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교도 운동의 위대한 지도자인 윌리암 에임스(William Ames)는 '신학'(divinity)을 '하나님께 대한 살아 있는 교리'라고 정의하였다. 청교도들은 참된 교리를 구체화함으로 사람들 앞에 분명한 진리의 빛을 보여줌으로 당시의 세속철학적이고 피상적인 사상들(ideologies)이 실패한 곳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리차드 박스터는 '건전한 교리는 건전한 판단과 건전한 마음, 건전한 대화(삶)와 건전한 양심을 만든다'-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 교리는 올바른 것이 아니듯지 바르게 이해되지 못한 것일 것이다! 성스러움은 땅 속에 자라나는 것이 아니며 더구나 공기로부터 실체화되지 못한다. 진실한 성스러움은 신비적 경험이나 교육된 성품에서 나오며 진실과 은총의 훌륭한 결합의 선물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청교도들은 바로 그 성스러움의 표상이었다라고 말하였다.

가. 성경중심주의
어떤 신념, 또는 실천도 성경의 보증 위에 서 있어야 한다는 확신이다. 청교도 주의의 위대성은 진실한 교리와 올바른 실행의 유일한 출처로서의 하나님 말씀에 대한 충실성에 있다. 그것은 단순한 종교적 신조에 대한 충실성이 아니었다. 그것은 성경으로 인간의 전인격을 통합시키는 생활철학이었다. 그들은 과학, 논리학, 철학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각 분야와 연관시켜 통합하려고 하였다. 그들은 성경이 이성과 학문으로 더불어 조화될 수 있다고 믿었다. 청교도들은 성경이 이성과 학문으로 더불어 조화될 수 있다고 믿었으며, 따라서 단순한 이성주의가 하나님의 말씀을 파기하도록 방치하지 않았다. 청교도들은 성경 말씀이 모든 분별력 있는 진리의 기초가 된다고 생각하였으며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것과의 관계에서 실체를 분별하려고 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만이 인간의 필요에 대한 오직 유일하고 분별있는 확고한 답변이라고 믿었다. 타락한 인간의 전적 부패에 대한 인간의 강렬한 신념에도 불구하고 청교도들은 그들 자신이 죄인들에게 인간의 불신앙의 비합리성을 보여주여 하며 성령님께서 그들에게 진리의 말씀으로 조명하여 주시기를 기도해야 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나. 주권교리
청교도들은 다분히 칼빈주의적으로 섭리와 은혜가운데 나타나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대한 개념을 아주 높이 다루었다. 이것은 그들이 가장 어려운 역경의 체험 속에서도 자신들을 지탱한 그리스도안에 있는 진정한 자유와 평강에 잘 반영되어 있는 사상이다. 또한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의 절망적인 상태와 궁핍과 의지를 보여 줄 수 있게 한 그들의 강한 복음의 능력에 반영된 사상이었다. 제임스 패커박사는 칼빈주의의 기본적인 원칙은 인간의 구원이란 예수님께 속한 것이다.(Salvation is of the Lord)라고 하였다. 청교도들은 구원사역에 있어서 하나님의 역사, 즉 성부 하나님의 선택, 성자 하나님에 의한 속죄, 성령 하나님에 의한 효과적인 소명을 강조하였다.


다. 죄에 대한 교리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교리가 그들을 고양시켰다면 죄에 대한 교리는 그들을 겸손하게 만들었다. 타락한 인간의 심성 속에 있는 사악한 잠재력과 마찬가지로 죄를 범할 가능성이 있는 그들의 경향을 깨닫고서 대체로 청교도들은 죄를 역명(逆命)중의 역명(逆命)이요 모든 악의 근원임을 서슴없이 밝혀 내었다. 그들의 저술과 설교에 있어서 청교도들은 갖가지 모습으로 위장한 죄의 사악한 모습을 파헤치면서 자만심을 파괴하고 오직 은혜로 말미암는 구원으로 인간의 인도하였다.

 

라. 은혜교리
은혜 교리는 구원에서 물질적 풍요에 이르기까지 여러 영역에서 청교도들의 사고에 스며들어 있었다. 청교도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인간이 누리는 모든 은택의 원천이요, 인간의 노력으로 그것을 얻지 못하는 믿음이 깔려 있다. 이 선물을 받아 들이고, 선물 주시는 분의 미쁘심을 인정하는 일 외에 또 다른 조건이 요구되지 않는다. 믿음은 그 선물을 받는 손이다. 이 말할 수 없이 놀라운 선물을 인해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 외에 무슨 순종이 필요한가?(사무엘 윌라드) 그들에게 회심은 성화 또는 거룩한 삶과 너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구원이라는 말에 이 둘 모두를 담아냈다. 리처드 십스는 죄를 용서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면 거룩한 위반을 할 지언정 모든 의무를 수행하고자 마음 먹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마. 언약 교리
청교도는 언약을 강조함으로 관계를 중시하였다. 즉 그들에게 언약은 상호 신뢰와 의무 수행관계를 포괄적으로 표시하는 말이었다. 언약이야말로 하나님께서 개개의 인간과 맺으시는 관계를 설명해주고, 가족, 교회, 그리고 국가와 같은 청교도적 제도에 철학적 토대를 제공하는 말이었다. 모든 것의 기반은 모든 성도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구원 언약인데, 그분은 그 언약에 대한 보답으로 순종과 신실을 요구하신다. 그래서 이제 사람들은 제 삼자, 또는 계약 보증자이신 하나님과 더불어 교회, 가정, 그리고 국가를 세우자는 언약을 맺는다.


바. 창조교리
그들은 하나님께서 물질, 그리고 인간 세계를 만드셨기 때문에 그것이 원칙적으로 선하다고 믿었다. 그리고 물질 세계는 하나님을 가리킨다고 믿었다. 그들은 바로 이런 구체적인 의미에서 교회 건물안에 갇혀 눈에 보이는 예식만을 되풀이하던 사람들보다 훨씬 당대의 진정한 성례 주의자였다. 이러한 창조 교리는 오랫동안 지배한 성-속의 이분법을 거부할 수있었다. 토머스 테일러는 만물안에 들어 있고 만물로 말미암아 들려 오는 하나님의 음성이 언제 어디서나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라고 썼다.
그들은 창조교리가운데 섭리 교리를 지극히 강조했다. 그들은 매일 부딪히는 사건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더듬는 내용들을 적어 놓았다. 또한 당대에 일어나는 역사적 사건들을 하나님의 섭리와 성경에 나오는 비슷한 사건들을 작업틀로 삼아 해석했다. 그들은 천직교리(소명)도 역시 하나님의 섭리를 모든 그리스도인인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에 구체적으로 적용한 것으로 여겼다.

결론적으로 이러한 교리들이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점을 제시하여 준다.
첫째, 진정한 회개의 필요성과 그 본질에 대한 문제이다. 인간들은 자기의 죄로부터 돌아서기 위해 진지하게 경고를 받아야 한다. 죄인은 자기 죄와 그 자신의 의와 사단 그리고 세상으로부터 돌아아서야 한다. 그러한 회개는 세상을 부러워하거나 그런 것을 교회안으로 끌어들일 여지를 남겨주지 않는다.
둘째, 진정한 그리스도가 죄인들에게 나타나야 하는 문제이다. 인간의 열정은 숫자에 대한 것이 아니다. 죽어가는 사람들의 깨어진 마음에 대한 것이다. 근본주의 설교자들은 성경 수리학의 광범위한 토론들, 성경과 과학, 별들 가운데 존재하는 복음, 그리고 성경적 예언들에 대한 극단적인 해석 등으로 너무 자주 곁길로 갔다.
현대 목회자들은 자유주의 이론을 비판하고 또 올바른 설교를 수행한다고 한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적극적인 설교는 게을리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그의 지상생애가 드러나 있는 복음들과 그의 본성과 속죄 사역이 나타나 있는 기독론으로부터 설교되어져야 한다.
조셉 얼라인은 "불안전한 개종은 그리스도를 반만 받아들인다. 구원의 그리스도는 모두 믿지만은 성화에 대한 그리스도는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완전한 개종은 그리스도 전체를 영접하는 것이다. 개종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무런 예외나 한계, 보류도 없이 모든 계획과 목적에 받아들이는 것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 청교도들의 교회관과 교리 설교의 강조

그들의 교회에 대한 기본 관심사는 누가 교회와 삶의 정신적 영역을 다스리는가? 하나님인가 혹은 사람인가의 문제였다. '루터'와 '칼빈'의 종교개혁 시대 당시에도 이 문제는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던 것이다. 우리는 청교도들의 답변을 분명히 들을 수 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단 하나 뿐인 그 성경의 권위로 인해서 신앙 양심에 따라 자유로운 예배를 드린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 만을 위해서……"
청교도들은 교회의 자유에 대한 자신감에 찬 긍정적인 자세로 이에 대한 해답을 쟁취하기 위해 냉혹한 시련들을 참고 싸웠다. 영국 국교회의 완전한 정화에 대한 희망이 희미해지자 청교도들은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에 변혁을 가져오은 설교에 중심을 두었다. 철저한 교리설교를 베풀었고 개혁의 성경적 원리들에 대하여 충분히 파악하지 못한 국교도들에게 영적인 일들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창조하려고 주력하였다. 국교회의 약점은 종교개혁 자체의 약점 때문 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국교회가 종교개혁의 원칙들을 충분히 따르지 못하는 데서부터 기인하였던 것이다.

보길예송교회