해야 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볼 때, 플라톤의 동굴 비유는 당대 아테네의 기존 교육 체제에 대해 반기를 들다가 사형을 당한 소크라테스를 변호하는 비유로도 읽힐 수 있다. 당대 교육관에 따르면, 교육이란 선생이 학생의 영혼 속에 지식을 집어 넣는 것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교육의 목적은 학생의 눈이 향하는 방향을 바꾸어 올바른 대상을 향하도록 하는데 있다.
2. 여행의 시작
동굴 안에 묶여 있는 사람은 실재를 잘못 알고 있으면서도 그러한 사실을 알지 못한다. 비판을 통해 그의 생각에 모순이 있다는 점이 드러날 때, 그는 움츠러들고 비판가로부터 몸을 돌린다. 그는 자신의 무지(無知)를 인정하려 들지 않으며, 따라서 무지를 극복하기 위한 지적 여행에 나서려 하지 않는다. 이는 전통적 생각에 물든 사람이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태도이다. 그래서 플라톤에 따르면, 누군가 그를 강제로 동굴 밖으로 끌고 나가야 한다. 그런데 누가 그를 끌고 나갈 수 있는가?
<국가>편에서는 동굴 안에 있던 사람이 어떻게 동굴 밖으로 나가는 여행을 시작하도록 강제되는지가 자세하게 이야기되지 않는다. 물론 <국가>편에도(485b, 485d, 486a) 진리를 향한 욕구가 철학자에게 있을 것이라는 언급이 있다. 그래서 수학 교육을 통해 진리를 향한 욕구가 일깨워진다고 여길 수 있다. 하지만 동굴 밖으로 나가게 되는 동기는 <향연>편에서 보다 자세하게 설명된다. 이 대화편에서 플라톤은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벗어나 영원한 형상을 향하게 되는 추진력은 사랑에 있다고 힘주어 말한다. 그런데 이러한 추진력은 우리가 우리의 무지를 깨달을 때 생겨난다. 사랑은 본질적으로 자신의 부족을 알고 그 부족을 채우고자 하는 욕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누군가 무지를 깨우쳐 주어야 한다. 플라톤에 따르면, 바로 선생이 이러한 역할을 한다. 선생은 논박술(elenchos)을 통해 젊은이의 생각에 모순이 있음을 지적함으로써, 젊은이가 자신의 생각이 체계적이고 일관되지 못하다는 점을 깨닫도록 한다. 이러한 깨달음이 바로 막다른 길(aporia)로 표현된다. 동굴 벽에 비친 그림자만을 보던 사람이 몸을 돌이켜 동굴 안의 불을 보았을 때 어지럼증을 느끼게 된다. 불빛에 눈이 부신 그는 자신이 이전에 보았던 그림자마저 잘 보지 못하는 사람이 된다. 그의 이전 지식은 무너졌고 새로운 대안은 아직 없는 상태에 빠진 것이다.
이러한 상태에 대해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난다. 대다수는 논박술로 자신의 무지를 폭로하는 선생에 거부 반응을 보인다. 대표적인 인물이 아테네를 결국 파멸로 몰아넣은 젊은 미남장군 알키비아데스(Alkibiades)이다. 플라톤이 <국가>편 494b-e에서 묘사하는 젊은이는 <향연>편에 소개된 알키비아데스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알키비아데스는 잘 배우고 기억력도 좋고 용기도 있고 큰 일을 잘 처리하는 훌륭한 젊은이이다. 영혼만큼이나 신체도 아름답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은 그가 나중에 정치적으로 크게 될 사람이라고 여긴다. 그래서 그에게 미리 아첨하고 그에게 명예를 돌린다. 그래서 그의 영혼은 야망으로 가득차고 헛된 자만에 빠지게 될 것이다. 누군가 이러한 젊은이에게 와서 젊은이가 처한 진정한 상태를 이야기해준다면, 즉 그에게 지성(nous)이 없으며, 그래서 지성이 필요하다고, 지성을 얻기 위해서는 노예만큼이나 수고해야 한다고 조용히 말해준다면, 그 젊은이가 주변 사람들의 시끄러운 칭찬 속에서 그러한 조용한 소리에 귀기울일 수가 없다. 다행히도 그가 무언가 알아듣고 철학을 하고자 하는 경우, 자신들이 공들여 온 것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주변 사람들은 개인적 음모와 법적 처벌을 통해 젊은이를 올바른 길로 설득하고자 하는 자를 무력화시키고자 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렇게 설득하고자 한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마시고 죽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 그러한 젊은이는 철학을 할 수 없다. 즉 그는 진리를 찾아나설 수 없다. 이는 <항연>편에서 알키비아데스가 자신의 무지를 깨달았지만 진리를 찾는 길에 나서지 않았다는데서 잘 드러난다. 이에 반해 소수의 사람은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고 진리를 찾아 동굴 밖으로 나아가고자 한다. <향연>편에서는 아가톤(Agathon)이 이러한 역할을 맡는다. 소크라테스는 논박을 통해 아가톤의 무지를 깨우치면서, 제우스를 섬기는 여사제 디오티마(Diotima)를 통해 자신도 그러한 경험을 했다고 밝힌다. 이는 <국가>편에서 플라톤이 분명하게 밝히지는 않지만, 동굴 안에 있던 사람의 족쇄가 풀려 불빛을 향해 몸을 돌이키는 사건은 논박을 통해 그의 무지를 깨우치는 선생이 있기에 가능했음을 잘 보여준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무지를 깨우쳐 준 자를 다이몬(Daimon)이라고 표현한다.
이를 기독교의 선교와 연결해보면 다음과 같다. 기독교인이 잘못된 사회적 관습이나 문화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 개혁 신앙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들의 신념이 자기 모순에 빠지거나 사람이 받아들일 수 없는 거짓 신념이라는 점을 밝혀주어야 한다. 먼저 그들의 문화관, 세계관을 흔들어놓는 일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들을 정죄하거나 멸시하는 태도 대신에 그들의 처지를 불쌍히 여기는 공감의 자세가 필요하다. <향연>편에서 소크라테스는 아가톤에게 자신도 아가톤과 같이 잘못 생각한 시절이 있었노라고 밝힌다. <국가>편에서 소크라테스는 동굴의 비유를 소개하면서, 태어날 때부터 동굴 속에 앉아 앞만 볼 수밖에 없는 사람이 "우리와 같은" 사람이라는 점을 굳이 강조해서 밝힌다(Pol. 515a). 한 때 잘못된 종교를 지녔던 사람이 회심한 후에 자신이 이전에 믿었던 종교를 여전히 믿고 있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더 잘 전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그 종교의 잘못된 점을 날카롭게 지적할 수 있는데 있어 보인다.
3. 여행길의 연속성
플라톤은 동굴의 비유 마지막 부분에서(Pol. 517a-b) 이 비유를 앞서 얘기했던 부분에 전체적으로 적용해야 한다고 밝힌다. 앞서 얘기했던 부분이란 해의 비유와 선분의 비유를 가리킨다. 앞서 해의 비유는 처음부터 가시계(可視界)와 가지계(可知界)를 엄격하게 구분한다. 두 세계는 서로 유비되면서도 서로 엄격하게 구분되었다. 보는 능력과 보여지는 것(to horaton)만으로는 시각이 이루어질 수 없다. 제3의 것(to triton genos, Pol. 507e)인 빛이 앞의 둘을 묶어주어야만 시각이 이루어질 수 있다. 이러한 빛의 원천은 하늘의 해이다. 마찬가지로 가지계에서는 사고 능력과 사고 대상만 있어서는 사고와 지식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좋음의 이데아로부터 사고 대상에 진리와 존재가 비쳐야 한다. 특히 좋음은 '존재를 넘어서'(epekeina tes ousias) 있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 때문에 철학자에게 경험과 전혀 관계없는 지식이 있으며 보통 사람이 아는 것은 진짜가 아니라는 주장을 플라톤이 하고 있다는 해석이 나오게 되었다. 이러한 해석은 플라톤을 두 세계 이론(two-world-theory)의 옹호자로 여긴다. 이러한 해석을 동굴의 비유에 그대로 적용하면, 동굴 안과 동굴 밖을 이어주는 길은 없게 되며, 후기 플라톤주의자의 글에서처럼 소위 불가지론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 지성으로 알 수 있는 세계와 감각 세계 사이에 연결이 없다면, 감각 세계밖에 있는 신은 감각 세계에 있는 인간에 대해 알 수 없게 된다. 또한 인간 역시 신에 대해 알 수 없다. 그래서 필론과 중기 플라톤주의자, 영지주의자에 따르면, 좋은 신은 완전히 초월적이고 따라서 본질적으로 알 수 없는 존재이다.
그러나 해의 비유는 동굴의 비유에 비추어 이해해야 한다. 동굴의 비유에서 동굴 안에서 동굴 밖으로 나아가는 길은 비록 가파르고 험하지만 단절되어 있지는 않다. 또한 선분의 비유에서도 가시계에 속하는 부분 가운데 믿음(pistis)에 해당하는 자연물을 나타내는 부분과 가지계에 속하는 부분 가운데 수학적 대상(mathemata)을 나타내는 부분의 길이가 서로 같다. 플라톤 자신이 이러한 사실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밝히지는 않지만, 이를 가시계와 가지계가 단절된 것이 아님을 암시하는 사실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티마이오스>편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세계는 완전한 세계는 아니지만, 제작자 신 데미우르고스(Demiourgos)가 가지적인 형상(形相) 세계를 보고 가능한 한 그 형상에 닮도록 만든 세계이며, 또한 신 자신을 닮도록 만든 세계이다(Tim. 30a). 따라서 언어로 표현되는 개념을 통해 (비록 완전하지는 않더라도) 이 세계를 파악할 수 있으며 이 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플라톤 스스로가 잘 보여준다. 그는 동굴의 비유라는 유비(analogia)를 통해 사태를 전달해준다.
기독교의 관점에서 볼 때, 이 세계는 하나님이 만드신 세계이며,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도록 지음받았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말씀이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당신의 뜻을 전달하신다. 로마서에서 이러한 사실이 잘 나타난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진리를 불의 속에 잡아 두는 자들, t n t n al theian en adikia ketechont n)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to gn ston tou theou phaneron) 저희 속에 보임이라.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ho theos gar autois ephaner sen)"(롬 1:18-22).
만일 구치처럼 예수님을 침묵의 대명사로 묘사하고, 종교적 언어를 비트겐슈타인의 말할 수 없고(unsagbar) 보여줄 수만 있는(zeigbar) 언어로 여기는 것은 문제 있는 태도이다. 이는 우리가 불가지론적 태도로서 이원론적 생각을 전제하는 태도이다. 하지만 동굴의 비유에서 볼 수 있듯이, 동굴 안과 동굴 밖은 유비(analogia)의 관계에 있다. 동굴의 비유는 원상과 모상의 관계를 전제하고 있다. 동굴 안과 동굴 밖은 전혀 단절된 세계가 아니다. 이때 유비는 동굴 안의 언어와 동굴 밖의 언어가 서로 다름을 뜻하지 않고, 동일한 언어의 의미에 대한 인식의 정도가 다르다는 것을 뜻한다. 영혼이 동굴 밖으로 여행하는 것은 교육 과정을 통해 영혼이 개념의 의미를 보다 분명하게 파악해가는 과정이다. 플라톤은 이러한 과정을 영혼이 정화(katharsis)되어가는 과정이라고 표현한다. 마치 거울에 때가 많이 끼여 있을 때 그 거울에 비친 상이 불완전하듯이, 영혼이 감각이 가져다 주는 혼란 때문에 이성의 기능을 온전히 발휘하지 못할 때 각 사물의 본질(개념 또는 정의)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기독교식으로 표현하자면, 인간에게 있는 죄로 인해 성경 말씀(logos)을 통해 드러난 계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셈이다. 이러한 경우, 죄는 하나님을 의도적으로 거역하고 자신에게 있는 "sensus divinitus"를 억압하는 것이다.
실제로 플라톤의 대화편에 나타난 소크라테스의 교육 방식이 바로 이러한 점을 잘 드러낸다. 소크라테스가 당대 아테네 젊은이를 교육할 때 사용한 언어는 당대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일상 언어였다. 젊은이들은 소크라테스의 말을 이해했으며, 그 언어 속에 나타난 논리를 쫓을 수 있었다. 그런데 소크라테스와 젊은이 사이에 이루어지는 대화(dialektik)는 어떤 개념의 정의(ho ti esti)를 묻는데서 출발한다. 젊은이가 제시한 대답의 의미를 밝혀가다 보면 결국 그 젊은이에게 모순된 생각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흥미로운 것은 젊은이의 대답이 궁극적으로 틀렸다는 것이 입증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젊은이가 서로 모순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만이 대화를 통해 드러난다. 이는 지식의 확실성을 추구하는 데카르트와는 달리 플라톤이 지식을 이해하는데 관심을 둔다는 사실을 드러내준다. 플라톤에 따르면, 이해한다는 것은 모순없는 설명을 할 수 있도록 체계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국가>편 10권에서 플라톤이 제작자보다 사용자에게 더 나은 지식이 있다고 여기는 이유도 이러하다. 예를 들어 신발의 제작자는 신발에 대해서만 알지만, 신발의 사용자는 신발 자체뿐 아니라 신발이 전체 사회에서 하는 기능(ergon) 또는 역할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전체적인 연관성을 안다는 점에서 사용자가 제작자보다 앞서 있는 셈이다. 하지만 후기 대화편 <티마이오스>편에서는 세계밖에 어떠한 것도 존재하지 않는 까닭에, 세계를 제작하는 신 데미우르고스(Demiourgos)에게는 <국가>편 10권에 나오는 사용자와 제작자의 구분이 나타나지 않는다. 우리 인간에게 개연적인(contingent) 진리가 신에게는 필연적인 진리라는 라이프니츠(Leibniz)의 주장도 이러한 구분과 관련해서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은 전체의 연관을 보지 못하지만 신은 전체의 연관을 볼 수 있다는 생각이 이러한 주장에 깔려 있다.
모든 세계관은 나름대로 정합적인 체계를 지니고 있다. 우리가 기존의 문화나 가치관을 완전히 반박해야 비로소 그러한 가치관에서 상대방을 구출해내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선교 대상에 있는 가치관 또는 세계관을 검토하여 그 속에 서로 모순된 생각이 있음을 폭로할 때 선교가 시작된다. 폭로 후에 해야 할 일은 우리에게 있는 참된 진리를 대안으로서 소개하는 일이다. 마치 진리 증명이 선교의 유일한 방책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지식의 확실성을 추구하는 데카르트에서 시작하는 근세적 사고의 결과이다.
4. 동굴밖에 이른 사람
동굴밖에 이른 사람은 드디어 실재 세계를 만난다. 그러나 그의 눈이 아직 태양빛에 적응하지 못해 어지럼증을 느끼며, 그래서 실재하는 자연물이 물에 비친 그림자만을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햇빛 아래에서 실재하는 대상을 직접 보며 나중에는 태양까지도 볼 수 있다. 플라톤은 동굴밖에서 눈이 태양빛에 적응해가는 과정을 변증술(dialektik )을 배우는 과정으로 이해한다. 그런데 <국가>편에 나타난 변증술에는 초기 대화편에 나타난 논박술(elenchos)과 다른 점이 있다.
플라톤의 초기 대화편에서 주로 사용되는 논박술은 상대방의 주장이나 생각을 철저하게 따져 봄으로써 상대방의 주장을 물리치는데 사용된다. 하지만 적극적으로 진리를 설명하지는 못한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초기 대화편에서 자신의 무지를 강조한다. 소크라테스가 당대 소피스테스(Sophistes)와 다른 점은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그가 알고 있다는 점이다. 이를 동굴의 비유에 적용해서 이해한다면, 소크라테스는 동굴 안에서 더 이상 벽에 비친 그림자를 보지 않고 몸을 돌려 동굴 안의 불을 본 사람에 해당할 것이다. <향연>편에서 소크라테스가 자신은 사랑의 일(erotika)만 안다고 밝히지만, 이러한 표현은 무지(無知)에 대한 지(知)를 다르게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소크라테스가 철학을 상품처럼 돈을 대가로 학생에게 전달해줄 지식(sophia)로 여긴 당대 소피스테스를 공격하기 위해 무지를 가장했는지, 아니면 실제로 그가 궁극적 진리를 발견하지 못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생각이 서로 다르다. 하지만 <향연>편에 나타난 철학(philosophia) 개념을 보면, 그리고 그 개념을 구체화한 소크라테스의 모습을 보면, 그가 무지를 가장하지 않았다고 여기는 것이 옳을 듯하다. 대화(dialegein)를 통해 따져 보고 틀린 경우 반박하는 것은 소크라테스의 삶의 방식이었으며, 지식(sophia)를 얻기 위한 자발적 노력이었다. 철학은 지식이 아니라 "무지와 지식 사이에 있는 것"(Symp. 204b)으로서, 지식에 이르는 길이다. <테아이테토스>(Theaitetos)편에서는 이러한 길을 가는 것을 신과 같아지는 일(homoiosis the , Theait. 176b)이라고 표현한다. 지식이 있는 자는 더 이상 철학자가 아니다. 그래서 신들 가운데는 철학자가 없다. 신에게는 이미 지혜가 있기 때문이다(Symp. 204a).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인간의 삶의 목적은 지식을 얻는 것이고, 이 일을 위해 반드시 사람들의 생각(doxa)을 따져보아야 한다(philosophounta men dein jen kai eksetajonta).
<향연>편에서 그리는 철학의 모습에서 두 가지 점을 기독교와 연결해 볼 수 있다. 첫째로, 아직 동굴밖에 나가지 않았지만 동굴 벽에 비친 그림자와 그림자의 원상을 구분할 줄 아는 사람이 그림자만 보는 사람의 시선을 뒤로 돌리는데 기여할 수 있다. 기독교적으로 말하자면, 기독교인이라면 아직 성경 말씀의 의미를 완전히 깨닫지 못했다 하더라도 아직 기독교를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에게 전도할 수 있다. 그는 이전의 세계관이 진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지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로, 그림자만 보던 사람이 그러한 도움을 받아 진리를 향해 돌이키는 경우, 진리를 향해 나아가는 일은 자발적이어야 한다. 즉 그에게는 진리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물론 이러한 마음은 성령의 역사가 없이는 생길 수 없는 것이다. 전도자의 사명은 전도받는 사람이 말씀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만나도록 도와주는데 있다. 소크라테스가 제대로 된 아기를 낳도록 도와주는 산파로 자처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그런데 <국가>편에 나타난 철학자에는 이전 대화편에 나타난 철학자와 다른 점이 있다. 이 대화편에서 플라톤은 당대 철학자를 자처하는 사람과는 다른 진짜 철학자가 누구인지를 정의하고자 한다(horisasthai). 철학자의 지식은 변치 않는 존재(Pol. 479a), 즉 이데아에 관한 지식이며, 결국 모든 이데아의 최종 근거인 좋음의 이데아에 관한 지식이다(Pol. 504a). 철학자는 변증술을 통해서 이러한 지식을 얻게 되며, 따라서 철학자는 변증가(dialektikos)이다. 변증가는 각 사물의 본질에 관한 설명을 지닌다(ton logon hekastou lambanonta tes ousias, Pol. 534b)는 점에서, 존재의 본성과 학문의 상호 연관을 통찰하는 자이다(Pol. 537c). 따라서 변증술은 사물의 본질에 대해, 그리고 그 본질의 최종적 근거에 대해 설명할 수 있는(logon didonai) 기술이라는 점에서 무지를 전제로 하는 논박술과 다르다. 따라서 논박술이 어떤 개념을 분석(anaysis)하는데 주력하는 기술인 반면에, 변증술은 논박술뿐 아니라 어떤 개념을 모든 것의 근거인 좋음(agathon)과 연결시킴으로써 전체적 연관을 설명할 수 있는 기술까지 포함하는 기술이다. 플라톤이 <국가>편 537d-539d에서 너무 어린 나이에 변증술을 배우는 일을 금하는 이유도 너무 어린 나이의 사람이 변증술을 파괴적인 성격이 있는 논박술로만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는 마치 자신의 아버지가 진짜 아버지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어린이가 보이는 행동처럼 부정적으로만 변증술을 사용할 것이다.
하지만 초기 대화편에 나타난 소크라테스에게는 논박술의 부정적 측면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에게는 진리를 향하여 나아가려는, 또한 젊은이들이 진리를 향하여 나아가도록 돕고자 하는 좋은 의도가 있기 때문이다. 이를 기독교에 적용한다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계시의 말씀인 성경을 대하는 태도에 따라 진리에로 나아갈 수 있고, 그렇지 않고 파멸에 이를 수도 있다. 그래서 플라톤은 <국가>편에서 중세 초기의 신학자 안셀무스의 명제 "나는 알기 위해서 믿는다"(credo ut intelligem)를 떠올리게 한다.
이제 동굴 밖으로의 여행은 해 자체를 봄으로써 끝난다. 해의 비유에서 해는 좋음의 이데아에 비유되었다. 최고의 지식 대상인 좋음의 이데아는 존재와 진리를 가능하게 하는 원천이었다. 따라서 좋음의 이데아를 접했다(haptesthai)는 것은 연구 대상인 한 개념을 전체와의 연관 속에서 파악했다는 뜻이다. 구슬이 서말이라도 꽤어야 보배라는 말이 있듯이, 어떤 대상의 본질을 안다는 것은 그 대상이 그 밖의 모든 대상과 갖는 관계를 안다는 것이다.
5. 동굴 안으로의 귀환
지금까지가 오르막길(anabasis)이었다면, 이제 내리막길(katabasis)이 있다. 동굴 밖에서 좋음의 이데아를 접한 사람은 이제 동굴 안으로 되돌아갈 것으로 기대된다. 플라톤의 교육프로그램에 따르면, 동굴밖에 나온 사람은 30세부터 5년간 변증술을 익힌 사람이다. 그가 35세가 되면 다시 통치자에게 필요한 경험을 얻기 위해 동굴 속으로 돌아와 15년간 현실 정치에 참여해야 한다. 또한 철학자는 50세 후에도 서로 돌아가면서 도시를 다스려야 한다. 플라톤은 <국가>편 473b-474c에서 철학자가 이상 국가를 통치해야 한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끌어들였다. 그래서 그는 통치하는 일과 철학하는 일이 사실 두 가지 일이 아니라 하나의 일이라는 점을 보여주어야 했다. 통치자나 철학자 모두 같은 교육 프로그램에 따라 교육받기 때문이다(Pol. 474b-d, 484a-d, 485a-487a). 플라톤이 보기에 철학하는 일은 통치하는 일에 추가된 일이 아니라 효과적인 통치를 하는데 필수적인 부분이다.
그런데 철학자는 통치하기보다 철학하기를 더 좋아한다. 통치하는 일보다 지식을 추구하는 일을 더 좋아해야 한다는 것이 역설적이게도 훌륭한 통치자의 자격 요건에 들어가기 때문이다(Pol. 519d-521b). 서로 통치하기를 원하는 경우 희망자 사이에 경쟁이 일어나 도시는 분쟁에 빠지게 되어 안정을 잃어버릴 것이기 때문이다(Pol. 520d). 그래서 플라톤은 철학자가 원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동굴 속으로 되돌아가야 할 이유를 제시해야 할 필요를 느낀다. 이는 '설득과 강제'가 필요한 사안이다. 그래서 그는 여러 가지 이유를 제시한다: 첫째로, 철학자는 국가가 자신을 그 단계까지 교육해준데 대해 빚을 갚아야 한다(Pol. 520b). 이는 정의(dikaiosyne)는 빚을 갚는 것이라는 보다 일상적인 의미의 정의관(Pol. 331c-d)과 연결된다. 둘째로, 철학자가 통치하지 않고 철학만 하고자 한다면, 제대로 된 통치자가 없는 도시는 망하게 될 것이다. 또는 망하지는 않더라도 제대로 통치되지 않아서 그러한 국가 안에서 철학자가 당할 불이익이 더 크다(Pol. 346b-347e, 520d).
플라톤이 위와 같이 이유를 제시하는 까닭은 철학자가 이기적이라는데 있다. <국가>편 412d-e에서 통치자를 교육할 때 통치자의 유익이 도시의 유익이기도 하다는 점을 가르칠 필요가 있다고 플라톤이 밝히며, 정의로운 사람이 부정의한 사람보다 더 행복하고 낫다는 명제를 증명하는 것이(Pol. 358a-362c) <국가>편의 주된 논증이라는 사실에서 철학자의 동기가 이기적이라는 점을 찾아볼 수 있다. 물론 <국가>편 519e-520a와 520e에 따르면, 좋음의 이데아에 근거를 두는 지식이 철학자에게 있기 때문에, 철학자는 무엇이 정의로운지를 안다. 그래서 전체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를 규정하는 정의 때문에(Pol. 519e-520a) 철학자는 동굴 속으로 되돌아와야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철학자가 자신의 유익을 포기했다는 논리는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플라톤은 전체의 유익이 동시에 철학자에게도 유익이라는 점을 증명해야 하는 부담을 계속 떠안는다. 그래서 철학자를 비이기적 인간으로 여기는 화이트(White)와 안나스(Annas)의 생각은 옳지 못하다.
플라톤에 따르면, 철학자가 동굴 안으로 되돌아가는 일은 의무에 가깝다(anank kai j mia, Pol. 347c). 철학자는 그의 이웃을 사랑하거나 이웃을 도와서 정서적으로 만족을 얻지 않기 때문이다. 플라톤의 철학자는 비인격적이다. 이에 반해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분을 믿는 제자들에게 선교의 사명을 주시며, 성령께서 제자들에게 죄에 빠진 사람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주셔서, 동굴로 되돌아가도록 재촉하신다. 마태복음 17장 4절에서 높은 변화산 위에 있던 베드로가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고 말하지만,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오신 것도(마17:9) 이러한 맥락에 비추어 이해할 수 있다. 플라톤에게는 성령과 같은 역할을 하는 존재가 없다. 소크라테스의 경우에는 다이몬이 그에게 그러한 소명을 주었다고 이야기하지만(Pol. 424c), <국가>편에 나타난 철학자는 기본적으로 이기적이다.
6. 이론적 지식과 실천적 지식
철학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이론적 측면과 실천적 측면이 바로 그것이다. 앞에서 플라톤이 철학자의 귀환을 정당화하기 위해 수고해야 하는 이유는 그가 철학자의 실천적 측면에서 이론적 측면으로 이동한데 있다. 하지만 플라톤은 철학자의 과제를 이론적 관조(theoria)로만 여기지 않는다. 철학자라면 이론적 지식에 바탕을 두고서 실제로 판단하고 자신이 이해한 것을 세상 속에 드러내고 정의를 증진시켜야 한다.
동굴 안은 동굴 안의 사람을 교육시키고 이러저러한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실천의 세계이다. 동굴 안으로 되돌아온 사람은 처음에는 어둠에 눈이 익숙치 못하여 착시와 어지러움(Pol. 518a)을 경험한다. 그러나 눈이 익숙해진 다음에는 동굴 안에만 있었던 사람보다 동굴 안의 사태를 보다 잘 볼 수 있다. 이는 이론적 지식이 실천에서도 유용함을 보여준다. 그래서 플라톤에게는 이론적 앎과 실천적 앎 사이에, 존재와 당위 사이에, 지식과 윤리 사이에 거리가 없다. 그래서 그에 따르면, "알면서도 고의로 잘못하는 사람은 없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이러한 생각을 주지주의로 여겨 비판한다. 모든 학문을 철학(philosophia)이라고 불러 좋음의 이데아라는 하나의 원리 밑에서 이해하고자 했던 플라톤과는 달리, 아리스토텔레스는 학문을 세 가지로 나누었다. 이론학(theoretik ), 실천학(praktik ), 제작학(poi tik )이 그것이다. 이론학에는 형이상학(신학), 수학, 물리학이 속하는데, 이론학의 특성은 사람이 그 대상을 아는 일이 그 대상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데 있다. 그래서 신이나 수학적 대상은 변치 않는 존재이다. 또한 이러한 학문을 하는 동기는 그러한 대상에 대한 지식을 얻는데 있다. 이에 반해 실천학(예: 윤리학)과 제작학(예: 건축, 예술)의 특성은 사람이 그 대상을 아는 일이 그 대상이 영향을 준다. 예를 들어, 윤리적 지식은 그 지식을 지닌 사람의 행위를 바꾸며, 예술적 지식 덕분에 예술가는 새로운 예술 작품을 만들어낸다. 실천학과 제작학의 차이는 그 대상이 인간인가 아니면 인간 밖의 것인가에 달려 있다. 실천학은 시공간 속에 있는 인간 또는 인간 행위를 대상으로 하는데 반해, 제작학은 인간 밖의 시공간 속에 있는 모든 것을 대상으로 삼는다. 실천학을 연구하는 동기는 인간이 행위하는데 있으며, 제작학을 연구하는 동기는 어떤 것을 만들어내는데 있다. 따라서 학문의 기초를 이루는 원리는 어떤 학문이냐에 따라 서로 다르며, 따라서 세 가지 학문에 공통적인 원리를 찾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한다.
다른 차원이기는 하지만, 논리 실증주의에서도 이러한 생각을 찾아 볼 수 있다. 논리 실증주의에 따르면, 종교의 언어는 반증을 할 수 없기 때문에 (과학의 언어와는 달리) 무의미하다. 초기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종교의 영역은 말해질 수 있는 것(das Sagbare)이 아니라 보여질 수 있는 것(das Zeigbare)이다. 이러한 경우 종교의 초월성이 강조된다: 이러한 초월성은 나는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고 있는데, 사람들은 정작 달을 보지 않고 내 손가락만 보더라는 선불교의 주장과, '도가도 비상도(道可道 非常道)'라는 도교의 명제에서 잘 나타난다. 만일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의 후기 이론을 따른다면, 종교 언어는 나름대로의 삶의 형식(Lebensform)을 기반으로 하는 언어로서, 종교 공동체나 종교 의식 안에서만 의미를 갖게 되는 언어이다. 윤리적 언어와 미적 언어, 종교적 언어는 서로 다른 차원에 있는 것이며, 다른 영역으로 넘어서는 경우 그 의미를 잃어버리게 되는 언어이다. 이러한 경우 예를 들어 종교적 언어는 예술의 영역에 대해 발언할 수 없으며, 윤리적 언어 역시 예술의 영역에 대해 발언할 수 없으며, 종교적 언어 역시 윤리적 영역에 대해 발언할 수 없게 된다. 만일 이러한 영역 구분을 무시하게 되는 경우에는, "빨강은 크다"와 같이 일종의 범주 혼용의 오류(category mistake)에 빠지게 된다고 한다.
이와는 달리 플라톤은 하나의 원리(arch )에서 출발해서 모든 것을 알 수 있으며, 따라서 모든 학문은 결국 하나의 원리로 귀결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arch 는 원래 시작 또는 기원을 나타내는 말이며, 이오니아 철학자들이 세계 재료를 나타내기 위해 처음으로 사용한 말이다. 기원에 대한 물음은 곧바로 토대에 대한 물음으로 이어졌으며, 그래서 철학에서 arch 는 재료 대신에 "인식의 원리", "존재의 토대", "운동 원인", "행위의 동기" 등을 나타내는 표현이 되었다. 학문을 하는 사람은 경제성의 원리에 따라 가능한 한 적은 수의 arch 를 통해 세계 전체를 설명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arch 에 대한 탐구는 플라톤에게서 정점을 이룬다. 플라톤이 보기에 정의(定義)는 arch 의 주요 부분 중 하나인데, 좋음의 이데아가 이러한 출발점으로서의 역할을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과는 달리 좋음의 이데아에는 실천적 의미도 있다. 플라톤에게 있어서 참된 것(眞)와 좋은 것(善), 아름다운 것(美)은 서로 일치한다. 사람이 알고서도 행하지 않는 경우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을 뒷받침해줄지도 모른다. 그러나 플라톤을 주지주의라고 부를 때 우리는 조심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어떤 것의 본질을 아는 것만으로 지식이 성립한다. 하지만 플라톤에 따르면,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어떤 것의 본질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우선 그것이 좋은 것인지를 알아야 한다. 그래서 플라톤은 좋음의 이데아를 모든 이데아(본질)의 근거로 삼는다.
로마서 1장 18-22절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으나 하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존재와 당위를 구분하며, 플라톤의 생각을 주지주의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은 이 구절에서 자신들의 생각을 뒷받침하는 근거를 찾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는 인식(gn sis)와 지혜(sophia)가 구분되고 있다.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있는 자가 진리를 불의 속에 가두어두는 경우, 그들은 스스로 지혜롭다고 자처하나 하나님이 보시기에 어리석은 자들에 불과하다. 플라톤에 따르면, 이러한 자는 하나님을 제대로 아는 자가 아니다. 'philosophia'라는 말에서 볼 수 있듯이, 철학자는 지혜(sophia)를 사랑하는 자이며, <국가>편에 따르면 지혜(sophia)를 얻은 자이다. <국가>편에 따르면, 어떤 지식이 정말 좋은지를 아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지혜(sophia)이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사람들에게 있는데도 불순종하는 이유는 그들이 불순종이 그들에게 더 좋다고 (잘못)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지혜로운 자들"(sophoi)라고 자처했다(롬1:22). 이는 무지한데도 스스로를 지혜있는 자라고 자처했던 소피스테스들의 태도와 같다. 하지만 로마서에서는 그들을 '어리석은 자들'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성경에는 존재와 당위라는 구분이 처음부터 없는 것 같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의 통합적 학문 모델을 거세게 비판했으며, 현대에 와서는 무어(G. E. Moore)가 '자연주의적 오류(naturalistic fallacy)'라는 표현을 통해 존재(Sein)에서 당위(Sollen)로 넘어갈 수 없다고 주장한 이후로 존재와 당위의 구분은 너무나 당연한 전제인 것처럼 받아들여져 왔다. 하지만 존재와 당위 사이에 뛰어넘을 수 없는 벽을 만드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에 따르는 것이 아닌 것 같다. 그러한 의미에서 볼 때, 플라톤이 좋음의 이데아에 기초한 일원론적 학문관을 제시한 이유를 되새겨 봄직하다.
7. 동굴로 돌아온 사람의 운명
동굴 속으로 내려온 사람은 동굴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진실을 알리고자 한다. 동굴 속에 들어온 사람의 눈이 다시 어두움에 익숙해져야 하기 때문에, 한 동안 그는 그림자 맞추기 놀이를 잘 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동굴 안에 있던 사람들은 그를 비웃는다. 그들은 그가 동굴밖에 나가서 눈을 망쳤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 그들을 자유롭게 해서 동굴 밖으로 나가도록 유도하는 경우 그를 죽이고자 할 것이다. 플라톤은 동굴 안으로 돌아온 사람의 운명을 묘사하면서 신을 모독한 죄(hybris)와 젊은이 유기죄로 아테네 법정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독배를 마셨던 스승 소크라테스를 생각하는 것 같다.
동굴 속으로 되돌아온 사람은 동굴 안에 있는 사람들을 설득(peith)해야 한다. 그는 그들로 하여금 기꺼이 교육을 받도록 설득해야 한다(Pol. 525b). 그러나 이러한 설득은 그리 쉽지 않다. 동굴 안에는 인형놀이를 진행시키는 사람도 설득에 참여하기 때문이다. 설득은 증명과는 다른 작업이다. 설득은 설득 대상이 누구냐에 따라 내용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증명의 목적은 어떤 주장이 보편타당하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있는 반면에, 설득의 목적은 어떤 주장이 구체적인 대상에 의해 받아들여지도록 하는데 있다.
플라톤은 <국가>편 488c에서 이러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그려낸다. 배가 항해하고 있을 때, 항해사와 다른 사람 사이에 설득 경쟁이 벌어진다. 항해사는 진리를 설득시키고자 하며, 다른 사람은 진리와 무관하게 배의 주도권을 잡는데(즉, 승리하는데) 설득의 목적을 둔다. 그 결과는? 선상반란이 일어나 항해사는 사지가 찢긴채 바다에 던지워진다. 진리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 키를 잡게 된 그 배는 곧 파선하고 말 아테네를 극적으로 상징한다. 플라톤은 아무리 진리라고 해도 듣고자 하지 않는 자에게는 설득이 먹히지 않는다는 사실을 절감한다(Pol. 327c). 그는 진정한 설득과 외견상의(dokein) 설득을 구분한다(Pol. 375a, 368b). 외견상의 설득은 선물로 신을 설득하는 것처럼 논리적이지 않은 설득이다(Pol. 390e). 플라톤에 따르면, 진정한 설득이란 근거있는 설명(logos)에 의한 설득이다(Symp. 182b). <항연>편에서 디오티마(Diotima)가 소크라테스가 진리를 찾아나서는데 가장 좋은 도우미라고 설득하듯이(Symp. 212b), <국가>편에서는 철학자가 동굴 안에 있는 사람들을 설득하고자 한다. 그러나 <향연>편에 나타난 알키비아데스와 같이 대부분의 사람은 철학자의 설득을 거부한다. <변명>(Apologia)편에 나오는 아테네 법정의 배심원이 그러했다. 그러나 일부 소수의 사람이 그 설득을 받아들이게 된다. <향연>편에서는 아가톤이 그 예이며, 대화편을 쓰는 플라톤 자신이 또다른 예이다.
<변명>(Apologia)편에서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법정의 배심원들을 향해 이야기(logos)한다. 그러나 그의 이야기는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요리사에게 고소를 당해 아이들 앞에서 재판을 받는 의사에 비유했다. 그에 따르면, 그의 변론(apologia)이 실패한 이유는 그의 이야기를 듣는 청중에게 있다. 그렇지만, 그에게는 사형을 모면하려는 목적보다 진리를 이야기해야 한다는 사명이 더 컸다. 그는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동정심에 호소하는 등 비이성적인 설득술을 사용할 수도 있었으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고르기아스>(Gorgias)편에서처럼 의사가 환자를 설득시켜 고통스러운 수술을 참아내도록 해야 하는 상황에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고통을 싫어하며 고통스러운 수술이 결국 자신에게 좋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한 설득을 거부한다. 그래서 플라톤은 그의 마지막 저술 <법률>(Nomoi)편에서 두 종류의 의사와 환자를 소개한다. 자유인인 의사는 자유인인 환자를 치료하면서, 환자에게 질병과 치료 방법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함으로써 환자의 동의를 얻어 치료한다. 이에 반해 자유인 의사를 보조하는 노예는 노예 환자를 치료하면서, 설명과 동의없이 강제로 치료한다. 이는 이성적인 설득이 당대에 실제로 거의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고, 그래서 결국 소크라테스가 죽었다는 플라톤의 판단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국가>편에서도 이상 국가를 이루는 구성원은 소수의 철학자와 다수의 백성인데, 이성적 설득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다수 백성에 대해서는 강제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생각은 후기 대화편 <티마이오스>편에서 보다 구체적으로(그리고 보다 현실적으로) 나타난다. 철학자가 사용하는 강제는 강제된 결과가 강제된 사람에게 유익하기 때문에 정당화된다. 이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성령의 강권적 역사를 떠올리게 한다.
소크라테스는 민주정이 회복된 기원전 399년에 "젊은이를 타락시키고 도시가 섬기는 신을 섬기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재판받고 처형되었다. 한 때 소크라테스를 열렬히 따라다녔으며 아테네에서 매우 촉망받았던 청년 장군 알키비아데스가 조국 아테네를 배신함으로써 아테네가 패전하는데 결정적 기여를 한 책임이 소크라테스에게 따라 붙었다. 플라톤의 삼촌이면서 소크라테스의 제자였던 크리티아스도 정치에 입문해서 30인 참주정치를 이끌었다. 민주정을 회복한 아테네 사람들이 보기에 이는 젊은이들을 잘못 교육한 소크라테스의 책임으로 비쳐졌다.
플라톤은 <향연>편 마지막 장면에서 알키비아데스를 등장시켜 아테네인의 입장에 서서 소크라테스를 고소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러한 고소를 통해 소크라테스가 무죄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이 대화편에서 플라톤은 소크라테스가 젊은이의 아름다운 영혼을 사랑한 자이며, 그래서 젊은이의 영혼이 탁월하게 되도록 교육하고자 한 사람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책임은 소크라테스에게 있지 않고 그의 도움을 거절하고서 전통적 교육방식으로 되돌아간 알키비아데스에게, 더 나아가서 알키비아데스를 잘못 교육한 당대 교육 체제에 있다. 책임은 자신에게 동굴 밖으로 나가라고 권유하는 자를 비난하고 이전의 모습에, 즉 현 세태의 문화 속에 안주하는 자와 그렇게 설득하는 체제에 있다. 로마서에서는 이러한 자가 자신의 책임을 피하기 위해 '핑계치 못할 것이라고'(롬1:20) 밝힌다.
V
이 글에서는 기독교 신학의 형성에 영향을 준 헬라 철학 가운데 플라톤의 철학을 동굴의 비유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동굴 안과 동굴 밖의 연속성을 강조하는 동굴의 비유를 통해 기독교의 복음과 개혁 신앙이 21세기 문화 속에서도 드러날 수 있다는 점을 밝히고자 했다. 또한 동굴 안과 동굴 밖의 유비(analogia) 관계가 서로 다른 언어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같은 언어를 다른 수준에서 이해하는 인식 수준 사이의 관계라는 점도 밝히고자 했다. 인간이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로고스로 주어진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그 말씀을 따르는 것이 정말로 좋은 것임을 깨닫지 못한데 있으며, 그렇게 깨닫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 인간의 죄에 있다는 점도 밝혔다. 이때 죄는 하나님을 의도적으로 거역하고 자신에게 있는 "sensus divinitus"를 억압하는 것이다. 결국 깨닫지 못한 책임은 회심시키고자 하는 사람에 있는 것이 아니라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 있다. 또한 동굴 안에는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이끄는 미디어(media) 지배자가 있기 때문에, 동굴 밖으로 나가도록 돕는 일은 동시에 또다른 설득자와의 싸움이라는 점도 지적했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고도로 정보화되고 매스 미디어에 많은 것을 의존해야 하는 21세기 사회에서 개혁 신앙을 제대로 전파하는 일은 개인적 차원에만 머물러서는 안되고 사회적 차원으로까지 나아가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우리의 영적 싸움은 기존의 잘못된 가치관과 세계관을 만들고 유지하고 보급하는 문화제작자와의 싸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론학과 실천학을 구분하여 서로 다른 영역에 둔 아리스토텔레스 이후의 학문관이 끼친 폐단을 지적하면서, 모든 지식의 근거를 좋음이라는 한 가지 원리에 둔 플라톤의 학문관이 지식과 실천이 함께 가는, 진리가 자유를 주는 개혁 신앙의 본질을 더 잘 드러낼 수 있음을 보여주고자 했다. 개혁신앙에서는 이론 신학과 실천 신학의 구분은 편의상의 구분일 뿐이지, 실제적인 구분이 되어서는 안된다. "실천없는 이론 신학은 공허하며, 이론없는 실천신학은 맹목이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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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21st Century Culture and Reformed Faith
: Plato's Analogy of the Cave
Lee Kyung Jik (Chonan University, Christian Philosophy)
What is the relationship between Christianity and philosophy? Should we follow Tertullian who insisted that Jerusalem has nothing to do with Athen? I think the supremacy of the Gospel does not necessarily imply the exclusion of the philosophy in the area of Christianity. Philosophical arguments and explanations, though not enough, could contribute to our understanding of what the Gospel means.
The purpose of this article is to look for some relevances of Platonic philosophy to Christian theology through the example of the famous analogy of the cave in Plato's "Politeia".
First, the emphasis lies on the continuity between the state-affairs in and the state-affairs out of the cave which implies the knowability of the Gospel in the 21st century culture: It means that man can understand, though not perfectly, the meaning of the Gospel by means of "ordinary language". The difference of the state-affairs between in and out of the cave does not come from the language difference, but from their different mental attitudes. Both of them use the same ordinary language. The distinction is only epistemological: The language or the notion is same but its understanding is in very different dimensions. If one regards the difference of the states as ontological, then is there no bridge between ordinary language and holy (i.e. Biblical) language. He accepts the incomprehensiblity of the Gospel but denies its knowability; he denies the incarnation of the Logos, Jesus Christ. Jesus Christ came to the earth and spoke to the people in human ordinary language. They understood his words.
The cause of this different niveau of the knowledge in the Christianity can be found in man's sin which corresponds to man's ignorance of what is good or best in Plato's philosophy. The responsibility of the ignorance lies not in the teacher of the Gospel nor the Gospel itself but the ignorant man who sins. In this case, sin means one's intentional rebellion against God and supression of his "sensus divinitus."
Secondly, it must also be emphasized that there are other factors in the cave which give influences to the people in the cave not to follow the right leaders (i.e. preachers). It means that the missionary of the Christianity in the 21st century culture has to wage war against the missionary of other rleigions or world-views, if he wants to help the people in the cave to see their true states: The missionary has to become polemical. Here comes Christian philosophy. A christian philosopher in the 21st century, when the influences of the mass media shall be great, should wage a spiritual war against the media, against the producers and preachers of the false worldviews.
Finally, it should be noted that it is dangerous to apply to Christianity Aristotelian view of science, the distinction between the theoretical (theoretik ) and the practical science (praktik ). It makes the unbridged gap between the truth and the power of the Gospel. Platonic view of science can be an alternative for reformed Christianity because it combines theoretical and practical aspects of the knowledge under the concept (or Idea) of the Good: if one really knows that A is good, one will do A. This conception of the science corresponds to reformed tradition which emphasized both theoretical and practical aspects of the knowledge: if one knows the will of God, one should (or will) do according to the will of God. The theoretical and practical knowledge go side by side. In the truth is the liberty. The assumption of the criticism that Plato's view of science is a kind of intellectualism is Aristotelian assumption according to which there is no relationship between the Good and the knowledge. For Plato, the real knowledge is the knowledge of the Good: If one does not know the Good of any things, he has no knowledge of it.
The distinction, therefore, between theoretical and practical theology is, therefore, only a convenient, but not a real dinstinction. "Theoretical theology without praxis is empty; but practical theology without theory bli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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