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신학자
제네바 시편찬송가 (1543) 서문 / 칼빈
신실한 신자라면 누구나 가까운 데에 있는 교회에서 성찬에 참여하고 주일이나 다른 날에 교회 모임에 참석하여 하나님께 영광과 경배를 돌려 드리는 것이 가장 필요한 일이고 기독교회에서 요구되는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배에 참석하는 사람이 모두 거기에서 말하고 행하는 것을 알고 이해하여서 유익을 얻고 세움을 입는 것도 마땅하고 사리에 맞는 일입니다.
이해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함(Understanding Is Essential)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모일 때에 지켜야 할 규칙을 제정하여 주셨는데, 주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그것을 보거나 관람하는 세상 사람들을 즐겁게 하시기 위함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백성들이 모두 거기에서 유익을 얻도록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바울 사도가 증언하고 명령하는 것처럼(고전 14:26), 교회에서 행하는 모든 것은 서로의 덕을 세우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의도가 아니었다면 그리스도의 종(사도 바울을 가리킴-역자 주)이 그렇게 명령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제정하신 모든 것에 대하여 우리가 교훈을 받아 지적 이해에 이르기 전까지, 우리는 (그러한 규칙들로부터) 유익을 얻을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어떤 기도나 의식에 참여하면서 그 내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경건한 마음을 갖게 되었다고 말한다면, 아무리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많더라도, 그것은 매우 우스꽝스러운 일입니다. 경건이란 죽은 것이거나 무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선한 정서(good affection)로서, 성령님께로부터 나온, 생기가 넘치는 움직임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진정으로 감화시키고 우리의 이해력을 일깨워 주실 때에 나오는 경건함이라는 말입니다. 만일 사람이 그 의미를 알지 못한 채 눈에 보이는 어떤 것으로 세움을 받을 수 있는 것이라면, 바울 사도는 이해할 수 없는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그렇게 엄격하게 금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한 ‘가르침이 없으면 덕을 세울 수 없다’는 이 논리도 사용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지금 교회에서 사용되는 우리 주님의 거룩한 규례를 존중하기를 참으로 원한다면, 먼저 그 규례에 담겨져 있는 내용과 그것들이 의미하는 바와, 그것들이 무엇을 의도하는 것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하여야 그 규례를 유익하고 건전하게 사용할 수 있게 되며, 결과적으로는 (그 규례의 사용이) 바르게 규제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예배의 요소들(Elements In Worship)
교회의 신령한 모임에서 우리가 지켜야 할 것으로 주님께서는 세 가지를 명하셨으니, 곧 그의 말씀의 설교, 공적(公的)이고 엄숙한 기도, 성례의 시행이 바로 그것입니다. 말씀의 강설에 대하여서는 논란의 여지가 없기 때문에 그것에 대하여서는 이곳에서 이야기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면 두 가지 규례가 남게 되는데, 먼저 기도에 대하여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성령께서는 사람들이 알 수 있는 일상적인 언어로 기도를 드리라고 분명하게 명령하셨습니다. 사도는 알 수 없는 말로 드린 기도에 대하여서 사람이 ‘아멘’ 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고전 14:16). 기도는 회중 전체의 이름으로 회중을 위하여서 드리는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 있는 모든 사람이 기도의 참여자가 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대부분의 교우들이 이해할 수 없는 라틴어를 교회에 도입한 것은 매우 무례한 일입니다. 거기에는 그들의 그러한 관행을 변호해 줄 수 있는 어떤 신비함이나 궤변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한 관행은 부당한 것이며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주장을 하려면, 하나님의 뜻에 정면으로 반대가 되는 것, 말하자면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에 하나님께서 동의할 것처럼 보인다고 가정해야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금하신 것을 정면으로 어기면서도 이러한 반역을 마치 거룩하고 칭찬할 만한 것인 것처럼 자랑하고 옹호하는 것은 하나님을 매우 멸시하는 일인 것입니다.
교리와 연결된 성례(Sacraments conjoined with Doctrine)
성례에 관하여는, 만일 우리가 성례의 본질을 철저하게 살핀다면, 사람들이 성찬을 단순히 쳐다보기만 하는 방식으로 성례에 참여하는 것은 매우 왜곡된 관습이고 거기에 담겨 있는 신비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이내 깨닫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만일 성례가 (어거스틴이 부르는 것처럼) 보이는 말씀이 맞는다면, 거기에는 단순히 외적인 구경거리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교리가 함께 연결되어서 우리의 지성에 이해를 가져다주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성례들을 제정하심에 있어서 이 점을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성례는 주님께서 우리와 맺으신 연합, 그의 죽으심으로 확증하신 그 연합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성례)에 그 의미를 밝힘으로써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우리가 알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보이는 말씀인 성례에서-역자 첨부) 우리 주님께서 그의 입을 여시고 말씀하시는 것은 헛일이 되고 말 것입니다. 주님 주위에 아무 들을 수 있는 귀가 없다면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점에 있어서는 긴 이야기가 필요 없을 것입니다. 이 문제가 사람의 상식에 비추어 검토된다면, 성례는 그 자체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상징들을 가지고 사람들을 즐겁게 만드는 한낱 헛소리에 불과하다고 모든 사람들이 고백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례를 시행하기를 하였지만 거기에서 사람들이 그 성례와 관련하여 언급되는 말씀들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성례를 오히려 더럽히고 훼손하는 경우를 우리는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사실이지 그러한 관행으로부터 미신들이 생겨나는 것을 볼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를 들면 세례를 위해 사용하는 물의 경우나 성찬에서의 떡이나 포도주의 경우에서처럼, 그것을 성별(consecration)하는 것을 마치 성육신의 일종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사람이 숨을 쉬고 입으로 말들을 발음할 때에, 감각할 수 없는 피조물이 힘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비록 사람은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그러나 참된 성별이란, 어거스틴이 말한 것처럼, 예수님의 말씀들에 명백하게 담겨진 그것이 선언되고 받아들여졌을 때, 믿음의 말씀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내 몸이니라”고 빵에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그를 믿는 신실한 무리들에게 ‘받아 먹으라(take, eat)’는 말씀을 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이 성례를 참으로 기념하고자 한다면, 우리에게는 반드시 그 성례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선언하여 줄 수 있는 교리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익숙하지 않은 자들에게는 이것이 마치 완전히 새로운 어떤 것인양 매우 낯설게 느껴지겠지만, 실상 이것은 만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라면 우리가 말하는 이러한 성례를 더욱 선호하는 것이 매우 당연하고 합당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맨 처음부터 제정하신 그것이 우리에게 새로운 것처럼 보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 누구의 생각을 우리가 꿰뚫어 알 수는 없기에, 무지한 자들에게 빛을 비춰주시는 것을 기뻐하시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자신의 감각에 의존하여 자기 자신에게 집착하거나 역시 함께 소경된 그들의 지도자의 정신 나간 지혜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땅 위의 모든 사람들이 아는 것이 얼마다 더 지혜로운 일인지를 알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교회에서의 사용을 위하여, 이러한 기도들과 성례들을 하나의 예식서 형태로 하여 공동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유익할 것으로 판단하였습니다. 각자가 그리스도인의 회집에서 말해지고 행해지는 것을 들을 때에 그것을 이해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하지만 이 책은 이 교회의 성도들에게만 유익한 것이 아니라, 신실한 신자로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일 때에 어떤 형식을 따르고 어떤 자세를 견지해야 하는지를 알기를 소원하는 모든 성도들에게 큰 유익을 줄 것입니다.
두 가지 종류의 기도(Two Kinds of Prayers)
따라서 우리는 성례를 기념하는 방식과 거룩한 결혼 예식의 방식을 요약하였고, 마찬가리로 우리가 사용하는 기도문과 찬송들도 간추려서 이곳에 함께 묶었습니다. 공적인 기도에 대해서 말할 것 같으면, 거기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말로만 하는 기도이며, 다른 하나는 찬송으로 드리는 기도입니다. 이것은 최근에 비로소 고안된 것이 아닙니다. 역사에 나타나 있는 것처럼 교회는 처음부터 그렇게 해왔습니다. 바울 사도께서도 입으로 하는 기도에 대해서 말할 뿐 아니라 찬송으로 드리는 기도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실이지 음악은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불붙게 하여서 우리로 더욱 간절하고 열정적으로 하나님께 부르짖고 찬송하도록 하는 힘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거스틴 선생의 말처럼, 우리는 찬송이 경박하거나 경솔해지지 않고 장중하고 위엄있게 되도록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식탁에서나 집에서 사람을 즐겁게 하려고 부르는 노래는, 교회에서 하나님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부르는 시편과는 매우 큰 차이가 있습니다. 이 책에 수록된 예식문에 대하여서 바르게 판단하기를 소원하는 사람은, 우리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이 책이 오직 교회를 세우고자 하는 목표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 책은 거룩하고 순수한 책이라고 생각하기를 소망합니다.
노래를 통한 표현(expression Through Singing)
하지만 노래를 부르는 일은 [예배에서만이 아니라] 더 넓은 범위로 확대될 수 있습니다. 가정에서나 일터에서도 노래는 하나님을 찬송하고 우리의 마음을 그분께 들어 올리게 하는 자극물, 말하자면 오르간이 될 수 있고, 그분의 능력과 선하심과 지혜와 공의를 묵상하게 함으로써 우리를 더없이 크게 위로하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첫째, 성령께서 성경 말씀으로 그렇게 세심하게 하나님으로 즐거워하라고 권고하시고 우리가 그것을 참된 목적으로 여기고 온통 그것만을 기뻐하도록 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헛된 것을 좋아하는 성향이 뿌리 깊게 있음을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본성은 어리석고 악한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온갖 수단들을 추구하라고 유혹하면서 이끌고 갑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그와는 정반대로 육신과 세상의 유혹으로부터 우리를 분리하여서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그분이 그렇게 강력하게 권고하신 신령한 기쁨을 우리가 충족히 누리도록 하시기 위해서 모든 가능한 방편들을 제시하여 주십니다.
음악의 중요성(Importance of Music)
사람을 재창조하거나 사람의 마음에 기쁨을 주는 것들 중에서 음악이 으뜸이고, 혹은 가장 중요한 것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음악은 그러한 목적으로 사용하라고 주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음악은 우리의 유익과 구원을 위하여 주신 것이므로 우리가 음악을 손상시키거나 오염시켜서 스스로를 정죄하는 데에 떨어질까 두려워해야 하며, 이를 그릇되게 사용하지 않도록 조심하여야 합니다. 이것 이외에 달리 더 고려할 것이 없다면 이제 음악을 적절히 사용하고 정직한 일에 사용하면 될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음악으로 말미암아 고삐가 풀려서 방탕하게 되거나 나약하게 되어서 무분별한 즐거움에 빠지지 않도록 하여야 하며, 음악이 어떤 음탕함이나 난잡함의 도구가 되지 않도록 하여야 합니다.
음악의 힘(Power of Music)
그러나 고려할 점이 더 있습니다. 플라톤이 현명하게 지적한 것처럼, 음악처럼 사람의 품행(morals, 또는 도덕심)을 이 방향이나 저 방향으로 돌리거나 굽힐 수 있는 것은 세상에 거의 없다는 점입니다. 음악이 사람의 품행을 이리저리로 돌릴 수 있는 신비한 능력, 거의 믿을 수 없을 만한 능력을 갖고 있음을 실제로 우리도 경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음악이 언제나 우리에게 유익만을 끼치고, 해를 끼치는 일이 없도록 더욱 부지런히 규제해야 합니다. 그러한 이유에서 고대 교회의 박사들은 그 시대의 사람들이 고상하지 못하고 방탕한 노래에 빠져 있다고 종종 불평하였습니다. 그러한 노래를 가리켜서 세상을 타락시키는 치명적이고 사탄적인 독약이라고 말한 것은 근거 없는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이제 음악에 대하여 말하자면, 음악에는 두 부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가사 혹은 노래의 주제와 내용(subject and matter)이고, 둘째는 곡조 또는 선율(song or melody)입니다. 바울 사도가 가르친 것처럼, 모든 악한 말은 선한 행실을 부패시킨다는 것이 사실입니다(고전 15:33). 그런데 그 말에 가락을 붙이면 더 강력하게 마음을 뚫고 들어옵니다. 포도주가 깔때기를 타고서 미끄러지듯 통 속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독소와 부패는 선율을 타고서 마음의 깊숙한 곳까지 스며드는 것입니다.
왜 시편을 택해야 하는가?(Why The Choice of the Psalms)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하여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고상하고(단정하고) 거룩한 노래를 불러야 합니다. 그러한 노래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양하고 그분의 행하신 일을 묵상하도록 박차(拍車)와 같이 우리를 격려하여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고 높이고 영광을 돌리도록 할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지 않고서는 하나님께 합당하게 노래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참으로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무리 철저히 살펴보고 이곳저곳을 찾아본다 하더라도 성령께서 다윗을 통하여 말씀하신 시편보다 이 목적(참된 찬송)에 더 부합하고 어울리는 노래는 찾을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시편으로 찬송할 때에, 마치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친히 그분의 영광을 노래라도 하시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의 입에 그 시편들을 두셨음을 확신하게 됩니다. 따라서 크리소스톰은, 남자와 여자와 어린아이들에게도 시편을 익숙하게 부를 수 있게 되기를 권면하였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시편이 일종의 그들 자신의 묵상이 되어서 (찬송에 있어서-역자 첨가) 천사와 하나가 되도록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이해하면서 찬송할 것이 요구된다(Singing With Understanding Required)
끝으로, 바울 사도가 신령한 노래는 마음으로만 부를 수 있다고 말한 것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엡 5:19; 골 3:16). 그러나 마음은 이해를 요구합니다. 어거스틴이 말한 것처럼, 바로 이 점에서 사람의 노래는 새의 노래와 다릅니다. 홍방울새나 나이팅게일이나 앵무새도 노래를 잘 부릅니다. 그렇지만 그 새들은 알지 못하고서 부르는 것입니다. 내용을 알고서 부른다는 것은 사람에게 주신 독특한 선물입니다. 내용을 알고 난 다음에 마음과 감정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찬송하려면 찬송을 암기하고 있어야 하고, 그렇게 될 때에만 마음과 감정도 움직여서 찬송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지금까지 말한 다른 이유는 차치하고 오직 이 이유 때문에라도 자기의 구원과 이웃의 유익과 관계하여서 하나님을 존귀하게 즐거워하고 하나님만을 즐거워하려는 교우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이 책(시편찬송가)을 강력히 추천합니다. 이 책은 가치가 있고 칭송을 받아 마땅하므로 본인이 굳이 이 책을 높이 추천할 생각은 없습니다. 단지 다음의 충고를 잘 받아들이기를 원합니다. 부분적으로 헛되고 경박하며 부분적으로 어리석고 둔하며 부분적으로 상스럽고 천박하며 따라서 악하고 해로운 노래를 지금까지 불렀는데, 이제부터는 그 노래들 대신에 선한 왕인 다윗과 함께 거룩한 천상의 찬송을 부르는 데에 익숙하여지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선율에 대하여서 말하자면, 우리가 지금까지 말한 것처럼, 그 내용에 적합한 장중함과 위엄이 있도록 조절하고 또한 교회에서 부르기에 적합하도록 조절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1543년 6월 10일
제네바에서 존 칼빈
(출처 : 김준범, 칼빈과 시편 찬송, 제 5회 개혁신앙강좌(2009. 10. 27), p13-16
[출처] 제네바 시편찬송가 (1543) 서문/존 칼빈 (한마음개혁교회) |작성자 목사님
번호 | 제목 | 작성자 | 작성일 | 추천 | 조회 |
23 |
칼빈의 연대표
쥬니어칼빈
|
2021.02.04
|
추천 0
|
조회 1925
|
쥬니어칼빈 | 2021.02.04 | 0 | 1925 |
22 |
교회를 다니지만 교리를 알지 못하는 이에게
쥬니어칼빈
|
2021.01.29
|
추천 0
|
조회 1383
|
쥬니어칼빈 | 2021.01.29 | 0 | 1383 |
21 |
개혁주의 신학을 규정하는 준거들
쥬니어칼빈
|
2018.06.28
|
추천 0
|
조회 2516
|
쥬니어칼빈 | 2018.06.28 | 0 | 2516 |
20 |
칼빈의 인간론
쥬니어칼빈
|
2017.06.21
|
추천 0
|
조회 3549
|
쥬니어칼빈 | 2017.06.21 | 0 | 3549 |
19 |
칼빈의 성탄절에 관한 설교
쥬니어칼빈
|
2015.12.25
|
추천 0
|
조회 3963
|
쥬니어칼빈 | 2015.12.25 | 0 | 3963 |
18 |
제네바 시편찬송가 (1543) 서문 / 칼빈
쥬니어칼빈
|
2014.10.06
|
추천 0
|
조회 5010
|
쥬니어칼빈 | 2014.10.06 | 0 | 5010 |
17 |
존 칼빈의 유서
쥬니어칼빈
|
2014.06.28
|
추천 0
|
조회 4173
|
쥬니어칼빈 | 2014.06.28 | 0 | 4173 |
16 |
칼빈의 편지들
쥬니어칼빈
|
2013.11.04
|
추천 0
|
조회 7667
|
쥬니어칼빈 | 2013.11.04 | 0 | 7667 |
15 |
쯔빙글리의 종교개혁
쥬니어칼빈
|
2013.10.05
|
추천 0
|
조회 5684
|
쥬니어칼빈 | 2013.10.05 | 0 | 5684 |
14 |
(칼빈의) 신학 구조
쥬니어칼빈
|
2013.08.09
|
추천 0
|
조회 7176
|
쥬니어칼빈 | 2013.08.09 | 0 | 717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