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의 제안대로 ‘교회 헌법’이 시정부에 의하여 통과되었지만, 제네바 개혁에는 많은 어려움이 산재해 있었다.
다수의 시민들이 칼빈의 도덕적인 개혁에 대해 불만을 품고 대항했다.

그 대표적인 세력인 방종파(Livertines)는, 칼빈이 사적으로나 공적으로 엄격한 윤리 생활을 요구하자, 칼빈에 대한 반대 운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카드놀이 제조업자였던 피에르 아뫼(Pierre Ameaux)는, 칼빈의 개혁 운동으로 유흥을 멀리하는 풍조가 일어나 막대한 재정적인 손실로 파산지경에 이르자, 1546년 1월부터 칼빈이 잘못된 교리를 가르친다고 중상 모략하였다. 칼빈을 제네바로 초청하는데 앞장섰던 아미 페린(Ami Perrin)도, 부도덕한 그의 장인과 아내가 장로 법원에서 치리받자, 칼빈의 개혁 운동에 대하여 사사건건 반대 하였다.특히 그는 1553년 원로원 회원으로 당선되자, 장로 법원이 가졌던 출교권을 시의회로 환원시키려고 하여 칼빈에게 어려움을 주었다.

 

칼빈은 반삼위일체주의자였던 세르베투스(Michael Servetus, 1511-1553)의 도전도 받았다. 세르베투스는 스페인에서 궁정 공증인의 아들로 태어나 사라고사(Saragossa)와 툴루즈(Toulouse)에서 법학과 신학을 공부한 후, 이태리와 독일을 여행하면서 필립 멜랑톤과 마틴 부쳐를 만났다. 그는 개인적인 성경 연구를 통하여 삼위일체 교리를 부인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그의 사상을 ‘삼위일체 오류론’(De Trinitatis Erroribus)을 통하여 발표하였다. 그 후 그는 파리로 가서 의학을 공부하고, 1541년부터 1553년까지 비엔나의 대주교 주치의로 일하였다.


이때에 그는 칼빈과 교제하게 되었지만, 얼마 못 가서 그의 정체를 발견한 칼빈의 비판을 받게 되었다. 세르베투스는 1553년 익명으로 쓴 ‘기독교의 재건’(Christianismi Restitutio)에서 그의 모든 사상을 설명하면서 삼위일체 교리와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하여 부인하였다. 이러한 사상으로 세르베투스는 스페인의 종교 재판소에 의해 사형 선고를 받고, 프랑스 리용에서 체포되어 화형 선고를 받았지만, 형 집행 전에 탈출하여 제네바로 향하였다. 칼빈은 세르베투스가 제네바로 온다는 말을 듣고 강력하게 반대했지만, 세르베투스는 제네바에 칼빈의 적들이 많으므로 그들과 합하면 칼빈을 이길 수 있다고 확신하고 제네바로 왔다.  그러나 제네바 시 당국은 그가 도착하자마나 체포하였고, 이단과 신성모독 죄로 정죄하였다. 당시의 법 형평상, 삼위일체 교리를 부정하는 사상은 성도의 영혼을 죽이는 염병으로 간주되어 화형에 해당되는 벌을 받곤 하였다. 세르베투스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제네바 시가 세르베투스에게 화형 선고를 내리자, 칼빈은 좀 더 인간적인 방법을 취할 것을 시의회에 요청하였다. 그러나 칼빈에 적대적이던 시의회는 이 요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칼빈은 2개월 13일간 세르베투스를 지하 감옥에 가두고 온갖 방법으로 그의 개심과 수정을 요청하였으나 그는 끝내 듣지 않았다. 1553년 10월 27일 세르베투스는 화형에 처해졌다.

이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은 칼빈이 세르베투스를 처형하는데 앞장섰다고 비난하는데 이는 크게 잘못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세르베투스 사건 이후, 칼빈과 제네바 시 당국은 세바스티안 카스텔리오(Sebastian Castellio, 1515-1563)의 도전을 받았다.
그는 사보이 출신으로 1540년 스트라스부르에서 칼빈을 만나 개종하였으나, 인문주의적인 사상 때문에 칼빈의 비판을 받게 되었다. 그는 1544년 아가서를 성경에서 제외시키려고 하였고, 그리스도께서 지옥에 내려갔다는 이단적인 사상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사상으로 칼빈의 비판을 받게 되자, 바젤로 가서 신학을 가르치던 중 ‘이단에 관하여-그들은 박해받아야 하며, 어떻게 취급되어야만 하는가?’라는 글을 써서 세르베투스의 처형에 대해 비판하면서 종교적인 관용을 주장하였다.


카스텔리오는 삼위일체론, 예정론, 자유의지론, 신론, 천사론 그리고 종말론 등을 구원과 관계없는 교리라고 말하면서, 이러한 교리에 대한 견해 차이로 추방하거나 구속, 투옥, 화형, 교수형을 선언하는 것은 교권의 횡포라고 비난하였다. 그는 교리보다 중요한 것이 도덕적인 생활이므로, 교회가 교리적인 문제로 성도를 박해하는 것은 위선적인 것이라고 하였다. 1551년 칼빈은 로마 천주교회에서 개종하여 제네바 근교에서 의원을 개업한 볼섹(Jerome Hermes Bolsec)의 중상모략을 받았다. 그는 원래 파리에 소재한 카멜파(Carmelite) 수도사였으나, 이태리에서 의학 수업을 받은 후 프랑스의 샤블레(Chablais)에서 생활하면서 칼빈과 교제하였다. 그는 1551년 제네바에 도착하여, 칼빈의 예정 교리가 하나님을 죄의 저자로 만든다고 주장하며 칼빈을 비난하였다. 이에 대하여 제네바 당국은 그를 중상모략 죄로 체포하고, 바젤, 취리히, 베른의 교회들과 함께 정죄하였고, 그 해 12월 제네바에서 영구 추방하였다.  그는 샤블레에서 칼빈에 대한 인신공격을 계속하면서 예정 교리를 비판하던 중, 1562년의 오를레앙 교회회의와 1563년의 리용 교회 회의에서 정죄를 받은 후, 로마 천주교회로 돌아갔다.
 

이와 같이 칼빈의 반대자들은 신학적으로 그릇된 사상을 주장하며 정치적인 세력으로 대항할 뿐만 아니라, 야비한 방법을 동원하여 칼빈을 괴롭혔다. 그가 자주 다니는 골목에 사나운 개를 풀어놓는다던가, 예배 중에 교회를 향하여 총을 쏜다던가, 그가 설교할 때 크게 기침 소리를 내어 설교를 방해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칼빈은 하나님의 은혜로 이러한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제네바 교회를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이 다스리는 곳으로 만들어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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