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 전서 11장 2-3절  

“너희가 모든 일에 나를 기억하고 또 내가 너희에게 전하여 준대로 그 유전을 너희가 지키므로 너희를 칭찬하노라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니라.”

 

그것에 이어서 바울이 “그의 유전(his ordinances)"에 관하여 말하고 있을 때 우리는 바울이 자기 멋대로 그 유전을 전해 주었다고 생각하지 말도록 하십시다. 오히려 그는 자기가 주님으로부터 받았던 것만을 충실하게 선포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 바울이 어째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그들이 “그 유전을 기억하고 그것들을 잘 지켰기” 때문에 그들을 칭찬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 안에는 무엇보다도 먼저 교리(doctrine)가 있고, 그 다음으로는 질서(order)와 방침(policy)이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교리에 관해서는 그것은 두 가지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것은 우리가 하나님에 관하여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것은 우리가 어떻게 모든 것을 그분을 향해 집중시켜야 하는가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리는 우리에게 무엇보다도 우리의 구원의 확신이 어디에 근거를 두어야 하며 우리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응답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어떻게 하나님을 찾아야만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신앙에 관련된 것입니다. 그리고 성례전은 그것에 대한 부속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어째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며 성만찬을 받아야 하는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교리에 관한 두 번째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섬겨야 하며 그 분을 향한 우리들의 의무가 무엇인지에 관한 것입니다.

 

 교리 이외의 나머지 문제라고 한다면 방침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 방침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들의 자유에 속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지금 우리들은 8시에 집회를 갖고 있지만 누군가가 이 집회를 7시로 조정하거나 혹은 어떤 다른 문제들에 관해서도 변화를 줄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 우리들은 종종 어떤 교회가 다른 교회와 아주 똑같은 질서를 지닐 수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만찬을 할 때 성만찬용 테이블은 다른 교회의 성만찬용 테이블과는 다른 형태로 배열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세례 역시 모든 교회에서 꼭 같은 장소에서만 베풀어지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그 문제에 관해 어떤 다른 기독교를 가지고 있는 것이겠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외적 질서나  방침에 속한 것들은 (제가 이미 말씀드렸듯이)인간들의 자유에서 맡겨져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는 건전한 마음가짐과 겸손함을 가지고 그런 일들을 행해야 하며 교회의 교화활동을 위해 무엇이 적합한지를 고려해야만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문제를 14장에서 좀 더 충분히 다루게 될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바울이 고린도에서 세워 놓은 유전들에 있어서 그의 모든 관심의 핵심이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의 어떤 것도 예수 그리스도의 관심과 뒤섞지 않았습니다. 그는 어떤 율법을 제시하거나 사람들의 영혼을 굴레에 묶음으로써 자기를 투사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전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히려 교인들에게 그들 사이에 품위의 평화 그리고 일치를 유지할 수 있는 질서만을 전해 주었던 것입니다. 이 질서는 모든 인간들에게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에게 아무런 방침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우리 모두는 제각기 박수갈채를 얻기만을 바랄 것이고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날 수가 없기 때문에 모든 것은 혼란에 빠지고 우리에게는 불일치와 상처만이 남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성경은 우리가 평화의 하나님, 즉 모든 질서를 사랑하시고 혼돈을 미워하시기 때문에 당신 스스로 자기 양떼를 먹이시는 하나님을 모시고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장소에 복음이 선포되고 교회가 세워질 때는 반드시 어떤 특별한 규례들이 함께 세워져야만 하는 것이며 우리는 후에 그것이 적절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며 또한 자유 안에서 그런 규례들을 이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제가 이미 말씀드렸듯이)신앙의 교리에다가 무엇인지를 첨가하거나 우리의 영혼을 굴레에 묶어 놓는 율법을 만드는 일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으므로 그가 말한 것으로 되돌아 가보도록 합시다. 고린도 교인들은 칭찬을 받을만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처음으로 교회를 세웠던 사람에 의해서 자기들에게 전해진 그 모든 질서를 변형시키지 않고 지켰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주목을 받을 가치가 있는 구절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만일 좋은 질서를 가지고 있다면 그 질서를 변형시키지 않도록 우리는 제어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인간들이 본질상 너무도 가벼운 존재들이며 만일 우리에게 이런 질서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우리의 그 가벼운 존재들이며 만일 우리에게 이런 질서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우리의 그 가벼움이 우리를 지배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탐욕은 너무도 불안정해서 날마다 새로운 어떠한 것들을 가지려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본성에 적합한 어떠한 것도 지니질 못한다면 아무 것이라도 우리들을 미쳐버리도록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어리석은 탐욕에 자신을 넘겨주고 우리들 사이에 훌륭히 정착되어 있는 질서와 균형을 깨뜨리고 변형시키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이 구절에서 하신 말씀을 지켜나가도록 합시다. 이것은 마치 인간들이 질서를 지키고 일단 건전한 교리에 대한 가르침을 받은 후에 어떤 확실하게 훌륭한 외적 질서를 지니게 된 상태에서 그것을 변함없이 지켜나가고 지속시키며 그것을 뒤집어 버리는 행위를 하지 않고 또한 일단 잘 수용되고 인정된 것을 그들 스스로 파괴하기 위하여 분쟁이나 논쟁을 일으키지 않는 그 때에 하늘에 계신 성령께서 그 충성됨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신다고 선포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이 단순하게 원칙적인 문제, 즉 교리문제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방침에 속해 있는 문제들에도 해당된다는 것을 깨닫도록 합시다. 신앙과 우리의 구원의 본질에 속해 있는 문제, 즉 예배에 관한 법과 우리의 믿음의 모든 세부적인 사항들에 속해 있는 어떤 것들을 변형시키려고 마음먹는 일은 증오할 만한 일이 될 것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예레미야에서 묘사 된 대로 새로운 신을 구하는 것과 마찬가지 일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의 신앙이 언제나 손상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고 우리들 자신이 성경으로부터 배운 것을 확실히 지켜 나가며 우리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주님은 또한 우리들이 외부적인 질서에 관하여 평화롭게 순종하여 매 순간마다 이것 도는 저것을 변형시키려는 어리석은 꿈을 가지고 있는 많은 사람들처럼 우리도 마구 움직이는 모래와 같은 자들이 되지 않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물론 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나날이 발전해가야만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교회의 공동의 유익을 위해 선하고 적절한 어떤 것을 후퇴시키고 폐지시킨다고 하면 일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교회에 대하여 마땅한 품위를 제공하기보다는 그저 단순히 그것을 하나의 게임정도로만 여기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이 문제에 관한 우리들의 사악한 정열에 대해 고비를 늦추지 않도록 합시다. 우리가 어느 교회에 가게 될 대면 우리는 우선 그곳에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들을 따르도록 합시다. 그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이나 복음의 순수 교리에 역행하지 않고 우리를 받아들이며 또한 평화와 일치가 그 교회 안에 있음을 보게 될 때면 우리는 그 교회의 질서를 받아들이도록 합시다. 우리는 스스로 겸손해지도록 합시다. 그리고 우리 자신의 머리에 너무 많이 의존하지 않도록 합시다. 그리고 “이것! 나는 이러저러한 것들을 원한단 말이야!” 라는 식으로 말하지 않도록 합시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가 어떤 일을 그렇게 변화시키려고 한다면 그리고 사람들이 자기가 원하는 모든 자유를 취하려고 든다면 그런 일에는 끝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에 대해서는 제가 이미 말씀을 드린바 있습니다.

 

 인간의 정신이라는 것은 계속해서 새로운 환상을 만들어내는 상점과 흡사하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무 것도 우리로 하여금 형제애 속에서 함께 걷는 것을 방해하거나 하나님께서 우리들로부터 영광 받으시는 것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우리들 사이에 분명하게 확립된 질서가 있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교회가 잘 되어가고 있음을 볼 때면 우리는 우리의 손을 함부로 움직이지 않도록 하고 또한 교회의 아무 것도 변형시키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며 그리고 여자의 머리는 남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바울은 얼핏 보면 매우 하찮아 보일지도 모르는 주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즉 많은 나라 중 특히 작은 모자가 없는 동방지역 나라들에서의 습관인 남자들의 머리쓰개에 대한 주제입니다. 우리는 지금도 이러한 터번들이 사용되고 있음을 알고 다른 나라들을 판단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남자와 여자 사이에 변경이 있었다는 점에서 어떤 혼란이 있었습니다. 실제로 멋진 머리모양을 지닌 여자들은 자기들의 머리를 나타내 보이려고 와서 빗질이 잘된 머리를 자랑했던 반면 남자들은 머리에다 주교관 모양의 끝이 뾰족한 터번이나 머리쓰개를 쓰곤 했습니다. 남자들은 마치 여자가 된 듯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보십시오. 이 세상이 얼마나 뒤틀려 있는 것입니까? 그들은 자연의 질서를 뒤바꾸려고 하는 것과도 같은 것입니다.

 

 비록 하나님의 자녀들의 경건함과 성스러움이 이런 것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이것은 부당한 일인 것입니다. 만약 이 일을 관대히 취급한다해도 결국 나쁜 결과를 가져 올 것입니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가 나쁜 일을 시작하고 그 일에 우리를 던져버린다고 한다면 우리는 마침내는 큰 혼란에 빠지게 되어 어떤 사악한 일들도 허용하게 되어버리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여자들이 자기들의 머리를 드러내고 머리카락을 보이는 일을 허락 받게 된다면 그들은 결국 자기들의 젖가슴을 드러내도록 허락 받게 될 것이고 마치 그것이 선술집의 쇼나 되는 것처럼 스스로를 웃음거리로 만들고 말 것입니다. 그들은 너무나 무감각해져서 어떤 겸손이나 부끄러움도 남아있지 않게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본연의 의무를 잊어버리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한편 남자들도 천박하고 사악한 방식들을 채택하고 자기들이 하는 일에 대해서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런 방종함은 곧 유행을 타게 되고 모든 관습들은 나쁜 영향을 받아 타락해 버리고 말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일들은 음탕함과 다른 사악한 방종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우리는 이 세상이 어떻게 모든 일들을 자기들 멋대로 취하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누군가가 아주 작은 일에서 자기 멋대로 할 자유를 얻는다면 그가 어째서 자기 마음대로 다른 일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겠습니까? 이런 비교를 하면서 그들은 일을 엉망으로 만들고 마침내 그들에게는 아주 극심한 혼돈만이 남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자들이 자기들의 머리를 드러내는 일을 허락 받는다면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게 될 것입니다. “여자들이 머리를 드러내고 다닐 수 있다면 어째서 이것과 저것은 벗어서는 안 되는 거지?”라고 말입니다. 그런 상황이 오면 남자들은 또 자기들 편에서도 이것저것을 깨뜨려버리고 말 것입니다. 요약하면 만일 사람들이 자기들 멋대로 극단으로 흐르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자기를 자제하고 또한 적절하고 정당한 것들을 존중하지 않는다고 하면 우리들에게는 아무런 고귀함도 남아있지 않게 될 것입니다.

  

고린도 전서 11장 4-10절  

 “무릇 남자로서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요 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이는 머리 민 것과 다름이 없음이니라. 만일 여자가 머리에 쓰지 않거든 깍을 것이요 만일 깍거나 미는 것이 여자에게 부끄러움이 되거든 쓸지니라.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그 머리에 마땅히 쓰지 않거니와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며 또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지 아니하고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이나 이러므로 여자는 천사들을 인하여 권세 아래 있는 표를 그 머리 위에 둘찌니라.”

 

 이와 반대로 바울은 “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여자가 자신의 부끄러움을 잃어버리고 모든 사람을 조롱하며 자신의 수치를 드러낼 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한 여자가 이러한 방법으로 행동한다면 그 여자는 지구상의 모든 남자를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개인적이거나 특별한 가정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이전 설교에서 말했듯이 인류를 두 부분으로 나누고 있습니다. 즉 남성과 여성이라는 것입니다. 비록 남자가 결혼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그 남자가 여전히 본질적인 우선권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는 “머리”라고 말하고자 합니다. 누구에게 머리란 말입니까? 물론 여자에게 입니다. 단순히 한 가정을 살피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당에 세우신 질서이기 때문입니다. 과부나 결혼하지 아니한 처녀의 경우에도 사도 바울이 지금까지 말한 주제가 그들에게 동일하게 적합한 것입니다. 왜 그러합니까? 그것은 내가 말했듯이 전 여성에게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으로부터 우리는 사도 바울의 말이 마치 결혼한 여성들에게만 언급한 것이라고 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내가 지적했듯이 그는 각 개인적인 것이나 특별한 것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질서를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이 각 개인을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히려 그는 우리 주님께서 어떻게 우리와 함께 하시고 연합하셨는가 그리고 각 사람은 그의 은사와 소명에 따라 살아야 할 것을 그리고 우리가 우리의 머리를 조절할 수 있어야함을 보이려 합니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의 머리를 조절할 수 있어야함을 보이려 합니다. 오리려 우리는 하나님께서 짐승과 하늘의 새 그리고 바다의 물고기를 우리 밑에 두시고 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허락하셨으며 우리를 위해 이 세상을 두셨으며 우리 가운데 세우셨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는 남자에게 더 위대한 권위의 표식을 두셨고 여자는 그와 가까이 있으며 그러나 지위에 있어서는 낮게 하셨던 것입니다...... 바울은 “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요”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그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사도 바울이 다른 곳에서 말했던 것과 대조를 보이고 있는 것이 나타납니다. 즉 그것은 여자들에게 가르치도록 허용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바울이 어떻게 여기서 예언의 임무나 일이 여자들의 것이라 말하고 있겠습니까? 대답은 바울이 주석에서 여자들을 다루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는 가설적인 경우를 제안하고 있습니다. 이제 여자들은 가르치고 기도했던 것들을 생각해보고 그러한 행위를 하는데 머리에 쓰지 않았던 것을 생각하고자 합니다. 모든 사람이 그러한 광경을 보고 놀랐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도 없었고 위대한 많은 증인들이 여기에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눈을 그곳에서 돌릴 것입니다. 그 문제에 대한 좀더 깊은 논의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는 “만일 여자가 머리에 쓰지 않거든 깎거든 밀 것이요”라고 계속 말하고 있습니다. 머리를 깎은 여자가 자연적인 질서와 예절에 어긋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머리에 쓰는 것 역시 요구된다는 결론을 내려야만 합니다. 진실로 머리를 가진 여자가 옷 대신 가죽을 갖는 동물과 결코 비유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여자는 이미 하나님께서 그녀를 남자에게 종속시켰다는 표식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여자는 모든 것을 잃는다는 것을 뜻하고 더 이상 여자 자신을 알지 못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여자의 머리 깎는 문제를 말할 때 이것은 여자가 어쩔 수 없이 머리를 깎아야되는 경우를 막는 것은 아닙니다. 즉 여자는 공식 석상에 보이기 위하여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진실로 사도 바울은 가정에서 생길지도 모르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여자가 자기 머리를 빗질한다면 그 여자는 확실히 덮을 만큼의 머리를 가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여기서 가정에서 개인에게 발생할 수 있는 것을 논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일 때 불신자들이나 이교도들이 우리를 비난하지 못하도록 존중해야한다는 것을 보이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비난을 받아서는 안되겠습니다.

 

 이제 바울은 또한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라는 말을 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남자가 머리에 쓸 것과 자기 얼굴을 가리기 위하여 다른 것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말로서 바울은 남자가 가졌고 하나님이 주셨던 우선적인 지위에 관하여 내가 지적했던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남자들은 자신들이 자연적인 권리를 포기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자신들의 머리에 쓸 것을 가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남자들은 머리에 덮는 것을 쓰지 말아야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다음 구절을 살펴보겠습니다. 그는 우선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며”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바울은 처음 시작으로 눈을 돌립니다. 바울이 본문 후반부에 말하는 것처럼 비록 여자가 남자로부터 나왔지만 남자는 여자 없이 살 수 없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인류가 여자를 통하여 번성하지 않았다면 멸망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바울은 처음 창조에 대해 유일한 것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즉 만일 여자가 자신들의 하소연을 서약해주기를 원하고 마치 하나님께서 불합리하고 초라하게 하셨다고 불평한다면 그들은 성경이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누가 처음인가, 아담입니까? 하와입니까? 남자가 처음이고 여자는 남자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여자는 한 부분이며 악세서리라는 것을 알아야지 않겠습니까? 한 가지나 뿌리나 그 나무의 줄기보다 더 고상한 이름을 가지려고 하겠습니까? “여기에 줄기로부터 뻗어나온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가지가 경쟁에서 높아지려고 하겠습니까?”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제 여자는 남자로부터 나온 한 가지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서로를 좋아해서 연합하도록 명령하시기 위하여 이렇게 하신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남자가 여자로부터 동 떨어졌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한 몸으로 결합시키셨음을 깨닫게 하시기 위하여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대적하지 않는다면 갈라서지 못하게 하시기 위하여 남자로부터 한 갈비뼈를 취하시기를 좋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계속 남자를 여자 위에 세우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여기서 제시했던 첫 번째 이유인 것입니다.

 

 이제 여자들이 남자를 지배하기를 원할 때 여자들이 낡은 생각을 갖지 않았는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한 마디로 그것은 미친 행동입니다. 남자가 여자를 위해서 만들어졌습니까? 오늘날 남자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은총을 여자들에게 내려주시는 통로입니다. 산업과 모든 예술과 과학이 어디에서부터 왔습니까? 노동은 어디서부터 왔습니까? 모든 가장 좋은 것과 최고의 것은 어디서부터 왔습니까? 확실히 그 모든 것을 남자로부터 왔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남자들이 여자들을 선히 다루시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그러나 바울은 여기서 남자가 홀로 있는 것이 좋지 않아서 항상 가까이서 도울 수 있는 누군가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창조 초기로 눈을 돌립니다. 하나님께서 남자를 생각하고 계셨기 때문에 확실히 여자는 눈을 돌립니다. 하나님께서 남자를 생각하고 계셨기 때문에 확실히 여자는 악세서리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것은 여자가 남자를 위해서만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자는 “내가 만일 결혼한 여자라면 하나님으로부터 남편을 존귀함과 존경으로 섬기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내가 만일 결혼하지 않았다면 모든 부드러움과 겸손으로 행해야하고 남자가 높은 지위에 있으며 남자들이 지배해야하고 이러한 것을 경시하는 여자들은 자연의 법을 잊는 것이며 하나님의 명령으로서 지켜야 할 것을 악용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여자들에게 상기시킨 것입니다.

 

 더욱이 바울은 결론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즉 ‘여자들은 천사들을 인하여 권세아래 있는 표를 그 머리 위에 둘지니라’고 말합니다. ‘권세’라는 말은 그것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모호한 것같이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실히 바울은 여자의 두건과 머리에 쓰는 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가 왜 “권세”라고 불렀겠습니까? 그것은 남자들이 여자들 위에 있고 여자들은 자유에 있어서 불완전하다는 것을 보이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바울은 그것을 우리가 하나님 앞에 모일 때 사용하라고 주신 하나님의 표식이라고 지적합니다. 이제 이것은 남자들 뿐만 아니라 여자들에게까지 적절한 것입니다. 만일 남자가 여자 위에 있는 높은 지위를 갖기 위해 창조되었다는 것을 안다면 그리고 그가 결혼했다면 그가 “머리”이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아내를 잘 이끌고 아내를 도우며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권위를 따라야하는 의무가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만일 남자가 정신이 해이하고 자기 아내를 이끌 수 없을 정도로 나약해서 여자보다 더 덕스럽지 못한다면 어떻게 이끌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남자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높여주셨듯이 스스로를 더 위대하도록 해야합니다. 우리는 높이 있는 자가 높이 올라갈 수 있고 더 멀리 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한 남자가 가정에 숨겨져 있고 대부분의 남자들처럼 행동하지 못한다면 그는 자신의 환상에 따라 행할 것이고 어리석게 행동할 것입니다. 객관적인 관점에서 우둔하고 비열할지라도 그는 스스로 유능한 자로 여길 것입니다. 만일 그가 공적인 사무실에 간다면 그는 어리석게 되고 여러 사람들 사이에 묻혀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자보다 우위의 지위를 주셨는데도 스스로를 현명하게 다스리지 못하고 그들의 지위를 관리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그들의 수치가 될 것입니다.

 

이제는 또한 여자를 도와야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너무 지배하려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비록 여자들이 덜 유능하지만 여자들은 많은 욕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비록 여자들이 덜 유능하지만 여자들은 많은 욕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자들은 자신들의 입술로 자신들이 순종해야 된다는 것을 충분히 고백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전적인 통제와 완전한 신뢰를 즐겨하지 않고 심사숙고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경멸과 모욕을 느낄 것입니다. 이러한 악이 우리 가운데 뿌리 깊이 박혀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바로 잡아야겠으며 각 사람은 자신의 위치를 알아야겠습니다.

 

본문을 통해 바울의 말씀 즉 머리에 쓰는 것은 높은 지위를 나타내는 것이고 여자들은 겸손(p.55)하며 자신의 머리를 낮추어야 한다는 것을 주의 깊게 살펴야겠습니다. 아비멜덱이 사라에게 아브라함의 아내라는 것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을 비난했을 때는 그는 그녀에게 덮개가 될 것을 말했을 때였고(창20:16) 그것은 그녀의 남편에 대한 언급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만일 한 여자가 하나님께서 그녀에게 주신 덮개를 거부할 때 그 여자는 주요한 덕목이라고 말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고린도 전서 11장 11-16절

“그러나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 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으나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 너희는 스스로 판단하라. 여자가 쓰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마땅하냐. 만일 남자가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욕되는 것을 본성이 너희에게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만일 여자가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영광이 되나니 긴 머리는 쓰는 것을 대신하여 주신 연고니라. 변론하려는 태도를 가진 자가 있을지라도 우리에게나 하나님의 모든 교회에는 이런 규례가 없느니라”

 

 사도 바울이 바로 이전에 여자가 남자에 종속되었다고 말했는데 그것이 경우에 따라 남자들 스스로를 과도하게 높이려 하기 때문에(우리는 자연적으로 그렇게 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알듯이)이제 바울은 그의 진정한 목적을 드러내려 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남자들로 하여금 여자들을 마구 짓밟고 억누르며 군주로 군림하는 무제한의 권리를 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각 사람이 자신의 역할을 무엇보다도 자비함에 다라 할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바울은 “주안에서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않다”는 말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처럼 남자가 여자 없이 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남자 홀로 있는 것이 좋지 않다고 말씀하심으로서 그것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바로 이러한 것을 통하여 하나님은 남자로 하여금 자신의 필요를 깨닫게 하셨고 하나님께서 만드신 결혼 제도를 지키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여자를 남자에 종속시키셨을 때는 하는 수 없이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라 그것이 옳기 때문이며 또한 남자가 여자의 도움을 받아야 되도록 의도하셨다면 그것은 달리 하실 수 없어서가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이 기쁘시기 때문입니다. 비록 우리가 그 이유를 알 수 없을 지라도 우리는 모든 지혜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권고 보다 더 좋은 것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바울은 그가 시작했던 주제에 대해 계속 말하고 있습니다. 즉 여자들은 공적인 집회에서 머리에 아무 것도 가리지 않은 채 나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남자 또한 불결하지 않도록 예의 바르게 옷을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확고히 하기 위해 그는 더 근원적인 이유 “만일 여자가 머리에 쓰지 않는 것을 가르치는 것은 마땅치 아니하니 그것은 그 여자에게 수치스런 일이 아니겠느냐?”를 말합니다.

 

 사람들은 한 여자가 머리가 없이 나오면 남자라고 확실히 말합니다. 그가 “여자는 머리를 덮을 필요가 있다”라고 말할 때 이는 여자를 가졌다거나 그 여자가 덮을 정도의 많은 머리를 가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는 오히려 그가 유지하기를 바랐던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는 오히려 그가 유지하기를 바랐던 것을 주님께서 직접 주셨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만일 여자가 긴 머리를 가졌다면 그 여자에게 “당신의 머리 덮개를 쓰시오, 당신의 모자를 쓰시오, 당신의 후드(두건)를 쓰시오. 그런 식으로 당신 자신을 노출시키지 마시오! 왜냐구요? 비록 당신이 머리 덮개도 안하고 후드도 안 할지라도 당신은 어떤 것으로도 당신 자신을 감추어야 합니다. 당신은 아무 것도 쓰지 않은 머리를 그냥 놓아둘 수 없다는 것과 본성에 대적하는 것임을 알 것입니다.”라고 말해야합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의 메시지를 어떻게 이해해야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남자에 관하여 반대의 경우를 말합니다. 즉 “만일 나자가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욕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단순히 그 당시 특별히 그가 말하고 있었던 민족에서 유행하던 동일한 습관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오늘날의 독일이나 프랑스와 같이 남자들이 그들의 머리를 짧게 자르거나 깎는 것이 관습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숱이 많은 머리털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비록 사람이 고대를 생각한다면 남자들은 확실히 하나님의 사람일지라도 우리가 압살롬의 경우에서 보듯이 머리를 갖고 있었습니다. 모든 고대의 역사가들은 남자들이 그들의 머리를 자르거나 깎는 습관이 없었다고 말합니다. 물론 여자들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머리는 그들 모두에게 공통적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여기서 공통적인 실제를 받아들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펴야 하는 점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말들로부터 우리가 받아들인 것들에 변화를 주고 싶어진 경솔한 욕구를 갖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가 가는 길만을 가야할 것입니다. 우리는 습관이 좋은지 온당한지 그것이 본성에 따른 것인지 그것이 품위를 높이는 것인지 좋은 본보기인지에 다른 것인지 그것이 품위를 높이는 것인지 좋은 본보기인지 혹은 그것이 부패했는지 악한지를 식별해야 합니다. 누가 모든 관습을 지키지 원하겠습니까? 그것을 이끄는 곳은 어디입니까?

 

우리가 아는바와 같이 남자들은 선하기보다는 악해지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타락에 빠져들기 시작하면 다른 사람들도 이를 다릅니다. 그리고 그들은 공동적인 실제규칙을 만들고 그것을 합법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만일 사람이 모든 관습을 승인하려고 한다면 그는 확실히 혼란과 악영향으로 뒤범벅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더 이상의 조화와 올바름이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언급도 없고 인간 가운데 예절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신중한 분별력이 요구됩니다.

 

 예를 들면 프랑스는 다른 민족들보다도 그들의 복장에 있어서 더욱 타락해 있습니다. 왜 그러합니까? 지금 이러한 방법으로 몸에 옷을 입고 목에 걸치는 민족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이 사람들의 이상한 호기심 때문이라고 말씀하셨고 그것들을 비난하셨고 조소하셨습니다. 그것은 전보다도 동요가 심한 오늘날 더 그러합니다. 이처럼 세계의 모든 것이 완전히 타락하고 모든 것이 뒤죽박죽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될지라도 우리는 특별한 여러 민족들의 악을 계속 살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그러한 악들로부터 우리 스스로를 지켜야 합니다. 그리고 악을 행하는 자들로 하여금 악에 대해 고백하게 하고 하나님 말씀에 따라 그들 스스로를 고치도록 해야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것들을 중요시여기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것에 관해 선지자들에게 말씀하신 것 즉 하나님이 이방의 의복을 고치겠다고 하신(습 1:8)것을 보게될 것입니다. 진실로 주님께서 의복을 바꾸는데 열정적인 자들을 징벌하시겠다고 말씀하실 때 그는 우리가 그것을 멈추어야 하고 이러한 변화는 나쁘며 항상 악한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가르치고 계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스스로를 지나치게 내버려둘 때 남자들은 어떻게 행동해야하는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효과적인 면에서 이러한 의복의 변화가 가져오는 결과가 무엇입니까? 우선은 야심입니다. 이는 패션의 지도자들이 많은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사람들은 그들의 운명을 그것에 쏟아버립니다. 그들이 계속 낭비하고 소비하기 때문에 그들은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해 여러 수단들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그들은 다른 사람의 부를 빼앗고 훔치며 어떤 사람들은 옷을 입는데 투자하고 노력하며 다른 사람들은 집과 소유물에 관심을 가질 정도로 혼란한 상태가 올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의해 비난을 받는 이러한 허영은 말하기에 차마 어려울 정도로 추잡함과 멸망을 가져 올 것입니다. 더욱이 우리가 의복에 관해 말했던 것은 마찬가지로 나머지 다른 모든 것들에 적용되어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들은 수용된 습관이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그것은 선하고 좋은 것이라는 사실을 배워야 하고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 습관을 바꾸고자하는 자는 확실히 누구든지 공동이 따르는 선의 대적자들이고 혐오의 대상이 되며 문제를 만드는 자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말했던 것처럼 우리는 관습과 악습사이를 식별해야 합니다. 우리는 관습이 하나님의 말씀과 교훈과 모범, 자연적 예절에 따를 수 있는 잘 다져진 행위라는 것을 생각하도록 해야겠습니다. 악습은 모든 불친절과 부 절제이며 어떤 것이든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지 않으며 그 모든 것이 공동이 따르는 선에 해롭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악습들은 끊임없이 고치고 제거해야겠습니다.

 

 만일 우리가 악습에 길들어져 있다면 우리는 당연히 그것을 벗어버리는 수고를 해야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봐, 보라구. 우리는 이 방법에 익숙해 있어 그것을 색다르게 보지 말라구”라고 말하는 완고한 자들이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비록 토대로 없더라도 그러한 완고한 자들이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비록 토대가 없더라도 그러한 완고한 것에 우리의 토대를 세워야 합니까? 낡은 악습을 만드는 것은 더욱 나쁜 것이며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악습은 고쳐져야 되고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는 실제로 이러한 악습에 익숙해져 있어”라고 말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실로 이러한 악행 때문에 하나님이 잘못되시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또한 질서 있게 잘 세워진 어떤 것을 변화시키기 위하여 관습에 호소하고 그들의 자유를 주장하는 자들을 거부해야 합니다. 그들은 “변화를 허용해서는 안된다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것은 피상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율법을 주시지 않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좋아하는 것을 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매일 변화를 하고 싶어하는 자들은 모든 것을 혼란에 빠뜨리려고 합니다. 일단 그들이 그들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합리적인 것에 반하는 어떤 것을 세웠을 때 그들은 “이것은 관습이야”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말했던 것처럼 그것이 어떤 토대를 갖고 있는가 살펴야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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