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 차 ◈


제1장 청교도  /4

1. 청교도란?  /4

2. 청교도의 유래  /5

3. 청교 주의의 기원  /7

4. 청교도의 활동  /10


제2장 청교도 혁명  /14

1. 청교도혁명의 배경  /14

2. 청교도혁명의 시작  /16

3. 청교도혁명의 결과  /18


제3장 청교도운동의 전개  /19

1. 영국 청교도 운동의 전개  /19

2. 청교도주의의 문학  /22

3. 미국에 끼친 청교도주의의 영향  /23


제4장 청교도의 이주  /25

1. 청교도의 신대륙 이주  /25

2. 신대륙의 영국 식민지  /30

3. 분리주의자와 비분리주의자  /31

4. 뉴네델란드와 메릴랜드  /32

5. 청교도 정신과 프론티어  /34


제5장 청교도의 신앙과 사상과 삶  /36

1. 청교도들의 사상  /36

2. 청교도 운동의 7대 기준  /36

3. 청교도들의 삶  /37

4. 청교도들의 신학  /44

5. 미국 청교도주의의 성격  /55

6. 청교도들의 사회활동  /62

7. 청교도들의 가정과 교육  /68


제6장 청교도들의 설교  /77

1. 청교도의 목사 상  /77

2. 청교도의 유명 설교자들  /78

3. 청교도 설교자들의 설교 특징  /79


제7장 청교도 인물사  /90

A. 전기 퓨리탄  /93

1. 존 낙스  /93

B. 초기 퓨리탄  /109

2. 에드워드 데링  /109

3. 존 도트  /112

4. 위리엄 퍼킨스  /115

5. 존 로저스  /119

6. 리차드 십스  /120

C. 절정기 퓨리탄  /122

7. 존 밀턴  /122

8. 존 번연  /125

9. 존 오웬  /128

D. 후기 퓨리탄  /130

10. 요한 웨슬레  /130

11. 조지 휘트필드  /132

12. 챨스 스펄젼  /134

E. 미국의 퓨리탄  /137

13. 토마스 쉐퍼드  /137

14. 조나단 에드워드  /140






淸敎徒史



제1장 청교도(Puritans)

1. 청교도(Puritans)란?

청교도들(Puritans)은 누구인가? 한 작가는 그들을 이렇게 묘사했다: “영국교회와 영국사회에서 보다 경건하고 철저한 개혁을 위하여 일어난 한 운동으로, 이것은 기본적으로 1560년에 시작했으며, 짧은 시기 즉 1640년대와 1650년대에 성공적이었다.”

청교도란 16세기 후반, 영국에서 일어난 프로테스탄트의 한 부류이다. 이들은 가톨릭적인 영국 국교회 즉 성공회에 반항하여 칼빈이즘을 모범으로 하여 태동된 하나의 신앙운동의 부류이다.

이들은 모든 오락을 죄악시하였으며 화미(華美), 호사(豪奢)를 물리치고 성직자의 권위를 배격하며, 승속(僧俗)을 구별하지 않고 청정(淸淨)한 생활을 강령으로 하고 있다.


청교도(Puritan)라는 별명은 1564년경에 붙여진 명칭으로 '통일령'(the Act of Uniformity, 1559년)에 규정된 것보다 더욱 급진적으로 교회의 예배와 질서를 개혁하기를 원했던 영국 국교회(the Church of England)의 회원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청교도들은 전해진 바에 의하면 미신적인 의식들과 천주교의 관구 조직을 타파하고 성직자들의 동등성을 주장하고 편협적인 징계에 대항하며 보다 더 나은 설교와 목회를 위해 능력을 받는 것을 위해 진력했다.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의 청교도들은 분리주의자(分離主義者)가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의 분리주의자들은 청교도로 불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17세기에 청교도란 이름은 포괄적으로 확대되어 사용되었는데, 칼빈주의 신조를 고수하고 진지한 경건 생활을 실천하는 감독 교회 교인, 장로교회 교인, 독립 교회 교인들 모두에게 대해 사용되었다. 보다 더 넓은 의미에 있어서 청교도주의는 검소하면서도 부유한 문화와, 고상한 전통적 도덕과, 목회 신학으로 발전하였는데, 이것은 영국에서와 뉴잉글랜드에서 18세기의 복음주의를 고취시켰다.

청교도 신학은 개혁주의 신학을 특색으로 하고 있으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the Westminster Confession)을 증거하고 있다. 두 가지의 뚜렷한 특징은 성령의 사역을 세밀하게 취급하였다는 것과 일요일에 대한 개념을 그리스도의 안식일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2. 청교도의 유래

(1) 종교개혁

사실 청교도주의 실마리가 된 것은 종교개혁과 일련의 사건들로 시작된다. 종교개혁의 직접적인 배경이라 할 수 있는 여러 해 동안의 교회의 악습, 특히 날로 증대해 가는 세입을 위한 온갖 십일조, 요금, 벌금 등의 부과는 그것의 원인이 될 수 있었다. 한 편, 독일에서는 농노제도가 아직도 존재하였으며 완전하게 지방분권화 된 정부들은 널리 퍼진 농민의 고통을 완화하는데 거의 도움이 되지 못했다.

또한 르네상스 시대의 교황들은 예술의 아낌없는 후원자들로 후원금을 대기 위해 계속해서 추가 세입을 거둬들였고, 특히 교회 당국의 노골적인 면죄부 판매는 루터로 하여금 개혁의 의지를 일으키게 한 가장 큰 원인이었다. 그의 태도는 이러했다. 신과 올바른 인간적인 관계만이 구원을 가져온다고 확신하고 모든 선행 중에서 가장 숭고한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라고 정의하였으며, 더 나아가 일상생활의 평범한 직업과 본질적인 선함을 주장하였다. 게다가 선행을 자선금 기부나 단식, 기도 또는 부자연스러운 금욕생활을 통해 추구하려는 점을 거부한 것은 루터 사상의 대단함과 독창성을 더욱 입증해 주고 있다.

또한 스위스에서 활동한 쯔빙글리의 뒤를 이은 캘빈은 인도주의적 전통 속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그의 종교에 대한 접근 방법은 신비적이거나 경건하기보다는 지성적이었다는 점이 특징이었다. 그 때부터 이 두 사람의 강력한 추진력을 통해서 개신교는 캘빈이즘 그리고 후에는 청교 주의를 구분해 주는 표시가 된 신학과 내적 조직의 특색을 띄게 되었다.


(2) Calvinism

캘빈의 신학 체계는 신의 완벽한 통치와 신의 진정한 본질을 인간은 결국 이해할 수 없다는 점을 받아들이는 것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나 그에 의하면 인간은 자신과 신에 대한 지식이 인간의 가장 소중한 의무이기 때문에 인간은 성격에 담겨 있는 신의 말씀과 자연의 교훈을 통해 약간의 이해를 성취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루터와 마찬가지로 캘빈도 개인의 삶 속에 적용하는 신의 은총을 개별적으로 통찰할 것을 강조했다.

캘빈은 예정설의 피할 수 없는 사실을 주장하면서 예정설이란 "우리가 신의 영원한 뜻이라 부르는 것으로, 그것으로 신은 마음속에서 인류 개개인에게 일어날 일을 결정짓는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모두 유사한 운명을 가지고 창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생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미리 정해져 있으며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영원한 저주가 미리 정해져 있다."고 하였다.

캘빈주의는 개인의 정신적 생활에 카톨릭 교회가 중재하는 것을 거부하며 비교적 단순하고 비 의례적인 예배 의식으로 돌아가고 또 교회의 목사들, 집사들, 그리고 장로들의 지도에 교회 신도들의 동의를 요하는 원칙을 내세운 점에서, 캘빈주의는 결코 이교도에게 관대하거나 민주적이라고는 부를 수 없지만 철저하게 신교 적이었다. 비록 캘빈주의 최초의 교리들이 영국 해협을 건너가면서 상당한 변화를 겪고, 또 대서양을 건너 뉴잉글랜드로 가면서 더 많은 변화를 겪었지만 캘빈주의의 기원과 일반적 특성들은 청교 주의의 기초가 되었던 것이다.


3. 청교 주의의 기원

* 청교도 운동 기간의 영국 국왕 계보와 개요 *

핸리8세(HENRY VIII, 헨리7세의 차남, 1509-1547, 중도(middle way), 국교회(Anglican Church) 시작, 1534년에 의회에서 수장령통과, 1536년에 영국교회의 첫 번째 교리 Ten Articles 발표, 1539년에 Six Articles로 개정)

에드워드6세(  EDWARD VI, 헨리8세와 제인 시모어 사이에서 낳은 아들, 1547-1553, 개신교(prostantism), 1549년에 영국교회의 첫 번째 기도서 The First Prayer Book 발간, 1552년에 교리 42조문(Forty-Two Articles)을 포고,)

매리(MARY, 1553-1558, 헨리8세와 케더린 사이에서 낳은 딸, 캐톨릭(romanism) 많은 개신교인들을 체포하고 죽임.)

에리자베스(ELIZABETH, 헨리8세와 앤의 사이에서 낳은 딸, 1558-1603, 중도(middle way)영국의 중흥 기 이룸, 청교도 운동 일어남. 에리자베스가 죽음으로서 tudor왕조가 끝남.)

제임스 1세(JAMES 1, 스코틀란드의 여왕 메리의 아들로서 스코트에서는 제임스VI세로 즉위했었음, 1603-1625, 국교회(Anglican Church) 확립, 왕권신수설(Divine right of kings)로 왕권을 강화함, Version of King James를 완역하여 출간, 영국과 화란의 100여명의 청교도들이 May Flower라는 배를 타고 Plymouth를 떠나 신대륙 동부에 도착.)

챨스1세(CHARLES I, 제임스1세(6세)의 아들, 1625-1649, 국교회(Anglican Church) 강화 개신교 박해, 1629년 왕은 의회를 해산. 그러나 1640년, 의회는 단독으로 장기의회(Long Parliament)를 소집하여 왕에게 대항. 1642년에 시민전쟁이 일어남, 장기의회는 Westminster Assembly를 소집(1643.7). Westminster Assembly는 1643-1647에 걸쳐서 소집되었으며 120명의 정회원으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대 소 요리 문답, 예배모범을 만듬.)


일반적으로 영국의 종교개혁은 1534년 헨리 8세가 개인적이며 정치적인 이유에서 잉글랜드의 교회는 교황 교회로부터 결별한다고 선언함으로써 시작되었다. 1534년의 ‘수장령(首長令)’에 따라 영국은 국왕을 최고 관리자로 하는 독립된 교회가 되었는데, 이것이 영국 국교회(성공회)이다.

그 후 아들을 얻지 못하는 헨리 8세의 뒤를 이어 그의 장녀 메리가 직위 한 후 신교도들의 박해는 시작되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가 정권을 잡은 후 그녀는 정치적 입장에서 양파에 대해서 타협적 입장을 취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헨리 8세에 의해 생겨난 성공회의 최고 수장 직을 계속 이어가면서 구교와 신교사이의 공통분모를 찾으려하였다. 하지만 정통 로마 카톨릭 측과 정통 개혁파측은 여전히 그들만의 교리와 교회를 유지하려 하였다. 이 때 생겨난 것이 청교도 운동이었다. 프랑스의 개혁파를 위그노파라 불린 것과 같이 영국의 개혁파의 주류는 청교도들이었다. 청교도들은 더욱 급진적으로 교회를 개혁하길 바랬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그녀에게 반대하는 자들을 배격하는 정책으로 일관하였다. 청교도들은 엘리자베스 여왕의 신앙 노선을 불신하였고 로마 카톨릭 교황 Pius 5세도 여왕을 1570년 파문시켰다.

그러나 많은 순교자의 반 카톨릭 정신 즉, 대륙의 Protestantism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정신은 결코 멈추지 않았다. 그 개혁자들이 바로 Puritans였던 것이고 그 운동이 청교 주의 운동이었던 것이다.

즉, 영국 국교회에 있어서 로마 카톨릭의 냄새, 즉 성서에 없는 의례를 일소하자, 그렇게 하지 않으면 개신교의 진리는 발휘되지 않는다는 것이 그 주장이었다.

로이드존스(D. Martyn Lloyd-Jones)의 표현처럼 “먼저 의식들과 예복들에서 시작이 되어서 끝내는 영국 국교회의 전체 상태에 대한 의문으로 나아갔고, 철저하게 개혁하려는 열망으로 연결되었습니다. 청교도는 부분적으로 개혁된 교회에 만족하지 않고 완전하게 개혁된 교회를 원하였다.” 더욱 발전하여 엘리자베스 여왕이 다스리던 1560년대에는 청교도 운동이 하나의 조직된 운동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로마 카톨릭을 벗어났다고 하는 영국 국교회는 국왕이나 여왕을 교회의 수장(Super Head)으로 받들었으며, 일반회원으로서는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은 귀족과 그 가신들이 존경을 받았다. 그러한 까닭으로 국교회는 전제군주정치와 원칙이 동일했다. 거기에는 인간의 자유가 중시되어 있지 않았다. 게다가 Puritan들도 결국은 영국 교회 테두리 안에서 개혁을 주장하였고 그 후 그들도 세속에 찌들고 영국 교회와 잦은 교류를 하면서 타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따라서 국교회를 반대하는 단체가 생기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청교 주의에 기초를 둔 것으로 비국교도(Dissenters) 라고 불리는 것들이었다. 그중 제일 먼저 나타난 것이 장로교회이다. 하지만 장로에 의해 운영되는 장로교도 아직 일반 회원의 권리를 충분히 인정하지 못했다. 그래서 또 하나의 교회가 생기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빈곤하며 사회적 지위가 얕은 사람들의 평등의 권리를 인정하는 조합 교회였다. 이 파는 분리주의자(Separatist) 라고 불려지기도 했다.


영국 국교회 내에서의 청교도 운동은 1662년 대 추방령으로 종식되었다가 1688년 명예혁명이 일어남으로 청교도들에게 설교하고 독립교회를 세울 수 있는 권리가 다시 주어졌고 국교회 밖에서 계속되게 되었다.


이렇듯 청교도는 한 세기 반가량 영국에서 진행된 개신교 종교 개혁운동이다. 청교도 운동은 그들의 정신과 사상을 이어받은 그의 후예들에 의해서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청교도라는 말이 최초로 사용된 시기는 1564년으로 추정되는데, 이 이름은 처음에 영국 국교회에 비타협적인 개신교도들을 내리깎는 경멸조의 적개심이 가득한 호칭이었다. “까탈스럽운 사람들, 비판적이고 고집불통의 사람들”, “까탈스럽고 비판적이고, 기만적이고 위선적인 작당들”, “국교도에 반대하는 악명 높은 청교도들”이라는 호칭으로 사용되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표현이 처음에 사용되었을 때에 대적 자들에 의해서 붙여진 경멸조의 이름이었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 영광스러운 표현이 되었듯이 청교도들이라는 경멸의 표현도 얼마 후에 일반적인 용어로 사용되었고 그 이후의 세대에게 영광스러운 이름이 된 것이다.


4. 청교도 (Puritans)의 활동

청교도들은 스코틀랜드의 장로교회를 그들의 모범적 교회 관으로 삼았다. 청교도들은 성공회로부터 분리를 원했고 그래서 기성교회와 정부로부터 심한 박해를 받아야 했다. 1588년 스페인의 필립 2세가 이끄는 130척의 무적함대가 영국 해협으로 출현하였다. 필립 2세는 엘리자베스 여왕의 이복누이 Mary Tudor의 남편으로써 영국의 개혁주의 운동을 차단하기 위해 영국으로 해군을 보낸 것이다. 1588년 7월19일 스페인의 무적함대는 네델란드 해안을 경유해 영국으로 나아가려다 갑작스런 돌풍에 휘말려 대부분 바다에 침몰되었다. 필립 2세는 다시 2차 공격을 준비하다가 병들어 죽었다.

1603년 엘리자베스 여왕이 죽자 Darnley경에 의해 스코틀랜드 Mary여왕이 낳은 제임스 1세가 영국의 왕이 되었다. 제임스 1세는 어려서 장로에 의해 교육을 받았으나 왕이 되자 성공회를 선호하게 되었다. 왕위에 오르자 제임스 1세는 교회를 개혁하라는 시대적 요구에 따라 1604년 런던 Hampton 궁중에서 성공회교도와 청교도들이 함께 모이는 의회를 소집하였다. 의회 모임은 실패로 돌아갔으나 그 의회에서 영국 성경 번역이 제안되어 성경을 영어로 공식적으로 번역하게 되어 나온 것이 King James Version (Authorized Version)성경이다 (1611년). 그 전에는 Mary Tudor 여왕 시대에 Geneva Version이 있었으나 Geneva Version이 군주제를 반대한다는 이유로 KJV를 만든 것이다. Hampton 궁중 의회의 결과에 실망한 많은 청교도들은 그 후 네델란드와 나중에는 북미로 이민가게 되었고 이것이 미국의 청교도들이 발생한 원인이었다.

17세기 전반부에 영국의 청교도는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특히 캠브리지 대학 도시에서 청교도들이 많이 나왔는데, 그 중에는 캠브리지에 엠마누엘 대학을 세운 Walter Mildway도 있었다. 또한 캠브리지에서 영국의 캘빈이라 불린 William Perkins(1558-1602)는 많은 학자들에게 캘비니즘에 입각한 설교로 그들을 개혁시켰다.

그리고 Richard Sibbes(1577-1635)는 49세에 캠브리지 성 캐서린 홀의 주임이 되어 개혁주의 설교로 청중에게 깊은 감화를 주었다. Thomas Goodwin(1600-1679)은 옥스퍼드 Magdalen 대학의 학장이 되어 많은 저술활동으로 청교도 정신을 유럽에까지 알렸다.

제임스 1세에 이어 영국 왕이 된 찰스 1세는 로마 카톨릭 성도인 Henrietta Maria와 결혼하게 되자 청교도 주류의 의회와 마찰하게 되었다. 영국의 청교도 교회들을 박해하고 나아가 스코틀랜드 장로교회까지 구교를 강요하다가 2년 간(1639-1640) 전쟁을 치른 끝에 스코틀랜드를 복종시킬 수 없음을 깨달았다.

1642년부터 1648년까지 영국 내에서 구교를 지향하는 왕당파 군과 청교도를 대변하는 의회 군(New Model Army)간의 시민전쟁이 발발해 신교를 대표하는 의회 군이 이기자 찰스 1세는 1649년 처형당했다.

7년간의 시민전쟁에 스코틀랜드 군도 의회 군 편에 가담하게 되었는데 의회 측과 스코틀랜드 장로회 측은 개혁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하여 교리와 예배와 제자 훈련과 교회 감독에 관한 전반적인 계약서를 만들자고 결의하였다.

그림 1) 웨스트민스터사원

 성공회와 같이 교회의 수장이 국왕이 되는 제도를 철폐시키고 개혁 교회들의 통일된 교리문답서를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사원(Abbey)에서 만들었는데 이 것이 웨스트민스터 대요리, 소요리 문답서인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교리문답서 작성에는 Thomas Goodwin, Samuel Rutherford, Richard Baxter 등 청교도와 장로교의 지도자들이 주도하였다. 웨스트민스터 교리문답은 장로교에만 국한되지 않고 1658년 회중교회(Congregationalists)와 독립교회(Independent), 1689년 침례교회에서 신앙고백서로 채택되었다. 후에 미국 교회들의 대부분의 보수주의 교단에서 웨스트민스터 교리 문답서를 인정하고 그들의 교리 문답서로 채택하였다.

그 후 의회와 의회군이 분열되고 스코틀랜드도 장로교 방식의 왕정 정치를 주창하다가 최종적으로 의회군에 의해 권력이 장악되어 영국 연방은 올리버 크롬웰 호민관(Lord Protector)이 이끄는 청도교파에 의해 올리버의 아들 리차드 크롬웰까지 군사독재로 통치되었다. 구교파의 입지가 약화되고 청교도를 비롯한 장로교, 침례교, 독립교회 지도자들이 재판관으로 올랐다. 올리버 크롬웰은 모든 종교를 공평하게 다루려 하였으며 그 일환으로 유대인들이 영국에 들어와 유대교를 세우는 것도 400년 만에 허용하였다. 올리버에 의해 청교도인 존 오웬이 옥스퍼드 대학의 부총장으로 발탁되었으며 존 오웬은 많은 저술 활동으로 청교도의 정신을 체계화시켰다.

올리버가 죽고 그의 아들 리차드가 새로운 호민관이 되었으나 얼마 못가 1660년 찰스 2세를 국왕으로 하는 군주제가 부활되자 청교도의 입지가 급속도로 약화되었다. 그 시기에 조지 폭스에 의해 퀘이커 교도들이 만들어졌다. 초기에 그들은 기독교 신앙으로부터 출발하였으나 신앙 교리를 가지려하지 않은 이유로 얼마 못 가 비기독교적 단체로 전락하게 되었다. 나중에 북미로 건너 간 퀘이커교도들은 1681년부터 펜실베니아를 중심으로 그들의 본거지를 구축하였다.

찰스 2세로 군주제가 세력을 회복하자 청교도들은 다시 핍박의 대상이 되었다. 구교 세력은 각종 종교적 제약으로 청교도의 입지를 줄여갔다. 찰스 2세 시대에 베드포드 지역에서 태어난 땜장이 존 번연은 갖은 투옥과 핍박 속에서도 수많은 저술 활동으로 청교도의 기본 정신을 알리려 하였다. 존 번연의 책으로 천로역정, 거룩한 전쟁, 죄인들의 괴수에게 넘치는 은혜 등이 있는 데 특히 천로역정은 성경 다음으로 전 세계에 가장 많이 팔린 베스트 셀러였다. 존 번연 외에도 17세기에는 청교도들에 의해 지어진 많은 책들이 알려졌다. 윌리암 거넬이 지은 '전신무장의 그리스도인', 리차드 백스터가 지은 '성도의 영원한 쉼', 요셉 캐럴이 지은 욥기 강해, 존 오웬의 히브리서 강해, 매튜 헨리가 저작한 전 성경 주석이 1687년~1712년 사이에 쓰여졌다.

1684년~1685년 사이에 영국과 스코틀랜드의 전 교회들을 Episcopal(주교주의) 제도화하려는 찰스 2세의 시도에 대항하는 스코틀랜드의 저항으로 스코틀랜드에서는 많은 핍박과 순교가 잇달았다. 1685년 찰스 2세에 이어 왕이 된 제임스 2세는 영국 연방을 모두 로마 카톨릭화 하려고 갖은 시도를 다하였다. 그는 프랑스에서 위그노파를 멸종시키려는 루이 14세와 같은 방식으로 청교도파와 성공회파를 모두 멸종시키려 하였으나 결국에 실패로 돌아갔다. 제임스 2세가 프랑스로 망명하고 난 후, 1689년부터 모든 종교의 자유가 허용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17세기 말부터 성공회는 세계 선교의 눈을 뜨고 북미 매리랜드에 성공회 교회를 세우는 등 전 세계에 성공회 선교사들을 파송하게 되었다.



▣ 과 제 ▣

1. 청교도란 누구인가 약술하라.

2. 청교도의 유래를 약술하라.

3. 청교 주의의 기원을 약술하라

4. 청교도들은 어떻게 활동 했는가 약술하라.












제2장 청교도 혁명


1. 청교도 혁명의 배경

(1) 영국 사회의 변화

영국에서는 인클로저(enclosure) 운동이 일어났는데, 이 운동으로 이득을 본 세력은 젠트리(gentry)로 불리는 지방 계층들이었다. 그들은 자영농과 귀족사이의 중간 계급으로서, 경제적 이익을 바탕으로 의회의 하원에서 다수 의석을 차지하였다. 한편, 도시에서는 상공업의 발달로 시민 계급이 성장하고 있었다. 경제적으로 발달한 두 세력 중에는 농촌의 자영농과 함께 칼뱅의 신앙을 가진 청교도가 많았다. 그들은 국왕의 전제 정치와 국교회 강요 정책에 대해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 보다 더 큰 문제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왕권신수설이었다.


(2) 왕권 신수설의 신봉

왕권 신수설에 대해 제임스 1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곤 하였다.

"신이 하는 일에 왈가왈부 하는 것은 무신론이자 신성모독인 것처럼, 왕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해 신하가 이러쿵저러쿵 하는 것 역시 주제 넘는 짓이자 엄청난 모독이다."


즉, 왕권신수설은 왕권의 절대성을 옹호한 것이다. 이에 따르면 국왕은 지상에서 신의 대리인이며, 왕권은 신으로부터 주어졌기 때문에 신성불가침이요, 절대적이다. 또한 국왕은 신에게만 책임을 지고 신하는 오직 복종의 의무만 있다. 그러나 왕권신수설은 한편으로는 신이 왕에게 굉장히 커다란 책임감을 준 것으로, 종종 왕이 그의 의무를 매우 신중하게 여기게 하도록 하였다.


문제는 새로운 왕이 의회 적 전통이 강한 영국에 왕권신수설을 강요한데서 출발한다. 엘리자베스 1세의 뒤를 이어 즉위한 제임스 1세는 이 왕권신수설을 강하게 믿었으며, 이를 신하들에게도 강요하였다. 이에 대해 의회는 반발하였다. 여기에 문제를 더욱 심각하게 하는 것이 하나가 더 있었다. 앞에서 보았듯이 왕과 의회는 종교적으로 다른 믿음을 지닌 것이었다. 즉 왕은 영국 국교회를, 의회는 청교도를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불구하고 제임스 1세와 그의 아들 찰스 1세는 현명한 정치를 하지 못하였다. 그들의 정치는 억압적인 전제정치였다. 이는 의회의 분노를 더욱 자극하였다.


(3) 전제정치의 강화

엘리자베스 1세가 죽음으로써 tudor왕조가 끝나고, 왕위는 스튜어트 가문의 제임스 1세가 이어받았다. 제임스 1세(1603-1625)는 당시 영국의 입헌정치의 전통을 무시하고, 왕권신수설을 신봉하면서 전제정치를 강화하고자 하였다. 이에 의회와 국왕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제임스 1세에 이어 아들 찰스 1세(1625-1649)도 절대왕권을 고집하며 가톨릭을 옹호하여 의회와의 관계를 악화시켰다. 찰스 1세는 왕권신수설을 신봉하여 전제정치를 펼쳤던 것이다. 그는 중세부터 확립되어 온 입헌적 전통을 무시하였고, 의회의 승인 없이 세금을 징수하는 한편, 일부 귀족과 대상인에게 상업독점권을 주었을 뿐 아니라 국왕의 통제 아래 있는 국교를 강제로 믿게 했다. 이에 대해 국민은 강한 불만을 가졌다. 귀족 대상인 등과 달리 도시의 중소상인과 수공업자, 농촌의 젠트리와 요맨 (yeoman)사이에는 국교를 기피하고 칼뱅파의 흐름인 청교주의를 믿는 사람이 많았다. 이들은 국왕과 늘 대립했다. 찰스 1세의 행동에 항의하여 의회는 권리 청원을 가결하였다. 왕은 마지못해 그것을 승인하였으나, 다음 해에 의회를 해산하고 그 후 11년간 의회를 소집하지 않았다.

11년간 찰스 1세는 이럭저럭 의회 없이 잘 이끌어 나갔다. 그러나 그는 영국 국교회의 교리를 스코틀랜드에게도 강제로 믿게 하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이에 영국 정치는 다른 국면을 맞게 된다.


2. 청교도 혁명(Civil War)의 시작

(1) 청교도 혁명의 시작

스코틀랜드는 영국 국교회가 아닌 청교도의 한 분파인 장로교를 믿고 있었다. 그런데 왕은 영국 국교회를 믿으라고 강요하는 것이다. 이에 스코틀랜드는 무장 봉기를 일으켰다. 당황한 찰스 1세는 이를 막을 군대를 필요로 했다. 그러나 그는 군대가 없었다. 그리고 돈도 없었다. 할 수 없이 왕은 11년 만에 의회를 다시 열 수 밖에 없었다. 왕과 의회가 다시 만나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청교도 혁명의 시작이 된 것이다.


(2) 청교도 혁명의 전개과정

스코틀랜드의 무장 봉기에 대처하기 위한 전비 마련을 이유로 찰스 1세는 11년 만에 의회를 소집하였다. 그러나 11년 동안 의회를 열지 않고, 왕이 독단적으로 정치를 하였던 것에 불만을 품은 의회는 왕의 정치 행동을 비판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왕을 지지하던 왕당파와 의회를 중심으로 왕을 비판하던 의회파 사이에 내분이 발생하게 되었다. 그러나 내분은 단순히 정치적인 것만이 이유는 아니었다. 종교적으로 영국 국교회를 믿은 사람은 국왕을 추종하였다. 반면에 청교도들은 의회를 추종하였다. 이외에도 재정에 대해 왕이 재정권을 지녀야 한다는 사람들은 왕을 중심으로, 의회가 재정권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사람들은 의회를 중심으로 뭉치게 되었다.


1642년 왕과 의회를 중심으로 갈라진 두 파사이에 전쟁이 발생하였다. 바로 이것이 청교도 혁명이다. 이 내분은 처음에는 왕당파가 유리하였다. 왜냐하면 왕당파에게는 전쟁에서 유리한 기병대가 있었으나, 의회 파에게는 그것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이 의회파의 군대를 재조직하면서 전세는 차츰 뒤집혀졌다. 크롬웰은 신형군이라 불리는 규율이 잘 잡힌 기병대를

그림 2) 의회파와 왕당파의 전쟁

만들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더구나 의회 파는 종교적인 이유로 스코틀랜드의 지지를 얻고 있었고, 해상권을 장악하고 있어 해외원조를 받기에도 쉬웠다. 결국 왕당파와 의회파의 전쟁은 의회파의 승리로 끝났다. 이 사건을 청교도 혁명이라 하는데, 그 이유는 왕의 전제정치에 맞선 의회 파들 대부분이 청교도들이었기 때문이다.


(3) 군대의 장악

전쟁에서 왕에게 대항한 의회파가 승리를 하였으나, 그들은 왕을 죽이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의회 파는 곧 신앙의 미묘한 차이와 군인과 의원간의 차이 등으로 인해 장로파와 독립파로 분열되었다. 보통 장로파는 의원들이 많았으며, 독립파는 크롬웰 하의 군인들로 이루어 졌다. 분열이 일어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우선 전쟁에 참여한 군인들에게 정당한 대우를 해주지 않고 오히려 급료도 지불해주지 않은 채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의회는 결정하였다. 또 군인들과 의회는 모두 청교도였으나, 둘 간은 다른 종류의 청교도를 믿고 있었다. 군인들이 믿은 청교도는 더욱 퓨리탄 적인 것이었는데, 의회는 군인들의 종교적 차이를 인정해 주지 않고 자신들의 종교를 강요하였다. 물론 이 외에도 권력에 대한 욕구 등도 작용하였다. 이에 군대와 의회는 함께 왕과 싸웠지만, 전쟁이 끝난 후 대립하게 되었다.


(4) 크롬웰의 집권

이 분열을 틈타 국왕 찰스 1세는 다시 한번 전쟁을 일으켰다. 그러나 왕은 또 다시 크롬웰이 이끈 군대에 의해 패하였다. 그리고 나서 크롬웰은 대부분 군인인 독립파를 이끌면서 의회 의원들인 장로파를 몰아내고 의회를 장악하였다. 이후 크롬웰과 독립파는 국왕인 찰스 1세를 전쟁의 책임을 물어 사형시키고, 영국 역사상 최초이자 최후의 공화정을 수립하였다.

크롬웰은 이후 장로파인 스코틀랜드와 왕당파 세력이 강한 아일랜드를 정복하고 항해조례를 제정하여 영국의 무역활동을 신장시켰다. 그러나 공화정은 오래 가지 못하였다. 크롬웰은 의회를 해산하고 호국경이 되어 금욕적인 독재정치를 실시하였다. 당시 크롬웰의 정치권력은 사형을 당한 찰스 1세의 권력보다 더욱 강한 절대적 통치권이었다.


3. 청교도 혁명의 결과

크롬웰이 죽자 영국 국민들은 그의 지나친 금욕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예전의 상황으로 돌아가기를 원했다. 그들은 좀 더 여유 있는 삶, 즐거운 오락이 존재하는 삶을 원했던 것이다. 이에 찰스 1세의 아들로서 프랑스로 망명가 있던 찰스 2세가 귀국하면서, 영국은 다시 왕정으로 돌아갔다.



▣ 과 제 ▣

1. 청교도혁명의 배경을 약술하라.

2. 청교도 혁명의 시작과 전개 과정을 약술하라


제3장 청교도운동의 전개

1. 영국 청교도운동 전개

엘리자베스 1세의 종교개혁을 철저하지 못한 것으로 여겨 성서에 따라 더욱 철저한 개혁을 추진하려 한 영국 프로테스탄트는 사상적 배경은 칼뱅이즘으로 하여, 개혁운동은 16∼17세기에 활발하게 전개되어 갔다. 국교회 내부로부터의 개혁을 지향하는 무리, 국교회와의 분리를 주장하는 무리, 필그림 파더스(Pilgrim Fathers)와 같이 외국으로 탈출하여 이상을 실현하려는 무리들이 있었으며, 이들은 후에 칼뱅주의적 개혁을 지향한 장로파를 중심으로 독립파·침례파·퀘이커파·수평파·디거파· 제5왕국주의자 등 여러 파로 나누어졌다.


개혁의 바퀴가 한 번 움직이기 시작하자 그것은 멈출 수 없는 힘이 되었다. 각기 새로운 지도자들과 그룹들은 개혁을 한층 더 몰고 갔으며, 1600년대는 영국교회에 부흥이 있었던 한 시기를 내다보고 있었다. 어떤 역사가들은 이 시기를 영국교회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시기로 보기도 한다.


첫째, 성장의 시기가 있었다(1560-1640). 청교도 운동은 영국 국교회(Church of England) 안에서 시작되었다. 이들 청교도들은 성경적 권위와 근거를 찾을 수 없거나 희박한 종교적 의식들을 폐지하기 원했다. 그들의 주요 목적은 성경에 기초된 설교와 실천에 있었다. 이 영역에서의 진전은 특히 개인적 성결과 가정의 성결을 통해서 나타났다. 이러한 성결의 강조는 매일의 ‘Q T(Quiet Time)’와 가족 경건회(family devotions)를 낳았다. 이 성결에 대한 동일한 열망은 또한 19세기 후반의 케스윅 운동(Keswick Movement) 배후에 놓여 있으며, 심지어 1990년대 미국 플로리다 펜사콜라 부흥과 영국 선더랜드의 부흥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엘리자베스 1세(Queen Elizabeth Ⅰ, 1558-1603) 재임 초기 동안, 청교도들은 의회의 강력한 지원을 받았고, 개혁에 대한 높은 희망을 가졌다. 그러나 그녀의 후계자 제임스 1세(King James Ⅰ, 1603-25)는 청교도들에게 적대적이었고 심지어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들이 국교회에 순응하도록 만들겠다. 아니면 나는 그들을 영토 밖으로 내몰 것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보다 심한 것을 보여주겠다.” 그 결과, 국교회로부터 나와 그들 자신의 독립된 회중들을 만든 성직자들에 의해 분리주의 운동이 자라났다.


이 시기에 핍박이 심했고, 적지 않은 지도자들은 그들의 회중들과 함께 보다 관대한 네덜란드로 망명했다. 이 망명에 의한 두 가지 사건은 특별히 의미가 있다.

첫째, 1608년, 네델란드의 홀란드에서 일군의 메노나이트(재세례파)들과 교섭한 결과, 토마스 헬위스(Thomas Helwys, 1550-1616) 존 스미드(John Smyth, 1570-1612)는 산자의 세례(Believer’s Baptism)를 재발견했다.

헬위스는 자신을 포함하여 스미드와 52명의 교회 멤버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3년 후, 헬위스는 런던으로 돌아와서 영국 최초의 침례교회를 세웠다.

둘째, 1620년, 순례자들(Pilgrim Fathers)은 메이플라워(mayflower) 호를 타고 뉴잉글랜드의 새로운 자유를 찾아 대서양을 건넜다.


좀 더 개인적인 경건의 측면에서 보자면, 청교도 운동은 개인과 가족의 경건을 강조한 가정 중심의 운동이었다. 매일의 가족 기도의 강한 실천이 있었다. 성서가 온 가족들에게 읽혀질 때, 가장은 성서 본문을 설명하면서 말씀을 나눴을 것이다. 종종 이것은 거의 칼빈주의적 예배 형태로 발전했다. 이와 맥을 함께하는 개척자들 가운데 한 명은 매튜 핸리(Matthew Henry)였다. 그가 쓴 성서주석은 바로 이런 실천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둘째, 청교도적 이념의 전파는 많은 부분을 영국시민전쟁 기간 동안 의회 의원이었던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 1599-1658)과 그의 신형군대(New Model Army)에 빚을 지고 있다. 이 군대의 많은 병력들은 거듭난 신자들이었으며 청교도적 설교 가들이었다. 이 군대의 발길이 닿았던 어떤 지역들에는 독립교회들이 현존하고 있다. 이 모든 교회들은 그 군대가 주둔해서 설교했던 곳에 세워졌다. 그러나 청교도주의는 단순히 하나의 종교적 개혁운동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또한 그들의 마지막 시간까지 극단적일 만큼 급진적이었던 하나의 정치적 힘이었다.


1625년, 청교도들은 핍박을 받기 시작했다. 캔터베리의 대주교였던 윌리암 로드(William Laud, 1573-1645)는 종교개혁과 선택의 교리, 예정설, 그리고 믿음에 의한 칭의 등을 거부했다. 그는 구원에 있어서 인간이 기여할 수 있다는 관점을 취하면서 선행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편을 선호했다. 이 ‘세상을 긍정하는 신학’(world-affirming theology)은 보다 더 세상을 부정하는(world-denying) 청교도적 이념과 완전히 대조적이었다.


1662년, 모든 성직자는 개정된 국교회 기도서에 따라야 한다는 일련의 의회 법안이 통과되었다. 거부하는 자들은 모두 국교회로부터 축출되었고, 그들의 이전 목회지로부터 5 마일 이내의 지역에서 설교가 금지되었다. 이런 방식으로 약 2000명의 성직자들이 축출되었다. 가정 모임들 또한 금지되었다. 퀘이커 지도자 윌리암 펜(William Penn)은 추산하기를, 이 박해기간 동안, 적어도 5 천명이 그들의 종교적 확신 때문에 죽었으며, 수천 명의 사람들은 보다 관용적인 유럽 국가들 혹은 아메리카로 망명하여 거기서 그들의 삶을 마감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이 운동은 침례주의자(Baptists)와 퀘이커(Quakers) 등과 같은 다양한 그룹으로 분해 되기 시작했으며 그 결과, 이 운동의 추진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그리고 물론 정치적 힘으로서의 역할도 실질적으로 끝나게 되었다. 그러나 한편 그것은 고난의 신학에 길을 열어주었다.


매튜 헨리 이외에, 아마 가장 유명한 영국 청교도는 사상가이며 목회자였던 존 번연(John Bunyan, 1628-1688)일 것이다. 그는 사람들은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는 열정을 가졌기에, 설교를 금지하는 박해를 대항해서 12년 동안 감옥에 갇혔다. 그러나 그가 기독교에 남긴 가장 위대한 공헌은 아마 네 단어로 축약될 수 있을 것이다: [천로역정: The Pilgrim’s Progress]. 이것은 그가 옥중에서 쓴 것이다. 그는 청교도적 사상들이 어떻게 덜 교육받은 사람들에게 습득될 수 있는지에 대한 예가 될 것이다. 그는 또한 17세기 말, 청교도주의를 계승했던 새롭고 그리고 덜 정치적인 비국교도들(Nonconformists)의 전형이다.


청교도의 개혁운동은 예배개혁에서 교회정치개혁으로 옮겨갔고, 나중에는 정치개혁으로 나아갔다. 국교회의 탄압 속에서도 설교운동과 클래시스운동 등으로 동조자를 늘려, 제임스 1세 시대에는 그들 요구대로 《흠정역성서(欽定譯聖書, 1611)》가 나오게 되었고 마침내 찰스 1세 때 혁명이 일어나 청교도는 크롬웰의 지휘 아래 왕정을 쓰러뜨리고 공화정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공화정은 11년으로 끝나고 왕정복고와 국교회의 부활로 청교도는 비국교회파가 되었다. 성서주의, 간소한 영적 예배의 강조, 신에 대한 강렬한 책임의식, 성스러운 공동체 건설 등이 청교도의 중심적 주장이었다. 또한 정치적·경제적으로 근대사회 형성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2. 청교 주의의 문학

  한 걸음 더 나아가 청교 주의의 문화 풍토에 있어서 문학의 목적은 실리적인 것이었으며, 종교가 우선이고 모든 것은 종교를 위해 봉사하도록 되어 있었다. 청교도들이 즐겨 사용한 장르는 설교집이나 신학적 논술, 전기, 토론 그리고 역사로 실리적인 면을 잘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들의 작품 주제는 그들 생활의 종교적 절대성에 의해 결정되었다. 모든 청교도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종교적 주제는 복잡한 과정의 갱생을 통한 원죄로부터 영적 세계로의 여정이었다.

청교도들의 문체 역시 종교의 영향을 받았다.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주관하신다고 믿음으로써 청교도들은 일상적인 일들을 우화적이거나 상징적으로 다루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청교도들의 신천지로의 출국을 명령하셨다고 믿음으로써 그들은 이 위대한 사건을 진지하면서도 극적으로 서술했다. 그 뿐만 아니라 성경이 그들의 모든 일을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저술은 성서적 바탕과 심상 그리고 비유 등으로 가득 차 있었다. 끝으로 그들은 간소한 의식을 주장하였기 때문에 문체도 간결함을 지표로 삼았다.


3. 미국에 끼친 청교 주의의 영향

아메리카에 이주한 청교도들에 의하여 미국의 건설은 청교 주의의 많은 영향을 받게 되었다.

청교도들은 정치 참여를 한정된 교회 구성원으로 제한하였고 특히 종교적으로 거듭난 자들에게 전적으로 위임함으로써 일종의 엘리트 독재정치를 실시하였다. 이는 오히려 미국의 독자적 민주정치에 역하는 사실이다. 그러나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집회소를 중심으로 한 그들의 촌락공동체, 지방분권적인 정치제도의 발달은 미국 민주주의의 밑거름이 되었고 중앙에 파견하는 대표자를 직접 선출하고 세금에 의한 공공사업을 펼쳤다는 것은 미국 정치의 중요한 근본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청교도들이 갖는 독특한 선민의식은 미국인들의 낙천주의와 깊은 관련이 있다. 그러나 이들의 선민의식은 다른 민족과의 접촉이나 선교 대상의 출현 시 수단이 무력이라 해도 과감히 자행하는 극단적 행동을 정당화시키는 수단이 되었을 뿐 아니라. 그 호전성 역시 미국인의 피 속에 선민의식과 같이 용해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신대륙  정착 시 인디언 정벌에서부터 가장 최근의 레이건 대통령의 말 '소련은 악마의 제국(Evil Empire)'에서도 이 같은 사실이 잘 밝혀지고 있다.

  한편 16C에서 17C동안 전 유럽과 미대륙 뉴 잉글랜드 지방을 휩쓸던 마녀 선풍이 있었는데 특히 뉴잉글랜드의 세일럼의 마녀 선풍은 청교도 사회가 낳은 폐단을 단적으로 지적하는 것이었다.

간략하게 요약하면 점차적으로 상업 자본주의의 물결이 전 세계를 휩쓸게 되고, 청교도 사회 역시 상업에 의한 부를 축적한 세력과 주로 농업 위주의 기존 세력이 갈등을 겪게 되었다. 전자가 뉴잉글랜드 동부의 John Poster 세력이고 후자는 항구 서쪽의 John Putnam 세력이었다. 이 분파 싸움의 치열함 속에 부임할 페리스 목사가 물질주의와 세속주의를 배격하고 성지를 더럽히는 악마의 세력과 싸워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 과정에서 무고한 주민들이 사탄의 허수아비로 취급되어 죽어 갔다. 상업주의의 거센 바람이 청교도들의 독특한 정신과 생활 그리고 마을의 특수성과 합쳐져 일으킨 큰 비극이었다. 그러나 지금도 미국인들은 17C청교도사회를 이상적인 세계로 간주하고 있으며 물질주의와 세속주의가 극도로 치달을 때마다 17C청교도 사회로의 복고를 주장한다.





▣ 과 제 ▣

1. 영국 청교도 운동의 전개 과정들을 약술하라.

2. 청교 주의의 문학에 대하여 약술하라.

3. 미국에 끼친 청교 주의의 영향을 약술하라.













제4장 청교도의 이주

1. 청교도의 신대륙 이주

 1607년 영국의 국교회를 개혁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된 청교도의 한 급진적인 무리인 분리주의자들의 한 소수 집단이 네덜란드의 레이덴을 향해 떠났다. 그들은 네덜란드 당국으로부터 피난처를 제공받은 것이다. 그러나 칼빈 파에 속하는 네덜란드 사람들은 이들을 주로 저임금의 노동직에만 종사할 수 있게 했다. 박해를 피해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11년 동안 머물렀었다. 본래 고국에서 좋은 직업을 가지고들 있었으나 네덜란드에서는 노동밖에 할 일이 없었다. 그들의 자녀들은 네덜란드 사람들의 풍습을 배워 살고 있었다. 네덜란드인들은 영국인들 보다 훨씬 덜 보수적이었다. 네덜란드인들은 주일이나 교회 생활을 중요시하지 않았다.

이래저래 이들 영국인들은 네덜란드인들을 싫어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영국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그들은 영국인으로 살면서 신앙을 유지하기 위해서 신대륙 행을 결심했다.

그림 3)  메이플라워호

청교도들은 1620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미국에 도착한다. 본래 이들은 버지니아를 목적지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물결은 그들을 북쪽 해안으로 밀어 갔고, 결국 그들이 도착한 곳을 플리머트(Plymouth)라 불렀다.

이들의 우두머리는 후에 스스로 플리머트 식민지의 총독이 된 윌리엄 브래드포드(William Bradford)였다. 그는 신앙심이 투철한 사람으로 신학적인 지식도 깊었다. 그가 쓴 일기는 당시 플리머트 식민지 사람들의 신앙과 삶을 살펴보는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1) 메이플라워 호

1620년 9월 6일 영국의 플리머스 항에서 한 척의 배가 닻을 올렸다. 배의 이름은 메이플라워 호로 102명의 승객을 태우고 신대륙 아메리카로 가는 배였다. 장장 9주일에 걸친 항해 끝에 마침내 배는 북 아메리카 동해안에 다다랐다. 새 땅에 발을 디딘 사람들은 그곳을 자신들이 떠나온 항구의 이름을 떠서 플리머스라 부르기로 했다. 바다 건너에 있는 고국을 생각하면서 붙인 이름이었다.


  이들은 대부분이 퓨리턴(Puritan), 즉 청교도로 제임스 1세의 청교도 탄압을 피해 신대륙으로 건너갔다. 그 해 겨울, 이주자들의 절반 정도가 추위와 굶주림으로 사망했다. 그러나 봄이 되자 길을 닦고 집을 짓는 등 건설에 힘을 기울였다. 함께 예배를 드릴 장소도 만들었다.


(2) 필그림 파더스의 맹약

  이들은 이미 항해 도중 정부형태에 관한 협약을 맺었다. 이 협약을〈메리플라워 맹약〉이라 한다. 맹약에 따라, 개척지는 성인 남자가 참여하는「민회」에 의해 통치되었다.〈메이플라워 맹약〉은 훗날 미국 헌법제도의 기초가 되었다. 자유를 찾아 미지의 세계로 온 102명의 메이플라워 호 사람들―이들을 후세 사람들은〈필그림 파더스(Philgrim Fathers〉라고 부른다. 이〈필그림 파더스〉가 바로 오늘의 미국을 있게 한 선조들이다.


“신의 이름으로, 아멘. 아래에 서명한 우리들, 즉 신의 은총에 의해 영국, 프랑스 및 아일랜드의 왕으로 즉위해 우리의 최고 통치자가 되시고, 또 신앙의 옹호자이신 제임스 폐하의 충성스런 백성인 우리들은 신의 영광을 드러내고, 또 기독교를 보급하고, 우리 국왕과 조국의 명예를 드높이기 위하여, 버지니아 북부 지방에 최초의 식민지를 건설하고자 항해를 계획하였던 바, 이제 이 서약서에 따라 각자 신과 상대방 앞에서 엄숙하게 서로 계약을 맺어 정치 단체를 만들어, 그것으로 우리의 공동 질서와 안전을 지켜 나가고, 또 위에 적은 목적을 수행하기로 한다. 그리고 앞으로 이것을 바탕으로 해서, 식민지 전체의 행복을 위하여 가장 적당하다고 인정되는 바에 따라, 언제든 공평하고 정의로운 법률, 명령 등을 만들고, 헌법을 제정하며, 또 공공 조직을 만들기로 한다. 이에 대한 맹세로 우리들은 제임스 폐하의 재위 18년째 되는 기원 1620년 11월 11일 케이프 코드 (Cape Cod)에서 여기에 서명하였다.”

[서약에 참여한 41명의 서명]

<메이플라워(Mayflower) 서약(1620년)>

1620년 11월 11일, 필그림 파더스가 메이플라워호 안에서 맺은 이런 서약에 따라 정치 사회를 형성한다는 새로운 형식은, 그 뒤 아메리카의 동북부 지대에 만들어진 식민지 형성의 본보기가 되었다.

(3) 뉴잉글랜드에 정착

때는 11월 중순이었다. 1620년 일단의 레이덴 청교도들이 버지니아회사로부터 토지 소유 허가를 받아서, 101명의 남녀와 어린이가 메이플라워호를 타고서 버지니아를 향해 떠났다. 그들은 폭풍을 만나 북쪽으로 떠밀려, 목적지와는 다른 뉴잉글랜드의 케이프코드에 상륙했다.

그림 4)  USA-뉴잉글랜드

해변은 춥고 황량하였다. 원주민들은 불친절해 보였다. 별수 없이 그들은 거기에 내렸다. 내리자마자 통나무집을 세워야 했다. 가져온 식량은 얼마 남지 않았다.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6개월 동안에 절반 이상의 사람들이 죽었다. 나머지 사람들의 생존은 기적이었다. 그들의 신앙심이 그렇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로부터 2만 명이 넘는 청교도들이 거주하게 되면서 고국의 이름대로 뉴잉글랜드로 불린다.

뉴잉글랜드(New England) 는 지금의 미국 북동부지역에 위치한 6주(매사추세츠, 코네티컷, 로드아일랜드, 버몬트, 뉴햄프셔, 메인)를 뜻한다.


 이때에 청교도 지도자 William Bradford는 청교도로서의 느낌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이곳에 우리를 오게 하시고 아름다운 항구와 평화로운 땅에 정착하도록 인도하신 하늘의 하나님의 축복에 대해 무릎을 끓고 기도했다." 바로 그 해 겨울은 매우 고통스러웠다. 추위와 배고픔과 질병으로 그들의 절반이 땅에 묻히게 되었다. 청교도들은 인디언들의 공격을 막기 위해 무덤을 감추어야 했다. 그 고생스러웠던 첫 해 겨울 초대 총독 John Carver도 사망했다. 그의 후계자 William Bradford가 총독을 계승했다.(30년 이상을 재임) 그의 지도 아래 청교도들은 영국에서 가져왔던 씨앗들을 심게 되었고 콩, 옥수수의 씨앗은 인디언들로부터 받았다. 첫 수확을 거두게 된 해 가을 추수감사절을 하나님께 드렸다.


(4) 메사츄세츠

그 후 청교도들은 1621년 Fortune호를 타고 32명이 이주했고 1623년 Anne and little James호를 타고 100여명의 이주민이 새로 정착하게 되었다. 1630년에는 1000여명의 청교도 이민자들이 마사츄세츠 베이회사의 지원으로 미국에 도착하게 되었다.

그들은 오늘의 보스턴을 건설했고 후에 하버드 대학을 세웠다. 그 후에는 영국에서 10년 동안 1만 8천명의 대 이민의 역사가 진행되었다.


 1630년 찰스 1세로부터 식민지 건설의 허가장을 받은 새로운 이민의 물결이 매사추세츠만 연안에 도착했다. 그들의 대부분은 그 종교적 관행이 영국에서 점차로 금지되던 청교도들이었다. 그들의 지도자가 존 윈드롭은 신세계에 "언덕 위의 도시"를 건설하겠다고 공언하며, 이 일에 착수했다. 이것은 청교도들이 엄격하게 자기들의 신앙에 따라 생활할 장소를 뜻했다.


 '매사추세츠만 식민지'는 뉴잉글랜드 지방 전체의 발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그것은 어느 정도는 윈드롭이 이끈 이들 청교도들이 특허장을 가지고 왔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 식민지를 다스릴 권한은 영국 아닌 매사추세츠에 있게 되었다.


 특허장의 규정에 따라 청교도 교회의 소속이어야 하는 "자유인"으로 구성된 '제 지방 집회'(General Court)에게 통치 권한이 부여되었다. 이렇게 해서 뉴잉글랜드 식민지에서는 청교도들이 종교는 물론 지배적인 정치 세력이 되는 것이 보장되었다. 지사를 선출하는 것도 '제지방집회'였다. 다음 한 세대 대부분의 기간 동안에 존 윈드롭이 지사직을 맡았다.


 청교도의 엄격한 통치는 모든 사람이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다. '제지방집회'의 권위에 공개적으로 도전하고 나선 최초의 인물은 로저 윌리엄스라는 젊은 목사였다. 그는 매사추세츠 식민지가 인디언의 땅을 빼앗는 것과 그리고 그 '집회'와 영국교회와의 관계를 반대했다.

 그는 매사추세츠만 식민지로부터 추방당하여, 1636년에 지금의 로드아일랜드 프로비덴스에 사는 나라가나세트 인디언들로부터 땅을 매입했다. 그는 그곳에 정치와 종교가 완전히 분리된 아메리카 최초의 식민지를 건설했다.


 매사추세츠를 떠난 사람은 윌리엄스와 같은 세칭 '이단자'들 만은 아니었다. 다른 청교도들도 더 좋은 땅과 기회를 찾아 이윽고 매사추세츠만 식민지를 떠나기 시작했다. 예컨대 코네티커트강 유역의 땅이 비옥하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토질이 박해서 어려움을 겪고 있던 농부들이 이곳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630연대 초에 이르러서는 많은 사람들이 평평하고 기름진 땅을 얻기 위해 인디언들의 습격의 위험을 무릅쓰고 떠나갔다. 이렇게 해서 생겨난 새로운 공동체들은 흔히 교회의 신도가 아니더라도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게 했으며, 그리하여 선거권이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부여되게 되었다.


 이 무렵 차츰 많은 이민들이 신세계가 제공하는 것으로 보이는 땅과 자유를 찾아 이주해옴에 따라 뉴햄프샤와 메인의 연안에는 다른 정착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여기서 주목할 일은 청교도 지도자들은 경건한 새 사회를 이룩하기 위하여 시민권 부여와 이민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기독교 신자에게만 제한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헌장에서 청교도 이주의 목적을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의 선을 위함'이라고 하였다. 그 이후 계속해서 새로운 약속의 땅에서 오직 성경에 약속된 자유와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며 미지의 세계를 정복하고 대자연에 감사를 드리는 믿음의 사람들이 신대륙을 많이 찾았다. 오늘날 미국 역사의 정신적 지주는 바로 청교도 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청교도(Puritan) 분야의 권위자인 페리 밀러(Perry Miller)도 “청교도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미국에 대한 이해가 불가능하다”고 했다.


2. 신대륙의 영국 식민지

영국은 세력이 확장되면서 전쟁을 통해 화란 인들의 영토를 빼앗았다. 차츰 영토를 넓혀 17세기말쯤에는 스페인이 차지한 플로리다의 북쪽에서부터 메인에 이르는 동부 해안 지역을 차지하였다. 영국 식민지의 주 거점은 버지니아와 뉴잉글랜드였다. 그러면서 두 지점 사이는 좁혀져 갔다. 그리고는 서쪽으로 영토가 넓혀졌다. 소위 서부 개척이 시작되는 것이었다.

버지니아는 영국의 최초 식민지로서 1607년 개척이 시작되어 사람들이 보내졌다. 버지니아란 처녀 왕 엘리자베스를 존경해서 붙인 이름이었다. 여기에 보내진 이들은 주로 부랑자들이었다. 산업의 부산물로 도시마다 부랑자들이 넘쳐흘렀던 것이다. 이들은 감옥이나 신대륙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명령을 듣는다. 그리하여 이 무위도식 자들은 그 비싼 배 값도 내지 않고 신대륙으로 보내진다. 이들을 보내면서 영국인들은 꿈에 부풀었다. 이제 새로운 인종이 탄생한 것이다. 그래서 미개한 인디언들은 문명을 받게 되고 혼혈의 인종이 새 나라를 세우게 될 것이다. 이 나라는 영국을 존경하고 섬길 것이다. 그리고 영국은 이들에게 모든 발전한 문명을 심어 줄 것이다. 영국에서 간 백인들과 현지의 토인들은 어깨를 나란히 하여 새로운 나라, 이상의 나라를 건설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부랑자들은 영원히 부랑자였다. 그들은 절대로 일을 하지 않았다. 이들은 영국에서처럼 먹을 것을 구걸하였다. 인디언들도 영원히 이들을 먹여 살릴 수는 없었다. 처음에는 친절했지만 결국에는 거절해야 했다. 그러자 부랑자들은 강도가 되었다. 총으로 인디언들을 몰살시키고 그들이 저장한 옥수수를 모조리 털어 갔다. 이 일은 한없이 계속되었다.


부랑자들 외에 또 신대륙에 온 이들은 종교적 불만 세력들이었다. 주로 청교도들과 각종 분파들 그리고, 카톨릭교도들이었다. 1632년에는 카톨릭 교도인 볼티모어에 의해서 마릴랜드(Maryland)가 시작된다. 매리는 예수의 모친을 말하는지, 당시 국왕 찰스 1세의 아내 매리를 말하는지 분명하지 않다. 여기서는 모든 이주자를 환영했지만 특별히 카톨릭교도들이 좋은 대우를 받았다.

그러나 식민지의 분위기를 바꾸어 놓은 것은 청교도들이었다. 이들은 미국의 건국 정신을 세웠다고 인정될 정도로 분명한 신앙적·도덕적 기초를 세웠다.


3. 분리주의자와 비분리주의자

(1) 플리머스 분리주의자(Plymouth separatist)의 건국이념 이해와 이들이 끼친 영향

1620년 메이플라워(Mayflower)호를 타고 대서양을 항해하여 미국 매사추세츠 남동부인 플리머스에 정착한 102명의 분리주의자들 이들을 ‘분리주의자’라 칭한 이유는 로마 카톨릭의 잔재를 가지고 있는 영국 성공회를 타도의 대상으로 삼아 그러한 교회로부터의 분리를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관심은 경제적 번성과 물질적 풍요를 만끽하며 양심의 자유를 지키는데 있었다. 그들은 인디언의 침입과 내부 혼란을 막기 위해 정치 조직이 필요하게 되자 ‘메이플라워 계약’을 맺고 자유가 최대한도로 보장되는 사회를 신대륙에 건설하고자 했다. 분리주의자들이 미국에 남긴 영향은 개인의 자유를 강조한 점이다. 이러한 개인주의 사상은 무질서와 방탕으로 이끌어 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양심을 가치 판단 기준으로 두면서 절대적 의미의 진리가 사라지고 상대적인 게 진리로 인식되었다. 이러한 현상을 볼 때 우린 양심의 자유를 주장하는 게 인간의 죄성을 간과하는 데서 온 것이란 확신을 할 수 있다.


(2) 보스턴 비분리주의자(Boston non-separatist)의 건국이념 이해와 이들이 끼친 영향

그러나 1630년 3월 아르벨라(Arbella)등 10여척의 배를 타고 미국 보스턴에 도착한 존 윈스롭(John Winthrop, 1588-1649)등의 비분리주의자들은 개인주의를 경계하면서 공동체의 의를 실현하는 경건한 사회 즉, ‘언덕 위의 도시’(City upon a Hill)를 건설하고자 했다. 이 공동체의 특징은 기독교 사랑에 기초한 신앙적 이상향의 사회인 성경에 기초한 법을 만들고 성도들이 다스리는 나라를 세우고자 한 것이었다. 비분리적인 청교도들은 변혁적인 문화관에 기초하여 영국을 개혁하고 신대륙에 이민하여 전 세계가 모델로 삼을 수 있는 경건한 사회를 건설함으로 미국의 기초를 놓았다. 이들은 플리머스의 분리주의자나 현대 미국 헌법과는 달리 하나님 앞에서 가증한 것은 금지하였다. 이들에 의하여 노동을 신성시하게 되었고, 법이 다스리고 법 앞에 누구나 평등하게 되어 현대 민주주의의 초석을 마련하게 되었다.



4. 뉴네덜랜드와 메릴랜드  (English)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에 의해 고용된 헨리 허드슨은 1609년에 지금의 뉴욕 시와 그의 이름을 딴 허드슨 강 일대의 땅을 아마 지금의 올바니 북쪽까지 탐험하였다. 그 후에 있은 네덜란드인의 항해로 이 지역에 대한 소유권 주장과 초기 정착의 토대가 마련되었다.


그 북쪽을 차지한 프랑스인들과 마찬가지로 네덜란드인의 최초의 관심은 모피무역이었다. 이 목적을 위해서 네덜란드인들은 모피가 나오는 오지에의 접근을 막을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이로키 인디언 5족'과 친밀한 관계를 맺었다. 1617년 네덜란드의 정착민들은 허드슨강과 모호크 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요새를 건설했는데, 그곳이 지금의 올바니이다.


맨하탄도 정착은 1602년 초에 시작되었다. 이 섬은 1624년에 그곳을 차지하고 있던 인디언들로부터 24달러를 주고 샀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 섬은 즉시 '뉴 암스테르담'으로 명명되었다.


 허드슨 강 지역으로 정착민을 끌어들이기 위해 네덜란드인들은 "농원 지주" 제도로 알려진 일종의 봉건적 귀족제도를 장려했다. 1630에 허드슨강 유역에 그 최초의 거대한 농원이 설치되었다. '농원 지주'제도 하에, 4년 동안에 자기의 농원에 50명의 성인을 끌어들일 수 있는 사람에게는 25킬로미터 길이의 강변 땅과 독점적인 어로 권과 사냥 권 그리고 자기의 땅에서의 민사상 및 형사상의 관할권이 부여되었다. 그 대신 그는 소작인들에게 가축과 농구와 건물을 제공해야 했다. 소작인들은 소작료를 바치고, 지주에게 잉여 농작물에 대한 '우선적 선택권'을 부여했다.


 이들 네덜란드인과 유대를 가지고 있는 스웨덴의 한 무역회사가 그로부터 3년 후에 그보다 남쪽의 델라웨어 강 연안에 최초의 정착지를 설치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그들의 정착지를 공고히 할 방편이 없었던 스웨덴인村은 네덜란드인의 정착지에 흡수되고 말았고, 이 땅은 후에 펜실베이니아와 델라웨어로 발전했다.


 1632년 캘버트 일가는 찰스 1世로부터 포토먹 강 이북의 땅을 개발할 수 있는 특허를 얻었다. 지금의 메릴랜드이다. 이 특허장은 비개신교 교회의 설치를 명백히 금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캘버트 일가는 같은 신앙의 카톨릭교도들이 그곳에 정착하도록 권장했다. 메릴랜드 최초의 邑인 세인트 메리邑은 1634년 포토먹 강이 체사피크만으로 흘러들어가는 어귀에 건설되었다.


 캘버트 일가는 영국에서 차츰 종교적 박해에 직면하게 된 카톨릭교도를 위한 피난처를 마련하는 한편, 이문이 있는 자산을 일구는 데에도 관심이 있었다. 이 목적을 위해서, 그리고 영국 정부와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서 그들은 개신교도들의 이민도 권장했다

이들은 신대륙의 특수한 환경에 의해 미국적인 특성을 가진 청교도 정신을 발전시켰다. 이 청교도 정신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을 지배하게 되었으며 미국의 기본 정신이 되었다.  이들은 종교와 정치에 불만을 품었던 사람들이 신대륙으로 이주해 왔기 때문에 종교개혁 정신에 투철하였다.


5. 청교도 정신과 Frontier

18세기 말에 이르러 New England 사람들이 서부로 진출하여 Frontier(미국 역사상 서부의 개척지) 의 자연 환경과 사회적 조건에 접하였을 때 청교도 정신은 변화되었다. 프런티어의 존재(또는 소멸)가 미국 사회에 끼친 영향은 매우 크다. 광대한 프런티어는 땅의 입수를 용이하게 하여 농업발달에 기여함과 동시에, 공업제품에도 충분한 국내시장을 제공하였다.

그리고 여기에는 자립의 기회가 열려 있었기 때문에 동부의 과잉노동인구를 흡수하는 안전판의 기능을 다함과 동시에, 미국사회의 유동성(流動性)을 높여 그 중산계급화를 촉진하는 한 원인이 되었다. 정치면에서도 기존(旣存)의 사회적 제약이 적은 프런티어는 자유 ·평화라고 하는 이념(理念)에 제대로 들어맞아 보통선거운동 등에 무시할 수 없는 영향을 끼쳤고, 자치의식도 높였다.

그리고 대자연에 맞서 살아 나가야 하는 냉혹한 상황 속에서 ‘프런티어 스피릿’이라 부르는 개척정신의 기풍이 배양되어 그것은 미국 국민의 국민성의 일부가 되기도 하였으며, 그들의 개인주의 ·현실주의 ·합리주의 혹은 개개의 독창성을 존중하는 성향을 강화해 주었다.

이런 Frontier의 강력한 평등주의 앞에 청교도들의 귀족적이고 독선적인 경향은 사라지고 개척민의 거대한 포부와 낙관주의가 청교도 정신의 비관적인 색채를 퇴색시켰다. 그러나 한 가지 뚜렷하게 남아있는 특징은 모든 일을 선악으로 판단하는 도덕적 습성이다. 오늘날 종교적 신앙으로서의 청교도는 New England에서도 사라지고 없어졌지만 그 도덕적 관념은 남아 있어 어려운 사회 문제에 대해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 과 제 ▣

1. 청교도의 신대륙 이주에 대하여 약술하라.

2. 분리주의자들과 비분리주의자들에 대하여 약술하라.

3. 뉴네델란드와 메릴랜드에 대하여 약술하라.

4. 청교도 정신과 푸론티어와의 관계에 대하여 약술하라.













제5장 청교도의 사상과 신앙과 삶


1. 청교도들의 언약 사상

청교도들의 신앙은 하나님의 뜻대로 개인적인 삶을 살며,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교회와 사회를 세우자는 것이다. 하나님 뜻대로 개인의 삶을 살고 교회와 사회 공동체를 세우자는 것은 목표이고 대 전제이다.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하여 청교도 성직자들은 먼저 스스로 설득되고 그리고 사람들을 설득시키며 그 목표에 도달하도록 하기 위하여 신앙적이고 사상적인 힘을 불어넣어야 했다.

바로 그 구체적인 사상적 틀과 정신적인 내용이 무엇인가 하면 그것은 청교도 언약사상이었고 그것에서 우러나오는 자발적 참여의식이었다. 언약사상은 이미 유럽대륙에서 소개되었지만 이것이 영국으로 넘어오면서 발전되었고, 청교도들은 이것을 개인 언약, 교회언약, 사회언약의 크게 세 가지로 발전시키면서 삶의 모든 부분을 하나님과의 언약관계로 정리했다. 청교도 개혁운동은 바로 이 언약사상의 뒷받침으로 전개되었다.

청교도 언약사상은 사람들에게 자발적 참여의식을 낳게 했고, 이 자발적 참여의식은 개혁의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청교도 개혁운동 역사 가운데 언약사상이 어떻게 형성, 전개되었으며 자발적 참여의식이 어떻게 발생되었는가를 보게 될 것이다.


2. 청교도 운동의 7대 기준

청교도 운동에는 일곱 가지 뚜렷한 기준이 있다.


첫째가 성경중심의 신앙이다. 청교도 운동의 시작이 성경을 바로 읽고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바르게 살자는 운동이다.

둘째가 성수주일(聖守主日)이다. 십계명의 네 번째에 지시한 바를 따라 안식일을 철저히 지키며 살자는 운동이다.

셋째가 직업에 대한 소명 정신이다. 신부와 목사만이 사명자요 사역자가 아니라, 모든 직업이 하나님이 맡기신 청지기로서의 사명이라 여겼다.

넷째는 자녀들에 대한 책임이다. 그들은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바로 가르치는 것을 자신들의 책임으로 여겼다.

다섯째는 바른 교회를 세우는 운동이었다. 교황이나 사람의 권위가 지배하는 교회가 아니라 예수께서 머리가 되시는 교회를 세우자는 운동이었다.

여섯째는 예언서의 기준을 따라 정의로운 사회와 국가를 세우자는 운동이다. 이 운동이 영국에서는 제한적인 역할만 하고 실패하였지만, 미국으로 건너간 청교도들에 의하여 미국이란 국가가 세워지게 되었다.

일곱째는 재물에 대한 청지기 정신과 십일조 생활에 대한 강조이다. 재물에 대한 이런 사고와 습성이 후에 자본주의를 일으키는 모체가 되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3. 청교도들의 삶

(1) 청교도들은 성경의 사람들이다.

  엘리자벳 시대의 청교도인 토마스 샘슨 박사(Dr. Thomas Sampson)는 청교도들을 이렇게 표현한다. “그 누구도 정당하게 잘못을 찾을 수 없는 교리와 생활을 지닌 형제들” 이라고 한다.

리랜드 라이큰(Leland Ryken)이 표현하였듯이 청교도들은 “이 세상의 성자들(Worldly Saints)”이다. “청교도들은 세속의 오염으로부터 격리된 거룩한 양심을 소유한자들이었다. 이들은 초대교회로부터 물려받은 사도적 순결과 거룩한 양심을 지키기 위해 세속으로부터 격리되기를 염원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성경에 근거하지 않는 신앙생활은 어떠한 것이라도 거부하였다.”

청교도들이 누구인가? 성경에 가장 가까운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로이드존스의 말처럼 “청교도는 언제나 신약으로 돌아가기를 원했습니다.” 제임스 헤른(James Heron, D.D)은 "청교도들이 원했던 것은 가능한 성경 속에 나타난 원리들에 적합한, 교리는 물론이고 교회의 규율과 행정조직을 갖기 원했던 것이다.“ 라고 한다. 청교도들은 오로지 성경의 가르침에 기초하여 모든 것을 복음적인 관점에서 보았던 사람들이다. 즉 그들은 철저하게 성경의 사람들이었다 말할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을 통하여 성경의 권위가 온전히 드러났다.


(2) 청교도들은 온전한 개혁을 이루려고 한 사람들이다.

  청교도들이 살던 당시의 카톨릭의 사제들은 정치적이고 형식적이었고, 반쯤 개혁된 영국 국교회(성공회)도 이러한 잔재가 남아 있었다. 또한 왕이 교회의 통치자가 되어 교회를 국가의 시녀로 전락시키었다. 놀라운 것은 당시 성직자들 가운데는 글을 읽을 줄 모르는 벙어리 성직자들도 많았다고 한다. 결국 설교 없이 의식만 거행되는 예배가 만연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종교상황 속에서 사람들은 혼란에 빠졌고, 빈곤 및 도덕성의 상실로 사회경제적인 불안이 심각하였다.

이러한 때에 청교도들은 국교회의 예배의식을 반대하고 초대교회와 같은 순수한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고자 했다. 또한 성경을 연구하고 그 성경을 기초로 죄와 회개 구원의 은혜를 중심한 설교를 강조하였다. 또한 이들은 거룩과 경건을 생활의 절대적인 요소로 삼았다. 결국 청교도들에 의해서 종교개혁의 모토인 ‘오직 믿음으로 (Sola Fide)’,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Soli DEO Gloria)’ 라는 온전한 개혁이 이루어지는 계기가 된 것이다. 비록 영국 국교회 내에서는 온전히 이루어지지 못하였지만 영국 개신교 교회에 종교개혁의 주역들이 되었다.


(3) 청교도들은 성경의 진리를 바르게 설교한 사람들이다.

“청교도들은 다른 어떤 자이기 전에 먼저 설교자였다”는 것이다. 청교도들은 교회가 성경의 권위아래 있게 했을 뿐만 아니라 성경의 진리를 드러내는 설교의 권위를 되찾게 되었다. 특히 이것은 강단위의 설교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청교도들은 무혈적이고 영적이고 구두적인 개혁을 설교를 통하여 이룬 자들이다.

그들은 “설교시간은 대체로 예배시간과 동의어로 사용될 정도로 예배에 있어서 설교는 가장 핵심요소였다.” 그들은 설교를 공예배의 절정으로 간주했던 것이다. 즉 “성령의 권능에 의해서 수반되는 말씀 선포와 그 말씀으로부터 오는 교훈을 구원과 성화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권능의 중요한 중재수단으로 여겼던 것이다.” 그래서 강단위의 청교도들은 설교를 위하여 성경을 철저히 연구하였고, 실제의 강단에서 리차드 백스터(Richard Baxter 1615 - 1691)의 말처럼 설교했던 것이다. “이것이 나의 마지막 설교인 것처럼 선포하였고, 그들 모두는 ‘죽어가는 사람으로서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설교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철저하게 성경의 진리를 설교함으로서 인생의 제일 되는 주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임을 강조하고, 의지하고 바라보아야 하는 유일한 대상이 그리스도임을 제시하고, 신앙인의 삶의 방향이 경건과 거룩임을 일깨웠고, 철저한 직업 소명의식을 일깨우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건전한 가정생활을 하게하고, 세상의 쾌락과 사치로부터 돌아서게 했다. 설교된 성경의 진리에 의해서 실제적으로 설교자들은 가장 성경적인 삶을 살았음은 물론이고 회중속의 청교도들도 그와 같이 살았다.


(4) 청교도들은 삶의 전반적인 영역에서 경건한 의무에 충실한 사람들이다.

  청교도들에게 있어서 중요시되는 단어가 ‘의무’라는 단어이다.

청교도들은 그들의 의무가 성경의 내용대로 순수한 신앙을 지키며 이것을 세상에 전파하는 것이요 그 대가로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특별한 대우를 받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그들은 순수한 신앙이 가정과 교회뿐 아니라 사회 전체에서 실현되어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기를 그렇게 원하고 싸웠던 것이다.

청교도들은 교회와 가정에서 청교도의 삶의 의무를 실제적으로 강조하였는데 목회자들은 설교에서 공통적인 표현으로 하나님께 순종과 충성을 강조했으며 양떼들에게 신앙과 의무를 이행하라고 강조했다.

청교도들이 철저하게 자신들의 의무로 삼았던 것들은 다음과 같다.

1. 성수주일이며 2. 예배이며 3. 기도이며 4. 경건한 가정이다. 5. 거룩한 삶이다.


l. 철저한 주일 성수의 의무이다.

그들은 주일을 ‘영혼을 위한 장날’ 이요 단체의 찬양과 기도로 천국 잔치에 참여하는 날로 생각하였다.

청교도들이 체계화시킨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The Westminster Larger Catechism) 제 118문은 이점을 분명히 하는데,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그들의 주요한 의무임을 명확히 하고 있다.

“왜 가족의 어른들과 다른 윗사람들을 향해 안식일을 지키라는 명령이 특별히 주어졌습니까?

답: 가족의 어른들과 다른 윗사람들을 향해 안식일을 지키라는 명령이 특별히 주어진 것은 그들 자신에게 안식일을 지킬 의무가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통솔 아래 있는 모든 사람들로 안식일을 지키게 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며, 그들 자신의 일로 아랫사람들의 안식일을 방해하는 일이 흔히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소요리문답(The Westminster Shorter Catechism) 제60문과 대요리문답 제117문에서는 어떻게 안식을 거룩히 지켜야하는 지를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다.

대요리 문답에서 “안식일 혹은 주일을 어떻게 거룩하게 하여야 합니까? 답: 안식일 혹은 주일을 거룩하게 한다는 것은, 온 종일 거룩히 쉼으로 할 것이며, 언제나 죄악 된 일을 그칠 뿐만 아니라 다른 날에 합당한 세상일이나 오락까지 그만두어야 하며, 부득이한 일과 자선 사업에 쓰는 것을 제외하고는, 그 시간을 전적으로 공사 간 예배하는 일에 드리는 것을 기쁨으로 삼을 것입니다. 그 목적을 위하여 우리는 마음을 준비할 것이며, 세상일을 미리 부지런히 절제 있게 배치하고 적절히 처리하여 주일의 의무에 보다 더 자유로이 또는 적절하게 행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주일성수에 방해가 되는 것들을 금지해야 할 것을 분명하게 명시하고 있다.

소요리문답 제61문과 대요리문답 제119문에 “제 사 계명에서 금지된 죄들은 무엇입니까? 답: 제 사 계명에서 금지된 죄들은, 요구된 의무를 하지 않는 모든 것과 모든 부주의와 등한함과 그것들을 무익하게 이행함과 이에 지쳐 괴로워함이며, 또 게으름과 죄악 된 일을 하는 것과, 세속적인 일과 오락에 대하여 필요 없는 일, 말, 생각들을 함으로써 그 날을 더럽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청교도들은 주일성수를 의무로 여기며 철저하게 지킨 좋은 전통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실제로 이러한 주일성수에 대한 의무와 철저한 준수는 리차드 박스터가 사역하던 키더민스터의 변화된 모습을 통하여 확인된다. 그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주일날에 거리에서 전혀 무질서가 보이지 않게 되었고 거리를 지날 때 수 많은 가정들이 찬송가를 부르고 설교를 되풀이 이야기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2. 예배의 의무이다.

청교도들은 형식적이고 의식에 치우친 예배를 배격하고 성경에 근거한 순수한 예배, 간결한 예배를 사모하였다. 그들은 존 카튼(John Cotton, 1585-1652))의 표현처럼 “그리스도인의 예배는 사모함이다.” 청교도들이 주일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함이다.

그들은 기독교 예배의 세 가지 영역이 있다고 말한다. 곧 지역교회에서의 공적 예배와 가족 단위의 가정 예배와 골방에서의 개인 예배인 것이다. 이중에 공적 예배가 가장 중요하다. 공적 예배는 주일의 중심이다. 그들의 주일은 아침과 오후 혹은 저녁의 공적 예배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다. 복음적인 예배는 중생한 자들만의 특권이며 동시에 의무였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발견하는 중요한 특징 가운데 그들은 가정에서 중요한 의무도 예배였다. 웨스트 민스터 예배모범을 보면 “모든 가정이 통상 아침과 저녁에 시행하야 하는 가정예배는 기도와 성경읽기와 찬양으로 이루어진다.”라고 말한다. 청교도들은 가정 예배를 권면하였고 실제로 가정에서 매일 예배하였다.

리차드 백스터는 “가정예배를 위해 단지 2명만 있어도 된다.”고 하며, 죠지 휫필드는 “마음만 올바르게 갖추어져 있다면 가정예배를 품위 있고 건덕스럽게 드리는데 있어서 다른 어떤 비장한 능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한다. 죠엘 비키(Joel R. Beeke)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든 부모들이 가정예배를 지속적으로 시행해야하는 이유를 이렇게 제시한다. 부부와 자녀들의 영원한 복락을 위해, 선한 양심의 만족을 위해, 자녀 양육의 도움을 위해, 주어진 시간이 짧기에, 하나님과 그의 교회에 대한 사랑 때문에 가정에서 매일 지속적으로 예배해야한다는 것이다.


3. 기도의 의무이다.

청교도들은 국교회의 고정된 기도서를 거절하고 즉석기도를 했다. 그들은 주일은 말할 것도 없고 일주일 내내 개인기도와 가족기도로 충만했다. 청교도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존 낙스가 기도의 사람이었듯이 청교도들은 기도의 사람들이었다. 특히 청교도들은 “경건한 생활을 위해서 많은 시간을 기도로 보냈으며 기도의 의무 실천을 계속하는 것이다.”

이러한 그들의 기도에 대한 의무가 대요리 문답 185문과 186문에 잘 나타난다. “

185문 :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합니까? 답: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위엄에 대한 엄숙한 이해와 우리 자신의 무가치함과 필요한 것들과 죄에 대한 깊은 의식과 통회하며 감사하는 열띤 마음을 가지고 이해, 믿음, 성실, 사랑과 인내로써 하나님을 바라며, 그의 뜻에 겸손히 복종함으로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제 186문에서 “하나님께서 기도의 의무에 관한 우리의 지침으로 어떠한 규칙을 주셨습니까? 답: 하나님의 말씀 전체가 기도의 의무에 관한 지침으로 사용되지만, 특별한 기도 법칙은 우리 구주 그리스도께서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기도의 양식인데, 곧 주기도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4. 경건한 가정의 의무이다.

청교도들은 가정을 사회의 기본적인 단위인 동시에 하나의 교회로 보았다. 그들은 남편을 목사로 아내를 전도사로 하는 작은 교회라고 주장했다. “남편의 의무는 가족을 신앙으로 이끌고 주일날 그들을 교회에 데리고 가고 가정에서 그날 온종일 성별하도록 감독하고, 자녀에게 교리문답을 하고 믿음을 가르치고 설교를 들은 후에 가족 전체의 시험을 보아 얼마나 기억하고 이해하고 있는지 살펴보고 부족하면 이해시키고, 매일 가정 예배를 이상적으로 하루에 두 번 인도하고, 언제나 모든 문제에서 근실한 모범이 되는 것이다.”

토마스 왓슨(Thomas Watson)은 그리스도인 부모들이라면 “자녀들을 그들의 자녀로 만들기보다 하나님의 자녀로 삼기위해 애쓴다”고 믿었다. 설교자들은 가정을 경건한 가정으로 유지할 것을 강조하였다.


5. 거룩한 삶에 대한 의무이다.

칼빈(John Calvin, 1509 - 1564)은 물론이고 존 오웬( John Owen, 1616 - 1683)이 말했듯이 “그리스도인의 땅의 삶 동안 그를 위한 하나님의 목적은 성화이다.” 그는 분명하게 말한다. “거룩은 하나님의 약속의 선물이기도 하며 인간에게 명해진 의무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우리는 이 의무를 실행할 수 없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의 의무를 바르게 실행할 수 있도록 하는 목적 아닌 다른 목적으로 이 은혜를 주시지 않으신다.”

거룩을 이루기 위해서는 죄를 억제하여야 하고 죄와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한다. 청교도들은 이것을 하나의 교리로 다루어 ‘죄 죽임의 교리(A doctrine on mortification)’를 강조하였다.

이 땅에서 완전한 거룩이 불가능하지만 그들은 거룩의 최고봉에 이르기 위한 열망으로 완전한 거룩을 추구한 사람들이다. 실제로 그들은 성경이외의 교회사에서 가장 거룩한 무리들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탁월한 거룩은 그들의 특징인 동시에 그들의 능력이 되어서 자신들의 시대는 물론 지금껏 남긴 글을 통하여 영향을 미치고 있다.


(5) 청교도들은 개신교회의 형성에 영향을 미친 사람들이다.

  초기 청교도들은 장로교도였다. 제임스 헤른(James Heron)은 독립파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존 로빈슨(John Robinson)의 말을 인용한다. “교황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의 통치권을 교황에게, 신교도들은 감독들에게, 청교도들은 장로회에, 우리들은 교회로 불리 우는 다수의 회중의 몸에 그것을 두었던 것이다” 그는 장로정치가 초기의 청교도들의 특성이었음을 말한다. 로이드 존스는 다음과 말한다. “청교도주의는 궁극적으로 하나의 정신구조요 하나의 정신입니다. 저는 주장합니다. 참된 청교도주의는 궁극적으로 장로교회 안에서 발견됩니다. 특히 존 낙스에게서 말입니다”

초기의 청교도들이 칼빈주의 적인 전통을 따르는 장로교였으나 이후에 여러 개신교의 산실이 되었다. 물론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면 더 초기적인 형태의 청교도는 침례교도라고 말하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들이 전체 개신교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종교의 자유를 찾아 미국과 대륙으로 떠나 교회의 형성에 영향을 미쳤으며 영국 교회 내에서도 장로교회, 영국의 회중교회, 분리주의교회, 감리교회 등에 영향을 미쳤다.


4. 청교도들의 신학 사상

  청교도들의 신학과 사상의 유일한 근간은 성경이었다. 그래서 청교도 신학을 한마디로 말하라 한다면 칼빈주의 적인 신학이라 말할 수 있다. 물론 청교도들은 다양한 신학적인 뿌리를 형성하는 사람들이었다. 청교도들은 후대에 감리교회에 영향을 주고 침례교회에 영향을 주기도 했으며,고 교회주의 자들에게 영향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정직하게 초기의 청교도들은 모두 칼빈주의 자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의 신학과 사상은 종교 개혁의 연속선상에서 생각할 수 있다. 그들은 공통적으로 영국 국교회에 종교개혁이 온전히 완성되기를 소망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청교도들의 신학과 사상이 가장 잘 나타나고 있는 문헌이 웨스트민스트 신앙고백이다. 그래서 청교도 신학과 사상은 종교개혁의 4가지의 모토와 웨스트 민스터 신앙고백을 기초로 형성할 수 있다.

종교개혁의 네 가지의 모토(Motto)는 ① 오직 성경! (Sola Scriptura : Only through Scripture) ② 오직 믿음! (Sola Fide : Only by Faith) ③ 오직 은혜 ! (Sola Gratia : Only by Grace) ④ 오직 하나님의 영광! (Soli Deo Gloria : Glory be to God Alone)이다.

또한 여기에 청교도들에게서 두드러지게 발견되는 ⑤ 오직 그리스도! (Soli Christo : Only through Christ)라는 사상을 발견할 수 있다.


① 청교도 신학과 사상은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다.

종교개혁자들은 한결같이 ‘오직 성경’을 강조한다. 즉 성경이 말하고 있는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종교개혁자들의 이런 주장은 성경이외의 변질된 교회전통이나 교황의 권위를 중시하는 카톨릭 교회의 문제점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들은 오직 성경이 최고의 권위를 가진 것임을 강조한다.

루터(Martin Luther, 1483 - 1546)의 경우 “성경은 그 자체로 해석한다(scriptura, sui ipsius interpres)”라고 말한다. 그는 교회의 전통보다도 성경 자체에 권위를 두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교황의 권위를 부정한다. "교황이 성경보다 위라는 점에 나는 반대하네. 누가 그에게 그런 권위를 주는 것인가? 그의 근거는 성경에 없고, 그의 교서는 단 한 번도 성경에 근거한 적이 없다네. 아첨꾼들이 교황을 성경 위에 올려놓고 잘못을 저지를 수 없는 사람이라고 우겨대지만, 그렇게 되면 성경은 사라지고 남는 것은 인간의 말뿐일세." 이렇듯 루터는 카톨릭의 비성경적인 사상에 반대하여 "나의 신앙은 오직 그리스도의 말씀에 사로잡힌 포로이다"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만이 하나님과 종교 문제에 대한 바른 지식을 얻을 수 있다"고 외쳤다. 그리고 자신이 친히 독일어로 된 자국어 성경을 번역하였다.

칼빈은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라는 그의 개념에 기초를 두고 "성경으로부터 생각하고 말하는 규범(ex scripturis et loquendi regula)"을 말한다. 즉 성경으로부터 생각하고 말하는 규범이란 성경에 따라서 우리들의 마음의 모든 생각과 입의 모든 말들이 측정된다는 것이며 모든 삶의 유일한 척도이며 표준이라는 것이다. 그는 "오직(sola)" 성경을 통해서 모든 사실에 대하여 그리고 전 삶에 있어서 주의 깊고 절제 있게 생각하고 말하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렇듯 성경이 모든 것의 절대적인 기준이 됨을 강조하였다.


그밖에 종교 개혁자들도 한결 같이 성경의 권위를 강조하였다. 왜냐하면 성서의 권위가 하나님에게서 왔으며 성령에 의해서 기록된 성경이 교회의 권위 위에 있기 때문이다. 즉 성경이 신적인 기원과 신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절대적인 권위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의 권위를 교회 위에 두고 있으며 오직 성경(Sola Scriptura)만이 그들의 신학과 사상의 최고의 권위가 되었다. 이러한 종교개혁자들의 신학과 사상은 그대로 청교도들에게 이어진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난다. 성경이 하나님과 그의 뜻을 충분하게 알게 하시려고 진리를 온전히 기록해두신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렇게 기록한다. “이 모든 책들(66권)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으로, 신앙과 생활의 법칙이 된다(눅16:29,31, 엡2:20, 계22:18-19, 딤후3:16).”고 언급하며,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그 권위를 받아들여야 함을 말하면서 “성경이 무오한 진리요, 신적 권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충분하게 납득하고 확신하게 되는 것은, 우리의 심령 속에서 말씀에 의하여 말씀을 가지고 증거하시는 성령의 내적 사역에 의해서이다(요일2:20,27, 요16:13-14, 고전2:10-12, 사59:21).”라고 한다.

“성경은, 성경이 전수된 모든 나라의 자국어로 번역되어야 한다(고전14:6,9,11-12,24,27-28). 그리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모든 사람에게 풍성히 거하게 하여, 그들이 하나님을 합당한 방법으로 예배할 수 있게 하며, 성경이 주는 인내와 위로를 통하여 소망을 가질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한다(골3:16, 롬15:4).”고 한다.

그리고 성경 해석에 대하여 “성경 해석을 위한 무오한 법칙은 성경 자체이다. 그러므로, 어떤 성경 구절의 참되고 완전한 의미에 대하여 의문이 생긴 때에는(참되고 완전한 의미는 여럿이 아니고 하나뿐임), 보다 분명하게 말하고 있는 다른 구절을 통해서 연구하고 알아내야 한다(벧1:20-21, 행15:15-16).”라고 한다.

마지막으로 종교에 관한 모든 논쟁들의 최고의 재판관은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성령이라고 정의한다. 이렇듯 성경이 무엇보다도 최고의 권위가 있음을 분명히 한다.

또한 웨스트 민스트 대요리 문답은 성경의 권위를 이렇게 표현한다. 제3문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인가?”라고 묻고는 이렇게 답한다. “신·구약 성경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며, 신앙과 순종을 위한 유일한 법칙이다.”유일한 법칙이라는 표현이 성경의 권위를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대요리 문답은 한걸음 더 나아가서 이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하는 지를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제157문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읽어야 합니까?” 에 답하기를 “성경은 높이 경외하는 마음으로 읽고, 성경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며, 하나님만이 우리가 성경을 깨닫을 수 있게 하실 수 있다는 굳은 신념으로, 거기에 계시되어 있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믿고, 순종하고자 하는 소원으로 부지런함과 성경의 내용 및 범위에 주의함과 묵상과 적용과 자기 부정과 기도함으로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청교도들은 성경이 성령에 의해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임으로 신앙과 삶에 절대적으로 권위가 있음을 분명하게 언급하였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이 친히 성경의 절대적인 권위를 인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 권위 아래에서 순종하는 삶을 살았던 신자들이었다. 오직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종교개혁의 전통을 그대로 수용하고 실제의 삶과 사역을 통하여 입증하였던 것이다.


② 청교도 신학과 사상은 오직 믿음(Sola Fide)이다.

종교개혁자들의 또 다른 모토는 오직 믿음이다. 여기서 오직 믿음은 이신 칭의 구원론의 핵심이다. 이것은 루터가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 진리를 재발견한 것이다. 그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하나님의 의와 그것을 수납하는 믿음을 깨달음으로 종교개혁이 포문이 열린 것이다. 그는 1517년 10월 31일에 비텐베르그 성곽교회 문에다 면죄부(행위 구원)에 반대하는 95개 조항을 계시하였는데 그는 여기서 로마 카톨릭의 행위로 구원을 강조하는 모든 비성경적인 것들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그는 행위로 구원을 지양하고 오직 믿음( Sola Fide)을 모토로 삼았던 것이다. 이것이 종교개혁의 신학과 사상이 되었다.

사실 오직 믿음으로 칭의를 얻는다는 진리는 초대교부 암브로시우스(Ambrosius , 340~397)와 어거스틴(St. Augustine, 354-430)이 강조한 칭의론에 근거를 둔 것이었으며, 더욱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의 중심 진리였다.

루터가 재발견한 이신칭의 진리를 칼빈에게 와서 동일하게 주장된다. 그는 이 진리가 "종교의 유지를 위한 결정적 구심점"이 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칭의의 근거는 인간에게 있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한다. 또한 그는 말하기를, “인간에게 의뢰함이 없이 하나님께만 의지하여 안식함이, 믿음의 본질인데, 믿음이 그만한 견고성을 가져야 지옥의 모든 공세 앞에서도 실패하지 않고 끝까지 견디어 나간다”고 한다.

이것은 동일하게 청교도들의 신학과 사상의 근간이 되었다.

청교도들이 성경에 근거하여 제정한 웨스트 민스트 신앙고백에서도 동일하게 오직 믿음으로 인한 칭의가 뚜렷하게 나타난다.

청교도들이 말하는 오직 믿음으로 인한 칭의는 믿음 자체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그의 의에 있음을 명확히 한다. “부르심을 입은 그들은 그리스도와 그의 의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의존할 때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다.

그 믿음은 그들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고, 그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다(행10:44; 갈2:16; 빌3:9; 행13:38,39; 엡2:7,8). 이같이 그리스도와 그의 의를 받아들이고 의존함에 있어서 믿음은 칭의의 유일한 방편이다(요1:12; 빌3:28; 5:1).”라고 한다. “그들의 칭의는 오직 값없는 은혜로 되어진 것이며 (롬3:24; 엡1:7) 성령께서 때를 따라 실제로 그리스도를 그들에게 적용시키실 때에 비로소 가능하다(골1:21,22; 갈2:16; 딛3:4-7).는 것이었다.

웨스트 민스트 대요리 문답에서도 칭의는 하나님의 은혜의 행위로서 우리의 믿음을 강조한다. 제70문에서 “칭의가 무엇인가?” 란 질문에 “칭의는 죄인들에게 하나님께서 자의로 베푸시는 은혜의 행위이다. ……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하신 순종과 보상하시는 속죄 까닭에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부여하시는 것인데, 믿음으로만 받는 것이다.” 라고 답한다.

그리고 제72문에서 “의롭게 하는 믿음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의롭게 하는 믿음은 죄인의 마음속에 성령과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하여 구원을 베푸시는 은총이다. 하나님 앞에 자신이 의롭다는 인정을 받기 위하여 말씀에 계시된 그리스도와 그분의 의를 받아들이고 의지하는 것이다.”라고 답한다.

그리고 제73문에서 “믿음이 어떻게 죄인을 하나님께서 보시는 가운데 의롭게 하는가?” 라는 질문에 “오직 믿음은 다만 그리스도와 그분의 의를 받아들이고 적용하게 하는 도구로서 의롭게 할뿐이다.”라고 답한다.  그러므로 오직 믿음이란 인간의 모든 행위를 부인(심지어 믿음이 자신에게 나온 것이라고 생각하여서 또 다른 행위로 생각하는 것까지)하는 것으로 그리스도와 그의 의를 수납하는 손(도구)을 말하는 것이다.

윌리암 퍼킨스(William Perkins, 1558-1602)가 말했던 것처럼 “믿음은 인간의 자유의지의 결과라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효과적인 부르심의 결과이다.” 존 오웬은 구원 얻는 믿음이란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중보로 말미암아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방식만을 의지하며 그 구원 방식을 선택하고 인정하는 것이다.”라고 한다.

토마스 굳윈(Thomas Goodwin, 1600-1679)의 표현처럼 “믿음은 은혜의 보좌에 좌정해 계시는 그리스도를 직접적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유일한 믿음의 대상이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이다”라고 강조한다.

그러므로 오직 믿음이란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와 그의 의를 바라고 의지하는 믿음을 받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청교도들은 이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③ 청교도 신학과 사상은 오직 은혜(Sola Gratia)이다.

로마 카톨릭 교회의 구원관은 공로사상에 근거한 행위구원에 있다. 즉 구원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가 아니라 행위에 근거한 것이기에 수많은 성자를 숭배하고, 금식기도와 고행이 수반되었다. 그래서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내놓을 무렵에는 면죄부를 판매함으로 그것으로 지옥 간 영혼일지라도 구원에 이룰 수 있다고 그릇된 교리를 가르치게 되었다.

그래서 루터는 성경에 근거하여 오직 은혜로 인한 구원을 강조하게 되었다. 루터는 자신의 구원을 고민하면서 “어떻게 준엄하시고 공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있겠는가.” 였다. 성경(특히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의존하는 구원론의 재발견은 자신의 의를 통해서 구원에 이룰 수 없음을 알고 하나님의 의만을 의존하게된 것이다. 그래서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이 죄인이 살길임을 외치는 슬로건을 내세우게 되었다. 그가 말하는 오직 은혜란 “모든 인간의 공덕과 행위를 배제하고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인류를 위한 화목제물로 삼으신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구원의 사역에 의존하는 구원의 원인적 근원에 대한 슬로건이다.” 오직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 속하였고, 그 구원은 하나님의 값없는 선물이다. 사도바울이 말한 진리와 일치한 것이다.


 칼빈도 동일하게 오직 은혜로 인한 구원을 강조한다. 그는 그의 기독교 강요 3권에서 불가항력적 은혜와 관련된 내용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그는 신. 인 협력설 주의와 공로주의를 비평한다. 그는 소명과 중생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통한 선택의 열매로 주어지는 것이라고 한다. 즉 인간의 의지를 통한 자력적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 전에 선택과 그 은혜의 결과로 구원의 부르심과 중생이 주어지는 것으로 제시한다.

“부르심은 선택의 증거라고 부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복음의 선포는 선택이라는 원천에서 흘러나오는 것이지만, 이런 선포는 악인들도 함께 듣는 것이므로, 그 자체로서는 선택을 완전히 증거 하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선택된 자들을 믿음으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효과적으로 가르치신다. ……누구를 왜 부르시느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그가 선택하신 사람을 부르신다는 것이다. …… (더 나아가서) 지금 경건한 자들이 구원을 위한 도움으로서 받는 것은 복락까지도, 모두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이다.”

이와 같이 칼빈도 구원이 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은혜에 있다는 것을 명확하게 한다. 오직 은혜로 구원에 이르게 됨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구원이후의 삶도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임을 말하고 있다. 그는 구원의 전 과정이 오직 절대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짐을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종교개혁자들의 오직 은혜에 대한 사상은 청교도들에게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다.

웨스트 민스트 신앙고백은 오직 은혜에 대한 진리를 총체적으로 정리하고 있다. 먼저 구원에 이르게 하는 유효적 부르심에 대하여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이 유효한 부르심은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특별한 은혜로만 되어지는 것이며, 결코 사람 안에 있는 어떤 것을 미리 하나님이 보시고서 하는 것이 아니다(딤후1:9; 딛3:4,5; 엡2:4,5,8,9; 롬9:11).”

더 나아가서 칭의에 대해서도 “믿음 자체, 믿는 행위, 또는 어떤 다른 복음적인 순종을 그들의 의로 돌림으로써가 아니라 -- 그 믿음은 그들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고, 그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다. ……그들의 칭의(稱義)는 오직 값없는 은혜로 되어진 것이다(롬3:24; 엡1:7).” 라고 분명히 언급하며, 또한 양자됨에 대해서도 “ 하나님께서는, 의롭다 함을 받는 모든 사람들이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를 위하여 양자됨의 은혜에 참여하는 자들이 되는 것을 허락하신다(엡1:5; 갈4:4,5).”고 하나님의 은혜임을 설명하고 있다.

또한 성화에서도 내주하시는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그들은 점차 모든 구원하는 은혜 안에서 활기를 되찾아 강건하게 되어(골1:11; 엡3:16-19), 참된 거룩의 생활을 하게 된다.”라고 분명하게 하나님의 은혜임을 정리하고 있다.

이와 같이 청교도들에게서 오직 은혜로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진리가 더욱 명확하게 종합적으로 정리되어 나타나고 있다. 구원의 전 과정이 인간의 어떠한 노력이나 공로가 아니라 성령의 역사에 의한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된다는 것이다.


④ 청교도 신학과 사상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 (Soli Deo Gloria)이다.

 종교 개혁자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산자들이다. 즉 그들의 신학과 삶의 최종적인 목적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었다.

루터는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를 강조하였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영광도 강조하였다. 그는 “구원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오는 믿음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사역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은혜로써만 가능하다” 는 것을 강조한 것인데 이것을 강조한 이면에는 “인간 구원의 모든 계획과 사역의 주체 자이신 하나님 한 분에게만 찬양을 드리며, 그 은덕에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의도가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특히 루터는 죄로 인하여 어두워진 인간의 본성을 이렇게 표현한다. “인간의 본성은 너무나도 타락되어 있기 때문에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려고 하지 않는다. 그 대신 영광을 그 자신에게 돌리려고 한다. 인간의 본성이 잘못되어 있음을 알면서도 잘못되었다는 것을 나타내려고 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것을 바로 잡기위하여 교육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임을 분명히 말한다.

엄밀하게 말해서 오직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진리를 루터가 주창하였다면 이것을 발전시켜서 자신의 신학의 중심주제로 삼은 사람은 칼빈이었다. 종교 개혁자들 중에 어느 누구보다도 칼빈의 중심사상은 Soli Deo Gloria 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인간 영혼의 구원보다도 더 중요한 일임을 말한다.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열심을 자기 실존의 제일의 목적으로 삼지 않고, 자신에게만 생각을 한정하는 것은 건강한 신학이 아니다.” 라고 한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의 역사는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자신의 이름의 영광을 위해 일할 자들을 선택하심으로써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기독교 강요에서 기도를 강조하면서도 기도 시에 중심 생각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이렇게 말한다. “자기를 생각하거나 신뢰하지 말고 전적으로 겸허한 자세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만 생각하며, 자기의 욕심이 성취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해야 한다.”라고 한다. 더 나아가서 세상의 모든 권세들은 하나님의 영광의 완전한 실현을 향해 나아가야함을 말한다.

제네바 교리문답을 살펴보면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신학과 삶이 중심 사상이었음을 알 수 있다.

“1문: 인간의 삶의 제일 된 목적이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답: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라고 답한다.

그리고 “2문: 무슨 이유에서 당신은 그렇게 말합니까?”라고 질문 하곤 이렇게 답한다. “답: 하나님은 우리들 가운데서 영광을 받으시기 위하여 우리를 지으시고 세상에 살게 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은 우리의 삶의 근원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삶을 살아가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칼빈이 제네바 교회에서 자녀들과 새신자의 성경 교육을 위해서 사용하던 교리문답서의 내용에서 제일 먼저 다루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었다. 여기서 그의 신학과 사상과 삶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었음을 분명히 알게 된다.

이러한 종교개혁자들의 신학과 사상은 청교도들에게 그대로 전하여져서 더욱 체계화 된다. 청교도들이 제정한 웨스트 민스트 대. 소요리 문답에서 칼빈의 정신은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나고 있다.

웨스트 민스트 대요리 문답에서 “제1문. 사람의 제일 되는 가장 중요하고 고귀한 목적은 무엇인가? 답: 사람의 제일 되며 가장 중요하고 고귀한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그분을 영원히 마음을 다하여 즐거워하는 것이다.”

또한 소요리 문답에서도 “제1문.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인가?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 라고 명확히 정리하고 있다.

청교도들이 교리 교육에서 최우선적으로 가르치고 있는 진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라는 것을 볼 때에, 청교도들에게 가장 중요한 신학과 사상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알게 된다. 그들은 이 진리에 입각하여 실제로 하나님의 영광을 주목적으로 하는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다.

청교도들의 실제의 말을 살펴보면 더욱 명확해진다.

토마스 왓슨은 “모든 사람들의 삶과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야말로 진리의 대강령이다”라고 언급한다.

그리고 실제의 청교도들의 설교를 살펴보면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혹은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 자신과 성품들)을 설교하기에 힘쓴 자들임을 알게 된다. 그들은 사람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의 지표를 분명하게 제시하였다. 그래서 성도들로 하여금 성경의 가르침대로 하나님의 영광(하나님)을 위하여 살도록 도와주었다. 청교도들은 교회사속에서 가장 실제적으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영광을 전하며 하나님만을 위하여 살아간 사람들이다.


⑤ 청교도 신학과 사상은 오직 그리스도 (Soli Christo)이다.

 청교도 신학과 사상의 중심은 오직 그리스도이다. 청교도들의 설교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를 맴도는 신학”이라고 일컬어진다. 이 진리도 동일하게 종교 개혁자들의 사상과 신학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 종교개혁자들은 신학과 사상의 중심이 그리스도였다. “마리아와 성자들의 중보는 사족에 불과하며, 사제들의 중보적 역할도 그 필요성이 전무하다. 인간의 공덕체제로써의 성례전을 부정하며, 미사의 피 없는 희생제사 제도를 배격한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십자가에 죽으심을 통해서 단번에 모든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키셨으며, 인류구원을 위한 족한 화목제물이 되셨다. 그리스도만이 인간구원의 소망이다.” 이라고 하여 그리스도 중심 사상과 신학을 전개하였다.

특히 루터의 ‘십자가 신학’은 구원의 문제에 관한 신학의 중심테마였다. 구원의 전 과정의 중심이 그리스도라고 하였다. 그래서 루터의 신학을 “그리스도 중심의 신학이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것은 칼빈에게 있어서 더욱 분명하다. 그는 “세계사의 중심적 전환점은 그리스도이다.”라고 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 세상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고 대 섭리사역인 구속활동을 행하신다. 칼빈은 그리스도 중심적인 구속사관을 언급하는데, 즉 메시야 사상이 역사 속의 종교의 기초, 기본이며, 모든 것들은 메시야를 지시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현현이며, 그리스도의 비하의 신분과 더불어 그리스도의 승귀의 신분이 강조되어 있다. 즉 칼빈은 그리스도의 왕의 권능적 위엄을 강조했던 것이다.

성경에서 그리스도가 없으면 휴지조작에 불과한 것처럼 청교도들의 신학과 사상에서도 그리스도가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청교도 설교는 그 방향에 있어서 철저하게 그리스도 중심적이었다.

리차드 시베스(Richard Sibbes, 1577 - 1635)는 젊은 토마스 굳윈에게 이렇게 조언한다. “젊은이, 만일 그대가 선한 일을 하고자 한다면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혜의 복음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설교해야 한다네.”

이렇듯 “청교도 설교는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주위를 맴돌았다. 왜냐하면 그것이 성경의 중심이기 때문이다. 설교자의 임무는 하나님의 모든 의도를 선포하는 것이다. 그런데 십자가가 그 의도의 중심이다.”

윌리암 퍼킨슨은 예언의 기술에서 “설교 문제의 심장은 이것이다 ; 그리스도를 찬송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에 의하여 한 그리스도를 설교하라” 이렇듯 청교도들의 설교와 신학의 중심은 그리스도였다.


청교도 신학과 사상은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며, 오직 믿음(Sola Fide)이며,  오직 은혜(Sola Gratia)이며, 오직 하나님의 영광 (Soli Deo Gloria)이며, 오직 그리스도 (Soli Christo)이다. 이러한 종교개혁의 신학과 사상의 토대위에 세워진 것이 바로 청교도 신학과 사상인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생각할 때에 청교도들은 종교개혁자의 사상과 신학을 체계화시키고 완성한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5. 미국 청교 주의의 성격

(1) 청교 주의의 특징과 실천주의

1570년에서 1680년 사이에 일어난 청교 주의는 몇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는 영국 국교의 종교개혁에 대한 견해와 로마 카톨릭의 신앙 해석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불만이 개인의 깊고 격렬한 신앙적 체험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로 이와 같은 개인적 체험으로부터 예배 및 생활 전반의 개혁 열정을 가지게 되었다는 점이다. 사실 국교도들은 로마 카톨릭의 미신과 의식을 제거하지 못했으며 카톨릭 전승과 관례를 성경보다 중요시하였다. 게다가 그들은 기독교다운 생활에 별 관심이 없었다. 그리하여 청교도들은 영국을 신의 뜻에 따라 개혁하기 위하여 정당을 발전시키기에 이르렀다.

중생이나 회심은 단순히 예배 의식이나 설교에 의해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은 모두 청교도들에 의해 체험된 실재들이다. 청교도들은 새로운 삶의 고통과 집요 불굴의 신앙 순례의 길을 걸으며 새로운 삶의 형태로의 개종을 개인적으로 체험할 수 있었다. 청교도 신앙의 개인적이며 경험적인 면은 그 운동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특성들을 만들어 내게 되었다.

신의 진노와 사랑에 대한 개인적인 경험은 회심에 있어서 필수적이고 성경에 기록된 대로 전파된 신의 말씀은 인간이 따라야만 하는 중요한 길이었다.

회심이라는 것은 신의 말씀과의 부딪침을 통하여 올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 해석에 대해 크게 강조하게 되었다. 심지어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신의 뜻이라 생각했으며 홍수나 가뭄 등의 재난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며 감추어진 죄에 대해 더욱더 깊은 자기반성을 하곤 하였다.

캘빈의 예정론은 청교도들에게 있어 또 하나의 힘이었다. 청교도들은 개인적 경험을 통해 회심하려 노력하였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들을 선택의 범위로 할 것인가를 알고 있다.'하는 예정론은 청교도들에게 하나의 희망이 될 수 있었으며 그 희망을 바라며 개인적인 믿음은 더욱 깊어지게 되었다.

그들은 신세계의 새로운 환경에 직면하며 세상의 존경과 영광을 한 몸에 받았다.

그러나 그들의 열정은 때때로 그들 자신을 협소하고 완고한 사람들로 만들었고 개인의 삶에 엄격하게 적용된 그들의 믿음은 종종 극단의 편협을 가져 왔으며 위에서 말했듯이 일상생활의 지극히 단순한 일을 결정하기 위해서도 닥치는 대로 성경을 자주 펴 보게 하였다. 그로 인해 질병과 사고와 전염병을 신의 죄 많은 자식들에 대한 징벌로 보는 청교도의 경향 때문에 의학은 매우 더디게 발전하였다.

모든 인간의 수명은 그들의 창조주의 손안에 놓여 있기 때문에 죽음이란 사실을 우리에게는 거의 냉담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체념하고 받아들였던 것이다.


(2) 청교 주의 사회적 윤리

청교도들은 구교도의 의복과 예식들이 영국 교회를 타락시키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영국 교회의 청결을 주장하면서 Puritans라는 이름이 생성되었던 것이다. 상업 발달의 가속과 방랑 거지들 그리고 계속적인 물가 상승은 청교도 운동에 많은 일반인도 참여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리하여 많은 영국인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사회 전반에 대한 개혁을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청교도들의 이러한 사회윤리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소명(Calling)설과 계약·예정(Contract)설이다.

먼저 소명 설은, 하나님으로부터 그들 모두는 소명을 받아 하나님의 일을 지상에서 수행하게끔 되었다고 믿는 것이었다. 이 직업 윤리(Work Ethic)는 그 시대에 팽배하고 있던 게으름과 나태함을 배척하는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더 나아가서 그들의 개인적인 구원에 급급치 않고 다른 사람의 이익은 물론 이교도에 대한 사회적·종교적 책임까지도 그들 자신이 지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사회적·종교적 개혁은 일치한다고 생각했다.

두 번째로 계약·예정설은, 인간은 자발적으로 하나님과 언약 또는 계약을 맺었으며 자신들이 맺은 언약을 충실히 이행함으로써 구원을 성취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이 계약 이론은 교회와 사회의 민주적인 제도 형성에 큰 역할을 했지만 하나님이 부여한 인간의 소명을 그들이 교회와 맺은 계약에 따라 충실히 이행해야 한다는 의식 속에, 타락하기 쉬운 자신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강력한 중앙 통제 정부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데 쓰이기도 하였다. 인간은 누구나 원죄를 지었기 때문에 타락할 수밖에 없다는 원죄설 역시 중앙집권적인 통제 정부의 필요성을 부추겼다.


(3) 계약신앙

미국의 청교도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교리는 '계약 신학'(Covenant Theology)이란 형태로 나타났다. 청교도들은 자기들은 하나님과 불가분의 관계가 맺어졌다고 믿었다. 이 관계는 마치 벗어날 수 없도록 연결된 사슬과 같았다 이 사슬의 한 쪽은 그들 개인에게 다른 쪽은 하나님에게 끊을 수 없도록 매어져 있었다. 그들은 이것을 신학적인 말로 '계약'이라고 불렀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행위의 계약을 맺었었다. 그리하여 그가 타락하기 전 인류의 대표로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며 살게 하셨던 것이다. 그 대가는 축복을 받아 영원히 사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계약은 이행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새로이 그리스도 안에서 주신 것이 곧 은혜의 계약이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도움으로 지켜져 나가는 특별한 형태의 계약이었다.

계약을 맺은 당사자는 계약의 내용대로 해야 할 의무를 가진다. 청교도들은 이처럼 하나님과 사슬로 연결되었다고 믿었다. 세상에서도 더 좋은 조건이 있어도 계약 맺은 상대와 관계를 하게 되었듯이 하나님도 계약의 내용대로 지켜야만 했던 것이다.

청교도들은 그들의 의무가 성경의 내용대로 순수한 신앙을 지키며 이것을 세상에 전파하는 것이요 그 대가로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특별한 대우를 받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그들은 순수한 신앙이 가정과 교회뿐 아니라 사회 전체에서 실현되어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기를 그렇게 원하고 싸웠던 것이다.

계약 신학의 출발은 청교도 지도자 윌리엄 퍼킨스로부터였다. 1612년 발간된 그의 책 제목이 바로 「금 사슬」이었다. 여기 금사슬로 표현된 하나님과의 계약은 '하나님의 선택에 섭리가 수행되는 외적인 수단'이었다. 이것은 은혜의 새 계약으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와 그의 모든 축복을 약속하여 인간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접하고 자기의 죄를 회개토록 요구하시는" 방편이었다. 이 새 계약은 인간의 영혼에 신앙을 일으킴으로 맺어진다. 이를 위해서 복음의 설교가 그 통로로 사용된다. 그리고 성례는 그리스도의 구원하는 은혜가 눈에 보이도록 나타나 신자들의 마음에 확신의 인봉을 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선택은 네 단계로 즉, 설교와 전도를 통한 부르심, 그리고 칭의, 성화, 영화로 진행된다. 영화의 시작은 죽음의 순간부터이며 심판 날 이후에 완성된다.

당시 청교도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그의 신학은 캘빈의 가르침을 그대로 전수 받은 것이었다. 여기에다 신앙의 실천을 강화했을 뿐이다. 그는 성경의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기를 원했다. 그로부터 말하는 법이나 글쓰는 법, 그리고 '지혜롭게 경건하게' 조용히 있는 법을 찾아냈다. 주일을 불필요한 여행이나 장사하는 것, 노동, 운동, 잔치 같은 일들을 위해 사용해서는 안 되었다.

또한 그는 경건한 삶과 기도, 금식, 찬양, 성례, 병자 방문, 자비, 절제, 자유 등에 관해서도 가르쳤다. 이 덕목들은 청교도들이 열심히 실천했던 것들이다.

이 모두는 성경의 법대로 해야 하며 성령에 의지해서 신자의 완전한 목표로 조금씩 자신을 훈련시켜야 했다. 신자들은 순결한 삶과 영원한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금 사슬에 매인 이들이었다.

리처드 로저스는 진실한 신자들을 위해서 '매일 할 일'의 목록을 요약해서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매일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에 비추어 자신의 삶을 살펴보고 죄를 회개할 것,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약속하신 사죄의 소망을 확신할 것, 매일 우리의 마음이 주 만을 찾을 것, 매일 자신을 악에 대해 무장하고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께 반항할 것을 두려워할 것, 매일 주를 두려워하고 사랑하며 다른 무엇보다도 주를 즐거워하고 그를 기쁘게 하기 위해 살며 그의 재림을 대망할 것, 더 많은 은혜를 사모할 것, 이 모든 것을 끝까지 유지하기 위해 경건히 하고 기도할 것, 매일 하나님과 화목하는 속에 일어나고 누울 것 등, 이 계약 신앙은 청교도들에게 하나 외에는 아무것도 원치 않는 신앙을 가져다주었다. 그리고 이 생활을 기뻐했다.

(4) 계약의 실천

뉴잉글랜드는 청교도들의 땅이었다. 이들은 성경 그대로의 나라를 건설해 보겠다는 뜨거운 의욕을 표현하였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새로운 땅을 종교개혁의 시대까지 감추어 두셨다가 하나님의 도성을 세우도록 사명을 주셔서 보내셨던 것으로 확신하였다. 그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여호수아와 그의 백성들로서 '구세주의 나라'(The Redeemer Nation)를 건설하게 되어 있었다.

이외에도 몇 가지의 신앙적인 확신들이 계약 신학으로부터 흘러나왔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명시된 운명'(manifest destiny)이 주어졌다고 믿었다. 그것은 신대륙에 '산 위의 마을'을 건설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 지배하는 의로운 나라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 일을 위해서 청교도들은 하나님의 '심부름하는 아이들'로 보내어졌다. 이러한 주제들이 계약의 핵심이었다. 이일을 위해서 총독은 진실한 신자로서 성직자 못지않은 신앙과 학문 그리고 인격을 가졌다. 또한 목사들도 총독 못지않은 권력을 가졌다. 목사들은 모든 면에서 사람들의 지도자였다.

만약 주일 성수 하지 않고 못된 짓 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대로에서 벌을 세우기 위해서 묶어놓을 수도 있었고 채찍을 가하도록 시킬 수도 있었다. 그야말로 신정 정치가 진행되는 중이었다.

청교도들은 신앙고백의 내용을 믿을 뿐 아니라 깨닫기도 해야 한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여기에 덧붙여 그 내용들을 행동에 옮겨 눈에 보이도록 선행이 나타나야 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것을 인간의 선행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의가 인간에 전가된 것이라 믿어야 가능했다. 이렇게 의롭게 된 다음에야 하나님은 힘을 공급해 선행을 하도록 도우신다. 하나님에게 복종하여 그분의 도움으로 선한 일을 하게 되는 것이 성화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신앙이 좋은지 안 좋은지 알 수 없었다. 또한 선행으로 얼마든지 자신을 선한 사람으로 속일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가장 선한 행동은 그리스도를 믿는 일이요. 그로부터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게 된다.

청교도들은 진실로 중생 하지 못한 사람을 밝혀내는 일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중생한 사람만이 택하여진 백성이요 하나님의 계약 속에 들어 있는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심은 교회에 온 사람들을 정식 교인으로 받아들이는 데 분명히 나타난다. 어떤 사람이 교인이 되고 싶으면 다른 교인들이 받아 주어야만 가능했다. 예배에 참석한다고 다 정식 교인으로 치는 것은 아니다. 청교도들은 절대로 아무나 교인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우선 교회를 세울 때에도 최소한 일곱 명의 발기인들이 서로의 신앙과 인격에 대해 만족하고 있어야 했다. 교인이 될 수 있는 기준은 중생의 체험과 기초적 교리에 관한 지식이었다. 일곱 이상의 발기인들은 이웃 교회의 목사와 지역 행정관들을 모셔 와서 자신들의 자격을 심사받아야 했다. 안 그러면 교인이 될 수 없었다. 어떤 사람이 교인이 되고자 할 때는 장로들 앞에 나와서 자신의 신앙적 지식과 체험을 시험받아야 했다. 신앙 지식이 빈약한 자, 중생하지 못한 자, 또는 문제아는 여기에서 일단 걸러졌다. 만약 시험에 통과되었다면 전체 교인들 앞에 소개된다. 그때 그 사람에 관한 문제점들을 교인들이 말하였고 지적당한 명백한 잘못은 공중 앞에서 회개하는 과정이 있었다. 여기까지 무사히 통과하면 몇 사람이 교회 앞에 이 사람을 교인으로 받아 줄 것을 요청하는데 약15분간 어떻게 믿게 되었는지를 간증한다. 그러면 여러 질문들이 따라 나온다. 그런 연후에 교인들이 좋게 생각하면 자신의 신앙을 대중 앞에 고백하고 교인들은 투표로써 그의 영입 여부를 결정한다. 통과되면 교회로부터 교인 됨을 공식적으로 통고 받았다.

어렵게 교인이 된 만큼 이들은 택해진 백성으로서의 분명한 긍지가 있었다. 이들은 주일 성수하고 십일조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마을을 떠나야 했다. 예배에 참석하기 위해서 가장은 가족 전체를 마차에 태우고 수 십리 길을 달려갔다. 설교는 보통 서너 시간씩 계속되는 성경을 강연하였다. 아이들도 어른들과 함께 설교를 들었다. 예배 후에는 돌아가는 길에 가장은 가족에게 목사의 설교를 정리해 주었다.


(5) 청교도들의 생활과 의식

Puritans는 교육자 양성을 위해 1636년 하버드 대학을 설립하였다. 근본적인 그들의 교육 목적은 일반 신도들의 교리 이해와 종교적 원리, 그리고 사회적인 규율간의 적절한 조화였으며 이는 미국 교육의 기초가 되었고, 1642년에는 세금으로 운영되는 교육을 최초로 실시하였다. 청교도 사회에서는 이상적인 공동체 건설에 방해되는 일들은 엄격히 금지되었으며 각 가정에서 책임지는 사람은 아버지로서, 부권 위주의 가부장적 사회였다.

청교도들의 공공 생활 중심부는 읍민회(Town meeting)였으며 이 읍민회는 교육과 정치적인 활동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었다. 어린아이들의 교육은 물론, 정치적인 결정을 내리는 사람의 임명까지도 읍민회가 담당하였던 것이다.

청교도 사회에서의 목사의 위치는 가히 절대적이었다. 청교도 사회는 성서가 지배했고 성경의 설교 다음으로 설득력 있는 권위는 바로 목사의 설교였던 것이다. 정치적인 대표자 역시 종교적으로 거듭난 경험이 있는 사람들에게만 국한되었으며 교회와의 계약에 충실해야 했다. 즉 제정일치의 사회였으며 전체 공동체의 이익과 이상을 우선으로 삼았고 개인의 야망과 성취에 앞서 이웃의 불행을 걱정하였다. 이는 미국의 다른 식민지의 지배적 성향인 개인주의적 미덕과는 사뭇 다른 양상이었다.

  

6. 청교도들의 사회활동

(1) 사회 참여는 그리스도인의 소명이다.

 청교도들은 자연스럽게 사회에 참여했다. 그들은 사회를 이 땅에서 일구어야 할 삶을 위해 하나님이 허락하신 질서의 한 부분이라고 여겼다. 소명 사상은 청교도들에게 너무도 중요하고 중심이 되는 사상이므로 정치 또한 소명에서 예외가 되지 않는다.

청교도들은 기독교 사회에 대한 이상을 가지고 모든 문화 영역에 참여했다. 이런 목적에 동원되는 수단은 청교도들마다 조금씩 달라질 수 있었으나 목적 그 자체는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초기 영국 청교도인 토머스 카트라이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국가를 교회처럼 세워야 한다. 즉, 기독교적 원리 위에 세워야 하는 것이다 … 교회가 세상의 기초이므로 이 기초 위에 세운 국가는 교회를 세우는 원리에 따라 구성됨이 마땅하다”


미국인 존 바나드(John Barnnrd)는 “정부의 궁극적이고 지고한 목적은 모든 인생들이 지닌 최후의 목적, 또한 모든 행위가 산출하고자 하는 목적과 동일하다. 그것은 만사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2) 공동선을 추구함

 청교도들은 사회의 결집력이 정부 구조에 달려있다고 보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정부의 행정력이야 어떻든지 공동체의 기풍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그들은 공동체 기풍을 형성하는 본질적인 구성 요소로 이기심과 공동 관심사를 꼽았다.


 윌리엄 틴데일은 이렇게 말했다. “이웃이라는 말은 사랑이라는 말과 똑같은 말이다. 이 말은 도움이 필요할 때면 언제나 민첩하게 손을 내밀어 준다는 뜻도 된다” 리처드 시브즈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상 우리는 우리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 산다.”라고 말했다. 바람직한 사회는 각자가 서로에게 아주 가깝게 밀착된 나머지 강할 때나 약할 때 또 즐거울 때나 고통스러울 때 서로서로 짐을 져주는 사회이다.


 존 윈스롭은 “자선의 한 모형”(A Model of Christian Charity)이라는 설교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모든 개인은 공공의 안녕을 최우선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공공이 무너지고 쇠락한 연후에는 어떤 개인도 보전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마치 한 사람인 양 이 일을 중심으로 뭉쳐야 합니다. 우리는 끈끈한 형제애로 서로를 즐겁게 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온유하고 자상하며, 참을 성 있고 화기애애한 가운데 친밀한 공동체 정신을 유지해 나가야 합니다. 우리는 서로를 용인하고 남의 처지를 내 처지로 생각해야 합니다. 서로 즐거워하고 서로 슬픔을 나누며, 함께 일하고 함께 고생해야 합니다. 우리 눈앞에는 언제나 우리가 완수해야 할 사명과 활력 있는 공동체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공동체는 한 몸 한 지체이므로 화평의 연대로써 정신적 통일을 유지해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고 우리와 기쁘게 함께 하실 것입니다”


청교도들이 이런 사회정신을 부추길 수 있는 동기로서 순전히 개인적인 이익보다 공공 또는 공동선을 더 의식하는 자세를 손꼽았다. 윌리어 퍼킨즈는 “공동선이 아니라 사욕(私慾)과 사리(私利) 만을 따르는 사람은 누구든 자기의 소명을 소홀히 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나만 위해야 한다 하면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신다 하는 사람은 그야말로 사악한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리차드 백스터는 “신성한 국가는 공동선과 하나님의 영광과 기쁨을 위해 만사가 처리되는 곳”이라고 했다.

존 코든은 자립하기 위하여 떠나는 개척자를 향하여 “가시오, 모두 가시오. 공동 정신을 가지고 가시오. 자기 것만 보지 말고 다른 사람의 것도 보시오”라고 권면했다. 이런 공동체 정신의 개념은 매우 도덕적이며 서로를 돌아보라는 신약 서신서들의 권면과 성도들을 한 몸으로 비유하는 바울의 은유뿐 아니라, 구약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에 뿌리를 두고 있음이 분명하다.

윌리엄 퍼킨즈는 “우리는 가정을 유지하기 위해서 일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떻든 인생의 진정한 목적은 사람을 섬김으로써 하나님을 섬기는데 있다”라고 말했다.


(3) 청교도들이 벌인 사회 활동

 당시 모든 시민 활동, 정치적인 실력 행사, 또는 어떤 소명을 이루려는 집합적인 노력 등은 가난한 사람을 위하는데 큰 목적을 두고 있다.

 실제로 청교도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하여 무슨 일을 했는가? 성공회 사제인 랜슬롯 앤드류스(Lancelot Andrewes)는 “1588년 런던에 있는 칼빈교도 망명자 교회들이 선행에 지극히 힘을 씀으로 교인 중 길거리에 나와 구걸하는 가난한 신도가 하나도 없을 정도였다. 그들은 감독관청인 런던시조차도 이런 일을 흉내 낼 수 없다”고 했다.


 조르단(W.K.Jordan)은 “1480~1660년 사이 영국은 인간의 영적 필요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민감한 반면 가난, 비참, 그리고 무지에 대해서는 선심 몇몇 개인이 재물을 희사했을 뿐 인색하고 대단히 비생산적인 관심만을 보인 증세를 보였다고 했다. 그는 ”기부자의 대다수는 청교도들이었다. 그리고 자발적인 자선이 증가한 배후에 자리 잡은 추인(推引)의 하나는 청교도 윤리의 출현이었다.“라고 말했다.


사무엘 워드는 “체덜톤(Chadderton)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저렇듯 가식 아닌 진실한 동정을 베푸는 사람”이라고 평가했으며, 존 폭스(John Foxe)는 존 후퍼의 집에 방문한 소감을 “성찬이 마련되어 있고, 거지와 가난한 사람들이 바글거리는 식탁”이라고 술회했는데, 나중에 보니 후퍼는 정기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불러 배불리 먹이는 일을 하였다고 했다. 리차드 그린햄은 가난한 사람들이 어려운 때 싼 곡물을 살 수 있게 하기 위하여 교구민들이 집단으로 구매하는 계획을 추진하기도 했다.

청교도들은 실업자들에게도 동일한 관심을 보였다. 청교도 이상 사회주의자인 사무엘 하틀립(Samuel Hartlib)은 구제불능의 게으름과 피치 못할 실업과는 정확하게 구분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소외당한 가난한 사람들은 가뭄에 지친 농토가 단비를 기다리듯 개혁을 기다리고 있다…의회는 사람들을 가난에서 구제하기 위한 수단과 방법을 시급히 강구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청교도들은 사회 부조리 척결을 위한 시민 행동을 장려했다. 그들은 터무니없는 가격에 대하여 행동을 취하였다. 1673년 뉴잉글랜드의 청교도 유리언 오크츠(Urian Oakes)는 “가난한 자들의 얼굴을 쥐어뜯고 비틀며 문지르는” 부자들의 비리를 과감하게 지적했다.

영국에서는 리차드 백스터가 사회 전반에서 자행되는 경제적 학대에 대하여 우려를 나타내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해서는 안 될 사업 관행에는 과다 가격, 과대 포장, 결함 은폐, 바가지요금, 다른 사람들의 시급한 필요를 이용한 야비한 장사 등이 있다고 했다.


(4) 사회 활동의 도덕적, 신학적 기초

 청교도들의 사회 활동은 기독교 도덕의식에 뿌리박은 것이었다.

백스터는 “진정한 도덕성, 또는 기독교 윤리야말로 그리스도의 영이 불러 일으켜 주시는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다. 이런 사랑은 믿음을 통하여 경건하고 공의로우며 선량하고 인내하는 모양으로 드러나고 나타난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지고 있는 빚, 곧 보편 애를 잃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말했다.


 청교도들이 사회 참여를 주장한 배경에는 신학적인 이유도 있다. 구원을 확고하게 보장받는 수단으로서 선행을 생각한 카톨릭과는 달리 청교도들은 중생으로 말미암아 사회적인 관심을 갖게 된다고 보았다. 진정한 경건은 선행을 낳는데, 이는 감사의 표현이지 결코 공적이 아니었다.


(5) 제도화한 사회 활동보다는 개인적인 사회 활동을 선호함

 청교도를 현대 집체적 체제와 비교하면 단연 개인주의가 돋보인다. 16세기 사상가들은 국가에 그런 기대를 걸지 않았다. 올바른 체제만 가지고는 아무도 구원할 수 없다. 물론 올바른 체제가 있어야 하지만, 개인의 협조와 개인의 책임이 반드시 뒤따라야 한다.


 청교도들은 무차별적인 자선을 반대하고, 정말 도와야 할 필요가 있는 사람에게만 도움이 주어져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윌리엄 퍼킨즈는 거지와 부랑자들에 대하여 “그들이야말로 저주받은 세대요, 교회와 국가에 병폐이며 독소이다. 일할 수 있는 사람의 구걸을 막는 법은 하나님의 법에 일치하는 좋은 법이다.”라고 말했다.

크리스토퍼 힐은 “무차별적인 자선은 사회적인 해악일 뿐이다. 이렇게 하면 가난한 사람들이 자신의 책임을 절감하지 못하고 절박하게 일자리를 찾지 않는다.” 그래서 많은 청교도들은 교회가 가난한 교구민들을 돌보는 방법을 선호했다. 교구에서라면 정말 도움을 입어야 할 사람과 눈속임으로 어려운 체하는 사람을 잘 구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청교도들이 대안으로 택한 구제 방법은 사람들에게 일을 독려하고 그들이 사회의 생산적인 성원이 되도록 고무하는 것이었다.


청교도들은 몸담고 사는 사회의 질을 진심으로 염려했다. 인크리스매더는 성경의 목적은 우리에게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고, 우리가 사는 세대를 섬겨야 할지를 보여주는데 있다고 하는 말로 청교도들의 관점을 요약했다. ‘자기가 사는 세대를 섬긴다.’는 이 구호는 이 세상을 믿음으로 살아가려는 그리스도인들이 언제나 붙드는 구호이다.


(6) 사람 위에 사람 없다 : 평등주의적 경향

 청교도의 개인주의의 신학 근거는 모든 신자가 제사장이라는 교리이다. 모든 사람을 하나님 앞에서 동등하게 대접하고 모든 개인의 중요함을 보호하려는 청교도들의 균형을 이루는 노력에서도 이러한 개인주의가 발견된다.

“그리스도인은 아무리 비천한 사람이라도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왕국에서는 왕의 형제인 양, 왕의 혈족인 양 대우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아무리 왕이라도 그렇게 비천한 사람을 섬기기에는 자신이 너무 고결하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 William Tyndale

 “그리스도 안에서는 아무리 지체가 낮은 농부라 하더라도 지체높은 귀족과 다를 바 없다” - Hugh Latimer

 "누구든 명문 세도가(勢道家) 출신임을 자랑해서는 안 된다. 오로지 어두움의 왕국에서 옮긴 사실을 감격하는 마음만이 있을 뿐이다. - William Perkins

   "통치자를 위해 인민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인민을 위해 통치자가 있다“ - Samuel Willard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닮은 제사장으로 세움을 입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 사이에는 성직자니 평신도니 하는 구분이 있을 수 없다. 오직 목회자는 그리스도인들이 선출한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교회의 동의 없이는 목회자들에게는 이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할 권리도 권한도 없다“ - William Dell

  존 벤브리그(John Benbrigge)에 따르면 진정한 회심의 표지는 “그리스도 안에서 부요한, 가난한 사람들을 대접하는 것이다” 그리고 가난한 그리스도인들 앞에서 세상의 부를 자랑하는 사람들을 꾸짖었다.

  청교도들은 외형적인 문제보다 영적인 데 우선권을 둠으로써 단지 혈통 또는 지위에 근거를 둔 특권을 경시하는 풍조를 열었다. 이런 태도에는 만인 제사장설이 뒷받침되었다.



7. 청교도들의 가정과 교육

 청교도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다스림을 받는 가정을 만들기 위해서는 가정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우선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가정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최초의 창조질서로 보았다. 가정제도는 교회가 존재하기 전에 있었고, 국가제도가 생기기전에 있었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가정의 개혁은 그 어떤 창조의 질서의 개혁보다 우선한다고 보았다.

 청교도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이 다스리는 가정을 만들기 위하여 가정의 시초가 되는 부부관계의 정립이 우선적으로 요청된다고 보았다. 그러면 청교도들의 의중에 있던 가정이란 무엇인지 대표적인 청교도요 케임브리지  대학의 교수였던 윌리엄 퍼킨즈(William Perkins)를 중심으로 몇 가지 살펴보자.

 (1) 가정의 기원

  윌리엄 퍼킨즈는 [기독교인의  가정](Christian Oeconomy)이라는 책에서 가정은 죄와 상관없이 시작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가정이 죄와 상관없이 시작되었다는 말은 결혼제도는 어떠한 제도보다도 신성하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청교도들은 모든 사람은 결혼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로마 천주교회는 경건을 핑계로 성직자의 결혼을 금하고 있다. 그들은 주장하기를 부부생활은 성직자들이 추구해야 할 금욕을 깨는 것이며, 금욕을 깨는 것은 바로 죄라고 한다. 이와 같은 성직자의 독신사상은 성경의 교훈을 오해한데서 비롯된 것이다.

  성경은 가정의 기원이 인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나왔다고 선언한다(창 2:18). 곧 아담이 여자를 그리워하여 가정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담을 위하여 가정을 세운 것이다. 하나님은 에덴동산에서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신 후 그의 갈빗대로부터 하와를 만드신 후 두 사람의 결혼을 주례하셨다.

주례사로 하나님은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 1:28)라고 말씀하셨고, {생육하며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 1:28)고 축복하셨다.

그러므로 청교도들은 성직자의 독신을 강조함은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는] [양심이 화인 맞은 자들]의 외식(딤전 4:1-2)일  뿐이라고 주장하면서, 모든 사람은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에 순응하기 위하여 가정을 이루어야 한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임박한 환란을 인하여](고전  7:26) 홀로 지낼 수는 있으나 독신주의는 성경적 교훈이 아니기 때문이다.

(2) 가정생활의 원리

  청교도들은 에덴동산에서의 첫 번째 가정은 모든 인간의 모범이 된다고 주장하였다.

에덴에서의 가정은 아가페적인 사랑에 기초하였다. 왜냐하면 아담이 하와를 보고,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내 살 중의 살}이라고 고백하고 있기 때문이다(창 2:23).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이라는 말은 최상급의 사랑고백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최초의 가정은 지고한 사랑고백 위에 세워졌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성경 교리에  근거하여 청교도들은 가정의 기초는 바로 사랑이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사랑을 유지하는 방편으로 하나님은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라는 가정생활의 원리를 주셨다(창2:24). 이 말씀은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는 남자가 부모를 떠나는 것이요, 둘째는 아내와 연합하는 것이요, 세째는 한 몸을 이루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부모를 떠난다]는 것은 남자가 부모로부터 공간적으로 떠나 분가하여 살라는 말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경제적으로 독립할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연합하라]는 말은 의견의 일치를 보라는 말이다. 20년 또는 30년 간 각기 다른 환경에서 자라온 사람들이 어떻게 의견의 일치를 볼 수 있나? 그것은 반 푼이 됨으로 가능하다. 자신의 의견을 50%만을 내세우고 상대방의 의견을 받아들이는데서 하나가 될 수 있다.

그리고 [한 몸을 이루라]는 말은 육체적으로 하나가 될 것을 시사한다.


(3) 결혼의 목적

 이와 같이 청교도들은 가정의 기원, 가정생활의 원리를 제시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다스리는 행복한 가정은 바로 가정을 세우신 목적을 아는데서 시작된다고 보았다.

하나님이 가정을 세우신 1차 적인 목적은 종족의 보존에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류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명령하고 있기 때문이다(창 1:28). 결혼의 원칙적인 목적은 거룩한 자녀를 두기 위함에 있다(말 2:15). 그러면  자녀를 두지 못하는 결혼은 잘못된 결혼인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자녀들은 결혼으로 반드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이다(시 127:3). 그러므로 결혼의 궁극적인 목적을 단지 자녀의 생산에 두는 로마 천주교도들의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성경에서 제시하는 결혼의 다른 목적은 음란을 방지하는데 있다. 성경은 인간들에게 음란을 방지하기 위하여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고 하였다(고전 7:1-2).

그러나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결혼제도를 세우신 궁극적인 목적은 서로 [돕는 배필]이 되는데 있다(창 2:18). 하와를 지으신 목적은 [돕는 배필]이 되게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퍼킨즈는 남편과 아내는 서로 도와 하나님이 각자에게 주신 소명을 이루어 나아가야 한다고 하였다. 하나님이 주신 소명을 이루어 가는 그 때에 하나님의 나라, 곧 말씀과 성령이 다스리는 가정이 이루어지며 가정의 개혁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4) 청교도의 자녀교육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이 넘치는 행복한 가정은 부부의 관계만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부모와 자녀가 함께 하나님을 섬기는 가운데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청교도들은 행복한 가정을 이루기 위해서는 자녀를 말씀에 근거하여 양육할 것을 주장하였다. 자녀를 양육하는데 있어서의 부모의 역할은 자녀의 양육에 필요한 물질을 공급해 주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청교도들은 물질적인 것 이상으로 영적인  양식을 공급하는 것이야말로 부모의 의무라고 주장하였다.


1) 교육의 궁극적 목표

  청교도들은 인간을 죄악 덩어리라고 믿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죄악 가운데 태어나며, 죄악 가운데 생활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목사 또는 장로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나지 않고는 천국의 보화를 상속할 수 없다. 이와 같이 어떤 아이가 목사의 자녀 또는 믿는 집안에서 태어나 은혜 계약 아래 있다고 하더라도 영적인 교육을 받지 않고는 지옥의 고통을 벗어날 수 없다. 자녀들을 지옥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 청교도들은 현세적인 교육보다는 영적인 교육을 우선 시 하였다.


  청교도들에게 교육의 목적은 하나님과 성경을 아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교육의 과제를 이 세상에서 출세하는 것보다는 성경을 가르치는 일을 우선적인 과제로 생각하였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뉴잉글랜드 보스톤의 목회자 존 놀튼(John Norton)은 말하기를 {부모가 자녀들의 영적인 성장과 축복을 누리는데 관심을 가지는 것보다도 세상적인 성공만을 바라는 것은 신발에만 관심을 갖고 발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 것과 같다}고 지적하였다. 사실상 우리가 우리의 자녀를 세상적인 일에 출세하는 것을 교육할 때 그 부분에서는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이 교육의 전부는 아니다.

이점에서 하바드 대학이 좌경화 할 때에 예일 대학교(Yale College)를 세운바 있는 코튼 매더(Cotton Mather)의 지적은 옳다고 할 수 있다. 매더는 지적하기를 {만일 당신 자녀에 대한 당신의 관심이 단지 현세적인 부귀와 영화라면 당신은 이 세상만을 위하여 사는 자녀를 만들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자녀를 이 세상만을 위하여 살아가게 한다면 당신과 당신 자녀의 몫은 이 세상 밖에 기대할 것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청교도들이 이와 같이 영적인 교육을 강조한 것은 인간은 누구나 성경과 구원에 대해 무지하게 태어나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성경적인 교육을 받지 않고는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그리고 그가 행하신 일이 무엇인지, 성령께서는 무엇을 행하시는지를 전혀 알지 못하는 가운데 살아간다. 따라서 그들은 영적인 무지 가운데 살 수 밖에 없으며 천국과 지옥이 무엇인지 모르는 채 짐승과 같이 본능을 따라 살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영적인 교육 없이는 비록 목사의 자녀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죄 성을 따라 살아가는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진노가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2) 세상 지식과 하나님의 나라

  그러면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나? 영적인 변화를 받아야한다. 곧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는 체험을 통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있다. 거듭남의 체험은 어떻게 가능한가? 거듭남의 체험은 인간의 수행이나 세상적인 많은 지식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접함으로 가능하다. 왜냐하면 거듭남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이루어지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은 들음에서 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코튼 매더는 말하기를 {세상적인 지식이 없어도 하늘나라에 갈 수 있으나 기독교에 대한 지식이 없이는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청교도들은 그들의 자녀를 먼저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하고자 하였다.

뉴잉글랜드의 대표적인 청교도 설교자였던 존 코튼(John Cotton)은 맹목적으로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라}하지 않고,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글을 가르치라}고 하였다. 다른 말로 한다면 자녀를 교육하는 목적은 성경을 읽게 하는데  있다는 것이다.

또한  벤쟈민 워드워스(Benjamin Wordwrth)는 {만일 귀하의 자녀가 글을  읽을 수 없다면 글을 가르치시요. 그러나 글을 읽을 수 있다면 성경을 읽지 않고 하루가 지나가지 않게 하시요}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청교도들은 자녀 교육의 궁극적인 목적을 신앙교육에 두었다.


  청교도들에게 자녀들을 영적으로 교육하는 것은 부모의 가장 큰 의무였다. 만일 자녀를 영적으로 교육하지 않을 때 언제인가 그들의 자녀는 그들을 저주할 날이 오게 될 것이라는 것이 청교도들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코튼 매더의 조부인 리차드 매더(Richard  Mather)는 다음과 같이 설교하였다. “언제인가 우리가 우리의  자녀를 신앙으로 양육하는 것을 우선시하지 않고 차선으로 할 때 자녀들이 지옥에서 부르짖기를 {내가 받는 지옥의 고통은 모두 부모님 때문입니다. 당신들은 내게 기독교에 대한 진리를 알려주어야만 하였습니다. 그러나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당신들은 나를 죄와 악으로부터 멀리 하여야만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당신들의 죄와 죄 값이 내게 전가되어 왔지만 당신들은 그것들로부터 나를 구원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죄 가운데 살아가는 나를 보고도 당신들이 침묵하였기 때문에 나는 죄 가운데 살았고, 그 죄로 인하여 지옥의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화로다 나여! 세상 적이고 생각이 모자란 부모를 두었던 나여! ”


 3) 정기적인 교육과 수시 교육

  자녀들을 영적으로 교육하기 위하여 청교도들은 자녀들을 수시로 또는 정기적으로 교육하였다. 청교도들은 앉았을 때나 서 있을 때, 길을 걸을 때, 옷을 입을 때나 벗을 때, 아침이나 저녁을 막론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그들의 자녀들을 수시로 교육하였다. 또한 그들은 정기적으로 자녀들에게 말씀을 교육하였는데, 주로 가장의 책임 아래 이루어졌다. 청교도들은 아침과 저녁으로 가정 예배를 드리면서 가장은 가정예배를 통하여 그의 자녀들에게 정기적인 신앙교육을 실시하였다. 또한 매주일에 한 번씩 모든 식구를 불러 모아 요리문답서를 교육하는 것도 등한시하지 않았다. 기독교 교리의 핵심을 다루고 있는 요리문답 교육은 루터와 칼빈 이후 기독교교육으로 크게 활용되었는데, 대부분의 영국과 뉴잉글랜드의 청교도 목사들은 요리문답서를 작성하여 자신의 교회에서 사용하곤 하였다.

또한 피터 벌클리(Peter Bulkely)가 {어린아이는 입이 좁은 병과 같아서 조금씩 하나님의 말씀을 불어넣으면 그리스도의 충만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자랄 수 있다}고 말한 것처럼, 청교도들은 시간이 허용하는 대로 자녀에게  조금씩 말씀을 주입하므로 그리스도의 신실한 백성으로 양육코자 하였다.


4) 자녀 교육과 매

  자녀가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날 때 매를 사용하는 것이 옳은가 아니면 그릇된 것인가 하는 문제는 현대교육에서 다루어지는 주제 가운데 하나이다. 인문주의적 교육의 영향을 받은 현대인들은 자녀에게 매를 대는 것은  비교육적이며 비인간적이라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이론에 근거하여 요즈음  미국에서는 부모가 자녀에게 매를 대는 것을 가혹 행위로 정죄하며, 매를 댈  경우에 자녀 양육권을 몰수당하는 경우까지 있다. 그러면 성경은 매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성경은 자녀에게 매를 댈 것을 주장한다. 잠언  22:15절에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하느니라}고 하였고, 잠언 23:13-14절에는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치 말라 채찍으로 때릴지라도 죽지 아니하리라 그를 채찍으로 때리면 그 영혼을 음부에서 구원하리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청교도들은 자녀교육을 위하여 매를 사용하였다. 청교도들에 의하면  매는 말씀의 교육효과를 높여준다고 하였다.

코튼 매더는 {아이들로 저주 아래 있게 하는 것보다는 매를 대라}고 하였고, [인디안의 사도] 존 엘리어트(John Eliot)는 말하기를 {매는 아이의 부패한 심령을 고친다}고 하였다.

 물론 청교도들이 매를 사용할 것을 제안한 것은 인격적인 설득과 사랑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청교도들이 매를 사용하는 데는 교양과 훈계(엡 6:4)와  사랑(히 12:8-10)을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사랑의 동기가 아닌  징계, 곧 과격한 체벌은 엄격히 규제되었다. 왜냐하면 매는 아이의 감정이나 육체를 상하게 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영혼을 죄에서 구원하는데 있기 때문이다.


(5) 청교도와 학교교육

  청교도들에게 학교교육의 주된 목적 역시 그들의 자녀들을 기독교인으로 만드는데 있었다. 뉴잉글랜드 청교도들의 학교 제도는 초등학교(Resding School), 중등학교(Grammar School), 그리고 대학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와 같은 학교체제에서 교육내용은 바로 기독교에 관한 것 뿐 이었다.

예를 들면 뉴잉글랜드의 청교도 자녀들이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영어를 배우게 되는데, 그때 교재로 사용하던 책이 바로 뉴잉글랜드 프라이머(New England Primer)이다. 이 책을 통하여 청교도 자녀들은 영어 알파벳의 A자를 배우면서 아담의 타락을 배웠다.

 곧 {아담의 타락 안에서 우리는 모두 죄를 범하였다}(In Adams fall, we sinned  all)는 교리를 배웠다. 그리고 초등학교를 졸업한 자는 중등학교에 진학하는데, 중등학교 과정을 통하여 그들은 성경적인 주제와 함께 기독교의  고전을 연구함으로 기독교인으로 세상을 어떻게 살 것인가를 배웠다. 그리고 대학에 들어가면 기독교 지도자로서 필요한 자질을 성경적 관점에서 배웠다.

 (6) 청교도와 주일학교 교육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자녀의 신앙교육을 교회에 주로 의존한다. 그러나 청교도들은 자녀의 신앙교육에서 교회교육이나 학교교육보다는 가정에서 신앙 교육을 우선으로 여겼다. 곧 청교도들은 가정교육과 학교교육을 근거로 하여 교회에서의 신앙교육을 실시하였다.

자녀의 영혼을 타인에게 맡기는 것보다는 부모 스스로가 우선적으로 책임지겠다는 것이  바로 청교도들의 생각이었다.  따라서 청교도들은 자녀들이 어렸을 때부터 가정에서 신앙으로 교육하였고 목사의 설교를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되면 장년 예배에 참석케 하여 설교를 듣게 하였다.

 설교말씀을 듣는 것보다 더 나은 신앙교육방법은 없었다. 따라서 부모들은 설교시간에 아이들이 설교를 이해하도록 도와주었고, 설교 말씀을 통하여 신앙적인 격려를 행하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예배가 끝나면 집에 돌아와, 가장은 자녀에게 설교시간에 무엇을 들었으며 얼마나 이해했는지 어려운 말씀은 없었나를 살핀 다음, 그들에게 들은 말씀을 설명하고 생활 가운데 실천하도록 하였다. 이와 같이 청교도들은 가정, 주일학교교육을 통하여 하나의 신실한 성도를 생산함으로 경건한 가정, 경건한 교회, 경건한 사회를 건설하고자 하였다.

 (7) 청교도와 가정예배

  청교도들의 신앙생활에서 특기할만한 것은 바로 가정예배의 실천이다. 영국 청교도들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한 바 있는 윌리엄 퍼킨즈(William Perkins)는 가정의 영적인 건강을 유지하기 위하여 하루 2번 이상의 가정예배를 드릴 것을 제안하였다. 퍼킨즈의 교훈을 따라 청교도들은 아침과 저녁으로 매일 2회 이상의 가정예배를 드리면서 경건을 실천하였다.

아침과 저녁에 온 식구가 모여 가정예배를 드리면서 청교도들은 아침예배 때에는 하루 동안 있게 될 일들을 위하여 기도하였고 저녁예배 때에는 하루 동안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기도를 드렸다. 즉 아침 기도시간에 가장은 가족의 모든 죄를 고백하면서 죄의 용서를 구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하는 예배를 드리면서 하루 동안 있게 될 일을 위하여 기도하였다. 아침 기도회가 끝나고 식사시간이 되면 두 번이나 기도하였다.  식사를  앞두고 음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릴뿐만 아니라 식사를 마치고 감사기도를 드렸다.


  청교도들에게 음식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음식이 필요하다는 것은 바로 인간이 음식 없이는 살 수 없고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 살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었다. 식사시간에 청교도들은 육적인 양식만이 아니라 영적인 양식도 주셔서 굶주리지 않기를 기도하였다. 식사 후 드리는 기도는 하나의 축도 형태로 {가족들이 식탁에서 떠나 세상으로 돌아감}으로 그들이 서 있는 곳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하도록 기도하였다.

저녁에 드리는 가정예배에서 청교도들은 인생의 모든 여정을 마치고 임종을 맞는 사람처럼 깊은 잠을 자기 전에 하루의 일과를 돌아봄으로 자기 성찰을 하는 시간으로 삼았다. 따라서 청교도들에게 저녁예배는 아침예배보다도 진지하였고, 늘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칭송이 있었다. 이와 같이 가정예배를 통하여 청교도들은 가정의 경건을 유지하였다.


  청교도들에게 무엇보다도 중요한 과제는 하나님의 나라의 실현이었다. 그들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고 하신 우리 주님의 말씀에 따라 이 세상에서의 성공보다는 그리스도의 나라에서 상 받기를 바라고 분투하였다.

그 결과로 청교도들은 영적으로나 육적으로도 엄청난 축복을 받았다. 비록 이  세상에서 행복을 누리는 것보다도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한 축복을 누리는 것을 우선시 하였지만, 그들은 세상적인 축복도 넘치도록 받았다.

 먼저 미국 10대 명문 대학 가운데 하나인 듀크대학의 교수 죠지 마스덴(George Marsden)의 연구보고에 의하면 제1차 세계대전 이전 미국의 정치, 문화, 경제계를 이끌어왔던 인물 가운데 8명 중 2명은 미국에 이민하여  온 다양한 인종들로서 그들은 바로 청교도의 후손이거나 청교도적인 신앙교육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또한 미국의 복음주의적인 목사 팀 라헤이의 글을 주의하여 보자. 라헤이는 {성령 충만한 가정의 비결}이라는 책에서 같은 시대 같은  장소에서 살았던 두 가정, 막스 쥬크스(Max Jukes)라는 사람의 가정과 죠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e)의 가정을 비교하고 있다.

쥬크스는 불신자로 불신자와 결혼하여 수많은 자녀를 두었다. 그의 자손 1천 26명을 연구한 결과 3백 명이 일찍 죽었고, 1백 명이 13년에 한 번 정도 교도소에 갔으며, 1백 90명은 창녀였고, 1백 명은 알콜 중독자였다. 결과적으로 쥬크스의 자손 가운데는 한 사람도 미국 사회에 공헌한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뉴잉글랜드의 청교도였던 죠나단 에드워즈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 기독교도와 결혼하였다. 그의 자손 7백 29명을 연구한 결과 3백여 명의 복음 전도자가 나왔고, 65명의 교수, 13명의  대학장, 60명의 작가와 3명의 국회의원, 그리고 1명의 부통령이 나왔다.





▣ 과 제 ▣

1. 청교도들의 언약사상에 대하여 약술하라

2. 청교도들의 7대 기준을 쓰라

3. 청교도들의 삶에 대하여 약술하라.

4. 청교도들은 무엇을 자신들의 의무로 삼았는가 쓰라

5. 청교도들의 신학사상을 약술하라.

6. 미국 청교도들의 성격을 약술하라.

7. 청교도들의 사회활동에 대한 사상과 활동을 약술하라.

8. 청교도들의 가정에 대한 사상을 약술하라.

9. 청교도들의 교육에 대하여 약술하라.




제6장 청교도의 설교


1. 청교도들의 목사 상

청교도 운동이 낳은 수많은 선언서 중 하나는 목사가 담당해야 할 큰 의무 세 가지를 ‘설교하고, 성례를 집전하며, 기도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윌리엄 퍼킨즈는  “진실한 목사는 두 가지 면에서 해석자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사람들에게 설교하는 일로 인해 하나님의 해석자이고, 사람들의 소원을 펼쳐놓고 그들의 죄를 고백하며, 사죄와 용서를 간구함으로 하나님 앞에서 사람들의 해석자이다”고 하였다.

 아더 힐더쉠(Arthur Hildersham)은 "목사가 해야 할 최우선이고 가장 중요한 책임은 말씀을 부지런히 전파함으로 양떼를 먹이는 일이다“라고 하였다.

 윌리엄 브래드쇼(William Bradshaw)는 청교도 운동을 당 시대에서 관찰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전한다. "그들은 목사가 지닌 가장 고상하고 지엄한 직임과 권위는 복음을 엄숙하고 공개적으로 회중에게 전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들이 생각한 복음 전파는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을 해석하고 권면과 견책으로 그들에게 그대로 적용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그 일이 그리스도와 그 분의 사도들이 행한 가장 위대한 일이었다고 보았다.”


2. 청교도의 유명 설교자들

1. 윌리암 퍼킨즈(William Perkins, 1558~1602)

2. 헨리 스미스 (Henry Smith. 1560~1591)

3. 토마스 테일러 (Thomas Taylor, 1576~1633)

4. 존 로저스 (John Rodgers, ?~1636)

5. 리챠드 십스 (Richard Sibbes, 1577~1635)

6. 리차드 백스터 (Richard Baxter, 1615~1691)

7. 제레마이어 버로우즈 (Jeremiah Burroughs, 1599~1646)

8. 토마스 맨튼 (Thomas Manton, 1620~1677)

9. 죤 오웬 (John Owen, 1616~1683)

10. 토마스 굳윈 (Thomas Goodwin, 1600~1680)

11. 크리스토퍼 러브 (Christopher Love, 1618~1651)

12. 토마스 브룩스 (Thomas Brooks, 1608~1680)

13. 윌리암 브리지 (William Bridger, 1600~1670)

14. 리차드 길핀 (Richard Gilpin, 1625~1700)

15. 매튜 로렌스 (Matthew Lawrence, 1600~1653)

16. 죠셉 시몬즈 (Joseph Symonds, ?~1652)

17. 죤 웰스 (John Wells, ?~1678)

18. 조나단 에즈워드(Jonathan Edwards, 1703-1758)

19. 찰스 스펄전(Charles Haddon Spurgeon, 1834-92)

20. 기타 : 존 카튼(John Cotton), 폴 베인(Paul Baine), 윌리암 고우지(William Gougw), 존 하웨(John Howe), 죤 프레스톤(John Preston), 토마스 왓슨(Thomas Watson), 힐더샴(Hildersham), 바이필드(Byfield), 세지윅(Sedgwick), 데이빗 크라슨(David Clarkson), 차르녹(Charnock)


3. 청교도 설교자들의 설교 특징

(1) 대중을 사로잡는 설교, 진한 감동

   당시 영국 성공회가 직면한 문제 중 하나는 설교를 따라 이리저리 쫓아다니는 평신도들이었다. 훌륭한 설교가 있는 곳에는 불원천리(不遠千里)하고 달려갔다. 훌륭한 설교를 들을 수 있는 그 곳에는 언제나 청교도 설교자가 있었다. 청교도의 설교가 인기 있었던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들이 설교에 대해 보였던 투철함에서 나온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설교는 듣는 것이 아니다. 설교는 우리를 하늘나라 아니면 지옥 근처로 데려간다.”고 한 존 프레스톤에게서 단적으로 찾아 볼 수 있다.


 존 코튼의 설교를 들은 어떤 사람은 이런 감사의 마음을 표현했다. “코튼 목사는 권위 있고, 능력 있게, 또 생명력 있게 설교하십니다. 그래서 그 분이 선지자나 사도의 말씀을 가지고 설교할 때면 그 분의 목소리가 아니라, 선지자 자신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아니, 제 마음 속에서 말씀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습니다.”


토마스 굳윈(Thomas Goodwin)은 죤 로저스의 설교를 이렇게 묘사한다. "그는 교인들에게 성경을 소흘히 하는 점에 대해서 훈계한다. 그런 다음 하나님의 역할을 맡아 그들에게 말한다. '에, 나는 너희들에게 오랫동안 성경을 맡겨 놓았다. 너희들은 그것을 경시하였다. 아무개아무개 집에는 온통 먼지와 거미 줄 투성이 인 채 방치되어 있다. 너희들은 그것을 들여다 볼 생각도 하지 않는다.... 에, 너희들은 더 이상 내 성경을 가질 수 없느니라.'

그는 성경을 강대상에서 집어 들고, 그것을 가져가려는 것 같이 한다. 그러나 즉시 되돌아서서 교인들의 역을 맡아 하나님께 말한다. 그는 무릎을 꿇고 부르짖으며 애원한다. '주여, 저희에게 무슨 일을 하셔도 좋습니다만 당신의 생명만은 가져가지 마십시오. 우리의 자녀들을 죽이고, 우리의 집을 불태우고, 우리의 재물을 진멸해 버리소서. 그러나 당신의 성경만은 우리에게 남겨 주십시오. 당신의 성경을 빼앗아가지 마소서.'

그런 다음 그는 다시 하나님의 역할을 한다. '음, 조금 더 너희들을 시험해 보겠다. 성경을 너희들에게 두노라. 너희들이 어떻게 사용하는지 내가 지켜볼 것이다. 그것을 더 사랑하는지, 더 귀하게 여기는지, 더 잘 지키는지, 더 잘 행하는지, 성경 말씀대로 더 잘 사는지를 지켜볼 터이다.' 그런 설교를 듣고 나면 사람들은 눈물바다가 되었다. 굳윈은 그 예배를 마치고 나와서 15분간 그의 말의 목을 붙잡고 울고 난 다음에야 말에 오를 기력을 회복하였다.


(2) 청교도의 지적 설교 충실

  영국 국교회 성직자들의 무지는 자연스럽게 평신도들의 무지를 낳았다. 조시아스 니콜라스(Josias Nicholsas)는 400명의 교구민 가운데 40명 미만이 ‘그리스도에 관해, 그 분의 인격과 사역에 관해, 죄가 어떻게 세상에 들어왔는지에 관해, 죄에 따르는 형벌이 무엇이고 무덤에서 썩은 우리 육체가 궁극적으로 어떻게 되는지에 관해’ 초보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음을 조사를 통해 알았다.

 설교에서 지적 깊이를 갈망하는 청교도들의 바람은 여러 모양으로 나타났다. 그 중 하나는 대학 교육을 받은 목사를 원하는 것이었다. 메사추세츠에 상륙한 지 불과 6년 만에 하버드 대학을 설립한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었다.


 성경해석 강연(prophesying)과 특별강연(lectureship)이라는 두 가지 독특한 제도 역시 지적인 설교 여부를 결정한다.

전자(엘리자베스 여왕 때에 이르러 폐지됨)는 설교 세미나 또는 설교의 질을 높이기 위한 일종의 연구 집회였다. 거기에는 한 지역 목사들이 참석했다. 목사들은 그 지역의 교회에 모여 사전에 합의한 본문에 관해 참가자 중 다섯 명이 설교를 하고 이어 강평회를 갖는 것이었다.

청교도들이 실시한 특별 강연은 평신도들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내용을 더 잘 파악하도록 돕는 방편이었다. 강사로 참가하는 사람들은 설교자 또는 평신도들에게 추앙받는 개인 연사였기 때문에 제도 교회의 직접적인 통제가 미치지 못하였다.


 청교도 설교 가들은 주도면밀하게 설교를 준비했다. ‘고민에 찬 설교’가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이상이었다. 그것은 자기 고민이 있고 세세한 부분에까지 신경을 쓰며, 면밀히 준비한 설교를 말한다. 미국 청교도들도 마찬가지였다. 존 엘리어트는 철저하게 연구한 설교가 아니면 가치 있게 보지 않았고, 깊은 연구를 하여 설교에서 어정쩡하게 넘어가는 대목을 만들지 않겠다고 굳게 결심했다.

 매더는 즉흥적으로 설교하기보다 설교요지를 요약해 적으면 더 충실하게 준비할 수 있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설교 요지를 요약해 적어야 하는 것은 우리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직무와 듣는 사람의 유익을 증진하기 위함이다.…간단한 원고라도 준비해서 설교 한 번 하기가 원고 없이 세 번 설교하기보다 훨씬 어렵다.” 고 하였다.


(3) 강해설교

청교도들은 교리와 신학을 떠받들었지만 특정 성경본문의 의미를 활짝 여는 강해설교를 절대적으로 지지했다. 윌리엄 에임즈는 “설교를 시작할 때 어떤 본문을 꺼내 청중들에게 던져 놓고는 금방 잊어버린다. 그리고는 이 말 저 말을 늘어놓거나 그 본문에서 아무 것도 캐내지 못하고 그저 거기서 맴돌고 마는 목사들이 있다” 고 하면서 “먼저 본문이 담고 있는 내용을 진술해야 한다. 본문이 담고 있는 진리를 개진할 때 목사는 먼저 이를 설명한 후 거기에 따르는 모범을 펼쳐 보여준다.”고 했다.

  웨스트민스터 총회는 공 예배 모범을 채택했는데 거기에 따르면 이렇다. “성경에서 가르침을 추출할 때 신중을 거듭해야 한다. 먼저 그것이 하나님의 진리인가를 살펴야 하고, 두 번째로 그 안에 진실이 배어 있는가, 그리고 회중이 그 가르침에서 하나님의 간섭을 어떻게 분별할 수 있는가를 조심스럽게 살펴야 하는 것이다.

 Millar Maculre는 청교도들의 성경적 설교 유형이 미친 영향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청교도들에게 설교는 단지 성경책에 달려 있지 않다. 조금 더 문자적으로 말하자면 하나님 말씀 안에 그들의 설교가 들어앉아 있다. 본문이 설교가 아니요 설교가 본문 안에 있는 것이다.…한 마디로 말해서 설교를 경청함은 곧 성경 안에 존재하는 상태를 말한다.”


(4) 설교의 짜임새(조직적)

  그들은 일반적으로 3부로 구성된 설교를 모델로 삼았다. 윌리엄 퍼킨즈의 “성경 해석의 실제”(The Art of Prophesying)에 청교도 설교 구성의 전형을 대할 수 있다.

    ① 정경의 한 부분을 선택해서 읽는다.

    ② 그렇게 읽음으로써 본문의 의미가 그것 자체만으로도 확연히 드러나게 한다.

    ③ 무리 없이 본문에서 추출할 수 있는 몇 가지 유익한 교리를 구성한다.

    ④ 설교자에게 그런 은사가 있다면 정확하게 구성한 교리들을 아주 쉽고 평이한 말로 생활과 인간사에 적용한다.


 본문 봉독을 합당한 설교를 위한 예비 과정으로 여긴다면 설교의 3부를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1) 본문의 표면적 의미를 포착한다.

(2) 그 본문에서 교리적 또는 도덕적 원리를 끄집어낸다.

(3) 이런 원리들이 그리스도인의 일상에서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가 제시한다.


 본문에서 교리를 추출해 내는 작업은 본문 분해이다. 청교도들은 본문에서 교리를 발견했을 뿐 아니라 각 교리들이 ‘모범과 성경의 증거, 그리고… 성경에 뿌리를 박은 건강한 추론의 힘에 의하여’ 보강되어야한다고 느꼈다. 이같이 증거와 추론을 중시하는 목적은 특정 본문에서 추출한 교리가 배경을 이루는 성경 전체의 지지를 받음을 확증하기 위함이었다.


 페리 밀러(Perry Miller)는 청교도 설교의 이상을 이렇게 요약한다. “청교도는 본문을 낭독하고 가능한 한 간략하게 그 내용을 드러낸다. 다시 말해서 본문의 정황과 문맥을 밝히고 문법적 의미를 설명한 후 난해한 비유와 사유(思惟)를 쉬운 문장으로 풀고 거기에 들어있는 논리적 의미를 물위로 끌어  올린다. 그런 다음 평이하고 서술적인 문장으로 본문에 담겨 있거나 거기서 논리적으로 연역할 수 있는 교리를 선포한 후에, 첫 번째 근거 또는 증거로 나아간다. 추론은 추론으로 이어진다. 이 때 한 번에 한 가지씩 추론해 나가야 함을 잊지 않는다. 마지막 증거를 제시한 후에는 구체적인 사용 또는 적용을 시도한다. 이 때에도 순서 있게 해야 함은 물론이다. 더 이상 언급해야 할 내용이 없을 때 설교를 마친다.”


(5) 교리(신학적) 적용

  청교도 설교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특징 가운데 하나가 있다면, 교리를 생활에 적용해야 한다고 역설한 점이다. 청교도들은 매우 실천적인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성경 진리에서 하루하루의 삶으로 이르는 다리를 놓지 않는 한 교리란 생명력이 없는 문구에 지나지 않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제임스 더럼(James Durham)은 “설교의 꽃은 적용이다. 심오한 진리를 펼쳐 열어 보이는데 요구되는 것만큼이나, 진리의 요점을 회중의 양심에 적용하고 역설하는 데에도 연구, 기술 연마, 지혜, 권위와 평이함이 꼭 필요하다. 따라서 목사들은 이 둘 다를 깊이 연구해야 한다.… 아마 이런 까닭에 설교를 설득, 간증, 간청, 탄원 또는 요청, 권면 등등으로 부르지 않나 생각한다. 그런데 이런 요소들은 모두 적용 부분에 들어간다.”고 하였다.


  적용은 설교자 뿐 아니라 회중에게 떠맡긴 책임이기도 했다. 토마스 맨톤(Thomas Manton)은 “말씀을 행하는 사람이 가장 잘 듣는 회중이다”라고 말했다.


  퍼킨즈는 그의 책 ‘성경 해석의 실제’에서 회중의 상태에 따라 적용방법을 일곱 가지 범주로 나누었다.

① 무지하고 가르치기 힘 든 불신자

② 배우려고는 하지만 무지한 자

③ 지식은 조금 있으나 오만 불손한 자

④ 겸손한 자

⑤ 믿는 자

⑥ 타락한 자

⑦ 이런 저런 요소를 고루 가지고 있는 자이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했다. “실천을 이끌어 내는 지식이 가장 고상한 지식이다. 회중의 삶이 설교자에게는 상급이다.”


(6) 살아 꿈틀거리는 설교

 청교도들은 설교에서 지적인 요소를 무척 강조했지만 이런 이지적 이해가 마음과 의지에 뜨겁게 호소하는 힘과 잘 조화를 이루었다. 그들의 설교는 살아 꿈틀거렸다. 백스터는 이 점에 대하여 정연한 이론을 펼친다. “설교가 듣는 이의 마음을 건 들어 주지 않는 한, 사람은 고분고분 자기가 아는 진리를 따라 살려하지 않는다. 思辨(사변)이 열정을 짓누르고 있는 한, 설교가 선사하는 단 맛을 맛볼 수도 없다. 이해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고로 이해로 모든 면은 다 가름할 수는 없다. 지식은 진리를 담고 있어야 하고, 진리로 하여금 의지를 움직일 준비를 시켜야 한다. 또한 진리를 받아서 열정에게 위임해야 한다. 사실 열정은 영혼을 떠받치는 低邊(저변)이다.”


 리처드 매더는 “사람들의 머리가 아니라 마음과 양심을 향해 화살을 쏜 사람”이라는 말을 들었다.

토마스 카드라이트는 “넘실대는 불길이 온기를 전해주듯이 설교가 불붙인 하나님의 말씀은 듣는 이의 가슴에 뜨거운 불을 지른다.”고 말했다.

백스터는 “당신의 말이 칼날같이 날카롭지 않다면 못처럼 단박에 찔러 꿰뚫을 수 없다면, 돌 같은 마음을 움직이기 힘들 것이다.”라고 말했다.


 청교도 관습을 보면 회중들이 대단히 적극적이었음을 충분히 엿볼 수 있다. 청교도 교육가인 존 브린슬리(John Brinsley)는 이렇게 충고했다. “안식일이나 다른 날에 설교가 있으면 모든 사람이 설교에서 무엇인가를 배우도록 자극을 주어야 한다. 아무리 어린아이라 할지라도 공책에 설교를 적도록 하라”

두 번째로 살펴보아야 할 청교도들의 관습은 설교를 듣고 난 후 차근히 묵상하는 것이었다. 묵상을 돕는 방편으로는 암송이 좋았다.

 윌리엄 에임즈는 설교가 던질 수 있는 가장 큰 파문은 예배를 마친 후 교회 밖에서 일어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설교 적기와 적극적인 암송이 전부가 아니었다. 그것들은 집에서 가족들이 모였을 때 그 설교를 재현함으로써 더 보강될 수 있었다.

데오필러스 이튼(Theophilus Eaton)은 주일 저녁 가족들을 한 자리에 모으고 아주 근엄한 태도로 그 날 아침 하나님의 집에서 공급받은 바에 관하여 가족 모두에게 자세히 소감을 밝힌 후, 그들 모두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 할 것을 비는 기도로 순서를 마쳤다.


(7) 긴 시간의 설교

청교도 설교자들은 일반적으로 한 시간 혹은 그 이상으로 설교를 하였다. 이 목적으로 그들은 모래시계를 사용하였다. 한 설교자는 다 끝마칠 때까지 무려 4번이나 모래시계를 돌려서 명성을 얻었다.

엠마뉴엘 대학의 학장인 Lawrence Chadderton은 설교의 대가였음에 틀림없다. 그는 때때로 2시간을 설교하곤 했는데, 그런 다음 요컨대 더 이상 "교인들의 참을성을 침해 하지" 않겠노라고 말하곤 하였다. 그러나 회중은 그가 설교를 그만 하도록 허락하려 하지를 않았다. "제발 바라옵나니, 목사님! 설교를 계속해 주십시오!"

그런 사건들은 비일비재하였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크롬웰이 John Howe(그의 궁전 목사 중 한사람)의 강단 실력을 테스트해 보길 원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크롬웰은 하웨 목사가 강단에 오르기 직전에 그에게 준 본문을 바꿔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웨는 이 새 본문을 가지고 2시간 동안 설교하였으며, 그가 모래시계를 다시 한 번 더 돌리려는 때에야 비로소 그만 하라는 부탁을 받았다는 것이다.


(8) 쉽고 편안한 설교

  평이한 산문체를 고집한 이유는 명쾌한 전달이라는 목적 때문이었다. 윌리엄 퍼킨즈는 이렇게 말했다. “설교는 쉽고 명료하며 군더더기가 없어야 한다.… 본보기가 될 만한 설교는 바로 쉬운 설교이다. 다시 말하지만 쉬우면 쉬울수록 더 좋다”

리처드 시브즈도 이렇게 주장했다. “진리는 꼭꼭 감추어 있기를 제일 두려워하고, 모두가 볼 수 있도록 투명하게 드러나기를 가장 원한다. 진리는 벌거벗을수록 사랑받고 강해 진다”

헨리 스미스 역시 “쉽게 설교한다는 것은 되는대로 하거나 교양 없이 하거나, 아니면 뒤죽박죽으로 설교한다는 말이 아니고, 평이하고 명쾌하게 설교해서 많이 배우지 못한 사람이라도 꼭 자기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듣는 것처럼 무엇을 가르치려 하는지 단박에 아는 설교를 말한다.”고 말했다.


 평이한 설교란 없어야 할 요소는 빼고, 갖추어야 할 요소는 갖춘 설교를 말한다.


 설교 내용이 형식보다 더 중요하다는 전제 위에 설교 유형에 관한 그들의 소신이 뿌리내리고 있음은 움직이지 않는 사실이다.

존 레이벨(John Flavel)은 “말은 이차적이다. 자물쇠 구멍에 맞는 쇠 열쇠가 보물 창고 문을 열지 못하는 황금 열쇠보다 백 번 천 번 유용하다”라고 말했다.

청교도들에게 말은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었지 목적 그 자체는 아니었다.


(9) 설교에 수반하는 거룩한 생활

청교도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설교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심령에 설교하였다.

리차드 백스터는 목사의 생활에서 끊임없이 경계해야 할 영역으로 네 가지를 언급한다.

1. 다른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제공하면서 자신은 그 은혜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하라.

2. 다른 사람들에게는 자범 죄를 짓지 말라고 설교하면서 자신은 더 나쁜 자범 죄를 행하며 살지 않도록 조심하라.

3. 자기가 맡은 고귀한 직분에 부적합하게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4. 자신의 모본이 적어도 자신의 가르침과 모순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10) 청교도 설교 가들의 설교 교훈

  (1) 나는 내가 느낀 것, 특히 내가 아픔을 겪으며 느낀 것을 설교한다.…사실 나는 죽음에서 일어나 사람들에게 보냄을 받은 자와 같은 신분이다. 나는 착고가 채워진 채 역시 착고에 묶인 그들에게 설교하러 간다. 그들을 깨워 일으키기 위해서 내 마음에 불을 담아간다. (Troplogia)

  (2) 다시 설교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설교해 본 적이 없다. 나는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보냄을 받은 죽어가는 사람이다. (Richard Baxter)

   (3) 설교에 동원된 언어는 치유의 수단이요, 구원 마차이다.…말씀 전파는 그리스도께서 내다보시며 또 그 분 자신을 성도들에게 내보이시는 창문이라고나 할까 (Thomas Watson)

   (4) 신실한 설교자가 없다면 하나님 나라는 사람들에게서 그 위용을 드러내지 못한다.…그렇다. 하나님 나라의 영광은 설교하는 베드로와 바울을 가진 조그마한 마을의 영광에 지나지 않는다.(Richard Heyricke)

   (5) 설교가 죽어있어서는 안 된다. 설교는 살아 있어야 하고 또 효과적이어야 한다. 불신자가 교회에 왔다가 감화를 받고, 말씀을 들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으로 변화될 정도가 되어야 한다. (William Ames)

   (6) 진실로 설교는 하나님께서 창안하신 제도이다. 믿음을 얻고 거룩한 지식을 쌓으며, 의지와 정열을 그리스도께 복종시키기 위한 신성한 제도이다. (Richard Sibbes)






▣ 과 제 ▣

1. 청교도들의 목사관을 쓰라

2. 청교도 설교자들의 설교 특징을 약술하라.











제7장 청교도 인물사

청교도의 역사를 구분한다면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1. 전기 퓨리탄 : 첫 순교자 윌리엄 틴데일(1494-1536), 토마스 크렌머 (1489-1555), 존 후퍼 (1495-1555) 등,

2. 초기 퓨리탄 : 국교에서 해고당한 토마스 카트라잇(1535-1603), 윌리엄 퍼킨스 (1558-1602),  리차드 십스 (1577-1635) 등

3. 절정기 퓨리탄 : 적지 않은 옥고에서도 백절불굴의 신앙으로 국교회에 반대하여 퓨리탄의 승리로 이끌어낸 최종 주자 리차드 백스터 (1615-1691)를 위시하여 신학의 거장 존 오웬(1616-1683), 순례자 존 번연(1628-1688)등

4. 후기 퓨리탄 : 영국의 메튜 헨리(1662-1714), 스코틀란드의 토마스 보스튼 (1676-1732), 그리고 미국의 요나단 에드워드즈(1703-1758) 등으로 구분하여 연구 할 수 있다.


 ▣ 청교도 주요 인물 명단 ▣

I. 전기 퓨리탄 (16세기 전반)

1. William Tyndale (1494-1536). The First English Bible translate. (New Testament) (1526).

2. Thomas Cranmer (1489-1556),. Works of Thomas Cranmer. (ed.) by G. Duffield. (1964).

3. John Hooper (1495-1555). A Godly Confession and Protestation of the Christian Faith. (1548).

4. Knox, John(1505-1572). The First Temptation of Christ. (1572). 

II. 초기 퓨리탄(16세기 후반)

5. Richard Greenham

6. Richard Rogers

7. Thomas Catwright (1535-1603). The Simplified Christianity Form of Church Government. (1569).

8. William Perkins (1558-1602). Golden Chain. (1592); The Art of Prophesying. (1601).

9. William Gouge (1575-1653). Epistle To The Hebrews. (1618)

10. William Ames (1576-1633)

11. Richard Sibbes (1577-1635). The Bruised Reed And Smoking Flex. (1620)

12. John Cotton (1584-1652) The Works of John Cotton - 미국이주

13. Thomas Hooker (1586-1647). The Souls Humiliation. (1638).- 미국이주

14. John Davenport (1597-1670)

      미국이주: 1637.A Discourse about Civil Government in a New Plantation.

15. John Preston (1587-1628). The Golden Scepter. (1625).

16. Richard Mather (1596-1669) 미국이주: 8/16/1635; An Answer.

     Churches in New-England Unto Nine Propositions.

III. 절정기 퓨리탄(17세기)

17. Thomas Goodwin (1600-1680). A Child Of Light Walking in Darkness. (1652)

18. William Bridge (1600-1670). A Lifting up for the Downcast. (1648).

19. William Rogers (1603-1683),

20. John Eliot (1604-1690) Preacher to Indian(미국), 성경번역

21. Thoma Shepard (1605-1649),

22. Richard Baxter (1615-1691). Saints Everlasting Rest. (1650); Reformed Pastor. (1658).

23. John Owen (1616-1683). The Death of Death in the Death of Christ. (1652)

      Sin And Temptation. (1658).

24. William Gurnal (1616-1679). The Christian In Complete Armour (1655).

25. Richard Gilpin (1625-1700). A Treatise of Saint's Temptation. (1677).

26. John Bunyan (1628-1686), Pilgrims Progress. (1672), Holy War. (1680).

27. Thomas Watson (1637-1717), A Body of Divinity (1692).

IV. 후기 퓨리탄(17세기 말-18세기)

28. Matthew Henry (1662-1714). The Pleasantness Of A Religious Life: A Puritan's View of the Good Life. 1702).

29. William Tennent (1673-1745) - 미국출생

30. Thomas Boston (1676-1732). The Art of Man Fishing: A Puritan's of Evangelism. (1699)

31. Josiah Eliot (1680-1756) 인디안선교사

32. Jonathan Edwards (1703-1758). The Experience That Counts. (1756). - 미국출생

33. George Whitefield (1714-1770). The Method Of Grace (1751).

34. William Carry (1761-1834). The Conversion of the Heathens. (1798).

V. 근대 퓨리탄(19세기)

35. Charles Hodge (1798-1878) Commentaries on Romans, Ephesians, 1 and 2 Corinthians.

36. John Charles Ryle (1816-1900). Holiness. (1858).

37. Charles H. Spurgeon (1834-1892). The Key To Holiness (1865).

38. Alexander Archibald 

* 1900-1950 (20세기 전반기)

39. Geoffrey F. Nuttal The Holy Spirit in Puritan Faith and Experience. (1946) - Packer's Advisor.

40. D M. Lloyd-Jones (1899-1981), The Gospel of God (1968):

      The Puritans: Their Origins and Successors. (1987).

41. Gordon S. Wakefield. Puritan Devotion (1957).



A. 전기 퓨리탄


1) 존 낙스(John Knox, 1514-72) : 청교도의 창시자


(1) 정치적 배경

영국의 바로 위쪽에 자리 잡은 스코틀랜드는 지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영국과 어떠한 관계를 맺어야만 하는 입장에 있었다.

이 입장은 역사적으로 볼 때, 대결의 양상으로 많이 분출되었다. 영국은 스코틀랜드를 합병하여 국위를 선양하려 했고, 스코틀랜드는 어떠한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자국을 보호하려 했다. 13세기부터 16세기까지 스코틀랜드는 실질적으로 프랑스와 동맹관계를 맺음으로 영국의 침략을 차단하였다.

영국 튜더 왕조의 창시자 헨리 7세는 국경 문제로 긴장 상태에 있는 스코틀랜드와 우호 관계를 맺으려고 딸 마가렛을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4세에게 출가시켰다. 잠시 동안 양국간에 평화가 깃들었으나, 헨리 7세가 죽고 그의 아들 헨리 8세가 영국 왕이 되어 교황이 주도하는 신성 동맹에 가담함으로써 두 나라는 또 다시 대적이 되었다.

신성 동맹은 프랑스에 대항하기 위해 결성된 것인데 프랑스는 스코틀랜드의 우방이었기에 처남인 헨리 8세가 매형인 제임스 4세와 적대 입장에 선 꼴이 되었던 것이다.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4세는 격분하여 영국군과 싸우다가 플로든의 전투(the battle of Flod- den, 1513)에서 전사하였다.

임종시 제임스 4세는 아내인 마가렛을 섭정으로 지명했으나 스코틀랜드 의회는 마가렛이 영국 왕 헨리 8세의 누나라는 이유로 이 지명을 거부하였다. 대신 알바니 공작(Duke of Albany)이 프랑스에서 불려와 섭정에 취임되고, 왕위는 생후 17개월 밖에 안 되는 제임스 5세에게 돌아갔다.

스코틀랜드 왕가는 지속적으로 프랑스와 깊은 결속을 맺는데 제임스 5세가 프랑스 왕의 딸 마들린(Madeline)을 왕비로 취하고, 그녀의 사후 프랑스의 실력자 로렌 공작의 동생인 기즈의 메리 (Mary of Guise)를 두 번째 부인으로 맞이함으로써 이 결속을 더욱 분명히 한다.


한편 야망에 찬 헨리 8세는 스코틀랜드를 장악하기 위해 4만의 군사로 전쟁을 일으키나 스코틀랜드의 견고한 방어망을 뚫지 못했다. 일단 방어에 성공하자 의기양양해진 제임스 5세는 영국군을 기습했지만, 솔웨이 모스 전투(the battle of Solway Moss)에서 패한 후 불과 3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왕위는 태어난 지 7일밖에 안 된 메리에게 돌아갔다. 헨리 8세는 아들인 에드워드와 스코틀랜드 여왕이 된 갓난이 메리 스튜어트(Mary Queen of Scots)를 정략 결혼시켜 스코틀랜드의 영토를 장악하려 했다. 개신교에 동정적인 스코틀랜드 귀족들은 이 결혼을 환영하였다. 1543년 7월 1일 양국간에 결혼 조약이 맺어졌다. 그러자 가톨릭 진영의 성직자들이 맹렬한 거부 반응을 일으켰다.

그들은 영국 왕 헨리 8세의 통치를 두려워했다. 헨리 8세 역시 스코틀랜드에 무리한 요구를 강행했다. 그는 즉각 프랑스-스코틀랜드간의 동맹을 파기하고 어린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 스튜어트를 영국에 인도하라고 명령했다. 이러한 헨리 8세의 고집은 스코틀랜드인의 저항과 반감만 부채질한 꼴이 되어 버렸다.


이후 메리 스튜어트는 프랑스에 보내져 가톨릭 신앙으로 교육받고 프랑스 왕 앙리 2세의 황태자 프란시스와 결혼했다(1558년 4월). 프란시스는 아버지의 보위를 이어 겨우 17개월 동안 프랑스 왕위에 올랐다가 1560년 12월에 죽었다. 이로 인해 메리 스튜어트는 1561년 8월에 다시 스코틀랜드로 돌아오게 된다.

스코틀랜드 왕가가 친 카톨릭, 친 프랑스 정책을 취할 때 영국은 그 반대 입장을 취했다. 힘의 역학 구도 상 그 방법이 가장 좋은 것으로 여겨졌다. 당시 반 카톨릭의 힘으로 나타난 것은 대륙의 종교 개혁이었고 영국도 이 힘을 지혜롭게 사용하였다.

그러나 처음부터 영국이 반 카톨릭이 되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헨리 8세는 루터의 종교 개혁에 반대하였다. 교황청은 이러한 헨리 8세를 “믿음의 수호자”(Defender of the Faith)로 추켜세웠다. 1534년 헨리 8세는 “수장령”(Act of Supremacy)을 반포하여 유럽 세계를 놀라게 했다. 영국 교회의 수장이 로마 교황이 아니라 자신이라는 것이다.

헨리 8세의 돌연한 변화는 그의 이혼 소송에 교황이 협조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났다. 헨리 8세는 왕정의 굳건한 토대를 세우려면 왕위 계승에 문제가 없어야 된다고 믿어 온 전제 군주였다. 자신의 아내인 캐서린(Catherine of Aragon)은 이러한 헨리 8세를 지속적으로 실망시키고 있었다. 캐서린으로부터 3명의 딸이 연이어 탄생되지만 모두 죽고 메리 튜더(Mary Tudor)만 생존해 있었다.

헨리 8세는 후계자 문제로 태산 같은 걱정을 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형수(원래 캐서린은 헨리 8세의 형인 아서와 결혼했으나 아서가 결혼 6개월 만에 죽자 다시 헨리 8세와 결혼했다)를 취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를 샀다고 결론 내리고, 마침 궁녀인 앤 볼린(Anne Boleyn, 1507-36)이 마음에 들자 이혼을 결정하고 교황청에 이혼 승인을 청원했던 것이다.

교황 클레멘트 7세는 이 이혼을 허락하고 싶었으나 신성 로마제국 황제 칼 5세(영문명, 찰스 5세)의 고모인 캐서린을 이혼 당하게 할 수는 없었다. 이혼을 허락하면 당장 교황청은 황제의 군대에게 유린당할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다. 헨리 8세는 교황의 허락을 못 받자 대노하여 수장령을 발표하고, 영국교회를 가톨릭에서 독립시켜 버렸다.

이 사건으로 900년 이상 영국에 가해 온 교황청의 힘은 제거되고 영국 종교 개혁의 문이 열리게 되었다. 헨리 8세의 아들 에드워드 6세(재위 1547-53) 때에는 개신교가 영국에 뿌리를 내릴 수 있었다. 1549년에는 공동 기도문(Book of Common Prayer), 1553년에는 42개 조항이 반포되었다. 이 기도문과 42개조항의 많은 부분에 칼빈주의 개혁파 사상이 삽입되었다.


에드워드 6세가 일찍 죽자 뒤이어 메리 튜더(메리 1세)가 여왕으로 즉위하였다. 그녀는 어머니 캐서린이 이혼당한 것에 한을 품고 있었다. 이혼을 허락한 영국 개신교 지도자들, 특히 켄터베리 주교 토머스 크랜머를 미워하였다.

메리 튜더의 등극은 피를 부르고 있었다. 그녀는 가톨릭을 다시 국교로 삼고, 가톨릭 국가인 스페인과 긴밀한 외교 관계를 수립했다. 이런 차원에서 스페인 왕 필립 2세(스페인 명, 펠리페 2세)와 결혼도 하였다. 그녀의 통치 기간에 300여 명의 개신교도들이 화형을 당했다.


메리 튜더가 죽자 왕위는 헨리 8세의 두 번째 왕비인 앤 볼린의 딸 엘리자베스(엘리자베스 1세)에게 돌아갔다. 엘리자베스는 영국의 종교를 다시 개신교로 바꾸었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이 있다. 메리 튜더가 사망할 때 영국의 왕위 계승권은 엘리자베스 외에 스코틀랜드의 메리 스튜어트에게도 있었다는 점이다.

메리 스튜어트는 헨리 7세의 딸인 마가렛의 손녀가 아닌가! 그런데 메리 스튜어트의 종교가 가톨릭이었으므로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왕권 신장을 위해서라도 스코틀랜드 왕정의 종교와 반대되는 개신교를 택함이 유리했던 것이다.

아울러 아버지인 헨리 8세도 그의 통치 말기에 개신교에 기울어졌고, 에드워드 6세도 개신교도였으며, 그녀의 어머니인 앤 볼린도 개신교도였으므로 엘리자베스가 개신교에 접근했음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는 영국내의 종교 전쟁을 원치 않았으므로 개신교도나 가톨릭교도들 모두에게 반감을 사지 않도록 처신하는 방법, 곧 헨리 8세가 실시했던 “교회 형식은 가톨릭, 교리는 개신교”를 채택했다. 이 방법은 개혁주의 청교도들이나 독실한 가톨릭교도들 모두에게 지지를 받지 못했다.


(2) 스코틀랜드 종교 상황

스코틀랜드 교회는 아일랜드의 켈트 선교(Celtic Missions)에 힘입어 수립된 것으로 보이며, 7세기에는 수도원들이 스코틀랜드의 영적, 지적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12세기에 들어서면서 스코틀랜드의 가톨릭 교구가 영국 요크(York)로부터 독립되었고(1176), 15세기에는 세인트앤드루스(St. Andrews) 교구가 메트로폴리탄 교구로 인정받았다(1472).


수도사와 수녀들이 기거하는 종교 건물이 스코틀랜드 전역에 산재하였고, 선교 초기에 영향력을 행사했던 켈트 수도원들은 대륙의 양식에 의해 밀려 나고 있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스코틀랜드 교회는 소수의 인물들을 빼고는 영적으로 뛰어난 지도자를 배출하지 못했다. 당시의 종교 상황을 리드 교수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대부분의 주교들과 수도원장들은 그들이 국왕이나 귀족들의 자손들이었거나 혹은 국왕에게 충성을 다한 인물들이었기 때문에 그 자리에 임명된 자들이었다. 그러니 이들이 성직자들의 높은 도덕적 생활  수준을 유지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겠다. 성직자들의 최고위층에서도 고상한 미덕이란 찾아보기 힘들었다.

[비튼 추기경]에게는 수도원장 시절에 이미 1남 2녀가 있었으며, 추기경에 임명되기 이전에 아들 셋을 더 낳았고, 임명된 후에 네 아들을 더 가졌다. 다른 스코틀랜드의 고위 성직자들도 이에 못지않은 왕성한 성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종교 개혁 당시 12명의 주교들이 사생아들을 거느리고 있었으며, 왕이나 귀족들이 낳은 사생아로 보이는 많은 수도원장들에게 또한 자기들의 사생아들이 많이 있었다.

이와 같은 상황을 감안해 볼 때, 하위 성직자들이 청교도적 금욕 생활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다. 평 교인들은 이러한 현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성직자들의 이러한 세속성보다도 더 심각한 문제는 이들이 민중들, 특히 교육받은 이들의 영적 필요를 충족시켜 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교회는 활기에 찬 시민 계급들이나 뭔가 불안을 느끼고 있던 지주 계급들에게 지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제대로 말씀을 전하지 못하고 있었다.]


성직자들은 무식했고, 교회 공동체의 운영은 개탄스러울 정도였다. 바로 이 시점에서 스코틀랜드에도 종교 개혁의 선구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위클리프의 개혁 사상에 동감을 표시한 영국 사제 레스비(James Resby)는 성경적 신앙을 주장하다가 1407년 스코틀랜드 퍼스(Perth)에서 화형 당했다. 선교사로 파송된 후스파 크라바르(Paul Crawar)는 1433년 세인트앤드루스에서 고난을 당했다.

카톨릭 교회는 종교 개혁 사상을 주장하는 자들을 제거하기 위해 종교 재판관을 채용했고, 상당수의 롤라드파 사람(Lollard)들이 이 무서운 종교 재판의 희생양이 되었다. 1525년 루터파 교리를 전파하는 것을 법률로 금했다.

이러한 종교 탄압에도 불구하고 개혁 사상의 불길은 결코 꺼지지 않았다. 1520년 스코틀랜드의 롤라드 파인 니스벳(Murdock Nisbet)은 위클리프 신약성경을 스코틀랜드 방언으로 고쳐 썼고(이 성경은 1901년에 가서야 출판되었다), 틴데일 영어 신약성경이 1526년 스코틀랜드에 들어왔다. 이후부터는 스코틀랜드에 개신교가 하나의 운동으로 부각되었다.


이 운동에 좀 더 분명한 금을 그어준 사람은 스코틀랜드 종교 개혁의 계명성이라고 호칭되는 패트릭 해밀턴(Patrick Hamilton 1504?-28)이었다.

스코틀랜드 왕가의 후손이요 상위 귀족의 아들인 해밀턴은 프랑스의 파리와 루뱅에 유학하여 루터와 에라스무스의 사상에 접한 후 귀국하여 세인트앤드루스에서 조용히 공부하고 있었다. 어느 날 해밀턴은 대주교 제임스 비튼(James Beaton)으로부터 이단 혐의로 출두 명령을 받았다.

상황이 자신에게 불리할 것을 예측한 해밀턴은 마르부르크(Marburg)로 탈주하여 프랑수아 랑베르(Francois Lambert) 등과 교제하면서 루터 파 신앙에 몰입하였다. 그는 “루터파의 신앙에 관한 짤막한 논문”(Loci Communes)도 작성했는데, 이것은 후일 틴데일의 친구인 존 프리스(John Frith)에 의해 패트릭의 처소들(Patrick’s Places)로 번역되었다. 그는 루터를 직접 방문하기도 했다.

패트릭 해밀턴은 종교 개혁의 열정에 충일하여 순교를 각오하고 스코틀랜드로 다시 귀국하여 설교하기 시작했다. 킨카벨(Kincavel)에서 세인트앤드루스로 오라는 비튼의 출두 명령을 받고 그곳에 가자마자 체포되어 화형에 처해졌다. 그때 그의 나이는 불과 스물 네 살이었다.

해밀턴의 순교는 스코틀랜드인들에게 가톨릭을 더욱 부정적으로 바라보게 했다. 지식층은 물론이고 상인들과 광부들까지도 종교 개혁자들을 옹호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시대의 흐름을 파악하지 못한 가톨릭의 지도층은 계속 탄압과 박해를 하였다.


1539년 제임스 비튼의 뒤를 이어 스코틀랜드 교회의 수장이 된 자는 그의 조카인 데이비드 비튼(David Beaton)이었다. 그는 교황청과 프랑스와 더욱 깊이 결속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의 악한 행적은 “선하고 경건한 민요들”(Good and Godly Ballads) 속에서도 풍자적으로 나타난다.

추기경이 되자 비튼은 한층 더 이단 박멸에 열심을 내었다. 1540년 비튼과 그의 추종자들은 이단 사상을 가진 자들을 제어할 법률을 의회에서 통과시키고 사적 종교 비밀 집회를 금하였다. 그러나 비밀 집회를 가진 개신교 모임(소위 사적 교회, Privy Kirks)은 지하 운동으로 존속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차에 비튼의 표적이 된 자는 조지 위샤트(George Wi- shart)였다. 그는 스코틀랜드의 몬트로즈 아카데미(the Academy of Montrose)에서 헬라어를 가르친 적이 있었다. 위샤트는 1532년 루벵(Louvain)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 수재였으며, 영국과 스위스에 가서 대륙의 종교 개혁의 흐름을 맛보았다.

그가 스위스에 있을 때 스위스 최초의 신앙 고백을 영어로 번역한 일도 있었다. 그는 신학적으로는 츠빙글리파에 속했다. 그가 영국의 케임브리지에 있는 코푸스 크리스티 대학(Corpus Christi College)에서 강의할 때 그의 학생 중 하나가 “[위샤트]는 키가 크고, 검은 구레나룻을 길렀으며, 단정하고 예의 바르며, 금욕적이고 독실하며, 박식하고 자애로웠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위샤트는 스코틀랜드에 돌아와 몬트로즈, 던디, 아이셔 지역에서 병자 간호 및 설교 사역을 하면서 종교 개혁의 당위성을 외치고 있었다. 그가 하딩턴 지역에 가까운 이스트 로티안(East Lothian)을 지날 때 그곳의 지배자 보스웰(Bothwell) 백작은 위샤트를 체포하여 비튼 추기경에게 넘겨주었다. 1546년 3월 1일 위샤트는 세인트앤드루스에서 해밀턴의 길을 따랐다. 순교의 역사에 동참한 것이다.


위샤트가 체포당하기 직전 양날이 선 검을 들고 위샤트를 호위하던 건장한 사나이가 있었는데, 그는 본장의 주인공인 존 낙스이다.

위샤트는 “종교 개혁의 일을 계속 추진하기 위해 다른 날을 기다리라, 희생은 나 하나로 족하다”며 낙스를 떠나보냈다.


위샤트가 죽자 시민들 가운데서 추기경에 대한 분노가 솟아올랐다. 특히 귀족들 중 상당수가 개신교에 동정적이었다. 귀족들은, 가톨릭 성직자들이 국왕과 결탁하여 귀족들의 국정 참여 권한을 축소시키고 재산(토지 등)을 몰수하려 한다는 계획을 알았을 때 분노하였다.

1546년 5월 29일 무장한 귀족 몇 명이 잠들어 있는 추기경을 깨워 칼을 들이댔다. 그 중 개신교도로 알려진 한 사람이 추기경에게 위샤트 살해를 추궁하면서 “우리는 복수하라는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았다”고 말하고 추기경을 두 번 찔렀다. 다음날 그들은 추기경의 시체를 창문 밖에 걸었다.

이 사건은 사실 단순한 복수극이 아닌 공포, 분노, 증오가 뒤섞인 복합적 이해관계에 기인한 것이다. 곧 귀족들과 시민들은 수비대를 만들어 세인트앤드루스 성을 함락시키고 가톨릭과 왕실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본격적인 스코틀랜드 종교 개혁이 시작된 것이다. 낙스는 이들의 영적 지도자로서 수비대의 설교를 담당하게 되었다.

(3) 존 낙스의 등장과 활동

존 낙스는 1513년경 에딘버러(Edinburgh)에서 그리 멀지 않은 하딩톤(Haddington)에서 태어났다. 그는 성 앤드류(St. Andrews) 대학에서 교육받고, 이어 신부로 서품되었다. 30세쯤에 그는 프로테스탄티즘에 설복당했고, 그와 동시대 사람이었던 죠지 위샤트(George Wishart)에게 깊은 감명을 받았는데, 위샤트는 복음 전하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은 자였고, 1546년 성 앤드류의 화형장에서 순교했던 인물이다.


향후 13년 동안 낙스는 여러 곳을 여행했다. 그는 실패로 끝나 버린 앤드류 성 반란에 참여하였다가, 노예가 되어 프랑스의 노예선에서 노를 젓는 일에 19개월이나 보내야 했다. 그는 에드워드(Edward) 6세 치하 말기에 영국으로 오게 되었고, 크랜머의 1552년판 '공중기도서'(Book of Commom prayer)를 준비하는 최종 단계에 참여하여 일익을 담당했다.


1553년 메리 여왕이 즉위하자 그는 독일로 건너갔다. 한동안 그는 프랑크푸르트(Frankfurt)에 있는 영국의 망명자 교회의 목사로 있었는데, 거기서 그는 논쟁에 휘말려들게 되었다. 낙스와 여타의 사람들이 보다 철저한 개혁파 예배 의식을 소개함으로써 '공중 기도서'를 이탈하게 되었다.


하지만 유럽의 여러 다른 도시에서 망명온 보다 보수적인 자들은 이를 좋게 여기지 않았고, 낙스를 즉시 몰아내려고 리차드 콕스(Richard Cox)와 그 이외 사람들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들은 낙스에게 항의하며 "그대들은 영국 교회의 모습을 가져야 할 것이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하여 낙스는 "주님께서는 그리스도의 교회의 모습을 지니라고 말씀하실 것이오"라고 대답했다.


이런 충돌은 엘리자베드 1세 치세시 '공중 기도서'를 견지하기를 원하는 자들과 대륙의 개혁파 교회들이 지니는 노선에 서서 보다 충실한 종교개혁을 요구한 자들 사이에서 일어난 청교도(Puritan) 논쟁의 전조가 되었다. 콕스는 사람들에게 (낙스의 급진적인 교회 정치관을 환기시킴으로써) 프랑크푸르트로부터 낙스를 추방시켜야 한다고 조종하자, 그는 제네바로 건너갔다.


그는 칼빈의 제네바를 열렬히 찬미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는 그 곳에 머물면서 그의 유명한 '괴물같은 여인들의 통치에 대한 제1차 나팔소리'(First Blast of the Trumpet against the Monstrous Regiment of women, 1558)를 저술했다. 이러한 여성 통치자에 대한 비난은 영국의 여왕 메리 튜더(Mary Tudor)에게 향해진 것이었다. 1558년에 엘리자베드가 즉위했고 그녀는 낙스의 그런 저서를 탐탁치 않게 생각했다.

1559년, 낙스는 스코틀랜드로 다시 돌아왔고 그 곳에서 교회 개혁을 도왔다.


(4) 낙스와 스코틀랜드 신앙 고백

메리 스튜어트가 프랑스에서 스코틀랜드로 돌아올 때까지 국사는 잠시 12명으로 구성된 추밀원에서 이루어지다가 1560년 8월 3일 의회가 소집됨으로 정치 주도권은 의회로 넘어갔다.

낙스는 즉시 종교 개혁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의회에 제출했다.

의회는 낙스와 그의 동료 목사들에게 신앙 고백서의 작성을 요구했다. 낙스는 4일 만에 5명의 동료 존들(John Spottiswood, John Row, John Douglas, John Winram, John Willock)과 같이 신앙 고백서를 작성, 의회의 상임위원회에 제출했다. 상임위원회는 이 고백서를 인준하여 본회의에 상정하였다. 그리고 본회의는 동년 8월 17일에 이를 승인하였다.


총 25개 조항으로 구성된 스코틀랜드 신앙 고백서는 개혁주의자들의 교리, 즉 칼빈의 요리 문답과 1559년의 프랑스 신앙 고백, 폴란드인으로서 칼빈주의자인 존 라스코(John Lasco, 1499-1560)와 스위스 종교 개혁자 불링거(Heinrich Bullinger, 1504-75)의 글들을 참조한 것이 역력하다. 이 신앙 고백은 1647년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이 나오기까지 스코틀랜드 교회의 교리적 표준이 되었다.


서문은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우리는 우리가 고백해 오면서 수치와 위협을 받던 교리의 모든 것들을 만천하에 공포하기를 오랫동안 갈망해 왔습니다.”로 시작되어, “우리는 끝날까지 이 신앙 고백에 머물러 있기를 단호하게 천명합니다.”라고 끝을 맺는다.


그러나 샤프가 지적한 바와 같이 이 고백서는 진리에 대한 진술들이 무오한 것으로 주장하지 않고 오히려 성경 안에서 수정과 개선이 가능하다고 하였다. 제20항은 교회 회의들의 무오성에 반대하면서 “어떤 회의들은 분명히 과오를 범하였으며, 그것도 매우 중대한 내용에서의 과오였다”고 지적하였다.


낙스는 1546년 트렌트 종교 회의(The Council of Trent)가 취한 가톨릭의 구원관에 기겁하였다. 트렌트 종교 회의는 사람이 구원을 받을 때 믿음만으로는 부족하고 교회가 베푸는 성례전에 참여하여 신과 인간이 협동함으로 구원을 이루어야 한다고 했다.

따라서 미사의 참석은 가톨릭의 구원관에서는 필수적이다. 가톨릭 신학에서 “미사는 구원 신비의 중심이며,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에 대한 기념이며, 아울러 사실적이고 현재적 희생이었다.”


낙스는 인간의 방법이 배제된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택으로 구원이 이루어짐을 믿었기에 미사의 폐지를 주장하였다. 스코틀랜드 신앙 고백서 제8항은 다음과 같이 담대히 선언한다.

[동일하신 영원한 하나님 아버지께서 오직 은총으로 이 세계의 기초가 세워지기 전에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셨고,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머리요, 형제요, 목자요, 우리 영혼의 위대한 감독으로 지명하셨다.]


교회 관에 대해서는 제18장에서 교회의 3대 요소, 곧 말씀의 참된 선포, 올바른 성례전의 집행 그리고 정당한 교회 훈련(권징)을 언급한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스코틀랜드 신앙 고백서는 “정직하고 곧으며 남자다운 문체로 기록되었으되, 불평이나 아첨이 없고, 논리적 정확성과 학문적 수준에서도 뒤떨어지지 않는다.

이것은 마치 온종일 진리를 전파한 후 피곤에 지친 사람이 밤에 조용히 앉아 자기가 가르친 내용을 생각해 보며 마음에서 새 힘을 되찾는 것과 같다.”

(5) 낙스와 장로교회

낙스가 주축이 되어 작성한 스코틀랜드 신앙 고백서 안에는 칼빈주의 색채가 짙게 깔려 있지만 교회 정치에 있어서 장로교회로 한다는 명문 규정이 없다. 더욱 중요한 문제로 떠오르는 것은 낙스의 생존시 감독(Superintendent)이라는 직책이 엄연히 존재한 점이다. 그렇다면 낙스는 영국 성공회와 같은 감독교회(Episcopal Church)를 스코틀랜드에 창설했는가 하는 것이 규명되어야 한다.

에든버러 대학교의 역사학 교수였던 도널드슨(G. Donaldson)은 낙스가 개혁한 스코틀랜드 교회는 처음부터 감독제였으나, 그의 후계자 앤드루 멜빌(Andrew Melville, 1545-1622)이 제네바에서 돌아와 제2의 개혁을 일으킴으로써 장로회 체제를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도널드슨이 무엇에 근거하여 이렇게 말하는가?


첫째, 낙스는 에드워드 6세 치하에서 영국의 궁정 목사로 시무할 때 이미 감독교회 정치의 영향을 받았다.

둘째, 스코틀랜드는 종교 개혁 이전부터 개혁파 교회보다는 루터파 교회의 영향 하에 있었다.

셋째, 1560년 낙스가 작성한 제1치리서(The First Book of Discipline)에 의하면 목사의 임명이 회중에 의한 선거와 학식이 풍부한 사람들에 의해 시행된 시험과 공적 임명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여기 학식이 풍부한 사람들이란 상당한 권한이 부여된 감독을 의미한다.

넷째, 감독은 1년에 2회 이상 담당 관할 구역을 시찰하고, 목사의 불경건한 삶이 발견될 경우 대회를 소집하여 해당 목사를 해임시킬 뿐 아니라, 감독구에 있는 주요 도시에 감독 재판소를 설치하여, 감독의 임명 또는 교인들의 이혼 문제를 다루는 사법 재판관 기능을 했다.

다섯째, 연금 수령에 있어서 감독은 500내지 700파운드를 받았는데 반해 일반 목사들은 100파운드에 지나지 않았다. 이러한 차등 지불은 감독의 우위성을 입증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도널드슨의 학설은 내픈과 리드에 의해 반박되었다. 특히 리드는 낙스의 저술을 세세히 분석하여 낙스가 성직자의 주 임무를 말씀의 선포로 보았던 점 그리고 성직자는 성공회와 같이 교회 기구나 세속 권력의 관여가 아닌 오직 회중의 동의에 의해서 임명된 점을 부각시키고 있다.

 제1치리서 제5항 제1조에서 제3조에 기록된 “감독”이라는 용어는 낙스의 진의가 아니었다. 낙스가 처음 작성한 원본에는 감독이란 용어가 빠졌으나 후에 그의 동료 윌록과 스포티스우드가 수정 작업에 참여하면서 감독이라는 말을 삽입했다.

이 감독이라는 명칭은 개혁을 추진하던 당시 상황에서 일시적으로 마련된 행정 조치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왜냐하면 스코틀랜드의 감독직은 영구 직이 아닌 한정 직이었고(처음에는 3년, 1570년도부터는 1년으로 단축되었음), 자기 관할 구역으로부터 비판과 치리를 받는 입장이며, 무엇보다도 영국 성공회가 인정하지 않는 장로 제도를 스코틀랜드 개혁교회는 처음부터 인정했기 때문이다. 스코틀랜드의 감독직은 도널드슨이 생각한 것처럼, 영국 교회의 치리자의 입장이 아닌 지 교회를 돌보는 방문자 또는 순회 전도자로 해석되어야 한다.


1566년 스코틀랜드 총회는 제2헬베틱 신앙 고백(The Second Helvetic Confession)을 채택하여 목사 직위상의 우월성을 부정하였다.

여기에서 낙스는 영국 망명 생활에서 로체스터 감독직을 제안 받았으나 감독 정치는 성경이 금한다고 믿었기에 정중히 사양한 점을 다시 한번 기억하자. 따라서 낙스는 처음부터 스코틀랜드에 장로교회를 조직하려 했으나 상황이 여의치 못해 장로교회의 씨앗만 뿌린 것이다.

 1560년 당시 비록 개신교 세력이 절대 우위를 차지했지만, 카톨릭교회의 직분 자들(대주교, 주교, 수도원장 등)이 계속 교회에 출석했고, 그들은 직분에 따른 재산도 그대로 소유하고 있었던 것을 알아야 한다. 스코틀랜드 의회는 가톨릭 성직자 및 그들의 재산 관리 때문에 상당 기간 동안 그들과 타협해야 했던 것이다.


1572년 추밀원과 개혁교회 지도자들이 합동하여 리스 협약(Concordat of Leith)을 작성했다. 이 협약에서 가톨릭 측 인사들도 개혁교회에서 임직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다. 개혁교회의 일원이 되면 개혁교회의 총회에 복종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낙스가 뿌린 장로교회의 씨앗은 그의 후계자 앤드루 멜빌 시대에 와서 꽃을 피웠다.


괴물 같은 여인들의 통치에 대한 제2차 낙스의 항거는 1568년 메리 스튜어트(Mary Stuart :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가 영국으로 쫓겨나는 날까지 계속되었다. 그는 그녀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을 관철시켰다. 그의 주저는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사' (History of the Reformation of Religion within the Realm of Scotland)로서, 1644년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책이었다. 낙스는 1572년에 세상을 떠났다.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을 위하여 헌신했던 최초의 청교도 죤 낙스(John Knox)는 부흥을 경험한 사람들이 갖는 영적 권세에 대한 생생한 일화를 남겼다. 

당시 이런 사람들이 설교한 내용은 대부분의 헌신적인 필사자들에 의하여 기록되고 잘 보존되었는데, 그는 망명과 추격 속에서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기에 설교문도 단 두 편밖에 남아 있지 않다. 그가 스코틀랜드로 돌아와서 설교할 때의 일이었다. 종교개혁에 대하여 정치적으로 기회주의적인 태도를 취하며 카톨릭과 개혁 신앙 사이를 오고 가던 메리 여왕 앞에서 그는 설교하였다. 여왕은 자주 얼굴이 하얗게 될 정도로 깊은 두려움에 질려서 부축을 받으며 예배가 끝난 교회당을 걸어 나오곤 했다고 한다. 여왕은 그를 반역죄로 체포하도록 명령을 내리기도 하였지만, 막상 그 앞에서는 어린아이처럼 펑펑 울며 자신도 설교자인 존 낙스에게 얼마나 잘 보이고 싶어 했는지를 하소연하기도 하였다.


1571년, 그러니까 죤 낙스가 죽기 1년 전의 일이다. 그는 이미 중풍에 걸려 있었다. 세인트 안드류(St. Andrew) 지방에 있는 낙스의 한 생도로서 그의 설교를 빼놓지 않고 들었던 제임즈 멜빌(James Melville)은 후일 자신의 일기 속에서 다음과 같은 사건을 술회하였다.

바로 그해에 존 낙스가 다니엘서를 강해할 때의 일이었다. 멜빌은 그의 설교를 받아 적기 위하여 펜과 노트를 준비하였다. 그는 반 시간 가량 온화하게 본문을 해설해 나갔다. 그러나 해설이 끝나고 그 내용을 적용하는 부분에 들어가면서 설교는 거룩한 열정에 불탔고 설교가 절정에 도달했을 때 멜빌은 더 이상 그 설교를 받아 적을 수가 없었다. 하나님의 심판을 예고하는 설교를 들으며 필사자의 온 몸이 두려움과 신적인 능력의 영향으로 그를 받아 적을 수 없으리 만치 덜덜 떨고 있었기 때문이다.


(6) 낙스 이후의 스코틀랜드

낙스는 1572년 11월 24일 사망하였다.

낙스가 죽자 어린 왕 제임스 6세의 섭정이었던 모튼(Morton) 백작은 성공회식 감독주의를 소개하려 하였다. 모튼은 존 더글러스를 세인트앤드루스 대주교로 임명하고, 대주교로부터 많은 소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국가가 강력히 통제하는 성공회식 주교들이 임직되기 시작하였다. 이들 고위 성직자들은 “툴칸(tulchan)의 감독들”로 불렸는데, 툴칸이란 게일어(Gaelic)로 “암소가 우유를 내게 하기 위해 사용하는 속을 채운 송아지 가죽(a stuffed calf-skin)을 의미한다.”


이러한 배도의 시기에 칼빈의 제자이며 낙스의 후계자로 앤드루 멜빌이 등장한다. 멜빌은 프랑스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제네바에서 칼빈의 도움을 받아 제네바 아카데미의 헬라어 강사가 되었다가 나중에는 시민법을 가르쳤다. 1574년 스코틀랜드로 돌아와 글래스고 대학교의 총장에, 1580년에는 세인트앤드루스 대학교 총장에 부임하였다.

그는 제네바 식 교육 행정, 교과 과정, 교수법을 스코틀랜드에 소개하여 대학 교육 제도를 크게 개선하였을 뿐 아니라, 낙스의 제1치리서를 1578년 개정하여 제2치리서(The Second Book of Discipline)를 만들었다.

제2치리서는 감독 정치를 정면으로 부정하여 칼빈처럼 교회 직분을 장로와 집사로만 나누었다. 제2치리서는 1578년 스코틀랜드 장로교 총회에서 채택되었다.

장로교 교육을 받은 제임스 6세가 영국에서 제임스 1세로 즉위하자마자 영국의 청교도는 물론 스코틀랜드 장로교들을 박해하기 시작하였다. 제임스도 그의 어머니가 지지해 온 왕권 신수설을 신봉하고 있었다. 그러나 영국과 스코틀랜드의 장로교 대의 정치는 왕권 신수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자연히 마찰은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멜빌은 제임스에게 이렇게 말했다.

“제가 전에 여러 번 말씀드린 것과 같이 지금도 말씀드립니다. 스코틀랜드에는 두 개의 왕국이 있고, 두 명의 왕이 있습니다. 이 나라의 머리인 제임스 왕과 교회의 머리인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제임스 왕은 그리스도의 백성이요, 그리스도의 왕국에서는 왕도, 주도, 머리도 아니고, 하나의 지체일 뿐입니다.

우리는 귀하를 왕으로 섬기며, 귀하에게 합당한 예의로 대할 것입니다. 그러나 귀하는 교회의 머리가 아닙니다.”

제임스는 멜빌을 런던탑에 4년 동안 가두었다가 영국에서 추방한다. 멜빌은 프랑스 세단(Sedan)에서 신학생들을 양육하다가 1622년 사망했다.

제임스의 사망(1625) 후 찰스 1세(재위 1625-49)가 통치하면서 스코틀랜드 교회는 더 힘든 수난을 맞는다. 찰스 1세는 스코틀랜드 교회에 성공회주의를 강요하고 1637년 7월 23일 장로교회를 폐지했다. 스코틀랜드인들은 이 처분에 봉기하여 장로교회 정치를 사수할 것을 결의했다.


이때에 알렉산더 헨더슨(Alexander Henderson)과 사무엘 러더퍼드(Samuel Rutherford)가 지도자로 부상하였다. 두 사람은 1643년 영국 런던에서 모인 웨스트민스터 총회에 스코틀랜드 감독관으로 참석하여 영향을 끼쳤다. 세인트앤드루스 대학의 신학교수인 러더퍼드는 낙스 식 계약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즉 “통치자는 하나님과 백성과의 이중 계약 아래 있다. 백성이 계약을 깰 때 법에 의하여 제재를 받는 것과 같이, 통치자도 백성과의 계약을 깰 때 법적 제재를” 받아야 한다. 결국 찰스 1세는 영국 청교도와 스코틀랜드인들의 연합 저항에 부딪혀 설 자리를 잃고, 1649년 1월 영국 의회 군에게 붙잡혀 처형당한다.


올리버 크롬웰의 무단 정치가 끝나자 스코틀랜드인들은 네덜란드에 피신해 있는 찰스 2세(재위 1660-85)를 왕으로 옹립하였다. 영국 장로교도들도 찰스 2세가 장로교인들을 우대할 것으로 믿고 영국왕으로 세우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찰스 2세는 이러한 기대를 모두 배반하고 장로교회의 신앙을 고백하는 수많은 계약파 성도들을 무참히 고문하고 살해하였다.


찰스 2세의 사후, 그의 동생인 제임스 2세가 왕이 되었다. 그는 영국과 스코틀랜드를 가톨릭 화하려 했다. 그의 정책에 따라 나타난 저항은 신속했다. 1688년 명예혁명으로 제임스 2세의 딸인 메리가 남편 윌리엄(William of Orange)과 같이 영국에 입성하였다.

네덜란드인 윌리엄은 이미 개혁주의자였다. 메리는 종교 관용령을 선포했다. 1690년 스코틀랜드 의회는 감독주의를 폐지하고 장로 정치를 유일한 그리스도 교회의 정부 형태로 승인했다.


B. 초기 퓨리탄


2. 에드워드 데링 (Edward Dering, 1540 - 1576)

에드워드 데링은 켄트(Kent)의 명문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1572년에 앤 로크(Anne Locke)와 결혼했다. 신부는 존 녹스(John Knox)의 설교를 흠모하였고 제네바에서 살기도 했던 부유한 과부였다. 청교도 학자인 패트릭 콜린슨(Patrick Collinson)은 데링을 이렇게 평가했다. '그는 청교도의 원형이다. 그의 생애와 사역은 그의 뒤를 따를 17세기 후배들에게 삶의 모델이 된다. 그는 청교도 정신의 긍정적인 자질들이 어떤 것인지를 가장 훌륭하게 예시한다.

데링은 케임브리지의 크라이스트 대학(Christ's College)에서 공부하였다. 이때는 메리 여왕의 통치 초반기였는데 케임브리지가 청교도의 모판이었다. 데링이 동역 자들에게 보낸 서신을 보면 그는 복음주의 신앙에 불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주된 신학적 관심은 죄로부터의 구원이었다. 즉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참 신앙을 통해서 대 심판 날에 구원을 받을 수 있으며, 어떻게 신자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신분을 보장 받을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데링은 당시의 가장 우수한 헬라어 학자의 한 사람으로 손꼽혔다. 그는 엘리자베스 여왕이 1564년 케임브리지 대학을 방문했을 때 헬라어 연설자로 선정되었다. 그는 대주교와 친분이 있어 중요한 행사에 설교할 수 있는 특권을 누렸다. 1570년은 그의 경력에 하나의 분수령이 되었다. 그는 국교회의 사역 수준이 너무도 저질인 것에 크게 분개하였다. 그의 친구들에 의하면 데링은 이러한 감정을 그의 설교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내었다.


1570년 2월 25일 그는 엘리자베스 여왕의 채플에서 설교했는데 여왕을 대놓고 면박하였다. 그는 여왕이 무가치한 교회 사역자들을 제거해야 할 의무를 게을리 한다고 꾸짖었다. 그는 그런 자들을 '놀고 먹는 자, 사기꾼, 기회주의자'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런 목사들은 '눈 먼 길잡이며 짖지 않는 개들'이라고 혹평하였다. 데링의 질책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는 여왕의 면전에서 책임 추궁을 하였다. "이러한 우상 숭배가 자행되고 있는데도 당신은 가만히 앉아서 방관만 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당신에게 책임을 물으실 것입니다."


휫기프트(Whitgift, 나중에 대주교로 승격됨)라는 사람은 여왕 앞에서 설교할 때가 되면 이를 여왕에게 잘보이려는 기회로 이용하였다. 그러나 데링은 휫기프트와는 달리 여왕의 큰 권력에는 그에 비례하는 책임이 있음을 상기시키길 주저하지 않았고 그런 지적으로 받게 될 결과에 대해 전혀 개의치 않았다. 아마 그는 자신이 결핵으로 얼마 살지 못할 것을 알았기 때문에 야심이나 자신의 유익을 따르는 유혹에서 자유로웠을지 모른다. 사실상 그는 결핵으로 일찍 죽었다. 엘리자베스 시대의 설교치고 데링이 여왕의 책임에 대해서 견책한 담대한 설교보다 더 많이 인쇄된 메시지가 없다.


목회자들의 한심한 영적 상태를 노출시킨 이러한 용기 있는 설교들은 캔터베리의 대주교인 파커(Parker)와 엘리자베스 여왕의 대신이었던 세실(Cecil)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데링의 영향력이 줄어든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그러나 데링은 런던의 감독인 샌디즈(Sandys)의 신임을 받아 런던의 세인트 폴(St. Paul) 대교회에서 설교할 수 있는 특권을 받았다. 이곳에서 데링은 심도 깊은 감동적인 히브리서 강해 시리즈로 당대의 최대 설교자라는 평가를 받았다.


1570-2년까지는 카트라이트, 필드, 윌콕스 등의 글로 인해 야기된 교회 정치에 관한 논쟁이 극심하였다. 데링은 소환되어 이들의 주장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히라는 요구를 받았다. 데링은 퍼킨스와는 달리 조직적인 신학자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는 교회 정치에 대해서 그다지 투명한 편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의 대적자들은 데링이 누리는 특권과 직분을 박탈하려고 결단하였다.


그러나 그는 고관들과 친분이 두텁고 그들의 보호를 받고 있어 제거하기가 어려웠다. 그의 입을 막으려던 모든 시도가 실패로 끝났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데링을 침묵시킬 뿐만 아니라 강의도 못하게 막으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이것마저 성공하지 못하였다. 여왕의 대리자들 사이에서 데링을 고발할 죄목을 작성하는 문제를 놓고 의견의 합치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데링의 사역에서 편지 쓰기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다. 그는 높은 신분과 영향력이 큰 귀부인들의 영적 상담을 위한 편지들도 썼다. 청교도 사역을 가장 열심히 지원한 사람들은 흔히 여성들이었는데 이것은 청교도 운동의 한 특징이었다. 그들은 대부분 종교개혁에 깊이 헌신된 자들이었으나 그들의 남편들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허다하였다. 데링의 서신 수신자의 한 사람으로서 허니우드(Honywood)라는 여자가 있었다. 그녀는 구원의 확신 문제로 몹시 시달렸다.


그녀는 한때 존 폭스에게 자신이 손에 쥐고 있는 유리잔처럼 확실히 정죄를 받았다고 말하면서 잔을 마룻바닥에 내던졌다. 놀랍게도 그 유리잔은 깨어지지 않고 그대로 되튕겨졌다고 한다!


데링은 36세로 죽을 때 동료 사역자들이 둘러서서 그의 임종을 지켜  보았다. 그리고 그들은 데링의 마지막 말들을 기록하였다. 그는 청교도 운동에 귀중한 공헌을 남기고 이 세상을 떠났다.


3. 존 도드 (John Dod, 1550 - 1645)

존 도드는 체샤이어(Cheshire)에서 태어났다. 그는 케임브리지의 지저스 대학(Jesus College)에서 공부하였다. 도드는 본성에 따른 죄의 상태에 빠져 살던 어느 날 대학 관리인에게 낼 돈을 바치지 않았다는 지적을 받고 화를 벌컥 내다가 고열로 인해 거의 쓰러졌다. 이때 '그의 죄들이 무장 군인처럼 도드를 덥치면서 그의 생각과 마음이 바뀌는 변화가 일어났다'고 한다. 그의 회심은 참된 것이었으며 새 생명이 그에게서 시작되었다. 그런데 나중에 대학 관리인은 존 도드에게서 돈을 지불받았음을 기억했다고 한다.


도드는 인기 있는 설교가여서 부르는 곳이 많았다. 그는 옥스퍼드셔(Oxfordshire)에서 20년 동안 목회하였다. 그의 설교는 수백 명의 영혼들을 회심케 하는 도구로 쓰여졌다. 그는 4명의 다른 설교자들과 함께 밴 버리(Banbury)에서 공개 강해 실을 세우고 사람들을 가르쳤다. 그는 힐더샘처럼 1604년부터 계속 심한 박해를 받았다.


윌리엄 할러(William Haller)는 '청교도의 상승'(The Rise of Puritanism)이라는 저서에서 도드를 영적 동지애의 대표적인 경건한 인물이라고 말하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그는 잉글랜드인의 유머를 가졌고 재치 있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은사가 있었다." 카트라이트(Cartwright)는 도드에 대해서 "목회 적 기능 면에서 그는 어떤 사람의 수준에서도 메시지를 전할 수 있는 가장 뛰어난 인물"이라고 평하였다.


다음은 그의 한 제자의 말이다. "그의 말은 모두 하나의 설교였다. 그의 말은 마치 누구나 먹을 수 있는 맛들인 음식과 같았다. 그는 재치와 흥미로 내용 있는 메시지를 골고루 섞어 전하였다. 만약 그의 말들을 모두 수집했다면 헬라어로 된 플루타르크 영웅전이나 혹은 라틴어로 된 다른 어떤 작품들보다 더 많았을 것이다."


또한 이런 이야기도 있다. "복음이 무엇인지 모르는 단순하고 평범한 사람들이 그의 설교를 듣고 오면 대화의 주제가 항상 도드의 메시지가 되었다. 도드는 일반 서민들이 복음의 신비를 알아들을 수 있도록 그들의 어휘와 언어 스타일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큰 효과가 있었다."

도드의 말 가운데 한 가지를 골라 소개한다. "나는 준비하지 않은 새 설교를 하기보다는 준비된 옛 설교를 열 번이라도 반복하겠다."


존 도드는 주일에는 두 번, 주중에는 한 번 설교하였다. 설교가 끝날 때마다 그의 아내는 목사관의 문을 열고 사람들을 환영하였다. 그는 여러 사람들을 식사에 초대하였다. 그중에는 집사들처럼 그를 도운 6명의 과부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의 아내가 음식이 부족할 것을 걱정하면 그는 이렇게 대답하곤 하였다. "좋은 벗들이 없는 것보다 고기가 없는 것이 더 낫소. 이 집은 추워도 무엇인가 줄 것이 있소." 도드 자신은 조금만 먹고 손님들에게는 많이 권하였다. 그리고 계속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는 할말이 많았다. 그가 피곤해지면 맥주를 섞은 작은 포도주 한잔을 마셨다. 그리고는 밤이 늦도록 말씀을 나누어 주었다.


많은 사람들이 조언을 받으려고 도드를 찾았다. 잘 알려진 청교도들이었던 좁 스록모톤(Job Throckmorton)과 존 프레스톤(John Preston)은 자신들의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고는 도드의 지역으로 이사하였다. 가까이에서 도드의 영적 자문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좁 스록모톤은 청교도 목사로서 의외로 자신의 구원의 확신에 관한 문제를 갖고 있었다. 그는 죽기 직전에 도드에게 물었다. "이 세상을 떠나가면서 아무런 위로를 찾지 못하는 사람에게 당신은 무엇이라고 말하겠습니까?" 도드는 이렇게 반문하였다. "당신은 이 세상을 떠나가면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부르짖으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당신은 무엇이라고 말하겠습니까?" 이 말은 스록모톤 목사의 시달린 영혼에게 위로를 주었다. 그는 곧 죽었지만 주님 안에서 기뻐하며 이 세상을 떠날 수 있었다.


도드는 95세까지 장수하였다. 그래서 그가 목회 사역뿐만 아니라 잉글랜드를 떠나 새 생활을 위해 미국으로 건너가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거쳐 온 긴 인생살이의 여러 경험들과 성경 말씀을 토대로 지혜로운 상담을 해 줄 수 있었다.


4. 윌리엄 퍼킨스 (William Perkins, 1558 - 1602)

윌리암 퍼킨스(William Perkins)는 44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지만 커다란 공헌을 하였던 원조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왓톤(warton)에서 태어났으며, 케임브리지 그리스도 대학(Christ's College, Cambridge)에서 공부하였다.

그는 어렸을 때 학자적인 기질이 엿보였으나 그의 성격은 거칠고 험하였다. 그러나 그가 개종한 후에는 전형적인 칼빈주의자가 되었으며 영적 생활의 욕구가 강하였다. 퍼킨스는 목사 안수를 받았으며 첫 목회는 케임브리지 감옥의 죄수들에게 설교를 하는 것이었다.


하루는 그가 하나님의 심판과 죽음에 대해서 별로 두려워하지 않는 젊은 죄수와 만나게 되었다. 퍼킨스는 그 청년의 곁에서 무릎을 꿇고, "형제여!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은총이 당신에게 새로운 힘을 줄 수 있는가를 보여 주고 싶소. 그리스도의 구원은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당신도 죄를 용서함 받는 체험을 갖고 구원을 받으십시요!"라고 눈물로서 간곡히 호소하였다. 이 청년 죄수는 예수를 영접하게 되었다. 그리고 침착하게 그의 사형 집행 날짜를 기다렸다. 그 청년은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총이 임하기를 바랬다.


퍼킨스는 학창시절에 예정론에 대해서, 냉담하고 인정이 없는 신학이라고 반론을 제기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감옥전도를 통해서 예정론을 확고히 믿게 되었다. 모든 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구세주이심을 믿고 영접할 때 구원받을 수 있음을 가르쳤다.

퍼킨스의 예정과 파멸을 다룬 금사슬 이론(Golden Chain)은 청교도 신학과 설교에 대한 근본적인 교리였고 그것이 오늘의 개혁주의 교리로 나타났다. 퍼킨스의 종말론에 대한 분석과 조직은 놀랄만하며 특별히 택함 받은 성도들의 죽음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역 관계를 명백히 하였다. 그는 믿음이란 죄인들의 자유의사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찾아오심에 대한 결과라고 가르쳤다. 그리고 진정한 회개는 성화(聖化)의 결과이며 완전한 순종에 이르게 한다고 가르쳤다.


금 사슬 이론의 흥미 있는 관점은 종교적인 열광자들의 참회는 단지 일시적이며 영원성이 없다고 하였다. 퍼킨스는 구원은 세례나, 신앙고백, 교회의식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설교하였다. 그리고 성도들의 진정한 인내와 순종과 선행은 구원의 결과라고 하였다. 퍼킨스는 청중들에게 잘못된 구원의 확신을 주지 않기 위해서 매우 조심하였다.


퍼킨스가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행한 구원론에 대한 설교는 청교도 운동이 17세기에 발전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위대한 신학자로서 퍼킨스는 케임브리지의 그리스도 대학의 연구원이자 성 앤드류 대학의 교수로서 명성을 떨쳤다.

그의 설교는 명확하고 실제적이며, 강한 영적 힘이 있었다. 율법과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많이 포함된 설교였지만, 그의 설교의 가장 뚜렷한 특징 중의 하나가 불안한 인간의 양심을 다루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서 사자성 같은 웅변을 토하였던 퍼킨스는 영국에서도 특이한 청교도주의 자였다.


윌리암 에임즈(William Ames)같은 청교도 저술가는 불안한 인간 영혼에 대한 의구심과 공포를 다루는데 뛰어 났던 후대 청교도 저술가였다. 그는 처음에 그러한 주제에 대한 퍼킨스의 설교를 듣고서 목사직을 선택할 수 있도록 인도 받았다.

이들은 퍼킨스의 설명적인 설교와 경건한 삶을 영위했던 철저하고도 전형적인 청교도 기준에 의하여 영향을 받았다. 이런 영향에 의해 청교도의 젊은 세대는 기적같이 쓰임 받은 퍼킨스에 의하여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영향을 받았다.


퍼킨스는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에 관한 논문을 주로 썼고, 그의 갈라디아서, 마태복음서, 히브리서의 강해설교도 부분적으로 출판되었다. 양심의 사례(Cases of Conscience)는 그의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저작들은 라틴어, 불어, 화란어, 스페인어로 거의 번역 출판되었으며 퍼킨스의 사역이라는 3권의 책에 그의 논문들이 모두 담겨져 있다.


윌리엄 퍼킨스는 케임브리지에서 사역했는데 놀라운 성과가 있었다. 그는 청교도 동지들의 특징인 영적 자질과 행정적 재질이 겸비된 사람이었다. 그는 강단에서도 특출하였고 펜으로도 많은 글을 써서 케임브리지 대학 출판사를 바쁘게 하였다. 그는 자기 시대의 다른 어떤 목회자들보다 더 많은 저술을 했는데 후속 세대의 책꽂이에도 그의 책들이 꽂혀 있었다.


처음으로 그는 설교를 주제로 『프라퍼싸잉의 기법』(The Art of Prophesying)이라는 설교학 저술을 한 사람이기도 하다. 퍼킨스의 설교는 적용에 중점을 둔 것이었다. 이것은 청교도들의 특징이었다. 그는 설교를 준비할 때 청중의 필요를 세세히 고려하였다. 그의 글들은 질과 양에 있어 당시의 다른 모든 청교도들을 능가한다.


윌리엄 퍼킨스는 상아탑의 학자가 아니었다. 예로써 그는 감옥에 있는 죄수들을 돕기 위해서 옥중 사역 허가를 받고 많은 영혼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였다. 물론 그는 세인트 앤드루스(St. Andrew's)와 같은 곳에서도 그의 설교를 들으러 온 대규모의 군중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사람들은 그의 설교가 모두 율법이고 동시에 모두 복음이라고 평하였다. 말하자면 죄의 수치를 드러낸다는 점에서는 모두 율법이었고, 잃어버린 죄인들에게 전적인 용서가 거저 주어진다는 점에서는 모두 복음이었다. 그의 사역은 죄인들로 하여금 영벌의 실체를 보게 해서 영혼이 깨어나게 하는 각성 사역이었다. 퍼킨스는 커뮤니케이션에 남다른 은사가 있어 '저주'라는 단어를 발음하는 것으로도 죄인들이 떨었다고 한다.


퍼킨스는 노동을 강조하면서도 레크리에이션의 필요성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의 레크리에이션 사상은 노동 중심적이어서, 모든 유희를 소명을 위해 있는 것으로 보았다. 곧 놀기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일하기 위해서 논다는 것이다. 합법적인 모든 레크리에이션은 일상적인 것들을 사용하지만, 어떤 면에서 제한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레크리에이션은, 첫째, 거룩한 일들 곧 하나님의 말씀, 성례, 기도 또는 다른 신앙의 행위 등이 그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되고 둘째, 인간의 죄나 허물을 구성하는 것이 그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되며,...셋째, 하나님의 심판이나 인간의 죄에 대한 벌을 그 대상으로 삼아서도 안 되기" 때문이다


레크리에이션과 관련된 경기에는 재치나 힘을 겨루는 것, 모험적인 것, 그리고 이 양자가 혼합된 것이 있다. 재치나 힘을 겨루는 경기에는 활쏘기, 사격, 달리기, 레슬링, 펜싱, 음악 그리고 체스와 장기 등이 있는데, 이러한 게임들은 심신의 단련이 주요 목적이며, 권장할 만하고 흥미도 있다고 하였다. 모험적인 경기는 오직 모험만이 지배하는 것으로, 영적인 측면에서 볼 때 합당하지 않다고 한다. 왜냐하면, "첫째, 모험을 위한 게임은 단순히 운에 의지하며, 이렇게 운에 의지하는 것은 일종의 종교행위로서 하나님을 주사위같이 결정권자로 만들기 때문이다. 둘째, 이런 경기는 레크리에이션이 아니고 공포나 슬픔과 같은 역겨운 감정을 유발하는 경기들이기 때문이다...셋째, 탐욕이 경기의 원인이어서 보통 돈을 걸고 경기를 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세 번째 경기는 부분적으로 모험이, 부분적으로 재치가 혼합되어 있는 것으로, 모험으로 시작해서 재치로 승부를 결정하는 경기이다. 이 경기는 모험에 의존함으로써 보완하는 경우이다. 이러한 경기는 "영적인 측면에서 볼 때 권장되지 않지만, 크게 규제되지도 않는다. 다만 이런 경기를 할 때는 아주 절제하면서 즐겨야 한다."고 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① "최소한도의 사행성과 최대한도의 평판을 지닌 레크리에이션을 선택해야" 하며, ② "우리 자신과 타인에게 유익을 주고 하나님의 영광을 높여야" 하고, ③ "그 목적은 우리의 심신을 건전하게 하는 데 있어야 "하며, ④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까지도 적당히 하고 절제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퍼킨스는 우선 가정을 세우고, 그곳에서 올바로 훈련된 성도들이 사회에 나아가 자신의 소명을 따라 이웃과 하나님을 섬김으로, 경건하고 거룩한 사회를 이룩하고자 하였다.


 5. 존 로저스 (John Rogers, 1566 - 1636)

에섹스 데드햄(Dedham, Essex)의 존 로저스는 청교도인 에섹스 웨더스필드의 리처드 로저스와 가까운 인척이었다. 리처드는 존 로저스가 케임브리지에서 공부할 때 후원을 해 주었다. 그는 존 로저스가 세속적인 쾌락을 위해서 자기 책들을 팔아도 참아 주었다. 그런데 결국 존은 리처드 로저스를 너무도 실망시켜 리처드가 그를 포기하려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리처드의 아내가 한 번 더 기회를 줄 것을 사정하였는데 이것은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연상시킨다. "포도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 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 대답하여 이르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후에 만일 열매가 열면 좋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 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눅13:7-9). 리처드 로저스의 아내가 존 로저스에 대해 인내한 것은 보상 있는 일이었다. 존이 회심하게 되었고 나중에 청교도 설교자들 중에서 가장 능력 있는 설교자의 한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존 로저스에게 내린 설교의 은사는 너무도 커서 사람들이 그의 설교를 떨지 않고 들을 수 없었다고 한다. 많은 영혼들이 그의 메시지를 듣고 예수님을 믿었다. 그는 자기 시대에서 영혼을 일깨워주는 가장 훌륭한 설교자의 한 사람이었다. 브라운리그(Brownrigg) 감독은 이렇게 말하곤 하였다. "존 로저스는 몇 자 적지 않은 급히 쓴 노트 하나만 가지고도, 우리 감독들이 잘 준비된 음악 순서의 지원을 받으면서 할 수 있는 설교보다 훨씬 나은 말씀을 전할 수 있다!"


멀리서도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런데 교회에 자리가 없어 들어가지 못해 실망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잘 알려진 청교도 목사인 자일스 퍼민(Giles Firmin)은 자신이 존 로저스의 첫 마디를 듣고 회심케 되었다고 술회하였다. 어느 날 젊은이들이 존 로저스의 설교를 들으려고 막 문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때 로저스가 그들을 보고 말하였다. "여기 젊은이들이 그리스도를 위해 들어왔소.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당신들에게 유익할 것이 없소. 그렇다면 그리스도를 믿으시오!" 자일스 퍼민은 이 첫 말에 당장 마음이 붙잡혀서 즉석에서 회심하였다.


존 로저스의 설교 능력은 유명한 청교도인 토마스 굿윈(Thomas Goodwin)의 체험에서 잘 예시되었다. 토마스 굿윈은 당시에 젊은 청년이었다. 그는 존 로저스의 설교를 듣고 속절없는 회개의 눈물을 흘리면서 하나님께 감사하였다.

이 책 청교도 설교자들의 설교 특징의 대중을 사로잡는 설교 항에서 예를 들은 대로였다.



 6. 리차드 십스 (Richard Sibbes, 1577 - 1635)

리처드 십스는 케임브리지의 세인트 존스 대학(St. John's College)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는 트리니티 대학(Trinity College)에서 강의를 맡았는데 그의 설교로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다. 이중에는 나중에 미국의 뉴잉글랜드(New England)로 건너가서 유명한 지도자가 된 존 코튼(John Cotton)도 있었다.


설교자와 교사로서 십스의 평판은 자자해서 런던의 그레이즈 인(Gray's Inn)에 정규적인 사역을 인도하게 되었다. 당시의 그레이즈 인은 지금도 그렇지만 법률 공부와 법무에 관해서 법조계의 중심부였다. 벤자민 브룩(Benjamin Brook)은 이렇게 말하였다. "해박한 법률가들 외에도 많은 귀족과 상류층이 일반 시민과 함께 십스의 메시지를 들으려고 몰려들었다. 십스의 사역에서 받는 영적 유익으로 사람들은 하나님을 크게 찬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십스는 청중의 머리와 가슴에 단단한 기초를 놓으려고 항상 주의를 기울였다. 그는 사생활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선을 베풀었고 목회자로서는 매우 훌륭한 목회를 하였다.


1626년에 십스는 케임브리지의 세인트 캐서린 대학(St. Catherine's College)의 학장이 되었다. 그의 런던 교회사역 조건에 의하면 다른 성직을 겸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그레이즈 인 교회의 부목이었고 결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중에 대학이 있는 케임브리지로 여행하는 일이 무리가 되지 않았다.

캐서린 대학은 십스가 학장이 되었을 때 장기간의 침체를 겪고 있었다. 재정은 거의 바닥이었고 학생들도 몇 명밖에 없었다. 십스는 이러한 상태를 완전히 바꾸어 캐서린 대학 역사에서 가장 빛나는 시기로 일신시켰다.


케임브리지에서 십스가 목회자를 훈련시킨 일의 영향은 윌리엄 퍼킨스(William Perkiins)를 제외하고는 따를 자가 없었다. 십스는 퍼킨스가 사역했던 세인트 메리 교회에서도 설교하였는데 그 영향은 런던의 그레이즈 인 교회에서의 사역 효과와 같은 것이었다.


리처드 십스는 심령을 치유하는 의사였다. 그는 영혼의 갈등을 말씀으로 풀어 주면서 심령을 치유하는데 1세기 이후에 『신앙 정서』(The Religious Affections)라는 가장 유명한 저술을 한 조나단 에드워즈(Johathan Edwards, 1703-1758)의 사역을 가리키는 화살표가 되었다. 십스는 『상한 갈대와 꺼져가는 심지』(The Bruised Reed and The Smoking Flax), 『돌아오는 탕자』(The Returning Backslider), 『영혼의 갈등』(The Soul's Conflict)과 같은 대표작들을 남겼다. 십스는 가장 유명한 청교도의 한 사람이다. 그의 영향은 청교도 운동의 구석구석에 퍼졌다.



C. 절정기 퓨리탄


7. 존 밀턴(John Milton, 1608-74) : 합리적 청교도


밀턴은 1608년 12월 9일 런던에서 태어났다. 공증인과 사채업으로 상당한 재산을 가진 아버지와 자애로운 어머니 밑에서 밀턴은 유년기를 보냈다. 아버지는 국교도였고 상당한 수준의 작곡을 할 정도로 음악에 재질이 있었다. 성 바울 학교에서 밀턴은 라틴어, 히브리어, 헬라어를 공부했고, 근대어 같은 부분은 가정 교사로부터 보충 수업을 받았다.


그는 학문에 심취했고, 12세부터는 자정 전까지 책을 놓는 일이 없었다. 과도한 독서는 후일 실명의 원인이 되었다. 1626년 담임 교수와 충돌하여 1년 정학을 받은 일 외에는 큰 탈 없이 학문에 매진하여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크라이스 칼리지 문학사(1629), 문학 석사(1632) 학위를 취득하였다.

밀턴은 학창 생활 7년 동안(1625-32) 라틴어로 운문을 쓰는 법과, 작품 속에서 자아를 표출하는 기술을 배웠다. 그의 첫 영시, “어떤 아기의 죽음에 대해”(On the Death of a fair Infant)는 엘리자베스 시대 풍으로 1628년 쓰여졌다.


그가 21세의 생일 직후에 쓴 “그리스도 탄생의 아침에”(On the Morning of Christ’s Nativity)는 혈기 왕성한 젊은 밀턴을 가둬 두고 신앙적 시를 통해 영성의 승화를 시도한 것같이 보인다(1629). 이 작품과 1628년에 쓴 “방학에”(At a Vacation Exercise)에서 고전 문학과 르네상스 인문주의 그리고 기독교 사상에 두루 영향을 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때 밀턴은 부모의 권유에 따라 성직자의 길을 택할까 생각해 보았으나 1630년경 마음을 바꾸었다. 영국 국교회의 제도에 들어가는 것을 노예 생활로 생각했으며, 한편으로는 시에 대한 헌신 때문에 성직을 포기한 성 싶다.

6년(1632-38) 동안 밀턴은 호튼(Horton)에 머물렀다. 이 시기에 철학, 고전 문학, 역사, 수학 및 음악 등 폭 넓은 교양 과목을 공부하였다. 자유사상을 통해 점잖고 관대한 예술 세계를 접하려는 젊은 밀턴의 야심이 엿보인다.


1632년경 밀턴은 궁정 취향 가면극 아케이드(Arcades)와 1634년 또 다른 가면극 코머스(Comus)를 썼다. 코머스는 밀턴의 선악 사상을 최초로 극화시킨 작품이다. 1637년 모친 사망 후 밀턴은 이탈리아를 방문하여 이탈리아 예술가들과 지식층 인사들로부터 정중한 환대를 받았다(1638-39).

나폴리에서 밀턴을 환영한 후작 만소(Giambattista Manso, Marquis of Villa)와 천문학자 갈릴레오와의 교분은 밀턴에게 자신감을 심어 주었다.


밀턴이 이탈리아 여행을 하고 있을 때 영국 정세는 불안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당시는 제임스 1세의 아들 찰스 1세(재위 1625-49)가 국왕이었는데, 그는 왕권신수설 이론으로 영국과 스코틀랜드를 통치했다. 찰스 1세는, 반 칼빈주의 자로 열열한 국교도인 윌리엄 로드(William Laud, 1573-1645)를 켄터베리 대감독으로 임명하여 비국교도들을 탄압하였다.

당시 의회는 비국교도인 청교도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왕과 의회는 자주 충돌했고, 왕은 청교도들의 간섭을 싫어하여 11년 동안(1629-40) 의회를 소집하지 않았다.


찰스 1세는 스코틀랜드에도 국교회 의식을 사용하도록 명령하였다. 존 낙스 이래 장로교회 정치가 뿌리내려진 이곳 사람들은 찰스 1세의 강제 명령에 대항하여 영국을 공격하였다. 국왕은 군비 조달을 위해 할 수 없이 의회를 소집했고, 이 의회는 1640년에 시작하여 1660년에 막을 내렸다.


이 질질 끈 영국 의회를 장기 의회라 부른다. 장기 의회 기간 중에 청교도들은 눈에 가시 같은 국교회 대감독 로드의 목을 요구했고(1645년 1월 참수됨), 나중에는 왕정에 대항하여 청교도 혁명 전쟁으로 비화했으며(1642-49), 마지막으로는 올리버 크롬웰 장군에 의해 찰스 1세를 사형에 처하였다(1649년 1월).


밀턴은 국교회의 사치스러운 의식, 대감독 로드의 전횡 그리고 국교회와 영국 왕실과의 정치적 타협에 불만이었다. 그러나 이제 청교도 세력의 사회 참여로 그의 불만을 해소할 기회가 왔다. 이탈리아에서 돌아온(1639년 7월) 후 밀턴은 뜨거운 정열을 쏟으며 정치 세계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1641년에 쓴 소논문 “영국에 있어서의 개혁”(Of Reformation in England)에서 영국의 감독 제도와 주교들을 공격하였고, 1642년에 정리한 “감독제에 반대하는 이유”(The Reason of Church Government Urged against Prelaty)에서는 이상적 교회 정치는 감독제가 아니라 사도 시대같이 민주적 단순성과 순수성을 보유한 장로 제도라고 조리 있게 설명하였다.


1643년 5월 밀턴은 연하인 메리 포웰(Mary Powell)과 결혼하였다. 그녀는 왕당파 지주의 딸이었으나 고등 교육을 받지 못한 무사 태평한 여자라고 밀턴은 후에 토로하였다. 33세의 대학자와 무학의 소녀와의 결혼이 평탄할 리 없었다. 결혼 직후 그녀는 친정으로 돌아가 3년 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밀턴은 3년(1643-45)에 걸쳐 그의 “이혼론”(Doctrine and Discipline of Divorce)을 발표하였다. 부부간에 애정이 없는 경우에는 이혼이 필수불가결하다는 것이다. 결혼은 애정과 우정으로 맺어진 능동적 관계이기 때문에 당시 유일한 이혼 사유인 간통보다 애정 없는 것이 더 큰 이혼 사유라고 정의했다.

불행한 결혼은 1652년 포웰이 죽음으로 끝났다. 밀턴은 1656년에 캐더린 우드코크와 두 번째 결혼을 하였으나 그녀도 1658년에 출산 직후 사망하였다. 1663년 밀턴은 젊고 상냥한 민셜(Elizabeth Minshull)과 결혼하였다.


밀턴은 크롬웰의 공화정에 참여하여 정부 활동에 개입했으나 1660년 왕정이 복고되자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다. 그렇다고 그가 정치적 사상을 버린 것은 아니다.

 그의 대 작품들인 실락원, 복락원, 투사 삼손은 모두 정치적 메시지로 가득 찬 것임을 알아야 한다.

밀턴은 1652년 완전히 실명하여 육체적 고통을 받았고, 왕정 복고 후에는 정신적 고뇌의 시간을 보내기도 하였다. 이러한 환난과 역경은 그를 대 서사 시인으로 만들어 주었다.


7. 존 번연(John Bunuan, 1628-88) : 청교도 순례자

성경 다음으로 가장 많이 읽혀지는 책 중의 하나가 존 번연(John Bunyan, 1628-88)의 천로 역정이다. 번연은 이 책에서 가장 평범하고 소박하면서도 적나라하게 우리 인간의 영성 체험을 제시한다.

그가 사용한 언어는 엄청난 사유를 요구하는 철학 용어나 과학 용어가 아니다. 번연은 주위에서 흔히 보고, 느낄 수 있는 일상생활 언어를 꾸밈없이 우리에게 제시한다.

그러나 이 언어 속에는 다이너마이트와 같은 역동적 힘이 있다. 참된 신자의 영혼 속에 부각되는 상승된 영적 희열이 있고, 왜곡된 믿음을 가진 위선자들에 대한 풍자적 책망이 있으며, 무엇보다도 진리를 위해 살아가려는 모든 이들에게 주는 위로와 격려가 있다.


영국의 청교도 작가이자 설교자였던 존 번연은 기독교 문학의 고전이 된 기독교인의 일생을 그린 우화집 세계 역사상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힌 책으로「천로역정」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인물이다. 이 책은 종교개혁이 강조하는 "이신칭의"(믿음으로 의롭게 된다)와 성경의 만인 이용을 설명한 기독교인의 생활에 관한 우화집이었다.


베드퍼드의 벽촌에서 땜장이의 아들로 1628년 태어나, 아버지의 직업을 이어 받었다. 겨우 읽기·쓰기만을 배운 그는 16세 때에 크롬웰의 의회군(議會軍) 수비대에 들어갔다. 1647년 의회군이 해산되자 고향으로 돌아가, 결혼하여 네 자녀를 두었다. 그는 구원을 얻기 위해 자신의 생활을 새롭게 하고 나쁜 습관을 버렸지만,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지 못했다.


마침내 그는 마틴 루터의 갈라디아서 강해에서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를 강조하는 내용을 읽고서 회심하였다. 그리고 베드포드에서 평신도 설교자로서 사역을 시작했다. 낮에는 냄비와 팬을 수선하고, 밤과 주말에는 영혼을 구령했다. 그의 능력 있는 설교로 인해 수많은 회심 자들이 생겼고, 또 강한 대적 자들도 나타났다. 그러던 중 찰스 2세가 복위하여 크롬웰이 통치하던 시기에 인정했던 종교의 자유를 취소하는 일이 일어났다.


1660년 존 번연은 허가(license) 없이 설교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었다. 설교를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면 풀려날 수 있었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고 1672년까지 감옥에 갇혀 있었다. 그가 투옥되었던 기간에는 그의 아내가 만든 구두끈을 팔아 번 돈과 그의 책에서 나오는 수입으로만 가족들이 생활을 해야 했다. 그는 1665년 잠시 자유의 몸이 되었지만, 다시 투옥되었다.

존 번연은 폐렴으로 투병 생활을 하다가, 1688년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설교를 그치지 않았다.


번연이 지은 60여권의 책 가운데 가장 유명한 책은 천로역정(Pilgrim's Progress)인데, 감옥에 면회 오는 아이들에게 이야기해 주기 위해 쓰기 시작한 책으로 크리스쳔 소설 중에서 가장 유명하고, 또 오래 동안 사랑 받아 왔다.


번연이 옥중에 수감되었던 일은 아마도 <천로역정>의 탄생을 위한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였는지도 모른다. 장차 망하게 될 죄악의 도성을 떠나 천성을 향하여 떠나는 한 순례자의 여로를 장엄한 서사시처럼 그려내고 있는 이 <천로역정>은 고뇌와 회심, 전도와 박해 그리고 마침내 최후의 승리로 이어지는 번연 자신의 고달픈 생애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라고 평가할 수 있겠다.

1678년 출판된 이 책은 여러 세대에 걸쳐 영어권의 독실한 그리스도인들에게 깊은 사랑을 받았으며 역사상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혀진 신앙서적이 되었다. 천로역정은 1678년에 처음 출판되었고 출판 첫 해만 10만 부 이상이 팔렸으며, 오늘날까지 베스트셀러로 남아 있다.


<천로역정>의 원제목은『순례자(Pilgrim)의 여로(Progress)』정도로 번역할 수 있겠으나 우리나라에서는 1895년 제임스 게일 선교사가 『천로역정』이라고 이름 하여 이 후 모든 번역본들이 이 제목을 취해왔다.



9. 존 오웬 (John Owen, 1616-1683)

죤 오웬은 '청교도의 왕자'라고 불린다. 맞는 말이다. 그의 전집(Works)은 건전한 가르침을 추구하는 자들이라면 제일 먼저 택해야 할 책들이다. 현재 그의 글들은25권으로 나와 있다. 그의 전집은 영어로 된 신학서의 최대 보고이다.

오웬은 '청교도들의 다윗 왕'이라고 불린다. 이것은 우리가 그의 가르침을 전반적으로 신뢰할 수 있다는 뜻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는 당시의 도전과 압력에 대응하기 위해서 책을 썼다. 그러나 그의 모든 글에는 힘과 일관된 사상이 있고 항상 성경의 권위에 충실하다. 오웬의 가르침의 균형과 예리한 통찰에 있어 맞설 자가 없다는 것은 여러 실례로 증명될 수 있다.

예로써 『성령의 인격과 사역』(The Person and Work of the Holy Spirit-Works, vol. 3), 『그리스도의 영광』(The Glory of Christ), 『죄의 억제』(The Mortification of sin, vol.6) 등이다. 그의 『양심의 자유』(Liberty of Conscience, vol13)는 당시처럼 오늘날에도 적실성이 있는 저서이다.


오웬은 웨일즈의 좋은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너무도 머리가 좋아서 12세에 옥스퍼드 대학에 입학하여 10년 간 공부하였다. 그는 투창 경기를 즐겼으며 롱 점프 선수였다. 또는 플투트도 불었다. 그는 학자의 기질이 있어 밤에 4시간의 수면만 취하는 때가 종종 있었다. 그러나 이런 식의 일과는 올림픽 챔피언을 만들지는 않는다!


오웬은 친구들과 함께 런던을 방문하는 동안 유명한 에드먼드 캘러미(Edmund Calamy) 목사의 설교를 들으러 갔다. 그런데 캘러미 목사가 오지 않고 한 시골 목사가 대신하여 실망하였다. 그러나 성령께서 이 방문 목사를 사용하여 오웬이 구원의 확신을 갖도록 역사하셨다.


오웬의 첫 목회 지는 에섹스의 포드햄(Fordham)이라는 마을이었다. 그때 그는 메리 루크(Mary Rooke)라는 여자와 결혼했다. 그러나 이들의 가정생활의 슬픔은 현대 의학의 혜택을 입고 사는 우리로서는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비극이었다. 그들은 11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딸아이 하나만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았고 나머지는 모두 일찍 죽었다. 그나마 살아남은 딸의 결혼도 깨어져서 친정에 돌아와서 산 지 얼마 안 되어 결핵으로 사망했다.


오웬은 1646년 주일에 출석 교인이 2천 명인 런던의 한 교회에 초빙되었다. 1648년 6월에 페어팩스(Fairfax) 장군은 콜체스터(Colchester)를 포위하였다. 그때 오웬은 군인들을 위한 설교 초청을 받았다. 그는 많은 장교들과 친분을 맺었는데 그중에는 올리버 크롬웰의 사위인 헨리 아이어턴(Henry Ireton)도 있었다. 오웬의 은사는 곧 소문이 퍼져 의회에 초청을 받았고 의회에서 가장 선호하는 설교자가 되었다. 그는 올리버 크롬웰의 군종으로도 임명되었다.


1652년 그는 옥스퍼드 대학교의 부총장이 되었다. 이 직책은 각종 행정을 책임지는 자리였다. 그는 6년간의 재직 기간에 신학, 설교, 교리문답, 기도를 중심으로 살았다. 옥스퍼드의 질서는 약한 편이었다. 오웬은 관대하면서도 확고했기 때문에 효과적인 행정을 할 수 있었다. 하나의 에피소드가 있다. 토론 때 한 학생이 상스런 말을 하였다. 그는 경고를 받았다. 그래도 말을 듣지 않자 오웬 자신이 그 학생을 힘으로 강의실에서 밖으로 내쫓았다고 한다!


1658년 오웬은 회중교회의 목회자 모임에 나갔다. 이 모임은 런던의 사보이 팰리스(Savoy Palace)에서 열렸다. 그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기초한 고백서를 준비하기 위해서 토마스 굿윈, 필립 나이, 윌리엄 브리지,윌리엄 그린힐, 조셉 카릴과 함께 대표로 임명되엇다. 이것이 나중에 알려진 사보이 선언(The Savoy Declaration)이다.


오웬은 1676년 훌륭한 그의 아내를 잃었다. 18개월 뒤에 그는 부유한 여자와 재혼하였다. 그런데 이때쯤 해서 그의 건강이 악화되었다. 그러나 그는 좋은 마차를 타고 여행을 다니는 편의를 돈많은 아내 덕분에 제공 받았다.


오웬의 글은 그가 분석적이고 조형적이며 통이 큰 두뇌를 가졌음을 보여준다. 그의 글은 모두 그가 심오하게 이해한 은혜의 교리를 바탕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오웬의 문장 스타일은 현대인들에게는 쉽지 않다. 다행히도 로(R.K.K. Law)의 수고에 의해서 오웬의 대표작들에 속하는 『성령론』(The Holy Spirit), 『하나님과의 교제』(Commuinon with God), 『복음으로부터의 배도와 그리스도의 영광』(Apostasy from the Gospel and the Glory of Christ)이 요약되거나 현대어로 고쳐져서 나왔다.




D. 후기 퓨리탄


10. 요한 웨슬리 (John Wesley, 1703 - 1791)

요한 웨슬리(John Wesley)는 1703년 6월 17일 사무엘 웨슬리 목사 부부의 열다섯 번째 자녀로 태어났다. 요한 웨슬리는 신앙심이 많았던 어머니 수잔나 부인에게서 엄격한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1735년 10월 14일 요한 웨슬리는 동생인 찰스 웨슬리와 함께 식민지 주민들과 인디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미국을 향해 떠났다. 그들은 2년 동안 조지아에서 사역했으나 별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1738년 2월 1일 그는 잉글랜드로 다시 돌아왔다.


돌아오는 배 안에서 웨슬리는 모라비안(Moravian) 교도들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는 그들이 갖고 있던 구원에 대한 확신과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함에 도전을 받았다.


그리고 마침내 모라비아교도 친구인 피터 뵐러(Peeter Bohler)의 간증을 통해 구원의 확신을 얻게 되었다. '구원은 즉각적인 것이며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진리를 완전히 믿게 된다. 그 후 그의 삶은 놀랍게 변화되기 시작했다.

1739∼1791에 있었던 '대 각성 부흥 운동'이 이렇게 시작되었다. 웨슬리는 놀랍게도 자기가 설교할 때면 성령께서 강력히 역사 하시어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죄를 깨닫게 하는 역사를 목격하게 된다.


또한 '나의 교구는 전 세계요, 세계는 나의 일터다.' 외치며 세계선교를 위해 기도하였고 '이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단 한 사람만 남아 있더라도 나는 그 사람을 위하여 땅 끝까지 달려갈 것이다' 라며, 1753년 직접 발 벗고 세계선교에 뛰어들기 시작하였다.


그는 왜소하였지만 그처럼 작은 몸 안에 세계를 흔드는 힘이 들어있었다. 요한 웨슬리는 전도하기 위하여 50년 동안 말을 타고서 지구10바퀴 이상 되는 거리를 돌아다녔다. 그 틈에 2백 권이 훨씬 넘는 책을 펴냈으며, 50이 넘은 나이에도 하루 평균 32km를 다니며 복음을 전하였다. 60년 동안 한번도 걸러본 적이 없이 새벽 4시면 일어나 기도하고 설교하였고 동생과 만든 수많은 찬송가중에 1778년에는 좋은 것만 뽑아 525곡의 커다란 찬송가를 만들기도 하였다.


그가 89세의 나이로 죽을 때 두 개의 숟가락과 하나의 차 주전자, 그리고 다 낡아빠진 코트 한 벌밖에 없을 정도로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나누어 주었다. 그의 장례식이 있기 전날 그의 시신은 시티 로드 예배당에 안치되었다. 그의 시신을 보기 위해 수만 명의 인파가 몰려 왔고, 그의 묘비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었다.


"이 위대한 빛은(하나님의 보기 드문 섭리로 말미암아) 이 나라들을 비추기 위해 떠올랐다. 이 묘비를 읽는 이들이여, 하나님의 도구인 웨슬리에게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는 심정이라면 그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라!"



 11. 조지 휘트필드(George Whitefield, 1714-70) :

     복음주의적 연합운동

휫필드는 1714년 영국 남서부의 도시인 글로스터(Gloucester)에서 태어났다. 여관업자의 아들로 태어난 그의 청소년 시절은 결코 신앙적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1733년 옥스퍼드의 펨브로크(Pembroke) 칼리지에 입학한 후부터 그의 삶은 급변하고 있었다.

1735년 회심한 그는 홀리 클럽의 회원이 되었고 훗일 함께 복음적인 신앙운동을 전개했던 요한 웨슬리(1703-1791)와 그의 동생 찰스 웨슬리(1707-1788) 그리고 테론과 아스파시오(Theron and Aspasio)를 쓴 제임스 허비(James Hervey, 1714-1758), 윌리엄 모건(William Morgan)등을 포함한 친구들과 교제하였는데 이들은 1729년 봄에 시작된 홀리 클럽(Holy Club)을 시작한 창립회원들이었다. 이 모임은 후일 영국과 미국의 부흥운동과 영적 각성운동을 이끌어간 동력원(Power station)이 되었다. 이들의 엄격하고도 철저한 시간관리, 규모 있는 생활방식(method) 때문에 메소디스트(Methodists)라고 불린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휫필드에게 큰 변화를 준 책 중의 하나는 헨리 스쿠걸(Henry Scougal)이 쓴 「인간의 영혼 속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The life of God in the soul of man)이라는 책이었다. 이 책은 그에게 중생의 필요성과 이에 대한 복음적 견해를 확립시켜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신학을 형성하는 데 있어서도 상당한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1736년 6월 20일 성직(副祭)임명을 받으므로 영국 국교회 성직자가 된 그는 자기의 고향인 글로스터의 성 메리 드 크립트교회에서 첫 설교를 했는데 이것은 설교자로서 그의 삶을 이끌어간 중요한 힘이 되었다. 왜냐하면 이때의 설교에 대한 그 자신의 기록이 보여주듯이 그는 이 첫 설교에서 외적 확신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의 설교는 상당한 반향을 일으키며 목마른 영혼들에게 끊임없는 영적 해갈을 주었고 이 땅에서의 지친 삶에 새로운 힘을 공급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설교에는 수많은 청중이 모여 들었다. 휫필드에게 있어서 특별한 일은 그가 1739년부터 옥외설교 혹은 야외설교를 시작한 일이었다. 곧 그해 2월 그는 브리스톨 근처 킹스우드(Kingswood)지방 광부들에게 첫 야외설교를 시작하였는데 약 2만 명이 운집할 정도로 상당한 효과를 주었다. 이곳은 광산 도시로서, 산업혁명 초기 당시 이들은 영국 국교회의 관심밖에 있었다. 휫필드는 영적으로 소외된 이들에게 눈길을 돌려 전도의 성공을 거두었던 것이다.


두 달 뒤인 4월에는 런던에서도 야외설교를 시작하였다. 그는 공터나 들판에서 설교하였는데 때로는 수만 명이 운집하기도 했다. 1739년 4월 29일자 일기에는 "약 3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운집했다"고 했다. 이와 같은 옥외설교는 당시 저조한 예배참석에 대한 현실적 대안이기도 했지만 자신을 반대하는 영국 교교회의 벽을 넘는 방안이기도 했다. "길과 산, 물가"로 나가서 전도하며 옥외에서 설교하였던 예수님의 설교는 그의 모범이 되었다. 휫필드의 옥외집회, 야외 설교 그리고 극장 전도, 가정 선교, 도시 선교 등은 당시 교회로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다. 그래서 토마스 찰머(Thomas Chalmers, 1780-1847)는 휫필드의 방법을 '공격적 방법'(aggressive system)이라고 불렀다.


휫필드는 1736년 6월 26일 주일 그의 고향인 글로스터에서 첫 설교를 한 후부터 1770년 9월 29일 미국 뉴베리 포트(Newbury Port)에서 56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기까지 34년간 그는 오직 한가지 일, 곧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일에 몰두하였다. 잉글랜드나 스코틀랜드, 웨일즈에는 복음전도자로서 그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었다. 그가 인도했던 공중집회는 1만 8천회에 달했고 스코틀란드를 14회나 방문하였다.


지금부터 250년이 넘는 그 당시의 도로, 교통, 통신 시설을 고려해 볼 때, 그것은 경이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또 당시 3-4개월이 소요되는 대서양을 건너 북미대륙을 무려 7번이나 방문한 일 또한 예사로운 일이 아니었다. 그 당시까지 기독교 역사상 그 누구도 그처럼 많은 대중에게 그만큼 많은 설교를 한 일이 없었다. 저명한 전기 작가인 루크 타이어만(Luke Tyerman)은 휫필드의 마지막 설교는 익세티 마을에서 죽기 불과 수 시간 전에 행한 고린도전서 13장 5절을 본문으로 한 설교였다고 한다.

이런 점에서 로이드존스의 평가는 거짓됨이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의 생애는 하나의 기이한 현상이었다. 영국이나 미국 내에서의 그의 헤라클레스적인 엄청난 노고는 성령의 능력을 언급하지 않고는 도저히 불가능하다."


12. 찰스 스펄전(Charles Haddon Spurgeon, 1834-92) :

    마지막 청교도

찰스 해돈 스펄전(1834-1892)은 영국 에섹스 켈비던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평온하고 독실한 목회자 가정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스펄전은 사춘기를 구원을 향한 회의의 시기로 보내게 되었다. 그에게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어린 시절부터 몸에 배어온 일상이었으나,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삶은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작은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그날 설교를 하기로 되어 있던 목사님이 눈보라 때문에 나타나지 않아서, 회중에 있던 한 성도가 설교를 하게 되었다. 그 성도의 설교는 간단했다. 구원을 위해서는 다만 그리스도만 바라보라는 것이었다. 그는 죄의식으로 지치고 낙담한 스펄전을 가리키며 "단지 주만 바라보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했다. 그 순간 스펄전은극적인 회심을 하게 됐다. 구원이 오로지 주님만 주실 수 있는 은혜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때부터 스펄전의 삶은 주의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열정의 삶이었다.

1851년 그는 17세의 나이로 정식 목사 직분을 얻었다. 그후 일생 동안 그가 설교하는 곳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 몰려들었다. 그의 힘차고, 신학적이며, 감미로운 설교는 그로 하여금 "설교의 황제"라고 불리게 만들었다.


861년 3월 31일 스펄전의 메트로폴리탄 태버나클에서 최초의 주일 예배가 드려졌다. 스펄전의 설교를 들으려 오는 사람들을 수용하기 위해 지어진 이 교회 건물은 6천석을 가지고 있었지만 몰려오는 사람들을 다 수용할 수 없었다. 그의 설교는 매번 서서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까지 1만 명을 넘었다. 그러고도 수 백 명의 사람들이 항상 되돌아가야만 했다.


그는 매 번의 설교를 위해 수 시간을 기도했다. 그는 결코 제목 설교를 한 적이 없었으며 항상 성경 본문으로 강해 설교를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내용이 다른 설교 3,500여 편을 중복해서 설교한 적이 없었다.

영혼을 사랑하는 뜨거운 마음은 그가 그토록 많은 설교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시간을 개인 전도하는데 보낸 것을 보고 알 수가 있다. 그는 바쁜 일정 중에도 매주 화요일은 구원의 확신을 위한 개별적인 면담을 위해, 토요일은 복음을 위한 개별 방문을 정기적으로 행하기 의해 남겨 두었다.

그는 "내가 소유한 것 중에서 받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자기가 꼭 명심하도록 해주시기를 하나님께 간구하였다.

이런 겸손은 처음에는 비우호적이었던 사람들까지도 "그의 고조되어 가는 명성에 따라 자만심이 커져가기는 커녕,그가 우리의 눈을 깜짝 놀라게 했던 처음보다도 오히려 더욱 겸손하고, 더욱 자기를 부정하게 된 것 같다." 고 말하게 만들었다.


1891년 1월 그의 생애가 끝날 때까지 그는 불타는 진실성과 굽힐줄 모르는 신학적 신념과 열정을 가진'목음의 전파자'였다.


찰스 스펄전의 사상을 보면 다음과 같다.

①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신학사상

 찰스 스펄전은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원 리를 위배하지 않는 지식과 지혜를 결코 멸시하지 않았으나 성경의 고등비평이나 진화론에 기초한 자유주의 사상이 복음을 타락시킬 때 그는 참을 수 없이 분노하였다. 또한 비록 복음을 부인하지는 않았지만 복음과 자유주의를 동시에 수용하려는 당시 교계의 타협정신을 거부하였음. 복음에 여러 가지 견해, 추리, 상상, 환상을 섞는다면 복음의 변질이 필연적인데, 스펄전은 자신이 속한 침례교단이 진정으로 고수할 근본 진리와 정반대의 가르침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때인 1887년 10월 그의 나이 53세에 교단을 탈퇴함.


② 설교 원리

1)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으로 영접하지 않고 외치는 설교는 말씀 선포가 아니다.

2)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설교자는 자나깨나 기도로 준비해야 한다.

3) 설교는 가르치는 내용이 있어야 하며, 그 내용은 건전하고 본질적이어야 할 뿐 아 니라 풍성한 교리가 있어야 한다.

4) 설교의 본문 선택에 신중을 기하여야 한다.

5) 설교자는 하나님만 의지하여 담대히 말씀을 선포해야 한다.

6) 설교자는 음성을 잘 관리해야 한다.

7) 설교전달의 자세와 태도, 몸짓에 신경을 써야 한다.

8) 설교에 예화를 사용하는 기술을 터득해야 한다.

9) 설교는 본문을 떠나서는 안 된다.



E. 미국의 청교도

13. 토마스 쉐퍼드 (Thomas Shepard, 1605 - 1649)

토마스 쉐퍼드는 존 코튼(John Cotton), 토마스 후커(Thomas Hooker), 리처드 매더(Richard Mather) 등과 함께 뉴잉글랜드 청교도 일 세대 지도적 목사들 중 한 사람이다. 미국 초창기에 설립된 교회인 케임브리지 제일 교회와 최초의 대학인 하버드의 설립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반 율법주의적 성향을 노출한 허친슨 부인으로 인한 위기 이후 그의 신학은 당시 뉴잉글랜드의 주류 정통으로 간주되었고 그 후 여러 세대 동안 뉴잉글랜드 신앙과 신학의 초석으로 후대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쉐퍼드는 1605년 영국 노샘프턴 근처의 토우스터(Towcester)에서 3남 6녀 중 셋째 아들로 출생했다. 부친은 식료품상을 해서 꽤 돈을 번 사람으로 상당히 경건하고 열심 있는 신앙인이었다. 어머니도 경건하고 애정 어린 분이었으나 토마스가 네 살 세상을 떠낫다. 그래서 그는 사랑 없는 계모 밑에서 자라야 했다. 동네에 전염병이 도는 바람에 그는 조부모 댁, 삼촌 댁 등등으로 옮겨 다니며 자라는 불행한 유년기를 보냈다. 얼마 후 부친마저 돌아가신 후에는 큰형의 양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그 형은 토마스에게 부모와 같았다. 훗날 그는 형이 자기에게 애정을 많이 쏟아 부었기 때문에 그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다고 고백했다. 소학교에 입학한 후 어느 교장 덕분에 그는 공부에 흥미를 붙이기 시작했고 학자가 될 자질을 보였다. 그리하여 세퍼드는 열다섯 살 때 케임브리지 대학의 임마누엘 칼리지에 입학한다.


케임브리지 대학에 재학 중이던 어느 날 세퍼드는 학생들과 함께 술  자리에서 만취의 경험을 하게 되는 데 이 일 직후 그는 취중에 자신이 보였던 금수 같은 행동을 기억하고 혼란과 수치심에 가득 차게 된다. 그는 들판으로 달려가 주일날 종일토록 거기서 숨어 범죄자처럼 떨며 지낸다. 그 죄의 경험은 그에게 그 행위에 대한 통렬한 슬픔을 일깨웠을 뿐 아니라 그의 모든 삶의 극심한 죄성과 그의 모든 죄에 대한 회개의 필요성을 볼 수 있는 눈을 열어 주었다. 그것은 새로운 삶의 출발점으로 그에게 오랫동안 기억될 날이었다. 그날 그는 죄와 자신의 길들의 사악함을 매일 묵상하기로 결심한다.


케임브리지에서 그는 당대의 가장 유능한 청교도 신학자요 설교자인 존 프레스톤을 만나게 된다. 그는 1622년에 임마누엘 칼리지의 교장으로 봉사하고 있었다. 프레스톤의 설교에 의해 쉐퍼드는 죄인으로서의 자신에 대한 더 깊고 뚜렷한 이해에 이르게 된다. 말하자면 자신에 대한 참 지식을 얻고 자기 마음의 감추인 악들과 은밀한 죄들을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전격적 회심과 갱신을 진지하게 추구하기 시작한다.


어느 주일 저녁, 영원한 유기와 고통에 대한 생각들로 너무 괴로워진 쉐퍼드는 거의 미칠 지경이 되었다. 그리하여 유다처럼 자신의 영원한 운명을 예상하고 자살해 버림으로써 자기가 가야 할 지옥으로 서둘러 가 버리고 싶은 강한 유혹을 느끼기까지 했다. 바로 이때 주님이 그를 찾아오셨다. 그리고 영혼의 고뇌에서 벗어나 빛을 위해 기도하게 하셨다. 그때 그는 자신을 계시하시고 그의 사랑을 드러내셨으며 그 모든 광란하는 생각들을 잠잠케 해 주셨다. 이제 그는 영광, 위엄, 신비를 보았다. 그리하여 주님은 그의 눈을 여시고 비참에서 그를 건지셨다. 한때 그의 영혼을 거의 파괴시키고 절망으로 몰아간 그러한 무서운 경험으로 인해 그는 후일 영적 고통 중에 있는 자들에 대한 남다른 동정심을 가질 수 있었다.


이러한 체험 후 안정을 얻은 그는 열심히 공부해서 케임브리지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다(1627, M. A.). 영국교회에서 부제 직(deacon)을 얻은 쉐퍼드는 얼스 콜론(Earles-Colne)등 여러 마을들에서 많은 영혼들을 회심시키는 성공적인 사역을 감당하다가 1630년에 주교 라우드(Laud)의 소환을 받는다. 거기서 영국 교회의 의식에 완전한 순응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모든 목회 사역을 중지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이후 그는 신대륙으로 이주를 결심한다. 추적자들을 따돌리면서 배를 타려 했으나 여러 번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마침내 출항에 성공한다. 가족들과 함께 항해 중 여러 번 죽을 고비들을 넘기고 쉐퍼드는 1635년 10월 초, 보스턴에 도착한다.


1636년 2월 쉐퍼드는 후에 케임브리지라고 불리게 된 뉴타운에 세워진 첫 번째 교회의 목사가 되어 사역을 시작한다. 1636년에 발생하여 그해 말과 이듬해 초에 절정에 달한 소위 '허친슨 논쟁' (Hutchinson Controversy)에서 허친슨 일당의 오류를 규명하고 그들을 추방하는데 중심 역할을 감당함으로써 뉴잉글랜드 청교도 주류 정통의 확립 자가 된다.


1636년, 쉐퍼드는 하버드 대학 설립의 주역으로 활약했다. 하버드 대학이 뉴타운에 설립된 이유는 이 지역은 쉐퍼드의 정통적이고 성공적인 목회 영향으로 인해, 당시 보스턴 교회 전체를 위협하고 있던 반 율법주의의 위협에서 잘 보존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648년 케임브리지에서 대회가 모여 뉴잉글랜듸 회중교회주의를 명문화한 '케임브리지 강령'(Cambridge Platform)이 기초되었을 때 쉐퍼드는 그 작성에 주역을 담당한다. 그리하여 그는 존 코튼, 토마스 후크와 함께 회중교회제도롤 옹호하고 반석 위에 올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가정적으로 그는 불행했다. 1632년 결혼한 첫 아내가 보스톤에 도착 직후인 1636년에 사망하고 그녀와의 사이에 태어난 아들도 죽는다. 재혼한 아내는 토마스 후크의 딸이었는데 그녀도 9년 뒤에 죽었다. 둘째 아내와의 사이에 태어난 세 아들 중 첫째 아들은 출산 중 사망했고 셋째 아들도 생후 4개월 만에 죽는다. 1647년에 세 번째 아내와 결혼하고 아들 하나를 두었으나 항상 몸이 약했고 창백한 안색의 소유자였던 그는 1649년 9월, 4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쉐퍼드는 강력하고 효과적인 설교자였다. 그의 설교는 영혼을 감동시키는 것이었다.


14.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58) :

    미국 대 각성 운동


죠나단 에드워드 Jonathan Edwards(1703-1758)는 1703년 10월 5일 코네티컷 주의 이스트 윈저에서 출생했다. 그는 11자녀 중 외아들이었다. 그의 부친 디모데 에드워드는 이스트 윈저의 회중교회 목사였다.


죠나단 에드워드는 어린 시절에 회심했다. 많은 지적재능을 가진 그는 12세에 예일대학 입학하였다. 그는 1720년 예일대학을 최우등으로 졸업했다. 비록 자신의 구원에 확신이 없었지만 에드워드는 복음 사역이 그의 소명임을 확신하여 1720년 10월에 신학수업을 위하여 예일로 돌아갔다. 6년 후 에드워드는 그의 할아버지 솔로몬 스토다드가 시무하던 교회의 강도사 직을 수락하였으며 그 교회는 메사추세츠주 노드햄턴에 있었다. 그는 1727년 2월15일에 회중 교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같은 해, 그는 사라 피에르폰트와 결혼하는데 그녀의 부친은 목사로서 예일 대학의 설립자중 한 분이었다.


1729년 에드워드는 노드햄턴 교회의 담임목사가 되었다. 1734년,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義) " 에 대한 그의 설교는 코네티것 리버 벨리 지역에 영적 부흥을 가져왔고, 1740년 일어난 영적 대각성 운동에도 영향을 미쳤다. 1750년, 에드워드는 성찬식 참여자의 자격에 대한 교회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노드햄프톤교회에서 해임되었고, 1751년부터 스톡브릿지에서 목회를 시작했다.


철저한 칼빈주의 자인 에드워드는 원죄, 예정론, 거듭남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설교인 "진노하신 하나님의 손에 놓인 죄인들"은 회개하지 않은 죄인들이 지옥에서 맞이하게 될 운명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노드햄턴 교회에서는 에드워드의 설교에 의해 많은 회심 자가 생겨났고 마을 전체의 분위기가 변화되었다. 1734-1735년과 1740-1742년에 일어난 그 유명한 부흥운동 이후 본 교회에서는 그에 대한 배척운동이 일어나 마침내 투표에 의해 축출되고 말았다.


그 후 에드워드는 인디안 선교사로서 여러 해를 일했다. 1758년 에드워드는 뉴저지 대학(지금의 프린스톤 대학교)의 총장직에 취임하였으나 취임 5주 만에 천연두로 이 세상을 떠났다.

그는 천재로, 최고의 설교자로, 많은 저술을 통해서 미국 역사상 큰 영향을 미친 가장 유능한 개혁 신학자로 알려졌다.


 대각성 운동(Great Awakening)의 조나단 에드워즈는 존 웨슬리처럼 한 시대를 마감하고 새로운 시대를 시작시킨 인물이었다. 그는 1703년 목사 가정의 다섯째로 태어났다. 신앙과 사상 그리고 근면한 삶의 터전은 아버지 디모데 에드워즈와 어머니 에스더의 영향이었다. 그는 13세 때 예일대학에 입학, 1720년에 졸업하고 계속 신학을 공부하였다. 그는 25년 동안 노댐프턴에서 목회를 했는데 이 시기에 대각성 운동이라는 부흥 운동이 일어났다.


에드워즈는 뉴잉글랜드의 대각성 운동이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에 의한 하나님의 역사라고 주장하였다. 대각성 운동의 결과, 많은 영혼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왔다고 증언하고 있다.

대각성 운동은 미국 해안 지방에 복음주의적 기독교를 심었다. 초기의 노예 제도 반대 운동은 계속되었고 인디언들에 대한 선교 활동이 증가하였다. 대각성 운동은 교육 부문에서도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프린스턴, 펜실베이니아, 브라운 대학 등은 대각성 운동의 결과로 생겨난 의의 깊은 학교들 중 일부이다.

또한 대각성 운동은 교파의 벽을 허물고 관용의 분위기를 형성하는 데도 이바지하였다. 교회사가 윌리스턴 워커도 말하기를 “문화적 혼란의 와중에서 발생한 이 운동은 미국의 교회 생활에 막대한 충격을 주었다”라고 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러한 혼란의 시대에 진리의 횃불을 밝히며 의의 길을 열어준 지도자였다.




▣ 과 제 ▣

1. 존 낙스에 대하여 약술하라

2. 존 밀턴에 대하여 약술하라

3. 존 번연에 대하여 약술하라

4. 존 오웬에 대하여 약술하라

5. 요한 웨슬레에 대하여 약술하라

6. 조지 휘트필드에 대하여 약술하라

7. 챨스 스펄젼에 대하여 약술하라

8.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하여 약술하라


출처: http://cafe.daum.net/church9191/1xME/57?docid=1239476464&q=%C1%A64%C6%ED+%BA%D0%BF%AD%BB%E7+%28+1950%B3%E2+-+1995%B3%E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