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신,구약 중간기의 의미

작성자
쥬니어칼빈
작성일
2013-10-05 20:06
조회
5493

신,구약 중간기(Inter-testamental Period)의 의미




흔히 성경의 역사를 신약의 역사와 구약의 역사 둘로 나누어 연구하고, 또 우리들도 그렇게 배워왔다. 하지만 신약과 구약의 역사가 가지는 비중만큼이나 중요한 역사적 시기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신약과 구약의 중간에 자리 잡고 있는 신구약 중간기이다.




대부분 이 신구약의 중간기에 대해서는 "암흑기"나 "침묵기" 정도로만 알고 있을 뿐, 이 중간기가 신약과 구약을 연결 짓는 고리 역할을 한다는 사실이나, 성지를 이해하는 데 얼마나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지에 대해서는 알고 있는 것 같지 않다.




신구약 중간기(Inter-testamental Period)는 대략 BC 400-500년 혹은 BC 400-100년 사이로 바벨론 포로시대(구약 성경의 끝)부터 신약 성경이 완성된 시기까지 약 400년의 기간을 말한다. 즉 성경의 말라기와 신약성경이 기록된 시점 중간에 약 400여 년의 갭이 있는데. 이 기간을 중간기(Inter-testamental Period)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 신구약 중간기에 있어서의 괄목한 만한 사건을 시대별로 살펴보고자 한다.




A. 포로귀환시대 (BC 722-400년)




먼저 북왕국으로 불리던 이스라엘의 멸망(BC 722년)을 들 수 있다. 계속하여 하나님께 악을 행하던 이스라엘 왕국은 결국 앗시리아(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하고야 만다. 그리고 이 앗시리아에 의해 혼혈정책이 시작되는데 이로써 이스라엘과 앗시리아 사람의 혼혈인 사마리아인이 등장하게 된다. 남왕국 유다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혼혈족이 된 사마리아인들을 경멸하며 그들을 개라고 불렀다. 이런 역사적 배경 속에서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과의 우물가의 대화가 전개되는 것이다.




다음으로 남왕국 유다가 BC 587년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에 의해 멸망당한다. 이때 유대인들에게 가장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는데, 그것은 바로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이스라엘 사람들은 영적인 딜레마에 빠져들게 되었다. 즉, '예루살렘 성전은 하나님의 집인데 어떻게 파괴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전능한 하나님이 아니란 말인가? 어떻게 이방인들에 의하여 하나님이 거하는 성전이 파괴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일어나게 된 것이다.




결국 이 의문에 대한 대답으로 선지자들의 메시지가 등장한다. 즉 여호와 하나님께서 능력이 모자라서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이 이스라엘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편 유다를 멸망시킨 바벨론의 지배는 그리 길게 가지 않았다. 바로 페르시아의 등장으로 인해 장엄한 바벨론의 역사도 막을 드리우게 된 것이다.




성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페르시아(바사)의 등장이 무척 중요하다. BC 538년 바벨론이 페르시아에 의해 멸망당한 후 페르시아의 고레스왕은 칙령을 반포하여 유대인의 귀국을 허용했다. 그래서 성경은 고레스를 위대한 왕으로 언급하고 있다. 고레스의 칙령에 의한 예루살렘으로의 귀향은 3번에 걸쳐 이루어지게 되는데 1차 귀환은 스룹바벨에 의해서 이뤄졌으며(538년), 귀국 목적은 성전 재건이었다.




당시 페르시아에 잡혀가 있었던 유대인들의 총 숫자는 200만 혹은 300만으로 추정되는데 이중에서 49,897명이 귀환했다. 이 사람들은 헌신된 사람들이었다. 페르시아에서의 안락한 생활과 권리를 포기한 채 가난과 굶주림을 각오하고 조국으로 귀환한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들이 생각했던 것만큼 성전 건축이 쉽지는 않았다. 결국 기근과 가난으로 인해 성전 건축이 중단되고야 만다. BC 534-532년 사이에 스룹바벨에 의해 성전이 건축되다가 520년까지 중지되었다가 515년에 완공되었다.




이후 2차 귀환은 느헤미야(444년, 예루살렘성벽을 재건하기 위해)와 에스라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에스라는 학사(서기관, Scribe)였다. 이 에스라에 의해서 율법이 모아졌는데(자료모집)-대부분의 구약성경이 이때 모아지고 편집되어졌다-특히 구약의 대부분(22권)이 에스라에 의해서 편집되었다고 본다.




또한 서기관 제도(Scribes)도 에스라 때부터 생겨나게 되었다. 또한 탈무드의 일부인 미쉬나(Mishnah)가 구전되기 시작하였는데, 이 미쉬나는 모세 율법과 똑같은 비중으로 취급되어진다. 결국, 613개의 율법(미쉬나)의 비중이 기록된 말씀(모세율법)과 같은 비중을 가지게 되었고 이러한 율법의 무게에 백성들의 삶이 짓눌려 버리게 된 것이다. 이것의 좋은 예가 마 11: 28-30이다.




B. 그리스시대 ( BC 332-142년)




그리스제국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지중해 일대의 세력 판도는 또 한번 변하게 된다. 먼저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 필립 2세는 페르시아를 공격하려다 암살당하고 만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21세의 젊은 나이로 왕으로 등극한 알렉산더 대왕은 마케도니아를 정복하고 결국 페르시아 제국을 멸망시켰다.




이러한 알렉산더 대왕의 패권은 지중해 일대를 그리스 문화화하는 데 크게 공헌을 하게 된다. 즉 알렉산더 대왕은 가는 곳곳마다 헬레니즘 문화와 헬라(그리스)어를 보급하게 되는데, 신약성경이 헬라어로 기록된 일과 이스라엘과 지중해 곳곳에 헬라식 건축양식이나 헬라식 문화의 흔적을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사는 영원하지 못한 법. 지중해 지역과 소아시아 일대를 평정한 알렉산더 대왕도 32세의 젊은 나이로 운명을 달리하고 그리스제국은 결국 분열의 길로 들어서고야 만다.




헬라제국은 알렉산더 대왕의 부하들이 영토를 나누면서 크게 세 나라로 분열되는데, 먼저 이집트를 중심으로 한 프톨레미 왕조와, 시리아를 중심으로 한 셀류크스 왕조, 그리고 마게도냐를 중심으로 한 안티고니드 왕조가 세우는 나라로 각각 나뉘게 된다.




유대 지방은 프톨레미 왕조에 의해 다스려지게 되는데(BC 301-198년) 이들은 유대인들을 주로 온화하게 다스렸다. 이러한 온건책으로 인해 디아스포라(Diaspora)의 확산이 이루어졌다. 즉 비교적 살기 좋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로 많은 유대인들이 흘러 들어갔다. 그 영향으로 결국 헬라어 구약성경 "70인역"이 번역되게 된 것이다. 즉 프톨레미 2세의 요청으로 히브리어로 된 구약성경을 알렉산드리아에 살고 있던 헬라-유대인들을 위하여 헬라어(그리스어)로 번역하게 된 것이다.




이후 유대지방은 다시 셀류크스 왕조의 지배(BC 198-142년)를 받게 된다. 셀류크스 왕국의 안티오커스 3세는 톨레미 왕국을 격파하고 팔레스타인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게 된다. 그의 후계자 안티오커스 4세는 유대인들이 결코 잊어버릴 수 없을 정도로 잔혹한 인물로, 별명이 에피파네스("God Manifested" 신의 현현)일 정도로 많은 사람들에게 위협적인 존재였다.




이 안티오커스 4세는 헬레니즘을 전파하기 위해 유대종교를 말살하는 정책을 폈는데 우선 레위기에 나오는 희생제사 대신, 유대인들이 가장 불결하게 생각하는 돼지피로 제사토록 강요하였다. 또한 유대 종교의 중심지인 성전을 훼파하고 성전의 한복판에 주피터의 신상을 세웠다. 또한 이스라엘 지방 곳곳에 자신의 얼굴을 신상으로 세웠다. 한편 율법을 폐지하였고 성경 사본을 파괴하였으며, 안식일과 할례를 폐지했다.




이러한 조건과 시대적 배경 하에 "부활, 영생" 사상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에피파네스라고 불린 안티오커스 4세의 폭정에 항거하기 위하여 BC 167- BC 142년 마카비혁명이 일어났다. 이 민중봉기는 Modein이라는 곳의 유대인 제사장 맛디아에 의하여 시작되었다. 제사장이며 용감한 애국자였던 맛디아는 네 명의 아들들과 함께 안티오커스 4세가 유대인들이 돼지 피로 희생제사를 드리는지를 감독하기 위해 보낸 사신을 다 죽이고 산 속으로 피신하여, 이미 피신한 신자들과 합류, 시리아 군인들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외경인 마카비 2서 14:6에 이 유대 반란자들을 가리키는 이름이 등장하는데 이때 이들을 지칭하는 명칭이 "핫시딤"(Hasidim, 경건한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핫시딤은 아직까지 유대인들의 한 종파의 이름으로 사용되고 있다.




맛디아가 죽은 후에는 유다 마카비(Judas Maccabean) 가 등장하는데 그는 게릴라 전투의 명수로 BC 165년 엠마오전투를 승리로 장식하고 예루살렘에 입성하게 된다. 그가 첫 번째 로 한 일은 안티오커스에 의해서 더럽혀진 성전을 성결케 하고, 성전을 여호와께 다시 봉헌한 것이다(BC 164). 안티오커스의 박해시절 어떤 한 유대인이 Napten(성전의 불)을 꺼뜨리지 않고 살려두었다가 마카비가 성전을 회복한 후에 그 불로 성전을 다시 밝히게 되었는데, 이날을 기념하는 것이 바로 수전절(The Day of Purification)이다.




마카비는 이후 시리아 사람들과 협상하는 과정에서 끝까지 싸우려고 부딪혔다가, 유대인들에게 지지를 받지 못하고 전투에서 전사하지만 그의 투쟁은 유대인들에게 종교적 자유를 얻게 하였다. 즉, 성전을 다시 회복함으로써 하나님께 희생제사를 드릴 수 있게 된 것이다. 마카비에게는 요나단(BC 152-BC 142)이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그는 탁월한 외교 능력으로 유대 총독이 되었다. 총독이 된 요나단 마카비는 자기 자신을 스스로 대제사장에 임명하게 된다. 이에 대해 강력하게 항거하는 그룹이 형성되었으니 그 사람들이 곧 에세네파로, 지금도 사해 지역에 가면 이 에세네파의 유적을 만날 수 있다.




어쨌든 요나단 마카비는 유대인들이 가장 혐오하는 사람 중의 하나가 되었다가 결국 발라스라는 추종자에 의해서 죽임을 당했는데, 그로부터 정통 대제사장이 아니라 불법 대제사장 Line이 시작되었다. 그가 대제사장에 스스로 임명될 당시 정통 대제사장의 계열인 사독 계열의 제사장 오니아스(Onias)가 존재해 있었다.




이후 잠시 동안이었지만 로마의 통치가 있기 전까지 성서의 땅에도 독립이 찾아왔는데 이 독립기간(BC 142-BC 63)을 헤스모니안이라고 일컫는다. 헤스모님이라는 말의 원래 의미는 제사장 맛디아의 가족을 일컬었으나, 나중에 유대인의 독립시대를 말할 때 사용하였다.




유다 마카비의 마지막 동생이었던 시므온(BC 142- BC135)도 대제사장 겸 총독으로 취임했다. 취임 이후 시리아에 내분(Civil War)이 일어나 시리아 사람들이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다 빠져나가자 이스라엘은 어부지리로 정치적 회복을 가져오게 되었다.




즉 이때부터 유대인의 자주시대가 도래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자주 시대는 BC 63년까지 계속 되었다. 즉 종교적 자유는 유다 마카비에 의해, 정치적 자유는 시므온 마카비에 의해서 이뤄지게 된 것이다.




이후 존 힐카누스(John Hyracanus, BC 135-BC 104)가 시리아군을 팔레스타인 땅에서 몰아내고 사마리아(Samaria)와 이두매(Idumea)를 통합하게 된다. 그는 이두매인들을 핍박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두 종파가 등장하게 된다. 즉 헬레니즘에 반대하였던 바리새파와 비교적 헬라적 성향이 강하였던 사두개파이다.




바리새파 중에는 핫시딤(마카비가 게릴라전을 벌일 때 마카비를 따라다녔던 경건한 사람들을 지칭)의 후손들이 많았는데 이들은 강력한 민족주의자들로서 나라의 위신을 보존하고 모세의 율법을 엄격하게 지키려고 했다. 한편 사두개인(Sadducees)들은 자신들을 사독의 후손이라 주장하며 대제사장으로로서의 자신들의 정당성을 주장하게 된다.




그후 아리스토블루스 1세(BC 104-BC 103)가 등장하게 되는데 그에 의하여 정식으로 갈릴리 지역이 점령되면서 이 지역이 유대땅으로 영입되게 된다. 이 갈릴리 지역은 원래 구약시대에는 이스라엘 땅이었으나 바벨론 포로 이후 이방인의 땅이 되었다가 그에 의해 다시 회복된 것이다. 이 아리스토불루스 때부터 왕이란 칭호가 사용되게 된다. 아리스토불루스의 형제였던 알렉산더 야네스(BC 103-BC 76)가 그후 왕권을 장악하게 되는데 이때 독립시대 중 최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즉 다윗, 솔로몬 시대에 차지했었던 영역까지 되찾은 시기인 것이다. 알렉산더 야네스는 바리새파와 결별하고 사두개파와 손을 잡았다.




그후 그의 부인인 알렉산더 살로메(BC 76-BC 67)에 의해 정권이 장악되는데 그녀에게 있어서 한 가지 문제는 여자의 신분이므로 대제사장 직분을 계승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알렉산더 살로메는 두 아들 하이라카누스 2세와 아리스토불루스 2세 중 동생이었던 아리스토불루스 2세에게 대제사장 직분을 맡겼다. 아리스토불루스 2세가 더 유능했기 때문이었다. 이때가 바리새파가 제일 득세했던 시기였다.




장자였던 힐카누스 2세가 축출을 당하고 아리스토불루스 2세가 권력을 장악하자 상대적으로 힘이 부족하였던 힐카누스 2세는 로마의 폼페이 장군(Pompeyus BC 63)에게 도움을 청하게 된다. 결국 폼페이 장군이 군대를 일으켜 예루살렘을 점령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비로소 이때부터 로마의 점령시대가 시작되게 되는 것이다.




C. 로마 점령시기 (BC 63-AD135)




힐카누스 2세의 요청에 의해 로마의 폼페이 장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하면서 교활한 정치꾼이 등장하게 되는데 그가 바로 안티파타란 인물이다. 원래 이두매 사람인 그는 힐카누스 2세 편에 기생하며 이두매 지역의 지배자가 되었지만, 이후 로마 정권이 들어서자 다시 로마 정권에 붙어 폼페이와 손을 잡고, 폼페이로 하여금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다스리도록 도와주었다. 후에 시이저가 더 강해지자 시이저와도 손을 잡았다. 이후 안티파타의 아들인 헤롯 대왕(Herod the Great, BC 40-BC 4)이 로마사람들에 의해 유다 왕으로 등극하게 되는데 그는 아버지 못지않게 교묘하게 유대 사람들에게 세금을 받아들이고, 로마 사람들에게 종을 바친 사람으로 유대 사람들에게는 악명 높았으나, 로마사람들에게는 충직하다고 알려졌다.




그는 산헤드린의 자격을 격하시켰는데 그 이유는 산헤드린의 구성 요인이 대개 사두개인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또한 산헤드린뿐만 아니라 대 제사장의 직분까지 격하시키면서 한편으론 바리새인들과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였다. 또한 그는 예루살렘 성전을 다시 개축하는 일을 단행하게 되는데 많은 이들은 이를 오해하여 헤롯 대왕에 의해 성전이 다시 지어졌다고 생각하지만 이는 사실과는 다르다.




그는 유대인들에게 환심을 사기 위해서 성전을 개축했으나 결국 완성엔 이르지 못하였다. 그는 성격이 난폭하고 잔인하며, 열 명 정도의 부인을 두었다고 알려졌는데, 그의 잔인성은 예수님이 태어날 당시 두 살 이하의 아이들을 모두 살해하는 끔찍한 일도 스스럼없이 자행한 것을 통해 널리 알려졌다.


이러한 시대적인 배경을 통하여 바로 이때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로서 그들에게 나타나게 된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신약과 구약의 중간기 동안을 침묵으로만 일관하지 않으셨고 성서의 땅에 메시아가 오실 수 있는 배경과 환경을 조성하셨다.


출처 : http://kcm.kr/dic_view.php?nid=39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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