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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의) 신학 구조

쥬니어칼빈 2013.08.09 19:59 Views : 5532

(칼빈의) 신학 구조

최근의 칼빈연구, 한국칼빈학회,

이양호교수

  칼빈 연구가들은 칼빈 신학의 구조를 찾아내려고 고심해 왔다. 일부 연구가들은 칼빈 신학의 중심적 교리를 찾아 그 교리에 의해 칼빈 신학 전반을 해석해 보려고 했으며, 또 일부 연구가들은 칼빈의 주저인 「기독교 강요」의 구조를 해명함으로써 칼빈 신학의 구조를 찾아 내려고 했다.     20세기 초까지 칼빈 연구가들은 칼빈 신학의 통일적 원리를 하나님의 예정으로 보고 이 통일적 원리에서부터 칼빈 신학의 각 주제들을 연역해 내려고 했다. 이런 경향을 대가다운 필치로 서술한 사람은 트뢸취(Ernst Troeltsch)였다. “칼빈주의의 첫째 가는 독특한 특징이며 가장 중요한 것은 칼빈주의의 유명한 중심 교리인 예정에 대한 관념이다.”  칼빈은 예정에 대한 관념에서 “절대적 주권적 의지로서의 하나님의 특성을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칼빈에게 있어서 “중심적인 점은 피조물의 자기 중심적인 개인적 구원이나 신적인 사랑의 의지의 보편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다.” 요컨데 트뢸취는 칼빈을 하나님의 예정,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 하나님의 영광을 강조한 하나님 중심적 신학자로 보았다.
  전통적으로 칼빈 연구가들이 트뢸취처럼 칼빈의 신학을 하나님 중심적으로 해석해 온 데 반해 니젤(Wilhelm Niesel)은 그리스도 중심적 해석을 했다. “칼빈은 교리의 모든 부분에 있어서 한 가지 사실, 즉 육체 안에 계시된 하나님에 대해서만 관심을 둔다.”  “예수 그리스도는 칼빈주의적 사상의 내용 뿐만 아니라 형식도 지배하고 있다.” 게리쉬(B.A. Gerrish)가 “엄격한 하나님 중심적 사상가로서의 칼빈에 대한 옛 이미지가 그의 신학안에 있는 기독론적 요소에 대한 새로운 평가에 의해 수정받아 왔다”고 말한 것처럼 니젤의 이 해석은 그 후 큰 영향을 미쳐 왔다.
  그런데 근래에 와서 칼빈 신학이 하나님 중심적이냐, 그리스도 중심적이냐 하는 문제가 제기되기 전에, 워필드(Benjanin B.Warfield)는 칼빈을 무엇보다 “성령의 신학자”라고 했다. “어떤 의미에서 죄와 은총에 대한 교리가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시작되었고, 보상에 대한 교리가 안셀무스에게서 시작되었고 신앙 의인론이 루터에게서 시작되었다고 한다면, 우리는 성령의 역사에 대한 교리는 칼빈이 교회에 준 선물이라고 말해야 한다.” 또한 워필드는 이렇게 말했다.

  그의 손에서 교회 사상 처음으로 성령론이 제자리에 왔다. 어느 누구의 마음 속에서보다 그의 마음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의 비전이 빛났으며, 그리고 그는 누구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않으려고 했다. 어느 누가 그보다 자기를 피로 산 구주에게 더 헌신했는가? 그러나 무엇보다도 하나님에 대한 칼빈의 모든 사상을 특징 짓는 것은 성령의 전능한 능력에 의한 구원의 주권적 역사에 대한 의식이다. 그러므로 그는 무엇보다도 “성령의 신학자”라는 위대한 이름을 받을 만하다.  

  우리는 여기서 칼빈 신학은 하나님 중심적인가, 그리스도 중심적인가, 혹은 성령 중심적인가 하고 묻게 된다. 칼빈의 본문들을 연구해 보면 위의 주장들은 각각 타당성이 있음을 보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공적에 대해 다룰 때 그 안에 기원을 두지 않고 제일 원인인 하나님의 결정으로 향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선의를 떠나서는 아무 공적을 쌓을 수 없었다.” 이런 표현들은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에 종속시키고 있음이 명백하다. 그러나 다른 한편 칼빈은 요한복음 주석에서 “창세로부터 모든 족장들은 그리스도로부터 그들의 모든 은사를 받았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기독교 강요」에서 “그[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죄들이 우리에게 전가되지 않게 할 수 있다”라고 말한다. 이런 주장들은 부명히 그리스도 중심적인 것들이다. 또 다른 한편 칼빈의 신학에서 성령의 역사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성서 기자들에게 영감을 주신 분도 성령이요, 성서 독자들에게 성서를 깨닫게 하시는 분도 성령이며, 성례를 통해 은총을 주시는 분도 성령이다. 성령의 은밀한 활동에 의해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그의 모든 축복들을 향유하게 된다.” 이상의 구절들을 종합해 본다면 칼빈 신학에서는 하나님, 그리스도, 성령이 모두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환언하면 칼빈 신학에서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 일체 하나님이 중심 주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 가지 실례로 신앙에 대한 칼빈의 정의를 보면, 이 짧은 정의 속에 성부, 성자, 성령이 다 언급되고 있다.

신앙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자애에 대한 확고하고 확실한 인식으로 그리스도 안에 값없이 주어진 약속의 진리에 근거한 것이며 성령을 통해 우리 지성에 계시되고 마음에 인쳐진 것”이다.

  칼빈의 본문들에는 위와 같은 삼위일체적 도식이 많이 나오고 있다. 칼빈은 이런 자기의 도식이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인설에 부합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구원에 있어서 동인은 하나님 아버지시며, 질료인은 그리스도이시며, 형상인 혹은 도구인은 신앙이며, 목적인은 하나님의 공의, 혹은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한다. 또한 사도행전 22:16을 주석하면서 “그러므로 죄의 용서에 있어서 우리는 하늘 아버지 이외 다른 창시자를 찾지 말아야 하며 그리스도의 피 이외 다른 질료인을 상상하지 말아야 한다. 형상인으로 말하면 성령이 참으로 지도적인 역할을 하시지만 복음의 선포와 세례와 같은 하급 도구가 첨가된다.”라고 말한다. 이 본문들을 보면 칼빈은 대체로 하나님을 동인으로, 그리스도를 질료인으로, 성령의 활동을 형상인으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두 본문에서 4원인과 하나님의 역사를 관계시키는 것이 정확하게 일치하지는 않는데 그것은--칼빈이 자기의 생각을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인설에 그대로 부합시키려고 노력한 것이 아니라--그의 삼위 일체적 도식이 4원인설과 엇비슷하게 일치했기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1917년 구마(Louis Goumaz)는 요한 칼빈의 신약성서 주석에 따른 구원론이라는 저서에서 위와 비슷한 해석을 한 바 있다. 구마는 하나님 아버지를 구원의 동인으로, 그리스도를 질료인으로, 성령의 활동을 형상인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목적인으로 해석했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바와 캍이 칼빈 자신은 이렇게 정형화하지는 않았다. 구마는 지나치게 아리스토텔레스의 구조에 칼빈의 사상을 맞추려고 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잘못이 있긴 하지만, 지금까지 칼빈 연구가들이 구마의 이 저작을 깊이 음미하지 않은 것은 애석한 일이었다고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지금까지의 칼빈 연구가들이 지닌 결점들이 드러난다. 칼빈 신학을 하나님 중심적으로 해석한 사람들은 동인을 칼빈 신학의 전체인 양 오해한 것이다. 반면에 니젤은 질료인을 칼빈 신학의 중심 주제로 과장한 것이다. 워필드는 칼빈의 형상인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그를 ‘성령의 신학자’라고 부른 것이다. 이들은 각각 칼빈 신학의 한 면만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나 칼빈은 이 셋을 동시에 강조했다. 하나님의 역사에 있어서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을 추진해 나가는 분은 하나님 아버지이다. 그리고 그 계획을 실천하기 위한 자료를 제공해 주시는 분은 그리스도이시다. 이 자료를 담아 전달해 주시는 분은 성령이다.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의 역사에 있어서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은 함께 일하시는 것이다. 칼빈 신학의 중심 주제를 하나님의 예정이나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나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본 학자들은 계획하고 추진해 나가는 성부 하나님만 보고, 그 계획의 실천에 있어서 필수적인 자료와 도구를 간과한 것이다. 그리고 칼빈 신학의 중심 주제를 그리스도라고 본 학자들은 하나님의 역사에서 사용하는 자료만을 보고, 계획하고 추진해 나가는 하나님 아버지와 그 자료를 전달해주는 성령의 역사를 간과한 것이다. 그리고 칼빈 신학의 중심 주제를 성령의 역사라고 본 학자들은 계획하고 추진해 나가는 하나님 아버지의 역사와 자료를 제공해 주는 그리스도의 공적을 간과하고 그 자료를 전달해 주는 성령의 역사만을 강조한 것이다. 예컨대 하나님의 구원 활동에 있어서 그 일을 계획하고 추진해 나가는 분은 하나님 아버지이며, 십자가에 달려 구원을 위한 자료를 제공해 준 분은 그리스도이며, 오래 전에 십자가에 달려 구원의 자료를 마련한 그리스도의 공적이 우리 개개인에게 전달되도록 우리 마음 속에 역사하여 그 공적을 받아들이게 하는 분은 성령이다. 하나님의 예정과 추진이 없었더라면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지 않았을 것이며,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 공적을 쌓았더라도 성령이 우리 개개인에게 역사하지 않는다면 그 공적은 우리와는 무관한 공적이 될 것이다.  
  한편 밀너(Benjamin Charles Milner, Jr.)는 그의 「칼빈의 교회론」에서 칼빈 신학의 통일적 원리는 “성령과 말씀의 절대적 상관 관계”라고 말했다. 밀너가 하나님 중심적 칼빈 해석자들과 그리스도 중심적 칼빈 해석자들에 대해 성령의 역사를 충분히 그리고 정확하게 평가하지 못했다고 비판하고, 성령과 말씀, 이 둘을 강조한 것은 이전의 연구가들에 비해 진일보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의 예정과 주권적 의지, 곧 계획하고 추진하는 성부 하나님에 대한 언급 없이 성령과 말씀만을 강조한 것은 큰 결점이라 말할 수 밖에 없다.
  한편 파티(Charles Partee)는 “칼빈의 중심 교리 재론”이라는 논문에서 칼빈의 중심 교리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고 주장했다. “이 논문의 목적은 칼빈의 중심적 교리에 대한 새로운 탐구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교리를 고려하는 것임을 제시하려는 것이다. 그것은 「기독교 강요」의 내용을 요약하는 유용한 방법을 제공한다.”라고 파티는 말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칼빈의 중요한 교리중 하나임에는 틀림없지만, 이 주장도 니젤에 대한 비판과 같은 비판을 면할 수 없다고 하겠다.


제4강 신학 구조 (2)

  서두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일부 칼빈 연구가들은 칼빈의 「기독교 강요」를 분석함으로써 칼빈 신학의 구조를 찾아 내려고 해왔다. 제네바에서 최초로 칼빈 전집을 출판한 편집자들은 이렇게 말했다.

   저자는 이 ‘기독교 강요’에서 이중적 목적--scopus duplex--을 가지고 있다. 전자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인데 그것에 의해 우리는 축복된 불멸에 도달한다. 후자는 우리 자신에 대한 지식인데 이것은 전자에 따라 결정된다. 그는 이 목적을 위하여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친숙한 사도신조의 형식을 사용한다. 그 신조가 네 부분으로 되어 있듯이 (즉, 첫째는 하나님 아버지에 관한 것이며, 둘째는 아들에 관한 것이며, 셋째는 성령에 관한 것이며, 넷째는 교회에 관한 것이다), 우리의 저자도 자기의 ‘강요’를 네 권으로 나누어 전술한 두 목적을 성취하고 있다.

  칼빈의 기독교 강요는 네 권으로 되어 있는데, 제 1권은 하나님 아버지, 제 2권은 성자, 제 3권은 성령, 제 4권은 교회에 대해 다루었다고 한 이 해석은 전통적으로 인정되어 왔다. 그러나 1868년에 쾨스틀린(J. Köstlin)은 그의 한 논문에서 칼빈의 「기독교 강요」는 크게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고 주장했으며, 금세기에 와서 다우위(Edward A. Dowey, Jr.)는 그의 저작 칼빈 신학에 있어서 하나님 지식에서 쾨스틀린의 주장을 더욱 발전시켰다. 다우위는 1982년 칼빈학회에서 발표한 논문에서 다시 한 번 자기의 주장을 고수했다.
  다우위에 의하면 1559년에 나온 「기독교 강요」 라틴어의 최종판은 duplex cognitio Domini(주님에 대한 이중적 지식)에 따라 다음과 같이 배열되었다.

1. 성부, 성자, 성령인 하나님, 그리고 죄와 및 죄에 의해 필수적이 된 구속적 활동과는 무관한 하나님의 창조와 일반적인 세계 통치--그리고 이와 비슷하게 죄 및 구원의 필연성과 무관한 인류에 대한 교리들. (제1권).
2. 죄인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역사적 계시와 활동, 즉:
   a. 화육한 성자를 통한 구원의 확립, 그것의 준비는 이미 옛 계약 아래서 이루어졌다.(제2권)
   b. 그리스도 안에 주어진 구원을 성령을 통해 적용함, 즉:
     (1) 성령에 의해 개인들 안에 내적으로 실현되는 구원의 과정, 이것은 부활에서 이사람들이 완성될 때까지로 확장됨. (제3권)
     (2) 하나님이 성령의 이 활동에 있어서 사용하는 외적 방편들. (제4권)

  쾨스틀린과 다우위의 이 주장은 뒤에 언급하는 바와 같이 파커(T. H. L. Parker)에게서 맹렬한 비판을 받긴 했지만, 사실상 많은 칼빈 연구가들이 이와 비슷하게 구분하고 있다. 방델(François Wendel)도 그의 저서 「칼빈: 그의 종교 사상의 근원과 발전」에서 「기독교 강요」 최종판은 크게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고 보았다. 즉, 첫째 부분은 제 1권으로 되어 있으며 신론(삼위 일체, 창조주, 섭리), 성서적 계시 및 인간(죄 및 구원과 무관한)에 대해 다루며, 둘째 부분은 나머지 세 권으로 되어 있는데 구원의 역사적 계시와 계획에 대해 다룬다고 한다. 다시 둘째 부분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첫째 부분은 옛 계약 아래서의 구원 사업을 위한 준비와 하나님의 아들의 화육에 있어서 그것의 성취(제2권)이며, 둘째 부분은 성령에 의한 구원의 적용으로 이것은 다시 (a) 미래의 삶에서 완성되기까지 신앙인 안에서 성령의 개인적 활동(제3권)과 (b) 성령이 이 활동을 완성하고 그것을 바른 목적으로 이끌기 위해 사용하는 외적 방편들(제4권)로 나누어져 있다고 한다. 데이킨(A. Dakin)의 다음과 같은 구분도 이들의 구분과 대동소이하다.

A.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지식
B. 구속주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지식
   1.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계시되는 방법
   2. 우리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방법
   3. 우리가 이 친교 안에 거하는 방법

  갬블(Richard C. Gamble)이 지적한 것처럼 “칼빈 연구는 duplex cognitio Dei 가 그의 신학의 하나의 지배적 원리이거나 유일한 지배적 원리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데 점진적으로 일치를 보아”왔다.
  반면에 파커는 「기독교 강요」가 사도신조의 네 부분에 따라 네 권으로 구성된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두 부분으로 나눈 다우위의 구분은 부당하다고 비판한다. “자료를 그렇게 재구성하는 것은 부당한 본문 비평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 주제의 특성을 평가함에 있어서 그 순서 자체를 고려하지 않고 (...) 사실상 가설을 그 순서에 부과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파티도 지적한 바 있지만, 파커 자신도 그의 칼빈의 하나님 지식론에서 “제1부 창조주에 대한 지식,” “제2부 구속주에 대한 지식” 등 두 부분으로 나누어 논술하고 있다.
  요컨대 「기독교 강요」 최종판은 네 권으로 되어 있지만 내용적으로는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구속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 등 크게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이 점은 「기독교 강요」 최종판에서 여러번 언급되고 있는데, 그 대표적인 구절은 다음과 같다.

  그러므로 주님이 먼저 세계의 창조와 성서의 일반적 교리에 있어서 단순히 창조주로 나타나며 후에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구속주로 나타나기 때문에, 여기로부터 그에 대한 이중적 지식이 나오는데, 그 중 먼저 것은 지금 다루고 나중 것은 다음에 적절한 곳에서 다룰 것이다.

  그러나 비교적 근래에 나온 칼빈 연구서들에서는 「기독교 강요」 최종판이 'duplex cognitio Domini'에 따라 저술되었다는 주장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밀너는 앞에서 밝힌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제 나는 강요 최종판의 구상 밑에 깔려 있는 것은 'duplex cognitio Domini'가 아니라 성령과 말씀의 상관 관계 속에 이루어진 질서, 즉 하나님 및 죄와 무관한 인간에 대한 교리를 다루며, 제2권 제1장에서 제5장까지는 타락에 의해 그 질서가 붕괴된 것에 대해 다루며, 제2권 제6장에서 제4권까지는 질서의 회복, 즉 말씀(제2권)이 성령(제3권)에 의해 외적 방편들(제4권)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되는 것을 다룬다.

  밀너는 질서의 회복을 위한 제도인 교회는 칼빈 신학의 중심을 차지한다고 한다.

  “이 이해는 ……칼빈의 교회론이 그의 신학 전반에 있어서 중심점이 됨을 확증해 준다. 교회는 세상에서 질서의 회복이기 때문에 제4권만이 아니라 제2권 제6장에서 제4권까지가 그것에 대한 설명으로 이해되어야 하며 제1권(질서에 대한 개념)과 제2권 제1장에서 제5장까지(질서의 붕괴)는 그것의 전제들로 이해되어야 한다.”

  여기서는 칼빈 신학의 중심이 신론도, 그리스도론도 아니라, 교회론이며, 「기독교 강요」 제1권에서 제3권까지의 모든 논의는 제4권, 즉 교회론을 위한 서론에 불과하게 된다. 밀너가 주장한 것처럼 「기독교 강요」는 제1권에서 제3권까지가 일종의 서론이며 제4권이 중심인가, 아니면 오히려 제1권에서 제3권까지가 본론이고 제4권은 어떤 의미에서 부록으로 볼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제4권의 첫 문장을 보면 자명할 것 같다. “전권에서 설명한 것처럼 복음에 대한 신앙에 의해 그리스도는 우리의 것이 되며 우리는 그에게서 주어지는 구원과 영원한 축복의 참여자가 된다. 그렇지만 우리는 우리의 무지와 나태로 인해…외적 도움들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하나님은…그 도움들을 첨가하였다.” 외적 도움들이 우리의 무지와 나태로 인해 첨가된 것이라면, 칼빈 신학에 있어서 제4권, 즉 그 외적 도움들을 다루는 교회론도 어떤 의미에서 첨가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 교회는 창조 질서가 파괴되고 난 후 그 파괴된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세워졌다는 밀너의 해석은 부분적으로는 옳다. 그러나 밀너의 이 주장이 지니고 있는 문제점은 지금도 창조 활동을 하는 하나님에 대한 칼빈의 사상이 제거되고 하나님의 구속 활동만 남게 된다는 점이다. 칼빈의 사상에서는 창조는 보존을 포함하기 때문에 창조가 단순히 과거적 사건만은 아니다. “더욱이 하나님을 순간적인 창조주, 곧 단번에 그의 작업을 완성한 분으로 여기는 것은 냉담하고 부족한 일일 것이다. 우리는 세계의 첫 시작에서 못지 않게 세계의 영속적인 상태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능력의 임재가 우리에게 빛나는 것을 보기 때문에 여기서 특히 세속적인 사람들과 구별되어야 한다.” 요컨대 칼빈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지금 교회를 통해 구속 활동을 하는 분인 동시에 여전히 창조 활동을 계속하는 분이다. 그러므로 밀너의 질서의 창조-질서의 붕괴-질서의 회복이라는 일직선적인 도식은 칼빈의 신학 체계에 일치하지 않는 것이다.
  다른 한편 윌리스는 그의 「칼빈의 카톨릭적 기독론」에서 'duplex cognitio' 구조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다음과 같이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De Cognitione Dei Creatoris"와 "De Cognitione Dei Redemptoris"는 있지만 "De Cognitione Spiritus Sancti"는 없다. 사도신조의 세 조항들이 아니라 "duplex cognitio"가 강요 최종판의 구조에 대해 근본적인 도구를 제공하고 있다는 것이 확정된다 하더라도--제1권의 주제가 대체로 창조주 하나님이고 제2권의 주제가 대체로 구세주이듯이--여전히 제3권과 4권의 주제는 대체로 성령의 활동이다.

   윌리스는 칼빈의 "duplex cognitio Dei"가 "creatoris et Christi"가 아니라 "creatoris et redemptoris"라는 것을 알고 있다. “왜냐하면 칼빈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구속적 말씀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적 말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라고 윌리스는 말한다. 그리스도도 창조 역사에 참여하기 때문에 창조주와 그리스도를 대비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고 윌리스가 본 것은 옳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윌리스는 "De Cognitione Dei Creatoris"에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 포함되듯이 "De Cognitione Dei Redemptoris"에 성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포함된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더구나 윌리스는 “칼빈에게 있어서 성령이 중생시키는 분일 뿐만 아니라 창조하는 분이듯이 그리스는 하나님의 구속적 말씀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적인 말씀이기도 하다”라고 말하면서도, "De Cognitione Dei Creatoris"에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와 성령이 포함되며 "De Cognitione Dei Redemptoris"에도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와 성령이 포함되는 것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또 다른 "De Cognitione Spiritus Sancti"를 상정할 필요를 느꼈으며, 그래서 「기독교 강요」의 제3권과 4권을 "De Cognitione Spiritus Sancti"를 다룬 것으로 보고 있다. 이처럼 윌리스가 제2권 "De Cognitione Dei Redemptoris"를 구세주에 대한 지식으로 잘못 해석하여, 제1권의 주제를 하나님에 대한 지식으로 해석하고 제3권과 제4권의 주제를 성령에 대한 지식으로 해석한 것은 큰 오류이긴 하지만, 칼빈의 신학에 있어서 삼위일체론적 구조를 시사한 것은 중요한 공헌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요컨대 칼빈에게 있어서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이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포함되며, 또한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이 “구속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포함된다. 창조에 있어서 하나님은 말씀과 성령에 의해 세계를 창조하였다. 그래서 “세계는 아들의 작품인 것 못지 않게 성령의 작품”이다. 구원에 있어서 창시자 혹은 동인은 성부 하나님이며 질료인은 성자 그리스도이며 형상인은 성령의 역사이다. 그래서 「기독교 강요」의 제1권은 창조주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다루고 제2권부터 제4권까지는 구속주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다룬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주지하는 바와 같이, 「기독교 강요」는 칼빈의 저서 중 가장 포괄적이고 체계적인 저서이기 때문에, 우리는 칼빈 신학의 주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사업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파티는 칼빈의 중심 교리는 “그리스도의 연합”이라는 자신의 주장에 근거하여 「기독교 강요」를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A. 우리를 위한 하나님
  Ⅰ. 창조주로서(제1권)
a. 그의 창조
b. 그의 섭리
  Ⅱ. 구속주로서(제2권)
a. 계시
b. 본성과 인격
c. 직임
B.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
  Ⅰ. 개인들로서(제3권)
a. 신앙
  1. 중생
  2. 의인
b. 예정
  Ⅱ. 공동체로서(제4권)
a. 목회
b. 성례
c. 국가

  그러나 파티의 이 구분은 파티 자신이 “칼빈이 의식적으로 네 권을 객관적(우리를 위한 하나님)/주관적(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 형식으로 조직했다는 것이 증명될 수 없으며, 주장해서도 안 된다”라고 말한 것처럼, 칼빈의 「기독교 강요」에서 한 번도 이런 구별을 언급한 적이 없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제5강 신학 구조 (3)

  칼빈 신학의 주제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 사업이라고 한다면 삼위일체 하나님의 창조와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칼빈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의 창조에 보존이 포함되기 때문에 하나님은 지금도 창조 활동을 하는 동시에 구원 활동을 하시는 것이다. 창조와 구원 관계의 문제는 넓게는 칼빈의 사고 구조에 관련된 문제라고 볼 수 있다.
  바우케는 1922년에 이 문제와 관련된 「칼빈 신학의 문제들」이라고 하는 주목할 만한 저작을 내놓았다. 그는 칼빈 사상의 특징은 형식적인 변증법적 합리주의로서 그의 성서주의에 입각하여 반대되는 것들을 결합시켜 놓은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는 칼빈은 체계론자라기보다 변증론자, 기껏해야 변증법적 체계론자라고 부른다. "교의학의 개개의 기본적 요소들이 나란히 놓여 있으며 상호 변증법적으로결합되어 있으며 한둘의 기본적 원리로부터 연역적으로 추론되지 않는다.“ 이런 칼빈 사상의 특징은 프랑스인의 사고의 특징으로서 두메르규 같은 프랑스인 칼빈 연구가들은 칼빈 이해에 아무 어려움도 느끼지 않지만, 내용적인 합리주의적 정신을 가진 독일인 칼빈 연구가들(예컨대 리츨과 랑)은 칼빈 이해에 상당한 어려움을 느낀다고 한다. 바우케는 칼빈 신학에 있어서 모든 것을 추론해 낼 수 있는 하나의 통일적 원리를 찾아내려는 시도는 이루어질 수 없으며 연구가들 사이에 새로운 분열을 야기시킬 뿐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바우케 이후에도 칼빈 연구가들은 칼빈 신학의 통일적 원리를 추구해 왔다. 가장 대표적인 시도 가운데 하나가 전술한 바 있는 니젤의 그리스도 중심적 해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니젤은 칼빈 신학의 중심에 기독론을 두고 그것으로부터 모든 교리를 추론해 내려고 했다. 이와 반면에 다우위는 전술한 바와 같이 칼빈 신학의 중심 주제를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구속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으로 보았으며 그리고 그 사이의 관계를 변증법적인 것으로 보았다. 또한 앤더슨은 칼빈의 사상을 “다양한 원리들의 변증법적 결합”으로 보는 견해를 부정하고 있는 반면, 가노지는 칼빈 신학의 내용과 방법론을 변증법적인 것으로 보고 있다.
  그들 이전에 두메르규는 칼빈의 사상을 역설적인 것으로 규정했으며, 그는 삶의 현실을 역설적인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역설적인 칼빈의 사상을 예찬했다. 그는 칼빈의 사상을 두 개의 초점을 가진 타원형으로 보았다. 이와는 반대로 바르트는 브룬너와의 논쟁에서 칼빈에게 있어서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창조 안에서의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포함한다고 하며, 따라서 칼빈의 사고는 타원형일 수가 없다고 했다.
  칼빈의 사고 구조는 두 개의 중심점을 가지는 타원형인가, 아니면 하나의 중심점을 가지는 정원형인가? 혹은 변증법적인가, 아니면 연역법적인가? 이 논쟁은 바우케가 지적한 것처럼 독일적인 칼빈 연구가와 프랑스나 다른 서양 민족의 칼빈 연구가들 사이에 있는 사고 구조상의 차이일는지 모른다. 독일적인 사고 구조에서는 통일성을 지향하기 때문에 칼빈을 통일적 사상가로 보려고 하는 반면 비독일적 사고 구조에서는 역설적인 삶의 현실을 인정하고 변증법적 관점에서 대상을 보려고 하기 때문에 칼빈을 변증법적 사상가로 보려고 하는지 모른다. 바우케의 주장의 진위를 떠나서 칼빈 연구가들 사이에 그런 경향이 있음을 우리는 주목할 수 있다. 그러면 칼빈 자신은 어떤 사고 구조를 가지고 있었는가? 바우케가 주장한 것처럼 칼빈은 프랑스인으로 독일인과는 달리 변증법적 사고를 했다고 결론지을 수 있는가?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 소위 'extra Calvinisticum'에 대해 고찰하고자 한다. 'extra Calvinisticum'이란 하나님의 영원한 성자는--화육 후에도--인간 본성과 연합하여 한 인격을 이루었으나 육체에 제한되지 않았다는 교리이다. 칼빈주의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를 넘어서도 존재하는 성자의 존재가 루터파의 속성의 교통이란 교리에 의해 위협받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을 루터파 신학자들이 듣고 그런 개혁파의 교리에 대해 “저 칼빈주의적인 이외(illud extra Calvinisticum)"라는 별명을 붙여준 데서 이 말이 유래했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이렇게 말한다.

  놀라웁게도 하나님의 아들은 하늘을 떠나지 않고 하늘에서부터 내려왔으며, 놀라웁게도 기꺼이 동정녀의 태에서 태어났으며, 지상에서 살았으며, 십자가에 달렸다. 하지만 그는 태초부터 행하던 대로 항상 세계를 채우셨다.

  니젤은 칼빈 신학에 있어서 'extra Calvinisticum'의 역할을 과소 평가하지만, 오베르만이 지적한 것처럼 칼빈 신학에 있어서는 'extra Calvinisticum'이 광범하게 나타나 있다. 'extra Calvinisticum'에 반영된 칼빈의 사고 구조는 타원형적인 것도 아니고 정원형적인 것도 아니라, 일종의 동심원적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칼빈은 서로 다른 두 대상을 중심적인 것과 주변적인 것의 관계로 연결시키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삼위일체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은 주변적인 것과 중심적인 것의 관계에 있다고 하겠다. 요컨대 칼빈 신학의 주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이며, 창조와 구원은 하나의 중심을 갖는 두 개의 동심원적 관계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겠다. 환언하면 칼빈에게 있어서 삼위일체 하나님은 교회를 통하여 구원 활동을 하는 동시에 교회 밖에서 창조 활동도 하신다. 그래서 칼빈에게 있어서는 바르트의 주장처럼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창조 안에 있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포함하는 것도 아니고, 다우위의 주장처럼 창조주에 대한 지식과 구속주에 대한 지식이 변증법적 관계에 있는 것도 아니라, 동심원적으로 중심적인 것과 주변적인 것의 관계로 있는 것이다.
  한편 암스트롱은 칼빈의 신학 구조는 가설적 구조라고 주장했다. “칼빈 신학의 전체적 일반 방침과 구조는 가설적 혹은 조건적 근거 둘레에 세워져 있다.” 암스트롱은 “칼빈은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이라는 두 세계들 속에 친근하게 살았으며, 그는 결코 근본적으로 서로 다른 이념들의 갈등을 풀 수 없었으며, 그의 신학은 갈등적 이념들에게 적응하여 그가 다루는 각각의 신학적 주제에 있어서 항상 두 극, 두 국면, 두 개의 변증법적이고 갈등적 요소들이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암스트롱은 “칼빈의 신학의 특징인 가설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의 구조, 이상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의 구조는 신앙 의인론과 성화론에 대한 신앙 의인론의 관계를 다루는 데 있어서 가장 분명히 나타난다.”고 했다. 암스트롱이 칼빈이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이라는 두 세계에 살아서 이 둘을 다 받아들이다 보니 항상 두 극을 주장하였다고 한 것은 일면의 일리가 있다. 그러나 칼빈은 이 둘에 같은 가치를 둔 것이 아니라 종교개혁에 중심적 가치를 두고 르네상스에 주변적 가치를 두었다는 사실을 암스트롱은 파악하지 못했다.
  다른 한편 엥걸은 「존 칼빈의 전망적 인간론」에서 전망주의적 관점에서 칼빈의 인간론을 다루었다. 엥걸에 의하면 칼빈은 인간에 대해 서로 다르게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한편으로 하나님의 전망에서 말하고 다른 한편으로 인간의 전망에서 말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한 사물을 다른 전망에서 보면 다르게 보인다는 것을 인정하나, 그것을 종합하여 그 대상을 포괄적으로 설명해야 한다. 따라서 엥걸은 칼빈이 서로 다른 전망에서 본 것을 어떻게 종합했는가를 고찰했어야 했다.
  또한 부스마는 그의 저서 「칼빈」에서 칼빈 안에는 두 개의 칼빈, 즉 “철학자요, 합리주의자요,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대표되는 절정기의 스콜라적 전통 속에 있는 스콜라 학자요, 고정된 원칙들의 사람이요, 보수주의자”와 “수사학자요, 인문주의자요, 오캄의 윌리암의 추종자들 식의 회의적 신앙주의자요, 기회주의자로 여겨질만큼 융통성이 있는 자요, 자신의 뜻과는 달리 혁명가”가 불안하게 공존해 있다고 주장했다. 부스마가 칼빈 안에는 두 개의 칼빈이 있다고 해석한 것은 옳으나 그 두 개의 칼빈은 철학자 칼빈과 수사학자 칼빈이 아니라 종교개혁자 칼빈과 인문주의자 칼빈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부스마는 칼빈의 인문주의를 과대 평가했지만, 사실상 칼빈에게는 종교개혁자가 중심에 있었고 인문주의자는 주변에 있었다고 하겠다.


제6강 신학 구조 (4)

  우리는 앞에서 칼빈 신학의 중심 주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이며, 이 둘은 주변적인 것과 중심적인 것의 관계에 있다고 말했다. 우리는 여기서 이런 해석이 칼빈 신학을 이해하는 데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우선 칼빈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창조주인 동시에 구속주이다. 하나님에 대한 이 이중적 인식에 대한 칼빈의 주장은 전술한 바와 같이 「기독교 강요」 여러 곳에 나타나 있으며, 「기독교 강요」의 제1권과 제2권의 제목에 잘 나타나 있다.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구속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 중 칼빈에게 있어서 구속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주변적인 위치를 차지한다는 것은 「기독교 강요」에서 이 두 주제의 각각에 대해 칼빈이 할애한 지면의 분량과 관심을 보아 잘 나타난다. “칼빈의 사상이 모든 신학을 지배하는 구원론적 중심을 가지고 있다.”는 다우위의 말은 이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또한 전술한 바와 같이 칼빈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육체 안에 계신 그리스도와 육체 밖에도 계신 그리스도의 구별이 있다. 칼빈은 그리스도에 대한 이 구별에 있어서도 육체 안에 계신 그리스도에게 중심적인 위치를 부여했으며 육체 밖에도 계신 그리스도에게는 주변적 위치를 부여했다. 칼빈의 신학이 구원론적 중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육체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중심적 위치를 차지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칼빈에게 있어서는 성령의 역사도 일반적인 역사와 특별한 역사가 있다. 칼빈은 “하나님의 일반은총”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성령을 진리의 유일한 원천으로 간주한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성령을 경멸하기를 원하지 않는 한 우리는 진리 자체를 거부하거나 진리가 어디에서 나타나든지 그것을 멸시하지 못할 것이다…시민적 질서와 규율을 매우 공정하게 확립한 고대 법률가들 위에 진리가 빛난다는 사실을 우리가 부정할 것인가? 철학자들은 자연에 대해 바로 관찰하고 예술적으로 묘사했는데 그들을 눈이 어둡다고 말할 것인가?…아니다. 우리는 이들 주제들에 관한 고대인들의 저작을 높이 찬양하지 않고 읽을 수 없다…그러나 우리는 동시에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어떤 것을 찬양할만하거나 고상하다고 생각할 것인가?

  이 구절만을 보면 칼빈은 에라스무스와 같은 인문주의자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기독교 강요」 전체를 보면 칼빈은 인간의 타락과 원죄를 주장하면서 에라스무스가 말한 자유의 의지를 부정하고 하나님의 구속 활동에 의한 인간의 구원을 중심에 두었다.
  중심적인 것과 주변적인 것을 구별하는 칼빈의 생각은 그의 가르침 곳곳에 나타나 있다. 우리는 여기서 그 중 몇 가지만 살펴보려고 한다. 칼빈은 자연과 역사에 나타난 자연계시를 인정했지만 이것이 인간의 타락으로 인간에게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특별히 성서를 주었다고 했다. “성서는 우리에게 참된 하나님을 분명히 보여 준다.”라고 말했다. 말하자면 칼빈에게 있어서는 성서적 계시가 중요한 것이고, 자연계시는 주변적인 것으로 인정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칼빈은 성서의 권위에 대해, 성서가 인간의 지혜를 넘어선다는 것, 그 연대가 오래 되었다는 것, 기적들에 의해 말씀이 입증되었다는 것, 예언이 성취되었다는 것 등등 이른바 'indicia"를 열거하고 있다. 그러나 칼빈은 “하나님만이 그의 말씀에 있어서 자기 자신에 대한 적합한 증인이듯이 그 말씀은 성령의 내적 증거에 의해 확인되기 전에는 인간들의 마음에서 신임을 얻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칼빈은 “참으로 그것을 확증하기 위해 존재하는 이들 인간적 증거들이 우리의 나약함에 대한 이차적인 도움들로서 저 일차적이고 지고한 증거를 따른다면 쓸데 없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성서의 권위에 대한 증거에 있어서도 중심적인 것은 성령의 내적 증거이고 "indicia"는 주변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성서의 영감과 무오성에 대해서도 칼빈은 같은 생각을 가졌다. 칼빈은 성서 기자가 하나님의 성령의 영감으로 성서를 기록해서 성서의 교리에는 오류가 없다고 보았다. “우리는 예언자들과 사도들에 대해 말할 때 모든 불완전에서 벗어난 순수한 진리와 그들 자신의 인격… 사이를 항상 구별해야 한다. 그들은 완전히 새롭게 된 것이 아니어서 육체의 어떤 자취가 여전히 그들 안에 남아 있다… 하지만 그(예레미야)의 교리는 모든 결함에서 벗어났다”고 칼빈은 말했다. 그러나 칼빈은 성서의 문자에는 오류가 있음을 인정했다. 칼빈은 마태복음 27:9 주석에서 “예레미야의 이름이 어떻게 하여 들어왔는지 나는 안다고 고백할 수 없으며 또한 나는 그것을 중요시하지 않는다. 분명히 잘못에 의해 스가랴 대신 예레미야의 이름이 기록되었다.” 이처럼 칼빈은 성령이 성서 기자에게 영감을 주어 교리에는 오류가 없지만 문자들에는 중요하지 않은 오류가 있음을 인정했다. 여기서도 우리는 중심적인 것과 주변적인 것의 구별을 볼 수 있다.
  칼빈은 교리에 대해서도 중심적인 교리와 주변적인 교리를 구별했다. 칼빈은 이렇게 말했다.

  더욱이 교리들에 있어서나 성례들의 집행에 있어서 어떤 잘못들이 들어올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를 교회의 교제로부터 분리시켜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참된 교리의 모든 조항들이 동일한 종류에 속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어떤 것들은 필수적으로 알아야 할 것으로서 모든 사람들은 그것들을 종교의 고유한 원칙들로 확정하고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 것들은 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것, 그리스도는 하나님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 우리에게 있어서 구원은 하나님의 자비에 의존해 있다는 것 등등이다.

  그러나 “교리들 중에는 신앙의 일치를 깨뜨리지 않는, 논쟁이 되는 다른 것들이 있다.”라고 칼빈은 말했다.
  또한 칼빈은 신앙을 하나님의 행위로 보았는가, 인간의 행위로 보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칼빈은 신앙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일이라고 보았지만, 그러나 받아들이는 인간의 일도 부정하지 않았다고 하겠다.
  칼빈은 교회론에 있어서 “교회 안의 교회”와 같은 도식을 생각하고 있었다. 즉, 가시적 교회 안에는 불가시적 교회에 속하는 예정된 신자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자들도 있다고 하였다. 여기서도 예정된 신자들이 중심부에 있고 그렇지 않은 자들은 주변부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칼빈은 목사의 소명에 대해서 내적 부름과 외적 부름을 구별했다. 내적 부름은 하나님으로부터의 부름이며 외적 부름은 교회가 목사를 청빙하는 것이다. 내적 부름은 목사 자신이 의식하는 것으로, 칼빈은 이 부름 없이 성직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외적 부름에는 두 가지 조건이 있는데, 건전한 교리와 거룩한 삶을 구비했는가 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성례의 실체와 표시의 관계에 대해서도 칼빈은 성례의 실체와 표시를 동일시한 로마 카톨릭도 비판하고 성례의 실체와 표시를 분리시킨 급진주의자들도 비판하여 성례의 실체와 표시를 중심과 주변, 내용과 그릇의 관계로 이해했다고 할 수 있다.
  칼빈의 이 동심원적 사고 구조는 그의 정치 사상에 영향을 미쳐 귀족정과 민주정의 혼합정이라는 사상으로 나타났다. 이것은 오늘날의 말로 표현하면 대의 민주주의이다. 민중들이 민중들 가운데 최선의 사람들을 선택하여 그들이 상호 견제하면서 정치를 하게 하는 이 혼합정은 제네바의 정치 제도이었으며 동시에 칼빈주의자들을 통해 전 유럽으로 파급되었다. 칼빈의 이 동심원적 구조를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칼빈은 근대 민주주의의 적이라는 주장(세네비에르)과 칼빈은 근대 민주주의의 주창자라는 주장(맥니일, 허드슨)이 맞서게 되었다. 그러나 이 동심원적 구조에서 칼빈은 우민들에 의해 이끌리는 사회도, 한 사람의 군주나 소수의 사람들이 독주하는 사회도 부정하고 민중들이 민중들 중에서 최선의 사람들을 뽑아 정치를 하게 하는 대의 민주주의를 주창했다.
  또한 칼빈의 이 동심원적 사고 구조는 그의 경제 사상에도 나타나 재세례파의 공산주의에 맞서 사유재산 제도와 시장경제와 금융업을 인정하면서도 가능한 한 기금을 늘려 부자도 가난한 자도 없는 복지사회를 지향하게 했다. 그의 이 사고 구조를 잘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막스 베버의 논제를 중심으로 끊임없이 논쟁되어 왔으며, 칼빈을 자본주의의 창시자로 보거나 기독교 사회주의의 주창자로 보는 양극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러나 칼빈은 복음적 사랑의 행위를 중심에 두었으나 인간의 타락 때문에 사유재산 제도를 두었다고 봄으로써 자본주의적 요소를 주변적인 것으로 인정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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