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신학자

개혁주의교회와 신학정체성 (1)

작성자
쥬니어칼빈
작성일
2012-12-04 02:56
조회
5264

개혁주의교회와 신학정체성 (1)


 
문병호 /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조직신학 교수



 20세기 후반부터 시작된 무분별하고 비성경적인 은사주의와 문화주의가 아무런 검증 없이 교회에 흘러들어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를 세속화시키며 복음의 본질을 왜곡하여 개혁주의 신앙이 도전받고 있는 이 시점에 개혁신앙의 본질을 점검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됩니다.


 


본 특집은 2009년 5월 11일부터 13일까지 새에덴교회에서 개최된 제46회 전국목사장로기도회에서 문병호교수(총신대)가 강의한 내용입니다. (편집자)


 


    1. 칼빈, 개혁주의, 한국 개혁주의



제네바의 종교개혁자 존 칼빈(Joannes Calvinus, Jean Calvin, 1509-1564)은 '오직 성경에 따라서'(sola Scriptura) 개혁신학을 선구적으로 수행한 성경의 교사(doctor)요 해석자(interpres)요, 수호자(custos)였다.


 


칼빈의 사상은 그를 잇는 개혁주의 신학자들에 의해서 더욱 정치하게 교리화되었음이 사실이나 단지 개혁신학의 효시로서만 의의를 갖는 것은 아니다. 칼빈의 후예들 가운데서 칼빈에 필적할 만큼 성경의 진리를 그 자체로서 심오하고 부요하게 다루었던 신학자를 찾기란 쉽지 않다. 칼빈은 돌아갈 곳 없는 망명객으로서 오직 하늘의 본향을 바라며 나그네의 신학(theologia viatoris)을 겸손하게 전개했다. 칼빈은 성경의 가르침 자체가 신학적이며 그 가운데 신학을 가르치는 길(via docendi)이 또한 이미 계시되어 있다고 보았다.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칼빈의 가르침으로부터 교회와 성도의 신앙과 삶에 역사하는 실천적 교리를 도출해 내려고 노력했다. 그들은 칼빈을 넘어서는 것이 아니라 칼빈을 풀어내는데 그들의 사명이 있음을 깨달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작품들을 저술함에 있어서 마땅히 그것들이 기독교강요를 위시한 칼빈의 작품들과 함께 읽혀져야 할 것으로 여겼다. 그러므로 참 신학이 펼치는 성경 교리와 경건의 비밀을 맛보기 위해서는 칼빈으로부터, 칼빈과 함께, 칼빈 가운데서 개혁주의를 읽어야 한다.


 


역사상 개혁주의는 칼빈의 신학이 각각의 상황에 고유하게 토착화되면서 여러 양상으로 수립되었다. 칼빈의 가르침이 제네바에서는 베자로부터 프란시스 뚤레틴에 이르는 제네바 개혁주의로, 불란서에서는 불란서 개혁주의로, 독일에서는 하이델베르크 신앙교육서에 기초한 독일 개혁신학으로, 화란에서는 화란 개혁신학으로, 잉글랜드에서는 청교도주의로, 스코틀랜드에서는 장로교로 전개되었다. 미국의 장로교는 잉글랜드의 청교도주의와 스코틀랜드의 장로교가 역사적으로 어우러져 이루어진 것이다. 각국의 개혁주의는 칼빈의 가르침에 따라서 언약신학이라는 공통의 열매를 맺었다. 개혁주의 언약신학은 칼빈의 가르침이 개혁주의로 교리화되어 가는 과정에서 생긴 필연적인 산물로서 전체 구속사와 개인의 구원서정을 언약의 약속을 성취하신 그리스도의 공로와 그 의의 적용이라는 관점에서 파악한다.


 


그러므로 언약신학을 핵심 주제로 전개된 칼빈주의의 실체와 의의와 가치는 칼빈의 신학 자체를 도외시하고는 합당하게 논의될 수 없다. '토착화된 칼빈의 신학'으로서 개혁주의는 칼빈의 신학의 연속이라는 측면에서 우선적으로 고찰되어야 한다. 개혁주의 언약신학이 지나치게 윤리성을 강조함으로써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를 제한했다는 비판도 종종 제기되는데 이는 개혁주의를 그것이 기초하고 있는 칼빈의 신학에 정초해서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까닭이다.


 


칼빈은 신약과 구약의 관계를 공히 그 실체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하신 중보자이심으로부터 추구함으로써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역동적인 이해에 이르렀다. 율법에 온전히 순종하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심으로써 다 이루신 자신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해 주시기 위해서 중보자 그리스도께서 지금도 중보하심이 신학의 중심 개념으로 부각되었다. 구원론과 교회론의 기초로써 기독론이 중시되었다. 그리스도의 중보는 대제사장적 기도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전체 과정에 역사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리스도의 중보로 말미암아 그의 의를 전가받아서 성도의 인격뿐만 아니라 부족한 행위도 받을 만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리스도의 중보로 말미암아 성도는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이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으로 계시되었음을 확신하게 된다는 사실이 예정론과 섭리론의 핵심 주제로 떠올랐다. 그리스도가 율법의 중보자 되심이 신학적으로 합당하게 다루어짐으로써 복음과 율법, 명령하심과 이루심에 대한 구속사적이며 구원론적인 이해가 동시에 이루어졌다. 그러하여서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교리에 대한 신학적 지평이 확보되었다.


 


칼빈의 신학은 자주 후대 신학자들에 의해서 획일적이고 제한된 관점으로 편협하게 이해되어 왔다. 대체로 이 경우 그들은 칼빈을 충분히 읽고 소화하기보다는 이용하는 데 그쳤다. 이러한 경향은 우리에게 특히 현저했다. 한국의 장로교는 서구사회에서 토착화된 개혁주의를 받아들임으로써 개혁교회로서 형성되었다. 처음에는 미국의 장로교가 한국개혁주의의 씨앗으로서 심겨졌다. 그것이 자라는 과정에서 화란 본토와 미국 개혁교단으로부터 전해진 화란 개혁주의 신학이 함께 큰 작용을 했다. 한국 장로교회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 소 요리문답서의 가르침을 채택함으로써 언약사상에 기초한 구원의 교리와 그리스도인의 삶의 교리를 중시하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특히 일반은총과 특별은총의 교리에 따라서 교회 내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와 국가에 있어서 성도의 바람직한 삶의 헌신이 강조되었다. 한국교회가 수용한 개혁주의는 칼빈의 신학을 충실히 전승하여 발전시킨 역사적 개혁주의였다. 그러므로 진정한 한국적 개혁주의는 칼빈의 신학 자체와 그것이 개혁주의로 수립되어 가는 과정을 신학적으로 합당하게 파악하는 일로부터 추구되어야 한다.


 


서구의 교회와 다름없이 한국의 장로교회는 성경의 무오와 예수 그리스도의 위격과 사역 등 주요한 신학적 주제들에 관한 논쟁들을 겪으며 발전되어 왔다. 이러한 과정에서 개혁주의의 성경 진리에의 적합성이라는 문제가 더욱 부각되었다. 그러나 개혁주의 교리와 기원에 대한 논쟁에 있어서조차 칼빈의 가르침 자체에 문의함으로써 결론에 이르고자 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많은 경우 칼빈의 신학은 그 자체로서 연구되기보다는 단지 개혁주의 가르침을 통해서 추론될 뿐이었다. 이러한 경향은 은사주의와 문화주의로 개혁신학이 도전을 받게 된 20세기 후반을 거쳐 현재까지도 계속되었다. 그리스도의 속죄의 영적이며 사회적 의의, 그 공로의 적용으로 인한 성도의 삶의 변화, 그리고 그리스도의 영으로서의 보혜사 성령의 작용 등에 대한 개혁주의의 입장을 묻는 많은 질문들이 안팎으로 던져졌지만 칼빈의 가르침으로부터 그 답들을 찾으려는 노력은 미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의 극복되었다거나 극복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난무하였고, 지금도 그러하다. 칼빈의 신학에 대한 깊은 이해가 결여된 이러한 비판은 편견이나 궤변이 되기 쉽다. 칼빈을 떠난 칼빈주의 혹은 개혁주의는 있을 수 없다.


 


오늘날 팽배해 가고 있는 교회 안의 세속주의와 종교다원주의는 기독교의 근간을 흔들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를 거치면서 상대주의가 오히려 절대시된다. 최고의 가치를 편의와 실용의 잣대로 판단하고자 하며 절대적 진리라는 개념 자체를 부조리한 것으로 여기는 세태가 지배한다. 심지어 개혁교회 내에도 이러한 조류가 밀려 들어와서 진리를 타협거리로 삼아서라도 공존하는 것이 순교의 피를 뿌리는 것보다 더욱 지혜롭다고 호도한다. 우리가 지켜내야 하는 기독교의 고유성은 단지 종교적 배타성으로 치부된다. 여전히 슐라이엘마허를 계승한 내재신학자들과 칼 발트를 계승한 신정통주의 신학자들이 성경의 계시성을 부인하고 전적타락과 전적은혜의 교리를 무시한 채 교회를 이성주의, 인본주의로 이끌어가고자 한다. 


 


한국교회는 수년 전에 선교 120주년을 갓 넘어섰다. 우리가 이어받은 서구 개혁주의는 칼빈의 신학을 받아들여서 자신의 것으로 삼기 위해서 오랜 기간 수많은 진통을 감내해 왔다. 교회에는 도전과 고난은 있을지언정 위기와 절망은 없다. 작금 한국교회는 한국 개혁주의를 더욱 깊이 심화시켜가야 할 전환기적 사명을 역사적으로 부여받고 있다. 진정 지금이야말로 오직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서 창조와 구원의 교리와 성도의 삶과 교회의 교리를 말씀의 깊이대로 추구해야 할 때이다. 진정한 기독교인의 가치관을 올바로 수립해서 그리스도의 영을 받아서 자녀 된 자로서 그와 함께 상속자 되어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그와 함께 고난을 받는 자리에 서야 함을 지고의 기쁨이자 소망으로 여겨야 한다(롬 8:17). 지금이 바로 성경 말씀의 심오함과 부요함이 배어 나오는 칼빈의 신학에 터잡아 참 신학을 추구함으로써 참 교회를 세우고 성도의 참된 삶의 교리를 세우고 진작해야 할 때이다. 한국 개혁주의 혹은 한국칼빈주의는 칼빈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리고 그곳으로부터 지금 이곳으로 나와야 한다.


 


2. 신학자로서의 삶


 
저명한 칼빈신학자 스타우퍼는 「인간 존 칼빈」이라는 책에서 칼빈의 삶을 남편과 아버지, 친구, 목사라는 세 가지 관점에서 기술했다. 이 책이 칼빈의 '인간성'에 중점을 둔 탓은 있겠지만 '신학자' 칼빈에 관해서는 아무 장(章)도 할애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의아스럽다. 많은 사람들은 칼빈을 목회자 혹은 당대 새롭게 전개된 인문주의와 종교개혁의 영향을 받아서 성경을 해석하고 가르친 개화된 교사 정도로 여기는 듯한데, 과연 신학자로서의 칼빈의 삶은 주목받지 못하는가?


 


칼빈의 삶은 그와 신학적 대척점에 서 있었던 가톨릭신학자들, 재세례주의자들, 유니테리언주의자들, 이성주의자들, 은사주의자들, 자연주의나 실존주의에 빠져 있었던 신학자들, 그리고 기독론과 성찬론을 비롯한 근본교리들에 있어서 비성경적 입장을 견지했던 루터란 신학자들에 의해서 자신들의 치부가 드러났던 민큼 비신학적인 칼빈 혹은 탈신학적인 칼빈을 그려내기에 몰두했다. 과연 칼빈은 신학적 주견 없이 그저 논쟁만을 일삼던 어느 한 종교주의자였는가?


 


칼빈은 자신의 시대에 일어났던 첨예한 신학적 논쟁들의 중심부에 있었으며, 그러한 논쟁들을 통하여서 생애의 후반부로 갈수록 신학자로서의 명성을 더하였다. 그는 1509년 7월 10일에 났으며 1535년 8월 23일, 불과 스물여섯 살을 막 넘겼을 즈음, 기독교사에 길이 남을 한 권의 책을 써서 당시 철권을 휘둘렀던 불란서 국왕 프란시스 1세에게 「기독교강요」라는 이름으로 헌정했다. 그것은 당대 교황주의 신학자들을 겨냥한 신학적이며 교리적인 서책이었다.


 


가톨릭주의자들에게 칼빈이 자신의 이름을 각인시킨 처음 계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의 유일성을 주장하여 파란을 일으킨 콥 총장의 연설문을 쓴 신학자로서였다. 재세례주의자들 역시 칼빈을 자신들의 영혼수면설을 반박하며 영혼창조설을 주장한 신학자로서 인식했다. 이신칭의의 교리로 새로운 시대의 기치를 내건 루터를 추종한 루터란들은 오직 성경적 진리에 기초하여 성찬론을 전개하고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를 구원론의 핵심으로 여기는 신학자 칼빈으로서 그를 기억하였을 것이다.


 


칼빈의 전기학자 가녹지가 언급했듯이 칼빈의 생애(주관)는 그의 작품들(객관)을 통하여서 읽혀져야 한다. 칼빈은 자기 자신의 신상에 대해서는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말을 아꼈다; "나는 나에 대한 말을 맘 놓고 하지는 않는다(De me non libenter loquor)." 제네바에서의 칼빈의 직무는 정치적이거나 사법적이었다기보다는 오히려 신학적이며 교리적이었다. 칼빈은 한번도 정치인이었던 적이 없었으며 단지 성경의 교사요 해석자요 수호자로서 제네바를 영적으로 지도했을 뿐이다.


 


세르베투스(Servetus) 공판은 목회자 혹은 정치가 칼빈으로서가 아니라 신학자 칼빈으로서의 모습을 조명한 사건이었다. 세르베투스가 처형된 1553년은 칼빈 자신조차도 권징 시행권의 문제로 말미암아 제네바 의회로부터 극도의 고난을 치르던 때였다. 당시 칼빈은 세르베투스의 반삼위일체적 단일신론과 율법 폐지론과 유아세례 반대론에 대한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전했을 뿐이었다. 칼빈은 15세기 말부터 유럽을 휩쓸었던 반유대주의에 대해서 정치적으로 대응하지 않고 신학적으로 작품을 통해서 말했다. 그의 삶을 통하여서 계속된 신학적 긴장은 정리된 교리로서, 문건으로서, 책으로서 해소되었다. 신학자로서의 칼빈의 삶은 오히려 아버지, 친구, 목회자로서의 삶을 압도한다. 따라서 칼빈의 삶의 가치는 신학적 전승이라는 측면에서 논구되어야 한다.


 


칼빈의 신학은 그 자체 개혁주의의 기초, 본질, 정수로서 작용했다. 칼빈의 신학은 칼빈신학자들 혹은 칼빈주의자들에 의해서 비로소 '신학화' 된 것이 아니었다. 칼빈은 성경의 진리로써 자신의 신학을 수립한 신학자였다. 역사적 칼빈주의는 칼빈신학의 역사적 적용이었다. 칼빈의 작품들은 칼빈의 신학을 담지하고 있는 것이지 단지 그것의 자료만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지 칼빈을 이용할 것이 아니라 그의 작품을 읽어야 한다.


 
    3. 초기 '신학적' 작품들과 기독교 강요


 
칼빈의 초기 작품들은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의 구속사적 의의를 논술하는데 집중되어 있다. 1533년 11월 1일에 있었던 콥(Nicholas Cop)의 파리 대학 취임 연설문에서 칼빈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중재하시는 유일하신 진실한 중보자, 생명의 열매를 맺게 하는 자신의 영으로 우리를 감화하시는 가장 위대하신 그리스도" 위에 우리의 진실한 믿음을 세워야 한다는 관점에서 '기독교 철학'을 '그리스도의 철학'이라고 명명한다.


1535년에 출판된 율리베땅의 불란서 성경 번역에 부친 서문에서 칼빈은 복음과 율법의 관계를 그리스도가 율법의 실체이며 완성이라는 관점으로부터 간략하게 설명한다. "율법은 어떤 사람도 완전함에 이르게 할 수 없었다; 그것은 단지 그리스도만을 제시했다. 율법은 마치 선생과 같아서 바울이 말한 바 있는 율법의 마침이자 완성인 그리스도에 대해서 전했으며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했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 초판을 출판한 다음해에 기독교 신앙의 조목으로서의 전체 교리를 일목요연하게 제시한 신앙 교육서를 제네바 교회에 제출한다. 이 작품은 가히 '칼빈의 가르침의 문을 여는 열쇠'요 기독교 강요의 정수를 모은 책이라고 할 만하다. 이 작품의 서문에서 칼빈은 신앙교육의 목적은 "날카롭고 고상한 지식보다 경건에 유익한 것으로" 행하여서 '교리의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이 목적은 오직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을 가르쳐서 '복음의 순수함'을 지킬 때 가능하다고 하였다.


 


1536년 칼빈의 대작(opus magnum) 「기독교 강요」 초판은 신약성경의 사분의 삼 정도가 되는 작은 분량이었다. 이는 절의 구분이 없이 모두 여섯 장으로 구성되었다. 제1장은 율법 교리에 기본적으로 할애되었다. 이곳에는 하나님의 속성과 이신칭의 교리 등 주요한 신학적 논제들이 망라되었다. 제2장은 신앙의 개념과 조목을 다루는 데 집중되었다. 제3장은 기도에 관한 바른 이해를 제시했다. 제4장은 성례를 개론, 세례, 유아 세례, 성찬의 순으로 다루었다. 제5장은 잘못된 카톨릭의 성례를 비판하는데 할애되었다. 마지막 제6장은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교리에 돌려졌다. 여기에서는 교회와 국가와의 관계가 입법권, 사법권, 재판권이라는 측면에서 비교적 정치(情緻)하게 전개되었다.


 


기독교 강요는 그 초판에서부터 이미 교훈적이며, 고백적이며, 변증적인 성격을 드러내었다. 순수한 근본 교리를 전하는 서책으로써 그것은 성도들을 교육시키는 신학적 교본으로써 작성되었다. 중세 성도들은 단지 예배를 보기만 하였을 뿐 듣지는 못했는데 이제 만인이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듣는 자리에 서서 배우게끔 추구되었다. 또한 본서는 성경의 진리를 믿음으로 받아들여서 감동받은 성도들의 고백의 서책이었다. 그곳에서는 공허한 사색이 배제되고 참다운 경건의 경험이 강조되었다. 그리고 그 자신이 책의 말미에서 말하였듯이 본서는 이미 충분히 변증적이었다. 그것은 가톨릭의 형식주의와 계급주의를 비판하였으며 당시 재세례파주의자들의 신비주의도 배격하였다.


 


기독교 강요는 칼빈의 생애를 통하여 라틴어와 불어로서 계속 증보 편집되었던 바, 라틴어로만 5판이 나왔다. 특히 1539년 제2판에서는 후에 '황금의 작은 책'이라고 불렸던 그리스도인의 삶의 교리라는 이름의 장을 신설하여 '미래를 묵상하면서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는 삶'으로서 성도의 삶의 요체를 제시하였다. 1543년에 출판된 제3판과 1550년에 출판된 제4판에서는 교회론과 시민정부론에 관한 교리들이 교부들의 작품들로부터의 인용을 통하여서 획기적으로 추가되었다.


 


1559년 마지막 판 '기독교 강요'는 무려 80장에 달하는 큰 책이 되었다. 장을 묶는 '권'을 넷으로 했다. 그리하여서 권-장-절의 구조를 취하게 되었다. 이제 책은 성경 전체와 맞먹는 분량이 되었다. 여기에서 칼빈은 전체 교리체계를 사도신경에 따라서 네 부분으로 나누어서 다루었다.


 


제1권에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에 대한 개괄적 고찰을 한 후 일반계시(자연법)와 특별계시(성경)를 다룬다. 그리고 후반부에서는 삼위일체론과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를 논한다.



 제2권에서는 먼저 타락한 인간의 비참한 상태를 다루고 이로부터 중보자 그리스도의 필연성을 논한다. 여기에서 칼빈은 바로 이어서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다루지 않고 먼저 율법과 신약과 구약의 일치와 차이에 대해서 몇몇 장들을 할애한다. 이로써 칼빈은 전체 성경의 실체가 그리스도임을 부각시키고 있다.


 


제3권에서 칼빈은 먼저 성령에 관한 논의에 한 장을 할애하고 이어서 믿음-회개-기독교인의 삶-이신칭의의 원리를 순서대로 다루고 있다. 이 부분에서 칼빈은 따로 장을 두지는 않았지만 그리스도와의 신비한 연합의 교리를 전체 구원론의 기초로 삼고 있으며 그 위에 이신칭의의 원리를 세우고 있다. 그리고 이신칭의의 장을 바로 이어서 기독교인의 자유를 다룬 장을 두고 이를 '칭의의 부록'이라고 불렀다.


 


제3권의 나머지 부분은 예정론과 기도론 그리고 최후의 부활이라고 제목을 붙인 종말론에 할애된다. 예정론이 은혜의 한 방편인 기도와 함께 다루어졌다는 사실은 칼빈이 이를 단지 선택자와 유기자를 나누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의 교리로서만 경직되게 이해하지 않고 구원받은 백성의 삶 가운데서의 확신이라는 측면에서 역동적으로 이해했는지 알 수 있다. 종말론적 언급이 구원론의 마지막에, 교회론 이전에 나타나는 것은 마지막 판 기독교 강요가 사도신경의 순서를 그대로 따른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칼빈에게 있어서 종말론은 미래를 묵상하며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좇아 살아가는 성도의 삶을 사는 우리에게 '지금' 의미 있는 교리로서 이해된다. 이렇듯이 제3권은 구원론과 종말론에 할애되었다.


 


제4권은 교회론과 시민국가론을 다루었다. 교회와 국가 모두 입법, 행정, 사법의 관점에서 논구되었다. 특히 가시적 교회와 비가시적 교회를 함께 논의하면서 참교회는 양자에 대한 바람직한 인식을 통하여서 그 일치를 추구해야 함을 전체 문맥 가운데서 도도하게 강조하고 있다. 교회는 수직적인 진리와 수평적인 사랑이 모이는 바로 그 점으로서 이해되었다. 그리하여 성례의 언약성과 공동체성이 함께 강조되었다.


 


마지막으로 한 장을 할애하여 다룬 시민국가에 대한 교리도 이러한 가시성과 비가시성, 수직성과 수평성이 함께 깔려서 전개되었다.


 


    4. 칼빈 신학의 중심 교리



 지금까지 우리는 초기 작품에 나타난 칼빈의 신학과 기독교 강요의 판별 특징을 일별했다. 그렇다면 칼빈의 신학은 어느 특정한 교리에 터 잡아 발전한 것인가? 과연 칼빈은 예정론만의 신학자였는가?


 


칼빈신학의 중심 교리에 대한 학자들의 다양한 입장이 전개되어 왔다. 그러나 칼빈의 신학을 일의적으로 파악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그는 이성적 전제나 철학적 사변이 아니라 말씀 자체가 계시하는 다양한 관점에 따라서 자신의 신학을 전개했기 때문이다.


 


칼빈신학의 중심 주제로 '칼빈의 칼빈주의'라고 명명된 예정론과 섭리론이 주로 논해졌다. 칼빈의 주장한 예정론은 성도의 특별은총으로서 공로 없는 은혜(gratia immerita)에 대한 감사를 표현하는 교리이지 루터란들과 카톨릭 신학자들이 칼빈을 폄하하며 주장하듯이 하나님의 섭리를 편협하게 축소하거나 왜곡하는 교리가 아니었다.


 


칼빈신학의 중심으로 전체 축자영감 성경론, 그리스도와의 연합, 그리스도인의 삶, 성령론, 교회론 등이 언급될 수 있을 것이나, 필자는 칼빈신학의 요체를 다음과 같이 포괄적으로 정리한다.


1) 하나님께서 스스로 계시며(존재), 스스로 진리시며(지식), 스스로 의로우심(도덕).


2) 한 분 하나님께서 삼위로 계시고 일하심, 즉 살아계심과 사랑이심.


3) 특별계시와 특별은총과 함께 일반계시와 일반은총 강조.


4) 하나님께서 성자 그리스도 예수를 구원자로 삼으셔서 육신 가운데 구원을 계시하고 이루심. 그분 안에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심.


5) 성령으로 영감 된 말씀을 성령으로 조명되어 감화받은 심령이 믿음으로 수납함으로써 하나님과 자신에 대한 부요한 지식에 이름.


6) 언약에 있어서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공로를 함께 강조


7)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다 이루신 공로를, 다 전가하셔서 성도의 인격 뿐만 아니라 행위도 의롭다고 받으심.


8)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분의 영으로 중생한 성도가 그분의 중보로 말미암아 그분의 의를 전가받아서 나그네의 삶 가운데서 자라감 - 그리스도께서 중보자로서 전체 율법의 과정을 은혜로써 주장하심.


9) 그리스도의 자녀로서 그분과 함께 후사된 성도의 삶-미래를 묵상하고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삶.


10)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할 그리스도인의 자유.


11) 거저 택함 받았음을 확신하며 살아가는 감사와 기도의 삶.


12) 한분 그리스도를 머리로 지체된 백성들의 연합체로서의 교회.


13) 성례를 통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의 연합 : 참 성례신학- 영적이나 실재적인 임재.


14) 공평을 강조하는 시민 국가의 삶.


 


[출처] [본문스크랩] 개혁주의교회와 신학정체성 (1) / 문병호 교수 (성경과 외국어) |작성자 진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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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과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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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거스틴의 생애와 사상
쥬니어칼빈 | 2013.02.15 | 추천 0 | 조회 5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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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티누스(A.D. 354-430)의 『하나님의 도성』(De civitate De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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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교회와 신학정체성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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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교회와 신학정체성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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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 신학과 신학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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