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신학자
칼빈의 편지들
칼빈의 편지들
- 장수민 목사 번역(칼빈아카데미 원장)
1. 칼빈이 쓴 편지들이 갖는 목회적 차원의 중요성
“칼빈의 서신들은 칼빈을 이해하는 중요한 자료
성경적 삶의 원리, 실천 목회 현장 생생해”
오늘날 칼빈주의 신학자들이 별로 관심을 갖지 않는 이상한 현상이 있으나 사실 칼빈의 서신들이야말로 여러 면에서 참으로 중요한 자료이다.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들과의 상호 관계 속에서 그가 취해나간 신앙적인 태도,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목사로서의 실천 목회관을 볼 수 있다.
칼빈의 진면목을 담고 있어
칼빈에 대한 평가를 어떤 식으로 내리든 간에 그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섬기는 현장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던 한 사람의 목사였다. 바로 이 절대적인 사실을 전제하지 않고는 어떠한 칼빈에 대한 해석이나 평가는 어불성설이다.
오늘날 책상머리에 앉아 머리로만 신학을 논하는 일부 현대 신학자들이 몇몇 개의 칼빈의 작품들에 근거하여 칼빈을 가르쳐 주겠노라면서 나서는 모습이란 얼마나 괴이한 현상인가!
교회를 섬기는 한 사람의 목회자로서 칼빈을 볼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자료가 바로 그의 서신들이다. 칼빈은 이런 저런 상황 속에서 위기나 특별한 환경에 처한 사람들에게 성경적인 삶의 원리를 가르쳐주기 위해 그 바쁜 중에도 시간을 내서 편지를 썼다. 어떤 날에는 하루에 네 통의 편지를 쓴 경우도 있다. 그것도 온 종일의 예배와 성찬과 여러 사람들과의 상담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주일에!
그가 쓴 서신에 나타나는 사상이나 대화 또는 지침들은 구구절절이 성경의 가르침에 근거한 것으로, 무엇보다도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적 임재방식이라 할 수 있는 교회를 이루는 구원 방식들을 제시해준다. 그야말로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실천 목회의 현장이다. 그러므로 칼빈 연구가라면 결코 이 서신들을 무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칼빈 서신들 다양하게 출판돼
칼빈은 임종이 임박하여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 유익하다고 판단될 경우 자신의 서신을 이용할 수 있는 권리자로 테오도르 베자(Theodore Beza)를 지명하였다. 베자는 샤를르드 종비예르(Charles de Jonviller)의 보조를 받아 칼빈의 사후 11년만인 1575년에 칼빈의 서신들을 라틴어로 출판하였다.
이후 여러 종류의 칼빈의 서신 모음집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쥴러 보네(Jules Bonnet)가 2권으로 구성한 프랑스어 번역판으로 ‘칼빈의 서신, 사필본에 근거하여 편집한 최초 모음집’(파리, 1854)과 에르멩자르(Herminjard)가 9권으로 구성한 ‘프랑스어권 나라들의 종교 개혁자들의 서신, 역사적이고 교회개혁과 관련된 다른 서신들과 해석에 도움이 되는 각주(explanatory notes)가 포함된 출판 모음집’(제네바, 1866-97) 등은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훗날 헨리 비버리지(Henry Beveridge)는 보네의 작품을 포함하여 이후 여러 사람이 편집한 칼빈의 서한들을 수집하여, 날짜가 정확하지 않은 18개의 서신을 포함하여 총 686통의 서신을 담은 서한집을 펴냈다(AGES Software: 알바니, 1998). 하지만 해설에서 의외로 상당수의 오류를 포함하고 있어 조심스럽다. 그러나 교회개혁사에 대한 어느 정도의 식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부분들을 충분히 식별할 수 있을 것이어서, 이 작품에서 상당한 유익을 얻을 것이다.
반면 에르멩자르의 작품은 중요한 해설을 담고 있어서 아주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지만 또한 1544년 이후의 서신은 출판에 포함시키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있다. 그런데 지금도 이따금씩 빛을 보지 못했던 칼빈의 서신들이 발견되어 출판되곤 한다.
필립 멜란히톤과 율리히 츠빙글리와 칼빈의 저서들로 구성된 라틴어, 프랑스어, 독일어 판의 ‘종교개혁자들의 작품 전집’(Corpus Reformatorum)은 총 101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Brunswick, 1863-1900), 이 중에서 칼빈의 작품은 무려 59권으로 구성되어 ‘칼빈 작품 전집’(Johannis Calvini Opera quae supersunt omnia)을 구성한다. 여기서 다시 칼빈이 당대의 다양한 사람들과 주고 받은 서신이 차지하는 분량은 무려 11권에 이를 정도로 방대하다. 여기에는 4,302통의 서신이 실려 있는데 칼빈의 서신만 1,300여 통에 이른다.
많은 대상들에게 보내진 서신들
칼빈은 편지쓰기의 명수였다. 실제로 어떤 신학자도 칼빈만큼 양과 능력과 관심 면에서 필적할 만한 서신을 남기지 못했다. 이 서신들을 통하여 칼빈은 개혁된 신앙의 심오한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그는 신실한 목회자로서 권면하기도 하고, 고통 받는 형제들에게는 위로를 주고, 친구들에게는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으며, 현명한 정치가로서 베른, 사보이, 프랑스와 제네바 사이에 복잡하게 얽혀 있는 어려운 정치적인 문제들을 해결하기도 한다.
그의 편지의 수신자들에는 당시의 거의 모든 개혁자들이 포함되어 있다. 멜란히톤, 부써, 불링거, 파렐, 비레, 슐처, 파브리, 크랜머, 체크, 녹스, 베자, 베르미리, 아 라스코, 미코니우스, 쉬트롬, 오트만, 드 팔레와 그의 부인, 노르망디 기타 등등.
그리고 각국의 군주들도 있어서 프랑스 국왕 앙리2세, 나바르의 마르게리트 여왕, 부르봉 왕과 그의 동생 꽁데 공, 페라라의 르네 공작부인, 폴란드의 지기스문트 아우구스투스 국왕, 팔츠의 오토 하인리히 선제후, 뷔르템베르크의 크리스토퍼 공작 등이 있다.
또한 정치인과 고위 관리들로 영국의 섭정 서머싯 공작, 폴란드의 라지비우우 공, 프랑스의 콜리니 제독과 당들로 그리고 취리히와 베른, 바젤, 장크트갈렌, 프랑크푸르트의 관리들 기타 등등이 있었다.
또한 칼빈은 다니엘, 뒤쉬맹, 루쎌, 로제, 리셔부르의 부친 등과 개인적인 서신을 주고받았을 뿐 아니라, 감옥에 갇힌 수많은 개혁신앙 고백자들과 순교자들에게 위로의 편지를 써 보냈는데 리용의 다섯 수감자들인 드 카니 부인, 그레이, 샹베리의 수감된 학생들 등이다. 당연히 전체 교회들 앞으로 보낸 서신들도 상당한 양을 차지하고 있다.
역사적 가치 높은 서신들
이처럼 칼빈의 편지 대상의 국적과 대상과 계층이 너무 다양해서 아예 당황스러울 정도이다. 칼빈의 도움을 요청하는 서신들이 프랑스에서 독일까지, 스위스에서 네덜란드까지, 이탈리아에서 스코틀랜드까지, 폴란드에서 영국에 이를 정도로 다양했으며 그럴지라도 칼빈은 시간을 내서 성실하게 답장을 써 보냈다.
이와 같은 칼빈의 서신 교류는 그의 보편성을 보여준다 하겠다. 그는 답신을 통하여 한 사람의 신실한 목사로서의 직무를 수행한 것이요, 그가 개혁교회에 물려준 중요한 다양한 신학적 원리들을 실제로 역사 현장에서 구현해 냈던 것이다.
한 가지 에피소드를 곁들인다면 칼빈이 그의 삼총사 동역자 중의 한 사람인 비레에게 편지를 보낸 일이 있었다. 그러자 한 학생이 서신 배달부로 자신을 시키지 않은 것을 질투하는 모습이 칼빈의 눈에 들어왔다.
그러자 칼빈은 조용히 앉아서 아무런 내용이 없지만 마치 아주 중요한 내용이 들어 있는 것처럼 반응을 보여달라고 요청하는 내용을 적어 그 학생을 시켜 편지를 전달한 일도 있었다. 이처럼 칼빈은 하찮게 여겨질 수 있는 사람 하나의 감정까지도 배려해 주는 아주 섬세한 사람이요, 곧 하나님의 신실한 목회자였다.
작은 부분까지도 배려하고 있어
칼빈은 편지 쓰는 것을 기쁨으로 여겼고, 그러한 작업을 통하여 교회를 실제로 섬기는 실천 목회자로서의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이제 우리 칼빈의 서신 속으로의 여행을 떠나보자.
2. 리옹 교회의 형제들에게(1542년 5월)
"성직을 행함에 앞서 충분히 검증되고 인정하는 과정 필요해"
개요: 카르멜파(the Carmelite) 출신 설교자를 반대하는 내용의 편지이다.
날짜: 불분명. 칼빈이 같은 주제와 관련하여 파렐에게 라틴어로 보낸 편지는 날짜가 밝혀져 있다(1542년 5월 10일). 이를 통해 이 백인 수사는 개신교의 직책을 거친 적이 있고 리옹에 속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칼빈은 리옹의 신실한 교인들에게 이 거짓 설교자를 경계시키기 위하여 편지를 보냈다. 리옹 교회는 프랑스 교회개혁의 영광스러운 현장의 하나로 1535년 파리에서 순교한 쟈코뱅파(an old Jacobin monk)의 한 수도승인 알렉산더 케머스(Alexander Camus)의 설교에 기원을 두고 있다.
리옹 교회의 초기 신자들은 상인들이었는데 주로 도시의 금속 세공인들이 주축이 되어 비밀리에 모임을 가졌다. 알렉산더 케머스가 일을 시작하고 이후 일반 신자 존 파브리(John Fabri, or Le Fevre)가 뒤를 이었는데 대규모의 핍박이 나타나기 전에 피터 포늘렛(Peter Fournelet)과 클라우드 모니어(Claude Monnier)와 같은 신실한 후계자들이 나타났다. [Hist. Eccl.], tom. 1. pages 55, 56.
칼빈은 이 편지에서 제네바에 체류한 카르멜파 출신 설교자와 면담한 내용과 그 결과 그를 복음의 사역자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들에 대해 조심스럽게 설명한다.
친애하는 형제들이여 …
그 설교자가 도착한 지 며칠 후, 우리는 그에게 이미 개인적으로도 말을 해놓았고 예의와 우정의 뜻을 표한 바가 있기 때문에, 그를 불러 함께 만나면서 그의 결심이 어떠한가를 물었습니다.
그가 자신은 하나님의 교회에 봉사하기 위해 왔다고 분명히 말했고, 따라서 우리는 그가 도착한 바로 첫 날에 설교를 부탁하지 않은 것에 대해 너무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리고 비슷한 맥락에서 앞으로 설교를 요청할 때까지 얼마간 더 기다려야 할 것이라면서 서두르지 못하는 여러 가지 상황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먼저, 충분히 인정된 사람이 아닌 경우 그 사람을 성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주께서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규정해 놓으셨기 때문에 이를 어기는 것은 합법적이 아닙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질서와 정책을 잘 유지하고자 한다면 그 법을 어겨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둘째, 우리가 아무런 조언도 받지 않고 서둘러 그를 받아들인다면, 다른 사람들도 같은 대우를 받고 싶어할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우리가 애초에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큰 혼란에 빠지게 될 것이라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셋째, 우리가 지금까지 사소한 일에 있어서는 주님의 명령을 어기고 우리의 양심에 따라 일을 처리해 온 적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할 자유가 우리에게는 없다는 것을 해명해주었습니다.
넷째, 그가 먼저 여러 사람의 조언을 들어보고 성숙하게 과정을 처리하는 것이 자신을 위해서도 더 좋을 것이라고 분명히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성직이라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지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볼 수 있고, 앞으로 자신이 해야 할 일들에 대해 굳게 마음을 다지면서 장차 민감하고 세밀한 사안에서 신도들의 감정을 상하지 않게 하도록(왜냐하면 아무리 교육을 적게 받고 예의를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어떤 문제에 있어서는 까다로울 수가 있으므로), 그가 스스로 잘 적응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형식과 절차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덧붙여 그를 오랫동안 기다리면서 지치게 만들려고 의도적으로 우리가 이렇게 하는 것은 아니라고도 분명히 말해 주었습니다. 반대로 그가 하나님께 봉사할 수 있도록 검증하고 승인하는 기간을 가능한 한 짧게 하기 위해서라고 하였습니다.
이상의 제안은 너무도 합리적인 것이라서 그가 잘 참작해 주리라는 것이 우리에게는 너무나 확실했습니다. 하지만 이 사람은 우리가 지금까지 제시한 여러 가지 근거 있는 설명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에 대한 대답으로써 확신을 달라고 요구하였습니다. 그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였습니다.
우선 그는 지금 자신을 위험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자신에게 경비와 마차를 제공해 줄 수 있는 친구들이 있기는 해도, 자신이 그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항상 있는 것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다음으로는 자신이 프랑스로 돌아갈 경우 자신이 이곳에 왔었다는 것이 공적으로 알려질 것이어서 매우 소란스러워질 것이므로 서두를수록 더 좋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그의 대답을 통하여 그가 교회에 대해서는 하나도 모를 뿐 아니라 성직에 대해서도 조금도 관심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었습니다 … 그가 우리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은 딱 세 가지 점이었습니다.
우선, 자기 자신에 대한 지나친 자만이었습니다. 둘째, 그는 급료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내가 생각하기에는 이 땅의 모든 것도 그를 만족시킬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마치 하늘에 계신 주님도 그의 자양물을 만족시켜 주시기에는 모자라 보였을 정도입니다. 셋째로 그는 너무나 무지하여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할 정도였습니다.
예배 시간에 우리는 사도 바울의 편지를 읽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서신은 여러 가지 신앙 원리들을 다양하고 아름답게 제시하고 있기 때문에 교회에서 설교하려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하는 부분입니다 … 그는 바울이 말한 바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그것이 의도적인 것도 아니고 악의에 의한 것도 아니라 단지 그가 무지했기 때문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세속적인 허영과 같은 다른 단점들을 그냥 덮어두고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 마지막으로 친애하는 형제들이여, 신실한 자들의 진정한 목자 되시는 주님께서 여러분들을 항상 안전하게 보호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3. 필립 멜란히톤 선생님께(1543년 2월 16일. 금요일)
"분열된 견해로 악마와도 같은 일들 일어나지 않기를"
개요: 멜란히톤을 향한 칼빈의 존경과 형제애 표현을 전달하고 있다. 칼빈은 자신의 책을 통하여 멜란히톤에게 경의를 표하고 있다. 제네바에서 수행하고 있는 자신의 수고에 대한 자세한 기술과 독일 및 이태리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이 편지는 칼빈이 멜란히톤에게 보낸 첫 번째 편지다. 라티스본 회의 이래로 우애로 뭉친 독일의 종교 개혁자들 무리에 합류한 멜란히톤은 존경과 존중받을 만한 본보기를 많이 보여주었다. 비록 칼빈과는 서로 다른 교리와 능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와의 교제를 한 번도 방해 받지 않고 잘 유지해 나갔다.
칼빈은 1543년에 멜란히톤에게 은총에 대한 교리에 반대하는 알버트 피기우스(Albert Pighius)에 반박하는 내용으로 출판한 책을 헌사했다. 그리고 칼빈은 몇 년 후에 멜란히톤의 [신학총론](Loci Communes)을 프랑스어로 번역했다. 이렇게 칼빈은 멜란히톤과의 관계에서 신실한 우정과 단결의 정신을 보여주었고 그러한 교제를 루터교와 개신교를 발전시키는데 적용하였다.
선생님께서는 얼마나 게을러터진 사람에게 편지를 맡기셨는가를 보고 계십니다. 편지 배달부가 제게 편지를 건네 준 데는 넉 달이 걸렸습니다. 게다가 선생님의 편지를 함부로 다루어 마구 구겨지고 훼손되어 있었습니다. 편지가 어렵사리 꽤 늦게 도착한 것이 불만이지만 그래도 결국은 전달 받았으니 의미가 있습니다. … 선생님께서는 이곳에서 제가 수많은 사건들이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상황 속에서 얼마나 고심하고 있는지 거의 믿겨지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제가 온갖 노력을 다 쏟아 부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알맞은 충분한 정도의 결실이 아직 보이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한 가지 주요 근심거리는 선생님을 비롯한 여러 동료들과 떨어져 지내게 되고 보니 지금까지 저에게 특별한 도움이 되어 왔던 심적 위로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데 대한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모두 자신의 판단에 따라 주님께 봉사하기에 좋아 보이는 그런 포도밭의 위치를 고를 수는 없는 것이겠지요. 우리는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 각자에게 정해주신 위치에 남아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
그런데 최근에 제가 발표한 작품에서 선생님의 존함을 부적절하게 언급한 것에 대해서는 선생님께 대한 저의 존경과 선생님의 관대하신 성품에 따라 너그럽게 보아주셨으면 합니다(멜란히톤은 1543년 2월에 서문을 썼다 … 그리고 5월 4일자 답장에서 멜란히톤은 칼빈에게 그의 훌륭한 글을 칭찬하면서 그가 자신의 저서를 헌사한 데 대해 감사를 표했다. "친절하게 대해 주어 고맙네. 그리고 이렇게 놀라운 자네의 저서에 내 이름을 넣음으로써 나에 대한 자네의 경애를 보여주다니 정말 고맙네. 이 이름은 모든 세상이 보게 될 것이네").
이곳에서 일어난 저희 자신에 대한 일에 대해서는 말씀드릴 사안이 없습니다. 이렇게 침묵하는 이유는 다른 뜻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한 번 말씀드리기 시작하면 너무나도 많은 일들을 늘어놓을 수밖에 없어서, 결국 이 편지를 끝맺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곳에서 묵묵히 최선을 다하여 노력하고 있습니다. … 게다가 프랑스에서의 고무적인 상황이 널리 이탈리아까지 퍼지고 있습니다. 다만 선생님이 계신 독일에서는 상황이 좋지 않다고 하니 그 점에 대해서는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슬프기보다는 약간 심각한 정도에서 걱정거리가 있는데, 전해들은 말에 따르면 투르크(Turk)가 또 더욱 큰 군사력으로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는 무조건 자기 마음대로 육지 전역을 행진하고자 하는데 누가 이에 맞서고자 하겠습니까? …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우리 쪽의 지도자들은 아직까지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들은 주님께 영광 돌리는 법조차 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엄격하게 훈련을 받았는데도 말입니다. 하지만 그나마 저에게 희망을 주는 소식도 있습니다.
콜로뉴(Cologne)의 주교와 그의 동료들이 그들의 교회를 완전하게 개혁하기 위한 작업에 착수하기로 진정으로 결심했다고 합니다. 물론 제가 보기에는 이 일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여태까지 주님께 영광을 돌린 신도가 아무도 없었던 이들 주교 무리가 이제는 손을 들고 로마의 우상이 가진 오점에 대해 공적으로 선언한다고 하니 우리로서는 조심스럽게, 그리고 부지런히 그들이 발전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분열된 견해로 인해 괴악스럽고 악마와도 같은 일들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도록 말입니다.
한편 로마의 대주교가 세상을 즐겁게 하고 자신들의 권력을 조금이라도 연장하기 위해 트렌트 공회라는 연극을 꾸몄다고 합니다(트렌트 공회는 개회 선언과 휴회를 계속하다가 결국 1545년 12월 13일 시작되었다). 올해까지는 상황에 커다란 변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제가 잘못 알고 있는 경우일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이미 너무나 많은 것을 말씀드린 것 같습니다. 그러니 여기서 이만 줄여야겠습니다.
아, 가장 훌륭하고 업적을 많이 남기셨으며 주님의 이름으로 영광을 받으실 분으로 저에게 영원히 기억될 선생님이시여! 선생님께서 별 탈 없이 주님의 이름을 높이고 교회를 이끄실 수 있도록 주님께서 보호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선생님의 다니엘서 주석을 왜 아직도 출판하지 않으시고 책꽂이에 꽂아 두고만 계신지 저는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저로서도 그 책을 열독할 때에 손을 떼기가 힘들 정도여서 잠자코 있기가 어려울진대 말입니다.
마틴 루터 박사님께 저의 이름으로 인사드려주실 수 있으신지요? 우리는 지금 시에나(Sienna)의 베르나르디오(Bernardino)와 함께 있는데, 그는 매우 저명하고 훌륭한 인물로 그가 떠날 때 이탈리아가 꽤 술렁였다고 합니다. 그가 선생님께 안부좀 전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
선생님의 존 칼빈 드림.
4. 불링거 목사님께(1544. 11. 25. )
"사람들 칭찬이 자신을 무너뜨리는 계기 될 수 있어"
내용: 프로방스의 발도파를 위해 취리히 영주에게 호소한 다음, 루터의 성격에 관해 예리하게 판단하면서, 그가 행해 나온 탁월한 봉사를 고려함으로써 그가 드러내 보인 일부 부족함을 용서하자는 호소.
(생략) 제가 듣기로는 루터 선생께서 마침내 격렬한 비판을 했다고 합니다. 사실 그것은 목사님측만을 향한 것이 아니라 우리들 전체를 향한 것이겠지요.*
지금의 시점에서는 침묵을 지키자는 부탁을 목사님께 감히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무고한 사람들이 그렇게 괴롭힘을 당하는 것은 정당하지 못할 뿐 아니라, 그들이 자신들을 깨끗하게 할 수 있는 기회조차 박탈당하는 것 역시 정당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한편, 그들이 그렇게 하는 것이 과연 신중한 것인지 아닌지는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하지만 이 문제에 있어서 저는 진정 목사님을 처음으로 머릿속에 떠올렸습니다. 목사님은 루터가 얼마나 저명하고 얼마나 뛰어난 재능을 갖추었으며, 정신력과 끈기가 얼마나 강한지, 얼마나 훌륭한 기술과 효율성 그리고 말씀에 관한 지식의 힘으로써 지금까지 적그리스도의 통치를 타도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헌신해 왔는지 충분히 고려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동시에 그가 저를 마귀(devil)라고 불렀다 할지라도 저는 그가 '주님의 뛰어난 종'이라고 선언하는 데 익숙해 있겠습니다.
하지만 루터 선생께서 아무리 보기 드물고 뛰어난 미덕을 갖추었다 하더라도 동시에 심각한 잘못(serious faults)을 범하였습니다. 그렇게 어느 방향으로 튈지 모르는 그러한 불안하고 침착하지 못한 기질을 조금만 궁리하여 개선시킬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또한 루터 선생께서 언제나 자신의 본성적 기질에서 나오는 열성을 진리를 대적하는 적군들에게나 보여줄 일이지, 우리 측의 사역자들에게는 그 같은 성질을 부리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하는 것이 저의 바람입니다. 그가 자신이 지닌 단점을 스스로 조심스럽게 관찰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참으로 아쉽기 짝이 없습니다.
루터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여러 가지 칭송들 때문에 더욱 잘못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그가 자기 자신에 대해 지나치게 관용하는 것은 자연스럽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에게 어떤 안 좋은 점이 있다 하더라도 그가 부여받은 놀라운 재능과 능력들에 대해서도 동시에 고려해주어야 하는 것은 우리의 몫일 것입니다.
따라서 목사님께서 루터 선생님을 생각하실 때 우선적으로 그분이 우리 동역자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주의 종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우리 모두 그에게 아주 큰 빚을 지고 있다는 점을 기억해 주시길 간청 드립니다. 그리고 목사님의 입장에서도 루터 선생님과 다투는 것은 좋지는 않을 것입니다.
정말이지, 단지 그들이 복음주의자들에게 했던 것처럼 그렇게 쉽게 이길 수는 없다는 것을 보여주어 약간의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는 것 외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우리가 서로 떨어져 각자 물고 뜯는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들은 우리가 말하는 것을 충분히 이용할 것입니다.
반면 우리가 합의를 이루어 한 목소리로 그리스도를 설교한다면, 그들은 분명 우리의 본래적인 나약함을 이용하여 우리의 신앙에 대해 비난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니 목사님께서는 루터가 그렇게 폭력적인 발언을 했던 것에 대해 집착하기보다는 이러한 점들을 미리 고려해 주셨으면 합니다. 사도 바울이 경고하는 것과 같이 서로가 서로를 헐뜯으며 먹고 먹히는 일이 목사님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말입니다.
그가 우리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일으켰다 할지라도 오히려 그러한 경쟁을 사절하는 것이, 범 교회적인 난파를 초래하여 상처를 더 크게 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입니다. 그만 이만 줄이겠습니다.
존 칼빈 드림
* [주의 만찬에 관한 짧은 고백](Short confession concerning the Supper; Kurzes Bekenntness vom Abentmahl)에서 루터는 자신의 성찬식에 대한 이론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향해 다시 욕설을 퍼부으면서 특별히 츠빙글리를 비난하였다. 그리고 오이콜람파디우스의 박식하고 경건한 학설에 대해서는 아예 관심조차 보내지 않았다(Hospinian, Hist. Sacramant. Tom3, pp. 326-331).
이러한 폭력에 화가 난 멜란히톤은 개신교를 분열시킨 무질서한 슬픈 장면을 없애려고 은퇴를 고려하기까지 하였다. 멜란히톤은 1544년 8월 24일에 부써에게 다음과 같이 썼다.
"언젠가 자네에게 쓴 편지에서 페리클레스(Pericles, 루터)에 대해 언급했던 것을 기억하겠는가! 그도 역시 주님의 만찬에 대해 가장 격렬하게 반응했던 사람이었어. 그래서 사납게 공격하는 말을 쏟아냈었지. 그러한 공격 때문에 자네와 나는 멍이 들었어. 나는 꽤나 온순한 새라네. 만일 우리를 방해하는 자가 나를 억제할 경우, 나는 기꺼이 이 육체의 감옥을 벗어나기를 갈망한다네"(Ph Melanchthonis Opera, edit, of Breischneider, tom5, p. 464).
5. 멜란히톤 선생님께(1545. 01. 21.)
"주님께서 그어 놓으신 선, 느슨하게 여길 수 없어"
내용: 루터에게 보내는 자신의 편지와 논문을 멜란히톤이 먼저 읽어 본 후 그 자신의 의견을 보내줄 뿐만 아니라, 기회를 보아 루터 박사에게도 의견을 물어봐달라는 부탁.
먼저 이 경건하고 고귀한 젊은이가 왜 저의 부탁에 따라 선생님을 찾아뵙게 되었는지부터 간략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복음을 접할 수 있는 특권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신성모독으로 가득한 가톨릭의 의식 절차를 아직도 행하고 있는 사람들이, 여전히 자신의 잘못을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고 있는 행동을 비판하는 프랑스어 논문을 발표하였습니다([복음의 진리를 아는 신실한 사람이 교황주의자들 틈에 있을 때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다루는 소논문]).
선생님께서는 분명 제가 그 문제에 대해 너무 엄격하게 접근하고 있다고 하실 테지요. (중략) 그러나 문제 자체가 저들에게는 혼란스럽기 때문에 선생님과 루터 박사님의 확신을 얻을 때까지는 그 점에 있어서 아직 의구심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실 그들은 선생님께서 저보다 관대하실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기 때문에 일부러 선생님께 조언을 구하고 있지는 않은지 걱정이 됩니다. 그 동기가 무엇이든 간에 선생님께서 진정으로 옳다고 생각하시는 방향으로 신실하고 온전한 조언을 주실 것이라고 저는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들이 요청하는 바에 따라 적절한 사람을 선생님께 보내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제가 결론 내리기로는 선생님께서 직접 저의 견해가 어떠한지 정확하게 아시고, 그렇게 생각하게 된 근거들에 대하여 모르시면 안 되기 때문에 특별히 라틴어로 번역한 저의 소고를 보내드립니다([니고데모파 제군들이 본인이 너무 심하게 엄격하다는 하소연에 대한 존 칼빈의 유감]).
이러한 일을 자처하는 것이 어떻게 보면 주제넘은 것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도 수고스럽겠지만 선생님께서 저의 동료의 입장에서 그 논문들을 검토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저는 선생님의 고견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고 있고, 또 그렇게 하는 것이 마땅하며, 따라서 선생님께서 허용하시지 않는 어떤 일에 착수한다는 것 자체가 꺼려집니다.
물론, 선생님께서는 매우 관대하시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여러 가지 행동에 대해 가급적 용인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주님께서 그어 놓으신 선에 있어서는 절대로 느슨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선생님께서 모든 사안에 있어서 저와 동조해 주시기만을 바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매우 주제넘은 일이겠지요.
혹은 저를 위해서 선생님 자신의 자유로운 판단을 유보하시는 것을 바라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수고스러우시더라도 저의 견해를 한 번 꼼꼼히 읽어봐 주시기를 부탁드리는 것입니다.
만일 선생님과 저의 견해가 완전히 일치하여 자그마한 토씨 하나라도 다른 부분이 없다면 그것이야말로 더 이상 바랄 여지가 없겠지요. 하지만 선생님께서는 저를 기쁘게 하는 것보다는 선생님의 올바른 판단을 계속 이끌어 나가는 것이 더 좋을 것입니다.
제가 선생님을 대할 때 얼마나 마음을 터놓는지는 선생님께서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마땅히 유지해야 할 존경의 선을 넘어서려는 뜻도 진정 없습니다. 저에 대한 선생님의 친절과 선의 안에서 제가 무엇을 할 수 있고 없는지는 선생님과 함께 지내면서 겪었던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존 칼빈 드림.
해설: 칼빈은 1543년에 [복음의 진리를 아는 신실한 사람이 교황주의자들 틈에 있을 때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다루는 소논문]을 써서 프랑스에서 교회 개혁 신앙에 접한 사람들이 겪고 있는 양심의 위기를 다루었다.
그러자 파리에서 앙뚜안 퓌메(Antoine Fum e)가 칼빈의 논문이 자신을 비롯하여 프랑스의 많은 니고데모파 사람들을 근심시켰던 기본적인 입장들이 얼마나 많은가를 지적하는 편지들을 보내왔다. 이들은 자신들이 경비를 부담할 터이니 과연 루터와 멜란히톤도 같은 생각인지 물어보자면서 칼빈에게 두 사람을 만나러 갔다 오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칼빈은 당시로서는 왕복 40일이나 걸리는 여행에 시간을 낼 여유가 없었다. 따라서 1545년 1월에 그는 대신 편지를 써 인편으로 보내면서 방금 저술한 [니고데모파 제군들이 본인이 너무 심하게 엄격하다는 하소연에 대한 존 칼빈의 유감]을 동봉하여 검토해 줄 것을 부탁했다.
여기에서 칼빈의 입장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더욱이 칼빈이 니고데모파를 비판하면서 날린 결정타는 그들이 자신들을 '니고데모파'라고 주장하는 명칭 자체를 아예 인정하지 않겠다고 한 점이다. 칼빈은 니고데모의 옷자락 아래 숨을 권리가 그들에게는 없다고 단언한다. 그들은 어느 모로 보아도 니고데모에 비할 바가 못 된다.
칼빈에 따르면 니고데모는 처음에 무지한 상태에서는 예수님을 밤에 찾아 갔으나 후에는 사도로서 예수님의 장례식장에서 자신의 믿음을 공개적으로 드러냈다. 즉 니고데모는 박해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프랑스의 니고데모파들은 니고데모의 진정한 추종자들이 아니었다.
칼빈은 이들을 비판하기를, "니고데모에게 호소하는 사람들은 한 가지 점에서는 그와 닮았는데, 그것은 그들이 그리스도를 장사 지내기 위해 애쓴다는 점이다"라고 했다.
칼빈은 1549년에 본서의 두 번째 판을 라틴어로 내면서 제목을 [거짓 니고데모파에게 주는 변호](Excusatio ad Pseudo-nicodemos)로 바꾸었는데 멜란히톤, 부써, 그리고 피터 마터의 승인을 받아 출판되었다.
6. 비레에게
"그리스도를 떠나 통치하려는 정치가들 많아"
이렇게 늦게야 답신을 보내는 나의 뻔뻔스러움을 좀 보게나! 여하튼 나는 편지 쓰기의 고민으로부터 안심할 수 있는 방법을 하나 고안하였다네. 그래서 앞서 루터 박사님과 멜란히톤 선생님께 보냈던 편지를 복사하여 자네에게 보내네. 그러면 자네는 내가 왜 클로드를 그분들께 보냈는지 알게 될 걸세.
자네의 편지가 도착하기 전에, 파렐 형님이 출판사 지라르에 보냈던 책을 텍스토가 크리스토퍼에게서 받아왔다네. 빨리 인쇄된 덕분이라네. 나는 아직 루이 베르나르와 말을 해 본 적은 없네. 그는 이미 내가 설교하는 예배에 두 번이나 빠졌어. 하지만 내일이나 모레라도 만나면 자네의 사과를 전하겠네.
자네가 올 때에 라 콩에 관하여 들을 수 있겠지. 내 생각에 나의 귀들은 현재를 향해 있고, 그들은 타인들의 험담을 억지로 들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고, 그리고 평소와 다름없이 나는 어둠 속에서 위선과 싸워야 하기 때문이지.
앙블라르 콘은 자신의 치리회 위원과 제네바 행정 부장직을 쉬게 해줄 것을 위원회에 요구 중이야. 왜냐하면 그는 지금까지 위원회의 비밀회의에서 숨겨왔던 서민들의 문제를 발견하였기 때문이지. 위원회는 나도 이 일을 알고 있지는 않은가 하여 의심하고 있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어떤 적대감은 보이지 않고 있어.
하지만 나는 그들이 얼마나 사악한지 알고 있고, 열 번의 설교를 통해서 이미 도시의 내부 상황의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네. 하지만 무엇 때문에 내가 이 미로로 들어가야 하는 것인가? 이번에는 직접 와서 귀로 들어서는 알 수 없는 것들을 자네가 눈으로 직접 보게나.
그리고 행정장관들이 정해졌네. 아미 퀴르텟, 아미 페렝, 도멘느 아를로, 쟈크 드 토르톤느, 루이 베르나르, 피터 베른, 그리고 나머지 두 명이 위원회에 들어가도록 섭외 중이라네. 우리는 그들에 대해 좋은 기대를 하고 있네. 하지만 그리스도 통치 아래 있으면서도 정작 이제는 그리스도 없이 통치하고 싶어 하니, 우리로서는 무엇을 기대해야 할지 잘 모르겠네. 그럼 이만 줄이겠네.
나의 친애하는 형제이자 친구여, 우리 동료들 모두 자네와 자네 식구들에게 안부 인사를 전한다네. 나를 대신해서 리비티와 엥베르에게도 인사해 주기 바라고, 엥베르의 아내가 페로에게 보내고 싶은 것이 있는지 자네가 확인해 주었으면 싶어. 왜냐하면 선한 친구 페로가 매우 열망적으로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야.
1545년 2월 12일 제네바에서, 존 칼빈
해설: 칼빈의 생애에서 1548년 9월 14일(금)에 칼빈이 트롤리에(Trolliet)와 함께 시의회의 소환에 출석하여 시의회에 사과하여야만 하는 특이한 일이 있었는데, 칼빈의 전기들마다 한결같이 소개하고 있는 독특한 사건이다.
사건의 발단은 이렇다. 칼빈이 1545년 2월 12일(목)자로 비레에게 썼던 오늘 이 편지를 페렝 가문의 한 사람이 훔쳐 편지에 기록된 내용을 문제 삼아 칼빈을 대항하는 무기로 활용하였다. 트롤리에는 이 편지를 아예 모든 시민이 알아볼 수 있게끔 프랑스어로 번역하여 여러 곳에 뿌리고 다녔다.
편지에는, 내용에도 잘 나타나 있듯이, 칼빈이 행정관들의 선출에 관해 언급하면서 사람들이 그리스도 없이 기독교를 가장하여 통치하려 한다는 투의 내용이 담겨 있었기 때문에 시의회의 분노를 샀던 것이다.
이것을 문제 삼아 한 때 칼빈을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의원들까지 있었으나 파렐과 비레가 9월 말과 10월 중순 이전에 시의회에 출석하여 개별적으로 의원들을 설득하면서 이해를 시키는 등으로 활약한 덕에 위기를 모면하였다.
엎치락뒤치락 하던 끝에 10월 18일(목)에 시의회는 두 사람에게 사이좋게 지내라고 훈계하면서 사건을 종결지었다.
7. 멜란히톤 선생님께
(내용) 루터의 횡포에 대해 불평하면서, 멜란히톤이 더 큰 결단력과 단호한 태도를 보여줄 것을 요청함.
" 우리는 후손들에게 적당한 본보기를 보여주어야 할 것 "
제가 선생님께 위안이 될 수 있어서, 마음의 짐을 함께 느끼는 동료애로써 적어도 어느 정도까지나 선생님의 슬픔을 덜어 드릴 힘이 될 수 있을지요? 취리히의 사람들이 걱정거리라고 말할 정도로 그 문제가 중요하다면, 그들이 시간을 내어 편지를 쓸 것입니다.
하지만 선생님의 페리클레스(루터)는 자신의 천둥 같은 사랑으로 모든 부담의 한계를 넘어서려 하시는 것 같습니다. 특히 자기 자신의 경우가 둘보다 더 어렵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입니다. 우리는 모두 그분께 어느 정도의 빚을 지고 있습니다. 저 역시 제 자신의 뜻을 거스려 굴복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 행복해 지기 위해서는 루터 박사께서 중대한 변화를 견디셔야 할 것입니다. 그분이 절도 있게 일을 잘 처리할 수 있다면 말입니다. 하지만 교회에서는 인간에게 지나친 존경을 표하지 않도록 항상 조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모든 것보다 위에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선생님을 아무리 기쁘게 하더라도, 교회는 모든 권위 위에 있습니다. 특히 자신이 얼마나 나아가도 되는지 그 한계에 대한 도덕관념이 없는 경우에는 더더욱 그러합니다.
이렇게 각기 다른 사람이 다른 주장을 하고 있고, 견해의 차이도 큰 상황에서는 문제가 되고 있는 물길을 틀어 냉정함을 회복하는 것은 정말로 쉽지 않은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해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온 정신을 집중한다면 일말의 치유책이 발견될 지도 모릅니다. 분명히 우리는 후손들에게 적당한 본보기를 보여주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입장에서는 한 사람을 조금 성가시게 하는 것보다는 아예 자유 전체를 던져 버리는 것을 오히려 더 선호하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선생님께서는 그의 성격이 다혈질이어서 그의 성급함을 제대로 다스릴 길이 없다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이러한 격렬함은 어떠한 강한 무력으로라도 다스릴 수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모두들 루터 박사께는 너무 관대한 것 같아, 박사께서 제 마음대로 하시는 것에 대해서 아무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습니다. 이제야 교회가 다시 살아나 봄을 맞이하려고 하는데 이와 같이 우쭐해 하는 독재자의 표본이 벌써부터 발견된다면, 앞으로 우리는 무엇을 기대해야 합니까?
아마도 얼마 지나지 않아 상황이 오히려 더 악화되지 않을런지요? 그러니 이제 교회에 닥친 재앙에 대해 슬퍼합시다. 그리고 우리의 슬픔을 침묵으로 삼켜버리지 말고 자유를 위해 신음하는 일에 과감하게 나서십시다. 게다가 주님께서 선생님으로 하여금 바로 이 논문에 더욱 충만한 신앙고백을 할 수 있도록 선생님을 이러한 협곡에 놓으신 것은 아닌지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제가 항상 동의하듯이 선생님께서 가르쳐 주신 것은 항상 진실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선생님께서는 항상 친절한 교육 방식으로 고난과 논쟁에 빠진 여러 사람들의 마음을 다시 부르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오셨습니다. 저는 선생님의 신중함과 절제에 대해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하지만 선생님은 지금 어떤 숨겨진 암초가 나타나 이 문제에 끼어들 수도 있고,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상하게 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너무 집착하신 나머지, 선생님으로부터 어떤 견고한 기초를 얻어 마음의 안정을 찾고자 하는 많은 사람들을 여전히 혼란과 긴장 속에 팽개쳐 두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전에도 제가 여러 번 상기시켜드렸듯이 우리가 많은 성인들이 피로써 맹세하기를 망설이지 않았던 교리에 대해 잉크로라도 서명하기를 거부했던 것은 매우 명예로운 일입니다. 그러니 이제 주님께서 선생님의 마음을 충분히 만족할 수 있도록 선언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고 계신 것입니다. 선생님의 권위를 존경하는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영원한 의심과 망설임을 벗어나 빠져 나올 수 있을 것입니다. 선생님께서도 이미 알고 계시듯이 이러한 사람들은 상당히 많습니다.
제가 선생님의 행동의 자유를 자극할 목적이나 마음의 위안을 드리기 위해 이러한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진실로 이러한 안타까운 붕괴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일말의 희망이라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저는 깊은 절망에서 완전히 지쳐 버릴 것입니다. 어찌되었든 우리는 일이 평화롭게 잘 마무리 되도록 인내로 기다리십시다.
이는 주님이 허락하시도록 기쁘게 할 것입니다. 선생님께서 답장을 주신 것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클로드(Claude)에게 보여주신 친절에 대해서도 정말 감사드립니다. 그 친구가 장담을 하면서 그쪽 사람들의 호의를 제게 전해주었습니다. 제 친구에게 그토록 깊은 예의를 갖추어 친절을 베풀어 주신 것을 보건대 정말로 선생님께서 저를 얼마나 소중히 여겨주시는가를 헤아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저는 주님께 감사를 돌리고 싶습니다.
선생님과 제가 함께 검토해 본 문제들에 관해 상호 아무런 견해 차이 없이 동의할 수 있었던 데 대해서 말입니다. 물론 특정 세부 사항에 있어서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전반적인 관점에 있어서는 동의를 했기 때문입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1545년 6월 28일 존 칼빈
해설: 루터가 주의 만찬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짧게 고백하는 자리에서, 취리히 교회 목사들의 교리에 반대하는 말을 함으로써 새롭게 시작된 루터의 공격에 충격을 받은 취리히의 목사들은 1545년에 반박서를 출판하였다. 하지만 루터의 공격적인 자세에 감정이 상해 취한 취리히 목사들의 이러한 대응은 열성적인 루터 교파들의 심기를 건드렸고 멜란히톤까지도 감정을 상하고 말았다. 이러한 때에 칼빈이 멜란히톤에게 편지를 보내어 루터와 취리히 사람들 간의 갈등에 대해 안타까워한다. 이 문제에 대해 취리히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반박할 이유는 있다는 입장을 밝힌다. 칼빈은 루터의 태도가 불만이어서 좋은 말을 해줄 수가 없었다. 칼빈이 보기에 벼락같은 소리나 지르고 있는 루터를 진정시키려고 애쓰는 사람이란 아무도 없었다. 그는 멜란히톤이 자신의 입장을 명확하게 밝혀주었으면 좋겠다고 부탁한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멜란히톤의 우유부단한 생각에 대해 의문을 품으면서 아쉬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8. 파렐 형제님께
“어느 시대나 군주에게 아양 떨려는 비굴한 자들 있어”
내용 _ 파렐의 형제 고티에(Gautier)가 투옥된 데 대한 안타까움과 제네바에 창궐한 역병과 관련한 소식.
형님께서도 이미 그 슬픈 소식을 들으셨겠지요. 이 편지를 전하는 사람이 형님의 형님 고티에께서 붙잡혀 족쇄를 차고 있으면서 아주 급박한 생명의 위기에 처해 계신다는 것을 전해드릴 테니 말입니다.
제가 항상 예견하면서 두려워했던 일이 그만 실제로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저로서는 이렇게 불길한 일을 예견하고 있었다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불평을 해 보았자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큰 형님을 돕는 문제에 있어서 저로서는 베른 사람들의 힘이 과연 얼마만큼이나 미칠지에 대해서는 확신이 서지 않습니다. 게다가 현재의 시점에서 그들이 과연 이 어려운 일에 발 벗고 나서줄는지에 대해서도 자신이 없습니다. 이 모든 상황들에 대해서는 저보다야 형님께서 더 잘 아실 것입니다.
장 슈트름(Jean Sturm)을 통하지 않는 한, 독일로부터 시기적절한 어떤 도움을 받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입니다. 하지만 슈트름이 아무리 이 대의를 위하여 노력한다고 해도, 상황이 그렇듯이 큰 형님과는 사이가 안 좋지 않습니까.
형님께서 시간이 있는 동안 잘 생각하셔서 뛰어난 친구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잘 생각해 보실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게다가 이 기회에 군주에게 아양을 떨려는 비굴한 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형님도 모르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여하튼 그 지역에서 무언가 시도해 보는 것이 필요할 것이고 생각하신다면, 형님께서 슈트름에게 직접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가장 효과 있을 것입니다. 더욱이 형님 곁에는 지금까지 그 어떠한 것도 함부로 거절한 적이 없는 부써(Martin Bucer) 선생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하지만 부써께 다녀오시라고 하기에는 길이 너무 먼 듯합니다. 그러니 부써께 부탁하셔서, 해결책이 너무 늦지 않도록 인편으로라도 베른 사람들을 독력하시라고 부탁하십시오.
그건 그렇고 형님과 관련한 소식이 아무 것도 없었기에 우리는 매우 놀랐습니다. 비레는 형제들이 모두 결정을 다 내렸다는 것을 저에게 알려왔는데, 그의 편지를 종합해본 최대한의 정보에 의하면, 의회에서는 아직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이 문제가 얼마나 오랫동안 불투명한 상태에 놓여 있겠습니까? 형님도 아시듯이 이곳의 우리들 역시 아주 힘든 문제에 봉착해 있지만, 형님은 우리와 너무 멀리 떨어져 계십니다.
마테우스(Matthaeus)는 병원에서 역병 환자들을 위해 열심히 땀 흘리고 있습니다. 형님을 부르고 있는 동안 우리의 가장 뛰어난 형제이자 신실한 동료인 제니스톤(Geniston)을 잃었습니다. 이제 다른 이들도 이렇게 역병으로 계속 우리를 떠난다면 어째야 좋습니까? 만약 단 한 명만이 살아난다면요? 그것이 바로 제가 된다면요? 목사들이 이곳 마을 사람들의 말도 안 되는 미신에 휩쓸려 스스로 폐쇄적으로 변한다면 또 어떻겠고요?
최근에 많은 목사들이 다소간 제한적인 생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니 형님께서 우리를 돕는 것을 더 이상 미루시지 않도록, 우리가 겪고 있는 어려움들에 대해서 좀 더 심각하게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비레가 언급하고 있는 것은 바로 형님쪽 형제들이 형님께서 우리가 투쌩(Toussain)의 계승을 가져올 수 있다는 조건 하에서 우리에게 동의했다는 말을 덧붙였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너무 우스운 일입니다. 우리가 그 문제에 있어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혹은 과연 어떤 방법으로 그 일을 시도할 수 있겠습니까?
요약하자면, 우리는 절대로 어떤 특정한 시간을 정하지 않을 것이고, 형님께서 최대한 부지런히 움직여 뇌샤텔을 떠나시기만을 바랍니다. 형님께서 즉시 족쇄에서 풀려나 우리에게 오시도록 말입니다. 우리는 지금 파렐 형님께서 이곳에 오시기만을 간절하게 바라고 있습니다. 우리의 상황을 보아서도 형님께서 충분히 아실 것입니다. 제니스톤의 아내는 거의 죽을 만큼 힘들어 하고 있습니다. 그의 어린 딸도 지쳐만 가고, 아들은 다른 사람에게 맡겼습니다. (편지의 나머지 부분 소실됨)
1545년 9월 칼빈 드림
해설 _ 이 편지는 날짜를 알 수 없고 결미 부분 역시 생략되어 있다. 아마 유럽을 휩쓴 흑사병 창궐 시기, 즉 1545년 9월에 쓰인 것으로 추정된다. 고티에 파렐(Gautier Farel)은 개혁자 파렐의 형으로 복음 때문에 투옥되었지만, 예상 외로 곧 자유의 몸이 되었다.
목사 루이 드 제니스톤(Louis de Geniston)은 앞서 역병으로 삶을 마감한 피에르 블랑셰(Pierre Blanchet)의 고귀한 본을 따라 자발적으로 병원으로 달려가 역병에 걸린 사람들을 위해 봉사했지만, 헌신적으로 일하던 중에 1545년에 역병에 걸리게 되었고, 이로 인해 아내와 두 자녀들과 떨어져 지내야 했고, 결국에는 사망하고 말았다. 당시의 역병은 너무도 심각하여 몇몇 도시는 인구가 급격하게 감소할 정도였다.
칼빈은 당시 어려움에 처해 있던 파렐에게 제네바로의 망명을 간청했지만, 파렐은 아랑곳하지 않고 이후로도 20년 넘게 뇌샤텔 교회를 지키면서 꿋꿋하게 활동하였다.
9. 쟝 프렐롱 경께(1546. 02. 13)
“무엇에 앞서 먼저 부끄러워할 줄 아는 마음 있어야”
내용: 세르베투스에게 편지를 보내 그의 잘못된 사상을 고쳐달라는 부탁을 정중하게 거절하는 내용
영주님께
제가 떠나는 순간에 받은 영주님의 최근 편지에 대해서 미처 시간이 없어 답장이 늦었습니다. 돌아와서 여유가 생기자마자 영주님께서 (세르베투스에게 글을 써 달라고) 바라시는 대로 편지를 쓰려고 노력했습니다.
그것은 최근의 특정인 한 사람을 유익하게 하고자 했던 것은 아닙니다. 단지 한 번이라도 더 그를 다시 돌이킬 수 있는 방법이 있나 시도해 보기 위해서입니다. 혹시라도 주님께서 그를 위해 역사해 주신다면 큰 성과가 나타나 그가 아예 다른 사람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제게 보낸 편지는 매우 교만한 어투였으므로 저는 의도적으로 더 호되게 꾸지람하여 그의 자만을 조금이라도 줄여보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먼저 배워야 할 것은 다름 무엇에 앞서 부끄러워할 줄 아는 마음임이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이 겸손이라는 것은 주님의 성령으로부터 그에게 전달되는 길 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도 우리가 지켜야 할 도리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와 우리에게 은혜를 허락하시면 현재의 대답이 그에게 유익이 될 것이고, 그러면 저는 기쁠 것입니다. 하지만 만약 그가 여전히 지금과 같은 행동 방식을 고수한다면 귀하께서 저에게 그를 어떻게든지 설득해달라고 간청하셔도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이 일 외에도 다른 해야 할 일이 너무도 많기 때문입니다.
저는 제 자신이 공연히 더 바빠지지 않도록 깊이 주의할 것입니다. 그것은 분명 더 쓸모 있는 여러 가지 독서로부터 나를 멀어지게 하고 정신을 흩뜨리기 위한 사탄의 유혹인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되기에 말입니다.
그러니 다른 더 좋은 방책이 당장 떠오르지 않으신다면 이 문제에 관해서는 제가 지금까지 들인 노력만으로도 영주님께서 만족해 주셨으면 합니다. 주님께서 항상 영주님을 그의 품 안에 보호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귀하의 종이자 진실한 친구,
샤를 데스페빌(Charles d'Espeville).
해설: 비엔느(Vienne) 대주교 고문헌 원본에 이 편지의 주소가 나와 있다. 이 고문헌은 아르티니의 대수도원장인 쟝 프렐롱(Jehan Frellon) 경이 처음으로 출판하였다. 쟝 프렐롱은 리옹의 자유 상인이자 레쒸 드 콜롱뉴(l'Eseu de Coulongne)의 교육자였다.
편지에서 언급된 이 신비스러운 인물은 바로 미카엘 세르베투스(Micheal Servetus)이다. 그는 7년 후에 열린 재판에서 치명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세르베투스는 도피니(Dauphiny)의 비엔느(Vienne)에서 외과의사로 있으면서 존 프렐롱(John Frellon)이라는 가명으로 칼빈과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는 기독교 회복(Christianismi restitution)이라는 제목으로 집필 중이던 자신의 작품 일부를 발췌하여 칼빈에게 보내주었다. 그러면서 제네바를 방문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바로 이것이 칼빈이 파렐에게 편지를 쓸 때 자주 인용되던 문단이 나오게 되는 배경이다.
“세르베투스가 최근에 저에게 편지를 보내왔는데, 자신의 정신착란적인 환상으로 가득 찬 두꺼운 책도 함께 동봉하였습니다. 그는 제가 괜찮다면 이쪽으로 오고 싶다고 했지만, 저는 그의 안전을 보장하지 못하겠습니다. 만약 그가 왔을 때 나의 권위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나는 그가 살아서 돌아가도록 허락하지 않을 것입니다”(1546년 2월 13일의 같은 날자 편지에서 인용).
이후로 7년 뒤에 얼마나 끔찍한 위험이 발생했는지! 세르베투스는 삼위일체를 비난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머리가 셋 달린 괴물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먼저 로마 카롤릭 측으로부터 이단으로 정죄되어 사형 선고를 받고 집행 대기 중에 탈출하였다가, 마치 불나방이 불꽃으로 달려드는 것처럼, 운명적인 매력에 이끌려 제네바를 방문하였다.
그는 1553년 8월 13일 일요일에 취리히로 가는 배 골든 로즈호의 예약 승객이었지만 이 날 마들렝 교회당에서 칼빈의 설교를 듣던 중 사람들에게 들켜 체포되었다.
10. 비레에게 _ 1547년 7월 2일
내용 _ 이 편지는 아미 페렝의 부인이 컨시스토리에서 심문받은 내용과 그루에 사건, 그리고 독일의 부써에게서 온 소식을 담고 있다.
우리는 이제 본격적으로 싸워야만 한다네. 희극 배우 가이사(Caesar)의 부인이*1 보인 거만한 행동 때문에 다시 치리회에 소환되었어.
처음부터 누가 화나게 한 것도 아니고 심한 말을 들은 것도 아닌데, 그녀는 자신이 들은 말보다 더욱 심한 독설은 쏟아냈지. 우선, 그녀는 법정으로부터 조사를 받는 것을 거부하면서, 자신의 죄가 그렇게 심각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네. 다음으로, 그녀는 타락하여 죄를 지은 자들만이 서는 것이 마땅한 자리에 자신이 억지로 나타나야 했기에 불명예스러운 낙인이 찍혔다면서 투덜댔지.
한 재판관이 그녀의 난폭한 행동을 자제시키려고 하자, 그녀는 이내 독설을 그에게 날렸어. 그 순간 아벨(Abel)이 개입하여, 그녀가 처음에는 상당히 온건한 태도를 보이면서 말하고 싶지 않아서 자세한 이야기를 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이제 보니 욕설에서라면 그녀를 따를 자가 없다면서 자신의 놀라움을 표현하였다네.
그러자 이 말에 다시 그녀의 분노는 끓어 넘치면서 또 쏟아냈지. “아니, 사실 그렇지 않아. 당신은 나의 아버지를 경솔하게 깎아 내린 욕설가야. 꺼져버려. 이 사기꾼아. 사악한 거짓말쟁이야!”
강제적으로라도 저지했기에 다행이었지만, 그녀의 천둥과 같은 목소리에 우리는 모두 깜짝 놀랐다네. 장로회는 그녀가 더 빨리 투옥되기를 희망하였지. 하지만 그녀는 지금까지 자신의 나쁜 모든 행실을 보호해주던 후원자인 사감의 도움으로 탈출하였다네. 그녀의 아들 한 명이 그녀의 도망에 동행하였어.
그런데 도시의 대문에서 별로 멀지 않은 곳에서 우연히 아벨과 맞닥Em리자, 또 다시 욕설을 퍼부으면서 전보다 더 부끄럽게 행동했다네. 아벨이야 치리회 때와 마찬가지로 아무 말 없이 최대한의 온건한 자세로 반응했지.
그 다음날 조용히 있지 않으면 우리를 죽이겠다는 협박장이 설교단에서 발견되었네.*2 여기 사본을 동봉하네. 이런 대담무쌍한 행위에 깜짝 놀란 치리회는 이 음모를 엄중히 조사하라고 명령 내렸어. 그래서 몇 명이 조사를 받았네.
많은 사람이 그루에(Gruet)를*3 의심하면서 즉시 체포했지만, 필체가 달랐어. 하지만 그의 문서들을 조사해보는 과정에서 중요한 사실들이 많이 발견되었네. 거기에는 의회에 제출하려고 계획한 간절한 탄원서도 있었지. 그는 거기서 국가를 해롭게 하는 것 외의 기타 것들은 법이 처벌할 수 없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네.
그는 행정에 있어서 가장 높은 권위를 가지고 있는 베네치아에서도 그러한 정책이 실시된다고 하였어. 그러면서 이 도시는 우울기가 있는 한 사람의 머리로 통치 받기에 천 명도 넘는 시민들이 어떤 사건에 노출되어 파괴될지 모르는 위험에 놓여 있다고 했지.
주로 앙드레 필립(Andre Philippe)에게 보내진 편지들도 발견되었어. 몇몇 편지에서 그는 내 이름을 언급하기도 했더군. 또 어떤 때는 내 설교 일부를 포함시키기도 했지만, 누구라도 그가 무엇을 숨기고자 했는지 단번에 지적해 낼 수 있을 정도로 너무 서투르게 조작되었더군.
게다가 라틴어로 쓴 두 장의 편지가 있었는데, 전반적으로 성경을 비웃는 내용이었고, 그리스도를 저주하며, 영혼의 불멸을 꿈과 우화일 뿐이라고 하여, 결국은 기독교를 아예 갈기갈기 찢어 놓는 것이었네.
나는 그러한 내용을 그가 직접 지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필체는 그의 것이었으므로, 아마도 그는 자신을 변호할 준비를 해야 할 것이야. 자신은 생각 없이 그냥 단순하게 기록한 것이라고 하지만, 그의 재능을 보건대 그가 다른 이들로부터 주워들은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 문장이 얽혀있고 어법에도 맞지 않으며 야만적인 표현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야.
데 갈라(Des Gallars) 부인의 자매 자코바(Jacoba)가 체포되었는지의 여부는 잘 모르겠네. 사실 같은 목적으로 그를 체포하라는 치리회의 명령이 있었다네.
방델(Vandel)에*4 대한 판결은 아직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여전히 상당한 위험에 있네.
이상이 지금 내가 편지를 쓰고 있는 이곳이 상황이야. 우리 행정관들의 판단력이 매우 부족하다는 것을 자네도 잘 알겠지. 그러니 치리회가 이 문제를 잘 처리할 것이라고 보네. (이하 지면상 독일에서 들려온 약간의 소식에 대한 내용은 생략함.)
그럼 이만 줄이겠네. 우리 부부가 자네 부부에게 주님 안에서 문안드리네.
존 칼빈.
해설
*1. 이 편지에서 칼빈은 줄곧 자신을 대적했던 아미 페렝(Amy Perrin)를 희극 배우 가이사라고 부르면서 그의 부인이 치리회에서 벌인 행패에 대해 털어 놓았다. 그녀는 치리회의 심문 과정에서 줄곧 아벨 목사에게 욕을 쏟아부었다(Registers of Council, 24th June).
*2. 1547년 6월 27일에 발견된 당시 사보이 언어로 쓰인 협박문의 내용은 이렇다.
“배뚱뚱아(big pot-belly), 너와 네 친구들은 주둥이 닥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만일 네가 우리를 계속 더 몰아친다면, 수도원에서 도망치던 날을 저주하는 신세가 될 줄로 알라. 우리는 이미 너희를 반대하는 많은 사람들을 포섭해 놓았다. 도대체 너희 배교한 목사들은 무엇 때문에 이곳에 와서 우리를 망치려드느냐? 이제 많은 사람들이 복수할 준비를 다 갖추었다. 너는 프라이부르크(Fribourg)의 베를리(Wernly)처럼 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을 명심하라. 우리는 너희들과 같은 선생을 원치 않는다. 우리의 경고를 잊지 말라.”
마지막 문단은 죽이겠다는 위협과 마찬가지의 내용이다. 왜냐하면 베드로 성당의 참사회원인 Peter Wernly는 1533년 5월 4일, 프로테스탄트와의 싸움 중에 목숨을 구하기 위하여 도망쳤지만 결국에는 죽임을 당했기 때문이다.
*3. 이전에 로마가톨릭에 있었던 쟈크 그루에(Jacque Gruet)는 방탕하고 음탕하며 변태적인 교리를 만들어 내었고, 계속해서 목사들과 충돌하였으며 교회뿐 아니라 국가의 규칙들도 견디지 못하였다. 그는 1535년 비레를 독살하기 위한 음모를 선동한 죄로 고소를 당했었다(Histoire de la Suisse, volume 11, p. 364). 그루에는 3주 동안의 심문 절차를 거쳐 7월 26일에 사형에 처해졌다.
*4. 피에르 방델(Pierre Vandel)은 하나님이 버리신 제네바 출신의 주요한 인물이다. 용모가 수려하고 영특했던 그는 시종들과 궁중의 신하들에 둘러싸여 손가락에는 반지를 끼고 가슴에는 금 목걸이를 두르고 자신을 뽐내는 것을 좋아하였다. 그는 타락한 행위와 재판정에서 보인 거만한 태도로 때문에 감옥에 갇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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