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의 신학은 윤리와 뗄 수 없다. 칼빈의 윤리 원칙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끌어냈고 철학적 의미의 윤리체계를 세운 것은 아니다. 그래서 칼빈은 철학자들의 냉랭한 윤리이론을 비판했다. 그는 기독교 강요에 쓰기를 “철학자들이 특별히 도덕적으로 살라고 하는 것은 다만 본성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뿐이다”(Ⅲ. 6. 4)라고 했다. 대개 양심을 따라 산다는 말은 듣기는 좋고, 양심도 귀한 일을 하지만 양심이 도덕적 표준이 될 수는 없다.

 

양심의 표준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물론 칼빈은 양심의 역할을 여러 번 말했다. 그의 시편 주석에는 “행복한 생활은 선한 양심에 달려 있다”(p. 7) “선한 양심보다 더 아름다운 극장은 없다”(p. 583)고 했다. 하지만 양심은 표준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이 표준이라고 했다. 칼빈의 윤리란 하나님의 뜻과 말씀의 절대 권위로 의지하는 확신에서 출발한다. 칼빈의 제네바의 행정과 정치는 그의 반대파들의 입장에서 보면 껄끄럽기 그지없고 자유를 억압한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제네바의 종교 회의(Consistory)를 통한 성도들과 시민들을 향한 윤리적 잣대는 오로지 하나님의 계명 즉 성경에 중심을 두고 있다. 얼른 보기에는 칼빈이 독재자의 모습으로 비추일 수 있었고 너무 강해서 실현 불가능한 듯이 보여 지기도 했다. 그러나 칼빈의 중심 신학이 하나님 앞에서의 삶이듯이 그의 윤리도 하나님 앞에서의 윤리였다. 또한 그가 주장한 윤리는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의 윤리였음으로 호소력이 있고 추진력을 가질 수가 있었다. 칼빈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를 위한 영적 싸움을 한다고 생각했다. 칼빈은 모세의 십계명에 주어진 기독교적 윤리에 대해 자세히 쓰고 있다. 칼빈은 그의 설교와 성경주석, 편지와 논문 등에서 하나님 중심의 신앙을 하는 사람들이 걸어가야 할 윤리적 법칙들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예수그리스도의 은혜와 삶을 최고의 도덕으로 봄 칼빈은 앞서 말한대로 윤리적 인식의 근거는 하나님의 말씀이 표준이 됐다. 즉 성경이 윤리의 기준과 근거가 된다는 말이다. 칼빈 당시 로마가톨릭의 입장은 교회가 성경을 결정했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니 성경의 권위보다는 교황의 칙령이나 전승이 윗자리를 차지하게 됐고 윤리적 기준이 없어졌다. 그래서 칼빈은 성경의 권위만이 교회를 바로 세우고 윤리를 바로 세운다고 본 것이다. 교회는 성경의 윗자리에 있지도 않을 뿐 아니라 교회는 성경에 예속되고 그 성경의 말씀에 따라서 살아야 할 것을 말했다. 성경의 해석도 교회가 자의적으로 자기 편의와 교권을 위해서 해서는 안 되고 성령만이 성경을 옳게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칼빈은 “참된 교회란 하나님의 말씀을 순수하게 증거하고 들으며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대로 성례를 시행하는 교회”라는 주장을 한다. 그러므로 칼빈이 말하는 윤리는 인간의 전적부패와 타락으로 자기 힘으로는 의를 행할 수 없음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삶을 최고의 도덕적 모범으로 보았다.

 

칼빈의 윤리는 하나님 중심의 윤리

칼빈의 윤리는 하나님 중심의 윤리이다. 칼빈의 신학이 하나님 중심이므로 삶의 윤리적 잣대로 하나님 중심이라는 것은 당연하다.

 

상벌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이 세상에 모든 윤리는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나듯이 우리 자신의 행동에 따라서 상급이 달라지고 행복이 달라진다고 한다. 또 모든 것은 인간의 결정하기 나름이라는 사상이다. 그래서 적극적 사고방식을 가지면 자연스럽게 모든 것이 잘 풀리고 거기에 대한 보상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칼빈은 인간이 자기의 선행으로 상을 받고 죄 때문에 벌을 받는 것 같지만 실상은 상을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벌을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칼빈은 윤리사상에서 하나님의 주권개념은 매우 중요하다. 하나님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시고 의로우신 창조주이며 구속주이시며 심판주가 되신다는 것이다. 그 하나님이 계시고 그가 주권적으로 다스린다는 믿음이 바로 윤리적 잣대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주권사상은 우리에게 말할 수 없는 확실성과 신뢰성을 주고 신앙의 견고한 기초, 불안과 두려움에서의 해방, 적극적 종교적 자유를 준다고 보았다.

 

인간의 전적 타락이 윤리의 전재이다

칼빈의 윤리에는 인간의 전적타락이 전재가 된다. 물론 이 말은 자유주의자들은 거부할 것이고 일반적으로 모든 인본주의자들은 비웃을 것이다. 하지만 칼빈은 인간의 본성이 전적으로 부패하여 선을 향해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으며 성령으로 중생의 체험을 하기 전에는 참된 선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칼빈의 윤리는 하나님 중심의 윤리이기에 인간의 전적부패를 믿고, 중생함으로서 하나님의 은혜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철학자들의 생각처럼 자연적 선이나 인간의 노력이나 사색을 통해서 의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헛된 것으로 본다. 칼빈의 윤리는 달리 말하면 하나님의 은혜의 윤리이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우리를 택해주시고 은혜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되었으니 또한 은혜로 죄를 이기는 삶을 산다는 것이다.

 

성경의 윤리는 자기 부정을 통해 긍정에 이른다

현대 윤리는 ‘긍정을 통한 긍정’이다. 오늘날의 거의 모든 신학체계는 인간의 본성은 믿을만 하니 일단은 자기를 긍정하고 적극적 사고방식을 가져야 한다고 가르친다. 이런 경향은 모든 책들, 설교, 신문, 방송 등에서 매일같이 보고 들은 이야기이다. 그러나 칼빈의 윤리 즉 성경의 윤리는 ‘부정을 통해서 긍정’에 이르는 원리이다. 즉 인간은 자기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줄 알고 자기의 연약과 부패를 깨닫고 난 후에 죄의 용서와 하나님의 은혜로 비로소 새롭게 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래서 칼빈은 디도서 주석에서 말하기를 “자신을 부인하여 자신에 대한 관심을 포기하고 주님이 요구하시는 것들을 전심으로 구하며 따라서 오직 주님께서 기뻐하시기 때문에 그것들을 구하는 것 외에는 우리에게는 다른 치료약이 없다는 것이다. 바울은 율법의 두 돌비에 근거해서 우리 자신의 본성을 버리고 이성과 의지가 원하는 것들을 부인하라고 명령하였다(2: 11-14)고 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한 첫 관문이다. 이는 인간의 전적부패와 무능을 정직히 받아 들리는 것이다. 그래서 주(主)밖에는 나의 구주가 없다는 탄성이 나오기 전에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그러므로 칼빈주의 5대교리의 첫째가 인간의 전적타락과 부패를 받아 들이는 것이다.

 

칼빈이 죽은 지 60년 만에 돌트총회에서 확정한 것은 천번 만번 옳다. 세상의 윤리는 인간의 의지와 양심에다 걸어 놓았으나 칼빈의 윤리는 불변의 하나님의 말씀에 그 기초를 두었다. 그리고 칼빈의 윤리는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과 하나님의 주권에 뿌리를 둔다. 그래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구원의 확신 가운데 살아가는 발걸음이 기독교윤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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