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의 인간론

 

서론

스위스에서 활동한 프랑스 출신의 종교개혁가 요한 칼뱅(John Calvin, 1509-1564)은 개신교 사상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위대한 신학자요, 교회 행정가였다. 그의 신학을 개혁주의 또는 칼뱅주의 신학이라고 부르며, 완전타락(Total Depravity),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제한구속(Limited Atonement), 거절할 수 없는 은혜(Irresistible Grace), 그리고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으로 축약해서 말할 수 있다. 이 다섯 가지 요점 가운데서 첫 번째 전제가 되는 완전타락이 인간본질에 관한 문제이며, 칼뱅의 교리를 이해하는 핵심논제이다.

 

완전타락이란 말은 인간은 나면서부터 본질적으로 유죄하며, 부패 하다고 보는 '결과론적' 인간론으로써 칼뱅의 이러한 사상은 그가 저술한 {기독교 강요}(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와 신학논문들 그리고 그의 주석들에 잘 나타나 있다.

 

그러나 칼뱅의 인간 본질론은 성 어거스틴(St. Augustine, 354-430)의 사상에서 그 전례를 찾을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완전탁락설을 칼뱅이 만들어낸 것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실제로 이 말은 어거스틴의 작품이다. 따라서 칼뱅의 인간 본질론은 어거스틴 사상의 확대 해석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 사상은 칼뱅주의라는 독특한 기독교 사상으로 위치를 굳혔고, 기독교신학의 한 축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모든 사상에는 주창자의 독특한 관점이 있고, 또 그의 주장에는 강점과 약점이 있게 마련이다. 따라서 이 글의 목적은 칼뱅의 인간 본질론에 대해서 알아보고, 강점과 약점을 찾아보는데 있다. 강점은 수용하고, 약점은 보완하여 발전시켜 나가고자 함이다.

 

앞에서 사용한 '결과론적'이란 말은 저자의 것으로써 원인을 분석하여 설명하는 귀납적 방식을 취하지 않고 결과물을 가지고 설명하는 연역적 방식을 말한다. 칼뱅은 주어진 결과를 보고 필연성의 입장에서 하나님 중심의 계시신학을 취하였기 때문에 인간의 자유나 우발성이 개입될 여지를 철저히 차단하는 약점을 갖고 있으나 구원받은 성도들에게는 큰 위로를 주는 강점을 갖고 있다.

 

칼뱅이 인간의 자유나 우발성의 개입여지를 차단한 것을 약점이라 하였으나 생각하기에 따라서 강점이 될 수도 있다. 하나님의 전지전능의 속성을 지지한다는 측면에서 보면 강점이지만, 인간의 모든 불행의 책임을 하나님께로 돌릴 수 있다는 점에서 보면 약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 때문에 하나님이 결코 모든 것의 원인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의지에는 하나님이 원하시고 하나님이 결정하시는 목적의지도 있지만, 하나님이 원하시고 인간이 결정하는 훈계의지도 있으며, 인간이 원하고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허락의지도 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전적으로 자유로운 분이시지만, 당신을 낮추시고 제한하시는 분이시며, 피조물을 찾아와 관계하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피조물을 만드신 그 자체가 하나님의 주권의 제한이다. 피조물은 만들어졌기 때문에 완전할 수 없다. 또 완전하지 못한 피조물은 필연적으로 죄인이 될 수밖에 없다. 완전하지 못함 그 자체가 곧 죄이다. 따라서 주권의 제한이 없이는 하나님께서 피조물 세계를 두실 수 없으며, 특히 배반을 일삼는 이성적 동물인 인간을 두신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피조물이 완전하지 못하다고 해서 그 책임이 하나님에게 있는 것은 아니다. 만일 피조물이 완전하다면 하나님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하나님을 모든 결과의 원인으로 책임을 전가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만일 우리가 인간에게 자유가 있다고 말한다면, 결과에 대한 책임은 하나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자유를 향유한 인간에게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완전하지 못한 피조물을 만드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전능하지도 전지하지도 않다고 말하는 것 또한 잘못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를 주심으로써 그 책임을 인간에게 두시고도 자유에 따른 인간의 모든 우발적인 행동들을 미리 아시고 예정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1535년 칼뱅은 [제네바 신앙고백서](Genevan Confession of Faith)를 초안하였는데, 이 신앙고백서에서 칼뱅은 인간의 본질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본질적으로 인간은 하나님의 참된 지식을 이해함에 있어서 소경이며, 흑암에 가려져 있고, 심령이 부패와 뒤틀림으로 가득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 자신은 하나님의 참된 지식을 바로 이해하며, 선한 일을 하는 데에 무능력하다. 그러므로 인간의 본질 그대로 인간이 하나님께 버림을 당한다면, 그는 단지 무지 속에 살 수 있을 뿐이며, 모든 죄중에 버림받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의 조명이 필요하며, 이 조명하심을 통해서 인간은 비로소 구원을 위한 바른 지식에 도달할 수 있다.[J. K. S. Reid, trans. and ed., The Library of Christian Classics, vol. 22, Calvin: Theological Treatises(Philadelphia: The Westminster Press, n.d.), p. 27.]

 

이 진술 가운데서 칼뱅 신학의 핵심을 이루는 몇 개의 중요한 인간 본질에 대한 개념들을 주목할 수 있는 데, '소경,' '부패,' '뒤틀림,' '무능력,' 그리고 '무지'와 같은 어휘들이 그것들이다. 그리고 이와 상반되는 개념을 또한 주목하게 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조명'으로써 이 말은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을 얻는 유일한 수단으로써 제시되고 있다. 이로써 보건대, 칼뱅 신학의 핵심 어휘는 '부패''하나님의 조명'이란 말로써 축약될 수 있음을 보게 된다. 그리고 칼뱅의 인간 본질론은 결국 이 두 어휘에서 찾아 볼 수 있기 때문에 이 논문의 초점을 여기에다 맞추어 전개해 보고자 한다.

 

1. 부패

칼뱅은 아담의 죄로 인해서 모든 인류가 하나님께 받은 모든 축복들을 상실했으며, 비참한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고 믿었다.[John T. McNeil, ed., The Library of Christian Classics, vol. 20, 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trans. by Ford Lewis Battles(Philadelphia: The Westminster Press, n.d.), , 1-7.]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담으로부터의 유전죄 즉 원죄에 대해서 확실하게 말하지 않았다. 물론 칼뱅은 원죄를 "인간의 영혼 구석구석에까지 퍼진 인간본질의 유전적 타락 또는 부패"[Institutes, , 1-8.]라고 기술하고 있다. 여기서 원죄와 유전적 타락 또는 부패와는 엄연한 차이가 있음을 지적하고자 한다. 원죄란 법적 개념의 술어요, 타락이나 부패란 인간본성에 대한 술어로써 질병과 관련이 있는 말이다. 원죄란 인간이 나면서부터 유죄함을 말하는 것이요, 부패란 그 본성이 병들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완전타락이란 인간이 나면서부터 본질적으로 유죄하며, 썩고 병들었다는 의미이므로, 칼뱅이 과연 이 교리를 믿었느냐하는 문제가 대두되지 않을 수 없다. 이 문제에 있어서 프레드 크루스터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칼뱅 연구에 있어서 이 혁신은 전통적인 의미에서 볼 때, 칼뱅은 결코 칼뱅주의가 아니었다 라고 진술될지 모른다는 것이 또한 제시되어진다.

 

최근에 칼뱅 사상에 있어서의 중심교리에 대한 개념이 정확하게 반박되어지고 있고, 증가되는 관심이 칼뱅의 교리에 대한 자료로서 성서의 중심성에 주어지고 있다.[Fred H. Klooster, Calvin's Doctrine of Predestination(Grand Rapids: Calvin Theological Seminary, 1961), p. 7.]

 

이 진술과 같이 칼뱅의 사상은 칼뱅주의라고 할 수 있는 어거스틴의 견해와는 사상적으로는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을지 몰라도 논리적으로는 분명한 차이가 있음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바꾸어 말하면, 칼뱅은 어거스틴의 유전적 타락과 원죄개념에 100% 동의하고 수용하였다 할지라도, 논리적으로 칼뱅의 주장은 원죄와 인간의 본질 문제인 부패를 구분치 않음으로서 절반펠라기우스주의(Semi-Pelagianism)의 견해를 옹호하는 듯 보였다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인간은 "무죄하지 아니하고, 유죄한 자녀를 출생한다. 왜냐하면, 그는 부패한 본질로부터 그들을 낳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Institutes, , 1-7.] 그리고 "유아들은 자범죄로 태어나지 아니하나, 원죄로 태어난다"고 말함으로써 원죄를 말하고 있다.[Ibid., , 1-5.]

 

절반펠라기우스주의란 인간은 나면서부터 무죄하나 본질적으로 부패한 상태로 태어난다고 믿는 절반칼뱅주의(Semi-Calvinism)를 말한다. 이 견해를 가진 사람들은 인간은 본질상 타락하였다고 보나, 아담으로 인한 원죄는(5:14) 그리스도의 한 순종의 행위로 인하여 정죄 그리고 사망으로부터 해방되었다고 믿는다.

 

인간 아담의 범죄로 원죄가 적용되고 모든 사람이 죽는다면, 하나님이신 그리스도의 순종은 더욱더 모든 사람들에게 선물이 넘쳤다고 바울은 말한다(5:12-21). 그러므로 은사는 범죄에 비교될 수 없으며, 아담의 범죄의 결과보다 더욱 크다고 강조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의의 선물은 아담의 죄의 결과보다 더욱 넘치고 생명 안에서 왕노릇 한다는 것이다. 또한 아담의 원죄보다 그리스도의 은혜가 원대하고 그 미치는 범위도 넓다는 뜻으로 보아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는 원죄를 말살하며, 그 범위가 아담에게까지 미친다고 보는 것이 절반펠라기우스주의이다. 그러므로 유아들이나 성인들이나 과거인이나 현재인이나 미래인이나 모두 원죄에서 해방된다고 본다.

 

칼뱅이 원죄와 부패와를 혼동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뱅을 일컬어 절반펠라기우스주의자 라고 말할 수는 없다. 차라리 그를 어거스틴주의라고 말해야 옳을 것이다. 그가 어거스틴주의자임에도 불구하고 원죄개념에 충실치 못했음을 몇몇 인용구들을 통해서 더 자세하게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리라 생각된다.

 

인간이 죄로 물들었을 때, 오염이 인간의 본질에로 기어들었다. 때문에 썩은 가지들은 썩은 뿌리에서 나왔으며, 가지들의 썩음은 또한 그 가지들에서 나오는 싹들에까지도 스며들었다. 그러므로 어린아이들은 부모로부터 부패하였으며, 그들은 그 질병을 또한 그들의 자녀들에게 전달한다. 즉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부패는 항구적인 흐름을 타고 그의 모든 후손들에게로 전달되어졌다. 왜냐하면, 오염은 육체나 영혼의 본질에 그 기원을 갖지 않기 때문이며, 첫 번째 사람이 단 한번에 또한 동시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부여하신 은사들을 소유하거나 상실토록 하나님께서 정하셨기 때문이다.[Ibid., , 1-7.]

 

여기서 보는 바와 같이 칼뱅은 분명히 인간본질의 질병을 다루고 있지, 유죄문제를 언급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다. 그가 사용한 '썩은 가지,' '썩은 뿌리,' '부패,' '질병,' '전달'과 같은 모든 어휘들은 인간본질에 관련된 용어들이지 법적 개념을 소유한 말들이 아니다. 질병은 유무 죄와는 관련이 없다. 질병을 앓고 있다고 해서 법을 어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유죄와 부패는 엄연한 구분이 있는 별개의 문제이다.

 

인간의 구원문제에 있어서 칭의와 성화를 별개의 것으로 다루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칭의를 법적 개념으로 본다면, 성화는 인간본질의 상태를 말하는 말이다. 칭의를 선포되고, 간주되고, 전가된 의라고 말하는 것은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단번에 무죄를 선포하심으로써 의롭다고 간주해 주시는 하나님의 의로우신 사랑의 전가를 말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화를 만들어진 의 또는 보상된 의라 부르는 것은 의사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부패하고 타락한 심령상태를 성령을 통해서 점차적으로 성결 되게 만들어 가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티켓은 바로 이 단번에 이루어진 칭의로 받는 것이며, 성화로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견해가 기독교의 정통교리인 것이다. 성화의 정도는 상급의 크기를 정하는 규준이 될 것으로 믿는다.

 

. 유아 유죄론

여기서 우리는 칼뱅의 유아 유죄론을 살펴봄으로써 그의 원죄개념을 살피는 것이 합당하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이 문제에 있어서 칼뱅의 견해가 명쾌하지 않다는 것을 이미 전제한 바와 같이 그의 원죄개념을 밝히는 일이 그리 단순하지만은 않다.

 

칼뱅에 의하면, 인간의 본질은 '죄의 씨앗'이다. 왜냐하면, 아담으로부터 썩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본질이 죄의 씨앗이라 할지라도 죄는 인간의 부패된 본질에서 유래하는 것이지, 아담에게서 오는 것은 아니다. 칼뱅은 "불순한 씨앗으로부터 죄의 오염에 날 때부터 전염된다"고 말한다. 여기서 칼뱅이 혼동하는 것은 "죄의 오염"이다. 우리가 조상으로부터 유산으로 물려받은 것은 질병이지, 유죄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칼뱅의 진술을 면밀히 검토해 보면, 그가 유아들이 죄로 태어난다고 믿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유아들이 '죄의 씨앗'으로 태어난다고 믿었다.[Ibid., , 1-5.] 설사 칼뱅이 유아유죄를 믿었다 할지라도 이 유죄는 아담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오, 유아 자신들의 것임을 칼뱅의 다음과 같은 진술에서 찾을 볼 수 있다.

 

한편 유아들이 모태로부터 그들의 저주를 받아 나온다 할지라도 유아들 자신들의 유죄는 다른 이로 인함이 아니오, 자기 자신들의 잘못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죄악의 열매들이 아직 맺히지 않았다 할지라도, 그들 속에 그 씨앗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진실로 그들의 전체 본질은 죄의 씨앗이다. 때문에 그것은 하나님께 증오스런 것이며, 가증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죄로 간주되어진다고 할 것이다. 왜냐하면, 범죄 함이 없이 정죄함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Ibid., , 1-8.]

 

죄를 짓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유아들이 날 때부터 그들의 저주를 가지고 나온다고 해서 아직 죄를 범하지도 아니한 그들을 죄인으로 간주하는 일이 가능한 일인가? 실제로 유아들이 가지고 나오는 저주, 즉 원죄의 결과는 육체의 사망과 고통이지, 영적 죽음은 아직 아니다. 물론 모든 피조물은 필연적으로 또는 결과적으로 죄인이 되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병을 앓고 있다고 해서 죄가 아니며, 질병 그 자체가 또한 악이라 할지라도, 아직 죄는 아니다. 전 인류의 본질은 부패하기 때문에 죄의 씨앗이 될 수는 있지만, 씨앗 그 자체가 아직 죄로 간주될 수는 없다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뱅은 죄의 씨앗이 필연적으로 죄의 열매를 맺게 되어 있기 때문에 그 결과에 주목하여 죄로 간주한다. 그러나 만약 죄의 씨앗이 유죄라고 한다면 그것은 유아 자신들의 것이 아니라, 아담의 죄인 것이다. 이것이 원죄일 것이다. 이것이 바로 칼뱅주의가 칼뱅의 신학이 아니라는 의혹을 갖게 하는 요소인 것이다. 다음과 같은 칼뱅의 글이 이를 입증한다.

 

우리의 파멸은, 그러므로, 하나님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이 아니오, 우리 육체의 범죄 함으로부터 온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본래의 상태로부터 타락하였기 때문에 멸망한 것과 같다.[Ibid., , 1-10.]

 

원죄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 자연의 법칙이 그것을 증명한다. 성경은 죽음을 죄의 삯이라고 분명하게 말한다. 자연의 법칙이 죽음의 법칙(엔트로피 법칙)이 된 것은 분명 죄 때문이었을 것이다. 자기 죄가 전혀 없는 유아들이 죽은 것도 바로 원죄 때문이다.

 

그렇다해도, 유아들의 유죄문제는 여전히 이슈로 남게 된다. 하나님의 구원의 완성은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때로 맞춰져 있다.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미 구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육체의 고통을 그대로 당하고 있는 이유가 바로 영적으로는 구원을 약속 받았지만, 육체적으로는 그 구원이 재림의 때로 연기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 성도들이 죄사함을 받고도 죽는 것과 마찬가지로 유아들은 죄가 없이도 죽을 수 있다는 가능성이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런 가능성의 배경은 인간 아담의 불순종의 결과보다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순종의 결과가 더욱 더 크고 넘쳤다는 로마서 512-21절의 말씀에 있다.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의 은총이 아담의 때까지 소급되어 원죄를 말살하지 말아야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럴 경우 원죄는 말살되어도 원죄의 결과는 여전히 재림과 부활의 때까지 지속되게 된다.

 

. 자유 의지론

칼뱅은 인간이 하나님께 부여받은 모든 재능을 완전히 상실했다고 믿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가 인간의 자연적 은사들이 전체적으로 파멸되지 않았다고 믿었다 하더라도, 영적 은사들은 소멸되었으며, 남은 자연적 은사들도 부패하였다고 믿었다. 그리고 인간이 동물과 구별될 수 있을 정도의 충분한 이성과 하나님의 형상은 남아 있다고 생각하였다. 사실 인간을 인격체라고 볼 때, 인격의 요소인 지정의 및 관계는 누구나가 인정하는 것이다. 칼뱅도 이를 인정하면서도 죄로 오염된 인간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해와 판단을 위한 무엇인가가 의지와 함께 잔여 분으로 남아있다 할지라도, 약하고 깊은 흑암에 빠진 마음을 건실하고 건전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의지의 타락은 너무도 잘 알려진 바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선과 악을 구별하는 이성은, 그리고 그가 이해하고 판단하는 이성은 자연적 은사이기 때문에 완전히 소멸되었다고 할 수 없으리라. 그러나 그것은 부분적으로 약화되었고, 부분적으로 부패하였다. 그러므로, 이성의 기형적 파멸이 드러나고 있다.[Ibid., , 2-12.]

 

또한 칼뱅은, "여전히 우리는 이러한 차이점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약간의 잔존의 흔적을 보며, 전체 인류를 다른 피조물들로부터 구별한다."[Ibid., , 2-17.]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무엇인가 좋은 것이 인간에게 남아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아무 것도 인간의 것이라곤 없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께 겸손해야 한다. 인간은 아담의 범죄이후로 가공할 상태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라고 말한다.[Ibid., ,1-1] 그리고 인간이 이러한 자신의 상태를 알고 있다면, 그는 자신의 자만을 스스로 포기할 것이다 라고 말한다. 어떻든 칼뱅은 자연적 은사로써 인간의 이성은 완전히 소멸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자유의지에 대한 오리겐의 정의를 받아 드림으로서 부분적으로나마 인간의 자유의지를 인정하고 있다. 오리겐의 인간의 의지에 대한 정의는 당시의 교회지도자들 사이에 일반적으로 수용된 견해로서, "자유의지는 선악을 구별할 수 있는 이성의 재능이며, 이것저것을 선택할 수 있는 의지의 재능이다"라고 말한다.[Ibid., ,2-4]

 

그러나 칼뱅은 죄인이 하나님의 은총을 얻기 위해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가라는 질문에서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부정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칼뱅이 과연 죄인이 자유의지로 복음의 초청에 자의로 응할 수 있으며, 믿음을 소유할 수 있느냐의 문제에 있어서는 또 한번의 논리적 모순성을 드러내고 있다. 바울의 경우를 보면, 하나님께서 두 가지 구원의 길을 우리에게 보이셨는데, 그 첫째가 율법의 준수를 통한 행위로 받는 구원, 즉 인간의 의로 받는 구원의 방법이었다. 그러나 죄로 인해서, 이 구원의 길은 인간에게 막혔고(1:18-3:20), 하나님의 의로우신 은총으로 말미암아 믿음을 통해서 가는 구원의 길을 예비하셨다고 말한다(3:21-5:21).

 

여기서 바울과 칼뱅의 차이점을 찾는다면, 칼뱅은 인간의 의지의 행위로는 하나님의 은총을 입을 아무런 행위도 할 수 없다고 하였고, 따라서 참된 하나님의 지식에 도달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에게 있어서의 믿음은 하나님의 계시에 의한 지식의 개념으로 받아 드려짐으로서 성령의 조명 없는 특별계시를 부인하였고, 인간이 설사 자신의 의지와 이성적 깨우침으로 하나님의 복음의 부르심에 응하였다 하더라도, 그의 받은 바 계시는 일반적 계시에 지나지 않음으로 참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부족으로 결국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고 보았다. 칼 바르트 역시 자연계시나 일반계시의 무용성을 주장하였다. 일반계시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하나님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칼뱅이 특별계시를 선택된 자에게 국한시킨 것은 결과론에 치중한 결과이다.

한편 바울에게 있어서의 믿음은 구원을 받는 수단이나 도구로서 언급되고 있으며(2:8), 선물로서 보지는 않았다. 구원 그 자체는 하나님이 예비하신 하나님의 의로우심에 의한 죄인에 대한 선물이긴 하지만, 믿음은 그 선물을 소유할 인간의 자세를 말하며, 계시의 정도를 의미하지는 않았다. 물론 구원하는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그에 대한 진술들에 대한 동의라 할지라도, 교리에 대한 믿음은 아니며, 칭의 하심이 점진적 성화와 구분하여 일시적이고 단번에 선포하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인 만큼 구원하는 믿음은 칼뱅이 생각하는 것처럼 성서가 우리에게 하나님에 관한 지식의 정도나 깊이에 의존되지 않는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율법을 주시고, 여러 가지 계명을 주신 그의 훈계의지에서 그 존재를 찾을 수 있고, 행위의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성서가 말하는 율법의 충족은 언제나 100% 준수를 말하는 것이므로 행위로는 그 누구라도 구원에 이를 수 없음을 선포하였다(2:10; 3:10).

 

이것은 인간이 전혀 아무런 좋은 일을 할 수 없다는 뜻이 아니다. 인간은 다 피조물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완전하지 못하다. 예를 들어 보자.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드셨기 때문에 뛰어난 이성을 갖춘 동물이란 사실은 자명하다. 그 인간이 하나님이 정한 100미터 넓이의 죽음의 계곡을 뛰어 넘고자 한다고 치자. 그런데 그의 능력의 한계가 99미터라고 치자. 그가 그 죽음의 계곡을 뛰어 넘을 수 있겠는가? 불가능하다. 이와 같이 인간이 스스로의 행위로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은 그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뜻이 아니다. 그는 만물의 영장이지만 또한 피조물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요구 조건을 충족시킬 수 없을 뿐이다. 그러므로 행위로는 누구라도 구원에 이를 수 없는 것이다. 칼뱅이 말하는 완전무능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인간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은 구원받은 자만이 하나님 앞에서 할 수 있는 겸손한 신앙고백이다. 칼뱅의 강점은 구원받은 자만이 할 수 있는 이 겸손한 신앙고백에 있다. 그러나 인간에게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자유로운 응답까지 빼앗는다면, 그것은 분명 약점이 될 수도 있다. 칼뱅이 인간의 이성이나 자유를 부정한 것은 아니다. 단지 칼뱅은 구원받은 자의 신앙고백의 관점에서 결과론에 주목하였을 뿐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칼뱅은 제롬이나 크리소스톰의 견해를 반박하면서 중세 천주교의 구원의 교리인 합일치 공덕이나 완전 공덕론을 철저히 반박하였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에 의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구원을 명백하게 공언하였다. 그러므로 그가 인간의 자유의지를 부정한 주된 이유를 인간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두려움으로 섬기도록 하며, 따라서 그들의 공덕을 자랑치 못하게 하고, 하나님께서 행하신 은총의 사역에 대해서 감사토록 하며, 최고의 위안으로 그들을 영감하며, 그들의 공덕에 대한 불완전함과 불결함을 생각한 나머지 실망에 빠지지 않도록 위로하며, 그리고 하나님은 사랑의 아버지이시요, 그들의 죄를 기꺼이 용서하시기를 기뻐하신다는 것을 기억토록 한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Treatises, op.cit., p. 202.]

 

칼뱅은 또한 의지의 속박을 결코 믿지 않았다. 그는 심지어 유기자라할지라도 선택된 자들과 같이 약간의 신령한 체험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인정하였다. 다만 그는 그것을 위선이나 일시적인 것으로 경시하고 말았다는데서 문제가 있다. 그것이 비록 일시적인 것이긴 하지만 그것은 분명 죄인이 자의로 복음의 초청에 응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마르틴 루터는 의지의 속박을 철저하게 수용하였다. 이런 관점에서 루터는 칼뱅주의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의지의 속박없이 인간의 완전타락을 말할 수 있으며, 인간의 완전 무능을 말할 수 있는가를 믿는 것이 용이치 않다. 인간의 완전무능을 말하지 않고서는 칼뱅의 조명론을 수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2. 성령의 조명론

여기서 우리는 칼뱅의 성령의 조명론에 대해서 살펴봄으로써 그의 인간론에 더욱 가깝게 접근해 보고자 한다.

 

칼뱅의 자유의지론은 그의 조명론에 비추어서 올바로 이해될 수 있다. 칼뱅이 비록 인간의 의지의 속박이나 법적 개념으로서의 유죄문제에 대해서 불투명한 설명을 함으로써 다소의 논리적 문제점을 제기하였다 하더라도, 완전타락설이나 완전 무능설 또는 의지의 속박을 배제하고서는 그의 조명론을 이해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칼뱅의 자유의지론은 죄인이 하나님을 믿거나 회개할 수 있는 선택의 여지를 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칼뱅에게 있어서, 믿음이나 회개는 분명히 하나님의 선물이며, 죄인이 구원을 얻기 위해서 그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성의나 태도라고 보지 않기 때문이다.

 

칼뱅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계시는 그것이 자연을 통한 일반계시이든지, 성경을 통한 특별계시이든지 간에 성령의 조명하심이 없이는 하나님이 구세주이심을 깨달을 수 없기 때문에, 자연이든지, 성경이든지, 유기자들에게는 모두 다 일반계시에 지나지 않으며, 선택된 자들에게 주시는 성령의 내적 증거에 의해서만이 비로소 성경을 특별계시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받기로 선택되지 아니한 자들에게는 어떠한 형태의 특별계시도 주어지지 않았다고 본다. 칼뱅은 "성령의 조명 없이는 하나님의 말씀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하였고, 성령은 믿음을 주시는 분일뿐만 아니라, 그 믿음이 자라 신령한 하늘의 지식에까지 이르도록 도우신다고 주장한다.[Institutes, III. 2-33.]

 

이것은 곧 인간의 무능 또는 완전타락을 말하는 것이며, 이 완전타락이나 무능은 어디까지나 인간이나 자연만물에 대한 인간의 한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오,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한계이며, 인간의 의에 의한 구원의 논리를 배제하고 하나님에 의에 전적으로 의존케 하려 함이다. 그러므로, 칼뱅의 신학을 신 우선주의 신학이라 말할 수 있다.

 

. 믿음과 회개

이러한 신 우선주의 관점에서 볼 때, 칼뱅에게는 믿음이나 회개조차도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지, 인간이 할 수 있는 무엇이 아니라고 본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그의 제네바 교회의 교리문답집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여기서 믿음을 특별한 하나님의 선물로 주장하고 있다.[Treatises, op.cit., p. 105.] 또한 그의 {기독교 강요}에서도 칼뱅은 "믿음은 성령의 주된 사역이다"라고 하였고, "믿음 그 자체는 성령이외에 다른 근원에 의존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Institutes, IV. 1-4.] 그는 또 다음과 같이 믿음을 정의하였다. 믿음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확고하고 분명한 지식이며, 그리스도안에서 값없이 주어진 약속의 진리 위에 기초한 것이며, 성령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에 나타났고, 우리의 심령에 봉함된 것이다"라고 하였다.[Institutes, IV. 2-8.]

 

그러나 칼뱅에게 있어서의 이 믿음은 선택된 자들만이 누리는 축복이며, 버려진 자들에게는 전혀 해당되지 않는다. 그는 "오직 구원받기로 예정된 자만이 믿음의 빛을 받으며, 복음의 능력을 진정으로 느낀다"고 하였고, "버림당한 자들은 은혜에 대한 혼돈된 인식 이외에 아무 것도 결코 받지 못한다"고 하였다.[Institutes, III. 2-11.] 이러한 이유 때문에 선택된 자들은 참된 믿음을 유기자들은 거짓 믿음을 갖는다고 하였다.[Institutes, III. 2-12.] 따라서 참된 믿음은 확신과 확실성을 준다고 하였다.[Institutes, III. 2-15,16.]

 

믿음이 확실한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에 회개도 또한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선물이다.[Institutes, III. 3-21.] 칼뱅에게 있어서 회개란 믿음의 결과이며, 믿음에 의해 탄생된다.[Institutes, III. 3-1.]

 

한편 칼뱅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는 터라, "모든 사람은 외적 전파에 의해서 회개와 신앙으로 부름을 받는다"고 하였고, "하늘의 영적인 지혜를 통달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깨닫는 마음을 지니고 있으며. . . 비록 하나님의 진정한 지식에는 도달하지 못하나, 그 사람은 신성에 대한 어느 정도의 이해는 소유한다"고 하였다.[Institutes, II. 5-19] 따라서 칼뱅은 유기자라고 해서 하나님을 믿지 못한다거나 신앙을 가질 수 없음을 말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그는 선택자나 유기자의 구별은 유기자의 일시적 신앙생활에 못을 박았고, 저들을 위선자라고 칭하였다.[Institutes, III. 2-11.] 칼뱅은 유기자와 선택자들의 차이점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대답한다: 하나님께서 선택한 자들과 일시적으로 믿음이 주어진 자들 사이에 상당한 유사함과 비슷한 점이 있지만, 오직 선택된 자들만이 확신을 가지고, 성장해 나갈 수 있다. . . . 그러므로, 하나님은 영원히 썩지 아니할 씨로 오직 선택된 자들만을 중생 시키시며(벧전 1:23), 그들 심령에 뿌려진 생명의 씨앗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양자의 은사로 그들 속에 확고히 봉함 하시며, 그것은 확고하고 분명할 것이다.[Institutes, III. 2-11.]

 

유기자들도 그들에게 자비로우신 하나님을 믿는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이 화목의 선물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혼동하고 분명한 깨달음이 없는 것이며, 하나님의 자녀들이 가진 그와 같은 믿음이나 중생에 참여한 자들이 아니다. 그러나 위선의 가리개 아래서, 그들은 그들과 공통의 믿음의 원칙을 갖는 것 같다. 이러한 정도에서 하나님은 그들의 심령에 조명을 하신다는 것과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인지한다는 것을 결코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관점에서 하나님께서 선택된 자들에게 주신 특별한 증거와 구별한다는 확증과 유기자들은 결단코 충분한 결과나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것도 부인하지 못한다.[Institutes, III. 2-11.]

 

여기서 분명히 볼 수 있는 것은 유기자들도 선택된 자들과 같이 분명히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데, 그것은 일시적이며, 위선적이라는 것이다. 환언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보편적 지식에 대한 조명하심으로 누구나가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고, 믿음을 가질 수 있으나, 오직 선택된 자에게만 성령께서 구원의 확증과 확신을 주신다는 것이며, 유기자들은 결국 어느 시점에 이르면, 타락하고 말 것이라는 견해인 것이다. 칼뱅에게 있어서, 인간의 이성이나 자유의지는 인간적 노력으로 하나님을 찾는 인 본위 신앙이므로 이를 철저히 배제하고 하나님의 선택하시고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철저한 신 본위 신앙을 주장하였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칼뱅의 조명론은 구원하는 믿음을 이원화시키는 모순을 낳고 있다. 구원하는 믿음을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라 시인하며(신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동의)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10:9-10)하신 말씀 속에 있다고 볼 때, 인간 이성에 의한 자율적 선택에 의한 불완전한 믿음과 성령의 조명에 의한 완전한 믿음으로 이분화 시킬 수 없다.

 

신자가 믿다가 타락하기까지는 선택된 자인지 아닌지를 구별할 방법이 없고, 또 그가 탕아와 같이 다시금 주님께로 돌아 올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에 아무도 선택된 자의 규정을 정할 수 없고, 신앙의 결과로서만 알 수 있다고 볼 때, 칼뱅의 조명론은 결과론에 근거하여 끝까지 믿음을 지킨 남은 자에서 출발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칼뱅의 조명론에서 제시된 요한복음 1426, 1613, 마태복음 1019-20절의 말씀들은 사도들에게 국한된 말씀들이며, 모든 성도들에게 확대된 약속으로 볼 수 없다. 만일 이 말씀들을 모든 성도들에게 적용시킨다면, 우리는 결코 교리적 논란으로 다투지 않아도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 볼 때, 칼뱅의 제한 구속론이나 성도의 견인론은 구원론에 의한 필연적 결과라기보다는 결과론에 의한 귀결이라고 보여진다. 따라서 인간의 선택과 유기는 인간이 범함 죄에 근거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행사에 근거한 신권을 옹호한다기보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은혜를 체험한 성도의 겸손한 신앙고백에서 나온다고 할 것이다.

 

결론

간략하게나마 칼뱅의 인간론을 점검하여 보았다. 칼뱅이 주장한 인간론의 특징은 인 본위를 철저히 배격하고 신 본위를 내세운 점에 있다고 할 것이다.

 

성서가 하나님을 창조주로, 인간을 피조물과 죄인으로 고백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 하나님을 창조주로, 예수를 부활의 주로, 성령을 임마누엘로, 그리고 인간을 피조물로 고백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앙의 위대함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인간은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고 그의 절대주권을 신앙으로 고백하게 될 때에 혼돈과 흑암의 세상을 살면서도 빛과 질서의 삶을 체험할 수 있으며, 죽음의 세계에 살면서도 부활의 삶을 맛볼 수 있으며, 하나님의 부재의 현실과 하나님의 침묵의 현실 속에서도 임마누엘의 삶을 선취할 수 있으며, 분명한 역사의식과 목적의식과 소명의식을 가지고 살아 갈 수 있다. 또한 인간은 이 신앙 속에서 보다 적극적이고 긍정적으로 재창조의 영을 가지고 살아 갈 수 있다. 이 뿐만 아니라, 인간은 자신을 죄인과 피조물로 인식하게 될 때에 비로소 자기를 만드신 분에게 예배의무가 있음을 발견하게 되고, 자신이 소유한 물질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임을 알게 된다. 인간이 피조물이란 말은 스스로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며, 부족한 존재이며, 죄인임을 시인하는 것이다. 그러나 칼뱅의 인간론에서는 인간에 대한 부정적이고 결정론적인 측면이 지나치게 부각됨으로써 기독교 신앙의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면의 책임성과 재창조의 정신이 오히려 약화되고 있지 않나 생각된다.

 

또 요한 칼뱅은 완전타락을 믿으면서도 부패와 죄성을 구분치 않았으며, 구원하는 믿음을 하나님의 계시에 의한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의 개념으로 생각함으로서 성령의 조명함이 없이는 성서라도 진정한 깨달음을 주지 못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일부 선택된 자들만이 참된 믿음을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한 점은 신자들에게 구원의 확신과 고집스런 믿음을 심어줄 수 있는 강점을 갖고 있다. 모든 신자들은 칼뱅적인 신앙고백을 가져야 한다는 점에서 교회 내에서의 신앙교육에 중요한 강점을 지닌다.

 

다른 한편에서 칼뱅의 인간 본질론은 선택과 유기에 대한 불확실성으로 결단의 보류와 방탕의 길을 걷게 할 가능성도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심지어 잘 믿던 자라도 결과적으로 구원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고의적인 타락의 길을 걸을 수도 있다. 또 신앙의 배타성으로 인하여 자칫 전도의 대상을 유기자로 잘못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뱅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갖는다면, 약점으로 지적된 내용들은 단순한 기우에 불과할 수도 있을 것이다.

 

참고서적

Klooster, Fred H. Calvin's Doctrine of Predestination. Grand Rapids: Calvin Theological Seminary, 1961.

McNeill, John T., ed. The Library of Christian Classics. Vol. 20. 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Trans. by Ford Lewis Battles. Philadelphia: The Westminster Press, n.d.

Reid, J. K. S., trans. and ed. The Library of Christian Classics. Vol. 22. Calvin: Theological Treatises. Philadelphia: The Westminster Press, n.d.

 

출처

http://theologia.co.kr/cgi-bin/spboard/board.cgi?id=a4&action=view&gul=55&page=13&go_cnt=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