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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신학자

칼빈의 연대표

작성자
쥬니어칼빈
작성일
2021-02-04 18:47
조회
1926
칼빈의 연대표
1509. 7. 10 - 1564. 5. 28

칼빈 출생 이전의 신학자들

• 1466. 10. 28.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 d. 1536)
• 1482. 요한 오이콜람파디우스(John Oecolampadius, d. 1531)
• 1483. 11. 10. 마틴 루터(Martin Luther, d. 1546)
• 1484. 1.1. 율리흐 쯔빙글리(Ulich Zwingli, d. 1531)
• 1489. 기욤 파렐(Guillaume Farel, d. 1565)
• 1491. 11. 11. 마틴 부써(Martin Bucer, d. 1551)
• 1497. 2. 16. 필립 멜랑히톤(Philip Melanchthon, d. 1557)
• 1504. 7. 4. 하인리히 불링거(Henry Bullinger, d. 1575)

1509년: 출생(7월 10일)
존 칼빈(John Calvin)은 프랑스 피카디(Picardy) 지방의 오래된 도시 노용(Noyon) ‐ 파리 북동쪽 70마일 지점 ‐ 에서 제랄드 코뱅(Gerhard Chauvin)과 잔느 르프랑(Jeanne Lefranc)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본래 노동자 였으나, 부지런함과 조직력을 인정받아 노용 관구의 여러 가지 업무를 보다가 최 종적으로 교회의 재정을 관리하는 일을 하였다.칼빈은 아버지 덕분에 그 지방 출신의 상류계급의 자녀들과 접촉할 기회를 가 졌으며 그들과 친분 관계를 갖게 되었다. 칼빈은 노용에서 형 샤를(Charles) 그리고 동생 앙투앙(Antoine)와 함께 초등학교인 까뻬뜨 학교(School of the Capettes)를 다녔다. 그는 타고난 지성과 판단력으로 학우들 사이에서 뛰어난 인물로 인정을 받았다. 칼빈은 안색이 좋지 않았으며 몸이 허약하고 신경질적이었으며 수줍어하는 편이었다. 게다가 화를 잘 내는 성격이었다. 그러나 사리를 판단하는 데에는 정확했 고, 그의 지적 능력은 아주 뛰어났으므로 아버지의 깊은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 의 아버지는 칼빈에게 좋은 교육의 기회를 주는 것이 가장 좋은 투자라고 생각했 다. 그래서 그는 칼빈을 파리에 있는 대학으로 보내게 되었다.

당시 전개된 일련의 종교적 상황은 다음과 같다.
• 1513년: 레오 10세(Leo X)의 로마 카톨릭 교황 즉위.
. 1514년: 존 낙스(John Knox)의 출생(스코틀랜드 동쪽 해안에 위치한 하딩톤)
• 1516년: 에라스무스가 루터 번역의 대본이 되는 ‘그리스어 성경’ 발행.
• 1517년: 마틴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비덴베르그 성곽 성당 문에 게시.
• 1519년: 6월 24일 테오도르 베자(Theodore Beza)의 출생.

1521년: 보조 성직에 임명됨(5월 19일)
칼빈은 12세 때부터 부친의 노력 덕택으로 노용 성당에서 한 보조 성직에 임직 되었고, 따라서 당시의 관습에 따라 머리를 삭발하고 성직록(benefices)을 받기 시작한다.(칼빈은 1527년에는 또 다른 성직록을 받았는데, 이는 당시 그가 마테비레 지방의 구역 성직에 임명되었기 때문이다.)

1523년: 파리의 마르슈 대학과 몽떼귀 대학
• 8월: 고향에서 까뻬뜨 학교를 마치던 14세 때, 칼빈은 파리로 가서 대장장이 로 일하던 삼촌 리챠드 칼빈(Richard Calvin)의 집에 머물면서 얼마 동안 가정교사 로부터 학습을 받은 후, 라 마르슈 대학(College of La Marche)에 등록했고, 마뛰랭 꼬르디에(Mathurin Cordier, 1479‐1564) 교수에게서 라틴어를 배운다. (파리에서 칼 빈은 자신의 이름을 ‘Calvin’으로 바꾸었다.)
• 11월: 몽떼귀 대학(College of Montaigu)으로 옮긴다. 당시 몽떼귀 대학은 학 생들에게 대단히 금욕적이고 엄격한 훈련을 요구하였다. 하루 일과는 아침 4시에 시작되었으며 수업은 아침 5시부터 오후 5시까지 계속되었다. 여기에서 그는 금욕 주의적인 삶과 장시간 공부하는 습관을 익혔다. 칼빈은 라틴어 학습에 더 주력하 고 동시에 수학과 스콜라 철학 학습 및 성경 학습에 치중하여 많은 발전을 이루었 다. 이즈음 경건주의와 엄격한 이론가로 알려져 있는 기욤 콥(Guillaume Cop) 교 수와 그의 아들들인 니콜라스(Nicolas) 형제들과 친교를 갖게 된다. (니콜라스 콥은 1533년 총장 연설 사건의 주인공이다.)
(11월 19일 로마에서 클레멘스 7세가 로마 카톨릭의219대 교황으로 즉위했다.)

1527년: 마테비레 지방의 구역 사제로 임명됨
칼빈은 18세의 나이로 마테비레 지방의 구역 사제로 임명되었다. 2년 후에 폰트 엘 에비끄의 사제직과 바꾸게 된다. 그는 1534년까지 이 직무를 포기하지 않는다.몽떼귀 대학에서 학업을 쌓을 당시 칼빈은 가까운 친척인 피에르 로베르(Pierre Robert)로부터 순수한 신앙에 대한 많은 영향을 받게 된다. 피에르 로베르는 올리 베탕(Olivetan)이라는 별명을 가진 사람으로, 1528년에 스트라스부르그에서 부써와 함께 그리스어와 히브리어를 공부하였고, 뇌샤텔에서 파렐과 함께 사역하면서1535년에 성경을 프랑스어로 번역하였다. 칼빈보다 몇 해 앞서서 개신교를 받아들 였고, 또한 칼빈의 친척이었으므로 칼빈에게 순수한 신앙의 본질에 대해서 많은 영향을 끼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칼빈의 후계자 베자는, 이 당시 칼빈의 상 태가 이러했기 때문에, 이후 아버지가 신학을 그만두고 법률 공부로 학업을 변경 하도록 요청했을 때 쉽게 동의할 수 있었다고 한다.)

1528년: 몽떼귀 대학에서 오를레앙 대학으로
• 4월 30일: 칼빈은 문학사 학위를 취득한다. 이즈음 뜻하지 않은 일에 연루된 부친이 어려움을 겪게 되고, 이 일을 계기로 칼빈의 부친은 아들이 사제가 아닌 법률가가 되기를 원한다. 따라서 칼빈은 법학을 공부하기 위하여 오를레앙(Orleans)으로 가서 오를레앙 대학에 입학한다. (칼빈이 몽떼귀 대학을 떠난 직후 예수회 창설자로 유명한 로욜라의 이그나티우스가 2월에 이곳 에 입학하였다.)
칼빈은 이곳에서, 당시 유명한 이탈리아의 로마 법학자 안드레아 알치아티(Andrea Alciati)와 견줄 정도로 뛰어난 프랑스 법학자였던, 피에르 레스뜨왈르(Pierre de I’Estoile)에게서 배운다.

1529년: 부르제 대학
(2월 28일: 영국에서는 패트릭 해밀톤이 스코틀랜 드의 종교적 수도인 성 앤드류 성당에 소환된다. 이때 그는 추기경 비톤의 인민재판 계략에 걸려 다음날인 29일 전격적으로 화형을 당 한다. 이 광경을 보고 위샤트가 영향을 받아 훗날 제네바로 가서 칼빈 밑에서 배운다.)
• 6월: 칼빈은 당시 이탈리아의 법학자 안드레아 알치아티가 부르제 대학(University of Bourges)으로 오게 된 것을 계기로, 그에게 배우기 위하여 학교를 옮 긴다. 알치아티에게서 배우면서 칼빈의 라틴어는 완숙해진다.또한 칼빈은 독일인으로서 건실한 루터파 교인이었던 멜키오르 볼마르(Melchior Wolmar, d. 1561) 밑에서 헬라어의 기초를 터득하게 된다. 볼마르는 후에 나바르 여왕(the Queen of Navarre)이 된 베리 여공작(Duchess of Berry)에게 고용 된 희랍어 선생이었다. 칼빈은 훗날 볼마르를 추억하면서, “그는 내가 어렸을 때에 나에게 성실한 가정교사이며 선도자였기 때문에 나는 그에 대한 특별한 기억을 가 지고 있다. 그것이야말로 내가 일생 동안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일이다”라고 했다.또한 칼빈은 ‘고린도후서 주석’을 볼마르에게 헌정하였고, 헌정사에서 그를 자신의‘주인’이라고 묘사함으로 사례를 표하였다.이 시기에 칼빈은 베리 지방(Berry region)에 있는 리그니에(Lignieres)라는 작은 마을에서 자주 설교를 하였는데 특별히 영주로부터 선대받았다.

1531년: 파리 왕립 대학
• 5월 26일: 아버지의 병환 소식을 듣고 부르제를 떠나 리용으로 가서 부친의 임종을 지켜본다. (그런데 베자에 의하면, 칼빈은 이미 아버지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어 급히 리용으로 갔다고 한다.) 칼빈의 나이 22세 때의 일이다.칼빈은 아버지가 받은 부당한 출교에 대한 교회의 사면을 받기 위하여 형 샤를 을 도와 2년 이상 참사회와 다투게 되는데, 도중에 샤를마저 출교를 당하게 된다.결국 이 사건은 칼빈으로 하여금 로마 카톨릭과의 교제를 단절하는 데 있어서 중 요한 계기가 된다. (샤를은 1518년에 대성당의 지도 신부가 되었고 동시에 루피의 교구 신부가 되었지만, 1531년에 이단 혐의를 받고 파문당하였다. 그는 임종시에 성찬을 거부하였고, 1537년 10월 1일 세상을 떠났는데, 밤중에 교수대의 네 기둥 사이에서 처형되었다.)칼빈은 앞서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신학에서 법학으로 그의 학문의 길을 바꾸 었으나 이제부터는 자유로이 자신의 앞날을 결정할 수 있게 되었다. 칼빈은 자기 가 원하던 고전을 공부하기 위하여 다시 파리로 가서, 당시 프란시스 1세(프랑수아, Francis I)가 세운 왕립 대학(Royal College)으로 옮긴다. 칼빈은 이곳에서 히브리어 학자 바타블(Vatable)을 가까이 접하게 되고 그로부터 히브리어를 배우게 된다.(10월 11일: 쯔빙글리가 카펠 전투에서 전사하게 되어, 불링거가 쮜리히 교회의 담임 목사직을 계승한다.)

1532년: 법학 박사 학위 취득과 처녀작 “세네카의 관용론에 관한 주석”저술
• 1월: 칼빈은몇달동안오를레앙대학에돌아와있었고, 학업을마치고법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다(혹은 1531년이라고도 한다).
• 4월 4일: 칼빈은 23세의 나이로 ‘세네카의 관용론 주석’(A Commentary on De Clementia)을 써서 라틴어로 출판했는데, 여기서 그의 인문주의적이며 엄격한 도 덕주의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세네카의 관용론(On Mercy)은, 로마 황제 네로(Nero, 54‐68 재위)가 기독교를 무참하게 박해하는 것에 대하여, 로마의 스토아 학 자였던 세네카가 스토아주의적 입장에서 황제의 마음을 돌이키게 하려는 동기에 서 썼던 책이었다. 칼빈이 이에 대한 주해서를 쓴 것은, 당시 프랑스 왕 프란시스1세가 개신교도들을 박해하는 것에 대한 의분으로 왕의 마음을 돌이키기 위해서였 다는 해석이 있지만, 정확한 것은 아니다.

1533년: 회심
(이 기간에 칼빈이 회심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1557년에 출판한 시편 서문에서“하나님은 그의 신비로운 섭리로써 나를 다른 방향으로 전환시키셨다”라고 기록 한 경험은 이 시기의 경험인 것 같다.)
• 11월 1일: (칼빈의 친구 니콜라스 콥이 10월 10일 루브르 대학 의 신임 총장으로 선출되었다.) 만성절이던 이날 콥은 당시 관례적으로 행해지던 마튀랭(Mathurins) 교회에서의 취임 설교에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게 되었는데, 내용 중에 당시 개혁자들이 품고 있는 복음 의 기능과 이신칭의 교리가 나타났다. (이 설교를 칼빈이 작성했다.) 콥은 파리 대 학의 소르본 신학부와 국회가 참지 못할 정도로 대담하게 외쳤다. 결국 콥은 국회 의 소환장에 응하여 법원으로 향했는데, 도중에 자신이 투옥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아버지 기욤 콥의 고향인 바젤로 피신하게 된다.
한편, 모린(Morin)이라는 법 집행관이 콥과 깊은 관계에 있던 칼빈을 구속하기 위하여, 당시 포르떼 대학(College de Fortet)에 있던 칼빈의 방을 수색했고, 오를레 앙을 비롯하여 여러 곳에 있는 친구들이 칼빈에게 보낸 편지들을 압수하게 된다.
위기를 느낀 칼빈은 신속히 쎄인톤지(Saintonge)로 도피하였고, 그곳에서 부유 한 가정 출신이었던 루이 드 띨레(Louis de Tillet)를 만나 함께 하숙하게 된다.

1534년: 방랑길 시작
• 5월 4일: 칼빈은 성직록을 포기하기 위하여 노용으로 갔는데, 그곳에서 체포 되어 투옥되었다가 얼마 후 석방된다. 칼빈은 친구인 루이 드 띨레와 함께 파리 남서부 250마일에 위치한 앙굴렘(Angouleme)에 은신처를 정했다. (이곳이 루이 드 띨레의집이었는지도모른다. 당시그집에는약3, 4천여권의장서가있었고, 이 것이 칼빈에게 시의적절하게 자신의 신학 지식을 발휘할 수 있는 적절한 기회가 되었다. 왜냐하면 칼빈은 이곳에서 미래의 ‘기독교강요’의 기본 체계를 세웠던 것 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 10월: 칼빈은 오를레앙에서 죽은 자의 영혼은 마지막 심판 때까지 잠을 자고 있다는 식으로 가르치던 재세례파를 비판하려고 ‘영혼 수면론’(De Psychopannychia)을 완성하지만, 카피통(Capiton)의 충고에 따라 출판 계획을1542년까지 연기한다. 이것은 칼빈이 복음주의로 전향했다는 증거가 된다. 이 책은 당시 칼빈이 그때까지 취득한 성경을 해석하는 놀라운 솜씨를 여실히 드러내주었 다. (칼빈은 이 책에서 일부 재세례파들이 믿고 있던 잘못된 교리, 곧 죽음과 부활 사이에 영혼이 잠드는 기간이 있다는 오류를 반박하였다. 이를 위하여 칼빈은 죽 은 자들의 영혼이 그리스도와 끊이지 않는 의식적인 교제가 있다는 것을 입증하였다.)
• 10월 18일: 유명한 ‘현수막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루터파 성도들이 로마 카톨릭의 미사와 교리 그리고 성직자들을 비판하는 내용을 ‐ “끔찍하고 극심하며 참 을 수 없는 교황의 미사의 폐해들에 대하여” ‐ 대담하게 공개적으로 내걸었던 것이 다. 이벽보는심지어왕이거하고있던궁정의왕의침실문에까지나붙었다. 이 에 따라 프란시스 1세가 개신교도들을 탄압하는 칙령을 내리게 되고, 당국의 박해 가 가중되자 위기를 느낀 칼빈은 고심한 끝에 드 띨레와 함께 바젤로 피난처를 찾 아 나선다.(이 해에 영국에서는 헨리 8세가 ‘수장령’을 반포하여, 영국 교회에 성공회를 도입하고, 로마 교황청과 영구적으로 결별한다.)
(칼빈은 1534년이 끝나갈 무렵 위험을 무릅쓰고 파리를 방문하게 되는데, 거기 서 ‘삼위일체의 오류에 관하여’라는 이단서를 쓴 미카 엘 세르베투스(Michael Servetus)를 처음으로 만나게 되었다. 세르베투스의 토론 도 전을 받아들인 칼빈이 약속 장소에서 기다렸으나, 그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20년이 지난 후에 칼빈은 이때의 일을 그에게 상기시켰다. “당신은 그때 내가 당신을 오류로부터 돌아서도록 돕기 위한 일에 나의 목숨까지도 아끼지 않았다는 것을 알 것이다.”)

1535년: 기독교강요 집필 전념
• 1월: 칼빈은 스트라스부르그(Strasbourg)와 바젤(Basel)을 오가며 가명으로 활 동하면서 기독교강요 연구에 집중하고, 또한 히브리어 학습에도 열중한다. 그는 이 시기에 하인리히 불링거(Hienrich Bullinger)와 피에르 비레(Peter Viret, 1511‐1571)와 같은 사람들과 교제하기 시작했으며, 인근 스트라스부르그의 카피통, 부써 등과 도 교제하게 된다. 당시 이곳에 에라스무스(죽기 1년 전)가 있었기 때문에 그와의 교제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칼빈은 드 띨레와 함께 이탈리아로 가서, 당시 종교개혁에 호의를 갖고 서 시인 클레망 마로와 같은 사람들에게 도피처를 제공해주던 페라라의 공작 부인 을 방문한 후 돌아온다. <그런데 어떤 학자는 칼빈의 이 방문이 1536년에 있었다고 보기도 한다.> 또한 칼빈은 기독교강요를 준비하기 시작했으며, 올리베땅의 프랑스 어판 성경 개정 작업을 도왔다. 이 성경은 1535년 6월에 칼빈의 서문과 함께 뇌사 텔에서 발행되었다.)
• 8월 23일: 기독교강요가 완성되었다. 하지만 정작 출판은 다음해(1536년 3월)에 이루어진다.

1536년: 기독교강요 출판
• 3월: 칼빈은 이곳 바젤에서 그의 나이 27세에 라틴어로 저술한 ‘기독교강 요’(The Christiance Religionis Institutio)를 출간한다. (비록 초판 서문의 날짜는 1535년 8월 23일이라고 되어 있지만, 책의 인쇄가 끝난 것은 1536년 3월이었다.) 책은 전체가 여섯 장(Chapters)으로 구성되었다. (칼빈은 이후 1539, 1543, 1550, 1559년에 최종판이 나올 때까지 23년 동안 이 책을 거듭거듭 개정한다.)
• 6월: 형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위험을 무릅쓰고 고향으로 간다. 이후 가사를 정리한 후 동생 앙투앙과 누이 마리(Marie)를 설득하여 외국으로의 이민길에 오른 다. 목적지는 스트라스부르그였으나, 당시 프랑스 왕 프란시스 1세와 독일의 칼 5세 왕 사이의 전쟁 때문에 길이 막혀, 북향하는 길을 택하려고 제네바로 가게 된다.(당시 제네바는 수세기 동안 로마 카톨릭의 지배를 받았다. 그런데 제네바는 종 교적인 이유보다는 정치적인 이유로 로마 카톨릭을 거부하였다. 1535년 8월 10일 제네바 시는 로마 카톨릭의 미사 의식을 폐지할 것을 정식으로 결의하였고, 1536년 5월 21일에는 시민 총회에서 복음주의적 신앙을 따를 것을 결의하였다.)
• 7월 24일: 칼빈은 제네바에서 밤중에 기욤 파렐(Guillaume Farel, 1489‐1565)의 내방을 받는다. <필립 샤프는 일부 학자들이 칼빈이 8월에 제네바에 도착했다고 보 는 것은 착오라고 주장한다.> 당시 파렐은 순회 설교자로 사역하던 중에 제네바에 서 종교개혁을 시작했는데, 칼빈의 명성을 들어 알던 중, 칼빈의 친구인 드 띨레로 부터 칼빈이 제네바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찾아왔던 것이다. 칼빈은 함께 종 교개혁 전선에 나서자는 파렐의 요청을 완강하게 거부하면서, 학문 연구에 몰두하 려는 자신의 계획을 피력하였다. 최선을 다한 설득에도 불구하고 칼빈이 끝까지 고집하자, 마침내 파렐은 화를 내면서 소리쳤다.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이름으 로 당신의 학문 연구가 하나의 구실에 불과하다고 선언하오. 만약 당신이 이 주님 의 사역을 거부한다면 하나님은 당신을 저주하실 것이오.” 결국 칼빈은 그의 설득 을 받아들였다. 나중에 칼빈은 그날 밤의 경험을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그때 나 는 파렐의 무서운 명령에 감당하기 어렵도록 몸을 떨었다. 그의 음성은 마치 높은 보좌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과도 같았다.”
• 9월 5일: 칼빈은 처음에는 제네바 교회에서 성경 봉독자(Reader in the Holy Scripture to the Church in Geneva)라는 직책을 수행함으로써 개혁자로서의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얼마 후 그곳 베드로 성당의 교사로 임명되어 바울 서신과 다른 책들에 대한 강해를 시작한다.
• 10월 1‐8일: 이 기간에 제네바에서 멀지 않은 로잔(Lausanne)에서 성찬론 문 제로 신교와 구교 사이에 토론회가 열렸다. 칼빈은 로잔시의 신교파를 지원하기 위해 파렐과 함께 회의에 참석하여, 터툴리안(Tertullian, ca. 155‐220), 크리소스톰(Chrysostom, 346‐407), 어거스틴(Augustine, 354‐430) 등을 비롯한 많은 교부들의 서적을 원고 없이 자유롭게 인용하면서 로마 카톨릭의 성찬론을 반박했다. (처음에 칼빈은 2차례 밖에 발언하지 못했지만, 그의 재능을 알아 챈 파렐이 이 천재적인 동역자에게 많이 양보하였다.) 이 회의를 통하여 칼빈의 재능은 큰 인정을 받게 되 었다. 참고로, 칼빈이 기독교강요에서 인용하고 있는 교부들과 그들에 대한 횟수는 다음과 같다: 어거스틴(228회), 그레고리 대제(39회), 크리소스톰(27회), 베르나르(23회), 암브로스(18회), 키프리안(14회), 제롬(12회), 힐라리우스(11회), 터툴리안(7회).그리고 플라톤(7회), 아리스토텔레스(5회), 키케로(9회), 세네카(3회), 플루타르크(2회) 등도 있다.
• 11월 10일: 칼빈은 파렐과 함께 21개의 짧은 조항으로 이루어진 ‘신앙고백서’를 제네바 시의회에 제출한다. 이 문서가 지향하는 바는, 건강한 교회의 삶에 있다. 특별히 어린아이들의 교회 교육에 대해서 관심을 표명한 부분은 주목할 필요가 있 다.(쮜리히에서는 1차 스위스 신앙고백이 불링거에 의해서 작성된다.)

1537년: 제네바에서의 사역
• 1월 16일: 칼빈은 새로운 교회 질서를 위한 일련의 규칙, 곧 ‘교회 조직에 관 한 규례’를 시 당국에 제출한다. 칼빈과 파렐은 이것들을 기초로 제네바의 종교개 혁을 추진하려고 했다.
• 3월: 마침내 시 당국은 출교권이 명시된 ‘신앙고백서’를 채택하였고, 행정당국 의 지도자들이 모범을 보이기 위하여 첫 번째 서명자들이 되었다. 그러나 정작 대 중들에게 서명을 요구하게 되었을 때는, 많은 반대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 5월 14일: 로잔의 목사 피에르 카롤리(Peter Caroli)는 칼빈의 기독교강요와 파 렐의 요약서(Summary)를 문제 삼아 두 사람이 아리우스주의자들(Arianism)이라고 비난하면서 고소했다. 이에 따라 로잔과 베른 총회에서 토론회가 열렸다. 비레(Viret)가 파렐과 칼빈을 변호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였다.
• 6월: 총회에서 결국 고발자인 카롤리의 무고죄가 드러나서 그는 교직을 박탈 당하고 로잔에서 추방당한다. 훗날 카롤리는 다시 로마 카톨릭으로 돌아가버린다. (소르본 대학의 박사였던 카롤리는 원칙이 없는 사람으로, 수 차례 종교를 바꾸었 다. 1535년에 파리에서 제네바로 도망쳐 와서 뇌사텔에서 목사가 되었고 결혼도 했 는데, 이후 로잔에 가서 체류하던 중에, 회의가 열리게 되었을 때, 파렐과 칼빈에 게 비난과 고소를 자행했던 것이다.)
• 7월: 급기야 평의회원들은 칼빈이 제출한 제안을 아예 거부하기에 이른다.

1538년: 추방당함
• 1월 3, 4일: 200인이 회집한 의회에서, ‘신앙고백’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에 대해 서는 성찬식에 참예하지 못하게 하겠다는 칼빈과 파렐의 제안을 의회가 거부함으 로써, 칼빈과 의회와의 대립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 2월 3, 4일: 의회 선거에서 개혁자들을 지지하는 세력이 패배함으로써 제네바 시민은 엄격하고 철저한 개혁보다는 온건한 개혁과 자유신학을 원하고 있다는 것이 나타났다.
• 2월 21일: 칼빈은 스트라스부르그에 있는 부써에게 편지를 보내 사태의 심각 성을 알리고 부써의 후원을 청한다.
• 3월 11, 12일: 시 의회는 목사회와 상의하는 일이 없이 일방적으로 베른의 입 장을 따라 목사들에게 베른식으로 복장을 착용하도록 결정했는가 하면, 성찬식용 떡을 로마 카톨릭에서 사용하는 것과 같은 것을 사용할 것을 결정하고 목사들에게 강요한다.
. 4월 23일: 칼빈과 파렐과 코로(Coraud)가 이 결정에 반대하게 되자, 시 의회 는 이들에게 부활절 설교를 금지시켰고, 칼빈측은 성찬 집례 거부로 대응하였는데,그러자 200인 시 총회가 차례로 열려, 당사자들이 없는 가운데 재판을 감행하여, 3일 이내에 칼빈 일행에게 제네바를 떠나라는 추방령을 내린다. (이 결정을 통보받 은 칼빈은 “좋다, 우리는 지금까지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마음으로 일을 하지 않 았으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합당하게 해주실 것이다”라고 하면서 담담하게 받 아들였다.)
• 4월 27일 ‐ 5월 4일: 칼빈 일행은 베를린과 쮜리히에서 개최된 스위스 개혁자 대회에 참석하여 제네바 시의 처사의 부당성에 대하여 호소하여 동조를 얻는다.
• 5월 23일: 칼빈 일행은 베를린 시 대표들의 호위를 받아 다시 제네바로 들어 가려고 했으나, 제네바 시정부는 이들의 입시를 거부한다. 결국 칼빈은 모든 것을 단념하고 파렐과 함께 바젤로 간다.
• 8월 1일: 칼빈이 바젤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은 스트라스부르그 측은 칼빈 을 목회자로 초청했다. 당시 독일에 속했던 스트라스부르그(현재는 프랑스 영토)는 많은 프랑스 종교 망명자들의 피난처였다. 파렐은 뇌샤텔 교회의 초빙을 받아 그 곳으로 부임한 후 죽을 때까지 그곳에서 목회한다. (한편, 칼빈을 추방한 제네바 측 의 처사에 충격을 받은 뒤 띨레는 다시 로마 카톨릭으로 돌아간다. 뒤 띨레는 이 후 양심의 고통을 느끼게 되고, 하숙을 치고 자비량하는 등등의 일로 칼빈이 경제 적 어려움을 겪는다는 것을 알고 그를 돕겠다고 제안하지만, 칼빈은 이를 정중하 게 거절하는 편지를 10월 28일자로 뒤 띨레에게 보낸다.)
• 9월 8일: 칼빈은 개혁가였던 부써의 추천으로 프랑스 난민 교회에서 그의 사 역을 시작했다. (칼빈은 그대로 머물면서 저술 활동에 전념하기를 원했지만, 부써를 비롯한 개혁자들의 끈질긴 초빙에 설득되어 성 니콜라스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던 프랑스 난민들의 회중 목사가 되었던 것이다.) 이곳에서 칼빈은 제네바에서 실행할 수 없었던 교회와 국가의 분리 문제를 실행할 수 있었다.
(칼빈은 성경을 강해하는 일에 전념하였고, 예배에 새로운 것을 많이 도입하였 다. 예배시 프랑스어로 된 시편 찬양을 도입하였고, 당시 일정한 형식이 없이 진행 되던 재세례파의 예배를 반대하여 새로운 예배의 절차를 만들었으며, 로마 카톨릭의 고해성사 대신에 목사와의 개별적인 면담을 시행하였다. 칼빈은 이러한 것들을 시행함에 있어서 부써에게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특히 훗날 제네바에서 실시하게 될 4중 직분 ‐ 목사직, 교사직, 장로직, 집사직 ‐ 과 예배 절차 및 교리문답의 구조 등에서 이때의 부써로부터 받았던 영향을 드러내 보인다. 칼빈은 이미 조직신학 분야에서 탁월한 지식을 소유하고 있었지만, 아직 경험이 부족하였던 실천신학 분 야의 지식들을 부써를 통해서 보충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1539년: 기독교강요 재판
• 1월: 스트라스부르그에서 야곱 슈트름(Jacob Sturm)이 학장으로 있던 대학의 신학 조교수로 취임하여 주로 성경주석을 담당했다. 틈틈이 저술에 힘을 쓴다.
• 2월 21일: 부써와 함께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개혁자 회의에 참석했고, 여기 서 자기보다 나이가 12살이 더 많던 필립 멜랑히톤(Philip Melanchthon)을 처음으 로 만나 평생을 동역자로 지낸다. (칼빈은 앞서 1538년 10월 부써의 소개로 멜랑히 톤과 서신 왕래를 시작했었다.) 교리, 치리, 예배 등 당시 민감한 주제들을 놓고 대 화를 나눈 멜랑히톤은 칼빈에게 반하여, 그를 ‘진정한 신학자’(the Theologian)라고 불렀다. (이즈음에 개신교와 로마 카톨릭 간에 중요한 논쟁들이 프랑크푸르트(동년 2월), 하게나우(1540년 6월), 보름스(동년 11월) 그리고 레겐스부르그(1541년 4월 5일) 등지에서 (연속된 회의로) 열리게 되는데, 이 때마다 칼빈은 대표자의 자격으 로 참석하여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였다.)
• 3월 18일: 제네바 당국자들은 로마 카톨릭의 추기경 야곱 사돌렛(Jacob Sadoleto, 1477‐1547)으로부터 공개 서한을 받았다. 그는 이 서한에서 제네바 시가 로마 카톨릭으로 복귀할 것을 촉구했다. 이에 대해 제네바에 있는 목사 중 한 사 람도 답을 쓸 수 없었기 때문에 제네바 시의회는 칼빈에게 사돌렛의 편지에 대한 답장을 써주기를 부탁한다. 이것은 제네바 시의 분위기가 개혁 운동에 매우 유리 하게 변해가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 5월 19일: 칼빈은 제베디우스(Zebedius)에게 편지를 보내어 루터파의 완고함 과 쯔빙글리파의 그릇된 견해를 지적하고 개혁 운동의 양대 진영이 서로 양보하여 타협하고 합동함으로써 개혁 운동의 효과적 추진을 주장한다.
• 7월: 스트라스부르그 시는 칼빈에게 시민권을 수여한다.
• 8월 1일: ‘기독교강요 재판’을 스트라스부르그에서 펴낸다. 이 재판은 초판보 다 분량이 약 3배 정도 늘어난 것이었으며, 루터도 이 재판을 읽고 매우 기뻐했다 고 전한다.
• 9월 1일: 칼빈은 슐츠(Sulzer) 목사를 통하여 사돌렛 추기경이 보낸 편지의 사 본을받아본후, 6일만에두배가넘는양의답변을작성하여, 이날제네바시가 그에게 답변하도록 편지를 보낸다. 이 편지는 이후 가장 뛰어난 종교개혁의 변증 문이 되었다. 제네바 시는 나중(1540년)에 경비를 부담하여 이 편지를 프랑스어로 출판한다. 로마 카톨릭의 모순을 주도면밀하게 반박한 칼빈의 이 글로 인하여 로 마 카톨릭의 기세는 상당히 꺾이게 된다.
• 10월 18일: 칼빈의 ‘첫 번째 주석 로마서’가 간행되어 시몬 그리나이우스(Simon Grynaeus)에게 헌정되었다. 주석의 내용들은 아마도 그가 1536년에서 1538년 사이에 제네바에서 했던 강의들을 요약한 것으로 보인다. (필립 샤프는 제네바 에서 추방당한 칼빈이 바젤에 왔을 때, 시몬 그리나이우스의 환대를 받았고 그에 게서 히브리어를 배웠다고 한다.)

1540년: 제네바 시의 칼빈 재 초청 결정
• 7월 1일: 제네바 시 선거에서 파렐파가 지배하게 된다.
• 8월: 칼빈은 부써의 적극적인 권유를 받아들여, 이돌렛 드 부르(Idelette de Bure)와 결혼한다. (정확한 결혼 날짜는 미상이지만, 일부 학자가 제기하는 9월초 설은 확실히 잘못이다. 어떤 학자는 칼빈의 결혼이 8월 17일 이전이라고 제시한다.당시 그녀는 칼빈보다 6년 연상의 과부로 두 아이를 가진 어머니였으나, 결혼 9년 만인 1549년 4월에 죽게 될 때까지 정숙하고 경건한 신앙으로 온 힘을 다하여 남 편 칼빈을 내조한다.)
(1539년 2월 이후의 제네바 시의 상황은 변화되기 시작했다. 1540년 네 명의 목 사들 중 두 명이 분쟁과 혼란으로 인하여 제네바를 떠났다. 당시에 프랑스와 베른 이 제네바의 독립을 위협하고 있었기에 제네바는 용기 있는 지도자를 필요로 했다.또한 추기경 사돌렛에게 칼빈이 서한을 보낸 후, 사돌렛과 로마 카톨릭은 일언반 구 논박도 하지 못했다. 이런 상황속에서 제네바 시는 다시 칼빈을 필요로 했다.)
• 9월 21일: 제네바의 소의회는 정식으로 칼빈을 다시 초청할 것을 결의한다.소의회는 후속 조치로, 베른, 바젤, 취리히, 스트라스부르그의 협조를 얻기 위한 조 치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1 10월 13일, 칼빈의 오랜 친구인 미쉘 드 부아(Michel du Bois)가 대의회가 칼빈에게 보내는 편지를 가지고 파송되었으며, 2 10월 19일, 200인 대의회가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최선을 다할 것을 다시 결의했고, 3 10월21일, 아미 페랑(Ami Perrin)과 루이 뒤포어(Louis Dufour)가 의전관을 대동하고 칼 빈에게 파송되었고, 4 이 모든 일에 수반하여, 칼빈을 설득해 달라는 요청을 하기 위하여 유력한 인사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하지만 스트라스부르그는 ‘진정한 신학 자’ 칼빈을 빼앗기지 않기 위하여 제네바의 노력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 11월 13일: 칼빈은 웜즈에서 파렐에게 편지를 보내어 자신이 제네바 시의 초 청을 받은 것을 알리고 그의 의견을 물어본다. 이에 대해 파렐은 초청을 수락하라 고 강권한다. 부써도 칼빈이 스트라스부르그에 머물기보다는 제네바에 가서 개혁 사역을 지속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칼빈을 설득한다.

1541년: 제네바 귀환과 기독교강요 프랑스어판 출판
• 1월: 칼빈이 ‘기독교강요 프랑스어판’을 직접 저술‐번역하여 출판한다.
• 1월 17일: 비레가 칼빈의 조력자가 되기 위하여 칼빈보다 먼저 제네바에 도착한다. (하지만 비레는 칼빈이 귀환한 후, 7월에 다시 로잔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뇌 샤텔은 파렐을, 로잔은 비레를 절대적으로 필요로 했다.)
• 2월: 파렐로부터 재차 제네바에서 온 초청을 수락하라는 ‘우뢰와 같은 편지’를 받고 크게 감동을 받는다. 칼빈은 “제네바의 돌들이 오라고 부르짖을 때까지 기다리겠느냐?”는 그의 벼락같은 편지 앞에 또 다시 설득당하게 된다.
• 3월 10일 ‐ 5월 22일: 이 기간에 칼빈은 여러 곳에서 열린 종교 회의에 참석한다. 루터파와 개혁파와의 합동을 위하여 노력한다.
• 5월 1일: 제네바 시의회는 1538년 4월 23일에 결의한 칼빈과 파렐에 대한 추방령을 정식 절차를 거쳐 공식적으로 취소하고 칼빈을 ‘진정한 하나님의 종’이라고 엄숙하게 선포한다.
• 5월 26일: 제네바 원로원은 각 도시에 간곡한 청원서를 보내어 칼빈의 귀환을 도와달라고 요청한다.
• 6월 25일: 칼빈은 여행을 마치고 스트라스부르그로 돌아온다.
• 8월 9일: 칼빈이 마침내 제네바로 다시 돌아갈 것을 결심한다.
• 8월 19일: 제네바 시의회는 다시 칼빈에게 초청장을 보내온다.
• 9월 1일: 제네바로 가기 위하여 스트라스부르그를 출발한다.
• 9월 13일: 칼빈은 제네바 시로 들어왔고, 기마대의 출영을 받는다. 취임 즉시,이전에 추방되기 직전에 진행했던 부분을 계속 이어서 성경을 강해하기 시작한다.또한 200인 의회에 ‘교회헌법 제정위원회’를 설치할 것을 건의하는 동시에 예배 의 식문의 초안에 착수한다. (16일에 칼빈은 파렐에게 편지하여, “당신의 뜻대로 되었 습니다. 저는 이곳에 꽉 붙잡혔습니다. 하나님의 은총만을 바랍니다”라고 했다.)
(이렇게 해서 칼빈의 개혁자로서의 인생이 다시 시작되었다. 칼빈은 제네바 시를 하나님의 도성으로 만들고 싶었다. 성경의 원리로 국가의 기반을 세우고 교회 와 국가가 서로 분리된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서로 협력하는 세계를 만들 고자 했다. 교회는 교회의 제반 문제를 관장하고 국가는 법과 질서의 문제를 관장 하는 그런 질서를 그는 원했다. 칼빈은 이러한 이상을 실현하는 첫 단계로 시의회 에 요구하기를, (1) 법에 따라 교회를 다스릴 것, (2) 그러므로 교회의 헌법을 제정할 것,(3) 자신을 시의회의 고문으로 세워 줄 것 등을 요구했다.)
• 11월 20일: ‘제네바 교회 법령’이 몇 가지 수정이 있은 후, 소의회, 200인 의회,총회에서 통과되어 대중 앞에서 낭독되어 공포된다. 이 규칙을 시행하는 것을 감 독하기 위한 감시 위원회를 구성, 매 목요일에 정기적으로 모인다. 이 법령은 부써 의영향을받아작성된것으로목사, 교사, 장로그리고집사의네가지직분을설 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어린이들에 대한 신앙 교육의 근거를 제시하였다. 칼빈은 교리문답서를 작성하여 교인들을 교리적으로 훈련시켰다. 성경의 원리가 모든 시 민의 생활 속에 펼쳐지도록 하는 데 힘을 다하여 노력했다. 칼빈의 엄격한 노선에 반대하는 자들도 있었지만 결국 제네바 시에는 도박이 사라지고 댄스가 금지되었 으며 사치와 방탕한 생활이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당을 찾아 나왔고 칼빈의 설교를 듣기 위해 베드로 성당은 항상 가득 차게 되었다. 또한 칼빈은 일련의 개혁과 더불어 목사단과 12명의 장로들로 구성된 감독 법원을 조직하 였다. 감독 법원은 신자들을 감독하고 훈계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으로서, 하나님 의 말씀대로 살지 않는 사람들에게 수찬정지나 출교를 가할 수 있는 치리의 권한 을 행사하였다. 칼빈은 주의 성찬을 중요한 것으로 여겼다. 그것은 “주님의 성찬을 부끄럽게 더럽히느니 차라리 죽기를 결정하겠다”고 하는 칼빈의 고백에서 잘 드러 난다. 그러한 성찬의 거룩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치리도 서슴지 않았던 것이다. 그 러나 단순히 억압하려 했던 것이 아니라, 신자들로 하여금 진심으로 죄를 회개하 고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시행되었던 것이다.그러나 시 당국자들은 치리의 권한이 자신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간 주하고 이러한 조치를 극구 반대하였다. 이미 시 정부는 장로를 임명하는 권한을 자신들의 권한으로 확보해 놓은 상태였기 때문에, 치리의 권한까지도 자신들이 독 식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심지어 몇몇 시민들마저 그러한 조치를 종교적인 규율로 써 자신들을 억압하는 것으로 받아들여 비판하고 나섰다. 이 문제에 얽힌 갈등과 논쟁은 칼빈이 사망한 1564년까지 지속되었다. 칼빈이 신자들에 대한 치리권을 교 회의 권한으로 규정한 것은 교회의 권력과 정부의 권력이 철저하게 구별되어야 한 다는 강한 확신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한 확신에 따라 칼빈은 정부가 교회의 권한에 간섭하는 것을 단호하게 거부하였던 것이다.‘주의 만찬에 관한 소고’도 이 해에 출판되는데 날짜는 미상이다. 이 저서에서 그는 루터파와 쯔빙글리파의 양극단을 피하면서 중도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즉 그 는 그리스도의 편재성을 근거로 실제적인 임재를 역설한 루터에 반대하여, 그리스 도가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심을 주장한 점에서 쯔빙글리를 지지하였다. 반면에,성찬을 단지 상징으로서만 이해한 쯔빙글리를 반박하고, 그리스도가 성찬에 임재 하신다고 주장한 점에서 루터에 동의하였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칼빈은 성찬을 받 을 때에 신자들이 성령의 역사하심에 따라 신앙으로 받게 되는데, 바로 그 신앙을 통하여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참여하게 된다고 역설하였던 것이다.칼빈은 부써가 작성한 교리문답의 구조를 따라, 33개의 항목으로 이루어졌던1537년도의 것과 다른 새로운 ‘제네바 교회의 교리문답’을 새로 작성하였다. 이 교 리문답은 373개의 문답으로 이루어졌는데 55주의 분량으로 구분되었다. 또한 그는‘교회의 기도와 찬송의 형식’이라는 ‘예배모범’을 만들었다.

1542년: 교리문답 작성
(이해에 스코틀랜드에서는 존 낙스가 토마스 그릴의 개혁주의 설교를 듣고 감명을 받기 시작한다.)
• 1월 2일: 제네바의 시민 총회에 의해, 칼빈의 지도 아래 작성한 ‘교회 헌법 규칙’이 제네바 공화국의 기본적인 교회법으로 엄숙히 비준되어 시행되기 시작한다.
• 7월 28일: 아들이 태어났으나, 안타깝게도 며칠 후 사망한다. 이때 칼빈은 비 레의 가족에게 편지하면서, “주님이 우리에게서 어린 아들을 데려가심으로써 우리 에게 큰 충격을 주셨지만, 그러나 우리 아버지는 자신의 자녀들에게 무엇이 최선인가를 가장 잘 아는 분이십니다”라고 했다.
• 10월 10일: 칼빈은 비레에게 보낸 편지에서 시력이 좋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1543년: 기독교강요 3판
• 1월: ‘기독교강요 3판’이 출간된다. 몇 가지 내용이 보충되었고 분량 면에서도21장으로 늘어났다.
• 2월: 칼빈은 ‘알버트 피기우스의 비방에 대항한 인간 의지의 노예성과 구원에 관한 정통 교리의 수호’(Defence of the Orthodox Doctrine on the Slavery and Deliverance of the Human Will against the Calumnies of Albert Pighius)를 저술하고,멜랑히톤에게 헌정한다. (5월 11일에 멜랑히톤은 감사의 편지를 보내온다.)
• 3월 24일: 비레에게 보낸 편지에 의하면, 칼빈이 초안을 작성해서 가결시킨‘교회 규칙’에 대해서 그것이 너무 엄격하다는 비난이 일어났다는 것과 시의회와 감사 위원회에서 큰 논쟁이 벌어졌으나 칼빈의 노력으로 겨우 무마되었다는 것을 알리고 있다.
• 9월: 제네바 시에 다시 페스트가 만연한다. 로마 카톨릭 교도들은 개혁자들의 불신앙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이라고 비난한다. 이에 대하여 칼빈은 역으로 그것은 개혁자들의 불신앙에서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로마 카톨릭의 우상숭배에서 기인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칼빈은 성유물에 대한 소논문을 프랑스어로 출간하여, 로마 카톨릭의 유 물숭배주의에 일침을 가한다. 이 논문은 다음과 같은 말로 끝맺는다: “성유물들이 너무나 완벽하게 뒤섞이고 뒤죽박죽으로 수집되어서, 도둑이나 강도의 유골, 아니 면 개나 말, 혹은 당나귀의 뼈를 숭배하게 될 수도 있다는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 는 어떤 순교자의 유골도 소지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후로는 그 누구도 자신 의 무지를 핑계할 수 없을 것이다.”)
(존 낙스는 당시 자신의 고향 하딩톤을 찾아온 죠지 위샤트 ‐ 그는 칼빈에게서 배운 복음을 가르쳤다 ‐ 의 개혁주의 설교를 듣고 감화를 받기 시작한다.)

1544년: ‘교회개혁의 필요성에 관하여’(On the Necessity of Reforming the Church) 출간
칼빈은 이 논문을 “그리스도께서 통치하기를 바라는 모든 사람들의 이름으로”황제 카를 5세에게 제출하고, 그리고 슈파이어에서 소집된 의회에 제출하게 된다.이 논문은 추기경 사돌렛에게 보낸 답변(1540년), 그리고 트렌트 공의회를 비판한 글(1547년) 등과 더불어 로마 카톨릭을 반대하는 뛰어난 작품이다.

1545년: 기독교강요 프랑스어판 출판
• 7월: 이시기에제네바시의목사회는친칼빈파에의해움직이고있었다. 그 들은 주로 성도덕에 엄격하였다.
• 12월 2일: ‘제네바 신앙문답서’를 출판한다. (로마 카톨릭의 트렌트 회의가 개최되기 시작함)

1546년: 고린도전서 주석 발간
• 1월 24일: 그의 두 번째 주석인 ‘고린도전서 주석’을 출판한다. “영예로운 신사 이시며, 버건디(Burgundy), 팔레(Falais), 그리고 브레이다(Breda) 등의 영주이신 제임스(James) 각하에게 드리는”이라는 헌정사가 첨부되었다.
• 1월 21일: 스트라스부르그에서 얻었던 모든 특권을 포기한다.
• 1월 26일: 피에르 아모(Pierre Ameaux)라는 이름의 트럼프 제조자가 자기 집에서 만찬회를 열고 거기서 칼빈을 공적으로 비난한다. 의회가 이것을 알고 그를 체포한다.(스코틀랜드에서는 존 낙스는 위샤트를 찾아가 자신을 제자로 받아줄 것을 간 청한다. 그러나 위샤트는 자신에게 닥칠 위험을 내다보며 이를 거절한다. 그로부터 정확하게 다섯 시간 뒤에 위샤트는 추기경 비톤의 군대에 의해 체포되어 2월 29일 화형에 처해진다. 이후 5월에 요한 레슬리가 이끄는 개신교 결사대가 앤드류 성으 로 쳐들어가 추기경 비톤을 살해하고, 존 낙스를 그들의 설교자로 추대하게 된다.그러나 이후 프랑스 군대는 앤드류를 함락시킨 후 존 낙스를 체포하였는데, 낙스 는 19개월 동안 프랑스 전함에서 사슬에 묶여 노예로 고난을 겪다가, 이후 1549년 이 되어 영국 정부의 개입으로 풀려나 자유를 얻게 된다.)
• 3월 21일: 어떤 결혼식에서 시에서 금지한 무도회를 열었다. 여기에 페랑 부 부와 교회규칙 실행 감시 위원장인 코르느(Corne)도 참가했다. 그러나 시 소위원 회에서는 이들을 다 체포한다.
• 6월 27일: 파브르(Favre)가 예배 시간 중에 자기 집에서 공을 가지고 운동하 면서 놀고 있다가 발각되어 체포된다.
• 11월 22일: 작명(作名)에 지나치게 종교적인 명칭, 십자가 또는 예수의 이름을 남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시의회 법규를 만들도록 하여 이것을 통과시킨다.
• 8월 1일: ‘고린도후서 주석’을 오를레앙에서 칼빈의 헬라어 선생이었던 볼마르 에게 헌정한다.
(칼빈은 멜랑히톤의 ‘신학총론’ 개정판 의 프랑스어 번역판에 자신의 주석적 서문을 달아 출간하여, 멜랑히톤에 대한 존 경심을 다시 한번 표명한다.)

1547년: 다시 일어나는 반대 세력
• 2월 2일: ‘트렌트 회의에 대한 반박문’을 출판한다.
• 3월 7일: 이때부터 한 시민이 시의 법과 교회의 법에 의해서 이중적으로 처벌을 받아야 하느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 페랑을 위시한 칼빈 반대파에서는 시의 법 에 의해서만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서 칼빈은 교회 훈련을 위해서는 모든 시민이 교회 규칙을 지켜야 한다고 하였으며, 교회규칙 범칙시에는 교회의 법에 의해서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교회의 권위 확보에 주력 한다.
• 3월 29일: 칼빈이 주장한 타협안이 제네바시 소위원회에 제출되어 시의회법 에 의해 처벌된 자가 회개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교회법에 의해서 처벌받아야 한다 는 안이 가결된다.
• 6월 27일: 칼빈이 매주 설교하는 베드로 성당의 강단에 사보이 방언으로 ‘너 무 엄격하면 복수한다’고 하는 위협장이 붙는 사건이 일어난다. 하수인이었던 쟈크 그루에(Jacques Gruet)를 체포하여 가택을 수사했을 때, 칼빈을 제네바에서 축출하 려는 계획이 논의된 비밀 문서가 다수 발견되었다. 시의회는 그가 자백하지도 않 았음에도 불구하고 확실한 증거에 따라 7월 26일 사형에 처한다.
• 9월: (앞서 칼빈을 죽이기로 음모를 꾸몄다가 들통나자 도망가버렸던) 아미 페 랑이 프랑스에서 돌아오자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 12월 16일: 칼빈은 모든 것을 불문에 붙이기로 페랑과 타협한다. 이것이 성사 되어 페랑은 석방된다.

1548년: 일련의 주석들 발간
• 2월 1일: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주석들’을 출판하여 비르 템베르그의 공작이면서 몽베리아르(Montbeliard)의 백작인 크리스토퍼(Christopher)에게 헌정한다. ‘고린도전후서 주석 라틴어판’ 출판.
• 2월 5일: 선거에서 ‘친 칼빈파’와 ‘반 칼빈파’의 수가 동수가 되었다.
• 5월: 칼빈이 설교 도중 시정(市政)에 관계 있는 몇 사람을 비판한 것이 문제 가 되어 시의회로부터 징계를 당한다.
• 7월 25일: ‘디모데전후서 주석’을 영국왕 에드워드 6세(Edward VI)의 후견인이 었던 에드워드 세이모어(Edward Seymour)에게 헌정한다.
• 10월 18일: 칼빈이 비레에게 보낸 편지를 트롤리(Trolliet)라는 사람이 훔쳐 시 당국에 제출한다. 편지 내용은 제네바 시의 현상에 대해 이야기하는 가운데 시의 회와 시민들을 비판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문제가 되어 한 때 칼빈을 사형에 처해 야 한다고 주장하는 의원들도 있었으나 파렐과 비레의 활약으로 위기를 모면한다.

1549년: 칼빈의 부인(이돌렛 드 부르) 사망
• 3월 29일: 칼빈의 부인이 사망한다. 이 일 이후로 칼빈도 지병인 편도선이 악화되어 고생하기 시작한다.
• 5월 23일: ‘히브리서 주석’을 출판한다. 칼빈은 “폴란드의 왕, 리투아니아, 러시아, 프러시아의 대공, 무스코비(Muscovy)의 군주이자 상속자이신 지기스문트 아우 구스투스(Sigismund Augustus) 폐하께 드리는”이라는 헌정사를 썼다.
• 11월 29일: ‘디도서 주석’을 발간하여 기욤 파렐(Guillaume Farel)과 피에르 비 레(Peter Viret)에게 헌정한다.

1550년: 기독교강요 4판 출판(라틴어, 처음으로 장과 절 구분)
• 2월 17일: ‘데살로니가전서 주석’을 로잔느 대학장 마투리누스에게 헌정한다. • 7월 1일: ‘데살로니가후서 주석’을 가족 주치의인 베노이 텍스터(Benoit Textor)에게 헌정한다. (1551년에 바울서신판으로 출판됨)
• 11월 25일: ‘이사야서 주석’을 영국왕 에드워드 6세(Edward VI)에게 헌정한다.

1551년: 기독교강요 프랑스어판 출판
• 1월 24일: ‘야고보서 주석’, ‘베드로전후서 주석’, ‘요한일서 주석’, ‘유다서 주석’등을 영국왕 에드워드 6세(Edward VI)에게 헌정.(3월 1일: 영국에서 마틴 부써가 사망한다.)
• 5월: 기독교강요 프랑스어판이 출판된다. 또한 5월부터 시작한 볼섹과의 예정 론 논쟁은 결국 칼빈의 주장으로 승리하였으며, 이 해 말에 볼섹은 제네바에서 추 방당한다. 칼빈에게는 예정론을 변증하는 한 해였다고 볼 수 있다.
• 12월 27일: ‘이사야서 주석’이 나타났다: 이것은 칼빈이 구약 해석에 간여한 첫 번째 주석이었다. 하지만 칼빈 자신이 직접 편집한 것이 아니고, 1549년에 행한 칼 빈의 이사야서 강의에 참석한 니콜라 데 갈라르(Nicolas Des Gallars)가 기록한 것 을 교정한 후 출판했다.

1552년: ‘하나님의 영원한 예정에 관하여’ 출판
• 1월 1일: 칼빈은 예정 교리를 확실하게 진술한 ‘하나님의 영원한 예정에 관하 여’(On the Eternal Predestination of God)를 출판한다. 칼빈은 이것을 ‘제네바 일치 신조’(Consensus Genevensis), 즉 ‘제네바 목사들의 합의문’(Agreement of the Genevers Pastors)이라는 제목으로 제네바 행정장관들과 시의회에 헌정하였다. 이 를 위하여 제네바 목회자들의 서명을 받았다. 이것은 9년 전에 죽은 피기우스와 볼섹과의 논쟁을 통하여 나온 것인데, 제네바 외부로부터는 어떠한 권위도 부여받 지 못했다.)
• 2월 29일: ‘사도행전 주석(1‐13장)’을 덴마크 왕인 크리스찬 3세(Christian III)에 게 헌정한다. (라틴어판과 프랑스어판으로도 출간)

1553년: 세르베투스 사건
• 1월 1일:‘요한복음 주석'을 제네바 시의 지방 장관들과 의원들에게 헌정한다. (라틴어판과 프랑스어판 모두 출판.)
• 4월 4일: 세르베투스는 비엔나에서 체포되어 재판을 받던 중에, 4월 7일 탈옥 하여 도주한다. (이즈음 세르베투스는 비엔나에서 가명으로 의사 개업을 하고 있었다. 그는 ‘기독교의 복구’라는 책을 출판하고 그 안에서 재차 기독교의 삼위일체론을 오류라고 주장하였다. 이 책이 칼빈에게 기증 되었다.) 그러자 비엔나 정부는 그가 궐석한 재판에서 사형을 언도했다.
(제네바 시에서는 시민권을 가지지 않은 자의 무기 휴대를 금하는 법을 통과시 켜 칼빈파의 세력 제거에 노력한다. 따라서 칼빈은 매우 불리한 입장에 놓이게 되 었으며, 제네바에서 완전히 제거될 위협에 놓이게 되었다.)
• 8월 13일: 세르베투스가 나폴리로 가던 중 제네바에 들렀고, 칼빈의 설교를 듣다가 체포된다.
• 8월 16일: 세르베투스 공판에 있어서 시 정부는 반 칼빈파의 거두 베르텔리에 를 변호사로 선임한다. 칼빈과 베르텔리에 사이에 격렬한 논증이 벌어진다.
• 8월 17일: 칼빈 자신이 직접 시 소위원회에 참여하여 세르베투스의 성경관이 성경의 권위를 부정하는 동시에 범신론적 신관을 가진 것이라고 비판한다.
• 9월 1일: 옥중에서 세르베투스와 칼빈이 대결하여 논쟁을 벌였다. 세르베투스 는 오히려 칼빈을 이단자로 고발한다(9월 22일).
• 10월 26일: 시 소위원회는 세르베투스를 산 채로 화형할 것을 선고했다. 이에 대하여 칼빈은 관대한 처분을 호소하고 최소한 단수형에 처할 것을 호소했으나,소위원회는 이를 거절한다.
• 10월 27일: 무죄를 확신하고 있던 세르베투스는 27일 낮에 시청 앞마당에서 자신에 대한 화형 선고문을 듣게 되자 그 자리에서 실신하였다. 파렐의 부축을 받 아 일어섰으나, 그는 여전히 자신의 주장이 옳다고 주장하였고, 오히려 자신을 단 죄한 자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였다. 그는 그날 화형에 처하여졌으나 끝까지 예수의 영원성을 부인하고 “영원하신 하나님의 (첫번째 피조물) 아들 예수여 긍휼 을 베푸소서”라고 기도하면서 죽어갔다. 이 사건에 대해서 멜랑히톤은 칼빈에게‘정당한 처사’라고 써 보냈다. 이 일 후에 제네바에서의 반 칼빈파의 세력이 많이 약화되었다.

1554년: 사도행전 주석
• 1월 25일: ‘사도행전 주석(14‐28장)’을 덴마크의 왕 프레드릭(Crown Prince Fredrick)에게 헌정한다.
(스코틀랜드에서 존 낙스가 망명을 와서 칼빈과 접촉하고 많은 감 화를 받는다. 처음에 칼빈은 낙스의 혁명적 생각에 대해서 별 관심을 갖지 않는다.존 낙스는 6월 10일에 제네바에 있는 동안 영국 망명자 교회 목사로 부임한다. 그 러나 동년 가을에모국으로 돌아간다.)
• 7월 31일: ‘창세기 주석’이 발행되었다. (이후 프랑스어판도 나타남)

1555년: 공관복음 주석
(3월 26일: 존 낙스가 다시 제네바로 돌아왔다.)
• 8월 1일: ‘공관복음서 주석’이 출판되고, 라틴어판이 프랑스어판과 함께 출판된다.

1556년: 목회서신 주석
• 1월 24일: 10년 전에 발행한 ‘고린도전서 주석’을 다시 비코(Vico) 후작의 독자 인 갈리아쪼 카라치올로(Galliazo Carracciolo) 경에게 헌정한다.
• 7월 20일: ‘디모데전후서 주석’을 서머셋(Somerset) 공작, 허트포오드(Hertford)백작, 에드워드(Edward) 경에게 헌정한다.

1557년: 시편 주석
• 2월 14일: ‘호세아서 주석’이 존 뷰데(John Budaeus)에 의하여 출판된다.
• 7월 22일: ‘시편 주석’(라틴어판)이 출판된다. 서문에서 칼빈은 시편을 ‘사람의 심령의 모든 부분의 해부학’이라고 표현했다.(엄격한 루터파 목사로 함부르크 학장을 역임한 요아킴 베스트팔이, 1552년의 ‘쮜리히 일치신조’에 반대하여 칼빈과 베르밀리 를 공격하는 논문을 쓴 적이 있는데, 이후 그의 공격은 계속되었다. 따라서 칼빈은 이 해에 ‘베스트팔에게 주는 마지막 권고’를 작성하 여 응대한다.) (스코틀랜드로 돌아갔던 존 낙스가 다시 제네바로 와서 일년 동안 저술과 연구에 시간을 쏟는다. 그는 59년 5월 2일에 다시 스코틀랜드로 돌아간다.)

1558년: 건강 악화
(칼빈은 후반기부터 건강의 급속한 악화로 절식을 하게 된다. 때로는 일일 일식 을 취하게 되지만, 그러나 강의와 설교를 계속한다.)
• 12월: 당시 69세이던 파렐이 뇌샤텔에서 자기보다 30살이나 어린 한 가난한 처녀와 결혼한다. 그는 6년 후에 아들을 보았다.

1559년: 기독교강요 최종판
• 1월 26일: ‘소선지서 주석’이 고트족과 반달족의 왕, 곧 스웨덴 왕인 구스타프(Gustavus)에게 헌정된다. (2월 1일: 존 크리스핀에 의한 ‘독자들에게 헌정하는 글’게재)
(5월 2일: 존 낙스는 스코틀랜드 개혁 운동 추진을 위해 돌아갔다.)
• 6월 5일: 베드로 성당에서 칼빈 아카데미가 개교하게 되고, 이날 테오도르 베 자의 개교 강연이 있었다.
• 8월 1일: ‘기독교강요 제5판(최종판)’이 출판된다. 4판의 1권짜리 21장과 비교할 때, 4권 80장의 대작으로 확대되었다.
• 12월 25일: ‘이사야서 주석’이 재판되고, 이때에 비로소 제네바 시의 시민권이 칼빈에게 부여되었다. 이제부터 제네바 시의 정식 시민이 되었다.(이 해에 칼빈은 위그노들에게 프랑스 신앙고백을 작성해 주었다.)

1560년: 기독교강요 최종판의 프랑스어역 출판
• 8월 1일: ‘사도행전 주석’의 두 번째 판이 니콜라스 랏지빌(Nicolaus Radziwil)에게 헌정된다.
(8월 17일: 존 낙스가 동료들과 함께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을 작성한다. 본 고 백서는 제18장에서 ‘교회의 삼대 요소’를 규정하고 있는데, 당시 개혁파 교회가 전 통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던 교회의 표식, 곧 ‘말씀의 신실한 선포’와 ‘성례의 순수한 시행’ 두 가지에 더하여 ‘권징의 정당한 집행’을 세 번째 요소로 채택하였다.)

1561년: 다니엘서 주석
• 8월 19일: ‘다니엘서 주석’이 프랑스의 고난 당하는 경건한 신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헌정된다. “그리스도의 왕국이 프랑스에 올바르게 건설되기를 추구 하는 하나님을 경배하는 경건한 자들에게 건강이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이 해에 ‘벨기에 신앙고백’이 기도 드 베레(Guido de Bres)에 의해서 작성된다.네덜란드와 벨기에의 개혁파 교회들의 공인된 신조로 채택됨.)

1563년: 창세기 주석
(1월 19일: 멜랑히톤의 제자 자카리아스 우르시누스와 칼빈 의 제자 카스파 올레비아누스에 의하여 하이델베르그 요리문 답이 작성되고, 팔라티네이트의 선제후 프레데릭 3세에 의하여 발행된다.)
• 6월 31일: ‘창세기 주석’이 5경 속에 포함되어 다시 나온다. 이 때는 신명기를 거쳐, ‘출애굽기 주석’을 한 권에 담았다. 벤도메의 헨리 왕자에게 헌정된다.
• 7월 23일: ‘예레미야서와 애가서 주석’이 라틴어판으로 프레데릭 3세에게 헌정 된다.
• 11월 17일: ‘프랑스 교회 신앙고백’이 출판된다.
• 11월 30일: ‘모세 5경 프랑스어판’ 완역.
• 12월 29일: 1544년 초반에 칼빈의 예정론에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이후로 계속해서 칼빈을 대적하던 세바스틴 카스텔리오(Sebastian Castellio/ Castalio)가 두 명의 아내에게서 얻은 네 아들과 네 딸을 남기고 48세의 나이로 죽는다.

1564년: 칼빈의 사망
(대학에서 마지막으로 강의한다.)
•2월 6일: 설교 중에 피를 토하면서 최후의 설교를 한다.
•5월 27일: 54세 4개월로 오후 8시에 임종한다.
•5월 28일: 임종 다음날인 오후 2시에 제네바 시의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유언에 따라 공동묘지가 선택되었고, 역시 유언에 따라 묘비도 세우지 않았다.
(칼빈 사후, 베자에 의해서 ‘여호수아서 주석’이 나오게 되는데, 이 주석은 칼빈 의 죽음 이후 바로 출판에 들어갔고, 프랑스어판이 우선 출간됨으로써 프랑스의 독자들은 테오도르 베자가 칼빈의 삶과 죽음을 묘사한 것을 대할 수 있었다. 곧 이어 ‘여호수아서 라틴어판 주석’이 출간되었다.) • 5월 29일: 베자가 칼빈의 후계자로 선출된다.

1565년: 에스겔서 주석
• 1월 18일: ‘에스겔서 주석(1‐20장)’이 테오도르 베자에 의하여 출간되어 프랑스 대제독 콜리니 각하에게 헌정된다.
• 8월 1일: ‘에스겔서 주석’에 대한 프랑스어판 발행.
(1605년 10월 13일, 칼빈의 후계자 테오도르 베자가 사망한다.)

http://www.calvinacademy.net/show_pdf.php?id=1&filename=MrCtLnBkZg==
출처: https://cafe.daum.net/correcttheology/1LBU/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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